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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미영은 우주선 중앙 화면에 안내 자료가 표시 되도록 조정했다. 양식은 그 화면을 보았다. 미영은 양식이 그 화면을 보는 순간 다시 안내 자료를 안 나오게 했다.

"왜 꺼요?"

양식이 말했다.

"또 이거 보고 나서, '이런 일은 우리가 사업을 시작한 취지에 안맞는 거잖아요.' 이럴 거 잖아요."
"그럴지 안그럴지 사장님께서 어떻게 알아요?"
"김이사, 맨날 그러잖아."
"그래도 이번에 그러라는 법은 없죠."
"동전 던지기를 아흔아홉번 했는데 계속 앞면만 나왔어. 그러면 백번째 던지면 앞면 나올까 뒷면 나올까."
"또 앞 면이 나올거라는 건가요?"
"그렇겠지. 아흔아홉번 연속으로 앞면이 나왔다는 건 정정당당하게 동전 던지기를 했다는게 아니라는 증거잖아요."
"진짜 속임수 쓰는 사람이라면, 상대방이 그렇게 백번째에 이번에도 앞면나올거라고 말하면 그때는 딱 뒷면이 나오게 던지겠죠."

양식은 미영이 조작하던 컴퓨터에 끼어들어 화면에 내용이 나오도록 했다.

"이거는 나름대로 보람찬 일이네요. 이 일은 우리가 맡아서 하죠."

미영은 양식을 말없이 노려 보았다. 양식은 슬쩍 미영의 눈치를 보더니 고개를 돌려, 서랍에서 봉지를 하나 꺼내더니 거기에 있는 육포를 뜯어 먹었다.

"맨날 일 마음에 안든다고 투덜거리는 거 싫어하던 사람이, 보람찬 일 따왔다고 좋아해도 불만 품고 뭐라그러면 너무 한 거 아녜요. 이건, 뭐 성격이 좀 꼬인건지."

양식이 말했다. 혼잣말 같은 말투였다.

"김이사가 성격이 꼬인거지."

미영은 소리를 높였다. 양식은 컴퓨터를 조작해서 우주선이 갈 곳을 입력했다.

"뭐 사장님이 꼬였건, 제가 꼬였건 하여간 이 일 하러 가긴 갈거죠?"
"......"
"그러면, 갑니다."

우주선이 진동과 함께 움직이기 시작했다. 잠시 말없던 미영이 다시 물었다.

"그런데, 왜 김이사는 왜 꼭 무슨 승리감을 느끼는 거 같은 표정을 지어?"


2.
미영과 양식이 간 곳은 은하수의 외곽 지역에 있는 우주 정거장이었다. 가는 길도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이 우주 정거장 주변에는 타키온 폭풍이 불 때가 있었는데, 마침 그날 따라 초광속 폭풍이 한창이었다. 양식은 어쩔 수 없이 훨씬 느린 아광속 추진으로 이동하도록 조종 했다.

"아광속 추진은 연료 많이 드는 거 몰라요? 왜 이렇게 달려요?"

미영은 돈을 아껴야 한다면서 양식을 다그쳤다. 양식은 몇 마디 항변을 했지만, 결국 꽤 지겨운 시간을 거친 후에야 우주 정거장에 도착할 수 있었다.

도착한 우주 정거장은 건설용 로봇과 우주선들이 활발히 드나드는 곳이었다. 그곳에서 미영과 양식은 무인 행성 예비 탐사일을 계약하러 가기로 했다. 미영은 이 일을 미영에게 소개해 준 비서에게 연락했다. 그 비서는 미영과 양식이 일전에 지구에서 만난 사람이었다. 비서가 위험하고 난처한 처지에 처했을 때, 미영과 양식이 도움을 준 일로 비서를 알게 되었는데, 위험한 일을 잘 넘겼지만 결국 그 이후로 비서는 일자리를 잃게 되었다.

하지만 만사 즐거운 얼굴 표정이 인상적인 이 어린 여자를 고용하고자 하는 곳은 세상에 많고 많은지, 곧 이 우주정거장에 있는 탐사 의뢰 중개소에 다시 취직한 것이었다.

"다시 보니까 엄청 반갑네요. 그런데 어떡하죠. 제가 지금 탐사 중개소를 그만 뒀거든요."

미영을 다시 만난 비서가 대답했다. 양식은 놀랐다.

"그새 또 짤린 거에요?"
"아니오. 제가 짤리기만 하는 줄 아세요. 이번에는 더 좋은데서 저 채용하겠다고 해서 제가 먼저 그만 뒀어요."
"어디요?"

미영이 묻자 비서는 "주식회사 염라대왕"이라는 회사 이름이 적힌 명함을 하나 건네 주었다.

"탐사 중개소에서 일 보시고 나면, 한 번 들러서 구경 오세요. 지금 고객들 할인가로 모집하고 있거든요."

두 사람은 "염라대왕"이라는 상호를 보고 불길하다고 생각 했다. 하지만 경쾌한 발걸음으로 새 일자리를 찾아 가는 비서의 뒷모습을 보고 뭐라고 나쁜 소리를 하기는 어려웠다.

두 사람은 비서와 헤어져 직접 탐사 의뢰 중개소에 찾아 갔다. 탐사 의뢰 중개소에는 아르바이트생으로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듯한 한 십대 청소년이 있었다. 그래도 "중개인"이라는 명패를 걸고 있었다.

"죄송합니다. 지금 일감이 없네요. 또 타키온 폭풍이 심한 때라서 우주선들이 날아다니기 어려운 지역이 많거든요. 일거리는 먼저 오신 분들이 다 맡아 가시고, 지금은 남은 일거리는 없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일부러 감지기 달고 와서 타키온 폭풍 멋있다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우리 같은 탐사 중개일 하는 입장에서는 갑자기 타키온 폭풍 생기면 골치아프기만 하죠."

중개인의 말에 미영은 자신은 미리 약속을 왔다고 했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약속을 한 당사자인 비서는 이미 이곳에서 퇴사하여 이곳 직원이 아니므로, 그 사정은 자신이 알 바가 아니라고 했다.

"저희가 얼마나 멀리서 왔는데요. 그냥 빈손으로 가라고요?"
"저기, 저거 보이시나요."

중개인은 사무실에 있는 큰 액자 하나를 가리켰다.

"컴퓨터로 옛날 예술가들의 기법, 특징을 입력한 뒤에, 그 기법, 특징을 그대로 살려서 새로운 그림 그려내는 수법 아시죠?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토성의 우주 정거장을 보고 그렸다면 어떤 모양이 될까, 미켈란젤로가 우주복 입은 화성 시민을 보고 어떻게 그림을 그릴까. 이런 거 컴퓨터로 계산해서 뽑아내는 거. 이게 옛날에 글씨 잘쓰는 사람들이 썼던 글씨 중에 골라내서 비석이나 간판 쓰는 집자(集字)랑 비슷하다 그래서, 이런 거 하는 사람들을 집자가(集字家)라고 하거든요. 솜씨 좋은 집자가들이 뽑으면 결과도 정말 좋죠. 저게 바로 조선시대의 한석봉 선생 솜씨로 쓴 겁니다."

그 액자에는 "먼저 줍는 사람이 임자" 라고 적혀 있었다.

양식이 미영에게 말했다.

"그러게 왜 그거 몇 푼 아끼려고 그렇게 느릿느릿 움직이자고 했어요. 원래 오려던 속력대로 왔으면 그래도 일거리 하나는 건졌을 거 같은데."

미영은 양식의 말은 못들은 것으로 하고, 중개인에게 다시 따졌다.

"그래도 그냥 가는 건 너무 하잖아요."
"어떡합니까. 먼저 오신 분들이 일을 다 맡아 가셨어요. 가끔 은하계 중심에 있는 블랙홀에서 잘못해서 빛 보다 빠른 입자가 튀어 나올 때가 있는데, 그 타키온 입자들이 이상하게 이 지역 쪽으로 많이 오거든요. 멀리 있는 다른 은하계에서 오는지. 그래서 우주선 다니는데 방해가 되어서 타키온 폭풍이라고 하는건데. 구경거리가 될 때도 있지만. 하여간 이번 폭풍은 너무 심하네요. 은하계들이 단채로 술마시고 토하고 있는건지 뭔지."

중개인이 힘없이 중얼중얼 하자, 미영은 중개인에게 다가가 가까이 섰다. 그리고 중개인의 눈을 힘을 주어 바라 보았다. 표정도 기가 막혔다. 양식은 고개를 돌렸다. 왠만히 어리숙한 사람은 뭔가 강하게 흔들어 놓을 수 있는, 순간적으로 한 번은 굉장히 위력적인 미영의 수법이었다.

"정 뭐하시면, 근처에서 한 몇시간 기다려 보시든지요. 폭풍 좀 잠잠해지면 일 맡아서 해 보실 수 있는 곳이 생길지도 모르니까."

중개인은 그렇게 대답했다. 겁을 먹은 것 처럼 떠는 목소리였다.


3.
미영과 양식은 첫 출근을 마치고 새 직장에서 첫퇴근하는 비서를 만나러 갔다. 같이 저녁을 먹을 셈이었다. 그런데 비서가 일하는 "주식회사 염라대왕"이라는 곳의 하는 일이란 것이 가관이었다.

일전에 미영과 양식도 본 적이 있던 지구의 한 경찰관이 경찰 일을 그만두고 지구를 떠나서 새롭게 시작한 사업이었다. 미영과 양식에게 사무실의 비서가 말했다.

"고객님, 고객님 나중에 사망하고 나시면 정말 허무하잖아요. 황금 관에 들어가서 국립묘지에 묻히면 뭐하나요 그냥 땅속에 가만히 들어앉아서 천년만년 들어 있는건데. 사망 하신다음에 보험금 나와도 마찬가지에요, 고객님. 고객님이 그 보험금이 어디에 어떻게 쓰이는 지, 잘 나와서 잘 쓰이는 지 아실 수 있는 방법이 전혀 없는 거에요. 고객님.

그런데, 저희는요 고객님. 저희는 다른 생명 보험 회사나 상조회사하고 저희는 전혀 다른 서비스를 제공하는 거에요. 고객님. 저희는 고객님께서 사망하시는 순간이 되시면, 저희가 보유하고 있는 망원식 순간이동경으로, 고객님의 뇌만 뽑아내서 저희 보관실로 옮겨 옵니다. 고객님. 그리고 그 뇌는 계속 뇌활동이 유지되게 보존액에 담기게 되고요, 그리고 나면 저희 가상현실 장치에 뇌가 연결이 되어서, 고객님 뇌는 저희 가상현실 프로그램 속에서 활동하게 됩니다. 고객님. 그러면, 고객님은 사망하시고 나시면, 그 뇌가 여기로 옮겨 와서, 고객님께서는 저희 프로그램 속에서 편하게 즐기면서 언제까지나 계속 쉬시면 되는 거죠. 고객님."

그렇게 말하면서, 비서는 가상현실 속의 풍경을 보여 주었다. 음식이 31가지 있는 뷔페 식당이 있고, 수영장, 스키장, 컴퓨터 게임 하는 곳이 갖춰진 거대한 어린이 놀이 공원이나 노인 요양원 같이 생긴 곳이었다. 보기에 따라서는 어린이 요양원이나 노인 놀이 공원 같은 느낌도 들었다.

"여기가, 천당인거죠. 고객님. 그래서 고객님, 저희 회사에서는 이렇게 면죄부를 발매합니다. 고객님. 저희 면죄부가 가격은 약간 있으신편인데요, 고객님. 이 면죄부를 사시면, 이렇게 사망하실 때 바로 천당으로 전송되실 수 있는 거에요. 고객님. 안그러면 죽고 나면 그냥 허무하게 썩어 없어지는 수 밖에 없는 거잖아요."

비서는 미영과 양식에게 수백개의 뇌가 가상현실 컴퓨터에 연결되어 보관되어 있는 보관실을 보여 주었다. 비서는 말을 계속했다.

"그리고 고객님, 고객님 고조할아버지, 할머니나, 고객님 조상분들은 벌써 돌아가셔서 천당에 안계시잖아요. 고객님. 그러면 그 분들은 천당에 못오신거라고요. 고객님. 불쌍하고 안타까우시죠? 고객님. 그래서 저희가 과거의 모든 다른 사람들도 천당에 모시고 오는 특약이 있어요. 고객님. 그게 뭐냐면, 시간 여행 기술을 이용해서 과거로 시간 여행을 해서, 과거의 분들이 사망하시는 순간이 되면 그 분들 뇌를 순간이동 시켜서 여기로 데려 오는 거에요, 고객님.

물론 아직 시간 여행 기술이 그렇게 쓸 수 있는 경지가 된 것은 아닌데요, 고객님. 그래도 지금 미리 특약에 가입해 두시면 면죄부 비용만 받고, 저희가 따로 시간 여행 비용은 안 받고 할인해드리고 있어요. 그러니까, 지금 미리 돈을 내 두시면, 저희가 백년후가 되건 천년후가 되건 시간 여행 기술이 개발되는대로 바로 옛날 과거 분들도 천당으로 모셔올 거에요.

여기 보시면, 지금 저희하고 협의 중에 있는 정부 기관들하고, 다른 이쪽 단체들도 많이 있거든요. 정말 착하게 살고 천당에 올 자격이 있는 과거의 사람들은 이런 단체하고 기관쪽에서 면죄부 비용을 내 주시고, 그 분들은 저희가 무료로 모시는 거죠. 고객님. 그러니까 나라별로 보훈재단이나 국방부에서는 그 나라에서 과거에 역사적으로 유명했던 장군이나 군인들을 시간여행으로 과거로 가서 천당으로 데려와 달라고 저희쪽에 의뢰를 하는 거에요."

비서의 설명이 한 바탕 끝이 났을 무렵, 비서의 관리자 한 사람이 뒤에서 나타났다. 관리자는 가만히 비서를 부르더니, 비서에게 단호한 어조로 지적했다.

"지난 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우리가 무슨 사기쳐서 등쳐먹는 보험회사가 아니잖아요. '고객님'이라는 말은 우리는 절대 쓰면 안된다고요. '클라이언트'라고 하세요. 기본이 제일 중요한 거라고요."

관리자의 말을 듣고 비서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렇지만, 미영과 양식 앞으로 올 때에는 다시 얼굴이 원래대로 밝아져 있었다.

"이렇게 저희 서비스는 시간 여행 개념이 있다는 게 가장 큰 특징입니다. 그러니까, 지금 당장 두 분 클라이언트께서 갑자기 사망하신다고 해도, 미래에 누가 면죄부를 사주신다면, 클라이언트 두 분께서는 죽자 마자 저희 천당으로 오시게 될 수도 있는 겁니다. 하하. 정말로 두 분이 죽어 보시기 전까지는 모르겠지만요. 하하. 옛날에 돌아가신 두 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할머니의 할머니도 마찬가지시고요.

그럼, 두 분 클라이언트들께서는 어떻게 저희 주식회사 염라대왕 서비스 쪽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나요? 클라이언트께서 직접 해주시는 말씀 듣는게 저희들한테는 제일 중요하니까요. "

미영과 양식은 오랫만에 한 마음 한 뜻이 되어 비서에게 "이런 회사 당장 때려 치우라"는 생각을 전달했다. 양식은 어떻게 이런 일을 시키려고 사람을 빼 왔는지 염라대왕 주식회사 대표이사에게도 따지겠다고 했고, 미영은 일자리가 도저히 없으면 당분간 미영의 비서가 되어도 좋겠다고 했다.

그리하여, 비서는 미영의 비서가 되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정작 돈이 되는 일거리 주겠다는 연락은 없었으므로, 미영은 남을 구해주고 도와 주었다는 뿌듯함보다는 쓸쓸한 기분에 빠졌다.

미영은 양식과 둘이 있을 때, 양식에게 투덜거렸다.

"하여간, 김이사는 예쁜여자라면 양팔 양다리를 쓰지를 못해. 비서한테 아주 넋이 나가서 혼자 무슨 정의의 용사가 되어 설치겠다고 난리더만."

양식이 대답했다.

"사장님이야 말로, 그 비서 보고 자기 옛날에 어릴 때 생각나서 물불 안가리고 막 나선거 아녜요?"

미영이 양식의 지적에 대답하기 전에, 일거리가 생겼다는 중개소의 연락이 왔다.


4.
미영과 양식과 비서가 중개인을 찾아가 보니, 잠깐 타키온 폭풍이 약해진 틈을 타서, 1024 폐기장 행성을 탐사 해 보라는 건이 떨어져 있었다. 1024 폐기장 행성은 타키온 폭풍이 많이 몰려 오는 곳으로 악명 높았지만, 미영은 어쩔 수 없다고 했다. 정 안되면 일주일이 걸리건 한달이 걸리건 초광속 추진을 안쓰고 움직여서라도 일을 하겠다고 했다. 양식도 떨떠름했지만, 직원이 한 사람 늘어난 마당에 다른 수도 없어서 반대하지 않았다.

중개인은 세부적인 목표와 일정은 의뢰주에게 물어 보라고 했다.

"의뢰주가 누군데요?"
"시공 장성"

비서는 시공 장성이 뭐냐고 미영과 양식에게 물었다. 미영이 "시공 장성"을 정말 모르냐고 묻자, 비서는 자기는 주로 달과 지구에서만 많이 지내서, 다른 곳 사정은 아는 것이 별로 없다고 했다.

양식은 시공 장성으로 날아가면서 비서에게 설명했다.

"세상에서 사람이 만든 것 중에 가장 커다란 게 바로 시공 장성이거든요. 그건 들어 보셨죠? 그러니까 시공 장성이란 게 시간과 공간의 커다란 성벽인데, 그게 있기 때문에, 세상에 있는 우주선들이 초광속 추진을 할 수 있는 거죠."

비서는 실제로 시공 장성을 보자 그 설명을 들었을 때 보다 몇 백배 더 깊게 감탄했다. 시공 장성을 실제로 보는 것은 미영과 양식도 처음이었기에, 감탄하기는 두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시공 장성은 어마어마하게 거대한 길게 뻗은 금속 덩어리 였다. 행성이나 별과 크기를 비교해야할만큼 그 크기는 컸다. 기둥이나 성벽 같이 보이는 번쩍이는 긴 금속 덩어리를 축으로 해서 원형의 큰 바퀴 같은 것이 있는 곳도 몇 군데 보였다. 그것이 시공 장성이었는데, 그 기능은 일단은 엄청나게 커다란 입자 가속기였다. 그리고 이 입자 가속기를 조작하는 정교한 운영체계는 입자 가속기의 막강한 성능을 이용해서 우주 곳곳의 우주선들이 이용할 수 있는 초광속 추진의 특이점을 만들어 내는 것이었다.

우주선들이 나날이 많아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 거대한 시공 장성은 나날이 그 크기가 늘어 나고 있었다. 너무나 거대한 시공 장성의 공사를 위해서, 시공 장성의 공사 지역 앞에는 균형을 이루고 회전하고 있는 백색왜성 세 개가 있었다. 이 백색왜성들은 강력한 중력으로 근처의 행성과 작은 별들을 끌어 당긴다. 끌어 당겨진 별들은 시공 장성 쪽으로 통과되면서 서로 강한 충돌을 일으키게 되어 산산조각으로 부서지고 폭발한다. 그러면 그 흩어진 물질들을 먹어치우면서 번식하는 작은 미생물들이 달라 붙는다. 이 미생물들은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부서진 별의 먼지들을 변형시키고 서로 이어 붙이도록 해서, 점차 자라나는 시공 장성의 새로운 부품을 만들어 갖다 붙이는 것이었다.

미영, 양식과 비서가 시공 장성의 84426호 사무실에 도착하자, 부지런히 일을 하고 있던 로봇이 세 사람을 맞아 주었다.

"시공 장성을 앞으로 더 건설하기 위해서 재료로 쓸 행성과 작은 별들을 알아보고 있는데, 그 중에서 동물, 식물이 사는 별이나, 경치가 아름다운 곳이 많거나 좋은 자원이 있는 곳들은 함부로 부수면 안된다고 은하 인권 위원회에서 날마다 경고를 하고 있거든요. 저희 감지 장치로 훑어 봐도 왠만히 동물이 사는지, 경치가 좋은 지 정도는 알 수 있는데, 그렇게 해서는 혹시 실수할지도 모른다고, 직접 탐사선을 보내서 조사하고 의견서를 받아 놓으라고 하고 있어요. 세상에, 직접 탐사선을 보내라니? 은하 인권 위원회에서 일을 얼마나 답답하게 하는지... 직접 탐사선으로 일일히 확인하라는거에요."

로봇은 은하 인권 위원회 사람들의 비효율성에 대해서 비판하는 말을 길게 늘어 놓았다. 하지만, 양식은 바로 그 비효율성 덕분에 우리 같은 한심한 회사가 거저 먹듯이 챙겨 먹을 일거리가 생기는 거라고 미영에게 속삭였다. 미영은 적당히 달래서 로봇의 장황한 말을 멈추고, 어느 행성을 탐사 하면 되는지, 어떤 양식 대로 탐사 결과를 보고하면 되는 지 확인했다.

"양식 작성하는 건 양식 이사가 다 맡아서 하라고요."
"이름 갖고 놀리는 거 너무 심하게 좋아하는 거 아녜요?"

계약서에 서명을 하고 나서는 미영의 표정이 과연 굉장히 밝아 보였다.

미영과 양식이 알아 볼 행성은 쓰레기 장으로 사용되던 행성이었다. 그렇게 큰 행성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대륙과 해양이 있는 행성 하나가 그 전체가 모두 쓰레기 장이라는 것은 그야 말로 시공 장성의 공사 현장에 갈아 넣어 마땅하다는 우울한 심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다만 행성으로 가까이 다가가면 갈 수록, 어지럽게 우주선의 앞길을 방해하는 소행성과 우주 공간을 떠다니는 덩어리들이 많았다. 처음에는 소행성 무리나 파괴된 돌 부스러기인 줄로만 알았는데, 하나 가까이서 살펴보니, 그것은 거대한 기계 덩어리였다. 로봇 팔이나 공장 설비 같은 것이었는데, 익숙한 옛날 전자회사 상표가 커다랗게 붙어 있었다.

"여기 어딘지 이제 알겠네요."

양식이 아는 체 했다. 미영도 곧 알아 볼 수 있었다. 전자식 컴퓨터에 다는 구식 하드 디스크를 만들던 공장이 있던 곳이었다. 이 전자 회사는 제품 자체의 성능이나 독창성은 부족했지만 하여간 믿을 수 없을 만큼 싼 값에 하드 디스크를 만들어 내는 솜씨가 뛰어난 곳이었다. 이 전자 회사는 규모의 경제를 위해서는 큰 공장에서 많은 생산 라인을 갖추고 한 꺼번에 많은 물건을 찍어낼 수록 가격을 낮출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한 극치에 이른 것이 바로, 공장성(工場星)으로 인공 위성의 형태로 만든 거대한 공장을 우주에 띄워 놓는 것이었다. 이 공장성의 크기는 엄청나게 커서 어지간한 소행성 보다도 훨씬 컸던 것이다.

그러나, 전동기와 금속판을 이용하는 하드 디스크가 완전히 쓸모 없는 것이 된 시대가 되자, 이 거대한 공장은 결국 아무 쓸모가 없어서 버려졌고, 몇 차례 방치된 기계들이 작동 오류를 일으키는 동안 폭발해서 이렇게 산산조각이 난 것이었다. 그 거대한 공장의 박살난 부스러기들이 주변 우주를 떠돌며 길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너무 방해되는 것이 많았기에, 우주선을 이용해서 쓰레기장 행성에 착륙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 마침내 우주선이 고장을 일으켜 조종 오류가 나오기도 했다. 미영과 양식이 난감해 하고 있는데, 비서가 나섰다.

"저희 아버지께서, 이럴때 쓰는 방법 알려 주신게 있는데요."

비서는 자신의 설득력을 굳게 믿는 표정을 지었다. 그리고 나서 비서는 주먹을 쥐고, 우주선 조종판을 한 번 세게 꽝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이거 진짜 진짜 말도 안되는 수법 아니에요? 심지어 이런거 요즘에는 별로 재미도 없잖아."

양식이 말하는데, 그 때 미영이 조심하라고 소리쳤다. 갑자기 타키온 폭풍이 다시 몰아쳤던 것이다. 우주선의 초광속 추진 장치가 잘못 휘말리면 우주선이 크게 망가질지도 모르는 노릇이었다.

그러나, 우주선이 망가지는 일도 없었고, 조종판이 소득없이 망가지는 일도 없었다. 오히려, 다시 깔끔하게 우주선은 조작이 정상화 되어, 사뿐하게 쓰레기장 행성에 착륙할 수 있었던 것이다.

"된다고 했죠?"

착륙에 성공했다는 것이 확인된 후, 비서는 다시 한 번 어디서나 쉽게 고용될 수 있을 듯한 좋은 구직자의 미소를 보여 주었다.


5.
미영과 양식과 비서는 착륙한 쓰레기장 행성의 광경을 보고 심심한 장엄함을 느꼈다. 이 쓰레기장 행성은 공장성에서 생산했던 어마어마한 양의 하드디스크들로 온 행성이 가득 뒤덮혀 있었던 것이다. 쓰레기장 행성의 차가운 표면은 공장성이 망하면서 갖다 버린 하드디스크들로 겹겹히 휘감겨 있었다. 세 사람은 언덕 위에 서서 보이는 풍경 저편 지평선까지 눈에 보이는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모조리 오직 하드디스크 뿐인 광경을 한참 동안 바라 보았다.

"이 정도면 보존할만한 풍경이나 지리적인 가치에 해당하는 거 아니에요?"
"모르죠뭐. 일단 측정해 놓고 사진 많이 찍고 감지기로 읽어들여 놓죠. 시공 장성 사람들이 판단하겠죠."
"하기야, 쓰레기장 행성마다 이 정도 풍경은 다 있는지 모르지뭐."

미영이 말했다. 그 말을 듣고 비서가 대답했다.

"장난감 갖다 버리는 쓰레기장 행성에는 장난감 병정들이 늘어서서 온 행성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거죠. 그리고 아침 여섯시가 되면 다같이 알람 소리를 내면서 일제히 온 행성에 가득한 장난감 병정들이 다같이 앞으로 걸어가는 거죠. 그러면 그게 장난감 병정 걷는 소리지만 너무너무 숫자가 많아서, 두두두두 땅이 흔들리는 소리가 나는거에요."

미영의 표현법에는 크게 공감하지는 못했으나, 양식 역시 내용 자체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이 정도 쓰레기 하드디스크가 놀랍도록 많이 쌓여 있다고 하더라도 까짓거 드르륵 시공 장성을 만드는 재료로 갈아 넣어 버릴 수도 있다고 볼 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양식은 쌓여 있는 하드디스크들을 뒤지고 다니면서, 절차 대로 생명체가 살고 있는 것이 있는 지 조사를 시작했다.

양식은 미생물 몇 개를 발견했다. 미영은 비록 미생물 몇 마리라고 해도 그 형태가 특이하거나, 독특한 특징이 있다면 행성을 보존할만한 가치가 있을 지 모른다고 소리쳤다. 그렇지만, 양식은 이 정도 미생물은 지구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아주 간단한 단세포 동물, 아메바 종류라고 했다. 요즘은 몇몇 적응한 종류가 있어서 화성에도 많다고 했다.

양식이 무심히 미생물을 넘겨 버리자, 미영은 좀 똑똑히 보자고 하면서 직접 미생물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미영이 미생물들을 관찰하면서 그날 저녁을 지새는 동안, 양식은 비서에게 겁을 주는 목소리로, 저 미생물이 혹시 겉보기는 저래 보여도 만약에 인간이 감염되면 흡혈귀로 바뀌게 하는 무서운 병을 일으키는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되겠냐고 농담을 걸었다. 비서는 그 이야기에 즐겁게 빠져 들어서, 두 사람은 20세기 영화에 나왔던 온갖 우주괴물과 흡혈귀 이야기를 뒤죽박죽으로 섞어 우주를 모험하는 이야기들을 술 한 잔 안 마신 맨정신으로 같이 떠들면서 저녁을 보냈다.

이튿날 아침이 되었을 때, 미영은 이 아메바 같은 미생물이 결코 단순한 게 아니라고 하면서, 여기 있는 미생물들은 서로 전기 신호를 보내면서 아주 간단한 의사 소통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증명해서 보여 주었다. 그 모습은 뇌세포 하나가 다른 뇌세포와 의사 소통을 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했다. 미영은 늦잠을 자고 부스스하게 일어난 양식과 비서에게 큰 소리를 질러 잠을 깨웠다. 바로 이런 아메바들이 몇 만개, 몇 십만개 모여 있기만 하면, 간단한 동물의 뇌와 거의 같은 작용을 할 거라고.

"확실히 그냥 아메바 같은 놈만 한 마리만 딱 있는 것 보다는 더 신기한 거기는 하네요. 말씀하신대로 이런 게 굉장히 많이 모여 있으면, 작은 동물 뇌 비슷하게 움직일  수도 있는 거고."

양식이 말하자 미영은 의기양양해 하였다. 그렇지만 양식의 말투가 지나치게 긍정적이고 밝게 미영의 말에 곧이 곧대로 찬동하는 말투라는 점을 알고 미영은 곧 양식의 얼굴을 다시 돌아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양식은 뒤이어 바로 부정의 언변을 늘어 놓았다.

"그래서, 그게 뭐요? 원래 단세포 동물들 중에 그런거 많아요. 그런 것들이 모이다가 다세포 생물들이 생기기도 하고 뭐 그런거 아니겠어요. 지구에도 그런 아메바들 많이 있으니까, 어제 사장님께서 밤새 보신 것의 가치는 100점 만점에 0점이었던 게 이제 0.2점 정도로 높아진 것 아닌가 합니다."
"꼭 그렇게 기분 나쁘게 놀려 먹는 투로 말해야 돼?"
"놀리는게 아니죠. 0점에서 0.2점이면 도대체 몇 배나 높아진거야. 0에서 0.2면, 몇 배, 몇 천배 이렇게 배율로 측정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 무한대잖아요.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거죠."
"말을 말자."
"아까 방금 한 말은 진짜 놀리는 거 맞습니다."

미영은 진지하게 한 번 고용주이자 회사의 대표로서 양식에게 비난을 할까 생각을 했다. 그러나, 간밤의 피로 때문에 미영은 모든 것을 멈추고, 그저 타키온 폭풍이 약해지는대로 탐사를 끝내고 시공 장성으로 돌아 가자고 말했다.

그러나 타키온 폭풍은 좀체로 잦아들지 않았다. 결국 그날 저녁도 세 사람은 쓰레기장 행성의 하드 디스크들 위에서 보내게 되었다. 양식은 심심하니까 버려져 있는 쓰레기장 하드디스크의 내용을 한 번 살펴 보겠다고 했다.

"저거 또 혹시 야한 거 저장된 거 있나 볼려고 저러는 거지."

미영이 말했다.

그렇지만 양식이 그날 밤 갖고 온 것은 더 색다른 것이었다.

"여기, 하드디스크에 읽기 쓰기 시험용 자료로 공개 통신 주파수에 흘러다니는 내용들이 아무거나 다 잡혀서 들어가 있어요. 별별 사람들이 대화 나눈 내용들이 그냥 가나다순으로 계속계속 쌓여 있네요.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오랫만입니다' '어디 가는 길이신가요?' '연료 채우러 가는 길입니다.' 뭐 이런 내용들로 하드디스크들이 꽉꽉 다 차 있다고요."
"온 별에 하드디스크들이 다 그런 잡담 내용으로 다 메워져 있다고?"
"예. 이게 도대체 얼마나 된 건지, 얼마나 쌓여 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별별 대화들이 패턴별로 가나다 순으로 다 있어요. 엄청 많이 있네. 보통 사람들 그냥 쓸데 없이 인사말 나누는 거나 안부 묻고 하는 그런 대화는 전부 다 있을거 같은데요."
"참 쓸데 없는 내용이네."
"그 '참 쓸데 없는 내용이네.' 라는 말도 기록된 데가 있어요. 그러면 거기에 대한 대답으로, '그러게 말이에요.'하고 대답하는 경우가 있다는 것도 기록 되어 있고."
"너무너무 종류가 많으니까, 누가 뭐라고 말하든지 간에 여기 있는 패턴만 따라가면서 이야기 해도 한 30,40분은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을 거 같은데요. 진짜 종류 많아요. 사랑의 고민에 빠져서 한탄하는 이야기나, 장래 진로 고민으로 골치아픈 이야기 같은 거 종류도 별거 별거 다 있어요. 자기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있고, 세상의 모습에 대한 궁금증, 영화 이야기, TV 이야기도 있고. 참 그러고 보면 사람이 하는 말이 참 몇 가지 없구나."

양식은 끝없이 많은 기억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는 수없이 많은 대화의 조합들에 대해서 신기해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미영은 거기에 관심을 가지기에는 타키온 폭풍이 점점 더 강해진다는 고민을 잊기 어려웠다. 지금쯤 일을 끝내고 보고를 마치고 돈을 받아야 되는데, 타키온 폭풍 때문에 발이 묶여 있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미영은 시공 장성에 무선 통신으로 보고서 자료를 먼저 보내기로 했다. 일단 자료부터 먼저 보낼테니까, 이걸로 임무는 끝낸 것으로 하고 나중에 찾아가서 확인하는 것으로 해서, 돈 주는 것은 최대한 빨리 처리될 수 있도록 신경 써 달라고 하기로 했다.

미영은,

"이 행성에는 별 볼일 없는 단세포 생물과 엄청난 양의 하드디스크 쓰레기 뿐입니다. 곱게 갈아서 쓰십시오."

라는 요점의 보고서를 보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 보고서를 보내는 것을 앞두고 있을 때, 갑자기 바깥에서 비서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미영이 나가 보니, 할 말을 잃고 양식과 비서가 밤하늘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밤하늘에는 갑자기 새롭게 빛을 발하게 된 별들이 기묘한 모양을 이루고 있었다. 밤하늘에 새로 나타난 별들은 꼭 글자 모양을 이루고 있는 것 같았다. 빛나는 새 별들이 이루고 있는 글자는,

"검색 좀"

이라는 모양 같았다.


6.
미영도 한 동안 말이 없다가 겨우 말을 했다. 눈은 계속 밤하늘의 별을 보고 있었다.

"어떻게 하늘에 갑자기 나타난 별들이 글자 모양이 될 수가 있지?"

양식 역시 말이 없다가 겨우 대답을 했다. 양식 역시 계속 고개를 젖혀 밤하늘의 별을 보는 그대로 였다.

"뭐, 굉장히 드문 우연인가보죠."
"말도 안돼. 저렇게 별들이 일렬로 늘어서서 글자 모양이 되는 경우가 어딨어. 글자도 딱 무슨 돋움체 9포인트 같이 생겼잖아."
"돋움체 자체가 좀 단순한 폰트 이기는 한데..."

미영은 양식의 대답을 듣지 않고 말을 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어떻게?"

세 사람의 경이와 혼란의 시간이 그 밤을 한 참 채운 끝에, 마침내 세 사람은 하늘에 별들의 모양에 따라 나타난 글씨의 뜻을 따르기로 했다. "검색 좀".

그렇지만 뭘 검색해 보라는 것인지 세 사람은 혼란스러웠다. 미영은, "검색 좀"이라는 말에 대해서, "검색 한 번 만 해보면 바로 답을 쉽게 찾을 수 있는데 괜히 게시판이나 사이트에 올려서 질문하는 사람 보면 지겨워서 검색 좀 해보라고 투덜거릴 때 있는데 그런 느낌의 말 아니냐"고 했다. 비서는 그 말을 듣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며 자신이 그런 일을 했던 기억을 돌이키는 표정을 지었고, 양식은 그런 느낌이기는 한데, 그래서 지금 뭘 봐야 하는거냐고 되물었다.

세 사람은 의논 끝에, 이 별을 온통 뒤덮고 있는 하드 디스크들에 대해서 검색 기능을 써보라는 뜻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모든 디스크들은 포맷이 되어 있는 디스크들이었기 때문에, 간단한 검색 기능 비슷한 것을 해 볼 수 있었다. 세 사람은 그런 검색을 수행하기 위해서 디스크 연결 회선의 해쉬 테이블을 손이 부르트도록 찾아서 장치를 연결 했다.

"그런데 뭘 검색하죠?"

비서가 말했다. 그러자 양식이 검색 내용을 입력했다. "그런데 뭘 검색하죠?" 라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온 행성을 뒤덮고 있던 하드 디스크들은 "그런데 뭘 검색하죠?"라는 말이 들어 가는 대화를 찾아서, 그에 대한 대답을 하나 결과로 주었다.

"어, 처음 뵙는 분 같으시네요. 누구시죠?"

미영이 뒤이어 검색할 말을 입력했다.

"저희는 여기 탐사하러 온 사람들인데요. 갑자기 하늘에 있는 별이 이상한 글자 모양으로 나와서요."

검색 기능은 지금까지 이어진 대화에 이어질 내용이 혹시 있는지 하드 디스크들 사이를 검색하였다. 그리고 찾아낸 결과에 있는 그 다음 대사를 출력했다.

"이상한 글자라... 무슨 글자요?"
"'검색 좀'이라고 나오던데요."
"글자는 어떻게 생겼는데요?"
"하늘에 떠 있는 별이 글자 모양이라니까요."
"별이 움직여서 의미를 나타냈다고요?"
"그래 보였어요."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것처럼 검색 결과가 계속해서 나왔다. 미영은 놀라워 했다.

"이거 진짜 사람하고 대화하는 느낌하고 똑같잖아."
"그래도 미리 다 조합되어 있던 수천억, 수천조 가지 경우 중에서 지금 이 흐름하고 맞는 걸 뽑아서 보여 주는 것 뿐이기는 한데... 정말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종류대로 미리 내용이 다 들어 있어서 워낙 가짓수가 많으니까, 우리가 하는 말에 대해서 진짜 무슨 생각이 있어서 말하는 내용대로 말하는 것하고 비슷해 보이네요."

양식이 대답했다. 이 대화 같은 검색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미영이 다시 검색 내용을 입력했다.

"그런데, 이거 정말 사람하고 대화하는 거랑 똑같네요."
"그렇죠. 저는 사람은 아니지만, 의식이 있고 살아 있으니까요."
"의식이 있고, 살아 있다고요?"
"예."

미영이 놀라워 하자, 양식은 "그렇게 미리 기록된 내용이 있는 하드 디스크의 내용 하나가 검색되어 표시된 것 뿐"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너무나 많은 경우가 입력된 내용 중에 가장 자연스러운 검색 결과가 표시되고 있으니, 미영은 정말로 생생하게 살아 있는 누군가와 대화를 하는 기분에서 빠져 나오기 어려웠다. 사실 양식이나 비서도 그것은 마찬가지였다. 양식이 애써 고개를 저어 보였다.

"아닙니다. 이거 그럴듯해 보여도, 결국 엄청나게 두꺼운 단어, 숙어 사전에서 그냥 이리저리 검색만 하고 있는 겁니다. 무슨 복잡하고 정교한 의식이 있는 살아 있는 대상이 아니라, 그냥 단어장 더미예요. 엄청나게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조합의 대화에 대해서 미리 대화 패턴들이 다 저장되어 있으니까, 그 중에 지금 우리가 한 말도 튀어 나오는 거에요. 복잡한 인간 같은 의식이 있는게 아니라고요."
"그런데, 뭐 복잡하고 정교한게 별건가. 이렇게 말이 되는 것만 모아 놓은 자료가 엄청나게 많이 쌓여 있고, 이게 검색이 이렇게 빨리 된다면, 그 엄청나게 빠른 검색 자체가 굉장히 발달된 인공지능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거 아니야?"
"혼란스럽네요."

셋 다 머뭇거리기만 할 때, 미영이 먼저 용기를 냈다. 미영은 생각나는대로 일단 다음 내용을 입력해 보기로 했다. 곧 다음 결과가 나타났다.

"아까 제가 하늘에 별이 갑자기 의미를 나타냈다고 했잖아요."
"예."
"하늘에 별이 그렇게 갑자기 의미를 나타내듯이 움직인다면, 이건 무슨 엄청나게 어마어마한 힘이 그렇게 한 거 아닐까요."
"은하계만한 덩치를 가진 뭔가가 있어서 별을 휙휙 자유롭게 밀어 낸다면 그렇게 될지도 모르죠."
"그렇게 갑자기 별이 눈에 보일 정도로 나타나게 하려면 보통 아광속 운동으로도 안될텐데."
"안되죠. 그러면. 갑자기 하늘에 별빛이 확 나타났다는 거 아니에요. 지금 딱 이 순간에 맞춰서. 그러면 은하계 하나 둘 정도 뒤흔드는 힘이 아니라 은하계 몇 십 개가 뭉친 힘이 있어야 될걸요."

거기까지 말하자, 갑자기 타키온 폭풍이 점점 더 강해지기 시작했다. 우주선 안의 표시 장치들이 이 행성 주위를 지나는 타키온 입자들을 표시하니, 타키온 입자들의 모양이 하늘에서 하나 둘 떨어지는 유성처럼 반짝이는 것으로 보이는 정도였다. 미영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잘못하면 우주선 부서지겠다. 전원 위치로!"

미영이 외쳤다. 양식이 다급하게 움직였다.

"전원이라고 해봐야 나 하나 잖아요."
"비서는 중앙에서 표시 수치를 똑똑히 확인하는 일 하세요."

미영이 소리쳤다. 우주선을 보호하기 위해서 외부와 연결된 회로를 풀다가 양식이 말했다.

"'검색 좀'이라는 거요. 그거, 우리가 한데로 정말로 바로 저 하드디스크 검색 내용 좀 살펴 보라는 뜻 아니었을까요. 저 대화 검색하는 검색 기능으로 엄청나게 많은 대화 가짓수를 검색하니까 꼭 살아 있는 사람하고 대화하는 거 같잖아요. 그게 진짜 살아 있는 생명, 사람 대우를 받아야 되는 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 적어도 그냥 바로 갈아 없애면 안되는 가치 있는 뭔가는 되는 거 같은데요. 그걸 일깨워 주려고, '검색 좀'이라고 우리한테 알려 준 거 아닐까요."
"그런데, 도대체 누가요?"

미영이 되물었다. 비서는 타키온 폭풍이 역사에 기록될만한 수준으로 강해졌다는 이야기를 했다. 마치 하늘에서 눈송이가 쏟아져서 온 세상을 하얗게 덮어버리는 것처럼 타키온 폭풍이 세 사람의 하늘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7.
타키온 폭풍이 잠깐 잠잠해지는 듯 하자, 세 사람은 약간 겁을 먹고 서둘러 하드디스크 쓰레기장을 탈출하듯이 빠져 나왔다. 도대체 무엇이 세 사람의 머리 위에 별들을 빛나게 했는지 하는데 대해서, 미영이 시공 장성에 도착할 때 쯤 되어서 말했다.

미영의 생각에는 그것은 엄청나게 커다란 생명체가 한 일인 것 같다고 했다. 은하계 중심에 있는 블랙홀은 타키온을 내뿜는 경우가 있는데, 이 타키온 입자가 날아가서 주위에 있는 다른 은하계에 맞닿을 때가 있다. 그러면 그 타키온에 닿은 은하계는 거기에 영향을 받아서 스핀이나 에너지가 변형된 성격이 달라진 타키온 입자를 내뿜는데, 이게 주변에 있는 또다른 은하계에 맞닿을 수도 있다.

이런 식으로, 가까이 모여 있는 은하계 수십개, 수천개 사이에서 서로 입자를 주고 받는 관계가 생길 수가 있는데, 만약에 은하계 수십만개, 수백만개, 수십억개 정도의 숫자가 복잡하게 입자를 주고 받으며 활동하게 된다면, 그것은 뇌세포들이 서로 신호를 주고 받아서 뇌가 움직이는 것과 비슷한 활동이 된다. 이렇게 되면, 은하계 하나가 뇌세포 하나의 역할을 하고, 십억개 정도의 은하계가 뭉쳐 있는 은하계 덩어리가 하나의 뇌와 같이 움직이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은하계의 덩어리는 살아 있는 뇌처럼 생각도 하고 의식도 갖고 있게 된다.

그런데 이 은하계 덩어리는 어떻게 하다가 우연히 우리 은하계의 쓰레기장 행성을 보게 되었다. 아마 시공 장성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위치에서 방향을 절묘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살아 있는 은하계 덩어리가 타키온 신호로 감지 하기에 좋은 위치에 있어서 그럴 것이다.

"그래서 그 은하계 덩어리가 그 하드디스크들하고 대화 하다가 정들었구나. 그래서 쓰레기 재활용 되어서 갈려서 없어지면 안된다고 우리한테 알려준거구나! 은하계 덩어리가 움직이는 정도면, 별 몇개 터뜨려서 빛으로 보여주는 거야 아무것도 아니겠지."

비서가 말했다. 이어서 양식이 말했다.

"그러면, 우리가 처음에 쓰레기장 행성에 착륙 잘 못하고 고장나서 헤메는 것 같았는데, 갑자기 매끄럽게 착륙한 것도 다 그 은하계 덩어리들의 뜻이었다는 거에요? 그 은하계 덩어리가 도와줘서 우리가 마법 같이 잘 착륙한거라고?"
"뭐,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고."

양식은 얼굴을 조금 찌푸렸다.

"말도 안돼요. 그렇게 엄청난 능력이 있는 은하계 덩어리라면 괜히 우리를 보내고, 하늘에서 별을 띄워서 쇼를 하고 이런 짓 안하고, 그냥 사뿐하게 쓰레기장 행성을 통째로 안전한 곳으로 옮겨 주든지 했겠지. 아니면 시공 장성에 정식으로 통신문 보내서 자초지종 이야기해 줬을 수도 있고. 왜 일부러 별빛으로 하늘에 글자를 새기는 쇼를 하고 그랬겠어요."
"은하계 수십억개가 뭉쳐 있는 크기의 어마어마하게 커다란 살아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있다는 것을 우리 세상에 똑똑히 알려 주기 싫어서 그런 것 아닐까? 어차피 우리가 이런 이야기 해 봐야 관심있게 들을 사람도 없을 거고."
"그래도 갑자기 별빛이 글자 모양으로 하늘에 딱 생긴 것은 관심 끌 수도 있을 것 같기도 한데요."
"더 개척할 데도 많고, 전쟁 뉴스도 많은데, 쓰레기장 행성에서 보이는 밤하늘 광경에 누가 그렇게 신경 쓰겠나."
"처음에 서로 신호 주고 받는 아메바 미생물들 보고 감동해서 자꾸 그런 쪽으로 생각하는 거 아녜요? 뭔가 살아 있다. 뭔가 의식이 있다. 이렇게."

미영은 양식의 비판은 무시하고 시공 장성에 보고서를 전송했다.

시공 장성에서는 하드 디스크 쓰레기장에 있는 독특한 형태의 "대화 대상" - 생명체라든가, 지성체라는 말을 쓰고 싶지 않아해서 그렇게 표현했다 - 이 보존의 가치가 있다고 보고, 파괴해서 재료로 쓰는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등급을 매기겠다고 회신해 왔다.

영광스럽게도 수수료와 사례금을 받고 G581E 행성으로 돌아 가는 길에 양식이 미영에게 물었다.

"사장님 말 다 맞다고 치고요. 그러면 그 은하계 덩어리 안에는 나름대로 엄청나게 별도 많고 그 안에서 사는 동물이나 사회, 나라도 많을 거 아녜요. 그 사람들은 자기가 복작복작하면서 사는 게 사실 그 엄청나게 큰 은하계 덩어리가 움직이는 데 달라 붙어 사는 기생충 같은 거네요. 은하계 덩어리가 한 번 움직일 때 마다 그 충격으로 그 은하계 안에 있는 행성들 수백개씩 폭발해서 절단나고, 동물들, 나라들 수천억개씩 다 박살나고 그런 부질 없는 거 아녜요?"
"꼭 그렇게 볼 필요 있나. 은하계 중심 불랙홀이 내뿜는 입자의 세기하고 형태가 은하계에 있는 온갖 일들의 영향에 따라서 미묘하게 결정되는 거잖아. 그러니까, 반대로 그 은하계에 사는 동물들의 행동이 그 은하계 덩어리의 생각에 영향을 미치기도 하는 거지."

양식은 별로 깨끗한 대답이 아니라는 표정을 지었다. 비서가 끼어 들었다.

"왜, 짜장면 먹을 지, 짬뽕 먹을 지 진짜 고민 돼서 결정 못하고 있다가, 그냥 아무거나 확 고를 때 있잖아요. 그때 그냥 아무거나 골랐다고 하지만, 뇌 깊은 곳에 어느 한 구석에서 왜 하필 거기로 결론을 내렸을 지 무슨 알 수 없는 이유 하나는 있을 거라는 느낌이 들 때 있거든요. 짬뽕이다! 하고 판단을 내린 뇌세포 하나에 결정적으로 그 원인이 된 무슨 분자 하나 원자 하나는 있었을 거라는 느낌 들 때 있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 은하수가 속한 이 은하계 덩어리 아저씨가 오늘 짬뽕 먹을까, 짜장면 먹을까 고민할 때, '그냥 아무거나' 하면서 하필이면 짬뽕을 고르는 이유가 다 있다는 거죠. 우리들의 인생과 우리 인간 역사의 나아갈 길이 종합적으로 영향을 미쳐서 점심 메뉴를 고르게 된 거라는 거죠."

새로 찾은 직장에서 이미 훌륭히 적응한 듯한 비서는 목소리도 양양하게 위와 같이 말을 마쳤다.

- 2012년, 김포공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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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No Profile
    쑤우 12.10.20 15:34 댓글 수정 삭제
    새로운 멤버의 합류군요~!
    그것도 '만사 즐거운 얼굴 표정이 인상적인 어린 여자'라니
    시리즈가 점점 구체적인 틀을 잡아가는거 같아요.
    조만간 한 권의 책으로 만나봤으면 좋겠어요~

    김이사의 경우 성이 남씨였으면 미영 사장님이 면박 줄때 더 재밌었을거 같아요.
    영식 : 블라블라~
    미영 : 남이사~

    이렇게 ㅎㅎ
    미영 사장님의 경우 직급이 팀장님이셨으면 좀 더 제 취향의 유머구요 ㅎㅎ
  • No Profile
    곽재식 12.10.21 11:06 댓글 수정 삭제
    이번 호에도 관심 감사합니다. 돌아보니 이름 없이 그냥 "비서"라고만 하니까 여기저기 극중에 나오는 너무 흔한 모습으로 굳어지고 진짜같은 면이 없어져서 약간 아쉽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름이 있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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