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곽재식 극기

2022.07.31 20:5407.31

 


극기(極器)

 

고조선 말에 <<신지비사>>에 깊이 빠진 학자들이 많이 나타났다. 땅을 살펴 보고 길을 내고 성벽을 쌓고 집을 짓는 일에 대단히 밝은 인물로 신지라는 사람이 있었다고 하는데, <<신지비사>>는 그가 남긴 이야기를 모아 놓은 것이었다. 사람들은 <<신지비사>>를 살펴 보면 사람이 어디서 어떻게 살아야 잘 살 수 있는 지 알 수 있다고 생각했고, 특히 나라를 다스릴 때에 어떻게 하면 더 재물이 넉넉하고 더 병사가 싸움을 잘 하도록 할 수 있는 지 알 수 있다고 여겼다. 학자들 중에는 <<신지비사>>의 깊은 뜻을 깨우치면 세상 모든 사람들이 평안하게 살 수 있도록 할 수도 있다고 보았다.

학자들이 <<신지비사>>에서 가장 좋아한 내용을 나라를 저울에 비유한 대목이었다. 학자들은 아침에 일어 나면 이 구절을 읊었고, 자기 전에도 이 구절을 말했으며, 하루에도 몇 백 번 씩 이 구절을 외었다. 그러면서 그 숨은 뜻을 알아 내려고 했다.

“나라를 저울에 비유하자면, 저울대는 부소(扶疏)이고, 저울추는 다섯 가지 덕을 갖춘 땅이며, 저울머리는 백아강(百牙岡)이다.”

이 중에 부소와 백아강은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다섯 가지 덕을 갖춘 땅이라는 것은 어렴풋이 무슨 말인지는 알 수 있었다. 그러므로 <<신지비사>>에 빠진 학자들 중에는 다섯 가지 덕을 갖춘 땅에 대해 따지며 공부하는 사람들이 가장 많았다. 그에 비해 부소를 따지는 학자들은 적었고, 백아강이 무슨 말인지 알아 내려는 학자들은 거의 없었다. 오직 몇 안 되는 학자들이 모여 있을 뿐으로, 무리의 숫자가 가장 적은 백아강에 대해 이야기하는 학자들을 대개 백아강파라고 했다.

학자들은 저울의 비유에 대한 풀이를 두고 누구의 말이 옳은 지 서로 다투었다. 그러다가 저울의 비유를 풀이한 내용에 따라, 어느 곳에 성을 쌓을 지, 어느 곳에 궁궐을 지을 지, 어느 곳을 나라의 서울로 삼을 지를 정해야 한다는 말을 믿는 사람의 숫자가 점점 늘어 나는 시절이 오기도 했다. 그러니, 온 나라 곳곳의 장군과 대부들은 서로 자기 땅이 좋은 곳이라는 뜻풀이가 옳기를 바랐다. 그래서 세력이 있는 사람들은 학자들에게 재물을 주거나 귀한 자리를 내어 주며 자기 땅에 좋은 뜻이 되는 저울의 비유를 풀이하는 방법이 나타나도록 학문을 이끌어 달라고들 했다.

그러던 가운데 가장 세력이 약했던 백아강파의 제자 중에 극기군(極器君)이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극기군은 학식이 깊고, 말하는 것이 명쾌하여 그 어느 학자들보다도 재주가 뛰어 났다. 백아강파에 속하지 않는 제자들 조차도 극기군의 말을 들으면,

“저 학자는 생각이 깊고 말을 잘 하는 것으로는 우리 보다 몇 백 배는 낫다.”

고 할 정도였다.

특히 극기군이 한 이야기 중에, 학자들이 가장 많이 따지던 다섯 가지 덕을 갖춘 땅에 대한 내용은 많은 사람들을 탄복하게 했다.

“다섯 가지 덕이란 무엇인가? 첫번째는 물의 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니 강물이 가까이 있고 우물을 파기 좋은 땅이 사람이 많이 살기 좋다는 뜻이다. 두번째는 나무의 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니 숲이 우거져 있는 땅이 좋다는 뜻이다. 세번째는 쇠의 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니 가까운 곳의 산에서 구리나 금을 캘 수 있는 곳이 있으면 좋다는 듯이다. 네번째는 흙의 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니 땅이 비옥하여 농사 짓기 알맞은 곳이면 좋다는 뜻이다. 다섯번째는 불의 덕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니 불을 잘 다루어 그릇을 굽거나 숯으로 쇠를 다룰 수 있는 재주를 가진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 좋다는 뜻이다. 이런 곳에 나라의 무게가 실려야 모든 일이 잘 풀린다.”

극기군의 말이 옳다고 생각해서 그런 땅을 찾아 다닌 사람들은 곧 큰 재물을 얻고 부유해졌다. 

그러자, 적지 않은 사람들이 극기군에게 배우고 극기군의 말을 따르면 잘 살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곧 부유한 사람들이 아름답게 꾸미고 백아강파를 찾아 와서 극기군의 말을 듣고 백아강파의 학문을 익히기를 바라게 되었다. 

그래도 극기군의 말을 직접 듣기는 쉽지 않았다. 

극기군은 때때로,

“재물을 많이 벌고, 오래 살면서, 편히 지내는 법은 이미 다섯 가지 덕을 밝히며 다 이야기 했는데, 또 무엇을 말하고 배울 것이 있겠는가?”

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극기군과 백아강파에서 무엇이라도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은 꾸준히 모여 들었다. 오랜 세월 극기군의 말을 듣기 위해 애쓰던 사람들 중에는, 어느새 그러던 중에 삶과 죽음의 어려운 일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는 사람들도 나왔다. 그 중 어떤 사람들은 원래는 더 큰 재물을 모으기를 바라는 부자였던 사람이 갑자기 삶에 대해 완전히 다른 생각을 하게 되어, 모든 재물을 그냥 주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기도 했고, 어떤 사람은 갑자기 입고 있는 값비싼 옷을 원수와 같이 여기며 벗어서 불태워 없애기도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극기군의 학문은 더욱 더 깊어졌다. 백아강파의 다른 제자들은,

“이제 극기군이 학식을 익히는 것이 조금만 더 높아지면, 저울에 비유하는 말을 모두 다 깨우쳐 온 세상을 평안하게 만들지 않겠는가?”

라며 기뻐할 정도였다. 극기군 역시, 그러한 말에 힘을 얻어,

“이제 그 모든 뜻을 다 풀이할 수 있을 때까지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으니 답을 얻을 때까지 게을리하는 것 없이, 더욱 열심히 애쓰겠습니다. 이제 저는 곧 모든 것을 깨우치는 깊은 깨달음을 얻을 것입니다.”

라고 벗과 스승에게 말했다. 

그렇게 해서 극기군이 밤과 낮을 따지지 않고, 먹는 것과 물 마시는 것조차 잊으며 세상과 삶에 대해 가장 깊게 생각했다. 그렇게 힘을 다해 점점 더 많이 애를 쓰는 것이 며칠이고 이어졌다. 극기군이 너무 배가 고프거나 힘이 들지 않을까 싶어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을 정도였다.

극기군을 따르던 어느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그러다가 몸을 상하여 목숨을 잃으면 어쩌러고 그러십니까?”

라고 이야기하며 걱정하여 울며 매달렸으나, 극기군은 그저 눈을 감고 손을 저으며,

“이제 조금만 더 하면 답을 얻을 것 같은데, 어찌 멈추겠습니까?”

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더니 “나라를 저울에 비유하자면, 저울대는 부소이고, 저울추는 다섯 가지 덕을 갖춘 땅이며, 저울머리는 백아강이다.”라고 빠르게 여러 차례 중얼거리더니 다시 깊이 생각할 뿐이었다.

그런데 그만 그러다가 극기군은 실성하고 말았다. 

백아강파의 다른 제자들이 극기군을 찾아 가 말을 물었을 때, 극기군은 도무지 알아 들을 수 없는 말만 거듭해서 말했다.

“왜 그러는가? 정신을 차리게.”

사람들이 반복해서 극기군을 다그치자, 갑자기 극기군은 눈빛이 변하고 이상한 말을 했다. 그리고 나서는 도저히 입에 담을 수 없는 흉칙한 말을 하였다. 그런가 하면, 결코 맞을 리가 없는 이야기를 옳지 않냐고 하더니 온갖 무섭고 두려운 말을 줄줄 늘어 놓기도 했다. 그러므로, 극기군 곁에는 도무지 사람들이 있을 수 없을 지경이었다.

백아강파의 제자들은 모여서 눈물을 흘리고 가슴을 치며 안타까워 하였다.

“극기군이 우리의 자랑이라고 그렇게 많이 이야기를 했는데, 이제 극기군이 온 정신을 잃었으니 이제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다른 학자들에 비해 우리 백아강파는 세력이 작아서 불리한 것이 많았는데, 극기군 덕택에 우리도 세력을 키울 수 있다고 즐거워 했는데, 지금 극기군이 이렇게 되었으니, 우리는 다시 쪼그라들어 영영 작은 세력으로 망해 갈 수 밖에 없으니 이와 같이 안타까운 일이 있겠습니까?”
“극기군이 저렇게 되었다는 말이 퍼지면, 이제 누가 우리의 학문을 따르려 하겠습니까?

하루 이틀 날이 지나자, 극기군이 나쁜 말을 하고 사람들이 싫어 하는 짓을 하는 것은 점점 더 심해졌다. 그러니 나중에는 백아강파의 제자들이 도저히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옛 말에 큰 것을 위해서는 작은 것은 버릴 수 있다고 했으니, 이렇게 우리가 힘겨워질 바에야, 극기군의 목숨을 빼앗아 없애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그런데 사람의 목숨을 빼앗는 것은 큰 죄이니 어찌 그런 짓을 저지를 수 있겠습니까?”
“비록 극기군이 온 정신이 아닌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일이 장군이나 대부에게 알려지면 우리는 사람을 죽인 죄를 받아 큰 벌을 받을 터이니, 그것이 두렵지 않습니까?”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어, 이야기가 마무리 지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밤 새 백아강파의 제자들은 한숨을 쉬고 또 눈물을 흘리며 서로 의논하였다.

마침내 다음날 아침이 되어, 제자들은 뜻을 모았다.

“극기군을 작은 방에 가두어 두고, 바깥과는 통하지 않도록 하여, 말을 하지도 듣지도 못하게 막아 두고, 다만 작은 구멍으로 밥만 매일 넣어 주도록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렇게 해서 극기군은 산 기슭으로 올라가는 으슥한 길, 그늘 진 곳 끄트머리에 보이지 않게 지어져 있는 작은 방에 갇혔다. 그 방은 모든 곳이 다 꼭꼭 막혔으니, 그 안에 갇힌 극기군이 무슨 말을 하는 지, 바깥에서 나는 소리가 얼마나 극기군에게 들리는 지도 아무도 알 수 없었다. 가끔 극기군이 그 안에서 무슨 일을 하는 것 같다, 어떻게 지내는 것 같다는 생각을 품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생각하면 두려워서 갇혀 있는 극기군이 무엇을 하려는 지 다들 더 따지려 하지 않았다.

한참 후의 어느 날, 문득 백아강파의 한 제자가 극기군이 갇힌 방에 넣어둔 밥이 줄어들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백아강파의 모든 제자들은 그 방 안에서 무슨 일이 생겼다는 것을 알았다. 그들은 모여서, 이 일을 어찌 할 지 하루 내내 의논했다.

“극기군은 처음부터 온 정신이 아니었는데, 그렇게 방 안에만 갇혀 있었으니 더욱 정신이 이상해졌을 것이 분명하지 않겠습니까?”
“그와 같은 사람이 그 만한 시간 동안 혼자 갇혀 있었는데, 지금은 죽은 것 아니겠습니까?”

긴 이야기 끝에, 결국 모든 제자들이 다같이 모여서, 다같이 극기군의 방을 활짝 열어 젖히고 그 안이 어떻게 되었는 지 보기로 하였다.

마침내 사람들이 모여 극기군의 방을 열어 보았다.

어찌된 일인지 방 안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정갈한 텅빈 방 바닥에는 다만 글귀가 하나 적혀 있었다. 그것을 알아 볼 줄 아는 사람이 읽어 보니 그 뜻은 이러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 넓은 곳을 놓아 두고 왜 그렇게 작은 곳에서 지내고 있는가?” 


- 2022년, 서초에서

댓글 4
  • No Profile
    윤새턴 22.08.02 20:23 댓글

    더운 날에 섬뜩한 미스테리 감사합니다. 잘 읽었습니다.

  • 윤새턴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22.08.31 23:21 댓글

    언제나 말씀 감사합니다!

  • No Profile
    지라엘 22.08.06 23:14 댓글

    고조선의 풍수지리학자 같은 걸까요? 그러고 보면 작가님은 고조선을 배경으로 하는 단편도 제법 많이 쓰시는 것 같아요. 극기군은 어디로 사라졌을까요?어쩌면 정말로 범인은 이해하지 못할 무언가를 깨우치는 득도의 경지에 오른 걸지도요.

  • 지라엘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22.08.31 23:21 댓글

    잘 보셨습니다. 나중에 풍수 문화가 발달한 후에는 신지, 또는 신지비사 를 한국 풍수의 옛 대가처럼 보는 이야기도 꽤 돌았던 것 같습니다.

분류 제목 날짜
곽재식 극기4 2022.07.31
곽재식 소설 쓰다 그만두는 이야기3 2022.08.31
곽재식 소원의 정복자2 2022.09.30
곽재식 우주선 유지 장치 특별 프로그램2 2022.10.31
곽재식 백투 유령여기 X2 - 자주 묻는 질문(FAQ) 2022.12.01
곽재식 한산북책 2023.01.01
곽재식 치트키 2023.02.01
곽재식 나의 기쁨 2023.02.28
곽재식 셜록GPT 2023.03.21
곽재식 천장의 공포 2023.04.30
곽재식 동부여 2023.06.01
곽재식 일곱 별의 숨결을 흙으로 빚은 몸에 불어 넣어 2023.07.01
곽재식 서하 2023.08.01
곽재식 인공지능 때문에 인류 멸망한 이야기 2023.09.01
곽재식 해탈의 길 2023.10.02
곽재식 심연의 이치 2023.10.31
곽재식 제호 2023.12.02
곽재식 나비 혁명 2024.01.02
곽재식 너 때문이거든 2024.02.03
곽재식 하찮은 묵시록 2024.03.01
Prev 1 ... 4 5 6 7 8 9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