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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문제의 유령의 집은 호수 저편을 돌아간 쪽에 있었다. 차에서 내려서 나는 한숨을 한번 쉬고는 유령의 집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한 십여분은 걸어야 할만큼 멀어 보였다. 애초의 계획대로라면 승희와 함께 와서 같이 걷고 있어야 했다. 금요일 오전이니, 맨날 출근하는 보안연구소 대신 여기에 와서 승희와 함께 같이 천천히 이 "유령의 집"이라는 곳을 둘러본 뒤에, 점심이나 한끼 먹고 오후에 퇴근이랍시고 돌아가면 정말 좋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면 금, 토, 일. 3일이나 노는 느낌이 날텐데. 그리고 애써 고민해서 어디 놀러가려고 하지 않아도, 한적한 교외로 잠시 쉬는 여행도 하는 셈이 될텐데.

그렇지만 승희는 오늘 아침에 갑자기,

"미안한데 오늘 나 좀 힘들겠어"

하고 짧게 연락했고, 나는 대체 왜 이러나 궁리하며 세걸음 마다 한번씩 "미안한데 오늘 나 좀 힘들겠어" 뒤에 숨어 있는 사연에 대해 추측하는 생각을 했다.

호수 주변에는 아직 아침의 물안개가 가시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날씨가 시원했기 때문에 그 피어오른 안개는 걸을 때마다 차갑고 신선하게 와닿는 느낌이었다. 호수는 저수지로 쓰기 위해 애초에 만든 것 아닌가 싶은 크기 였다. 그래서 건너편이 빤히 보이면서도 둘레는 한참 걷는 산책에 적당한 크기 였다. 호숫가를 따라 우거진 버드나무 잎 아래로 유령의 집을 향해 걸어가면서 보니, 그 나무 사이사이로 멀리 푸른 산들이 보이기도 했다. 호숫가 있는 곳은 별로 깊이 들어 온 산 속도 아니었는데 높은 나무가 가득한 숲으로 둘러 쌓여 있어서 썩 운치있는 광경이었다. 역시 승희와 함께 와야 마땅했다는 생각이 다시 들었다.

애초에 "유령의 집"이라는 이곳을 짚어낸 사람부터가 바로 승희였다. 바로 승희가 인터넷에서 검색하면 나오는 하고 많은 "유령이 나오는 곳"과 "흉가"들 중에 이 호숫가의 집을 골랐다.

"이 정도 거리면 서울에서 갔다 오기도 가깝고. 그래도 또 반대로 너무 가까우면 하루 시간을 다 쓰는 거리가 안될 수도 있잖아. 그런데 그러면 오전에 갔다가 오후에는 사무실로 출근하라 그럴거니까 딱 이정도 거리가 좋지. 하루 몽땅 다 일 안하고 떼먹게. 또 오는 길에 이쪽으로 빠지면, 뭐 맛있는 거 먹을데도 많고 하니까. 여행 갔다오는 것처럼 갔다오면 재밌겠다. 좋겠다. 넌 출근 안하고 이런데 가면서 하루 때우고... 부럽다."
"야, 이런 거 하루 갔다오면 괜히 남들만 내가 논다고 생각하지. 그냥 하루 날리고 날린 만큼 일 밀려서 또 괜히 주말에 출근하고 야근하고 그래야 된다고. 이건 논다는 소리만 듣고, 일은 일대로 밀리고. 하나도 안좋아. 왜 나한테 '사보' 담당 이런거 왜 맡긴거지? 아니 그것보다 도대체 우리 회사 사보 보는 사람이 누가 있다고 사보라는 걸 왜만드는거야?"
"야, 나같으면 좋다고 가겠다. 회사 돈으로 여행도 하고, 밥도 먹고, 하루 혼자 놀고. 좋지 않냐?"
"이런 걸 하려면 사보 만드는 부서를 하나 정해서 그 부서에서 사보를 계속 담당하도록 해야지, 이 부서 저 부서 달마다 돌아가면서 만드니까 만들 때마다 이 때 다르고 저 때 다르고, 매번 마지막 날에 벼락치기로 몰아서 만들고 엉망이잖아."
"좀 그만 투덜거려라. 부서 사보 담당 하면 수당도 좀 주잖아."
"그거 수당 얼마라고."
"얼만데?"
"탐나고 부러우면 이번 수당 너한테 다 줄테니까 니가 갔다 오든지,"
"정말?"
"그래. 아, 대신 가는 건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주라."

그렇게 저렇게 이야기하던 중에, 결국 사보에 실을 기사 취재를 위하여 승희는 하루를 휴가 내고 동행하기로 약속을 했고, 나는 그녀에게 하루 길동무를 해준 대가로 이번달 사보 수당을 주기로 했던 것이다. 

그녀는 신나는 목소리로,

"너 영광인줄 알아야돼. 내가 어디 아무하고나 같이 여행가고 그러는 줄 알아."

라고 말하기 까지 했다. 영광까지는 아니었으나 흐린 날씨에도 얼굴이 좀 환해질만한 반사광 정도는 되는 이야기이기는 했다. 도대체 왜 사보에 있는 "그곳에 가고 싶다"란의 "여름 납량특집"을 위해 내가 유령의 집을 찾아 가느라 헤매야 하는 지 괴로워할 시간이 아니었던가? 그 시간에 적어도 그간 자주 어울려 다녔던 20대의 여직원과 잡담이라도 나누며 하루를 보낼 수 있다면 충분히 경쾌한 상황이었다.

어제 아침까지만 해도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왜 세상의 수많은 여행 안내글의 제목은 그렇게도 많이 "그곳에 가고 싶다"로 붙이는 것이는지, 그렇게 제목을 붙인 사람은 도대체 이제는 어디서 베낀 것인지 알지도 못한 채 그런 제목을 붙였으면서 꽤 그럴듯한 제목을 스스로 달았다고 "이정도면 무난하지"하고 빙그레 웃음까지 지었겠지. 그렇게 상상하면서 대상을 특정할 수 없는 괴이한 분노감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런데, 어제 저녁에는 그런 텁텁한 분노감 대신에 어디에 가서 뭘하고 놀까, 돌아오는 길에 어디 잠깐 새서 영화라도 한 편 볼까 하는 기대감을 품을 수 있었다. 심지어, 나는 이제 이런식으로 계속 같이 다니다가는 언젠가는 정들어서 연인 관계로 발전할 지도 모른다 하는 상상도 잠깐하고, 뒤이어, 승희는 내가 원래부터 좋아하는 용모의 규수는 아니지만 그래도 객관적으로 보면 꽤 괜찮은 사람이라는 생각도 잠깐하고, 뭔 쓸데 없는 상상을 길게도 하냐 싶어 혼자 부끄러워 하기도 했다.

그러나 승희는 오늘 아침에 갑자기 "미안한데 나 오늘 좀 힘들겠어"라고 했고, 나는 이렇게 금요일 아침 유령의 집이 있는 호숫가에 있고, 버드나무의 드리운 가지 사이로 조용히 아주 작게 들리우는 물결 소리가 들리고, 그 사이를 걷다가 왠갖 잡념 속에 빠지고, 또한 그러다 문득문득 다시 "왜 사보 기사 제목을 그냥 생각도 없이 '그곳에 가고 싶다'고 붙인거지?"라고 분노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녀에게 문자 메시지를 하나 보내 본다.

"무슨 일이야? 큰 일 있는 건 아니지?"

나는 걸음걸음 옮길 때 마다 전화에 답신이 오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보았다. 그냥 전화기가 잠깐 덜렁 거린 것을 전화기의 진동이 느껴진다고 생각해서 전화를 꺼내 보고, 그저 현재 시각만을 표시하고 있는 무심한 전화 화면을 보고 집어 던지듯이 전화를 다시 돌려 놓기도 했다.

그렇게 아무런 답도 오지 않은 전화를 괜히 착각하며 꺼내 보고 넣는 것을 네 번 반복하고 나서야, 나는 "유령의 집" 앞에 도착했다. 도착해 보니, 그 집에는 "전신 전화 박 관"이라는 글씨가 문 위에 한 글자에 판자 하나씩으로 붙어 있었다. 아마 전신전화박물관이겠지. "물"자는 떨어지고 없었다.

"사보 취재 오신 분이죠? 들어 오세요."

집에서는 집을 돌봐주는 노인이 나를 맞이 했다. 노인은 덩치 좋고 느릿느릿 말하는 사람으로 "유령의 집"을 매일 방문하는 사람치고는 아주 밝아 보였다. 아마도 아무도 찾아 오지도 않는 이런 쇠락한 빈집을 최소한의 수준으로 유지해주는 것만으로 적당한 월급을 받을 수 있는 자신의 일거리에 무척 만족했기 때문아니겠는가?

"여기가 원래는 전신 전화 박물관이었나 보죠?"
"예. 맞습니다. 왜 그런 거 있잖습니까. 이, 평생 이것저것 수집하고 모으고 이런거 좋아하면서 돈 걱정 안하고 넉넉하게 산 사람들이 늘그막에 되면 뭐라고 하나... 환원. 이렇게 세상에 뭘 남겨 보려고 재산 다 털어서 무슨 무슨 '박물관'이라면서 자기가 갖고 있는 거 늘어 놓는데. 뭐 그런 식으로 하려고 이 터에다가 이렇게 집을 지었댑니다.

처음에는 그 말하신대로 여기가 전신전화박물관으로 하려고 했는데. 막상 한 번 문도 제대로 못 열어 보고. 이렇게 온통 다 만들어 놓고 치장 다 해놓고 한 번 제대로 문도 못 열어 보고. 다 그냥 때려 치웠다고 합니다. 제대로 문도 한 번 못 열어 보고."

노인은 문을 활짝 열고 선 채로 나에게 들어오라며 그렇게 말했다.

집안으로 들어서면서 보니 노인 뒤에는 나보다 먼저 온 사람이 있었다. 20대 후반 30대 초반쯤 되어 보이는 여자 였는데, 나이와 현대라는 시대에 어울리지 않게도 머리에 비녀를 꽂고 쪽지고 있었다. 이 사람은 무슨 묘한 수를 부렸는 지 얼굴 피부가 조금의 잡티도 없이 새로산 탁구공처럼 반질반질했다.

집안을 돌아보고 있던 이 사람은 친절한 미소를 얼굴에 가득 드리운 채로 나에게 말했다.

"안녕하세요. 저는 퇴마사, 김혜란 입니다."

한산 모시 센터 웹사이트에서 온라인으로 구매한 것으로 보이는 흰 빛의 개량 한복 차림이 "퇴마사"라는 말을 할 때 마다 배경음악처럼 사각거리는 듯 하였다.

"예? 퇴마사요?"

그렇게 되묻는데, 갑자기 등줄기가 찌릿하였다. 퇴마사를 만난 전율감 때문인 줄 알 뻔도 했으나, 실은 정말로 전화가 진동으로 문자 메시지가 왔음을 알려 왔기 때문이었다. 그렇지, 진짜 전화가 울리면 이 정도로 울리지. 승희가 보낸 것이었다. 전화를 꺼내 보니 이렇게 씌여 있었다.

" 나도 네가 진짜 좋은 친구인거 알고, 정말 미안한데. 너 이러는 거 솔직히 좀 부담스러워. 미안해."



2.
노인은,

"이 쪽입니다."

하고 우리를 유령에 대한 것을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으로 안내했다. 그렇지만 나는 두 발을 그 방향으로 차례로 옮기고 있을 뿐, 유령이라든가 전신 전화라든가 "이 쪽"이라는 방향에는 아무런 생각을 기울이지 않고 있었다. 승희가 보낸 문자 메시지가 전화 밖으로 튀어나와 턱을 한 대 올려 치는 느낌이었던 것이다.

뭐가 갑자기 미안하고, 뭐가 부담스럽다는 건가? "너 이러는 거 솔직히 좀 부답스럽다"니. 내가 이러긴 뭘 "이런" 다는 건가. 호숫가의 호젓한 곳으로 놀러 가면 좋겠다는 말을 꺼낸 것도 너고, 내가 같이 가자고 했을 때 바로 찬성 하기도 하지 않았던가. 뭔가? 이게 도대체 왜 이러는 건가. 이 녀석은 지금 출퇴근 시간에 좀 밝은 웃는 얼굴로 몇 번 아는 척 했다고 해서 자기를 좋아할 거라고 착각하고 데이트 신청을 한 과도하게 자신감을 가진 남자를 차는 상황에 어울리는 대사를 했다.

나는 차일 상황이 아니었다. 축구공이나, 럭비공이나, 길가를 뒹구는 깡통이나, 같이 숙제를 몇 번 한 것이 전부였던 아리따운 후배 여학생에게 과욕을 부린 선배 남학생 등등이 차임을 당하는 대상이다. 나는 그런 것이 아니었다. 이건 축구선수가 축구공을 잘못 차는 정도가 아니라, 킥오프 전에 갑자기 발을 대는 것...도 아니라, 축구 경기를 하다 말고 갑자기 관중석으로 뛰어올라 파도타기를 시작시키려는 관중 한 명에게 옆차기를 하는 형국 아닌가?

"선생님으로부터 영감이 느껴집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계단을 오르는데, 김혜란이라는 이 사람은 대뜸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예? 영감이요?"

김혜란은 나를 보고 다시 웃음을 지어 보인다. 웃음 자체는 그 모습만 따로 사진을 찍어서 지금 이곳이 아니고, "영감" 같은 늙수레한 어감이 풍기는 단어와 관계 없이 본다면 무척 좋아 보였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상황이 아니었다.

"여자 문제 시지요? 여자 문제에 대한 고민 때문에 나쁜 기운이 지금 많이 끼었습니다."

김혜란은 그렇게 말했다. 내가 답을 하려는데, 김혜란은 신비로운 분위기를 풍겨 보고자, "훗" 하고 소리까지 어색하게 웃음을 웃고는 다시 고개를 돌려 계단을 올라 갔다. 나는 김혜란이 참으로 얼토당토 않은 수작으로 나를 들쑤시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여자 문제라고 하기에도 적절하지 않은 문제였다. 굳이 따지자면 이것은 "친구 문제"에 가깝다. 승희는 그냥 같이 몇 번 밥먹으러 다니고 영화 몇 번 같이 보러 다닌 사람일 뿐이었다. 남자인 친구랑 영화보러 가면 좀 쓸쓸할 데도 있고, 갑자기 프랑스 요리 종류가 먹고 싶을 때 남자랑 가는 것 보다는 여자랑 가는 게 좀 그럴듯하다 싶을 때 같이 간 사람. 그것으로 끝이었다.

물론 영화표 값이나 식사 값은 주로 내가 내곤 했지만 그거야 승희 보다 내가 연봉이 높기에 그저 그냥 동료 간의 호의로 충분히 이해될만한 것이었다. 거기에 승희가 너무나 소중하고 받들어 모실만해서 내가 이런 저런 걸 자꾸 갖다 바친다는 그런 생각은 전혀 없었다. 답답해 빠진 김학근 과장 같은 녀석이야 "승희 정도면 미모로는 어디 가서 꿀릴 사람이 아니지"하고 시시덕 거리며 괴상한 말을 한 적이 있기는 하지만, 나는 승희에게 별로 아름다움을 느끼는 부분도 없었다. 대체 뭐가 어째서 "이렇게 부담스럽게 한다"는 건가?

김혜란이 내가 갑자기 얼굴이 뻘개진 것을 보고 "여자 문제"라고 짚은 것은 그냥 원래 그렇게만 말하면 다 되기 때문일 것이다. 남자에게 문제가 있다면 여자문제 아니면 돈문제 아니겠는가. 진짜 문제는 둘 중에 어느 문제가 더 문제냐 하는 점이리라. 그나마 보통 두 문제는 다 어느 정도 수준으로는 존재하기 마려니다. 돈문제가 걱정인 사람이라도 여자문제에 조금도 신경거리가 안될 경우는 드물잖아? 백만장자이지만 망해가는 결혼 때문에 고생하는 사나이는 여자문제가 고민거리라고 하겠지. 하지만 그런 사람이라도 자기 재산에 관한 문제가 전혀 없겠는가? 누구나 여자문제나 돈문제는 둘 다 정도의 차이지 언제나 고민 거리인 것 아닌가?

"여기는 어떻게 오신 겁니까?"

내가 묻자 김혜란은 이렇게 답했다.

"케이블TV의 여름 납량특집 방송을 준비하느라 사전 답사 차 왔습니다. 확실히 기운이 센 집이고, 터 자체도 귀기가 어리기에 좋게 잡혀 있네요."

귀기 같은 소리 하네. 분명히 이 김혜란이라는 사람은 납량특집 방송에 섭외된 다음에 진짜 촬영이 시작 되었을 때 신기한 소리를 많이하기 위해서 미리미리 뒷조사를 해 놓으려고 온 것임에 틀림 없었다. 이 집에 얽혀 있는 사연이나 집 구석구석에 숨겨진 것들을 미리 보아두고 갔다가, 방송 촬영을 할 때 또, "이 쪽에서 귀기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따위의 대사를 하면서 미리 봐 둔 문뒤편에 새겨져 있는 낙서 따위를 찾아내는 척 하겠지.

"여기 입니다. 바로 여기가 귀신이 드는 자리랍니다."

노인이 안내한 곳은 2층 호수쪽 방의 창가쪽 이었다. 거기에는 지난 겨울 창바깥에서 잘못 들이친 낙엽 조각이 지저분하게 뒹굴고 있었다. 그만큼 사람이 가까이 가지 않았다는 뜻이었다. 거기에는 아주 간단한 설계로 되어 있는 구식 전신기가 놓여 있는 탁자 하나가 있었다. 귀신이나 도깨비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왜 여기가 귀신 자리가 된 겁니까? 그냥 옛날 전신기만 하나 있는 거 뿐인데."
"어휴, 역시 연구소에서 일하시는 학자 분이시라서 바로 알아 보시네요. 이게 전신기라는 건데. 저는 어떻게 하는 건지 모르는데, 하여간 이게 전기도 안통하는데 자주 저절로 움직인답니다. 그게 귀신이 소식을 전하는 거라고 하네요."

보안연구소 직원이라고 해서 구식 전신기를 알아보는 것은 아무런 이유가 되지 않았다. 이걸 알아보는 것은 내가 군대에서 통신병 교육을 받을 때 비슷한 것을 봤기 때문일 뿐이었다.

"귀신이 전신기로 소식을 전해요?"
"이게 전신기가 딸깍딸깍 움직이면서 소리 내는 걸 암호처럼 신호로 해서 이야기 하는 거라잖아요? 그런데 그 움직이는 걸 해석해 보면 '피를 다오'라는 뜻이 된다고 하더라고요."
"그럼 귀신이 전신에 사용하는 모스 부호를 외워서 그대로 전신기를 움직인다는 겁니까?"
"모스 부호...요? 그게 뭡니까?"

통신병일 때는 아직까지 연애라고는 한 번도 못해 본 때였고 - 물론 지금도 딱 한 명의 애인이 있었을 뿐이지만 - 그때는 애인에게 편지라도 한 통 받는 놈이 그렇게 부러워 보였다. "너는 아무도 편지 보내주는 사람 없냐?"라고 누가 물으면 나는 무슨 큰 흉이나 들킨 것 같이 당황하기도 했지. 그 때 전신기와 통신에 사용하는 모스 부호를 외울 때는 문득문득 나는 영영 어떤 여자도 사귀지 못하고 제대하고 나서도 마치 이 세상 전체가 점차 거대한 군대처럼 나를 휘감아 버릴지 모른다는 악몽을 떠올리기도 했다.

그때 문득 김혜란이 말했다.

"어? 언니. 언니 거기서 왜 그러고 있어."

김혜란은 전신기가 있는 쪽 허공을 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는 언니야 말로 도대체 왜 그러세요? 노인이 정색을 하며 김혜란에게 물었다.

"퇴마사님,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뭐가 보이십니까."
"여기에 젊은 여자. 젊은 여자 귀신이 서 있어요. 혼인 못한 귀신이네. 해를 안 당하려면 퇴마진을 그려두는 게 좋을 것 같기도 합니다."

여자 귀신이라는 말을 듣고 노인은 주춤하며 두 발걸음 물러 섰다. 바라 보니 무척 놀란 얼굴이 되었다.

"아이고. 대단하십니다. 정말 딱 맞추시네. 이게 이 저수지 전설이 바로, 그겁니다. 저도 잘은 모르는데, 정조 때인가 영조 때인고 하여간 조선시대에 여기서 이게 어떻게 일이 꼬여서 꽤 큰 부자집 규수가 젊은 나이에 여기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서 그 한이 맺혀서 그때부터 계속 여기서 귀신이 나온다고 하더라고요. 이 전신 전화 박물관 지으신 분은 그걸 모르고 이 터에다가 박물관을 지어서, 지금은 여기에서 귀신이 '피를 다오' '피를 다오' 한다든가 '피가 모자라' '피가 모자라' 한다든가 하는 겁니다."

피가 모자라는 옛날에 유명한 헤비메탈 음악 거꾸로 재생하면 들린다는 소리 아니었나? 뭘 이렇게 엉뚱한 이야기거리가 덕지덕지 섞였는지. 김혜란의 호들갑에 나는 좀 겨루고 싶은 마음이 되어, 넌지시 농담인냥 말했다.

"이거 납량특집 분위기 살아나네요. 역시 한국 귀신이라면 처녀 귀신 아니겠습니까. 여기가 동유럽 성터 였으면 흡혈귀 나오는 게 제맛일텐데... 배경이 한국이라면 누구나 다 처녀 귀신이 어울린다고 볼테니까. 이거 딱 맞아 떨어지네요. 와, 분위기 좋네."

김혜란은 그저 한국에서 가장 흔히 상상되는 귀신을 고른 것 뿐이며, 그게 역시 여느 흔한 "귀신 전설" 답게 맞아 떨어진 것 아닌가? 나는 어떻게 김혜란을 화나게 부추길 방법은 없을까 잠깐 궁리하기도 했다. 분명하지는 않지만, 그렇게 가벼운 농담의 형태로 모르는 척 말하지만 상대방이 기분 나쁘기를 기대하는 마음은, 어째  괜히 반항하며 나를 봐 주길 바라는 별 볼 일 없는 어린이 같다는 생각도 잠시 들었다. 그러고 보니 약간량만큼 울적해졌다.

그런데, 그 때 딸깍거리는 소리를 내며 정말로 그 낡은 전신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저 허공에 늘어뜨려져 있는 전선 두가닥만 연결되어 있을 뿐인 전신기가, 어디서 전기가 들어오지도 않는 채로 긴 시간 거기에서 먼지를 뒤집어 쓰고 있던 전신기가 그 노인의 말대로 혼자 움직인 것이다.

"아이고, 참말이네. 진짜 참말이네."

노인은 자신도 정말로 이 "귀신이 나타나는 현상"을 본 것은 처음인지 그렇게 말하며 상기된 표정을 지었다. 나도 한참을 말을 못하고 그저 전신기를 노려 보았다.

"아이고, 처녀가 울고 있네 울고 있어."

김혜란은 흥겹게 맞장구를 치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그러나 김혜란은 즐거워서 웃는게 아니라 더욱 흥이 올라 그 귀신 분위기에 고조되게 흐느껴 우는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김혜란에게 점차 제압되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어떻게 반격을 해볼 틈을 찾아 보려고 했는데 갈수록 김혜란이 그 하얀 얼굴로 이상한 소리를 내는 것이 점점 스산해서 좋은 방법을 떠올리기 좋지 않았다.

"돈 쓰 ..."

나는 그 전신기가 움직이는 소리를 한 번 찬찬히 들어 보기 시작했다. 정말로 전신기 신호 같은 짧은 신호와 긴 신호가 번갈아 가며 나오는 것이었다. 길게 통하는 전기, 짧게 통하는 전기. 전기가 통했다 끊어졌다는 하는 것이 규칙을 이루면서 계속 반복되어 의미를 가진 신호를 이루고 있었다. 그 소리는 무척 빠르게 엉켜 지나가서 판별하기는 쉽지 않았다.

나는 전화기와 함께 전시되어 있는 전화메모용 메모지를 하나 떼다가 거기에 이 낡은 전신기에서 나오는 신호를 기록해 보기 시작했다. 10 WPM 은 될법한 꽤나 빠른 속도로 같은 신호가 계속 반복되고 있었다. 나는 메모지에 선과 점으로 신호를 기록했다.

옆에서 우는 소리를 즐겁게 내며 이 광경을 보며 춤이라도 한 바탕 출 기세이던 김혜란은 그걸 보더니, 갑자기,

"지금 우리 한민족의 전통적인 지혜의 힘을 빌려서 이 마기를 느껴 보시려는 거죠? 역시 우리 민족의 한글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과학적인 글자죠. 이 안에는 스티븐 호킹도 모르는 우주의 이치가 들어가 있어요. 이런 정도만 해도 마기를 빨아들이기에는 괜찮아 보이네요. 이 선으로 되어 있는 것은 천지인 중에 지를 나타내고 이 점으로 되어 있는 것은 천을 나타내고. 바로 이 음양의 반복이 우주의 이치인데..."

라고 주절거리기 시작하였다. 전신 신호를 표기하는 선과 점 부호를 보고 김혜란은 그게 한글 "ㅡ" 모음과 아래아 모음이라고 생각하고 내가 무슨 주술적인 부적을 그리고 있기라도 하다고 생각한 것이지 싶었다. 그걸 또 노인은 심각한 표정으로 듣고 있었다.

"좀 조용히 좀 해 보세요."

나는 이제 잘 기억이 나지 않는 모스 부호를 더듬어 본다.

"돈 쓰, 돈 돈 쓰, 돈 돈 돈 쓰..."

나는 내가 기록해 놓은 모스 부호 신호를 한글로 옮겨 보았다.

"ㅍ, ㅣ, ㅈ, ㅗ."
"피조?"
"피 죠? 피를 달라는 거네. 아이고. 아이고."

노인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거의 주저 앉을 듯이 뒷걸음질을 쳤다.

"정말로 귀신이 있네요. 여기 귀신이 있어서 우리를 보고 피를 달라고 하네요. 이게 진짜네. 정말 꼭 그렇네."

신호는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계속 반복 되었다. 몇번 반복되다가 다시 또 멈추기도 했지만, 계속 같흔 신호를 계속 보내며 짤깍 짤깍 움직이고 있었다. 피조. 피조. 피조.

김혜란은 이제 거의 종신고용 정교수로 대학에 초빙되어 간다는 말을 하며 상사에게 사표를 내미는 기업 연구원과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 눈에는 다 보입니다. 젊은 처녀가 계속 울면서 피를 달라고 피가 모자라니 피를 내어 달라고 하고 있어요. 바로 저기."

김혜란은 그렇게 하면서 창 바깥 방향을 가리키며 거의 음악적인 소리까지 한 번 내었다. 나는 정확히 뭔지는 모르지만 당하는 느낌이었다. 내가 말했다.

"정말로 피를 달라는 말 같으면 정확하게 '피를 주세요' 라든가 '피를 내어 놓아라' 라고 하겠죠. 하다 못해, '피를 줘' 라든가 '피 줘'라고 해야 맞겠죠. 그런데 이건 '피조' 아닙니까. 그냥 그렇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이건 다른 말 아닙니까?"

노인이 말했다.

"'피조'가 피를 달라는 뜻 말고 또 무슨 뜻이 될 수 있다는 거요?"
"뭐, 곡식 중에 피 라는 곡식이 있잖아요. 피하고 조를 말하는 걸 수도 있겠죠."
"갑자기 곡식 이야기는 왜 합니까?"
"그러면 갑자기 피 달라는 이야기는 왜 하나요."
"귀신이잖아요."
"귀신이 무슨 적십자 봉사단입니까? 피를 왜 구해요."
"그래도 왜 영화 같은 데 보면 귀신이 피 빨아 먹잖아요."
"그건 흡혈귀 입니다. 동유럽 쪽 전설 입니다."
"그래도 우리나라 TV에도 보면 처녀 귀신도 피 빨아 먹던데..."
"그러니까 귀신이 뭐하러 피를 빨아 먹냐고요. 무슨 보신에 좋아서 건강식품으로 동물 피 마시고 뭐 이런 것도 아닌데."
"자꾸 그러시면 부정 탑니다."
"아니면, 아니면, 뭔가 누가 만들었다는 뜻으로 '피조'라고 한 걸 수도 있죠. 왜 '피조물'이라는 단어도 있잖습니까. 아니면, 월드컵 같은 데서 조추첨 할 때 A조, B조, C조, D조... 이렇게 나가서 P조를 말하는 걸 수도 있고요."
"부정 타요. 그런 말씀 자꾸하지 마십쇼."

부정 타는 게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또 갑자기 전신기를 향해 무수히 절을 하는 김혜란을 보고 있자니, 나는 오늘 하루 이미 부정이란 것을 이미 활활 태우고 있는 것 같았다.

"뭐, 사실 곡식이니 혈액이니 다 엉뚱한 소리고 그냥 우연이겠죠. '피조'가 무슨 긴 말도 아니고, 그냥 우연히 이런 신호가 들어온 것 아니겠습니까?"
"저절로 전기가 들어오는 그런 우연이 어딨나?"
"구름 모이고 번개 치면 나무 박살내고 집 태우고 이런 전기도 콱콱 떨어지잖아요. 이 정도 전신기 움직이는 작은 전기야 어떻게 하다 보면 저절로 생길 수도 있겠죠. 그게 공교롭게 '피조'라는 신호로 들리는 거고."
"어떻게요? 어떻게. 자꾸 그런 말씀 하지 마십쇼. 진짜 부정탑니다."

그때 절을 하고 있던 김혜란이 노인에게 말했다.

"퇴마 의식을 해서 이 처녀의 원한을 달래 줘야 합니다."

그 말을 듣자 김혜란을 보고 따졌다.

"그 퇴마 의식이라는 건 얼마짜리인데요?"
"선생님. 지금 돈이 얼마냐는게 중요한게 아니예요. 이 여자의 한을 풀어야 된다고요."

김혜란은 일어나 나를 똑바로 보았다. 그리고 이렇게 호령하였다.

"지금 선생님이 여자문제 때문에 마가 끼인 것도, 다 푼돈을 아까워하는 마가 끼인거야. 지금 여자에게 쓴 영화값, 밥값 그런 걸 아까워해서 뭘 하겠다는 건지."
"예? 예?"

나는 지금 승희와 함께 다니면서 영화보고 밥 먹고 한다고 돈 쓴 것이 아깝다는 게 아니었다. 나는 그저, 그러고 지내다가 갑자기 승희가 나보고 "부담스럽다니" 어쩌니 하니까 그게 극히 당혹스럽다는 것 뿐이었다. 도대체 자꾸 왜 이렇게 엉뚱하게 찔러대는 건지.

"이게 처녀 귀신 원한과는 상관이 없어요. 이 전신기 기계하고 전기가 맞아 떨어져서 그렇다니까요. 다른 기계로 한 번 비교해 보면 알겠죠."

나는 호흡이 거칠어져 있었다. 전신 전화 박물관 이곳저곳을 뒤적거려서 나는 지금 이 전신기보다 더 낡고 더 단순해 보이는 전신기를 하나 더 찾아 냈다.

"이 전신기는 여기 보면 코일부분하고 동작부분 설계가 안좋아서 신호가 빨리 바뀌면 그걸 못잡아 내는 겁니다. 이건 10 WPM 정도 되는 신호는 못 잡거든요. 이걸 저 전신기 대신에 갖다 놓으면 전혀 엉뚱하게 들릴 겁니다."

나는 구형 전신기를 원래 있던 전신기 대신에 갖다 놓았다. 그리고 원래 있던 전신기의 전선을 풀어 내고 구형 전신기에 연결했다.

잠시 시간이 흐르자 구형 전신기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철컥거리는 소리를 냈다. 아까 보다 훨씬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나는 메모지에 다시 그 신호를 받아 적고 확인해 보았다.

"돈, 쓰, 돈, 돈 쓰..."

외우고 있던 모스 부호를 다시 떠올려서 다시 신호를 따져 보았다.

"피..."
"피?"
"피조."
"또 피조예요? 또? 이거 귀신 맞네. 진짜 귀신이네."

영감님은 감탄하여 눈을 크게 치떴다. 나는 두번 세번 네번 계속 신호를 되짚어 보기만 했다.

"이게 전신기 성능을 고려해서 신호가 저절로 계속 막 바뀌네. 신기하네..."
"신기한게 아니라, 마기가 있는 겁니다. 이거 퇴마의식을 해서 마기를 쫓아서 처녀의 한을 풀어야 되는 거예요."

김혜란이 자꾸 옆에서 장사하는 말을 하자 나는 더 타오르는 느낌이 되었다. 뭐가 타오르는 지 모르겠다. 굳이 말하자면 부정이라는 게 타는 지도 모른다. 뭐 그 타는게 이 타는 건 아니겠지만. 갑자기 퇴마 어쩌고 하는 건 뭐 말이 맞는가?

"다른 기계로 한 번 보죠."

나는 다시 전신전화박물관을 뒤졌다. 이번에는 20세기 초에 쓰이던 구형 텔레타이프 기계를 찾아냈다. 미국산 기계였는데 전신 신호가 들어오면 거기에 맞는 알파벳을 자동으로 종이에 인쇄해 주는 기계였다. 귀찮게 부호를 사람이 외우고 있으면서 따질 필요가 없이 바로 읽을 수 있게 글자로 찍어 주니까 더 쉽게 알아 볼 수 있지 싶었다.

"지금 이게 한글로 '피조' '피조'라고 신호를 보내고 있거든요. 그게 지금 우리가 보니까 이게 딱 '피를 달라'는 발음하고 비슷해서 이상해 보이지, 영어나 다른 언어로 보면 아주 전혀 말도 안되는 신호일거라고요. 하다못해 이 전신기들이 사용된 백몇십년 전만해도 '피를 달라'는 발음을 '피조'처럼은 안했겠죠. 말 발음이 좀 달랐을테니까. 그러니까, 이건 의미 없는 신호라니까요."

그러나 막상 텔레타이프를 달아 놓자, 텔레타이프에서는 선명하게 알파벳, P, I, J, O가 같이 찍혀져 나왔다.

"피조네. 피조. 피조 맞네! 선생님, 선생님 부디 저좀 도와 주십시오."

노인은 알파벳 P, I, J, O를 보더니 바로 옆에 있던 김혜란의 손을 붙잡고 고개를 숙이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계속 반복해서 인쇄되어 나오는 PIJOPIJOPIJO 를 보다가, 확 "핫"하고 한 번 웃어 보였다. 

"이게 PIJO라고 나오는 게 사실 더 말안되는 거라고요. 이 텔레타이프 기계는 모스 부호 체계로 신호를 주고 받는게 아니라 보도 코드 체계로 신호를 주고 받거든요. 그런데, 어떻게 그 코드가 이렇게 저절로 변환이 되겠어요."
"그러니까 이거는 서양의 과학이 아니라, 동양의 철학으로 이해를 해야 하는 거죠. 머리로 생각하지 말고 몸으로 마기를 느끼세요."

김혜란은 나를 보고 안타깝다는 동작으로 혀를 찼다. 김혜란은 그런 안타까움의 감정을 나에게 꺼내 어 일부러 펼쳐 보이면서 자신이 나보다 더 높은 경지에 있음을 과시하고 내가 열등감을 느끼도록 유도하고 있다고 선언하는 것이었다.

"이게 무슨 동양 서양이 왜 나와요. 전신기라는 거 자체가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들어온건데. 아까 뭐 조선시대 때 처녀 귀신이라고 하지 않았어요? 그런데 조선시대 처녀 귀신이 뭐 아마추어 무선 동호회라도 찾아 다녔습니까? 어떻게 모스 부호를 알아요. 조선시대 처녀 귀신이 기다리고 기다려서 미군 부대에서 통신병으로 근무하면서 안익혔으면 보도 코드는 또 어떻게 알았겠어요. 그리고 그걸 또 한글 로마자 표기법에 딱 맞게 어떻게 또 피조라고 표시하겠어요. 이게 더 이상하다니까요."
"그 이상한 게 바로 마라는 거예요. 마."
"아, 참나..."

나는 말하기를 멈추고 다른 기계를 찾아서 연결해 보았다. 이번에는 머레이 코드를 사용하는 텔레타이프였는데, 역시 원래 전신기 자리에 두고 전선을 연결하자 잠시 후에 "PIJO"라고 인쇄되어 나오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모스 부호, 보도 코드, 머레이 코드 세 가지 부호 체계로 저절로 변환해 가면서 "피조"라고 신호가 나오고 있는 것이다. 

"이거 아예 이 박물관에 있는 기계들이 전부다 다 이상이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이곳저곳을 뒤지며 다른 기계들을 찾다가 80년대초에 나온 컴퓨터식 한글 텔렉스를 찾아냈다. 이 기계는 텔레타이프랑 같은 기능을 하는 장치였는데 전기식, 기계식 장치가 아니라 컴퓨터가 신호를 해석하고 인쇄하도록 되어 있는 더 빠르고 다양한 기능을 가진 장치였다. 물론 한글도 지원하는 기계 였다.

"이거는 한글이 나오는 건데, 이 기계는 80년대에 잠깐 쓰이던 7비트 완성형 코드로 한글을 표현하게 되어 있거든요."

전신기 자리에 한글 텔렉스를 놓고 신호선을 연결해야할 자리에 아까 그 전선 두가닥을 연결했다. 얼마 후 기계는 "피조피조피조피조"하는 글자를 계속 표시했다.

"이건 좀 심하네. 7비트 완성형 한글 코드는 청계천 코드인데 여기에 맞춰서 어떻게 신호를 보내 주는 거지?"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위험하다는 겁니까?"

노인이 물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이 7비트 완성형 한글 코드는 우리나라에 컴퓨터가 처음 들어 왔을 때 청계천 주변의 컴퓨터 상가들 사이에서 임의로 자작해서 만들어 쓰던 코드였거든요. 정말 컴퓨터 들어온 초창기 중에서도 초창기에. 한글 코드 정부 표준도 없을 때. 그런데 그걸 어떻게 알고 거기에 맞춰서 신호가 들어오는 건지 모르겠네요."

김혜란은 계속 피조피조피조피조하고 인쇄되는 기계를 보고 있었다. 김혜란이 말했다.

"처녀가 화를 내고 있네. 화를 내고 있어."
"그만 좀 하세요. 귀신이 어떻게 청계천 한글 코드를 다 따지고 있나요? 무슨 귀신이 청계천에서 용산으로 옮아갔다가 테크노마트도 다니고 뭐 그런 답니까?"

나는 이번에는 음향식 전신 수신기를 찾아 연결해 봤다. 수신기가 찰칵거리며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삑삑 거리를 내는 소리를 내는 기계였다. 이번에는 길게 삐 하고 울리는 소리와 짧게 울리는 소리가 기계에서 흘러 나왔다. 기계에 적혀 있는 표준 소리 였다. 신호를 받아 적어 놓고 보니, 역시 이번에도 "피조"였다.

"이제 그만큼 보셨으면 귀신이 있다는 건 믿지 않으십니까?"

노인이 말했다.

"아뇨. 이게 참... 이게 소리를 내려면, 이런 소리를 내려면 이게 783 헤르츠 짜리가 표준으로 되어 있으니까, 여기에 이런 소리를 내려면 신호를 1초에 칠팔백번 정도 속도로 엄청나게 빠르게 넣어줘야 되거든요. 그런데 그게 되네요."
"그렇게 빠르게..."
"어떻게 이렇지?"

마침내 나는 마지막으로 구식 전화를 찾아다가 연결해 보았다. 말하는 곳과 듣는 곳이 분리되어 있고 올려 놓는 곳과 손잡이에는 예스러운 양식으로 장식도 되어 있는 매우 고풍스러운 것이었다.

전화를 연결해 놓자, 잠시후 전화 수화기에서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피- 조-"

그 목소리는 낮고 탁하기는 했지만 여자 목소리 같았고, 싸구려 MP3 기계에서 쓸데 없이 자랑하는 메아리 음장 효과도 깔려 있는 채로, 정말 뭔 TV의 귀신 이야기 재연 프로그램에서 나오는 소리 처럼, 웅웅 울리고 흑흑 흐느끼면서, 그렇게 집 안에 가득 울려 퍼졌다.



3.
"피조"라는 뭉게진 소리를 한 번 듣자 노인은 혼비백산하여 집 밖으로 도망쳤고, 김혜란은 스스로도 충격적인 감동을 느꼈는 지, 갑자기 록 가수 공연의 팬과 같이 높은 환호성인지 비명인지 모를 괴성을 지르기도 하였다. 우리는 그런 상황을 수습하느라 한 몇 시간 같이 "진정하세요" "선생님 잠깐만" "아니 일단 잠시 앉아서" 이런 말이 가득한 대화를 나누었다.

셋이서 이상한 일을 덤터기로 겪고 나서 한참 숨을 고르고 진정하고 나니, 노인은 다같이 어디가서  점심이라도 먹자고 했다. 나 역시도 사실 "피조"하는 그 이상한 소리에는 상당히 놀랬기에 같이 그 소리를 들었던 그 증인과도 같은 사람들과 더 오래 같이 있고 싶다는 마음이 생기기도 했다. 우리는 노인이 소개해 주는 오리고기와 거위요리를 잘해 준다는 곳으로 갔다. 

거위 요리를 먹고 오리 고기를 굽으면서도 계속 김혜란은 신이나서 귀신이 어쩌니 혼령이 어쩌고 혼백이 어쩌니, 혼과 백의 차이가 뭐고, 신과 령의 차이가 뭔지 따위의 이야기를 주절주절 늘어 놓기 시작했다. 대체로 중국 남북조 시대에 나와서 이어져 내려온 헛장난 같은 가짜책의 학설들을 컴퓨터 게임 만드는 사람들이 게임에 등장하는 괴물들을 꾸미기 위해 소개하는 바람에 널리 알려진 형태대로 조합한 것들에 지나지 않는 내용이었다. 나는 뭐라고 끼어 들어 봤자 부질 없이 말만 길어질 듯 하여 말을 않고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저 전화기로 인터넷에서 김혜란이 하는 헛소리들을 검색해보며 어디서 듣고 와서 갖다 붙이는 것인지 혼자 하나하나 뒤집고 있기만 했다.

한참 흥이 오른 김혜란은,

"퇴마 의식에는 진기가 많이 소진 되기 때문에 기가 응축된 음식을 많이 먹어야 되거든요. 그런데 모든 동물의 진기는 간에 다 모여 있다고요. 왜 우리가 겁먹었을 때 놀랐을 때 간담이 서늘하다고 하잖아요. 그게 그만큼 간이 마를 물리치는 것과 관계가 깊다는 거라고요. 이게 다 말 한마디 한 마디에 우리 조상들의 지혜가 숨어 있는 거죠."

라고 하면서 거위 간 요리를 집어 먹을 때 나를 쳐다 보았다. 같이 앉은 노인은 말할 때 마다 "아, 예, 예," "예, 그래요? 그것참" "같은 말을 쉼없이 반복하고 있었다. 반면에, 나는 계속 혼자 전화기 들고 인터넷이나 뒤지고 있었다. 그러니 김혜란이 보기에는 그게 좀 거슬리게 대조 되었던 모양이었다. 김혜란은 자신의 쇼를 감상하는 태도가 불량하다고 생각했는지, 내 관심을 확 잡아 당기고 싶어 하는 듯 하였다.

"선생님께서 겪으시는 여자 문제는 아무래도 결국 짝사랑이 빚은 문제 아니겠어요."

김혜란은 갑자기 내가 짝사랑 때문에 고민하고 있다고 하였다.

나는 관심을 갖는 것 자체가 무의미함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뭐라고 따지고 싶었다.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승희의 표정이 떠올랐다. 마음에 안드는 그 표정. 또렷하게 상상할 수 있었다. 얼굴로는 난처하고 슬픈 표정을 짓고 있지만 가슴 속에서는 수수께끼 같은 통쾌한 감상을 느낄 것으로 짐작되는 태도로 나에게 짜릿한 역전 안타와 같은 느낌으로 '이러는 거 부담 스러워'라고 말하는 장면이 떠올랐던 것이다.

분노가 꼭 새로 나온 광고 속의 세탁기 물살처럼 확 치밀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게 한승희 때문인지 김혜란 때문인지도 알 수 없었다. 별 근거도 없었지만, 그렇게 화가 났던 탓에, 나는 한승희가 애초에 이 모든 걸 계획했던 것 아닌가 하는 망상을 품기도 하였다. 나를 이런 저런 말을 하며 살짝살짝 끌어 들이다가 내가 한승희에게 확 접근하게 되면 문득 "부담스럽다"라는 말을 함정처럼 터뜨려서 거기에 걸려 난처해 하는 나를 보며 좋아 하는 것이다. 그렇게 또다시 훌륭한 사냥감을 낚았다고 즐거워하는 그런 괴상한 악취미를 한승희가 갖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니까 고기를 먹으려고 사냥을 하는 사람이나 농사를 망치는 동물을 쫓으려고 사냥을 하는 사람이 아니라, 스포츠의 일환으로 즐기기 위해 사냥을 하는 그런 사람처럼, 한승희는 가장 크게 사람의 기대가 무너뜨리는 형태로 "부담스럽다"라는 말을 던지는 것을 한 발의 수렵용 산탄총 탄환처럼 즐기는 것 아닌가 싶었다는 것이다.

"아, 거 참. 여자 문제 아니라니까 그러시네요. 뭐 짝사랑이고 자시고 여자 문제라는게 아예 없다니까요."
"혹시 한 번 잘 생각해 보세요. 무슨 퇴마가 필요한 상황은 아닌지."
"무슨 퇴마가 다 뭐예요."

나는 고개를 돌리고 다시 오리고기를 굽는데 집중하려 했다. 그런데 노인이 말했다.

"어휴 선생님. 그런 말씀 마십시오. 우리가 다 같이 듣지 않았습니까. 분명히 우리가 마를 물리쳐야 하는 그런데에 신경써야 될 때도 있는 겁니다."

그러면 내가 정말 무슨 마를 만났단 말인가? 나는 그동안 한승희가 나에게 했던 기억에 남는 말들을 떠올려 보았다. "너는 어떤 스타일의 여자를 좋아해?" "몰라, 너 보니까 그냥 웃음이 나오네" "그냥 아무 이유는 없고 생각 나서 한 번 전화 했어" 덫, 미끼, 올가미. 사냥꾼이 던져 끌어오는 함정이라 할만하지 않나? 신빙성이 높지는 않다고 생각 되었지만 보안연구소 직원 중에 한승희에게 애절하게 구애 했다가 비참하게 거절당한 사람들이 줄줄이 있다는 소문이 있었지. 이 사람들은 저마다 그 목이 박제가 된 채로 사냥꾼의 통나무 집 벽에 차례로 걸려 장식되어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나는 정말 그 함정에 빠진 것이 아니었다. 이런저런 헛 상상을 할 때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한승희는 내가 그렇게 목을 맬만한 사람이 결코 절대 아니었다. 한승희는 지구상의 모든 여자들을 보면 무조건 "살쪘네." "얼굴이 좀 크네" 하는 말부터 하는 버릇이 있었다. 한승희에게 여성의 아름다움이란 두 개의 숫자로 간단히 표현될 수 있는 일종의 측정치였다. 몸무게와 얼굴둘레. 그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무조건 빼빼마르고 얼굴이 작으면 아름다운 사람이고 조금이라도 깡마른 느낌에서 벗어 났다거나하면 "살쪘네"라면서 아무런 평가의 가치가 없는 대상으로 흙바당에 나뒹굴었다. 한승희는 텔레비전에 오랫만에 등장한 연예인이 나올 때 아주 조금, 아주 아주 약간이라도 체중이 불어 보이면, "어머, 쟨 왜이렇게 살쪘데. 쟤도 이제 완전 망가졌네"라고 소리쳤다. 정말 그 말투 하는 정확하게 기억난다.

내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미의 기준이었다. 사람이 겉모습이 전부가 아니라지만, 전부가 아닌만큼 일부이기는 하다. 한승희에게는 본인이 갖고 있는 자신감과는 달리 나는 공감할 수 없는 "일부"가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겉모습을 아름답다고 평가하는 기준 자체가 다르다는 것은 겉모습 뿐만 아니라 마음에 있어서도 맞는 부분이 부족하다는 것 아닌가?

그러던 와중에 갑자기 내가 자꾸 이러는 게 부담스럽다니. 내가 뭘 어쨌는데? 나는, 내가 이렇게 당황하는 만큼 나도 무슨 한마디로 한승희를 당황하게 하고 울화통터지게 하는 뭐 그런 방법이 없을까. 하는 걸 계속해서 고민하고 있었다.

어떻게 무심하게 생각 없이 한 마디 하지만, 그걸로 확 열받게 하는 그런 대사를 던져 볼 수 없을까.

"짝사랑은 퇴마로도 보통 답이 없어서..."

그런데 도리어 김혜란은 그렇게 또 한 마디 하지 않는가?

"이보세요. 자꾸 퇴마, 퇴마 하시는데, 도대체 퇴마라는 걸 어디서 배운 겁니까?"
"퇴마술과 퇴마식은 옛날 신라 때 원효 대사께서 해골물의 마를 물리치고 깨달음을 얻으셨던 때부터 우리 민족에게 대대로 내려오는 그런 거예요. 그래서 결코 서양의 과학이 해결하지 못하는 거, 그걸 바로 우리 한민족 전통으로 내려오는 퇴마의 기를 이용해서 해결하는 거라고 하면... 지금 선생님처럼 공부가 부족하신 분은 좀 어려우셔서 우리 민족의 철학에 대해서 좀 더 공부하셔야 겠지만, 그래도 대충은 감이 오지 않나요?"

김혜란은 그 말을 할 때 늠늠하였다. 그러나 그로써 김혜란은 내가 친 그물에 걸렸다.

"퇴마 공부를 그렇게 하셨으면, 혹시 퇴마에 대해서 깊게 다룬 '빽 투 더 퓨처'는 보셨습니까?"
"빽 투 더 퓨처요? 그게 퇴마하고 무슨 상관이야. 그런 건 할리우드의 물질주의, 서양 문명, 서양의 과학으로만 가득찬 영화에요. 그런 영화에만 빠져 있으니까, 몸은 한국사람이라도 혼이 한국 사람이 아닌게 되는 거지. 우리 민족 고유의 그 정기를 잃게 되는 거에요. 누구나 퇴마 공부를 할 수 있는 그 철학을 잃는 거예요."
"빽 투 더 퓨처가 퇴마 중에 퇴마 맞는데."
"엑소시스트랑 헷갈렸겠지."
"빽 투 더 퓨처 맞아요."
"고스트 버스터즈랑 착각한 거는 아니고?"

나는 다 구워진 오리고기를 한 번 쌈싸 먹으면서, 그물에 걸린 줄도 모르고 펄떡 거리며 마지막으로 움직이는 김혜란의 말을 잠깐 들었다. 오늘 아침 이후로 잠깐이라도 느껴보는 기분 좋은 순간이었다.

"퇴마 라는 말이 우리 나라에 옛날부터 있었던 줄 아세요? 그러면 한자로 뭔데요."
"퇴할 퇴 짜에, 마 마짜 아닌가."
"......"

나는 잠깐 말 없이 생각도 없앴다. 계속해서 나는 말했다.

"퇴마라는 말은 원래 한문식 표현으로 쓰는 말이 아니에요. 우리나라건 뭐 한자 쓰는 다른 나라건 옛날에 퇴마라는 말을 쓴 사람이 없어요. 이게 어디서 처음 생긴 말이냐면, 60년대 말에 나온 일본 소설 중에 '퇴마전기'라는 게 있거든요. 거기 보면 나쁜 일이 생겼을 때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서 그 나쁜 것을 없애는 기계가 나오는데... 그러니까 타임머신 입니다.

그 타임머신을 소설 속에서 재밌게 한자로 표현하려고 '퇴마선'이라고 부른 겁니다. 영어 '타임머신'하고 발음이 비슷하니까. '퇴마선'하고요."
"빽 투 더 퓨처에 귀신의 힘으로 타임머신을 타는 이야기가 나오나요?"
"아니, 아니, 그런게 아니고. 타임머신이라는 말이 발음이 비슷해서, 재미로, 언어유희로 퇴마선 이라는 말이 생겼다고요. 무슨 유령 물리친다는 게 전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죠."

이번에는 김혜란이 잠시 말이 없었다. 나는 노래 하듯이 즐겁게 다음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이 '퇴마'라는 말을 유령 물리치는 일에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한 거는 그 다음에 귀신 나오는 일본 소설쓰던 기쿠치 히데유키 라고요. 요수도시, 마계도시, 뭐 이런 거 혹시 아세요?"
"그거 홍콩 영화도 있지 않습니까?"

노인이 아는 이야기가 나오니 끼어 들었다.

"맞습니다. 그게 기쿠치 히데유키 소설이 원작인데, 거기에 '퇴마'라는 말이 많이 쓰이면서 여기저기 확확 퍼지기 시작한거예요. 그런 걸 간접적으로 보고 읽은 우리나라 작가들이 PC통신 시절에 귀신이랑 싸우는 소설을 쓰면서 그 말을 가져다 써서 우리나라에는 '퇴마'라는 말이 퍼진 겁니다. 뭔 원효대사가 무슨 상관이고 한민족 고유의 기가 다 뭡니까. 일본에서 만든 말이고 PC통신 시절에 퍼진 말일 뿐입니다.

스스로 퇴마사라고 하면 이런 배경 알고 있는 사람에게는 정말 무슨 장난 같아 보입니다. 김혜란씨, 차라리 직업 이름이라도 퇴마사 말고 다른 걸로 해보면 어떻습니까."

그즈음 말을 하자 김혜란은 뒤집던 오리고기 마저 그대로 둔 채로 가만히 있었다.

김혜란은 얼굴이 가늘게 떨리는 듯 해 보이기도 하였으나, 다만 오리고기 타는 연기에 가린 내 착각일 수도 있었다. 워낙에 희고 광택이 도는 얼굴이라서 얼굴 빛이 달라 졌는지 알 수는 없었다. 그나마 몇 점의 오리고기가 활활 타는 것이 그대로 방치 되었다. 나는 뭔가 제대로 "부정 탄 것"을 본 듯하여 통쾌하다는 생각도 잠깐 들었다.

그런데 그러다 김혜란이 갑자기 다시 활짝 웃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들이지 못하고, 자꾸 쪼개고, 자꾸 떨어뜨려 놓고, 분석하고 해체하고. 이렇게 하는 게 바로 분석적인 서양의 사고 방식이에요. 우리 동양의 사고 방식은 그런게 아니라 모든 걸 하나로 보고, 서로 모두 어울려서 그 연결과 관계를 생각해서 전혀 다른 관점에서 이야기를 받아 들입니다. 그렇게 보면 이상할 게 없죠."

노인은 분위기를 좀 평화롭게 가져 가기 위해서 김혜란의 웃음에 같이 웃어 주고 있었다.

"그거하고 퇴마라는 말이 전통이 아니라는 거하고는 상관 없잖아요."
"그렇게 서양식의 분석적 사고에서 빠져 나와 보세요. 얼마나 마음이 편하고, 얼마나 몸에 기가 저절로 돌게 되는 지 몰라요. 동양식의 융합의 생각을 해 보세요. 순수하게, 처음으로 돌아가서 제대로 사물을 보세요."
"아니, 그래서, 그게 퇴마라는 말하고..."

내가 말을 하는 데, 김혜란은 말 사이에,

"그러니까, 선생님도 짝사랑 때문에 여자문제로 애태우지말고, 차라리 어렸을 때 느꼈던 그 사랑, 예전 그 순진했던 애인을 떠올려 보세요. 그러면 지금의 짝사랑이 다 헛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라고 말하고는 상추에 싼 오리고기를 입에 쏙 집어 넣었다. 내가 "짝사랑 그런 거 아니라니까 그러시네." 라고 말하면서 울분에 찬 목소리를 내는 것을 김혜란은 오리고기에 새로 뿌리는 양념정도로 여기는 듯 했다. 거기에는 아무 대답도 반응도 없이, 그저 맛있게 상추쌈을 씹는 데만 집중하며 웃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따지기 시작했다. 옛 애인에게 연락하는 것이 고작 새로운 짝사랑에 실패했을 때라고? 그건 그 자체로 또다른 비굴한 일인듯 들렸다.

"그러면, 새로 애인 한 번 만들어 보려다가 실패했는데, 그렇게 실패하면 내가 너무 못난 놈이라서 실패한 것 같아서 부끄럽고 낙심 되니까, 갑자기 옛날 애인한테 전화라도 해서 그래도 이 사람하고는 한 때 참 잘 지냈던 적도 있으니까 내가 아주 여자들한테 인기 없는 것은 아니다... 하고 용기를 얻어 보라는 겁니까?"
"자꾸 그렇게 분석적으로 말하시니까, 내용이 점점 안좋게 보이잖아요."
"내용이 안좋잖아요. 무슨 옛날 애인이 뭔 스페어 타이어도 아니고. 열등감 느낄 때 힘 불어 넣어주는 만만한 예비 땜질로 그렇게 써먹습니까?"
"짝사랑의 아픔을 극복하는게 쉽지는 않잖아요."
"진짜, 짝사랑 하고 아무 상관 없다니까요."

우리가 소리를 점점 높여가며 빠르게 떠들어 대고 있으니 노인이 말리듯이 나서며 화제를 다른 것으로 바꾸려 하였다.

"그런데 정말 저 귀신이 큰 일 입니다. 이게 무슨 마... 아니 저주 같은 건 없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김혜란은 자기를 통해서 퇴마 기호라는 부적을 사서 사용하고 퇴마 의식이라는 굿을 해서 돈을 내고 귀신을 달래야 한다고 주장했고, 나는 나대로,

"정말 귀신이 있는 거라면, 지금 '저주' 이런 것 따위가 문제가 아닙니다."

라고 말하며 같이 맞붙어 떠들어 댔다.

오후가 꽤 늦도록 우리는 오리고기 집에서 그런 이야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점심 시간을 맞아 식당을 찾은 한 무리의 북적거리는 사람들이 다 왔다가고 조용해져서 새는 오후 햇빛이 좀 졸리울 때까지 우리는 거기에서 떠들고 있었다. 김혜란이 다른 곳에서 "퇴마식"을 해야 할 약속이 있다며 가는 것을 계기로 우리는 헤어졌다. 그렇지만 그 자리에서, 우리는 귀신의 정체를 좀 더 알아 보도록 내일 다시 모이기로 했다.

차를 세워둔 곳으로 가기 위해 유령의 집과 호수를 다시 걸으며 이런 저런 생각을 해보니, 점점 생각이 얽혀 별별 잡생각이 다 가득하게 되었다. 그 가득한 잡생각은 운전해서 서울로 돌아가는 동안에 점점 더 불어났다. 마침내 그날 밤이 깊었을 때, 나는 무슨 생각에서 인지 정말로 회사에 들어 왔을 때 처음 사귀었던 혜숙에게 전화를 한 번 해 보기도 했다. 혜숙이야 말로 정말 그때는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나도 사랑 받고 있다고 느꼈던 사람이었지 않은가?

그러나 몇 년 만에 전화를 하니 별 할 말도 없었고 나는 비척비척 걷다가 자빠지는 것처럼 무의미하고도 쓸쓸한 전화통화를 마쳐야 했다. 왜 내가 혜숙에게 갑자기 전화를 했을까. 무슨 저주가 있다면 이런 게 바로 저주였다.

혜숙에게 전화한 것을 후회하느라 잠을 늦게 자는 바람에 나는 이튿날 늦게 일어 났다. 그렇지만 일어나자 마자 바로 유령의 집을 향해 달려 갔으므로, 유령의 집에 도착했을 때에는 내가 김혜란이나 노인보다도 먼저 와 있었다.

을씨년스러운 쓰러져 가는 빈집에 혼자 있으니 대낮인데도 사실 나 역시 꽤 무서웠다. 더군다나 나는 귀신을 불러내는 것이라는 실험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러나 곧

"어제 승희가 황당하게 부담스럽니 어쩌니 하는 소리를 했을 때 바로 비웃고 따져야 했어."

하는 생각이 떠올라 온몸을 가득 채워서, 무섭다느니 귀신이니 하는 느낌은 내쫓아 버렸다. 대신에 후회 되었다. 승희에게 아무 대구도 하지 못하고, 별 이야기도 없이 하루가 지나가니까 정말 내가 승희를 짝사랑하기라도 해서 충격을 크게 먹는 바람에 괴로워서 아무 말 못하는 것 같지 않은가. 아니, 이런 걸 자꾸 고민하고 후회하고 하는 자체가 참 마음에 안들고 초라해 보인다 싶었다.

이날 처음으로 전신기가 있던 자리에 연결한 것은 라디오 였다. 연결을 마칠 무렵에 김혜란과 노인도 같이 나타났다. 우리 셋이 보는 자리에서 어김없이 라디오에서는 "피-조-" "피-조-"하는 그 말소리가 들렸다. 어제는 그렇게 겁을 먹고 도망치던 노인도 오늘은 예상했던 그 소리가 한 번 더 나오자,  눈을 뜬 모양이 살짝 이상해질 뿐 도망치거나 소리지르거나 하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어떻게 전기 신호를 이 라디오의 AM 방식에 맞춰서 변형시켜서 이렇게 딱 맞게 보내는 걸까요? 라디오를 FM으로 바꾸면 또 FM 방식에 맞춰서 '피-조-'하는 말소리를 전기 신호로 보내 주기도 하고. 이거 뭐든 다 맞게 저절로 맞춰져서 신호가 날아 옵니다."

나는 어째서 이런 일이 일어 날 수 있는지 이유를 궁금하게 여겨서 여러모로 궁리해 보았지만, 한참 그 "피조피조"하는 소리를 듣는 가운데에서도 아무것도 딱히 그럴싸하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자꾸 들으니까 점점 무서워 집니다. 이제 그만 끕시다,"

노인은 그렇게 말하였다. 내가 무슨 최면술에라도 걸린것처럼 반복되는 "피조"하는 소리를 계속 듣고만 있던 것을 멈춘 것이 바로 이 때문이었다.

"굉장하네요. 어떤 방식으로 무슨 코드를 갖다 대든지 그걸 바로 인식해서 맞춰서 제대로 신호를 변환해서 바로 우리가 볼 수 있게 하네요."

김혜란은 가부좌를 틀고 앉아 눈을 감고 있었다. "기를 모으고" 있다고 하였다. 잡담을 해도 기를 모으는 데 지장은 없는 지 김혜란은 낮고 느린 목소리였지만 뭐라고 계속 말을 했다.

"기계로 느낄 수 없는 걸 마음으로 느껴 보세요. 이 기계 저 기계 아무리 서양 과학의 온갖 기계로 다 봐도 이 마음으로 느끼는 한의 기를 느끼지 못하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기계 바꿔 달아 보는 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소용이 없는게 아니라니까요."

내가 반발하자 김혜란은 눈을 뜨고 나를 쳐다 보았다. 좀 뾰로통한 표정이었다.

"기계 바꿔서 계속 같은 걸 자꾸 듣는게 왜 필요한데요?"
"코딩을 알아서 저절로 감지해서 바꿔 주잖아요. 전화기 인터넷 되죠? 아무거나 우리나라 관공서 웹사이트 들어가 보세요. 관공사 웹사이트들이 보통 코딩 표준 안맞게 엉켜서 만들어져 있는게 많으니까."

나는 김혜란이 들고 있던 전화를 집어 들고 이런저런 공공기관 웹사이트들에 들어가 보았다. "인터넷 콘텐츠 정화 공사" 웹사이트에 들어 갔을 때, 전화기에 표시되는 웹사이트 화면이 엉망으로 깨져서, 한글이 모조리 이상한 특수 기호로 보였다.

"보세요. 요즘 웹사이트 만드는 전문가라는 사람들도 웹사이트 만들다 보면 문자 코딩을 표준대로 맞추는 걸 잘못해서 이렇게 보통 사람들이 쓰는 보통 웹브라우저로 안들어오면 확 다 깨지잖아요. 그런데 여기서 나오는 '피조'하는 내용은 안깨지게 코드를 다 알아보고 저절로 들어 온다고요."
"그게 바로 과학으로는 설명이 안되는 마의 기라는 겁니다."
"과학으로 설명이 안되는 게 아니고, 너무 심하게 설명 되니까 그렇죠. 이게 말이 됩니까. 이런 식이면 귀신이 피 달라고 하는 말을 하는 데 유니코드도 지원할 판인데. 귀신이 도대체 유니코드를 어디서 배웠겠습니까? 어디서 ISO 출판물이 나오는 걸 정기 구독이라도 하고 있는것도 아닐거고."

김혜란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다시 눈을 지그시 감고 어느 불경에서 따온 것임에 분명한 주문을 읊조렸다.

"콘텐츠 신호 말고 메타 콘텐츠 신호도 알아 먹나?"
"예?"

노인은 무슨 말인지 몰라 물었다. 

"여기 전신전화 박물관이니까 전화도 있죠?"
"전화는 1층 안쪽으로 있습니다."

나는 전화를 집어 와서 연결시켰다. 20세기 중반에 나온 가장 전통적인 전화, 전화의 표준. 미국 AT&T사의 전형적인 까만 다이얼 전화였다. 곡선과 직선이 조화된 모양, 묵직한 무게, 따르릉따르릉 소리를 내는 종, 달칵이며 빙그르르 돌아가는 숫자판. 고풍스러운 모양은 귀신이 있다면 과연 좋아할 법도 싶었다. 이 박물관에 얽힌 전설과는 200년 정도 차이가 나기는 했지만. 왠갖 문자 부호와 송신 방식이 바뀌는 것을 다 섭렵하고 있는 이 상황이라면 전화라고 못 건드릴 리 없다.

곧 전화벨 소리가 울려 퍼졌다.

"전화가 오네요."
"이거 전화 걸어서 너 지금 어딨냐고 물어 보면 바로 너 뒤에 있다고 하는 그거 아닙니까?"

전화벨 소리가 굉장히 크게 들려서 그 자체로도 사람 가슴을 빠르게 뛰게 했다. 모두들 말이 없는 가운데 전화벨 소리가 계속 울려 퍼진다.

"받아 보세요."

김혜란이 눈을 감은채로 말했다. 여유롭고자 하는 목소리지만 그 뒤에 감춰진 강렬한 호기심은 새어 나온다. 나는 손을 전화로 뻗었다.

전화를 받아 보니, 전화 수화기에서는 예의 목소리로,

"피-조- 피-조-"

하는 목소리가 귓속으로 들려 왔다. 나는 "지금 너 있는 거 어디야?" 라고 말해서 정말로 "바로 네 뒤에"라고 대답하는 지 한 번 시도해 보고 싶다는 마음도 확 치밀었다. 그런데 웅웅울리는 그 단순한 "피조피조"하는 소리를 어제 오늘 끝도 없이 계속 듣다보니 묘한 느낌이 있었다. 솔직히 말해서 겁났다. 나는 그냥 다른 말을 하지 않고 전화를 끊고 분리했다.

"영계와 통하는 전화네요. 이건 참 마기가 보통 높아서는 잘 안생기는데."

김혜란이 또 뭐라고 영계에 대해 말하기 시작했다.

"어제 말한 거에 따르면 혼, 백, 신, 령, 귀 라는게 다 뜻이 다르다면서요. 그러면 그냥 영계라고 하면 안되고... 어제 말한대로라면 혼계라고 해야 되는거 아녜요?"

내가 묻자 김혜란은 뭐라고 변명을 하려고 말을 했다. 나는 그 말을 듣지 않고 다른 고민을 시작했다. 애초에 풀이가 궁금해서 물은 말도 아니었다.

"이게 전화 거는 신호를 알아내서 보내네요. 아무 전기 신호나 울린다고 여기저기 전화가 걸리면 안되니까 전화를 걸게 할 때는 전화국이랑 전화기 회사가 같이 정해 놓은 특별한 전기 신호를 보내야지 전화가 걸리기도 하고 시외 요금으로 계산되기도 하고 그러는 건데. 이게 전화 거는 신호를 알아내서 연결하네요."
"전화 거는 신호를 알아내는게 어렵습니까?"

노인이 물었다.

"단순하게 하는 건 안어려울 수도 있는데, 정확하게 기술을 알고 잘만하면 전화선에 전기 신호만 잘 흘려버리면 공짜로 아무데나 전화를 할 수 있게 되잖아요. 그래서 70년대에는 전화선에 전기 신호를 교묘하게 흘려보내서 공짜로 장난전화하는 해커들이 있었죠. 존 드래퍼라고 유명한 사람도 있었고."
"귀신이 해킹도 하네......"

노인은 혼란스러운 표정이 되어 전화를 쳐다 보았다.

"그냥 전화를 오게만 하는 건 뭐 그렇게 대단히 어렵지는 않은데, 그래도 이 전화에 익숙하고 이 전화의 내용과 규약을 알아내야 할 수 있는 거거든요. 자료가 없으면 혼자서 알아내기 쉬운 건 아닐텐데. 신기하네요."
"보세요. 마음의 눈으로 기로써 몸으로 느끼면 눈으로 못보는 걸 볼 수 있다니까요."

혜란이 말했다. 나는 여전히 거기에 신경쓰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예 텔레비전을 한 번 달아 보죠."

나는 차로 돌아가 어제 오후에 왠갖곳을 돌아다니면서 구해온 텔레비전을 하나 둘 가져 오며 차례로 연결해 보려 했다. 전기를 끌어오고 선을 연결할 지점을 찾고 하느라 시간이 꽤 흘러 갔다. 텔레비전은 여느 기계보다 꽤 무겁고 커서 올려 놓을 자리를 잘 만들어 놓는 것도 문제 였다. 어느 새 오후 시간도 늦어서 저녁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해는 산속으로 사라진 후였지만 여름의 긴 낮태양은 아직 그 흔적을 남기고 있었다. 검게 솟은 숲의 나무 그림자 뒤로 보라색 빛의 하늘이 아직 어슴프레하게 빛이 남아 있었다. 그 빛깔은 유난히 괴상해 보였다. 그 그림자 뒤편의 해가 진 남은 빛 때문에 반대로 솟은 나무들은 까맣게 알지 못할 괴물의 검은 옷자락처럼 호수를 둘러 싸고 있었다. 깨끗한 흑색이 된 호수에는 그 사이로 새어 나온 알지못할 빛들이 반사되어 군데 군데 낮은 물결 소리와 함께 빛나고 있었다.

"옛날 TV인데 VHF 로 맞춰 보겠습니다."

TV를 연결시키고 우리는 화면에 나올 것을 기다렸다. 잠시 화면에 어지러운 검고 흰 점들이 가득 시끄러운 소리와 함께 오갔다. 우리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으므로 그 시끄러운 소리가 어떻게 들리고 점점 화면이 잘 나오게 되면서 어떻게 잦아 드는지 똑똑히 느낄 수 있었다. 

"귀신이네. 아이고! 귀신이네!"

노인이 대뜸 소리쳤다. 화면에는 상의에 하연 옷을 입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 뜨린 형체의 사람 같은 것이 보였다. 21세기 이후로 이런 긴 머리 귀신은 그 눈을 이상하게 보여주는 것이 무섭게 만드는 유행이었는데, 화면에 보이는 것은 그 유행을 따르는 모양은 아니었다. 가득 늘어 뜨린 숱이 많은 머리칼이 얼굴을 온통 빽빽하게 가리고 있어서 눈도 코도 입도, 말을 할 때의 입모양도 모두 가린 그냥 머리칼만 늘어뜨린 모양이었다.

"피-조- 피-조-"

텔레비전에서는 같이 아까 전화기에서도 들렸던 그 말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텔레비전 속에서 귀신이 똑똑히 나오고 있었다.

"아기씨, 진정 하십시오. 아기씨."

화면을 보고는 김혜란은 이번에는 손을 모아 비는 동작을 하면서 또 절을 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노인은 이번에는 각오를 하고 있어서 인지 좀 흥분한 듯 하기는 했지만 그저 신기하게 여기며 화면에 표시되는 그 여인을 찬찬히 들여다 보고 있었다.

나는 UHF 방식으로 TV를 연결해 보기도 하고, 다른 텔레비전을 가져와서 NTSC 방식과 PAL 방식을 바꿔가며 연결해 보기도 했다. 모든 방식에 대해 다 표준 방식을 다 알아채고 연결한대로 맞춰서 그대로 똑똑히 머리 긴 여자 영상을 보여주었다.

나는 내친김에 최신 HD 디지털 TV도 연결해 보았다. 이번에도 또렷한 HD 영상으로 문제의 그런지한 헤어스타일의 장발여인이 출연했다.

"디지털 TV는 좀 심한데."
"왜요? 온갖나라 온갖 방식 TV로 다 나오는데, 디지털 TV로도 나오겠죠."

노인이 말했다. 나는 내친 김에 최신형 3D 초고해상도 HDTV 도 연결해 보았다. 역시 깨끗하고도 선명한 영상이 나왔다. 3차원 TV로 보니 입체 효과도 썩 잘나오게 표현된 영상이라서 정말 그런 것이 거기에 서 있는 듯 보였다. 어두워져 가는 방안에서 빛을 뿜는 TV로 그런 걸 보고 있으니 무척 음산했다.

김혜란이 빙그레 웃는 표정을 지었다. 김혜란은 역설적이게도 그 웃는 표정이 무척 좋게 어울렸다. 김혜란이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신기하게 여기시겠지만, 저는 참 당연하게만 느껴져요. 자연스러워요. 왜냐면, 저는 이 마를, 기를, 느낄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까 학교에서도 괜히 스트레스만 많이 주고 실생활에는 아무 도움도 안되는 수학, 영어 이런 거 가르치지 말고 차라리 마음을 다스리는 우리 민족의 지혜를 가르쳐야 되는데, 이제 사람들이 전부 그런 건 전혀 모르고 자라나니까 태어나서부터 가지고 있던 걸 학교라는 그 틀에 박힌 데를 다니면서 다 잃어 버린다고요."

밤이 찾아오면서 방안은 어두워지고 있었다. 전등이 켜지지 않는 곳이라서 점점 깜깜해 지는데, 홀로 켜진 TV에서 으시시한 모양만 빛을 뿜고 있으니 분위기는 결코 정겨운 호숫가 휴양지 답지는 않았다.

우리는 일단 오늘은 물러 서기로 하고 전신 전화 박물관에서 같이 걸어 나왔다. 밝은 별들이 이미 하늘에 총총히 떠 있었다. 세상 어디에서도 쉽게 보지 못할 아주 신기한 것을 보았다는 생각에 우리 셋은 서로 형식과 부족한 부분이 다르기는 했지만, 모두 어느 정도는 보람찬 느낌을 갖고 있었다. 차를 세워둔 쪽으로 걸어가는 중에 내가 말했다. 

"디지털 TV는 신호를 보낼 때 그냥 보내는 게 아니라, 기본적인 거일 때라도 H.262 라는 방식으로 압축을 해서 보내야 되거든요. 그런데 이 H.262 방식으로 압축을 한다는 게 쉬운게 아닙니다. 고등학교때 보면 왜 삼각함수랑 미분, 적분 나오죠?"
"하, 제가 수학하고는 적성이 안맞아서... 저는 아예 몸이 수학하고 안맞는 거 같아요. 전 수학은 그냥 학교 졸업하면서 싹 머리에서 지웠어요."

김혜란은 수학에 대해 무지하다는 점을 자신의 인간적인 면모를 드러내는 즐거운 농담처럼 설명했다. 얼마나 자기가 수학을 싫어하는 지 김혜란이 말을 마치자, 나는 말을 뒤이었다.

"영상을 H.262로 압축할 때 기본이 되는 방식 중에 디스크리트 코사인 트랜스폼이라는 게 있는데, 그 디스크리트 코사인 트랜스폼이라는 게, 삼각함수랑 적분이랑 같이 섞여 있는 계산을 수백만번 하는 거거든요."
"코사인. 발음만 들어도 짜증나네. 차라리 날 죽이지."

김혜란은 귀신은 죽을래야 죽을 수도 없다는 것을 잠시 잊고 있는 듯 하였다.

"그냥 단순하게 신호를 변환하는 그런 것만 하는 게 아니라, 이게 그 정도 계산을 해낼 수 있는 그런 능력도 갖고 있어요. H.262 인코딩을 하려면 계산 능력이 그만큼 따라줘야 되는 건데. 사람이 손으로 계산을 한다는 건 불가능 한거고. 펜티엄 시대가 되기 전까지는 이런 걸 쉽게 하기도 결코 어렵지 않았거든요. 특히 아까 그 초고해상도 3차원 HD 영상 같은 건 왠만한 성능을 가진 컴퓨터로도 인코딩하기가 간단하지가 않은데, 그것도 그냥 돼서 바로 영상이 나오네요."

노인이 물었다.

"지금 정확하게 무슨 말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그러면 귀신이 되면 머리가 컴퓨터 처럼 빨리 돌아가서 계산을 빨리할 수 있게 된다는 겁니까?"
"저도 뭐가 뭔지 모르겠어요. 그런 것 같지는 않잖아요?"
"분석적으로 서양 과학의 해석적인 관점으로 따지지 말고, 동양의 모든 것이 연결된 관점으로 보면 자연히 깨달을 수 있습니다."

김혜란은 그렇게 덧붙였지만 헤어질 때 까지도 그렇게 깨달으면 도대체 뭐라는 건지는 알려 주지 않았다. 스스로 깨닫는 수밖에 없다고 했다. 왜 그 수밖에 없는 지는 역시 알려 주지 않았다.

나는 김혜란에게 따지는 말을 한 마디 더 하려다가 그냥 아무말 하지 않았다. 그날은 이제 더 이상 부정 타고 말것도 할 것 없지 싶었다. 서울에 돌아오니 이미 꽤 늦은 밤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날 밤, 첫사랑이자 처음이자 마지막 애인이었던 혜숙이 나에게 전화 했다. 어제 내가 전화했을 때에는 오랫만에 어색하게 대화를 끌어가는 것이 그렇게 어색했는데, 이번에는 아니었다. 혜숙이 스스로 대화를 재미있게 끌어 가려고 직접 애써 노력하고 있었다. 나는 거기에 따라 가면서 박자만 맞춰 주면 되었다.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나는 이런 게 정말 사랑하는 마음이 통하는 짝인가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다 보니, 그 때 한 1년여 사귀면서 있었던 이런저런 일들과 서로서로 알고 있던 점들에 대해서 말할 것들이 참 재밌고 웃긴 것들도 많이 있었고, 그간 있었던 일 중에 서로 간에 재미나고 신기한 일도 많았다. 확실히 그 때는 우리가 정말로 사랑하는 사이였던 만큼, 여전히 한 번 말문이 터지지 시작하자 나눌 이야기는 많았다. 조심스레 말하는 것을 듣자니, 혜숙은 승희와 내가 연구소를 나설 때 종종 같이 다니는 것을 보고 승희가 내 애인이나 그 과정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나는 그게 무슨 얼토당토 않은 소리냐고, "귀신이 곡할 노릇"이라고 시치미를 떼었다.

혜숙은 전략마케팅팀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고도의 마케팅 전략"이라는 게 얼마나 허망한 헛생각에서 나오는 결단인가를 알려주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런 이야기들은 끝없이 들어도 울분과 함께 웃음이 섞여 재미가 있었다. 나 역시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이 호숫가의 유령의 집 이야기도 길게 들려 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옛날, 혜숙을 만난지 한 두달 쯤 지났을 때 처럼, 우리는 누워서 잠을 기다리며 전화통화를 하다가 동이 터오는 것을 보게 되었다.



4.
다음날. 나는 밤을 지새워서 무척 졸리웠지만 그래도 그 긴 밤 이야기했던대로 나는 현혜숙과 만나기로 했다. 간밤에 이야기 했던 내용대로, 현혜숙과 나는 바로 그 호수를 한 번 둘러 보는 것으로 아주 오랫만에 둘이 같이 만나보는 시간을 보내기로 하였다.

오래간만에 만나보니 현혜숙은 그대로였다. 사실 혜숙이가 무슨 냉동식품도 아니고 아무 바뀐 점 없이 정확히 그대로 일 수는 없었겠지. 하지만 적어도 내가 좋아했던 그 현혜숙의 매력들만은 여전했다.

사소한 이야기들에게도 시원하게 소리내어 웃어주는 그 즐거운 웃는 표정도 여전했다. 관공서 사람들 만날 때 마다 쉰 떡처럼 질리도록 들을 수 있는 억지로 허허 거리며 웃어 주는 그런 답답하고 막힌 웃음이 아니라 진심으로 작은 이야기거리에도 재밌어 하는 웃음 소리 였다. 거기에다가 느릿느릿한 현혜숙의 말투와 가끔가다가 조금씩 더듬거리는 말버릇은 묘하게 순박하게 느껴지는 데가 있어서 금방 쉽게 파묻혀 대화에서 편안한 아늑함을 느끼게 된다. 그러면서도 이 아가씨는 시원시원한 표정하며, 꽤 이국적인 옷차림도 무탈하게 흘러가는 용모하며. 옆에 있으면 계속 쳐다보며 심박수를 높이게 하는 면도 있었던 것이다.

사실 현혜숙과 헤어진 것도 그런 점들을 내가 감당하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현혜숙은 누구의 부탁이건 바로 거절을 못하는 성격이었다. 현혜숙에게는 왠갖 동기, 선배, 상사, 거래처 사람 등등 별별 다양한 남자들이 계속 별별 핑계로 현혜숙을 만나자고 불러냈다. 현혜숙은 그때마다 작은 일에도 그 즐거운 웃음을 웃었고, 나는 그때마다 그런 현혜숙의 몸매를 샅샅히 훑어보는 그 별별 남자들의 시선이 어떤 것인지 확확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걸 두고, 그런 모임에 나가야 되느냐, 꼭 그 사람을 만나야 되느냐 좀 싸우고, 괜히 기분 나쁘다는 점을 표현하기 위해서 치사하게 굴다가 현혜숙을 몇 번 울게 만들고. 그러다가 나는 쫓겨나게 된 것이었다.

숲속의 그 작은 호수로 가는 동안에도 현혜숙은 그렇게 몇 차례나 연거푸 웃음을 터뜨렸다. 잠깐이지만 나는 별다른 과정도 없이 아주 자연스럽게 다시 현혜숙의 애인이 되었다는 착각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 옛날처럼 자연스럽게 현혜숙의 머리칼을 넘겨 주었고, 얼굴에 난 잡티를 이리저리 가까이서 쳐다보며 피부관리에 대해서 잡담을 하기도 했던 것이다.

"너 혹시, 그러면 그게 귀신이라는게, 어떤 엄청난 기술을 가진 사람이 만든 특수한... 그런, 특수한... 특수 장치... 인거 아닌가? 무슨 장치가 있는데 그 장치는 무슨 수신기가 오던지 수신기를 스스로 자동으로 해석하고 해독해서 반드시 꼭 꼭... 어... 신호를 보내는 거지. 그런게 그 유령의 집이라는 거 어디에 묻혀 있어서 그런거 아닌가.

그래 맞다. 외계인인거 아니야 외계인? 외계인 우주선이 거기 인근에 떨어져서. SOS 신호, 구조 요청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 그런거 아닌가? 외계인 말로 '피조 피조'가 '메이데이 메이데이' 이런 뜻인 거야. 그래서... 음... 그래서... 자기를 구출해달라고 계속 신호를 보내는 건데... 그런데. 외계인 컴퓨터가 진짜진짜 발달된 거라서 무슨 수신기를 넣든지간에 저절로 해독하는 거. 그런거!"
"그런데 무슨 외계인이 처녀 귀신 모양으로 생겼냐?"
"그게 우리 지구인이 이해하지 못하는 외계인의 독특한 외모인거지. 그런 외계인이 한국에는 옛날부터 가끔 떨어져서 그걸 보고 우리나라에 그런 전설이 많이 생긴거 아닌가. 맞다. 맞다! 호수에... 호수에... 외계인 우주선이 호수에 빠져 있는 거겠다!"

나는 현혜숙과 이야기하면서 정말 즐겁게 웃었다. 그런데 그러고 있으니, 나는 한켠으로 이유도 모를 "좀 잘못된 일이다"라는 감상을 느끼기도 하였다. 그 감상이 무엇인지 나는 똑바로 보고 있지 않고 있어서 그 정체를 스스로 애써 알려 하지도 않고 있었다. 그 어색한 기분은 확 짚어 보자면 바로 일종의 죄책감 같은 것이었다. 기이한 형태의 양심의 가책이라고 해도 될 것이다. 괜히 토요일 저녁에 울적해서 현혜숙에게 전화를 해 봤을 때, 그때 내 마음이 어땠는 지 선명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그때 나는 분명히 한승희에게 알 수 없는 소리를 듣고 확 기분이 나빠지고 나서, 주섬주섬 어떻게든 내가 이렇게저렇게 멍청하게 놀아나는 바보만은 아니라는 것을 어디서든 한 번은 확인하고 싶었다. 그래서 내가 찾아 무례하게 건드려 본 것이 옛 애인 현혜숙이었다. 지금 나는 현혜숙과 함께 떠들며 즐겁게 웃고 있었지만, 나는 정말로 현혜숙을 가장 좋아해서, 현혜숙 생각을 깊이 하다가 현혜숙을 찾은 것이 아니었다. 나는 그냥 한승희 생각을 하다가 어떻게 때워 붙이려고 현혜숙을 찾은 것이었다. 그렇게 만난 현혜숙이 훨씬 더 아름다운, 이렇게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뒤늦게 확인하는 동안에도, 그 괴이한 떫은 향취는 사라지지 않고 자꾸만 맴돌아 다니고 있었다.

그런 마음이 남아 있는 채로, 산속으로 들어오는 도로에 이르자 어쩐지 저 구석에서 김혜란의 얼굴이 유령으로라도 나타나 "스페어- 스페어-"하고 소리치며 차 뒤를 따라오고 있는 듯 하기도 하였다.

내가 마지막으로 유령의 집 내부를 방문한 것은 일요일 오후였다. 내일은 또 출근을 해야한다는 갑갑함이 아직 지구가 일요일인 시간대의 지구를 온통 무겁게 휩싸고 있는 바로 그런 무렵이었다. 같은 것에 짓눌리고 있는 노인과 김혜란과도 곧 만날 수 있었다.

노인은 나와 같이 온 현혜숙을 보고 뭘 착각했는지 나에게 속삭이는 목소리로,

"짝사랑할만합니다."

하고 싱긋이 웃었다. 나는 어제 밤을 새어 피곤했기에 그냥 아무 말없이 고개만 그대로 푹 숙이고 있었다.

우선 우리는 금요일, 토요일 했던 것들을 다시 한 번 차례로 실험해 보았다. 전신, 전화, 라디오, 텔레비전. 뭘 연결하든지 어떤 형식으로 연결하든지 꼭 "피조" "피조" 하는 신호가 계속 정확하게 나오고 있었다. 어둡게 들리는 "피조"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질 때, 그 오래 보고 싶지 않은 흉상이 TV 화면에 표시될 때, 현혜숙은 무척 놀랐다. 이미 익숙하게 계속 지켜본 우리도 들을 때 마다 영 침침해 지는 느낌이었으니, 처음 직접 이 이상한 것을 접한 현혜숙은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현혜숙은 TV 화면에 그 사람이 나타날 때 마다 내 등뒤쪽으로 숨기도 하고 "어마"하는 소리를 내며 손으로 눈을 가리기도 했다가 조금씩 조금씩 적응이 되는지 찬찬히 고개를 내밀고 내다 보기도 했다.

현혜숙은 나에게,

"그렇게 말 없이 구경만하지 말고 잡담이라도 계속 좀 해라, 야. 이거 소리랑 모습만 계속 울려퍼지니까 안보고 있어도 너무 무섭다."

라고 말했다.

나는 이제 내 휴대 전화를 원래 전신기를 연결해 놓았던 전선에 연결해 보기 시작했다.

"휴대 전화는 전화 받는 번호랑 전화 오는 거 연결하는 신호가 하나하나가 다 복잡하게 코드로 되어 있거든요. 전화국 컴퓨터하고 전화 사이에서만 통하는 코드로 되어 있어서 이게 사실 잡아 채서 남의 전화에 전화국인척 전화오게 하는 게 참 어렵습니다."
"얼마나 어려운데요? 어제 그 디지털TV 그것보다도 더 어렵나요?"
"제가 쓰는 전화는 전화 코드가 DES 수준으로 암호화되어 있다고 하거든요."

전화기를 붙잡고 이리저리 조작하면서 노인과 내가 말하는 것을 듣더니 현혜숙이 한 마디 했다.

"DES 수준이면 절대 해독이 불가능한 수준은 아니잖아. 고성능 컴퓨터로 다 달라 붙어서 암호 푸는 것만 붙잡고 돌리면 한 4, 5일이면 해독할 수 있지 않나?"
"컴퓨터 보다 훨씬 더 정확한 게 사람의 마음이고, 컴퓨터가 절대 따라오지 못하는 컴퓨터를 뛰어 넘는 우주의 이치가 바로 우리 조상들이 한민족의 전통속에서 진행해 온..."

그걸 보면서 김혜란이 또 뭐라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하여간 한 번 보자고. DES 수준을 돌파하는 지 어쩌는지."

나는 김혜란의 말은 듣지 않은 척 하했다.

연결을 모두 끝내고 나서, 나는 한 걸음 물러 서서 전화를 쳐다 보았다. 환한 햇살이 아주 보기 좋게 전화를 비추고 있었다. 잠깐 기다리는 동안이었지만 나는 혜숙이 몹시 집중하고 있는 모습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이윽고 내 전화에서 "세빌리아의 이발사" 에서 나오는 "헛소문은 산들바람 처럼" 노래가 울리기 시작했다. 내 전화가 걸려 올 때 흘러 나오는 수신음이었다. 나는 전화 소리가 크게 들리도록 스피커로 나오게 했다.

"피-조- 피-조-"

어김 없이 소리가 나왔다.

"이거 진짜 말도 안된다."

현혜숙은 눈이 동그랗게 되었다가 좀 당황하기도 하면서 다시 주섬주섬 어딘가로 숨으려 하였다. 내가 말했다.

"4초가 채 안걸렸네요. 최고 기술로 컴퓨터를 몇 대씩 연결해도 몇날 며칠은 걸려야 겨우 해독 되는게 DMS 수준의 암호인데. 여기서는 그걸 깨고 전화를 거는 데 4초 밖에 안걸리네요. 4초."

나는 다시 차근차근 전신, 전화, 라디오, TV들을 연결해 가면서 계속 이런 현상이 생기는 지 다시 살펴 보았다. 어김 없었다. 뭘 연결해서 무슨 재주를 부리든지, 바로바로 붙잡아 신호를 보내주고 있었다.

"이건 뭐, 뭘 연결하든지 '귀신' 같이 잡아내네."

나는 그렇게 말하는 게 농담이라고 생각하며 현혜숙을 바라 보았다. 그러나 현혜숙은 반복해서 들리는 괴상한 소리와 귀신처럼 생긴 그 영상을 보고 겁을 먹었는 지, 조금도 웃지 않았다.

"다른 전화도 마찬가지일까요?"
"마찬가지 겠죠. 좀 더 복잡한 구조로 되어 있는 전화로 한 번 해보면 좋겠는데."

노인과 나는 이 이상한 일에 점점 빠져들고 있었고, 김혜란은 자신이 승리감을 느낄만한 상황이라고 판단했는지 더 기뻐하고 있었다. 처음 이런 걸 본 현혜숙만 계속해서 들려오는 "피조" 소리에 점점 더 겁을 내고 있었다. 이런 걸 보고도 "무서워 도망가자" 같은 소리는 안하고 다른 이야기들이나 하고 있는 우리 셋을 보고 더 그런 느낌을 받는가 싶었다.

현혜숙이 겁먹은 표정으로 말 없이 한참 있다가 말했다.

"이거 내 전화가 RSA 로 암호화 되어 있는 보안 전화거든. 사람들 도청 못하게 하는 거라고 우리 마케팅팀에서 새로 들고 다니는 건데, 이걸로 해봐. 그리고... 나 무서워. 좀 나가 있을께."

현혜숙은 자기 전화기를 나에게 건내 주고 박물관 밖으로 도망쳐 나갔다.

"같이 가 주실 수 있겠습니까."

혼자 유령의 집 근처에 있다가는 오히려 더 무서울 것 같았기에, 나는 노인에게  그녀 옆에서 잡담하면서 귀신 생각 좀 덜나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제 내 곁에는 왠갖 여러가지 방향으로 쉼없이 헛소리를 하는 김혜란과 계속해서 "피조" 소리를 내는 기계만 있었다.

"이건 보안 전화라서 정말 현실적으로 신호를 훔치는 것도 어렵고, 신호를 훔쳐서 전화를 울리게 한다고 해도 목소리 신호 자체도 정확하게 암호를 따라해야 제대로 소리가 나는 거거든요. 이 정도 보안 전화 암호를 해독하려면 세상에 있는 컴퓨터들을 다 끌어 모아서 해독 작업을 해도 몇 백년이 걸려도 끝이 안날 수도 있을텐데.

이게 우리 인터넷 전자상거래하고 주민등록처리하고 할 때 쓰는 암호화 수준이랑 비슷한 건데. 이걸 깰 수 있으면, 은행이건 정부건 뭐건 다 뚫을 수 있다고 봐도 과장도 아닐텐데. 정말 이런 것도 될까요?"

내가 묻는 말을 김혜란이 듣고 있었지만, 나는 김혜란에게 들으라고 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내가 그냥 기대감을 한 번 마지막으로 느껴 보려고 낸 소리였다. 김혜란은 또 이상한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만 하겠지.

"불가능한 건 없어요. 그런데 아직도 마를 푸는 마풀이를 못하고 있으니. 이것참... 이렇게 마가 자꾸 짙게 끼여만 가는데."

김혜란은 나를 보며 안타깝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야릇한 호기심과 기대에 웃는 표정으로 마가 어쩌니 하는 소리에 반박하고 보안전화를 연결해 보았다.

보안전화를 연결한 지 3초. 3초 정도 지나자, 보안전화 조차도 울리기 시작했다.

"RSA를 깨는데 3초. 3초 밖에 안걸린단 말이지."

나는 현혜숙의 전화를 받아 들었다. 이번에도 정확히 "피조" 라는 말이 들려 왔다. 

"진짜 끝네주네."

나는 감탄했다. 흥분감에 들떠서 어디 누구에게라도 소리 질러 알리고, 이 일에 성공한 시간을 메모라도 해보려고 했다. 나는 당장 밖으로 뛰어나가 혜숙에게라도 이야기하려고 했다. 나는 전화를 들고 혜숙에게 뛰어 갔다.

그런데 뛰어 가려는 데, 전화에 표시된 화면에 눈이 갔다.

전화의 대기화면에도 "피조"라는 말이 씌여 있었다. 휴대전화에 대한 귀신 이야기라면 과연 있을 법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피조"로 대기화면을 바꾸기 위해서 전화의 암호도 풀려 있었다. 나는 현혜숙이 평소에 항상 보던 전화의 대기 화면을 볼 수 있었다. 바로 거기에는 그녀 보다 서너살 많이 보이는 어떤 남자와 그녀가 끌어안고 즐겁게 웃고 있는 사진이 있었다.

나는 그가 누구인지 단수메 알아 볼 수 있었다. 그는 연구소를 나설 때 종종 같이 다니는 것을 보고 내가 현혜숙의 애인이나 그 과정에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전화의 버튼을 한 번 누르자 지난 통화 목록이 나왔다. "오빠"라는 사람이 잔뜩 나왔다. 현혜숙에게 친오빠는 없었다. 그런데 현혜숙은 바로 어제 점심 무렵 때까지 "오빠"라고 표시된 사람과 가장 자주 통화를 하고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다가 바로 토요일 점심 이후부터 일제히 그 "오빠"와 이야기를 나눈 기록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오빠"는 토요일을 기점으로 날아가 버린 셈이었다. 그 토요일 밤에 전화한 사람으로 바로 내 이름이 나와 있었다. 그녀가 나를 찾아 전화했던 시각이었다. 이 유령의 집에서, 내내 "피조 피조"하고 울리던 그 목소리가 변하여 "스페어" "스페어" 하고 울려 퍼지는 듯 하였다.

나는 얼굴이 붉어 질 일은 아니다, 붉어 져서는 안된다 하고 버티고 용써 버티고 있는 데도 그것을 보자 얼굴이 붉어 졌다. 현혜숙이 토요일 밤 나에게 전화를 건 것도 바로 토요일날 이 "오빠"에게 이별을 당하고 나서, 그 패배감을 달래보기 위해 옛날을 뒤져본, 일종의 재활용품 보관함 뒤지기 였던 것인가? 정말 그럴까. 그녀도, 아니 그녀야말로 나를 트렁크에 박혀 있는 스페어로 여겨서 아쉬운대로  한 번 뒤져 본 것은 아니었을까?

별 일 아닐 수도 있었는데, 나는 터널터널 걸어 나오는 동안 무슨 대단한 큰 사실이라도 알아 채 놀란 느낌이었다. 이미 현혜숙과 노인은 저만치 멀리 호숫가를 돌아가 걷고 있었다. 숲의 높은 나무 그림자가 빽빽하게 비치는 맑은 일요일 오후의 호숫물을 멍하니 보면서 나는 느린 속도로 그녀를 향해 걸었다.

저 호숫물 속에서 정말 뭐라도 확 튀어나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산들바람에 조그만 물결만 일 뿐 잔잔한 호수 물 위에는 오래전 이 호수를 휴양지로 만드려고 하던 시절에 가져왔을 노젓는 배 두 척이 떠 있을 뿐이었다. 두 배는 몹시 낡아 구한말의 유물과 같은 몰골을 하고 그저 물가에 처박혀 있었고, 그 위에는 호숫가에서부터 드리워진 버드나무 가지가 그늘을 만들고 있었다. 호숫가를 돌아가, 다시 우리들이 모두 만날 때 까지, 그 버드나무가 바람을 따라 조금 움직였을 뿐, 물 속에서는 아무것도 튀어 나오지 않았다.



5.
이후, 내가 이 호숫가의 유령의 집이 있던 곳에 다시 찾아온 것은 꼬박 1년이 더 지난 후였다. 그 1년 동안 모든 일은 일사천리로 풀려 나갔다. 이걸 한 번에 천 리씩 풀려 나갔다고 해야할 지, 한 번에 천 리씩 엉켜 나갔다고 해야할 지 모르겠지만, 하여간 일이 많이 생겼다.

지금 이 호숫가에는 유령의 집 대신에 국가정보원에서 건설한 "P-조셉 센터"라는 것이 있다. 우리가 발견한 것은 생각보다 빠르게 잘 전달 되어, 정식으로 이 "유령의 집"을 암호 해독에 사용하는 방법이 확정되어 자리 잡았다.

정부에서는 이 호수를 특별히 따로 전화망을 쓰는 구역으로 지정해 두었고, 전화국에서는 그때그때마다 보안 휴대전화의 통화를 전달하는 암호 신호를 바꾸었다. 만약 국가정보원에서 반드시 해독해야할 자료가 생기면, 그 자료의 암호를 풀어야만 보안 휴대전화도 통화가 되도록 전화국의 규약을 바꾸도록 조정한다. 그렇게 해 놓으면 이 유령의 집에서는 순식간에 저절로 그 암호가 풀려서 전화벨이 울리고 예의 그 귀신 같은 목소리가 들려 나오게 된다. 그것이 확인 되면, 그 암호가 풀린 상태를 역추적해서 처음에 해독하고 싶었던 자료도 읽어 낼 수 있게 된 것이다.

정부에서는 혹시라도 건물을 짓다가 뭘 부수면 이런 작동이 멈출 수도 있다고 보고, 유령의 집을 "P-조셉 센터"라는 명칭의 암호해독특별관으로 개조할 때에도 원래의 집은 건드리지도 않았다. 대신에 원래의 집이 통째로 들어가는 창고 형태로 건물을 지었다. P-조셉 센터가 탄생하자 몇 달만에 어마어마한 실적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 곳을 이용하면 세계 어느 암호라도 단박에 해독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미국 NSA에서는 한국 정보부에서 고성능 상용 양자컴퓨터를 개발해서 대규모로 운용하고 있다는 헛된 추측을 하기도 했고, 이스라엘 모사드에서는 한국인들에게 포섭된 세계 각국의 배반자 스파이들이 어마어마하게 많을 것이라는 추측을 하면서 이것이 아마 한국 연속극에 중독 된 간접적인 효과가 아닌가 하는 얼토당토 않은 그 망해가는 요즘 한국 연속극을 제대로 한 번 보지도 않은 채 만든 듯한 분석결과를 내어 놓기도 했다. 다행히 국가정보원에서는 그 원리와 구조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았고, 다만 동맹국들이 골치를 썩는 몇몇 암호들을 선심쓰며 해독해 주면서 적당히 달래 주었다. 

1년만에 이곳을 찾았을 때에도 그대로 전처럼 한적했다. 이번에는 혼자 오지 않고 애인과 함께 왔다. 어떻게 하다가 이렇게 되었는 지 돌이켜 보아도 아무것도 해독이 되지 않지만, 지금 나는 김혜란의 애인이다. 나는 김혜란과 사귀면서 김혜란에게 제발 "퇴마사" 이런 걸 제목에 걸어 두고 하는 일은 좀 그만 두고, 하다 못해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단오굿, 용왕굿 같은 문화재 굿을 배워보기라도 하라고 몇 차례에 걸쳐 부탁했다. 결국 그녀는 이런게 사랑의 힘인지 뭔지, 정말로 원래 하던 일은 그만 두고, 인간문화재 굿하는 사람들에게 무형문화재를 익히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로는 신끼가 있다고 했고 내가 보기에는 워낙에 적성에 맞는 일이어서, 그녀는 얼마 안되는 시간 사이에 거의 수제자 대접을 받게 되었다.

다 엉망진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호수와 새로 지어진 집의 모습을 한참 보고 있자니, 뭐 언제는 엉망진창이 아니었냐는 생각도 들었다. 사실 나에게 평생 이제껏 무엇인가 엉망인 것보다 오히려 엉망이 아닌 것이 하나라도 있는 지 없는 지 모르겠다 싶기도 했다. 꼬이지 않은 상태라는 것은 실제로는 없는 것이 아닐까? 꼬이지 않은 삶이란 그냥 상상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닐까? 엉망진창이 아닌 인생이란 그저 신화요, 전설이요, 뜬소문인 것 아닐까?

"이제 한 걸음 옮길 때 마다, 내가 '피'하고 말하면, 니가 '조'하고 말하는 거야."

김혜란은 재미난 게임을 떠올렸다면서 그렇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말을 하면서 이곳의 경치를 보며 호수를 돌아 보자고 했다. 걷자니, 이유 없이 휴가를 내고 찾아온 오전의 호숫가에, 아침의 옅은 물안개도 그대로 였고, 걸을 때마다 차갑고 신선하게 와닿는 그 신비한 느낌도 꼭 그대로 였다.

- 2011년 논현동에서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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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vy 11.06.27 02:51 댓글 수정 삭제
    잘보았습니다. 마지막은 정말 생각지도 못한 반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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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쑤우 11.06.27 19:10 댓글 수정 삭제
    이른바 '국위선양 폴터가이스트 SF'네요 ㅎㅎ
    모바일로 봤을때 글쓴이가 '정해복'님으로 나오는데 이것도 P-Zo 현상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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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슴컹크 11.06.28 11:16 댓글 수정 삭제
    '퇴마'라는 말이 타임머신에 유래되었다는 얘기요, 저는 작가님이 약 파시는 건 줄 알았는데 진짜인가봐요? @_@ 약장수 취급해서 죄송합니다..

    김혜란이 막판에 저렇게 귀여운 대사를 치다니, 정말 반전이네요. 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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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1.06.28 13:02 댓글 수정 삭제
    navy/ 귀신 같은 현상을 정보업무에 이용한다는 것은 인코딩/디코딩 이야기할 때 어느 정도 암시는 되었고, 주인공의 연애 이야기를 파국으로 몰고가기 위해 좀 심하게 휘었다는 생각은 저도 듭니다. 대강 웃어가면서 보기에는 적당하리라 생각 합니다.

    쑤우/ 졸지에... 귀신 붙은 웹페이지... 그러나 내용 때문에 무섭지는 않고...

    슴컹크/ 저게 "퇴마"라는 말의 어원에 대한 제 생각 입니다. "퇴마전기"까지는 약간 추측인데, 기쿠치 히데유키의 영향은 대부분 공감할 줄로 압니다. 원래 "퇴마"라는 단어는 한문으로 성립하기 어려운 말이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일본이나 중국에서 전통적으로는 별로 쓰이던 말이 아니니 말입니다.
  • No Profile
    이기환 11.07.29 18:51 댓글 수정 삭제
    SF납량특집이네요! 하하
    즐겁게 보고 갑니다.
    올 여름 시원하게 보내세요.
  • No Profile
    곽재식 11.07.30 10:08 댓글 수정 삭제
    이기환/ 감사합니다. 귀신이 나타나는 현상이나 초자연적인 일에 대한 소문을 "어떻게 하면 그럴 수 있는가" 하고 세부를 하나하나 따져가기 시작하면 아주 우스꽝스러워질 때가 있는데, 그런 소재를 이야기로 꾸며 봤습니다. 예를 들어서 밤 12시 마다 학교 음악실에서 피아노 소리가 들른다는 류의 이야기는 유령이 12시를 딱 맞추기 위해 시계를 보면서 기다리기라도 한다는 건지, 어떻게 정확히 표준시각으로 12시라는 시점을 "딱 맞출 수" 있게 될 수 있는지 참 애매해지니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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