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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잠시 쉬어 가는 곳

2011.08.26 23:4408.26

 일요일 오후 호텔 영업점 22층에서 나는 그녀를 처음 보았다. 그녀는 결혼식장에 가도 어울리고 신입사원 면접을 가도 어울리는 옷차림으로 엘레베이터 앞에 있는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녀의 차림이 결혼식장에 가도 어울리고, 신입사원 면접을 가도 어울리는 모습이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예식장에 신입사원 공채가 났을 때 거기에 면접을 보러 가는 사람처럼 보였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 면접 자리가 있다면 그때의 그녀는 오히려 일찍 높은 자리에 오른 면접관으로 여유롭게 사람 구경이라도 하고 있는 것이 어울릴 것이다. 그녀는 무릎을 가만히 모으고 허리를 똑바로 세운채로 소파 위에 앉아 있었는데, 그러면서도 불편하거나 긴장한 모습은 조금도 없었다. 그 허리와 다리가 이루는 각도는 위세가 대단했다.

 그때 나는 호텔 직원 답게 그냥 웃어 보이며 여느 투숙객에게 대하듯이 그냥 인사나 하고 지나갈 수도 있었다. 그때 그랬다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나는 지나가기 전에 잠깐 멈춰서서 앉아 있는 그녀를 보았다.

 그 자리는 원래 내가 오후 로비 근무를 마치고 사무실 근무를 하러 들어가기 전에 잠깐 앉아서 쉬는 자리 였다. 지난 두 달 동안 그랬다. 로비 근무가 끝나고 사무실 근무를 하러가는 사이에, 담배를 피우는 직원들은 흡연 구역에서 어슬렁 거리면서 한 반시간 때우고 가곤 한다. - 손님들에게 냄새가 날 수 있기 때문에 로비 근무를 하기 전에는 담배를 피우지 못한다. 그러므로 로비 근무가 끝난 후에 담배를 몰아 피우면서 뜬소문이며 험담을 나누어야 하는 것이다. 어떤 직원들은 커피 자판기 앞에서 죽치고 앉아 어제 본 텔레비전 프로그램 이야기의 채널별 놓친 부분들에 대한 정보라든가 상사들의 흠결을 욕하는 것에 대한 정보를 서로 메꾸어 깨끗하게 채우며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나는 흡연자도 아니었고, 텔레비전을 좋아하는 편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해서 나만 교대시간이 끝나자 마자 바로 사무실로 들어가 즉시 일을 한다면 좀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지나다니는 사람이 별로 없는 22층 객실 엘레베이터 앞에 와서 혼자 조용히 쉬다가 가는 쪽을 택했다.

 어느 층, 다른 구석보다 22층 엘레베이터 앞이 좋았다. 엘레베이터 앞에서 같은 층 서로 다른 객실에 있는 손님들이 서로 만나는 일이 많았기에 보통 규모가 큰 호텔에는 엘레베이터 앞에 의자 하나 둘 즈음 같다 놓기 마련이다. 내가 일하고 있는 호텔의 경우에는 "내 집 거실에 있는 듯이 편안한 느낌"을 전해주자면서 엘레베이터 앞을 작은 탁자와 마주보는 소파가 놓인 모양으로 꾸며 두고 있었다. 22층의 경우에는 공간이 넓어서 가짜 벽난로도 있었고, 편안하게 늘어져 기댈 수 있는 푹신한 방석도 많았다. 몇 시간 동안 자리에 앉아 있어도 특별히 지나다니며 말하는 사람도 없다. 이러면 왠만큼 분위기 좋다는 식당 보다 낫다. 잠깐 쉬자고 배고프지도 않은 데 디저트 하나를 먹어야 하는 가게 따위 찾아갈 필요조차 없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 절묘한 곳을 발견했다는 것을 비밀스러운 자랑거리로 생각하고 있기까지 했다.

 무엇보다도 22층 엘레베이터 앞은 바깥이 내다 보이는 창문이 있었다. 22층 아래를 보며 이 호텔을 둘러 싸고 있는 도심의 많은 빌딩들과 그 길 사이에 소음과 같이 답답하게 차 있는 차와 사람들이 까마득히 내려다 보였다. 푹신한 22층 엘레베이터 앞 자리에 앉아 있으면, 저 시끄럽고 바쁜 도심은 멀리 떨어진 일인 것처럼 유리창 바깥 먼먼 구경거리로만 보일 뿐이었다. 심지어 22층, 오후 시간에는 객실 청소하는 직원들 조차 일을 모두 마친 후여서 정말 고요 했다. 그러면 나는 한 10분, 15분 정도 다리를 쉬며 편안하게 기대고 앉아서, 한 번에 두 세 페이지씩 읽고 마는 책이나 몇 장 넘기는 것이다. 그래서 2년째 읽고 있는 서머셋 몸 단편집. 그러고 있으면, 잠깐 동안은 내가 이 도시의 왕이 되어서, 번잡한 저 모든 것들이 숙연히 멀리 물러나 조용히 업드려 있는 것 같다는 상상도 잠시 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날은 나 대신에 그녀가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아주 여유로운 모습으로 책을 읽고 있었다. 그녀가 펼친 페이지에는 "마치 커피 열매 한 알을 실에 매달아 펄펄 끓는 커다란 보일러 물통에 1분쯤 담갔다가 꺼낸 듯, 맛이 심심하기 그지 없었다"라는 말이 씌여 있는 것이 보였다. 코넬 울리치 단편집. 그 편안한 모습은 어떤 제국의 여왕과도 같아 보였다. 그러자니 나는 잠깐 주춤 하면서도, 어째 따져 묻고 싶어 졌다. 나는 몇 초 간이었지만, 내 나라를 빼앗긴 독립운동가와 같은 마음이 되어 그녀에게 물었다.

 "손님, 죄송합니다만, 혹시 투숙하고 계신 객실 번호가 어떻게 되십니까?"
 "예?"

 그녀는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아까까지 유지되던 그녀의 편안함이 깨어지는 것을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불안감이 빚어내는 생동감이 떠올랐다고 생각한다. 그녀는 바로 답을 하지 못한다. 그녀는 머뭇거린다. 나는 그녀의 곧은 허리가 위치를 잃는 것을 본다. 그녀는 아무도 없는 유리창 쪽으로 잠깐 두리번 거린다. 그녀가 말한다.

 "제가, 음... 투숙하고 있는 건 아니고요. 여기 지나가다가 다리가 아파서 잠깐 쉬어 가려고요."

 그녀는 "잠깐"이라는 단어를 정말 짧은 시간이라고 표현하기 위해 길게 늘여 자아암깐 하고 발음 한다. 나는 패전한 나라의 여왕에게 너그러운 표정을 지어 보인다.

 "손님, 여기는 저희 투숙객들께서 엘레베이터 기다리시느라 이용하시는 곳이라서요. 이제 좀 쉬셨어요? 아니시면... 저희 1층 로비에 커피숍이랑 시티 라운지가 있습니다. 그 쪽으로 이용해 보시면 어떠시겠습니까?"

 그녀는 "예, 예" 라는 짧은 의미 없는 말을 한다. 최후의 단말마라고 되뇌여 본다. 그녀는 읽고 있던 코넬 울리치 단편집을 가방에 집어 넣고 짐을 챙긴다.

 나는 그렇게 말을 해두고 그대로 내가 갈 길로 갔어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자리에 서서 그녀가 일어날 때 까지 기다리면서 지켜 보고 있었다. 어쩔 수 없었다. 나는 22층으로 올라오기 직전, 다른 로비 직원들에게 어떻게 호텔에 들어오려고 하는 노숙자나 잡상인들을 쫓아 내는지에 대한 회의를 했던 것이다.

 로비 안에서 근무를 하려면 로비 바깥의 지구 위 나머지 지역에서는 하지 말아야하는 것이 옳다는, "사람을 겉모습으로만 보고 평가하기"를 해야 한다. 호텔 문 앞으로 들어 서는 사람의 복장 세탁 정도, 다림질 상태, 상의와 하의의 어울림, 신발, 얼굴과 피부의 청결도, 머리 모양, 머리를 빗은 형태 등등을 재빨리 살펴보고 이 모든 것을 종합해서 단숨에 평가를 마쳐야 한다.

 그렇게 해서 이 사람은 호텔의 "손님"이 될 자격이 없다고 판단되면 움직여야 한다. 혹시 가까이에 있는 직원이 정확히 발견하지 못했다면 다른 직원이 가만히 알려줘야 한다. 손가락질을 하거나 턱으로 가리키는 것은 매출액 5위권에 들지 못하는 호텔 브랜드에서나 하는 것이다. 아무도 알아보지 못하지만, "저 거렁뱅이를 빨리 쫓아내" 라고 가만히 전달해야 한다. 그러면, 그 사람을 문앞에서 바로 몰아 낼 수 있는 위치로 먼저 발을 내딛고 달려 가고, 그 "거렁뱅이"에게 "손님, 어떻게 도와 드릴까요?" 라고 물어야 한다. 이 말은 호텔의 회장에게나 처갓집에나 언제나 똑같이 진실해 보여야 한다는 웃음을 얼굴에 머금고 언급되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거렁뱅이가 이 호텔의 상쾌한 냉난방 상태와 은은한 방향제 냄새를, 대가 지불 없이 즐기기 전에 쫓아 내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분기부터 우리 팀에서 추진하고 있는 "글로벌 브랜드 부스팅 전략"에 따르면, 사실 반드시 이 호텔에 돈을 낼 사람만 들어올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훨씬 너그럽게 사람을 출입하게 할 수 있다. 전략 메뉴얼에 나와 있는 대로, "호텔에 들어선 잠재 고객이 활기를 느끼고, 호텔에 즐거운 느낌을 느낄 수 있는 영향을 줄 수 있다면", 적어도 그럴 가능성이라도 아주 약간이나마 있다면 얼마든지 하릴 없이 들어오게 해 주어도 상관 없다. 만약, 길 두 개 건너 사무실에 있는 연예기획사에 주말특집극 조연 오디션을 보러 온 100명의 배우지망생들이라면, 이 호텔에 단체로 드글드글 들어 와서 그저 체크인 카운터에 놓인 공짜 사탕 접시에서 사탕만 집어간다고 해도 얼마든지 들어오게 해 주어도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지금 사정 없이 무너져 부끄러워 하며 물러나고 있는 그녀는 충분히 호텔에서 모셔 마땅한 거렁뱅이였다. 그녀의 자태라면 우리 직원 모두가 압도 당하여 존경의 몸짓으로 주문을 받고 화장실의 방향을 안내할 만하였다. 괴이한 가격표의 음식이나 차를 주문하는 손님들을 존경의 눈빛으로 우러러 보며 자연히 충성스럽게 구는 신입 직원들을 눌러 버릴 수 있는 모습 이상이었다. 왠만한 행색의 손님을 두고는 언제 본 어떤 손님에 비하면 엄청 한심해 보인다면서 결코 명확히 걸러낼 수 없는 정묘한 무성의함으로 손님을 대하기 마련인 3년차 직원들 또한, 그녀에게만은 가장 솔직히 환영할 수 있을만큼 그녀의 모습은 좋았다.

 문제는 하필이면 그녀가 이 일요일 오후 22층 엘레베이터 앞 소파에 앉아 있다는 점이었다. 나는 약간 죄책감 비슷한 것을 느끼기는 했다. 어떻게 보면 동정심 같은 것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엘레베이터가 개방 되어 있어서 누구든 객실이 있는 층까지 올라올 수 있는 한국 호텔들의 특징을 이용해서 눈에 잘 안 뜨이는 편안한 앉을 자리를 찾아 이곳 22층까지 찾아 온 사람이었는데.

 그녀가 엘레베이터를 타고 내려가자, 나는 그녀가 앉던 자리에 앉았다. 역시 가장 편안한 자리였다. 나는 곧 이 정도 일이야 그저 잊기로 했다.

 그 후 1주일이 지났다. 1주일이 지나는 동안 나는 호텔 영업점이 아닌 본사로 다시 돌아 가서 일했다. 영업점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충만한 질투를 담아 흔히 "WHQ에 누구누구"라고 본사에서 일하는 사람들을 부르곤 했다. 나는 "WHQ의 누구누구" 중 한 명이었다. 나는 진급을 앞두고 있었고 매번 진급 심사 때마다 돌아오는 영업점 실습 근무를 하는 중이었다. 새로운 고객 대응 전략을 개발하고 시험하기 위해 회장 직속으로 무슨 부서를 만든다는데, 이번에 진급이 되면 그 부서로 뽑혀 갈 수 있다고 했다. 나 같은 경우에는 영어를 잘한다는 이유로 별 다른 어려움 없이 거기로 갈 수 있을 거라는 소문도 있었다. 그러니, 가끔 돌아오는 영업점 실습 근무는, 그냥 적당히 쉬엄쉬엄 신입직원들이랑 농담 따먹기나 하면서 지내도 되는 거 아니냐며 부러워 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그렇지만, "WHQ의 누구누구"들을 싫어하는 기색을 은근히 강하게 뿜어내던 영업점 직원들 사이에 있는 것은 그렇게 편한 일은 아니었다. 영업점 실습을 하는 주말이 되자, 나는 로비 근무를 하다가 사무실 근무로 넘어갈 때 그 잠깐 쉬는 시간을 한 나절 내내 기다렸다.

 그런데, 22층 엘레베이터 앞 자리로 가보니, 또 그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가 앉아서 보는 책에는 이번에도 "마치 커피 열매 한 알을 실에 매달아 펄펄 끓는 커다란 보일러 물통에 1분쯤 담갔다가 꺼낸 듯, 맛이 심심하기 그지 없었다"라고 씌여 있었다.

 나는 그녀 앞으로 가서 훌륭한 웃음을 만들어 보이며 물었다. 이와 같이 훌륭한 웃음을 지어 보인 적이 평생에 채 세 차례가 있었던가 싶을 정도의 품질을 자랑할만한 미소였다.

 "실례합니다만, 손님, 혹시 투숙하고 계신 객실 번호가 어떻게 되시나요?"

 그녀는 고개를 들어 내 얼굴을 본다. 그녀는 나를 보자 마치 반기는 것처럼 너그럽게 되웃어 보인다. 그러자 나는 뒷걸음질을 칠 뻔 한다. 하지만 나도 웃음을 잃지는 않는다. 그녀는 무슨 이유인지 즐거운 목소리로 말한다.

 "제가 여기 머물고 있지는 않고요. 만날 사람 누구 좀 기다리고 있느라고요."
 "아, 그러십니까?"

 나는 소리를 내어 한 번 웃어 보인다. 우리는 그와 같이 다정한 손님과 종업원으로 대화를 마치고, 나는 물러 서게 된다.

 그녀가 다시 그 편안한 미소를 되돌려 읽던 책으로 돌아 가려는 데, 내가 그 마지막 틈에 돌아서며 다시 말을 걸었다.

 "그런데, 그러면 이 층에서 만나기로 하신 겁니까?"
 "예."
 "그러면, 정말 죄송합니다만, 손님. 그 만나실 일행분께서는 투숙하는 객실 번호가 어떻게 되시나요?"
 "객실 번호는 모르고요. 그냥 이 층이라고만 알고 있는데. 뭐 기다리다보면 만날 수 있겠죠, 뭐."

 나는 그 말을 듣자, 옳다거니 싶었다. 이런 기분이 요나라의 대군이 쳐들어 왔을 때 역전승으로 물리친 강감찬 장군의 기분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 였다.

 "손님, 저 죄송합니다만, 지금 제가 조회해 보니까 여기 22층에는 투숙객이 한 분도 안 계십니다. 혹시 손님께서 층을 잘못 알고 계신 것 아닙니까?"
 "예?"

 그녀는 당황하였다. 그녀는 읽고 있떤 책을 덮으며 잠깐 내 얼굴을 아무 말 않고 쳐다 보았다. 나는 패잔병을 추격하듯이 다시 물었다.

 "혹시 만나 뵈실 뿐이 누구시고 어떻게 약속하셨는 지 알려주시면 제가 어떻게 도와드릴 지 같이 찾아 보고 알아 봐 드릴 수 있는데요."

 그러나 그녀는 잠시 후 존경스러울 만큼 좋은 미소를 얼굴에 만들어 보였다.

 "아뇨. 괜찮습니다. 제가 그냥 연락해 볼께요."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그대로 22층 엘레베이터 앞 자리를 떠났다.

 나는 그녀가 도대체 누구인지 궁금해졌다. 가끔 그런 사람들이 있기는 했다. 무슨 추억이 있는 지, 사연이 있는 지. 계속 한 장소에 찾아 오는 사람들이 있었다. 이런 사람들도 있었다. 한 때 영영 그러고 살 수 있는 사람들 사이를 따라다니며 빛나는 건물, 찬란한 식당, 행복한 옷들을, 마치 바구니에서 쏟아지는 비누방울처럼 풍성히 경험해 본 사람들 말이다. 그런 사람들 중에 일부는 그 모든 것이 다 그냥 흩어져 사라진 지금도, 그저 겉에 빛나는 허영을 따라 자꾸만 그 근처에 오고 싶어 한다. 어떤 근사한 곳에 다시 들어 서면 기쁜 옛날이 다시 돌아올 기회를 잡을 수 있게 될 것만 같이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이 호텔에 그런 마음으로 자주 오는 사람들을 몇 알고 있었다.

 1주일이 또 지나는 동안 잠깐씩 조사해 봤을 뿐이었지만, 나는 생각보다 훨씬 쉽게 그녀에 대해 알아낼 수 있었다. 그녀는 배우 였다. 그때는 이미 배우가 아니라고 하는 것이 더 옳을 지도 모르겠지만. 그녀는 몇 년 전에 잠깐 여기저기에 바쁘게 불려 다녔던 배우였다. 22세, 23세 사이 2년간. 채 24개월이 못되는 시간 동안 꽤 많이 나오던 사람이었다. 특히 그녀가 눈물을 흘리며 우는 장면은 대단한 장면으로 모두들 떠들어 대는 이야기 거리였다. 그녀가 한창 유명하던 그 여름에는 기자들마다 "눈물 연기"라는 말을 쓰는 것이 유행이 되어, 그녀 이외에도 무슨 여배우가 슬픈 장면에 나오기만 하면, "몰아치는 눈물 연기" "절제된 눈물 연기" "최고의 눈물 연기" "눈물 없는 최고의 눈물 연기" 따위의 말을 버릇처럼 써 대기도 했다.

 그런데 어떻게 기회가 안 맞았는지, 말못할 뭔 사건이 있었는지, 아니면 무슨 신비로운 연예계의 마법인지, 그 2년이 지나갈 무렵 그녀는 갑자기 전속력으로 잊혀지기 시작했다. 지금도 그녀의 얼굴을 보면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많기는 할 것이다. 그리고 옛날 그녀가 나왔던 영화에 대해서 이야기하면 모두가 뭔지는 안다는 얼굴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정작 그녀를 화제로 대화하는 이야기는 이제 전국 방방곡곡 어느 잡담 속에서도 찾아내기 어렵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때의 그녀가 지난 2주일 동안 갑자기 다시 나타나서 호텔 상등급 객실들이 있는 층 앞에서 오후 시간을 때우다가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이런 것은 꽤 신기한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에게 그냥 대놓고 따지고 싶기도 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냐고, 호텔 로비에서 커피를 사서 마시고 앉아 있을 돈도 없어서 이러냐고 물어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두 번이나 그녀를 물리 쳤지 않은가. 이제 그녀는 다시는 나타나지 않을 거라고 생각 했다. 그러고나니 좀 아쉽다는 생각도 아주 조금 들었다.

 그런데 내가 아쉽게 생각한 그 찰나를 어떻게 엿보기라도 했는지, 1주일이 지난 일요일 오후에 그녀는 그 자리에 또 앉아 있었다. 그녀는 지난 2주일은 마치 이 세상 시간의 역사에서 사라지기라도 한 것처럼 여기고 있는 듯,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녀는 방금 전까지 저 객실 중 한 곳에서 자다가 차려 입고 나오기라도 한 것처럼 정말로 편안하게 앉아서 쉬는 모습으로 그 자리에 있었다.

 "손님, 실례합니다만 혹시 일행분 기다리고 계신 건가요?"
 "아뇨. 이거 어쩌죠. 여기 이렇게 계속 다니면서 보다보니까 제가 발을 좀 삐끗한 것 같아서요. 제가 서 있고 걸어다니가 어려워서 좀 앉아 있어요."

 그녀는 얼굴을 살짝 찡그리면서 또 재밌는 이야기라도 하는 것처럼 웃어 주었다. 이제 나는 그녀의 웃음에 화음을 이루어 주는 것처럼 바로 맞받는 미소를 보낼 수도 있었다. 내가 다시 말했다.

 "그러시면, 제가 아예 저희 직원 사무실 쪽에 있는 침상으로 데려다 드리면 어떻겠습니까. 거기가면 파스랑 얼음찜질할 것도 좀 있고 한데요. 손님 부상도 저희는 주요 보고사항이라서요."
 "아뇨. 제가 서서 잘 걷지를 못해서. 어딜 가는 것 보다 그냥 여기 있으면 좋을 텐데..."
 "손님, 그럼,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저희 응급요원에게 연락해서 여기로 와서 치료해드릴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녀는 한숨을 쉬었다.

 "아닙니다. 그러실 필요까지는 없구요. 일어 설 수는 있을 것 같네요. 저도 어차피 다른 약속이 또 있으니까, 가봐야겠네요."

 그녀는 일어나서 자리를 떠났다. 그녀는 일어나고 엘레베이터로 가는 동안 일부러 발목이 아프고 다리를 다친 듯이 절뚝거리는 연기를 했다. 이 시점에서 그녀는 어차피 쫓겨 나가는 처지였으므로, 이렇게 연기를 해서 나를 속일 이유가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발을 삐끗했다"고 아까 거짓말 한 것을 들키지 않기 위해 이렇게 발을 삐끗한 척 연기하고 있다. 그녀의 이 절뚝거리는 연기는 정직하지 못한 자신을 덮으려고 하는 초라한 거적데기 였다. 이미 발 삐었다는 속임수는 아무 소용 없는 것이지만, 그래도 거짓말한 것은 아니라고 과거의 명예라도 건져가기 위한 과거로 날아가는 거적데기인 셈이다. 지금 엘레베이터로 들어가면서 내가 보라고 절뚝거리는 뒷모습을 보이는 척을 할 때, 아! 그녀는 얼마나 비굴할 것인가.

 그런데 1주일 후, 그녀는 또 나타났다. 일요일 오후, 호텔 22층 아무도 없는 엘레베이터 앞 소파에 그녀는 또 있었다. 내가 그녀의 비굴한 뒷모습을 통쾌 해 하던 것을 벌써 잊었는지, 그녀는 거기에 또 자리를 잡고 있었던 것이다.

 "아, 저는 여기 호텔 베이커리 이용했는데요. 호텔 베이커리에는 따로 앉아서 먹을 데가 없더라고요. 그래서 이것 좀 먹고 가려고요."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호텔에 있는 빵집에서 산 5백원 짜리 초콜렛 칩 과자 하나를 들어 보였다. 그녀는 말을 하면서 자기도 좀 민망하다는 듯이 내 관용과 동조를 유도하는 웃음을 웃어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반대로 뭘 이렇게까지 하냐 싶어서 도리어 더 몰아 내고 싶다는 생각이 치밀었다.

 "정말 죄송합니다. 손님, 저희 베이커리는 다 제품을 손님께서 포장해서 가져 가시는 것만 두고 운영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손님, 저희 베이커리 제품은 저희 다른 레스토랑에서도 드실 수가 없으십니다. 어휴, 어쩌죠. 정말 죄송합니다."

 나는 그녀에게 미안하다는 내용을 말했다. 간곡하고 굽실거리며 나는 죄송하다고 그녀에게 빌어 댔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죄송하다는 말을 한 번 할 때 마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라고 손목을 잡고 끌어 당기는 느낌을 한 번씩 받는 듯이 앉은 자세가 바뀐다. 그녀는 곧 과자를 한 입에 쏙 던져 넣었다. 그녀는 다시 자리를 떠나 갔다.

 그녀를 떠나 보낸 자리에 앉아 있으니, 역시 편하기는 편했다. 그렇지만 그런 편한 자리 만큼 머릿속은 뒤숭숭해졌다. 본사에서는 진급 발표에 대한 여러 가지 소문이 막바지 기세로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누구는 불륜 문제가 도가 지나치도록 심해서 사생활에 문제가 있다는 둥, 누구는 누가 호텔 부지 사들일 때 돈 먹은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함부로 못한다는 둥, 누구는 지난 번 식중독 사고 때문에 회장한테 밉보여서 그 후로는 아무리 잘해도 소용이 없다는 둥. 그런 이야기들이었다. 아직 나는 무슨 소문에 휩싸일 만한 직급도 아니었고, 실제로 아무 소문이 없기도 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여직원 휴게실 근처 같은 곳을 지날 때에,

 "걔는 어떻게 바로 WHQ로 들어가서 그렇게 쭉쭉 치고 나간데? 이번에는 또 회장 직속 부서로 까지 간다면서. 이거 뭐 누가 봐주는 사람 있는 거 아닌가, 그런 얘기도 있더라고."

 정도로 수군대는 이야기를 전해 듣기는 쉬웠다.

 한 번은 부장이 날 불러서 사람을 떠보는 말들을 물어 보았다. 부장은 이럴 수록 영업점 실습 같이 별 것 아닌 일에 초점을 맞춰서 열심히 일을 하면서 그냥 차분하게 기다리면 잘 풀릴 거라고 했다. 부장이야 말로, 내가 꿈꾸던 것처럼 본사 중심 부서에서만 똑바른 직선 방향으로만 사다리에 사다리를 타고 올라간 사람이었다. 나는 "사람을 항상 충직한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표어를 내건 호텔의 직원 답게, "예, 예, 맞습니다. 잘 알겠습니다" 하고 부장의 조언에 다지고 다져 대답했다.

 내가 그녀를 마지막으로 물리친 것은 그 다음 주 였다. 이번에 그녀는 호텔을 소개하는 소책자 광고물을 들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녀는 그 소책자를 마치 아파트 모델하우스에 있는 전단 처럼 읽고 있었다. 그래서 그 때의 그녀는 읽어 보다가 기분 내키면 이 호텔을 확 사버릴 수도 있다는 여유로운 태도로 보일 지경이었다.

 "음, 호텔에 볼 거, 할 게 참 많아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어떤 게 재밌을 지, 한 번 주욱 찬찬히 읽어 보고 있었어요."
 "예."
 "이거 자료도 참 잘 되어 있네요. 앞뒤로 내용도 상세하고, 재밌고."

 나는 그녀에게 물었다.

 "궁금하신 내용 있으시면 저한테 물어 보시면 됩니다. 손님, 어떻게 주로 숙박 위주로 궁금하신가요, 아니면 드랍-바이 위주로 일정 생각하고 계신가요? 어떤 쪽으로 보시는 가에 맞춰서 저희가 할인 프로그램 쪽으로도 소개해 드릴 수 있는 것도 많이 있거든요."

 그녀가 대충 나를 좇아 버릴 심산으로, 고개를 끄덕거리고 웃으며 몇 번 "예, 예" 하고 웃는 동안 나는 사정 없이 호텔 소개를 성심성의껏 퍼부어 대었다. 그것은 목표를 똑바로 보지도 않고 떨어뜨려도 어쨌거나 많은 양을 퍼붓는 다면 하여간 다 망가지게 된다는 융단폭격 전법과 비슷한 것이었다. 그녀의 그 넉넉하고 부유한 연출은 하나 둘 갈라져 떨어져 나갔다.

 마침내 그녀는 내 긴긴 소개의 말 속에서 어떻게든 정말로 하나 짚지 않으면 피할 구멍이 없다는 점을 알게 되었다. 그녀는 망해가는 나라의 힘없는 최후의 반격으로,

 "제가 그냥 이거 찬찬히 한 번 다 읽어 보고요. 혹시 모르는 것 있으면 물어 볼께요."

 하고 말했다.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 실제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말도 그렇고, 총체적으로도 나는 그녀가 22층 엘레베이터 앞 자리에서 물러 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으니까. - 답했다.

 "예, 그러십시오. 제가 여기 있을 테니까, 궁금하신 건 뭐든지 물어보시면 됩니다."

 그리고 나는 그녀 앞에 똑바로 서서 계속 그자리에서 기다렸다. 다른 곳에 가지 않고 그녀 곁에만 서서 기다렸다. 그녀는 한 3분간 호텔 소개를 읽는 척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전혀 아무 관심도 없을 호텔 수영장 일정에 대한 것을 주섬주섬 물어 보았다. 그녀는 정말 물어 볼 것이 없었는 지,

 "수영장 물은 언제 마다 한 번씩 가나요."

 같은 따위를 물어 보며 질문을 마쳐야 했다. 그렇게 그녀는 엘레베이터로 퇴장했다.

 나도 이 정도까지 매번 그녀를 마주할 생각은 사실 없었다. 한 두어번 쯤은 그녀를 편안하게 22층 엘레베이터 앞 소파에서 마음껏 쉬게 해 줄 수도 있었다. 좀 심하다 싶으면 그 때 몰아 붙여도 크게 안될 것은 없지 않겠는가.

 만약 이 영업점으로 영업점 실습을 온 본사 쪽 사원이 나 말고 하나 만 더 있었어도 정말 그렇게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영업점에 온 본사 쪽 사원은 나 혼자 밖에 없었다. 혹시 이 호텔에서 뭐라도 하나 이상한 이야기 거리라도 하나 생기면 뭐든지 나랑 얽힐 것 같다는 생각이 계속 들었다. 그렇게 또렷하게 생각을 한 것은 아니었지만, 허물어져 가는 초가집 흉가에 감도는 음산한 기색처럼 그 비슷하게 냄새처럼 맡을 수 있는 형태로 생각이 돈다는 기분이었다. 괜히 직원들 사이에 도는 헛 풍문들이 워낙 많아서 더 그런 느낌이 들었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었다. 그녀가 집에서 싸온 생수 한 병이나 자판기에서 뽑은 소다 캔 하나를 들고 여유롭게 22층 엘레베이터 앞 소파에 앉는다. 그녀는 여유롭게 책을 보면서 세 시간 장도 편안하게 쉬면서 물이나 소다를 마신다. 공기는 딱 적당하게 시원하고 창밖의 풍경은 아름답다. 세계에서 가장 좋은 향기를 뒤져서 달아 놓은 이 호텔의 방향제는 물 한방울 튀지 않았지만 온몸을 깨끗하게 씻고 뽀송뽀송하게 말리고 있는 느낌을 들게 해준다. 심지어 이곳은 조용하기까지 하다. 그녀는 지점이 수백개씩 퍼져 있는 커피 가게들도 값을 더 받곤 하는 이 도심 한 가운데에서, 뭘 사먹지 않아도 얼마든지 더 편안하게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을 찾았다고 기뻐한다. 그녀는 돈 들여서 커피 전문점에 갈 필요 없이, 이곳 호텔 22층, 15층, 19층으로 가서 엘레베이터 앞 소파에 앉아 있으면 된다는 사실을 중대한 깨달음이라고 생각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인터넷을 통해 퍼져 나간다.

 그러면 남들이 돈을 아끼기 위해 하는 행동을 따라하는 것이 자신의 지능 또한 올려준다고 생각하며 떼로 모방하는 그 많은 무리무리들이 하나 둘 이 호텔로 몰려들 것이다. 곧 머지 않아 이 호텔에는,

 "22층에서 쉬고 놀 때는 그럴듯하게 놀러온 사람처럼 옷차림만 말끔히 차려 입고 있으면 됩니다. 다들 정말 관광객인 줄 알고 아무도 뭐라고 하는 사람 없습니다."
 "호텔 직원들이 말 못걸게 일본인이나 중국인 관광객인척하고 앉아 있으면 됩니다."

 라고 서로 자신들의 속임수 기술을 나누기도 하는 그 많은 사람들이 와글와글 몰려 들 것 아닌가.

 나는 아직 그녀가 자리를 옮겨 둔 자리에 있는 소파의 방석들을 보면서, 그녀가 앉던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문득 그녀가 배치해 놓은 모양이 더 앉아 있기에도 편안하고 보기에도 더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윽고 진급 발표가 나기 전 마지막 영업점 실습을 하는 날이 찾아 왔다. 그날 따라 백화점에서 특별 행사를 한다고 해서 근처 교통이 유난히 엉망으로 북새통이었다. 지금 돌아보니, 백화점도 일종의 시장이라고 생각해 보면, 그게 바로 "가는 날이 장날이다"는 속담과 맞아 떨어지는 전조가 아니었나 싶다. 그날 그 일대의 요란하고 찌들어 빠진 갑갑한 공기를 뚫고 호텔에 출근 해 보니, 호텔 안은 그렇게 아늑하고 상쾌할 수가 없었다. 마치 이 안이 다른 세계라도 되는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다.

 나는 마지막 날인만큼, 오늘은 중간에 괜히 쉬지 말고 로비 근무를 마치면 바로 사무실로 가서 연달아 일하겠다고 생각 했다. 그래서 나는 로비 근무를 평소 보다 조금 더 하고, 사무실 근무는 평소 보다 조금 덜 하려고 했다.

 그런데 로비 근무를 마칠 때 즈음이 되자, 나는 이제 본사에 새로 생기는 회장 직속팀으로 들어 가고 나면, 이 영업점에 다시 올 날은 영영 또 오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용으로 로비 가운데에 서서 한복을 입고 가장 먼저 손님을 맞이하는 직원과 농담도 한 마디 했다. 안내 역할을 맡은 아리따운 여자 직원과 문지기 역할을 맡은 덩치 좋은 남자 직원들이 서로 자주 시시덕 거리는 것은 자연의 섭리이지만, 이 호텔의 엄격한 규칙은 그걸 말리고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에 그날만큼은 나는 좀 헐렁하게 행동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나는 과연 그 22층 엘레베이터 앞 자리에 오는 그녀는 어쩌고 있을 지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신입 직원 한 명을 시켜서 엘레베이터 앞 자리들 마다 한 번씩 둘러 보고 오라고 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신입 직원이 하는 말이 귀에 꽂고 있는 무전기 이어폰에 들려 왔다.

 "저, 여기 22층 인데요. 손님이 제가 근처에 가니까 따로 말 걸지도 않았는데, 여기서 누구 기다리고 있는 거라고 먼저 말을 거십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이 수법은 맨 처음에 벌써 썼던 수법 아닌가. 하고 생각했다. 어째 기대가 무너지는 듯 해서 실망스러웠다. 나는 어째 좀 섭섭한 느낌마저 느꼈다.

 "누구 기다리냐고 한 번 물어 보세요. 그럼 갈 겁니다."

 내가 말하자, 잠시 후 신입 직원이 놀라는 목소리를 냈다.

 "어, 손님이 매니저님 찾으시고 계신다는데요?"

 그녀는 다름 아닌 내 이름을 댔다고 했다. 아마 그 동안 마주친 나를 보고 내 가슴의 이름표를 읽어 기억한 이름일 것이다. 나는 어리둥절해서 아무 말 못하는 데, 그 신입직원은 하여간 그녀를 데리고 나에게 오겠다고 했다.

 잠시 후, 그녀는 로비 엘레베이터에 나타났다. 그녀는 그 어느 때 보다 신비롭고도 위엄 있는 모습으로 걸어 나왔다. 그녀는 호텔 로비 정중앙으로 나오며 나를 똑바로 바라 보고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그녀는 나를 무척 잘 알고 지낸 사람인것처럼 내 이름을 불렀다. 도대체 무슨 영문인지 그녀의 그 목소리는 매우 애절하고도 또한 온갖 한이 맺혀 있는 것처럼 들렸다. 그녀는 내가 그때까지 호텔에 드나드는 것을 본 그 어떤 배우들의 연기보다 실감나고, 표현력이 강한 연기를 하고 있었다. 겨우 두 번 내 이름을 부르는 것으로 그녀는 엄청난 감정을 뿜어내고 있었다.

 그리고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 보고 있는 내 바로 앞에 서자, 내 얼굴 앞으로 바싹 그녀의 얼굴이 다가 오며 다시 내 이름을 불렀다. 나는 두려워 도망치려는 목소리가 되어 말했다.

 "저, 저... 손님, 왜... 이러세요?"
 "뭐? 뭐라고?"

 그러더니 그녀는 갑자기 눈을 감고 나에게 입을 맞추었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내용인지는 몰랐지만, 심지어 나는 지금 그녀 자신 조차도 구체적인 내용은 몰랐을 것이라고 자신하지만, 그 모습 속에는 뭔가 대단히 기구한 사연이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넘쳐 났다. 내가 뒷걸음질 치려 하자, 그녀는 아주 자연스러워 보이는 모양으로 먼저 물러 났다.

 로비의 모든 직원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나는 이리저리 살피다가 "아니, 이게, 왜," 라고 했다. 내가 허둥대고 있는 모습을 보고, 호텔 로비의 직원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수군거렸다. 뭘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 지, 나를 보고 "진짜 너무 심했다"라고 말하는 직원도 한 명 있었다.

 내가 놀란 눈으로 다시 그녀를 쳐다 볼 때, 그녀는 눈이 마주치자 마자 호텔 건물 36층을 몽땅 날려 보낼 것처럼 시원하게 내 뺨을 후려 갈겼다. 조용한 로비에 울려퍼지는 그 소리는 심지어 내가 들어도 왜인지, 마치 신명나게 울려퍼지는 한 바탕 사물놀이 소리를 단 하나의 음에 집중해서 터뜨리는 것과 같아서 너무나 통쾌하게 들렸다.

 그녀는 꼭 멋진 공연을 본 호텔 직원과 손님들이 퇴장에 즈음하여 박수라도 보낼 것처럼 감동적인 표정을 지어 보이고, 그대로 호텔 로비 바깥으로 걸어 나갔다. 그저 어리벙벙한 나와, 영원히 넋처럼 회사를 떠돌 소문의 주인공이 된 나를 기념하는 직원들의 쑥덕거림만이 휑한 공기 사이를 채우고 있었다.

 진급 발표자 명단이 나왔을 때, 나는 진급 대상에서 떨어졌다. 회장이 직속으로 만든다는 팀에는 우리 팀 부장이 들어 갔고, 나는 본사에서 밀려 나게 되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다름 아닌 바로 그 호텔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이제 언제쯤 여기서 나가게 될까 싶은 생각이 드는 영업점의 첫번째 일요일 당직 근무에서, 나는 한가한 오후 시간을 맞는다. 나는 22층 엘레베이터 앞 자리로 가 보았다. 역시 그녀가 앉아 있었다. 그녀는 나를 쳐다 보지도 않고, 자신이 앉아 있던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었다.

 나 역시 아무 말 없이 조용히 그녀의 맞은 편 자리에 같이 앉는다. 그녀가 읽고 있는 책은 여전히 "코넬 울리치 단편집"이었다. 나는 "서머셋 몸 단편집"을 꺼낸다.

 그날 우리는 한 동안 몇 장씩 읽다 말던 그 책들을 그 자리에 앉아 천천히 끝까지 모두 읽었다.

- 2011년 소공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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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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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쑤우 11.08.27 00:53 댓글 수정 삭제

    예전에 백화점에서 알바를 했을때 만날 지하에만 있다가 어쩌다가 올라가본 
    옥상 가까운 층에서 보았던 눈이 내리던 창밖의 거리 모습이 떠오르는 글이네요.
    또 다른 알바 관계로 호텔 연회장을 자주 찾곤 하는데
    그런 기억들도 겹쳐지면서 개인적으로 더 친근하게 느낀 작품이었어요.
    소공동이라 함은 L호텔이나 W호텔에서 영감을 얻어 쓰신 글인가요?

  • No Profile
    gerecter 11.08.27 09:41 댓글 수정 삭제
    옳습니다. 외형면에서는 L호텔, W호텔을 적당히 섞은 부분도 상당히 많이 써먹었습니다. 내부 사정이나 운영과 같은 다른 면은 또 다른 곳을 좀 따라가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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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엄길윤 11.09.01 05:29 댓글 수정 삭제
    자리 싸움이라니!! ㅎㅎㅎ 굉장히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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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1.09.01 13:08 댓글 수정 삭제
    엄길윤/ 잘 읽어 주셨다니, 감사합니다.

    이 싸움에서 여자 주인공 쪽의 동기가 보다 명확하면서도 구구하지 않게 깔끔하게 나왔다면 더 좋은 이야기가 될 수 있었을 텐데, 결국 좋은 것 떠올리지 못하고 막연히 알듯 말듯하게만 꾸며 놓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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