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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이 결혼 안됩니다.

2007.04.28 00:2704.28

1.

한수진 박사가 나에게 문제의 그 우편물을 전해 준 날. 그 날은 폭풍우가 몰아치는 음산한 날이었다. 정말 세상을 다 어둑어둑하게 하는 잔뜩낀 낮은 구름들과 가끔가다 긴 소리를 울리는 천둥소리가 들려오는 그런 날이었다. 내가 일하고 있는 건축안전연구소는 안그래도 가장 우중충하고 후미진 곳에 자리잡은 건물이었는데, 날씨가 이렇다보니, 온 연구소가 "폭풍의 언덕"이 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잠시 내가 스누피가 쓰는 소설속 첫구절의 등장인물이 아닌가 생각할만큼 그날 내리는 비는 그야말로 음산했다.

나는 처음에는 별 생각도 없이 우편물을 뜯었다. 그날 오후까지 경보기의 통신체계를 끝내게 되어 있었으므로, 일이 정신 없었던 것이다. 나는 시내에 연결된 통신망이 정상적으로 동작하는지 계속 확인하고, 반복해서 검사하는 작업을 하고 있었기에, 어디서 온 것인지도 보지않고 이 스팸메일 비슷한 우편물에 큰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다. 나는 눈으로는 컴퓨터 화면을 바라보면서, 무심히 봉투를 찢었다.

"청첩장"

세 글자가 한자로 적여 있었다. 이번 달에는 축의금 많이도 깨지는 구나. 나는 이 사람에게는 돈을 얼마나 내야 하나 가늠하기 위해 청첩장을 뒤집어 이름을 확인했다.

뭐?

나는 다시 한 번 청첩장에 쓰인 이름을 확인했다. 그녀였다. 대학교때부터 사귀다가, 박사 1년차 때 헤어졌던, 바로 그녀의 이름이었다. 잠깐잠깐. 나는 좀 어리둥절해져서 문제의 날카롭고 빳빳한 종이 조각을 앞뒤로 뒤집어 보며 다시 확인 했다.

"청"
"첩"
"장"

끽 해야 MS파워포인트 기준 15포인트 정도일 그 글자크기가, 백만포인트도 넘을 정도로 크게 눈에 들어왔다. 내가 들고 있는 그것은 틀림 없는, 그녀의 결혼식을 알리는 청첩장이 맞았다.

"하."

나는 내가 생각해도 상당히 괴상한 소리가 나는 이상한 형식의 한숨을 쉬었다. 나는 몸에 힘을 축 빼며 자리에 삐딱히 기대어 눕듯이 퍼질러졌다. 나는 갑자기 줄줄이 이어지는 그녀에 대한 수많은 생각에 빠지게 되었다.

내가 그녀와 처음 만난 것은...

하는 생각을 하려는데, "회의 안들어와요?" 하는 라무 박사의 목소리가 들어왔다. 오전 11시. 회의하기로 되어 있는 시각이었다. 나는 멍하니 일어서서, 내 의지가 아니라 "회의 안들어와요"라는 그 음성에 실려 몸이 이리저리 휘날리는 듯이 망연자실한 태도로 터벅터벅 걸어 회의실로 들어갔다.

"시스템은 푸우울리 다 컴플리션 되고 푸우우울리 다 인스톨래이션 된 거죠?"
"예."
"그럼 이제 우리도 모스트의 컨설버티브 워닝 테스트에 퍼펙트하게 리스폰스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겁니까?"
"예."

내 대답은 좀 무성의하게 들렸을 것이다. 실제로 그때 내 정신상태는 "모스트의 컨설버티브 워닝 테스트에 퍼펙트하게 리스폰스하는 일" 따위에는 무성의했다. "모스트"란, 정부의 과학기술부를 Ministry Of Science and Technology 라는 약자가 발음이 되도록 부르면 초특급 멋있을 거라고 생각한 어느 사무관 공무원의 제안으로 쓰이는 호칭이었다. 무슨 NASA나, UNESCO 처럼 거창한 조직이름을 흉내낸답시고 쓰는 호칭이었는데, 정작 CIA를 씨아 라고 부르는 사람도 없거니와 미국 국방부를 "돋" 따위로 부르는 인간도 드문만큼, 왜 모스트 라는 이름을 이렇게 애쓰며 퍼뜨리려는지 알수가 없었다.

내가 그날 회의에서 보고해야 했던 것은 과학기술부의 안전검사에 대응하는 우리 기계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가 시내에 설치한 기계들은 건물이 수해, 붕괴, 화재, 지진 위험이 있으면 경보를 울리고 소방서에 연락하는 자동 장치였다. 그냥 보통 화재경보기와 큰 차이 날 것이 없는 단순한 것들이었다. 이게 내가 보고하니 마니 하는 문제거리가 된 것은, 바로 그 안전검사에 과학기술부가 관여하겠다고 작년부터 갑자기 나섰기 때문이었다.

과학기술부는 작년부터 "한국 생활 과학 합리화 챌린지 슬로건"이라는 이름으로 뭔가 이상한 일들을 추진했다. 그러면서, 최근 갑자기 망해가고 있는 한국 과학 기술계에 혁신을 가해 보겠다고 나서서 설치는 것이다. 그 중에 우리하고 엮이는 일은, 지금까지 시와 구 당국에서 하던 건축물 안전 검사에 과학기술부가 뛰어든 일이었다. 시청과 구청이 하는 안전관리는 너무나 비합리적이고 비과학적인 주먹구구식인 것이 많기 때문에, 과학기술부에서 합리적이고 과학적인 방식을 도입하겠다는 것이었다.

그 내용이란 것이 바로 "컨설버티브 워닝 얼럿 테스트"로 이 작자들은 흔히 C.W.A.T 즉 "쾃"이라고 부르는 것이었다. 원래 "보수성 검사"라고 다들 부르던 것인데, 위험 경보기가 얼마나 잘 작동하는지 확인하는 검사였다. 이것을 "보수성 검사"라고 부르는 까닭은 다음과 같다. 위험 경보는 너무나 안전에 중요한 일이기에, 오동작을 심하게 하면 탈락시키고 벌금을 물린다. 즉, 위험이 없을 때 오동작해서 경보를 울리는 것은 봐 주지만, 위험이 있을 때 오동작해서 경보가 안 울리는 것은 무조건 탈락시키는 제도였던 것이다.

다시 말해서 건물에 아무문제가 없을때, 잠시 기계가 고장나서 마구 경보를 울리는 것은 상관 없다. 그 때는 그냥 사람들이 좀 대피한다고 한번 소란 하면 된다. 하지만, 건물이 무너질 때, 기계가 고장나서 경보를 울리지 않으면 큰일난다. 그러면 사람이 죽는 것이다. 그래서, 경보기는 오작동을 해도, 실수로 멀쩡할 때 위험하다는 오작동을 해야지, 위험할 때 가만히 있는 오작동을 해서는 안된다.

"모스트에서 이번 쾃 지침을 내려 왔어요."

지금 내 앞에 있는 오 박사님이 작년에 그렇게 말했던 것이 첫번째 과학기술부의 안전검사였다.

"경보기가 사소한 위험에도 잘 동작하고, 별일 없을 때도 보수적으로 경보를 울리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각 경보기마다 경보를 울린 횟수를 일률적으로 검사한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경보를 일년내내 안 울린 경보기는 너무 둔한 경보기로 본다는 거예요. 진짜 사고 날 때도 경보 안울릴 거라고 보는 거죠."
"그런데, 우리 연구소 경보 체계는 굉장히 정밀하고 완벽해서 진짜 사고가 나지 않는한은 경보를 안울릴텐데요."
"그건 문제가 있는데."
"경보기 성능이 좋아서 오작동을 안하면 아무 문제 없는거 아닙니까?"
"문제가 없으면 문제예요."
"그래도 어떡합니까. 우리 경보기는 자체 테스트를 거쳐서 오작동 없는 것만 설치를 하는 건데."
"그래서는 안돼죠. 그래서야...... 모스트의 쾃을 통과할 수 없어요. 모스트에 그 4급공무원 천...뭐 라고 있죠? 그 양반이 일본회사에서 설계한 경보체계는 한 달에 경보를 네번이나 울렸다고 보고 배우라고 어제 두 시간동안 떠들었거든요. 우리는 그걸 능가해야 한다는거예요."

결국 내가 작년 한 해 동안 한 일은, 그 일본 회사를 능가하는 것이었다. 나는 우리가 설비한 경보기를 모두 돌아다니면서 경보기 뚜껑을 열고, 재해 감지기 7호 코일을 망치로 두 번씩 가볍게 두들겼다. 그렇게 조금 감도가 떨어지도록 망가 뜨리는 일을 작년 내내 했다.

"이제는 감지기가 좀 부서졌거든요. 다 좀 고장났으니까, 아마 일 주일에 두 번씩은 경보가 울릴것입니다."
"잘했어요. 역시 기대를 져버리지 않아요."

오 박사님은 나의 신속하고도 능동적인 대응에 대해 그렇게 기뻐했다. 우리 연구소의 설비는 작년 한해 동안 아무 사고도 없었지만, 평균 108번의 경보를 울렸고, 우리는 과학기술부가 선정한 가장 민감한 안전 체계를 개발하는 연구소로 꼽혔다. 연구소 소장님은 이로써 대통령 표창을 받았고, 나는 비록 맥도널드에서 캐첩 박스 나르는 일 정도의 연봉을 받는 비정규직 연구원치고는, 꽤 많은 성과급을 받았던 것이다.

오늘 내가 이 회의에서 오 박사에게 보고 하는 것은 그 뒤를 이어 올해에 새롭게 생긴 일이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어느 정신 똑바로 박힌 동사무소 공무원이 이 정신나간 바보짓을 알아챈 것이다.

"정부의 무능. 일년에 잘못울리는 경보가 백번이 넘으니, 시끄러워서 일을 제대로 못하는 것부터가 문제다. 게다가 시끄러운 것은 둘째치고, 이래서야 경보가 아무때나 자주 울리니, 정작 이제는 경보가 울려도 사람들이 신경도 쓰지도 않고 대피할 생각도 안하게 만들었다는 점이다. 과학기술부 장관은 장관 때려 치우고 양치기 소년이나 하는게 어떤지."

이 공무원은 자기 개인 웹페이지의 일기에 그런 푸념 섞인 글을 올렸다. 그런데, 어떤 인간들이 그걸 복사해 가서 여기저기 올리며 "널리 알려 주십시오. 네티즌 여러분 부탁합니다." 하는 절절한 호소를 한 덕에 세상사람들이 모두 이 일을 알게 되었다. 결국 사이버 수사대는 수사에 착수해, 이 글을 처음 쓴 동사무소 공무원의 신분을 알아냈고, 그 죄의 댓가로 이 공무원은 무능한 공무원을 퇴출시키는 "공무원 경쟁 자극 운동"의 일환에 찍히게 되었다. 그는 결국 근무지가 강제로 옮겨져서 독도 경비대의 수도 설비 담당으로 빠지게 되었다고 한다.

공무원을 동해안의 무인도로 보내버리기는 했으나, 과학기술부에서도 이미 세상에 알려진 바보짓을 계속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과학기술부는 혁신팀의 직원을 모조리 물갈이 했다. 2년전 혁신팀이었던 개혁팀 직원들을 혁신팀으로 배치하고, 혁신팀 직원들은 2년전 개혁팀에서 일했던 경력을 살려 개혁팀으로 배치했다. 팀원들이 그렇게 모조리 바뀌자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왔다.

"이번에는, 모스트에서 쾃이 무조건 경보만 많이 울린다고 상을 주는게 아니예요. 그러면 쾃에서 오히려 감점이라는 거야. 모스트에 그 4급공무원 천... 뭐였더라. 하여간 그 양반이, 그러는데, 우리나라 경보기는 시도 때도 없이 경보를 울리는데, 미국회사에서 설계한 경보체계는 일년에 두 번 밖에 경보를 안 울린다는거예요. 그러면서, 우리는 아직 멀었다고 두 시간동안이나 그러더라고요."

그 바뀐 아이디어에 대해, 지난 달 오 박사는 그렇게 소식을 전했다. 나는 오 박사에게 얼굴을 찡그리며 답했던 기억이 난다.

"그냥 대놓고 이딴짓 왜하냐고 따지면 안됩니까?"
"그건 아니죠. 세상을 효율적으로 사는 건 그런 방식이 아니죠. 원래 우리나라, 이 코리안 엔지니어들은 너무 이 테크티컬, 또 사이언티피컬 마인드만 너무 강하거든요. 그런데, 사실 엔지니어들이 엔지니어링 마인드만 너무 스트롱하면 안돼요. 아메리칸 엔지니어나 유로피언 엔지니어들은 소셜 스킬, 그러니까 커뮤니케이션 마인드가 풍부하거든요. 그게 오히려 태스크 이피션시를 높이는 길이고......"

그러면서, 오 박사는 점심시간이 몽땅 지나가는 동안 세상을 효율적으로 살기 위해 과학자가 가져야할 마음가짐에 대해 이야기 했다. 결국, 나는 거기에 굴복해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그러면, 이렇게 합시다. 저희가 이번에 개발한 8번 처리 칩에 타이머가 들어 있거든요. 그러니까 8번 처리칩에 프로그램을 좀 넣어서, 6개월에 한 번씩 울리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 꼭 일년에 두 번 경보기가 울리는 것 같을 거 아닙니까."
"좋은 생각이기는 한데... 그러면 너무 인위적으로 보이지 않을까요?"
"뭔들 인위적인짓 아닙니까?"
"그러면, 제가 아이디어를 줄께요."

그리하여, 마침내 오 박사가 제안한 결과가 바로 오늘 내가 회의에서 보고하는 것이었다.

"안전 체계에 9번 통신 칩을 장착합니다. 그러면, 우리 연구소에서 임의로 접속해서 언제나 원할 때 원격조종으로 경보기를 울릴 수 있습니다. 그러면, 일년에 두 번 정도 경보를 울리게 하면서, 또 그 간격이나 시간은 마음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입니다."
"9번 통신칩이라고 하지 말고, 그걸, 커뮤니케이션 오토매틱 칩 시스템 이라고 하기로 했으니까, 앞으로는 회의할때도 그렇고 C.A.C.S. 캑스라고 부르세요."
"예. 알겠습니다."

그렇게 대답하는데, 그날 따라 참 내가하는 일이 끝없이 허망해 보였다. 캑스가 다 뭐란 말인가. 창밖에서는 또 다시 공허한 멀리서 울리는 천둥소리가 들렸고, 심난한 내 마음속에서는 다시 그녀의 결혼식과 그 청첩장의 모양이 떠올랐다.

"계속 안해요?"
"예. 죄송합니다. 갑자기 좀 머릿속에 시스테마틱한 프라브름이 좀 생각이 나서요."

나는 발표중에 멍하니 있다가 지적을 들었다. 그래서 나는 위기를 모면하기 위해 대답을 하면서 영어 단어를 두 개나 섞어 썼다. 예상대로 오 박사님은 왠지 반가워 했다.

"그래서, 이제 저희는 9번 통신 칩 그러니까 캑스 개발과 설치 작업을 다 마쳤습니다. 애초에 예상 시한에서는 2주일이 더 걸렸지만, 그래도 마감시한을 넘기지는 않았습니다. 오늘 오후까지 작업하면, 내일부터는 바로 작동시킬 수 있습니다."
"인스톨 할 때, 셋업 닷 이엑스이 는  어베일러블 한 거죠?"
"예."

사실 이짓은 2주일 전에 이미 끝낼 수 있었다. 그런데, 오 박사가 이런 조작은 현장 연구원을 고생시키지 않기 위해 "매니저 레벨"인 자기가 직접하고 싶다고 해서 일이 더 붙어 늘어난 것이었다. 오 박사는 유닉스 명령행을 쓸 줄 몰랐다. 그래서 나는 setup.exe 파일을 복사한 뒤에, 더블 클릭하면 화면에 요란한 아이콘과 함께 시작 메뉴에 "캑스 ver 1.0" 이란 것이 생기도록 프로그램을 계쏙 꾸며야 했다.

오 박사는 "유저 프렌들리한 소프트웨어가 마켓을 룰 하는 거거든요" 라면서 이 속임수용 협잡 프로그램을 두고 별별 해괴한 치장을 다 하도록 했다. 결국에는, 오 박사가 자기 랩톱 컴퓨터에는 윈도 2000 이 깔려 있는데 거기에서도 잘 돌도록 해야 된다고 주장하는 통에 쓰잘 데 없이 더 일이 많아지고 길어진 것이었다.

내가 경보 시스템의 통신칩에 대한 이야기를 마치고 난 뒤에도 회의에는 라무 박사와 바수 박사 등등 몇몇 다른 연구원들의 이야기가 계속 이어 졌다. 하지만, 지난 한 달 동안 골머리를 썩은 내 자신의 연구과제를 보고하는 동안에도 내 마음은 콩밭에 가 있었을 뿐이었다. 당연히 다른 연구원들의 이야기에 나는 콩뿌리의 뿌리혹 박테리아 만큼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광풍을 사방에 흩날리는 토네이도가 몰아치는 거대한 대평원에, 그 지평선 끝까지 펼쳐진 초대형 콩밭을 내 마음은 끝없이 가로지르며 멀리멀리 헤메고 있었던 것이다.

회의가 끝나고 점심시간이 되어 저마다 사람들이 밥먹으러 사라졌다. 곧 텅빈 연구소 건물에 나는 홀로 남게 되었다. 나는 보통 한수진 박사와 함께 칼국수나 일본식 고기 덮밥 따위를 먹곤 했는데, 오늘 한수진 박사는 오 박사님의 맞수라 할 수 있는 우 박사님과 오전내내 뭔가 속닥속닥거리며 웃고 떠들고 하더니 소리없이 어딘가로 사라졌다.

비는 계속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다시 그녀의 청첩장을 집어들고 차근차근 또 들여다 보게 되었다.

네모 반듯한 모양에 금색 반짝이로 두른 테두리, 금색 반짝이로 적힌 부모님 이름과 그녀의 이름. 그냥 청첩장이었다. 나는 그 모양 자체 부터가 약간 짜증스럽기도 했다. 그녀는 항상 내 마음속에 굉장히 대단하고 좋은 어떤 여왕 같은 것이었다. 대학시절 그녀는 학과에서 누구보다 인기가 많았고, 누구 못지 않게 똑똑하기도 했다. 요란한 치장을 하는 것도 아니요, 대단한 집안의 자식도 아니었는데도 언제 누구와 같이 서도 더 돋보여 보였다. 그러면서 그녀는 이상한 열등감 같은 것이 조금 있었는데, 그때문에 우울해 보인다기보다는 묘하게 겸손해 보였고, 무엇보다 내가 참 끝도 없이 좋아하던 사람이었다.

그런, 그녀였는데, 그녀가 다른 남자와 결혼한다는 이 저주받은 청첩장은 그냥 청첩장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그저 인터넷 프린트 사이트에서 클릭 두번 하면 튀어나오는 흔하디 흔한 청첩장 모양일 뿐이었다.

나는 멍하니 있다가, 답답한 마음에 누구에게 이야기나 해 보려고, 전화를 꺼냈다. 전화에는 그녀에게 온 문자메세지가 하나 있었다.

"청첩장 받았어? 놀랐지. 나 결혼해. 꼭 오라고. ㅋㅋ"

그 문자를 읽자 나는 오랫만에, 사랑의 집착에서 헤메는 멍청한 사람들이 항상 하는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 한마디 한마디, 행동 하나하나에 갖가지 의미를 찾아내고 혼자 온갖 추리를 하면서 그 문자 메세지를 여러번 연거푸 읽으며 분석하기 시작한 것이다.

비록 헤어진 후에도 간간히 연락해오기는 했지만, 그래도 우리사이에는 언제나 대학시절을 함께 했던 그 기억이 가장 크게 남아 있지 않은가. 누구와 결혼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지금 이녀석을 그때 나를 사랑했던 것보다 더 사랑하고 있는 것일까. 아니, 지금도 내가 그녀를 알고 그녀가 나를 아는 만큼 두 사람은 서로 알고 있기라도 할까. 그런데, 그녀는 "놀랐지"라든가 하는 말로, 가벼운 장난이라도 되는양 자신의 결혼을 나에게 알리지 않는가.

이제는 나를 보는 것이나, 드라이버 세트에 끼우도록 되어 있는 손잡이 부분을 보나, 느낌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인가. 그래도 기억이 있고, 추억이 있지. 어떻게 그냥 정말 아무렇지도 않을 수야 있을까. 3학년 기말고사를 앞두고 있었던 그 사건이나, 우리가 항상 단 둘이 만나던 장소인 식품실험실 옥상에서 보이던 그 경치가 생각이 나지 않을까. 그러면, 결혼한다는 말을 저렇게 가볍게 할 수 있을까.

나는 이제는 마지막에 붙은 "ㅋㅋ"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박사 1년차 때였나, 그녀는 맞춤법 틀리는 것이나 이상한 속어 같은 것들을 참 싫어한다고 릭스다인에서 밥먹다가 한 참 떠든 적이 있다. 나는 그때 오랫만에 맛난거 먹으려고 시간내서 왔는데, 꼭 투덜거리고 짜증내는 이야기만 해야겠냐고 투덜거리고 짜증냈다. 그녀는 또 투덜거리며 짜증을 냈고, 그래서 우리는 음식점의 모든 사람들이 쳐다 볼 정도로 소리를 높이며 다툰 적이 한 번 있었다. 그 기억은 선명하다. 그런데, 왜 그녀는 스스로 문자메세지에 "ㅋㅋ" 를 붙여 보냈을까.

이것은 그녀가 이 말을 억지로 좀 농담인것처럼 보이려는 마지막 수법 아니었을까. 도저히 "결혼한다"라는 말을 심각하지 않은 어조로 전달하지 않을 방법을 찾지 못해서, 마지막 수단으로 그토록 싫어하는 "ㅋ"을 쓴 것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그녀는 여전히 나에 대해서 여러가지로 의식하고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닐까. 그래서, 애써 아무렇지도 않은 듯, 이제 나쯤은 가벼운 옛 추억으로 여기고 있는 듯, 뭔가 정리하고 스스로 공포하는 듯한 그런 의도가 서려 있어서 이런 문자메세지를 보낸 것은 아닐까.

아-. 다 무슨 쓸데란 말인가. 어쨌거나, 중요한 것은 그녀는 어떤 중늙은이를 인생을 함께할 마음의 배필로 정했고, 이제 1주일 후면 결혼을 한다는 것인데, 그동안 나는 이 구석에서 멍청하게 모스트의 쾃과 캑스 따위를 고민하며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이었다. 답답한 가슴에 정신만 사나울 뿐 도무지 "캑스" 프로그램이 손에 잡히지를 않았다. 나는 아무 쓸모 없이, 인터넷 뉴스 사이트나 빙빙 돌면서, 이런저런 읽을 거리 따위를 조금의 감흥도 없이 그져 글자만 읽으며 자리 앞에 계속 앉아 있었다.

그렇게 멍하니 앉아서 나는 아무 일도 못하고 청첩장을 받은 오후를 내내 가만히 있었다. 그 비내리는 날 오후 동안 나는 그렇게 우두커니 앉아서 이적의 "Rain"이나 이승훈의 "비오는 거리" 같은 노래들을 들었는데, 노래가 감동의 물결이 되어 비처럼 가득 차 올라서, 그 안에서 헤엄을 치다가 무한히 잠수해 가라앉아 버릴 듯한 그야말로 푹푹 잠기는 느낌을 받았다.

구름 속에 갖혀 있어 별 값도 못하던 무의미한 해는 그러는새 저버렸다. 곧이어 저녁이 찾아왔다. 퇴근시간은 지났지만, 나는 오늘 마쳐야 하는 일들을 전혀 끝내지 못했다. 나는 일을 끝내기 전에는 퇴근을 할 수 없었다. 나는 조금만 신경써서 일해서 끝내고 일단 집에 가서 계속 괴로워하자고 생각했다. 하지만, 도무지 그 조금만 "신경쓴다는 것"을 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녀가 돌리는 웹사이트에 들어가 보거나, 예전에 그녀가 나에게 보냈던 문자메세지를 내 전화에서 찾아본다거나 따위의 일을 반복하면서 계속 한자리에 앉아 헤멜 뿐이었다.

사실 우리가 4년이 좀 넘는 그 시간동안 그렇게 행복하고 밝고 명랑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물론 대체로 행복하고, 대부분 밝았으며, 전반적으로 명랑했다. 그러나 우리는 다투기도 했고, 나는 그녀의 키가 너무 작다고 생각했으며, 그녀는 내가 맥주와 팝콘을 쌓아 놓고 "빽 투 더 퓨처" 1,2,3편을 연달아볼 때는 정떨어질 정도로 멍청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그 동안 중간에 한 번 헤어진 적도 있었다. 그것은 은영이라는 여학생이 신입으로 들어왔을 때였다. 은영은 키가 크고 마이클 J. 폭스를 무척 좋아했다.

보통 여자친구의 여자 친구들 중에는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1명 이상 꼭 있었다. 그 절반 정도는 그녀가 나 보다 낫기 때문에 나같은 한심해 보이는 공대생은 당장에 던져버려야 겠다고 생각하는 부류였다. 그리고, 나머지 절반 정도는 내가 그녀보다 낫기 때문에 질투심에 뭔가 파탄나길 바라는 부류였다. 그 때에도 어김없이 그런 친구가 있었고, 바로 그런 그녀의 친구가 은영과 나와의 관계에 대한 어림없는 추측을 소문으로 흘렸다. 그것이 문제의 원인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어느날 그녀는 굉장히 진지하고 무거운 목소리로 나를 불러서 약 40분간 이리저리 말을 빙빙 시계방향으로 돌리며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그라고, 그 다음에는 말을 40분간 시계 반대 방향으로 돌리더니, 그리고 나서야 마침내 헤어지자는 이야기를 했다. 이유는 "우리가 안맞는 면이 있고" "사람과 사람의 관계라는 것이" 어쩌고 하는 것이었지만, 뭔가 인간이 정상적인 지성으로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 소문이 전하는 사실은 얼토당토 않은 것이었지만, 내가 그 소문과 같은 상황을 상상하는 적이 없지는 않았다는 것이었다. 나는 좀 당황한 척 하긴 했다. 하지만, 결국 그래야 겠다면 그러자고 했다. 그녀가 아깝긴 하지만, 어차피 우리는 벌써 사귄지 몇 년이 지나 좀 지친 상황이었고, 나는 헤어지고 나면 이제는 정말로 은영과 어떻게 잘 해 볼 기회가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나는 그녀의 표정을 정확히 볼 수는 없었지만, 어쨌거나 나는 "좋은 친구로 같이 지내자"라는 그 제안을 단번에 접수했다. 그리고 그길로 어딘가로 맥주를 마시러 떠났다.

내가 지금 이상하게 생생하게 기억나는 장면은 바로 그 다음 이틀인가 사흘인가 지난 후였다.

나는 학자금 대출 이자를 내러 은행으로 가는 길이었다. 건물을 나오니, 그녀가 나타나 어디 가느냐고 물었다. 나는 학자금 대출 이자를 내러 간다고 했다. 그게 학자금 대출이자라는 것도 엄청나게 많은 이자액수 때문에 잊혀지지 않는다. 우리는 말그대로 친한 "좋은 친구"였고, 헤어진 후 이틀 동안에도 숙제 이야기나 도서관에서 무슨 책을 찾아 보는게 응용안전관리공학 과목에 도움 되는지 같은 이야기를 자연스레하곤 했다. 그녀는 자기도 은행가는 길이니 같이 가자고 했고, 자연스레 우리는 같은 길을 나란히 걸었다.

정말 똑똑히 기억난다. 5월달 이었다. 구름은 좀 있었지만, 햇살이 정말 기분 좋은 즐거운 날씨였다. 가끔 봄바람이 살랑 불 때마다 학교 나무들의 연두색 잎이 소리를 내며 흔들리는데, 참 보기 좋았다. 우리는 자연스럽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고, 처음에는 요즘에는 신입생들이 갑자기 학교 식당에 많이 들어와서 너무 복잡해졌다는 이야기를 했던 생각이 난다.

그렇게 이야기를 하다가, 은행 바로 앞에 다 왔을 때 쯤이 되어서, 우리는 은영에 관해서 이야기를 하게 되었다. 우리는 요즘은 뭐가 유행이라느니, 누구는 뭘 좋아할 거라느니 하는 이야기에 곁들이다보니, 내가 보기에는 신입생 중에는 은영이 제일 괜찮아 보인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녀는 고개를 좀 과장된 동작으로 끄덕끄덕 하는 듯 하더니, 자기가 보기에도 은영이 좋아 보인다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좀 짖궂은 질문일 수도 있겠다 싶었지만, 어떻게하면 은영에게 관심을 끌 수 있을까 하는 이야기를 했다. 사실 그때 나는, 이 학자금 이자를 다 현금으로 내면 이번 달을 뭘 먹고 사나 하는 생각을 더 심각하게 하고 있었다.

그녀는 은영과 나에 관한 이야기들을 조금씩 하다 말고, 갑자기 좀 말을 멈추더니, 놀랍게도 갑자기 은행 건물 앞에서 서서 울기 시작했다. 나는 그제서야 번뜩 정신이 들었다. 그녀가 울먹이며 하는 이야기란, 나한테 할 말이 있어서 아까 강의실 앞에서 내가 나오기를 기다렸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아무래도 생각해 볼 수록 너무 성급하게 한 것 같아서, 오늘 나에게 우리 다시 어떻게 잘 해보면 안되겠냐는 말을 해보려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 말을 하려고 기회를 보고 있는데, 나는 속도 모르고 사람 속뒤집어 놓는 은영의 관심끄는 이야기 따위나 늘어놓았다는 것이다.

나는 갑자기 굉장히 미안하기도 하고, 갑자기, 뭔가 확 감동적이기도 해서, 그녀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그녀는 자리에 서서 고개를 숙이고 어깨를 들썩거리며, 정말 불쌍하게 울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붙들고. "좋아. 그게 훨씬 좋아. 그렇게 해." 하면서 좀 허둥대면서 그러자고 했다. 그 때 그 맑던 하늘에서 갑자기 비가 한 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제법 비가 내리는 것처럼 비가 내려, 그녀의 머리를 적시고, 눈물이 흐르던 그녀의 얼굴도 더 젖기 시작했다.

그렇게 햇살이 가득한 밝은 날에 쏟아지는 비를 맞으면서 그녀는 한참 울더니, 우는 가운데 나를 붙들고 한탄하듯이 말했다. 애들이 그러는데, 그녀만 나를 많이 좋아하고 맨날 내 생각만하는 것 같고, 나는 그냥 그녀랑 같이 다니는 것 뿐이지 별 관심도 없고 덤덤한 것이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것 같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면서 그녀는 안겼다.

나는 이상하게도 그때 내가 정말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녀가 항상 안길 때면 가슴속으로 깊게 들어와서 고개를 묻고는, 잠시후에 다시 고개를 들어 내 턱에 한 번 입을 맞추곤 했는데, 그 느낌이 어떤 기분인지 그 때 나는 절절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그녀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하는 그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내가 그녀와 같이 지내면서, 이렇게 울고 웃는 모습에 가까이 있는 것이 굉장히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그녀를 사랑하고, 그녀가 내 곁에 있는 것이 참 기분좋은 내 영혼의 바탕이라고 생각했다.

그녀가 울먹이며 다시 나랑 사귀고 싶다고 말하려고 기다렸는데, 넌 왜 그런 이야기만 하냐고 빗속에서 이야기하던 그 날. 그 비오던 날을 기억하면서 나는 한숨을 한 번 푹 쉬어 보았다. 어느새 다른 연구원들은 퇴근하고 가고 없고 나 혼자 남아, 아직도 손도 대지 못한 일을 마쳐야 한기에 자리에 붙어 있었다. 괜히 이제 그녀가 결혼한다고 생각하니, 그 결혼 소식에 멍청하게 충격먹은 내가, 예전에 그녀가 다시 돌아왔던 그 추억만 계속 파고 있는 초라한 꼬락서니인 셈이었다.

이제는 정말 시간이 늦어 정리하고 가야 할 때였다. 나는 대강 억지로 때워놓기라도 하자는 생각으로 일단 9번 통신칩 체계로 들어가서, 엉성하게나마 재빨리 마무리 짓기 시작했다. 어려운 일도 아니고,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도 아니었지만, 내가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했던 모든 일 중에 가장 하기 싫은 일이었다. 나는 눈에 보이지 않도록, 이 청첩장을 어떻게 찢어서 버려버릴까 하다가, 그게 오히려 더 마음에 심하게 남을 듯 해서, 그냥 가방에 집어 넣었다.

그녀는 이제 1주일 남은 결혼을 앞두고 지금 결혼 생각만 하고 있을 것이다. 신혼집에 그 남편과 함께 쓸 가구는 어떻게 쓸지, 어느 작은방을 그 남편과 함께 낳을 아들딸의 방으로 할지를 고민하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갑자기 지나간 옛 애인을 그리워하면서 일도 제대로 손에 못잡고 오락가락하다가, 겨우 이 따위 캑스나 쾃 같은 우습지도 않은 이름이 붙은 일을 해야만 하는 것이다.

갑자기 울적해져서 집에 가야하는지 말아야하는지도 잘 생각이 정리되지 않지만, 그래도 겨우 일을 마치고 일어서는데, 갑자기 이 텅빈 연구소에 누군가 걸어 들어왔다. 한수진 박사였다.

"어, 너 안가고 있어구나. 야, 너 나 술 사줘."

한수진 박사는 얼굴이 붉게 변해서 혀 꼬부라진 소리를 하고 있었다.

"내가 오늘 저녁에 우세희 박사님이하고 상담을 길게 했거든. 그런데, 결론이 뭐냐면. 니가 정말 문제라는거야. 우세희 박사님이 그러는데, 나는 너랑 술을 한 번 먹어야 된데."
"뭔 소리야. 내일은 출근 안해요? 지금이 몇 시라고. 집에 가서 쉬고, 내일 봐요."

나는 더 생각이 혼란스러워지기 전에 그냥 나오려고 생각했다. 연구소 문을 나서려는데, 뒤에서 한수진 박사가 내 팔을 잡았다.

"야, 너 내가 술 사달라는데 그냥 가기야? 우리 사이가 이거 밖에 안돼?"
"지금껏 술 드시다 왔잖아요. 부족하면, 우세희 박사님하고 어디 딴데 또 가든가."
"아냐, 우세희 박사님은 잉글리쉬야 인디언의 마인드에 대한 언더스탠딩이 없어."

한수진 박사는 술 취한 소리로 일부러 우세희 박사님이나 오현명 박사님 말투를 웃기게 흉내내며 이야기 했다. 영국인이니 인도인이니 하는 이야기는 평소에 그녀와 점심먹을 때 잘 하던 우스갯소리였다. 물론 이번에는 그다지 웃기지는 않았다.

우리 연구소는 30 여명이 조금 못되는 사람들이 일하는 곳이었는데, 누가 보면 꼭 20세기초의 인도의 영국 주둔부대 같아 보였다. 인종에 따라 명백히 직업이 나눠지는 놀라운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산업기술보호법과 비정규직노동자법 때문에, 한국 연구원들은 직장을 얻을 수 없고 비정규직 자리에 있는 소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 연구소에서는 외국에서 박사학위를 받은 연구원들만 채용해서 팀장이나 부서장 같은 간부를 맡겼다. 이 사람들은 모조리 미국 내지는 영어권에서 유학갔다가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들을 "영국인"들이라고 부른다. 바로 오현명 박사님이나 우세희 박사님 같은 사람들이다.

한편 실제로 일을 하고, 연구의 중심이 되는 사람들은 외국 국적자 들이었다. 한국 사람들은 산업기술보호법 때문에 아무도 연구원으로 취업하려 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외국인들은 이 법에서 자유롭기 때문에 한국 연구소에 취업해서 기술을 배워 자기 나라로 되돌아가려는 수요가 꽤 있었다. 우리 연구소에는 중국사람들이나 러시아 사람들이 조금 있기는 했으나, 다수는 인도 사람들과 파키스탄 사람들이었다. 이 사람들이 바로 "인도인"이라고 불리우는 사람들이었다.

그리하여, 우리 연구소가 돌아가는 모습은 기본적으로 "영국인"들이 "커뮤니케이션"과 "휴먼 네트워크"에 집중하는 고수준의 작업을 위해서, 하루종일 정부 보고서의 문단 모양과 글꼴을 바꾸도록 비서들을 닥달하면서 시작된다. 그러는 동안 "인도인"들이 연구소의 미래와 거의 상관없는 개인 각각의 연구를 진행하는 형태로 연구소가 굴러가는 것이다. 영어로 대화하는 영국인과 인도인들은 수없이 많은 "OK"와 "You know"를 주고 받지만, 결국 영국인들은 인도인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 수 없었고, 인도인들은 굉장히 훌륭하고 대단한 일을 했다고 발표하지만 영국인들 역시 그게 뭔지 알 수 없었다. 그러는 가운데, 과학기술부의 기술검사 같은 급한 일이 생기면, 그것만은 어떻게 황급히 막아나가며 버티는 것이 우리 연구소의 모양새 였다.

한수진 박사와 나는 기본적으로 인도인에 속한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직장을 자유롭게 옮길 수 있는 진짜 인도인들과는 달랐다. 우리는 법적으로 연구소에 묶여 있으면서도 법적으로 비정규직으로 있을 수 밖에 없는 한국 사람들이었다. 그래서, 또다른 처지였다. 결국 한수진 박사와 나는 같이 어울려 다니는 일이 많았다. 우리는 나이도 동갑이었고, 통하는 취미가 있기도 했기에, 가끔 같이 누구의 연주회에 간다거나 무슨 전시회를 간다거나 할 때가 있었다.

"우세희 박사님이랑 장시간 상담 했다면서요."
"아, 몰라. 그건 그거고. 여튼. 나 술 사줘."

이런 걸 두고 때가 안 좋다고 하는 것인지. 나는 사실 한수진 박사에게 마음이 있다면 마음이 있었다. 한수진 박사는 사람 착실하고 인상도 썩 좋거니와, 사람들과도 두루두루 잘 지내는 편이라서 누구나 호감을 가질 만했다.

한편, 우세희 박사님은 한수진 박사에게 "언니가 오늘은 점심 사줄께." 라든가 "언니가 오늘은 술사주마, 따라와라" 라면서 한수진 박사와 뭉쳐다녔다. 한수진 박사의 말에 따르면 우세희 박사님은 "카리스마"적이고, 굉장히 많은 사람들의 "인생상담"을 해주는 걸출한 인물이라고 했다. 나는 그 우세희 박사님이 "인생상담"을 위해 술마시며 들은 이야기를 줄줄이 다른 장소에서 흥미거리 화제로 삼는 모습이 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게다가 그 "카리스마"라는 것도, 기실은 연구소에 온 택배기사나 피자배달원에게 마음에 안드는 점을 매몰차고 잔혹하게 몰아붙이는 것 외에는 어떤 실체가 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평소에는 한수진 박사와 단둘이 언제 같이 저녁이라도 맛나게 먹어야 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왠지 한수진 박사의 술취한 모습이 정 떨어졌다. 우세희 박사님처럼 스스로 점점 변해가려고 노력하는 듯한 그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인가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 술에 취해 말하는 말투가 좀 마음에 안들기 때문인가도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 어느 것도 아니었다.

"야, 너 이렇게 배신하기야. 니가 나한테 이럴 수 있어. 야, 니가 나한테 이럴 수 있는 거야."

나는 그냥 연구실을 나와서 오늘도 밤새도록 실험을 하고 있는 지훈에게 갔다. 지훈은 한수진 박사의 대학원 2년 후배였고, 나와도 친한 사이였다. 나는 지훈에게 한수진 박사가 아직까지 연구실에 남아 있으니까, 집에 잘 들어가는지 좀 확인좀 해 보라고 하고는 연구소 건물을 나왔다.

하루 종일 내리던 비는 거의 그쳐서, 이제는 빗방울만 가끔 하나 둘 씩 떨어지고 있었다. 나는 갑자기 그동안 내가 만나던 사람들과, 내가 성공해 보겠답시고 밤새도록 과학기술부에서 던져주는 괴상한 일들을 헤쳐나가던 날들이, 어쩌면 헤어진 그녀에게 언젠가 자랑하기 위해서 그랬던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을 문득 했다. 차가운 밤공기를 들여 마시고는, 다시 생각해보니, 그러면서 언젠가는 그녀와 다시 만나서 보란듯이 멋있는 척을 하고, 결국 그녀와 같이 다시 맺어지기를 지금껏 마음 한구석에서 꿈꾸며 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은식이냐? 나다. 어디냐, 안 바쁘면 어디 가서 맥주나 한 잔 하자."

연구소를 나선 나는 전화로 친구를 불러내서, 그날 밤이 깊도록 술을 마시며, 청첩장 이야기와 그녀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2.

은식은 연구소에서 일하면서 다시 만난 친구였다. 우연히도 은식은 소방서에서 일하고 있었고, 건축안전연구소에서 일하는 나와 같이 만나 하게 되는 일이 많았다. 그렇게 사교적인 사람은 아니라도, 나름대로 많은 친구와 함께 살아왔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막상 삼십줄에 접어들어 하루종일 연구소에 틀어박혀 살다보니, 어울릴 친구라고는 은식 정도 뿐이었다.

"헤어지긴 왜 헤어졌는데."
"군대 갔다와서 박사 1년차 때, 걔는 학위 따서 졸업했거든. 걔는 직장 잡고, 나는 대학원 다니고 그러다 보니까 자꾸 좀 어긋나고 그러더라고. 만나고 헤어지는 시간이 좀 줄어들고 한 몇십분 어긋나는 거라고 볼 수도 있는데 자꾸 멀어지는게......"
"그냥, 대학원에 있으면서 니가 사는게 좀 고달프고 답답해서 괜히 막 걔한테 짜증낸 거 아니냐?"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맥주잔만 비웠다. 학교에서 밤샘하며 일에 시달리다가 좀 꾀죄죄한 몰골로 허겁지겁 달려나가면, 회사일을 마치고 퇴근하는 그녀가 말끔한 정장차림으로 좀 낯선 표정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느낀 기분이 은식이 말하는 그런 것일 수도 있다. 무슨 기념일이다 싶어 한참 기다리고 있는데, 그녀는 늦게 회식이 끝나 억지로 돌리는 폭탄주를 마시고, 그 회사 사람들과 어울리다 힘든 표정으로 나타난 때도 많았다. 그게 은식이 하는 이야기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결혼식에는 갈 거냐?"
"왠지 가고 싶을 거 같기는 한데. 사실, 지금 못보면, 나중에는 더 보기 힘들지 않지 않겠냐. 나름대로 사연도 있는데 결혼하고 나면 둘이 그냥 얼굴만 본다고 해도 좀 이상하잖아. 결혼식이 마지막으로 볼 기회 아니겠냐."
"그렇긴 하지."
"그래서."
"그런데... 그게 말야, 거기 결혼식이면, 대학교 때나 대학원 때 알았던 애들 많이 올거 아냐. 상관없냐? 그 중에는 나름대로 너랑 걔랑 둘다 아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거 아냐. 괜찮을까?"
"상관 없을려나......"

그러고 보니, 그렇기는 했다. 그녀가 결혼하는 모습이야, 그냥 보면서 울적하니 감상에 한 번 젖으며 어떻게 때워가면서 넘어갈만도 하다. 하지만, 거기에 모일 다른 사람들은, 예를 들면, 이런저런 우리 사연과 엮이는 바가 적지 않은 은영이나, 우리 둘을 같이 불러 주말 점심을 사주거나, 어디 근처로 소풍을 가자고 하던 선배 부부들을 보면 뭐 어떤 표정을 지어야 하나. 그냥 밝은 표정만 짓는 것도 멍청해 보일 거고, 그렇고 마음 속 있는 대로 울상을 짓고 있어서야 그야말로 한심해 보일 것이다.

"이게, 그 자식이랑하는 결혼식이 아니라, 너랑 하는 결혼식이면 만사 생각할 필요 없이 행복할건데, 말이지."

은식은 애써 상황을 가볍게 해보려는 듯이 웃었다. 참 조잡한 생각이었지만, 사실이었다. 대학 때만해도 "나중에 결혼은 좀 더 키가 큰 애랑" 어쩌고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자주 있었건만. 지금은 참 간절하게도 그녀와 내가 결혼했으면 좋겠다는 허무한 상상에 빠져들고 있었다. 그만큼 술을 퍼먹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는 은식과 자리를 파하고, 터벅터벅 집으로 들어오면서, 반성 비슷한 것을 하고 있었다. 애초에, 그녀와 헤어지는 것이 아니었다. 구관이 명관이라고... 이럴 때 쓰는 말은 아니다만, 하여간, 그냥 어떻게든 관계를 잘 유지해나가다가 학위 받을 때쯤해서 그녀와 결혼 했어야 했다. 그게 잘 안된다면, 지난 번에 그녀가 직장에서 만난 첫번째 애인과 헤어져서 울적해하며, 나한테 자주 전화하던 그 때 어떻게 다시 잡았어야 했다.

아니면, 작년 초에 그녀가 다니는 회사와 공동연구를 진행해서 마주칠 기회가 많았던 그때 어떻게 해야 했다. 하다 못해, 지난번 동창회 때 그녀랑 만나서 길게 이야기했던 그때. 그때 되돌렸어야 했다. 맞다. 그때 이상하게 그녀가 이야기를 길게하고 오래한다고 생각했는데. 나는 차끊기니까 일찍 들어가라는 소리만 했지. 뭔 영구짓인지. 지금 돌이켜 보니, 지난 날 내 바보스런 행동들이야말로 그야말로 영구 아트 무비였다.

그날 나는, 술김에 더스틴 호프만 나오는 "졸업" DVD를 빌려 보았다. 영화가 끝나기 직전, 여자 주인공이 결혼식을 하고 있다. 남자 주인공은 갑자기 결혼식장으로 허겁지겁 뛰어와 그녀의 이름을 소리쳐 부른다. 사람들은 뭔 일인지 싶어 돌아보고, 뛰어드는 남자 주인공을 막기 위해 결혼식장은 난장판이 되어 간다. 남자 주인공은 사람들을 뿌리치고 여자 주인공에게 달려 가고, 여자 주인공은 남자 주인공을 보는 순간, 갑자기 뭔가 깨닫고 손을 잡고 같이 뛰어 도망친다.

이건 위험한 방법이다. 일단 이건 잘못하면, 몰매 맞고 체포될 위험성이 있다. 일부러 달려들어와 소리를 지르니, 자진해서 소란을 불러일으키는 꼴이고, 분명히 그녀에게 접근도 하기 전에 끌려나갈 것이다.

더군다나, 무슨 미친 사람처럼 그렇게 소란 떨면서 엉켜 싸우고 밀치며 달려드는 행패를 볼작시면, 그녀 입장에서도 그냥 나를 단순한 미친 사람으로 생각할 가능성이 높다. 그녀와 내가 정말로 얼마전까지 돈돈하게 관계를 이어오며 절절하게 감정을 이어온 것도 아니고, 몇년이나 같이 지내다가 그냥 지루해져서 시들해지며 헤어진 지리멸렬한 모양에 가깝지 않은가. 미친놈처럼 등장한 나를 두고,  그냥 말그대로 결혼식 망치는 미친놈으로 여길 확률이 훨씬 높다.

다음날 내가 본 영화는 "세렌디피티" 였다. 이 영화의 상황은 정말로 내 환상속을 가득 채울 만한 아주 멋진 이야기다. 나는 아무짓도 안하고 가만히 있는데, 그냥 결혼 하는 사람이 스스로 내 생각을 하면서 이건 아니다 싶어 결혼을 멈추는 것이다. 나는 아무 것도 안하는데, 내 간절한 진심이 그냥 마법처럼 전달되듯이, 무슨 운명의 클라이언트와 서버처럼 딱 들어맞아서 내가 그녀를 사랑하는만큼, 그녀도 나를 사랑하다 못해 멀쩡한 결혼을 스스로 망쳐버리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역시나 그야말로 헛된 낮 꿈일 뿐이었다. 더군다나 설령 그녀가 나를 여지껏 사랑하고 있다고 해도, 여기에는 겹겹의 안전장치가 있다. "이 결혼은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라고 생각을 그녀가 한 번쯤 할 수는 있다. 하지만 그녀가 그런 생각을 할 수록, 주변에 그녀의 친구와 선배들이 몰려들어, "원래 결혼하기 전에는 다 그런 생각이 든다"며 무시하라고 할것이 틀림없다. 이것은 결정적이다.

그러면, 그런가보다하면서, 놀랍게도 하고 싶지도 않은 결혼을 향해, "결혼은 그냥 대강 하는거야"라면서 스스로 되뇌이며 한발한발 눈을 질끈 감고 걸어가는 것이다. 게다가 그런 것을 극복하고, 결혼을 깨갰다고 작심한다고 해도, "나 결혼 안할래요"한다고 하면, 모든 일 준비에 참여한 그녀의 부모님께서 말리고 들 것임에 틀림없다. 당연히 그녀의 남편될 녀석도 왠만해서는 별별 감언이설과 윽박지름을 섞어 참고 결혼하자고 꼬드길 것이 분명하다. 갑자기 그녀가 뭔가에 씌여 결혼을 안하기로 결심했다고 해도, 이 모든 겹겹의 장애물을 돌파하기란 불가능하다.

다음날 내가 본 영화는 "로빈 후드" 였다. 이것은 될만하다. 여자주인공은 사악한 왕과 강제로 결혼할 판이다. 이 때, 우리의 의로운 주인공이 나와서 사악한 왕을 몰아낸다는 정치 정변과 동시에, 아울러 결혼식까지 중단시킨다는 것이다. 매우 훌륭한 상황이다. 그녀가 결혼을 당장에 때려치우고 싶은 마음이 없다고 해도, 이것은 그와는 별도로 결혼을 중단시킬 다른 대의명분이 있는 것이다. 비록 화살은 쏘아 본 적이 없고, 내가 후드 뒤집어 쓴 모습이 어울리는 사람도 아니다만, 어차피 목숨걸고 한다면 한 번 시도 해 볼만도 한 상황이다.

그러나, 그녀가 결혼을 결심한 상대라면, 탐관오리이거나 악랄한 군주일 가능성은 거의 없다. 그보다는 돈 잘벌고 착하고 잘생긴 누가봐도 훌륭한 민주시민 신랑감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마 십중팔구 빽 투 더 퓨처 보면서 술퍼먹는 일 따위와도 거리가 먼 사람일 것이다. 그녀가 결혼식을 하는게 국가와 민족, 민생 안전에 거슬리는 일도 전혀 아니었다. 그녀가 무슨 12 12 사태를 일으키며 결혼 한다거나, 성혼 서약 대신에 유신 헌법을 공포하려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내가 그 결혼식을 멈출 대의 명분은 없는 셈이다.

목요일날 본 영화는 "세 남자와 아기 바구니" 2편이었다. 이 영화는 정석대로 였다. 결혼식이 벌어지고, 한 단계 한 단계 결혼식의 과정이 진행되고, 남자 주인공은 허겁지겁 자동차를 몰고 달려간다. 결혼식의 맹세와 선포가 진행되기 직전, 여자 주인공이 마음속으로 사랑하던 남자 주인공이 마침내 아슬아슬하게 나타나 사랑을 고백하고 여자 주인공은 마음을 돌린 다는 것이었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부분은 두 가지 였다. 하나는 여자 주인공이 결혼하는 사람이 영국에 사는 좀 낯선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결혼을 멈추려고 달려오는 주인공을 과감한 친구 두 사람이 도와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세" 남자와 아기 바구니 시리즈 아니겠는가. 주인공이 갑자기 어느 학교 선생님과 급작스럽게 연결되는 부분은 그냥 넘어간다손 치더라도, 이 두 가지야말로, 주인공이 갑자기 결혼식에 뛰어들어 신부를 빼내는데 빼낼 수 없는 핵심이었다.

내 상황은 둘 다 아니었다. 아는 바 없지만, 분명 그녀의 남편은 대한민국에서 답답한 직장생활에 쩔어가고 있는 그냥 멀쩡한 사람일 것이다. - 어쩌면 문자 뒤에 습관적으로 붙이는 "ㅋㅋ" 같은 것은 그녀가 남편될 자의 버릇에 물든 것인지도 모른다. - 성실하고 어디하나 빠질 것 없어서 결혼정보회사에 인적사항을 때려넣으면 분명히 고득점을 할만한 인간일 것이다. 내가 아는한, 머나먼 타향살이를 해야 하는 사람도 아니었고, 무슨 역마살이 끼어서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사람이라는 소문도 없었다. 그냥 한국에서 한 시간에 수십쌍식 생겨나는 그런 남편의 평균치에서 조금 위쪽을 웃도는 좋은 인간인 것이다.

결혼식에 뛰어드는 짓을 지원해 줄 두 명의 친구에 대해서는 더욱 암담하다. 물론 대학시절 안주거리로 삼자면서 기숙사 뒤뜰에 자라던 감나무에 같이 기어오르던 약간 제정신이 아닌 듯한 친구들은 내 주변에 많다. 그리고, 그 친구들은 꽤나 멋진 녀석들이고, 어림없는 껀수에 흥미진진하게 인생의 대부분을 걸만한 재목들이다.

하지만, 그 녀석들은 진정한 친구였다.

내가 은식에게

"몰래 주례 선생님으로 변장하고 결혼식에 잠입해서 이상한 방향으로 분위기를 몰고 가는게 니가 할 일 이다. 그러면 내가 교묘한 수작을 부려서 무슨 수로든 결혼식을 깨갰다."

라고 제안한다면, 은식은 분명히 냉수를 한 사발 따라 주면서 속을 차리라고 할 것이다.

쓸데 없는 망상과 괜히 사무치는 옛생각에 휘말려서 엉뚱한 어림없는 범죄저지르지말고, 그 시간에 내 살길이나 잘 찾으라고 분명히 그렇게 진심어린 조언을 해 줄 것이다. 나라도 그럴 것이다.

괜히 떠날 때 붙잡지 못하고, 돌아올만할 때 맞아들이지 못했지 않았나. 그렇게 맥없이 그녀를 보내면서도, 괜히 뭔가 훨씬 더 멋진 순간이 찾아올 거라는 막연한 기대만 하면서 나는 허송세월했던 것이다. 내가 멍청하게 내 잘난 맛에 빠져서 완전히 볼썽사나운 꿈 속을 헤메고 있던 것인데, 누구를 탓하고 누구를 원망하리오. 그동안 멀리 떨어져 있지도 않은 그녀에게 달려가 아직 사랑하고 있다고, 다시 같이 하자고 이야기하는데는 택시 기본요금과 35분 정도의 시간이면 충분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무려 1주일간을 그렇게, 붕 뜬 기분으로 보냈다. 마음 잡지 못하고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을 뒤적뒤적하면서, 그저 24시간, 1440분씩 맥없이 시간만 흘려보내면서 하루하루를 보냈다. 나는 그냥 그녀가 결혼하는 그 결혼식날이 오지 않으면 좋겠다고 멍하니 생각해 본 적도 있었다. 그거야 말로 항상 그녀에 대한 꿈만 꾸면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던 내가 빠질만한 헛생각이었다.

다행히도, 과학기술부의 보수성 경보 검사와 통신칩은 정상적으로 잘 동작했고, 오현명 박사님이나 우세희 박사님도 흡족해 했다. 때문에, 당분간 나에게 급한일은 없었다. 나는 연구소에서 하루 종일 빈둥빈둥해도, 별달리 큰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대한민국 정부에서 또다른 광기어린 제안을 내 놓을 때까지는 잠시 여유가 있었다.

어떻게 보면, 그것은 불행이기도 했다. 만약에 또다시 산더미 같은 연구과제가 쏟아졌다거나, 또 한 번 경보 체계의 그 수많은 프로그램들을 다 뜯어 고쳐야 하는 날이 온다면, 나는 아마 1주일 동안 정신없이 일만했을 것이다. 그러면 뭐가 어떻게 되었더라도 지금같은 기분은 아닐 것이었다. 나는 무기력하게 우울함에 빠져, 이런저런 허망한 생각만 하면서, 그녀와 그녀의 결혼식에 대한 그 왠지 모를 속이 뒤집히는 느낌만 계속 연거푸 느꼈던 것이다.

그녀의 결혼식을 하루 앞둔 금요일날. 악몽 같은 최후의 날이 바로 몇 시간 전으로 다가왔건만,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이라고는 소파에 앉아 영화를 보는 것이 전부였다.

금요일 저녁, 내가 본 영화는 "네 번의 결혼식과 한 번의 장례식"이었다. 이것은 역할 관계는 좀 바뀌어 있지만 그래도 꽤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상황이다. 이 영화의 결혼식은 결혼 직전에 절체절명의 정보를 알게 되어 결혼할 마음을 싹 가시게 하는 것으로 멈춘다. 예를 들면, 결혼식 직전에 남편될 사람이 사실은 국제 변태 협회 회장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가. 적어도 갑자기 몸이 아파서 결혼을 못한다는 식으로 결혼을 미루기라도 하지 않겠는가 이 말이다. 좀 밝고 명랑한 경우를 생각해 본다면, 내가 아직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그녀는 잠시 결혼을 미룰 고민에 빠져들지도 모른다.

썩 좋은 영화였다. 나는 아예 모함을 해버릴 수도 있었다. 그녀가 결혼할 그 인간을 해코지 하는 것이다. 그 자가 사실은 미국에 기술을 빼돌리려고 하는 지능적이고 악랄한 나라 팔아먹는 산업스파이 라고 신고할 수도 있었다.

어차피 산업기술보호법이 있겠다, 일단 신고만하면, 연구원이라는 낙인이 찍힌 인간인 이상 법에 걸리지 않을 수는 없다. 형량이야 벌금 몇 푼일 수도 있고, 수십년 징역살이일 수도 있겠지만, 분명 몇 조 몇천억원 가치의 우리 나라 기술을 외국에 팔아먹으려한 파렴치범이라고 소문은 날 것이다. 그러면, 결혼은 어려워질 것임이 분명하다. 이것은 완전 범죄다. 시간은 얼마남지 않았지만, 경찰이 아니라 국가정보원 쪽으로 신고하면, 단숨에 요원들이 출동해서 일단 체포부터 하니까, 모든 면에서 훌륭하다.

꼭 그런식으로 하지 않아도 될 듯 했다. 나는 솔직하게 그냥 말할 수도 있었다. 나는 내가 사실은 그녀를 아직 사랑하고 있으며, 그래서 결혼을 하지 않으면 좋겠다는 사실을 그녀에게 결혼 전에 알릴 수 있다. 우리는 드문드문 연락해 오던 사이였고, 가끔 만나던 사이였으므로, 어떻게든 잠깐 시간을 내서 진지하게 이야기하는 정도는 충분히 기회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안그러면 평생 후회하지 않을까. 사랑하는 그녀에게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그 말은 한 번 하는게, 속은 시원하지 않을까.

아니, 임금님 귀 크기가 좀 비정상적이라는 이야기 때문에 속병난 이발사 이야기가 지금 몇천년째 전해내려 오는데, 이건 귀가 좀 크다는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문제 아닌가. 지금까지 달리고 뛰며 살아오고 더 좋은 날을 위해서 노력했던 것이, 생각해 보니까, 다 너한테 잘 보이고 싶어서 그런 것 같았다고. 아직 사랑하고 있다고. 그 말은 한 번 할 수 있는게 아닐까. 좀 부끄럽기야 하겠지만, 공허한 대나무 숲속에서 혼자 소리치는 것 보다야, 마지막으로 그녀와 다시 한 번 만나서 참으로 오랫만에 잠깐이라도 같이 있는다면, 그것만으로도 앞으로는 누리지 못할 시간 아닐까.

좋은 생각과 나쁜 생각, 이래야 겠다, 저래야 겠다. 말은 하자, 전화부터 해 보자, 그냥 일단 잠이나 자자, 밖에 가서 술이라도 마시자. 계속 생각만 하면서 그날 밤은 지나가고 있었다. "세 남자와 아기 바구니"가 끝나자, 나는 고전 영화 "드림 와이프"에서 어느 왕국의 공주가 결혼을 때려 치우는 장면을 보았고, 그게 끝이나고는, "내 남자 친구의 결혼식"을 보면서, 옛날 애인 결혼 방해하는 모습을 보았다. 새벽이 깊어서는 "웨딩크래셔"와 "런어웨이 브라이드"를 보면서, 상습적으로 결혼식에서 난리치는 사람들을 보며, 대체 왜 내가 웃는지도 모르면서 웃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리고, 마침내 먼동이 터올 때 쯤 해서는 "첫사랑 사수 궐기 대회"를 보기 까지 했다. 나는 사상 최악의 못만든 결혼식 멈추기 장면이라는 그 허탈한 무의미함의 나락에 자포자기처럼 빠져보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거의 밤을 샌 초췌한 몰골로 다시 한 번 날짜와 시간을 들여다 보니, 오늘은 분명히 그녀의 결혼식 날이었다. 이 놈의 지구는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생각없이 돌고 또 돌아, 이 날을 오게 만들고 만 것이다.


3.

나는 일전에 한수진 박사가 골라주었던 암회색 정장을 걸쳤다. 한수진 박사는 이 옷을 입으니까 사람이 달라 보여도 그렇게 달라 보일 수 없다고 칭찬한 바 있었다. 나로서는 그때문에 사긴 했으나, 사실 이 옷은 좀 심하게 칙칙해 보이는 색깔이라는 생각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점은 상관 없었다. 오늘 나는 세상에서 가장 칙칙해 보이는 옷을 입고 싶은 사람이었다.

점심 때 있을 그녀의 결혼식에 가기 위해, 집을 나서기 전에, 나는 구두를 닦았다. 나는 구두를 반짝반짝 빛나도록 잘 닦고 싶었다. 그래서, 작정하고 자리를 잡고 계속 구두솔로 구두를 문질렀다. 구두닦이 계에서 금단의 기술인 물광과 불광을 시도할까 했으나, 어차피, 오늘 할 일 이라고는 결혼식 가는 일 밖에 없겠다, 나는 마음 잡고 앉아서 정석대로 충실히 인간의 땀과 노력으로 구두를 빛나게 하리라 결심했다.

그녀의 결혼식에 신고갈 그 구두를, 나는 계속 닦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사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앉아서 계속 "구두에 광채를."하는 생각만 하면서 우직하게 장시간 동안 닦고 또 닦기만 했다. 나는 붓글씨를 쓰는 사람들이 천천히 먹을 갈면서 생각을 가라앉히고 마음을 비워 정신을 가다듬는다는 것이 문득 생각났다. 그녀의 결혼식에 가는 구두를 닦는 내 마음의 그 텅텅 빈 공허함이란, 그 마음을 비우는 느낌으로만 따지면, 아마도 제갈 공명이 출사표를 쓰기 전에 먹을 가는 심정에 비길만 할 것이었다.

밤새고, 조금 졸고, 아침 먹고, 구두 닦고 하니까 어느새, 시간은 아홉시, 열시에 지나고 있었고, 나는 마침내 집을 나서 결혼식장으로 향했다.

그 토요일은, 정말 5월의 토요일 답게, 무척 화창한 날씨였다. 햇살은 약간 따뜻한 듯 했지만, 바람은 또한 조금 시원해서 더할나위 없이 사람 기분을 들뜨게했다. 아무 일이 없어도 어딘가 놀러가고 싶게하는 날씨였다. 나는 시계를 보면서 지금쯤 가면 언제쯤 도착할 것인지 잠시 가늠해 보았다.

그녀의 결혼식 장소는 와우파우 라는 곳이었다. "웨딩 오브 웨딩, 파라다이스 오브 웨딩"의 약자를 따서, W.O.W.P.O.W 라는 이름을 쓰는 곳이었는데, 인터넷에서 찾아본 홈페이지에는 자랑스럽게 "와우파우는 Wedding Of Wedding, Paradise Of Wedding 를 나타냅니다"라는 소개 문구가 맨 위에 박혀 있는 곳이었다. 이름은 그렇다만, 군데군데 살펴보니, 썩 훌륭한 곳으로 보였고, 특별히 신기하다거나 대단하달 것은 없어도, 어느 누가 봐도 빠질 것 없어 보이는 꽤 좋은 식장인 듯 싶었다. 와우파우는 집에서는 조금은 먼 거리였고, 거리가 먼 만큼, 나에게는 차 타고 가면서 여러 잡상에 번뇌할 시간도 길었다.

"이 결혼 안 됩니다."

그렇게 지금 말하는 수도 있었다. 지금 전화해서, 혹은 지금쯤 결혼식 장소로 오고 있을 그녀를 찾아가서, 말한다는 것도 가능은 한 일이었다. 사람들이 모이고, 결혼식이 시작되어 사람들 앞에서 결혼의 예식을 시작하기 전에, 그 전에 그녀에게 한 번 말을 해 볼 수 있었다. 그러면, 나는 그 "와우파우"로 갈게 아니라, 그녀의 집으로 가야하는 것인가. 아니 그럴 필요 없이 일단 전화라도 한 번 걸어봐야하는 것 아닌가. 지금, 지금 연락해서 결혼 안하면 안되겠냐고, 그렇게 말하면서 결혼을 멈추려고 해야 하지 않는가.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럴바에야, 나는 어제 연락할 수도 있었고, 목요일이나, 수요일이나, 화요일이나, 월요일에 말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렇게 하지 않은 것이다. 겁 먹어서라고 할 수도 있고, 좀 더 인간적으로 말하면, 이제 다 잡혀 있는 남의 인륜지대사를 괜히 요동치는 마음으로 폐끼치지 말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자니, 나는 차 안에서, "그래, 사랑한다면 진정으로 행복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보내주는게 멋있는 거지" 하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즉시, 그 너절한 대사가 TV연속극에서 막바로 따온 꼴이 얼마나 느끼한지 깨닫고 고개를 가로 저었다.

그리고 생각해보니, 내가 과연 그녀가 행복한 결혼을 하기를 바라는지, 아니면, 울적한 결혼을 하다가 망하기를 바라는지, 그것도 솔직히 정확히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녀가 행복하게 결혼하기를 즐거운 마음으로 바라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나는 지난 1주일 내내 그녀가 결혼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 속을 헤메고 있었다. 사실, 지금까지도 나는 그녀가 결혼한다는 사실을 똑바로 실감나게 느낄 수조차 없는 편에 가까웠다. 그녀가 그녀의 남편이 될 사람과 웃으며 사람들의 축복을 받을 생각을 하면, 나는 뭔가 울컥하는 마음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듯한 느낌이 명백하고도 뚜렸했다.

그렇다고, 내가 그녀가 허구헌날 남편과 다투며 긴 세월을 눈물로 지새다가 어느날 허망하게 이혼하기를 바라느냐 하면 그것은 더 아니었다. 그렇게 해서 남는게 뭔가. 그렇게 생기는 기회는 나와 그녀의 밝은 미래와는 거리가 멀었다. 아마, 잠깐의 얕은 겉멋은 부릴 수 있을 것이다. 나와 그녀가 맺어졌던 것이 더 좋은 일이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듯, 정답을 맞추었다며 "거봐라 내 말이 맞지"하는 느낌은 좀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거야 말로 참 비열한 것 아닌가. 나야말로, 그녀가 내곁에서 스스로 떠나게만든 장본인인 주제에, 남에게 몹쓸마음 갖고 있다가 불행에 기뻐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악한 짓이었다.

그녀의 결혼식이 열리는 곳은 종종 자주 지나치는 낯익은 길가였다. 그러나, 실은 또 한 번도 이 동네에 무슨 용무를 갖고 자세히 돌아다닌 적은 없는 곳이었다. 오늘 이곳의 결혼식장에 올 때까지, 나는 여기에 "와우파우"라는 게 있는지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니, 항상 지나가는 곳이었지만, 이상하게 멀리 떨어진 생소한 곳이라는 느낌도 묘하게 들었다.

마침내 나는 문제의 결혼식장에 도착하고야 말았다. 결혼식장에 들어서보니, 누군가의 붓글씨로 쓴 그녀의 이름과 그 부모님의 성함이 눈에 들어 왔다. 그리고 그 옆에는 짝을 맞춰 어느 들어본 적 없는 이름이 나란히 적혀 있었다. 아무 쓸모도 없이, 나는 결혼식장 돌아다니면서 이름 붓글씨로 써주는 아르바이트가 있다는 생각을 잠시간 했고, 또한 괜히 내 구두를 한 번 쳐다 보았다.

처음 청첩장을 보자마자 결심했던 대로, 나는 좀 과하다 싶을 만큼 두둑하게 축의금을 봉투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내 이름을 써서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그녀의 친척에게 그 봉투를 건넸다. 봉투에 돈을 넣고, 방명록에 내 이름을 적는 짧은 순간이, 어쩐지 긴 시간으로 느껴졌다. 나는 미묘하게 이제야 그녀가 정말로 결혼한다는 것을 좀 실감할 수 있었다. 나는 수십개의 사람 이름과 함께 내 이름이 줄줄이 방명록 종이에 쓰여 있는 모양을 보았다. 그리고, 다시 고개를 들렸을 때, 식장 중앙에 다시 한 번 큰 글씨로 쓰여 있는, 그녀와 그녀의 신랑의 이름을 보게 되었다.

감상적이면서도 밝은 음악이 어디선가 계속 흘러나오고 있고, 잘 차려 있은 남녀노소의 사람들이 웅성거리며 북적하게 오가고 있었다. 예식장소에는 줄을 맞춘 의자들이 아직은 앉을 사람들을 기다리며 비어 있는 채로 늘어서 있었고, 사람들 중에는 결혼식을 계기로 오랫만에 만나 서로 인사를 나누는 사람들도 종종 눈에 뜨였다.

"이 결혼 안됩니다."

나는 신부대기실로 뛰어들어가 그렇게 소리치고 싶었다. 나는 두리번거려서 신부대기실이 어디인지 찾아보고, 그 쪽으로 걷기까지 했다.

그런데 문득 한수진 박사의 얼굴이 보였다. 나는 황급히 반대로 돌아서 구석으로 피했다. 한수진 박사가 여기에는 왜 온 것인가. 어떻게 저떻게 그녀와 한수진 박사도 아는 사이였던 것인가. 그럴법했다. 한국에서 건축안전공학 바닥이야, 내 손바닥 보다 조금 넓은 정도다. 이 바닥에서 한 다리 건너서 한 다리만 건너면 모두가 아는 사이이다. 그 그물처럼 엮인 다리들 사이에서, 한수진 박사에서 그녀에게 가는 다리도 청계천에 관광용 다리 놓듯 가볍게 연결될만 했다. 온갖 아는 동문이며 옛날 친구, 일하다 만난 사람들이 득실거리는 이 자리니, 나를 잘 아는 사람들이 수십씩 있다고해도 전혀 이상할 것은 없었다.

그냥 한수진 박사에게 가서 아는 척하며, 반가워 해도 되었을 텐데. 이유도 모르고 나는 일단 피하기 부터 했다. 그러고보니, 신부대기실에 들어가 결혼 하지 말라고 권하는 것도 결코 옳은 짓 같지는 않았다. 신부 대기실에는 항상, "드레스 입으니까 너무 이쁘다-"라는 말을 하는 신부의 친구들이 3명이상 둘러치고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얼굴들 사이에는, 내가 아는 사람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아니, 그녀의 친한 친구치고 내가 모르는 사람들이 거진 없으니, 아마 다들 내가 아는 얼굴일 것이고, 대체로 나와 그녀의 일도 잘 아는 사람들일 것이었다.

그렇다. 나는 "쪽팔릴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 혼자만 있다면, 나는 에라 모르겠다 하면서, 일단 하고 싶은 말은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모습을 나를 아는 다른 사람들이 지켜본다면. 그건 좀 다른 문제인 듯 했다.

그 사람들은 나를 정말 보잘 것 없는 놈으로 여길 것 같았다. 수군거리며 놀라는 그 모습을 상상하자니, 도저히 그 앞에서 그녀를 붙잡고 갑자기 결혼하지 말라는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아마, 평생,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과, 내 직업과 관련된 한국의 건축안전공학 계 전체에 소문이 다 날 것이다. 나는 항상 남의 결혼식장에 뛰어 들어 난리친 놈으로 불리우게 될 지도 모른다. 그러면 아마 인생 먹고사는 데도 상당한 지장이 생기지 않을까. 잘못하면, 소문이 더더욱 안좋은 방향으로 부풀려져서, 성격이 엄청나게 이상하고 정신 불안한 놈으로 나는 찍힐지도 모른다. 그러면, 그녀의 결혼식에서 괜히 소란만 일으키고, 나는 나대로 장례의 내 혼삿길이 막혀 버릴것이다.

나는 내가 이 결혼식장에 온 것을 사람들이 알까봐 갑자기 두려워졌다. 나는 화장실 근처에서 왔다갔다하며 한참 숨어 있었다. 그러다가 나는 잠시 건물 밖으로 나왔다. 길을 왔다갔다하며, 나는 멋드러지게 맑은 하늘과 봄날씨를 만끽하며 즐겁게 걸음을 옮기는 거리의 행인들을 한참 지켜 보기도 했다. 그러다 시계를 보니 어느새 시간은 훌쩍 지나 있었다. 갑자기 나는 뭔가에 화들짝 놀란듯이 다시 결혼식장으로 뛰어들어갔다.

진짜 무슨 영화처럼 허겁지겁 뛰어서 계단을 오르고 결혼식장 문을 두 손으로 양쪽으로 열어 붙이며, 나는 식장안으로 들어섰다. 식장안은 사람들이 축하해 주는 소리로 소란스러웠다. 리하르트 바그너가 만들었던 그 노래가 피아노 반주로 잔잔히 울려퍼지고 있었다. 자동차 후진할 때 나오는 "엘리제를 위하여" 다음으로 익숙한 고전 음악이 바로 이 곡이어서, 나는 무슨 의미인지 당연히 알고 있었다.

사람들은 결혼식장에서는 자리에 앉지 않고, 자리 뒤에 선 채로 있는 것을 좋아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결혼식 자리는 맨 앞자리의 부모형제 자리와, 다리 아픈 어르신들이 주로 앉는 맨 뒤쪽 자리를 빼고 중간에는 비어 있는 자리가 많은 법이었다. 나는 처음에는 여느 결혼식 때처럼, 뒤에서 서서 멀찍이 신랑신부를 바라보는 자리로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러다가는 수많은 대학 시절, 대학원 시절의 아는 얼굴을 마주칠 것 같았다.

"잠시만요."

나는 사람들 사이를 헤집고 들어가, 중간 쯤의 눈에 뜨이지 않을만한 자리에 앉아 몸을 낮추고 은폐물 뒤로 들어가듯이 자리에 앉았다.

곧이어, 그녀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하얀 웨딩드레스를 입고 있었고, 고개를 약간 아래로 숙인채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녀가 앞으로 걸어오자, 그녀는 내 쪽으로 점점 가까워졌다. 사람들의 박수소리가 더 크게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녀는 소리도 없이 발걸음을 옮겼고, 그 움직이는 모습은 한장면 한장면 가슴에 새기듯이 또렷하게 보였다.

나는 이 사람들이 신부 화장을 한답시고 도깨비처럼 울긋불긋 칠을 해서 그녀의 자태를 좀 망쳐놓았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정말 아름다웠다. 다른 모든 것을 다 잊고, 그냥 그 언제나와 같은 모습의 그녀를 보는 것에만 잠시 빠질만큼, 무척 많이 아름다웠다. 어쩌면, 내가 괜히 상상하고 있던 그 꿈 속의 그녀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환상으로만 포장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실제로 보는 그녀의 모습을 두고, 신부 화장 탓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모르겠다. 어찌 되었건, 나는 오직 그녀의 모습만이 진하게  마음에 남을 뿐, 주변 사람들과 배경은 그저 희뿌연 안개처럼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그 얼굴을 나는 진작에 달려가서 봐야 했다. 그런 그녀의 그 얼굴이, 면사포 아래 속에서 바닥을 지긋이 바라보면서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이었다.

"이 결혼 안됩니다."

나는 그때 그렇게 말할까 말까 고민을 했다. 그녀는 지금 결혼을 하는데, 나도 못지 않게 뭔가 해야 되겠다는 이상한 경쟁심 같은 것이 생기는 듯도 했다. 차분히 생각하면 황당한 생각이지만 그때는 정말 그런 이상한 마음으로 뭐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나는 일어서서 그렇게 외치려고 다리에 힘을 넣었다.

그러나 사방을 둘러보니, 상황이 좋지 않았다. 그녀는 드레스 자락을 잘못 밟아 자빠지지나 않을까 온갖 신경을 집중하고 있는 듯 보였고, 식장은 사람들의 소리로 무척 시끄러운 상태였다. 더군다나 저 바그너 노래는 끝도 없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저 많은 소리들과 신부에게 온통 집중된 이목을 뚫고, 내 말이 들리도록 하려면 분명히 벌떡 일어나서 길을 가로막으며 큰 소리로 소리질러야 할 것이다. 그러면 갑자기 시커먼 덩치가 튀어나와 소리를 버럭 지르는 것으로 보일 것이다. 그래봐야, 그 소리를 듣고 사람들은 처음에는 뭔가 싶어 전부다 어리둥절 할 것이고, 두 세 번, 소리친 다음에야 사람들이 말을 알아들을 것이다.

그러면 안된다. 최악이다. 알아듣지도 못할 소리를 지르며 결혼식장을 뛰어다니는 정신나간 놈, 바로 그 자체이다. 그거야 말로 버스 떠난 뒤에 손 흔들기요, 김 샌 뒤에 솥뚜껑 덮는 짓을, 가장 나쁜 방향으로 형상화시키는 행동이라 할 만하다. 그런데, 그래도, 지금 내 눈앞에, 그녀가 있지 않은가. 얼마만인가. 지난 날, 다만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또 보고 싶고, 다시 만날 아침을 기다리던 그 설레던 날들도 있었다. 그렇다면, 몇날 며칠을 목소리 한 번 듣지 못하고 있다가, 지금 이렇게 그 얼굴을 보고 있자니, 자꾸만 갑자기 이상한 기분에 휩싸이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계속 이랬다 저랬다 갈등만하면서 정신 없이 앉은채로 비틀비틀 하는 동안, 그녀는 마침내 내 바로 곁을 지나치기에 이르렀다. 나는 그녀의 숨소리가 들릴 만큼 가까운 거리에서 그녀를 빤히 바라다 보았다. 보건데, 그녀는 지금 내가 이자리에 와서 이렇게 그녀를 보고 있다는 등등의 것들은 전혀 생각도 하지 않고 있는 듯 보였다.

사실, 그게 옳은 일일 수도 있다. 지금 그녀가 눈앞에 두고 있는 것은 새로운 인생의 단계로 접어드는 일이요, 말하기에 따라서는 일생의 동반자 곁으로 가는 길이자, 혹은 인생의 무덤으로 걸어들어가는 그 중대한 걸음을 걷고 있는 것이다. 지나간 연인의 미련뿐인 마음 따위, 지금 그녀가 마음에 두지 않는 것이 맞다. 그리고, 그것이 내가 알고, 좋아하고, 그리워한 그녀다운 모습이었다.

그녀는 마침내, 주례 선생님 앞에 도착해서 신랑 곁에 섰다. 음악은 딱 맞게 멈추었고, 그녀와 신랑이 나란히 서 있게 된 그 순간, 장내는 다시 조용히 잦아들었다. 아무 말 없이, 짐짓 엄숙했다. 어디서, 어린애 우는 소리만 하나 들려왔다. 이름모를 저 어린 것만이 내 마음을 알아 주고 있구나 싶었다.

"신랑과 신부는....."

하고 주례 선생님꼐서 말씀하시기 시작했다. 그 목소리가 울려퍼지며, 조용함은 계속되었다. 다만 조금씩 소곤거리는 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이 결혼 안됩니다."

나는 지금이야말로 이 말을 할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다. 이제 조용하다. 지금 말하면, 분명히 한 번에 또렷하게 내 말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말을 하고나면, 갑자기 장내는 소란해질 것이다. 하지만, 신랑의 친구나, 그녀의 친척이 나서서 나를 끌고 나가려 할 동안, 몇 마디 안 되지만, 나는 짧지만 또박또박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었다. 이제야말로 그녀에게 말할 시간이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떡 일어나려 했는데, 앞사람과의 자리가 조금 좁아서 일어나는데 엉거주춤 시간이 좀 걸렸다. 그게 좀 이상했다. 나는 확 눈에 뜨이게 일어난게 아니라, 뭔가 엉성하게 갑자기 전화와서 전화받으러 슬며시 일어선 듯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흐름이 끊겼다. 일어서느라 좀 미적미적하다보니, 문득 말할 시간을 놓치고야 말았다. 약간의 농담과 신성한 축원이 교차하는 주례사는 이제 지루한 중반으로 접어들고 있었던 것이다.

그 와중에 갑자기 중간에 말을 끊고 판을 깨버리자니 또 좀 아닌거 같았다. 결혼식을 멈추게 하려고 달려왔으면, 오자마자 바로 뜻을 말하든지, 아니면, 신부 얼굴을 보자마자 말하는게 솔직하고 소신있는 행동아니겠는가. 안절부절하다 말고, 갑자기 주례사 들려오는 가운데 중간에 엉성하게 끼어드는 것은 무슨 힘없는 짓이란 말인가. 이것은 시점이 안맞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깐, 소신이 뭔 소리고, 시점은 또 뭔 이야기인가. 애초에 소신이나 시점을 중하게 여겼으면, 이따위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처음부터 똑바로 잘 살았겠지. 그리고 지금 저 앞에 저 녀석 대신 내가 서 있겠지. 아니면, 이런 곳에 발을 들이지 않았던가. 소신도 없고, 시점도 안맞은 인생을 잘못 살아온 대가로, 지금 여기와서 일어나 소리칠 순간이나 엿보게 된 것 아닌가.

그래, 그냥 한 번 가보자 싶었다. 인생을 살다보면, 뭔지 잘 모르지만 그냥 한 번 확 가봐야 할 때도 있다고 하지 않는가. 지금이 그렇게 가 볼 때지 싶다. 그녀가 결혼하는 이 마당에, 뭔가 더 중요한 "가 볼 때"란 더이상 없지 않겠는가.

그렇게 해서, 다시 한 번, 나는 벌떡 일어나려 했다. 그런데, 가만 생각해보니, "안됩니다"하고 난 다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가 좀 마땅찮았다.

"왜 안되냐면, 나는 아직 그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상한 소리였다. 내가 청첩장 받아서 혼자 엉뚱한 생각한 것 덕분에 왜 다른 사람이 결혼을 하지 말아야 된다는 것인가. 대한민국 헌법이 보장하는 신체의 자유를 침해하는 일일 뿐만아니라, 스스로를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실없는 놈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더군다나, 세상에는 사랑과 신뢰를 맹세하는 이 결혼이라는 것에 대해, 사실은 사랑과 별 상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굉장히 많았다. 그리고 왠지, 사랑의 맹서는 사랑과 상관 없다는 주장을 펼치는 사람들은, 사랑이 가장 중요하다는 사람들을 철모르는 이로 취급하곤 했다. 그리하여, 스스로의 현명함과 세상에 대한 노련함을 돌이키며 더욱 더 으스대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괜히 어림없이 "사랑"을 들먹이는 것은 그냥 "저 자식 영화를 많이 보다가 맛이 같구나." 하는 평가만 받을 듯 하다. 사실 지금 이런 일로 고민하며 헤롱대는 나의 모습은 정말로 영화만 많이 보다가 맛이 간 결과인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느새 주례사의 대부분이 끝나가고 있었다. 그녀의 표정은 아무 변화 없이 그대로였다. 주례 선생님은 신랑에게 신부를 아내로 맞을 것인지 물었다. 무슨 영화에 보니까, 주인공이 고민하는 동안, 갑자기 신랑 쪽에서 다른 여자가 튀어 나와서 결혼식을 대신 망쳐주는 경우도 있긴 했다. 그러나, 그럴리야. 그녀를 아내로 맞이하여 검은 머리 파뿌리 될 때까지 같이 산다는데, 무슨 다른 답이 필요하나. "예." 신랑이 대답했다. 짝짝짝. 정답이다. 너무나 쉬워서 실수해서 틀리기 조차 어려운 간단한 정답이었다. 아마 세상에서 틀린 사람이라고는 나뿐일 문제의 답이었다.

"신부는 신랑을 남편으로 맞아..."
"이 결혼 안됩니다."

혀끝에서 계속 그 말이 맴돌고 있는데, 주례 선생님의 마지막 물음이 한 단어 한 단어 발음되고 있었다. 한 마디 한 마디가 내 심장을 쿵쿵 울렸다. 이 결혼 안됩니다. 이 결혼 안됩니다. 나는 깊은 무력감을 느끼며, 숨이 조금은 가빠지는 것을 느꼈다. 이마에서 땀이 나는 듯 했다.

마지막 순간. 나는 이게 꿈이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는 생각을 했다. 돌이켜보면, 지난날, 오랫만에 그녀를 만나, 다시 그녀가 나를 사랑한다는 고백을 듣고 그녀의 달콤한 입맞춤에 빠져들던, 그 허망한 꿈을 꾸던 밤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 간절한 꿈이 숨겨둔 내 진심을 드러내면, 나는 새벽에 잠을 깬 뒤에, 아스라한 좌절감에 빠져들곤 했다. 그렇게나 많은 그녀와의 이야기가 나의 사랑이 흩어지는 꿈이었는데, 지금 내 앞에 그녀가 결혼하고 있는 이 광경이 그저 꿈이면 안될까. 그녀가 나오는 꿈이라면 이번에도 그냥 깨서 털고 일어날 수 있는 꿈일 수도 있지 않을까.

나는, 도저히, 그 말에 그녀가 대답하는 모습을 볼 수가 없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숙였다.

바로 그때, 갑자기 사방에서 혼을 빼놓는 정신없는 사이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그 왱왱거리는 소리에 사람들은 저마다 당황해서 소란을 피웠다. 하지만, 그 소리마저 사이렌 소리에 다 묻혀버릴만큼, 사이렌 소리는 컸다. 모든 것이 멈추고, 그녀도 그저 당황한 표정으로 어쩔 줄 몰라했다. 그냥 이 모든 것을 날려버릴 만큼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가 온 건물에 마구 울리고 있었다.

이내, 갑자기 결혼식장 천장의 스프링클러가 작동하며, 주룩주룩 물을 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마른하늘에 날벼락이 쳐서 소나기라도 쏟아지듯이, 사방에는 물줄기가 쏟아졌다. 그렇게 물이 쏟아지자, 다들 멈추었다. 주례선생님의 말과, 그녀의 대답과 결혼식을 지켜보던 많은 하객들의 시선과, 그 모든 선포와 결정의 시간들이 다가오는 것은 일제히 멈추어 버렸다. 끝없이 울리는 이 시끄러운 소리 속에서, 물줄기는 사정없이 그녀의 웨딩드레스와 모든 사람들의 차려 입은 예복으로 쏟아져 내렸고, 이 급작스런 난장판이 깨끗하게 장내를 날려버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물에 옷이 젖고, 짙은 화장이 점점 번지고 있었다. 그녀는 어쩔 줄 몰라하며 사방을 두리번 거리고 있었고, 너무 급작스런 일이라, 신랑도 역시 당황하고 있었다. 사회와 주례는 뭐라고 말하면서 소리쳤으나, 사이렌소리가 너무나 커서 그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사방에서 내리는 물줄기를 향해 짜증내는 모습과 소리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일어서서 자리를 빠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부모 형제 정도만 왔다갔다 하고 뭔가를 서로 물으면서 바삐 오갈뿐, 다른 사람들은 문밖으로 나가려 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의 귀에 대고 뭐라고 말을 하는 것 같았는데, 그녀는 그게 안들리는지 아니면 경황이 없는 것인지,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그녀 자신의 망쳐버린 결혼식을 보면서, 얼굴이 점점 붉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녀는 울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건물 밖에서는 어느 때보다 맑은 5월 햇빛이 눈부시게 탁 트인 식장 창문으로 쏟아지고 있었다. 그 햇빛은 떨어지는 물방울들이 방울 방울 반짝거리게 하였다. 나는 다시 한 번, 그녀의 얼굴을 똑똑히 바라 보았다. 파란 봄하늘의 들뜬 그 날에, 물에 젖어가는 그녀는 마치 꼭 빗속에서 우는 것처럼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 모습을 나는 한동안 꼼짝않고 바라 보았다.

이내 나는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원형의 화재 감지기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그자리에서 의자위에 올라서서 펄쩍 뛰어올라, 천장의 화재 감지기를 돌렸다. 내 주변에서 우왕좌왕하고 있는 사람들이 갑자기 놀라 나를 바라 보았다. 화재감지기가 돌려 열려지니, 그 내부가 드러났다. 그 안에는, "C.A.C.S" 즉, "캑스"라고 적힌 장치가 하나 보였다. 그리고 누군가 이 경보기에 접속해 원격 신호를 보내고 있음을 표시하는 초록색 불빛이 빛나고 있었다. 나는 다시 한 번 펄쩍 뛰어서, 천정의 "캑스"를 주먹으로 때려 부수어 버렸다.

통신칩이 부서지자, 즉시 물이 쏟아지는 것은 멈추었다. 그리고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도 바로 멎어 들었다. 그 시끄러운 난리가 일시에 사라져버리니, 갑자기 장내는 쥐죽은 듯 고요해졌다. 모든 사람들은 중간에서 펄쩍거리면서 경보기를 멈춘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더듬더듬 둘러대며 말하기 시작했다.

"죄송합니다... 경보기 오작동입니다. 저는... 저는... 건축 안전 연구소에서 나온 사람입니다. 그냥... 그냥... 아무 일 없이 경보기가 오작동한 것 뿐이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안심하세요. 안심하십시오. 그냥 경보기 오작동입니다. 돌아오세요. 다시 다들 들어 오시겠습니까. 행사 계속 진행하셔도 됩니다. 아무 문제 없습니다."

그녀 앞에서 등을 돌린채 나는 그렇게 외쳤다. 사람들은 다시 수군거리며 돌아와 자리에 앉기 시작했다. 나는 그렇게 선채로 뒤를 돌아다 보지 않았다. 사회를 보던 사람이, 다시 주례 선생님께 멈추었던 때부터 다시 진행하자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그냥 그대로 식장에서 걸어 나와 버렸다.

예식장 밖에 나와서 나는 그냥 길가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이내 경보기에 연결되어 있는 연락망 때문에 소방차가 몰려왔다.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가로저었다. 항상 하던것처럼, 익숙하게, 소방서 사람들에게 이야기했다. "이번에도 경보기 오작동입니다" "또 예요? 또 무슨 검사하나보죠?"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나는 예식장 직원들 대신 나서서 서류를 작성해 주고, 저쪽과 저쪽을 확인해보면 된다고 소방관들에게 이야기 했다. 그러고 있는 동안, 그녀의 결혼식은 잘 마무리 되었지 싶었다. 아마도, 지금쯤은 사람들에게 둘러쌓여 예식장을 떠나 나오고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잠깐 해 보았다.

소방서에서 온 사람들 중에는 은식도 있었다. 예식장에서 나를 발견한 은식은 처음에는 좀 놀란 표정이었다. 그러나 이내 아무말 않고, 그냥 어깨를 주먹으로 한 대 툭 쳤다.

결혼식이 다 끝났는지, 하객 중 한 명이었던, 한수진 박사가 걸어 나오고 있었다. 한수진 박사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려보니, 한낮의 햇살이 강하여, 나는 손을 이마에 갖다 붙였다. 한수진 박사도 나를 보고 곧 손을 흔들며 나를 불렀다. 나는 목례로 답하였다. 은식이 말했다.

"어, 아는 사람이냐? 엄청 예쁜 것 같으다."

은식이 한수진 박사를 보고 말했다. 한수진 박사는 우리쪽으로 걸어오며 말했다.

"여긴 어떻게 오셨어요? 되게 놀랐어요. 신기하다, 여기서 이렇게 또 만나고. 신부측이예요? 신랑측이예요? 점심 안드세요. 식사하세요. 음식 되게 좋은 거 같던데."

나는 두 사람에게 말했다.

"여기, 다 정리되고 나면, 우리 어디 가서 멍게랑 낮술이나 좀 먹는 거 어떻습니까?"
"어, 낮술. 나 낮술 되게 좋아하는데. 멍게 맛있게 하는데 아세요?"

하늘을 보고 한숨을 한 번 푹쉬고는, 그렇게 저렇게, 발걸음을 옮기는데, 그날 날씨는 끝까지 계속 참 좋기만 했다.


- 2007년, 샹하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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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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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07.04.28 11:03 댓글 수정 삭제
    한국에서 있을 법한 이야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앞 이야기랑 뒷 이야기가 무슨 관련이 있는 건가 했더니... 킥킥.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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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07.04.29 18:16 댓글 수정 삭제
    원래는 훨씬 더 많이 SF스러운 이야기였는데 고치다보니 그런 느낌이 많이 없어져 버렸습니다. 다음번에는 좀 더 "환상문학 웹진"에 걸맞는 분위기로 가 보렵니다.

    뽀/ 감사합니다. 지나치게 앞 이야기가 눈에 트이게 부풀어 버린 감이 있어서 약간 부자연스럽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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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utechre 07.05.18 05:32 댓글 수정 삭제
    결말 부분을 읽고 처음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아항~하고 깨달았습니다. 패자부활전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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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07.05.21 12:17 댓글 수정 삭제
    그러나 과연 부활할 수 있을지는 여러모로 좀 더 고민 해 봐야겠습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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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날개 07.06.04 21:43 댓글 수정 삭제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공감 가는 구절도 있고 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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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콩 09.07.18 14:05 댓글 수정 삭제
    제가 읽은 곽재식님의 소설은 대부분 러브 스토리였어요.
    그녀의 결혼을 기다리면서 매일매일 다른 영화를 보며 고민을 하는 것만 따로 떼어서 조금 더 깊이 들어가면 또 하나의 괜찮은 연애소설이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아주 압축해서 그것만으로도 노래 가사를 하나 만들 수 있을 것 같아요.

    저도 공무원으로 일하면서 위로 올라갈수록 이 나라가 왜 이리 삽질로 돌아가는지 의아했었는데 삽질의 세계는 제가 속한 곳만이 아니군요. 다른 분야지만 공감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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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두콩 09.07.18 14:11 댓글 수정 삭제
    헤어진 연인을 회상하는 씬에서 그녀가 안긴 후에 꼭 턱에 가볍게 뽀뽀하는 장면은 심리묘사가 빛나는 장면이라고 생각해요. 여성의 마음을 잘 알고 계시는군요. 결혼이 깨질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런 식의 반전은 뜻밖이었어요.
    잘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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