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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블릭 아트" 2011년 10월호에 "천사의 옆얼굴"이라는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아래 이야기는 지면 관계상 "퍼블릭 아트"에 싣지 못한 부분을 포함한 새로운 판입니다.



1.
여러 편으로 이어지는 이야기나 연속극에는 아슬아슬한 장면에서 이야기가 끊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리고 나서, "다음편에 계속..." 등의 안내문을 보여주면서 맺곤 한다. "매달린 장면" 내지는 "클리프 행어"라고들 부르는 것이다. 과연 위기에 빠진 주인공이 어떻게 될까를 궁금해하면서 다음편을 안달나게 기다리게 하려는 술수다. "매달린 장면"이라는 말에 걸맞게 옛날 흑백 영화 중에서는 정말로 주인공이 절벽에 매달려 있는 채로 끝나는 경우도 있었다. 주인공이 죽을 지 살 지 알려면, 혹은 어떻게 살아날 지 알고 싶으면 속편을 봐야 한다.


내가 지금 돌이켜 보려고 하는 이야기는 아예 시작을 "매달린 장면"으로 출발해 볼만하다. 이유는 그때야 말로 이 이야기 전체에서 가장 신기한 때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가을 밤에 부산 해운대의 호텔 16층에 있었고, 발코니에 몰려 누가 떠민다면 금방이라도 속절 없이 떨어질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리고 내 앞으로는 결코 내 친구라고는 할 수 없는 사람들 두 사람이 서 있었다. 금방 나를 속절 없이 떨어지게 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었다.


나는 뒷걸음질을 치며 물러 났다.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본다. 혹시 바닥으로 떨어져도 어떻게 살아날 방법은 없을까? 16층. 큰 숫자 였다. 묘수를 고안하는 데 시간을 쓸 필요가 없을 만한 숫자다.


대신 나는 쓸모 없이 바닷가 도시 풍경을 여기저기 보며 두리번 거린다.


똑같은 동물을 셋이나 넷씩 맞추는 휴대전화 게임을 할 때 시간이 다 떨어지면, 게임이 끝나기 직전에 시간이 다 떨어져 갈 때 아무 동물이나 부질 없이 이리저리 움직여 보곤 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날 밤, 내가 아무 살아날 길 없는 주변을 살펴 보는 것이 그와 같았다. 혹시 뭔가 있진 않을까? 도대체 무슨 수는 없을까. 내려다 보는 저녁 도시 풍경으로 까맣게 비워진 수평선과 오가는 자동차 불빛들, 멀리 하얀 요트들이 모여 있는 곳의 반사광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니 막연히 여름 해변이 떠오르기도 했다. 그렇지만 바람은 서늘했다. 멀리서 왁자한 시내의 번잡한 소리가 들려오는 듯도 했다. 그래도 귀를 기울여 보면 막상 선명히 들리는 소리는 바람 소리 뿐이었다. 나는 곧 16층에서 두 낯선 사람에게 몰려 나라는 한 사람이 내 던져 질 상황치고는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나는 그때 그 광경 속에서 어느 때 보다 분명하게 천사의 얼굴을 보았다. 천사의 얼굴은 먼 곳에서 보였다. 하지만 그 얼굴은 분명히 나를 보고 있었다.



2.
"천사"가 갑자기 왜 나오는 지를 설명하려면 우선 대학원 시절 나를 떠났던 내 옛 애인 이야기를 해야 한다. 무척 보기 좋은 사람이었고, 특히 내가 공부하던 "민스"에서는 한 세기 동안 기다려도 찾아 볼 수 없을만한 미인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천사 였다거나, 그녀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전혀 아니다. 지금 나는 오히려 그 반대로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뉴질랜드 오클랜드에서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갑작스런 스매싱과 같이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꺼냈던 것이다.


그녀가 나에게 난데없이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그녀가 그녀의 첫 사랑이자, 절대 어떻게 할 수 없는 불가항력인 "진정한 사랑"을 만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 "진정한 사랑"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설명하는, 전혀 돌이키고 싶지 않은 잡다한 이야기를 그녀는 비행시간 내내 진이 빠지도록 길게도 했다. 하지만 요약하자면 나는 그녀가 심심해서 빈 시간 채우느라 만나던 적당히 멀쩡한 놈일 뿐이고, 그녀가 애타게 갈구하는 사람은 따로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그 사람이 떠났기 때문에 다 끝났다고 생각하고 나를 만났는데 어쩌다 그 사람이 이제 돌아 왔기 때문에 나는 꺼져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긴 대화에서 얻은 긍정적인 지혜라고는 비행기 안에서 헤어지자 어쩌자 하는 이야기를 하면 매우 괴롭다는 것 뿐이었다. 호기심 어린 주변의 시선과 쫑긋 귀를 기울이고 우리 대화를 듣는 앞뒷자리의 사람들. 어색한 순간이 생겨도 문을 열고 잠깐 내려서 쉬었다 갈 수가 없었다.


이후로 나는 속이 터지는 마음 탓에 "민스"에서 원래 하던 일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그렇게 그녀와 헤어진 후에, 한동안 뭘하고 있건 주기적으로 어디서 무슨 독침이 날아와 확 가슴을 찌르듯이 욱하는 마음이 치밀었다. 예를 들어서 나는 라면을 끓이려고 물을 데우다가도 갑자기 그 "진정한 사랑"이라는 놈과 그녀가 다정한 시간을 보내는 광경을 상상하게 될 때가 있었다. 그러면 라면 먹고 싶은 맛은 산산히 없어져 버린다.


머리를 싸매고 박사 학위를 따보자고 "민스"일을 하는 것도 생각처럼 잘 하기 어려웠다. "민스", 즉 MINS - Molecular Imaging Network Society 는 영어 약자를 억지로 조합해서 발음할 수 있는 말로 꾸미면 멋있을 거라고 생각하고 단체 이름을 짓던 유행이 남아 있던 바보스러운 나날의 마지막 시대에 탄생된 곳이었다. 내 생각에 민스는 정육점에 더 어울릴 이름처럼 들렸다. 그 곳에서 하는 일은 물질을 어마어마한 배율로 확대했을 때 분자와 원자의 모양을 사진이나 영상으로 담아내기 위해 별별 웃기지도 않는 - 실제로 정말로 하나도 웃길 것은 없다 - 복잡한 컴퓨터 계산을 하는 곳이었다. 나는 민스에서 박사 학위 논문을 준비 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진정한 사랑"에게 빼앗긴 내 거짓된 사랑 탓에 정신을 차리기 어렵게 되었다. 그냥 잊고 털고 나오면 될 일이긴 했는데, 그 이상한 "억울한 마음"이라고 불러야 할까, 어떨까 하는 심정 때문에 그것도 쉽지는 않았다.


결국 나는 해야할 일 대신에 엉뚱한 일들에 시간을 쏟으며 허송세월하게 되었다. 허송세월한다는 자체는 지친 고년차 박사과정 대학원생 다운 일이기도 하지 않은가? 그러니 주변에서 적극적으로 말리는 사람도 없었다. 나는 그녀와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분자역학 학회에서 찍었던 사진 따위를 끝없이 다시 열어 보았다. 그녀가 옛날에 나에게 보낸 편지나 이메일 메시지를 차례로 차츰차츰 돌아 볼 때도 있었다. "그래, 이때 쯤 부터 분명히 그 진정한 사랑을 만났겠지." 그런 생각을 하고, 미쳐 그런 방향으로는 상상하지 못한 나를 부끄러워 한다. 나는 그렇게 하나하나 짜맞추며 부끄럽고 괴로운 마음을 들면 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에서는 그 이상한 마음이 얼마나 더 강하게 느껴질 수 있을까? 하는 탐구심 같은 것이 일어나, 더욱더 옛일을 파고 들기도 했다. 그러다 보면, 그녀가 나를 마주보면서도 마음 한 쪽으로는 진정한 사랑을 생각하는  상상을 혼자 거듭 해 보기도 하면서, 그 이상한 마음의 한결 높은 강도를 체험 하게 된다. 그러면서 나는 뼈가 어떤 식으로 저리고, 속이 어떤 각도로 뒤집히는 지 느껴보는 것이다.


그녀와 내가 연인인 상태로 갔던 마지막 도시인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학술회의에서 찍은 사진들도 몇 차례 보았다. 그 사진들 중에는 그녀와 함께 미술관에서 찍은 사진들이 있었다. 위선적인 배신자라는 점 외에, 그녀의 유일한 단점은 그녀의 허황된 회화 취미였다. 지금 와서 다 털어 놓고 하는 이야기이지만, 내가 보기에 그녀는 전혀 미술이나 그림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는 자기가 어떤 그럴듯한 취미를 갖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어 하는 것처럼 보였다. 독서나 음악은 그녀에게 탈락이었다. 독서는 답답해 보이기도 하거니와 책을 읽는 것을 그녀는 지겨워 했다. 음악을 듣는 것 역시 좋다는 옛 노래일 수록 그녀에게는 지루하게 들리는 것들이 많아서 그녀가 택할 만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녀에게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을 감상한다는 취미는 괜찮게 보였나 보다. 한 번 대충 보는 데 몇 초에서 몇 십초면 충분하다는 점이 그녀에게는 마음에 들었을 것이다. 인터넷에서 그림의 소재가 되는 그리스 로마 신화나 성경 속 이야기를 찾아 보고 그대로 읊어 대는 것 역시, 크게 해가 될 것 없는 사소한 과시를 좋아하는 그녀의 성격에 잘 맞았던 것이다.


오클랜드의 미술관에서 그녀는 19세기 말에 그려진 뉴질랜드 이민자의 초상화를 보고 재밌다고 말했다. 몇 백년전에 살다가 죽어서 까마득히 잊혀진 사람인데,


"이 그림보면, 어제 이 근처 시장에서 새 마차 고르러 다닌 사람 같네."


라면서 생생해 보인다고 했다. 예전에, 여기에서 살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죽고 사라져 없다. 그런 생각을 하면 아련하다고 했다. 그때 나는 같이 그림을 보면서 그녀가 그렇게 말을 하는 것을 들었다. 나는 그녀가 그림에 대해서 한 말 중에서는 가장 재미난 이야기라는 생각을 했다. 그 미술관의 그림들을 유난히 나는 세심히 살펴 보게 되었다.


그래서 사진을 다시 보던 중에 파고들게 된 것이 바로 제노아 항구를 그린 그림이었다. 그녀가 19세기 뉴질랜드 이민자의 초상화를 오랫동안 보았다면, 내가 그때 재밌게 보았던 그림은 바로 이 제노아 항구의 풍경이었다. 제노아 바다의 수평선과 항구 거리와 배들이 그려져 있다. 재미난 부분은 풍경의 오른쪽 구석 부분이었다. 그림 오른쪽 구석 아래에는 한 화가가 그려져 있었다. 그림 속의 화가는 그림 속에서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 그림 속 화가가 그리는 그림이 바로 제노아 항구의 풍경이었다. 그러니까 이 그림 속 화가는 이 그림 자체를 그린 화가 자신이었다. 그리고 그림 속의 화가가 그리는 그림은 바로 이 그림 자체였던 것이다. 그림 속의 그림을 보면, 정말로 이 그림처럼 제노아 항구의 풍경이 작게 그려져 있었다.


다시 그 그림을 보면서 나는 이 그림이 최근에 새롭게 화제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 그림 속의 그림에는 역시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작게 그려져 있다. 그리고 그 화가가 그리는 그림은 역시 원래의 이 그림 자체이다. 그래서 그림 속의 그림 속에도 그림이 있었다. 그 그림의 풍경  역시 이 그림 자체였다. 마치 두 개의 거울로 비춰보는 영상 처럼 그림 속에 그림이 있고, 그림 속에 또 그림이 계속 있다는 것이었다. 돋보기로 확대해 보면 여섯 겹으로 그림 속의 그림 속의 그림 속의 그림 속의 그림 속의 그림이 있는 것까지 보인다고 했다.


일이 그렇고 되려고 그런 것인지, 나는 결국 이 그림을 정밀 현미경으로 조사하고 전자현미경으로 살펴보는 일에 관심을 갖고 뛰어들게 되었다. 몇 달 후, 나는 민스의 장비를 이용해서 이 그림에 묻은 물감의 분자 구조를 확인하는 과제를 맡기도 했다. 나는 이 그림의 물감을 확대해 보면 그 결정이 이루는 모양이 제노아의 풍경과 비슷하고, 심지어 이 그림을 더 확대한다면 그 분자 구조의 모양이 제노아의 풍경과 비슷하다는 것을 알아 냈다. 이 그림은 그림 속에 그림이 계속 겹쳐져 있어서, 원자 하나 하나로 그림을 그려야 할 만큼 어마어마하게 작은 단위에서도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는 이야기였다. 물론 분자 구조의 모양은 제대로된 제노아 풍경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투박했다. 하지만, 수평선과 같은 구조와 제노아에 정박된 배와 같은 모양들이 원자들이 이루는 모자이크로서 대략 자리를 잡고 있었다. 그림 속의 그림 속의 그림 속의 그림이 계속 반복되며 작게 작게 속에 속에 그려져 있는데, 그 가장 깊숙한 작은 그림은 광학장비로는 제대로 볼 수도 없는 원자가 이룬 분자 모양으로 그림이 되어 있다는 것이었다.


이런 괴상한 그림을 밝혀내고, 나중에 어떻게 이런 그림이 그렸는 지까지 결국 알아내게 되면서, 나는 외국 방송과 외국 신문에 이름이 몇 번 나오게 되었다. 덕택에 그런 식으로 이름이 실리는 것을 좋아하는 우리나라 언론에도 몇 번 소개가 되었다. 나는 마침내 "과학자의 시각으로 본 명화 속의 과학" 어쩌고 하는 조악하게 베낀 제목에 억지로 대충 내용을 채워 넣은 쓰레기 같은 책도 몇 권 쓰게 되었다. 그런 덕택에 나는 민스에서 쓴 진짜 졸업 논문은 걸레 같았음에도 - 그것도 걸레로써도 더이상 쓸 수 없어서 버릴만한 걸레였다. - 불구하고 여기저기 불려다니며 꽤 기름지게 밥값을 하고 살 수 있었던 것이다.



3.
"천사의 얼굴"을 처음 본 것은 점차 밥값을 하기 어려워 질 무렵이었다. 나는 그때 가끔 텅 빈 낮시간 라디오 방송에 출연해서 인터넷을 뒤져 방송 작가가 조사해 준 "과학 상식" 원고를 읽는 것 따위를 하며 먹고 살고 있었다. 더는 이짓도 어렵겠다 싶어서 나는 이런 따위의 이름값을 과대평가하는 어느 헐렁한 대학에 교수 자리라도 하나 얻어 두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여기저기 좇아 다니며 굽실 거렸다. 이 역시 쉽게 풀리지는 않았다. 다시 답답하기만 한 사조에 접어든 나는 한창 돈 잘 벌 때를 그리워 하게 되었다. 나는 제노아 풍경 그림의 비밀을 밝히던 때의 신문 기사나 잡지 자료 등등을 다시 돌아 보았다. 그러다보니, 나는 다시 뉴질랜드로 휴가를 떠나 오게 되었고, 다시 그 미술관에도 가 보게 되었다.


나는 이제 꽤 유명해져서 눈에 잘 뜨이는 자리에 대단한 위세로 전시된 제노아 풍경 그림을 보았다. 그런데, 그 옆에 있어야 했던, 그녀가 그때 유심히 보았던 초상화는 없었다. 대신에 그 자리에는 다른 그림이 있었다. 새로 입수한 그림들과 함께 그림을 바꿔 전시했기 때문일 것이다. 새로 걸린 그림 역시 19세기 말에 그려진 초상화 였다. 젊은 여자의 정면 얼굴이었다.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나는 한참 아주 오래도록 그 얼굴을 쳐다 보았다. 생동감 있는 얼굴이었다. 지금이라도 어딘 가에서 살아 가고 있을 사람처럼 보이는, 정말 있는 사람 같았다.


사람을 보고 첫눈에 반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 사람을 많이 알기 전에, 어떤 말을 하는 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 지, 뭘 어떻게 하면서 세상을 살아가는 지, 알기 전에 그냥 딱 보고 좋아하게 되는 일이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림을 보고 그 그림 속의 사람을 좋아하는 것도 그렇게 이상한 일만은 아니다. 적어도 그림 속의 얼굴은 차분하게 똑똑히 가까이서 오래동안 바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그림 속 얼굴을 보고 그 그림 속의 사람을 좋아하게 되는 것이 심하게 이상할 것은 없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그 그림을 여러 번 사진 찍었고, 그림을 그린 화가와 그림의 수집 경위에 대해서도 상세히 살펴 보려고 했다.


누구를 그린 그림인지는 정확히 자료가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그 그림을 그린 화가에 대해서는 이런저런 자료가 좀 있었다. 그리고 이 화가가 그린 그림 중에 확인 되지 않은 것들이 몇 건 있었다. 그런 확인 안된 그림 중에 제목이 "천사"라는 것이 있었다. 아마 그 이름 없는 젊은 여자의 얼굴이 그 "천사" 그림이 아닌가 추정 된다고 했다. 그림의 주인공인 사람의 이름이 "천사" 비슷한 것이었는지, 혹은 어떤 연극에 "천사" 역할을 맡았는 지, 혹은 무슨 그림의 모델에서 "천사" 역을 했기 때문이었는지, 혹은 그녀의 별명이 "천사"였는지 모르겠지만.


그 때만 해도, 나는 그 그림 속의 사람이 진짜 "천사"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했다.



4.
휴가가 끝나고 돌아 와서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 나는 다른 그림 속에서 그 얼굴을 또 보게 되었다.


외국의 유명 미술관 창고에서 썩고 있는 그림 몇 개를 빌려 온 뒤에, 별로 안 유명한 미술관에서 빌려온 그림들을 짜집기 해서 구색을 맞추어 입장료 가격을 높이곤 하는 전시회들이 그 해 한국에서 크게 유행했다. 나는 그런 전시회 중 하나에 홍보글을 짧게 하나 써 주는 일을 맡았다. "과학자의 눈으로 그림을 보면..." 이라는 말을 우선 맨 먼저 쓰고, 그 뒤에 인터넷에서 대충 검색한 말을 좀 바꿔서 써 주면 원고료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러다 그 "썩고 있는 그림 몇 개" 중에서 그 얼굴을 다시 찾게 되었던 것이다.


안니발레 카라치라는 화가가 그린 그림 중에, 중앙에 한 영웅이 있고 좌우에 두 명의 아름다운 여자가 있는 그림이 있었다. 두 여자 중에 한 사람은 악을 나타내는 옷을 입고 있어서 악마를 나타내고 있고, 다른 한 사람은 선을 나타내는 옷을 입고 있어서 천사를 나타내고 있었다. 악마와 천사는 가운데 서 있는 영웅에게 서로 자기의 뜻을 따르라고 유혹하고 있다. 그런데 그 중에 천사의 얼굴이 바로 그 때 그녀의 얼굴과 꼭 같았다. 뉴질랜드에서 보았던 그 천사의 얼굴과 정확히 같아 보였다. 처음에는 분명히 어디선가 본 얼굴이기는 한데 어디서 본 얼굴인지 생각이 안나서 잠깐 헤메기도 했다. 하지만 그 그림을 본 자리에서 얼마 지나지 않아 알 수 있었다. 바로 "천사"의 얼굴 이었다.


만약 두 사람의 화가가 한 사람의 모델을 두고 그림을 그렸다면, 서로 다른 두 그림에도 같은 얼굴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오클랜드 미술관의 그림은 19세기 말에 그려진 뉴질랜드 사람의 초상화였고, 안니발레 카라치가 그린 그림은 그 보다 300년 전쯤에 그려진 이탈리아 것이었다. 결코 한 사람을 두고 그린 그림일 수는 없었다. 그저 우연히 그림 속 얼굴이 닮은 것일 수도 있기는 했다. 하지만 내 눈에는 그렇지는 않아 보였다. 내가 뉴질랜드에서 보았던 그 그림 속의 얼굴, 그 사람이 이 그림 속에도 그대로 서 있다는 것을 똑똑히 알 수 있었다. 그냥 눈, 코, 입이 닮았다는 것이 아니라, 같은 사람의 같은 자태가 같은 힘으로 그림 속에 똑같이 담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만큼 뉴질랜드에서 본 그 그림속의 얼굴이 기억에 또렷이 남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처음에는 그저 신기한 일 정도로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후로도 자꾸 두 얼굴이 같다는 점이 쓸데 없이 계속 생각이 났다. 예를 들어서 라면 끓일 물을 데우고 있다가도 갑자기, "도대체 그 얼굴은 어디서 온 것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곧 나는 그 그림 속 얼굴을 분석해 보기로 했다. 나는 회절 분광 분석에 쓰이는 분자 구조 그림을 입체적인 여러 방향에서 겹쳐 보는 소프트웨어를 이용했다. 안니발레 카라치의 그림 속 얼굴과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초상화를 합성해 보았다. 정확히 맞아 떨어졌다. 소프트웨어의 추정 계산 결과로도 한 사람을 다른 각도에서 본 두 가지 모습임이 분명 했다.


어디까지나 그 소프트웨어의 계산 결과도 추정과 추산에 근거한 값일 뿐이기 때문에 그것만으로 증거가 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자료들을 모아 보기 시작했다. 두 그림의 재질, 화법, 사용된 물감, 그림을 그린 화가들의 인종, 수명, 생활 습관 등등에 대해서 알아 보았다. 공통점이라든가 서로 관계를 짐작할 수 있을만한 단서를 찾기 위해서 였다. 두 그림과 작가들은 그렇게 아주 잘 알려진 것은 아니었기에 자료를 모으는 데 시간이 꽤 걸리게 되었다.


그래서 그동안 나는 그 그림 속의 얼굴에 대해 더 선명한 기억을 갖게 되었다.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나는 날마다 여러가지 각도로 보이는 한 사람의 얼굴을 계속 크게, 작게, 밝게, 어둡게 하며 여러번 관찰했다. 그러자니 그무렵 즈음 나는 어느 곳에서건 항상 그 얼굴을 쉽게 떠올릴 수 있었다. 복사를 하기 위해 내 사무실 앞을 지나는 여자 대학원생의 얼굴을 얼핏 볼 때에도, 나는 그 그림 속 얼굴을 생각 했다. 그 그림 속의 얼굴과 닮은 점과 다른 점이 숨은 그림 찾기의 해답처럼 금새 떠올라 보였다. 구내 식당에서 줄을 서서 기다리면서 영양사 선생의 얼굴을 볼 때에도, 점심 먹고 빈 지갑을 다시 채우러 은행에 들렀을 때 번호표 기계 소리를 울리려고 단추를 누르는 은행원의 얼굴을 볼 때에도, 나는 그 얼굴 속에서 항상 천사의 표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러는 사이에 나는 두 그림 속의 얼굴과 꼭같은 얼굴을 몇 가지 더 찾아 냈다. 피에트로 코스탄치가 그린 그림 중에 한 성당의 벽에서 발굴 되었다는 그림이 있었다. 이 그림에는 구박 받던 성자가 기적을 일으켜 하늘로 날아가는 순간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오른쪽 아래에는 이 광경을 아름답게 여기지만 크게 놀라지는 않는 표정으로 보고 있는 한 귀부인이 그려져 있었다. 귀부인의 얼굴이 바로 "천사"의 얼굴이었다.


이 그림은 1700년대에 그려진 것이었다.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초상화 보다는 100년 앞선 그림이었고, 영웅을 유혹하는 천사의 그림 보다는 200년쯤 나중에 나온 그림이었다. 어느 쪽과도 관계가 없어 보였다. 그러나, 분석 결과는 이 그림속 얼굴은 나머지 두 그림의 얼굴과 같은 얼굴을 조금 다른 방향에서 그린 것이라고 했다. 16세기부터 19세기까지 4백년 동안 늙지도 변하지도 않는 사람이 있어서, 그 사람이 이런저런 그림 속에 계속해서 모델로 나타났던 것인가? 나는 이 그림 속 천사의 모습이 살아서 움직인다는 상상을 해본다. 그림 속의 천사가 살아 있어서, 마치 연기가 스며들 듯이 이 그림 저 그림 속을 옮겨 다니며 돌아다닐 수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해봤다.


그 다음으로 찾아 낸 것은 남유럽 시칠리아 섬의 한 오래된 건물에서 찾아냈다는 모자이크화 였다.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고 있는 아담과 이브를 그린 그림이었다. 두 최초의 남녀를 쫓아내고 있는 천사가 그림 속에 그려져 있었는데, 바로 이 천사의 얼굴이 "천사"의 얼굴이었다. 이 그림은 오래된 모자이크화 였기에 세부 묘사가 분명하지는 않았다. 이 그림과 닮은 얼굴은 어디서나 쉽게 찾을 수 있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 쉽게 찾을 수 있는 닮은 얼굴들 중에서, 바로 "천사"의 얼굴과 가장 닮았다는 결과를 얻게 되었다. 이 그림은 1200년대에 제작된 것으로 짐작된다고 했다. 다른 그림들과는 시대가 또 한참 더 떨어져 있었다.


이즈음 되자, 나는 이렇게 모은 잔뜩 쌓인 자료를 정리해서 읽을 거리로 만들어서 논문이나 간단한 보고서를 꾸며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천사가 살아 있어서 그림 사이를 돌아 다니고 있다거나 한 이야기보다, 좀 더 쉽게 받아 들일 만한 것으로 내용을 꾸며 놓을 수도 있었다. 예를 들어서, 긴긴 시대가 변하는 중에도 화가가 그림에 담는 얼굴 중에 어떤 것들은 아름다워 보이는 얼굴의 기준이 변하지 않고 있다는 내용 정도면 괜찮게 보일 수 있겠지 싶었다.


오래도록 변하지 않는 가장 아름다운 얼굴의 진정한 극치는 딱 한 가지 뿐인데, 화가들이 저마다 그 시대, 그 지역에서 가장 그것과 비슷한 얼굴을 찾아서 그렸기 때문에 한 사람의 얼굴인것처럼 꼭 닮게 된다는 내용을 나는 요란하게 꾸며 썼다. 그런 내용으로 이야기를 쓰면 써 댈 수록 나는 진짜 천사 같은 것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게 되었다. 긴 시간 동안 늙지도 죽지도 않고 사람들 사이에서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어떤 천사 같은 것이 계속 우리 사이에 숨어 있을 수도 있지 않나.


나는 갈 수록 더 많은 자료를 찾아 냈다. 보르게세 미술관에 새롭게 기증된 중동 풍의 옷차림을 한 여자 마법사 그림이 바로 그 천사의 얼굴이라는 것을 알아내기도 했고, 이탈리아 베네치아의 아카데미아 미술관의 음산한 교외 풍경 속에 그려진 아기에게 젖을 먹이고 있는 한 불쌍한 어머니의 모습이 천사의 얼굴이라는 것도 알아 냈다. 그렇지만 그림이 그려진 시대와 장소는 항상 저마다 다르게 흩어져 있었고, 도대체 그 그림 속 얼굴이 누구인지를 알려줄 이야기는 어느 자료에도 없었다.



5.
변하지 않고 여러 그림 속에 나오는 얼굴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로 나는 다시 돈벌이를 좀 하게 되었다. 그 돈벌이가 가장 잘 되던 무렵, 나는 대학원 시절 그녀의 돌잔치에 가게 되었다.


그러니까, 비행기 안에서 그러고 나서도 여전히 나는 그녀와 함께 "민스"에서 일하는 동료였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결혼식에도 갔고, 가끔 복도에서 마주치면 웃으면서 인사도 하고, 어색해서 죽을지언정 돌잔치에도 허허 웃으며 가게 되는 처지로 살고 있었다.
 
그녀가 나를 내다 버리던 때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 많던 그 돌잔치에서, 나는 호기로움을 과시하고 싶었는지 뭔지, 괜히 크게 웃으면서 주절주절 이야기를 떠들어 댔다. 그렇게 해서 많은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주도자가 된다면 아마 나는 조금 덜 버려진 놈 처럼 보일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호기심을 끌어 볼 이야기를 하면서 또 내가 멋있고 재미난 일을 하고 있다고,  내자랑도 좀 해 보겠다고 그 이상한 얼굴에 대한 이야기를 떠들었다. 과연 이 이야기는 재미가 있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내자, 한참 요란하게 여러 사람이 저마다 이런저런 생각을 늘어 놓았다.


어떤 사람은 그 여자는 정말 천사였고, 우리 옆에 어딘가에 있다가 인류에게 신성한 아름다움을 보여주기 위해 가끔씩 화가들 앞에 나타나 모델이 된다고 말했다. 그 많은 화가 중에 뉴질랜드 오클랜드의 초상화를 그렸던 사람이 가장 그 정체를 정확하게 알았기 때문에 그 사람은 그림의 제목을 "천사"라고 붙였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그 여자는 천사가 아니라 악마라고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인류 문명 발전을 계속해서 지켜보는 외계인이라는 생각을 내어 놓기도 했다. 비슷한 의견으로는 그 그림 속의 사람이 먼 옛날 불로불사의 수법을 포함하여 완벽한 인간이 되는 비술을 익힌 천재라서, 늙지도 죽지도 않고 가장 아름다운 모습으로 이곳저곳을 숨어 다니는 데 가끔 그 미모에 반한 화가들이 있어서 어쩔 수 없이 그림에 등장하게 된 것이라고 하기도 했다.


독특한 의견으로는 이 그림 속의 천사 같은 여자는 한 사람이 아니고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온 여러 사람이라는 것도 있었다. 얼굴이 모두 똑같은 것은 아주 특별한 유전자를 타고 났을 경우에는 그 자손에게도 그대로 모습을 꼭같이 물려 주는 수도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이런 희한한 특징이 있는 유전자는 우연히 생겨났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야기 하는 중에, 외계인 혼혈인 에게 이런 유전자가 있으므로 그게 물려져 내려온 외계인 유전자의 특징이라거나, 천사 혼혈인으로부터 대대손손 내려온 천사 유전자의 특징이라는 이야기로 가지를 치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들 중에 천사나 외계인이라는 설을 가장 흥미 진진하게 떠들던 사람은 바로 오늘 돌잔치의 주인공인 아기의 아버지였다. 다시 말해서 그녀의 "진정한 사랑"이었다. 그가 뭐라고 천사나 외계인, 인간과 문화에 대한 말을 이렇게 저렇게 꾸며서 말하면 이야기를 듣던 사람들은 저마다, "그거 기발하네" 라거나 "그 이야기는 참 좋네요" 운운하며 콧소리를 섞은 감탄사를 짧게 내뿜곤 했다. 때문에 이 그림 속의 얼굴은 "각박한 문명인에게 신비로움에 대한 순수한 감흥을 잊지 말라는 오묘한 섭리 때문에 계속해서 내려오게 된 선물"이라는 따위의 이야기가 결론으로 굳어지려 했다.


다만 쓸데 없이 소리를 높이며 그런 방향으로 굳어져 가는 결론에 반대한 사람이 한 사람 있었으니, 바로 다름아닌 나였다. 나는 내가 먼저 신기한 이야기랍시고 이 그림 속의 얼굴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으면서도 최대한 신비감이 없는 쪽으로 이야기를 몰아 보려고 하고 있었다.


"예전에 제가 그림 속의 그림 속의 그림 속의 그림이 몇 십 겹으로 계속 계속 겹쳐져 있어서 정말 조그마하게 분자 몇 개가 이루어져 그림을 이룰 정도로 엄청나게 작은 그림까지 그려져 있는 신기한 풍경화를 찾아낸 적이 있었습니다.


그 때, 이 그림이 그려지던 시대에는 도저히 이렇게 작은 그림은 그릴 수 없고, 심지어 현대 기술로도 분자의 구조로 그림을 그리는 것은 어렵다고들 했습니다. 그래서 그 그림이 시간여행자가 과거로 돌아가서 그린 그림이라거나, 외계인이 발달한 기술로 그린 그림이라는 이야기를 떠드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자꾸 그렇게 불가능한 쪽, 증명 못할 이야기 쪽으로 이야기를 몰아가면 답이 없어지는 겁니다. 결국 그 그림이 어떻게해서 만들어진 건지 조사해서 알아냈는데, 뭐 당연히, 외계인이나 시간여행하고는 아무 상관이 없었습니다. 이 그림은, 그림 속의 그림 속의 그림을 그리다가 정말 작은 그림이 그려야 할 때 분자 구조까지 조작해서 작디 작은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그리는 일은 당시에 있을 수 없었던 일이니까 일어나지 않는 게 맞는 겁니다. 그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우선 빼 놓고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알아보니, 이 그림을 그린 화가는 바로 당시 원자이론을 퍼뜨리던 화학자와 친분이 깊은 사이였습니다. 그래서 화가는 뉴질랜드 남섬에서 나는 꽃에서 추출한 물감을 쓰면 분자 구조가 어떻게 될 지 그 원자 이론의 학설을 전해 들은 적이 있었던 겁니다. 그러니까, 화가는 그림을 그리고 그림 속의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닙니다. 반대로, 화가는 먼저 분자구조의 모양에 대한 학설을 화학자에게 전해 듣고 그 분자 모양과 닮은 그림을 그린 겁니다. 그래서 분자와 원자의 구조가 이룰 모양과 닮도록 그 바깥의 그림을 그린 겁니다. 그러니까 그 화가는 배들이 드나들고 있는 제노아 항구의 풍경을 그리려고 애초에 먼저 마음 먹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화학 지식으로 상상할 수 있었던 분자 구조의 모양을 먼저 전해 듣고, 그 모양에 맞아 떨어질 풍경을 그 다음에 짜 넣었던 겁니다.


이 천사의 얼굴에 대해서도 그거랑 비슷하게 생각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천사가 진짜로 있다거나, 불로불사를 익힌 사람이 있어서 나돌아 다니고 있다는 생각은 일단 버려야 되는 겁니다. 그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니까, 있다고 생각 안하자는 겁니다. 있을 수 있는 일만, 있을 수 있는 거니까요.


그러니까 이 문제에 대한 해답은 최소한 이런 식이라도 되어야 할 겁니다. 멀리 로마 시대 즈음에 만들어진 어떤 대리석 석상이 있다고 합시다. 그게 무슨 의미심장한 보물인가보죠. 그래서 그 대리석 석상의 얼굴을 이런저런 각도에서 보고 수백년 동안 화가들이 자기 그림 속에 그려 넣었다는 겁니다."


사람들은 왜 하필 세계 각지의 많은 화가들이 그 대리석상의 얼굴 하나를 굳이 그렇게 꼬박꼬박 그림에 넣는거냐고 물었다. 그때 나는 허둥거리면서, "정말 대리석 석상이라는게 아니고..." 하고 둘러대기만 했을 뿐 매끈한 분위기로 이끌지는 못했다. 나도 사실 로마시대 대리석상 이야기는 그 때 그냥 급히 갑자기 떠올린 것일 뿐이었다. 결국 그날 내가 얻은 깨달음은 다음 한 가지 였다. 돌잔치는 아기와 그 부모가 주인공인 것이 마땅하고, 나는 거기서 쓸데 없이 말을 많이 한 보기 껄끄러운 놈이었다는 것이다.


그 다음날부터 나는 그렇다면 그 그림 속의 사람이 정말로 세상에 있는 사람인지 확인 해 보자는 생각이 들었다. 수백년 동안 불로불사로 계속 있었던 사람이라면 - 사람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 지금도 세계 어디인가에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세상 모든 사람들의 얼굴 중에서 이 천사의 얼굴과 똑같은 얼굴이 있는 지 찾아보기로 했다.


여권 데이터베이스의 사진을 검색했다면 훨씬 쉽게 일을 진행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일이 세계 평화와 특별히 관계가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그럴 수는 없었다. 그래서 나는 어떻게 닮은 얼굴들이라도 모아보면 무슨 규칙이라도 찾을 수 있지 않겠나 싶어 그냥 인터넷에 떠도는 온갖 종류의 인물 사진 중에서 같은 얼굴을 검색해 보기로 했다.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나는 그때 내 입으로 했던 이야기와는 다르게 정말 천사나 외계인을 만날 수 있게 되기를 한 마음으로 은근히 바라고 있기도 했다. 만약에 내가 천사를 찾아낸다면. 그러면 내가 남들을 좀 덜 부러워 하게 되지 않을까. 그러면 이미 든든한 교수 자리를 찾은 동료를 덜 부러워하게 되겠지. 돈이 넉넉해서 여유로운 삶을 살고 있는 친구나, 진정한 사랑과 결혼을 해서 쑥쑥 자라나는 자식을 지켜보며 돌잔치를 하는 사람들을 덜 부러워하게 되겠지.


그런데 검색 결과 중에 정확하게 일치하는 결과가 하나 나타나 버렸다. 그 얼굴. 그 사람이 이 세상 어떤 곳에 있다고 딱 맞게 확인되는 자료가 검색 되었던 것이다.


그 얼굴은 부산의 나이트 클럽 무용단 포스터에서 춤을 추는 "러시아 미녀 무용단"의 댄서 중 한 사람으로 나타 났다.



6.
이렇게 해서 나는 그 얼굴을 찾아 16층에서 떨어져 죽을 판에 놓이는 그 부산의 호텔에 오게 된다.


16층에서 떨어져 죽을 판에 놓이기 직전까지, 나는 수백년 동안 그림 속에 얼굴을 보였던 그 댄서를 찾아 다녔다. 그 나이트 클럽에도 찾아갔고, 그 나이트 클럽 포스터를 찍은 사진사와 포스터를 인쇄한 인쇄사도 찾아 다녔다. 이렇게 저렇게 알아낸 댄서의 동료들을 찾아가 보기도 했고, 그 댄서를 만날 수 있는 지 여러가지 경로로 연락을 해 보기도 했다. 나는 댄서가 "러시아 미녀 무용단" 소속이기는 했지만 사실은 우크라이나 출신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이와 이름도 알게 되었다. 살던 곳도 찾아 냈고, 지금은 어디쯤에 있을 거라는 소문도 여러 가지 알아 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정말로 그녀를 만날 수는 없었다.


그나마 나는 한 나이트 클럽 홍보 영상에서 동료들과 함께 춤을 추는 그녀를 볼 수 있었다. 아담과 이브를 내쫓던 그림 속의 그녀, 영웅에게 길을 안내하던 그림 속의 그녀, 성자의 비행을 지켜 보던 그녀, 중동의 마법사이던 그녀가 내 컴퓨터 화면 속에서 소녀 가수들의 빠른 노래에 따라 술취한 손님들 앞에서 반짝이는 의상 끝트머리를 흔들며 춤을 추고 있었다. 그 모습을 수차례 돌려 보면 돌려 볼 수록, 나는 그녀를 찾아 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반드시 만나서 도대체 누구인지 얼굴을 똑바로 보면서 대놓고 물어 보고 싶었다. "정말 천사입니까?"


그러다 마침내 해운대의 한 백화점에서 그녀의 옆얼굴을 보고 그녀를 찾아 내고, 그녀에게 말을 하기 위해 좇아 갔던 적도 있었다. 그녀와 거리가 가까워 지자 그녀는 나를 피하려고 했다. 그녀는 먼저 지하철을 타고 떠나가 버렸고, 나는 내 앞에 바로 있었던 그녀를 놓쳐 버렸다. 그렇게 되자, 나는 그녀가 내릴 만한 지하철 역과 그 주변을 계속 돌아다니며 찾아 다닌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지쳤고, 이럴 것이 아니라 방법을 바꿔서 다시 차근차근 해결책을 찾아 보자는 생각을 해 보기도 했다. 일단 다시 부산을 떠나서 돌아가서 차분히 정리하고 좋은 수를 마련해서 다시 돌아 오는 게 좋지 않을까.


그리고 그렇게 곱게 일단 떠나 보려는 데 맞닥뜨린 것이 바로 저녁 밤, 호텔 16층으로 찾아 온 두 사람이었다. 설명도 없고 소개도 없이 나타났다. 두 사람은 내 앞으로 걸어 왔다. 나는 겁을 먹고 도망친다. 그러다가 발코니로 몰린다. 16층. 높은 발코니, 바람이 부는 것을 느끼고, 바깥을 돌아 본다. 그리고 그 때 문득 발코니 건너편 다른 건물에서 이쪽편을 보고 있는 그녀를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나를 보고 있었다. 그녀의 얼굴이 분명히 보인다. 나는 혹시 지금 내 앞에서 나를 내던져 버리려는 사람들은 천사의 신비나 외계인의 비밀을 지키는 무슨 수호자 따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한다. 나는 떨어지기를 기다리면서 그녀를 본다. 저 건너편에 그녀가 지금 이렇게 정말로 내려와 자리를 잡고 나를 보아주고 있다면, 그렇다면 그녀가 나를 구해 줄 수도 있지 않을까. 내가 여기서 떨어져 내려도 단숨에 흰 날개를 펼치고 빈 밤하늘을 날아와 나를 살려 줄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게 되는 것 아닌가.


나는 더 이상 물러설 곳도 없고, 도망칠 곳도 없어서 발코니 난간 위에 올라 선다. 나는 내 앞의 두 사람이 나를 밀기 전에 내 발로 먼저 뛰어내릴 생각을 한다. 마지막으로 주춤했을 때 고개를 돌려 다시 그녀 쪽을 본다. 그런데 그녀는 없었다. 대신 그녀 곁에 있던 다른 사람들이 그녀의 자리에 있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큰 소리와 함께 요란하게 뛰어드는 많은 사람들이 내 방에 나타난다. 소리지르는 소리와 욕설과 물건들이 거세게 부딛히는 소음이 가득 들렸다.


"내려 오세요. 내려 오라고요!"


나에게 하는 말도 들린다. 나는 내려 선다. 내려 선다고는 하지만 넘어져 발코니 바닥에 나자빠졌다. 어지러운 가운데 휘말려 들어 몇번 넘어지고 여러번 두들겨 맞는다. 경찰들과 나이트 클럽의 경비 직원들과 다른 범죄자들이 뒤엉켜 험하게 싸운다.


이 일은 다음날 정리 되어 여러 부서 공무원들의 좋은 사진 찍기 재료로 나오게 되었다. 신문과 방송에서 기사로 실린 것은 그날 오후 였다. 그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았다.



7.
옛날 종이와 물감을 재현하는 새로운 수법을 이용해서 고도로 정밀한 가짜 그림을 그리는 조직이 있었다. 한국인을 중심으로 중국인, 필리핀인, 프랑스인이 뭉친 "업체"였는데, 이 사람들은 주로 조금 덜 알려진 옛날 화가들의 유명한 그림과 비슷한 그림을 그려서 옛날 그 화가의 그림이라고 하면서 비싼 값에 팔곤 했다. 이들은 다른 그림들을 조합해서 만들기만 하면 그림 자체의 전체적인 생동감이 부족해진다는 사실 때문에 그림에 등장하는 몇몇 인물들은 실제 모델을 기용해서 그렸는데, 그 중 한명이 바로 우크라이나인 댄서 였던 것이다. 위조 조직은 이 우크라이나인을 모델로 그린, 12세기, 16세기, 18세기, 19세기 여러 화가들의 그림들을 가짜로 그렸고, 그 그림을 세계 각지의 가짜 유통자들에게 새로 발견된 그림이라는 교묘한 사연을 갖도록 공급했던 것이다.


아직 새로운 기법을 확신하지 못하던 초기에 그려서 팔아 먹었던 그림이 별로 큰 값을 기대하지 않고 그렸던 뉴질랜드의 한 초상화 였다. 그때만 해도 아직 크게 주의하지 않던 실험 단계의 위조였기 때문에 19세기 그림을 흉내낸 것이기는 해도 사람 얼굴을 정확하게 알아 볼 수 있는 사실적인 얼굴 초상화를 그대로 그린 것이었다. 그런데, 아쉽게도 "민스"라는 뭔지 알아 먹을 수 없는 곳에서 일하는 엉뚱한 놈이 그 그림에 쓸데 없이 매달리기 시작했고, 그 놈이 어떤 영문인지 우크라이나인 댄서를 모델로 써서 그린 뒤에 팔아 먹은 위조품들을 하나하나 짚어 나갔던 것이다.


한편 그녀는 그림 모델이 된 적이 몇 번 있을 뿐, 위조품에 대한 일은 전혀 모르고 있었다. 대신에 그녀는 나이트 클럽 손님들 중에 자꾸 달려들어 해코지를 하는 정신병자 같은 인간들이 늘어나는 통에 골치아파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떤 놈이 나타나 왠간 주변 사람들을 들쑤시고 다니면서 사는 곳과 신분을 조사하고 다니는 통에 겁을 먹었다. 그녀는 나이트클럽을 관리하는 경비 직원들에게 이 사실을 말했고, 연락을 전해 받은 경찰도 그녀를 보호하기 위해, 주의 인물인 나를 따라 다니기 시작했다. 이때 위조범들을 나를 처리하려고 내 주변에 모여들게 되고, 경찰과 경비직원들은 갑자기 이상한 위조범들과 엉켜다는 것을 더욱 의심스럽게 여기고 나를 감시한다.


그러다 큰 사건이 벌어지려는 밤. 경찰은 멀리서 나를 지켜보면서 그녀를 데려와,


"저 사람이 그 미친듯이 따라다니는 정신나간 팬이 맞습니까?"


하고 물으며 내 얼굴을 보게 했고, 16층 발코니에 얼굴을 내민 나를 보고 그녀는 맞다고 확인 해 주었다. 그 다음에 벌어진 일은 내가 16층에서 떨어져 죽거나, 그녀가 날개짓을 하며 날아와 나를 구해 주는 대신에, 경찰이 덥쳐오고 이 모든 사람들이 뒤엉켜 싸우며 한바탕 난장판이 벌어진 것이다.


결과적으로 나에게는 좋은 일이었다고 생각 한다. 덕택에 나는 한동안 이곳저곳 미술품 경매하는 곳에서 연락을 받아, 그림 속에 "천사의 얼굴"이 있는 지 없는 지 감별해주는 일을 맡게 되었다. 한 번 그림을 스윽 보고, 그림에 나오는 얼굴들을 소프트웨어로 한 번 계산해 보는 것으로 받는 대가 치고는 수입도 썩 좋았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면, 발코니에서 마지막인것만 같이 그녀의 얼굴을 보던 그 매달린 장면에서 느꼈던 기분은 안타깝게 여겨질 때가 있다. 그때 돌잔치를 했던 그 남녀가 이제 둘째를 낳는 다는 소식을 들으면 부끄럽게도 아직 나는 기분이 어느 한 부분 정도는 답답해 진다. 그래서 더더욱 그날 밤 허공 저 편에서 나를 돌아보던 옆얼굴이 생생히 기억에 남아 있는 지도 모를 일이다. 또한 왜 하필 그 19세기 뉴질랜드 초상화가의 그림 제목이 "천사"였는지도 나는 영영 알 수가 없었다.


- 2011년, 남대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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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6
  • No Profile
    쑤우 11.10.29 15:17 댓글 수정 삭제
    연예인 누구와 몇퍼센트 닮았다고 말해주는 얼굴인식 프로그램과
    세상에는 날 꼭 닮은 사람이 3명은 있다는 이야기 같은게 떠오르네요.
    작품의 모델이 됐을 법한 실제하지 않는 우크라이나 댄서도 궁금하구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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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1.10.29 18:35 댓글 수정 삭제
    하필이면 우크라이나 사람이 나오는 것은 고백하자면 문득 Back in the U.S.S.R. 노래 가사가 생각이 나서 갖다 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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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도경 11.11.07 13:52 댓글 수정 삭제
    어떻게든 그 천사가 진짜이길 내심 바랬는데 결국은 러시아 사람을 가장한 우크라이나 사람이었군요 (그것도 좋긴 좋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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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1.11.08 08:38 댓글 수정 삭제
    어릴 때 신비한 사건이 일어나는데 주인공이 힘을 다해 파헤치고 보니, 사실은 악당들의 수법 때문에 그렇게 보인 것일 뿐이었다는 줄거리를 읽을 때마다 워낙에 좋아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요즘도 가장 자주 쓰게되는 이야기인듯 싶습니다. 점점 고정틀이 되면서 좀 식상해질 수도 있겠다 싶긴한데 마감 빡빡한 잡지 송고용이라 한 번 투척해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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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jamm 11.12.19 21:21 댓글 수정 삭제
    근데 말이죠, 천사 진짜루 다 내가 봤걸랑요. 내하고 같이 생활도 좀했고요.
    여기서 말하는 생활은 조폭들이 말하는 어 내 지금 생활 하고 있다 할때 그 생활이 아니고요. 저와같이 동거 했다는 거에요
  • No Profile
    곽재식 11.12.31 22:07 댓글 수정 삭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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