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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열어 보면 안됨

2012.03.30 23:3303.30


 
 열어 보면 안됨
 
 
 1.
 그녀는 나에게 서류철이 든 봉투를 건내 주면서 말했다.
 
 "안에 열어 보면 안돼요."
 
 나는 그녀의 표정을 보았다.
 
 "왜요? 뭐 들어 있는데요?"
 "하여튼. 열어 보지는 말고, 그대로 426호에 갖다 주면 돼요."
 "열어 볼거야. 궁금하잖아."
 "열어 보면 안된다니까."
 "왜?"
 "야튼 안돼요. 알았죠?"
 
 그래서 나는 시킨대로 서류철을 열어 보지 않았다. 나는 곱게 그대로 봉투째 서류철을 들고 가서 426호에 갖다 주었다. 그래서 아무 별 일이 없었다. 그렇게 그날 하루는 끝났다.
 
 - 2012년 익산에서
 
 
 2.
 설마 이야기가 이렇게 끝나기야 하겠는가. 서류철을 열어 보면 안된다고 해서 그냥 곱게 안열어 보고 말면 이게 무슨 이야기가 되겠는가. 모든 이야기에서,
 
 "다만, 절대 뒤를 돌아 봐서는 안된다."
 
 따위의 이야기가 나오면 반드시 뒤를 돌아 보는 일이 한 번은 벌어 진다. 안그러면 이야기를 듣는 사람에게 미안하다. 하지 말라는 일은 하고 싶고, 하면 어떻게 되는 지 궁금해 졌잖아. 뒤를 돌아 보면 안된다는 이야기가 나온다면,
 
 "그러면 뒤를 돌아 보면 어떻게 되는가?"
 
 하는 것을 알고 싶어지는 것은 인간 존재의 위대한 가치인 호기심이 꽃피우는 아름다운 한 장면의 작렬이다. 바로 그렇게 뒤를 돌아 보고 싶어 지는 마음 덕분에 새로운 탐험이 이루어졌고, 위대한 발견이 성취되지 않았겠는가? 그래서 항상 이야기 속에는 절대 들어가 보지 말라는 방을 들어 가는 사람이 있고, 절대 돌려 주지 말라는 날개옷을 주는 사람이 있고, 절대 따먹지 말라는 과일을 따먹는 사람이 있다.
 
 "서류철을 열어 보면 안된다고 해서 그냥 곱게 안열어 보면..."
 
 나는 그녀에게 이상과 같이 인성의 본류와 인간의 역사에 호소하는 긴긴 논의로 서류철을 열어 보지 말란다고 안 열어 볼 수는 없다고 말하려고 했다.
 
 "아, 나 지금 바로 회의 들어 가야 되거든요. 벌써 늦었어. 부탁 해요."
 
 그렇지만, 그 논의의 첫번째 문장을 채 마치기도 전에 그녀는 바쁘게 한 마디를 하고 돌아 서서 멀어 졌다.
 
 "아니 잠깐만."
 
 나는 그녀에게 도대체 서류철이 얼마나 중요한 건지 물어 보기라도 하려고 했다. 보관할 때 함부로 책상 위에 올려 놔도 되는 건지 숨겨 놔야 하는 건지라도 알아 보려고. 의외로 열어 보지 말라는 말은 그냥 그녀가 자주 하는 실 없는 괜한 장난일 수도 있지 않겠는가.
 
 "열어 보면 안돼요."
 
 그런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 저 여자라면 백번이고 천 번이고 나의 이 환히 드러나는 마음 따위 얼마든지 읽을 수 있다. - 그렇게 말을 한 번 더 남기고 회의실로 걸어 들어 갔다.
 
 "저, 저기!"
 
 나는 회의실에 들어 가는 그녀를 자리에서 일어서서 다시 불러 보려고 하는데, 그녀는 회의실 문을 열더니 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열어 보면 안돼'
 
 라고 하더니 손짓으로 가위표 모양을 그렸다.
 
 도대체 이게 뭐하자는 건가? 나는 받은 서류철을 보았다.
 
 그냥 서류철. 노란 서류철이었다. 마이크로소프트사의 아이콘 디자이너의 보편성 있으면서도 지루하게 평범한 상상력도 강하게 증명되는, 그 컴퓨터 화면 속 "내 문서" 아이콘 모양과 색상과도 매우 닮아 보이는, 그냥 서류철이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서류철을 받아 들고 나는 잠깐 책상 위 내 컴퓨터 화면을 보고, 화면 속의 "내 문서" 아이콘 제목을 "그녀의 문서"라는 제목으로 바꾸는 설정은 혹시 없을까 생각도 해 봤다.
 
 도대체 서류철 속에는 무엇이 있을까? 왜 얼어보지 말라고 한 것일까?
 
 역시 나는 열어 봐야 겠다고 결심했다.
 
 
 3.
 그런데 과감하게 열어 보려고 하니 역시 꺼려 지는 것이 있었다. 별로 보람찬 관계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녀에게 호의를 갖고 있는 "친한 사람"이었다. 친한 사람이 굳이 부탁을 한 만큼, 나는 그것을 들어 주는 것이 옳은 일을 하는 것이었다. 서류철을 열어 보지 말라면, 그냥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대로 두고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된다. 그냥 그런게 여기 없다고 생각하고, 물벼룩 유전자를 측정하고 관공서에 보낼 홍보 자료를 만드는 내 일을 하면 되었다. 무겁지도 않고 가볍지도 않고 크지도 않고 작지도 않은 이 멀쩡하디 멀쩡한 서류철이 여기 하나 있건 없건, 내 생업을 위한 이런 작업을 하는 데에 방해 되는 일은 전혀 없었다.
 
 그녀가 무슨 일을 해달라고 한다면 힘든 일인지 고생을 해야 하는 일인지 생각을 해 볼 여지도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나에게 내가 굳이 할 필요도 없는 한 행동을 그냥 하지 말라고 한 번 당부했을 뿐이었다. 가만히 있으면 된다. 보지도 않고 만져 볼 것도 없이, 그냥 이 서류철을 두기만 하면 된다.
 
 1분전에 그녀가 서류철을 들고 내쪽으로 걸어 올 때만 해도 나는 그 서류철의 내용은 조금도 알고 싶지 않았다. 그 안에 뭐가 있는지 알고 싶기는 커녕 서류철 자체에 신경도 쓰지 않았다. 나는 그녀가 입은 치마의 붉으면서도 차분한 색깔과 털실로 짠 하얀 조끼를 덧입은 갈색의 셔츠를 보았다. 그리고 그녀가 복도를 걸어 내 쪽으로 오면서, 그 걸음걸이에 맞춰서 옷자락들이 움직이는 모양과 그녀의 머리카락이 그 옷자락 위에 흩어지는 형상을 보았다. 언제나와 같은 얼굴도 여전 했다. 사진을 찍어서 낯선 사람에게 보여 준다면 어김없이 무표정이라고 할 표정이었지만, 어째 매번 사무실에서 보기에는 이상하게 살짝 웃음을 짓고 있는 것은 아닌가 싶은 얼굴이었다. 무슨 서류철은 눈에 보이지도 않았다. 서류철을 왼팔에 들고 있었는지, 오른쪽에 들고 있었는 지, 발로 드리블을 하면서 왔는 지도 기억이 안난다.
 
 그런데, 서류철을 눈앞에 꺼내고, 열어 보지 말라고 하니까 갑자기 온통 신경이 쓰이는 것이다.
 
 "좀 있다가 실험동 가실 거죠? 나, 지금 회의 들어가 봐야 되는데, 실험동 가시면 거기 426호 실험실에 이 서류철 좀 갖다 주시면 안될까요?"
 "예, 아, 뭐. 그렇게 하죠."
 
 그 말을 듣고 나서 나는 그녀에게,
 
 "오늘 옷 입으신 게 색깔 멋지네요."
 
 따위라도 한 마디 하면서 허헛 허헛 하고 웃는 상으로 헛소리라도 몇 마디 주거니 받거니 해 보려고 했다. 그런데 적절한 대사와 어색하지 않은 말투를 마음 속으로 개발 완료하기도 전에, 그녀는 나에게,
 
 "그런데, 이거 안에 열어 보면 안돼요."
 
 라고 한 것이다. 아무리, 실없는 신문 기사나 인터넷의 "강추글" 따위에서 구두나 액세서리를 칭찬하는 말을 붙이면서 여자와 가까워 지는 것이 좋은 접근법이라는 말이 자주 나올 지언정, 그 말을 듣자 치마 색깔 말하는 대사를 짜맞추기는 아주 어려웠다.
 
 도대체, 이게 뭘까? 열어 보면 안될 정도로 중요한 것이라면 얼어 볼 수 없는 곳에 집어 넣든지, 하다 못해 겉봉을 접착테이프로 발라 붙이기라도 하든지 할 수라도 있지 않았을까? 정말 중요한 것이라면 조금 늦는다 하더라도 그녀가 직접 전달해도 되지 않을까? 왜 하필 나한테 전해 주라고 시키면서, 그냥 덜렁 주고는 안을 열어 보면 안된다고 했을까? 의문은 두 가지 였다. 첫번째 이  서류철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는가? 두번째, 그녀는 왜 이 서류철의 전달을 나에게 의뢰 하였는가?
 
 나는 답을 알아 내는 방법은 한 가지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 서류철을 열어 보는 것이다. 나는 서류철을 집어 들고 열기 시작했다.
 
 
 4.
 그런데 열어 보기 직전에 오현명이 자기 자리로 오면서 말을 걸었다.
 
 "어? 그거 뭐예요?"
 "뭐?"
 
 나는 오현명이 이쪽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서류철을 급히 다시 내려 놓았다. 그녀가 열어 보지 말라고 한 서류철이기 때문에, 적어도 남이 봐서는 안될 것 같았다.
 
 "그거 아까 걔가 들고 있던 건데. 뭐예요?"
 
 여기서 "걔"라는 것은 오현명이 그녀를 일컫는 말이다. 오현명은 아까 복도에서 그녀와 마주칠 때 나와는 달리 서류철을 들고 있다는 것을 알아 보았나 보다. 오현명은 그녀의 얼굴 표정이나 걷는 모습을 보는 대신, 이 양철 조각 달린 누리끼리한 마분지 겉장 따위를 보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기야 저 오현명이라는 놈은 얼굴에서 해골의 윤곽이 정확히 보일 정도로 빼뺴 마르지 않은 사람이면 무조건,
 
 "좋은 분이시기는 한데, 솔직히 여자로서 매력이 있다거나 하신 것은 아니죠."
 
 라고 평을 하곤하는, 도무지 알 수 없는 인간이니 그럴 만도 하다. 이해할 수 없는 미의 기준이었으나, 나는 나이 조금 더 든 사람이 조금 덜 든 사람을 이해 못한다는 식의, 일종의 세대 차이려니 생각 하고 있다.
 
 "그거, 또 걔가 연구원님 보고 연구동 누구 한테 갖다 달라고 시킨거죠? 걔는 그래도 회사 선배인데 너무 심부름 같은 거 막 시키는 거 아녜요?"
 
 오현명은 몇 마디 투덜거린다. 나는 오현명에게 대충 얼버무리고 빨리 자리를 피하려 했다. 그녀와 이야기를 할 때마다 유난히 바보스러움이 강조 되어 보이는 나의 모습을 빨리 숨겨 보고 싶다는 생각도 있었다.
 
 "그거 뭐예요? 무슨 중요한 서류예요?"
 
 오현명은 그렇게 말하면서 서류철을 열어 보려고 했다.
 
 "야, 뭘 남의 걸 그렇게 막 뒤져 보려고 그러냐. 열어 보지 말라고 그랬어."
 "아니 뭘 무슨 대단한 보안 자료라고 굳이 열어 보지 말라고 해요? 생긴 모양은 꼭 무슨 심부름 센터에서 남편 바람 피우는 거 몰래 촬영해다가 부인한테 보여 주는 사진 넣어 둔 것 같이 생겼네."
 "너는 무슨 생각을 해도 그래? 뭔 개망상이 그렇게 구체적이야?"
 "아니 이게 크기를 봐도 그렇고, 두께를 봐도 그렇고. 굳이 꼭 열어 보면 안된단 소리를 하는 거나, 무슨 사생활 위협하는 사진, 자료 뭐 그런 거 같잖아요."
 
 그러고 보니 그렇게 보이기도 했다. 열어 보면 그 안에는 무슨 충격 받을만한 사진이 있으면 어울릴 것 같다는 생각이 확 들었던 것이다.
 
 무슨 사진일까. 내가 보면 안될만한 사진일까. 그녀와 직접 관계가 있는 사진일까. 아니면 그녀가 보호해야할 누군가와 상관이 있는 사진일까. 내가 서류철을 가져다 줄 연구동의 사람에게 중요한 사진일까? 거기까지 생각 해 보니, 만약에 이 서류철에 든 것이 사진이라면, 굳이 서류철을 나에게 주는지도 대충 짐작할만 했다.
 
 왜인고 하니, 바로 나에게는 지난 주 수요일 저녁에 어정쩡하게 "좋아합니다. 여자친구 해주세요."라고 그녀에게 말했다가, 그 대답으로 별 거지 같은 거절 대사의 리사이틀을 들었던 가슴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또 이 모든 것이 아귀가 맞아 든다는 생각도 잠깐 하게 되었다.
 
 바로 눈 앞에 수요일 저녁의 참담한 상황이 선하게 다시 떠올랐다. 애초에 그녀를 만나면서 오늘은 "좋아한다"고 이야기를 하겠다고 결심을 하니까 자꾸 한 마디 한 마디 하는 말마다 쉽게 하기가 어려웠다. 평소에는 그렇게 쿵짝이 잘 맞게 그녀와 서로 서로가 즐거운 농담도 잘 했는데, 그날 따라,
 
 "오늘 조크가 왜 이래. 오늘 계속 대사 처리가 영 좀 이상하시네요."
 
 같은 소리나 몇 차례 들었다. 그녀와 같이 저녁을 먹고 돌아가는 길에, 나름대로 가로등 빛이 멋지게 지나가고, 그런대로 길거리의 조용한 영역으로 접어 들었을 즈음에 나는,
 
 "저, 그..."
 
 하면서 걷다가 멈춰서서 말을 했다. 조용한 길이라고는 했지만, 그래도 길 이편 저편 건너편으로 같이 수백명의 사람들이 어딘가로 걸어 가고 있는 번화가의 한 모퉁이었다. 그 무심한 수백수천의 한 가운데에서 그 사람 중에서 나는 내 곁의 그녀에게 영혼이 통째로 후끈후끈 하는 기분으로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밤하늘 은하수 끝까지 어색해져만 가는 그 말투는 나 자신에게조차 민망스럽게 느껴졌다.
 
 그녀의 대답은, 이를 테면,
 
 "우리는 좋은 친구로 지내는 직장 동료 잖아요."
 
 설마. 그래도 그녀가 그때 그렇게까지 극심히 재미 없는 말투만 골라 써서, 무한한 암담함과 졸렬함을 담은 대사로 거절을 한 것은 아니다. 왜 그런 사람들 있잖은가. 쓸데 없이 자기 연애 하는 이야기 설명할 때 꼭 연속극에 나오는 주인공들이 쓰는 현실성 없는 말투와 단어를 따라하면서 나도 주인공 같은 상황에 빠졌다는 느낌을 은근히 느끼려는 무리들 말이다. 대학원 때 박혜란이라고 있었는데, 걔는,
 
 "나는 그쪽을 이성적으로는 생각해 본 적이 없어요."
 
 라든가,
 
 "나 너라는 친구 정말 좋거든. 그런데 우리 관계, 그렇게 바뀌어서 그 좋은 친구 잃고 싶지 않다."
 
 라든가 하는 양념만 바르면 어릴 때 좋아하던 그 닭살 맛과 똑같아 질 것 같은 질감의 대사들을 현실에서 직접 읊어대면서 연애하는 이야기를 상담하곤 했다. 하기야 만약 수요일날 그녀도 그 비슷하게 갔다면, 그걸로 그냥 거기서  끝이 났을 것이다.
 
 그런데 그녀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게 또 무슨 놀라운 수법인지 뭔지는 모르겠지만, 그녀는 이런 식으로 말했다.
 
 "우와. 진짜로?"
 
 이게 뭔가? 이런 반응이 있나? 나는 이렇게 되고 싶다는 생각은 해 본적이 없지만, 저절로 얼굴이 붉어 진다.
 
 "어... 예. 진짜로."
 
 내 얼굴은 더욱 붉어 진다.
 
 "솔직히 말해서. 저도 그러니까 조금 좋아하는 마음이 있거든요."
 
 그녀는 나의 허무한 태도에 비해 극히 매끄럽게 답을 해 나갔다. 아주 부자연스러운 나에 비해 그녀는 아주 자연스러웠다. 나는 멋모르는 수줍은 어린아이가 되고, 그녀는 세상사에 통달한 고단수의 상담가와 같이 보인다. 그녀가 나를 달랜다면 달래고 나를 진정시킨다면 진정시키는 듯한 말투로 대답을 하는 것은 이 어색한 공기 속을 마치 유선형 몸체의 물고기가 수중을 헤엄치 듯이 자유롭게 누비며 하늘을 나는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아직 여자 친구, 남자 친구 어쩌고 하는 것은 이른 것 같고, 같은 회사에서 매번 만나는 사이에 갑자기 위험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렇게 까지 하는 것은 잠깐 나중에 생각하고 일단 지금처럼 친하게 좀 더 같이 즐겁게 지내보자. 그러면 언제고 또다른 결단의 시간이 나지 않겠냐. 하는 이야기를 했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는 개미가 개미지옥에 빠지고, 갓 상경한 순박한 시골 청년이 범죄조직의 마수에 빠지 듯이 그녀의 말에 신나게 휘말려 들었다. 나는,
 
 "어, 뭐, 예, 음, 저...."
 
 따위로 말을 하면서, 그녀의 말에 동조 했다. 그렇게 해서 그녀와 나의 어정쩡한 관계를 확실한 것으로 변모시키려던 나의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물거품 중에서도 모양도 정확히 떠올릴 수 있을 것 같았다. 나의 마음은 인어공주가 죽으면서 변한 바로 그 물거품과 같은 모양으로 흩어졌다. 그녀와 나의 어정쩡한 관계를 확실히 하려던 내 시도는, 바로 어정쩡한 관계임이 확실하다는 것으로 끝맺어져 버렸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로 나는 그 때 그녀가 이 서류철 안에 우리의 이 멍청한 관계를 처리하기 위한 사진을 넣었을 것이라고 생각 했다. - "우리의 관계"라는 말도 부끄러운 말일지 모른다. 내가 "우리의 관계"라고 부르는 것은, 그녀에게는 "그 엉뚱한 남자의 태도" 정도로 취급될 지도 모르겠지. 아마 모르긴 해도 그녀에게는 나와 같이 어정쩡하게 그녀를 좋아하면서, 항상 웃는 얼굴, 재미난 이야기, 잠깐 거들먹거리기 위해 왠갖 정성을 바친 행동을 제공하는 사람이 또 하나 더 있을 지도 모른다. 꼭 지금 나와 동시에 다른 한 명을 견주고 있는 것은 아니라 하더라도, 나를 만나서 친하게 다니기 직전에 지금의 나만큼 친했던 다른 사람이 쌓여 있었을 수도 있지 않았겠는가. 바로 이 서류철 안에는 그녀와 그 놈의 지극히 다정한 어떤 광경이 사진으로 촬영 되어 들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내가 봐서는 안될 사진이면서도 나에게 맡겨도 될만한 사진일 수도 있다. 자연히 그 사진을 보고 내가 충격을 받고, 그녀에 대해 단념을 하게 되면 그것은 그대로 그녀와 나의 관계를 - 혹은 그녀에 대한 내 태도를 - 그대로 끝낼 수 있는 단초가 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나는 이 험난한 경쟁구도를 알고 좀 더 그녀에게 정성을 다해 충성을 바치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그 사진을 일부러 보여 주려고 나에게 준 것은 아니다. 보지말라는 사진을 내가 본 것 아닌가.
 
 왜 하필 이런 사진을 보여주는 이유는 뭐고 의도는 뭐냐고, 박혜란 같은 애라면,
 
 "이런 사진을 나한테 보여 주는 저의가 뭐야?"
 
 라고 하면서 묻고 따질 수도 없게 된다. 왜냐하면 다시 한 번 따져 보자면 그녀는 나에게 이 서류철을 열어 보지 말라고 했고, 내가 그걸 억지로 몰래 훔쳐 본 것이 되니까. 이 얼마나 훌륭한 덫이고 함정이며, 올가미이고, 미끼인가? 따져 볼 수록 그녀다운 수법이 아닐래야 아닐 수 없다.
 
 그리하여 나는 과감하게 그렇다면 나는 끝까지 이 서류철을 열어 보지 않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별로 친하지도 않던 두 남녀가 만나서 조금씩 가까워지는 과정의 한 수 한 수를 꼭 무슨 바둑 대국처럼 따져 보는 것도 우스꽝스러운 짓이지만, 그녀의 복병을 피해서 내가 의표를 찌르는 기습을 하는 방법은 이것 뿐이지 않겠는가? 그녀의 흐름에 말려드는 것에서 빠져 나와 어쨌거나 나는 그녀가 예상치 못한 나만의 행동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야 말로, 그녀의 빈틈을 치고 돌아 올라서는 유일한 방법이 아니겠는가.
 
 나는 잠이 안와서 본 수요일 늦은 밤 심야 케이블 방송의 저 오랜 흑백 TV 시절 1950년대 "알프레드 히치콕 극장" 재방송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제목은 "시험 삼아 해보기" 비슷한 것이었다. 청부살인업자 세계에 막 입문한 주인공이 있다. 주인공에게 두목은 "시험 삼아 해볼만한" 쉬운 임무를 맡긴다. 주인공은 두목에게 총을 받아서 두목이 지목한 빚쟁이를 처리하러 간다. 그런대 빚쟁이에게 가니 빚쟁이는 주인공에게 더 많은 돈을 줄테니 배반해서 두목을 공격하라고 부탁한다. 주인공은 고민 끝에 배신한다. 그런데, 그러자 빚쟁이는 주인공에게 이 "시험 삼아 해 보는 임무"는 말그대로 두목의 "시험"으로 자기는 두목과 짜고 주인공이 배신하는지 안하는지 시험해 보기 위해 빚쟁이인척 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빚쟁이는 주인공에게 배신자는 제거 되어야 한다고 공격하려 하고 주인공은 맞서 싸우려 하지만 두목이 주인공에게 준 총은 발사되지 않도록 조작되어 있는 총이었다.
 
 그러니까, 이것도 이런 것 아니겠는가? 서류철 안에 무엇이 있는가 하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은 바로 서류철에 대한 나의 태도인 것이다. 예를 들어서 이런 거다. 내가 서류철을 열어 보고 안에서 그녀의 내밀한 사진을 발견한다. 나는 사진을 보고 정신적으로 손상을 입는다. 그녀는 그러면 함정에 빠진 나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다. 만약에 내가 끝까지 사진을 보지 않고 정직하게 배달했다면, 그녀는 나를 믿음직하고 사소한 호기심에 휘둘리지 않는 대범한 사나이로 생각 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나는 서류철을 열어 보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당당하다. 나는 그녀의 시험을 통과한 것이고, 그녀는 서류철 속 사진에 같이 나와 있는 놈과는 관계를 정리한다. 그리고 그녀는 나에게 완전히 돌아선다. 그러니까 그녀는 나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정리하는 것의 반대로 하기 시작한다.
 
 "그러면 그녀는 나와의 관계를 어질러 놓기 시작한다고 해야 하나?"
 
 따위의 헛생각을 하며 달콤한 망상에 빠져 들면서, 나는 어쩌면 그녀가 서류철을 여러 봤는지 안열어 봤는지 확인할 수 있는 장치를 서류철 안에 해 놓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문이 묻으면 변색되는 스프레이를 뿌려 놓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아니면 서류철을 열면 찢어지게 종이나 끈을 달아 놓았을 수도 있다.
 
 아니면 이렇게 무슨 절대 열어 보지 말라, 어쩌고 하는 이야기에 상투적으로 등장하는대로, 정작 이 안에는 아무것도 안들어 있을 지도 모른다.
 
 예를 들면 그냥 종이 쪽지 한 장만 들어 있는 것이다.
 
 "열어 보지 말라는데 왜 열어 봤어요? 못 믿을 사람이네. 제 남편감을 결정하기 위한 마지막 시험이었는데 낙방하셨네요. 실망이예요. 이제 선배와는 밥도 안먹고 농담도 안하고 상대도 안해주고 하여간 안놀아요. 이제 장래희망을 '영원히 재미 없게 혼자 살다가 노총각 되고 나서 부모님이 찾아 준 여자랑 결혼하는 사람'으로 하시지요."
 
 같은 말이 적혀 있을 지도 모른다. 그런거다. 안에 뭐가 들어 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열어 보느냐 마느냐가 중요한 상황이 아닐까?
 
 그런데 마침 그렇게 생각 했을 때 오현명이 서류철을 집어 들었다.
 
 "선배 보고 열어 보지 말라고 한거지, 나보고 열어 보지 말라고 한 건 아니잖아요. 제가 대신 보고 뭔지 알려 줄께요. 하여튼 걔 진짜 이상해. 온 회사에 걔를 모르는 사람이 없어."
 
 그리고 오현명에 의해, 서류철의 내용을 나는 알게 되고야 말았다.
 
 
 5.
 그렇게 되어서는 안되었다. 그래서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마침 오현명이 서류철을 열려고 할 때, 안의 내용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여느냐 마느냐가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래서 얼렁뚱땅 내 의지와도 상관 없이 서류철의 내용을 알게 되면 큰일 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오현명이 서류철을 집어 들자 마자 빼앗았다.
 
 "야, 보지 말라 잖아."
 
 오현명이 고개를 갸웃한다.
 
 "어? 수상한데. 선배는 안에 뭐 있는 지 본 거 아녜요? 둘이 무슨 관계예요?"
 
 관계라는 단어에 나는 또 평정심을 잃는다. 오현명은 자리에서 책을 한 권 챙기고, 종이 유인물을 하나 챙기더니 일어서서 다시 걸어 나간다. 나가면서 오현명이 다시 말했다.
 
 "거 무슨 엄청 중요한 무지막지한 내용인가보네. 다음부터 걔가 잔심부름시키면 좋은 말로 거절하세요. 또 상무님이나 나이 드신 영감님들 보시면 후배가 선배 부려 먹는다, 여직원이 남자 직원들 홀린다, 어쩐다 하면서, 진짜로 막 뭐라 그런다고. 그러면 서로 안좋잖아."
 
 오현명이 가고 다시 혼자 있게 되자 나는 다시 한 번 생각이 소용돌이 친다. 그렇지, 그녀가 그렇게 진지하게 무엇인가 나를 위해 공을 들여 공작을 벌이고 있다고 상상하는 자체가 나만의 넘겨 짚기 아니겠는가.
 
 물론 좋게 좋게만 세상이 흘러간다면야, 저 서류철 안에는,
 
 "서류철 받으시는 분께: 지금 서류철 가져다 주시는 분을 저는 사모하고 있어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 마음을 전할 수 있는 방법을 알려 주세요."
 
 같은 말이 씌여 있을 수도 있겠지. 그녀는 나에게 직접 말하지 않았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직접 말하는 효과를 나타낼 수가 있는 것이다. 내가 서류철 안의 내용물이 궁금해 못견딜만큼 그녀에 대해 아직도 이런저런 깊은 생각을 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서류철을 열어서 그녀의 사연을 보게 될 것이고, 그녀와 나의 관계가 성립되기 위한 정보 교환은 그 자리에서 완료되는 것이겠지.
 
 그러나 세상이 어찌 좋을 수만 있으랴. 그런 세상이라면, 제2차 세계 대전이나 남북분단이 왜 일어났겠는가?
 
 자리에서 일어나서 연구동으로 가면서 생각해 보니, 그런 상상을 했다는 것 자체가 한심스럽게 여겨졌다. 수요일의 부끄러운 하루를 잊기 위해, 그녀의 그런 쪽지가 서류철에 담겨 있다는 상상을 하는 것을 비슷하게 들리는 다른 말로 바꾼다면,
 
 "오늘 복권이 당첨된다면 너무 욕심 안부리고 한달에 4백만원씩만 쓰면서 평생 놀기만해야지."
 
 정도나 다름 없었다.
 
 그러면 도대체 이 안에는 무엇이 있는 것인가? 역시 현실적인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은 대외비로 처리해야 하는 업무에 관한 자료일 것이다. 공식적으로 "기밀" 자료이기 때문에 아무도 보면 안되는 자료라서, "보면 안된다"고 말은 한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 심각한 기밀은 아니길래 그냥 나에게 대충 부탁한 것이다.
 
 내가 무슨 첩보 요원도 아니고, 그 기밀이라는 것이,
 
 "국회의사당 밑에 외계 우주선이 있어서 외계인이 지구인으로 둔갑하고 있기 때문에 그 건물에 들어가는 인간들마다 다 그 모양이 되는 것이다."
 
 같은 무슨 어마어마한 것일 리는 없다. 회사 방침에 따라서 그저 혹시나해서 기밀로 처리하는 문서 정도일 것이다. 이 회사 같은 연구소에 무슨 대단히 치명적인 정보가 오고 갈 리도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벼룩이나 초파리에게 뭘 뿌렸더니 어떻게 되더라 하는 정도의 이야기를 담은 보고서 아니겠는가?
 
 사실 따지고 보면 정말 기밀 다운 기밀이 있을 가능성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외계인이나 전쟁발발과 같은 엄청난 것은 아니겠지만 나름대로 꽤 숨겨져야 마땅한 정보가 있을 수도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서 물벼룩 채취 방법 결정. 그 정도라면 말이 된다.
 
 내가 처음 그녀와 길게 이야기 한 것도 물벼룩 이야기 였다. 포토셀이라고, 요즘 회사에서 유행하는 스프레드쉬트처럼 자료를 처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인데 사진이나 그림 자료도 표 속에 자유롭게 넣어서 쓰는 것이 있다. 어찌저찌 하다가 내가 그녀에게 포토셀 쓰는 묘수 하나를 알려 준 것 때문에 그녀와 나는 서로 "말을 하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다가 하루는 자기 자리로 가다 말고 나에게,
 
 "아까 벼룩시장, 벼룩시장 하던데 그게 뭐예요?"
 
 하고 물었던 것이다.
 
 "아, 벼룩시장은 생활정보지 이름이고. 나는 벼룩시장이 아니고 벼룩장사요."
 
 나는 그렇게 대답했고, 내가 회사 동료들 사이에 "벼룩장사"로 불리우고 있다는 것에 대해서 나는 그녀에게 설명을 했다.
 
 액체가 얼마나 독성이 있는 지를 알아 볼 때 보통 미생물인 물벼룩을 집어 넣어서 얼마나 오래 버티면서 잘 사는 지를 알아 본다. 그런데 물벼룩들이 그 종류별로 유전자가 특이하게 다른 점이 있어서 잘 골라서 써야만 한다는 것이 우리 회사에서 내가 붙잡고 있는 연구 결과 였다.
 
 이런게 장사가 되는 까닭은 그렇게 하면, 한국에서 물질의 독성을 측정할 때는 한국 환경의 특성을 잘 반영하는 물벼룩을 잡아서 써야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는 점에 있었다. 그러면 한국에 새로운 물질, 새로운 식품, 새로운 상품을 팔기 위해서 안전검사를 해야 하는 외국 회사들은 한국 물벼룩으로 다시 한 번 실험을 해서 증명을 해야 한다. 이렇게 하면, "FTA로 위협 받는 한국 업체, 한국 생산자들을 경쟁으로부터 지켜 줄 수 있다"고 정치인들이 자랑하고 다닐 수 있다. 그러니, 이 한국 전용 물벼룩을 정하고, 고르고, 팔아 먹는 일이 관심 받는 일거리가 되고, 나는 물벼룩을 파는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벼룩장사"라는 것인데, 지난 번에 언제 한 번은 미나리 밭에서 채취한 물벼룩이 가장 좋은 것이라는 연구 결과가 나오고, "미나리 밭 물벼룩"이 표준 시험용 물벼룩으로 채택되는 통에, 독성 검사를 하려는 왠갖 회사들마다 다 미나리 밭 물벼룩을 사려고 다닌 적이 있었다. 그 덕에 갑자기 전국의 미나리 밭 주인들이 순식간에 엄청난 돈을 벌었다. 미나리 밭 주인들은 도대체 왜 밭의 물을 돈을 주고 사람들이 사가는 지, 물벼룩을 고르는 게 무슨 소용인지, 왜 물벼룩을 골라 쓰는 제도가 생겼는 지 뭔지 아무 영문도 모른 채, 부자가 된 것이었다. 갑자기 저 머나먼 곳에서 벌어진 벼룩장사와 정부 관리 몇몇과 국회의원 몇몇이 전혀 상관도 없이 궁리해서 벌인 물벼룩 연구 때문에, 엉뚱하게 작년에는 나도 미나리 농사로 돈 벌어 보겠다고 새로 미나리 밭을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아 졌나.
 
 예를 들면 이 서류철 안에는 딱 그 정도의 파급효과를 가지고 있는 "기밀"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는 것이었다. 이런 것이다. 새로운 물벼룩에 대한 연구 결과와 그 물벼룩을 채취할 수 있는 장소가 기록되어 있다. 먼저 서류철을 열어 본 사람은 재빨리 몰래 그 지역의 땅을 사들여 돈을 벌고 백만장자가 된다. 호화로운 삶. 돈을 낭비하는 유흥. 그렇지만 어찌저찌 하다가 이런 사연이 들통난다. 경찰이 들이 닥치고 검찰에 넘어 간다. 나와 그녀와 426호의 이 서류철을 받을 사람은 줄줄이 감옥에 갇힌다. 설마. 그런 모험을 벌이며 기밀로 무슨 일을 벌여 볼 생각은 없다.
 
 그렇겠지. 함부로 새어나가서 수작 부리는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안되는 정보라서 "기밀"로 정해 놓았고, 그래서 "열어 보면 안되"기는 하지만, 딱히 내가 지금 열어 본다고 해서 당장 무슨 큰 일은 내지 않을 법한 정도의 기밀 말이다. 그런 정도의 재미 없는 일 아니겠는가.
 
 목적지인 연구동 426호에 거의 다 도착하고 나니, 나는 맥이 풀렸다. 그렇게 재미 없다니. 열어 보면 안되는 서류철 속의 내용물이 그렇게 싱겁고 재미 없고 그냥 그저 그런 높은 확률로 예측되는 이야기란 말인가. 벼룩장사 하는 놈에게 흔히 일어날 법한 고작 그런 정도의 이야기란 말인지.
 
 그녀와 처음 벼룩 장사 이야기를 했을 때, 우리의 대화는 이렇게 이어졌다.
 
 "그때 보니까, 선배, 완전 포토셀 박사! 맞죠?"
 "나는 생물학 박사인데요."
 "아니아니. 그게 아니고. 포토셀, 나 진짜 골치 아픈 거 또 하나 돌려야 되는데. 이거 좀 도와주세요. 해주시면 제가 맛있는 거 사드릴께요."
 
 뭐 그렇게 하다가, 두어번 식사를 하고, 식사를 하면서 몇 번 크게 같이 웃고, 웃는 얼굴 때문에 끝나고 나서 집에 와서도 밤새 내내 생각 나고, 그 다음 날 아침에 출근하면서 이상하게 만날 꺼 기대하고, 만나서 의외로 별 일 없어서 좀 실망도 했다가, 그러다가 또 저녁도 같이 먹고, 영화도 서너 번 보러 갔고, 겨울이 다 지나가기 전에는 같이 스케이트를 타러 두 번갔고, 나는 칠천번 정도 넘어 졌고, 그녀는 괜찮냐고 진심으로 물어 봐 주면서 세 번 내 손을 잡아 일으켜 주었고, 지난 주말에 뭐 했냐는 상무의 질문에 같이 스케이트 갔다는 이야기를 하는 일은 좀 피해야 할 것 같아서 둘이 묘하게 거짓말을 지어내면서 어떤 연결된 관계라는 느낌을 느끼고. 그러다가 봄 바람 살랑살랑에 들떠서 수요일날 좋아한다고 한 번 말했다가 더 어색해진 관계에서 비틀비틀 나날이 정신을 못차리는 시간이 셀 수 없이 이어지는 그렇게 그냥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라니.
 
 열어 보지만 말라고 했으니까, 초음파 검사도 해보고 X선 검사도 해 보는 것은 어떤가. 그러면 적어도 이 안에 사진이 있는지, 쪽지가 있는지, 서류가 있는지 정도는 알 수 있지 않을까.
 
 의외로 그렇게해서 살펴 보면, 이 안에는 전혀 다른 무슨 장치가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예를 들면 이 안에는 무시무시한 테러 무기가 숨겨져 있을 수도 있다. 그렇지. 그녀는 진규류 연구부 소속이었다. 서류철을 열면 안에서 무시무시한 세균이 튀어 나와서 일대를 오염시키는 테러 무기라도 장치된 것이 아닐까. 그래서 최종적으로 서류철을 전달 받는 사람을 없애 버리려는 엄청난 음모는 아니겠냐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사실 암흑의 세계정복조직이 보낸 암살자일 수도 있고, 혹은 그녀 스스로 암흑의 세계정복조직을 꾸미는 대악당이라는 것은 어떤가?
 
 426호 앞에 서서 서류철을 건내기 직전에 있으니, 별 허망한 생각이 다 들었다. 서류철이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면, 그 안에는 도대체 뭐가 있어야 그래도 덜 허무할까. 이런건 어떨까. 서류철을 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참고 끝까지 열지 않고 426호에 전달해 줬더니, 받은 사람이 뜯어 보니 그 안에 또 서류철이 하나 더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서류철 위에는 "열어 보면 안됨"이라고 씌여 있고 또다른 누군가에게 전해주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이번에는 이 서류철을 받은 사람이 또다시 서류철을 열어 볼까 말까 뭐가 있을까 하면서 또다른 사람에게 전해주려고 하면서 궁금해 하는 고민의 여행을 하는 것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나는 수요일 이후로, 내가 너무 헤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게 무슨 못난 모습이란 말인가. 이런 식으로 헤메다가 엉뚱한 짓을 많이하고, 이러다가 사람이 자칫 잘못하면 생각도 삐뚤어지고, 행동도 기울어지는 것이다. 열어 보면 열어 보는 것이고, 말면 마는 것이지, 이렇게 따지고 저렇게 따지고, 이런 상상 저런 상상, 이런 궁리, 저런 계략 자꾸 이럴 필요가 없지 않은가.
 
 하기야, 이렇게 서류철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 지 궁금해 하는 이야기일 수록 안에 뭐가 들었는 지 계속 이야기 거리로만 삼다가 꼭 끝까지 안 알려주지 않고 확 끝나 버리는 이야기도 꽤 많은 편 아닌가. 60년대 한국영화 "사르빈 강에 노을 지다"의 마지막 장면을 보면 주인공이 고향의 옛애인이 보낸 편지를 보고 그 옛애인이 꼭 해줄 이야기가 생겼다는 데 까지 읽었는데, 갑자기 예상치 못하게 총을 맞아 다음 부분을 읽지 못하고 죽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 식의 이야기 많지 않은가. SF소설 중에도 온갖 모험을 거쳐 우주의 끝에 도착하고 나면, 맨 마지막 페이지에서, "그래서 우주의 끝 너머를 보았더니..." 라고 되어 있고 확 끝나 버리는 것들 있지 않은가? 나도 서류철을 막 열어 보려는데, 갑자기 건물이 무너지거나, 계단을 헛디뎌서 넘어졌는데 머리를 다쳐서 확 내가 사망하면서 영영 서류철의 내용은 모르는 채로 모든 것이 팍 당돌하게 여기서 끝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나는 결국 426호 문 앞에서 마지막으로 한 숨을 쉬고, 뭐 어떻게 되든 궁금한 건 궁금한 거라고, 더 이상은 모르고 헤메는 기분으로 지내고 싶지는 않다고 생각하고, 진짜로, 정말로, 에라 모르겠다, 서류철을 열어 보고야 말았다.
 
 그리고 서류철 안에는...
 
 - 2012년, 서대전에서
 
 
 6.
 예를 들어서 이런 식으로 끝나 버린다는 것이다. 물론 이 이야기는 그렇게까지 힘 없이 끝나지는 않는다.
 
 서류철을 열어 본 순간, 문이 열리며 426호에서 한 사나이가 나타났다. 사나이는 덩치가 컫고 한 손에는 나초 봉지를 들고 있었다. 사나이는 쩝쩝거리면서 나초를 먹고 있었는데, 나와 마주치자, 근무시간에 연구실에서 나초를 먹고 있다가 들킨 것에 당황하며 어정쩡하게 나초를 숨기려는 동작을 취했다.
 
 "어? 어떻게 오셨습니까?"
 
 보니 그 명찰에는 "곽재식"이라고 적혀 있었다. 426호 문을 보니, 곽재식이라는 이름은 이 연구실에서 일하는 사람의 이름이기도 했다.
 
 "이거, 전해 달라고 해서요."
 "아, 예. 감사합니다."
 
 곽재식은 서류철을 받아 들었다. 서류철을 주면서 언뜻 보니 그 안에 든 것은 인쇄된 A4 용지 십수장 정도 였고, 거기에는 소설이나 감상문 같은 정도의 내용이 적혀 있는 듯 하였다. 내용에는 드문드문 빨간색 펜으로 수정 표시나 삭제 표시가 되어 있기도 했다. 내용은 잘 알 수는 없었는데, 첫머리는 "그녀는"으로 시작하고 있었고, 맨 마지막 끝은 "2012년, 서울에서"로 끝나고 있었다.
 
 "무슨, 소설 같은 건가 보네요?"
 
 내가 묻자 곽재식은 자연스러운 손동작으로 한 손에 들고 있던 나초를 치웠다. 곽재식이 대답했다.
 
 "아, 예. 그냥 제가 취미로 써서 인터넷에 올리고 있는 게 있습니다. 이번에는 사연을 듣고 그거에 바탕을 두고 이야기를 꾸민 게 있거든요. 그걸 그대로 쓸 수는 없으니까, 배경은 조금 바꾸고 남녀 주인공 이름은 실명이 안나오게 바꾸고 한건데요. 사연 준 사람한테 이 정도면 마음에 드냐고 한번 보여 줬더니, 뭐 고치고 싶은 게 많은 지 이렇게 저렇게 막 표시해 왔네요."
 
 나는 이건 또 뭔가 싶었다. 어리벙벙해 지려다가 말고 나는,
 
 "어, 그럼 그거 올리시면 저도 보여 주십시오. 오늘 올리시나요?"
 
 하고 물었다.
 
 "아마 한 내일이나 모레 쯤. 토요일, 일요일에 보통 많이 쓰는데, 내일은 익산에 출장 내려갈 일이 있어서, 왔다가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정리해서 마치려고 합니다."
 
 곽재식과의 이야기를 그렇게 마치고 나니 나는 뭔가 뒤집힌 느낌이 들었다. 풀리는 답은 없었다. 서류철 안에 든 것이 중요한 것인지, 그걸 열어 봤다 안본다는 여부가 중요한 건지, 서류철 안에는 결국 아무것도 없었다는 것인지, 아니면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안 알려주고 그냥 확 알려주기 직전에 끝나버린 건지. 나는 서류철을 열고 보니, 이제는 열어 버린 면이 서류철 바깥쪽이 되고 바깥쪽이 안쪽인 면으로 바뀌어 뒤집혔다는 기분이 되었다.
 
 어떻게 할 지 몰라서 머뭇머뭇하고 있었다. 그런데, 뭘 연구하는 지 익산에 가서는 또 무슨 벼룩 비슷한 걸 팔려고 하는 지는 알 수 없는 저 얼간이 같은 직원이, 얼른 내가 가면 먹던 나초 다 먹을 텐데 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본 순간, 나는 그 때 용솟음치는 결심이 섰다.
 
 회의를 끝내고 그녀가 나올 때 즈음해서 바로 말할 것이다. 오늘이건 내일이건 다시 한 번 이야기를 하자고. 옛날 박혜란이 비웃는 소리가 다시 귓가에 환청으로 들리든지 말든지, 나는 그녀를 붙잡고 이야기를 해 보려고 한다. "너에게 나는 어떤 존재냐"고, "우리 관계 이대로 좋은거냐"고. 결론이 좋거든 두 번 다시는 회사에서 과도한 잔심부름을 하지 않겠다고도 덧붙여 선언할 것이고, 결론이 나쁘거든 그래도 눈부신 태양 아래 따뜻한 바닷물 속에서 새하얀 산호가 펼쳐진 아름답고 멋진 열대의 어장을 기분좋게 유람하던 고래처럼 관리를 받았던 겨울 한 때 였다고, 휴가철 좋은 여행지처럼 생각해 보려고 한다.
 
 어느 쪽이건, 내 머리 꼭대기에 앉아 있는 그녀에게 이제 다만 기원해 보는 것 외에 뭘 더 할 수 있겠는가.
 
 - 2012년, 서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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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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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슴컹크 12.04.01 22:52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요. 서류철에 든 종이에 "그녀는"으로 시작해서 "2012년, 서울에서"로 끝난다면서요. 그럼 지금 읽는 이 글이 이야기 속에 나오는 서류철 안에 든 글인 건가요? 그렇다면 여자분이 제보한 내용을 곽재식이라는 사람이 남자의 입장에서 각색한 것인가요? 그렇다면 여기에 화자로 나오는 남자는 실재하는 인물이 아니라 곽재식이라는 사람이 만들어낸 허구의 인물인 건가요? @_@ 묘하게 액자 구조이네요. 저는 좀처럼 어떤 게 맞는 건지 잘 판단이 안 섭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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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2.04.02 08:08 댓글 수정 삭제
    언제나처럼 관심, 감사합니다. 말씀하신대로 지금 이 글이 극중의 서류철 안에 든 글이 되는 것입니다. 또한 말씀하신대로 극중의 "나"는 허구의 인물인 것이고 극의 작가로 되어 있는 "곽재식"역시 극중의 인물인 이상 사실에 기초한 허구로 생각하는 것이 잘 맞아 떨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나"는 "곽재식"이 아니고, 제가 "나"인 것도 아니고 "곽재식"인 것도 아닌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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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쑤우 12.04.03 09:34 댓글 수정 삭제
    두어번 식사에서 이어지는 3월의 봄바람 같은 묘사가 너무 좋네요~!
  • No Profile
    곽재식 12.04.03 11:56 댓글 수정 삭제
    격려 감사합니다. "맥거핀"을 많이 사는 이야기의 전형으로 이번 이야기는 꾸며 봤는데, 그런 이야기들일 수록 맥거핀을 핑계로 보여 주고 싶은 장면, 드러내고 싶은 묘사를 많이 하는데 집중하는 편이기에 저도 이야기에 엮어서 몇몇 묘사를 재미있게 하려고 노력해 봤습니다.
  • No Profile
    카논 12.04.07 18:58 댓글 수정 삭제
    재밌게 읽었습니다. 소설과 현실의 교묘한 장치가 좋네요!
    '우와 진짜로?' 이부분은 읽으면서 왠지 찔렸습니다. 현실에서 저런 반응을 똑같이 보인 터라.. 다음 글도 기대하겠습니다.
  • No Profile
    곽재식 12.04.08 00:11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극중극에서 소설/현실 충돌을 이용하는 것은 "콘도르 날개 (완결편)" 때부터 종종 활용해 오던 것으로, "환승역의 7인" 등등에도 잠깐씩 나옵니다만, 이번에는 개중에서도 좀 정석스럽게 처리해 봤습니다. 비슷한 관점을 너무 많이 써먹으면 식상할 듯해서 요리조리 다른 면에서 극중극 소재를 살리는 방법을 찾아 보고 있는데, 이번 것을 재밌게 봐주셨다니 반갑습니다.
  • No Profile
    잠본이 12.04.15 00:02 댓글 수정 삭제
    '열어보면 안돼'만 갖고도 이렇게 이야기를 만들수 있다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국회의사당의 비밀은 농담으로 들리지 않는군요 OTL
  • No Profile
    곽재식 12.04.15 22:47 댓글 수정 삭제
    영상물로 만들면 "열어 보면 이런 것이 있지 않을까?" 하고 상상하는 장면 하나하나 마다 서로 장르가 다른 이야기를 하나 씩 보여 주는 시간을 가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해 봅니다. 그렇게 하면, 그런 모든 이야기들이 다 들어 있는 그 영상물 자체의 영화필름/비디오테입이 바로 그 서류철 속에 들어 있는 것으로 맨 마지막에 나올 겁니다. 이렇게 되면 이야기들의 가지와 전체, 액자 간의 포함관계가 좀 더 재미나게 보일 거라고 생각해 봅니다.
  • No Profile
    실바람 13.05.03 18:22 댓글

    열어보면 안되는 이야기를 열어보고 말았어요~ㅎㅎ

    제목처럼 본문도 계속 호기심의 연속이었어요. @zz_acac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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