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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환승역의 7인

2011.07.30 00:3107.30

이 이야기는 원본이 따로 있었다. 지하철 안에서 읽은 원고 였는데, 읽어 가면서 형태를 갖춘 이야기로 고치고 있었다. 그런데 다 읽고 고치는 것이 10분의 1 정도 남았을 때 어쩔 수 없이 중단하게 되었고, 원래의 원고는 잃어 버리게 되었다. 다시 찾을 길도 막막했기에, 어쩔 수 없이 지금 다시 급히 생각나는 대로 이야기를 꾸민 것이 아래와 같다.


 


 


1.


오후 3 5분의 지하철 3호차 칸에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뭐가 지나가는 지 수만번 씩 보지만 알 수 없는 빛이 검은 창 밖으로 지나가고, 비슷한 정도로 들어 봤지만 왜 저런 소리가 나는지 고민해 본적이 없는 기계 소리가 들릴 뿐이었다. 그래서 거기에 타고 있는 짧게 머리를 깎은 사람은 지하철에 탄 다른 사람들을 두리번 두리번 살펴 보았다. 짧은 머리는 구석에 앉아 있는 멤피스 풍의 안경 쓴 사람을 본다.  짧은 머리는 멤피스 안경이 어떤 사람인지 짐작해 본다.


 


곧이어, 멤피스 안경을 쓴 사람은 이제 곧, 지구의 종말이나 우주의 파멸을 선언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 까닭은 이러하다. 안경 쓴 사람은 30대 중반을 전후로 하는 나이로 보인다. 30대이고 안경을 썼다는 것만으로 지구 종말을 불러오는 사람으로 볼 수는 없다. 요즘에는 각막을 깎는 수술을 하지 않는 사람들은 거의들 안경을 쓰고 있다. 안경을 쓰는 것만으로 이유가 된다면 이 지하철 안에만 지구 종말을 불러올 사람이 몇 십명은 될 것이다.


 


짧은 머리는 잠시,


 


"그렇게 지구 종말을 불러올 사람이 널리고 널려서 세상이 이 따위인지도 모르겠다."


 


하고 생각한다.


 


그러나 짧은 머리의 멤피스 안경에 대한 근거는 그 외에도 더 있다. 멤피스 안경은 나이에 비해 머리모양과 몸집은 늙어 보이지만, 반대로 표정은 어려 보인다. 또한 생계를 책임지고 저축을 하고 누구를 먹여 살리는 번민에 빠져 있지도 않아 보인다. 즐거운 대목은, 이 멤피스 안경은 바로 그런 번민을 느끼는 삶을 자신이 살고 있지 않다는 상황에 대해 번민을 느끼는 듯이 보인다는 부분이었다. 그러니까 멤피스 안경은 제대로 된 직업을 가져 보지 못한 사람이었다.



 


그러면서도 멤피스 안경은 극히 어렵고 대단한 요령이 필요한 일을 하고 있을 것이다. 멤피스 안경은 인간 사상의 제일 뾰족한 끝에서 뜀뛰기하는 일을 하고 있다. 무엇인가 아주 복잡한 것을 공부하거나 어려운 것을 연구하는 사람일 것이다. 그렇지만 막상 이렇게 3 5분의 지하철을 타고 있을 때에는 이제껏 밥벌이도 하지 못해 무슨 장학금이니, 무슨 지원금이니 하는 적선의 의미를 가진 돈으로만 살아온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 더 강하다.


 


따라서 멤피스 안경은 간섭 철학, 계량 언어학, 자료 윤리학 등등을 전공하는 학생이나, 이제 학생이라는 명칭은 벗었지만 사실 학생과 다를 바 없이 살고 있는 그와 비슷한 인간이라고 추측할만 했다. 혹은 사회학, 정치학, 법학 등을 공부하다가 가끔 1, 2년에 한 번씩 속절 없이 시간만 가는 청춘이 답답하고 욱할 때마다 고위 공무원이 되는 시험을 쳐 보겠다고 잠깐 뒤적뒤적하하는 것으로 인생이 요약되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짧은 머리는 그런 사람들이 세상에 꽤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멤피스 안경이 바로 그런 사람인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오후 3 5분의 지하철에서 짧은 머리는 그런저런 정도가 아니라, 멤피스 안경이 화끈하게 우주를 산산히 파멸시키는 주제를 다루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얼마 후 지하철이 환승역에 도착할 때 즈음 해서, 문득,


 


"이제 끝이거든요."


 


라고 속으로 되뇌이고, 그러면 갑자기 세상 모든 것이 조각조각 흩어져 작디 작은 끝없이 많은 알갱이로 흩어지고 그대로 온 우주의 빛이 일시에 꺼져 버리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상상하게 된다. 짧은 머리는 왜 멤피스 안경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는 지 다시 잠시 정리 해 본다.


 


오후 3 5. 지하철 3호칸을 보면서 몽상에 빠진다. 3 5분 지하철 안을 보고 있으면 여유롭고도 재미나 보인다. 지금은 학생은 학교에서, 직장인은 직장에서, 저마다 할 일에 치여 갑갑하게 갇혀 있는 시간이고, 실업자들은 할 일도 없고 갇혀 있는 곳도 없어서 답답함을 이기기 어려워 하는 시간이다. 물론 그렇다고 감옥이나 수용소 같은 곳에서 정말로 갇혀 있는 사람들이 3 5분에 답답해 하지 않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요점은 3 5분에 지하철을 타고 어딘가로 가고 있는 사람은, 요행 반복되는 직장 생활 중에 하루 휴가를 내고 여유롭게 지내다가 느긋한 약속을 찾아 가는 생기 있는 전환, 혹은 적당한 핑계로 하루 학교에서 도망나와 갈데 없이 여기저기 그저 다니기만 해도 재밌어 하는 10대의 위대함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급한 연락을 받고 누출 사고가 난 공장으로 달려 가고 있는 어느 불행한 건강식품회사의 담당자가 있을 수도 있고, 갑자기 시어머니가 쓰러지셨다는 소식을 듣고 온갖 혼란과 미래에 대한 사백여 가지 경우의 수를 따지고 있는 며느리가 있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런 것들 조차도 다른 시간대의 지하철과는 현격히 다르다. 모두가 덜 깬 아침잠의 피곤함으로 꾸깃꾸깃 처박혀 떡져 있는 아침 지하철과는 다른 오후 3 5분의 지하철의 격조라고 할만하다.


 


짧은 머리는 이 지하철의 풍경을 이루는 일곱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제 역할을 하고 있다. 짧은 머리는 방금 전부터 하는 일 없이 지하철에 탄 인간들을 훑어 보고 있다. 유난히 짧은 머리가 보기에 아름답게 보이는 여자가 맞은 편에 보이기 때문에 그 쪽을 많이 보기는 한다. 그 여자는 지하철에 개를 데리고 타고 있어서 더욱 눈에 뜨이기도 한다. 그러나, 짧은 머리가 이 여자의 아름다움에 대놓고 망망히 빠져 있을 만한 사람은 못 된다. 만약 이 개를 데리고 탄 사람이 짧은 머리를 본다면, 어떤 감상을 느낄까. 짧은 머리의 얼굴은 비슷한 것을 골라 보자면, 면을 모두 먹고 난 후의 칼국수 국물 정도의 감흥을 줄 것이다. 짧은 머리 스스로도 그렇게 생각해 본다.


 


그러자 짧은 머리는 이유를 알게 된다. 짧은 머리가 멤피스 안경을 보고 하필이면 우주 파멸을 떠올린 까닭은, 멤피스 안경이 좀 더 이상해서라기 보다는 짧은 머리의, 그 면발이라고는 한 가닥도 없어 보이는 국물과도 같은 자신의 텅 빈 심경에 이유가 있었다. 짧은 머리는 멤피스 안경의 표정 구석구석을 흘깃흘깃 보면서, 멤피스 안경이 세상을 살 면서 겁을 먹고, 화를 내고, 부끄러워 하는 순간순간들을 천천히 상상해 본다.


 


출퇴근 시간과 다른 오후 3 5분의 지하철의 즐거움이 여기에 있다. 이 지하철 칸의 사람들은 출근하는 방향이 같다거나해서 매일 만날 사람들이 아니다. 어디에서 타서 어디에서 내리는 지, 뭐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있고, 무슨 일을 하러 가는 길인지,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내일 또 만날 지, 혹은 어제나 2년전 어디선가 잠시 얼굴을 본 적도 있는 지 그런 것도 전혀 알 수 없다.


 


뭐하러 살고 있는 지 알 수 없는 사람들 몇 명이 강철상자 속에 같이 들어가서 시속 40킬로미터로 튀어 나가고 있는 와중이라면, 무슨 생각이라도 할 수 있다. 저 여자는 사실은 정교한 인조인간이고, 문 앞에 서 있는 저 아주머니는 사실 변신한 외계인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이 지하철칸에 있는 사람 일곱명 중에 정상적인 사람은 나 하나 뿐이라고 생각해 봐도 된다. 예컨데, 끝 자리에 앉아 무슨 서류인지 모를 글을 정신 없이 읽고 있는 양복 입은 덩치 좋은 사람이 사실은, 철저히 평범한 인간으로 정체를 위장하고 있는 첩보 요원일 수도 있다. 저 회사원은 지금까지 어떻게 하다가 첩보원이 되었는 지, 어떻게 해서 저렇게 지독하게도 평범한 회사원처럼 보이도록 위장을 했고, 앞으로는 무슨 임무를 수행할 것인지 그냥 생각나는대로 짐작해 봐도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짧은 머리는 맞은 편에 앉은 멤피스 안경이 다음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해 보았다.


 


 


2.


이야기는 멤피스 안경이 어느 맑은 여름날 오후 고요한 사무실 자리에서 창밖을 내다보던 순간으로부터 출발 한다. 멤피스 안경이 있는 사무실은 넓다랗게 지은 3층 건물의 3층이었다. 멤피스 안경이 있는 3층의 오른편 사무실에는 여섯명의 면티셔츠를 입고 면바지를 입어서 비슷비슷한 풍미의 30, 40대 인간 남자 여섯 명이 있었다. 여섯 사람은 모두 컴퓨터 앞에 앉아 느릿느릿 화면을 보고 있었다. 그 중에 하나인 인간 남자 멤피스 안경도 어김 없이 마찬가지였다.


 


멤피스 안경과 나머지 여섯명과의 차이점은 멤피스 안경이 그 때 창 바깥을 보았다는 것이다. 물론 이 사무실의 사람들은 종종 하릴 없이 창 바깥을 멍하니 보곤 했으므로, 창 바깥을 본다는 자체는 특별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그 때 나머지 사람들과 멤피스 안경을 구분할 수 있는 점은 그 때 멤피스 안경이 창 바깥을 보고 있던 순간이라는 점이었으므로, 또 그 시점이 멤피스 안경에게 중요하기도 했기에 그 점을 굳이 이렇게 밝혀 보는 것이다.


 


멤피스 안경의 눈 앞에 무엇이 보였던가. 창 바깥에는 농작물이 자라나고 있는 벌판이 펼쳐져 있었고, 대조적으로 새파란 하늘에는 가지각색 여러 모양의 흰 구름이 유난히 탈속적인 흰 빛으로 번진 햇빛을 빛 내며 떠 있었다. 농작물이 자라나는 들 가운데로 멀리 좌에서 우로 길게 뻗은 검은 2차선 도로가 보이는데, 그 도로를 따라 소리도 없고 뜻도 알 수 없이 드문드문 자동차들이 휑하니 달려 지나가고 있었다. 햇빛은 밝고 하늘은 빛나고 풍경은 소리가 없었다.


 


멤피스 안경은 그 조용한 전원 풍경을 보며 다시 한 번 자신이 있는 곳을 깨닫는다. 사람을 만나기 쉽지 않은 멍한 고장. 멤피스 안경이 근무하고 있는 연구소의 동료들 이외에 가끔 눈에 보이는 사람들이라고는 농업에 종사한다고 보아야 하는 노인들 뿐이었다. 이 노인들은 약을 파는 약장수들에게 속아 넘어가고 표를 사려고 부추기는 정치인들에게 휘둘리면서 이리저리 이용 당하는 것 정도가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가장 중요한 영향이면서도, 알 수 없이 자신의 꿋꿋한 소소한 뜻에는 절대 누구도 도전해서는 안된다는 그 아집만은 초신성의 불꽃처럼 타오르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런 사람들이 이 지역 일대 노인의 100% 전원은 아니었겠지만, 멤피스 안경은 그렇다고 생각 했다.


 


멤피스 안경이 그런 생각을 품고 있다고 짧은 머리가 상상한 것은, 짧은 머리가 상상하기에 멤피스 안경은 자기가 그런 지역에서 거주하고 있다는 것에 불만을 많이 품을 사람이라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멤피스 안경은 초등학교 시절, 텔레비전에서 본 잡다한 교양 프로그램을 어린이스러운 재치로 기억했다. 멤피스 안경은 그러한 기억을 바탕으로 별 힘 안들이고 학교의 사회, 과학 분야 과목들에서 득점하는 것을 영예롭게 여기던 사람이었다. 멤피스 안경은 또한 중학교, 고등학교 때 성실히 학업에 몰두하여 역시 고득점을 유지했으므로, 이에 대해서도 자부심을 느끼고 살았다. 멤피스 안경은 자신은 고액의 사교육을 통해서 고득점을 달성한 것이 아니라, 꾸준한 노력과 흔들림 없는 학업 태도로 앞 선 석차를 이룩했기에 더욱 자신의 성취를 고귀한 것으로, 또 명예로운 것으로 여겼다. 이리하여 멤피스 안경은 자신이 단순히 입시의 성과를 위해서만 고득점을 달성한 것이 아니라, 학문의 기쁨과 지성의 가치를 같이 깨우치고 있기에 더더욱 그 달성에 영예를 느끼고 있다고 생각했다.


 


멤피스 안경의 영예가 무너지기 시작한 것은 대학에 입학하면서 였다. 멤피스 안경은 입시에 실패한 것은 아니었지만, 평소의 고득점에 비하면 다소간 만족할 수 없는 결과를 얻었다. 덕택에 멤피스 안경은 대학을 다니는 내내, 고교 시절 같은 반에서 더 좋은 입시 결과를 얻은 학생을 부러워하는 마음을 갖고 살았다. 질투심이라고 보기는 어려웠다. 물론 질투심이 전혀 없는 것이라고 볼 수는 없었다. 멤피스 안경은 미약하게 나마 그 학생이 언젠가는 망했으면 좋겠다고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 정도가 별로 심하지도 않았던 데다가, 멤피스 안경이 스스로도 그렇게 질투심을 품는 것이 옳지도 않고 자신의 미래에도 도움이 안된다고 판단하기도 했다.


 


문제는 멤피스 안경이 그 학생을 부러워 하는 마음을 대학 재학 기간 내내 계속 연속적으로 품고 있었다는 것이다. 멤피스 안경은 종종 자신이 한 때는 얼마나 더 압도적인 고득점을 이루었으며, 간혹 그 학생은 얼마나 믿을 수 없을 만큼 멍청했는 지를 돌이켰다. 또한 멤피스 안경이 학문의 기쁨과 지식의 발견에 순수한 감탄을 느낄 때, 그 학생은 다만 약간의 석차에서 앞서는 것만을 학습의 유일한 목표로 느끼고 있었다. 멤피스 안경은 그 학생이 배움의 과정을 얼마나 고통스러운 노동이냐며 좌우에 불필요하게 과시하며 엄살을 부렸는지도 기억하곤 했다. 그랬으면서도, 혹은 그랬기 때문에 대체로 멤피스 안경은 그 학생 보다 더 고득점을 이루어내곤 했다. 따라서, 그 때 멤피스 안경의 추론에 따르면 대학 입시에 성공하는 쪽도 멤피스 안경이어야 했다. 이러한 추론은 멤피스 안경 뿐만 아니라 다른 그의 동료와 그를 가르친 교사들도 일반적으로 동의하던 바 였다.


 


그랬기 때문에, 멤피스 안경이 대학 재학 기간 동안 그 학생을 부러워 하던 마음을 계속 품고 있었던 것 이유로는, 그러한 자연스러운 인과 관계가 맞지 않는 결과를 멤피스 안경이 받아 들이지 못했다는 점을 꼽아야 마땅하다. 멤피스 안경은 대학 기간 내내 그 학생이 그 좋은 학교에 가서 얼마나 더 즐겁게 지내고 있으며 얼마나 더 많은 기회를 얻을 것인가 하는 생각을 계속 마음 속 한 켠에 갖고 있었다. 그래서, 멤피스 안경은 아침에 깨어날 때 부터, 잠 들 때 까지, 어디를 가고, 무엇을 하며, 누구와 함께 있든지, 그 생각을 아주 미약하게 나마 끊임 없이 지속하고 있었다. 이를 테면, 멤피스 안경이 입시에 성공한 학생을 부러워 하는 그러한 마음이 그 몇 년 간의 긴긴 시간 동안 마치 머리 뒤에 악착 같이 달라 붙은 지옥의 거머리 유령처럼 계속 따라 다녔던 것은, 과정과 결과가 연결되지 못한 불합리에 대한 끊임 없는 멤피스 안경의 호기심이라고도 볼 수 있는 것이다.


 


여기까지는 그냥 적당히 한심한 대학생이 보여주는 한심함의 적당한 경지라고 볼 수도 있었다. 이 때 짧은 머리는 지하철 속에서 멤피스 안경의 유난히 일찍 벗겨진 듯한 앞 이마를 보았다. 그리고, 잠시 궁리한 끝에 짧은 머리는 멤피스 안경이 진정으로 잘못된 선택을 한 것은 대학을 졸업한 후의 시점이었다고 짐작해 보았다.


 


짧은 머리는 이렇게 다음 이야기를 생각 했다.


 


멤피스 안경은 그렇게 대학시절을 보내는 동안, 자신이 고교 시절에 갖가지 과목의 고득점에 얼마나 재능이 있었는 지, 또 자신은 단순한 고득점 뿐만 아니라 학문 자체의 고귀한 깨달음의 기쁨을 얼마나 생생히 느꼈는 지 극히 자주 돌아 보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멤피스 안경은 그러한 깨달음의 기쁨을 느꼈던 경험이 바로 자신의 특출난 장점이라고 여기게 되었다.


 


바로 이 부분이 멤피스 안경의 패착이었다. 멤피스 안경은, 무릇 몇몇 사람들이 "하고 싶은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서", "공부하는 것이 너무 좋아서" 라는 말을 자랑스럽게 떠들면서 중요한 일을 때려 치우고 중요해 보이지만 쓸 데 없는 잘못된 길로 접어드는 일을 하는 그 여러 가지 다양한 경우와 같은 걸음을 걷게 된 것이었다. 20세기 후반, 유명한 대한민국의 록그룹이 노래 속에서 "공부하기 싫은 사람 모여라"라고 외친 적이 있었거만, 그래서 "공부한다"는 것은 당연히 "싫다"는 말과 잘 어울려야 하는데, 어째 남 앞에서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서" 라는 대사를 읊으면 그 부정합을 희귀한 것으로 평가하여 남들이 그 희소가치를 잠깐이라도 존경할 것이라는 착각에 빠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바로 멤피스 안경도 그 중의 한 무리와 별 다를 바 없는 경로를 거쳐, 마침내 대학원에 입학한 것이다.


 


멤피스 안경은 더욱 더 생기 없고, 더욱 더 "그 학생"에 대한 부러움이 강렬해져만 가는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멤피스 안경은 대학원의 그 기나긴 저주 받은 악몽의 그늘 아래 깊은 늪 바닥 구렁텅이로 막막한 끝조차 없이 이어지기만하는 터널과도 같은 시기를 거쳐 마침내 박사 학위를 취득 했다. 멤피스 안경은 다심분석 개변우주론에서 괄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고, 멤피스 안경의 선후배 세명과 동기 네 사람 정도는 대한민국에서 멤피스 안경이야말로 다심분석개변우주론의 1인자라고 대충 상상하게 되는 경지에 이르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 멤피스 안경이 학위를 얻은 뒤에 얻게되는 직장이 자연스럽게 정해 졌다. 정부 기획예산처 직원들 세 사람이 5분 동안 서로 잡답해 봤을 때 뭐하는 지 금방 알 수 없을 만한 전공 분야 졸업생들만 꾹꾹 눌러 담아 모아서 수용해 놓기 위해 건설된 듯한 느낌의 한 공립 연구소의 비정규직 연구원이 되는 데 멤피스 안경은 성공한 것이었다.


 


지방 균형 발전 계획과 도심 과밀화 방지를 위해 전국 여러 곳의 정부 기관, 공립 기관을 이런저런 곳으로 옮기는 업무를 하기 위해 21세기 초에 "지지지위" - 지역 지원 지식 위원회를 그렇게 부르면 멋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이와 같은 5개월 된 개똥지빠귀 우는 소리를 닮은 발음으로 부르곤 했다 - 라는 정부 위원회가 결성된 적이 있었다. 지지지위에 참가하고 있는 한 국회위원의 어느 보좌관이 채용한 한 직원이, 그 때 52개에 달하는 "중소규모 연구소"들을 재배치하는 초안을 MS 파워포인트로 작성했다.


 


이 직원은 어린 시절 바둑알들을 어지럽혀 놓았다가 잘못 정리했다는 이유로 좀 과하게 부모에게 매를 맞은 적이 있었다. 때문에, 당시 바둑알들의 갯수를 세기 위해 가지런히 바둑알들을 일정한 폭으로 늘어 놓는 부모의 모습에 대한 음침한 강박관념을 이 직원은 자기도 모르게 갖게 되었다. 덕분에, 이 직원은 그 때 그 모양을 떠올리며, 52개의 중소규모 연구소들을 지도 위의 이 지역 저 지역 들에 적당히 보기 좋은 모양으로 배치 했다. MS 파워포인트는 그냥 마우스를 움직이면 화면에 있는 가상의 격자에 따라 그림들이 줄을 맞추어 배치 되기 때문에 그 줄에 따라 조금씩 조정된 위치에 52개의 중소규모 연구소들은 최종적으로 자리 잡았다.


 


이 때 한 여당의 거물급 인사가 소유한 땅값을 올리기 위해 "희귀동물 사육보조 센터"라는 기관을 멋대로 배치한 것이 아니냐 하는 의혹이 크게 일었다. 그때문에 "지지지위"에 소속된 사람들은 "희귀동물 사육보조 센터"의 위치를 두고 의결 기한 마지막날까지 피 튀기게 싸웠고, 실제로 주먹으로 싸우다가 피를 튀긴 사람도 있었고, 결국 시간이 부족해지면서 52개의 중소규모 연구소들은 그렇게 대충 정해 놓았던 초안을 기준으로 다 위치가 정해지게 되었고, 3년 정도가 지나서 소동이 잠잠해 지게 되었을 때 결국 여러 공무원 퇴임자들의 땅투기를 위해서 조금씩 위치가 다시 얼렁뚱땅 세밀히 조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멤피스 안경이 일하는 연구소의 위치는 결정 되어 있었다.


 


여기서 잠깐, 21세기 초에 4 5천만원을 들여 개발된 후에 차관 보는 앞에서 시범으로 단 한 번 실행된 후, 그 이후로 단 한 번도 실행되지 않고 그대로 묻힌 인공지능 지리개발 평가 소프트웨어를 실행시켜 본다고 가정 해보자. 이 소프트웨어는 대한민국의 특정 지역을 골랐을 때, 그 지역에서 운영하기에 가장 적합한 산업이 무엇인지 표시해 주는 기능을 갖고 있다. 멤피스 안경이 일하는 연구소를 선택하면, 이 소프트웨어는 이 곳에서는 월남 줄무늬 애호박을 재배하기에 가장 적합한 곳이라는 설명을 보여 준다. 실제로 연구소 주변에 월남 줄무늬 애호박은 하나도 없었지만, 호박이나 박이 재배되고 있는 곳은 꽤 있기도 했다. 다만, 애처롭게도 멤피스 안경은 그 곳에서 월남 줄무늬 애호박의 씨를 뿌리는 대신, 다심 분석 개변 우주론을 연구하고 있었고, 동시에 여전히 멤피스 안경은 "그 학생"은 지금 멋진 곳에서 일하고 있고 연봉도 얼마씩이나 되는데 나는 월급이 얼마밖에 되지 않는 비정규직이라는 생각을 하며 하루 이틀 꾸역꾸역 살아 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맥락에서, 멤피스 안경이 그 때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았을 때, 그 한가롭고 아름다운 농지 위의 여러 구름 끝을 보며, 그 구름 틈 사이로 하늘을 날아다니는 신비한 여인이 구름 조각을 만져보며 노는 허황된 상상을 잠깐 했다는 것은 결코 이상할 것이 없다. 멤피스 안경은 중학교 때 지하철 환승하는 곳에서 종종 보곤 했던 무척 아름다웠던 여학생을 생각하면서, 그 때 그 여학생의 얼굴을 그 허황된 상상속 날아다니는 여인의 얼굴로 생각해 본다. 멤피스 안경은 그 정도로 아름다운 여학생이면, 이미 자신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인생의 성취를 얻고 자신이 상상할 수 없는 경지의 행복을 얻을 것이라고 막연히 짐작하곤 했다. 그랬기 때문에, 그 상상은 더 길게 지속적으로 이어졌다.


 


멤피스 안경은 그 상상 속에서, 구름 아래 들판의 도로를 잠깐 생각하게 된다. 멤피스 안경은 도대체 이런 동네의 아무것도 없는 저 길을 지나다니는 자동차들이 왜 이정도로 많은가, 저마다 무슨 생각으로, 어디를 가느라 저렇게 도로를 달려 가는가. 하는 생각에 빠진다. 만약 이 때 멤피스 안경이 조금만 더 창 바깥을 보았다면, 멤피스 안경은 저 들판 구석 구석에도 그늘이 있고 벌레나 작은 풀이 자라는 공간들이 틈틈히 있다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넘어 갔다면, 다음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실제로 이 때 멤피스 안경이 보는 들판의 한 구석에는 한 희로무시 귀뚜라미 한 마리가 사마귀에 쫓기어 도망가고 있는 곳도 있었다. 창밖을 멍하니 보고 있는 멤피스 안경과는 약 890 미터 정도 떨어져 있었지만, 희로무시 귀뚜라미의 사력을 당한 도주는 결코 따분한 것은 아니었다. 이 희로무시 귀뚜라미는 천적이 가득한 이 들판에서 도망다니는 것이 매우 괴로웠다. 희로무시 귀뚜라미는 근처를 지나다 잠시 서 있는 자동차 바닥의 좁은 틈으로 끼어 들어 숨어 가서 간신히 사마귀를 피한다. 희로무시 귀뚜라미는 그러다가 갑자기 자동차가 출발하는 바람에 전혀 다른 도시로 가게 된다. 다시 멈춘 자동차에서 내렸을 때, 귀뚜라미는 도시 한 복판에 떨어진다. 잠깐 차의 틈 사이에 숨었다가 내려 왔는데, 공간 이동을 했는 지 전혀 다른 세계에 와 있게 되었다.


 


만약 그 귀뚜라미가 사람이었다면, 잠깐 지하철 역 화장실에 갔다가 나왔더니, 화장실 바깥의 모든 세상이 초록색 하늘을 강철로 된 용들이 날아 다니는 머나먼 우주의 행성으로 바뀌어 있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 멤피스 안경은 그 들판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 풍경 속에 있는 희로무시 귀뚜라미에 대한 생각도 하지 못한다. 멤피스 안경의 생각은 거기서 중단된다. 이유는 바로 그 때, 멤피스 안경 옆에 멤피스 안경이 가장 싫게 여기는 동료가 옆자리에서 크게 웃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멤피스 안경이 이 싫은 동료를 싫게 여기고 있는 까닭들 중에 가장 싫었던 점은, 싫은 동료가 극히 납득할 수 없는 형태로 자신의 직업을 남들에게 기괴하게 드러내는 것을 즐긴다는 점이었다. 싫은 동료는 11살 때 일본 NHK에서 방송한 "아인슈타인의 삶"이라는 다큐멘터리의 한국어 더빙판을 본 적이 있었다. 싫은 동료는 그 때부터, 그 다큐멘터리에서 괴상하게 묘사된 과학자를 자기도 흉내 내면 남들이 멋있고 대단하다고 칭송하여 재미난 사람으로 보일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을 품게 되었다.


 


때문에 싫은 동료는 이 연구소에 처박혀서 시간을 보내는 자신의 직업을 두고 이런 생각을 했다. 성스러운 우주의 진리를 성스럽게 탐구하는 성스러운 일을 하고 있는 성스러운 사람이 자신이라고 내 보이고자 한 것이다. 싫은 동료는 자신은 그런 성스러운 일의 가치를 이해하는 성스러운 지성을 갖고 있기 때문에, 돈도 휴식도 사랑도 맥주의 맛도 모두 다 성스러운 사람이 되어 그저 일주일 24시간 내내 그 성스러운 자연의 위대한 진리에 도전하는 성스럽디 성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것으로 자신의 삶을 꾸몄다. 싫은 동료는 그와 같이 기이한 인간이 자신이라고 몰래 뻐기기 좋아했다.


 


전형적이고 단적이고 상징적인 예로는 이런 것을 꼽을 만 하다. 싫은 동료는 멤피스 안경도 차마 입밖에 내지 않았던, "하고 싶은 공부가 너무 하고 싶어서"라는 말을 10회가 넘게 해 본 적이 있었으며, 그 경지를 넘어서서 여기가 무슨 게으른 각본가가 집필한 일일연속극 속이라고, "공부에 미쳐 있다"라는 표현도 여러 번 사용해서 자신의 고귀함을 - 보편적으로는 누구도 그런 것을 고귀함이라고 부르지 않는 형태의 고귀함을 - 은근히 내 보이려고 한 사람이었다.


 


멤피스 안경은 나름의 동정심으로 싫은 동료를 감내하고 있었다. 오죽이나 보람을 느낄 곳이 없고, 오죽이나 남들 사이에서 자신의 자존심을 유지할 수 없으면, 자신이 미쳤다는 것 따위로, 그것도 "공부에 미쳤다는" 따위로 자존심을 구걸하려 드는 지. 혹은 앞으로 5년후, 10년 후 즈음에 언젠가 싫은 동료가 이러한 억지 수법이 다 부질없다고 깨닫는 날이 오면 얼마나 괴로울까. 그렇게 생각하면 싫은 동료가 약간 측은해 보이기도 했다. 잠시, 멤피스 안경의 당시 생각과 관계 없이 밝혀 보자면, 싫은 동료는 그 시점으로부터 8년 후에 자신의 그런 행동과 태도가 매우 부끄러운 유치한 짓이었음을 드디어 깨닫고 후회하게 된다.


 


그러나 그 때 멤피스 안경이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싫은 동료가 그러한 허망한 치장의 꿈 속에서 하물며, 농담과 웃음 마저 그 위선의 진흙탕에 쳐박아 버린다는 점이었다. 싫은 동료는 "전공자만 이해할 수 있는 농담"을 극히 좋아 했다.


 


싫은 동료가 좋아하는 전공자만 이해할 수 있는 농담이라는 것들은 사실 대부분 별로 웃긴 농담도 아니었다. 그냥 뜻을 알 수 없는 어려운 단어가 몇 가지 나오는 것 뿐으로, 핵심은 "포수가 참새를 쏘았더니 참새가 개소리했다"는 따위 보다 싱거운 것들이었다. 그런데, 싫은 동료는 단지 자신은 그와 같이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려운 단어를 이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과시하고자, 그 따위 웃기지도 않는 농담에 극히 우렁차게 웃어 댔다. 그 웃음 속에서 자신의 지성을 뽐내고, 자신의 학문에 대한 헌신을 자랑하고자 했다. 혹시나, 그 어려운 단어를 이해하지 못해서 농담의 구조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의문스럽게 동조하지 않으면, 자신이 얼마나 어려운 단어를 잘 알고 지내는 사람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특별함에 도취하는 것이었다.


 


멤피스 안경이 가장 고통스럽게 여기던 부분도 바로 그 웃음소리였다. 옆에서 싫은 동료 자신이 특이한 농담에 즐거워하고 있으니 관심을 가져 달라고 애원하는 듯이 일부러 크게 웃는 웃음 소리. 그렇게 그 소리를 듣고 있으면, 웃음이라는 것이, 바로 인간이 기쁘고 즐거울 때 내는 그 웃음의 소리라는 것이, 서글프게도 한 조작된 수단이 되어, 이 애처로운 한 인간의 삶을 그려내고 있을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멤피스 안경은 그것을 견디기가 매우 어려웠던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있는 짧은 머리는 이 대목까지 생각하고, 자신이 학창시절 관심이 있었던 것이 과학이나, 다심 개변 우주 어쩌고는 결코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비슷한 방식으로 억지로 크게 웃어 보이는 어떤 사람을 이 사람 저 사람 달리 떠 올려 보았다. 잠시 다른 사람 생각을 하던 짧은 안경은 세 사람을 떠올린 후에 다시 멤피스 안경에 대한 다음 이야기로 되돌아 갔다.


 


그 날, 그 오후. 멤피스 안경이 창 바깥의 풍경을 보고 늘어진 상상에 빠져 있다가, 잠깐 길 가를 달리는 자동차를 보았던 바로 그 때. 그 때 싫은 동료의 웃음 소리가 들려 왔다. 싫은 동료는 돌아 볼 때 까지 계속, 더 크게 웃는다. 멤피스 안경은 그냥 무시하고 싶지만, 끊어질 듯 끊어질 듯 하면서 언젠가 관심을 가져 줄 때까지 계속 여러가지 방안으로 싫은 동료는 계속 웃는다.


 


어쩔 수 없이 멤피스 안경은 왜 웃는 거냐고 물어 본다. 싫은 동료가 대답한다.


 


"이거 형이 어제 받은 메일에 나온건데. (여기서 ''이란 싫은 동료 자신을 말한다. - 짧은 머리는 '그렇지 이렇게 말하는 사람들 많지'라고 잠시 생각한다.) , 이거 봐라. 알파 입자, 베타 입자, 감마 입자로 횡단 선속 실험을 했데. 그런데 베타 입자 속도가 늦게 측정이 되는 거야. 이유가 뭔지 아냐?"


 


멤피스 안경은 그냥 "안다"고 대답하고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다. 그러나 싫은 동료는 내가 답을 맞히지 못하고 자신은 반전을 제시하는 그 장면을 굳이 이어가고 싶어 한다. 나는 답을 모르는 방향으로 나아 간다. 싫은 동료가 말했다.


 


"이유가 뭐냐면, 베타 입자는 배 타고 온다고 늦었다는 거야. 베타 입자가 배 타고 물건너 왔데."


 


그리고 싫은 동료는 껄껄 거리고 웃었다. 싫은 동료는 잠시 후 다시 말을 잇는다.


 


"그런데 감마 입자는 실험을 하니까 반사가 측정 되는 거야. 이거 왜이런지 아냐? 너 이거 맞히면 형이 밥 산다."


 


멤피스 안경은 이번에는 진짜 안다고 대답하고 싶다. 정말로 멤피스 안경은 이 농담의 답을 떠올려 예상할 수 있었다. 그러나 멤피스 안경은 싫은 동료가 그 끝을 보도록 동조 해 준다.


 


"감마 입자가 왜 반사 되냐면, 감마 입자가 딱 가니까, ! 임마! 이러는 거야. !! 그래서 돌아온거라고."


 


그리고 연구소 사무실 안을 울려퍼지는 싫은 동료의 웃음 소리. 그 소리는 아수라들이 내던지는 2억개의 마귀 들린 야자 열매들이 온통 썩어서 물러 터지면서 바닥에 튀어 다니는 듯이 강한 진동으로 길고도 오래 퍼져 나갔다.


 


그러한 결과로 멤피스 안경은 무슨 일이 있어도, 여기서 나가자고, 이 연구소에서 빠져 나가자고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 결심이 얼마나 굳었던지 오직 순수한 그 결심만 마음 속에 꽉꽉 가득차서 그 순간에 그토록 오래 멤피스 안경을 따라 다니던 학창 시절 "그 학생"에 대한 생각 조차도 아무 저항 없이 잊혀 지게 되었다. 멤피스 안경은 무슨 수로든 지금 하고 있는 연구를 그럴듯하게 내어 보이고, 많은 사람들에게 유명해지게 만들어서, 좀 말이 되는 연구소의 말이 되는 자리를 얻거나, 언젠가 어느 소박한 대학일망정 교수 자리를 하나 얻고야 말겠다고, 비장하고도 굳건하게 맹세에 맹세를 거듭거듭한 것이었다.


 


 


3.


그 구름과 풍경과 웃음의 혼합 속에서 멤피스 안경이 "그 학생"을 잊게 된 그 날 이후, 멤피스 안경은 그 동안 미루어 두웠던 "매주 봐야할 논문"들을 다시 끌어 내어 모조리 읽고 탐구하기 시작했다. 멤피스 안경이 세계 각지의 초입자 가속 연구 논문들을 읽었고, 뒤이어 여러 방법으로 그 내용을 다심분석 개변우주론을 적용해서 무엇인가 자기가 일할 거리가 이렇게 대단하고 많다는 점을 꾸며 내기 위해 사력을 다해 노력 했다. 이 시절 멤피스 안경의 노력은 그 기록적인 두뇌 활용의 효율성이라는 측면만으로도 다시 살펴 볼 가치가 있다.


 


멤피스 안경은 마침내, "초끈 붕괴"라는 것을 상당히 가시적인 방법으로 보여 줄 수 있는 연구 방법을 찾아 낸다. "초끈 붕괴"라는 것은 이미 6년전 쯤에 미국 멤피스에 있는 한 대학의 교수가 제안한 것이 었다. 하필이면 멤피스 안경의 연구 결과와 멤피스에 거주하던 교수가 멤피스라는 지명으로 맞아 떨어지는 것은 특별한 다른 이유는 없었다. 앞으로도 그 우연이 이루어내는 다른 이야기 거리는 나오지도 않는다. 하지만, 어쨌거나, 허망한 한 가지 상상으로만 존재하던 "초끈 붕괴"라는 것을 구체적인 과학 이론과 실험으로 살펴 볼 수 있는 수단 중에 하나를 멤피스 안경이 떠올렸다는 것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점은 앞으로도 계속 언급 된다.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멤피스 안경은 초끈 붕괴를 따져 볼 수 있는 연구 방법 중에 하나로 제시되었던 것을 보다 현실적으로 보완했다. 그러나 어차피 대한민국에 있는 사람 중에 다심분석개변우주론을 이해하는 사람도 극히 적고, 그 중에 초끈 붕괴라는 것을 이해하는 사람도 극히 적을 것 아닌가? 멤피스 안경은 불법이 아닌 수준으로는 과장하기로 했다. 멤피스 안경은 바로 자신이 "초끈 붕괴"를 탐구하는 연구법을 만들었다고 떠들었다. 그 정도의 포장과 꾸밈마저 없어서야, 어떻게 멤피스 안경이 정규직 직장을 얻기 위한 길에서 진전을 할 수 있었겠는가?


 


멤피스 안경은 초끈 붕괴를 밀어 붙이기로 하고, 이런저런 잡다한 강연회며 교류회, 학술발표회며 토론회에서 이런 부류의 내용을 이야기 했다.


 


"왜 하필 세상에는 만유인력의 법칙과 전자기력의 법칙 같은 것이 있는 것입니까? 왜 이런 법칙이 일정한 수식의 형태로 온 우주 전체에 걸쳐 꾸준히 수백만년 동안 계속 유지 되고 있는 것입니까? 왜 이런 모양으로 법칙이 생겼는 지도 알 수 없습니다만, 이런 법칙이 계속해서 꾸준히 유지된다는 것도 무척 이상한 일입니다. 누가 이런 법칙을 유지시키려고 어딘가 숨어서 애쓰고 있기라도 한 겁니까?


 


그런데 다심분석개변우주론 관점에서 접근해서 살펴 보면, 현재 유지 되고 있는 이런 법칙들이 곧 점점 그 안정된 형태를 잃고 진동해서 발산해 버릴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실험으로 확인된 것은 아닙니다만, 앞으로 1억년 내 정도의 가까운 시간 내에, 이런 우리 우주의 물질들이 따르는 법칙들이 흩어져 없어져 버릴 것으로 보입니다. 중력의 법칙과 전자기장의 법칙 따위가 갑자기 온통 하나도 맞지 않게 되는 날이 온다는 겁니다.


 


이걸 '초끈 붕괴'라고 합니다. 초끈 붕괴가 일어나면, 세상에서 빛을 내뿜고 밝고 어둠이 있는 차이가 사라지고, 태양과 지구가 멋대로 떨어져서 돌고, 결국에는 우리 몸과 세계의 모든 물체를 이루고 있는 원자, 분자의 작은 알갱이들이 모조리 산산히 흩어져 버릴 것입니다. 그래서 온 우주가, 이 세상 전체가 단숨에 모두 깨어져 흩어져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극적인 효과를 돋우기 위해서 멤피스 안경은 발표를 할 때마다 이렇게 초끈 붕괴가 무엇인지 이야기를 한 후에,


 


"초끈 붕괴가 만약에 성립한다면, 초끈 붕괴는 앞으로 1억년 내에 일어 날 겁니다. 그 보다 더 정확하게 예측하기는 좀 어렵습니다. 앞으로 5분 후에 일어날 수도 있고, 5천만년 후에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라고 말한 뒤에, 발표를 끝낼 때,


 


"다행히 지금 여러분과 저, 땅과 하늘이 모두 무사한 것을 보니 아직 초끈 붕괴가 일어나지는 않았네요."


 


라고 웃으면서 덧붙이곤 했다. 그러면, 이 발표를 듣고 있던 사람들은 퇴장하는 멤피스 안경을 보고 따라 웃는다. 그것은 "싫은 동료"가 어려운 용어 등장하는 농담에 억지로 웃는 것과 다소간 닮은 형태였고, 뒤이어 유쾌한 박수 소리가 뒤이어 지곤 했다


 


멤피스 안경이 초끈 붕괴를 들먹였던 것은 꽤나 성공적이어서, 멤피스 안경은 곧 좀 더 많은 곳에 좀 더 적절한 이유로 불려 다니게 되었다. 마침내 멤피스 안경은 꽤 넉넉한 연구비의 국가 연구 사업에 참여할 기회를 엿볼 수 있게 되기도 했다. 멤피스 안경은 이 연구 사업을 따기만 하면, 조금 더 넉넉한 느낌으로 몇 년 더 버텨서 드디어 자나깨나 꿈꾸던 "그럴싸한 자리"로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멤피스 안경에게 이 국가 연구 사업은 행복의 구름 끝으로 올라 탈 수 있는 하늘에서 드리운 동아줄과 같아 보였다.


 


멤피스 안경이 이 동아줄을 붙잡기 위해 노려보고 있는 마지막 장애물은 연구 사업을 따내기 위해 열쇠를 쥐고 있는 정부의 공무원이었다. 이 공무원 청년은 무척 성실하고 상당히 청렴한 사람이었다. 결혼 한 지 5년이 지난 후 부터 7년이 지나는 사이 2년 동안 바람을 피운 적이 있을 뿐, 특별히 지칭할 만한 위법 행위를 하고 산 적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이 청년은 이 청년 앞에 떨어지는 사백이십륙개 분야나 되는 각종 과학 연구 지원 사업에 대해 따져야 하는 삶을 살았기에, 특별히 초끈 붕괴나 다심분석개변우주론에 대해 깊이 있는 이해를 갖고 있지는 않았다. 또한 이 공정한 청년이 보기에는 초끈 붕괴 못지 않게 국가 연구 사업으로 지원해야만할 다른 연구 분야도 많아 보였다.


 


멤피스 안경이 노리고 있는 이 연구 사업을 따내기 위해 멤피스 안경과 경쟁하는 비슷한 연구자들은 대한민국에 네 명 정도가 더 있었다. 각자 연구분야는 달랐다. 하지만, 이 연구 사업을 디딤돌로 삼아서 어떻게든 살 길을 찾아 보겠다는 간절함만큼은 다섯 사람 모두 비슷했다. 공정한 청년인 공무원은 이 다섯 사람들 중에 누구에게 연구 사업을 맡도록 하는 지 결정하기 위해, 좀 더 철저히 다섯 사람을 평가하고자 했다.


 


공정한 청년은 다섯 사람들의 연구 분야에 대한 발표와 설명 자료들을 이틀밤 이틀낮 동안 살펴 본다. - 이렇게 성실한 공무원은 대한민국에 단 두 명이 더 있을 뿐이다. - 그러나 봤지만 똑똑히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초끈 붕괴나 그와 비슷한 수준의 다른 각종 연구 분야 다섯 가지를 언제 새로 차근차근 공부해서 어느 것이 가장 가치 있는 것인지 판단하겠는가? 공정한 청년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던 것 한 가지를 골라 일단 탈락시켰다. 그리고 나머지 연구 분야들 중에, 그 연구 사업을 추진해 나갈 추진력과 조직력, 지도력을 갖춘 사람에게 연구 사업 예산을 맡기기로 결심한다.


 


공정한 청년은 술을 많이 퍼먹어서 머리 왼쪽이 엄청나게 아프던 공무원 연수원 시절의 어느 날 강연에서, 마법과 같이 졸리운 목소리로 말을 하던, 그렇지만 나이에 걸맞지 않게 붉게 빛나는 머리핀을 하고 있던 어느 고위 공무원의 말을 떠올린다.


 


"정부에서 나라를 위해 돈을 쓰는 지원 사업을 진행할 때...... 여러분. 얼핏 생각하면 가장 유망한 분야, 가장 필요한 분야. 이런 쪽으로 사업을 진행하시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 하시죠? 그런데 여러분, 명심 하십시오. 그건 절대 아닙니다.


 


물론 그런 것도 중요하지 않다는 건 아닙니다. 그게 다가 아니라는 겁니다. 어떻게 보면 아주 일부, 조금일 뿐입니다. 생각해 보세요. 누가 자기 연구가 쓸데 없는 분야라고 하겠습니까? 누가 자기 사업 지원해 달라면서 유망하지 않다고 하겠습니까? 세상에 유망한 분야, 정부의 지원이 필요한 분야는 끝도 없이 넘쳐 납니다.


 


그래서 여러분. 여러분께서, 나중에 국장도 되시고, 관리관도 되시겠습니다만, 돌아 보면 그런 생각 드실 겁니다. 정부 지원 사업을 추진할 때는, 사업을 정말 성실하게, 조직적으로 잘 이끌어나갈 수 있는 리더를 선택하셔야 합니다. 일을 잘 조직해서 정말 우리 국민의 혈세가 낭비되지 않게, 차근차근 일이 진행되어서 뭐라도 보여 줄 수 있는 성과가 나오게. 그렇게 조직력이 있고, 추진력이 있는 그런 리더, 일을 되게 하는 사람을 지원하도록 하셔야 합니다.


 


여러분께서는 정부 쪽에서... 어떻게 보면 여러분께서 정말 TV에서 말하는 사회지도층이 되실텐데, 그런 여러분께서 바로 그런 리더십이 있는 사람을 볼 수 있는 눈을 키우셔야 하는 겁니다. 그게 제일 중요 합니다."


 


그때 그 빛나는 붉은 머리핀의 말이 공정한 청년에게 얼마나 강한 영향을 끼쳤느냐하는 것이 중요하지는 않다. 실제로 측정해 본다면 직접적인 영향은 그다지 크게 평가 될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공정한 청년은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서서히 붉은 머리핀의 그 때 그 말에 스스로 동의해 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공정한 청년은 이번 지원 사업에서도 그야말로, 가장 "리더십"이 있는 사람이 추진하는 분야를 지원해 주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랬기 때문에, 공정한 청년이 가장 눈여겨 본 것은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네 연구자들이 얼마나 잘 어울리고, 술잔을 서로 채우고 기울일 때, 네 연구자들이 스스로 데려온 연구팀 사람들과 얼마나 잘 화합이라는 것을 이룩하는 지 관찰하려 했던 것이다.


 


가장 결정적인 순간인, 그날 저녁 먹으며 소주 마시는 그 시간이 오기 전에는 일종의 전야제가 있었다. 그날 오후 시간에, 사업 지원에 대한 설명회와 평가회가 엄숙한 분위기에서 진행 되었던 것이다. 밤에 계획되어 있는 같이 저녁 식사하는 자리에 앞서, 이 설명평가회는 낮에 진행되었으니, 전야제라기보다는 전일(前日)제라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하겠다.


 


공정한 청년은 열심히 설명평가회의 내용을 청취하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내용을 발표하는 사람들이 아리따운 미녀도 아니었고 즐거운 농담을 던지는 희극인도 아니었으며, 대부분이 그저 멤피스 안경과 같은 중늙은이들이었고, 시간 내내 "초끈 붕괴" 따위의 주제를 안타깝도록 열심히 혹여라도 재미날 것처럼 치장해 보이려는 것이 계속 되었다. 공정한 청년은 이 많은 지원사업비를 누구에게 줄 지 결정하는 가장 결정적인 자리로 불리우는 것이 그 자리였기에, 감히 졸지 않고 모든 이야기를 열심히 들으려고 온 힘을 다해서 노력했다. 이런 지겨운 내용을 대하면서 만사 젖혀 놓고 편안하게 졸면서 시간을 보내는 여느 "의사결정권자"들에 비하면, 공정한 청년은 졸지 않으려고 노력도 했고, 실제로도 도합 2분 정도를 제외하면 깨어 있었다. 이 대목을 생각할 때, 짧은 머리는 이 공정한 청년은 과연 공정한 청년이라고 할만하다고 생각 했다.


 


역시 공정한 청년이 걱정했던대로, 설명회와 평가회에서는 네 사람 중에 누구에게 지원사업비를 줘야 할 지 명확히 판단하기 어려웠다. 이것은 공정한 청년과 함께 심사위원을 맡은 학계와 업계의 전문가라는 무리들에게도 마찬가지 였다.


 


그리하여, 멤피스 안경은 지원 사업을 이번에는 꼭 따내고야 말겠다는 간절한 사명감을 갖고 저녁 식사 자리에 앉게 되었다. 멤피스 안경 역시, 사업비를 지원해 주기 위해 심사하고 판단하는 사람들이 이런 자리에서 얼마나 "리더십"이 있어 보이는 사람을 높게 평가하는 지, 그것이 정부 지원 사업을 해 나가는 데 얼마나 중요한 지 잘 알고 있었다. 사람을 이끌고, 사람을 부리고, 인간과 조직을 움직여 나가는 그 지도력. 멤피스 안경은 삶의 모는 것을 걸고, 그날, 수 킬로 그램의 돼지 목살 고기와 남부지방에서 생산된 소주들을 소비해 나가는 그 자리에서 멋진 리더십 있는 사람으로 보이려고 했다.


 


그러나 멤피스 안경에게는 치명적인 문제점이 있었으니, 멤피스 안경은 술을 마시면 얼굴이 붉어지고 급격히 정신이 몽롱해지며 자리를 지키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날, 멤피스 안경은 싫은 동료의 웃음 소리가 휘감고 있는 그 황량한 사무실을 탈출하고자 하는 욕망 때문에 그 모든 것을 감내하고 이겨 내기로 했다. 진정으로 스스로의 리더십을 뽐낼 수 있는 기회를 찾기 위해서는 서로 즐겁게 웃고 떠들며 다같이 기뻐하고 보람찬 시간을 보이는 척 하면서 자정까지는 버텨야 했다.


 


멤피스 안경은 쫓겨나지 않고, 제 발로 걸어나가지도 않으면서 자정까지 버티기 위해 묘수를 썼다. 멤피스 안경은 틈틈히 화장실을 가는 척 하면서 식당 바깥으로 나왔다. 멤피스 안경은 밤의 어둠이 그 섬뜩한 빛깔을 숨겨주는 그늘진 벽 뒷면 그늘로 들어 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미리 준비해 둔, 술 깨는 성분이 들어간 약병을 꺼내어 주사기로 팔에 주사 한다. 멤피스 안경은 주사기를 다루는 재주가 없기 때문에, 팔은 아프고 잘못 찌른 자리에서 피가 새는 일도 많다. 몰래 인터넷 모임을 뒤져서 주문한 이 약이 그저 술을 깨고 정신을 또록또록하게 하는 기능 이외에 또 어떤 업무를 몸 속에서 저지르는 지도 잘 몰랐다.


 


하지만, 멤피스 안경은 간절했고, 약병은 다섯 개나 있었다. 멤피스 안경은 그날 저녁 네 병의 약물을 왼쪽 팔에 주사하여, "술도 잘 마시고 사람도 좋아하고 인간관계에 훌륭한" 사람으로 보일 수 있는 시간을 충분히 가질 수 있었다. 드디어 멤피스 안경은 국가 지원 사업으로, "초끈 붕괴"에 대해 연구할 기회를 얻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이제 초끈 붕괴 현상에 의해 우주의 모든 별들과 모든 물체와 온 시간과 공간 전부가 단숨에 깨어져 없어지는 그 순간을 탐구할 수 있게 될 듯 했다. 그렇게 해서, 멤피스 안경은 드디어 답답한 싫은 동료와 함께 갇혀 있는 지금의 황량한 직장을 떠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바로 눈 앞에 세금이 모여 결정을 이루는 영롱히 빛나는 지원 사업비의 환상이 떠올라 우주의 끝으로 떠나는 초끈 붕괴의 꿈으로 아롱아롱 나타나서 손으로 움켜쥘 수 있을 듯 하였다.


 


멤피스 안경은 마지막 한 순간, 최후의 노력을 더 하기 위해, 세 차례만 더 공정한 청년과 같이 웃으며 두 잔 만 더 술잔을 비우기 위해, 잠시간만 아주 잠시간만 더 에틸 알콜을 견디기 원했다. 멤피스 안경은 그날 밤 그리하여 술 깨는 약 다섯번째 병을 왼쪽 팔에 주사하게 되었다.


 


진짜 문제는 바로 그때부터였다.


 


 


4.


여기까지 이야기를 진행했을 때, 짧은 머리는 갑자기 방해를 받았다. 같은 칸에 타고 있는 사람이 큰 소리로 전화 통화를 하며 떠들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키 큰 여자였는데,


 


"어디서 뭘 보고 왜 이러는 거야."


 


같은 말을 하면서 뭐가 큰 일이 있는 지 흥분한 어조로 크게 떠들어 댔다.


 


키 큰 여자는 말의 소리 크기와 내용보다는 그 어투와 목소리가 무척 거슬려서 자꾸만 방해 되는 사람이었다. 물론 목소리가 작지는 않았다. 그러면서도 말투와 복잡한 내용이 엮이는 바람에 뭐라고 그렇게 오래도록 많은 말을 떠들어대야만 하는 지는 결코 알아 들을 수도 없었다.


 


한 번 키 큰 여자에게 방해를 받는 바람에 짧은 머리는, 멤피스 안경에 대한 이야기를 부드럽고 자연스럽게 이어나갈 수가 없었다. 짧은 머리는 맞은 편에 앉은 아름다운 편이라고 생각하던 개를 데리고 있는 여자를 보며 잠시 딴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러고 난 다음에 짧은 머리는 멤피스 안경에 대한 생각을 다시 이어 갈 수 있었다.


 


여러 분야의 학자들과 공정한 청년과 함께 멤피스 안경이 저녁을 먹은 그날 밤, 멤피스 안경은 다섯번째 약물을 주사하고 나서, 문득 균형 감각을 완전히 잃어 버리는 느낌을 받았다. 멤피스 안경은 넘어지게 된다. 그런데 멤피스 안경은 넘어지면서, 사방을 둘러싸고 솟은 전기불빛으로 반짝이는 간판들의 건물들을 본다. 그 건물들이 보이는 각도가 빙글 돌아가는 것이 보이고, 그 틈 새의 검은 밤하늘이 눈에 맺힌다. 꺼멓게 무한의 밑바닥까지 뚫린 구멍처럼 보이는 그 밤하늘에서, 멤피스 안경은 그 때, 하늘을 장엄하게 뒤덥는 거대한 빛의 덩어리가 어마어마한 속도로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본다. 그 날 밤, 주사기를 들고 자빠지면서 멤피스 안경은 자기 눈에, 강철로 만든 대륙과 같은 덩어리가 수억개의 빛조각을 터뜨려 사방에 내비치면서 밤하늘을 덮고 날아가는 광경이 보이는 것을 느끼며 온몸에 소름이 바짝 돋는다.


 


멤피스 안경은 바닥에 자빠진다. 아프리라 짐작되지만, 멤피스 안경은 조금도 아픈 느낌이 들지 않고, 아픈 것은 문제도 되지 않는 듯이 누워 있다. 멤피스 안경의 귓가에 많은 사람들이 정신 없이 춤을 추는 음악이 멀리 들려 온다. 어느 가게에서 나오는 지 정확하지는 않다. 가사에는 "재즈의 음계", "그 바깥으로" 이런 내용이 있는 것도 하지만 역시 분명하지는 않다.


 


멤피스 안경은 그대로 반듯이 누워 밤하늘을 본다. 이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검은 하늘과 좌우에 솟은 술집과 유흥업소들의 간판 불빛들이 보인다. 그렇지만 멤피스 안경은 그대로 멍하니 하늘을 보고 있다. 약물의 영향 때문에 멤피스 안경은 눈꺼풀이 파르르 떨리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드디어 온몸으로 밀어 닥친 가장 깊은 깨달음의 감격에 멤피스 안경은 모든 것을 잊고 몸서리를 치기만 한다.


 


멤피스 안경은, 바로 그때 시멘트로 대충 덮어 놓은 식당 옆 벽에 자빠진 채 누워서, 자신이 겪고 있던 그 많은 번민의 의미와, 지금껏 자신이 여러가지 고생을 겪으며 이때껏 빈 하늘의 텁텁한 바람 보다도 재미 없게만 살아 왔던 삶의 목적을 온 마음으로 절절하게 느끼며, 드디어 그 답을 얻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 답이란, 멤피스 안경 자신이 외계에서 온 존재이며, 자신이 이제 곧 초끈 붕괴를 일으켜 종말을 맞이할 우리 지구와 우리 은하계의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이었다.


 


 


5.


짧은 머리는 지하철에 앉아 있는 멤피스 안경을 보고 이런 내용에 참으로 어울릴만하다고 스스로 기뻐했다. 거기까지가 짧은 머리의 상상력의 한계요, 감성의 끝이었다. 짧은 머리는, 멤피스 안경의 살짝 주름졌지만 깨끗하디 깨끗하게 관리된 옷차림을 보고 이런 내용에 어울린다고 여겼고, 멤피스 안경의 조금 벗겨져 가는 머리카락의 선을 보고 이런 내용에 어울린다고 여겼다. 또한 멤피스 안경의 그 적절한 자존감이 가득한 표정이 이런 내용에 어울린다고 생각했고, 한 편으로 불안한 겁쟁이의 눈빛이 있는 눈이 이런 내용에 어울린다고 여겼다. 짧은 머리는 멤피스 안경의 험한 일에는 어울리지 않는 손이 어울리고, 멤피스 안경의 세상에 대한 불만이 모여 있는 눈썹이 어울리고, 멤피스 안경의 멤피스 안경이 이런 이야기에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짧은 머리는 멤피스 안경이 그 날 밤 약을 다섯번 주사로 맞고 자빠질 때, 떠올린 내용이 이렇다고 생각했다.


 


멤피스 안경은 자신이 기억을 잊고 있어서 그렇지 원래부터 외계 저 편에서 온 존재라고 깨달았다고 생각 했다. 까맣게 그런 사실을 잊고 살아 가고 있었고, 오직 멤피스 안경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무의식 속에서 그 진짜 기억이 숨어 있었다. 멤피스 안경이 뛰어난 지성을 갖추고 다심분석개변우주론을 연구하게 된 것도 바로 그 무의식이 조종한 것이었다. 그러다가 멤피스 안경이 이 우주에 초끈 붕괴가 일어나서 한 순간에 멸망한다는 것을 알게 되는 그 순간, 멤피스 안경의 무의식은 깨어난다. 멤피스 안경은 이 초끈 붕괴의 멸망 속에서 사람들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을 갖고 있었으므로, 이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 멤피스 안경의 숭고한 사명이 된 것이다.


 


이러한 멤피스 안경의 운명은 아주 아주 오래 전 부터 예정되어 있던 것이었다. 머나먼 옛날, 아주 먼먼 곳에 멤피스 안경을 보낸 무리들이 있었다. 이 무리들은 얼마나 멀리 있었냐하면, 우주가 탄생한 시간 부터 지금까지 빛의 속도로 계속 달려도 도달할 수 없을만큼 머나먼 거리에 떨어져 있었다. 따라서, 이 무리들은 무슨 짓을 해도 우리에게 영향을 끼칠 수 없을 만큼 멀리 멀리 떨어져 있었다. 우리는 거기서 빛이 도달하는 데만 우주의 모든 시간이 소요되기에, 아무리 좋은 망원경으로 본다고 해도 그 무리들을 볼 수는 없었다. 당연히 그 무리들에게 도달할 수 있는 방법도 서로 통화할 수 있는 방법도 전혀 없었다. 따라서, 그 무리들은 우리가 우리의 세상이라고 부르는 것의 영향권 밖에 있는 무리들이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우주 바깥에 있는 무리들이었다.


 


이 무리들은 자신의 우주가 아주 긴긴 시간이 지나고 나면, 초끈 붕괴를 일으켜 그 모든 것이 모조리 갑자기 산산히 흩어져 없어져 버리게 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 이 무리들도 바로 대학원에 가서 다심분석개변우주론을 연구했을 것이다. - 따라서, 이 무리들은 초끈 붕괴에서 탈출할 방법을 찾아 보려고 했다. 그리하여, 이 무리들은 이들의 수준 높은 기술을 마음껏 활용해서, 자신들의 우주에 영향을 끼칠 수 없을만큼 먼 거리에 실험장치를 보내서, 새로운 법칙과 구조를 가진 우주가 생겨 나게 했다. 소위 "빅뱅"을 일으키는 실험장치를 만든 뒤 이들의 최신 기술이었던 광속을 넘는 속도로 우주선을 보내는 수법을 써서 멀리 떨어진 곳에, 이 무리들의 우주와는 다른 우주를 만들어낸 것이다. 중력의 형태와 전기와 자기가 작용하는 방식이 조금 다르고, 양성자와 중성자가 다른 형식으로 움직이는 다른 법칙으로 굴러 가는 우주를 꾸며 놓고, 이런 우주에서 초끈 붕괴가 일어나면 어떻게 대처하는 지 먼저 실험해 보려고 했던 것이다.


 


이 무리들은 실험장치를 이곳 저곳으로 여러 개 만들어서 보냈다. 이 무리들은 이렇게 해서 48개의 우주를 만들어 놓고, 이 우주들이 어떻게 초끈 붕괴를 일으키고 어떻게 거기서 빠져 나올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낼 수 있을 지 관찰 해 보기로 했다. 이 무리들은 실험을 정교하고 역동적으로 진행하기 위해서, 만들어낸 우주의 많은 은하계들 중에 어느 한 구석에는 자신들의 뜻을 상상하고 이해할 수 있는 생물들이 나타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해서 이 무리들은 수없이 많은 은하계들 중에서 적어도 한 군데에서는 생명이 출현하는 우주를 만들어 보려고 했다. 그리고 그 생명체가 똑똑하게 진화할 수 있는 환경이 생길 가능성이 높아지도록 우주를 만들고자 했다. 그렇지만, 48개의 우주 중에 47개의 우주에서는 똑똑한 생명체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러는 가운데 이 47개의 우주 중에 31개에서 정말로 초끈 붕괴 현상이 일어났다. 31개의 우주들은 흩어지는 연기처럼 사라져 버렸다. - 멤피스 안경은 연기만 해도 얼마나 어마어마하게 많은 숫자의 기체와 그을음들의 분자들이 모여서 된 것인지 생각해 본다면, 연기처럼 흩어지는 것만 해도 정말로 넉넉하고 풍성한 광경 같이 느낄만 하다고 생각 한다. 한 줌의 연기 속에는 몇 조의 몇 조 배나 되는 입자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초끈 붕괴로 우주가 흩어질 때는 그야말로 모든 것이 단숨에 흩어져 사라져 버린다. 광대한 풍요로 가득찬 그 말 할 수 있는 가장 큰 거대함이 잠깐 사이에 아무것도 남기지 않고 한 톨의 흔적도 없이 없어져 버리는 것이다.


 


이리하여, 이 무리들은 31개의 초끈 붕괴를 관찰하면서 연구한 끝에, 자신들의 기술을 이용하면 초끈 붕괴가 일어나는 와중에 상당한 물체들을 자신들이 사는 곳으로 구출해 올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아직 초끈 붕괴 자체를 막을 방법을 알 수 없겠지만, 적은 숫자의 물체 나마, 초끈 붕괴가 일어나지 않는 곳으로 옮겨 올 수 있는 방법은 찾아낸 것이었다. 그렇게 해서, 이 무리들은 인간이 태어나 살고 있는 48번째 우주에서 초끈 붕괴가 일어날 때, 그 안에 있는 물체를 구출해 오는 실험을 해 보려고 한다. 적어도 몇 천 명, 몇 만 명 단위의 인간을 우주 저 편, 이 무리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구출하여 데려 오려고 했던 것이다.


 


멤피스 안경은 자신이 바로, 이 우주를 만들어낸 실험 장치의 직계 후손이라고 생각 한다. 멤피스 안경은 우주 바깥, 자신을 이곳에 보내어 이 우주를 만들어낸 그 존재의 뜻에 따라, 이 우주에 살고 있는 똑똑한 존재를 초끈 붕괴가 일어나기 전에 구출해 데리고 나가는 사명을 가지고 있다고 믿게 된다.


 


이후, 멤피스 안경은 공정한 청년에게 잘 보이는 것이나, 정부의 눈 먼 돈을 받아 챙기거나 하는 일에는 완전히 관심을 잃는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싫은 동료의 웃음만은 여전히 견디기 어려웠다. - 멤피스 안경은 사무실 건물 옥상에 올라가, 파랗게 자라난 모가 꽉꽉 들어찬 논을 보고 그 지평선 너머 쪽을 바라 보면, 그 방향에 살고 있는 수십억의 인간들이 모두 눈에 보이고, 그 사람들의 말과 생각이 모두 귀에 들린다는 느낌을 받는다. 멤피스 안경은 지구의 사람들 중에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 남을 수 있는 사람,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남을 가치가 있는 사람들만 선택하고자 한다. 그렇게 해서 이 우주 바깥, 이 우주를 만들어낸 존재들이 사는 우주로 데려 가리라고 결심한다.


 


멤피스 안경은 이 사람들을 우주로 데려 갈 날짜를 정해 두었다. 멤피스 안경은 90년대에 유행했던 시한부 종말론에서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사람들을 우주 바깥으로 구출해 갈 계획을 세웠다. 구출을 할 그날, 새벽 0시가 되면, 선택한 사람들을 순간적으로 하늘 위로 떠오르게 하면서 빛 보다 빠른 속도로 우주 바깥으로 이동시키는 것이다.


 


지구는 둥글고, 세계 여러 나라마다 시차가 있을 것이기 때문에, 각 나라별 표준 시각에 맞추어 이동을 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멤피스 안경은 결심했다. 그래서 나라 별로 새벽 0시가 찾아오는 시각에 맞춰서 차례로 순간 이동이 일어 난다. , 동쪽에 있는 나라에서부터 서쪽에 있는 나라까지 차례대로 사람들은 순간이동 된다. 뉴질랜드에 있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구출 되고, 그 다음에는 같은 표준 시간을 쓰는 일본인과 한국인들이 동시에 순간 이동 된다. 그 다음에는 중국인들이, 인도인들이, 유럽인들이, 미국인들이 차례로 순간 이동 되어 구출 되는 것이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 나라 표준 시각으로 0시가 될 때에 맞추어 차례대로 순간 이동 되는 것이다.


 


멤피스 안경은 정확히 시간을 맞추어 사람들을 순간 이동 시켜서 구출 시키기 위해, 세계 여러 나라들 중에 어느 나라가 써머 타임을 쓰고, 어느 나라는 아직 안 쓰는 지 차분하게 인터넷을 보면서 조사해서, 수첩에 차곡차곡 메모해 두었다. 써머 타임을 쓰면 보통 시간이 한 시간이나 차이가 난다. 온 우주가 망해서 흩어져 없어지는 가운데, 온 우주 전체에서 유일하게 구출될 사람들이 하늘 저 편으로 가게되는 이 장엄한 순간이, 고작 써머 타임 착각 때문에 한 시간씩이나 오차를 보이게 된다면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냔 말이다. 멤피스 안경은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 시간을 잘 맞추고자 노력 했다.


 


멤피스 안경이 처음에 걱정했던 것은 혹시 길을 가다가 마침 그 순간 시간대의 경계선을 넘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되냐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떤 어부 한 사람이 있어서 마침 그 날 새벽 0시에 한국 지역 바다에서 꽃게를 잡다가 중국 지역 바다로 넘어가다가 딱 가운데에 걸리게 되면 어떻게 되는가? 그러면 반쪽만 구출되고, 반쪽은 남겨지게 될까? 그래서는 안된다. 인간은 몸의 반쪽만을 분리해서 이동시키면 그 생명을 지속시키기가 어렵다. 멤피스 안경은 반쪽 짜리 인간이 나타나도, 심장과 혈관을 재빨리 치료해서 생명을 유지시키도록 하는 장비를 우주 너머에 준비해 둘까 하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그래도 인간의 틈바구니에서 대학원을 다닌 경험을 한 멤피스 안경은 그 방법은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리하여, 멤피스 안경은 사람이 걸어갈 때의 속도와 몸이 받는 관성에 따라, 다심분석개변우주론적 방법에 의해 그 사람의 위치를 변환하여 계산하면 시차의 경계에 걸려 있는 사람이 얼마나 한 쪽으로 치우쳐져 있느냐에 따라 어느 곳으로 넘어온 것으로 봐야 하는 지 정할 수 있음을 증명했다. 이제 그날 새벽 0시에 시간대의 경계선에 걸쳐지는 사람은 다심분석개변우주론 방법으로 둘 중 어느 시간대로 보아야 하는 지 판정한 다음, 거기에 따라 시간을 맞춰서 순간 이동 시키면 되는 것이다.


 


멤피스 안경이 마지막까지 풀 수 없었던 문제는 동남아시아의 한 켠에 있는 "마약섬"이라는 곳에 대한 것이었다. 마약섬은 그 곳에 아시아 각국의 마약조직들이 정글 사이에 숨어서 소굴을 꾸미고 있던 시절에 붙은 이름이었다. 그 섬은 하나의 작은 나라처럼 운영되었고, 전국민이 모두 마약밀매조직원이라는 특징이 있는 나라 였다. 이 마약섬은 아시아의 마약문제를 근절시키기 위해, 아시아 7개국 협력으로 군대를 보내어 마약밀매조직을 대거 소탕하면서 빈 땅처럼 되어 버렸다. 아직 남은 사람들이 조금 살고 있기는 하지만, 어느 나라의 정부도 그 사람들을 전적으로 책임지지는 않는, 국가라는 것이 모호한 지역이 된 것이다.


 


그런데, 이 마약섬에 몇 가지 귀한 금속 자원이 발견된 데다가, 배가 지나가면서 머무는 항구가 있으면 좋은 지점이 몇 군데 있어서, 여러나라들의 기업, 특히 다국적 대기업 조직들이 매우 빠르게 퍼져 나갔다. 그런 식으로 3, 4년쯤 시간이 흐르다 보니까, 이 마약섬이라는 곳은 어느 한 나라가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세계 유수의 몇몇 거대 기업들이 섬을 지배하면서 서로 영향력을 맞서 싸우는 곳이 되어 버렸다. 어찌보면, 업종이 바뀌었을 뿐, 왕이나 대통령이 있는 정부 대신에 "조직"이 다스리던 시대로 되돌아갔다고 볼 수도 있었다. 사는 사람들을 보호하고, 범죄가 일어나면 조사하고 퇴치하고,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건설과 토목 사업을 벌이는 일들을 모두 마약섬을 나누어 가진 대기업 조직들이 맡았던 것이다.


 


문제는 마약섬에는 이렇게 여러 나라의 기업들이 서로 잡다하게 퍼져 있기 때문에, 표준 시각 역시 하나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30, 1시간 차이기는 했지만, 어느 회사 소속으로 근무하느냐에 따라 사람들이 따르는 표준 시각이 서로 달랐다. 나라와 나라처럼 땅을 나누어 시간대를 구별해 놓은 것도 아니고, 서로 섞여 살면서 어느 회사 소속이냐에 따라 시각이 달랐던 것이다.


 


그러니, 멤피스 안경으로서는 이 섬에 사는 사람들은 도대체 언제 순간이동 시켜 줘야 할 지 정하는 것이 난감하게 되었다. 그냥 아무 시간이나 하나를 정해 둘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멤피스 안경이 임의로 어떤 한 회사를 지지하는 모양이 되어 버린다. 그것은 옳지 않았다. 멤피스 안경은 우주의 멸망 속에서 우주에 몇 안되는 선택된 존재만을 구출해주는 권위를 갖고 있다. 그런데, 이런 멤피스 안경이 주가대비 당기순이익이나 자기자본 규모 따위의 지표를 기준으로 한 회사만 편든다면, 모양이 너무 나쁘게 보이게 된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소속사별로 사람들을 시간을 나누어 순간이동시킬까? 땅에 있는 시간대의 경계선에 걸쳐진 사람들을 순간이동 시키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소속사에 따라 구분하는 것은 얼마나 더 난감하겠는가?


 


어쩔 수 없이 멤피스 안경은 마약섬으로 가서, 대기업 회장들끼리 서로 만나서 하나의 표준 시각을 정하라고 주선하려고 했다. 멤피스 안경은 그래도 멀쩡한 학위를 갖고 있으며 멀정한 실적을 갖고 있는 연구원이었는데 우주 멸망 같은 이야기를 꺼내지는 않으면서도 워낙 심각하고 진지하게 회의를 제안했기에 대기업의 담당자들은 그래도 이 사람을 만나 보기는 해야 겠다고 생각 했다. 그렇게 해서 멤피스 안경의 주제로 마약섬에 있는 여러 회사의 직원들은 서로 모여 회의를 하려고 했다.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회의를 하는 지 모두가 궁금해 하고 있고, 멤피스 안경은 드디어, "초끈 붕괴로 우주가 멸망하고, 나는 외계에서 사람들을 선택해서 구출하로 온 사람이다."라고 말하려고 하는 순간이 왔다.


 


이때 지하철 안에서는 다음역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짧은 머리는 안내 방송에 귀를 기울였다. 다음 역은 환승역이었다. 짧은 머리는 안내 방송에서 영어로 말하는 부분이 나올 때, 자기가 그 단어들 중에 얼마나 알아 들을 수 있을 지 유심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짧은 머리가 알아 들을 수 있는 말은 거의 없었다.


 


안내 방송이 끝나자, 짧은 머리는 다시 마약섬을 찾아 간 멤피스 안경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한다.


 


멤피스 안경이 정말로 "나는 외계에서 왔다"고 말했다면, 그 말이 너무도 황당하여 제대로 비웃지조차 못하고 모든 회사에서 온 사람들이 그대로 걸어 나갔을 것이다. 사람을 무시하고 얕보고 꺼림칙해 하는 그 많은 양복입은 사람들의 반듯한 모습들, 그 광경이 짧은 머리의 눈에 선했다. 그리고 나서 마약상의 살벌한 분위기로 보건데, 멤피스 안경은 우주의 멸망이니 초끈 붕괴니 하면서 떠들고 다니다가 어느 폭력배나 용역 직원에게 두들겨 맞아 처참히 죽을 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 다음 이야기는 그렇게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 다음 이야기에서 너무도 황당하여 그저 말 없이 걸어나간 사람은 멤피스 안경 자신 이었다. 멤피스 안경은, 마약섬 중앙 빌딩 31층 회의실에서 그 정글이 평평하면서도 끝없이 펼쳐져 있어 서울 송파와 노원의 아파트 떼들처럼 높디 높게 솟아 깔려 있는 울창한 나무들을 내려다 보았다. 그리고 그 위에 햇빛을 비처럼 쏟아 붓고 있는 하늘을 보았다. 그런데 그리고 말을 막 시작하려고 할 때, 멤피스 안경은 새로운 소식을 듣게 된다. , 멤피스 안경의 고향이자, 모든 우주들을 만들어낸 실험 장치를 처음에 보냈던 곳, 그 외계 우주 너머의 그 곳. 그곳이 지구가 있는 이 곳 보다 먼저 초끈 붕괴를 일으켜 버렸다는 것이다. 이러니, 그 무리들은 탈출할 방법, 돌아갈 수단 조차 체대로 찾지 못하고 그대로 사라져 없어지는 우주와 함께 모두 멸망해 없어졌다.


 


이리하여, 멤피스 안경은 이제 순간이동을 시켜달라고 연락할 고향이 없어져 버렸다. 게다가 순간이동을 할 수 있더라도 어디로 가야할 지도 모르게 되었다. 이제 표준 시각을 맞추는 것 따위는 다 날아가 버린 것이다. 이제 선택 된 사람들만 구출되는 것 없이, 그저 다같이 초끈 붕괴를 맞이 하여 모두 다 없어지는 것 뿐일 것이었다.


 


멤피스 안경은 모든 게 망했으므로, 그저 마약섬에서 고향인 - 외계의 그 곳과 비교해 볼 때 가짜 고향, 혹은 진짜 고향 - 서울로 되돌아 왔다. 그리고 지금 멤피스 안경은 자신이 알고 있는 것을 모든 지구 사람들에게 발표하려고 가는 길이다.


 


방송국이나 정부 기관을 찾아가서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 괜히 외계의 존재니 뭐니 하는 이야기는 빼 놓고, 학술적인 연구로 알게 된 것으로 꾸며서, 이제 곧 초끈 붕괴가 일어나서 우주가 없어지게 된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멤피스 안경은 술 마시다가 약 주사 놓으며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한 이후, 초끈 붕괴가 언제 일어나는 지 보다 정밀히 계산할 수 있게 되었다. 초끈 붕괴는 앞으로 2분 후에서 6개월 사이에 일어날 것이다.


 


멤피스 안경은 그 철저한 멸망의 날을 상상해 본다. 운이 좋은 사람이 살아 남을 수도 없고, 선택된 몇몇 만을 멀리 보낼 수도 없다. 하다 못해 인간은 모두 망해서 없어지는 것을 감수하고 우리의 흔적을 남길 수 조차 없다. 우리의 문화와 기록을 남길 수도 없다. 아무리 튼튼한 비석에 새긴 글자이건, 아무리 안전한 방식으로 보내는 신호이건 모두 다 멈추어 서고 소멸하게 될 것이다. 세상에 정말로 "존재"할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모두 다 사라져 없어져 버린다. 천국은 무너져 내리고, 지옥은 얼어 붙은 뒤, 둘 다 모두 다 끓어 올라 없어질 것이다. 거기에는 아무런 예외도 없고, 어떠한 다른 가능성도 없다. 모두가, 모든 것이 그저 깜깜한 암흑만이 가득한 끝이 없는 공허함으로 차가운 죽음이 되는 것이다.


 


멤피스 안경은 초조한 마음으로 자신이 한 말이 세상에 퍼지고, 세상 사람들이 이 말을 받아 들이기 시작한 후의 광경을 생각해 본다. 세상 사람들은 처음에는 이런 저런 가능성으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다고 하기도 하고, 어떤 사람들은 그 어떤 경우에도 희망은 있다면서 기적이 일어날 지도 모른다고 하기도 한다. 하지만, 차츰차츰 모두들 알게 된다. 곧 온 우주는 사라지고, 우주의 이 모든 것들과 내 영혼의 모든 알갱이들이 이 세상에 그 어떤 영향을 남기지도 못하고 모조리 끝나버리게 된다는 것, 그것이야 말로 믿어 마땅한 진실임을 다들 알게 된다.


 


결국 인간의 사회가 떠올린 방책이란 것은 텔레비전에서 위선적으로 조용한 음악이나 여러 종교의 경문들을 24시간 울려 퍼지게 해 놓고, 가족끼리 집집마다 보여, 편안한 마음으로 존엄성 있는 죽음을 다같이 맞이하자고 요란을 떠는 것이다. 이 말을 따르기로한 많은 사람들은 텔레비전에서 나오는 소리에 맞추어 다같이 주문이나 기도 따위를 읊조린다. 그러나 그 무서움을 잊기는 어려워 그 읊어대는 반복은 더욱 소리만 커지다가, 결국 겁에 질려 눈물을 흘리며 울게 된다. 울고 있는 부모와 자식들은 서로 부둥켜 안고 시끄럽게 군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런 따위가 사실 마음을 다스리는데도 아무 도움되 안되며, 그저 모든 것이 무서움을 달랠 수 있다는 거짓 속임수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절절히 느끼게 된다. 마지막 순간의 절망을 두고,


 


"나는 두렵지 않다"


 


고 멋을 부리던 고명한 지도자들이 하나 둘 두려움에 발발 떨며 울고 발버둥을 치는 광경이 도처에서 나타난다.


 


그렇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멤피스 안경은 생각한다.


 


그래도 아무것도 모르는 사이에,  붕괴의 손을 맞아 영문을 모르고 파리채에 덮혀 찌부러지는 파리 보다는, 알고 낙망하여 무서워 눈물을 흘리면서 찌부러지는 꼴을 보는 것이 좀 더 옳은 일이라는 마음을 버릴 수가 없기 때문이다.


 


 


6.


멤피스 안경에 대한 이야기를 짧은 머리는 이상과 같이 돌아 보았다.


 


그런데, 이 이야기의 앞 부분을 보면, 짧은 머리가 멤피스 안경을 보면서 이런저런 잡다한 생각을 하기 시작하기 전에, 짧은 머리가 유난히 맞은 편에 앉은 여자에 신경을 썼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짧은 머리는 그 여자를 꽤 아름다운 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짧은 머리가 이 여자를 제대로 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딴전을 피우다가 위와 같은 멤피스 안경에 대한 생각으로 빠진 것을 본다면, 짧은 머리가 얼마나 이 여자의 용모를 심도 있게 평가하고 있는 지 짐작이 될만 하다.


 


하지만 지하철 칸 안에 있는 사람들의 생각이 모두 거기에 일치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대표적으로 멤피스 안경은 이 여자의 모습에 대해 오히려 부정적인 감상을 받고 있었다.


 


우선 멤피스 안경은 개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여자는 작은 개를 한 마리 데리고 있었다. 검정색과 갈색의 털이 길게 난 팔뚝만한 크기의 개였는데, 여자는 개를 제 무릎 위에 앉혀 놓기도 했고, 개가 내려가면 제 발 앞에 서 있게 하기도 했다. 멤피스 안경은 지하철에 개를 데리고 타는 것은 원칙적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개라고 해도 멤피스 안경은 이것은 큰 잘못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개털 알레르기라도 있는 사람이 있다면, 밀폐된 지하철 전동차 안에서 얼마나 당혹스러울 것인가?


 


물론 이와 같은 생각에 모두가 동조하는 것은 아니었다. 예를 들어, 지하철에서 전화를 받고 있는 키 큰 여자는 멤피스 안경과 생각이 달랐다. 키 큰 여자는 자기 스스로 개를 데리고 지하철에 타지는 않을 것이며, 또한 개를 지하철에 태우는 것이 옳지는 않지만, 그래도 너그러운 마음으로 저 개와 개 주인은 용서해 주면 더 좋은 세상이 되지 않겠냐고 생각 했다. 키 큰 여자는 개가 작고 얌전해서 아무에게도 별다른 피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다. 더우기 키 큰 여자가 보기에 그 개는 귀여웠다. 지하철의 덜컹거리는 움직임과 큰 소리가 낯설어 조금 겁먹은 표정으로 붙어 앉은 수십명의 사람들이 있는 광경을 호기심 많은 눈빛으로 보는 그 까만 눈망울이 아주 마음이 설렐 정도로 보기 좋다고 여겼다. 이렇게 귀여운 개라면 누구든 오히려 가까이서 보면서 즐거워 할 것이라는 것이 키 큰 여자의 판단이었다.


 


멤피스 안경은 그 시기에, 그런 키 큰 여자와 같은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을 가정으로 상상 했다. 멤피스 안경은 그런 사람들이 있기에 지하철에 개를 데리고 타는 것을 관대하게 받아 들여 주는 경우가 있어서 당연히 지켜야할 규칙이 안지켜 지는 것이라고 더욱 기분 나빠 하였다.


 


멤피스 안경이 보기에 개를 귀엽게 여긴다는 것은, 인형이나 아기를 보고 좋아하는 퇴행적인 취미와 유사한 일부 인간들의 취향일 뿐이었다. 멤피스 안경과 같은 취향으로 본다면 이 개와 같은 동물은 빠진 개털을 뿌리고 다니고 가끔 광견병 따위의 병을 옮겨 놓곤 하는 쓸모 없는 추한 생물일 뿐이었다. 멤피스 안경은 자신과 같은 시각을 갖고 있는 것이 좀 더 어른스럽고 수준 높은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기까지 했다.


 


이러한 때문으로 멤피스 안경은 이 개의 주인인 여자를 더욱 더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다. 멤피스 안경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이 사람을 두고, 안톤 체홉의 유명한 단편 소설,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의 등장 인물, 안나 세르게예브나를 떠올렸다. 멤피스 안경은 그 유명한 단편 소설을 좋아하지도 않았거니와, 왜 이런 정도의 소설이 이렇게 유명해졌는 지 납득도 하지 못해 오히려 불만마저 품고 있었다. 당연히 그 등장 인물로서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인 안나에 대해서도 공감하지도 못하고, 좋아하지도 않았다. 멤피스 안경은 때문에 지하철 옆 자리에 앉은 개를 데리고 다니는 여인을 안나와 견주게 되었다.


 


멤피스 안경이 보니, 안나는 매우 마른 몸집을 가지고 있었다. 체구도 작은 편이었다. 너무 마른 편이라서 병약해 보이기도 하고 반대로 어딘가 신경질적인 면이 있어 보이기도 하다고 멤피스 안경은 생각 했다. 멤피스 안경과는 정반대로 짧은 머리는 바로 그런 마른 몸집을 갖고 있다는 이유 때문에 일단 안나는 "미인"의 기준이 되기 위한 요건을 취득했다고 보았다. 짧은 머리는 사람은 크게 마른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으로 나뉘고, 모든 미인들은 마른 사람들 중에서만 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짧은 머리는 일단 몸무게가 적게 나가면 나갈 수록 그만큼 더 아름답다는 시각을 매우 굳게 세워 놓고 있었다. 짧은 머리가 보기에 안나는 그 조건의 비례에 따라 썩 높은 아름다움의 정도를 뿜어낸다고 보고 있었다.


 


멤피스 안경에게는 전혀 아니었다. 안나의 머리칼은 이상하게 그 색깔이 옅고 가닥가닥이 힘이 없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약간 긴듯하게 기른 그 머리카락이 스산하게 흩어진 듯한 모양으로 사방으로 뻗어 있는 것 처럼 보였다. 나이는 꽤 어려 보여서 19, 20세 정도. 보이기에 따라서는 고등학생이라고 해도 충분해 보였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헐렁하여 힘없이 펄럭이는 면으로된 옷은 어째 옷을 입는 것에 대한 치장을 완전히 포기하고 산 지 10년이 넘은 60대 할머니의 운치와 비슷한 면도 있었다. 가끔 눈은 매우 멍해져서 아무것도 없는 검은 창 바깥을 향하기도 하다가, 또 갑자기 개를 보면서 뭐라고 중얼거리기도 했다.


 


이 즈음 해서, 멤피스 안경은 이렇게 함부로 남의 겉모습을 재단하고, 지하철 안에서 흘깃흘깃 남을 보면서, 이러쿵 저러쿵 속으로 평가하는 마음을 먹는다는 것이 옳지 않은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남을 함부로 쳐다보면서, 저주에 가까운 이런 평을 속으로 내리는 것은 양심에 어긋나는 행동이며 예의를 잘 따르는 행동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때 안나가 데리고 있는 개가 한 번 소리를 내어 짖었다. 그러자 안나가 뭐라고 개의 이름을 부르며, "우리 아가야" 어쩌고로 시작하는 말을 꼭 자기 자신이 귀여운 아기가 된 듯한 어투로 말했다. 멤피스 안경은 도대체 왜 저러나 싶었다. 개가 귀여울 수는 있겠다. 그렇지만 개 주인이 귀여워지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왜 개에게 말을 하는 사람이 그런 이상한 어린 아기 같은 말투를 흉내내 말을 하는 것인가? 멤피스 안경은 안나가 저 개에게 말을 하면서, 귀여운 개와 말하고 있으니 안나 자신도 무심코 어떤 "귀여움의 세계" 속에 잠시 들어와 있다고 생각하고 자기도 그런 세상의 일원으로 저런 소리를 내는 거라고 짐작하게 된다. 그러고 있으니, 멤피스 안경은, 하여간 개를 데리고 지하철에 탄 안나는 아주 나쁜 사람이고, 그러므로 그런 사람에게 나쁜 소리를 좀 한다손 치더라도 나쁠 게 없다는 따위의 마음이 욱하고 치밀게 된다.


 


그래서 멤피스 안경이 안나를 보면서,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일 거라고 상상하기 시작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7.


이야기는 2대를 더 거슬러 올라가서 안나의 할아버지 때부터 시작 해야 한다. 안나의 할아버지가 43세 정도 였던 시절, 안나의 할아버지는 가난한 살림을 탈출하고자 이것저것 적극적으로 행동하며 사는 인생을 살아 보고자 결심한다. 안나의 할아버지는 주위의 무기력한 가난뱅이들을 비웃으며, 자신은 TV에서 가르쳐 준 대로 다만 몇 십만원의 자산이라도 "투자"라는 것을 하는 삶을 살고 있다고 말하려고 한다. 안나의 할아버지는 과감하게 전재산을 투자기금 계좌에 입금한다.


 


안나의 할아버지는 9일 후 전재산을 모두 날려 없앴다. 안나의 할아버지는 이제 살 길을 잃게 되었다. 안나의 할아버지에게 그 때 주어진 것은 길거리를 떠돌며 살다가 무료 급식소를 전전해야 하는 생활이었다. 그 이상을 생각할 수 있다면, 안나의 할아버지가 가끔 일용직 자리를 얻어 한 며칠 좁은 곳이라도 지붕이 있는 집에서 사는 삶을 시도하는 것 정도 였다. 하지만 안나의 할아버지는 남들이 하지 않는 일에 도전할 때에 좋은 기회를 얻는다는 생각을 그때까지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여러가지 불법적인 방법을 동원하여 안나의 할아버지는 마지막 기회를 찾아 원자력 발전소 사고 구역으로 갔다.


 


원자력 발전소 사고 구역은 방사능 오염 지역이 되어 모두가 오래 전에 떠나간 곳이었다. 안나의 할아버지는 방사능으로 오염된 곳에 몰래 들어가서, 버려진 빈집에서 살기로 한다. 그런 곳에서 살면, 널찍한 저택에서 있으면서 가장 좋은 가구를 사용하고, 미처 떠난 사람들이 가져가지 못한 패물과 세간을 훔쳐와서 팔아 먹을 수도 있다. 물론 그렇게 살다보면 방사능에 오염되어 곧 암에 걸려 죽을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그렇지만, 안나의 할아버지에게 남아 있는 것은 일당 몇 푼으로 매일 술을 마시다가 알콜 중독이 되어 간이 썩어서 죽는 미래와 길거리에서 자다가 광견병이 걸려 추워서 떨다가 죽는 미래 밖에 남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가정이지만, 만약 그 때 안나의 할아버지가 방사능 오염 지역으로 들어 가지 않았다면, 2년 후에 서울 지하철 을지로 입구역 2번 출구 열 한 번째 개단에서 광견병에 걸려 죽은 채로 발견 되게 된다.


 


그러나 안나의 할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고 방사능 오염 지역으로 걸어 들어 갔던 것이었다. 때문에 안나의 할아버지는 지하철역에 쓰러진 채로 2년 뒤에 발견되지 않았다. 이 무렵, 방사능 오염 지역에 몰래 들어 가서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물건들을 꺼내 오려는 사람들은 안나의 할아버지 외에도 꽤 많았다. 경찰은 이런 사람들이 방사능 오염 지역으로 들어 가는 것을 막았다 .하지만, 금반지 몇 개라도 집어서 나오려는 빈자들은 밤마다 몰래 경찰을 피해 철조망 밑으로 기어 들어가서 방사능 오염 지역으로 들어 갔다. 그런 사람들을 주변 사람들은 "핵털이"라고 불렀다. 곧 기자들도 "속칭 핵털이"라면서 그 말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안나의 할아버지와 같은 사람들은 모두 핵털이로 불리우게 되었다.


 


안나의 할아버지는 방사능 오염 지역으로 몰래 숨어 들어간 뒤에, 그 곳 중에서도 가장 위험한 구역으로 들어 갔다. 핵털이들도 어지간해서는 가까이 가고 싶어 하지 않을 만큼 심하게 오염된 지역이었다. 방사능 중에서도 가장 기이한 것들이 가득한 그곳은 밤이면 뿜어내는 방사성 물질들의 빛깔 때문에 여러가지 색깔의 야광 먼지가 하늘에 날아 올라 마치 수십 마리의 귀신이 웃으며 춤추는 것과 같이 빛덩어리들이 꼬리치며 떠도는 곳이었다. 안나의 할아버지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그곳에 갔다. 그리고 나오지도 않는 거대한 텔레비전 앞의 푹신한 소파에 앉아서 편안한 밤, 텔레비전 보는 척을 하면서 하루를 보냈다. 안나의 할아버지는 그곳을 돌아다닌 끝에 결국 많은 현금과 금반지를 가득 꺼내어 방사능 오염 지역을 나올 수 있었다.


 


안나의 할아버지는 성공한 핵털이가 되었다. 핵털이로 가져온 돈으로 안나의 할아버지는 노인들만 사는 시골에서 정착할 집을 산다. 안나의 할아버지는 그곳에서 빈땅에 몰래 채소를 심어 팔았다. 안나의 할아버지는 핵털이 짓을 한 후에도 행운이 있어 아무런 병도 걸리지 않았다. 안나의 할아버지는 같이 살 반려자도 구했고, 늦었지만 자식도 낳았다. 그렇게 태어난 사람이 안나의 아버지였다. 안나의 아버지는 안나의 할아버지가 자기도 모르는 방사능 피해를 받은 것 때문에, 걸을 수 없는 몸을 갖고 태어나게 되었다.


 


안나의 아버지는 안나의 할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서울에서 살았다. 안나의 아버지는 성실한 사람이었고, 안나의 할아버지와는 달리 쓸데 없이 만용을 과시하며 즐거워 하는 사람도 아니었다. 안나의 아버지는 여러가지 장애인을 돕는 프로그램과 원자력 발전소 사고 피해자 보상 모임을 찾아 다니면서 착실하게 살아 남는 길을 찾아 갔다. 안나의 아버지는 그러한 지원책 중에 하나를 붙잡아 마침내 지하철 역 근처, 한 노점 가판대를 운영할 권리를 서울시에서 얻게 되었다. 안나의 아버지는 편의점 회사에 공급하는 공장으로부터 김밥과 빵을 공급 받아 팔고, 다른 여러가지 군것질 거리도 팔았다.


 


그 지하철 입구 쪽은 안나의 할아버지 때부터 이어진 안나 가문의 행운으로 매우 많은 사람들이 드나드는 곳이었다. 뿐만 아니라 그 노점상이 있는 위치는 저녁에 퇴근하는 직장인들이 딱 배가 고파서 무엇인가 군것질 거리를 먹고 싶게 되는 정도의 지점에 자리하고 있었다. 안나의 아버지는 적당한 수입을 올리기 시작했다. 안나의 아버지는 헤프게 돈을 쓰지도 않아고 달리 돈을 쓸 곳도 없었으므로 그 돈은 모였다. 안나의 아버지가 하는 노점상에는 갈 수록 더욱더 많은 사람들이 몰렸고, 안나의 아버지는 상당히 많은 재산을 갖게 된다.


 


안나의 아버지는 원자력 발전소 피해자 협회에 열성적으로 자원봉사를 하던 사람과 결혼을 하게 된다. 그 사람이 바로 안나의 어머니였다. 안나의 어머니는 자원봉사일에 지나치게 매달려 모든 삶을 거기에만 쓰는 사람이어다. 안나의 아버지는 그 전에는 무엇을 하고 어떻게 지냈는 지 물었지만, 그 때 마다 안나의 어머니는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며 무슨 수로든 그 말을 대답하지 않으려고 얼토당토 않게 말을 돌렸다. 안나의 아버지는 그럴 때 마다 안나의 어머니가 좀 돈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안나의 어머니는 매우 친절했고 매우 도덕관이 투철한 사람이었다. 안나의 아버지와 함께 한 가정을 버텨 나가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안나가 아직 어릴 때 안나의 아버지는 사망한다. 나이가 조금 들게 되자 안나 아버지의 하반신에 있는 많은 장기들이 제대로 움직이지 못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모든 장기들이 동시 다발적으로 허물어지기 시작하니, 살릴 수가 없었다. 안나의 아버지는 죽으면서 자기 보험금과 모아 놓은 돈으로 편의점을 하나 내어 앞으로는 편의점을 운영하며 편안하고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 보라고 유언 했다. 안나는 아버지가 죽을 ㄸㅒ 많이 울었다. 그렇지만 안나의 어머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안나의 어머니는 정말 많이 슬픈지, 소리를 깩깩 지르고 주저 앉아 이리저리 구르며 괴로워 하였다.


 


안나는 아버지와 달리 걷고 달리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발의 발가락 두 개가 서로 붙어 있고 그 붙은 채로 남들보다 조금 커 보이기는 했지만, 보통 속도로 걷고 보통 속도로 뛰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었다. 안나는 그 지능 발달이 조금 느린 편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학교를 다니고 더러운 같은 학급의 또래와 싸우며 사는 데는 조금도 문제가 없었다.


 


안나에게 특이한 점을 고른다면 그런 점 보다는 안나의 어머니를 지목해야 한다. 안나의 어머니는 안나의 아버지가 죽은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몸에 흐르는 기를 모아서 우주에 흐르는 기와 박자를 맞추게 하면 여러 가지 병을 치료할 수 있고 어떤 사람도 제압할 수 있는 위력을 갖출 수 있다는 말을 텔레비전에서 보았다. 수십년 전, 안나의 할아버지가 소액이라도 투자를 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고 알려 주었던 방송과, 같은 방송국에서, 같은 시간대에 방영한 것이었다.


 


안나의 어머니는 그 방송을 보고 깊은 감명을 받아 그런 수법을 갖고 있다는 스승이라는 자들을 만나 한 달씩 수강료를 내고 기를 모으는 "누구나 할 수 있는 비법"들을 익힌다. 하지만 날이면 날마다 밤에도 새벽에도 지독하게 극성스럽게 달려들어 갖가지 "기를 모으는 원리"에 대해 알아내려고 설치는 안나의 어머니를 도리어 스승들이 견뎌내지 못했다. 스승들은 한 두 달 만에 안나의 어머니를 내쫓는다. 안나의 어머니는 다섯 사람의 스승을 거친 끝에, 자기 나름대로의 경지에 오른다. 안나의 어머니는 서른 시간 동안 다른 일은 하지 않고 눈을 감고 기를 모으면, 우주의 영상을 온 마음과 몸으로 느끼며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남들이 듣지 못하는 것을 듣게 된다고 생각 한다.


 


안나의 어머니는 안나가 아주 어릴 때 부터 안나에게 이런 수법들을 가르쳤다. 안나는 이상한 수련과 엄격하게 매를 맞는 학대를 당하며 자라난다. 이런 것을 견디는 데는 다소 이상하게 발달한 안나의 지능이 오히려 도움이 되었다. 안나는 안나의 어머니의 세계를 온 마음으로 이해하고 스스로도 같은 감정을 그대로 느끼며 살게 된다. 그러면서도 안나는 동시에 안나의 어머니가 약간은 미쳤다는 생각도 깨닫고 있었다. 두 가지를 동시에 갖고 안나는 자라났다.


 


학교 공부를 워낙 못했고, 스산한 머리칼과 사시사철 똑같은 옷차림 때문에 안나는 바보라는 소리를 듣고 친구라는 자들에게 구타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안나는 구타를 당하고 끝을 내는 것이 아니라, 안나의 어머니가 가르쳐 준 대로 친구들과 싸웠다. 안나는 뾰족한 물건으로 사람의 급소를 치는 방법이나 연필촉으로 사람을 공격하는 재치가 매우 뛰어났다. 안나는 우주 만물의 기를 알고 있기 때문에 주변의 모든 것이 안나의 주먹과 발이 되어 싸우는 것이었다.


 


안나가 중학교에 다닐 때, 안나를 공격하려던 학교의 친구들이 모두 차례로 나가 떨어진 일이 있었다. 그러자 이 무리들은 인근 남자 고등학교에서 쫓겨나서 싸움하고 겁주는 것을 익힌 아이들을 데려 왔다. 이 아이들 여럿이 안나를 공격했을 때, 안나는 꽤 오래 싸움을 계속했다. 싸우다가 안나는 발가락 하나가 잘려 나가고, 발가락 하나가 부러졌다. 반면에 안나의 상대 아이들은 피떡이 되었고, 그 중 두 명은 영원히 걸을 수 없게 되었다.


 


이때 안나는 경찰의 조사를 받게 된다. 이러한 조사를 거치면서 안나는 다니던 학교를 옮겨 특수학교를 다니게 된다. 이후 다소 안나는 별 일 없이 학교를 마치고 졸업 한다. 한편 안나를 공격했던 아이들 중 한 명은 마약섬으로 옮겨 가서 살다가, 안나가 졸업 하던 해에 중국계 투자 기업의 파업을 진압하는 일을 맡았다가 사람들에게 밟히는 바람에 사망하는 일이 있었다.


 


안나가 학교를 졸업하자, 오랜 세월 안나의 가정을 돌보아준 어머니의 피해자 단체 시절 옛 동료가 안나에게 권했다.


 


"아버지께서 물려 주신 편의점은 이제 네가 직접 맡아 보는 게 좋지 않겠니?"


 


안나 어머니의 동료는 안나 어머니가 여러가지 일을 저지르다가 곧 편의점을 날려 먹을 것을 안타까워 하고 있었다. 안나를 설득하고 안나의 어머니를 설득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러나, 안나를 조사한 후로 알고 지내던 경찰도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되자 안나가 직접 편의점을 맡도록 도우려고 한다. 경찰은 몇 가지 교묘한 수법으로 안나의 어머니를 달랜다. 마침내 안나는 편의점 보는 일을 하게 된다.


 


안나는 편의점을 보는 일을 썩 잘해 나간다. 편의점을 찾는 모든 손님들에게 이상하게 부끄러워 하는 듯이 밀려 가는 이상한 목소리로 물건의 가격과 물건의 위치를 말하는 것이 단점이라면 단점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것은 안나가 원래 말하는 말투였다. 또한 그 정도는 편의점 운영에 치명적인 문제도 아니었다. 안나의 편의점은 안나와 안나의 어머니가 살아가는 길이 되어 주었다. 안나의 어머니는 마음 놓고 기를 모으는 법을 가다듬을 수 있게 되었다. 안나의 어머니는 선과 악의 대결에서 이기기 위해 악의 무리를 무찌르는 싸움에 모든 기를 퍼부어 댈 날을 기다렸다.


 


안나의 어머니는 사람을 죽일 수 있는 가스라든가, 독약, 단숨에 동맥을 끊어 놓을 수 있는 숨겨 놓은 칼날 같은 것을 만들어 보기도 한다. 안나의 어머니는 눈을 감고 기를 모으면 하늘의 누군가가 그런 것을 만드는 방법을 저절로 깨닫게 해준다고 안나에게 설명한다. 안나는 그게 어떤 기분인지 똑똑히 알고 있지만, 동시에 그 말을 따를 가치가 없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안나는 안나의 어머니가 자신에 전수해 주는 그런 수법들을 배우고 익힌다. 안나에게 그런 것들은 여가 생활이었고, 신실한 명상이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날 안나는 편의점의 바코드 단말기를 정기 점검해주고 문제가 생기면 수리를 해주는 청년을 만나게 된다. 같은 일을 하는 사람은 어느 영감님이 었는데, 그 날 부로 어느 청년으로 바뀌었다. 안나는 그 청년의 웃는 표정과,


 


"문제 없이 잘 쓰시고 계시죠? 많이 파세요."


 


하고 인사하는 목소리를 기억한다. 안나는 그 모습과 소리를 자꾸 돌이키게 된다.


 


안나의 어머니는 안나의 이러한 변화를 눈치채고,


 


"기가 순한 흐름으로 안 모이네."


 


라고 기의 흐트러짐을 느꼈다고 주장하며 안나를 비난한다. 안나는 어머니의 말에 따라 이런 저런 짓들을 하는 것이 그날 따라 잘 맞아 들지 않는다. 안나의 어머니는 안나를 더욱 가혹하게 대한다. 안나의 어머니는 안나에게 소리를 점점 높이며 욕을 하고 꾸짖는다. 안나는 핏대를 세우며 소리지르는 어머니의 부릅뜬 눈을 보자, 그 광기에 안구가 튀어 나와 버릴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안나는 어머니의 눈을 두 손바닥으로 가리고 소리를 내어 운다.


 


 


8.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안나를 보고 있던 멤피스 안경은 갑자기 멈추게 되었다. 지하철 같은 칸에 타고 있던 키가 큰 사람이 소리를 지르듯이 큰 목소리로 전화 통화를 했기 때문이었다. 멤피스 안경은 비웃음의 의미로 그 웅변을 하듯이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을 한참 구경하려고 했다. 그러나 곧 마음을 바꾸어 다시 안나의 이야기를 이어 가기로 한다. 한 가지 일에 깊게 집중하고 다른 것에 방해를 잘 받지 않는다는 점은 멤피스 안경의 장점이다. 멀리 갈 것도 없이 지금 짧은 머리도 멤피스 안경을 바로 그런 사람으로 보고 있었다.


 


어머니와 "기의 흐름이 서로 음음-양양으로 부딛혔 융화되지 못하기만 했던" 그 다음날 부터 안나는 버려진 들개를 한 마리 주워다가 편의점에서 기르기 시작 한다. 안나는 그 개를 두고, 안나 자기를 지칭할 때마다 "엄마"라고 부르면서 애지중지 한다. 안나는 개를 매우 좋아한다. 이미 늙수레 해져서 노련한 개는 사료 한 줌을 먹어 보려고 인간들의 귀엽다고 여기는 동작을 한다. 그러면 안나는 그 개를 "아기"라고 부르면서 개에게 뭐라고 말을 한다. 안나는 개에게 말을 할 때, 마치 그 개를 자기가 보고 갖고 기르고 있는 것 만으로, 그 개가 나타내는 디즈니 만화영화 같은 귀여움의 세계의 일원이 되었다는 생각에 빠져서, 꼭 그 한 등장인물과 비슷한 어린애 목소리를 흉내내어 말한다.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닌데, 자연히 안나는 귀여운 사람들이 내는 목소리를 낸다.


 


안나는 그 개를 보며 편의점을 지킨다. 개가 가끔 반항하고, 개가 가끔 아파하는 것이 세월의 지루함을 덜어주는 사건들이 된다. 그러던 어느날, 51세의 한 여자가 편의점에 나타난다. 그 사람은 편의점에서 산 김밥이 겉 포장에 적힌 것과 다르게 안의 재료가 부족해 보인다는 생각을 한다. 김밥 산 사람은 안나에게 따지려고 한다. 김밥 산 사람이 보니 그 때 안나는 개를 보며 개가 귀엽게 생겼다는 생각에 웃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김밥 산 사람은 그 모습을 보자 안나가 웃는 것을 확 깨어 버리고 싶다는 마음이 치민다. 김밥 산 사람은 안나에게 더 화가 난 것처럼 꾸미면서 따진다.


 


안나는 놀라서 대답한다. 하지만 김밥 산 사람은 안나의 대답하는 목소리와 말투를 듣고, 안나가 평균보다 지능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간파한다. 김밥 산 사람은 이제 기세 좋게 안나에게 욕을 하며 반말로 소리 지른다. 두 사람은 소리를 높이며 싸우기 시작 한다. 싸우는 중에 추운 곳을 피해 가게로 기어들어온 희로무시 귀뚜라미를 보고, 김밥 산 사람은,


 


"이거 봐 가게가 얼마나 지저분하면 바퀴벌레도 있네."


 


라고 하고, 안나는 "바퀴벌레가 아니라 귀뚜라미에요." 라고 한다. 그러자 김밥 산 사람은 더 비웃어 욕하는 말을 강하게 한다. 김밥 산 사람은 발로 희로무시 귀뚜라미를 밟으려고 하고, 귀뚜라미는 밟히는 듯 하다가 피해서 가게 바깥으로 도망친다.


 


욕을 하며 신나게 소리를 지른 김밥 산 사람은 그러다가,


 


", 사장 나오라 그래."


 


라고 하면서 안나가 미친 사람이라고 욕을 한다. 안나는,


 


"내가 사장 이에요. 나가세요."


 


라고 소리를 지른다. 안나는 우는 소리를 섞어서 비명을 중간중간에 질러 가며 말한다. 김밥 산 사람은 그러자 더욱 흥에 겨워 더 억센 소리를 섞어 욕을 한다.


 


이때 안나가 기억하던 바코드 기계 고치던 청년이 나타난다. 그 청년은 바코드 기계를 고치려고 왔다가, 그 모습을 보고 김밥 산 사람을 말린다. 김밥 산 사람은 젊은 남자가 나타나자, 안나에게 마지막으로 욕을 한 마디 하고 바로 편의점 밖으로 나간다.


 


청년은 안나를 본다. 안나는 얼굴이 붉어져서 제대로 서 있지 못해 한 손으로 짚고 기대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청년은 안나에게 묻는다. 청년과 안나는 대화를 나누고, 안나는 청년과 친해 진다. 안나는 그 순간 편의점에 틀어 놓은 라디오에서 나오던 음악도 기억 하고 있다. 억지로 가사를 붙인 노래였는데, "슬픔에서 빠져 나와" 어쩌고 하는 빠르면서도 멍멍해지는 곡이었다.


 


그 다음부터, 청년은 안나에게 바코드 기계와 관계 없이도 찾아 오게 된다. 또 안나는 그날과 달리 웃는 얼굴로 청년과 말을 하게 된다. 안나는 안나의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 참으로 오랫만에 다른 사람과 "기의 흐름"이나 "우주의 조화"와 상관 없는 주제로 긴 대화를 하기도 한다.


 


이때 지하철 안에서는 다음 역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멤피스 안경은 잠시 안내 방송을 들어 본다. 다음 역이 환승역이라는 것을 알아 듣는다. 멤피스 안경은 뒤이어 영어로 나오는 안내 방송을 들으며, 그 단어들을 얼마나 알아 들을 수 있는 지 귀를 기울여 본다. 멤피스 안경은 그 말들을 모두 알아 듣고, 번역이 좀 잘못 된 것 아닌가 싶어 한다.


 


방송이 끝나고 나자, 멤피스 안경은 안나의 다음 이야기를 알 수 없게 된다. 멤피스 안경은 그 다음에 이어질 이야기를 생각하느라, 안나 쪽을 유심히 본다. 안나 앞에는 안나와 알고 지내는 사이인지 모르는 사이인지 정확하게 속단하기 어려운 한 청년이 서 있다. 멤피스 안경은 바로 저 사람이 안나와 친해진 그 바코드 기계 봐 주는 청년인지도 모르겠다고 생각 한다.


 


멤피스 안경은 그 모습을 보고, 안나의 다음 이야기를 이렇게 짐작 한다. 안나의 어머니가 드디어 매우 기뻐하는 행복한 얼굴이 되어,


 


"이제 선과 악의 싸움을 위해 악마를 물리칠 때가 왔거든."


 


하고 안나에게 말한다.


 


안나의 어머니는 우리를 유혹하고 우리에게 다가와 달콤하게 빠져들어 모든 것을 앗아가는 악마가 나타났다고 말한다. 안나의 어머니는 안나에게 바코드 기계 수리하는 청년이 그 악마라고 말한다. 그리고 안나에게 선한 기의 흐름을 이용해서 두 손으로 그 청년의 목을 감싸 짓누르는 방법을 쓰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악마를 죽여 없애라고 말한다.


 


안나는 안나의 어머니가 무엇을 보았고, 어떤 마음을 느꼈는지, 안나 자신에게도 정확히 전해짐을 느낀다. 안나는 어머니의 기를 느껴서, 어릴 때처럼 다시 그 진심을 이해 한다. 안나는 악마를 죽이려고 한다. 하지만, 청년을 만나게 되면 그런 생각은 없어 진다. 안나는 아버지가 남겨준 것을 붙들고 한 달 한 달 버텨가며 살아 가는 가족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안나는 어머니가 알게 된 것을 누구 보다 분명히 이해하고 있지만, 차마 청년을 해치지는 못한다.


 


그렇게 해서 벌써 며칠이 지났는 지 모른다. 아마 청년을 앞에 세워 두고 가끔 이런 저런 이야기를 속삭거리면서 잘 들리지도 않게 나누는 지금. 이 지하철 속에서도 안나는 속으로 이 청년을 없애야 하나 말아야 하나 몇 십번 씩이나 고민하고 있는 지 모른다.


 


그렇지만 고민할 필요는 없다. 이미 모든 우주의 기의 흐름을 읽은 안나의 어머니는, 안나가 차마 나서지 못할 것까지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안나의 어머니는 안나가 키우는 개가 다쳤을 때 팔다리에 달아 준 의수, 의족 로봇 장치에 자신의 모든 기를 불어 넣은 장치를 몰래 숨겨 두었다. 안나가 망설이고 있는 동안, 안나가 꼭 끌어 안고 있는 이 귀여워 보이는 것으로 먹고 살기 위해 한 평생 노력한 생물에 달려 있는 폭탄이 이제 곧 터질 것이다. 그러면, 이 지하 가득히 독성의 가스가 퍼진다. 그 독성은 안나와 청년을 포함한 이 주변의 모두를 죽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선과 악이 싸우는 전쟁에서 어쩔 수 없이 희생될 주변의 모든 사람들의 넋을 위로 할 수 있을 만큼, 정결하고 정결한 안나의 생명이 저 악마를 붙잡아 죽일 것이다.


 


 


9.


멤피스 안경이 이렇게 생각할 때, 안나는 당연히 자기가 안고 있는 것이 개폭탄이고 곧 터질 것이라는 생각은 조금도 하지 못했다. 지하철 안에서, 안나는 자신을 자꾸 쳐다 보는 멤피스 안경을 마음에 두고 있지도 않았다.


 


개폭탄을 안고 있든 그렇지 않든, 안나의 눈에 자꾸 들어오는 것은 맞은 편에 앉은 사람이다. 지나치게 짧게 자른 머리카락. 꼬박꼬박 다림질된 까만 양복. 그렇지만 빛나게 알록달록한 넥타이. 옷차림에 비해서는 무척 왜소해 보이는 어깨. 눈에 뜨이는 점 하나 없이 하얗게 말갛게 깨끗한 얼굴. 안나는 저 짧은 머리를 분명히 어디서 본 듯 하다고 생각 한다.


 


안나는 짧은 머리가 어떤 사람인지 생각 해 본다. 안나는 짧은 머리의 행색을 일부러 살피려고 하기 시작한 후, 그제서야, 멤피스 안경이 자기를 잠깐 보고 있었다는 것을 안다.


 


 


10.


안나의 맞은 편에 앉은 짧은 머리는 이제 곧 죽어 없어지기로 결심 한 것 처럼 보인다.


 


짧은 머리의 이야기는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것이 맞겠다고 안나는 생각한다. 왜냐하면 짧은 머리는 스스로 죽는 것에 대해 장황하게 이야기 하는 것을 싫어 해야 마땅하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짧은 머리는 만약 자신이 그렇게 길게 고통과 괴로움에 대해 주절주절 읊어 대게 된다면, 그 마음 한 켠에 자칫 남들은 쉽게 생각하지 않는 일을 하고 있다는 점을 뽐내는 목적이 묘하게 숨어 있는 것이라고 여겼다. 짧은 머리는 그 따위로 뽐내기 위해 스스로 죽니 어쩌니 하면서 설쳐대는 것은 추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짧은 머리는 그와 같이 추하게 되지 않기 위해, 어차피 죽을 것, 죽기 전에 잡다한 이야기를 가능한한 남기지 않으려고 작정하고 있었다.


 


짧은 머리는 자신이 이제 곧 죽는 이유를 간략하게 설명할 수 있었다. 짧은 머리가 죽는 까닭은 살 방법이 없기 때문이었다. 짧은 머리는 지금 자신이 종사하고 있는 직업을 버리기로 했다. 그러므로 생존에 필요한 식량을 확보할만한 최소한의 수입을 얻을 방법이 없었다.


 


짧은 머리가 택할 수 없는 직업이 달리 없는 것은 아니었다. 짧은 머리는 40세였으니 아주 젊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짧은 머리는 그 짧은 머리 만큼이나 건강한 편이었다. 도시에서도 몇 가지 일자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었고, 시골로 가서 농사일을 거드는 자리를 따라다닌다면 딸린 가족도 없는 몸뚱이 하나 생명을 부지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러나 짧은 머리는 그런 일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고통과 권태를 가까스로 일주일 참아내 보아야 주어지는 것은 다시 그런 방식으로 연장할 수 있는 또다른 일주일 뿐이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는 짧은 머리가 꿈꾸었던 사람이 살 수 있을만한 마땅한 풍경을 꾸밀 수 없었다. 솔직히 말한다면, 짧은 머리는 사람이 살 수 있을만한 마땅한 풍경 따위에 대해 제대로 어떤 계획을 갖고 있었던 적은 없었다. 그런 것을 할 줄 아는 사람이 흔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하지만, 짧은 머리는 적어도 답이 절대 될 수 없는 것은 분명히 짚을 수 없었다. 짧은 머리는 그렇게 사는 것은 공원이나 비를 피할 지하철 역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을 하는 일로 삼아 지내는 남루한 무리들과 다를 바 없다고 여겼다.


 


사실을 보자면, 설령 그러한 남루한 무리 중의 하나가 된다고 해도 당장 살 수가 없다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게 지내도 겨울에는 조금 더 따뜻한 곳을 찾아가려고 애를 쓰느라 땀을 내어 추위를 견디고, 무료 급식소를 찾아 가서 끼니를 유지하면, 계속해서 끊이지 않고 살아갈 수 있었다. 그러나 짧은 머리는 그렇게 더러운 구덩이들을 헤메고, 넉넉한 인심의 버리는 찌꺼기에 불과한 양식을 취하며 지내면, 곧 병들고 지쳐서 허약해 지고, 마침내 몇 걸음 옮기기 힘들도록 앓게 되는 날이 온다고 보았다. 그러면 쓰러져 골골하는 것을 발견한 경찰 몇몇에 이끌려 가서 어느 관공서와 같은 곳에서 이삼일 버틸 것이다. 그 이삼일이 지나면, 얼굴도 이름도 제대로 외지 못하고 몽매 속에서만 바라 볼 어린 공중보건의 의사의 한 숨소리와 함께 죽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사는 사람들의 급격히 망가지는 건강을 생각하면 그렇게 지내다가 죽을 때 까지는 6년에서 7년 정도면 평균적인 시간이라고 생각 했다.


 


짧은 머리가 지금 빨리 삶을 끝내 보자는 결심을 품은 가장 큰 판단의 근거는, 이렇게 지내며 굴러다니다가 죽는 것은 지금 곧 스스로 죽는 것과 다를 바 없는 것이라고 여기는 시각이었다. 지금 당장 20층 빌딩에서 내 발로 뛰어내린다면 4, 5초 만에 죽을 것이다. 어떻게 저떻게 버티며 생존하다가 죽는 길을 택한다면 6, 7년에 걸쳐 천천히 죽어갈 것이다. 그 지긋지긋한 공포를 느낄 시간의 차이 밖에 없다. 어떤 경로를 택하든지 그 사이에 짧은 머리에게 더 주어질 것도 없고, 짧은 머리가 더 이룰 것도 없다. 고통스럽게 세상을 끝내는 것은 서로 동일하다.


 


짧은 머리는 이때문에 빠른 시일 안에, 재빨리 삶을 끝내는 방법을 궁리하게 되었다. 풀이하기에 따라서는 짧은 머리가 일을 하지 않는 다면 6, 7, 일을 한다면 십몇년을 더 질질끌며 죽는 대신에 단숨에 죽는 것을 더 "깨끗하게" 여겼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짧은 머리는 그런 것을 두고 "깨끗하다"고 말하는 것을 매우 싫어하기도 했다. 짧은 머리는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에 이를 무렵 고등학교 동창생과 같이 살았다. 그 동창생은 그 때 "죽을만큼 심한 고통" 어쩌고 저쩌고 하면서 자기가 엄청 괴로워하고 있는 마음을 담아 도자기를 만든다고 했다. 짧은 머리는 그것을 굉장히 싫어 했다. 도자기를 만든다는 일도 싫게 보였지만, 도자기를 만들면서 그런 소리를 하는 것은 매우 견디기 어려웠다. 동창생은 그냥 도자기 값을 높이기 위해 도자기에 사연을 더 담아 소개하는 말을 길고 기억에 남게 한다는 목적으로 "죽을만큼 심한 고통"이니 "생명을 쪼개어 갈아 넣었다느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헛되이 지어내는 녀석일 뿐이라고 짧은 머리는 생각했다. 그래서, "차라리 죽음이 더 쉬운 선택"이라거나, "죽음으로서만 정화될 수 있다" 라든가 하는 따위의 그 동창생이 여기저기 써놓던 말 역시 매우 싫어 했다. - 그 동창생은 그런 말을 단지 일기장에 써 놓거나, 남에게 보여주는 일기장 역할을 하는 인터넷 사이트에 게재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었다. 무슨 비위인지 그 동창생은 사람을 실제로 만나서 면전에다 대놓고 보면서 제 입으로 그런 부류의 말을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간드러지는 목소리를 꾸며 말하는 일에도 꺼리낌이 없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짧은 머리는 어쩔 수 없이 인정하는 부분은 있었다. 짧은 머리가 지금 자신이 이와 같은 결단을 내린 것에는 고교 시절 열심히 읽던 만화책들의 결말이 미치는 영향이 있을 거라고. 짧은 머리가 좋아하는 내용일 수록 어째 주인공이 스스로 목숨을 끊으며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또 그런 만화들일 수록 아주 아름답게 그려진 주인공들이 작가가 가장 공을 들인 모양으로 스스로 삶을 끝내면서 아쉬운 마지막 페이지를 넘기게 하였다. 그런 만화들을 짧은 머리와 같이 가장 열심히 봤던 친구가 바로 같이 살았던 그 동창생이었다. 그 감상에서 동창생과 짧은 머리가 그것을 써먹은 방식은 무척 달랐다고 할 수 있었다. 한 쪽은 그 감상을 도자기에 유약처럼 덕지덕지 발라서 비싸게 구워 팔아 먹는 직업을 갖게 되었고, 다른 한 쪽은 그 감상 덕분에 빨리 죽어야 겠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짧은 머리는 이러한 결심을 굳히고 집으로 돌아 오는 길, 그 저녁에, 가는 앞을 가로 지르고 팔딱팔딱 뛰어 가는 희로무시 귀뚜라미 한 마리를 보게 된다. 희로무시 귀뚜라미는 날씨가 조금 서늘하게 느껴질 때가 있는 지 조금이라도 더 따뜻하고 조금이라도 더 더운 방향을 찾아 뛰어 간다. 희로무시 귀뚜라미는 왼쪽으로 몇 십 번 뛰어 갔다가 길가에 세워 둔 선풍기가 뿜는 바람에 다시 돌아오기도 하고, 오른쪽으로 몇 십 번 뛰어 갔다가 인도 위를 흐르는 웅덩이, 물줄기에 다시 돌아오기도 한다.


 


짧은 머리는 희로무시 귀뚜라미에는 관심이 없었다. 저녁 해가 다 지도록 짧은 머리는 결심한 일에 대해 돌아 보고 고민하였다. 짧은 머리가 한 참 그렇게 서성이며 서 있는 동안, 희로무시 귀뚜라미는 부질 없이 몇 백 번씩 뛰어 다닌다. 짧은 머리가 고민을 마치고 간 후에도, 희로무시 귀뚜라미는 밤이 깊을 때 까지 그렇게 움직이다가, 아늑한 지하로 들어가는 따뜻한 김이 피어오르는 배수로 구멍을 찾아 뛰어 든다.


 


안나는 이미 이것만으로 짧은 머리의 사연 소개가 지나치게 길어 지고 있다고 여겼다. 안나는 좀 더 짧게 요약해서 짧은 머리의 사연을 더 줄이고 줄여서 간단하게 짚어 보고 그만 두기로 한다.


 


안나가 직접 보고 파악한 부분은 많지는 않다. 안나가 짧은 머리에 대해 보고 아는 것은 짧은 머리가 가끔 안나가 일하는 편의점에 나타난다는 것 뿐이었다. 좀 더 중요한 부분을 짚어 말한다면 두 가지 정도 였다.


 


첫째는 짧은 머리가 그렇게 가끔 나타나서 별 물건을 사지 않으면서도 - 생수 두 병 정도 - 이리저리 편의점을 돌며 흘깃흘깃 안나 자신을 자주 쳐다 본다는 점이었다. 두번째는 편의점 근처의 길을 지날 때 유리문 밖에서 안나가 일하고 있는지 일하지 않는 지 지켜 보고 지날 때가 많다는 점이었다. 이외에 짧은 머리에 대한 나머지 모든 생각들은 일부는 짐작이고, 대부분은 짐작이라고 부르기도 어려운 허망한 상상일 뿐이었다.


 


그 상상의 중심은 이러하다. 짧은 머리는 안나를 사랑한다. 몰래 혼자서만 사랑하고 있다.


 


 


11.


안나는 짧은 머리가 자신을 자주 쳐다 본다고는 생각하지만 얼마전까지만 해도 좋아하는 지 어떤지, 심지어 좋아할 수 있는 전제를 같이 하는 지 조차 몰랐다. 그러나 앞으로 진행될 이야기의 구성을 위해서는 짧은 머리는 안나를 몰래 좋아하고 있었다고 보는 편이 더할나위 없이 맞겠다.


 


짧은 머리는 몸무게 숫자가 작게 나와서 가느다란 팔다리를 가진 얼굴이 하얀 안나, 이 조그마한 사람을 보기 좋다고 느낀다. 하릴 없이 긴긴 시간 편의점에서 서 있거나 앉아 있고, 그럴 때마다 멍한 눈빛을 보이는 것도 보기 좋다고 생각한다. 여기에는 허약해 보이는 어린 여자를 볼 때, 짧은 머리가 20년 전쯤 자신이 꿈꾸고 좋아하던 것을 다시 떠올릴 수 있다는 점도 마음을 더 돕고 있었다.


 


안나가 아주 아름답기만 하다고 짧은 머리가 생각하는 것은 전혀 아니었다. 짧은 머리가 보기에도 안나가 그렇게 대놓고 아름답지는 않았다. 그러나 짧은 머리는 오히려 안나 정도라면, 도대체 나도 이런 아이의 어느 점이 콕 집어 무엇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사랑이라는 마법 같은 굴레"가 서로를 사로 잡는다 어쩐다 하는 말을 읊어 대기에 적합하다고 여긴다. 그리고 짧은 머리는 안나의 모습을 보고 막연히 안나도 고달프고 서글프게 살고 있을 거라고 넘겨 짚는다. 짧은 머리는 그렇다면, 안나와 자신을 엮어 놓으면 "어려운 사랑이지만 서로의 아픔을 감싸주며 의지하는 아름다운 모양"이라고 꾸밀 수도 있겠다고 생각 한다. 짧은 머리는 이 정도라면 답답하고 마음에 들지 않는 하루하루에 한 번씩 엉엉 우는 소리를 내면서 푹 젖어 볼 수 있는 감상과 체험의 백화점으로 좋겠다고, 좋겠다고, 속으로 킥킥 거렸다.


 


직업을 버리고, 살 수 없는 상황이 되었으면서도 짧은 머리가 한 동안 죽겠다고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에는 이 킥킥 거림이 큰 위치를 차지 하는 일상이 있었다. 짧은 머리는 반사된 희뿌연 빛이 들어 오는 월세방에서 일어 나서 형광등을 키고 컴퓨터를 붙잡고 앉아 있는다. 무엇을 해야 할 지 몰라서 인터넷 이곳 저곳을 다니며 빈둥 거린다. 짧은 머리는 혹시라도,


 


"이제 당신을 구해 드리겠습니다."


 


라는 요지의 소식이 어느 곳에서 날아 왔을까 자주 여러번 e메일을 확인한다. 짧은 머리는 그게 아니라도, 그저 좀 신기한 소식이라도 누구에게 오지 않았을까 싶어 그 다음에도 자주 여러번 e메일을 확인한다.


 


아무 소식이 없으므로, 짧은 머리는 심심해 하다가 컴퓨터 게임을 하기 시작 한다. 별로 하고 싶어하는 게임도 아니고 좋아하는 게임도 아니었지만, 반복해서 오기로 오래 시간을 끌도록 만들어 둔 부분이 있었기에, 짧은 머리는 생각했던 것 보다 오래 한다.


 


한참 컴퓨터 앞에 있던 짧은 머리는 시간이 이렇게나 많이 지났냐고 놀란다. 짧은 머리는 방안에만 하루 종일 있으면 답답하고 또 더 빨리 죽게 될 것 같다고 생각 한다. 짧은 머리는 바깥으로 나간다. 좀 밝고, 사람들이 많고, 그렇지만 "깨끗한" 곳을 가고 싶어 한다. 짧은 머리는 지하철을 타고 - 바로 지금 타고 있는 것과 같은 노선 - 중심가로 나아 간다. 짧은 머리는 대형 서점에 들어 가서 이런 저런 책들을 뒤적뒤적하며 시간을 보낸다. 혹시나 지금 짧은 머리가 어떻게 해야 할 지 알려 줄 무슨 수가 보일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잠깐 품기도 한다. 그러다가 많은 분야의 책들에 호기심이 다하고 몸이 피곤해 질 때 즈음이면 돌아갈 시간이 되어 있다. 짧은 머리는 돌아 온다. 그리고 돌아 오면서 편의점에 들러 생수 두 병을 산다. 그리고 사랑하는 안나를 본다. 안나와 몇 마디 대화를 한다.


 


"2천원 입니다."


"여기요.


 


짧은 머리는 항상 부끄러움을 타는 듯한 안나의 목소리를 좋아 한다. 짧은 머리는 집에 돌아와서 인생이 끝날 때 까지 이런 날이 반복될 것을 상상하면서 하루를 끝낸다.


 


그러나 반복은 오래 계속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반복이 오래 계속되지 않아도 짧은 머리는 하여튼 이제 곧 죽으려고 하고 있으므로, 인생이 끝날 때 까지 반복 된다는 말 자체는 성립한다.


 


드디어 짧은 머리가 이와 같은 생각을 한 날을 설명하면 다음과 같다.


 


짧은 머리는 대형 서점에서 답답한 많은 책들을 본다. 답답한 마음으로 짧은 머리는 집으로 걸어 온다. 안나가 일하는 편의점 쪽으로 가면서 짧은 머리는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문득 중학교 때 떠벌였다가 들통난 부끄러운 거짓말을 떠올린다. 짧은 머리는 그런 조잡한 순간이 자기 삶에 있었다는 사실이 아주 싫어 진다. 짧은 머리는 저도 모르게 이 모든 것을 없애고 이런 부끄러운 생각을 잊고 싶어 한다. 짧은 머리는 짧게 알 수 없는 말을 혼자 소리낸다.


 


"파란색 파란색 밖으로"


 


그 모양은 발작적으로 이상한 소리를 내는 미치광이와 같다. 짧은 머리는 한 동안 그 노래 같은 말소리를 낸다. 짧은 머리는 길가다가 갑자기 옛날 잊고 싶은 부끄러운 일이 다시 생각 날 때마다 부끄러움을 견디지 못하고 이상한 소리를 내곤 하는 자신의 이런 버릇이 못마땅하다. 짧은 머리는 길가다가 갑자기 문득 이런 혼잣말 소리를 냈다는 사실 조차도 부끄러워 진다. 부끄러운 지난 일을 잊기 위해 이런 부끄러운 소리를 냈다는 이중의 구조가 더욱 부끄러워 졌다.



 


짧은 머리는 이제는 그 멀기만한, 잊을 가치조차도 없는 중학교 때의 일을 묻기 위해, 방금 자신이 소리 냈던 것이 무슨 음악이었는지 생각 한다. 짧은 머리는 잘 떠오르지 않아 곰곰히 고민한다. 한참만에, 짧은 머리는 안나가 일하는 편의점 앞에 도달한 순간 드디어 깨닫는다. 그 소리는 짧은 머리가 바로 이전에 일하던 직업을 처음 얻었던 심야 클럽에서 계속 울려 퍼지던 소리 였다. 전자악기로 높은 된 빠른 리듬이 가득한 고층빌딩의 불빛들처럼 울려퍼진다. 하지만 천천히 흐르는 곡조만 따라가 보면 전체의 음악은 서글프게 들리는 것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그걸 알고 나면, 심야 클럽의 그 많은 춤추는 사람들이 모두 다 울고 있는 것처럼 보이게 되던 곡이라고 짧은 머리는 생각 한다.


 


그 음악의 정체를 다시 생각해 냈을 때, 짧은 머리는 안나가 어떤 남자와 즐겁게 웃는 것을 본다. 그 남자가 안나의 한 손을 잡고 흔들며 좋아하는 것을 본다. 짧은 머리는 두 사람 사이에, 저 젊고 어린 사람들이 괜히 나이든 사람들을 배알 뒤틀리게 하는 정이 있는 것을 안다. 짧은 머리는 비로소, 이제 자신은 먹고 살 직업이 없고, 얼마간의 시간을 두고 행하건 간에 죽어야만 한다고 다짐 한다.


 


짧은 머리는 죽을 방법을 궁리한다. 짧은 머리는 이전 직업 덕에 비교적 쉽게 죽는 방법을 결정한다. 짧은 머리는 몰래 들여온 약을 찾아 낸다. 버려진 애완동물들을 모아 두는 곳에서 처분할 방법이 없을 때 개를 죽이기 위해 쓰는 약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그런 약을 모아서 사람에게도 잘 듣도록 어느 나라에서 가공한 약이었다. 짧은 머리는 살면서 먹었던 음식은 개밥을 먹지는 않았지만, 죽을 때는 개약으로 죽는다니 재밌는 일이라고 여긴다. 이런 이야기를 두고 재밌다고 누구에게 말한다면, 짧은 머리는 그 사람이 나를 어느 정도로 멋지다고 평가할 지, 짧은 머리는 짧게 상상하고 죽을 시기와 장소를 고른다.


 


짧은 머리가 당장 죽지 못하는 것은 지금 짧은 머리 자신이 죽는 것이, 정말로 살고 싶지 않기 때문인지 아니면 자기의 죽음이라는 행동으로 누군가에게 항의를 하고 싶은 것인지 스스로 잘 구분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짧은 머리는 살 이유가 없어서 삶을 끝내는 것은 "깨끗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나는 죽을 만큼 슬프다" 고 누구에게 보여 주기 위해서 죽는 것이라면 그것은 깨끗하지 않다고 생각 했다. 그런 것은 과하게 꾸중을 들은 꼬마가 제 부모가 후회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괜히 일부러 더 주눅이 든 척, 더 멍청해진 척 하는 것과 같다고 생각 한다. 어린애 같은 짓이다.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을 등에 지고 버티는 척 한다. 하지만, 그 속에 있는 사람은 큰 소리로 엉엉 울면서 자지러질 듯이 발버둥을 치면서 데굴데굴거리기만 하면 자신의 위대한 존엄과 권세 앞에, 엄마 아빠가 지갑을 열고 세상의 무슨 물건이든 사다가 갖다 바칠 것이라고 믿고 있는 어린애와 같다.


 


짧은 머리는 자기가 이제 그만 살아야 겠다고 하는 것에 후자와 같은 점이 없는 지 계속해서 돌아 본다. 확신할 수 없다. 짧은 머리는 자기가 죽는 것을 하나의 흉내내기 어려운 쇼를 공연하듯이 하는 마음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만 같다. 그래서는 안된다. 짧은 머리는 손에 알약을 숨긴 채 항상 어디든 다니기로 한다. 짧은 머리는 이제 언제 어디서건, 분명한 확신이 생길 때, 그 때 두 눈을 감고 그 알약을 삼키고, 곧 삶을 사는 것을 마치기로 하고 있었다.


 


 


12.


이 때, 갑자기 지하철 안에서 큰 소리로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 덕분에 안나는 괜히 그 말을 듣게 된다. 안나는 그 사연을 알고 싶지도 않다. 전화를 하며 이리저리 변하는 전화 받는 사람의 감정을 같이 느끼고 싶지도 않다. 그래서 전화를 받는 키가 커 보이는 여자의 큰 소리가 싫다. 그 사람도 그런 것을 깨달았든지 그 소리는 점차 줄어 든다. 마침내 안나는 다음 이야기를 계속 차분히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다.


 


짧은 머리의 이야기는 이와 같이 충분히 정리 되었다. 빠진 것이 있다면, 애초에짧은 머리가 계속 살아나갈 수 있는 생계 수단을 어떻게 해서 잃어 버렸는가 하는 일이다. 짧은 머리의 직업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과 같다.


 


짧은 머리는 초등학교 6학년 때, 학교에서 하는 연극 공연에서 무대를 꾸미는 것을 만드는 일을 했다. 짧은 머리는 그걸 잘 만들었다. 짧은 머리는 그걸 스스로 만들다 보니, 점점 더 잘 만들어지는 모양을 볼 수록 무척 만족스럽고 기쁘고 즐거운 감정을 느꼈다. 짧은 머리는 때문에 더욱 많은 시간과 정성을 들여 무대를 꾸미는 여러 가지를 만들었다. 짧은 머리는 초등학교 담임 교사가 기대하기에는 눈이 휘둥그래질만한 품질로 무대를 꾸며 낸다. 초등학교 담임 교사는 대단하다고 칭찬해 준다.


 


"너 진짜 실력이 있네."


 


초등학교 담임 교사는 자신이 경험했던 인생의 좁은 폭 안에서라면 충분히 납득할만큼의 호들갑을 보여 주었다. 짧은 머리는 이 말이 마음에 남는다.


 


초등학교 담임 교사는 가끔 수업시간에,


 


"사람이 공부만 잘한다고 잘 되는 게 아니죠. 다들 자기에게 만든 적성이 있는 거죠. 공부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노래 잘하는 사람이 있고, 노래 잘하는 사람이 있으면 어떤 사람은 손재주가 좋은 사람도 있죠."


 


같은 말을 했다. 그런 말이 나올 때 마다 같은 반의 어떤 아이들은 짧은 머리의 이름을 괜히 한 번씩 말하기도 했다. 짧은 머리는 자기가 바로 이 "손재주가 좋은 사람"이라고 막연하게 생각하게 된다. 짧은 머리는 자기는 그 "손재주가 좋은 사람"으로서 모든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말하는 사람이 되고 싶다는 그런 생각이 마음 속 한 구석에 스스로도 모르는 사이에 자리 잡는다.


 


그것은 따지자면 담임 교사의 유산이었다. 담임 교사는 그렇게 짧은 머리에게 전해진 유산에 어울리는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담임 교사는 그로부터 6년 후에 학부모와 바람이 났다가 들키자, 너무 부끄러워서 12층에서 뛰어내려 버리는 방법으로 빠르게 삶을 완료 시켰다. 짧은 머리는 그런 일이 있었다는 사실은 모르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짧은 머리는 그런 일이 있음을 알게 되어 느낄 감정들을 이미 모두 느끼고 있었다.


 


초등학생 짧은 머리의 결심을 더욱 굳힌 것은, 그 해에 수학여행을 가는 기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 아이가 한 말이었다. 오전 10 12. 기차가 어느 산속을 굽이 돌아 가는 철로로 접어 들었을 때, 하늘을 뿌옇게 채운 구름에서 비가 내리기 시작한다. 아이가 짧은 머리에게 말했다. - 그 때 짧은 머리는 긴 머리였지만.


 


"기차 타고 이렇게 숲 같은 데 지날 때, 갑자기 비 오면. 좀 슬프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런데 참 보기 좋지 않냐?"


 


짧은 머리는 그렇다고 이야기 한다.


 


짧은 머리는 그 때, 바로 이 아이는 예술가 같은 영감을 갖고 있다고 생각 한다. 짧은 머리 자신은 지금까지 기차가 지나가는 특정한 장소와 그 시간의 날씨를 조합한 어느 경우를 골라내서 그걸로 어떤 감정이 연결될 수 있다고 상상조차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이 아이는 그런 것을 짧은 머리에게 보여 주고 있었다. 기차를 타고 가는 데 비가 올 때. 짧은 머리는 그게 아주 멋지다고 생각 한다.


 


짧은 머리는 그렇게 해서, 공부를 하지 않지만, 까불거리며 시끄럽게 굴지는 않고, 뜻 모르는 영화나 음악을 들으며 막연히,


 


"진짜 죽도로 좋지 않니?"


 


라고 친구에게 말하면서 세월을 보낸다.


 


짧은 머리는 오늘은 어떤 "미친 짓"을 했고, 자주 어울리는 무리들이 "미친 놈들"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일부러 내세우고 다니기 까지 한다. 그러면서, 짧은 머리는 무대에서 번쩍이는 공연과 관객의 쏟아지는 기대에 어린 집중과 그 끝난 후의 박수 소리가 항상 느끼고 싶은 탐닉이라고 여기게 된다.


 


짧은 머리는 무대 주위를 전전하면서,


 


"야 술이나 한잔 하자."


 


라는 말을 하며 조금 모은 돈을 다 써 없애고 가난함과 사회에 대한 욕을 같이 하는 무리들과,


 


"정말 세상에서 제일 좋은 사람들이야."


 


라고 거짓말을 주워 담으며 조금 더 세월을 보낸다. 짧은 머리는 무대 미술, 조명, 연출, 연기, 텔레비전 등등의 일거리 사이를 떠돌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는 사이에 짧은 머리는 쓸데 없이 병원 신세를 지거나, 괜히 힘있어 보이려고 잠깐 삭발을 하거나 해 본다. 퇴원하고 삭발한 모습을 거울에서 보았을 때, 짧은 머리는 강인한 저항군 용사와 같은 모습을 기대했다. 그렇지만 짧은 머리에게 짧은 머리의 자기 모습은 병자 처럼 보였다. 몹쓸 큰 병을 앓아 죽어 가면서 세상에 왜 나에게만 이런 운명이 다쳤냐고 겁내며 억울한 마음을 품을 줄 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후로 짧은 머리는 다른 좋아 보이는 것들도 발견했다. 10대 때, "우리는 미친 놈들이야"라면서 즐거워 했던 것처럼, 짧은 머리는 "내가 성질이 더럽고 못되먹어서 말야"라고 말을 시작하는 화술을 익히게 되었다. 짧은 머리는 그런 말투가 특색 있다고 좋아하곤 했다. 그런 말을 여기 저기에서 90 번 정도 하고 나니, 짧은 머리의 20대와 30대가 지나갔다.


 


짧은 머리가 "내가 성질이 더럽고 못되먹어서 말야"라고 웃으며 말하면서 속으로 늠늠해 하는 무리들이 전국에 얼마나 많이 널려 있는 지 알게 된 것은 40세가 되어서 였다. 짧은 머리는 그런 말투를 쓰는 수법을 누구를 어떻게 따라하는 지도 모르고 따라하게 된 것을 한심하게 여긴다. 짧은 머리는 일거리를 찾아 "예술성"이 있다고 알려진 작은 극장이나 심야 클럽을 찾아 다닌다. 짧은 머리는 매일 새벽 4 26분이 되면 같은 음악을 트는 심야 클럽에서 일하게 된다.


 


짧은 머리는 그 심야 클럽에서 일하다가 밤거리에서 소란 피우는 무리들과 다툼을 막는 일을 하게 된다. 짧은 머리가 몸이 날렵하다거나 격투에 노련함을 갖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짧은 머리는 갑자기 "미쳐서" 사람을 죽이거나 눈이 뒤집혀져 죽을 것도 모르고 달려드는 이상한 사람처럼 보여서 기선을 제압하는 실력이 매우 좋았다. 덕분에 짧은 머리는 비슷한 일을 하는 사람들과 친해지고, 좀 더 40세 다운 수입을 올릴 수 있는 일을 맡게 된다. 그렇게 해서 짧은 머리는 직업을 찾게 된다. 짧은 머리는 마약섬이라는 곳에서부터 배달 된, 여러가지 불법 제조 약품들을 몰래 유통하는 일에서 한 자리를 맡았다.


 


짧은 머리가 그 직업을 그만 두려고 한 것은 어느 새 손님을 만난 직후 였다. 짧은 머리는 새 손님을 만나는 곳에 가기 위해 지하철을 타고 약속한 한적한 역으로 갔다. 지하철은 지상 구간으로 나간다. 마침 시각은 오전이었고, 흐린 하늘에서는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짧은 머리는 창 밖으로 비가 내리는 모양을 아무 생각도, 아무 말도 없이 계속 넋을 잃고 보기만 하면서 역에 갔다.


 


짧은 머리가 도착해서 만난 사람은 약을 구하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나이가 들었고 볼품 없어 보였고, 멤피스 식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그 사람이 구하는 약은 술을 마셔도 취하지 않게 하는 주사제 였다. 재미 없는 중늙은이 사이에서 재미 없는 방식으로 재롱을 부려야 먹고 사는 무리들이 사는 약이었다. 그런 인간들이 좀 더 재롱을 잘 부리는 무리들을 질투해서 그 약을 사곤 했다. 짧은 머리는 감히 물어서 확인해 보지는 못했지만, 그가 바로 초등학교 6학년 때 수학 여행을 가던 기차 안에서 옆자리에 앉아 있던 아이라고 생각 한다.


 


지하철 안에서 안나는 멤피스 안경을 흘긋 쳐다 보았다. 때마침 지하철 안에 안내방송이 나와서 다음역을 알려 주었다. 안나는 짧은 머리에 대해 생각하는 것을 잠깐 멈추고 방송을 들었다. 뒤이어 영어로 나오는 지하철 안내 방송도 안나는 유심히 들어 보았다. 안나는 몇몇 영어 단어들을 확인 했다. 안나는 잘 알 수 없었던 단어가 무엇이었는지 잠깐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곧 그 생각을 멈추었다. 안나는 다시 짧은 머리가 자기 일을 완전히 그만두기로 결심하던 날의 사연을 마저 따라가 보려고 한다.


 


짧은 머리는 약을 팔고 돌아 온다. 짧은 머리는 집으로 돌아가지도 못한다. 짧은 머리는 문제도 모르면서 답을 찾아 볼까 싶어서 대형 서점으로 간다. 가는 길에 같이 살았던 동창생이 전화를 걸어서 자식이 자라고 부부간에 다투는 이야기를 하며 안부를 묻는 태도로 자랑을 한다. 짧은 머리는 동창생이 망한 남의 처지를 되짚어 보면서 저런 자기 이야기를 할 때 안식을 찾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 한다.


 


"요즘 어떤 책이 좋아?"


 


짧은 머리는 동창생에게 물었다. 동창생은 짧은 머리의 취향을 고려한다면서 이런저런 많은 책을 골라 주었다.


 


일을 그만두겠다고 완전히 결심하기 직전, 짧은 머리는 서점에서 그 책들을 본다. 짧은 머리는 그 많은 책의 줄거리들은 온통 가지 각색의 우울증 환자들이 그 증세를 밸리 댄스처럼 꾸며서 서로 경연 대회를 하는 모양이라고 생각 한다.


 


드디어 짧은 머리는 일을 그만두겠다고 결심했다. 그리고 짧은 머리는 그 많은 책들이 모두, 울적한 인간들이 그런 책을 집어 들고 읽으면서 자기가 겪는 한 톨도 가치 없는 울적함이 이런 비싼 책으로 팔리고 있는 것을 보면서 마치 숭고한 가치라도 있는 것인냥 교만을 느끼게 하는 것이 목적이 아니냐고 생각 한다.


 


그 때문에 짧은 머리는 나를 좋아하게 된 것이 아니겠냐고 안나는 짐작해 본다.


 


 


13.


지하철 한 가운데에 키가 큰 편인 여자가 서 있다. 이 사람은 오늘은 하루 자유를 느껴보겠다는 마음이 있는지, 마음 껏 굽이 높디 높은 구두를 신고 있다. 키가 큰 사람이라고 높은 구두굽의 구두를 신어 서는 안된다는 법이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 사람은 그런 규칙을 유지하면서 살아 왔다. 그렇게 보면 과연 오늘 신은 구두는 마음 껏 자라나 당당히도 높다랗다. 그렇다면, 키 큰 이 사람에게는 정말 높은 구두굽이었다. 한편으로는 이 사람의 큰 키에 비한다면 상대적으로 이 구두굽은 전체적인 비례에서는 아주 높게 보이지는 않을 수도 있었다. 그렇다면, 이 구두굽은 이 키 큰 사람에게는 높지 않은 구두굽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이런 식으로 구두굽의 높이에 대해 상반되는 두 가지 묘사를 스스로 돌이키는 것은 이 높은 구두굽을 신은 사람이 이런 형태로 꾸민 묘사를 유난히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서, 높은 구두굽은 지금 전화기 화면으로 영화를 보고 있었는데, 영화 속 등장인물들이 읊는 대사들도 이런 모양이었다.


 


높은 구두굽이 보고 있는 것은 웃긴 영화 였는데, 지금은 왕년에 유명했던 골프 선수의 숨겨둔 애인과 왕년에 유명했던 축구 선수의 숨겨둔 애인이 나이가 들어서 우연히 만나서 이런저런 대화를 무심한 어투로 길게, 위와 같은 교묘한 대립 어절들을 섞어서 주고 받는 장면이 나오고 있었다. 높은 구두굽은 이런 대사들을 좋아해서 아주 웃기다고 생각 했다.


 


영화 속의 두 사람은 모두 젊은 시절에 운동 선수의 숨겨둔 애인이었다는 사실이 텔레비전에 나오고, 그 사실에 세계 여기 저기에 소개 되고, 그러면서 자기 얼굴도 이곳저곳에 많이 나왔던 때가 있었던 것을 돌이켜 보았다. 둘 중 한 사람이 그 시절에는 그런 마음은 없었는데, 나중에 잠잠해 지고 나니까, 그렇게 왁자지껄하게 어디서든 자기 이야기를 듣기 위해서 세상이 애를 쓰던 때가 계속 이어졌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그래서 몇 달, 몇 년이 지나도록 자꾸 이런저런 말을 꺼내며 신문과 텔레비전에 나오고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다고 고백 했다.


 


"그걸 잘 지나간 거지. 그 때 세상이 우리 이야기를 하는 걸 들으면서 아늑하게 느끼는 기분. 거기서 우리가 손을 털었기 때문에 우리가 지금 이렇게 영예롭고 궁상 맞지 않게 있을 수 있는 거라고. 이제 그때 일은 모두 싸악 잊어서 세상이라는 게 그저 거지 같지만 대신에 지금 우리는 아늑 하잖아."


 


한 사람이 그렇게 말하는 데, 그 말하는 투가 바로 높은 구두굽이 특히 좋아하는 표본과 같았다.


 


그래서 높은 구두굽은 웃었다. 높은 구두굽은 지하철 안에서 몇 인치 짜리 액정 판이 알록달록 그 결정상태를 변하는 것을 보고 행복해 하는 표정을 짓는 것이라면 좀 처량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면서 웃는 것이라면 처량해 보이지는 않겠지. 그래서 전화기 화면의 영화를 보면서 웃는 것을 참으려 한다. 그러다 보니 덕분에 기이하게 소리 없이 미소 짓는 표정이 된다. 오래도록 이어지는 웃는 표정에 변하는 화면 빛깔이 어른 거린다. 높은 구두굽은 마침내 웃음을 참지 못해 킥킥거리는 소리를 낸다.


 


그런데 그 때 높은 구두굽이 보던 그 전화에 전화가 왔다는 표시가 나타난다. 전화기에서 벨소리가 울린다. 본시 흥겨운 춤추는 음악이었던 것을 피아노 곡으로 바꾼 곡 같은 피아노 소리였다.


 


높은 구두굽은 혹시 혼자 화면 속에 빠져 웃고 있던 자신을 누가 보았을까 생각하여, 얼른 그 모습을 지워 보고자 전화를 받는다. 그래서 아주 조금 밖에 음악이 나오지 않았을 때, 높은 구두굽은 전화를 받았다.


 


"죄송 합니다만, 혹시 지금 전화 화면에 나온 영화 보면서 웃고 계셨습니까?"


"? ?"


 


높은 구두굽은 어리둥절해 한다.


 


"굽이 높은 구두를 신고 계시지요?"


"?"


 


높은 구두굽은 되물어 보려고 한다.


 


"누구시지요?"


"... , 그러니까. 얼마 전에 '한국환상문학단편선'이라는 책에 실려 있는 이야기 보시고 e메일 보내셨잖아요. 제가 바로 그 e메일 받아 본 사람 입니다."


"?"


"그러니까, 제가 이 이야기를 지금 쓰고 있는 사람입니다."


"무슨 말씀이세요?"


"확 다 이야기 하자면 이런 겁니다. 지금 전화 받고 계시는 분은 진짜 사람이 아니고, 진짜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전화 받고 계신 분께서는 사실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일 뿐입니다. 그리고 제가 그 이야기를 쓰고 있는 사람이라는 겁니다. 이것만큼은 제가 어제, 오늘 하는 하고 많은 말 중에서 정말 제일 진담 같은 진담입니다."


"?"


 


높은 구두굽은 전화를 걸어 사람을 속이는 새로운 사기 수법에 대한 생각 부터, 가상 현실과 우주관에 대한 우화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생각을 잠깐 이리저리 해 본다. 어느 쪽이건, 높은 구두굽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쪽으로 연결되지는 않았다.


 


"그러니까, 지금 지하철을 타고 가면서 서서 영화를 보고 있으셨다고 생각하시잖아요? 그런데, 사실 그게 아니고, 이건 그냥 글자로 씌여지고 있는 이야기일 뿐이라는 겁니다. 정말로 벌어지고 있는 일은 커피 가게에 앉아서 제가 컴퓨터 자판으로 글을 쓰고 있는 거라는 말입니다.


 


지금 눈 앞에 지하철 벽에 붙은 광고들하고, 휙휙 지나가는 불빛들이 보이고 있을 겁니다. 그렇지만, 정말로 세상에 지금 그런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정말로 있는 것은 뭐냐면, 커피 가게 테이블 옆에 30만원짜리 작은 컴퓨터가 있고, 그 옆에 비를 맞아서 젖은 것을 닦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둔 손수건이 있다는 겁니다. 제가 그 컴퓨터로 지금 이 이야기를 쓰고 있습니다.


 


전화 받은 시는 분께서는 아마 지금 지하철 안에 앉은 승객들이 보일 겁니다. 그렇지만 커피 가게에 앉아 있는 제 옆에는 그런 사람들이 없어요. 대신에 제 왼쪽에는 이 동네 사람들 중에 어머니와 딸이 술취한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제 오른쪽에는 커피가 나오기를 기다리다가 갑자기 온 전화를 받는 안경 쓴 남자가 앉아 있습니다."


"무슨 말을 하시는 건가요?"


 


높은 구두굽은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며 따지다가, 선명하게 전화 속에서 들려오는 말을 한 번 부정했다.


 


"그걸 제가 받아 들일 이유는 없죠."


"아니요. 꼭 좀 받아 들여 주셨으면 합니다. 이걸 잘 이해 하셔야 돼요. 심지어 시간이 흘러가는 것도 우리가 지금 전화로 말하고 있는 이 속도가 아닙니다. 이제 바로 제가 말을 마치면, 전화 받으시는 분꼐서는 이게 다 뭔 헛소리냐 싶어서 '죄송합니다. 전화 끊겠습니다.' 하고 전화 끊으시려고 하실 겁니다. 이거는 예언도 아니고, 예측도 아닙니다. 제가 정말로 그렇게 쓸 거거든요. 그러면 전화 받으시는 분께서는 등장인물이기때문에 그대로 하게 될 겁니다.



 


그런데 그 시간이 바로 이어지지 않을 겁니다. 제가 말을 하고 난 다음에 바로 뒤이어 대답을 하는 것 같이 이야기는 연결 되기는 할 겁니다. 그런데, 실제로 제가 컴퓨터에 글자를 써 넣는 속도는 전혀 다릅니다. 저는 지금 커피가게에서 이 부분을 쓰고 있는 데, 제 말을 마치고 전화 받으시는 분께서 대답을 하는 부분은 이 커피 가게에서 나와서 자리를 옮겨서 쓸 겁니다. 한참 후에 다른 곳에 가서 쓸 말이라는 겁니다.


 


지금 제가 말을 미차면, 1초도 채 지나지 않아서 대답하는 말을 바로 다음에 하시겠지만, 사실 정말로는 두 말을 쓰는 사이에 저는 이 커피가게에서 떠나서 다른 데로 가고, 몇 시간이나 지난 뒤에 다음 대사를 쓰는 거라는 말입니다."


"죄송합니다. 전화 끊겠습니다."


 


높은 구두굽은 전화를 끊어 버리려고 했다. 그러나 다급한 전화 건너편의 목소리는 마지막으로 만류했다.


 


"잠깐만요. 어제 저녁에는 미안하다, 다시는 안그러겠다는 내용으로 어떤 사람한테 장황하게 이런저런 이야기 하면서 비는 e메일 보낸 적 있죠?"


"? 어떻게 그걸 아시죠?"


 


높은 구두굽은 놀라서 전화 끊는 것을 멈춘다. 높은 구두굽은 여러가지로 가능한 방법을 궁리해 본다.


 


"혹시 e메일 관련된 컴퓨터 업체, 인터넷 업체 뭐 그런데서 일하시는 분께서 훔쳐 보고 말씀하시는 건가요?"


 


높은 구두굽은 조금 무서워 하고, 그만큼 화를 냈다. 전화 건너편의 목소리는 답답해하고 애통해 하는 목소리다.


 


"아니오. 사실은 그런 e메일을 보냈다는 자체가 제가 그렇게 써넣었기 때문에 벌어지는 일입니다. 다시 좀 더 말씀 드리자면, 아까 '죄송합니다. 전화 끊겠습니다'라고 말씀하시는 대목을 쓰기 직전에는 밤이었고 어제였고 커피 파는 가게에서 쓰고 있었습니다. 지금 e메일 이야기 하는 이 부분을 쓰는 것은 하루가 지나서 낮입니다. 여기는 아이스크림 가게 입니다. 저는 아이스크림 대신에 그냥 탄산수만 마시고 있습니다만."


"그만 하시고요. 하여튼 뭐 그렇건 말건 지금 말씀하시는 분께서 그 e메일을 받은 사람일 리는 없을 테니까 남의 e메일 본 거는 맞는 거고요. 그러면 그건 잘못한 일이니까. 이제 그만하시고. 제가 뭐, 왜 제가 쓴 메일이 다른 데로 새어 나갔는지, 그건 제가 e메일 회사에 따지든 지 알아서 할테니까."


 


높은 구두굽은 다시 전화를 끊으려 한다. 이번에는 도망치려는 태도였다. 하지만, 남자는 다시 부여 잡는다.


 


"아니라니까요. 제가 바로 e메일을 원래 받아야 될 사람도 맞습니다."


"......"


"여보세요? 여보세요?"


 


높은 구두굽은 말을 않는다. 높은 구두굽은 전화를 끊기 위해 몇 번이나 전화를 귀에서 떼었다가, 다시 그래도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나 싶어 전화를 끊지 않는다.


 


"."


 


높은 구두굽이 답하자, 전화 건너편의 목소리는 안도한다.


 


"제가 차근차근 설명하겠습니다. 지금 전화 받고 계시는 분께서는 '한국환상문학단편선'이라는 책을 읽으셨습니다. 독자분이신겁니다. 그런데 독자분께서는 이 책에 나오는 '콘도르 날개'라는 단편 소설을 읽으셨습니다. 그리고 독자분께서는 그 이야기를 쓴 사람에게 책을 읽고 생각한 내용을 e메일로 써서 보냈습니다. 제가 바로 그 이야기를 쓴 사람입니다. 그래서 제가 그 e메일을 받았습니다. 그게 독자분께서 저에게 보내신 첫번째 e메일입니다. 맞죠?"


"계속 해 보세요."


"그 내용이 뭐였냐면, 이런 거였죠. "콘도르 날개"는 영화 시리즈를 보고 그 영화에 나오는 대로 자기 인생이 흘러가는 사람이 이상하게 여기는 이야기 입니다. 주인공 일행은 망해가는 자기들의 운명을 바꾸기 위해서 꾀를 냅니다. 영화 시리즈의 완결편 내용을 만들어 낼 사람을 찾아내서, 그 완결편을 만드는 겁니다. 완결편의 내용은 반전이 일어나서 행복한 결말이 된다는 걸로 꾸밉니다. 그렇게 하면 주인공 일행에게는 행복한 미래가 올 거니까.


 


그런데, 바로 이런 내용으로 꾸며져 있는 '완결편'이라는 것 자체가 바로 '한국환상문학단편선'에 실린 이 단편 소설 자체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모든 사연을 담아 놓은 이야기 자체가 바로 이 단편 소설이고, 하필이면 이 단편 소설의 결말이 행복하게 끝나는 결말인 것은 이렇게 이 이야기를 결말 내야만 자기들의 운명이 행복해질 수 있는 인물들이 그렇게 쓰라고 글 쓴 사람에게 부탁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제가 그 책을 읽은 건 맞긴 맞는데요...."


"죄송합니다. 잠깐만요. 조금만 더 들어 보십시오.


 


그런데 독자님께서 저한테는 이런 이야기를 해 주셨습니다. '콘도르 날개' 이야기 속에서 263 페이지까지의 내용은, 등장인물들이 작가를 찾아가서 이런 결말 부분이 있는 콘도르 날개 완결편을  써달라고 부탁하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작가는 제주도의 한 호텔에서 그래서 글을 쓰게 됩니다. 그 다음에 264 페이지 부터는 작가에게 그렇게 부탁을 하고 났더니 그 다음 부터는 이렇게 저렇게 행복하게 잘 살았다는 내용이 나옵니다.


 


그러면, 작가가 글을 쓰고 있는 상황에서 263페이지까지 벌어지는 사건은 이미 있었던 과거의 일입니다. 등장인물 두 사람이 겪었던 일을 전해 듣고, 그런 일이 벌어진 옛 사건을 옮겨서 소설로 꾸며 놓은 겁니다. 그렇지만 264페이지 다음부터 나오는 일들은 작가가 글을 쓰는 시점에서 벌어지지 않은 사건입니다. 미래의 사건입니다. 운명이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고 여자 주인공이 부탁해서 그대로 꾸며서 쓰는 미래의 일입니다. 전체 단편소설 자체는 과거형으로 씌여 있고 이 모든 일이 벌어진 한참 후의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투로 되어 있기는 합니다. 그렇지만, 263페이지를 경계로 그 전은 정말 과거의 일이고, 264페이지 부터는 사실은 미래의 일인 겁니다.


 


작가는 263페이지, 바로 그 순간에 지금 호텔, 현재에서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소설에는 264페이지 이후에 행복한 결말이 나타나는 미래가 펼쳐진다는 걸로 내용을 채웠습니다. 그렇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명의 인물들이 운명을 바꾼다는 이 꾀가 먹힐지 안 먹힐지는 또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되면 이 소설 속 이야기가 아닌 진짜 미래에서는 이 사람들이 망할 수도 있다는 겁니다.


 


독자님께서는 바로 이런 사실을 독자님께서 알아냈다고 즐거워 하시면서, 263페이지를 경계로 과거와 미래가 교차하고 있다고 무척 길고 세세하게 쓴 e메일을 써서 저한테 보내셨습니다. 맞잖습니까? 그런 적 있으시죠?"


 


높은 구두굽은 당황했다. 잠깐 말이 없이 생각한다. 높은 구두굽이 대답했다.


 


"그런 적이 있긴 하죠."


"독자님께서는 재미있게 꿰뚫어 본 좋은 감상과 분석을 알려 주셔서 감사하다는 답장을 받으셨을 겁니다. 아주 정확하지는 않지만 분명히 즐겁게 잘 읽어 주신 것은 맞으니까요. 거기까지만 해도 좋았습니다. 좋은 독자와 감사해 하는 글쓴이의 좋은 관계였습니다.


 


그런데, 독자님께서는 그러고 나서 또 e메일을 보내셨습니다. 이것저것을 묻고, 제 안부도 묻고, 날씨가 어떻다는 이야기도 하고, 날씨가 어떠니까 건강을 조심하라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중심 내용 자체는 사실 처음 저에게 e메일을 보냈던 그 '콘도르 날개' 263 페이지에 관한 이야기와 다를 바가 없었습다.


 


그래도 뭐, 괜찮았습니다. 할 이야기가 달리 없어서 한 번 쯤 더 말하는 것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리고 이런저런 안부 묻고 이렇게 독자와 인터넷으로 알고 지내는 게 또 즐거운 일 아닙니까. 독자님께서는 제가 나름대로 맞장구를 치는 답장을 받으셨을 겁니다.


 


그런데, 그리고 나서 독자님께서는 그런식으로 인사말과 안부만 조금씩 바뀐, '콘도르 날개' 270페이지에 관한 e메일을 그 후로 115통을 더 보냈습니다."


 


높은 구두굽은 그 말을 듣자 얼굴이 붉게 변한다. 높은 구두굽은 뭐라고 말하고 싶은데 뭐라고 말을 해야 할지 몰라서 입만 벌렸다 다물었다 하며 머뭇머뭇한다. 마침내 높은 구두굽은,


 


"어디서 뭘 보고 왜 이러는 거야."


 


하고 크게 말한다. 그 소리는 꽤 커서 지하철에 있는 사람들이 홀로 하던 생각을 멈추게 하고 집중을 흐트린다. 지하철 안의 사람들은 잠깐이지만 일제히 높은 구두굽 쪽을 바라 본다.


 


전화 속의 목소리가 높은 구두굽을 달랜다.


 


"괜찮습니다. 따지고보면 그 덕택에 제가 이렇게 지금 독자님께 전화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독자님께서는 그렇게 저에게 계속 e메일을 보내시고, 이런저런 인터넷 사이트를 다니면서 쓸데 없이 '콘도르 날개'를 읽어야 한다고 별 이유도 설명도 없이 덧글을 썼습니다. 괜히 다른 작가가 더 낫다고 하는 사람이나, '콘도르 날개'가 별로라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욕설에 가까운 비웃는 덧글을 달았습니다. 도대체 왜 그러셨습니까? 그렇게 싸우시고 다니는 바람에 괜히 제 이야기를 읽을 사람들도 제 글을 피해가게 되었습니다. 정말 제 이야기를 좋아하셨다면, 그냥 차분하게 비평글이나, 감상글이나 여럿 써서 올리셨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독자님께서는 독자님께서 발견하신 '콘도르 날개'의 숨은 의미를 다른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것에 부아가 치미셨는 지, 갈 수록 더 심해지셨습니다. 겉으로는 멀쩡한 직장에서 차분하게 일하는 성실한 회사원이셨습니다만, 할 일이 없이 어두워만 지는 퇴근 후의 밤 시간이나 심심하게 흘러가버리는 주말 오후에는, 같은 인터넷 사이트 서너곳을 수십번씩 반복해서 업데이트를 확인하면서 이런 행동에 몰두하셨습니다.


 


제가 독자님께 보내는 e메일 답장이 성의없게 보인다고 실망하셨는 지, 저를 저주하고 욕하는 e메일을 보내기도 하셨고, 그러다가 또 바로 다음날 정말 아까는 너무 화가 나서 그랬다고 화가 날 수 밖에 없는 개인사에 대한 핑계를 길게 쓰시면서 미안하다고 미안하다고 사과하는 e메일을 보내기도 하셨습니다.


 


그런 것을 몇 차례 반복하고 나더니 독자님께서는 제가 발표자로 나선 어느 세미나에 몰래 참석하셨습니다. 그리고 독자님께서는 발표자에게 세미나 내용에 대해 질문하고 싶다고 하시면서 제 전화번호를 알아 내셨습니다. 이제 독자님께서는 저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대답을 안하자, 어제 밤 동안에는 문자 메시지를 60건 가까이 보내시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오늘 아침에는 또 이런 행동이 부끄럽고 미안하다는 내용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시기도 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제 정말 진심으로 어떻게 생각하시는 지 말해 주시려고, 그러려고... 그러려고 전화 하신건가요?"


"또 아니라고 대답하게 됩니다만, 그게 아닙니다. 제가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은 독자님께서 지금 제가 쓰고 있다는 다른 이야기의 등장인물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떻게 독자님의 생활과 심정과 이 모든 사건의 배경에 대해서 다 맞혀서 이렇게 길게 한 자리에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심지어 보통 말할 때 사용하는, '...' '...' 하고 더듬는 말도 한 마디 하지 않고 말을 했습니다.


 


제가 이렇게 독자님에 대해서 잘 아는 건 독자님과 지금까지 독자님이 살아온 모든 시간들과 독자님이 계시는 곳, 계시던 곳들이 전부 제가 지어낸 이야기 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저하고 이야기하고 자시고 할 이유가 없잖아요. 어차피 다 아시고, 쓰시는 대로 될텐데. 뭐하러 저한테 전화하는 장면은 쓰시고 계신건데요?"


 


높은 구두굽은 화를 내어 따지는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로 궁금해서 묻고 싶기 보다는, 부끄럽고 화가난 마음에 어떻게라도 전화 하는 사람을 화나게 해 보는 말을 찾아 보려고 했을 뿐이었다.


 


"전화를 걸어서 지금 이런 이야기를 하는 목적은 이겁니다. 지금 이 지하철에는 어딘가 다 끝장 내 버리려는 사람들이 타고 있습니다. 제가 그렇게 썼거든요. 나름대로 잘 꾸며서 여기까지 이야기는 잘 진행해 왔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나가면 그냥 이야기가 이렇게 흘러가다가 그저 심심하게 정말 끝장내는 결말이 나오면서 끝납니다. 이래서는 안됩니다. 전환도 없고 긴장감도 없게 됩니다. 어떻게든 그렇게 끝장나는 걸 말릴 방법을 찾아서 줄거리를 잘 틀어 꾸며야 합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이렇게 전화를 드리고 있습니다. 이 지하철에 위험한 사람들이 타고 있으니까, 독자님께서 저랑 의논하셔서 잘 활약하시고 그래서 줄거리를 좀 다른 방향으로 이끌어 달라는 겁니다."


"그러니까 그게 왜 필요하냐고요. 그냥 '위험한 사람이 갑자기 성격이 확 돌변해서 행복하게 잘 살기로 했습니다.' 라고 당장 쓰면 되는 거 아니냐고요. 좀 아까 뭐라 그랬나... . 그래,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글 쓰는 중이라면서요. 아이스 워터 한 잔 마시고 속 좀 차리신 뒤에 확 그냥, '다들 행복하게 잘 살았습니다.' 이렇게 과감하게 쓰면 그냥 다 되는 거 아니냐고요."


"그게 그렇게 해도 되기야 되겠지만, 그럴 수는 없는 거 아닙니까. 벌써 여기까지 제가 쓴 이야기만 15만 바이트가 넘는 용량입니다. 그걸 확인하려고 방금 컴퓨터에서 파일 속성을 확인해 봤습니다.


 


이렇게 이야기 하면서 이런 저런 사람들의 사연과 배경을 여기까지 꾸려 왔는데, 그냥 대뜸 확 '하여간 다 잘풀렸음' 이럴 수는 없는 거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자기 사연과 자기 배경에 맞게 행동해야 합니다.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그 사람들의 성격대로 움직인 결과로 부드럽게 결말이 나와야 되는 거 아니겠습니까."


"아니, 그러면 뭐 갑자기 저한테 대뜸 전화가 와서 '너는 등장인물이고 내가 이야기 지어내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밝히는 장면이 나오는 건 뭐 부드럽나요?"


"부드럽지요. 부드럽지요. 바로 독자님께서 저한테 e메일을 백통씩 보내고 문자 메시지를 몇 십 건씩 보내는 사람으로 나오시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독자님께서 지금 이 전화를 받고 있는 거는 부드럽게 이어진단 말입니다. 독자님께서는 지금 아주 정신이 불안한 상태 이시지 않습니까. 그렇게 때문에 지하철을 타고 오다가 갑자기 받은 전화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리는 겁니다. 독자님께서는 자신이 이 세상에 제대로 살고 있는 게 아니라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 바로 독자님께서 e메일을 보내고 문자 메시지를 보내던 그 사람이란 말입니다. 부드럽잖습니까."


"아까는 제가 정말로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이라면서요."


"맞습니다. 이야기 속 등장인물입니다. 그런데, 그게 정말로 그런지, 아니면 정신이 오락가락해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는 지 지금 좀 헷갈리고 있다는 겁니다."


", 정말 말을 해도 너무하네요."


 


높은 구두굽은 치미는 마음이 있었다. 그렇지만, 전화에서 들리는 소리의 말투며, 말하는 내용이 마음을 끌고 있었다. 높은 구두굽이 얼마 전에 관심을 가진 부류의 이야기와 들어 맞는 것도 사실이었다. 높은 구두굽은 "그러면..." 이라든가, "..." 같은 말을 하면서 조금 머뭇거렸다. 높은 구두굽이 말을 이어 나간다.


 


"그래도 아직 지금 전화 주시는 분께서 이 이야기를 쓰는 사람이라는 것은 도저히 못 믿겠네요. 아까 말씀하신 그런가 아닌가 의심하는 수준까지도 아직 아니거든요. 쓰는 데로 다 다음 이야기로 만들 수 있다면, 뭐 갑자기 제가 공중 부양을 한다거나, 허공에서 갑자기 천사가 나타났다가 악마로 변해서 썩어 없어지더니 먼지로 사라진다거나, 그런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일을 제 눈 앞에 보이게 해 주기라도 해 보세요. 그러면 제가 믿지요."


"그런 일을 하면, 지금 이 지하철 안에 있는 사람들이 다 영향을 받게 됩니다. 전혀 다른 갑자기 일어난 초자연 현상에 대한 이야기로 갑자기 전체 이야기 내용이 다 뒤흔들릴 겁니다."


"그래도 그냥 대충 개인정보 빼낸 거 들이대서 몇 번 맞혀 놓고, 이런 걸 믿으라고 하면 믿기 쉽겠어요?"


"독자님께서는 이 일에 딱 맞는단 말입니다."


"그렇게 자신 있으시다면, 제가 못믿는게 불만이라면 이제부터 지금 쓰고 계신 이야기에서 제가 말을 하는 이 부분 이 다음에, 바로 제가 갑자기 마음이 바뀌어서 깊은 신뢰를 느꼈다고 쓰시면 되잖아요."


 


높은 구두굽은 그렇게 말하고 나니, 문득 마음이 바뀌면서 깊은 신뢰를 느낄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높은 구두굽은 아무래도 아니라고 고개를 절래절래 흔든다. 요즘 너무 지나치게 일을 많이하고, 퇴근 후에도 밤마다 마음이 피폐해지는 건으로 e메일을 보내느니, 전화 번호를 알아내느니 하면서 잠도 잘 못자고 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이런 해괴한 일도 당하는구나 하고 생각해 본다.


 


높은 구두굽이 잠시 말이 없었다. 전화 속의 목소리도 무슨 생각을 곰곰히 하는 지 말이 없었다. 잠시 후에 전화 속의 목소리가 말을 이었다.


 


"정말 증명이 필요하시다면, 등장인물들 서로 간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일 정도는 실험을 한 번 해 볼 수 있을 겁니다. 예를 들어서 저는 지금 바로 지하철에서 다음 역이 어디인지 알려 주는 안내 방송을 당장 나오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이렇게."


 


그 순간 지하철 안에는 다음역이 어디인지 알려 주는 안내 방송이 나왔다. 다음 역은 환승역이라고 했다.


 


"만약에 독자님께서 지금 이 대화를 하고 있지 않았다면 저 안내 방송을 듣고 영어로 안내 방송이 나오는 부분에서 영어로 말하는 단어들을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는 지 가만히 한 번 들어 볼 겁니다. 지금은 그렇게 하시지 않을 거고요. 어떻습니까. 이 정도면 그럴 듯 하지 않습니까?"


"이런 건 그냥 우연이죠. 아니면 시간을 미리 알아 놓고 교묘하게 맞춘 거든지."


"이게 진짜가 아니라면 뭐하러 제가 그렇게까지 고생해서 이런 소리나 하고 있겠습니까?"


"그 정도로는 어렵겠네요. 불가능한 일이 안된다면 정말 가능성이 낮은 일을 한 번 지금 당장 일어나게 해 보시면 어때요? 갑자기 지하철이 사고가 나서 지금 확 멈추고 엄청 잘생긴 비밀 구조 대원으로 창문을 깨고 나타나서 저를 제일 먼저 안전하게 구출해 주는 그런 정도로 정말 정말 벌어지기 힘든 그런 일을 보여주면 한 번 믿어 보죠."


"지금 이 시점에서 지하철이 멈추면 좀 어긋나는 거 같고..."


 


높은 구두굽은 이제 이 전화를 하는 사람의 진짜 정체가 뭔지 알아 보는 것도 재미있겠다고 생각 한다. 그러나 전화 속 목소리는 조금 머뭇거리더니, 꽤 비장한 투가 되었다.


 


"이렇게 하죠. 독자님께서는 지금부터 21분전에 한강에 놓인 다리를 지나가는 지하철에 타고 계셨습니다. 독자님께서는 그 때도 전화 화면에 나오는 영화를 보고 있으셨습니다. 그러다가, 지하철이 다리 위로 올라오면서 지하철 달리는 소음의 소리가 조금 바뀌고 갑자기 창이 밝아집니다. 독자님께서는 기척을 느끼고 강을 한 번 내려다 보면 어떤 경치일까 싶어서 창 바깥을 보게 됩니다.


 


독자님께서는 한강이 이렇게 넓었나? 강변의 저런 빌딩들은 집값이 얼마나 할까? 물이 좀 탁하네. 이런 정도의 생각을 하셨습니다. 그러다가 지하철이 한강에 있는 섬 옆을 지나가는데, 그 섬에 우거진 버드나무 사이로 뭔가 이상한 걸 본 것 같습니다. 무척 황당한 모습이라서, 독자님께서는 나뭇가지에 비닐봉지 같은 것이 걸린 것을 잘못 본 것이겠거니 하고 생각 합니다. 그렇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정말로 그런 있을 수 없는 장면을 갑자기 본 것 같다는 생각도 듭니다. 도대체 지하철 타고 언뜻 스쳐 갈 때 잠깐 본 그 한강 섬에 있던 그 비죽 튀어 나와 있던 것은 뭐였겠습니까.


 


저는 독자님께서 그걸 처음 보셨을 때 무슨 생각을 하셨는 지 지금 말하겠습니다.


 


독자님이 일하고 계시는 직장에는 독자님의 상사로 최윤아 부장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독자님께서 웃으며 친한 동료인 것처럼 하고 다니지만, 독자님께서 정말 싫어하는 사람이기도 합니다. 독자님께서는 보통 안 볼때는 '윤아'라고 부릅니다.


 


사사건건 매사 뭔가 잘못된 것만 찾으려고 하는 사람이고 그러면서 본인의 일은 엄청나게 답답하고, 헤픈 웃음 소리가 아주 듣기 싫은 사람입니다. 독자님께서 최윤아를 싫어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최윤아는 지독하게 재미 없게 살아가는 최윤아 자기 인생이 평범한 직장인의 표준이라고 생각하고 남들도 다 거기에 맞춰 산다는 기준으로 모든 용이함과 어려움, 해서 될 일과 해서는 안될 일을 판단한다는 겁니다. 독자님께서는 그래서 최윤아가 참 답답해서 불쌍하다는 생각을 진심으로 했던 적도 몇 번 있었습니다. 싸우다가 남 비웃고 잘난척 하려고 상대방에게 불쌍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정말로 진짜로 불쌍하게 여긴 적까지 있었다는 겁니다.


 


문제는 그런 덕분에 독자님께서 계속 시달리신다는 겁니다. 출근하기 싫고, 퇴근해서 있으면 다음날 출근하는 것이 싫고. 주말이나 연휴가 이어지면, 푹 쉬고 직장 일은 잊으려고 하는 데, 갑자기 푹푹 터지듯이 일거리가 머리에 떠오릅니다.


 


그렇다고 그 일이 아주 세상에 절박한 것이라서, 일을 해서 뭔가를 이룬다던가, 일로 세상에 어떤 도움을 준다는 생각 때문에 그 일이 떠오르는 게 아닙니다.


'혹시 이게 이렇게 되어 있으면 또 최윤아가 짜증을 내는 것은 아닐까.'


'이거 이렇게 되어 있다면 내가 출근하자 마자 이렇게 고치지 않으면 최윤아가 또 막 다그칠텐데.'


그저 최윤아에게 괴롭힘을 당할 지 안당할지의 여부만 생각을 하게 되는 겁니다.


 


독자님께서 정말 정말 견디기 어려우셨던 것은, 최윤아에게 이렇게 시달리다 보니, 이제 최윤아가 없고 직장과 전혀 상관 없는 곳에 있을 때에도 거기에 붙잡힌 느낌이 든다는 겁니다. 왜 독자님께서 이렇게 최윤아 때문에 인생이 항상 볶여야 하는 지, 대범하게 최윤아 따위 안 볼 때는 없는 일인 것처럼 여기지 못하는 지. 독자님께서는 스스로도 참 못나게 느껴지기도 하는 겁니다.


 


그런데, 독자님께서는 21분 전에, 잠깐 스쳐 지나가는 한강의 섬에 있는 이상한 물체를 보고, 그걸 보고도 최윤아 생각을 했습니다. 비죽하게 무슨 나무 장대 같은 것이 솟아 있고, 그 위에 어떤 사람 형체가 해금이나 첼로 같은 악기를 들고 매달려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아주 잠시 스쳐 지나간 것이지만, 독자님께서는 최윤아에 대한 생각에 시달리느라 그 모습을 보고도 최윤아의 얼굴을 생각 합니다. 독자님께서는 그 물체를 보고 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고 설마 그럴 리야 없겠지만 정말 그렇게 보인다는 생각을 합니다. 독자님께서는 윤아가 장대에 올라 해금을 켜니 사방에 바람이 불어 흔들리다가 떨어지는 광경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독자님께서는 다시 지하철이 지하로 들어 갔을 때 그냥 잘못 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잊으려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이렇게나 계속 시달릴 정도로 최윤아에게 내가 눌려 있어야 하나, 하는 그런 쓴 맛은 계속 남습니다. 겨우 그 무능한 한명의 직장인 때문에, 이렇게 불행해지고, 점점 더 사람이 망가지고, 그러다 보니 쓸모 없는 것들에 집착해서 남에게 부끄러운 짓만 자꾸 더 하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그 맛이 정말 쓴 겁니다.


 


이 정도면 어떻겠습니까?"


 


그 말을 듣자 높은 구두굽는 견디지 못한다. 높은 구두굽는 지하철 안에서 전화를 받다가 눈물을 글썽거리기 시작한다. 지하철 안의 사람들 중에 높은 구두굽 쪽을 보는 사람은 없었지만, 만약 있었다면 도대체 무슨 사연으로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되었길래 울고 있는 지 궁금해하면서 구경거리로 쳐다 볼만하게 높은 구두굽는 조금씩 눈물을 흘린다.


 


높은 구두굽이 투덜거렸다.


 


"그냥 두면 그대로 다 끝짱나는 결말이라면서요. 그냥 다 부드럽게 끝짱나는 걸로 여기 있는 사람 다 끝짱나는 걸로 하면 되겠네요."


 


높은 구두굽의 이런 말을 듣자, 전화 속 목소리는 놀라며 다급해진다.


 


"아뇨. 그러지 마시고요. 잠깐만. 저기, , 사실은. 이게 지금 하고 있는 이 지하철 속의 모든 이야기들이 원래 보던 원고가 따로 있었어요. 그런데 제가 그 원고를 읽을 때만 해도, 부드럽게 이야기를 해결할 방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제가 '지하철 한 가운데에 키가 큰 편인 여자가 서 있다'는 부분까지 읽고 더 못 읽었을 때 원고를 잃어 버렸다고요.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 뒤의 이야기는 완전히 다시 꾸미고 앞부분도 여기저기 다시 고치고 있는데, 꼭 지금 독자님께서..."


 


높은 구두굽는 진절머리가 나서 전화를 끊는다. 높은 구두굽은 눈물이 흐르는 얼굴로 지하철 안을 보았다. 여전히 자기 쪽을 보는 사람은 없다. 한 사람 예외가 있는데, 배낭처럼 생긴 책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 두고 있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은 높은 구두굽이 우는 모습을 쳐다 본다.


 


높은 구두굽은 노려 보듯이 그 사람을 잠깐 쳐다 본다. 그 사람은 눈길을 피한다. 높은 구두굽은 눈치를 보는 그 볼품 없는 사람 따위에게도 한심한 구경거리였던 듯 하여, 더 큰 증오로 그 사람을 쳐다 본다. 그 사람은 후회하고, 또 약간 겁을 먹은 얼굴로 변하는 것 같이도 보인다.


 


한편, 높은 구두굽이 아까 진행한 전화로 이야기를 주고 받을 때 충분히 알았아야 마땅한 점들은 놓친 것이 많았다. 조금만 더 높은 구두굽이 전화 통화를 길게 했다면, 분명히 여러가지 또다른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이었다. 예를 들어서, 그 중에는 이 지하철에 어느 발에 채여 굴러 들어 왔는지, 희시무루 귀뚜라미 한 마리가 타고 있다는 것도 있었다.


 


 


15.


이 때 안나는, 높은 구두굽을 쳐다 봤다가 눈을 돌린 그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은 회사원 옆에 앉아 있다. 회사원은 종이 뭉치를 계속 이리저리 넘기고 있었다. 회사원은 종이를 넘기다 옆자리에 팔 끝이 닿을 때 마다 미안 하다고 한다.


 


미안하다는 소리를 들은 옆자리 사람은 턱이 동그랗게 보이는 30대 초반 정도의 여자이다. 동그란 턱 때문인지 30대 초반의 나이 보다 훨씬 더 어린 표정이 항상 남아 있는 얼굴이라는 생각도 든다. 안나는 그 사람이 들고 있는 배낭을 본다. 배낭이라고 하기에는 책가방 같은 느낌이고 책가방이라고 하기에는 등산용 배낭 같아 보이는 가방이었다. 그 사람은 그 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 놓고 그 배낭 책가방을 껴 안듯이 하고 있었다.


 


짧은 머리는 안나가 그녀를 보는 것을 본다. 그러자 짧은 머리도 배낭 책가방을 든 그녀를 본다. 짧은 머리는 배낭 책가방을 들고 있는 사람이 자기 뱃살을 가리기 위해 가방을 그렇게 두었다고 생각 한다. 사실 배낭 책가방은 그다지 살이 찐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앉으면 뱃살이 눈에 뜨이게 나와 보였다. 낮은 숫자로 기록되는 체중을 인간이 보이는 아름다움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 치고 있는 짧은 머리가 보기에, 배낭 책가방은 반드시 항상 열등감을 느끼고 지낼 만한 사람으로 보였다. 더군다나 짧기는 짧지만 "아직 미혼 여자 입니다"라는 암시를 잃어버릴 정도는 아닌 길이로 유지하는 배낭 책가방의 머리카락 길이를 보고 짧은 머리칼은 더욱 열등감에 대한 생각을 굳힌다. 배낭 책가방은 자기 배를 가방으로 가린 채로 앉아 있을 때 편안함을 느낀다.


 


짧은 머리는 배낭 책가방의 그 순해 보이는 얼굴을 보고는 그녀가 공공기관에서 운영하는 청소년 상담이나, 종교단체에서 벌여 놓은 "사랑의 상담"을 맡아 일하는 사람이라고 생각 한다. 힘들고 보수는 적지만 사람들이 "선한 일"이라고 하니까 무슨 대단한 자부심을 가져도 된다고 생각할 뿐인 곳이겠지. 사실은 효율도 없고 막상 기여하는 바도 찾아 볼 수 없는 잘못 운영되고 있는 아무런 필요가 없는 상담 시설에서 그녀는 일하고 있는 것이다.


 


멤피스 안경은 상담 시설에서 일하는 배낭 책가방의 생활을 상상한다. 배낭 책가방이 상담 시설에서 주고 받는 말들을 떠올려 본다. 멤피스 안경은 이제 그런 비유를 누가 비유로서 힘이 있다고 생각할 지 모를 정도로 진부한 비유의 금언을 떠올려 본다. 아마 그런 말 따위를 직장에서 서로 주고 받으며 상담실의 배낭 책가방은 귀중한 한 마디를 들었다면 좋아하는 표정을 꾸며 대겠지.


 


"행복을 식으로 나타내면 그 분자는 성취이고 분모는 욕망입니다. 행복이 커지기 위해서는 성취를 많이 해도 되지만, 그것보다 분모를 줄이면, 그러니까 욕망을 줄이면 큰 행복을 얻게 될 수가 있습니다."


 


도대체 선형 비례 한다는 것을 어떻게 증명할 지 꿈도 꿀 수 없는 소재들을 가지고 과감하게 분자, 분모에 배치하여 "공식"이랍시고 이상한 실험식을 끄집어 놓는 것 부터가 황당무계한데, 분자, 분모와 같은 수학 시간에 듣고 오래 동안 잃어 버린 어휘 몇 개로 치장하면 무엇인가 좀 더 그럴듯해 보이고 조금 더 재치 있어 보이는 효과를 노린다는 것도 애초부터 사악하다. 더군다나 이제는 그 조차가 영겁의 형벌처럼 왠갖 매체에서 반복되어 아무런 감흥 없이 너덜너덜 낡기만한 말 아닌가? 무엇보다도 억지로 욕망을 줄인다는 것을 도대체 왜 행복이라고 풀이하나? 그런 것은 보통 좌절이라고 하지 않나?


 


하지만 배낭 책가방은 정말로 그런 말을 하는 수백명, 수천명의 상담시설을 들르는 정치인들과 정치인이 되려는 인간들을 보면서 날마다 감탄한 표정을 지어 보여 줄 것이다. 배낭 책가방은 진심으로 그런 표정을 지을 줄 아는 사람이다. 열등감을 이겨 내기 위해서 배낭 책가방은 작은 일에 진정한 행복을 느끼는 사람으로 치장하며 지낼 거라고 짐작 해 본다. 그렇기 때문에 상담시설에 들러 사진 찍으며 고루한 소리를 하는 인간들에게 무슨 말을 듣던 잘 웃고, 감동 받은 표정도 잘 짓는다. 멤피스 안경은 그런 따위에 그 정도로 감흥 있는 표정을 보여 준다는 것이 배낭 책가방의 진짜 재주라고 생각 한다. 멤피스 안경은 그녀에게 그런 재주가 있기에 월급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봐야 옳겠거니 한다.


 


안나는 지금 배낭 책가방이 상담시설에서 잠깐 나와서 점심 때 약속을 한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라고 짐작 한다. 배낭 책가방은 친구에게 항상 친절하게 배려해 주는 성격이므로 비교적 여유로운 상담 직장에서 자기가 시간을 뭉텅 내어 친구가 기다리는 먼먼 곳으로 가겠다고 한 것이다.


 


짧은 머리는 배낭 책가방의 친구는 대학 때 친구라고 생각 한다. 같은 강의실에 있는 사람들을 한 번 주욱 돌아 보고, 자기 보다 조금 더 못생긴 사람과 같이 다니면 상대적으로 자기가 좀 더 멋지게 보일 거라는 수법을 실천하려는 어느 불행한 외모를 가진 대학생이 있었다. 바로 이 대학생이 배낭 책가방의 가장 친한 친구였다. 친구는 그러한 계획으로 배낭 책가방과 자주 같이 다니곤 했다. 그런데, 그러다 보니 그 친구는 반대로 이제 배낭 책가방이 아닌 다른 사람과 같이 다닐 때는 어쩐지 자기가 못나 보일까 하는 생각이 든다. 친구는 자신감을 잃게 되었다. 친구는 배낭 책가방과 더 자주 붙어 다닌다. 친구는 그럴 때는 든든하고 편안하다. 그리고 세월이 흐른 이제는 정말 친구에게 배낭 책가방은 가장 친한 사람이 되어, 지금은 그런 계산 없이도 항상 자주 만나게 될 사람이 되어 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친구가 그런 계산을 하지 않는다는 것은 아니지만.


 


멤피스 안경은 짐작하기로, 배낭 책가방이 요즘 자주 하는 이야기는 새로 사귄 남자 친구 이야기라고 상상 한다. 배낭 책가방에게는 난생 처음 생긴 남자 친구였다. 배낭 책가방의 친구는 배낭 책가방 앞에서 노련한 남녀 심리의 전문가가 되어 이런저런 이야기를 우아하게 들려 준다. 배낭 책가방은 존경의 눈빛을 보내며 그런 이야기들을 듣는다. 이렇게 이야기를 주고 받으면 긴긴 시간도 무척 잘 지나간다. 한잔 차를 가져다 놓고 피곤해서 어서 집에 가서 자고 싶을 때 까지 몇 시간이고 커피 가게에 앉아 있을 수 있었다.


 


안나는 배낭 책가방의 남자 친구를 자기가 좋아하는 남자와 비슷한 모습으로 생각 한다. 안나의 상상 속에서는 똑같이 생긴 사람이다. 안나는 배낭 책가방이라면 그 남자에게 매일 저자세로 받들어 모시듯이 끌려 다녀야 한다고 생각 한다. 그것은 남자가 대단하지는 않아도 배낭 책가방 보다는 우월하고 배낭 책가방에게 그 정도를 분에 넘친다고 받아들여 마땅한 열등한 점들을 스스로도 느끼고 있기 때문이었다.


 


짧은 머리는 때문에 배낭 책가방이 친구와 커피 가게에 앉아 몇 시간 씩 나누는 대화의 내용들을 다음과 같이 짐작한다. 요즘 들어서 그 이야기들은 한 가지 주제로 계속 해서 모이고 묻혀 가고 있었다. 친구는 그것 때문에 조금 지겨워 하기도 한다. 그렇지만 재미있기 때문에 계속 이야기 하게 되는 주제였다. 그것은 배낭 책가방의 답답한 행동과 비난 받아 마땅할 남자 친구의 야비함이었다.


 


배낭 책가방의 남자 친구는 농담이나 장난이라고 하면서 배낭 책가방에게 험한 말을 많이 한다. 살을 빼라거나, 돌머리라고 한다거나, "우리의 미스 답답" 따위의 말을 애칭으로 여겨 배낭 책가방을 부르는 말로 쓴다. 가끔 배낭 책가방에게 커피 몇 잔이나, 저녁 식사 한 끼를 사 주기는 한다. 그렇지만 그런 때를 전후 해서는, "왜 항상 남자가 여자한테 사줘야 하는 건지 모르겠어" 로 시작하는 잡스러운 말로 같이 있는 시간을 주렁주렁 둘러 친다. 저녁 늦은 시간이나 토요일 오후 시간에 갑자기 전화를 해서 영화를 보러 가자거나, 뭘 사는 데 - 우산이나 운동화 따위 - 같이 가자고 문득 불러대는 때가 있지만, 한 번도 배낭 책가방과 미리 일정을 상의하지는 않는다. 때문에 배낭 책가방은 친구와 한참 이야기를 하다가 남자 친구의 전화를 받고 문득 뛰어 나갈 때도 있다.


 


결정적인 문제는 배낭 책가방의 남자 친구가 다른 친한 여자들에게도 자꾸 지나치게 관심을 보인다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으로는 남자 친구가 일하는 회사에 최근 입사한 경리직원이었다. 고졸 후에 바로 입사한 까닭에 나이 차이가 7, 8세 쯤 나는 그 직원에게 남자 친구는,


 


"선배가 후배 돌봐 줘야지. 또 애가 사회 생활 경험이 없어서 진짜 이런 저런 걸 잘 모르거든. 내가 개념 없이 키웠다는 소리 안들으려면 이것저것 잘 가르쳐야지. 귀찮아 죽겠어."


 


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는 그 경리직원을 불러 내어 점심이나 저녁을 같이 먹는다든가, 같이 술을 마시며, 직장 생활의 고뇌를 "풀자"고 한다거나 했다. 배낭 책가방은 이러한 관계가 좀 이상한 듯 하여 몇 마디 일정과 빈도에 대해 남자친구에게 물었다. 그러나 남자 친구는 문득 화를 담뿍 자리 위에 퍼부으면서,


 


"니가 회사 생활이란 걸 안해 봐서 이해를 못하는데."


 


로 시작되는 여러 가지 형태의 쉰소리들을 들려 주었다.


 


멤피스 안경은 이런 일들을 배낭 책가방의 친구가 듣는다면, 배낭 책가방에게 그 남자 친구가 나쁘다고 말할 것이라고 상상한다. 배낭 책가방의 친구는 배낭 책가방에게 "내가 너 남자 친구를 꼭 나쁘게 말하는 것 같에서 약간 조심스럽기는 한데" 라는 말을 말 앞에 꼬박꼬박 달아 가며 남자 친구에 대한 욕을 한다. 친구의 해석에 따르면, 배낭 책가방의 남자 친구는 그냥 심심해서, 혹은 "이제는 누구라도 여자 친구가 있어야 친구들 사이에 바보 취급 안 받겠다"라는 말에 대응 하기 위해서 아무나 사람을 붙잡았고, 마음 약한 배낭 책가방이 그냥 친절해야 한다는 생각이 찌와 붕돌이 되어 거기에 걸렸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어물쩡 두 사람은 "사귀는 관계"가 되었고, 그러고 나니 배낭 책가방은 타고난 규범을 준수하는 태도 때문에 그 관계의 한 쪽에 있는 남자 친구에게 정을 주고 있다는 것이다. , 친구의 해석에 따르면 두 사람 중 그 누구도 서로 애정을 갖고 있는 관계는 아닌데도, 남자 친구가 괴롭히고 배낭 책가방은 "아파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배낭 책가방의 친구는 "아파한다"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들으니 어쩐지 멋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배낭 책가방의 친구는 그 "아파한다", "네가 너무 아파하니까", "참 니가 이렇게 아파하는 걸 보는 나까지 속이 터진다" 등등의 말을 매우 많이 사용 했다. 그때마다 친구는 자신이 사는 인생이 조금씩 더 감동적으로 변해 간다는 환상에 빠진다.


 


배낭 책가방은 그런 이야기를 듣다 보니 한 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하게 되었다. 친구가 배낭 책가방이 그렇게 괴로운 불운에 빠져 있고 그만큼 가진 것이 없는 이야기를 하면서, 동시에 친구 자신은 그렇지 않고 그것 보다 나은 위치에 있다는 점을 되새기는 것이다. 친구는 배낭 책가방의 처지를 처참하게 묘사하면서, 그러한 되새김으로부터 약간씩 위안을 얻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마저 든다. 날마다 배낭 책가방이 토로하는 이야기를 매번 이렇게 이 친구가 열심히 듣고 매우 풍부한 해설과 조언을 들려 주는 것은 그런 이야기를 들으며 친구가 스스로 행복감을 느끼기 때문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안나는 배낭 책가방이 이러한 의심 정도로 친구를 싫어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배낭 책가방의 열등감은 더 넓고 더 깊다고 본다. 배낭 책가방은 정말로 자기는 그렇게 망한 이야기로 남들을 기쁘게 해주는 위치에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자, 그만큼 더 부끄럽고, 그만큼 더 "분모를 줄이고" 살아야 겠다는 생각이 가슴 안에 답답하게 찬다.


 


마침내 배낭 책가방은,


 


", 내가 진짜 웃긴거 이야기 해 줄까. 너 이 이야기 들으면 진짜 하하하 소리 내서 웃을 지도 몰라."


 


고 말하면서, 남자 친구와 자신 사이에 생긴 일을 들려 주는 화술을 사용하기에 이른다.


 


민망한 일을 저질렀을 때 일부러 자기가 먼저 웃으면서, "이건 민망한 일이 아니라 웃긴 일이야"라고 상대방에게 신호를 보내는 것 처럼 보이기도 한다. 스스로도 자신의 누추함을 이미 깨닫고 있다고 미리 밝히고 말하면 그 누추함이 조금은 가려지는 효과가 있을까봐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일까? 내가 지금 부터 보여주는 내용은 괴롭고 추하여 나쁜 것이 아니라, 그냥 차라리 웃어 넘길만한 일이라고 밝히면 자신이 그만큼 강인해 보이리라 생각해서 그러는 것일까? 혹은 그냥 그만큼 더 극적인 정신 상태에 내가 놓여 있다고 괜히 그런 이상한 정신 나간 방식으로라도 좀 화려하게 보이려고 하는 것일까?


 


배낭 책가방에게는 그 어느 것도 어울리지 않았지만, 배낭 책가방은 그런 말을 하면서 남자 친구 이야기를 또 새롭게 이것저것 늘어 놓았다.


 


남자 친구가 자기 앞에서 여자에게서 온 전화를 받을 때에는 자리를 피해서 받는 다는 이야기, 남자 친구와 소리를 고래고래 지르면서 길에서 막 싸운 적이 있다는 이야기, 그렇게 싸운 적이 또 있다는 이야기, 이번에는 어느 거리에서도 그렇게 싸운 적이 있다는 이야기, 그러면서도 남자 친구에게 정말로 나쁜 일이 있을 때는 나를 찾아와 남자 친구가 울었다는 이야기, 그런데도 남자 친구는 다시 경리 직원이나 그 비슷한 사람들과 어울려 다니다가, 배낭 책가방이 왜 이렇게 쓸데 없이 그런 여자들과 자주 어울리냐고 물으면  "나를 너무 소유하지 말라"거나 "너무 구속하면 오히려 벗어나고 싶다"는 따위 20세기 말엽 유행가 가사에서 따온 한자어 단어들을 양동이로 쏟아 붓듯이 말한다는 이야기, 그리고 "내가 생각해도 내가 바보 같아"라는 말을 하면서 아까의 화술과 같은 분위기를 만드는 이야기들을 반복적으로 계속한다..


 


며칠 전부터, 친구는 배낭 책가방이 이런 이상한 사연과 싸움을 자꾸 주물럭 거리다가 배낭 책가방 스스로도 남자 친구가 퍼부었던 20세기 말엽 유행가 가사 속 한자어에 절여 진 것이 아닌가 짐작 하고 있다. 친구는 그래서 배낭 책가방이 싱겁고 할 일 없는 놈팽이 한 놈과 엮여서 시간 낭비 당하며 이용되는 형편을  "슬프도록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꾸미고 있는 것 아닌가 싶다. 배낭 책가방 스스로가 감상에 빠져 있는 까닭에, 남자 친구를 당장 때려 치워야할 놈팽이 이야기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돌아보면 "쓸쓸한 감흥이 심장을 먹먹하게 하는" 이야기를 겪고 있다고 자꾸 우기는 것은 아닌가?.


 


그러고 보니 배낭 책가방의 이런 말들도 생각이 났다. 배낭 책가방은 오히려 더욱 적극적으로 남자 친구에 대해 이야기 하면서,


 


"걔도 그러는 거 보면 불쌍하고, 내가 어떻게 해서든 사람 만들어 보고 싶어"


 


따위의 말을 하면서 질질 끄는 것 같다.


 


친구는 배낭 책가방에게 화를 내듯이 그런 자신의 분석을 털어 놓는다. 배낭 책가방은 웃어 넘기면서, "몰라 나, 너무 답답하지. 미안해. 미안해." 라고 말하면서 친구와의 관계를 달래려고 한다. 그러고 나서, 다시 만나서 이야기를 한 번 해보자고 약속했고, 지금 배낭 책가방이 친구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그러나, 멤피스 안경은 배낭 책가방이 이렇게 울고 불고 고민하고 찢고 구기며 살고 있지만, 이런 것 따위 아무 부질 없이 곧 이 세상 나머지 모두와 함께 산산히 날아갈 것이라고 생각 한다. 이제 이 큰 일과 견주어 보면 무의미한 그 많은 말들과 관계 없이, 그 모든 것이 파멸하는 순간이 될 때, 그 때 배낭 책가방에게 큰 깨달음이 올 것이라고 생각 한다.


 


안나는 갑자기 운명을 끊는 사고 혹은 삶을 뒤 엎어 버리는 폭발이 이제 곧 일어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 사고로 배낭 책가방의 삶이 단숨에 바뀔 것이라고 생각 한다. 이제 배낭 책가방은 같은 팔자에 사로 잡힌 주위의 사람들과 함께 곧 예기치 않은 최후를 맞을 것이다. 안나는 그렇게 갑자기 어쩔 수 없이 찾아오는 우연이야 말로 배낭 책가방의 그 기나긴 위선에 대한 처벌이 되리라고 생각 한다.


 


짧은 머리는 배낭 책가방과 같은 상황에 처한 사람이야 말로 이제 지금 당장 스스로 삶을 마칠만한 기분일 것이라고 생각 한다. 배낭 책가방이 더 이상 호흡과 소화를 계속하며 몸의 장기와 근육들을 계속 꿈틀 거리며 유지시키는 것은 오히려 슬픈 일이라고 생각 한다. 배낭 책가방처럼 모든 사람에게 무시 당하고 비웃음 당하고 있어서, 베풀어 지는 동정 조차 겨우 그녀의 동료에게 심심풀이로 소비되는 유희에 지나지 않는다면, 그러한 상황은 지금 곧 끝나야 마땅하다고 짧은 머리는 믿는다. 짧은 머리는 이제 배낭 책가방은 드디어 결단을 내려, 마지막으로 스스로 생을 바꿀 수 있는 행동을 할 것을 생각 한다. 그녀도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음을 스스로 보여주기 위해 제 손으로 그녀의 삶을 끝낼 것이라고 짧은 머리는 생각 한 것이다.


 


이 때, 드디어 지하철은 다음 내릴 차례인 환승역에 다가 와 속력을 줄인다.


 


 


16.


멤피스 안경이 초끈 붕괴의 순간을 기다리고, 안나가 자신은 모르는 채로 개폭탄이 터질 시간을 기다리고, 짧은 머리가 언제 이 모든 것을 끝장낼 지 마음 속으로 투덜투덜하며 기다리는 이야기들이 흘러다니는 동안, 이 사람들을 적재하고 있는 지하철은 환승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지하철은 환승역의 하차 위치가 가까워 오기에 속도를 줄이는 영향을 받는다.


 


지하철 역에 있는 사람들은 속도가 줄어 드는 것 때문에 몸이 한 쪽으로 쏠리는 느낌을 받는다. 멤피스 안경, 안나, 짧은 머리를 비롯해서, 높은 구두굽, 배낭 책가방과 회사원까지 환승역의 여섯 사람들은 서로 떨어져 있었지만 같은 형태로 이 느낌을 모두 받게 된다.


 


환승역에 도착하기 직전 이 마지막 느낌을 두고, 멤피스 안경은 이렇게 속도가 줄어 들 때 한쪽으로 쏠리는 느낌이 나는 것은 결국 이론상 중력과 같은 효과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므로 지금 지하철 같은 칸 안에 있는 사람들에게 모두 손을 뻗쳐 한 데 뭉쳐 휘어 잡고 있는 이 느낌은 하나의 법칙으로 엮여 있다. 멤피스 안경은 이렇게 엮여서 퍼져 있는 이 힘이 이제 곧 초끈 붕괴가 일어 나서 우주가 사라지게 되면 곧 중단될 현상이라고 생각 한다. 멤피스 안경은 그러한 상상에 조금 더 처연하고 좀 더 서글픈 느낌이 되었다.


 


한편 지하철의 끝트머리가 환승역 승강장 쪽으로 접어들며, 환승역에 서서 바로 이 지하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들의 영상이 번쩍이며 차창에 지나치는 모습으로 보인다. 안나는 그 덧없는 흐르는 영상 속의 얼굴들을 고심한다. 지하철 안에 탄 사람이 바깥을 볼 때는 승강장에서 기다리던 사람들의 얼굴을 제대로 볼 시간을 갖지도 못하고 빨리 지나가 버리고 영영 다시 떠올리지 않을 의미 없는 흐름이었다. 그러나 지하철 바깥의 사람들은 나름대로 이 지하철이 오기를 저마다 다른 정도의 초조함으로 기다리고 있었다는 생각을 한다. 안나는 그러자 만약에 폭탄을 터뜨려 사람을 죽인다면 이 승강장에 서기 전에 터져야만 최소한의 사람이 죽을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그러나 안나는 끝까지 청년을 죽이지는 않겠다고 다시 다짐한다. 안나는 자기 생각과는 달리 개에게 독가스 장치가 장치되어 있고 곧 원격으로 터질 것이라고는 알고 있지 못했다. 그러므로, 아직도 그런 고민이나 하고 있었던 것이다.


 


짧은 머리는 환승역에 가까이 다가오자, 재빨리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쪽으로 미리 걸어 가는 사람들을 둘러 본다. 이 사람들이 이렇게 문 앞쪽으로 미리 걸어 간 것은, 문이 열리자마자 빨리 내리기 위해서 라고 생각 한다. 그러자 짧은 머리는 긴긴 인생 속에서 문 까지 걸어가는 1, 2초의 시간을 조금 더 절약하기 위해 먼저 문 앞에 다가가 서는 사람들을 혐오 스럽게 여기게 된다. 짧은 머리는 문이 이렇게 절약하는 잠깐의 시간 마저 정당화 되려면, 인생의 시간들이 좀 더 짧아서, 그 한 순간 한 순간이 중요하게 여길 때만 가능하다고 생각 한다. 그래서 짧은 머리는 빨리 삶을 끝내는 것이 이 모든 것을 좀 더 정의롭게 만드는 것이라고 결론을 내리려 한다.


 


그러나 결론 전에 짧은 머리는 다시 생각한다. 문이 열리자마자 내릴 사람이 최대한 빨리 내려야 한다는 것은 불문 규칙일지도 모른다. 1, 2초 빨리 내리고 싶어서 미리 문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주어진 규칙이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보통 지하철에 타는 사람들은 내린 사람들이 모두 내린 다음에 탄다. 지하철 예절이라는 것이 하나둘 만들어지던 시기에 그려졌던, 먼저 내린뒤에 타자는 것을 그림과 함께 붙여 놓은 낡은 포스터의 모양을 짧은 머리는 떠올려 본다. 그렇다면, 지하철에 타는 사람들이 지하철에 올라타 빈 자리에 앉을 곳이 있을까 파악하고 서로 경쟁하며 앉으려고 달리는 것은 나보다 앞서 지하철에 타고 있던 사람이 내리는 것으로 결정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만약 내가 서서 기다리고 있던 문 앞에 타고 있던 사람이 느리게 내릴 경우 나까지 늦게 지하철 안으로 진입하게 된다. 반면에 재빨리 사람들이 내린 문 앞에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은 먼저 지하철 자리 안으로 들어가서 빈 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이러한 까닭으로 지하철이 서자 마자 최대한 빨리 지하철에서 내려야 하는 까닭은 정당화 된다. 내가 지하철에서 최대한 빨리 내려야만, 내가 내리는 문앞에 기다리던 사람이 최대한 빨리 지하철 안으로 들어가서 먼저 앉을 자리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말하자면, 이것은 내가 내리는 문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을 위한 배려이며, 협동이다. 서로 얼굴 한 번 마주치지 않고 그저 교차해 지나갈 뿐이며, 우연히 같은 문을 출입의 위치로 삼았다는 것 외에는 어떠한 이유도 없이 서로에게 맺어진 짝이다. 하지만, 지하철에서 내리는 사람과 타는 사람 간에는 이러한 협동의 관계가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짧은 머리는 여기까지 생각하자, 1초 먼저 내리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나 문 앞으로 다가 가는 사람의 의미를 깨우치게 되었다. 1초의 시간이 뒤이어 그 문으로 지하철을 타는 사람이 2시간 동안 앉아서 가느냐 서서 가느냐를 결정할 수 있으니 말이다. 이와 같은 역치값으로 표현할만한 시간과 고통의 증폭을 생각 하자, 짧은 머리는 지하철에서 일찍 내리려고 조바심 내며 문 앞에 다가서는 사람으로부터 이와 같이 예술적인 통찰을 이끌어 낼 수 있는 사람이 세상에 얼마나 있겠냐고 스스로를 자랑스럽게 생각 한다.


 


그러나, 잠시 후 고작 이러한 쓸모 없는 통찰력 따위를 자신의 자랑스러움으로 붙잡는 잠시 전의 과거가 얼마나 부끄러운 지 짧은 머리는 스스로를 생각하며 몸서리 친다. 짧은 머리는 결국 어쩔 수 없이 이 삶은 빨리 끝낼 수 밖에 없다고 생각 한다.


 


지하철이 완만한 곡선을 그리는 선로를 따라 승강장으로 들어설 때, 만약 땅을 몇 십미터쯤 절개 하여 지하에 있는 터널을 드러나게 하고, 지하철이 지나가는 모습을 위에서 내려다 보면 무척 멋지고 아름다울 것이다. 그런 광경을 아무도 볼 수 있는 사람은 없지만 항상 수천번, 수만번씩 늘상 벌어지고 있는 일인 것이다. 직사각형의 강철로된 커다란 상자들이 달려 가는 데, 그 모습은 꼭 구부러진 비닐 관을 따라 흐르는 물과 같이 부드럽기만 하다.


 


위에 마지막으로 나온 지하철이 들어오는 모양을 위에서 내려다 보는 모습에 관한 내용은 지하철에 타고 있는 지금까지 이야기 된 6인 중 그 누구의 생각도 아니다. 환승역을 향해 다가 오는 6인은 지하철 안에 있지 위에 있지는 않다. 그렇다면 위에서 내려다 보는 모습에 관한 이런 묘사는 왜 갑자기 나왔는가? 바로 이것은 희시무루 귀뚜라미의 시점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희시무루 귀뚜라미가 그 때 느꼈던 것을 만약 같은 형태로 인간이 느낀다면 느껴질 것을 써 놓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다음 이야기를 위해서는, 일곱 번째 등장인물 - 더 명확히 하자면 등장동물로 이 희시무루 귀뚜라미가 겪은 일을 꼭 짚고 넘어가야 한다.


 


 


17.


지하철 지붕 위로 올라온 희시무루 귀뚜라미는 지하철이 달리기 시작하자 빠른 바람에 이리저리 흩날렸다. 그러자 귀뚜라미는 바람이 안들어오는 지하철 부품의 틈에 숨고 기어서 앞으로 나아가기도 하고, 바람에 떠밀리지 않으려고 지하철 지붕 위 한 켠을 붙들고 꿋꿋이 버티기도 했다. 그랬으므로, 귀뚜라미는 거대한 지하철의 육중한 요동과 퍼붓는 강풍에 비해서는 원래 기어오른 곳에서 별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까지만 밀려 났다.


 


하지만 지하철이 속도를 줄이기 시작하자 그 쏠리는 느낌에는 당황했다. 희시무루 귀뚜라미는 뒤로 밀리지 않으려고 가까스로 버티던 동작에서 앞으로 쏠리지 않으려고 버티는 동작으로 빠르게 바꾸지 못했다. 그러기에는 지하철의 움직임과 바람이 불어오는 힘이 서로 엇갈리는 것이 매우 혼란스러워 놀랐다. 희시무루 귀뚜라미는 일반적으로 날렵한 편이었지만, 이러한 혼란을 헤치고 나가는 특수한 동작에는 둔한 편이었다.


 


지하철이 환승역에 완전히 멈추어 설 때 즈음이 되자, 희시무루 귀뚜라미는 튕겨 올라가 지하철과 맞붙어 있는 전선에 앉게 되었다. 희시무루 귀뚜라미는 앞과 뒤로만 움직일 수 있고 옆으로는 갈 곳이 거의 없는 전선에 올라서자 조금 더 당황스러웠다. 괜히 옆으로 가는 동작을 하다가 몇 번 떨어질 뻔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희시무루 귀뚜라미는 곧 알게 되었다. 바로, 이 전선 위야 말로 그토록 희시무루 귀뚜라미가 찾아 헤멨던 곳이었다. 이 전선은 뿜어내는 열기로 따뜻했다. 희시무루 귀뚜라미가 가장 즐겁게 느낄 수 있는 노곤노곤한 편안함이 가득한 온도 였다. 거기에는 갖가지 다양한 먼지들이 새까맣게 묻어 있었는데, 그 중에는 희시무루 귀뚜라미가 즐겁게 맛 볼 수 있는 풍성한 동물성, 식물성 부스러기들이 가득 있었다. 그런 먼지는 전선을 타고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원래 이래서는 안되는 것이었다. 전임 지하철 회사 사장이 적자가 줄어들었다고 발표하기 위해서, 전선 정비에 쓸 돈을 아끼고자 정비 사업을 계속해서 미루었던 일이 있었다. 한 달 정도만 미루면 전임 지하철 회사 사장이 책임 질 임기는 끝이 난다. 그리고 나면 전선을 정비하는 것은 신임 지하철 회사 사장이 취임 했을 때의 몫이다. 그러면, 신임 지하철 회사 사장은 돈이 없어서 괴롭겠지만 어쨌거나 전임 지하철 회사 사장은 자기 임기 동안에는 돈을 많이 번 것처럼 끝까지 뽐내면서 박수 받으며 퇴임할 수 있었다. 이 정도로 며칠 정도 정비를 미루는 것은 단순한 일정 조정일 뿐으로 안전 규정에 어긋나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이렇게 전선 정비가 밀려 있는 데도, 신임 지하철 회사 사장 조차 전선 정비를 즉시 지시하지 않았다. 신임 지하철 회사 사장은 자기 나름대로 전선 정비보다 더욱더 시급한 안전개선 사항이 많다고 보았다. 신임 지하철 회사 사장은 전임 사장을 믿지 못해서 우선 안전 일정, 정비 일정을 모두 재검토하고 그 중에 제일 문제 되는 것부터 투자를 하려고 했다. 그러므로, 그 재검토 하는 기간 동안 마땅히 정비되고 청소되었어야 마땅할 전선은 그대로 방치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전선에는 유난히 낡은 부분과 삭은 부분이 많았고, 과열되는 경우도 많았고, 먼지도 많았다. 이 모든 것이 희시무루 귀뚜라미에게는 극히 안락한 만족을 가져다 주었다. 포근함과 포식에서 즐거워 하며 영영 완성된 행복이 도래한 것을 느낀 희시무루 귀뚜라미는 마침내 도달할 수 있는 최상의 위치에 도달했다고 기뻐한다.


 


만족감에 가득 차 있던 희시무루 귀뚜라미에게, 검게 때가 탄 금속 부품 틈 사이로 눈 앞에서 반짝거리는 빛이 신비롭게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희시무루 귀뚜라미는 그 빛 사이로 다가가면 다가갈 수록, 점점 더 따뜻해지고 점점 더 맛있는 먹을 것들이 풍성해지는 것을 알게 되었다. 희시무루 귀뚜라미는 이와 같이 즐겁고 신나는 곳이 드디어 자신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기뻐서 한 번 길게 귀뚜라미 소리를 내며 노래를 부르기도 했다. 희시무루 귀뚜라미는 그리고 더 큰 기대와 기대를 뛰어 넘을 경이를 생각하며, 눈 앞에 보이는 빛 속으로 다가갔다. 마침내 그곳에 도착하자, 희시무루 귀뚜라미는 드디어 느낄 수 있었다. 희시무루 귀뚜라미는 온 몸에 전기가 통하는 듯한 짜릿한 기분을 느낀다.


 


이 느낌은 희시무루 귀뚜라미가 지하철 전선의 누전으로 인해 스파크가 발생하는 부분에 들어 가서 실제로 몸에 1 5천 볼트의 전압이 걸리는 바람에 바싹 구워졌기 때문이었다.


 


 


18.


지하철 지붕 위에서 발생한 누전은 전기에 타죽은 희사무루 귀뚜라미의 사체 때문에 전기 합선으로 발전 한다. 희사무루 귀뚜라미의 사체를 타고 수없이 많은 전자기파의 다발이 치솟아  떨어져 있어야만 했던 점점 사이를 무시무시한 기세로 넘나든다.


 


이제 어두웠던 지하철 터널 속 전선의 공간들은 상하로 빛을 뿜으며 연달아 소리를 내었다. 그 빛과 타닥거리는 소리는 지하철의 운행 방향 전후로 흑룡이 내뿜는 꽃불길처럼 빠르게 내뿜어지며 퍼져 나갔다. 이어서 선로에 연결된 모든 회로들이 활활 타오르며 온통 불꽃놀이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윽고 지하철과 승강장의 모든 전등들이 잠깐 꺼지더니 곧 다시켜지고 어두워졌다 밝아졌다를 몇 차례 빠르게 반복했다. 그러고 나더니, 그 전등 불빛이 점점 더 밝아졌다. 그 불빛은 눈부시게 밝아지면서 지하에 가득찬 전류의 풍성한 힘을 바닷물결과 같이 보여 주었다.


 


윙윙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리는 지, 귀를 직접 뒤흔드는지 이상한 느낌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들렸다. 그 소리는 점점 더 높아졌다. 눈이 부시고 귀가 조금 아파온다고 느낄 무렵, 거룩한 흰 옷자락 처럼 그 빛나는 공간과 혼란이 사람들을 모두 덮친다. 이제 사람들이 들고 있던 모든 휴대전화가 빛을 내뿜고 점점 더 밝아 진다. 요동치는 고압의 전기가 잘못 새어 들어 손이 갑자기 뜨거워지거나 찌릿해져서 전화를 떨어 뜨리는 사람들이 생긴다. 모든 전화에 수신감도를 표시하는 안테나 아이콘이 강한 신호였다가 약한 신호였다가 마구 움직인다. 이내, 그러더니 그 모든 전화들이 무엇인지 기체의 덩어리가 깨어지는 듯한 소리를 내면서 남김 없이 픽픽 꺼져 버린다.


 


이후 지하철은 비상 회로로 전기가 차단 되어 전원이 모두 꺼져 버린다. 구내의 모든 전원이 사라졌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다시 한번 빠른 강철 덩어리가 달리는 구멍이 얼마나 깊은 땅구덩이 속에 있는지 지하의 위세를 단단히 드러 낸다. 모든 것이 모습을 감추고 아무것도 어떠한 빛도 없는 깜깜함만이 끝없이 가득해 진다. 당황 속에서 문득 적막한 소리 없는 시간이 온통 꽉꽉 들어 찬다.


 


짧은 머리는 그 갑자기 들이친 당혹스러운 고요에서, 드리어 그 동안 열렬히 낭만적으로 두려워 해 오던 순간에 돌입했음을 느낀다. 짧은 머리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자신에게 올 것을 기다린다. 짧은 머리는 그것을 "숙명을 기다린다"고 표현하면 좋겠다고 스스로 생각 한다.


 


안나는 녹아내리고 탄 냄새와 희미하게 피어올랐다가 흩어지는 연기를 본다. 안나는 그녀의 폭탄개가 갑자기 조용해 졌다고 생각 한다. 안나는 납이 끓어 오르고 수은이 증기가 된 냄새가 메마르게 탄 독기가 되어 코 끝에 차는 것을 느낀다. 안나는 눈을 지그시 감고 자신에게 올 것을 기다린다. 안나는 이제 곧 자신의 이야기 속에 나온 안나 자신과 청년과 개가 모두 한 운명으로 강하게 엮이는 순간을 기대 한다.


 


멤피스 안경은 마침내 모든 빛과 소리가 사라진 모습을 본다. 멤피스 안경은 눈 앞을 바라 보면서도 아무리 가까이에 있는 것 조차도 조금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철저히 빛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철저한 어둠 덕택에 멤피스 안경은 지금 자신의 바로 눈 앞에 어느 흉측한 귀신이 바로 얼굴을 바싹 갖다대고 있어도 알 수 없다고 생각 하고, 반대로 눈 앞에 이 모든 것이 사라져서 수백, 수천 광년의 텅텅빈 허공만 펼쳐져 있을 뿐인지도 알 수 없다고 생각 한다. 멤피스 안경은 눈을 지그시 감고 자신에게 올 것을 기다린다. 멤피스 안경은 이제 곧 이 모든 이야기와 이야기의 서술과 묘사의 규칙과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일 조차 없어질 것을 믿는다.


 


이 때, 배낭 책가방이 눈을 뜬다.


 


배낭 책가방은 눈을 뜨고 두리번 거려 무엇인가를 보려고 하지만 볼 수가 없다. 배낭 책가방은 이어폰에 연결된 작은 기계를 꺼낸다. 그것은 모두 전자회사들이 애플사 제품의 겉모습을 따라 하면 돈을 벌 수 있을 거라는 허황된 기대 속에서 아무 성과 없이 디자이너를 괴롭히던 시기가 도래하기 전에 만들어진 구식 MP3 플레이어 였다. 배낭 책가방은 구식 MP3를 똑닥거리며 조작하여 화면에서 가장 많은 빛이 나오도록 한다. 그 덕분에 배낭 책가방이 듣던 음악 소리가 이어폰 밖으로 새어 나온다. 조용한 가운데 그 소리는 넓게 퍼지면서, 하나 둘 들려오는 사람들의 말 소리에 섞인다.


 


적막한 짧은 시간이 지나자 그것을 조금씩 무너뜨리고 두런두런 사람들이,


 


"왜 이런거야?"


"어머, 이건 또 뭐래."


 


하는 소리가 하나 둘 들려오기 시작한다. 배낭 책가방이 듣던 첼로 소리가 처연하게 흘러나오는 느린 음악이 같이 퍼지는 바람에, 이 모든 것들이 천천히 움직이는 것 처럼 느껴진다.


 


배낭 책가방은 MP3 플레이어의 불빛을 이리저리 비춘다. 배낭 책가방은 곧 지하철의 문을 수동으로 여는 손잡이가 있는 곳을 찾아 낸다. 배낭 책가방은 발로 차서 그 손잡이를 막아 놓은 보호판을 부순다. 배낭 책가방은 손잡이를 움직여 잠금 장치를 푼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 맞아요?"


 


배낭 책가방은 누군가 확인해 줄 사람을 찾아 물어 본다. 모두 배낭 책가방 쪽을 바라 보기는 하지만, 아무도 답해 주는 사람은 없다. 배낭 책가방은 두리번 거리다가 문에 가까운 쪽 구석에 앉아 있는 회사원을 본다. 배낭 책가방은 회사원에게 다시 물어 본다.


 


"이렇게 하면 문 열 수 있는 거 맞아요?"


 


회사원은 답을 하지 못하고 그저 어리둥절해 한다. 배낭 책가방은 답을 듣지 못하겠다고 생각하고,


 


"한 번 열어 보죠."


 


라고 말하면서, 바로 지하철 문을 열어 보려고 한다.


 


배낭 책가방은 지하철 문 오른쪽을 붙잡고 당긴다. 회사원은 멀뚱거리며 쳐다 보기만 한다. 배낭 책가방은 회사원의 손을 툭 치면서,


 


"같이 문 왼쪽도 좀 당겨 봐요."


 


라고 말한다. 회사원은 그제서야 좀 정신이 든 듯이,


 


", . 해보죠."


 


라고 말하며 급히 일어 서서 문 왼쪽으로 간다. 그 때문에 회사원은 무릎 위에 펼쳐두고 이리저리 살펴 보던 인쇄된 종이 뭉치들을 바닥에 떨어 뜨린다. 회사원은 이 때문에 "지하철 한 가운데에 키가 큰 편인 여자가 서 있다" 라는 부분까지를 읽은 것을 마지막으로 그 다음부터는 원고에 뭐라고 써 있는지 영영 보지 못한다. 떨어진 그 원고들은 넓게 퍼지며 하얗게 바닥에 깔리는가 싶더니, 곧 이 지하에 꽉 차 있는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배낭 책가방이 시키는 대로 맞추어 회사원은 문을 당긴다. 양쪽에서 두 사람이 문을 당기자 얼마지 않아 쉽게 지하철 문이 열린다. 문이 완전히 열리니, 문득 다시 비상전원이 들어 온다. 지하철 안과 승강장에 나가는 곳 표시를 하는 화살표들의 전등이 켜진다.


 


배낭 책가방은 한 발자국 발을 지하철 바깥에 디디고,


 


"내리세요."


 


라고 지하철 안에 탄 사람들에게 말한다. 멤피스 안경과 안나와 짧은 머리는 그제서야 눈을 뜨고 정신을 차린다. 사람들은 하나 둘 두리번 거리며 주섬주섬 자리를 챙겨 나오기 시작 한다.


 


 


19.


배낭 책가방과 같이 문을 열어 젖혔던 회사원은 엉겁결에 허둥거리다가 가장 먼저 승강장으로 내려 선다. 굳건히 정지한 승강장의 표면에 발을 내딪자 회사원은 전후상하좌우를 온몸으로 뚜렷이 느끼게 된다. 회사원은 계단 위로 발걸음을 내 딛는다. 회사원은 고개를 들어 지하철 역 바깥 방향을 바라 본다. 회사원은 성큼 성큼 걷기 시작한다. 햇빛이 들어 오는 지하철 출입구를 향해 점점 더 빨리 내 달린다.


 


회사원은 지하철 역 바깥에 나온다. 환승역 바깥에 펼쳐진 도심의 풍경은 어디에서든 볼 수 있는 철근 콘크리트의 건물 더미들과 그 사이사이를 오가는 한없이 많은 사람들이다. 지하의 세계와 그 곳에 가득차 있어 시속 수십 킬로미터의 속력으로 터널 이곳저곳에 실려 다니는 사람들의 무리와 세상 곳곳에 퍼져 있는 무수한 사연들이 어디에 있을 지 조차 모두 잊고 있는 땀에 젖은 대기만이 스모그와 섞여 있다.


 


약간 멍해 있던 회사원은 시계를 한 번 보더니 길거리를 감상하던 것을 멈춘다. 회사원은 행선지를 향해 걷기 시작 한다. 바쁘게 목적지로 걸어 가면서, 회사원은 오늘 환승역에서 벌어졌던 작은 사고를 되짚어 본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움직이고 엇갈리게 하는 철로를 따라 이 세상 구석 구석 많은 이야기들이 계속해서 이어진다. 그 이야기들이 세상을 돌면서 발착하고 도착할 때, 오늘은 그 가운데에 잠시 머물러 흩어졌던 영원의 단면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 2011, 서울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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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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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티븐 킹의 고양이가 아니라 곽재식의 귀뚜라미입니까. 새벽녘의 한바탕 꿈을 꾸고 일어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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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1.07.30 10:05 댓글 수정 삭제
    다른 작가를 말씀하셔서 말인데, 커트 보네거트 소설과 비슷한 분위기로 가는 구나 싶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아예, "귀뚜라미 이야기를 이러저러하자면 꼭 해야한다" 같은 말을 쓸 때는 쓰면서도 이런 거는 커트 보네거트 소설에서 이야기 갖다 붙일 때 쓰는 수법인데... 하면서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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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쑤우 11.07.30 11:11 댓글 수정 삭제

    와.. 그토록 다양하고 어찌보면 이해하기 어렵기도 한 소재를
    이렇게도 조화롭게 하나의 이야기에 녹여내시다니 곽재식님... ㅠ_ㅠ b
    이 이야기의 원고가 궁금하신 분은 다음의 주소를 참고하세요.
    http://djuna.cine21.com/xe/2452499

    희시무루 귀뚜라미를 매개체로 한 테마게임식 구성도 재밌네요.
    일본라이트노벨의 작법을 빌려 표현하자면 '7인과 1충(蟲)의 기묘한 인연'이라고 할까요?
    중국집 요리사의 솜씨를 알고 싶으면 '볶음밥'을 먹어 보듯이
    한 작가의 역량을 가늠하는 잣대로 '종말'은 정말 매력적인 소재인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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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1.07.31 11:37 댓글 수정 삭제
    격려 감사합니다.

    시간에 쫓기면서 이리저리 꿰어 다니느라 보다보면 부실한 부분도 있고 그렇습니다. 예를 들어서 주요 인물 중에는 "짧은 머리"의 이야기는 좀 더 강화되었어야 하고 처음에 쓴 "멤피스 안경" 이야기는 상대적으로 좀 과하게 긴 듯 합니다. 무엇보다 높은 굽 구두 이야기에서 가방 책가방 이야기로 연결된 대목은 무척 헐렁해 보이고 결말까지 이끄는 클라이막스 느낌이 약해서 기회가 된다면 좀 더 잘 고쳐 써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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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onad 11.08.01 02:50 댓글 수정 삭제
    와 정말 감동적으로 읽었습니다. 제 리퀘스트 부분도 행복하게 읽었고 특히 휴거가 물거품이 되었을 때 아찔했고 윤아가 나올 때는 폭소했습니다. 어쩜 이렇게 사고의 흐름(처럼 보이는 소설의 전개)이 유연하면서도 독창적이죠.
    좋은 경험 감사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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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1.08.01 08:57 댓글 수정 삭제
    감사합니다. 전체 분위기가 가라앉게 가는 듯 해서 System F 의 "Out of the Blue" 노래는 귀뚜라미 주제곡 처럼 전반에 깔아 넣는 방법으로 써 봤습니다. 말씀해 주신 "윤아" 부분 같은 경우에는 좀 더 내용을 추가해서 더 명확하게 설명을 집어 넣어도 좋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높은 구두 굽"에게 증거로 제시할 수 있는 증거라는 것이, 전체 세계관을 뒤흔드는 정말 돌발적인 사건을 보여줄 수는 없고, 높은 구두 굽의 불안한 정신 때문에 진짜인지, 착각인지 알쏭달쏭한 수준까지 밖에 안됩니다. 그래서 지하철 타고 지나가다가 창밖에 언뜻 보이는 헛것 같은 것 정도를 증거로 제시할 수 있을 뿐입니다. 이게 정말 전화 속에 들려오는 목소리가 제시한 증거인지, 점차 편집증이 심해져서 피폐해져 가는 높은 구두굽의 착각인지 애매해지고 있고, 어느 쪽이든 높은 구두굽은 꽤 괴로운 상황이 된다는 겁니다. 이런 이야기들은 좀 더 풀어서 설명하고 더 세세한 현장감 있는 묘사, 사건을 더 부연해도 좋았겠다고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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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유 11.08.16 18:05 댓글 수정 삭제
    메타메타소설인가요. 별 상관없어 보이는 이야기들이 높은 구두굽에게서 모이는 순간이 짜릿하네요. 리퀘스트를 보고 저걸로 어떻게 글을 쓰려나... 생각했는데 놀라울 정도로 매끄럽네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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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1.08.18 08:28 댓글 수정 삭제
    과분한 평 감사합니다. 정말 매끄럽다고 하기에는 결말 부분과 높은 구두굽의 최후에 대한 설명에서 약간 부실했다고 생각 합니다. 넉넉하게 시간을 갖고 조금더 고쳐 쓸 여지는 상당히 있다고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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