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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개

2008.09.26 23:3609.26

   여자는 숨을 멈췄다. 숨을 멈추고 있는 건 예전엔 쉬운 일이었다. 여자는 어렸을 때 물 속에서 5분도 넘게 버틴 기록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1분도 채 버티기 어려웠다. 여자는 다시 숨을 몰아쉬었고, 거친 날숨이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사람들은 제각기 색깔이 다른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이제는 방독면도 하나의 패션이 되었다. 텔레비전 광고에는 매번 새로운 기능이 들어간 방독면을 선전했다. 음악 듣기나 동영상 보기, 적외선 카메라 기능 등등. 여자는 한 번도 방독면을 써본 적이 없었다. 방독면을 쓰고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돈이 많았다. 여자 같이 가난한 사람들은 마스크를 쓰는 게 고작이었다.
   마스크도 나쁘진 않아. 여자는 그렇게 생각하며 걸음을 옮겼다. 하늘은 우중충했고 거리는 뿌옇게 변해 있었다. 안개도 아니고 황사도 아닌 무언가였다. 정확한 학술적 명칭은 지나치게 긴 영어였고 그 뜻조차 미확인 물질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처음에 각종 매체에서 몇 십 페이지에 걸쳐 소개하던 모든 내용은 사실 무의미했다. 아무것도 밝혀진 게 없었고 앞으로도 밝혀질 가능성은 적어보였다. 처음에 혼란에 빠진 사람들도 이제는 모든 것에 익숙해져버렸다. 인간이라는 종족의 장점이자 단점은 무엇에든 적응해버린다는 사실이었다. 어느새 사람들은 지금의 환경에 순응해버렸다. 여자도 마찬가지였다. 숨을 참아본 건 심심한 탓이었다. 사는 게 심심한 건 누구나 마찬가지겠지만, 여자의 증세는 차츰 심해져만 갔다. 숨을 5분 이상 참을 수 있을 때는 그렇지 않았던 것 같았다. 여자는 그래서 숨을 오래 참으려고 가끔씩 노력해보았다. 하지만 이제 숨을 그토록 오래 참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사는 게 답답한 건, 이 뿌옇게 세상을 뒤덮은 무언가 때문이라고 했다. 여자는 동의하지 않았다. 이 무언가가 생기기 전에도 여자의 부모는 항상 사는 게 답답하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었다. 모두 알면서도 스스로를 속이거나 아니면 정말로 모르고 있을 것이다. 여자는 상관하고 싶지 않았다. 착각은 자유였기 때문에 그 권리를 침해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사람들이 느끼는 행복이나 불행 역시 착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여자는 걸음을 조금 빨리했다. 비가 올 조짐이 느껴졌다. 하늘은 차츰 더 어두워졌고 사람들은 바삐 거리에서 사라져갔다. 거리는 을씨년스러웠다. 방독면을 쓰고 돌아다니는 사람들은 전부 인간이 아닌 외계인처럼 보였다. 그러고 보면 이 현상도 외계인 때문에 생겼다는 주장도 있었다. 이제는 다들 아무려면 어떠냐는 심정이었지만.
   여자가 막 모퉁이를 돌 때였다. 낯선 남자가 앞을 가로 막았다. 여자는 흘깃 눈을 들고 남자를 쳐다보았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는데 눈에 띄는 건 머리카락을 말총머리로 묶었다는 점이었다. 남자의 입에는 여자와 같은 회사 제품의 마스크가 걸려 있었다.
   저기, 도를 믿으십니까? 여자는 놀란 나머지 할 말을 잃고 말았다. 그 말은 아주 까마득히 오래 전에 사라져버린 고대어처럼 들렸다. 누구도 해석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도대체 무슨 의미인지 이제는 누가 알까. 저 말이 진심인지, 장난인지, 유혹인지, 거짓인지. 여자는 무시하기로 마음먹고 재빨리 걸음을 놀려 남자를 비켜지나갔다. 남자는 처음에는 주춤거리며 물러났다. 여자가 신속하게 발걸음을 옮겨 자신의 곁을 벗어나자 조금 놀란 것 같았다. 하지만 이내 그는 평정을 되찾고 여자와 나란히 걸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잠깐만요. 오해하지 마세요. 전 나쁜 사람 아니에요. 여자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오해 따윈 처음부터 하지 않았다고. 나쁜 사람이든, 착한 사람이든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타인이고 결코 타인이 아닌 존재는 될 수 없을 것이다. 나는 당신을 있는 힘을 다해 거부할 뿐이다. 그걸 왜 몰라주는가. 백 마디 말보다 한 가지 행동이 더 확실할 때가 있다. 제발 알아 달라. 나는 이미 말할 기력을 잃어버렸다. 여자는 혼란스런 생각을 지우며 속도를 높였다. 하늘에서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졌다. 이마를 때리고 어깨를 적셨다. 여자는 택시를 잡아타야 할까 고민했다. 거리는 고요했고, 돌아다니는 차나 택시를 찾기 힘들었다.
   우리가 사는 세계는 거짓되었어요. 저는 참다운 도를 알려 드리려고 하는 거예요. 여자는 걸음을 멈췄다. 막다른 길이었다. 정신없이 걷다보니 좁은 골목길로 들어선 모양이었다. 되돌아 나가야했다. 몸을 한 바퀴 돌리자 남자가 정면에 서 있었다. 여자는 물끄러미 남자를 쳐다보았다. 마스크를 벗은 남자의 얼굴에는 어떤 말로 규정짓기 어려운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그건 슬픔도 아니고 기쁨도 아닌 그 중간의 어딘가였다. 여자는 어떤 마음을 가지면 그런 표정을 지을 수 있는지 사뭇 궁금해졌다. 여자가 잠시 멈춘 것이 자신의 말을 듣고자 한 것으로 판단했는지 남자는 다시 말을 이었다. 지금 이 현상이 정상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과학적으로 이게 규명될 수 있다고 여겨요? 아니에요. 사람들은 모두 거짓말을 하고 있어요. 비가 오든 눈이 오든 사라지지 않는 이 입자들이 어떻게 물리적인 것으로 증명할 수 있단 말입니까? 이건 형이하학이 아닌 형이상학적인 물질이에요. 우리의 혼탁한 마음이란 말입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예전에는 방독면은 낯선 물건이었고, 누구나 맑고 깨끗한 공기를 마실 수 있었어요. 과거를 떠올려 봐요. 당신의 눈은 맑아요. 과거를 볼 수 있어요. 그렇다면 지금 잘못되었다는 걸 깨달을 거예요. 이 세계는 올바르지 않아요.
   여자는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이봐요, 세계는 한 번도 올바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거예요. 더 이상의 말은 필요 없을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나도 다르다는 것을 상대방도 알까. 모른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여자는 자기만 알면 된다고 생각하며 다시금 남자를 비켜 지나갔다. 이번에는 남자는 따라오지 않았다. 여자의 말을 곱씹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영원히 공감할 수 없는 무언가를 되짚어 보려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여자는 둘 다 일거라 생각했다.
   차라리, 이 세계가 가상현실에 불과하고 지금 우리 시야를 뒤덮고 있는 무언가는 버그 때문에 생긴 거라고 말했다면 솔깃했을 지도 몰랐다. 여자는 스스로 실없는 생각이라 여기며 버스에 올라탔다. 버스 안에는 운전수와 여자 밖에 없었다. 운전수는 머리가 희끗희끗한 할아버지였다. 조금씩 빗방울이 내리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할아버지는 검은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여자는 왠지 다른 세계에 진입한 것 같은 기묘한 감각을 느꼈다. 이미 익숙해진 상황이 낯설게 느껴지는 미시감(未視感) 같은 것일까. 물어보고 싶었다. 할아버지 전에도 선글라스를 끼고 계셨나요? 그랬는데 제가 왜 이렇게 낯설게 느끼는 건가요? 할아버지는 대답해주지 않을 것만 같았다. 아니, 그 전에 운전수의 안전을 위해 설치한 투명한 플라스틱 막이 소리까지 차단해버릴 지도 몰랐다. 여자는 왠지 할아버지가 있는 운전석에는 뿌연 입자가 더 짙게 모여 있는 것 같았다.
   바깥은 어느새 새까만 어둠이 깔려 있었다. 밤이 오자 마음이 자연스레 편안해졌다. 세상을 뿌옇게 뒤덮은 입자들이 어둠에 가려 보이지 않기 때문이었다. 창밖으로 흘러가는 풍경들은 찬란하게 빛나는 화려한 색들의 군무처럼 보였다. 눈이 어지러울 정도로 빛들이 흘러넘쳤다. 빛들은 마치 제 세상을 만난 듯했다.
   여자는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시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 어쩌면 할아버지가 선글라스를 낀 이유를 알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내릴 때가 다 되어서야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운전석 근처로 다가갔다. 할아버지는 여자의 움직임엔 신경도 쓰지 않았다. 오로지 운전만이 모든 것을 해결해주리라는 굳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았다. 여자는 문득 할아버지가 가엾게 느껴졌다. 그것이 덧없는 감정임을 알면서도 떨치기가 힘들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 여자는 조그맣게 속삭였다. 할아버지는 듣지 못했지만 여자는 상관하지 않은 채 말을 이어나갔다. 그건, 할아버지 잘못이 아니에요. 여자는 빨간 버튼을 눌렀다. 서서히 내려야할 정거장이 다가오고 있었다. 여자는 내리면서 알 수 없는 괴성을 내질렀다. 자기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였다. 어쩌면 오래 전에 사라져버린 고대어일지도 몰랐다. 할아버지는 알아들은 듯, 혹은 알아들은 척 가볍게 고개만 끄덕였다. 여자가 내리자마자 버스는 쏜살같이 사라졌다. 어둠을 뚫고 낯선 세계로 진입하려는 듯이 무서운 속도로 질주했다. 여자는 버스가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지켜보다가 걸음을 옮겼다. 아마도 내일 다시 똑같은 버스를 타도 낯선 감각을 느끼리란 걸 알았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집으로 가는 길은 항상 같았다. 늦게까지 놀았는지 한 아이가 아파트 입구 근처에서 서성거렸고 경비가 마침 주위를 돌고 있었다. 여자는 경비가 챙기리란 생각에 신경 쓰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여자의 집은 아파트 13층이었다. 열쇠로 집 문을 열자마자 눅눅하고 퀴퀴한 공기가 밀려왔고, 스위치를 켜서 방을 밝히자 방 안에는 뿌연 입자가 가득 차 있었다. 그걸 보니 마스크를 벗고 싶지 않았지만, 마스크는 낮 동안 온갖 먼지를 빨아들인 탓에 더러웠다. 여자는 세탁기에 옷가지들을 넣고 마스크는 따로 통에 담아서 삶았다. 그리고 집에서 쓰는 새로운 마스크 하나를 입에 걸었다. 부드러운 촉감이 느껴졌다.
   여자는 거실을 가로질러 베란다 문을 열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피부에 닿았다. 눈에 닿는 모든 주택가 건조대마다 색색의 마스크를 걸어놓은 게 보였다. 마스크들은 끝이 없을 정도로 펼쳐져 있었고 유령처럼 어둠 속에 매달려 있었다. 한 순간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강풍이 불어 전부 넘어졌으면 싶었지만 바람은 불지 않고 사위는 조용했다. 너무나 조용한 나머지 귀가 멎은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로. 이윽고 여자는 침대로 돌아가 잠을 청했다.
   다음 날, 여자는 알람 소리에 잠을 깼다. 창밖에서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이는 소리가 들려왔다. 베란다 문을 열고 밖을 내다보자,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저마다 마스크를 쓴 채 줄지어 등교하고 있었다. 아이들의 표정은 읽을 수 없었다. 얼굴에 미소를 짓고 있는지, 찌푸리고 있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여자는 베란다 문을 닫고 회사에 출근할 준비를 했다. 오늘은 빨간색 마스크를 입에 걸었다.
   마스크를 쓰고 나서 사람들은 극도로 조용해졌다.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경우가 적어졌고 입 밖으로 나가는 소리도 마스크로 인해 줄어든 탓이었다. 조용한 게 좋아. 여자는 상대방에게 표정을 읽히지도 않고 누가 귀찮게 말 걸지도 않는 마스크의 이점이 마음에 들었다.
   여자는 버스 정류장에 서서 버스를 기다렸다. 금방 도착한 버스는 출근 시간이라 마스크를 쓴 사람들로 가득 찬 상태였다. 발 디딜 틈조차 없었지만 사람들은 다들 아침마다 말없이 불편을 감수했다. 여자는 버스 운전수가 어제 그 할아버지인지 확인하지 않았다. 잊어버린 탓도 있었지만 그만큼 중요하게 여기지도 않은 탓이었다.
   여자의 앞에는 한 남자가 느긋하게 자리에 앉아서 신문을 보고 있었는데 무심코 시선이 신문 기사에 닿았다. 신문 기사에는 한 여고생의 자살이 적혀 있었다. 세상을 원망하는 이야기를 두서없이 적어놓고 아파트 13층에서 뛰어내렸다는 기사였다. 사진에는 여고생이 뛰어내리기 전에 얌전히 벗어놓은 마스크가 찍혀 있었다. 핑크색. 그 나이 때 소녀들이 좋아할만한 색이었다. 여자는 기사의 나머지 부분은 읽지 않았다. 어차피 다른 건 추측성 보도일 터였다. 당사자가 없는 이상 어떠한 말도 진실이 될 수 없을 테니까.
   출근시간보다 십 분 일찍 회사에 들어섰다. 여자가 문을 열고 회사 안으로 들어왔는데도 사람들은 눈길 한 번 주지 않았다. 다들 마스크나 방독면을 쓴 채 모니터만 주시했다. 여자가 일하는 곳은 한 식품회사의 홍보팀이었다. 주로 제품의 장점을 파악하고, 소비자들에게 어떤 식으로 마케팅을 할지 기획하는 일을 했다. 사람들의 기호는 매번 바뀌는 편이었다. 여자는 그 속도에 따라가느라 지치곤 했다.
   여자가 자리에 앉아서 오늘 올릴 기획안을 작성하는 동안 옆자리에 앉은 J가 마스크 색이 강렬하다며 칭찬을 건넸다. 여자는 고개를 돌린 뒤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J는 마스크가 아닌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쾌적한 공기를 제공한다고 선전하던 대기업 제품이었다. 순간, 여자의 손이 움찔거렸다. ……어쩌려는 걸까. 뺏고 싶은 걸까. J의 방독면을 벗겨서 얼굴을 확인해보고 싶은 걸까. 웃고 있는지, 울고 있는지. 여자는 의문을 가지다가 다시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타자 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오후가 되자 밖에선 비가 내렸다. 어제의 가랑비와 달리 오늘은 장대비가 쏟아졌다. 창밖을 내다보니, 각양각색의 우산들이 이리저리 움직이는 중이었다. 마치 해파리 떼가 연상되는 모습이었다. 어디로들 사라지려는 걸까. 여자는 커피를 마시며 느긋하게 우산들의 행렬을 감상했다. 아니, 여자가 보고 있는 건 우산이 아니라 우산과 여자의 시선 사이에 놓인 뿌연 무언가였다. 비가 와도 사라지지 않고 시야를 가리고 있는 정체불명의 입자들. 불안한 것들이었지만 때론 저게 위안이 될 때가 있었다. 무슨 방법이든 어찌할 수 없는 무언가가 존재한다는 건, 뭘 해도 되지 않는 일도 있으니, 그만 쉬어도 된다는 메시지처럼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휴가를 내볼까. 불현듯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여자는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 이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그려보고 싶었다. 그렇다면 뭔가 알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적어도 무언가 느낄 수 있게 되지 않을까. 무언가는 마치 세상이라는 캔버스에 누군가 물감을 흩뿌려 놓은 것 같았다. 그림 속 세상에서는 덧칠된 물감을 지울 방법이 없는 것이었다. 여자는 그걸 재현하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래봤자 바뀌는 건 없겠지만, 애초에 바꾸고 싶은 마음도 없었다.
   이거 신상품 카피 문구 좀 생각해봐. 나중에 업체에 맡길 테지만, 일단 내일 임원진 발표 때 시안이 있어야 하잖아.
   이 대리가 놓고 간 것은 아직 시중에 깔리지도 않은 시제품에 대한 보고서였다. 겉보기엔 단순한 커피에 불과했지만, 효능은 세상을 뒤덮은 무언가로부터 몸을 깨끗이 해준다고 적혀 있었다. 근거로 과학자들에게 인정받았다는 인증과 어떤 식으로 몸에 작용하는지도 첨부되어 있었다. 여자는 모든 게 사기라고 생각했다. 무언가가 어떤 것인지도 알지 못하면서, 어떻게 무언가로부터 우리 몸을 깨끗이 해줄 수 있단 말인가. 게다가 뿌연 무언가의 입자가 우리 몸에 나쁜지도 확실치 않았다. 점차 의문사가 늘면서 다들 마스크를 쓰긴 했지만, 그게 무언가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에서인지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 모든 이유를 차치하고, 여자는 이 커피가 엄청나게 팔려나가리라 예감했다. 지금껏 이 무언가에 대한 제품이 인기를 끌지 않은 경우는 없었다. 다들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새로운 물건을 사들였다. 그건 마치 광기처럼 보였다. 애초에 실제 효능 같은 건 상관없을 터였다. 사람들에게 필요한 건 거짓된 위안이었다. 괜찮다고. 괜찮을 거라고 누군가 말해주길 원하고 있었다. 여자는 남은 커피를 마신 뒤, 마스크를 쓰고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는 가느다란 손가락을 움직여 키보드를 두들겼다. 머리가 아프고, 때론 답답하시죠? 걱정하지 마세요. 이제…….
   비는 멈추지 않았다. 여자는 책상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정각이었다. 남은 일은 내일 하기로 결정했다. 비가 오는 날 굳이 야근까지 할 필요는 없겠지. 다행히 과장은 조퇴를 했는지 보이지 않았고 다른 사람들은 여자를 신경 쓰지 않았다. 다들 자기 일에만 관심이 있었다. 남의 얼굴을 보지 않게 된 이후부터 서로 신경을 끊기라도 한 것처럼. 남의 감정을 굳이 애써 볼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에 자신에게 몰두하게 된 걸까. 여자는 답을 알지 못한 채 회사를 빠져나왔다.
   핸드백에 넣어둔 삼단 우산을 펼쳤지만, 비바람이 심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머리카락은 물론이고 마스크까지 흠뻑 젖어버렸다. 방수가 되는 방독면이었다면 괜찮았을 텐데. 세차게 내리는 비와 원래 존재하는 뿌연 무언가 때문에 시야가 흐려져 한치 앞도 분간하기 힘들었다. 사람들은 버스 정류장을 향해 달음박질 치고 있었다. 여자도 서두르다가 문득 외진 골목길에 시선을 던졌다. 어제 자신이 잘못 들어갔던 길이었다. 이렇게 비가 내리는데, 오늘 같은 날 나왔을 리가 없지.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여자는 자신도 모르게 골목길로 향했다.
   막다른 골목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자는 재빨리 발길을 돌렸다. 그 순간, 시야가 어두워졌다. 눈앞에는 어제 말총머리를 한 남자가 있었다. 어제와 똑같은 마스크를 쓰고 검은 우산을 든 채였다. 달라진 건 여자를 보는 시선뿐이었다. 섬뜩한 눈빛으로 쏘아보고 있었다. 여자는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났다. 빗물에 젖은 차가운 벽이 등에 닿았다.
   왜. 무엇 때문에. 여기서, 이렇게. 여자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남자는 대답 없이 여자의 입가에 걸린 마스크를 떼어냈다. 여자가 숨을 내쉬자 흰 수증기가 피어올랐다. 남자는 한 동안 여자를 바라보기만 했다. 여자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몸서리쳤다. 비명을 지르려고 했지만 웬일인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말하는 법을 순식간에 잊어버린 것 같았다. 다시 처음부터 모든 언어를 배워야할 것 같은 막막함이 느껴졌다.
   당신도…… 아니었군요. 아닙니다. 남자는 발길을 돌려 사라지려 했다. 여자의 손에 젖은 마스크를 쥐어준 채. 여자는 남자의 팔을 붙잡고 멈춰 세웠다. 지금 잡지 않으면 이대로 이 사람을 다시는 못 보게 되리란 예감이 들었다. 어디론가 알지 못할 곳으로 사라져버릴 것처럼 희미하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남자는 차분한 눈빛을 띠고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눈빛이었다. 여자는 돌연 소리를 높여 외쳤다.
   영문 모를 소리만 하고 사라질 거예요? 내 시간을 뺏었으니 책임을 지세요.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살짝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여자의 손을 잡고 어디론가 이끌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을 지나쳤다. 비가 오는 가운데 그들은 모두 인간이 아닌 외계인처럼, 로봇처럼, 고대인처럼, 미래인처럼, 혹은 자신처럼 보였다. 모두가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누가 누군지 알아 볼 길이 없었고 어떤 표정을 짓고 살아가는지도 알 수 없었다. 그들에겐 왠지 마스크를 벗겨내도 마스크와 똑같이 생긴 얼굴이 드러날 것만 같았다.
   한참을 걸어도 남자는 멈출 기색이 없었다. 여자는 다리가 아파오고 온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비가 체온을 뺏고 있었다. 젖은 옷은 걸음을 더욱 무겁게 만들었다. 남자는 여자의 안위가 걱정되지 않다는 듯이 걸음만 옮기고 있었다. 여자는 문득 남자의 마스크를 벗겨내고 손찌검을 하고 괴성을 질러대고 싶었다. 자기도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하지만 남자의 눈빛을 볼 때마다 그런 생각은 잦아들었다. 남자의 눈빛은 형형히 빛나고 있었는데, 무언가를 간절히 구하는 듯한 눈빛이었다. 여자가 살면서 한 번도 가져본 적이 없는 눈빛이기도 했다. 저토록 간절히 원하던 게 있었던가. 앞으로 있을 수 있을까.
   여깁니다. 어느덧 남자가 걸음을 멈추고 말했다. 그곳은 도시 외곽에 위치한 작은 창고 같은 곳이었다. 여자는 기가 막혔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일단 비를 피하고 싶었다. 남자가 먼저 문을 열고 들어갔다. 다행히 실내는 아늑했고 꽤 잘 꾸며져 있었다. 침대도 있었고 차를 끓일 수 있는 식당과 안락한 의자 그리고 테이블이 있었다. 세간도구 뿐이라 삭막하다는 느낌을 주긴 했지만 몇 시간 동안 비에 젖은 사람에겐 그 어떤 때보다 따뜻한 공간으로 보였다. 심지어 주위에 가득 찬 뿌연 무언가까지 그랬다.
   갈아입을 옷은 여기 있습니다. 누추하긴 하지만 저 문을 열면 샤워실이 있고요. 가서 씻고 갈아입어요. 온수는 안 나오지만. 괜찮죠? 여자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커피 한 잔과 이야기면 됐는데. 그러나 가는 도중에 한 마디도 하지 않은 건 자신이었다. 여자는 하얀 면 티셔츠와 짧은 반바지를 들고 샤워실로 들어갔다. 찬물을 틀어서 몸을 씻어내자 기분이 한결 나아졌다. 수건으로 몸을 닦고 새 옷으로 갈아입었다. 밖으로 나가자,   남자가 커피를 내밀었다. 마셔요. 따뜻해질 거예요. 여자는 두말 않고 커피를 받아 조금씩 마셨다. 그 사이 남자도 새 옷으로 갈아입고 나왔다.
   맛있긴 하지만 전 근처 커피전문점이 더 좋아요. 여자의 말에 남자는 싱긋 웃었다. 제가 지금 수중에 돈이 없거든요. 여자도 따라서 미소를 지었다. 얼마 만일까. 이렇게 웃는 건. 두 사람은 뒤로 젖혀지는 안락한 의자에 앉아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둘 다 마스크는 쓰지 않은 채였다. 여자는 물어볼 말이 많았다. 아까 했던 행동의 의미는 무엇이며 도대체 왜 매일 길거리를 헤매고 있는지. 정말 도를 믿고 있는 건지. 하지만 도무지 어떤 식을 말을 꺼내야 할지 몰랐다. 단도직입적으로 묻겠어요. 그쪽 정상인가요?, 라고 할 수도 없었으니까. 여자가 곤란해 하고 있다는 걸 눈치 챘는지 남자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이제 도를 믿으십니까? 여자는 어이없어 하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다. 농담이죠? 남자는 입가에 웃음을 띠며 말했다. 예전에 길에서 돈이나 뜯어보려는 사기꾼을 떠올린다면 농담일 겁니다. 하지만 이제 다들 얼굴을 볼 수 없으니 관상을 보고 좋은 집안에서 태어났다느니, 얼굴이 안 좋아 보인다느니 하는 이야기는 할 수 없지 않겠습니까? 제가 믿는 도는 그런 건 아닙니다. 여자가 말했다. 그럼 어제 왜 그런 건데요? 설마 낡은 작업 수법은 아니었겠죠? 도에 관심 없다고 하면, 자기도 관심 없다면서 사실은 나에게 관심 있다고 하려했는데 오늘 얼굴 보고 실망했다거나. 남자가 큰 소리로 웃었다. 여자는 무안하다는 듯이 인상을 찡그렸지만, 남자는 한동안 웃더니 겨우 웃음을 멈추고 말했다. 아닙니다. 미안해요. 그렇게 오해했다면. 전 동생을 찾고 있습니다. 여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여동생이요?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오래전에 홀연히 사라져버렸어요. 이 뿌연 무언가가 세상을 뒤덮기 시작할 무렵에 어딘가로 가버린 겁니다. 사람들은 다들 이 무언가 때문에 죽은 거라고, 그만 포기하라고 하더군요. 하지만 전 그럴 수 없었습니다. 그 거리는 동생을 마지막으로 본 곳입니다. 전 아직 이 세상 어딘가에 동생이 있으리라 믿습니다. 지금 제가 찾을 수 없는 건 마스크에 가리어져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뿐입니다.
   거짓된 믿음이라고 여자는 생각했다. 스스로 체념하면서도 자기를 속이면서까지 믿는 것이라고. 하지만 아까 보았던 남자의 눈빛을 도저히 머릿속에서 지울 수가 없었다. 그 절박함이 가슴 속으로 느껴졌다. 자신이 사라지면 누가 찾아줄까. 여자는 아무도 없을 거라 단정 지었다. 지금껏 홀로 살아왔기에. 누구나 인간은 혼자라고 하지만, 여자처럼 철저히 홀로 자라온 사람은 몇 없을 것이었다. 하지만, 어쩌면…… 혼자가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의 말이 맞다면, 아주 오래전, 이 무언가가 세상을 뒤덮기 전에.
   많이 닮았어요. 갑자기 남자가 입을 열었다. 눈이, 제 동생과 흡사했어요. 비슷해 보이는 사람마다 같은 소리를 한 건 아닙니다. 다 제 나름대로의 단계가 있어요. 당신에게 건넸던 도를 믿느냐는 말은, 제가 가지고 있던 마지막 말이었습니다. 그 말을 하면, 동생은 항상 어떤 대답을 해오곤 했고, 또 제가 동생을 찾을 수 있는 방법은 다른 의미를 담은 도였기 때문이기도 했습니다. 제가 말했죠. 참다운 도라고. 기억해 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뭔가를 잊고 있습니다. 이 뿌연 무언가가 생기기 전에 우리는 이게 무엇인지 알고 있었고 막으려 했어요. 하지만 어느 순간 포기했기 때문에 전부다 이걸 잊게 된 겁니다. 그리고 이젠 당연시 하면서 살고 있고 말입니다. 하지만 그건 잘못된 겁니다. 저는 그래서 우리가 모두 과거를 기억하고, 이 뿌연 무언가를 제대로 꿰뚫어보고 저항할 수 있는 도를 원하는 겁니다. 그럴 수 있다면, 과거로 되살릴 수 있다면, 우리 주위에 떠다니는 이것들을 몰아낼 수 있다면 제 동생도 돌아오리라 믿습니다.
   만약 그렇지 못 하면요? 이대로 우리의 삶이 지속되면 어떻게 되는 거죠? 여자가 물었다. 여자의 목소리는 단호했고 울림이 있었다. 남자는 물끄러미 여자를 쳐다보았다.
   무언가가 이대로 서서히 우리 몸을 좀먹고 들어갈 겁니다. 아무도 모르게 우리 몸에 쌓이고 쌓이겠죠. 그렇게 우리는 차츰 변형될 테고 새로운 무언가로 바뀔 겁니다. 그건 지금의 우리가 아닌 다른 것이 되는 겁니다. 그게 아니라면, 세상은 멸망으로 치닫게 될 겁니다. 어떤 식의 모습일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분명한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파국이 우리 앞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침묵이 내려앉았고 밖에선 약해진 빗소리만이 들려왔다. 여자는 멸망이라거나 파국이라는 단어가 마음에 들었다. 진정 여자가 원한 건, 자신의 답답함과 무료함을 한 번에 날려줄 무언가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여자는 이 뿌연 무언가들이 언젠가는 분진 폭발처럼 일순간에 세상을 폭발시킬 지도 모른다는 상상을 했다. 그게 옳은지 그른지는 상관없었다. 어쩌면 여자는 변화를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미리 포기하고 체념하는 습관이 든 지도 몰랐다. 여자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도 그친 듯하니 돌아갈게요. 커피는 잘 마셨어요. 남자는 더 쉬었다 가라고 만류했지만, 여자는 고개를 저었다. 옷은 빨아서 모레 드릴게요. 거리에서 보면 되죠?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어주었다. 여자는 보슬비가 내리는 밖으로 발을 내딛었다. 세상은 뿌연 무언가와 물안개가 섞여 몽롱할 정도로 흐릿하게 보였다. 모든 경계가 불분명해진 것 같았다. 여자는 경계 없는 세상을 얌전히 걸어갔다. 이대로 어딘가로 초월해버려도 상관없다는 듯이 홀연히 앞으로 나아갔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았고 세상은 적막이 감쌌으며 어두웠다. 여자는 그 편이 더 좋았다. 아무렇게 걸어도 부딪칠 염려가 없었으니까. 이대로 다들 영원히 나오지 않으면 좋을 텐데. 여자는 버스 정류장까지 도착했다. 버스는 쉽사리 오지 않았다. 삼십 분이 넘게 기다린 끝에야 버스가 도착했고, 여자는 손님이 아무도 없는 텅 빈 버스에 탑승했다. 어제와 같은 시간인 걸까. 운전수는 또 선글라스를 낀 할아버지였다. 그러나 이번에도 여자는 한없이 낯설게만 느꼈다. 도무지 할아버지가 친숙해질 기미가 없었다. 마스크와 선글라스를 동시에 벗겨보고 싶었다. 그 안이 아무 것도 없는 텅 빈 공허라도 두렵지 않을 듯했다. 하지만 여자와 운전수 사이에는 투명한 플라스틱 막이 쳐 있었다. 여자는 운전수한테 손끝 하나 댈 수 없었다. 그저 바라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따름이었다. 어떤 할 말도 없었지만, 여자는 결국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할아버지는 왠지 귀가 먹었을 것만 같았다. 누가 갑자기 내려달라고 외쳐도 못 듣고 정류장을 지나쳐버릴 것 같은 인상이었다. 여자는 망설였다. 할아버지에게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한 남자를 만났는데 여동생을 찾고 있었노라고. 그 사람은 어떤 도를 믿고 있었는데 이 세상이 혼탁한 우리들의 무언가로 뒤덮여 있으므로 그걸 꿰뚫어 봐야 한다고. 반드시 그걸 걷어내야만 잊힌 사람들,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사람들이 돌아온다고. 믿지 않을 것이다. 여자는 자신도 믿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다. 어쩌면 진실로 예전에는 모든 사람들이 이걸 막으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그러는 도중에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잊히고, 누군가는 사라졌을 지도 모른다. 이제는 아무도 그 때를 기억하지 못하는 건지도 모른다. 누가 일부러 기억을 없앤 게 아니라 당연하다는 듯이 잊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게 어쨌단 말인가. 이제는 이렇게 살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는가. 모든 건 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게 흘러가야만 하는 일이었고, 개인이든 단체든 막을 수 없는 흐름이었다. 여자는 빨간 버튼을 눌렀다. 아직 물기가 남은 새빨간 마스크를 입에 걸고 할아버지를 향해 또다시 괴성을 내질렀다. 할아버지는 역시 귀가 안 좋은 모양이었다. 그저 환하게 웃으며 여자를 배웅하고 버스는 떠나갔다. 여자는 무료함을 느끼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아파트 입구에서 여자는 처음 보는 낯선 아이를 만났다. 확신할 수는 없었다. 이 아이도 매일 밤 집에 가는 길마다 봤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여자는 처음 보았다고 느꼈다. 모든 경계가 불분명해진 밤이었다. 여자는 아이가 경계들 사이로 떨어져 버릴까 염려됐다. 집이 어디니? 늦었으니까, 얼른 집에 가렴. 아이는 남자아이인지, 여자아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머리는 길지도 짧지도 않은 어중간한 길이였고 옷은 그 아이 때 애들이 입을 법한 평범한 옷차림이었다. 아이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이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눈을 빛내고 있었다. 어쩌면 이 아이는 저 무언가를 들여다보고 있는 지도 몰라. 여자는 순간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 지워버렸다. 아이의 손을 잡고 경비실에 데려갔다. 경비는 최고급 방독면을 쓰고 있었다. 그제야 아이가 처음부터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여자는 아이에게 자신의 마스크를 벗어서 걸어주었다. 아이는 잠시 만지작하더니 금세 마스크를 벗어 땅에 내던졌다. 경비가 원래 마스크를 쓰기 싫어하는 아이들이 있다며 그냥 가라고 말했다. 여자는 할 수 없이 아이에게 손을 흔들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가 천천히 내려왔다. 문이 열리고 처음 여자를 맞이한 것은 거울 속에 비친 셀 수도 없이 많은 무언가의 입자들이었다. 잡히지도 않지만 분명 보이고 존재하는 무언가. 여자는 엘리베이터에 타고 13층의 버튼을 눌렀다. 집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대로 쓰러져 누웠다. 야근을 한 날보다 더한 피로가 몰려왔다. 거실 바닥에 쓰러져 그대로 자려는 노곤한 몸을 가까스로 침대에 눕힌 다음 여자는 잠에 빠져들었다.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꿈속에선 한 번도 본적이 없는 사람들이 나왔다. 그들은 전부 모르는 사람들이었으나 여자에게 다가와 친근하게 굴었다. 여자는 두려운 나머지 문을 열고 밖으로 도망쳤다. 밖은 낮이었는데도 뿌연 무언가가 보이지 않았다. 사람들은 전부 환히 얼굴을 드러내고 걸어 다녔다. 여자는 이 생경한 장면에 질려 더럭 겁이 났다. 분명 예전에 이런 시대를 본적이 있을 터인데도 모든 게 낯설게만 느껴졌다. 여자는 어디로 가야 할지 몰랐다. 이 세상은 자신이 살던 세상이 아니었다. 전부 낯선 사람들뿐이었다. 여자는 끊임없이 달리다가 꿈에서 깨어났다. 정신을 차리자 땀으로 흠뻑 젖은 몸이 느껴졌다. 왠지 모르게 홀가분한 기분이 들었다. 여자는 자기 외에 아무도 없는 텅 빈 방의 스산함이 좋았다. 어둠 속에서 무언가는 시야에 보이지 않았지만, 여자는 여전히 무언가들이 주변을 감싸고 있음을 느꼈다. 여자는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다시금 잠을 청했고 이번에는 죽은 듯이 어떤 꿈도 꾸지 않은 채 아침까지 잘 수 있었다.
   변함없이 알람 소리가 여자의 신경을 자극했다. 눈을 뜨고 부스스한 머리를 한 채 얼굴을 씻고 거울을 쳐다보았다. 사방을 채운 뿌연 무언가와 비스듬히 선 여자가 비쳤다. 여자는 평소처럼 옷을 갈아입고 흰 마스크를 쓴 채 밖으로 나갔다. 엘리베이터를 타는 순간 기묘한 느낌을 받았지만, 정확히 그게 무엇인지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아파트 입구를 나서는 순간, 여자는 그제야 무엇이 변했는지 느꼈다. 정적이었다. 사방이 조용했고, 아침의 소란스러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여자는 두리번거리며 마스크를 쓰고 등교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찾아보려 했지만 보이지 않았다. 아이들이 모두 어디로 가버린 걸까. 피리 부는 사나이라도 나타난 것처럼 아이들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여자는 경비실로 향했다. 어제 만난 아이가 아직까지 있으리란 생각은 안 했지만, 혹시나 한 까닭이었다. 경비는 어디를 갔는지 보이지 않았으나, 어제 만났던 아이가 피부가 검게 변색된 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여자는 재빨리 아이를 끌어안았다. 아이는 심하게 땀을 흘렸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듯 흰자위가 번득였다. 여자는 아이의 뺨을 치며 정신 차리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아이는 가까스로 잠시 정신을 차린 듯 흘긋 여자를 보더니 꺼질 듯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언니……. 희미한 목소리였지만 사방이 고요했기에 여자의 귓가엔 또렷이 들렸다. 아이는 더는 버틸 기력이 없다는 듯이 고개를 축 늘어트렸다. 여자는 어쩌면 매일 밤 이 아이를 만났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아이는 하나뿐인 언니를 찾아 매일 아파트 앞에서 기다렸지만 그 언니는 이 아이를 못 알아봤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사람들은 무언가에 홀려 서로 잊히고 사라졌는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그 남자의 말이 맞았을 지도 모른다고. 여자는 아이를 품에 안고 걸음을 옮겼다. 다들 어디 있지? 이 사방을 메운 무언가 때문일까. 음악 듣기나 동영상 보기, 적외선 카메라 기능 따위가 달려 있는 최신 방독면이라도 결국 아무런 소용도 없었던 것일까. 어쩌면 그런 건 아무 상관도 없었을 것이다. 중요한 게 아니었을 것이다. 무언가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뭔가를 바르고 뭔가를 마시고 뭔가를 입었지만, 결국 우리는, 아무 것도 모른 거야. 버스 정류장까지 가면서 여자는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다. 마치 세상 모든 사람들이 여자와 아이를 두고 어디론가 떠나버린 것 같았다. 다른 행성, 혹은 이계, 경계의 틈새, 무언가 속으로. 버스가 도착했다. 운전수는 낮인데도 불구하고 선글라스를 끼고 있었다. 여자는 그 모습이 한없이 낯설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그런 것을 따질 시간이 없었다. 아이가 점차 식어가는 게 몸으로 느껴졌다. 호흡이 잦아들고 있었다.
   버스가 출발했다. 운전수는 상황의 심각함을 아는지 평소보다 빠른 속도로 차를 몰았다. 말을 하지 않아도 상황을 알아차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왠지 운전수는 귀가 잘 들리지 않을 것만 같았다. 여자는 한 손은 손잡이를 잡고 다른 손은 아이를 안은 채 아이에게 온 신경을 집중했다. 아이의 숨은 미약했다. 호흡이 불규칙했고 이마는 불처럼 뜨거웠다. 전신이 땀으로 젖어 번들거렸다. 여자의 옷도 젖어갔다. 여자는 아이의 안색을 살피다가 마스크를 벗어 창밖으로 던졌다. 세찬 바람이 여자의 입가를 스쳐갔다. 바람에 닿은 피부는 차가웠다. 여자는 잠시 찬바람을 마시다가 곧 고개를 숙여 아이와 입을 맞췄다. 그리고 아이의 입 속으로 숨을 불어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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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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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태운 08.09.29 22:29 댓글 수정 삭제
    분위기가 좋아요. 독자가 음미할 수 있는 메타포가 더 많이 올라와 있다면 보다 맛있는 밥상이 되었을텐데.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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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08.09.30 00:00 댓글 수정 삭제
    앗,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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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봄볕바람 08.09.30 21:39 댓글 수정 삭제
    페로딘님 거울에도 글을 올리시는 군요. 헤헤
    어디서 본 내용이다 했더니 이글루스에서 봤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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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08.10.01 06:07 댓글 수정 삭제
    봄볕바람/ 네, 원래 리뷰만 올리다가 이번에 처음 단편을 올렸어요.^^;; 앞으로도 이글루스와 동시에 올리려고요. '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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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티 08.10.14 15:47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영화 미스트가 생각나네요^^

    두 작품 모두 '상실'과 '비현실', '반복'이 드러나고 있지요. 둘 다 구성 면에서는 빈틈없었다고 생각합니다. 차이가 있다면 해안가는 저 요소들을 이겨내지 못한 채 그저 짓눌리며 살아갈 뿐이라는 점에서 꽤 답답했습니다. 반면 이 소설은 주인공이 그것을 통해 뭔가를 이루어낼 수 있었다는 점에서 독자가 뭔가를 얻어갈 수 있게 했습니다. 무조건 '살아라' 식의 결론을 내는 건 곤란하겠지만, 무의미한 현실이 반복되는 것보단 뭔가 결론을 내리는 쪽이 독자에겐 선호되겠지요.

    딱 하나 읽으면서 걸렸던 게 있다면, 저렇게 그것이 퍼진 지 오래되었고 마스크와 방독면까지 쓰고 다닐 정도라면, 그것의 이름이나 효력 정도는 진작에 밝혀지지 않았어야 하지 않나 싶습니다. 비현실성을 좀 더 추구하셔서 그런 것이라면 상관없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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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08.10.15 08:29 댓글 수정 삭제
    라티/ 두 개다 읽어주셨군요. 감사합니다. 글은 약간 모호하게 이미지만 쭉 나간 글이긴 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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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금 늦게 읽었네요. 잘 봤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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