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곽재식 초능력

2013.01.31 16:4801.31


초능력


아침 일찍부터 걸려 온 전화를 받자마자 지하철이 도착했다. 상준은 전화를 받으면서 지하철 안으로 들어섰다. 유진의 전화였다. 상준은 놀랍기도 하고 반갑기도 해서 밝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유진이 물었다.

"오늘도 지하철에 앉은 사람 중에 누가 맨 먼저 내릴지 맞힐 수 있어요?"

상준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일곱 사람이 자리에 앉아 있었고, 그 앞에 두 사람이 서 있었다. 출근길 지하철이 항상 그런 것처럼 오늘도 타자마자 앉을 수는 없었다. 상준이 대답했다.

"글쎄요."
"이번 달 들어서 계속 지하철 타기만 하면 빨리 내릴 사람 앞에 자리잡았다면서요. 그래서 바로바로 자리에 앉아서 지하철 타고 왔다고 했잖아요."
"이 쪽 회사로 옮긴 다음부터 계속 그랬으니까."
"나도 그랬으면 좋겠다. 아침에 출근할 때 진짜 피곤하고 졸리고 그래서 자리에 앉고 싶은데. 자고 싶기도 하고. 어떻게 그렇게 운이 좋을 수가 있는 거에요? 다음 정거장에 내릴 사람 미리 알아보는 방법이라도 있어요?"

유진의 말을 듣고 상준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들을 보았다. 상준에게 가장 가까운 쪽에 있는 것은 화장을 짙게 한 노인이었다. 상준의 생각에는 거의 화장을 할 일이 없지 않을까 싶은 나이의 노인이었는데, 무슨 일이 있는지 그려 넣은 눈썹이 얼굴에 무엇인가를 그린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그리기 위해 그 얼굴이 필요한 것과 같아 보일 지경이었다.

그 왼쪽과 오른쪽에는 간밤에 마신 술이 덜 깬 것 같은 남자 두 사람이 앉아 있었다. 한 사람은 얼굴이 붉고 나이가 들어 보였고, 한 사람이 얼굴이 희고 훨씬 젊어 보였다. 둘 다 눈을 감고 자는 듯이 표정을 지었다가, 머리가 아픈양 눈을 찌푸리면서 잠시 눈을 뜨고 이마를 짚기를 반복했다. 눈을 감을 때 와 뜬 때가 두 사람은 서로 달라서, 마치 어떤 규칙이나 박자에 맞추어 서로 번갈아 가면서 표정을 바꾸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 옆에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조그마한 전화기 화면을 보고 있는 사람이, 매우 즐거워하며 웃고 있었다. 억지로 웃음을 참으려고 노력했지만, 그 참느라 다문 어금니 사이, 구겨진 소리로 들리는 웃음이 계속 새어 나왔다. 웃는 소리를 듣고 끝트머리에 앉은 사람은 고개를 돌려 그 모습을 봤다. 그런데 그 사람은 이마를 드러내고 정성을 다해 조각품처럼 빗은 머리를 틀어 올린 모습이 꼭 그런 머리 모양을 지켜야만 하는 직업이나 직장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하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상준은 그 끝트머리에 앉은 사람을 흘깃 살펴 보았다. 격식을 갖춰야 하는 특별한 업체나 기관의 직원이나, 떠받들어 모시고 있다고 매순간 광고를 해 주어야하는 높은 사람을 모시는 직원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준의 직장 근처 결혼식장 안내원들은 모두 그렇게 이마를 드러내는 머리 모양을 한다는 것이 생각났다. 항공기 승무원들도 대부분 그렇다 싶었다. 그런데 다시 잠깐 돌아보니, 이마의 작은 주름이 뭉개진 모양이 눈에 띄었다는 점이 짚였다. 왜 그런 모습이 되었을까 생각하면서 두리번거리다가 상준은 반대쪽 끝에 앉은 체육복 차림의 남자를 보았다. 다리 한쪽을 5센티미터쯤 계속 까닥거리며 움직이고 있는 남자는 팔이 굵고 힘이 억새어 보였다.

문득 상준은 반대쪽 끝에 앉은 사람의 이마 모양에 대해 한 가지 짐작을 할 수 있었다. 이마를 드러내는 머리 모양을 할 때, 그 모양이 예뻐 보이려고 이마에 약을 바르거나 주사한 뒤에 손바닥으로 힘을 다해 미는 시술이 있다고 얼핏 들었던 것이 기억이 났다. 아마 꽤 억센 팔 힘을 가진 사람에게 시술을 받는 편이 유리할 것이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최근에 그런 방법으로 이마 모양을 다듬는 요법을 받은 사람일 것이다. 아직은 젊은 나이. 저런 머리 모양이 필요한 직업을 얻기를 위해 준비하고 있는 사람일까 싶었다. 머리 모양, 옷차림에, 이마의 피하 조직 분포까지 그 직업을 얻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게 개선하는게 좋지 않을까, 애절하게 바라고 있는 사람. 그렇다면 이 사람이 가려고 하는 곳은 아마 그런 직업을 얻기 위한 사람을 훈련시키면서 "너도 저렇게 멋있는 꿈 속의 직업을 얻을 수 있다"는 환상을 파는 학원이나 교습소에 가는 사람일 수도 있을 것이다.

상준은 지하철 다음역 근처에 무엇이 있는지 생각해 보았다. 호텔 직원, 비서나 승무원이 되고 싶은 사람을 가르치는 학원은 없다. 그렇다면 저 사람은 아마 좀 더 먼 곳에서 내릴 확률이 높을 것이다. 화장을 짙게한 노인도 부정적이다. 저렇게 단장을 한 것을 보면 오늘은 특별히 어디 멀리 가려고 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아마 버스터미널이나 기차역으로 갈 가능성이 높겠지. 이 지하철을 타고 10 정거장 이상은 더 갈 것이다. 그렇다면 역시 체육복 차림의 남자가 눈에 뜨였다.저 팔이 굵은 남자는 편하고 후줄근한 옷차림으로 짐작해보면 아마 집근처에서 왔다갔다하는 것일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그렇다면, 체육복 입은 남자가 아마 다음 정거장에 내릴 확률이 가장 높지 않을까.

"옷차림이나 얼굴 같은 걸 보고, 멀리 갈 사람일지, 금방 내릴 사람일 지 관찰하고 추측해서 확률로 따지는 거에요?"

그때 전화에서 유진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 왔다.

"그런건 꼭 아니고."

상준이 대답했다. 가능성은 그 나머지 만큼의 불가능성과 같이 있다고 상준은 생각했다. 이마의 화장기가 반짝거리는 사람은 근처 가까운 곳에 내려서 버스로 갈아타고 다른 곳으로 갈 수도 있을 것이다. 팔이 굵은 남자는 직업이 운동선수라서 그냥 운동하기 편하도록 체육복을 입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남자는 실내체육관이 있는 지하철 종점까지 자리에 딱 달라 붙어 있을수도 있다. 노인역시 멀리 가느라 화장을 짙게 하는 것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가지만 그곳에서 오늘 따라 중요한 사람을 만나는 것이라서 화장을 짙게한 것일 수도 있다. 그게 아니라면 그냥 그런 화장을 좋아하기 때문일 지도 모른다. 설령 짙은 화장을 좋아하지 않더라도, 오늘 따라 그런 화장을 좋아하는 같이 사는 동생이 "한 번만 짙게 해보면 훨씬 젊어 보일거"라고 부추겼기 때문에 눈썹을 그린 선이 몇 배 더 날카로워졌을 수 있는 일 아닌가. 

상준은 걸음을 옮겼다. 들어찬 사람들 사이로 발을 디뎌 한 사람씩 그 옆을 지나쳐 앞으로 움직여 나갔다. 결국 상준은 전화기 화면으로 나오는 TV 쇼를 보고 있는 사람 앞으로 다가가 섰다. 다시 유진의 목소리가 상준의 귀에 들렸다.

"나도 그런 건 있는데. 누가 가방에 책이나 전화기 집어 넣고 짐 추스리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다음 역 쯤해서 내릴 거라는 거 알고 잽싸게 그 앞에 가서 서 거든요. 아니면 전화기 보고 있다가 잠깐 힐끔힐끔 지하철 어디까지 왔는지 한번 고개 들어서 둘러 본다든가 하면. 거의 다 와가서 그럴 때가 많으니까."

상준은 앞에 앉아 있는 전화기 보는 사람을 보았다. 그 사람은 또다시 소리를 내며 웃었다. 얼굴은 진심으로 행복한 사람의 표정이라고 사진을 찍어 놓아도 될만 했다. 잠이 부족한 출근길에 지쳐 있고, 하루가 흘러갈 피곤함에 두려워 하는 사람들이 침울하게 가득한 차량 안이라서, 그 표정이 더욱 극적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지. 그 사람은 전화기 속 다섯치 화면에서 비춰 주는 어느 해변가 풍경에 빠져 있을 뿐으로, 짐을 싸고 있지도 않았고 주변을 두리번 거리면서 지나온 거리를 가늠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러나 상준은 그 사람 앞에 선 후로, 다른 쪽으로 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앉았어요?"
"아직이요."
"오늘은 실패구나. 아쉽네. 오늘 성공하면 열번째 아닌가?"
"아직은 실패인지 아닌지 모르죠. 아직 한 정거장도 안 지났으니까. 방금 탔다고 했잖아요."
"아직 한 정거장도 못 갔어요? 거기는 한 정거장이 되게 기네."

유진은 재차 상준의 상황을 물었다. 스포츠 중계를 듣는 태도였다.

유진은 그때 상준이 타고 있는 지하철에서 두 정거장 떨어진 지하철 역에 서 있었다. 그러고보니, 항상 지하철이 그 즈음을 지날 때 좀 오래 가는 느낌이 난다는 것이 기억 났다. 유진은 지하철이 오고 있는 것을 표시하는 전광판을 올려다 보았다. 두 가지 색깔로 변하는 작은 전구들이 달려 오는 지하철을 나타내고 있었다. 정류장을 지나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기 때문에 지하철 그림은 움직이다 말고 한 자리에 멈춰 있는 것처럼 보였다. 

유진과 함께 열차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의 숫자는 질리도록 많았다. 유진의 앞으로 지하철이 도착하자 그 많은 사람들이 모두 일제히 열차로 밀려 들어 갔다. 유진은 사람들이 서로 부딛히며 빽빽하게 지하철 안에 차들어 가는 사이에 있으면서, 비닐 호스 끝트머리를 좁게 만들어서 물줄기가 거칠게 튀어 나가는 것을 생각했다. 매일 아침마다 머릿속에서 떠오르는 광경이었다. 중학교때 물이나 기름 같은 액체도 아주 작은 분자 알갱이들이 가득 모여 있는 것이라고 배웠는데, 그게 바로 이런 느낌일거라고 생각 했다.

유진이 반대편 문까지 밀려 들어 갔을 때, 유진은 한쪽 편 자리에 앉아 있는 상준을 보았다. 빽빽하게 들어찬 사람들의 머리 몇 십개를 넘어서 보이는 모습이었다. 상준도 고개를 들어서 그 많은 얼굴들의 틈 사이로 보이는 유진의 눈을 보았다. 유진의 두 눈은 다른 얼굴들 사이의 손톱만한 틈으로 간신히 보였다. 그러나 상준은 유진의 얼굴이 놀라는 표정이었다가, 반가워 하는 표정이었다가, 우습다는 표정으로 바뀌는 것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상준의 전화로 유진이 보낸 문자 메시지가 들어 왔다.

"오늘도 또 앉았네요? 진짜 어떻게 한 거에요?"

유진은 전화기를 꺼내서 보는 상준을 보았다. 상준이 글자들을 읽고, 자기 전화로 유진에게 뭐라고 답을 써서 보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뭐라고 쓰고 있을까. 유진은 말소리를 듣고 내용을 알기 전에 말을 한다는 사실을 먼저 안다는 것이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화기에서 무슨 영상 보면서 웃고 있던 사람 앞에 섰는데요. 그 사람이 한참 빠져서 웃고 있다가, 지난 번 역에서 갑자기 내릴 역 지나친 것처럼 확 놀라서 뛰어 나가더라고요."

유진은 그 말을 읽고 다시 답할 말을 써보냈다. 두 사람 사이의 어느 틈에 앉아 있는 한 노인이 전화 통화를 하는 소리가 들렸다. 노인은 멀리 있는 사람에게는 큰 소리로 말을 한다는 본능이 남아 있는 것인지, 감도가 나쁜 구식 전화기로 전화를 하면서 상대방에게 잘 들리도록 말하는 것에 익숙한 버릇이 있는지, 귀에 들리는 소리의 크기 그대로 큰소리로 말하고 있었다. 그 목소리는 유진에게도 들리고 있었고, 상준에게도 들리고 있었다. 지하철 안에 타고 있는 다른 팔십명 정도의 사람들도 "인정이 결혼식 때 본 걔가 나온다고 했으니까 너도 오늘 나오라"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유진과 상준은 소리를 내어 말을 하지 못하고 서로 상대방 얼굴을 건너다 보면서 문자 메시지만을 주고 받았다.

"어떻게 한 거냐고 묻는게, 어떤 일이 일어 났는지 물은게 아니고요. 어떻게 다음 역에 내릴 사람을 미리 알아보고 그 앞에 서는지, 그 비법이 뭐냐고요. 매일 앉아서 오잖아요."
"그런데 지금처럼 이렇게 사람 많으면 알 수 있다고 해도 소용없죠뭐. 한 발자국 움직이기도 어려운데."

상준의 말처럼 역을 하나 더 지나는 사이에 사람은 더 많아졌다. 사람들은 서로 다닥다닥 붙게 되고, 밀려 들어 오는 사람들 사이에 끼일 때, 어떤 사람들은 짓눌리거나 밀리면서 신음 소리를 내기도 했다. 유진은 이 즈음 역을 지날 때 매일 저런 신음소리 몇을 듣는 다는 것을 생각해 냈다. 항상 비명을 잘 지르는 경향이 있는 사람들 몇이 정해져 있어서 저 소리를 내는 것인지, 매번 운나쁜 자리가 정해져 있어서 그날그날 거기에 끌려 들어가는 사람들이 저 소리를 내게 되는 것인지 궁금히 여겨 보았다.

유진은 회사 앞 지하철 역에서 내리자마자, 트인 공기를 크게 한 번 마시고 내 쉬었다. 그리고 발걸음을 계단으로 옮겼다. 끼인 채로 서서 긴 시간 버텼던 다리로 딛기에 계단의 숫자는 많기도 하여 보였다. 유진보다 조금 늦게 내린 상준은 유진의 뒤를 빠른 걸음으로 따라 갔다. 상준은 유진이 걸어 가는 옆까지 오자, 말을 걸었다.

"오늘은 그래도 어제 보다는 지하철에 사람 안많았죠?"
"안많기는. 오늘도 땀이 확 나는구만."
"앉아서 보니까 잘 모르겠던데. 바깥 날씨 추운데 비해서 지하철 안이 따뜻하잖아요. 그리고 아침에는 다들 피곤해서 조용하니까 사람 되게 많은데도 아무 소리 안들리고 조용하거든요. 그러면 아늑하다고 할까, 그런 기분도 들고 그렇던데."
"남은 힘들어 죽겠는데, 자기 앉아서 온다고 아늑하다는 건 또 뭐야?"
"어떡하겠어요. 제가 대리님께 자리를 비켜드리고 싶어도 그 사람 많은데서 그렇게 할 수도 없고. 저도 마음만은 혼자 편하게 와서 매일 미안한 마음인데."

상준이 말하면서 소리를 작게 내서 웃었는지, 웃는 소리를 아예 안냈는지 유진은 알 수 없었다. 웃는 말투였던 것은 분명했다. 유진은 상준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상준은 지하철 계단 위 하늘 쪽을 보면서 웃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웃는 인상은 무척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사람들 특징 보고 관찰해서 추측하는 건 아니라고 했죠? 그러면 어떻게 하는 거지. 이거 속임수 아닌가. 사실은 지하철 반대로 타고 가서 종점까지 갔다가 빈자리에 앉아서 오는 거 아니에요? 그래 놓고, 지하철 탈 때 마다 항상 다음 자리에 내릴 사람 찾아낼 줄 안다고 하는 거 아니에요?"
"내가 뭐하러요?"
"나야 모르지. 멋있게 보이려고 그러는건지."
"지하철에서 먼저 내릴 사람 찾아 내는 게 멋있는 거에요?"
"아침에 힘들게 멀리까지 와야 되는데 앉아 있는 사람 진짜 부럽잖아."

두 사람은 직장 사무실이 있는 건물 안으로 같이 들어 갔다. 엘레베이터에 타고 나니 두 사람 밖에 없었다. 소란스러운 아침 길거리에 추워서 빨리 걸으면서 떠들던 큰 소리에 비해, 두 사람 밖에 없는 엘레베이터 안은 갑자기 너무 조용했다. 엘레베이터가 내는 종소리, 기계에 녹음된 소리가 메아리를 치는 것처럼 선명하게 들렸고, 과연 지쳐 있는지, 유진이 숨을 쉬는 소리도 들렸다.

상준은 뭐라고 좀 더 유진에게 말을 해 보려고 했는데, 할 말이 없었다. 할 말이 없는 만큼이나, 엘레베이터 안은 더 조용했다. 상준은 유진과 마주 보고 있으니, 조용하다는 것이 더 강하게 느껴졌다. 상준은 고개를 돌려서 몇 층까지 엘레베이터가 와 있는 지 보았다.

엘레베이터는 4층에서 5층으로 올라가고 있었고, 층수가 표시 되는 곳에는 작은 화면이 있어서, 오늘의 바깥 온도가 몇 도이고 날씨는 어떻다는 내용이 나와 있었다. 그 배경으로는 어항 속 풍경 같은 것이 뜻없이 나타나고 있었다. 상준은 어항 풍경을 보면서, 이 커다란 건물이 커다란 불가사리나 말미잘 같은 동물로 변해서 바다 밑 깊은 곳에 잠겨 있는 모습을 생각해 보았다. 건물 속에 구석구석 뻗어 있는 복도와 책상 사이를 직원들이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건물에 연결된 전화선으로 여기저기 통화를 하면서 하루가 돌고 나면, 이 건물 안에 입주한 회사들은 그만큼 더 돈을 번다. 바위 위에 붙어 있는 따개비가 열 한가지 무기질 영양분을 빨아들이고 몸속에 키틴질을 쌓아 간다. 몸 샅샅이 뻗어있는 작은 관에 굴러다니는 입자들처럼 직원들은 움직여서, 이 건물에 있는 팔백 마흔 세 개의 책상 자리들을 찾아가 채운다. 줄무늬 넥타이를 한 직원은 비타민이 풍부한 입자, 대머리 관리자는 철분이 풍부한 입자.

"하루 잘 보내세요."

유진은 인사를 하고 17층에서 내렸다. 상준은 좀 더 과장된 태도로 내리는 유진에게 인사했다. 엘레베이터 안에서 너무 조용하기만 했던 몇 초 간의 시간이 자신의 잘못 같다는 책임감을 느꼈기 때문이었다.

상준은 22층에서 내렸다. 유리문 옆에는 "보험안전공사"라는 말이 붙어 있었고 그 옆에는 사장이 바뀔 때마다 "혁신"을 해야 한다면서 항상 바꾸곤 하는 회사 로고도 그려져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이번에 새로 부임한 사장이 다시 로고를 바꾸려고 했기 때문에, 마케팅팀에서 그 일을 맡은 유진은 요즘 일이 많아진 편이었다. 상준은 그 그림을 보면서도 유진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못했다. 상준은 유진이 마케팅팀에서 일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고, 최근 갑자기 유진과 친해진 것에 대해서 생각하는 시간도 많았다. 그렇지만 아직도 유진이 무슨 일을 하는지, 그 일을 얼마나 귀찮아 하는지는 전혀 알지 못했다.

상준이 유진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그날 오전 회의 시간이었다. 그날 회의는 올해 서울에 폭설 피해가 발생할 확률이 얼마나 높은 지, 액수는 얼마나 될 지에 대해 의논하는 회의였다. 회의의 초점은 정부 부서에서 갑자기 그 확률을 주말까지 알려 달라고 했는데 도대체 어떻게 해서 며칠만에 그 자료를 만들어내느냐 하는 것이었다. 상준이 회의에서 발표할 내용은 혹시 너무 큰 확률이나 너무 작은 확률을 발표 했을 때, 보험안전공사의 중요한 돈줄인 보험회사들이 반발할 가능성이 있지는 않을지 말해 주는 것이었다.

말을 마치고, 앞쪽 자리에 앉아서 탁자에 앉은 사람들을 둘러 보았을 때, 상준은 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몇 살 즈음을 경계로 어린 사람과 나이든 사람으로 뚜렷하게 갈라진다는 것을 발견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보자, 유진이 며칠전 출근길에 말해 주었던 "중생대 대격변"에 대해서 떠올랐던 것이다.

"중생대 대격변"은 공룡들이 득실거리던 중생대가 끝날 무렵에 갑자기 지구에 아주 큰 변화가 생기는 바람에 일시에 공룡들, 파충류들이 죄다 없어져 버리고, 그 다음 시대에는 새로운 포유류들이 번성하는 시대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그게 우리 회사랑 무슨 상관인데요?"

상준이 물었을 때, 유진은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원래 여기 보험안전공사라는 데가 그렇게 일이 재밌는데도 아니고, 회사가 큰 데도 아니고, 그렇다고 월급을 많이 주는 데도 아니라서 별로 인기가 없었거든요. 그런데, 요 한 몇년 전부터는 워낙 불경기가 심하고 젊은 사람들 취업이 잘 안되니까, 그래도 '공사'라고 갑자기 취업자들이 너무 많이 몰린 거예요. 그러다보니까, 갑자기 지원자 숫자가 열배 스무배로 늘어 났는데, 특별히 그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더 일 잘할 사람 못할 사람 가려낼 세밀한 방법을 찾을 수가 없잖아요. 그냥 적당히 어지간한 사람이면 이 회사에서 일 잘하고 못하고 할 것도 없는데. 어차피 무슨 점수나 이런 건 비슷비슷하고. 그러다보니까, 결국 1차 면접, 2차 면접, 3차 면접 계속 보면 결국에 가면 외모가 조금이라도 남은 사람들이 우선 순위로 올라 오거든요.
그래서 취업 불황이 시작된 시점 후에 채용된 직원들은 대부분 이상하게 미남 미녀가 엄청 많은거죠. 그전 부터 일하던 사람들하고는 아주 종족이 다른 것처럼 보이는 거에요. 회사에 몇 번째 기수로 입사했느냐에 따라서 딱 갈려요, 그 기수 이전까지는 못생긴 기수, 그 기수 이후부터는 잘생긴 기수. 파충류 시대에서 포유류 시대로 넘어 오던 것처럼."

그 말을 듣고 상준은 유진에게 물어 보았다.

"그러면 대리님은 파충류 기수예요? 아니면 포유류 기수예요?"

유진은 그 말을 웃어 넘겼고, 상준도 같이 웃었다.

회의 도중에 상준의 눈에 보인 풍경이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파충류 직원들과 포유류 직원들이 뚜렷하게 나뉘어 보이는 모양이었다. 회의 하는 사람들이 "위원회장님"과 "고문위원님"의 입장에 대해 논쟁하며 결국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을 지루한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상준은 유진이 한 이야기들을 혼자 떠올려 보았다. 상준은 경기가 활황으로 가느냐 불황으로 가느냐 뜨고 가라앉는 경향에 따라서, 회사 직원들 사이에 미남미녀가 많이 나타 났다가 적게 나타났다가 하는 경향도 곡선 모양으로 나타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파도 모양으로 출렁거리는 그래프의 높은 부분에서 외모가 출중한 취업자들이 남루한 옷을 입고 모여 서서, 그래프의 낮은 부분에 있는 직원들을 보고는 억울한 표정을 짓는 모습을 떠올려 보았다.

같은 시각, 유진은 새 로고를 만들어줄 디자인 회사에 전화를 걸어 이야기 하는 데 지쳐 가고 있었다. 디자인 회사를 선정해서 돈을 주고 일을 맡기는 조건 중에는, 적당히 대충 좋게 좋게 처리하고 넘어 가도 되는 부분이 있었고, 모든 점에서 투명하고 청렴 결백해서 조금의 불공정한 면이 없어야 하는 부분도 있었다.

유진이 어려움을 겪는 대목은 어느 부분이 대충 넘어가도 되는 부분인지, 어느 부분은 엄격하게 처리해야 하는 것인지 그때그때 달라서 도대체 쉽게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보잘 것 없는 일을 두고 극히 세심한 공정함을 요구하는 부분이 있는가 하면, 유진이 생각하기에는 결정적인 내용인데도 시간 끌지 말고 내키는대로 정하고 넘어가면 그만인 부분도 있었다. 어떤 기준을 따라야 하는지 고민해 보자면, 회사 규정집에 나와 있는 부분을 따라야 할 때도 있었고, 회사 전자 게시판에 올라와 있는 내용을 봐야 할 때도 있었고, 반년 전에 감사팀에서 '유의사항'이라며 전달해 준 e메일에 나와 있는 것이 중요해 지는 부분이 있기도 했고, 그냥 상사에게 어떻게 지금껏 일해 왔는지 물어봐야 결정할 수 있는 것들도 있었다.

유진은 점심 시간이 지나도록 그 일에만 붙잡혀 있었다. 점점 더 일이 무의미해져만 가는데, 중간중간 끼어 들어 "일을 그렇게 하면 어쩌냐"고 쓰레기 같은 소리를 하는 사람들이 나타날 때마다 나자빠졌다가 다시 일어나야 하는 느낌이었다. 유진은 결국 신선한 공기라도 한 번 쐬고 나와야 겠다고 생각하고 건물 바깥으로 나왔다. 그러다가 들어가는 길에 상준과 마주쳤다. 유진이 상준의 답답한 얼굴을 보니, 아마 아까 건물 밖으로 나오던 자신의 표정도 저렇지 않았을까 싶었다.

"안녕하세요."

유진은 인사만 하고 지나치려고 했다. 오늘 아침에 일찍 상준에게 갑자기 전화를 건 것도 좀 경솔했던 것 같았는데,  혼자 너무 많은 이야기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상준이 유진을 따라 발걸음을 돌리면서 말을 붙였다.

"아침에 지하철 기다릴 때, 속임수 쓴 건 정말 아닙니다."

유진은 상준에게 대답하는 대신에 그냥 웃어 주었다. 유진은 엘레베이터를 타고 사무실로 되돌아가려고 했다. 그런데 상준은 걸음을 돌려서 유진을 따라 나섰다.

"바깥으로 나가시려는 것 아니었어요?"
"바람 쐬러 한 번 나가려고 했는데. 뭐, 그냥 들어 가려고요."

다시 앨레베이터를 타고 올라 가는 동안, 두 사람은 지하철에서 먼저 내릴 사람을 찾는 것에 대해 다시 또 이야기 했다. 잠시 어색한 몇 초 동안 우리 사이에 이야기할 내용은 이런 것 밖에 없나하고 유진이 먼저 생각 했고, 그 직후 무렵에 상준도 속으로 같은 생각을 했다. 그렇지만 웃으면서 이야기하던 두 사람은 엘레베이터가 67미터를 움직이는 시간 동안,

"정말 못 믿겠으면 제가 지하철 처음 탈 때 부터 한 번 보시면 되잖아요?"
"그러면 당장 오늘 퇴근할 때 같이 한 번 보죠. 어차피 같은 방향으로 가니까 저랑 같이 타면서 속임수 쓰는 지 안 쓰는지 보면 되겠네."

라고 합의 했다.

두 사람은 약속한대로 회사 건물 엘레베이터 앞에서 만나서 같이 퇴근했다. 유진은 5분 전부터 퇴근 시간이 될 때까지 여섯 번이나 시계를 확인했다. 상준은 평소에 다른 사람이 퇴근해서 몰려 나가는 눈치를 봐 두었다가 같이 걸어 나가곤 했는데, 오늘은 여섯시가 되자 마자 바로 컴퓨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지만 두려운 생각 보다는 그저 상쾌한 기분이었다. 엘레베이터 문이 열릴 때, 그 열리는 틈으로 상준은 바깥을 보았고, 유리문 옆에 서서 바깥 풍경을 보며 기다리고 있는 유진의 옆모습을 보았다.

퇴근길의 지하철은 출근할 때 보다는 한산했다. 그렇지만 훨씬 더 시끄러웠다. 별로 웃기지 않은 농담을 쉴새 없이 주절거리는 사람의 목소리들과 거기에 답하느라 억지로 웃는 사람의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소란스럽게 들려 왔다. 개중에는 전화 통화를 하고 있는데, 전화 건 반대쪽에서는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것인지 정말 궁금하게 만드는 말들을 사용하는 사람들도 여기 저기에 흩어져 있었다. 그러니, 그 와중에 혹시 정말로 웃긴 이야기가 그 사이에 섞여 있는지 어떤지는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유진은 먼저 지하철 안에 들어선 상준의 뒷모습을 쳐다 보았다. 상준은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았지만 자연스러운 걸음걸이로 지하철 가운데 쪽으로 걸어 갔다. 유진은 조금 간격을 두고 그 뒤를 따라 갔다. 상준은 작은 문제집을 꺼내서 보고 있는 한 학생 앞에서 주춤 하는 듯 하더니, 바로 그 옆에 앉아 있는 악기 가방을 든 사람 앞에 섰다. 유진은 상준이 두 사람 중에서 누가 먼저 내릴 것인지 분간이 잘 가지 않는 점이 있어서 잠깐 고심한 것인가 생각했다. 유진은 상준의 뒤에 다가 서서 상준에게 물었다.

"다른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읽어 내고 그런 건가요? 그게 아니면 무슨 불길한 기분 들거나 좋은 일이 생길 거 같은 예감 들거나 그런 것처럼, 정확하게 보지는 않지만 막연히 이상한 느낌이 불끈불끈 들고 그런 거에요?"
"그런게 어딨겠어요."

상준은 학생을 보면서 '요즘은 지하철 안이나 버스 안에서 보기 좋으라고 저렇게 작은 크기의 문제집을 아예 출판사에서 만들어 파는구나' 하는 생각을 했을 뿐이었다. 유진은 의심스러운 눈으로 상준을 쳐다 보았고, 상준은 그 표정이 재밌다고 벙글거리고 웃었다. 그리고 그때, 지하철 역이 다음 정거장에 도착했고, 상준 앞에 앉아 있던 사람이 일어 나서 내렸다.

"앉으세요."

상준은 유진에게 자리에 앉으라고 했다.

유진은 자리에 앉아 가면서 상준에게 도대체 어떻게 지하철에서 먼저 내릴 사람을 알아 볼 수 있는 것인지 계속 캐물었다. 상준은 대답을 피하면서 계속 이리저리 말을 돌렸다. 그러다가 두 사람은 반대편 지하철 유리창에 어둡게 비친 자신들의 모습을 보았고, 잠깐 말을 멈추었다. 그리고나서 어쩌다보니 두 사람은 한강의 밤 경치에 대해서 이야기하게 되었고, 강바람이 추워서 고생했던 때의 이야기나, 한강에서 낚시하기 좋은 곳에 대해서도 대화를 나누었다.

다음날 출근길에 상준은 무척 놀랐다. 상준이 지하철역에 왔을 때, 유진이 그곳에 먼저 나와서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일부러 지하철 타고 거슬러 올라온 거예요?"

유진은 고개만 끄덕거렸다. 유진은 상준의 눈을 초점을 정확히 맞추어 쳐다 보았다. "이제 실토해 보라"는 신호를 눈빛에 실어서 뿜어 보려는 것 같았다. 상준은 잠시 난처해 하는 듯도 하였다. 유진은 비법이 들킬 것 같아 걱정하기 때문인지, 자기가 바라보는 시선 때문인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지하철이 도착하자 상준은 또 먼저 걸어 가서 앉아 있는 한 사람 앞에 섰다. 그러자 유진은 그 옆에 서면서 상준에게 말했다.

"제가 그 자리에 서면 안돼요? 대리님은 저 옆에 옆자리에 서시고."
"예?"

상준이 제대로 대답도 하기 전에 유진은 상준의 자리 쪽으로 한쪽 발을 내딛었다. 상준은 떠밀려서 옆쪽으로 가서 서야 했다. 상준은 일부러 불쌍한 표정을 지으면서 유진을 쳐다 보았다. 왜 이러는 건지 설명을 해달라는 뜻이었다. 유진이 말했다.

"만약에 앉아 있는 사람의 특징을 관찰하거나 앉아 있는 사람의 생각을 읽거나 느끼는게 아니라면 도대체 어떻게 하는 건지, 내가 계속 고민해 봤거든요. 생각해 보니까, 아예 역발상으로 접근할 수가 있더라고요. 그러니까,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서 내릴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일단 아무 자리에나 서서 그 앞에 앉은 사람을 내리게 만드는거죠."

상준은 미간을 찌푸리며 부정한다는 뜻을 내보였다. 그렇지만 유진은 굴하지 않았다.

"앉아 있는 사람이 일어날 수 밖에 없는 그런 신비한 기운을 막 발산하는 건지, 아니면 표정이나 눈짓으로 교묘하게 이상한 감정을 불러 일으켜서 앉아 있는 사람이 도저히 더이상 앉아 있을 수 없는 기분이 들게 하는 건지. 하여간, 뭐 그렇게요."
"그걸 어떻게 증명하는데요?"
"이렇게 하는 거죠."
"이렇게?"

유진은 손짓을 해서 상준을 가까이 불렀다. 그러더니 상준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먼저 대리님이 한 자리를 찾아서 자리를 잡게 하는 거죠. 그리고나서 그 다음에 저랑 위치를 바꿔서 서는 거에요. 그러면, 대리님이 만약에 다른 사람이 미리 내릴 걸 알아보고 자리를 잡은거였다면, 대리님이 처음에 자리 잡았던 제 앞에 앉아 있는 사람이 다음 역에서 일어서서 내리겠죠.
그게 아니라, 대리님이 누구 앞에 서든지 그 사람을 다음에 내리도록 만드는 거라면, 자리를 바꾼 지금 대리님 앞에 있는 사람이 일어서서 내리겠죠. 이렇게 실험해 보면 적어도 둘 중에 어떤 수법인지는 알 수가 있잖아요."

상준은 유진이 무슨 말을 하는 지 알 수 없었고, 그냥 유진의 작은 목소리가 귓가를 장난스럽게 간질 거리는 것 같다고만 생각했다. 그리고, 다음 역에 도착하자 유진에게는 실망스럽게도, 두 사람 앞에 앉아 있던 사람들 모두가 동시에 일어나서 자리를 비워주고 내렸다.

그날 오후에는 눈이 내렸다. 창 바깥을 보고 상준은 지금 자기가 보고 있는 눈송이들이 그대로 내려가면 잠시 후 17층에 있는 유진도 보게 될 것이라고 생각 했다.

"눈이 많이 오네."

상준의 옆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이 창바깥을 보면서 말했다. "눈이 오는 풍경을 다같이 한 번 지켜 봅시다. 보기 좋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렇게 바로 말하면 이 얼간이 같은 세상의 격식에 어긋날까봐, 조심스럽게 퇴근길 교통상황을 걱정하듯이 꺼내는 불행한 말투였다. 사무실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창 바깥쪽을 보았다. 흰 눈이 가득 쏟아지는 격렬한 광경이 어떠한 작은 소리도 없이 건물 벽면 대신 서 있는 거대한 유리 바깥으로 보이고 있었다.

"이제 무슨 수법인 줄 알았어요. 오늘 저녁에 증명해 봐도 돼요?"

그때 상준의 전화기에 유진이 보낸 문자 메시지가 도착했다. 상준은 무슨 증명이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유진이 다시 답해왔다.

"사람 마음을 읽는 것도 아니고, 이상한 신비로운 기술을 써서 다른 사람 마음을 조종하는 것도 아니고요. 누구든지 노력만하면 할 수 있는 수법을 쓰는 거예요. 어떻게 하는 거냐면, 지하철에 타는 사람들이 어디에 내리는 지 미리 외워 놓는거죠. 출퇴근 시간에 지하철 타는 사람들이 대부분 매일 비슷한 시간에 지하철 타는데, 거기다가 내리는 데가 똑같이 정해져 있잖아요. 그러니까 그걸 기억하고 있으면 그중에 누가 어디서 내릴지도 알 수 있는거죠.
사실 대부분 출퇴근 시간 일정한 사람이면 항상 같은 시간에 같이 움직이는 사람들이잖아요. 아무도 그 얼굴을 보고 누가 누군지 익힐 생각을 안해서 그렇지, 일년이면 몇백번씩 마주치는 사람들이잖아요. 그러니까 그 중에서 내가 타는 정거장 바로 다음 정거장에 내릴 사람만 딱 외워 놓으면 그러면 그 사람 앞에 서 있으면 다음 정거장에서 바로 앉을 자리가 생기는 거죠."

상준은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저녁에 자기 생각을 증명하겠다는 유진의 제안에는 동의 했다.

유진은 상준의 답을 보고 기뻐하며 전화기를 닫았다. 유진은 창 바깥에서 내리는 눈을 보았다. 저 내리는 눈송이들 중에는 22층에 있는 상준에게 먼저 보인 뒤에 여기까지 내려온 것도 있겠지. 또 생각 했다.

상준이 빙판길에 한 번 넘어진 사람이 또 넘어질 확률이 얼마인지 계산하고, 서울 시내 도로에 있는 1평망미터 넓이의 빙판은 녹기전에 평균 몇 명의 사람을 미끄러지게 하는지도 계산하고 나자, 퇴근 시간이 되었다. 유진이 생각해낸 증명 방법은 출퇴근 길에서 멀리 떨어진 장소에 가서 지하철을 탄다는 것이었다. 그렇게하면 상준이 다음 역에서 내릴 사람으류 찾아내지 못하리라는 것이었다. 유진은 멀리 떨어진 곳에 가서 저녁을 먹고 거기서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 보자고 했다. 상준은 유진의 이야기를 듣고 같이 갈만한 식당을 찾아 예약해 두었다.

두 사람은 택시를 타고 회사와 계약 되어 있기 때문에 직원 할인가에 음식을 판다는 식당으로 가기로 했다. 군데 군데 눈이 하얗게 쌓인 길이 있었고, 그 흰 빛에 엉망이된 길을 힘겹게 지나가는 자동차들의 불빛이 계속 반사되어, 택시 안에 탄 두 사람의 얼굴은 잠깐은 붉은 빛으로 잠깐은 푸른 빛으로 바뀌었다. 그 동안 여러 가지 이야기로 같이 많이 말을 했던 것 같은 데, 그날 저녁은 이상하게 둘 다 말하기가 어색한지 조용하기만 했다. 택시의 라디오에서 정치 이야기, 사건사고 이야기, 스포츠 이야기를 하는 방송만 계속해서 흘러 나왔다.

상준이 예약한 식당은 높은 건물의 꼭대기층에 있는 식당이었다. 보험안전공사가 투자한 돈으로 지은 건물이라서, 그 꼭대기층 식당에는 보험안전공사의 마크가 네온사인 불빛을 밝히고 있었다. 유진은 "저 마크도 이제 또 바뀌겠지"하는 생각을 했고, 상준은 전에 여기에 와 본 적이 있냐고 유진에게 물어 보았다.

유진이 그 식당에 온 것은 처음이었다.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있었다. 창가 자리에 앉으면 서울 시내 수십만개의 집들이 밝히고 있는 빛들이 먼데까지 내려다 보였다. 그리고 그 창에는 보험안전공사에서 만들어 놓은 장치가 되어 있어서, 창밖으로 보이는 경치의 불빛들 위에 겹쳐서 조그마한 붉은 하트 표시나 책 모양, 아이스크림 모양 같은 것이 창유리에 가끔 나타나게 되어 있었다.

유진은 식당 메뉴 옆에 나와 있는 설명을 읽어 보았다. 보험안전공사의 통계에 따르면, 서울 시내에서는 하루에 151.5쌍의 연인이 탄생하고, 8401.3권의 책이 읽히고, 3만1501.7개의 아이스크림이 소비 된다고 한다. 그래서, 창에 모양이 다른 불빛이 반짝할 때 마다, 한 번씩 연인이 탄생하고, 책이 읽히고, 아이스크림을 먹게 된다고 나타내는 것이었다.

"저 집에서 누가 아이스크림 먹었다는 거에요?"

유진이 아이스크림 모양이 나타났다가 사라진 것을 가리켰다.

"정말로 저 집에서 지금 누가 아이스크림을 먹었다는 것은 아니고, 그냥 통계상으로 보면 지금쯤 시간이 흐르는 동안 서울 시내에서 누가 하나 아이스크림 먹은 정도 되는 확률이다, 그런 뜻이겠죠."

유진은 붉은 하트 모양이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보면서 "저기 하트. 저기도 나타났다" 라고 했다. 상준은 다시 메뉴에 있는 설명을 보다가,

"하루에 151.5쌍의 연인이 생긴다는데, 0.5 명은 뭐지?"

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고도 유진은 창 바깥을 계속 보고 있었다.

"사귀는 것도 아니고, 아닌 것도 아니고. 뭐 그런 건가 보지."

그런데 유진이 그 말을 마쳤을 때, 갑자기 창 밖 먼쪽으로 보이던 한 높은 건물이 있는 곳에서 갑자기 폭죽이 터지 듯이 여러 개의 붉은 하트 모양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거, 몇 분에 한 번씩 나와야 될텐데 갑자기 왜 저렇게 많이 나오는거지?"
"우연히 갑자기 겹쳐서 나오는 수도 있겠죠 뭐. 정말 낮은 확률이지만, 가끔가끔은 그냥 우연히 저렇게 될 수도 있는 거 아니에요?"

빌딩들을 둘러싸고 나오는 붉은 하트 모양은 이후에도 불꽃놀이처럼 계속 쏟아 졌고, 두 사람은 음식이 나온 후에도 한참 그 모습을 지켜 보았다.

"어디가 고장이라도 난건가."

곧 고장이 고쳐 졌는지, 아니면 그날 따라 수천명이 갑자기 사랑에 빠졌던 것인지 알 수는 없지만 쏟아지던 하트 모양은 한참 후에야 멈추었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그날 저녁 돌아가는 길에, 상준은 유진에게 좋아한다고 말했다. 유진은 바람직하고 훌륭한 취향을 갖고 있다고 상준의 견해를 인정해 주었다. 돌아가는 길에 지하철 빈자리가 있어서 유진이 그 자리에 앉았다. 두 사람이 사는 동네까지 가려면 열두 정거장이나 가야 했지만, 상준은 유진 앞에 서 있을 뿐, 다른 빈자리가 나는 동안에도 유진의 앞에 줄곧 머물러 있었다.

- 끝 -
mirror
댓글 2
  • No Profile
    쑤우 13.02.01 19:11 댓글

    약간은 우울한 금요일 겨울날에 어울리는 따뜻한 단편이네요~

    어디론가 정해진 시간에 매일 출퇴근 했을 때 자주 보곤 했던 얼굴들도 생각나구요.

  • 쑤우님께
    No Profile
    곽재식 13.02.01 22:37 댓글

    감사합니다. 워낙에 추울 때 쓰던 이야기라서, 그냥 제일 자주 하던 대로 이야기 서둘러 꾸며 봤습니다. 그래서 조용하고 기분 좋아질 만한 분위기로 만들어 보려고 했는데, 다시 보니 앞부분에 지루한 설명이 많아 보이기도 합니다.

분류 제목 날짜
곽재식 종속선언서 (본문삭제)2 2017.10.31
곽재식 종말 안내문 (본문삭제)11 2017.09.27
곽재식 텔레파시 삼단계 2017.08.29
곽재식 루프 해킹6 2017.07.25
곽재식 납량특집 프로그램의 공포 (본문삭제) 2017.06.28
곽재식 은방장군4 2017.05.30
곽재식 이상하고 아름다운 도깨비 공화국9 2017.04.30
곽재식 불공정(본문 삭제)2 2017.03.31
곽재식 뎅강뎅강뎅강 (본문 삭제)2 2017.02.28
곽재식 잡귀야 나한테 달라 붙지마라5 2017.01.31
곽재식 박승휴 망해라 (본문 삭제)2 2017.01.01
곽재식 해변의 휴양지4 2016.11.30
곽재식 쓰레기를 비싼 값에 사다 (본문 삭제)4 2016.10.31
곽재식 재건축의 마신7 2016.09.30
곽재식 범인이 탐정을 수사하다 (본문 삭제) 2016.08.31
곽재식 따주십시오의 의미에 관한 신고찰6 2016.07.31
곽재식 재식주의자4 2016.06.30
곽재식 파란 모자4 2016.05.31
곽재식 영혼을 팔아도 본전도 못 찾는다(본문삭제)4 2016.04.30
곽재식 이상한 말하는 쥐 이야기 (본문 삭제)4 2016.03.31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