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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콘도르 날개

2006.11.24 23:4911.24

"용의 전설"을 처음 알게 된 것은 컴퓨터 주니어 사에서 설계도를 넘긴 엔진의 열류 해석 프로그램을 돌리고 있을 때였다. 초고온 작동 엔진이라서 섬세한 정밀도의 계산 결과가 필요했고, 평소보다 훨씬 더 오래 계산을 해야 했다. 계산 결과가 나올 때까지, 나는 이런 저런 웹사이트들을 돌아다니며 시간을 죽이고 있었다. 포털 사이트 첫화면에서 오직 제목만 재미있는 뉴스들을 읽었고, 아무대서나 퍼온 "뜨는 이야기"라는 글들을 읽으면서 가라앉는 기분을 느꼈다.

그러다가 나는 한 공포 영화 소개 페이지를 읽다가 스티븐 킹의 팬 페이지 하나를 읽게 되었고, 그곳에서 소개하는 링크에서 70,80년대에 유행했던 조잡한 휴대용 전자 게임기를 컴퓨터로 다시 즐길 수 있게 해주는 사이트를 알게 되었다. 그 사이트를 돌아다니다가 나는 내용을 짐작할 수 없는 이탈리아 웹사이트로 들어갔고, 거기서 다시 호주 사람이 돌리고 있는 고전 게임 웹사이트에 들어갈 수 있었다.

그 웹사이트에는 "울티마"나 "위저드리" 같은 게임의 초기 버전부터, "네트핵"이나 "로그" 게임 같은 것들도 소개되어 있었고, 어떻게 나왔다가 어떻게 사라진지도 세상사람들에게서 잊혀진 "칭키스칸의 재단사", "화성 핵전쟁" 같은 게임도 소개되어 있었다. 그 중에서 나는 텔넷 프로토콜과 VT100 형 터미널에서 돌아가는 텍스트로 된 온라인 게임을 발견했는데, 그 게임의 이름이 "용의 전설"이었다.

"귀하는 1회째 접속하셨습니다. 현재 4번째 사용자이십니다."

전 세계에서 지금 이 오래된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은 네 명 뿐이었다. 나는 대강 아무렇게나 주인공을 만들었다.

"예리코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런 류의 게임이 항상 그렇듯이, 나는 어느 대륙, 어느 왕국의 적당한 크기의 시골마을에서 시작하고 있었다. 내가 갖고 있는 물건은 약간의 돈과 한 자루의 단검이었다. 단검이라. 수없이 많은 게임 주인공들이 서로 모이고 노동조합을 만들어서, 반드시 첫번째 무기는 단검으로하자고 결의라도 한 것인지 싶었다. 어김없이 첫번째 무기는 단검이다.

"공주가 용에게 붙잡혀 있다. 용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해오는 자에게 큰 상을 내리겠다."

세계의 운명을 건 싸움을 시작하는 것은 이처럼 지나치게 간략하게 요약되어 붙어 있는 왕의 격문이었다. 오랫만에 보는 텍스트 멀티 유저 게임이 좀 반갑고 정다운 느낌이 있어서 나는 좀 진득하니 이 게임을 해 보기로 마음 먹었다. 열류 해석 계산이 끝날 때까지는, 어찌 되었건 용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해올 작정을 한 것이다.

나는 용이 있는 곳을 알기 위해 왕궁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그런데, 왕실의 근위병이 나를 막아섰다.

"기사가 아닌 자는 왕궁에 출입할 수 없다."

기사라. 어떻게하면 기사가 될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쓸데없이 24시간 왕궁앞에 죽치고 앉아서 지나가는 행인들에게 자꾸 말참견을 하는 할아버지와 대화했다.

"기사가 되려면 충분한 전투경력이 필요하지. 듣자하니 왕궁 서쪽 숲에 늑대떼들이 골치거리든데....."

이 거지스러운 할아버지와의 가벼운 한 마디는 실은 늑대와 싸우면서 힘을 기르라는 명령이나 다름 없었다. 나는 왕궁밖으로 가서 늑대와 단검으로 싸우기 시작했다. 늑대는 몹시 가벼운 적수여서, 몇번 검을 휘두르면 죽으면서 점수를 주었고, 늑대가 무슨 주머니에 동전이라도 들고 다니는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돈도 조금씩 벌 수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늑대를 한 마리 두 마리 잡다보니 나는 좀 지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아직 열류 해석 계산은 끝나려면 한참 남아 있었다. 이런 반복적인 노동을 내가 직접 명령을 계속 타이핑 해가며 할 이유가 무엇인가.

나는 작은 프로그램을 하나 만들기로 했다. 자동으로 "용의 전설"에 접속해서 주인공을 움직이고 늑대에게 끝없이 밤새도록 칼질을 하게 하는 프로그램이었다. "용의 전설"은 비교적 허술하게 만들어진 게임이었고, 요즘 사용하는 인터넷 접속 프로그램들은 훨씬 성능이 좋았기 때문에 나의 작은 조작 프로그램은 문제 없이 돌아갔다. 내가 직접 손을 대지 않고도 자동으로 컴퓨터가 내리는 명령에 의해 "용의 전설" 속 내 주인공은 끝없이 늑대를 잡는 것이었다.

좀 더 속도를 내도 되겠다 싶어서, 나는 프로그램 두 개를 동시에 돌렸다. "용의 전설" 속 나는 두 배의 속도로 늑대 잡이를 하고 있었다. 거의 10초에 한 마리 꼴이었다. 내친김에 어디까지 가나 싶어서 나는 프로그램을 하나 더 돌려 보고, 또 하나 더 돌려 봤다. 결국 나는 팔십 개의 늑대잡이 프로그램을 돌리게 했다.

장난 같은 일에 그만큼 열중했는데도 열류 해석 프로그램은 아직도 결과를 주지 않고 있었다. 내일 아침이나 되어야 결과가 나올 듯 했다. 나는 퇴근시간이 되었으므로 그대로 프로그램들을 돌아가게 하고 연구소에서 나왔다.

나는 수진과 기막힌 프로방스 치즈를 덮은 빠에야를 먹으러 가게 되어 있었다. 수진의 제안이었다. 하지만 수진은 갑자기 변덕을 부려서 생전 처음보는 술집에서 포도주와 함께 잡스러운 치즈 조각들을 이것저것 뭉친 것을 먹자고 했다. 식성이 너그러운 내쪽이 양보를 하는 것이 우리 사이의 암묵적인 규칙이었고, 나는 그녀가 끝없이 권했으므로 술에 떡이 되어 쩔때까지 거기에 붙들려 있었다.

그리고나서 그렇고 저런 일들이 있었고, 나는 어떻게 돌아가는 지도 모를 만큼 정신 없는 밤을 보내고 나서야 새벽 2시쯤이 되어서야 집에 돌아왔다. 나는 피곤한데다가 술에 쩔기까지해서 쓰러지듯이 잠에 빠졌다.

나는 잠에 빠져들고 꿈을 꾸면서 마치 VT100 터미널을 온몸으로 느끼는 듯한 이상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꿈속에서 "용의 전설" 속에 나오는 왕궁 옆에 있었다.

나는 숲 속에서 늑대 떼들 앞에서 칼질을 하고 있었다. 포유류 동물 목에 단검을 찔러넣는 것은 실제로 하기에는 별로 유쾌한 일은 아니었고, 꿈속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사방에 널려 있는 늑대 시체들 사이에서 벗어났다. 어디로 갈지 몰랐던 나는 일단 게임속에서 내 고향으로 설정되어 있던 예리코로 가보기로 했다. 게임 속 세계인 만큼, 도로 사정은 나쁘지 않았고, 갈림길마다 친절한 푯말이 있었다.

예리코에 도착하자 마자, 갑자기 지나가던 사람 하나가 넙죽 고개를 숙이며 경의를 표했다.

"아, 당신은 말로만 듣던 늑대왕 아니십니까."
"제가 늑대왕이요?"
"전설적인 소문으로만 들어 왔습니다만. 손바닥만한 단검 한 자루로 늑대 십구만 마리를 한 자리에서 처치했다는 분이시지 않습니까. 위대한 단검의 명인임은 물론이요, 세상의 늑대들이 공포에 떨어 항상 당신을 따르고, 심지어 죽은 늑대들의 원혼이 서려 마법까지 사용하실 수 있다는 천하의 영웅아니십니까."

나는 조금 당황했으나, 곧 상황을 파악했다. 자동으로 돌아가고 있던 프로그램들이 1초에 열마리꼴로 늑대를 잡아 죽였으니, 지금쯤이면 벌써 20만마리쯤 죽였을 시간으로 맞아 떨어진다. 나는 천하의 영웅으로 행세하는 법은 잘 몰랐으나, 사람들이 받들어 주며 굽신거리는 모양새가 좀 재미나다는 생각은 들었다.

그러자, 나는 다른 생각도 들었다. 게임속에서 늑대 한 마리를 잡는데 몇 푼의 돈이 생겼다. 그렇다면 늑대 십구만마리를 잡았다면. 내 주머니 속에는 눈부시게 빛다는 다양한 보석들이 수북하게 들어 있었다. 나는 백만장자. 억만장자였다.

"부동산!"

꿈 속이라서 잠시 착각을 한 것이 원인이었지만, 나는 문득 그런생각이 들었다. 이 많은 돈을 가장 안전하게 투자하는 방법은 부동산이라는 것이었다. 그것은 주식에 넣을까 펀드를 들까 적금을 어떻게 부을까 월급날마다 고민하던 버릇이 무심코 튀어나온 것이었다.

나는 마을의 주점으로 걸어 들어갔다.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술집 주인이 넙죽 엎드리듯 몸을 숙였다. 나는 다이아몬드와 사파이어 몇 개를 꺼내서 그에게 건넸다.

"가장 좋은 술과 우리 가게의 모든 음식들을 차례로 다 내어 드리겠습니다.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막달레나, 어서 늑대왕님을 모시어라."

술집안은 나를 보며 저마다 수군거리고 웅성거리는 소리로 가득했다.

"주인장. 이 마을이나 근처의 집이나 땅을 사려는데, 누구와 이야기해보면 되겠소?"
"마법사 마르타와 이야기를 해 보십시오. 늑대왕이시어."

그는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막달레나 중에서 요안나에게 손짓을 했다. 요안나는 재빠른 걸음걸이로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술을 마시면서 마을사람들과 금새 친해졌고, 루카라는 음유시인이 연주하는 하프 반주에 맞춰 구성지게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를 부르기까지 했다. 노래를 한참 부르고 있을 때, 문제의 마법사 마르타가 나타났다. 그녀는 놀랍게도 수진과 매우 닮은 모습이었다.

"요즘 좋은 매물이 있습니까?"
"얼마 정도 생각하고 계십니까?"
"일단은 처음 사보는 거니까 루비 삼사십 캐럿 정도선에서 알아보려고 합니다만."
"그러면 요즘 급매물로 나온거 좋은 집이 있는데 한 번 보시겠습니까? 주변에 상권도 괜찮고, 얼마 안있으면 재개발된다는 소문도 있고 해서 단기 차익쪽으로는 괜찮을 겁니다."

나는 마르타와 함께 집을 보러 나섰다. 꽤 괜찮은 집이었다. 구미가 당겼다. 내 수중에는 이런 집을 몇십채는 살 수 있을만한 돈이 있었다.

"아예 이 돈 전부로 집을 사버리는 것은 어떻겠습니까?"
"저희들이야 그러면 좋죠. 아예 강 서쪽 땅을 다 사버려도 되겠네."
"이렇게 혼자서 마을 집이며 땅을 다 사재버리면, 국왕폐하께서 뭐 어떻게 하시는 거 아닙니까?"
"아이고, 걱정 마십시오. 나라에서 부동산 잡겠다고 하는 일치고 제대로 되는 거 봤습니까. 걱정 마십시오."
"그렇다면, 저기 저 집들을 전부다 내가. 우하하하핫!"

나는 그렇게 큰 소리로 하늘을 보며 정말 늑대왕처럼 웃었다.

그리고 나는 잠에서 깨어 났다. 술기운 때문에 머리가 무척 아팠다. 꿈이 무척 생생하긴 했지만 또 한심한 꿈이기도 했다.

연구소에 도착해보니, 열류 계산은 끝나 있었다. 나는 자료를 뽑아서 중요한 부분과 쓰레기 같은 부분을 나눠서 검토해 보고, 적당히 보고서로 꾸몄다.

"어떻게, 열류 해석 보고서 다 되어가나? 그거 늦어도 이번 주말까지는 돼야 되는데."

팀장이신 서박사님이 보고 말씀하셨다. 오후에 벌써 다 끝내 놨는데. 문제 없습니다.

"문제가 좀 있습니다. 주말까지는 어려울 것 같은데요. 빨라도 다음주 화요일 쯤은 되어야 될것 같습니다."
"그래? 그러면 안되는데. 내가 믿을 사람이 누가 있나. 자네가 좀 어떻게 노력해주게. 내가 개인적으로라도 어떻게 처리해 줄테니까 야근을 하든지 밤샘을 해서라도 좀 어떻게 안되겠나."
"밤샘이요? 그거 너무 하신거 아닙니까. 근무조건이 아홉시 출근 여섯시 퇴근인데, 강제로 밤샘하게 하는게 어디있습니까. 막말로, 제가 게을러서 일이 늦어지는게 아니라 애초에 계획부터가 무리했던것 아닙니까. 제가 무슨 웹서핑이나 컴퓨터 게임 하면서 놀다가 일을 못하는 줄 아십니까."
"내가 강요하는게 아니고 이렇게 부탁하는거 아닌가. 저번에 곽팀장님 한테 나 소장님 앞에서 엄청깨졌다고. 좀 부탁하네."
"그러면, 제가 무슨 수를 써서든지, 토요일까지 한 번 해 보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부탁하네."

서박사님은 어깨를 툭툭 두 번 두드리고 가셨다. 금요일 쯤에 엄청 고생해서 완성했다고 보고서를 내밀면 무척이나 좋아하시겠지. 나는 이제는 금요일까지는 놀고 먹어도 되겠기에, 박시은 팬 사이트에 새로 올라온 사진이 없는지 뒤적거리다가 결국 다시 "용의 전설" 게임에 접속했다.

"예리코 마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늑대를 엄청나게 잡아서 인지, 정말로 게임속 주인공의 별칭이 "늑대왕"으로 되어 있었다. 나는 충분히 확보된 엄청난 돈과 점수에 기뻐하면서, 곧장 왕궁으로 들어섰다.

"늑대왕님, 국왕 폐하께서 기뻐하며 맞아 주실 것입니다."

답답하던 병사 녀석도 가뿐하게 나를 통과시켜 주었다. 국왕이 말했다.

"오오, 늑대왕. 그대가 나를 찾아오니 너무나 기쁘네. 나는 공주가 용에게 잡혀 간 이후로 한 시도 편히 잠든 적이 없네. 사실 용이 있는 곳은 아무도 모른다네. 다만 북쪽의 현자 카파르나움이 용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다는 소문이 있다네. 부디 공주를 구해주게."

내가 무슨 임꺽정도 아닌데, 늑대 이십만 마리를 도축하고 나서 겨우 얻은 정보가 잘 모른다는 것이란말인가. 카파르나움까지 가려면 길도 멀거니와, 분명히 무슨 이상한 난관이 있을 것이고, 카파르나움 놈을 만나도 공짜로 용에 대해 알려줄리는 만무했다. 그 온갖 역정을 어떻게 다 돌파하고는 용을 찾을 것인가.

어쩔 수 없었다. 나는 왕궁을 나와 북쪽으로 향했다.

"날개달린 사자가 여섯 마리 나타났습니다."

멀쩡한 길에 갑자기 무시무시한 괴물이 나타났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괴물과 대적했지만, 문제는 간단하지 않았다. 나는 늑대만 죽도록 잡아서 돈만 많이 벌고 지상공격 능력치는 굉장히 강했지만 공중공격 능력치는 형편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아무리 칼질을 해도 날개달린 사자를 공격하는데는 역부족이었다.

더군다나, 무기가. 이 단검이 워낙 썩어빠진 거지 같은 무기였다. 날개달린 사자에게는 한의원에서 사용하는 침정도도 아닌 듯 싶었다. 나는 "늑대왕" 체면에 도망칠수도 없고해서, 오기로 버티다가 무진장 얻어 맞았다. 답답하고 짜증날 무렵 갑자기.

"콘도르 흑기사가 싸움에 끼어들었습니다."

콘도르 흑기사라는 작자는 날아다니는 말을 타고 "롱기누스의 창"을 무기로 싸우는 놈이었다. 그 놈은 틱틱거리는 효과 음향이 몇 번 울리기도 전에 그토록 나를 괴롭혔던 여섯 마리의 날개달린 사자를 몽땅 스테이크 감으로 도축해 버렸다.

"네가 예리코의 늑대왕이로구나. 어린 솜씨치고는 제법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역시나 이 정도구나. 다음에 만날 때는 적이 될 것이고, 그 때는 네가 저 신세가 될 것이다."

그 녀석은 재수없게 잘난척을 하고는 그렇게 휑하니 사라졌다.

콘도르 흑기사가 누구인지 궁금하기도 하고, 막막하게 북쪽으로 나가는 것도 좀 위험할 것 같기도 하고 해서 나는 다시 예리코 마을로 돌아갔다. 금고에 가보니, 내 돈이 어마어마한 금액으로 불어나 있었다. 정말로 부동산이 폭등이라도 한 것일까. 나는 술집에서 술을 스물 세번 마셔서 바닥이난 체력를 모두 회복시키고 온 몸에 난 상처도 다 치료되게 했다. 나는 콘도르 흑기사에 대한 정보를 구하기 위해 이런저런 사람들과 대화를 했지만, 딱히 정확한 정보를 주는 사람은 없었다.

퇴근 시간이 되었다. 수진은 문자 메시지를 보내 왔다.

"어제 술 많이 먹고 괜찮아? 미안 미안."

나는 오늘은 뭔가 쉬고 넘어갈 때다 싶어서 그냥 문자 메시지에 아무 말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 집으로 들어갔다.

집에 도착한 나는 케이블 텔레비전에서 하는 남세진 작가의 해괴한 SF모험극을 보다가, 갑자기 코메디 미니시리즈 "SYS"를 보고 싶은 마음에 집 근처 DVD대여점에서 "SYS" 시즌1을 빌려다가 한참을 보았다. "SYS"를 보다가 나는 소파 위에서 잠이 들었고, 또다시 꿈을 꾸게 되었다.

예리코 마을에서 어디로 가야할지 방황하고 있던 나는, 멀리서 익숙한 모습을 보았다. 마법사 마르타였다.

"마르타! 마르타."
"아, 늑대왕이시어. 요즘 재미 좋지 않으십니까. 제가 뭐라고 그랬습니까. 집 사신 것은 따블이 되었고, 땅 사신 것은 따따블이 되지 않았습니까. 재개발도 생각했던 대로 결정되었고. 이제 이쪽으로 무기점이랑 방어구점이 들어설거니까. 한 3년만 지나면 다섯배, 여섯배도 바라 볼 수 있어요."

마르타는 계속 방실방실 웃으며 즐거워하고 있었다.

"저기, 여기저기 많이 다니면서 사람 많이 다니고 집 많이 보시니까 분명히 들어보셨을거 같은데. 혹시 '콘도르 흑기사' 누군지 아나?"
"에이, '콘도르 흑기사' 모르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누군데. 누군데 그래? 내가 산에서 맨날 개장수 비슷한 삶만 살다보니까 좀 모르는게 많거든."
"베타니아 최고의 영웅이자, 우리 예리코의 악몽인 콘도르 흑기사. 정말 몰라요?"
"몰라."
"예리코랑 베타니아 사이에서 전쟁이 났을 때 일인데, 국왕 폐하께서 원군을 많이 보내주셨기 때문에 거의 우리 예리코가 이길 분위기였거든요. 그런데, 베타니아에서 콘도르 흑기사란 놈이 갑자기 나타나더니 전세를 뒤집기 시작했어요."
"그 놈이 그렇게 대단해?"
"즉위 11년 4월 26일, 오후 두 시경. 그 생생한 살아 있는 전설의 시간을 잊고 있는 사람은 별로 없지요. 예리코 기사 열네명이 콘도르 흑기사를 함정으로 끌어들여서 한꺼번에 공격했거든요. 그런데 콘도르 흑기사란 놈이 꿀벌이 춤추듯. 나비가 꽃을 돌 듯 날아다니면서 움직이더니 그 열네명을 칼질 세 번에 쓰러뜨렸지요."
"칼질 세 번에? 열네명을?"
"그 후로 예리코 사람들은 놈을 예리코의 악몽이라고 부르고 있어요."
"그런데, 왜 그 놈이 날 살려준 거지?"
"콘도르 흑기사를 만났어요?"
"아까, 잠자고 꿈꾸기 전에. 낮에."
"콘도르 흑기사 때문에 도저히 전쟁이 끝날 것 같지가 않아서 국왕폐하께서 휴전을 결정하셨어요. 그리고 나서 공주님이 잡혀가셨는데, 용을 물리친다는게 어디 쉬운일인가요. 그래서 옛날에 적이었긴 하지만, 워낙 출중한 실력이 있는 콘도르 흑기사에게도 일을 부탁한 것이지요."
"알았어. 지금은 놈이랑 내가 목적이 같고, 그래서 나를 도와준거군. 꽤 멋을 아는 놈이구만."

마르타는 잠깐 뒤를 돌아보더니 갑자기 내 손을 덥석 잡았다.

"잡다한 이야기는 관두고 중요한 사업이야기를 합시다."
"부동산?"
"예, 요즘 소문이 파다한데. 베타니아랑 다시 전쟁을 할지 모른다고 합니다. 베타니아 마법사들이 새로 개발한 '악마화염'이 떨어지면 예리코는 한 번에 잿더미가 된다던데요. 어떡합니까. 전쟁나기 전에 북쪽지역 땅은 파는게 좋지 않겠습니까. 만약 전쟁일어나면 땅문서 따위는 다 휴짓장 될텐데."
"어휴. 믿지마. 믿지마. 막 신문이나 뉴스에서 전쟁일어날 것 같이 분위기 살벌하고 그럴 때, 그런거 믿으면 절대 안돼. 다 사기야. 그렇게 술렁술렁 할 때 더 땅사고 주식사고 해야 한다니까."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마르타에게 신신당부하다가 잠에서 깨어났다.

그날은 출근하자마자 컴퓨터 앞에 앉아서 "용의 전설"에 접속했다. 나는 콘도르 흑기사에게 강한 경쟁심을 느끼고 있었다. 나는 무려 20만마리에 가까운 늑대를 오직 게임 시작할 때 주는 단검하나로 다 잡은 괴력의 "늑대왕"아닌가. 그런데, 날아다니는 말이라는 폼 나는 아이템 하나의 힘으로 온갖 영웅 행세 잘난척은 다하는 그 싸움꾼이 좀 얄미웠다.

나는 콘도르 흑기사 보다 먼저 용을 찾고 공주를 구하기로 결심했다. 용을 찾기 위해서 분명히 콘도르 흑기사는 북쪽의 현자 카파르나움을 찾아갈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냥 아무 정보나 힌트 없이 무작위로 이 땅 전체 구석구석을 다 뒤져보는 방법을 사용하기로 결심했다.

나는 또다시 간단한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용의 전설"에 접속해서 화면 제일 북쪽끝, 서쪽끝으로 가서는 용이 있는지 없는지 찾아 본다. 없으면 한 걸음 동쪽으로 움직인 뒤 용이 있는지 없는지 찾아 본다. 없으면 또 한 걸음 동쪽으로 움직인 뒤 용이 있는지 없는지 찾아 본다. 그런식으로 북쪽끝을 모조리 다 뒤지고 나면 이제는 남쪽으로 한 발자국 움직인 뒤 용이 있는지 없는지 찾아본다. 이런식으로 한 구십만번에서 삼백만번 정도 반복하다보면 "용의 전설"의 지도 전체를 샅샅히 다 뒤질 수 있게 되고 어디인가에 있는 용을 분명히 찾아 낼 수는 있을 것이었다.

"용의 전설"은 어차피 십몇년 전에 나온 게임이고, 그렇게 큰 지역을 소화할 수 있는 용량의 게임이 아닐 것이다. 자동 프로그램으로 지도를 뒤지면 한 여섯시간에서 일곱시간이면 용을 찾아 낼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괴물이나 적을 만나면 무조건 도망가도록 설정해 놓고, 프로그램을 가동시켰다. 그리고 북쪽 끝에서부터 쉴새없이 움직이며 계속 용이 있는지 없는지 뒤지는 모습을 보면서 느긋하게 기다리기 시작했다.

은박사님의 세미나를 듣고, 오후에는 연구 회의에 들어갔다 나오니, 프로그램은 끝이 나 있었다. 백오십만번 탐색을 한 결과 드디어 용의 굴을 찾아낸 것이었다. 나는 용의 굴이 있는 위치를 메모지에 메모해 두었다. 드디어 용과 싸우고, 공주를 구할 가장 결정적인 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 때, 전화가 울렸다.

"나."
"그래, 왜?"
"오늘 저녁에 시간 나?"
"오늘 저녁?"
"어."

수진이었다. 그녀가 만나자고 한 약속 장소까지 나가려면 좀 일찍 연구소에서 출발해야 했다. 나는 용의 굴 바로 앞에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나는 수진과 만나서 처음에는 말 없이 썰렁한 시간을 한참 보내다가, 막상 밤이 깊어지기 시작하자 온갖 이야기를 기나길게 나누었다. 수진은 자신과 나의 성격에 대해서 길게 이야기를 끌어내는가하면, 우리의 관계라든가 나의 미래, 수진의 미래에 관한 이야기도 길게 했다. 밤은 깊어 갔고, 수진의 감정은 복잡하게 이리저리 요동쳤고, 나는 그에 따라서 이런 저런 행동들을 했다.

우리는 도시의 서쪽 끝까지 오게 되었고, 마침내 자정이 살짝 넘어서야 헤어졌다. 엄청나게 택시비가 나올 지역이었다. 어쩌랴. 나는 추운 날씨에 벌벌 떨며 사십분을 헤멘 끝에야 택시 한 대를 잡았고, 뒷자리에 눕듯이 앉아 집에 도착할 때까지 긴긴 시간 동안 짧은 잠에 빠져들었다.

나는 용이 자는 숨소리가 들리는 동굴 바로 앞에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동굴 속으로 한 발자국 발을 내딛었다. 거대한 용이 엎드려 있었다. 용의 눈만 해도 나보다도 더 큰 엄청난 크기였다. 초록색 비늘로 뒤덮힌 그 몸은 은은히 빛이 나는 듯 했고, 비늘 하나하나는 매끄러운 유리 같기도하고, 커다란 철갑옷 같기도 했다. 나는 용의 꼬리 뒤켠에 눈부시게 빛나는 수많은 금은 보화들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고, 그리고 마침내 그 보물들 사이에 비단 천들 사이에 덮혀 있는 사람 한 명을 보았다. 공주였다.

나는 용이 깨지 않도록 살금살금 공주가 있는 곳까지 갔다. 용이 뭘 먹게 한 것인지 공주는 나름대로 건강해 보였다. 공주는 아름다웠고, 특히 나는 그녀의 이마가 아름답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공주가 놀라 소리를 지르지 않도록 그녀의 입을 막았다. 그리고 공주를 흔들어 깨웠다.

"예리코에서 온 늑대왕입니다. 공주님을 구하러 왔습니다."

공주는 놀란 눈으로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공주의 한 손을 잡고 다시 살금 살금 걸어서 용의 굴 밖으로 벗어나려 했다. 용은 그때까지도 아무것도 모르고 쿨쿨 자고 있었다. 우리는 용의 굴을 완전히 벗어났고, 공주는 너무나 오랫만에 보는 햇살에 깊게 감동하는 듯 하였다.

"이렇게 공주님을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나는 한껏 멋을 부려 이야기하려 했다. 하지만, 20세기말 한국에서 성장하고 21세기에 들어서서 연구원질을 하며 살고 있는 나로서는 아무래도 갑자기 멋있는 말을 지어내는 것에는 한계가 있었다. 하지만 공주는 눈부신 미소로 답해 주었고, 나는 과연 인생을 살아오고, 세상을 다니며 모험을 하고, 야비한 수법으로 자동프로그램을 돌리며 인터넷에 패킷을 주고 받은 보람이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 퍼덕거리는 소리와 함께 하늘 저 쪽에서 콘도르 흑기사가 나타났다.

"공주를 내 놓아라."

놈이 소리 질렀다.

"왜? 벌써 내가 용으로부터 구해냈는데?"
"네놈은 치사한 수법으로 공주를 구해냈다."
"치사하기는, 날아다니는 말 타고 다니는 건 뭐 불굴의 의지와 고난 극복을 보여주는 거더냐?"
"닥쳐라. 나야 말로 공주를 구해내야만 한다."
"얼씨구. 그렇다고, 용 앞에서 우리편 끼리 싸울거냐?"
"네놈에게는 공주를 구해내는 일이 겨우 명성을 높일 기회나, 좋은 아내를 얻기 위한 방편 정도일지 모르겠지만. 나에게는 우리 베타니아의 평화를 위한 유일한 희망이다."
"용이랑 공주랑 베타니아랑 무슨 상관인데?"
"공주를 베타니아의 기사인 내가 데리고 있어야 네 놈들이 우리 베타니아를 침공하지 않을 것이란 말이다."
"웃기고 있네. 베타니아 마법사들이 악마 화염이니 뭐니 해서 안그래도 집값 떨어질까봐 신경쓰이는구만. 거기에 공주까지 차지하고 있겠다고?"
"말이 길다. 베타니아의 운명을 걸고, 공주는 내가 데려 가겠다."

놈의 말은 길게 말우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 놈은 하늘에서 내려 꽂히듯 나에게로 내려 왔다. 놈이 든 롱기누스의 창 끝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런데, 그 시끄러운 소리를 듣고 용이 깨어났다. 용은 으르렁거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시끄러워서 귀를 막았다. 정신이 번쩍 깨었다.

말인 즉, 나도 잠에서 깨어났다.

"다 왔습니다. 미터기대로만 받겠습니다."

택시 기사가 말했다. 나는 집에 도착한 것이었다.

집에 도착한 나는 택시 안에서 조금 자서 그런지 영 잠이 오질 않았다. 한참 밤중에 방안을 서성이던 나는 꿈 생각에 과연 공주는 어떻게 되고 콘도르 흑기사는 어떻게 되는지 궁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의 전설"에 집에 있는 컴퓨터로 접속하려고 생각도 해 보았으나, 주소를 회사 컴퓨터에만 저장해 두어서 그러기도 어려웠다. 다시 주소를 찾아 가려면 한참 헤메야 할 텐데 그러기에는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나는 그렇게 야밤에 헛생각만 하다가 수진이 건 전화 두 통을 놓쳤다. 그리고 목이 말라 냉장고에서 콜라를 벌컥벌컥 마셨다. 아차. 콜라 카페인. 덕분에 잠은 더욱더 멀어졌다. 나는 이런저런 생각에 한참을 잠자리에서 뒤척이다가 새벽에야 잠깐 잠이 들었다가, 알람 소리에 맞춰 허겁지겁 다시 일어나야 했다.

용은 단숨에 공주를 잡아 채었다. 용이 날뛰는 통에 콘도르 흑기사도 움찔해서 하늘로 날아 몸을 피했다. 나는 어떻게 반격을 해 보기로 했으나, 아직까지도 무기에 별 신경을 안 쓰고 게임을 했던 탓에 손에 들고 있는 무기는 단검 한 자루 뿐이었다. 이걸로는 놈의 비늘에 끼인 때를 떼내는 정도의 효용만이 있을 뿐이었다. 용은 어마어마한 불을 입에서 내뿜었다. 나는 황급히 도망쳤다. 나는 뒤를 돌아다보며 소리질렀다.

"공주님, 공주님. 꼭 다시 구하러 오겠습니다. 꼭 다시 옵니다. 꼭이요."

그날 연구소에는 점심때는 "사장님과의 대화" 가 있었기에 바빴고, 저녁때는 회식이 있어서 바빴다. 하지만, 나는 연구 과제가 엄청나게 바쁘다는 핑계를 대고 점심도 빠지고, 저녁도 빠졌다. 대신 "용의 전설"에 접속했다.

나는 용이나 콘도르 흑기사와 맞서 싸우기 위해서 혼자 힘으로는 역부족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거대한 도끼나 창을 휘두를 전사들과, 쉼없이 회복 마법이나 방어 마법을 사용해 줄 마법사들을 데리고 쳐들어가야 한다는 생각을 했다. 돈이야 끝도 없이 많으니, 이 많은 돈으로 싸울 사람들을 고용해서 수십명, 필요하다면 수백명쯤 되는 무리로 떼지어 가서 싸우면 아무리 용이고, 아무리 예리코의 악몽이라도 상대할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더군다나, 돈이란 돈은 내가 부동산 투자로 왕창 끌고 갔으니, 장사 밑천으로 쓰일 돈이나 물건을 만들고 농사를 짓는데 쓰일 돈도 없는 세상. 사람들이 일할 곳이 없고 실업자들이 넘쳐나는 것이 예리코의 현재 상황일 터였다. 예리코는 지금 엄청난 불경기라는 말이니, 쉽사리 사람들을 모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예리코의 익숙한 주점에 들어가 동료를 모으라는 명령을 입력했다.

"동료로 나설 사람이 0명 모였습니다."
"동료를 모으는데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아무리 많은 돈을 투입해도 도무지 사람들은 모이지를 않았다. 이상했다. 대체 이유를 알 수 없었던 나는 예리코 주민들에게 까닭을 알기 위해 이런 저런 이야기를 물어 보았다.

"대답을 알 수 없는 일이 있다면, 북쪽 현자 카파르나움을 찾아가 보게."
"현자 카파르나움은 모르는 게 없다네."
"카파르나움은 현명한 자라는 평판으로 명망이 높지."

쓸만한 이야기는 카파르나움 이야기 뿐이었다. 이 현자를 만나는 귀찮은 모험을 하지 않으려고 얍삽한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용을 찾아낸 것이었는데. 결국 용과 싸워 이기려면 카파르나움을 만나야만 한단 말인가. 얼마나 많은 싸움과 괴로운 수수께끼 풀이를 해야만 카파르나움을 만날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나는 용을 찾아내기 위해 이 세계의 구석구석을 모두 다 검색해 볼 때의 그 프로그램이 남긴 기록 파일을 떠올렸다. 옳거니. 그 기록 파일 속에는 무엇인가 유용한 정보가 있을지 모른다. 세상을 다 뒤지던 기록이 거기에 저장되어 있으니까, 그걸 잘 검색해보면 유용한 정보가 나올지 모르는 것이다.

복잡한 기호와 좌표, 일련 번호로 되어 있는 방대한 기록 파일을 읽기 힘들었다. 나는 "102309 AX 70" 따위로 되어 있는 기록 파일을 "남쪽 20 동쪽 15 지역, 비밀창고 금화 70개" 처럼 읽기 쉽게 고쳐 주는 변환 프로그램을 재빨리 만들었다. 그리고 이 프로그램으로 변환해 읽기 좋게 바뀐 기록파일을 나는 찬찬히 살펴 보았다. 지루하고 고달픈 과정이었지만, 심박사님이

"커피 안 마실래?"

라고 세 번 나에게 말을 걸만큼 시간이 지났을 때, 나는 드디어 찾아냈다.

북쪽 현자를 만나러 갈 수 있을 만한 비밀 통로가 의외로 남서쪽의 제단에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제단아래에는 깊숙한 지하 감옥이 있었고, 그 지하감옥에는 흉칙한 몰골의 이상한 문어 같은 괴물이 있었다.

"나를 이곳에서 나가게 해 다오. 그러면 나는 너에게 특별한 능력을 주마."

괴물은 묻지도 않았는데, 자신의 정체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나는 1만 5천년전 이곳을 탐험하기 위해 바리사이 별에서 비행접시를 타고 내려온 위대한 존재다. 그러나, 그대들의 영웅 그레고리와 싸운 끝에 그만 이 깊은 감옥속에 갖히고 말았다. 그렇게 해서 이 심연의 암흑속에서 1만 5천년을 지냈으니, 힘겹고 답답해 정신이 이상해져버릴 지경이다. 지금이라도 나를 꺼내어 자유를 준다면, 너에게 세상 어디로든 날아갈 수 있는 기계를 주마."

나는 그 괴물을 나오게 해 주었다. 괴물이 "속았지롱. 너부터 잡아먹어야겠다"라고 할까봐 겁이 나기도 했지만, 용을 물리치고 공주를 구하는 일이 너무나 바쁜 지금 나는 그냥 기도하면서 잘되길 바라며 후다닥 명령을 입력했다.

"약속대로. 기계를 주마. 크래프트를 받아라."

괴물은 나에게 "크래프트"라는 것을 주었다. H를 입력하고 남북 좌표를 입력한 뒤, P를 입력하고 동서 좌표를 입력하면 크래프트는 정확히 그 위치로 날아가게 되어 있었다. 나는 크래프트를 작동시켜 카파르나움이 있는 북쪽 신전으로 날아갔다.

"그대를 기다리고 있었다 용사여."

나는 카파르나움에게 "나를 기다리고 있었으면 좀 찾아오든가." 하고 모니터 앞에서 투덜거렸다. 하다못해 마중이라도 좀 나오면 한결 편할 것 아닌가. 어쨌거나 카파르나움은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답을 주려 했다.

"왜 아무리 돈을 많이 준다고 해도, 실업자들이 그대의 모험에 합류하지 않는 것이 궁금한가."

답이 기대되었다.

"용사여.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무릇 청년들은 당장이 아무리 궁하다 한들 그럴듯한 대기업이나 공무원이 되고 싶어 할 뿐, 어찌 이름없는 작은 일터나 그대와 같은 모험의 길을 택하겠는가. 더군다나, 요즘같은 때에 출발을 작게 시작하면 그로써 신분은 결정되고 일터를 옮길 때에도 계급과 서열이 정해지는 법. 그같은 청년들의 생각을 틀렸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막막했다. 이 게임을 하면서 언제 내가 내 왕국을 세운다거나 내 일당들의 규모를 대기업으로 부풀린단 말인가. 나는 오직 가진 것은 돈 뿐이지 않은가. 하지만, 용을 물리치려면 반드시 도움이 필요했다. 카파르나움은 과연 해결책까지 마련해 주었다.

"용사여. 서쪽의 바오로와 동쪽의 요한을 찾아가라. 그들 중 바오로를 아웃이라 하고, 요한을 소싱이라 하니, 그들이 이끄는 무리 들이, 그대들에게 비정규직으로 일할 사람을 줄 것이다."

나는 그 말을 듣자 마자, 재빨리 다시 크래프트를 움직여 바오로와 요한을 찾아갔다. 과연 그들로부터, 나는 마법사 동료들과 기사 동료들을 잔뜩 모을 수 있었다. 드디어 결전의 순간이 다가 온 것이다.

나는 열명의 마법사들과 일흔 명의 기사들을 떼거리로 이끌고, 메모해 두었던 용의 굴로 다시 달려갔다.

그리고 그 때 전화가 울렸다.

수진이었다.

수진과 나는 이미 당분간 연락을 끊기로 했다. 하지만, 그녀가 먼저 전화한 것이었다. 그녀는 전화해서 결코 좋은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녀와 무척 짧게 통화를 했는데도 무척 서글펐고, 또 외롭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다. 어느새 사방을 둘러보니, 연구소 사람들은 모두 나가고 텅빈 연구실에 나 혼자만 남아 있었다. 혼자서 이렇게 연구소에 남아 컴퓨터 게임을 하며 밤이 깊도록 버티고 있는 것도 참 궁상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에서 일어나 연구소 밖으로 나왔다. 나는 연구소 근처 술집에 가서 같은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는 대학 친구를 불러냈다. 꼭 술을 무지막지하게 퍼먹겠다는 생각은 없었지만, 어쩐지 오늘은 코가 비뚤어지게 마시게 될 듯하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

나의 코가 수직에서 벗어난 각도로 따졌을 때 약 5도에서 7도정도 비뚤어졌을 무렵. 나는 술집 문밖으로 나가는 어떤 사람을 한 명 보았다. 그녀는 바로 공주였다. 정말이었다. "용의 전설" 속에 나오는 용에게 붙잡혀 있던 공주였다. 내가 꿈속에서 보았던 그 모습과 똑같아 보이는 공주 그대로였다.

나는 그녀를 찾기 위해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술집 밖으로 나갔다. 황급히 거리를 둘러 보았지만, 대체 그녀가, 공주가 어디로 사라졌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용과 마법사 마르타와 예리코와 술집과 마리아, 요안나, 수산나, 막달레나와 현자 카파르나움과 콘도르 흑기사와 연구소 사람들과 수진을 계속 이리저리 생각해 보았다. 서로 상관 없는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연결되며 머리속에 가득했고, "야, 좀 잘해봐. 너 잘하는 놈이었잖아" 하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으며 헤어지고 집에 돌아올 때까지 그 생각들은 계속 이어졌다. 나는 끊없는 고민의 구렁터이에서 헤메면서 잠에 빠져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크래프트를 타고 선두에 서서 날고 있었고, 그 뒤를 말과 낙타와 타조를 타고 마법사와 기사들이 뒤따르고 있었다. 우리의 군사가 내달리며 일으키는 흙먼지는 자욱한 안개나 모래 폭풍을 연상케 할 정도였다. 우리는 무서운 기세로 용의 굴을 향해 돌진하고 있었고, 기세는 하늘을 찌를 듯했다. 정말로 한 번 움직일 때마다, 각각의 등장인물들의 움직임을 묘사하는데 한 화면이 가득찰만큼 북적이는 규모였던 것이다.

"적군이다!"

그 때 갑자기 낙타 위에 앉아 있던 한 마법사가 멀리 까지 내다보는 주문으로 무엇인가를 발견하고 소리쳤다. 이내 계속해서 적의 출현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늘을 나는 말이다!"
"콘도르 흑기사다."
"콘도르 흑기사다. 예리코의 악몽이다!"

베타니아 놈들이었다. 그리고 그 선두를 저 악명 높은 콘도르 흑기사가 맡고 있었다. "예리코의 악몽"이라며 소리지르는 아군 기사들 중에는 콘도르 흑기사가 나타났다는 사실에 약간 겁먹고 있는 이도 있는 듯 했다.

"겁내지 마라. 우리쪽의 숫자가 훨씬 더 많다."

가장 노련한 마법사인 필립보가 외쳤다. 하지만 두목 노릇을 하고 있는 나도 겁이나는 판이었다. 나는 눈 앞에서 날개달린 사자 여섯마리를 썰어버리는 콘도르 흑기사의 솜씨를 아직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기사 1진 돌격 준비-"

필립보가 소리쳤다. 자신의 검과 창을 곧쳐 잡고, 말탄 기사 열명 가량이 앞 줄로 나와 섰다. 멀리서 날아다니는 말 한 마리와 검은 말을 타고 달려드는 베타니아의 기사들이 눈에 보였다. 어느새 베타니아 마법사들이 날려 보내는 마법의 불덩이가 하나 둘 우리 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그 불덩이들은 공기를 가르며 떨어지면서 삑하는 괴상한 호루라기 소리 같은 것을 냈다.

"방어 마법을 시작하라."

곧 마법사들이 주문을 외우기 시작했다. 싸움에 나서는 기사들을 적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해주기 위해 마법을 거는 것이었다. 재빠른 마법사들은 위험에 처한 기사 한 명에게 두 세 명의 마법사가 동시에 마법을 걸도록 훈련하기도 해서, 최대한 적의 치명적인 공격을 막아내도록 하고 있었다.

"리베르 제네라티오니스 이에수......"
"인 프린치피오 에랏 베르붐......"
"쿼니암 퀴뎀 멀티 코나티......"
"이니티움 에반겔리 이에수......"

주문소리와 함성소리가 사방에 울려퍼지고, 말발굽 소리가 땅을 쿵쿵 울렸다. 나는 신난다는 생각도 들고 무섭다는 생각도 들고 요며칠간 대체 뭔짓을 하고 있는거냐는 생각도 들어서 이상한 흥분감에 사로 잡혔다.

곧, 우리의 기사들이 베타니아의 기사들과 마주쳤다. 칼이 갑옷에 부딪히고, 창이 투구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비명소리와 신음소리, 내지르는 괴성과 도움을 청하는 소리. 정신이 없었다. 나는 조금씩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나고 있기까지 했다. 소음과 함께 떨어지는 적의 마법 불덩이들도 좀 더 많이, 좀 더 뜨겁게 떨어졌다.

"기사 2진 돌격 준비-"

필립보가 다시 소리쳤다. 눈 앞에서 피튀기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좀 더 긴장되었는지, 2진 기사들은 약간 더 떨리는 듯 보였다. 나는 필립보에게 물었다.

"이거 우리가 이길 수 있을까?"
"걱정 마십시오. 놈들이 마법사들이 좀 많은 듯 하지만, 막상 칼든 기사들은 열명남짓입니다. 우리가 절대적으로 우세합니다."

다시 우리 기사들이 달려나가고 더 치열해진 소리가 울려 퍼졌다.

나는 좀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 싸우는 광경을 보지 않으려 했는데, 보다보니, 이거 좀 이상했다. 놈들은 분명히 밀리고 있었는데, 사력을 다해서 싸우고 있었다. 대체 이런 아무것도 없는 들판에서 뭐하러 질게 뻔한 싸움을 이렇게 미친듯이 하고 있는 것일까. 놈들은 조금 물러서기도 하고 목숨걸고 달려들기도 했으나, 어쨌거나 결코 후퇴하지 않고 있었다. 놈들은 패배가 자명한 싸움에서 전멸을 각오하고 있는 듯 했다.

굳은 각오를 한 덕분에 놈들은 참 무시무시하게도 잘 싸웠다. 우리의 비정규직 기사들은 적지 않은 숫자가 말에서 굴러떨어졌고, 비정규직이라서 의료보험도 잘 처리되지 않을 텐데 심각하게 부상을 입기도 했다. 필립보가 말한대로, 워낙 아군의 숫자가 많았기에 밀리고 있지는 않았지만, 양쪽의 기세라든가 개인전적, 1인당 생산성으로 따지면 확실히 우리가 아래였다.

"이거 너무 센 거 아니야."
"놈들이 너무 죽기 살기로 덤비고 있습니다."
"이상한데......"
"걱정마십시오. 가장 용맹한 기사인 요셉과 마티아를 보내서 적장 콘도르 흑기사부터 없애버리도록 하겠습니다."

나와 필립보는 날아다니며 창을 휘두르는 콘도르 흑기사를 불길한 눈빛으로 같이 쳐다 보았다.

"요셉과 마티아-"
"잠깐만."

나는 필립보를 잠깐 멈추게 했다. 이상했다. 콘도르 흑기사 놈은 좀 약해 보였다. 예전처럼 신출귀몰하며 세상을 박살내던 그 무서운 놈이 아니었다. 여전히 잘 싸우긴 했다. 자신에게 달려드는 우리편 기사 세 명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으니. 그렇지만, 내가 아는 콘도르 흑기사라면 기사 세명 정도야 새로산 DVD 비닐 벗기듯 처지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좀 귀찮고 어렵긴 하겠지만 간단히 승리를 거둘 훨씬 더 출중한 실력을 가진 인물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캐릭터 프로필을 보는 명령을 입력했다. 그리고 인물의 점수와 능력지수를 확인해 보았다.

"요셉과 마티아, 전투는 집어 치우고 나를 따르라. 이건 흑기사 놈의 속임수다. 저것은 가짜 흑기사다."
"예?"

필립보와 요셉, 마티아 등등이 어리둥절해 있을 때, 나는 당장에 크래프트에 올라타 날아갔다. 놈이 우리 발을 여기에 묶어 두기 위해 무모한 싸움을 걸어 온 것이었다. 지금 콘도르 흑기사랍시고 혼자 날뛰는 녀석은 꽤 싸움 잘하는 놈이 콘도르 흑기사로 변장한 녀석인 것이다. 자기에게 모든 공격이 집중될 것을 각오하고, 콘도르 흑기사가 무슨 음모를 꾸밀 시간을 벌어주고자, 스스로 희생하며 우리에게 달려든 것이다.

"어디로, 어디로 갑니까-"

날아가고 있는데 멀리서 요셉과 마티아가 소리질러 물었다. 허둥지둥하다보니, 어디로 가는지를 안가르쳐 줬다.

"용의 굴로. 분명히 놈은 용과 공주를 노리고 있다. 용의 굴로 당장 직행!"

내가 날아가자 뒤에 남은 요셉과 마티아, 두 용맹한 기사는 서로 수군거렸다.

"믿어도 되는거야?"
"어쩌겠나. 우리는 비정규직 아닌가. 손가락 하나 까딱하고 눈 한번 깜짝 하면 잘리는게 우리 신세일세. 안 잘리려면 시키는대로 해야지."
"비정규직 자르는 거야 뭐 두부 자르는 거 보다 쉬우니까. 에휴."

요셉과 마티아는 같이 한 숨을 쉬고 크래프트를 타고 날아가는 내 뒤를 따라 미친 듯이 말을 달렸다.

우리 앞에 비오 듯이 마법의 불덩이들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길게 삑삑거리는 기묘한 호루라기 소리가 귀가 아프도록 울려 퍼졌다.

그리고 그 소음에 나는 다시 잠에서 깨어났다.

내 머리 맡에서 내 전화기가 삑삑거리며 전자음을 내고 있었다. 몹시 성가신 소음이었다. 문자메세지. 새벽녁에 들어온 문자메세지였다. 한 삼사십분, 한 두시간정도 저 소리에 뒤척이면서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쌓이고 쌓인 소음을 견디지 못하고 깨어난 것이었다.

수진이 보낸 것이었다.

"이렇게 끝나게 되어 정말 미안해."

짧은 말이었다. 미안하다라니. 꼭 끝까지 자기가 나를 조종했고, 휘둘렀고, 슬픈고 괴로운 쪽은 나라는 것을 강조하고 싶더냐. 그렇게 막판 잘난척을 한 번 해야 속이 시원하냐.

나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었다.

기왕 일어나게 된 것, 잠도 다시 오지 않을 것 같아서, 나는 새벽 일찍, 길을 나섰다. 아직 동이 채 트지도 않아서, 세상은 어두웠다.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나는 아직 깜빡깜빡 졸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출근길을 나섰고, 아직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새벽의 연구소에 도착했다. 밤샘 근무를 한 몇몇 연구원들만 마치 되살아난 시체들처럼 유령같이 커피 자동판매기 앞을 배회하고 있었다.

나는 졸린 눈을 비비며, 홍차를 한 잔 타서는 한모금 마셨다. 그러면서 한 손으로는 키보드를 두드려 "용의 전설"에 접속했다.

"크래프트를 사용합니다."

나는 단숨에 용의 굴 바로 앞으로 왔다. 아니나 다를까, 그곳에는 콘도르 흑기사가 와 있었다. 진짜 콘도르 흑기사였다. 놈은 정말로 자신의 부하가 자신으로 변장하고 속임수를 꾸미게 하기 위해서였는지, 하늘을 나는 말도 없었고, 롱기누스의 창도 없었다. 놈은 그냥 걷고 있었으며 하잘 것 없어 보이는 단검 한 자루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리고, 잠든 공주를 데리고 있었다.

"콘도르 흑기사 옆에 황제 콘도르 새끼가 서 있습니다."

화면에 한 줄 글귀가 더 출력되었다. 놈의 옆에는 커다란 새가 있었던 것이다. 아직 새끼라서 그런지 특별히 사람을 공격할만한 괴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위협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서야 나는 흑기사 콘도르의 생각을 짐작할 수 있었다. 놈은 용이 자는 틈을 타서 몰래 굴 속에 들어간 뒤, 공주를 데리고 나온 것이었다. 그리고 바로 저 황제 콘도르 새끼를 타고 멀리멀리 날아서 도망칠 생각이었던 것이다.

콘도르 흑기사는 나에게 대화를 보내 왔다.

"너는 상상도 못하겠지만, 나는 지난 5년 동안 이곳에서 '용의 전설'을 위해 온갖 일을 했다. 망해가는 베타니아를 되살리고, 예리코 전투에서 국왕의 군대와 맞서싸우기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야 했다."

흑기사는 한맺힌 자기의 모험담을 주절주절 읊고 있었다.

"날아다니는 말과 롱기누스의 창을 구하기 위해서 나는 마흔 여섯개의 동굴과 지하감옥을 뒤지고 다녔고, 용이 있는 곳을 알아내기 위해 남쪽의 사막과 동쪽의 대양을 헤메며 끝도 없는 길을 헤메고 다녔다. 그러면서 '용의 전설' 속에 있는 수많은 괴물들과 등장인물들의 자료를 보충하고, 이들의 인공지능과 대화 데이터를 업데이트하고 업그레이드 했다. 5년. 5년이 꼬박 걸렸단 말이다. 나에게 '용의 전설'의 세계는 네놈이 상상도 못할만큼 소중한 것이다. 반드시, 내가, 내가 공주를 구하겠다."

콘도르 흑기사는 끝까지 전설속 흑기사 같은 말투를 사용하고 있었지만, 내용은 꽤 진지하고 숙연한 데가 있었다. 나는 약간의 죄책감마저 느껴지는 기분이었다.

"콘도르 흑기사가 싸움을 걸어 왔습니다."
"콘도르 흑기사가 단검으로 당신을 공격합니다. 체력 -5"

빠르게 화면에 글자들이 올라갔다. 콘도르 흑기사는 나를 공격했다. 놈은 날아다니는 말도, 롱기누스의 창도 없었기에 정말로 명성 만큼 위험한 상태는 아니었다. 하지만, 나보다는 월등히 강했다. 크래프트를 타고 정신없이 날아온 덕분에 아직 요셉과 마티아 두 기사는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콘도르 흑기사가 단검으로 당신을 공격합니다. 체력 -7"
"당신은 오른쪽 팔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나는 속수무책으로 콘도르 흑기사에게 당하고 있었다. 공주를 눈앞에 두고 이렇게 허무하게 죽다니. 예리코의 부동산 큰 손이자, 1백명에 가까운 기사와 마법사를 거느린 내가 여기서 이렇게 죽는단 말인가.

"당신은 위험합니다."
"당신의 의식이 잠시 불명이 되었습니다."
"콘도르 흑기사가 단검으로 당신을 공격합니다. 체력 -4"

마지막을 장식할 글자들이 빠르게 모니터를 두드리며 지나갔다. 이 짓도 이렇게 마무리인가.

그러나, 그때, 나는 잊고 있었던 것이 하나 생각났다.

"당신이 마법을 사용합니다."

나는 마법 명령을 내렸다. 그리고 혹시나 콘도르 흑기사의 단검 공격에 죽을까 싶어 최대한 빠른 속도로 키보드를 타이핑해 주문을 입력했다. 놈의 칼질보다 빨리 마법이 먹어야 한다.

"늑대왕이 늑대때들을 부릅니다."
"당신이 주문과 함께 하늘을 보고 길게 늑대 소리를 냅니다."

나는 한 자리에서 단검 칼질로 무려 20만마리의 늑대를 잡은 늑대왕 아닌가. 그게 바로 처음으로 땅투기를 하는 밑천이 되었지. 나는 그 생각을 해냈던 것이다. 사방에서 개짖는 소리 같은 동물 소리가 들리고, 길게 울부짖는 늑대 고유의 울음소리도 세상에 울려퍼졌다.

삽시간에 수백 수천 마리의 늑대떼들이 어디선가 나타나 몰려 들었다. 늑대떼들은 미친듯이 달려나와 늑대왕을 위해 콘도르 흑기사를 향해 달려 들었다.

"늑대8이 콘도르 흑기사를 이빨로 공격합니다. 체력 -5"
"늑대29가 콘도르 흑기사를 이빨로 공격합니다. 체력 -3"

정신 없이 말들이 출력되었다. 개떼처럼 몰려든 늑대떼들의 공격에 제 아무리 콘도르 흑기사라도 롱기누스의 창도, 하늘을 나는 말도 없는 한 별수 없었다. 결국 놈은 분노의 눈물을 삭이며 콘도르 새끼를 타고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마침내 나는 공주를 구출했다. 나는 잠든 용이 깨어날 새라 재빨리 크래프트를 날아오르게 하는 명령을 입력했다. 나는 공주와 함께 용을 피해 멀리멀리 도망쳤다.

"택배 왔다는데요."

그 흐름을 끊은 것은 컴퓨터 앞에 앉아 있는 나를 부른 지영씨였다. 나는 잠시 "용의 전설"을 떠나서, 연구소 입구에 누가 보낸지 모르는 물건을 받으러 갔다.

물건을 보낸 사람은 수진이었다. 그리고, 수진이 보낸 것은 종이 상자 하나 속에 담긴 여러가지 자잘한 것들이었다. 내가 보냈던 편지, 나와 함께 보았던 영화표, 내가 선물해 주었던 CD, 책, 머리핀, 반지. 등등등.

"아니, 꼭 이렇게 해야돼?"

나는 혼자서 중얼거리며 그렇게 한 번 짜증을 냈다.

나는 다시 연구소 안으로 돌아가기가 싫어졌다. 나는 연구소 건물과 붙어 있는 빌딩 지하로 내려가 찜질방에 들어갔다. 나는 수진에 대해서나, 수진이 없는 앞으로의 나날들에 대해서나, 누구는 결혼했다던데, 누구가 아직 애인이 없다지 아마. 하는 생각들을 계속하며 뜨거운 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있다보니, 벌써 출근시각이 다가왔고, 나는 터덜터덜 연구소로 들어와 출근부를 찍었다. 어제 잠도 못잔데다가 아침부터 뜨거운 목욕을 했기에, 잠은 쏟아져 왔고, 나는 결국 내자리 컴퓨터 모니터 앞에 업드려 잠을 자버렸다.

나는 공주와 함께 하늘을 날고 있었다. 바람에 머리칼이 흩날리는 그녀의 모습은 무척 아름다웠다. 그녀는 빠른 속도로 하늘을 나는 크래프트가 무서운지 내 팔을 꼭 붙들고 앉아 있었고 나도 사실은 무척 무서웠지만, 그녀 때문에 짐짓 여유 있는 척 했다.

한편 공주가 없어진 것을 안 용은 분노하여 사방에 불을 뿜으며 난리를 쳤다. 뒤늦게 용의 굴에 도착한 요셉과 마티아는 갑자기 날벼락처럼 불뿜는 용이 일대를 파괴하자 깜짝 놀랐다. 그 두 용맹한 비정규직 기사는 워낙에 실력이 출중했기에 가까스로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내는데는 성공했지만, "하여튼, 윗대가리들이 시키는 짓이라고는......" 하면서 끝없이 투덜거리며 도망쳤다.

마침내, 왕궁에 공주와 함께 도착해 크래프트에서 내리자, 공주를 발견한 왕실 근위병들과 대신들, 기사장들은 한 부동산 투기꾼과 함께 나타난 공주를 보고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나 곧 그들은 바닥에 업드리며 예를 표했다.

"공주마마."

나는 그들을 보며 반가움의 눈물을 흘리는 공주의 모습을 보고 내심 흐뭇해졌다. 나까지 눈물을 글썽일 정도였다.

그런데, 갑자기 낮인데도 하늘이 어두워지며 사방에서 먹구름이 몰려들어 해를 가려 버렸다.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설마...... 설마......"

학식이 풍부해 보이는 대신 하나가, 꼭 영화나 만화에나 나올 법한 투로 설마거리고 있었다. 이런 것은 대부분 지구 멸망의 전조를 볼 때나 하는 소리였다.

"이것은 지구 멸망의 전조입니다. 폐하."

그는 국왕에게 그렇게 고했다.

"그렇다면, 설마 황제 콘도르가 깨어난단 말인가."
"그러하옵니다."
"오오오오...... 오오오오......"

사람들이 모두 겁을 내며 떨고 있었다. 나는 무슨 영문인지 몰라 그나마 안면이 있는 공주에게 살짝 물었다.

"공주님. 이게 다 뭡니까? 왜 내 꿈속에 이따위 내가 싫어하는 상황들이 단체로 나타나는 겁니까."
"거룩한 늑대 영혼의 주인이시고, 위대하신 용사이시며, 제 생명의 은인이신 당신이여. 이것은 전설로만 전해져 내려오던 콘도르 여신이 깨어나는 징조입니다."
"콘도르면 새 아닙니까? 새 한마리 깨어나는게 무슨 큰 일이라고 다들 겁내는겁니까?"
"콘도르 여신은 콘도르 흑기사가 부리는 황제 콘도르 새끼의 어미 입니다. 콘도르 여신이 날개를 펼치고 하늘에 오르면 온 세상을 뒤덮을 만큼 거대하다고 하는 엄청난 새입니다."
"좋습니다. 그러면 엄청나게 큰 새 한마리 깨어나는게 무슨 큰 일이라고 다들 이러십니까."
"이 새는 너무나 거대하고 엄청난 크기라서, '용의 전설' 서버가 감당을 하지 못하는 크기입니다. 이 새가 날아오르기 시작하면, 용의 전설 서버는 급격하게 느려집니다."
"예?"
"그래서, 콘도르 여신은 기록과 전설로만 전해질 뿐, 단 한 번도 실제로 등장한 적은 없는 새였습니다. 더군다나 만약 이 콘도르 여신이 분노한 용과 싸우기라도 한다면, 1초에 3만 2천 7백 6십 8번의 마법 화염과 마법 폭풍이 몰아치고, 한 번의 화염마다 2백 5십 6번의 방어 마법이 사용될 것입니다. 그러면, '용의 전설' 서버는 바로 다운 되어 버리고, 이 세계는 이 세계의 모든 것은 유리창처럼 깨어져 연기처럼 흩어질 것입니다."

공주는 겁에 질린 표정으로 말했다. 마지막 "연기처럼 흩어질 것입니다" 부분을 말할 때는 목소리가 좀 흐느끼는 듯 하기까지 했다.

"아니 대체, 왜요? 대체 왜 누가 콘도르 여신을 용과 싸우게 해서 '용의 전설' 서버를 멈추게 한단 말입니까. 누가 세계를 단숨에 멸망시키는 어처구니 없는 짓을 한단 말입니까."
"바로 콘드르 흑기사 입니다. 거룩한 늑대 영혼의 주인이시고, 위대하신 용사이시며, 제 생명의 은인이신 당신이 용에게서 저를 구출하셨으니, 콘도르 흑기사는 삶의 의미를 잃어버리고 허무와 절망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박살내 버리려 한 것입니다."
"이런 속좁은 녀석."

나는 콘도르 흑기사의 마음이 이해가 가면서도 속이 터졌다. 종말에 임박함을 느낀 사람들은 모두 부둥켜 안고 덜덜 떨고 있었고, 애처로운 눈빛으로 하늘과 나를 바라보는 공주는 정말 불쌍해 보였다.

나는 그 공주의 얼굴을 보면서, 분명히 어딘가에서 공주를 본 듯하다는 생각을 했다. 공주는 내가 매일 계속 보아오던 사람처럼 나에게 친근하고 가깝게 느껴졌다. 그래서 나는 굉장히 사랑스럽다는 생각까지 멋대로 해버리고 말았다.

"공주님. 제가 무슨 일이라도 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모르겠습니다만, 일단 잠에서는 깨어나야 겠죠."

나는 잠에서 깨어나 책상에서 일어났다. 화장실로 뛰어가 찬물로 세수를 하고 나서 다시 자리에 와 앉았다.

"주의: 서버 용량이 부족합니다."

벌써 "용의 전설" 서버는 과부하에 시달리고 있었고, 명령을 처리하는 속도는 눈에 뜨이게 느려지고 있었다. 콘도르 여신과 용이 서로가 서로를 발견하고 싸움을 해서 서버를 멎게 하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 문제로 보였다.

나는 누구에게 물어봐야 할 지 고민했다. 떠오르는 사람은 한 사람 뿐이었다.

"크래프트는 북쪽 신전의 현자 카파르나움을 향해 날아갑니다."

현자 카파르나움에게 찾아 가서, 나는 급하게 명령어들을 두들겼다. 시간이 부족했다.

"콘도르 여신은 너무나 거대한 존재일세. 한 번 날개짓을 하는 것을 처리하기 위해서만도 얼마나 많은 메모리와 스왑파일 입출력이 필요한지 모르네. 이대로라면, 만약 용과 콘도르 여신이 싸우기라도 하는 날에는, 과부하를 이기지 못한 '용의 전설' 서버의 하드 디스크나 CPU가 타버릴 듯 하네."

나는 어떻게 세상을 구할 방법이 없는지 물었다.

"매우 위험한 방법이네만, 방법이 딱 한가지 있네. 그것은 바로 주정뱅이 철학자의 듀오스데 원판을 사용하는 것일세."

어떻게 원판 조각 하나가 세상 멸망을 막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알 수 없었지만, 별 방법이 없었기에 카파르나움의 말을 계속 듣고 있었다.

"세븐트라이브스 쩜 제이 에이취 쩜 에스브이 사이트에 들어가게. 그 웹사이트에서 지도 고유번호 00426 을 찾아가게. 그러면 그 지도에 뮤직맨 이라는 주점이 표시되어 있을 걸세. 그곳에 가서 죽치고 앉아 물통에 맥주를 담아 술을 마시고 있는 사람을 찾게. 바로 그가 주정뱅이 철학자 일세. 그에게 카파르나움의 이야기를 듣고 왔다고 하고는 카파르나움이 맡긴 듀오스데 원판을 달라고 하게."
"예? 진짜 그러니까, 게임 밖의 술집에 찾아가라고요?"
"그렇다네."
"그러면, 카파르나움님은 게임 속 캐릭터가 아니라 진짜 사람이 조종하고 있는 것입니까?"
"그런 이야기를 다 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네. 어서 움직이게."
"잠깐요. 잠깐요. 그러면, 카파르나움님의 중재로 공주고 뭐고 그냥 다 그 콘도르 흑기사라는 양반에게 양보하는 걸로 어떻게 타협할 수 없을까요?"
"힘들걸세. 콘도르 흑기사는 5년전 구조조정 때문에 겟세마네 부설 연구소에서 퇴직당했다네. 그런데 2006년 통과된 산업기술보호법 때문에 그 후로는 나라 법에 발이 묶여 아무곳에도 취직 못하고 여지껏 고통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네. 그런 그의 응어리진 한을 어디 풀기 쉽겠는가."
"그러니까 웹사이트에 가서 00426번 지도를 보고 찾아가란 말이죠?"
"기억하게...... 주정뱅이 철학자의 듀오스데 원판일세......."

나는 후다닥 파이어폭스 웹브라우저를 띄워 카파르나움이 말한 지도 웹사이트에 들어갔다. 나는 지도를 한 장 인쇄했다. 그리고 나는 며칠전에 만들어 놓은 보고서를 꺼내 들고 팀장 서박사님께 찾아갔다.

"보고서 다 했습니다. 진짜 맨날 밤샘했어요."
"주말께에나 된다더니. 벌써?"
"고생좀 했습니다."
"그래. 수고했네. 야, 역시 자네 뿐일세."
"에이, 뭘요. 그리고 한가지 더요. 저 지금 좀 급한 일이 있어서 그러는데요, 오늘 좀 일찍 나가봐도 되겠습니까?"
"그래. 그래. 나가봐. 얼른 나가봐."
"감사합니다."

나는 지도를 들고 바삐 연구실 밖으로 나갔다.

연구소들이 모여 있는 이 지역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그 뮤직맨이라는 술집이 있었다. 나는 택시를 잡아 타고 술집 앞까지 갔다. 정말 여기에, 공주와 왕궁과 예리코를 구할 유일한 아이템을 갖고 있는 사람이 있을까. 나는 떨리는 심정으로 뮤직맨 안으로 들어섰다.

이제 막 저녁 시간 근처에 왔기 때문에 가게에는 거의 손님이 없었다. 가게 안에는 "Will I Ever Tell You" 노래가 나오고 있었고, 주인으로 보이는 약간 대머리인 듯한 중년 남자가 컵을 손질하고 탁자를 닦고 있었다.

나는 가게 안을 찬찬히 두리번 거렸다. 대학생으로 보이는 남녀 한 쌍, 초췌한 모습의 무척 말라보이는 심각한 인상의 외로운 사나이. 그리고, 주인에게 뭐라고 의미 없는 농담을 던지는 좀 실없어 보이는 사나이. 그 앞에는 물통이 하나 있었고, 그는 물통에서 맥주를 따라서 자신의 잔을 채우고 있었다. 저 사람이다. 저 사람이었다. 나는 굉장히 어색했지만 용기를 내서 생전 처음 보는 사람에게 꽤 이상하게 아는 척을 해다.

"저, 죄송합니다만, 혹시 주정뱅이 철학자 십니까?"
"예?"
"주정뱅이 철학자 아니십니까?"
"글쎄요. 제가 술을 좀 많이 마시기는 하고, 과학자라고는 할수 있겠습니다만, 주정뱅이 철학자라."

그는 엉뚱한 나를 보고 재미있는지 술집 주인을 보며 웃었다. 그러나 그와 달리 나는 다급했다.

"저기, 예. '용의 전설' 이요. '용의 전설' 모르십니까? 북쪽 현자 카파르나움이 한 이야기를 듣고 왔는데요."
"'용의 전설'?"
"예. VT100으로 돌아가는 텍스트로 되어 있고.... 한 이삼십년 된 것 같은 온라인 게임인데요."
"아아아... 카파르나움."
"카파르나움 아세요?"
"알죠. 어, 그 친구 어떻게 아셨어요? 아시는 사이세요?"
"저기 예. 뭐 알긴 압니다만. 하여간 제가 좀 급하게, 듀오스데 원판이라는게 필요하거든요. 혹시 아십니까? 듀오스데 원판?"
"듀오스데 원판?"
"예, 주정뱅이 철학자의 듀오스데 원판이요."

그는 잠시 골똘히 생각하는 듯 했다. 그리고 그는 웃고있는 표정의 바탕아래 잠깐 심각하게 생각하는 듯도 했다. 그는 맥주를 한 모금 마셨다. 그가 술집 주인을 보고 말했다.

"최박사님. 그건가 본데요?"
"뭐?"
"그 왜, 아포칼립테크에 유 책임 아시죠?"
"티모테오 공업에 있다가 나온 유 책임?"
"예. 그 때 왜 옛날에 유책임이랑 같이 온 사람이 맡겼던 거 있잖아요."
"어.... 그거. 그게 어디 있더라."

술집 주인은 바 안쪽의 서랍 이쪽저쪽을 살폈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을 나에게 건넸다.

"이게 아마, 주정뱅이 철학자의 듀오스데 원판일겁니다."

그것은 낡은 2D 디스크 였다. 컴퓨터에 들어가는 오래된 5.25인치 플로피 디스켓이었던 것이다. 십몇년전에나 쓰이던 기록장치였다. 종이 봉투에 담겨 있고 빳빳한 종이 같은 얇은 플라스틱 속에 얇은 자성 필름 같은 것이 들어 있는 참 본지 오래된 물건이었다.

"감사합니다."

시간이 없었기에,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낡은 디스켓을 들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갔다.

내가 '용의 전설'에 들어가자마자 카파르나움이 부르짖듯 말했다.

"어서 빨리 해결해 주게. 지금은 내가 자네 친구들과 함께 콘도르 흑기사를 방해하고 있네만, 곧 한계에 부딪힐지 싶네."

느려진 서버가 출력하는 글귀가 천천히 힘겹게 화면에 표시되고 있었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일까. 나는 디스크를 들고 컴퓨터에 집어 넣었다. 아뿔싸. 집어 넣으려 했지만, 집어 넣을 구멍이 없었다. 5.25인치 2D 디스크를 읽을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가 없었던 것이다.

"저기요. 혹시 이거 읽을 수 있는 드라이브 어디 있는지 알아요?"

나는 급하게 일어서서 저편에 있는 장비 담당인 지영씨에게 소리쳤다. 지영씨는 조르르 달려 오더니.

"어머? 이게 뭐예요?"

라고 했다.

나는 사방을 뛰어다니며 수소문 했지만, 연구소에서 5.25인치 디스크를 읽을 플로피 디스크 드라이브를 찾아보기는 힘들었다. 그러는 사이에 어느새 퇴근시간이 다가오고 있었고, 하나 둘 사람들이 퇴근해버려서 물어 볼 사람이 없어지고 나면, 5.25인치 디스크 드라이브를 찾기는 불가능해질 지경에 이르렀다.

"서버실 공사 새로 할 때 나온 것들은 12AZ 창고에 다 모아 놨거든요."

나는 건설 영선 담당 차과장님의 말을 마지막 근거로 12AZ 창고란 지하동굴 같은 곳으로 기어들어갔다.

그곳에는 수백개의 버려진 낡은 컴퓨터들과 먼지가 보얗게 앉은 작디작은 CRT 모니터들이 천장까지 높다랗게 쌓여 있는 곳이었다. 그렇게 쌓은 컴퓨터들이 벽을 이루고 길을 이루며 미로를 만들면서 기묘하게 을씨년스러운 분위기를 만들고 있었다. 그곳은 마치 망자들의 쓸쓸한 넋이 떠도는 어둠의 미로 같은 느낌이 들었다.

콘솔로 쓸 쓸만한 놈을 하나 꺼내서 콘센트에 꽂아두고, 나는 찬란한 색깔로 부팅 될 때마다 자신이 무려 열여섯까지 색깔을 보여줄 수 있는 "EGA"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을 자랑하는 이 순박한 컴퓨터를 작동시켰다. 이 컴퓨터를 손이 부르트도록 열었다 닫으며 나는 수많은 기계들을 뒤지며 연구실의 내 컴퓨터에 연결할 수 있을만한 제대로 돌아가는 5.25인치 디스크 드라이브를 찾아 다녔다.

시간은 훌쩍훌쩍 지나갔고, 얼굴에는 검은 먼지가 묻고, 팔에는 긁힌 상처가 났으며, 손에는 전기 스파크에 데인 화상자국이 생겼다. 하지만 나는 공주를 구하고, 예리코를 구해야 했으며, 용과 콘도르를 막아야 했다. 밤이 깊어져 무척 피곤하다는 생각이 들쯤 되어서야 나는 마침내 제대로 돌아가는 5.25인치 디스크 드라이브를 찾아냈다.

아무도 없는 연구실에 다시 와보니, 이미 모두가 퇴근하고 깜깜하게 어두운 상황에서 웅웅거리면서 돌아가는 내 컴퓨터 소리만 건물 안을 울리고 있었다. 나는 혼자 컴퓨터 앞에 앉아서 디스크 드라이브를 연결하고, 문제의 디스크, "주정뱅이 철학자의 듀오스데 원판"을 집어 넣었다.

디스크 드라이브에서 무슨 믹서 돌아가는 소리내지는 복사기 복사하는 소리 같은 상당히 요란한 소리가 났다. 철컥거리고 덜커덕거리는 소리도 아주 많이 들렸다. 한참을 그런 끝에, 이 디스크 드라이브에 들어 있는 파일들이 표시되었다. 그것은 telnet 프로토콜 다중 접속 프로그램이었다.

나는 그제서야 카파르나움이 말한, "매우 위험한 딱 한가지 방법"이 뭔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모든 이용자들이 "용의 전설"을 이용할 수 없도록 네트워크 시스템을 망가뜨리는 것이었다. 지금 내 컴퓨터로는 1초에 2천번씩 "용의 전설"에 접속하도록 시도할 수 있었고, 그렇게 되면, "용의 전설" 서버의 데몬은 혼란을 일으켜 망가지게 된다. 아마도 나도 "용의 전설"과의 접속이 끊길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다시 세계 어디에 있을지 모르는 이 "용의 전설" 서버를 백업해 되살리기 전까지는 앞으로도 영영 다시는 "용의 전설" 서버에 들어갈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콘도르 흑기사도 접속이 끊기게 된다. 콘도르를 용에게 끌고 가서 세계를 멸망시키려는 그의 작전도 중단되게 된다. 그렇게 되면, 비록 모든 사람으로부터 접속이 끊기고, 어딘가 있는 낡은 컴퓨터에서 저 혼자 돌고 있을 망정, "용의 전설" 속의 도시들과 나라들, 괴물들과 기사들, 주민들과 상인들. 그리고 불쌍한 늑대떼들과 나의 공주도 그 안에서 그대로 살아 있게 된다. 그리고 누구의 개입도 없이 앞으로도 계속 그곳에서 살아나갈 것이다.

나는 문제의 5.25인치 2D 디스크에서 발견한 네트워크 파괴 프로그램을 실행하는 명령을 다 타이핑해 놓고, 엔터 키를 누를까말까 하며 고민하고 있었다. 이 방법 밖에 없을까. 앞으로 영영 다시는 "용의 전설"에 들어가보지 못한다니. 그러면, 공주는. 공주도 다시 만날 수 없단 말인가.

나는 점차 반응 속도가 느려져가는 "용의 전설" 서버 상태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면서 한참동안 그렇게 아무 일도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 깊은 밤의 적막과 기이한 고민을 휘젖는 몽롱한 졸음이 점차 차가워져가는 공기 속에 스며들고 있었다.

그 때, 갑자기 잠을 깨우는 밝은 빛이 창밖에서 비쳤다. 달빛이나 별빛이라고 하기에는 너무나 밝은 빛이었다. 그것은 공주였다. 공주는 신비스럽게 온 몸이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나의 크래프트를 타고 창밖에서 연구소 안의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공주님. 어떻게 여기까지 오셨어요?"
"강 서쪽 부동산의 제왕이시며, 비정규직 고용의 높은 봉우리신 늑대왕이시여. 쏟아지는 불덩이와 몰려오는 적들사이에서 이 내 몸을 구해 주셨던 것과 같이. 이번에는 또한 우리 모두를 구해 주시어요."
"잠깐만요. 거기 그대로 계세요."

나는 연구소 밖으로 뛰어 나갔다. 연구소 밖에서는 강한 바람이 폭풍이 되어 몰아치고 있었다. 깜깜한 밤이어서, 분명히 빛을 내던 공주를 쉽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는데, 도무지 어디에 있는지 볼 수가 없었다.

이내 갑자기 환한 빛이 나에게 드리웠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거기에는 은색으로 빛나는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새가 온 하늘을 다 가리고 날고 있었다. 그 새는 도시 전체를, 아니 이 지구 전체를 모두 가리우면서 어마어마한 날개짓을 했다. 새는 곧 길게 울음을 울었고, 나는 그 엄청난 소리에 깜짝 놀라 귀를 틀어 막았다.

그제서야, 나는 공주를 발견했다. 공주는 크래프트 위에 서서 나를 안타까운 표정으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나는 공주쪽으로 다가가려 했는데, 갑자기 서쪽 하늘에서 또다시 밝은 빛이 보여서 그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용이었다.

초록색 용이 소름끼치는 소리를 지르면서 미친 것처럼 마구 퍼덕거리면서 날아오고 있었다. 용이 움직일때마다 주변의 구름이 미친듯이 뒤엉키며 회오리처럼 흩어져 나갔다.

"예, 제가 구해드리겠습니다. 제가. 공주님 빨리 도망가요. 빨리. 크래프트, H1P1"

나는 크래프트에게 명령을 내려 북서쪽 맨 끝으로 날아가도록 했다.

"열류 해석 프로그램의 대가이시며, 보고서 작성의 거룩한 성자이신 늑대왕이시여-"

나는 공주의 마지막 모습을 똑똑히 보았다. 그녀의 눈에는 공포가 아리어 있었으며, 다급해하는 그 눈동자에는 생생한 생명력이 느껴져서 오히려 더욱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녀는 그 마지막 말을 제대로 마치지도 못하고, 엄청난 속도로 흰 빛을 남기며 까마득한 창공으로 치솟는 크래프트와 함께 사라졌다.

나는 연구소 안으로 다시 뛰어들어 갔다. 용의 울음소리가 들렸고, 그 큰 소리 때문에 연구소 유리창이 깨져나갔다. 나는 바닥에 넘어졌지만, 다시 일어나서 계속 뛰었다. 용의 울음소리는 정신없는 울부짖음으로 바뀌었고, 곧 미쳐나가는 콘도르 여신의 길고긴 높은 소리와 섞여들기 시작했다. 정말로 용과 콘도르가 싸울 셈인지 지축이 흔들렸고, 연구소 벽에 금이가며 조금씩 천장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지진이 난 것처럼 흔들리는 복도를 걸어서 찌그러진 연구실 유리문을 깨 부수었다. 도난경보기, 침입경보기가 마구 울어대고 있었지만, 귀를 멍하게 만든 용과 콘도르의 소리 때문에 다른 소리는 잘 들리지도 않았다. 나는 유리파편과 돌부스러기가 가득한 내 자리 앞에 앉았다.

곧 거대한 소리가 내 두 귀를 꿰뚫는 듯 했고, 따뜻하면서도 얼음처럼 시린 느낌이 온 몸의 살갗에 닿아왔다. 곧이어 아무것도 들리지 않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으며, 온몸이 산산히 부서져 나가고, 세상이 모두 녹아 내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밤 샘했나? 자네?"

나를 깨운 것은 서박사님이었다. 아침 햇빛이 눈이 부셨다. 나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내 자리 앞의 모니터 화면을 보았다.

"telnet 다중접속 스크립트를 작동합니다: 모든 사용자의 접속이 끊겼습니다: 네트워크 서비스가 비정상적으로 종료되었습니다."

해낸 것이었다. 뮤직맨의 술꾼에게 받아온 디스켓의 프로그램을 나는 제대로 작동시켰고, 이 늙은 프로그램이 눈부신 속도의 요즘 컴퓨터 위에서 움직이자, 삽시간에 "용의 전설" 네트워크를 강타해서 모든 연결을 다 끊어버린 것이었다. 이제는 흑기사도, 거대한 콘도르도 없다.

나는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다시 한 번 "용의 전설"에 접속을 시도해 보았다.

"서버를 찾을 수 없습니다."

역시나 였다. 완전히 네트워크 연결이 끊어진 것이었다. 다음 주가 될지, 내년이 될지 혹은 영원한 시간이 흐른 후가 될 지 모르지만, 어쨌거나 이제 한 동안은 아무도 다시 "용의 전설"에 들어갈 수 없었다.

나는 좀 쉬어야 되겠다고 생각했다. 요 며칠간 일다운 일을 한 것은 하나도 없지만, 나는 무척 지쳐 있었다. 서박사님은 이번에도 흔쾌히 허락해 주셨다.

"안녕하세요? 지금 출근하십니까?"

언제나 밝은 웃음으로 연구원들을 맞아 주는 빌딩 안내부스의 직원이 나에게 인사를 했다.

나는 문득 그녀를 돌아 보았다. 나는 그녀를 어디서 보았는지 바로 알 수 있었다. 내가 빤히 그녀를 쳐다보며 다가가자, 그녀는 약간 당황한 듯 머뭇거리다가, 잠시 후에 다시 되물었다.

"지금..... 퇴근 하시는겁니...까?"

내가 그녀에게 물었다.

"저기요.... 혹시요, 혹시. 저...... 경복궁이나 창경궁 근처가 원래 살던 곳이세요?"
"예? 예. 어, 어떻게 아셨어요. 저 살던 집이 안국동 쪽이거든요."

그것이 우리가 처음으로 나눈 대화였다.


- 2006년 카이로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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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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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배명훈 06.11.26 14:17 댓글 수정 삭제
    오, 재미있어요. 호칭들이 압권. 다른 사람들도 읽어야 되니까 더 자세히는 못 쓰겠지만, 하하. 이거 읽느라 또 한참을 할 일 못하고 딴 짓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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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06.11.27 09:58 댓글 수정 삭제
    등장하는 게임 "용의 전설"은 지금으로부터 10여년전 "컴퓨터 주니어"라는 잡지에 연재되기도 했던 이만희님의 SF소설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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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ol 06.11.27 11:52 댓글 수정 삭제
    단행본으로도 나왔었죠. 예전에 감동 받으며 읽은 작품 간만에 추억하게 되어서 즐거웠습니다. 잘 읽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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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06.11.27 16:02 댓글 수정 삭제
    "SYS"와 "남세진" 도 발견하셨습니까? 저는 중간에 살짝 사기꾼 같은 녀석이 갑자기 SYS를 만나서 이런저런 돈벌 궁리를 하는 부분을 가장 흥미진진하게 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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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fool 06.11.27 17:43 댓글 수정 삭제
    그냥 용의전설 은 흔한 작명이니까 우연의 일치로 생각했는데 SYS 에서 의도적이었구나 감 잡고 반가웠어요. 남세진은 기억이 안 나네요. 아무래도 (소설들에서) 흔한 이름이라 그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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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06.11.27 21:36 댓글 수정 삭제
    남세진이 SYS의 창조자 입니다. "용의 전설"은 아직도 전문을 http://cs.sungshin.ac.kr/~dkim/miscellany.html#sf 이곳 김도형님의 홈페이지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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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로 09.04.16 22:03 댓글 수정 삭제
    물통에 맥주를 담아마시는 사람은 벌써 여러번 등장하는 군요. 최박사님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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