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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이환 종이 바깥의 영화

2006.06.30 23:1706.30

  친구가 강연회에 다녀왔다. 요즘 잘 나간다는 소설가의 강연회였다. 그런 강연회에는 관심 없어했던 친구였으므로 나는 어찌된 일이냐고 물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강연회가 열린 대학이 그의 모교였고 친구는 모교에 볼일이 있었던 것이다. 볼일과 볼일 사이의 남은 시간과 소설가에 대한 호기심이 더해져 ‘친구가-잘 알지도 못하는 소설가의-강연회에-가는 일’이 일어났다. 소설가는 잘 나가는 소설가였다. 웃기게도 친구는 그걸 몰랐다. 내가 설명해주고 나서야 알았다. 소설가의 강연회가 친구의 입에서 이야기로 모양을 갖춰 나온 이유는 소설가가 유명해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니까 이건 이런 이야기이다. 이야기를 영상화해 보자. 요즘엔 글자보다 이미지가 더 잘 나간다. 문장 대신 영상을 상상해 보자.

  영화를 한편 상상해보라. 술집을 배경으로 한 영화다. 주말 저녁인데도 손님이 없을 만큼 장사가 안 되는 술집이다. 카운터의 종업원은 지루해 하품을 한다. 카메라는 유일한 손님 둘을 비춘다. 한 명은 열심히 이야기를 하고 있고 다른 한명은 경청하고 있다. 말하는 쪽이 친구다. 친구는 듣던 쪽에게 말한다. “강연회에 사람 진짜 많더라.” 듣던 쪽은 고개를 끄덕인다. 그게 나다. 컷이 바뀌어 시공간이 이동하면, 강연회가 펼쳐진다. 강당이 꽉 찰 정도로 인기 있는 소설가의 강연회다. 소설가는 최근 단편집을 내놨고, 강연회는 단편집의 홍보도 겸하고 있다. 사람 하나가 뒤늦게 입장해 주위를 살피며 기웃거리다 빈 구석의 벽에 기댄다. 그게 이야기 속의 친구다. 늦게 들어와서 벽에 기대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친구는 주변을 힐끔거리며 분위기를 살핀다. 소설가는 반은 열성적으로 반은 냉소적으로 사람들의 질문에 답한다. 반은 열정적이고 반은 냉소적인 태도라는 묘사가 괴상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그건 내가 소설가의 작품을 설명한 형용사기도 하다. 나는 소설가의 글을 대부분 읽었다. 글들은 열정적이면서 냉소적인, 괴팍한 글이었다.

  컷은 다시 술집으로 돌아온다. 친구는 신이 나있다. 이야기의 가장 낯선 면에 도달한 것이다. “그런데 무슨 일이 있었냐면” 친구가 마구 웃어대면 컷이 바뀌어 장소는 강연회로 넘어가있다. 질문과 대답시간이다. 소설가의 팬 하나가 소설가에게 묻는다. 마지막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어요. 주인공이 상상하는 세상 말이에요,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백미라고 생각해요. 뭐랄까, 소설가들이 백지를 채워나가는 고통이 어떤 것인지를 간결하면서도 재미있게 설명한 좋은 장면이라고 생각하는데,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컷이 바뀌어 술집으로 돌아오면, 클라이막스를 떠들어대느라 얼굴까지 상기된 친구의 얼굴이 클로즈업 된다.
  “그 말을 들은 소설가가 어떻게 했는지 알아? 책을 뒤지더니 팬이 말한 페이지를 찾아서는 찢어서 먹어버린 거야.”
  멍한 내 표정의 반응쇼트.

  소설가는 페이지를 찢어 미련 없이 씹어댄다. 사람들은 아무 말 하지 못한다. 몇몇 감정 표현에 솔직한 사람들이 키득키득 웃는다. 카메라는, 구석에 서서 입을 벌린 채 강단만 쳐다보는 친구를 비춘다. 소설가는 종이가 너무 뻑뻑했는지, 앞에 놓인 유리잔의 물을 들이키기까지 한다.

  나는 작은 이야기를 덧붙여서 친구의 이야기를 더 풍성하게 완성한다. 작가가 새로 발표한 단편집에는, 종이 씹어 먹는 강박증을 가진 사람을 주인공으로 한 단편이 있다. 아마 소설가는 그 단편에 대한 언급 삼아 그런 괴상한 행동을 취했을 것이다. 내 이야기는 친구의 이야기에 붙은 작은 반전이 되었다. 친구는 나로 인해 이야기가 새롭게 진화한 것을 고마워한다. 우리가 술잔을 부딪치는 장면을 마지막으로 영화는 끝난다.

  우리는 술을 몇 잔 더 마셨지만 많이 마시진 못했다. 내가 황급히 자리를 떴기 때문이다. 친구는 더 놀다 들어가라고 매달리지만 나는 허둥지둥 친구를 물리친다. 혼자 골목을 걸어가는 내 표정은 굳어있다. 골목이 어둡고 세상이 춥기 때문이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자, 나는 종이를 씹어 먹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었다. 그래서 내 표정은 굳어있고 골목은 어둡고 세상은 춥다.

  강박증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머리카락을 뽑는 강박증, 갖고 있는 물건을 내다버리지 못하는 강박증, 결벽증, 복장 도착증, 독재자의 딸을 숭배하는 강박증 등등. 종이를 씹어 먹는 강박증이 의학계에 얼마나 보고 되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그 강박증에 시달리는 사람이 적어도 한명 있다는 걸 나는 안다. 나는 종이를 씹어 먹는 강박증에 시달리고 있다.

  강박증이 처음 시작하던 순간을 기억한다.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다. 책을 읽고 있는데, 책상에 놓인 흰 종이가 눈에 들어왔다. 어째서 흰 종이가 눈에 들어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흰 종이는 ‘항상’ 눈에 들어온다. 내 방에는 출력을 기다리는 A4용지가 ‘항상’ 널려있으니까. 그러므로 흰 종이는 내 눈에 ‘항상’ 들어왔을 것이다. 그러니 지금까지 눈에 들어왔던 흰 종이가 어떻게 해서 시야의 다른 물건들 보다 더 내 눈에 띄는 우선권을 획득했는지가 중요하다.  

  그때 읽고 있던 책이 무슨 책인지는 기억 못한다. 아마도 친구가 말했던 소설가의 단편집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건 우연일 수도 있고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다른 어떤 물건보다도 더 강렬하게 눈에 띌 수 있는 우선권을 어떻게 갖게 됐는지 아직도 모르겠는 그 흰 종이를 집었다. 종이를 집는 순간 나는 아, 하고 오르가즘에 가까운 탄식을 내뱉었다. 이전에는 종이가 그렇게 부드러운 물건이라고 생각하지 못했다. 나는 천천히 모서리를 찢었다. 종이 찢어지는 소리가 그토록 시원했는지도 이전엔 알지 못했다. 작은 삼각형 모양의 종이는 내 손 끝에서 손가락과 함께 가늘게 떨렸다. 종이를 바라보는 내 시선도 가늘게 떨렸다. 천천히 나는 종이를 입으로 가져갔다. 그때의 나는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몰랐다. 지금도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치즈 조각을 넣듯 종이를 입에 넣었다. 치아 사이에서 종이가 버석거리는 소리가 귀를 통해 들렸다. 종이의 맛을 느낀 침이 목구멍으로 흘렀다. 침 때문에 부드러워진 종이를 나는 삼켰다. (주1)

  사람은 이상한 짓을 많이 하기 마련이다. 그땐 그렇게 생각했다. 사람은 가끔 이상한 짓을 하며 그건 가끔 하는 이상한 짓이기 때문에 가끔 하는 이상한 짓 정도로 생각하면 되었다. 강박증이라는 단어는 내 사전에 없었다. 내 사전엔 사람은 가끔 이상한 짓을 많이 한다는 사실과, 찢어진 모서리가 있다.

  나는 사전의 모서리를 찢어먹곤 했다. A4 종이는 금방 싫증이 났기 때문이다. 천원이나 오천원, 만원 지폐의 한 모서리를 찢어서 씹기도 했다. 껌을 사서 껌은 버리고 껌 종이만 씹기도 했다. 음식점이나 커피숍에 가서 기다리기 지루하면 메뉴판이나 냅킨을 찢어서 살짝 입에 넣곤 했다. 표를 씹어보기 위해 일부러 지하철을 탄 적도 있었다. CGV, 메가박스, 롯데시네마 등등 극장표도 많이 씹었다. 무궁화호 표도 씹어봤다 (KTX는 아직 씹지 못했다). 하지만 역시 가장 많이 씹은 건 책이었다.

  얼마나 많은 책의 모서리가 내 입으로 들어갔던가. 아끼는 책일수록 더 많은 페이지가 찢겨나갔다. 몇몇 책들은 더 이상 모서리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찢겨나갔다. 내 방 서가에 꽂힌 보르헤스의 책 ‘세익스피어의 기억’은 사각형이 아니라 육각형이다.

  나는 모서리만을 찢어 씹었다. 모서리가 찢기 쉽기도 했기 때문이고, 모서리에는 이야기가 없기 때문이기도 했다. 세상의 모든 종이들, 수많은 색의 종이들, 모두 다른 질감의 종이들, 종이, 종이, 모두 내 혓바닥을 통해서 들어간 그 많은 것들, 그중 어느 것에도 중요한 종이는 없었다. 종이의 모서리는 여백이다. 그곳엔 이야기가 없다. 중요한 정보가 담겨있지 않다. 천원 지폐의 모서리가 찢겨있다고 위조지폐가 되진 않는다. 책의 모서리를 접어놓았다고 그 책이 아무 내용 없는 책이 되진 않는다. 보고서의 모서리가 찢어졌다고 해서 효력을 잃지 않는다. 종이의 모서리는 순수한 여백이었다. 이 세상엔 순수한 여백이 없다. 세상이 둥글다는 걸 증명한 이유로 세상엔 모서리가 사라졌다. 그래서 세상엔 여백이 없다. 여백은 종이에만 존재한다.

  종이를 씹으며 나는 상상하곤 했다. 내가 찢어낸 종이가 세상으로 흩어지는 상상을. 종이는 땅에 스며들어 종이꽃을 피운다. 종이는 하늘로 날아 올라가 종이 구름이 된다. 종이는 땅에서도 솟아나고 하늘에서도 떨어진다. 건물의 벽에서 피어나고 콘크리트 바닥에서도 솟아난다. 세상은 종이로 가득 찬다. 나는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그러니까 이건 이런 이야기이다. 다시 해볼까 문자를 버리고 영상으로 빠져드는 놀이를. 아니, 놀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옳은 일일까. 사람들은 글이 엄숙한 것이고 영상의 이미지는 가볍고 자극적인 것이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건 편견 아닐까? 이미지가 들으면 그 모든 헛소문은 자신의 자리를 위협받는 글이 이미지를 음해하기 위해 지어내 퍼트린 것이라 생각할 것이다. 이 글은 그 것이 단순한 편견일 뿐임을 말하려는 의도를 다분히...

  단순한 편견일 뿐임을 말하려는 의도를 다분히... 이라는 문장에서 영화는 시작한다. 컷이 바뀌면 한 남자가 서점을 우울한 눈빛으로 돌아다닌다. 밑에 자막을 넣자, 그는 씹던 종이에 혀를 베었다. 그래서 혀가 조금만 움직여도 시큰 시큰 아프다. 자막이 끝나면 남자가 입맛을 다시다가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남자는 서가를 돌아다니지만 서점을 둘러보는 사람들이 흔히 그렇듯 큰 원을 그리며 맥없이 걸어 다니고 있을 뿐이다. 남자의 서점 순례를 마치게 만든 것은 한권의 책이다. 아름답고 화사하고 매력적인 디자인의 소설책. 화면은 책을 클로즈 업 한다. 책 너머로는 천천히 다가오는 남자가 보인다. 카메라는 남자의 얼굴로 치고 들어가고, 책을 집는 남자의 눈썹이 위로 올라간다. 깔리는 자막, 책이 너무 예뻐서 남자는 흥분했습니다. 책을 쓰다듬은 남자의 성기가 발기하면서 바지 앞 춤이 부풀어 오르는 것까지 보여줄까? 아니, 그러지 않는 것이 좋겠다. 그건 너무 오버다. 오버는 글을 망친다.

  종이를 씹어 먹게 된 후로 나는 책의 내용보다는 책의 종이를 보고 고르는 일이 잦아졌다.  웃긴 일이라고 생각해도 어쩔 수 없다. 나조차도 웃긴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나조차 어쩔 수 없다. 그 소설가의 책에서는 달콤한 사탕 냄새가 풍겼다. 소설가가 책에 사탕 냄새나는 향수를 뿌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아니면 책의 페로몬이거나. 어떤 책은 이유 없이 많이 팔린다. 당신은 해리 포터의 인기를 설명할 수 있는가? 그 책은 독자를 유혹하는 페로몬을 풍겼을지도 모른다. 나는 사탕 냄새가 나는 책 모서리를 찢었다. 그리고 입에 넣었다. 종이가 입으로 들어가는 순간 이성이 습관을 때려눕히고 두뇌에 비상 신호를 울렸다. 지금 이 새끼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종이를 씹어 먹고 있어! 두뇌는 나에게 정신을 차리라고 명령했으며, 나는 정신을 차렸다.

  카메라는 종이를 막 입에 집어넣은 남자를 보여준다. 컷이 바뀌면, 남자의 근 몇 미터 안의 사람 모두가 남자를 멍하니 보고 있다. 남자는 몸을 돌려 점원에게 개미 같은 목소리로 말한다. 이 책 얼마에요?

  그 다음 컷에서 페이지마다 모서리를 찢어 씹으며 열심히 책을 읽는 남자의 모습을 보여주면 더 재밌을 테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카메라는 마지막 페이지를 덮으며 절망적으로 바닥에 책을 집어던지는 남자를 비춘다. 책이 툭탁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구르는 것을 나는 본다. 바닥에는 내가 책에서 찢어냈지만 입에는 집어넣지 못한 종이가 굴러다닌다. 카메라가 비추는 것은 그것이다. 종이가 슬프게 굴러다니는 모습들.

  그래, 슬프다, 이 이야기는 슬픈 이야기이다. 슬프게 읽어줬으면 한다. 소설가의 소설을 읽은 후 나는 더 이상 종이를 씹을 수 없었다. 그건 슬픈 일이었다. 아니 씹으려면 씹을 순 있었다. 하지만 씹고 싶지가 않았다. 욕구가 사라졌다. 욕구를 불러일으킬 쾌감이 사라졌던 것이다. 종이를 씹어도 아무리 달콤한 종이를 씹어도 맛있지가 않았던 것이었던 것이었다.

  당신은, 소설가의 단편이 어떤 내용인지 궁금한가?

  나는 친구에게 말한다.
  “단편 소설에는 종이를 씹어 먹는 남자가 나와. 남자는 소설가인데, 문장을 써내려가는 것에 대한 회의를 느껴. 여백 공포증에 걸렸다고 할까. 그럴 때 있잖아, 여백을 보면 까마득하게 느껴져서 문장 하나 쓰는 것이 답답한 거. 그때마다 소설가는 종이를 찢어 씹어 먹어서 공포증을 해소해. 소설가는 종이를 삼키고 소화하고 배설하며 끝도 없이 중얼거려, 문장을 쓴다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어차피 나는 좋은 글을 쓰지도 못하는데, 차라리 여백에 그림을 이미지를 영상을 채워 넣는 것이 더 좋지 않을까, 왜 내가 글로 여백을 채워야하나, 그렇게 끝도 없이 중얼거려. 남자는 종이를 찢어서 방바닥에 버리고 그렇게 쌓인 종이는 바닥을 메우고 벽을 타고 오르기 시작하지. 소설은 그런 내용이야.”
  “아하, 그렇구나.”
  친구는 대답한다.

  그러니까 이건 이런 이야기이다. 단편 소설을 읽은 나는  종이를 씹어 먹는 나 자신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그건 제정신이 아닌 짓이었다. 세상의 여백을 삼키느니 어쩌느니 하는 그럴듯한 의미가 부여된 행동이 아니었다. 그건 아이들이 바닥에 떨어진 물건을 주워 먹는 행동처럼 그냥 추잡한 행동이었다. 그냥 미친 짓이었고 지저분한 짓이었다. 책이 얼마나 더러운데 그걸 다 찢어먹고 있다니, 이 얼마나 한심한 짓인가.

  그래서 나는 참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친구의 이야기를 더 이상 듣지 않고 술집을 달려 나왔다. 그래서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왔다. 그래서 작가의 단편 소설을 읽었고, 습관적으로 찢은 모서리를 입에 집어넣지 않고 방바닥에 던졌다. 그래서 방은 찢어진 종이로 가득 찼다. 그래서 나는 슬픈 종이 뭉치들을 바라보며 나 자신을 비웃고 비웃었다.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그래서 나는 소설가의 단편을 읽고 또 읽었다. 책 모서리를 찢고 또 찢었다. 책은 더 이상 찢어낼 여백이라곤 없을 만큼 너덜너덜해졌다. 보르헤스의 ‘세익스피어의 기억’이 육각형이라면 소설가의 단편집은 뭐라 이름조차 붙이지 못할 불규칙한 도형이었다. 나는 찢어진 종이를 내려다보다가 찢어진 종이 위에 누워 잠이 들곤 했다.

  그럴 때면 나는 꿈을 꿨다. 꿈속에서, 내가 찢어낸 종이는 세상으로 흩어진다. 종이는 땅에 스며들어 종이꽃을 피운다. 종이는 하늘로 날아 올라가 종이 구름이 된다. 종이는 땅에서도 솟아나고 하늘에서도 떨어진다. 건물의 벽에서 피어나고 콘크리트 바닥에서도 솟아난다. 세상은 종이로 가득 찬다. 나는 그런 꿈을 꾸곤 했다.

  꿈에서 나는 소설가의 강연회에 간다. 난 볼일이 있어서 모교를 가는데 그곳에서 소설가의 강연회가 열리고 있다. 호기심이 생긴 꿈속의 나는 볼일도 집어치우고 그대로 강연회로 들어간다. 내가 들어갔을 때 강연회는 이미 시작한지 오래다. 늦게 들어간 사람이 흔히 그렇듯 주위를 살피다, 빈 구석을 찾아 벽에 기댄다. 그리고 힐끔거리며 주변을 둘러본다. 질문과 대답시간이다. 사람들은 소극적으로 손을 들어 질문하고, 소설가는 반은 냉소적이면서 반은 열정적인 태도로 답변해 나간다.

  반은 열성적이고 반은 냉소적인 태도, 그건 소설가의 글을 읽었을 때 받은 느낌이다. 그 느낌을 나는 느끼고 있었지만 꼬집어 말하진 못했다. 그러나 소설가의 대답을 듣는 순간 그 표현이 확실하게 혓바닥에 자리 잡아 튀어나왔다. 내가 소설가의 냉소적이면서 열성적인 소설을 생각하는 동안, 소설가는 이렇게 말했다.

  “소설가라면 자신의 글에 대해 열정적이면서도 냉소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어야 하죠.”
  그건 우연 같기도 했고, 우연이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냉소적이고 열정적인 대답 때문인지 이제 아무도 질문을 하려 하지 않는다. 이미 나올만한 질문은 다 나온 걸까. 혹은 방청객들이 역사상 유례없이 소극적인 독자들이 이 강연회에 참가했기 때문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건 우연일 수도 있고 우연이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나 역시 소극적인 건 마찬가지다. 나는 손의 무게가 천근이라도 되는 것 마냥 힘들게 손을 들어 질문의 기회를 얻어내고, 마이크를 받는다. 그리고 긴장한 나머지, 지금까지 글을 찢으면서 작가에게 하고 싶었던 질문들과는 전혀 다른 질문을, 얼떨결에 내놓는다. 마지막 부분이 가장 인상 깊었어요. 주인공이 상상하는 세상 말이에요, 소설에서 가장 빛나는 백미라고 생각해요. 작가님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소설가는 대답이 없다. 소설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대답한다. 소설가는 천천히 종이를 씹어 삼킨다. 사람들은 웃거나 당혹해한다. 웃지도 당혹해하지도 않는 사람은 종이를 씹는 소설가와 그를 지켜보는 나뿐이다. 나는 소설가의 입으로 들어간 종이를 생각한다. 나는 종이를 삼킨 소설가를 생각한다. 소설가가 쓴 소설을, 종이를 씹어 먹는 남자에 대한 글을, 그 글이 써져있는 종이를, 종이의 여백을, 채워지기를 강요당한 그 여백을, 종이를 씹어 먹는 글을 쓴 나를,  사람들 앞에서 종이를 씹어 먹는 나를, 나는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건 이런 이야기이다. 이제는 이야기가 빙빙 돌면서 현기증을 만드는 것 같다. 여기까지 읽은 사람들은, 무엇이 현실이고 무엇이 환상인지 무엇이 소설가이고 무엇이 소설가가 쓴 글인지 모호해지지 않을까 겁을 먹기 시작할 것이다. 종이를 찢고 씹고 씹지 못하는 이야기를 계속 반복하면서 모든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 뿐인 것 같다. 이래서야 아무 재미가 없다. 하지만 너무 당황해 할 건 없다. 당신은 그렇게 모호한 경계로 독자를 괴롭히려는 거만한 작가들의 작품을 수도 없이 읽어왔다. 이 글은 그런 거만함을 갖추진 못했다. 이 이야기는 단순하다. 이 이야기는 단순한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이건 이런 이야기이다. 영화를 상상해보자. 요즘엔 글자보다 이미지가 더 잘나간다. 술집을 하나 상상하라. 텅 빈 술집을. 얼마나 사람이 텅 비었는지 종업원이 지겹다 못해 하품을 할 지경이다. 그곳에서 남자가 혼자 술을 마신다. 남자는 종이를 한 장 앞에 두고 앉아 있다. 남자는 천천히 모서리를 만진다. 남자는 종이의 모서리를 찢어 입에 넣는다. 종이는 직사각형에서 다각형으로 변한다. 남자는 펜을 들어 종이에 직사각형을 그려 넣는다. 그리고 안에 글자를 적는다, 직사각형 안에 글자가 적힌다. ‘종이 바깥의 영화’.




『종이 바깥의 영화』





  그는 집 밖으로 나왔다. 계단을 내려가면 다른 계단이 있고 다른 계단을 내려가면 도로가 있었다. 그는 보도블록의 단단한 면을 골라 밟으며 걸었다. 무슨 공사인지가 진행 중이어서 길바닥은 시멘트와 그 밑의 모래가 다 뒤집어져 있었다. 남자는 건널목에서 신호등을 기다리며 하늘을 보았다. 검은 하늘의 보름달은 검은 벽에 뚫린 밝은 구멍 같았다. 남자는 달을 보며 가방을 어깨로 끌어당겼다. 노트북이 무거웠다. 문도 다 잠갔고 창문도 다 잠갔지, 집은 안전하다, 남자는 가방 끈을 세게 쥐며 중얼거렸다. 보름달이 떴구나, 지나치게 밝은 보름달이. 남자의 눈에 보름달과 신호등의 초록색 불빛이 번갈아 흘러들어가는 동안, 남자의 신발은 모래의 표면을 밟고 건널목을 밟았다. 찬 바람이 가방을 밀고, 남자의 손은 가방을 더 세게 쥐었다.

  남자는 카페에서 누구를 만날 예정이었다. 오늘 만나야 하는 누군가는 그에게 DVD를 몇 편 빌려주기로 했다. 남자는 최근에 DVD 플레이어를 구입해서 보고 싶은 타이틀이 많던 차였다. 그에게 DVD를 빌려주기로 한 사람은 ‘올모스트 페이모스’의 감독판과, 키에슬로부스키의 영화들과, 그가 예전부터 정말 보고 싶었지만 구할 수가 없었던 ‘위대한 엠버슨가’를 가지고 있다고 했다. 그는 허샤오시엔의 영화도 몇 편 가지고 온다고 했는데, ‘비정성시’를 늘 다시 보고 싶었던 그에겐 설레는 소식이었다. 그는 DVD 타이틀을 받으면 ‘올모스트 페이모스’부터 돌려볼 생각이었다. 감독판은 일반판과 어떻게 다른지, 추가된 40분이 영화를 어떻게 다르게 만들었는지가 무척 궁금했다. 그는 ‘올모스트 페이모스’에서 듣고 정말 좋아하게 된 노래 ‘Tiny Dancer'를 생각했다.

  이쯤에서 영화를 하나 상상하자.

  영화를 하나 상상하자. 요즘은 문자보다 영상이 더 잘나간다. 정말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치고 영화를 하나 상상하자. 난 당신과 논쟁을 벌이고 싶지 않다, 단지 영화를 하나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영화가 시작하면, 한 남자가 신호등을 기다리고 있다. 카메라는 남자와, 남자가 힘겹게 들고 있는 가방과, 차가운 바람이 자꾸 밀치고 지나가는 외투를 비춘다. 카메라가 오른쪽으로 팬하면 도로가 온통 뒤집어져 있고, 하늘에는 보름달이 검은 하늘의 구멍처럼 휑하게 빛난다. 컷이 바뀌면 신호등이 붉은 색에서 푸른색으로 변하고 남자가 걸음을 옮긴다. 남자는 이미 어깨에 단단히 걸려있는 가방이 바닥에 떨어질 것을 걱정이라도 하듯 끈을 더 세게 움켜쥔다. 이 모든 것을 되도록 강렬하게 상상하라. 당신이 다른 사람보다 더 쉽고 강렬하게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다면, 모두가 당신에게 이미지를 보여 달라고 구걸할 것이다.

  모두가 이미지를 구걸하는 시대다. 세상은 이미지로 넘쳐나는데, 대부분의 이미지가 5초를 넘기지 못하고 폐기된다. 운 좋은 이미지들은 복제되고 복제되고 복제되고 앤디 워홀의 공장에서 다시 복제되고 GQ에 실리고 JANE에 실리고 베니티 페어에 실리고 CNN에서 live로 방송되지만 그렇지 못한 것들은 허공에 사라진다. 사람은 흙에서 태어나 흙으로 돌아간다. 이미지는 허공에서 태어나 허공으로 돌아간다. 모두가 이미지를 구걸하는 시대다. 모두가 이미지를 구걸하는 시대이니 당신에게 쉽게 이미지를 전달할 수 있도록 영화를 하나 상상하자. 남자가 걸어가는 장면을 상상하자.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길을 걸어가면서 쇼윈도우를 흘끗 쳐다보는 습관이 생활화 되어있다. 남자 역시 그랬다. 그는 상점을 바꿔가면서 반복되는 노래를 잊기 위해 쇼윈도를 보았다. 지오다노와 디키즈와 노튼을 지나, 캘빈 클라인과 필라와 나이키와 아디다스를 지나, 퀵 실버와 닉스와 클럽 모나코를 지났다. 그는 수많은 상표가 등장했던 영화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생각했다. 렉서스와 어메리칸 익스프레스와 펩시와 레보와 갭의 광고가 차례대로 흘러나왔던 그 영화를. 남자는 수많은 상표가 번갈아 나오는 그런 영화를 상상했다. 눈앞에서는 ‘마이너리티 리포트’의 장면들이 흘러갔다. 남자는 걸었다.

  세상엔 이미지가 너무 많아, 남자는 생각했다. 이미지가 너무 쉽게 흘러나와 너무 쉽게 잊혀진다. 그림이 발명되면서 이미지는 생명을 얻었고, 영화가 발명되면서 이미지는 움직일 수 있는 권리를 가졌고, 리모콘이 발명되면서 이미지의 생명은 5초로 단축됐다. 이미지는 복제되고 복제되고 복제되지만 5초만에 죽고 죽고 죽는다. 이효리는 귀여운 핑클이었다가 청순한 핑클이었다가 성숙한 이미지의 핑클이었다가 여성스러운 핑클이었다가 해피투게더의 쟁반 노래방이었다가 애니모션이었다가 10분 안에 남자를 사로잡는 섹시 아이콘이었다가 조정린이 패러디하는 이미지의 원본이었다가 애니클럽의 이효리가 되었다. 이효리는 수도 없이 죽었다가 다시 태어났다. 세상은 이미지로 넘쳐나며 그 어느 이미지도 영원하진 않지만 그 모든 이미지가 현실의 실제로 존재하는 어떤 것들보다도 더 높은 가치를 지닌다. 쇼윈도에서는 이효리의 애니클럽이 튀어나온다. 길의 표면을 걸어가는 동안 쇼윈도의 안에서 흘러나온 노래를 그는 비껴 걸었고, 세상이 유리창과 콘크리트와 아스팔트의 면으로 이뤄지는 동안 그는 그 위를 떠다니는 이미지를 피하며 비껴 걸었다. 그의 머리 안에는 영화의 이미지들만이 있었고 그게 그의 관심사였다.

   카메라는 카페 안으로 들어가는 남자의 뒷모습을 비춘다. 당신은 카메라를 들고 남자를 따라가지 않고, 쇼트를 나눠 카페 안으로 들어오는 남자를 비춘다. 당신은 남자에게 ‘핑클의 노래를 피해서 카페에 들어오니 속이 다 시원하군’이라는 표정 연기와, 그 연기에 이어서 ‘카페가 덥네’라는 연기를 하라고 배우에게 요구한다. 당신은 세상에서 가장 유능한 배우를 영화에 캐스팅했다.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다. 이 영화를 상상하는 순간 이 영화는 당신의 영화다. 당신이 이 영화의 촬영 감독에 ‘마이너리티 리포트’를 촬영했던 다리우스 쥐스콘트를 쓰더라도 당신은 그럴 자격이 있다. 이건 당신의 영화다. 당신은 제작자로 와인스타인을 고용해도 좋고 조엘 실버를 고용해도 좋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에게 조언을 구해도 좋고 미라맥스를 제작자삼아 1억 2천만 달러의 제작비를 지원받을 수도 있다. 이건 당신의 영화이기 때문이다.

  남자는 집의 밖으로 나와 도시의 표면을 천천히 걸었다가 이제는 카페의 안에 도착했다. 그동안 그가 걸은 길은 직선이었고 쇼윈도는 길에 직각으로 서있었다. 모든 신경이 직각으로 곤두선 것 같은 기분을 그는 잊어버리려 한다. 그래서 그는 집의 밖으로 되도록 나오지 않으려 했다. dvd 타이틀을 들고 다시 그곳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그는 괜한 불안감에 사로잡힌다. 카페엔 사람이 없다. 음악도 조용하다. 춥지 않고 따뜻하다. 너무 밝지 않다. 그는  앉는다. 작은 창문으로 밖을 내다본다. 그가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을 이 구멍을 통해 내다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지금은 검은 길과 검은 하늘만 보인다. 하늘엔 억지로 뚫어놓은 구멍처럼 생긴 달이 천천히 서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그 움직임은 보이지 않는다.

  영화는 화면 위에 1초에 24번 깜박이는 사진에 불과하다. 인간에게는 그 움직임이 보이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보고 싶어 하는 이미지가 보일 뿐이다. 그건 거울이고 창문이고 하늘이고 우리의 눈이다. 창문에는 아무 것도 없다, 우리는 창문 너머의 것을 본다. 우리는 영화를 보고, 이미지를 보고, 그 속에서 실재하는 어떤 것들을 본다. 그러니 영화를 하나 상상하자. 요즘은 문자보다 영상이 더 잘나간다. 정말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그렇다고 치고 영화를 하나 상상하자. 남자가 있다. 남자는 카페로 들어간다. 남자는 늘 앉던 자리에 앉는다. 갈색 벽이 그의 옆에 자리 잡고 그는 화면의 왼쪽에 앉는다. 우리는 영화의 결말이 오기 전까지 이 벽을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반대편에 빈 자리엔 새로운 등장인물이 앉을 예정이다. 남자는 가방에서 노트북을 꺼내고 조심조심 테이블에 내려놓는다.

  남자는 노트북을 펼쳐 노트북의 안이 밖으로 보이도록 한다. 파워 버튼을 누르면 노트북이 연산을 시작하고 그 안이 환하게 빛나며 밖으로 뒤집어져 나온다. 남자는 노트북에 헤드셋을 연결해서 노트북의 안으로 귀를 묻는다. 윈앰프를 클릭하면 프로그램이 시작된다. 그는 모비의 hotel 앨범을 선택한다. 바탕화면에는 hotel 앨범의 표지가 벽지로 깔려있다. 모비는 호텔의 밖을 내다보고 있다. 아마 호텔에서 거대한 대도시를 내다본다면 그런 기분일 것이다. 남자는 노트북에 귀를 파묻은 채 눈은 창 밖으로 향한다. 그곳은 대도시가 펼쳐져있다. 남자는 대도시의 안에 있다. 남자는 그 밖을 상상할 수 없다. 남자는 그가 존재하지 않는 곳도 상상할 수 없다. 남자는 mp3 파일을 실행하고 hwp 파일을 실행한다. dvd를 실행하고 avi와 wmv와 xls와 ppt와 exe와 ogg와 zip를 실행한다. 도시의 표면이 노트북이라면 그곳의 이미지들은 컴퓨터의 파일들이다. 파일들은 표면을 구성하며 세상을 풍요롭게 만든다. 풍요로운 이미지의 시대라니 얼마나 즐거운 일인가.

  이제 새로운 인물이 나타날 시간이다. 다른 남자가, 편의를 위해 남자2라고 하자. 남자2가 카페로 들어온다. 그는 남자에게 빌려둘 DVD 타이틀을 몇 개 갖고 있는데, 그건 스프리스 쇼핑백에 얌전히 담겨있다. 이 영화가 당신의 영화라면 당신은 남자가 들어오는 프레임을 잡고 문을 프레임 안으로 침입해 들어오는 프레임으로 잡을 것이다. 그는 밖에서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다. 노트북으로 열심히 글을 쓰고 있는 남자의 프레임 안으로 남자2가 들어오도록 할 것이다. 노트북은 사각형이다. 남자는 노트북 안에 갇힌 듯한 느낌을 준다. 실제로 남자를 노트북에 가둘 수 없으니 그런 이미지만을 주자. 남자2는 전혀 그렇지 않다. 만약 더 기교를 부릴 수 있다면 지금까지 남자가 존재한 모든 쇼트에서 사각과 폐쇄된 느낌을 강조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새로 등장한 남자2에게 폐쇄된 느낌과는 정반대의 가볍고 경쾌한 느낌을 줄 수도 있을 것이다. 그에게 아디다스 모자를 씌어줄 수도 있고 다리가 길고 표정이 환한 남자 배우를 캐스팅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남자2는 가방을 내려놓는다.

  털썩 소리가 남자의 고개를 들게 한다. 왔어? 남자2는 말했다. 오래 기다렸어? 남자2의 목소리를 따라 남자의 목소리도 커진다. 이곳은 카페고 알지 못할 음악이 항상 배경으로 깔려있어서 너무 작게는 이야기 할 수 없다. 뭐하고 지내? 그냥 그렇지 뭐.

  남자2의 가방엔 dvd 타이틀이 몇 개 들어있다. 영화가 그렇게 좋아? 보는 게 재밌으니까. 남자는 나머지 대답을 속으로 삼킨다. 영화가 재밌는 게 아니라 본다는 것 자체가 재미있으니까. 보면서 능동적으로 생각하는 게 재밌으니까. 어떤 사람들은 문자를 능동적으로 읽는다. 마찬가지로 어떤 사람들은 능동적으로 영화를 확인한다. 영화나 소설을 능동적이고 수동적인 것으로만 해석할 순 없지만, 분명 그 범주에 들어가는 사람이 존재한다. 남자는 남자2가 가져온 dvd들을 확인한다. 부탁했던 목록 그대로다. 오손 웰즈, 카메론 크로우, 키에슬로부스키, 허샤오시엔, 스즈키 세이준. 노트북 좋다, 남자2가 말한다. 이거 dvd도 돼지? 그래. 이걸로 dvd 본적 있어? 아니, 화면이 작아서, 남자는 화면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모니터, 스크린, 브라운관, 화면, 프레임이 작아서, 일수도 있지만 남자에게는 화면이 작다. 남자는 남자2가 준 dvd 타이틀을 열어본다. 플라스틱 상자 안에 플라스틱 원반이 있다. 그 안에 디지털 코드가 있고 많은 기계들이 그것을 아날로그로 재현해 낸다. 그래서 그 안에 영화가 담겨있다. dvd의 안에. 그것은 노트북의 안으로 옮겨질 예정이다. 플라톤이 봤다면 그것이야 말로 이데아의 실현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남자는 플라스틱 원반을 플라스틱 노트북 안에 넣고 프로그램으로 플라스틱 안의 디지털 코드를 열어 영화가 화면을 통해 세상으로 나오도록 한다. 남자는 영화를 본다. 남자를 통해 세상으로 영화가 나온다. 영화가 시작한다.

  그러니까 이건 이런 이야기이다. 영화를 상상해보자. 요즘엔 글자보다 이미지가 더 잘나간다. 술집을 하나 상상하라. 텅 빈 술집을. 얼마나 사람이 텅 비었는지 종업원이 지겹다 못해 하품을 할 지경이다. 그곳에서 남자가 혼자 술을 마신다. 남자는 종이를 한 장 앞에 두고 앉아 있다. 남자는 천천히 모서리를 만진다. 남자는 종이의 모서리를 찢어 입에 넣는다. 종이는 직사각형에서 다각형으로 변한다. 남자는 펜을 들어 종이에 직사각형을 그려 넣는다. 그리고 안에 글자를 적는다, 직사각형 안에 글자가 적힌다.

  그리고 영화가 끝난다. 영화 잘 봐라. 남자2는 말한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남자는 프로그램을 닫는다. 영화는 사라진다. 디지털 숫자로 변화되어 노트북 하드의 어느 메모리 안에 사라졌다가 사라진다. 프레임은 닫힌다. 남자는 마우스를 부지런히 움직여 윈도우를 닫는다. 노트북이 꺼진다. 노트북이 닫힌다. 카메라는 두 남자를 비껴 창문을 빠져나온다. 어디선가 불이 꺼진다. 어디선가 도시로 그림자가 날아든다. 도시가 잠시 네모나다는 착각에 빠질 때 쯤 도시는 어둠에 잠긴다. 지구는 둥글다. 지구는 태양의 그림자로 숨어든다.

  그리고 다시 남자의 눈동자, 마치 2001년 우주오딧세이처럼, 태양이 남자의 눈동자로 클로즈업 되고 남자는 창밖을 보고 있다. 그 눈동자는 vhs를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영화 티켓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르고 피디박스와 폴더플러스와 이동키와 당나귀와 프루나를 떠돌던 불법 동영상들을 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 눈은 글자를 읽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지금 그 눈은 창밖을 보고 있다. 그는 창밖을 보면서 자신만의 영화를 상상하고 있다. 그게 무슨 영화인지는 당신 마음대로 상상하라, 어차피 당신의 영화이니까. 어느 것이 어느 쪽을 바꾸는지는 모른다. 그런 것 생각하기 좋아하는 철학자는 정의내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모른다. 이제 남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카페를 나온다. 그는 헤드폰을 끼고 길을 걸어간다. 그의 주변으로 수많은 상표가 덤벼든다. 그의 주변으로 수많은 이미지가 덤벼든다. 길은 안에서 밖으로 뒤집어져 있다. 달은 마치 검은 벽에 뚫린 구멍 같다. 들리는 모든 소리는 남자의 귀 안으로 침범하려고 하는 듯 자극적이고 도발적이다. 프레임만 남는 이미지들. 세상을 연결하는 빛의 속도로 연결하는 이미지들.

  남자는 집으로 돌아온다. 다시 부지런히 노트북을 켜고 DVD 타이틀을 꺼낸다. 그중 하나를 노트북에 넣어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영화가 시작한다. 네모난 프레임을 남자가 응시한다. 프레임 안으로 종이가 보인다. 흰 A4 종이, 네모나고 반듯하다. 남자는 종이를 바라본다. 그러니까 이건 이런 이야기이다. 종이에 이렇게 씌어있다. 『종이 바깥의 영화』.



주1) 절대 따라하지 마세요.
mirror
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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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07.01 10:35 댓글 수정 삭제
    작중 종이, 작중 종이를 둘러싼 공간의 이미지, 작중 종이 속의 이미지, 작품이 실려 있는 종이의 안팎. 저도 그 종이 안팎의 연쇄로 우주를 붕괴시키려고 시도한 적이 있었는데, 사실 아직도 하고 있구요. 밀고 나갈 여지가 많아 보여요. 일종의 과제랄까. 과업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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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린 06.07.02 00:08 댓글 수정 삭제
    배명훈님의 글도 기대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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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yunn 06.07.02 10:22 댓글 수정 삭제
    이건...아니, 이것도 에셔의 그림이 떠오르는 글이네요.
    눈을 빛내며 읽다가 후반부에 살짝 집중의 끈을 놓치긴 했지만(이유는 나중에 다시 읽으면서 생각해봐야 할 것 같군요), 재미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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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07.03 11:28 댓글 수정 삭제
    그..그런데요.. 로비님이 콜린님이신 건가요?

    첫화면에는 로비라고 떠있는데 들어와 보니 콜린이라고 떠있네요 =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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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6.07.03 11:47 댓글 수정 삭제
    중첩된 뫼비우스의 띄를 정신 없이 걸어다닌 느낌이에요. 정말 yunn님 말처럼 에셔의 그림이 떠오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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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린 06.07.05 18:40 댓글 수정 삭제
    로비로 지내다가 얼마전 이름을 바꿨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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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기 06.09.06 21:55 댓글 수정 삭제
    옛날에 문근영대통령과 로보트 연재하셨잖아요 완결 났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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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람별빛 07.01.28 17:42 댓글 수정 삭제
    오타 발견했어요. ^^;
    마지막 줄. 남자는 종이를 보라본다. -> 바라본다 아닐까요?
    그렇지만 너무 멋있는 글이엇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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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irror 08.11.06 03:46 댓글 수정 삭제
    바람별빛/ 오타 수정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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