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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신비한 사랑의 묘약

2006.06.03 01:5906.03

1.

학교에 들어온 첫 해에 나는 박은영 선배를 만났다. 박은영은 "포도밭은 영원히"라는 음악동아리의 4학년 학부학생이었다. 대학에 처음 들어갔을 때, 낯선 도시의 외딴 교외에 위치한 학교에서 나는 외로움과 무료함을 느꼈다. 알고 있던 친구라고는 없었고, 뭐가 뭔지 몰라서 공부하느라 바빠야 한다는 것도 몰랐다. 나는 어떻게 아는 사람이라도 만들고 뭔가 놀고 시간 보낼 기회라도 얻고자 "포도밭은 영원히"의 신입 오디션을 보러 갔다.

컨테이너 가건물로 된 음침한 곳이 그들이 말하는 "동아리방"이라는 곳이어서 일단 실망을 했다. 그리고 말이 오디션이지 가기만 하면 무조건 신입회원이 될 수 있다는 것도 단번에 알아차리면서 더 깊이 있는 엉성함을 느꼈다. 여드름이 많은 동아리 회장이 소개하는 동안 그곳에 모인 사람들이 부르는 노래라는 것이 영원히 "여행 스케치"와 "Real Group"을 따분하게 따라는 것임을 알게 되었고, 곧 이곳에 있는 사람들과는 뭔가 어울리기 쉽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화장실 가는 척 하면서, 그냥 다른 동아리로 나갈까 하는 차에, 나는 박은영 선배를 보았다. 그녀는 초록색 눈동자가 단 번에 눈에 뜨이는 사람이었다. 그녀의 눈빛은 텅빈 듯 하면서도 무척 깊어 보였다. 검은색으로 염색을 했지만 언뜻언뜻 원래 색깔인 금발이 드러나는 머리칼도 멋져 보였다. 그녀는 그녀의 친구들과 가볍게 웃으면서 이야기를 했고, 그녀 주위에는 3명 정도의 남자 대학원생들이 "동아리 선배"임을 들먹이면서 쉼없이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뒤에 앉아서 그녀가 나누는 대화를 가만히 들어 보았다. 그러던 중, 나는 그녀가 오디션에서 노래를 부르는 신입생을 평가하는 기준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이 "포도밭은 영원히"에서 4년간 공연을 하고 노래 연습을 하면서, Carpenters와 비슷한 노래는 좋고 그렇지 않은 것은 안좋다라는 고정관념을 이성으로 복종하게 된 듯 하였다. 옳다구나 싶었다. 나는 고등학교 축제 때에 "Please Mr. Postman"을 죽어라 연습한 적이 있었던 것이다.

나는 노래 솜씨가 굉장하다고 하기에는 거리가 멀었지만, The Beatles의 노래대로 "Please Mr. Postman"을 부르는 것에는 끊임없는 연마를 통해 쌓인 경험이 있었다. 더군다나, Carpenters와는 전혀 다른 그 강렬한 리듬감과 뒤틀리는 구성진 소리는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들이 꽤 좋아하던 것이었다. 록으로 흘러가면 "Somebody To Love"요, 재즈로 흘러가봐야 "Dream A Little Dream Of Me" 정도일 고만고만한 노래만 지겹게 반복하는 이 동아리에서, 분명 박은영 선배는 신선한 느낌을 받을 것임에 틀림없었다.

박은영 선배는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박수를 치며 오디션에서 내가 부르는 노래에 감격했다. 그리고, 오디션이 끝나고 신입생들과 재학생들이 학교 근처 술집에서 한 잔 하는 자리에서, 그녀는 나에게 말을 걸어 왔다. 그녀는 어머니가 우즈베키스탄 계였는데, 나는 고등학교 때 웃긴 농담의 달인이라서 내가 잘 따르던 선배도 우즈베키스탄 계였기에 거기에 대한 몇 가지 즐겁지만 거슬리지 않을 만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녀는 반가워 하면서 더 재미있는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고, 새벽 1시인가 2시인가가 되어 기숙사로 모두가 헤어져 돌아가게 되었다. 나는 기숙사로 돌아와서는 역시 기숙사 침대에 누워있을 그녀에게 전화를 걸어서 좀 더 안부를 묻다가 내일 저녁에 학교 근처에 맛있는 음식점 좀 소개해 달라는 것으로 데이트 약속을 잡았다.

그리하여 나는 박은영 선배와 같이 다니게 되었다. 한 2주일 쯤 지났을 때, 나는 정말 정신을 못차릴 정도로 그녀에게 푹 빠지게 되었다. 우리는 별 하는 일도 없이 학교 벤치 어디 한 켠에 앉아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입을 맞추고 서로의 손길을 느끼면서 세 시간이고 네 시간이고 해가 지고 밤이 새도록 시간을 보내곤 하였다. 둘 다 기숙사에 사는 형편이니 우리는 아침에 일어나서 서로에게 안부를 물었고, 같이 아침을 먹고,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고, 놀고, 공부하고 잠자리에 들었다.

어차피 썰렁한 도시의 교외에 위치한 학교였고, 학생들의 생활이란 뻔한 것이었다. 우리는 항상 언제나 같이 붙어 다녔다. 그래서 따지고 보면 우리가 같이 지내는 시간이란 약혼한 남녀나 부부가 같이 지내는 시간보다도 훨씬 더 긴 편이라 할 수 있었다. 그렇게 항상 같이 다니면, 너무 지겹고 서로가 서로에게만 너무 메이게 되는 것이라서 답답할 수 있지 않겠냐... 하는 학설을 이제 좀 친해진 룸메이트가 제기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완전히 금발을 드러낸 그녀가 내 목을 팔로 감아 안을 때 따뜻한 입김이 와 닿아 보라지. 그런 식으로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다.

그렇게 1년이 지나가고, 나는 미적분학 과목을 배우다가 내가 다양한 미분과 적분에 재미를 느끼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학부안에서 학과를 결정해야 할 시기가 왔기에, 나는 애초에 수학과나 해석학과를 들어가려고 생각했다. 두 학과의 정원은 4,5명 정도였는데 그런데, 공교롭게도 24시간 온라인 게임과 에로 영화의 심해에서 잠수해 있는 학생들 8,9명 정도가 지원을 하고 나섰다. 나는 그 심해의 축축하고 그늘진 분위기에 휘말릴 듯하여, 두 학과를 피하기로 결심했다. 그리고 미분과 적분의 재미가 활용될만한 다른 학과를 알아 보았다.

전산유체역학과와 확산학과가 만만해 보였다. 둘 다 주로 공장에서 사용되는 여러가지 물질의 이동과 흐름을 계산하고 짜맞추는 학과들이었다. 박은영 선배의 전공이 전산유체역학이었고, 나는 공부나 전공에서 여러모로 애인과 비교되는 것은 관계에 문제를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기에 전산유체역학과가 아닌 확산학과로 들어갔다. 예상대로 확산학과에서 나는 그럭저럭 잘 자리잡을 수 있었다.

"군대에 빨리 갔다오는게 좋아."
"어영부영하다가 군대 가기 귀찮아져서 대학원 입학하는 것만큼 멍청한 일도 없다."
"병역특례, 대학원 이런거 요즘에 하는 거 미친짓이야. 어서 군대나 갔다와."

확산학과의 선배라는 이들은 위와 같은 충고를 나에게 해 주었다. 대학원에 들어간 뒤에 병역특례를 받아서 전문연구요원으로 복무하는 것이 공부를 하는 사람에게는 더 유리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국내 대학원에 가는 짓은 멍청한 짓이라고 했다. 공부를 더 하고 싶으면 차라리 유학을 가라고 했고, 유학을 가려면 군대를 먼저 다녀 오는 편이 신분이 편해진다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나는 입대했고, 어쩌다보니, 서해5도에 배치되게 되었다. 군대에 들어간 첫 얼마동안은 내용은 짧았지만, 끝없는 그리움으로 절절히 이어진 그녀의 편지가 나에게 배달되었다. 그 짧은 편지는 나에게 얼마나 큰 감동이었던가. 맨날 섬 구석 바위틈의 더럽게 추운 초소에 갇혀 밤마다 벌벌 떨 때에, 차가운 강철 총신을 붙잡고 세상의 매정함과 잔인한 무례함에 좌절할 때에. 그 때 그녀가 보낸 편지는 읽고 또 읽어도 읽을 때마다 눈물이 흐르는 따뜻한 인정의 품 그 상징이었다.

그런데, 편지의 내용은 올 때마다 조금씩 짧아 지더니 어느덧 더 이상 서해를 건너지 않게 되었다. 곧, 나는 그녀가 "미안해. 항상 너답게 밝고 쾌활한 웃음 잃지 않길 바래" 어쩌고 하는 이별 통보를 받았다.

황당했다. 슬프지도 않고, 놀랍다기 보다는 왠지 좀 억울했다. 나는 백령도, 대청도, 소청도, 연평도, 소연평도, 북위 37도35분 38도03분 사이에 갇혀 있었기에 도무지 무슨 일이 어떻게 일어 났고, 도대체 그녀가 왜 나와 헤어지려 하는 지 아무것도 알 수 없었다. 아니 도대체 왜. 왜 이렇게 외롭고 한없이 바다 저편을 그리워 하는 이 시국에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기는 것인지. 뭐가 어떻게 되어서 이렇게 되었는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아아. 빛나든 옛 맹서는 김치냉장고에 들어간 액체질소통 속의 드라이아이스처럼 차디찬 띠끌이 되어 황사처럼 서해에 흩날려 날아가버리고 있었다. 나는 배반감을 느꼈다. 긴긴 밤 내 귀에 속삭이던 그 사랑한다는 말들은, 우리가 같이 미래를 상상하며 즐거워 하고 장난치던 추억들은. 그건 다 어디에 녹아나고. 도무지 영문을 알 수 없는 뜬금 없는 이별이란 말이냐.

술먹고 나서, "역시 내가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라고는 우리 동아리 사람들 밖에 없어"라면서 떠들어대지만, 사실은 나의 그녀에게 어떻게 수작 부리려고 동아리 모임 때마다 찾아오는 3명의 대학원생 선배들. 그들의 농간이었을까. 혹은, 열 몇달 먼저 태어나고 늦게 태어나는 것이 인생에 뭐 그렇게 엄청난 일이라고, 나이가 적은 남자를 만나는 것의 저주에 대해 항상 설파하는 그녀의 친구들의 이야기에 홀린 것 때문이었을까. 도저히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휴가를 나와 학교에 가보니, "포도밭은 영원히" 동아리는 이번 공연을 "여행스케치"풍으로 할지, "Real Group"풍으로 할지를 두고 싸우고 있었다. 그것도 치열한 논쟁과 갑론을박이 이어지는 토론이 아니라, 항상 실실 웃으면서 눈치만 보고 슬슬돌려 말하면서 불편한 기색만 서로 표출하다가, 나중에 헤어지고 나면 서로서로 파당을 지어 모여서 상대방에 대해 끝없는 욕을 하며 밤을 지새는 한심한 싸움이었다. 나는 마지막으로 그녀를 만나 다시 한 번 우리가 정말로 헤어진 것임을 확인당하고, 미련 없이 동아리를 때려치웠다.

그것이 첫번째 였다.


2.

학교에 들어온 지 3년째 되던 해에, 나는 권보라를 만났다. 권보라는 전산유체역학과의 4학년 학부학생이었다. 사람 얼굴 별로 보지 못하고 섬에 갇혀 있느라, 여전히 별 생각을 못하고 갑작스런 헤어짐에 멍할 무렵이었다. 나는 박은영이 별로 그럴듯하지도 않은 한심한 녀석과 다시 사귀고 다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나는 내가 그녀와 했던 여러 일들을 바로 그 한심한 녀석이 같이 하고 다니는 것을 백령도의 별이 빛나는 밤마다 무수히 상상하게 되었다. 나는 괴이한 보복심리에 불타, 뭔가 한 방의 역전 펀치를 날리고 싶었다.

나는 그녀가 쉽게 알아챌 대상을 선정했다. 그리하여 전산유체역학과의 학생들을 살펴 보았다. 전산유체역학과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의 선망을 받는 여학생이 바로 권보라였다. 그녀는 새하얀 피부와 가라앉은 차분한 작은 목소리,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아주 많은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신비한 눈빛이 매력적"이라고 소문난 학생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녀에게 구애 했지만, 결코 제대로 먹힌 적이 없이 매정한 거절만 주변에 쌓여 나갈 뿐이었다.

"권보라와 만난다는 소문과 사진이면 화려한 맞서기로 충분하리라."

나는 비장한 각오를 다졌다. 그리고, 서해5도의 바닷바람 속에서 이틀에 한 번 꼴로 출몰하는 공산당들의 전함을 보며, 여러모로 수단을 궁리했다.

시간은 매우 짧았다. 짧은 휴가 기간만이 주어진 시간이었다. 그러나, 불쌍한 병사의 끓어오르는 가슴을 하늘도 아셨는지 기회가 좋았다.

권보라는 많은 남자들을 거절해 왔지만, 사실 거절한 남자들 중에서도 두 명 정도는 어느 정도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럴듯한 재즈 고전 연주로 인기가 많던 동기 학생 하나와, 몹시 명석한 전산 유체역학 실력과 그 명석함에 걸맞는 날카로운 농담들이 유쾌한 선배 하나 였다. 그러나, 그녀가 약간의 우위를 차지하기위해 두 남학생을 거절한 틈을 타, 권보라의 가장 친한 고등학교 동문 친구가 재즈 동기 학생과 맺어져 버렸다. 그리고 그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권보라의 룸메이트가 똑똑한 선배와 만나게 된 것이다.

현재 권보라는, 절친한 두 친구가 애정행각의 대잔치를 옆에서 불태우고 있는 통에, 그것도 은근히 마음에 두던 두 사람이 엮인 탓에 꽤 싱숭생숭한 마음일 것이다. 그러면서,

'나만 애인 없는 사람으로 궁상맞게 남겨지는 건가'

하면서 쓸쓸해 할 지도 모를 일이다. 놓쳐서는 안되는 기회였다.

적화통일 만큼이나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 "군대에서 공부하기"라지만, 나는 그 기회를 노리고 프랑스 현대 철학으로 남북한 대치 문제를 조명하는 다소 기이한 분야를 부단히 연마했다. 나는 그것을 위해서, 서양철학을 통째로 공부해야 했고, 한국 현대사와 거기에 얽힌 다양한 인맥, 사조, 세계 정세를 무척이나 심도있게 익혀야 했다. 서해의 용왕도 감복했는지, 부단한 나의 노력 탓에 이러한 학문 연마는 나날이 가치를 가졌다.

휴가를 받아 다시 섬에서 나온 날. 나는 재학생이요, 수강생인척 하면서 그녀가 듣는 교양강의에 몰래 들어 갔다. 그 "세계현대사 연구" 수업에서 나는 그녀와 다른 조에 속해서 그녀와 긴 토론을 펼쳤다. 겉으로는 말 하지 않아도, 그녀는 스스로가 세계 제일의 냉철한 중립성과 똑바른 사회관을 가진데 대한 자부심이 엄청난 사람이었다. 나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그녀의 그러한 자부심을 살짝 추켜 세워 주면서도 은근히 내 비장의 무기인 "프랑스 현대 철학으로 남북한 대치 문제 조명하기"를 버무렸다.

토론은 흥미진진하게 한참 이어졌다. 그녀는 남들과 심각한 이야기를 길게 하거나, 남 앞에 나서서 발표한다면, 자신의 철두철미한 멋이 꺾일 위험이 있기에 그런 일은 피하는 성격이었다. 그러나, 어느 새 토론의 흥미로움에 그녀는 그 저항선을 넘었고, 이내 내가 엮인 그 대화에 깊이 빠져들었다. 결국 그녀와 나는 강의 이후에도 이야기를 좀 더 하면서, 다음 강의의 과제를 같이 준비해 보기로 마음을 맞추었다.

그 후의 만남에서 자연히 나는 재학생이 아니라 군인임을 드러냈다.

"그런데, 강의에는 왜 들어 왔어?"

그녀의 물음에, 나는 몇마디 준비해 놓은 대사와 함께, 계산 대로 옆에 뒹굴고 있는 피아노를 붙잡고, "Tea For Two"를 연주했다. 당장 다음 날 나는 백령도로 돌아가야 했기에, 그러한 고백의 결과가 조마조마하게 궁금했다. 그런데, 그녀는 아무래도 주변 두 친구에게 맞설만한 대항마가 필요했든지 나와 좀 더 연락하고 만나보겠노라 답을 주었다.

수십일만에 휴가 때 잠깐 씩 얼굴을 볼 수 있었기 때문인지, 그 짧은 휴가 며칠 동안 우리는 정말 많은 일을 하고 다녔다. 그러한 시간 제한 때문에, 우리는 좀 모험적인 일들을 벌이기도 했고, 가끔은 남들이 욕할만한 과격한 행동들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우리에 대한 소문들은 좋은 소문과 안좋은 소문이 함께 널리널리 온 학교에 퍼져나갔다. 나는 내 의도가 적중했기에 즐거워 했다.

그녀와의 그 일탈적인 며칠씩을 겪어보니, 학과에 퍼져 있는 그녀에 대한 인상과는 오히려 정 반대가 될만큼 그녀는 그런 행동들에 적극적인 편이었다. 그녀가 환상처럼 그 외딴 연평도에 찾아와 면회를 신청했을 때, 그날 외박을 얻어 그녀와 함께 벌인 일들은 두고두고 연평도 사람들이 수군거릴 만한 소문이 될 정도 였다.

마침내 군복무가 끝나고 나는 학교에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서울에 있는 무슨 대기업에 취직한 상태였고, 우리는 주말쯤 마다 한 번씩 만났다. 좀 더 만나는 기회가 더 잦아졌다는 것 외에는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복학생이 학교에 적응하는 것은 약간의 난관이었다. 하지만, 일단 나는 확산학과 전공과목이, 모두가 싫어하는 힐버트 스페이스에서 확산 방정식 전개로 들어서자, 나는 그 난해하고 별 쓸모도 없는 내용들에 대해 저돌적인 이해력을 가진 사람으로 드러났다. 그러한 학업에서의 유리함을 발판으로 나는 복학생의 난관을 빠른 속도로 격파해 나갔다.

그러나, 막상 다시 학교생활에 익숙해지게 되자, 나는 점차 권보라가 물리적으로 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으로도 참 나와 먼 곳에 있는 사람임을 깨닫게 되었다.

우선은, 그녀의 알 수 없는 멋 부리기가 좀 낯설었다. 그녀는 도대체 무슨 책들을 어떻게 읽어온 결과일른지 몰라도,

"사람이 우울하고 약간 미친 것이 멋있다"

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그녀는 "봄날에 이처럼 날리는 꽃씨들이 결국에는 나무가 되는 것이라고는 백만분의 일이라니 너무 슬프지 않니"라는 식으로 우울해 했다. 그녀는 그러면서 스스로 슬픈 표정을 지으며 한없이 진지한 척 했다. 그러면 나는 그녀에게,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해냈니. 너는 보통 사람들과는 사물을 보는 눈이 다른 특별함을 갖고 있구나"

라고 감탄을 해 주어야 했다. 그녀는 그것을 기대했다. 내가 꾹참고, 그녀가 원하는 감탄의 말들을 들려 주면, 그녀는 짐짓 정색하며,

"그래 특이하다고? 꽃씨들을 이렇게 보고 있으면, 그렇게 우울해지는거... 당연하지 않니?"

하면서, 자신의 특이함을 당연함이라 하면서 더 특이한 척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또, 국내 굴지의 대기업에 취직했다는 사실 때문에, 과연 그녀의 능력과 지성은 사회 최고급이라는 자부심만은 서해안의 개펄처럼 끝이 없었다.

그녀는 전공시간에 배운 힐버트 스페이스의 효용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기억하고 있지 않으면서, 옛날 과학자들이 양자 역학에 대해서 재미있게 들려준 농담을 많이 읊어 대는 것으로, 자신이 신비한 현대 과학의 대부인냥 행세하려 들었다. 그녀는 최불암시리즈 보다 못한 농담을 보편성 없는 전문용어들로 대체한 소위 "전공 농담"들을 들먹이면서, "전공자만 이해할 수 있는 유머" 어쩌고 하면서 별로 웃기지도 않은 것에 한 없는 잘난 척의 웃음을 짓는 괴이함도 갖고 있었다. SF소설과 철학이 어쩌니 하면서, 어줍잖게 필립 K 딕의 아이디어를 베껴대는 SF물 평을 늘어놓는 것도 참 듣고 있기 힘들었다.

나는 계속 권보라랑 다니다가는 나까지 한없는 겉폼잡기에만 물들어서, 우울함을 잘난척으로 승화하는 대마왕의 손아귀에 붙들릴 듯한 위협을 느꼈다. 결국 나는 그녀가 "사랑을 잃은 시련을 겪는 우울함이 정말 멋지다"라는 환상에 빠져 있을 때 쯤, 아주 애매 모호하게, "우리는 잊혀졌다 다시 찾는 추억일 때에 더 아름다운 것 아닐까" 어쩌고 하면서 그녀와 헤어지자고 말했다. 그녀는 눈물을 흘렸다. 그렇지만, 나는 그녀가 속으로,

'아아, 드디어 실연의 아픔을 마음 껏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겠구나. 더군다나 이 다음에는 바로 실연의 아픔에도 개의치 않고 꿋꿋이 일어서는 의연하고 대범한 모습도 과시할 수 있겠구나'

하면서 즐거워 하고 있음을 택배로 MP3 배달 받듯 전달 받을 수 있었다.

그것이 두번째 였다.


3.

학교에 들어온지 5년째 되는 해에, 나는 채정아를 만났다. 채정아는 학교 근처의 교회에 다니는 4학년 학부 학생이었다. 학교 축제 행사에서 봉사활동을 하다가 알게 된 한 선배가 교회에서 결혼식을 한다기에 일요일날 교회에 갔다가, 마침 그 교회를 다니는 채정아를 보게 된 것이 시작이었다.

얼핏 옆으로 지나간 그녀를 본 나는, 그녀의 뒤에 서 있었기에, 결혼식 동안 계속 그녀의 뒷모습을 보고 있게 되었다. 처음 그녀에게 주목하게 된 것은 채정아가 키가 큰 편이라 쉽게 눈에 뜨였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인지, 나는 그녀의 긴 다리와 청바지를 입은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그런데, 결혼식이 끝이 날 때까지 나는 이상하게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어차피 모두가 기숙사에서 사는 손바닥만한 학교. 같이 듣는 강의가 없고, 학과가 다르다 하더라도, 벌써 입학한지 4,5년 지난 시절이니 왠만한 학생들의 얼굴은 모두가 눈에 익다. 사실 채정아도 마찬가지였다. 정확히 무슨 학과인지는 모르겠지만, 건설공학과와 동력학과가 있는 건물쪽에서 자주 보였고, 누구누구랑 자주 어울려 다니는지도 대강 기억해낼 수 있었다.

그런데, 그동안 별로 그녀에게 주목해 본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그 결혼식 동안은 그녀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그녀가 엄청나게 아름다운 미인은 아닐지라도 은근히 사람의 시선을 끄는 쉽게 말할 수 없는 멋이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그날부터는, 학교 매점이나, 학교 안의 은행, 우체국 같은 곳에서 잠깐 잠깐 그녀를 볼 때 마다 나는 그녀의 모습을 의식하게 되었다. 학교 식당의 긴 줄에 늘어서서 두리번 거리다가 밥을 먹는 그녀를 볼 때나, 깊은 밤, 어느 조교에게 숙제를 갖다 주려는지 바삐 기숙사에서 걸음을 채근하는 그녀를 발견했을 때, 나는 한참 동안 그녀에 대한 여러가지 상상을 하곤 했다.

기회는 어느 금요일 학교 강당에서 마이클 네스미스가 공연을 하던 때에 찾아 왔다. 마이클 네스미스의 공연은 그의 방한을 맞이하여, 학교 문화행사팀이 초청한 것이었다. 하지만, 공연장에는 나이든 교수님과 근처 연구소들의 지긋한 연구원들이 주로 찾아들었다. 마이클 네스미스가 Monkees의 멤버일 때는 열광적인 인기를 몰고 다녔던 인기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미 영감이 다 된 지금, 그것도 머나먼 외국의 한 중소도시에서 누가 그를 찾아 올 것인가. 로버트 로드리게즈의 신작 액션 영화에 삽입된 것 때문에 괜히 Monkees의 노래를 좋아하게 된 나와 내 친구 몇몇이 그들 사이에 끼어서 노래를 듣게 되었다.

강당에 들어섰을 때, 나는 식당, 매점, 은행, 우체국에서 그녀를 발견했듯이, 강당에서 혼자 공연을 보려하고 있는 채정아를 보았다. 아무래도 60년대 록큰롤 가수의 공연을 보기 위해 주말밤을 보낼 친구를 찾기는 힘들었던지 혼자 공연장에 나타난 것이었다. 나는 친구들을 저버리고 혼자 달려나가 채정아의 옆자리에 앉았고, 친구들은 나의 의도를 간파하고 약간의 욕과 투덜거림을 곁들이며 내 옆에 앉았다.

"저, 혹시 전에 결혼식 때 뵈신 분 아닌가요?"

라면서 나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4년간 같은 학교를 다닌 우리 두 사람은 이런저런 기회에 서로 이름까지 아는 사이였다. 어차피 우리 둘은 따지고 보면 친구의 친구일 것임에 틀림 없는 좁디 좁은 학교의 학생들이었던 것이다.

노쇠한 마이클 네스미스의 힘겨운 인간승리에 가까운 공연으로 우리는 Monkees의 노래를 둘 다 굉장히 즐겁게 들었다. 특별할 정도로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데는 실패했지만, 우리는 길가다 마주치면 가볍게 인사할 정도는 되는 아는 사이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날 이후, 나는 왠지 채정아를 잊을 수가 없었다. 그녀와 말을 해 본 것은 그날이 처음이었는데, 그녀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이야기 할 때, 날카로우면서도 은근한 달빛 같은 데가 있는 그 눈빛은 계속 머릿속에 남았다. 그녀는 좀 콧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이야기 했는데, 이상하게 하는 말 한마디 한 마디마다 좀 떨고 있는 듯한 수줍은 감이 말꼬리를 흐리고 있었다. 나는 귓가에 항상 울리듯 그 목소리를 기억할 수 있었다.

나는 그날부로, Monkees의 노래들을 연습했다. "I'm A Believer"가 괜찮을까, "Sweet Young Thing"이 괜찮을까 고민하다가 둘 다 연습했다. 몇 번의 길가다 만나면서, 나는 그녀가 북유럽 신화나 고대 그리스 신화 같은 것에 매우 관심이 많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곧 나는 유럽 역사와 문화 상징에 대한 피와 땀 뿐인 수련에 들어 갔다.

어쩌다 서점 근처에서 만나, 최근 읽은 책을 추천하고, 서점에서 중세 유럽에 대한 신간에 대해 이야기하게 되어, 나는 채정아와 점심을 한 번 같이 먹게 되었는데, 이 때 나는 그녀의 할아버지가 거대한 병원의 소유주로 그녀가 대단히 부유한 사람임을 알게 되었다. 이야기가 어쩌다 연애 이야기로 흘러가자, 그녀는 잠깐 잠깐씩 사람들을 만나 보았지만 오랫동안 이어지는 관계가 되지는 않았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런저런 그녀의 이야기들에는 따뜻한 사람의 진실된 느낌이 담겨 있었고, 착한 마음의 씀씀이가 느껴지는 데가 많았다.

그녀와 오랫동안 이야기를 하며 점심까지 같이 먹었다는 벅찬 감동도 잠시. 기숙사에 돌아와 곰곰히 생각을 해보니, 그녀의 쫓겨난 전 애인들은 결국 그녀의 어머니가 오랜 시간 동안 형성해준 "쓸만한 남자"관에 터무니 없이 어긋났다는 데 문제가 있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가 어릴 때부터 마르고 닳도록 설파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남자가 멋을 갖추기 위해서는 몇가지 행동과 능력을 보유해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던 것이다. 당연히 기숙사에서 살면서 장학금에서 떨어지는 돈으로 한 달 밥값만을 학교 식당에서 겨우 막아내는 공대생들이 그러한 기준에 딱 맞는 "쓸만한 남자"가 어찌 될 수 있겠는가.

나는 말도 안되는 궁핍한 생활로 닥치는 데로 여유자금을 모으기 시작했다. 온갖 아르바이트와 돈 벌 방법에 대해 궁리하다가 나는 곧 미국 국방성에서 주관하는 세계 대학생 확산공학 대회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승을 하면 상금이 5만 달러였고, 우승이 아니더라도 입상자들에게는 꽤 많은 상금이 있었다.

"이거라도 잡아 보자. 잘 되면 돈이고, 잘 못되어도 공부에 도움이라도 되니 나쁠 것 없잖은가."

나는 점심 시간에 선잠만 자면서 1주일 연속 밤새기라는 미치광이 기록을 세우는 등 미친 듯이 확산공학대회를 준비했다. 모두가 취약한 힐버트 스페이스 전개법에서 나는 익숙한 강점을 나타냈고 쉽게 한국 대표 자격을 얻었다. 그 뒤를 이은 노력의 시간은, 뇌를 오른손으로 비비고 왼손으로 비비는 듯한 고뇌의 학업 연마 였다. 결국 나는 개처럼 공부해서 정승처럼 수상할 수 있었다. 우승과는 꽤 거리가 있었지만, 나는 대학생으로서는 꽤 큰 상금을 손에 쥘 수 있었던 것이다.

나는 미국에서 대회를 치르고 돌아오면서, 면세점에서 그녀에게 줄 이해 불능 가격의 목걸이를 하나 샀고, 한국에 도착하자 마자, 중고차일지언정 겉보기는 괜찮아 보이는 자동차를 사버렸다. 그러고 나니 어마어마한 거액인 것 처럼 보였던 상금이 피시식 소리를 내며 꺼져 들었다.

나는 그녀에게 찾아가 시간을 내어 달라고 하고는 토요일에 점심을 같이 먹고 저녁에는 다시 마이클 네스미스의 공연을 보러 가자고 했다.

"마이클 네스미스 한국 공연 일정 이제 다 끝났잖아요."
"다 방법이 있거든요."

나는 그동안 적당히 친해진 그녀를 대강 설득하여 시간을 약속 받는데 성공했다.

토요일이 되자 나는 그녀를 국제 공항으로 데려 갔고, 우리는 2시간동안 비행기를 타고 가서 도쿄에서 연주한 마이클 네스미스 공연을 보았다. 그동안 나와 꽤 친해져 있던 그녀는 놀라워 하면서 또 즐거워 했고, 나는 정말 말을 똑바로 할 수 없을 정도로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내가 그녀를 좋아한다고 말하였다. 나는 기회를 엿보고 엿보다가 계속 좋은 기회를 놓치기만 해서 제대로 말을 못하고, 엉성하게 동해 상공에서 기내식 먹을 때 그 이야기를 했는데, 식사를 마치고 홍차를 마시던 그녀는 긴 말 없는 긍정의 미소로 답을 주었다.

그리하여 나에게는 가히 꿈과 같은 시간들이 펼쳐졌다. 그녀는 보면 볼수록, 만나면 만날 수록, 그때그때 뻥뻥 뻥튀기 되듯 정이 드는 사람이었다. 언젠가 길을 걸을 때, 그녀는 내 오른팔을 잡아 끌어 그녀의 허리에 둘렀다. 그렇게 걸어가며 이야기 하다가, 그녀는 문득 품에 안기면서 뺨에 재빠르게 입을 맞추었는데, 한 팔에 느껴지는 그녀의 몸과 그 깊게 느껴지는 서로 친숙하다는 그 감상은 잠깐 현기증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그녀는 등 한 가운데를 간지르면 몹시 간지럼을 심하게 탔는데, 특히나 등에 입을 맞추면 가장 극심한 간지럼을 느낀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가끔,

"등에 뽀뽀."

라면서 그것을 부탁/지시하기도 했는데, 그녀는 그것을,

"원래 공포영화 이런거 보면 괴로우면서도 자꾸 호기심나서 시도하게 되잖어. 나도 그런 비슷한 끝없는 탐구심으로 이해해주시오."

라면서 예의 그 항상 어딘가 떨리는 약간 콧소리 들어간 목소리로 웃었다.

나는 곧 학부를 마치게 되었다. 나는 취직을 할까 대학원에 갈까 고민을 하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대학원에 가는 것은 미친 짓이라는 옛 선배들의 의견에 따라 군대에 다녀온 만큼 나는 취직을 하리라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무렵, 엄청나게 그럴듯한 다국적 컨설팅 회사에 먼저 취업해 있던 그녀와 약간씩 다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안그래도 그녀와 만나는 시간이 갈 수록 줄어들고 있었는데, 그녀는 회사에서 바쁜 일이 급하게 생겼다면서 약속을 어기는 일이 많아졌다. 더군다나 그러다가 힘겹게 그녀와 만나게 되어도, 그녀는 힘든 일에 시달린 나머지 항상 기운이 축빠져 병약해 보이기까지 한 상태였고, 그런 그녀와 예전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그녀와 나는 점차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더군다나, 그녀와 나누는 대화란 그녀가 하는 직장 상사들 욕과 이 팀장, 부사장 그런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들 뿐이었다. 특히 그녀는 이 팀장이라는 사람의 놀라운 재치에 대해서 많은 이야기를 했는데, 나에게는 아무런 실감도 느껴지지 않는 그런 이야기일 뿐이었다. 곧 그녀의 이야기는 이렇게 너무 오래 같이 있으면 휴식시간이 줄어 들고, 그러면 일할 때 힘겹다는 식으로 흘러갔다. 나는 자꾸 내가 소외되는 듯 하여 짜증이 났다.

결국 나는 그토록 좋아했던 그녀에게 괜히 싸우고 말 안하고 버티고 그러다가,

"이제 더 이상은 우리가 너무 안 맞는 거 같다."

그러면서 헤어지자는 말을 듣게 되었다.

나는 갑자기 북받쳐 올라서 좀 떨리는 목소리로 좀 붙잡으면서 뭔가 되돌려보려고 매달리려 했는데, 이미 버스는 떠나고, 새는 날아가고, 님은 간 것이었다. 그렇게 나는 그녀를 잃고 말았다.

그러고나서 다시 취직을 하려 알아보니, 아무리 취직을 잘해도 채정아보다 좋은 직장을 차지 할 수는 없을 성 싶었다. 그리고, 그냥 신입사원으로 어디 대단한 곳에 취직을 한들, 확산학 같은 거 전공한 공대생이 고대로부터 전해내려오는 선후배의 위계와 인맥을 갖고 있는 다른 학교 출신 직원들과 겨루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더군다나 온갖 난리를 쳐서 겨우겨우 어떻게 비집고 뭔가 폼을 잡아보려 한다 해도, 나는 신입사원이었고, 어느새 채정아는 몇 년 앞서간 경력자 아닌가. 그러한 어줍잖은 옛 애인과의 경쟁심 덕분에, 나는 아예 경쟁의 각도를 달리할 수 있는 대학원 진학으로 방향을 트는 무모한 결심을 했다.

외국으로 유학을 가려하니, TOEFL 시험 부정과 원서대필로 유학을 가 버린 개떡처럼 자랑스런 몇몇 선배들 덕분에, 터무니 없이 까다로운 기준이 필요했다. 그러려면 무슨 고시 공부하듯이 한 1,2년 따로 공부할 필요가 있었다. 다시 한 번, 채정아와의 비료값도 안나오는 경쟁심에 쏠려 나는 유학을 포기했고, 나는 우리 학교 대학원에 가기로 결심했다.

대학원 입시가 무슨 대단한 시험이라고, 나는 서류 전형과 면접에 꽤 긴장해 있었다. 그러나, 우리 학교 학부 출신 대학원생은 나날이 줄어들어가고 있었고, 나는 가장 좋은 조건으로 대학원에 합격했다. 그리고 대학원 생활이 시작되자, 미친듯이 쏟아지는 영수증 처리, 연구실 청소, 논문 공부의 대혼란 속에서 채정아를 잠깐 잊게 되었다.

그것이 세번째 였다.


4.

학교에 들어온 지 7년째 되는 해에, 나는 유인실을 만났다. 유인실은 내가 소속된 확산학과 생체확산연구실에 "연구체험" 과목 때문에 들어온 4학년 학부 학생이었다. 생체확산연구실은 사람의 몸 속에서 영양소들이나 다른 물질들이 어떻게 확산 되는지를 다루는 곳이었는데, 지도교수님이 꽤 명망 높으신 할아버지 셨다.

교수님께서는 별로 학맥을 확장해 나가거나 정치적인 입지를 새우시는 데는 재주가 없으셨지만 은퇴가 가까워 오시는 연세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분야에 대한 호기심과 확산학에 대한 흥미만은 여전히 넘쳐나시는 분이셨다. 그렇게 긴 세월을 사신 분이다보니, 딱히 제자들 끌어모아서 사조직을 만들거나 정치인들에게 인사 다니지 않고도 교수님은 꽤 이름이 높으셨다. 그래서 그런 교수님에게 직접 연구 실제를 배우는 경험을 해 보고자 실력 있는 학생이었던 유인실이 들어온 것이었다.

그 무렵 나는 또다른 짜증의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힐버트 스페이스 변환 오퍼레이터를 다루는 데는 능했으되, 생물학과 연관되어있는 생체 반응에 대해서는 정말로 아는 것이 부족했다. 때문에 나는 일주일에 한 번씩 열리는 연구실 세미나를 끌고 나가기 위해서는 한도 끝도 없이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했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이 공부량의 막대함에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많은 양의 내용들을 익히다 보니, 자연히 여러모로 떠오르는 잡다한 생각들이 많았다. 따라서 세미나 시간이 되면, 나는 교수님께 그런 생각들을 제안하고 교수님이 던진 질문에 내가 떠올린 생각을 곁들여 답하는 경우가 있었다. 교수님은 거기에 아주 신나하면서 기뻐하셨다.

그런데, 그러고나니, 2년전에 대학원에 들어온 연구실의 선배가 나를 불러서,

"교수님이 질문하신 것을 선배들이 답을 제대로 못했는데, 네가 그렇게 나서서 대답을 하면서 아는척을 하면 선배들이 얼마나 싫어하겠냐. 사회 생활에서 그런 것은 알아 둬야 할 일이란다."

라면서 2시간정도 세미나에서 말을 가려 하라는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한편, 교수님의 한 질문에 내가 공부를 소홀히 해서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한 부분이 있기도 했는데, 그 때는 같은 연배의 또 다른 선배가 나를 불러서,

"도대체 그런식으로 공부를 하면 교수님이 얼마나 실망이 크시겠냐. 너 뿐만 아니라, 너를 제대로 가르치지 못했다고 선배들까지 욕을 먹지 않겠느냐"

라면서 2시간정도 신나게 나에게 분노와 열등함에 대한 저주를 표출하는 것 아닌가.

그러다보니, 생체확산에 대한 그 많은 연구들은 호기심과 흥미에 의한 것이 아니라, 다만 질문 잘 막아내고 잘난척 하지 않기 라는 틀에 맞추는 1주일에 한 번씩 치는 시험 공부 같은 것이 되어 버렸다.

그러니 날이 갈수록 정말 지긋지긋하게 연구는 재미없어져 갔다. 곁들여, 수업료가 인상되어 장학금보다 더 많아진 덕택에, 먹고 살려고 근처 아파트들을 다니며 과외를 해야 하는 것도 지겹고 피곤한 일이 되었다.

따라서, 나의 삶은 짜증과 답답함 투덜거림으로 점차 부스러져 가고 있었다.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1주일을 살다가 주말이 되어 잠시 짬이 생기면, 이번에는 막상 놀거리가 없었다. 동년배 친구들은 이리저리 취직해서 나가버렸고, 학교안에 아는 사람들은 세월이 가는 동안 급격히 줄어든 상태였다. 결국 나는 온라인 게임이나 자극적인 다양한 싸구려 괴기물 같은 것들을 보면서 시간을 때워야 했는데, 그렇게 놀고 나면 놀아도 논게 아닌 것 같은 우울함만 배가될 뿐이었다.

"살 길은 연애 밖에 없다."

나는 점차 내 몸의 구성 성분이 66%의 물과 33%의 짜증으로 변해 가는 것을 느끼면서 경각심을 느꼈다. 여가시간을 같이 보낼 사람을 만들고, 우울한 삶에 정서적인 활력이 필요했다. 그리고, 맨날 햇빛도 잘 안들어오는 연구실에 틀어박혀 그 좁은 틈바구니 안에서 선배니 후배니 교수니 학생이니 하면서 아웅다웅 하는 그 답답함을 환기할만한 어떤 탈출구가 필요했다.

뿐만 아니었다. 어느새 애인 없이 쓸쓸한 삶은 보낸지도 오래되어, 이대로 시간이 더 흐르다가는 마치 애인을 만들 수 있는 사교에 대한 재주마저 상실해 버리지 않을것인가 하는 위협마저 느껴졌다.

"누구를 포섭한다..."

거의 강남과 분당을 떠돌며 땅보러 다리는 부동산 중개업자의 마음가짐 비슷한 태도로 나는 내 주변의 모든 여자들을 살펴 보았다. 그러던 중, 판교 내지는 대치동 쯤 되는 사람으로, 우리 연구실의 학부 4학년생, 유인실이 눈에 띠었던 것이다.

유인실은 항상 상대방을 즐겁게 해주기 위해 스스로 재미있는 말들을 끝없이 늘어 놓는 유쾌하고 즐거운 사람이었다. 더군다나 청바지를 입었을 때는, 키는 작아도 약간 채정아 비슷한 뒷모습인 듯 보이기도 했다. 웃을 때 표정이 의외로 좀 살벌해 보이기는 했으나, 그러나 매끈한 하얀 피부는 누구나 인정하는 매력이기도 했다.

나는 의도적으로 교묘하게 학업에 대한 일정을 조절하여, 그녀가 나의 연구를 돕는 연구생이 되도록 교수님을 이끌었다. 그리하여, 같이 연구하게 된 우리는, 하루 종일 같이 공부하고 같이 밥 먹고, 밤새 같이 실험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 정도면 친해질 기회로서는 충분했다.

나는 그녀가 닐 세카다의 노래를 좋아하고, 에스파냐어와 에스파냐 문학에 애정이 깊으며, 또 항상 사놓고 나서 후회하고 아쉬워 하기만 하면서도 구두와 신발에 대한 욕심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어느새 뻔뻔하게 선배들의 요청에 버틸 수 있게 된 나는 여유 시간을 내어 "Little Devil" 같은 노래를 연습하고, 아르헨티나에서 온 석사과정 신입생에게 에스파냐어 과외를 받았다. 아무래도 돈이 부족해진 나는 학교 주변 아파트를 돌며 하던 과외를 때려치우고 다른 일을 찾기로 하였다. 나는 미국 국방성에서 주최한 확산공학 대회 수상경력을 내세워, 어느 영국 벤처 기업의 시간제 사원이 되어 야간에 재택근무 형식으로 일을 맡아 하게 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 모든 자원을 동원하여 갖가지 은근한 방법으로 유인실에게 구애하였다. 여기서 은근한 구애라는 점은 매우 중요한데, 예를 들어,

"유인실씨. 우리 내일부터 같이 사귑시다."
"미안하지만, 좀 아닌거 같네요. 죄송합니다."

이렇게 되어버리면, 2차시도, 3차시도를 하기가 매우 힘들어진다. 분명히 싫다는 의사를 들었는데도 자꾸 치근데다가는 자칫 스토커 처럼 보일 위험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은근슬쩍 접근을 하고 속내를 내비쳐 의사를 보이면서도, 단정적인 결론으로 몰아 붙이는 데서는 벗어나는 간접적인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 그런 약은 짓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녀 역시 노련하게 은근한 거절을 계속했다. 나는 정말로 내가 싫은가 싶어 깨끗이 단념하기로 했으나, 그녀의 친구들로부터 수집한 정보에 따르면 또 그렇지도 않은 것 같았다.

마침내, 나는 해법을 찾아내기에 이르렀다. 그녀가 전에 만나던 사람은 나이가 7살인가 많다는 어떤 회계사였다고 한다. 그 회계사가 결혼을 서두르는 통에 그녀는 그와 헤어졌지만, 여전히, 그녀가 남자를 보는 기준은 그 회계사에 맞춰져 있는 것이었다.

나는 따라서 그 회계사와 완전히 차별화되는 다른 어떤 강점을 내세울 필요가 있었다. 나는 그녀가 흉금을 털어 놓는 한 선배가 또다른 선배와 연구실의 가구 교체 문제를 두고 싸울 때에 그 선배의 편을 들어 주었다. 그 선배는 나를 도원결의한 동생쯤으로 신용하게 되었고, 나에게 온갖 이야기를 다 들려 주었다. 결국, 나는 유인실이 전체적으로 마른 듯 보이지만 허벅지 근육이 단단해 보이는 남자에게 충동적인 매력을 느낀다는 A급 정보를 입수해 내기에 이르렀다.

나는 거울을 보았다.

7년간 학교에서 지내며, 주간의 식당밥과 야간의 야식만 먹으며 학교에서 살아온 나의 모습은 그 A급 정보를 활용하기에는 무척이나 막막해 보이는 상황이었다. 나는 나의 외모를 완전히 바꿀 것을 결의하고, 거의 성룡 영화 초기작을 방불케 하는 신체 단련에 나섰다.

우리 학교는 공대밖에 없는 곳임에도 불구하고 쓸데없이 학교가 넓었다. 그래서 기숙사에서 서문, 정문, 동문, 후문을 차례로 빙 돌면 꽤 기나긴 시간이 걸린다. 그럭저럭 차도 사람도 별로 없는 황량한 학교인지라 운동을 하기는 좋아서, 가끔 살빼기 위한 중장년 지역 주민들이 애용하기도 하는 조깅코스이기도 하였다. 나는 그 대열에 참가하였다.

나는 생체확산 과제를 핑계로 근육조직학 연구실을 들락거리면서 근육을 기르고 체형을 바꾸는데 대한 내용을 연구한 뒤에, 피나는 운동의 실험으로 연구 내용을 실천하였다. 가히 군대시절 백령도에서 고생했던 훈련이 떠오를 정도로 혹독한 운동의 연속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운동을 하면서, 이토록 오랫동안 지내온 학교를 돌아본다는 어떤 애정같은 것도 느낄 수 있었고, 또 항상 눈에 뜨이지만 결코 알지 못했던 조깅하는 지역 주민들과 친해질 수 있는 기회도 되었다. 그래서 운동 자체가 나름대로 생활에 활력도 되고 재미도 생기고 그랬다. 곧 나는 어느 정도 체력이 붙자, 학교 수영장에 입장권을 주르륵 끊어서 수영을 시작하면서 더욱 운동의 수위를 높였고, 기대 이상으로 건실하게 목표에 다가서고 있었다.

마침내 나는 교내 단축 마라톤 행사에 참가하게 되었다. 교내 단축 마라톤 행사는 워낙에 많은 사람이 참가하는 행사이기에 유인실도 참가자 중 한 명이었다. 나는 유인실과 함께 뛰었다.

그녀를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감격의 완주로 이끌어나가는 동안, 거의 탈진할 듯 비틀거리며 땀을 쏟는 그녀와 함께할 수 있었다. 결국 함께 결승선을 넘어 자리에 앉아 숨을 몰아쉬고,

"애고고 죽겠다."

하는 동안, 나는 그동안 여러번 실패를 겪었던 은근슬쩍 속내 비치기를 다시 시도했다. 이번에는 그녀의 좋은 맞장구가 울려 퍼졌다.

확실히 애인이 생기면서, 삶은 좀 더 나아지는 듯도 했다. 그러나 의외로 생각했던 것과 달리 그렇게 삶의 모든 것이 단지 애인이 생기는 것만으로 확 바뀌지는 않았다.

재잘거리며 그녀의 이야기를 들은 날들은 셀 수 없이 많았지만, 또 좀 더 깊이 친해지고 보니, 유인실은 인성이 원채 좀 잔인하고 공격적인 사람이었다. 특히 그녀는 자신이 분노를 느낀 대상에 대해 무시무시한 욕설을 날리곤 했는데, 내가,

"좀 바르고 고운 말을 씁시다. 예?"

라고 농담 비슷한 충고조차 고하여 올리려다가, 그냥 포기할 정도로 살벌한 데가 있었다. 더군다나 약간은 납득하기 어려운 변태 비슷한 취향도 좀 있었다. 무엇보다도, 어쩌니 저쩌니 해도, 확실히 내 스스로가 지나친 투털거림과 짜증냄에 오랜 기간 젖어 있으면서 사람이 좀 피곤한 인간이 된 면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그녀와는 별로 일이 잘 풀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의외로 별로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나는 그녀에게 헤어지자는 말을 했다. 나는 뺨 한 대 얻어 맞고, 미안하다고 하고, 다른 쪽 뺨 한 대 얻어 맞고, 이건 좀 심한 거 아니냐 하는 생각을 할 때 쯤 되어 결국 그녀의 쏟아지는 욕설을 들으며 돌아서게 되었다.

그것이 네번째 였다.


5.

학교에 들어 온지 9년째 되는 해에 나는 이혜영을 만났다. 이혜영은 일찌감치 학과 공부를 끝내 놓고 유학을 위한 공부를 하고 있는 학부 4학년 학생이었다. 이혜영을 처음 본 것은 수영장이었다. 나는 유인실과 헤어졌지만, 그 때 운동하던 습관은 좋은 것이라 여기고 있었기에 아침마다 수영은 계속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혜영은, 물 안으로 들어 오기 위해 탈의실을 나서면, 수영장의 모든 남학생들이 일제히 동작을 멈추고 시선을 보낼 수 밖에 없는 그런 여학생이었다. 나도 그 중 하나였다. 우리는 이내 이러한 시선의 변화가 얼마나 쑥스러운 것인지 깨닫고 오히려 두 배, 세 배로 더 속도를 높여 힘을 다해 수영을 하는 그런 유치한 인간들이었던 것이다. 그녀는 수영이 능숙하지 못한지, 꽤 자주 물을 먹는 편이었는데, 물을 먹고 허우적 대는 그녀의 모습은 거의 흐뭇할만큼 기억에 남았다. 곧 나는 그녀가 4학년 학생이고 이름이 이혜영이란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미 박사과정 대학원생이 되어 학부생 수업 조교 같은 것 따위는 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지만, 대학원 신입생 후배들은 선배의 말 한 마디라면 무조건 사시나무 떨듯,

"예. 형."

혹은,

"예, 오빠."

라고 밖에 대답할 줄 모르는 멋모르는 이들이었고, 나는 그런 석사과정 학생들 몇몇에게 대강 핑계를 둘러대고 내가 한 과목의 조교를 맡겠다고 했다.

나는 수강생 명단에서, 이혜영의 이름을 찾아 낼 수 있었다. 학교를 졸업하지 않고 재학생 상태로 남아 있으려면 반드시 한 두 과목은 수강을 해야 했다. 그녀 역시 유학을 가는 데에도 재학생 신분이 졸업생, 즉 백수 신분보다 여러모로 유리한 면이 있다는 것을 알았기에 학교에 남으려고 작정한 상황이었다.

한 두 과목 적당히 들으면서 학교에 남으려 하는 많은 학생들이 선택하는 과목. 그들은 다양한 연구에 도움이 되고, 그렇게 어렵지도 않은 우리 확산학과의 "미분기하학의 공업 응용 기초"라는 과목을 듣곤 했다. 이혜영도 그런 학생들 중 한 명이었다. 나는 "미분기하학의 공업 응용 기초"의 조교가 되겠다고 했다.

조교가 되어 오랫만에 학부생들을 마주하고, 학부생들의 생활과 고민거리에 대해 듣고 있으니, 대학원생이 된 뒤에 세월이 지나면 얼마나 지났다고 가히 감격적일 정도로 그리운 어떤 감상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그러한 감상주의는 현실적인 이혜영에 대한 혹하는 마음으로 기울어 졌다.

곧 나는 이혜영에 대해 몇몇 사실들을 추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혜영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이탈리아에서 살다가, 대학갈 무렵이 되어 후기 입학생으로 우리 학교에 들어온 학생이었다. 학부생들은 방학이 되거나, 한 두달에 한 번씩 주말무렵이 되면 기숙사를 떠나 저마다의 부모가 있는 고향으로 돌아가기 마련인데, 그녀는 여행성수기와 겹치고 들락날락하는 것도 귀찮아서 일년에 딱 한 번 겨울에만 이탈리아의 부모에게 가곤 했다. 당연히 그녀는 이탈리아어 실력이 완벽했고, 한국어에도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다만 가끔 낯선 한자어를 잘 모르거나 말투 자체가 약간 느릿느릿 어눌한데가 있었다.

그녀는 뛰어난 실력의 학생이라고는 할 수 없었고, 공부하는 것을 약간 싫어하는 듯도 했다. 하지만 성실한 학생이어서, 그녀는 "미분기하학의 공업 응용 기초"라는 과목을 해나가기 위해 조교인 나에게 자주 찾아와 많은 이야기들을 묻곤 하였다. 그렇게 열심히 무엇인가를 설명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그녀는 이목구비가 큼직큼직해서 인지 실제 나이보다 약간 더 나이 들어 보이는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런 저런 모든 그녀의 특성이 한데 어울려 아주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내 나는 항상 "미분기하학의 공업 응용 기초" 시간을 매우 간절히 기다리게 되었다. 항상 그 시간에 신경을 쓰고 여러가지 준비를 했고, 가상 시나리오를 만들고, 다양한 수작들을 계획했다. 그러면서 나는 그녀가 푸치니의 초기 오페라 음악들을 좋아하고, 그녀의 전공에 관계 없이 수중 포유류 - 고래, 물개, 비버 같은 - 의 생테에 관심이 많으며, 각종 다양한 토끼털 코드를 사들이는데 남다른 환상을 갖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또한 흰 피부의 도회적인 백면서생 같은 남자연예인들의 열렬한 팬임도 알게 되었다.

당장에 나는 오페라 CD들을 사서 듣기 시작했고, BBC와 디스커버리 채널의 돌고래 관련 다큐멘터리를 모아서 연구하였다. 영국 벤처 기업에서 내어준 스톡옵션 주식을 모두 처분해서 목돈을 만들었고, 피부 미백에 대한 다양한 남성용 화장품, 마스크 등등을 조사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면서, 나는 그녀에게 예의 그 은근한 접근 방법을 시도 했다.

"그래요. 지금 시간이 좀 다 되어 가네. 우리 같이 점심 먹고 나서 계속 같이 공부해 보까요?"

라면서 은근슬쩍 "미분기하학의 공업 응용 기초"를 같이 하는 점심 식사로 연결하려 했다. 그런데, 의외로 그녀는 단호하게,

"미안한데요 조교님. 저가 남자 친구가 있거든요. 그래서 점심 식사는 같이 못하겠네요."

라고 해버리는 것이었다.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그리하여, 나는 추근덕 댈 여러 기반과 저변을 상실하여 버리고 말았다.

그녀의 남자 친구를 조사해 본 결과, 그는 그녀와 동기로 그녀가 입학할 무렵부터 같이 다니던 사람이었다. 그는 그다지 얼굴이 희지도 않고, 토끼털 코드를 사들일 만한 사람도 아니었으나, 적당히 건실하고 성실한 사람이었고, 착하고 순박한 학생이었다. 무엇보다 그는 그녀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어서, 그 오랜 시간 정과 의리가 들어 있었다. 이혜영은 그런 것을 배반하기에 막대한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었기에, 이건 어떻게 비집고 들어갈 틈이 보이지 않았다.

절망적이었다. 그러다 보니, 나는 그 별볼일 없는 놈과 이혜영이 같이 다니는 모습이 눈에 뜨일 때 마다 심장을 두들기는 질투심과 얼굴에 피를 몰리게 하는 시기심을 느꼈다. 그 결과, 그녀의 온갖 멋진 점과 아름다운 점들은 더욱더 애절한 꿈으로 다가 왔다. 나는 정말 간절히 그녀를 원하고 있었다.

별의별 노력도 이혜영의 지금 애인을 떼어낼 수 없다는 생각에 낙망하여, 나는 마침내, 인터넷에 떠도는 "찍은 여자, 반드시 넘어오게 하는 법" 따위의 글들이나 읽고 있기에 이르렀다. 지극히 궁상맞은 상황이었다. 무엇하나 뾰족하게 설득력 있는 해결책은 없었고, 더욱더 마음은 애처로워만 갔다. 특히나, 그러다가,

"에라, 일단 아무하고나라도 애인을 만들어야겠다."

는 생각에, 예전에 나 좋아한다고 했던 어떤 선배에게 가서 사귀자고 했다가 퇴짜를 맞기까지 했다. 그것은 거의 철저한 멸망에 가까웠다. 그리하여 수영장에서 구슬픈 눈빛으로 이혜영을 훔쳐 보는 것이 그녀에 대한 유일한 몸짓일 뿐인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마침, 원래 대학원 연구실의 지도 교수님이 나이가 정년을 맞으셔서 은퇴하시고, 우리 연구실은 이제 막 조교수가 된 젊고 어린 새 교수님을 지도 교수로 삼게 되었다. 그런데, 이 지도교수는 하루 빨리 종신재직권을 얻어낼 생각에 일 욕심이 과했고, 온갖 지독한 방법으로 대학원생들이 뼈빠지게 연구하도록 들볶는데 인생의 혈기를 퍼붓는 사람이었다.

"나도 작년까지 대학원생이었어. 그래서 어떤지 다 알거든."

그러면서 이 교수는 온갖 괴이한 편법, 꼼수, 꼬인 관례를 마구 풀어 놓았는데, 거기에 시달리다보니 인생에 대한 의욕 전체가 전반적으로 쇠락하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과중한 연구에 시달리던 중, 나는 재미삼아 NDSL에서 아무도 사용하지 않는 옵션으로 검색을 하게 되었다. 그 검색의 끝에서, 이 모든 것을 뒤바꾸어 놓을, 가히 해를 가리는 일식이 일어나고, 초신성이 폭발하는 듯한, 굉장한 논문 하나를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 논문은 마케도니아에 있는 스코프예 대학의 인체호르몬 연구실, 카르멘 롬 교수와 그 연구팀이 발표한 논문이었다. 논문의 내용인 즉슨, 그 논문에 있는 혼합물을 인간의 호흡기에 주사하게 되면, 마치 새의 각인 효과와 같은 기능과 함께, 강렬한 옥시토신 호르몬, 도파민 호르만 자극반응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말인 즉슨, 그 물질을 주사하면, 그 사람이 보고 있는 사람과 사랑에 빠지게 된다는 것이었다.

카르멘 롬 교수가 발표한 이 사랑의 혼합물은 무척 비싼 물질이라서 실용성이 별로 없었고, 또, 사람의 호흡기에 들어가도록 예리하게 주사해 주어야 했기 때문에 지나가는 사람이 갑자기 누군가를 사랑하게 하는 동화 같은 용도에는 별 소용이 없었다. 그리고, 카르멘 롬 교수가 "사랑의 열병"이라고 이름붙인 극심한 고열을 잠시 경험하게 되는 부작용도 있었다.

그래서, 그의 혼합물은 진정한 "사랑의 묘약"이 되는 데 실패하고 말았다. 더군다나, 제8차 코소보 전쟁을 겪으면서 스코프예 대학은 완전히 망했고, 그 평판도 형편없이 나빠졌다. 당연히 하루에도 수백편씩 쏟아지는 인간 호르몬 관련 논문 중에서 그 논문에 주목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바로, 나. 그 잊혀진 논문을 찾아낸 나는 그 잊혀진 논문을 돌이킬 방법을 갖고 있었다. 최근에 내가 끝내서 졸업 논문으로 사용하려고 하고 있는 연구 중에는 호흡기 물질 확산에 관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잘 설계된 분사기를 사용하고, 방향성 휘발 용매를 잘 혼합하는 방법에 관한 것이었다. 그렇게하면, 주사를 하지 않고도, 물질을 공기중에 분사하여 확산시키는 것 만으로, 그것을 흡입하는 사람에게 마치 주사를 한 듯한 효과를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분사기를 설계할 때 힐버트 스페이스 변환 오퍼레이터를 응용한 방법을 사용하면, 그 물질을 꽤 멀리, 그리고 정확하게 보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로서 결론이 나왔다. 9년간 확산학을 공부해 온 내 학업의 결정체인 이 졸업 논문과 카르멘 롬 교수의 물질을 결합하면, 써먹을 수 있는 "사랑의 묘약"이 탄생한다. 그것을 그 어떤 여자에게 뿌리기만, 하면, 나는 그녀의 꺼질 줄 모르는 열정을 얻게 되는 것이다.

나는 당장에 시제품 제작에 착수했다. 요란하게 성과보고회 행사만 치를 뿐, 그 내용에는 아무도 신경도 쓰지 않는 산업자원부 정부 과제에 적당히 명목을 맞추면, 이 "사랑의 묘약"을 연구 과제 시제품이라고 할 수 있었다. 복잡한 연구 용어로 설명을 하면, 이게 뭔지 어차피 아무도 모를 것이고, 반년만 지나면, 지루한 연구 보고서 같은 것 따위 아무도 읽어 보지도 않을 것임에 분명했다. 지도교수 역시, 그 과제에서 우리가 빨리 시제품을 만드는 편이 자신의 성과보고에 유리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에, "사랑의 묘약" 제작은 일사천리로 이루어 졌다.

시제품을 완성한 나는, 오직 단 한 번의 시험 기회만 있었기에 가장 좋은, 풍향, 시기, 각도를 노렸다. 그녀가 지나치게 다른 사람과 가까이 있으면 안된다. 그러면 "사랑의 묘약"이 지나가는 잔인무도한 도둑고양이 사냥꾼 할머니 등의 인물에게 뿌려져 그 할머니의 무서운 구애를 받는 일 같은 것이 일어날지도 몰랐기에 주의해야 했다.

결국 학교 식당 근처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날, 그 꽃 앞에서 사진을 찍겠다고 이혜영이 미소를 지으며 카메라 앞에 서 있을 때를 포착했다. 그 짧은 시각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그 옆을 슬며시 지나가면서, 나는 내 "사랑의 묘약"을 그녀의 코를 향해 슬쩍 뿌렸다. 무색무취의 물질이었기 때문에, 그녀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 때, 나는 괜히 그녀 앞에 잠시 서 있었다. 그리고 도망치듯 사라졌다.

다음 강의 시간에 그녀는 출석하지 않았다. 그녀의 친구의 말로는,

"갑자기 너무 열이 심하게 나서요. 아무데도 못가고 그냥 기숙사 방안에만 있거든요."

라고 했다. 옳거니, 부작용이었다. 사랑의 묘약이 제대로 작동한 것이었다.

결국, 3일 후 아무도 없는 강의실에서, 그녀는 나에게 안겼다. 아직 열이 덜 내린 그녀의 몸, 그  높은 체온을 나는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이 원래 애인을 배반하는 것에 강한 죄책감을 느끼는 지, 눈물을 글썽이는 듯 하기도 했다.

"나, 정말 조교님 때문에 포기하는 것도 많고. 내가 사는 거. 그 사는 방법 자체를 바꾸는 것도 많은 거거든요. 그러니까. 나한테 정말 잘해 줘야 돼요."

그녀의 말에, 나는 대답은 하지 않았지만, 아무렴. 아무렴하고 뿌듯해 하였다.

2년후, 그녀가 에스파냐의 세비야 대학에 합격 소식을 받아 유학을 가 내 곁을 떠나갈 때 까지, 나는 정말 좋은 시간을 보냈다. 그녀를 보며 온갖 낭만적인 생각에 젖었던 내 꿈들과, 그녀를 상상하며 좀 엉큼한 생각에 젖었던 그 많은 망상들보다, 실제 그녀와 보냈던 2년간은 몇백만배나 더 멋진 시간들이었다.

그것이 다섯번째였다.


6.

학교에 들어온지 11년째 되는 해에 나는 박민주를 만났다. 박민주는 확산학과의 4학년 학부 학생이었다. "사랑의 묘약"을 만들었던 내 연구 결과는 졸업 논문으로 충분했으므로, 사실 나는 이제 박사학위를 받고 졸업했어야 마땅했다. 그래서 박민주와 만날 기회 조차 없어야 했다. 그것이 11년 동안 계속 공부하면서 이 학교에서 산 이유 아닌가.

그런데, 지도 교수는 자신이 종신재직권을 받을 때까지 성실히 연구할 대학원생이 필요했기에 자기 제자인 내가 박사학위를 따는 것을 막았다. 내가 당장 졸업하면, 지도 교수의 마음에 들만한 연구를 할 사람이 없어지니까 자신의 성과가 나빠지게 된다. 그것을 막기 위해, 지도 교수는 내 연구 결과에,

"발상은 좋으나 현실 적용의 공학적 연구결과라 보기에는 무리가 많다."

라는 엉뚱한 핑계를 대고 논문을 통과시키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지도 교수의 부인을 데려다 놓고 사랑의 묘약을 한 번 뿌려 보고 현실적이니 어쩌니 하는 말을 할 수 있는지 보고 싶을 정도 였다.

그러나, 내 졸업 논문을 평가하고 승인해주는 사람은 오직 지도 교수 한 사람 뿐이었다. 별 도리가 없었다.

"좀 더 체계적으로 한 2년만 더 공부를 열심히 하게."

그런 이야기를 하며 그는 나를 학교에 계속 묶어 두었다.

피곤하고 골치아픈 시간들이었다. 대학원에 들어오지 않고 졸업한 친구들은 벌써 연봉이 얼마다, 언제 결혼을 한다 하는데, 아직 기숙사에서 살면서 학생으로 지내고 있으니, 불안하고 답답한 마음에서도 헤어나오기 힘들었다.

바로 그 때, 4학년이 된 박민주를 만났다.

"어, 오빠? 오빠 맞죠?"

언제나 처럼 아침식사 시간에 나른하게 학교 식당에 줄을 서서 밥차례를 기다릴 때였다. 나를 먼저 알아본 것은 박민주 였다.

우리는 아는 사이였다. 내 어릴적에 살던 곳은 그 때만해도 신도시 아파트 단지가 되기 전이라 꽤 시골스러운 곳이었다. 그 때 국민학교 4학년 때던가 5학년 때던가 언젠가 겨울에 뒷산에 토끼를 잡겠다고 올라간 적이 있었다. 무슨 평범한 민가의 나지막한 산에 토끼가 있겠냐만은 하야간 한참을 산을 돌아다니던 끝에 다리가 아파온 다른 친구들은 모두 집으로 돌아가버리고야 말았다. 그 때 끝까지 나를 따르며 붙어 다니던 유난히 볼이 빨갛게 얼어 붙은 여자아이가 있었는데, 그 녀석이 바로 박민주였던 것이다.

설상가상. 뭐, 우리가 서리나 눈을 맞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만, 하여간 우리는 산에서 길을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허둥지둥하며, 좀 겁내고 서로 붙잡고 울고 그러다가, 간신히 정신을 차리고 산을 내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발견하고 우리는 기뻐했다. 그렇게 기뻐하면서 돌아가는 길에, 갑자기 우리 옆쪽 덤불에서 거짓말처럼 산토끼 한 마리가 툭 튀어 나와 폴짝폴짝 뛰어갔다. 그 산토끼를 넋을 잃고 보면서 얼마나 신기해 했는지. 생각해 보면, 벌써 십몇년은 훨씬 더 지난 옛 추억이다.

그런데, 바로 그 박민주가 그럴듯한 대학생이 되어 내 앞에 서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그녀는 여전히 옛날의 장난스런 표정이 남아 있는 어린 얼굴이었다. 그러면서도 어렴풋이 계속 얼굴을 바라보게 하는 조용한 아름다움이 있었다. 더군다나, 항상 내 기억속에 그녀는 걸음을 겨우 걷는 듯한 작은 꼬마였는데, 굽 높은 구두를 신은 그녀는 꽤 훤칠해 보였다. 그래서 그 기억속의 꼬마와 지금 눈 앞의 여자가 겹치면서, 아주 정겹고 친숙하면서도 또 신기하고 감동스러워 보였다.

너무 오랫만에 만난 것인데다가, 또 그녀와 알고 지냈던 것은 기억이 가물거릴 만큼 어린 시절이었기에 사실 나는 굉장히 어색하고 할 말이 없을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는 말솜씨가 탁월했고, 우리는 서로가 서로를 매우 재미있게 해주는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그녀는 머리칼을 쓰다듬어 넘기며 허공을 응시할 때 갑자기 순간적으로 정신을 멍하게하는 느낌을 주는가 하면, 또 우스운 이야기에 웃는 웃음소리는 꼭 어린아이의 웃음소리 같은 데가 있었다.

그 다음 날이었던가. 나는 우연히 길에서 참으로 오랫만에 박은영을 만났다. 10년전 대학에 처음 들어와서 가장 친하게 지냈던 그녀는, 좀 나이가 들어보이긴 했어도, 여전히 그 아름다운 금발과 초록색 눈동자가 깊이 마음에 와닿았다.

"응. 우리 아들이야. 인사해."

그러면서 그녀는, 같이 걷고 있던 어떤 어린 아이와 나를 대면 시켜 주었다. 그녀가 결혼했다는 이야기도 들었고, 아들을 낳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하지만, 정말 이렇게 다른 누군가와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가정을 이루며 산다는 느낌을 강하게 느껴본 적은 없었다. 그 아이는 벌써 학교에 갈 나이가 되었는지, 꽤 자란 똑똑한 아이로 보였다. 그리고, 좀 헝클어지긴 했어도 자기 어머니를 닮은 금발이었다.

그녀와 그렇게 정말 오랫만에 만났다 헤어지고, 그녀의 아이를 보자. 나는 갑자기 온갖 생각에 확 마음이 뒤집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그 긴 세월 동안 그녀는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어 벌써 애가 학교에 간다는데, 나는 11년 동안이나 이 학교의 기숙사에서만 계속 먹고자고 하면서, 도대체 이날 이때까지 공부한답시고 뭘 하고 사는가 하는 생각에 비틀비틀했던 것이다.

그 일이 있은 뒤, 두 번째로 박민주와 마주쳤을 때, 나는 굉장히 이상한 마음가짐으로, 거의 그때까지 단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아주 이상한 마음가짐으로 그녀를 보고 있게 되었다. 그리고 그 날, 나는 그녀가 확산학과의 우수한 학생임을 알았고, 또 날씨가 더워 겹쳐 입고 있던 스웨터를 벗을 때 박민주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게 되었다. 그렇게 그녀는 내 영혼을 애틋한 심정의 저 드넓은 대양에 빠뜨려 버렸다. 아. 나는 그녀를 정말 진심으로 사랑하는 것이었다.

나는 당장 사랑의 묘약을 다시 만들어서 사용하리라 생각하고 그녀에 대한 온갖 꿈에 취해 연구실로 돌아 왔다. 그런데, 막상 다시 설계서를 꺼내 보다 보니, 이게 뭐하는 짓인가 싶었다. 화학 약품을 뿌려서 그녀의 정신을 교란시킨다니. 이게 도대체 변태 악당이 원더우먼을 클로로포름으로 기절시켜 끌고 가는 것과 딱히 뭐 크게 다를 바 있다는 말이냐. 그것은 내 사랑을 내 스스로 속이는 일이 아닌가 말이다.

나는 그녀와의 진정한 사랑을 원한다. 그런데, 그런 약 따위로 가짜 환상을 얻는 것은, 그것은 오히려 정말로 부끄럽고 열등감 느껴지는 일이었다. 결코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나는 곧 앓아 누울 정도로 깊은 고민에 사로 잡혔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그녀에게 이 터질듯한 가슴에 넘쳐나는 감정을 전할 것이냐 말이다. 그녀가 좋아할만한 모습으로 외모를 바꿔 가장하는 것. 눈을 사로잡는 비싼 선물들로 공세를 하는 것과, 그녀가 듣고 싶어하는 지식과 듣고 싶어할만한 말들을 익혀 대사를 읊어대는 것. 모두가 내 진심은 아니지 않은가. 나는 속수무책이었다.

언제나. 정말로 말 그대로 언제나 계속 그녀 생각이 가득했다. 그렇게 말을 못하고 표현을 못하고 애만 태우자니 더 답답해서 더 생각났다. 그렇다고 어설프게 말해서 일을 망치는 것도 싫었고, 대강 시험삼아 한 번 사귀어 보자는 식으로 해서 동정심으로 애인이 된 뒤에 의무감과 권태로움의 사슬로 얽어 매어 관계를 만드는 것도 참 하기 싫은 일이었다.

나는 도무지 내 마음을 그녀에게 어떻게 전해야 할 지, 어떻게 해야 내 사랑이 그녀의 마음에 흘러갈 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나는 거의 중증으로 증세가 번져서, 그녀를 만나서는 그냥 심장만 쿵쾅거릴 뿐, 정확한 발음으로 말 한마디 제대로 할 수 없을 지경에 이르고야 말게 되었다.

도저히 수가 나지 않아, 나는 교회에 밤마다 몰래 나가 기도를 하기에 이르렀다.

"방법은 모릅니다만, 신이여. 제발 박민주에 대한 제 사랑을 이루어지게 해 주십시오."

나는 성서를 첫 페이지부터 읽어 내려가면서, 거의 완벽한 기복신앙으로써 독실한 기도에 매진했다. 그 일을 나는 창세기를 거의 다 읽을 때까지 멈추지 않았다.

나는 결국, 이래서는 도저히 정상적인 생활이 안되겠다 싶어서, 그녀를 좀 잊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나는 그녀를 잊기 위해 정신나간 듯이 연구에만 매달렸다. 그 독한 우리 지도교수가,

"좀 쉬어가면서 하지. 요즘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닌가."

라고 할만큼, 나는 정말 정신이 새하얗게 변할 때까지 일에만 몰두하려 했다. 그러나, 도무지 그녀를 잊을 수는 없었다. 괜히 그렇게 무리하느라 나는 몸살이 나서 드러 눕게 될 뿐이었다.

바보 같은 한심한 상황에 스스로 괴로워하고, 끙끙 앓으며 나는 기숙사 침대에 누워 있었다. 어느새 정말로 꽤 나이 있어 보이는 아저씨가 되어 버린 처지에, 무슨 학부생에게 사랑에 빠지니 어쩌니 헛마음에 정신 못차리고 있는가하는 한심함이 스스로 괴로워짐을 더하였다.

그러던 중, 그녀, 박민주에게 전화가 왔다. 진로에 대해 뭔가 상담하고 싶다는 것이 있다는 내용이었다. 나는 오늘은 정말 아파 죽겠으니까 다음에 시간을 잡자고 말했다. 그녀에게 이렇게 우중충한 모습을 보이기는 정말 싫었다는 것이 진짜 이유였다.

그런데, 얼마 후. 기숙사 사감실에서 연락이 오더니, 누군가 내 기숙사 방에 찾아 왔다고 했다. 바로, 그녀였다.

"오빠. 오빠가 아프다 그래서, 내가 약이랑 전자렌지에 데워먹는 전복죽이랑 사왔는데. 어떡해. 정말 많이 아파 보인다."

그러면서 울상을 짓는 것이 아닌가. 나는 문득 고마운 마음과 뭔가 졸업 못하고 있는 박사과정 대학원생의 서러움이 범벅이 되어 갑자기 눈물이 펑펑 쏟아질 것만 같았다. 나는 곧, 애써 정색을 하고, 그녀에게 뭐하러 이런 것을 다 사왔냐고, 정말 미안할 정도로 고맙다고 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그녀가, 그에 대한 대답으로. 그 순간, 나는 아파서 정신이 없었고, 또 그녀도 기어들어가는 소리로 한 작은 말이었지만, 정확히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분명히, 나에게,

"뭐. 내가 오빠 좋아해서 그런건데 뭘."

이라고 말한 것이었다.

나는, 갑자기 뭔가 몸이 붕 뜨면서 가슴이 벅차 올라, 환청을 듣는 듯한 느낌마저 느꼈다. 그녀가. 그녀도 그녀도 나를 좋아한다니. 이렇게 멋진 일이 있는가. 이거 정말 감동적인거 아닌가. 나는 내가 아프다는 것 조차 잊어 버릴 정도가 되었다.

그리하여, 나는 나이 차이가 좀 나긴 해도, 그 날로 백년해로를 마음 속으로 결심한 애인을 마침내 얻게 되고야 말았다. 그리고, 그 해가 지날 무렵이 되자, 지도 교수도 이제 다음해에는 졸업을 해도 되겠다고, 아무 논문이나 하나 대강 써 내면, 졸업 논문으로 통과시켜 주겠다고 했다.

졸업 예정자가 되자, 나는 직장을 구했다. 나는 국내 굴지의 가스회사에 자리를 얻었다. 어마어마한 연봉을 주는 곳으로 이름난 곳이라서 꽤 만족스러웠다. 직장이 뚜렷해지자, 나는 곧 나의 사랑하는 그녀에게 결혼하자고 했다. 그녀에게는 이제 막 대학을 졸업한 순간이었지만, 나는 결혼을 할만한 나이였다. 그녀는 조금 머뭇거렸지만, 이내 결혼을 하겠다고 결정을 내려 주었다.

기나긴 학교 생활이 끝나고, 마침내 영광의 졸업의 그 날이 가까워 오게 되자, 나는 감개무량한 마음으로 졸업 논문을 친구들과 선후배들에게 돌리기로 하였다. 졸업논문을 돌려 봤자, 아무도 읽지 않고, 논문 표지가 딱딱하니 뭐 라면 받침대나 될 것이다. 그렇지만 그래도, 10년이 넘는 동안 이 학교 안에서 살고, 공부하면서 먹고자고한 그 결론에 해당하는 만큼 나는 정성스럽게 준비했다.

졸업 논문을 마지막으로 준비하면서, 나는 다시 한 번, 내가 대학원에서 했던 연구를 차례차례 되돌아 보았다. 물론, 가장 화려한 순간이었던 사랑의 묘약을 잊을 수는 없었다. 원래 그 논문으로 졸업하려고 했는데, 지도교수가 방해했기 때문에 사장되어 묻혀버린 아쉬움도 있는 논문 아니었던가.

그런데, 나는 정리 중에, 바로 그 사랑의 묘약 논문이 사장되지 않았음을 발견했다. 교수는 그 논문을 내가 낼 수 없도록 통과시키지 않았지만, 몰래 논문을 복사해서는, 내 이름을 빼고 자신 혼자의 연구 결과로 고쳐서 발표했던 것이다. 교수는 내 "사랑의 묘약" 논문을 훔쳐서 자기 이름으로 낸 것이었다. 나는 그 논문을 못 발표해서 졸업을 못 하게 하고는, 자기가 열심히 연구한 성과라고 자랑한 것이다.

"해도 해도 너무하네."

나는 교수에 대한 실망감에 맥이 탁 풀렸다. 그런데, 갑자기 그 실망감을 넘어설만큼 불안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서둘러 다시 한 번, 논문 발표 실적과 국가 연구 진행 검색 웹사이트를 찾아 보았다.

불길한 느낌 그대로 였다. 누군가 사랑의 묘약의 실제 첨부 설계도를 다운로드 해 간 사람들이 있었다. 누군가가 어디서 어떻게 사랑의 묘약을 만들었다는 뜻이었다.

나는, 내가 박민주를 두 번째로 보고 나서 얼마지나지 않아, 아팠던 것이 기억이 났다. 나는 그것이 너무 열심히 연구를 하다가 몸살이 난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면 전형적인 사랑의 묘약 부작용과 똑같았다.

갑자기 나는 박민주가 지금껏 내가 반하여 만났던 그 어떤 다른 여자와도 별로 공통점이 없다는 사실도 떠올랐다. 그런데, 왜 내가 그녀에게 그토록 열렬한 사랑을 느끼게 되었을까. 나는 박민주도 나를 사랑한다고 하여 그토록 기뻐했건만, 사실은, 박민주가 뿌린 사랑의 묘약에 내가 그냥 당한 것일 수도 있었던 것이다. 결혼은 이제 다음주 인데, 모든 것이 그냥 사랑의 묘약에 의한 사기일 수도 있음을 알게 된 것이다.

그것이 여섯번째였다.


7.

학교에 들어온지 13년이 되는 해에 나는 마침내 드디어 대학원을 졸업하고 학교를 벗어나게 되었다. 열아홉살의 10대 소년으로 이 학교에 입학했건만, 어느새 나는 서른 두살의 30대 아저씨가 되어 학교를 졸업하게 된 것이었다. 13년의 긴 시간 동안 이 학교에서 울고 웃고, 땀흘리고 피흘리며, 싸우고 즐거워하면서, 지낸 끝에. 그리고 그 긴 시간 동안 겨울마다 더럽게 춥기로 악명 높은 북향 기숙사에서 살며 학교 안에서 살아간 끝에. 드디어 박사학위 증이라는 종이 한 장을 받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결국 박민주와 결혼도 했다. 박민주에게 사랑의 묘약을 사용한 적 있는지 캐 묻거나, 은근히 조사라도 해보려고도 했다. 하지만, 나는 그냥 이렇게 학교를 졸업하면서 옛날 생각을 하다보니, 이것저것 다 귀찮은 짓은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더군다나, 누구나 결혼하기 직전에는 이게 과연 제대로 하는 결혼인가 의심도 많이 한다고 하지 않는가. 뭐 그 비슷한 것으로 생각하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그 후 가스회사 연구원으로 5년 동안 일했다. 5년이 지나자, 내가 대학원에서 익혔던 최첨단 확산 기술은 흘러간 옛기술 구닥다리 무용지물이 되었다. 나는 할 일이 없어져 버렸다. 40세가 되면 할일 없는 사람들은 정리해고를 한다는 것이 회사 방침이었던 고로, 나는 한 살이라도 젊을 때 다른 일을 해야 겠다고 생각하고 회사에서 명예 퇴직하였다.

지금 나는 그동안 저축해놓은 돈과 퇴직금을 합쳐 피자 가게를 하고 있다. 고액연봉 연구원에서 피자가게 주인으로 바뀌어 버린 것에 때문인지, 나의 그녀와 나는 예전처럼 그렇게 깨가 쏟아지지는 않는다. 그렇지만, 그래도 살을 맞대며 그간 살아온 그 따뜻함은 그녀와 나의 마음속에 뚜렷하게 남아 있다.

이후에도 나는 사랑의 묘약에 대해서 몰래 몇 번 생각이 나서 좀 알아 본 적도 있다. 하지만 아직도, 나는 그녀와 나의 사랑이, 진정한 것인지 혹은 한 대학원생의 논문 첨부 자료에서 나온 이상한 약품의 농간인지 도저히 알아내지를 못하고 있다. 뭐 거기에 뾰족한 묘안이 있겠는가.

어쨌거나, 그녀에 대한 사랑은 불확실할지라도, 생활력 강한 그녀가 아주 뛰어난 피자 가게 주인이라는 점은 그 무엇보다 확실하다고 여기고 있다.

- 2006년, 산 호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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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절영 06.06.05 15:59 댓글 수정 삭제
    그게 사랑이죠. 계획적인 사랑과 무계획적인 사랑, 둘 다 그냥 사랑이겠죠. 아니, 사랑이란 게 실제한다면 말입니다.^^ 흥미로운 화두로군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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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06.06.05 18:57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절영님의 생각은 대체로 글의 주인공의 생각과 일치하시나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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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쑤우 07.09.20 15:35 댓글 수정 삭제
    사랑의 진심에 대한 묘사가 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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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야 18.03.28 18:33 댓글

    어찌되었건 기도가 이루어졌네요ㅎㅎ그런데 다운로드해간 사람'들'인데, 다른사람들에게는 어떤일이 벌어졌을지 궁금하네요. 물론 저런 약이 정말 퍼진다면 끔찍하겠지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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