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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다시 한 번만

2012.07.28 00:1407.28

1.
양식은 내용을 한번 훑어 보더니 말했다.

"이거 죽은 사람 되살리는 걸로 쓰면 되겠네."

양식은 그 말만 하더니, 다시 고개를 돌려서 넘겨 보고 있던 신문을 보았다. 미영은 신문 위에 손을 올려 놓았다.

"아, 좀 똑바로 보라니까."
"똑바로 봤어요. 뭐 괜찮네요. 장기 배양기인데, 입자 플라즈마화 장치를 달아서 자기 몸에 있던 물질을 최대한 활용해서 장기를 만들어서 거부감을 줄여 준다, 좋은 기계네요."
"좋은 기계면 뭐 어떻게 하겠다라는 게 있어야죠."
"뭐 좋은 기계인데... 이런 거 왠만한 행성에는 다 있지 않겠어요? 우리가 무슨 의사 면허나 이런 게 있는 것도 아니고, 의료 업계에 발이 넓고 끈이 있는 것도 아닌데, 기계 하나 생겼다고 그거 붙들고 있다고 갑자기 돈벌고 그런 건 아니잖아요."
"그러면 이거 안하면 뭐할건데."
"아니뭐, 우리 본업이 있고, 이 분야에서 일단 전문가 답게 잘 해놔야 우리 회사가 결국 잘 되는 거지, 이거저거 그저 몇푼 돈될만한하다고 막 하면 이도저도 안되잖아요."
"김이사는 그래서 뭐하는데. 그냥 지구 신문 보면서 시간 날리는 게 우리가 전문가 답게 할 일이라는 거에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한심하게 무의미한 일로 시간 낭비하는 것처럼 들리는데, 이게 진짜 신문이라니까요. 진짜 종이로된 신문. 지구에 착륙해서 하나 사와서 다시 여기까지 들고 와야 손에 쥘 수 있는 거. 만져보세요. 이게 지구 나무로 된 거고, 여기 글씨가 다 지구에 옛날 묻힌 식물에서 나온 석탄, 석유로 된 거라니까. 이 인쇄할 때 나는 기름 냄새도 한 번 맡아 보고요. 이만하게 어딨어."

미영은 다시 신문으로 눈을 돌리는 양식을 보았다. 양식은 신문의 이런저런 면을 그냥저냥 훑어 보고 넘기더니 여자 가수들이 나와서 선전하고 있는 관광지 광고를 뚫어져라 쳐다 보았다. 미영은 다시 말했다.

"이거 회사돈으로 산 회사 재산이죠?"
"예. 사장님께서 직접 자료 수집비로 사라고 결재해 주셨잖아요."

양식이 말을 끝내기 전에, "예"라는 첫부분만 분명히 확인되자 미영은 바로 신문을 빼앗았다.

"아, 사장님!"

양식은 미영을 불렀지만, 미영은 멈춤없이 빼앗은 신문을 그대로 벽면에 있는 배출구에 넣었다.

"긴급배출을 실시 합니다."

기계에서 나오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다섯, 넷, 셋, 둘, 하나. 숫자를 거꾸로 세는 소리가 들리고, 배출구에 들어간 신문은 그대로 우주 공간으로 튀어 나갔다.

"아, 신문, 신문."

양식은 안타깝게 신문을 쳐다 봤지만, 머나먼 지구에서부터 온 이 식물 섬유와 인류 문명의 혼합체는 우주 공간을 떠돌다가 곧이어 내리쬐는 강한 별빛에 너덜너덜하게 사그라들더니, 곧 온통 숯덩이처럼 회색으로 뭉그러졌다.

"이게 얼마짜린데. 이런게 다 회사 재산 허투루 날리는거라고."
"김이사 월급만큼 아깝기야 하겠어요."
"아니, 진짜 쓸데 없이 장기배양기계 돌려서 뭐 해보려고해도, 생판 그바닥 일 아무것도 모르다가 갑자기 건수 생겼다고 달려 들어서 뭐가 되겠어요. 이거 진짜 아닌데."
"우리가 국가 혁신 아이디어 실무 태스크포스에서 일하던 게 벌써 얼마전인데. 아직도 거기서 일할 때 처럼 그냥 아무것도 안하면서 시간만 채우다 퇴근하면 월급 나온다고 생각하면 돼요?"
"그래도 그렇지, 무슨 갑자기 우리가 장기배양기계로 뭘 해요."

미영은 투덜거리는 양식의 목소리를 배경음악으로 여기면서, 유유히 조종석으로 걸어가서 새 목적지 궤도를 입력했다.


2.
우주선이 아름다운 푸른색으로 빛나는 G581E 행성에 다가가자 양식이 물었다.

"여기, 착륙선 삯이 엄청 비싼데요. 오랫만에 직접 착륙할까요?"
"이런데 직접 착륙하면 우주선에 무리 많이 간다면서."
"착륙선 삯 한 번 보세요. 여기 물가 왜이렇게 높아?"

높은 착륙선 삯을 내야 하냐, 말아야 하냐 하는 문제로 미영은 고민하고, 양식은 잡다한 더 많은 고민거리들을 줄줄 농담처럼 읊어댔다. 한 마디 두 마디 주고 받자니 미영은 점차 화가나서 결국 이 모든 게 다 뭐하는 짓이냐 싶은 생각에 다시 양식을 을러대며 다투기도 했다.

결국 직접 착륙을 하느라 덜컹덜컹하는 우주선에 겁을 내면서 두 사람은 도착했다. 도착하는 곳의 도시를 보니 넓은 평야에 끝없이 높다란 시멘트 건물들이 많이 서 있었다. 그 높은 건물들은 어떤 것들은 무리지어 규칙적으로 있기도 했고, 어떤 것들은 규칙이 별로 없게 이리저리 흩어진 듯 보이기도 했다. 어떤 것들이건 서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거리에 계속 빽빽하게 들어차 있었다.

그 건물들은 하나 같이 수백개의 나눠진 방으로 되어 있었다. 아파트나 비슷한 사무용 건물들처럼 보였다. 그런데, 대부분의 건물들은 텅텅 비어서 쇠락해 가고 있었다. 도시 중심부의 건물 몇채만 어느 정도 다듬어져 사람이 살 뿐이었다. 조금씩 부서져가고 있는 그외의 다른 모든 건물들은, 아무도 살지 않은지 오래되어 이 행성의 들짐승, 날짐승, 무엇보다 초록 식물과 벌레들이 어슬렁거리며 사는 곳이 되어 있었다.

덩굴이 뒤덮여 있고 곰 같이 생긴 동물이 벽을 타고 있는 건물 옆을 우주선이 지나갈 때, 미영이 말했다.

"여기가 부동산 거품 무너지면서 이렇게 빈 아파트들이 많이 생긴거야?"
"그런게 아니고, 그냥 인구가 조금씩 조금씩 줄어든 게 수백년 동안 반복되어서 이렇게 된거죠. 무슨 대단하게 거품 붕괴, 부동산 파동, 이런 게 일어난 게 아니라. 그냥 옛날에 한 번은 인구가 엄청나게 많았던 곳인데, 그러다보면 줄어드는 시절로 돌아갈 때가 있잖아요. 그때 조금씩 조금씩 사람이 줄어 들어서 결국 이렇게 된 거에요."

힘겹게 착륙한 뒤, 우주선 바깥으로 나와서도 계속 그 이야기는 이어졌다. 여기는 빈 건물 값이 거저나 다름 없는 곳이니, 미영은 사무실을 여기로 옮기면 좋겠다는 뜻을 비치며 이야기를 계속 했다. 그러다 양식이 말했다.

"이 동네 이상한 동네라고요. 여기 이렇게 완전 망하기 직전까지만해도, 이제 이렇게 빈집이 많아졌으니까 분명히 다시 여기저기서 사람이 들어오고 다시 인구가 늘어날 거라고 생각하던 때가 있었거든요. 그래서 그때 마지막으로 한 번 경기 끌어 올려 보려고, 무슨 자산관리법이나 재산 처분 자율화법이다 해서 이상한 법 되게 많이 생겼다고요. 그거 덕분에 갑자기 벼락 부자 된 사람도 있고, 단속이나 규제 피해서 여기로 흘러들어온 사기꾼 같은 놈들도 엄청 많았고."

미영이 가기로 한 목표를 향해 길을 돌아 가자, 유난히 높은 건물들이 솟은 거리가 나타났다. 이 거리에는 바닥에는 금속판에 글자가 새겨진 판이 붙어 있는 것이 많았다. 마치 길바닥에 모자이크 무늬라도 있는 것처럼 금속판은 가지각색으로 수천개, 수만개는 되어 보일만큼 붙어 있었다.

"이게 뭐야?"
"이 동네 관광지죠."
"할리우드에 있는 영화배우들 손바닥 찍어보는 뭐 그런거야?"
"비슷한데, 손바닥 찍은 게 아니고 저 위 빌딩에서 사람 뛰어내렸을 때 그 뛰어내린 사람 떨어져 죽은 자리를 표시한거죠. 그리고 그 사람 화장한 가루를 여기다가 이 밑에 묻었고."
"그러면, 이게 다 묘비 같은 거예요?"
"자산관리법 이랑 재산 처분 자율화법 실패하면서, 결국 쫄딱 망해서 하루아침에 가진 거 다 날린 사람들 엄청 많았거든요. 금융회사 차리고 돈벌던 사람들이 망하면서 자기 사무실에서 하나 둘 마지막으로 멋있는 경치나 보면서 뛰어내린건데. 어쩌다 보니 유행처럼 되어서, 이렇게 돼버린거예요. 지금은 다 옛날 이야기고 관광지지만."

마침 관광객 한 사람이 바닥에 업드린 모습으로 웃으며 사진을 찍고 있었다. 미영은 질린 표정이 되어 고개를 흔들면서도 좌우를 둘러 보며 이 행성의 마지막 관광지 풍경을 살폈다.

그러던 중, 이 수많은 금속판들 끝트머리에 최근 새로 만들어진 어느 판을 보게 되자, 미영의 표정은 바뀌었다.

"이 사람이 나한테 돈 갚아야 될 사람인데."


3.
미영이 투자한 돈으로 새로운 사업을 벌여 보겠다던 이 행성의 한 청년은 지금 화장한 재가 되어, 금속판에 "모든 것을 다시 해 볼 꿈을 이루었으나 그 꿈을 꾸는 것은 다시 해 보지 못하고 이곳에 잠들다"라는 말과 그 이름을 함께 새겨 놓은 것 아래에 묻혀 있었다.

미영이 저승으로 도망쳐 버린 빚쟁이 청년을 욕하고 있을 동안, 양식은 어딘가에 전화를 걸어 보았다. 그러더니 양식이 미영에게 말했다.

"그래도 다행인지 이 양반은 자발적으로 저승에 간 건 아닌가보네요."
"그러면 강제로 저승에 갔으니까 다행이예요?"
"뭐, 그거는 그렇네요."
"뭐가 그런데요."
"그거."
"......."
"......."
"진짜 이 상황에서 이런 소리나 하고 여기서 이러고 싶어요?"
"이 사람은 간에 병나서 죽었다는데요. 원래 간이 좋은 사람이 아닌데, 어디 술 먹는 게 예의라고 생각하는 회사 다니다가 병들었다는 거 같아요. 남은 투자금으로 쓸 데가 없어서 무덤 자리 사는데 썼다네요. 나름대로 명소에 묻히고 싶어서 여기 묻어 달라고 했고. 그러니까 공식적으로 이 무덤이 지금 사장님 소유입니다."

양식이 날렵한 왈츠의 춤동작처럼 말을 돌리자, 미영은 마치 세익스피어 연극의 한 장면처럼 극적으로 털썩 무릎을 꿇고 앉았다. 미영은 두 손을 죽은 청년의 묘비 역할을 하는 금속판 위에 얹었다.

"아니, 사업이야 새로 시작하는 사업이니까 망할 수도 있겠지. 대신에 그러면 남은 돈은 나한테 돌려 줘야지. 이게 무슨 짓이야."

푸념하는 미영을 달래서 양식은 죽은 청년의 사무실에 찾아가 보기로 했다. 미영은 이 모든 불행이 게으르게 신문을 보면서 일감 없는 시간을 보내던 양식 때문이라는 듯이 양식에게 날카롭게 굴었다. 하지만, 양식은,

"망한 사업체에서 기계 남은 거 건져 오자고 여기 오자고 한 사람이 사장님이니까 일단 거기까지는 가 보자고요."

라면서 미영에게 대답했다.

미영과 양식이 찾아간 사무실은 정글과 엉켜 있는 버려진 아파트들의 한 가운데에 있었다. 늘어진 나뭇가지들을 꺾어내며 길을 뚫어서 가다보니, 건물 천장에 뿌리를 박고 자라난 나무도 있었고, 그런 나무들이 위층 건물 바닥에 뿌리를 밖고 자라난 나무와 엉켜 있는 경우도 있었다.

"아파트들이니까 환경이 엉망으로 꼬였네. 땅 위에 하늘이 있어야 되는 데 그 위에 땅 역할하는게 또 있으니까 여기 동물들이 진짜 이상하게 움직이네."

양식은 그렇게 말했다. 그렇지만, 그 이상한 동물들은 모두 멋지게 적응해 있었다. 계단 한쪽을 걸어 돌아갈 때에는 한 번 폭우가 왔을 때 고였던 빗물들이 내려 가지 않고 고여 있는 한 층을 볼 수 있었다. 건물 12층이었는데, 이곳 건물 12층 전체와 18층, 19층의 방 몇 개에는 물이 가득 고여 있었다. 멀리서 떨어져 살펴보면 높다란 허공 한 중앙인 셈이었지만, 그곳은 유유히 헤엄치는 커다란 물고기들과 악어까지 있었다. 물이 차 있는 아파트 18층은 하늘에 떠 있는 강이었다. 깨진 장문으로 물결이 칠 때마다 폭포가 쏟아 지는 곳 옆을 지날 때에는, 위층에서 물고기가 떨어지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나 어릴때 지구에서 살던 아파트도 만약에 벽을 뚫고 볼 수 있는 사람이 볼 수 있다면 이 비슷할 수도 있겠다. 어항 같은데 물고기 키우는 사람들 있으니까."

미영이 말했다. 지쳐서 그런지 미영이 조용히 있으니, 한참만에 길을 다시 뚫는데 성공한 양식이 대답했다.

"벽을 뚫고 볼 수 있으면 샤워실 쪽부터 봐야죠."

양식의 말에 미영은 다시 활력을 찾아 양식의 못남과 지금 처한 상황의 좌절스러움에 대해서 저주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영의 저주가 그 완전한 토로에 도달하는 순간을 100으로 보았을 때, 0.2 정도를 진행했을 무렵, 양식과 미영은 목적한 곳에 도착했다.

미영이 투자하라고 내어 준 돈으로 사업을 벌여 이것저것을 연구하고 만들어둔 시설이 있는 곳, 새로운 장기배양기계가 있는 사무실에 도착한 것이다.


4.
미영은 계속 밀어 붙이고, 양식은 계속 반대하는 것이 주고 받는 리듬이었다.

"일단 그래도 이게 남은 거니까 한 번 해보라니까. 깨끗하잖아요. 하긴 해 봐야지. 남은 게 이거 밖에 없는데."
"이거 안 건드리고 버려 놓은지 한참 된 거 같은데. 지금 이런 거 아무도 모르는 사장님이랑 제가 봐서 뭘 어떻게 한다고요."
"그래도 뭘 상태라도 알아야 다른 사람한테 팔기라도 하지."
"여기는 번듯한 고층건물 집이 쌓여 있어도 하나를 제대로 못팔아서 망한 사람들 천국이잖아요. 이런 고물을 팔기는 뭘 팔아요?"
"그래도 여기에 투자 돼서 날아간 돈이 얼만데."
"날린 건 잊어야죠. 날아갔다고 날렸다고 하는 거 잖아요. 휙 날아간거라니까. 새처럼. 하늘로. 멀리멀리. 이제 와서 방방 뛰어봐야 나도 날아가서 잡을 수 있는게 아니잖아요."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어쩔 수 없이 이 일은 미영의 뜻대로 진행이 되고 있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미영과 양식은 장기배양기를 돌릴 수 있도록 움직일 수 있게 되었고, 거기서 다시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자, 두 사람은 근처에 떨어져 있던 시든 썩은 나뭇잎을 기계에 집어 넣어 작동시켜 보게 되었다.

"이렇게 돌리면 파릇파릇한 새 나뭇잎이 나온다는 거죠."
"또 모르지. 기계가 잘못돼서 나뭇잎 달렸고 덩굴을 촉수처럼 휘두르는 괴물이 튀어나올지. 영화 보면 그런 거 많잖아요. 엄청난 과학 실험을 하는데 뭐가 잘못 돼서 흉칙한 괴물 나오고 그런 영화. 플라이, 1986년 데이빗 크로넨버그 감독."
"플라이는 50년대 영화가 원조 아닌가?"
"제가 1986년이라고 말하는 순간, 이렇게 말하면 사장님이 나보다 더 많이 아는 거 오랫만에 나왔구나 착각하고 50년대에 나온 영화 언급하겠지 딱 예상했거든요."
"왜 이렇게 인간이 일부러 얄밉게 굴어요?"
"억압 받는 사람 나름대로 그걸 해소하는 방식으로 농담을 하자는거죠."
"억압, 이런 단어 쓰지마. 진짜 따다다다 말만 빨리하면 똘똘한 인물 재밌게 표현한 줄 하는 대충만든 연속극 등장인물이 튀어 나온 거 같거든요."
"직원한테 단어 쓰지 말라고 하는 게 진짜 억압 아닌가."

그런 헛소리들을 나누는 사이에, 기계는 부서져 가는 썩은 나뭇잎을 플라즈마화 장치에서 가공해서 쉽게 반응되는 입자로 만들었고, 그 입자는 세포증식기에 공급되는 영양액과 섞여 들었다. 그래서 그 썩은 나뭇잎에서 나온 물질들은 자연스럽게 새로 모양을 갖추어 가는 세포들로 변해 갔다.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기계의 유리관 안에는 파릇파릇하게 자라난 싱싱한 나뭇잎 하나가 자라나 있었다.

"이거 되네."
"대충 되는거 같네요. 이 정도면 근처 행성에 있는 왠만한 고급 병원에 간이나 심장 만드는 기계로 팔면 되겠네요. 증식조절기가 있으니까 이게 노화 상태나 발육 상태도 조건을 주면 최대한 조절을 해 주니까 딱 맞는 모양으로 만들기도 좋고."
"되네."
"다른 것도 해 보죠."

양식은 그리고 나더니, 다른 나뭇잎이나, 꽃이나 죽은 풀벌레를 되살려 보기도 했다.

"아주 재미 붙였네."
"똑바로 알아야 제값을 알아서 팔죠. 이거 어디 팔기라도 해서 조금이라도 돈 건져야 된다고 한게 사장님 원래 말씀하신거잖아요."
"그렇다고 갑자기 이렇게 또 열정적으로 막 몰두하는 건 왜 그러는 건데요?"
"신기하잖아요."

양식은 벌레 두 마리를 한 꺼번에 집어 넣고 돌려 보면 혹시 부작용이 생기지 않을까 실험해 보려고 했다. 미영은 진짜 괴물 영화 같은 장면을 실험해 보는 미친 녀석 같다면서 양식을 혐오스러워하는 눈빛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감상의 시간도 잠깐이었고, 미영은 이제 팔아 먹을 수 있을 정도의 물건이라는 것은 알게 되었으니, 더 이상은 관심이 생기지 않아서 구경은 점점 지루해졌다.

"여기 너무 더운데, 인제 일단 가면 안돼요?"
"그럼 혼자 가세요."
"야, 여기 막 벌레도 많고 악어도 있고 그렇든데 어떻게 나 혼자가."
"큰 악어는 한 마리도 없던데. 물가에만 안가면 되죠."
"그래도 악어 잖아요."
"조금만 있다가 가면 안돼요?"
"조금만 얼만큼?"

다행히 두 벌레를 한꺼번에 넣고 기계를 돌려도 기계가 자연스럽게 대상을 구분해 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확인이 끝난 시간이 되자, 어쩔 수 없이 양식은 미영을 우주선에 다시 데려다 주어야 했다. 양식은 또 한 번 아파트 정글을 지났다. 겹겹히 수직으로 겹쳐진 생태계가 된 커다란  아파트들을 통과하여 시내의 우주선 착륙장까지 오니, 어느새 해가 질 시간이 다 되어 가고 있었다. 미영을 우주선에 데려다 주고 양식은 다시 장기배양기가 있는 버려진 사무실로 돌아가려 했다.

"또 가려고? 이제 밤 될텐데. 여기 지구보다 해가 길어서 잘 몰라서 그렇지, 지금 시간 꽤 많이 지난거거든. 무리해서 가지 말지."
"오늘 다 해결해야 내일까지 정리해서 가죠. 여기 너무 물가만 높아서 우주선 오래 세워 두면 돈 많이 손해 볼거에요. 후다닥 살펴보고 올게요."

양식이 떠나자 미영은 혼자 저녁을 먹고 혼자 놀고 혼자 앞으로 일을 걱정하다가 곧 잠이 들었다. 하지만 밤이 긴 행성이어서 미영은 한 밤중에 벌써 잠을 다 자고 깨어났다. 그때까지도 양식은 우주선으로 돌아오지 않은 듯 했다.

미영은 우주선 조종실과 사무실을 돌아 보았다. 그리고 미영은 양식의 방과 빈 방을 돌아 다니며 양식을 찾아 보기도 했다. 그러다가 미영은 양식에게 연락을 해 보았다.

"저 여기서 아직 작업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살펴 볼게 많네요."

양식이 대답했다. 양식은 아직도 그 이상한 숲 속에 있었던 것이다. 미영은 깊은 밤인데 산짐승이라도 만나면 어쩌려고 그러고 있냐고 했다. 양식은,

"여기가 산이 아닌데 산짐승은 좀 이상하지 않아요?"
"그럼 뭐 빌딩 짐승이라고 하나?"
"빌딩하면 너무 업무용 빌딩만 생각 나잖아요. 여기 아파트가 더 많은데. 산짐승, 들짐승 처럼 딱 한 글자로 운율 맞는말 없을까?"
"층짐승?"
"층짐승 괜찮네."

와 같은 별 쓸모 없는 말로 대꾸를 대신하고, 연락을 마쳤다. 미영은 밤이 새도록 혼자 책을 보거나 노래를 듣거나 하다가, 다시 한 번 잠이나 자보려고 누웠다가 뒤척이는 것을 거듭하였다.

날이 새자마자 미영은 양식을 찾아가 보았다. 밝은 낮이라도 꺼려지는 것은 똑같았지만, 미영은 이번에는 혼자 찾아 갔다. 어젯밤 양식과 이야기하면서, 혼자 못 다닐 이유가 없다고 이죽거리는 것에 욱한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낡은 시멘트 벽에 이상한 버섯이 자라고 녹슨 철문 구멍사이로 한 번도 보지 못한 벌레들이 기어다니는 이곳을 다니는 것은 상상만큼은 으스스하였다.

미영은 한 번 크게 놀라기도 했다. 고장난 엘레베이터가 아래 위로 왔다갔다하면서 아래층에 고여 있는 물을 위층으로 퍼올려 대는 곳이 있었다. 그러니까 물이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이었다. 그런데 그 엘레베이터 문이 열리면서 갑자기 위로 솟구치는 폭포처럼 물이 쏟아져 나오고, 거기서 이빨달린 큰 물고기들이 같이 실려와서 파닥거렸던 것이다. 미영은 질겁을 하며 도망쳤다. 그래서 미영은 잘 차려 입은 옷이 상당한 꼴로 망가지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다치거나 큰 어려움을 겪지는 않고 어제 왔던 사무실에 다시 오게 되었다.

"김이사."

미영은 양식을 불렀다.

"김이사, 뭐해요?"
"예? 어, 사장님. 사장님 여기 어떻게 오셨어요. 이런데 혼자 못다닌다면서."
"어제 혼자 못다닐 것도 없다면서요."

양식이 밤새 일하던 자리에는 작은 기계 뭉치들과 여러가지 도면들이 나와 돌고 있었다. 두 개 정도의 컴퓨터 화면에 인쇄한 도면과 같은 내용이 표시되어 있었다. 도면이 어질러져 있어서, 장기배양기계를 덮고 있었다.

"식사는 하셨어요? 어, 저는 밥을 못 먹어서 배고픈데. 식사나 하시죠. 여기 음식 추천 목록 한 번 보시죠. 여기 근방 20광년 내에서 닭강정 제일 맛있게 하는 데가 있다는데."

양식이 말하는 것을 미영은 대답 없이 들었다. 미영은 방안을 살펴 보았다. 그러다가 미영이 한 쪽을 보면서 말했다.

"나도 내 남동생이 있는데..."
"예? 동생이요? 그런 줄 몰랐는데..."
"남동생이 성인 채널 보다가 부모님 갑자기 방에 들어오셨을 때 후다닥 채널 돌리면 이런 분위기 였던 거 같거든요."
"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사장님, 사장님."

양식은 미영을 몇 번 불렀다. 하지만 미영은 아랑곳함 없이 도면으로 뒤덮여 있던 장기배양기에서 도면을 들추었다. 도면을 들추자 장기배양기 안에 있던 것이 드러났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한 여자가 잠자는 것처럼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5.
도대체 어쩌자고 이런 일을 저질렀냐는 미영의 비난이 도대체 나에겐 왜 이런일만 생기냐는 본인의 삶에 대한 신세한탄으로 이어지는 대목으로 진행 되자, 양식은 장기배양기 속의 몸이 누구의 것인지 말하게 되었다.

"이게 내 거라니까요."
"예? 이게 김이사 몸이라고요?"
"소유권으로 따지면 그런거죠."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는데요."
"그때 자산관리법 때문에 사람들 다 뛰어내리던 시절에 뛰어내린 사람 중에 이쪽 태양계 역사상 가장 아름다운 미녀라는 사람도 뛰어내렸거든요."
"이게 그 사람이라고요? 진짜 미친거 아녜요?"
"미친게 아니라 그 미녀라는 사람은 사실 술 마시고 발을 헛디뎌서 추락한 건데, 그때가 마침 그렇게 투신하는 게 유행하던 때라서 이 사람도 투신한 걸로 지레 짐작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아니, 당신이 미친거 아니냐고. 도대체 무슨 짓을 한거야."
"아니, 다 완벽하게 합법적으로 한 거라니까요. 제가 거기 땅바닥에 깔려 있던 무덤 이름판 중에서 이 사람 이름을 찾아내서, 그 무덤을 사들였어요. 그 땅값이 비싸지, 내용물 자체는 엄청 싸더라고요. 그래서 묻어 놓은 이 사람 가루를 다 파온거죠. 그래서 그걸 원료로 집어 놓고 세포 증식 시킨거에요. 유전체 정보는 주민등록 전산화 데이터베이스에 수록되어 있는 거 다운로드 해서 프로그램에 등록시켰고, 그대로 맞춰 넣은 거죠."
"그래도, 그 사람을 이렇게 만들면 안되지. 이건, 뭐, 어쩌자고? 무덤에 남아 있는 가루가 사람 전부가 아니잖아요."
"물론 그게 다는 아니죠. 사람 태울 때 사람 몸 성분 중에 제일 많이 차지하는 탄소, 산소, 수소 이런 거는 다 연기로 변해서 날아가니까. 다 허공에 흩어지겠죠. 그래서, 그런 거는 허공에서 또 흡입해서 기계에 원료로 집어 넣었다니까요. 그 사람 성격하고 기억도 자리잡아 주려고 시냅스 동기화 프로그램도 걸었어요. 원래 사장님 돈 투자 받아서 이거 차렸던 사람이 시냅스 동기화 연결하는걸 하려다가 다 못하고 관뒀더라고요. 시냅스 동기화 프로그램을 쓰면, 이렇게 생긴 뇌의 신경 상태도 딱 옛날처럼 돌려 놓을 수 있다니까요."
"그때 저장해 놓은 게 없을텐데. 뭘 기준으로 옛날처럼 돌려 놔?"
"어차피 신경 연결 상태라는게 잠자고 나면 달라지고 기절했다 깨어나면 또 다시 재구성되고 그런거잖아요. 대충 비슷하게만 해 놓으면 나머지는 깨어나서 이야기하면서 다시 차분히 돌아보면서 살아가면서 되살리면 되는 거죠."
"대충 비슷하게 어떻게 하는데?"
"다른 사람이 이 사람의 성격이나 기억에 대해서 상상하면서 그걸 측정해서 공명이 되는 연결 상태로 걸어 주는 거죠."
"김이사가 이 사람을 알아요? 뭘 상상하면서 측정했는데요?"
"그냥, 뭐 일반적인 거죠."

미영은 컴퓨터 화면에 대사 원고가 있는 것을 보았다.

"이게 뭐야, '나는 양식이를 사랑한다. 양식이를 위해서 항상 봉사하겠다....'"

미영은 양식을 노려 보았다. 그 기세를 보고 양식은 조금 눌린 듯 하더니, 양식이 말했다.

"아니, 뭐, 사랑, 봉사 이런게 사람이 보편적으로 추구해야할 가치잖아요."
"정말 너무하다. 왜 도대체 회사에 득될 일은 하는 게 없으면서, 이렇게 사고만 쳐?"
"무슨 또 사고는 사고입니까? 법을 어긴게 없다니까요."

미영은 긴 말로 답을 하는 양식을 무시하고, 기계 옆으로 가서 조작 버튼을 살펴 보더니 큰 스위치들을 휙휙 끄고 다니기 시작했다.

"어, 잠깐만, 잠깐만. 지금 뭐하시는거에요?"
"아직 심장 뛰고 피 돌게는 안했죠? 진짜 살아서 숨쉬기 전에 이렇게 시체 상태일 때 그만 둬야죠."
"왜요. 내가 야밤에 시체 가루 파오는 것 부터 시작해서 밤새도록 고생한건데. 지금이 무슨 20세기 초입니까?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게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고 뭐 그런 것도 아니잖아요."
"깨우면 어떻게 할건데. 살리면 어떻게 학건데. 책임 질거에요?"

그러자 양식은 장기배양기 속의 아름다운 여자를 쳐다 보더니, 갑자기 낮은 목소리를 냈다.

"만약, 그녀가 나에게 책임지라고 한다면, 나는 기꺼이 그녀를 책임지는 영광을 지리다."

미영은 혀를 찼다.

"이러다가 큰일나. 이게 무슨 정신 나간 짓이야."
"아, 진짜 잠깐만. 잠깐만. 이거 실험하는데 엄청 고생했는데. 아, 잠깐만. 다르게, 다르게 할께요."

양식이 애원했지만, 미영은 바로 스위치를 내리고 작업을 중단시켰다. 미영은 아직 살아 있는 상태가 되지 못한 이 몸을 그대로 다시 무덤 속에 돌려 놓자고 했고, 양식은 투덜거리면서 화장하기도 어렵다, 매장하기도 어렵다. 운운했다. 결국 양식은 다시 시내로 나가 값싼 나무 판자 관을 한짝 사와서 돌아 왔다. 미영의 주장으로 두 사람은 자뭇 진지하게 다시 그 몸을 묻는 의식을 치루었다.

"이것도 죄는 죄 아니에요? 스위치 넣고 1분만, 아니 30초만 기다렸다면 이 사람이 깨어나서 죽기 전하고 똑같이 걸어 다녔을거라고요. 그런데 이렇게 기계에서 도중에 빼내서 세상에 나올 기회를 빼앗는 거. 이것도 죄는 죄일텐데."
"하여튼 아직 공식적으로는 시체긴 시체잖아요."

졸지에 건물 아래에 생긴 무덤 앞에 절을 하는 동안 그런 말을 하고 있자니 미영은 다시 기분이 마뜩찮아진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왜 그런 사고를 쳐. 왜."

미영은 다시 한 번 양식에게 말했다. 양식은 말이 없었다.

두 사람은 우주선으로 돌아가 G581E 행성을 떠났다. 한참 동안 말이 없던 양식은 미안하다고 몇 번 미영에게 사과를 했다. 미영은 풀이 죽어 있는 양식을 보았다. 미영은 그래도 아직은 양식을 좀 더 꾸짖어야 한다고 생각 했는지, 여전히 표정은 화난 얼굴로 말을 했다.

"잘하는 일은 잘 하기도 하면서 이런 일은 참..."

미영은 말끝을 점점 작은 소리로 줄였다.

그리고 궤도 정기 운항선이 있는 곳까지 도착하자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우주선을 타게 되었다.

양식이,

"이제 장기배양기가 제대로 돌아가는 지 알았으니, 제 값에 살 사람을 찾아야 되잖아요. 제가 돌아다니면서 알아볼게요. 이번에는 월급값을 해야죠."

하고 말한 것이 이유였다. 양식은 그리고 며칠 동안 미영에게 연락을 않고 혼자 돌아 다녔다.

미영은 진지하게 반성을 하는 것처럼 보이는 양식의 떠나는 뒷모습을 한참 보았다. 혼자 며칠 동안 우주선에 있는 사무실을 지키면서, 미영은 양식이 해본 실험들이 얼마나 옳지 않고, 얼마나 옳은 일인가 생각해 보았다. 일단 법을 어긴 것은 아니잖아. 하고 생각했다가, 그래도 그게 다가 아니라고 생각을 했다가, 이번 일 때문에 G581E 행성에 찾아 갔다가 온다고 들인 돈을 결산해 보고 그러다 정신이 번쩍들어 분기 실적을 회계 프로그램에서 찾아보고 말그대로 분기가 치밀어 올라, 고래고래 양식인지 누구인지 모를 대상에게 또다시 저주를 퍼붓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그런 시간도 흘러가고, 다시 혼자 사무실에 들어서는 것이 지루하다는 생각이 들었는 지, 미영은 빈자리를 보고 한숨을 쉬었다. 미영은 양식의 자리로 가서 양식의 책상 위에는 뭐가 놓여 있는지 한 번 보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양식에게 연락이 왔다.

"사장님, 접니다."
"어, 김이사. 잘 되어 가고 있어요?"

미영은 황급히 자기 자리에 원래부터 있었던 것처럼 돌아가 자리를 잡았다.

"이건 보고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거래 하시려는 분이 지금 계신데, G581E로 지금 오실 수 있으세요?"
"지금? 기계 있는 그 빌딩숲에요?"
"그러니까 꼭 지구에서 도시에 있는 빌딩이 숲에 있는 나무처럼 많아서 빌딩숲이라고 하는 거 같네요."
"그거 말고, 빌딩 더하기 숲. 해서 빌딩숲. 거기요?"
"예, 거기요. 혼자 기계 있는 데 까지 오기 힘드시면 제가 착륙장까지 가서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미영은 다시 G581E 행성으로 향했다. 미영은 왠만한 가격에 기계를 넘기는 것으로만 계약을 따 왔어도 굉장히 잘 했다면서 칭찬을 해주기로 마음을 먹었다. 미영은 그렇게 연습하면서, 양식이 자신의 칭찬에 기뻐하며 감사해하면, 그 기회에 양식에게 생명의 존엄성에 대해서 다시 똑똑히 조심스럽게 행동해야 한다고 말해 주려는 계획까지 세웠다.

하지만, 막상 다시 웃자란 나무들과 시멘트벽에 적응한 곤충들을 해치고 찾아가 보니, 거기에는 양식과 함께 남자 같아 보이는 한 중년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납골함을 들고 서 있었다. 양식이 미영을 보면서 말했다.

"사장님. 우리가 이 기계로 이 분의 돌아가신 아버님을 지금 되살려 드릴겁니다."


6.
미영은 양식에게 소리를 한 번 크게 지르려다가 납골함을 들고 있는 남자를 보고는 겨우 억지 웃음을 지어 보이며 참았다. 미영은 손짓을 해서 양식에게 사무실 바깥으로 잠깐 나가자고 불렀다.

"이런 거 하면 안된다고 했잖아요. 그것도 그렇고, 저 사람 지구에서 온 사람 아니에요? 맞죠? 지구에서 함부로 이렇게 사람 데려오면 안되잖아요. 이런 거 안하고 그냥 곱게 병원에 팔자고 했잖아요."
"그게 아니라까요. 이번에는 이 돌아가신 분 깨우면, 저 남자 손님분이 부양하실 거라니까요. 좋잖아요. 저 남자 손님은 아버지를 다시 보고 싶어 하신다고. 아버지라는 분도 돌아가실 때 별로 돌아가시고 싶어하지 않으셨대요. 안될게 없잖아요. 비용은 낸다고 하셨고. 일단 이게 제대로 돌아가는 지 한 번만 실험해 보고나면 이쪽으로 쭈욱 사업을 할 수도 있으니까..."
"무슨 이쪽으로 우리가 사업을 왜 해. 김이사가 이렇게 함부로 멋모르는 분야에서 사업하는 거 아니라고 했잖아요."
"아니, 그런데 이렇게 딱 조건 맞는 실험 대상 찾느라 고생도 했고..."
"그러면 그동안 죽은 사람 되살릴 기계 돌릴 손님 찾아다녔어요?"
"꼭 우리가 이 사업을 이렇게 직접 해야 되는 것도 아니에요. 한 번만 제대로 검증 되면, 이 기계하고 사업권을 넘기면 되죠. 이번에 한 번만 제대로 성공하면, 이건 장기를 만들어 내는 기계에서 죽은 사람을 되살리는 기계가 된다니까요. 얼마나 굉장해. 죽은 사람도 살린다. 이거만큼 옛날부터 만병통치약 선전하는 말이 있었나."
"이런 짓 하다가 큰 일 나."
"한 번만. 이번에 한 번만. 손님부터 미리 동의하신 거라니까."
"이런 식으로 죽은 사람 되살리는 거 치고 뭐 잘 된 게 있냐고. '소설이나 영화에서 죽은 사람을 되살린다. 이건 엄청난 일이야' 이런 사람 나오는 것 치고 좋게 끝난게 뭐가 있어요. 아예 즐거운 분위기로 가는 영화가 없잖아요."
"바탈리언."
"예?"
"즐거운 분위기로 가는 영화 있다고요. 바탈리언, 1985년, 댄 오배논 감독."
"그 영화에서 맨 마지막에 끝날 때 어떻게 되는데요?"
"끝은 좀 이상한데..."
"어떤데요?"
"핵무기 같은 거 터져서 등장인물들이 전부 다 죽어요."

두 사람은 그 후로도 한동안 더 대화를 나누었다. 미영은 양식이 기계를 이용해서 남자의 아버지를 살리는데 완강히 반대했지만, 양식의 계속된 권유에 지쳐 갔다. 미영은 동의했다기 보다는 포기하는 심정으로 양식이 기계를 작동시키도록 허락해 주었다.

양식은 먼저 납골함 속의 내용물을 입자 플라즈마화 장치에 집어 넣었다. 뿌연 연기 같은 것들이 기계 속에 가득찼다. 그 일이 잘 진행된 것을 보자, 양식은 압축공기 탱크 몇 개를 힘겹게 낑낑대면서 끌고 와서 기계에 연결했다.

"그건 뭔데요?"
"지구에서 가져온 공기예요. 돌아가시고 화장하실 때 공기 중으로 탄소, 산소, 수소는 흩어지는 거니까."
"그런데 그 산소나 탄소를 마시고 자라난 풀이나 나무가 있으면 그 풀이나 나무에 돌아가신 분 성분이 섞여 있는 것 아녜요?"
"그래서 근처에 있는 풀하고 꽃 같은 것도 꽤 가져 왔죠."
"이게 무슨 의미가 있어. 어차피 벌써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 건데. 산소나 수소로 된 거는 바람타고 비타고 온 세상에 다 퍼졌을 거고, 그거 마시고 자라난 다른 벌레, 동물, 다른 사람도 또 얼마나 빨빨거리면서 돌아다니면서 더 퍼졌을 건데."
"아, 좀 조용히 말씀하세요."

양식은 미영에게 말하면서, 흘깃 남자를 보았다.

"손님도 그 정도는 알고 계신다고요. 그런데 어차피 우리가 한 몇년 살다보면, 새로 밥먹고 새로 살찌고 하면서 몸이 조금씩 새 걸로 바뀔거 아녜요. 몇 년 지나면 살아 있어도 남아 있는 성분 자체는 그렇게 많지는 않다고요. 그러니까 돌아가신 분이 돌아가신 지 벌써 한 십년 지났으니까 그 사이에도 몸 성분이 많이 바뀌었을 거라고. 그거 생각하면 이정도만 이렇게 써도, 별로 그렇게 이상한 거는 아니라니까."

마침내 장기배양기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서, 내부에 점차 형체가 갖춰지는 듯 했다. 양식은 남자에게 말했다.

"이제 이걸 쓰시고, 아버님 생각을 하시면서, 아버님 이야기를 좀 해주십시오. 그 상상하고 기억에 맞춰서 시냅스 동기화 프로그램을 돌릴 거고요. 그러면, 그거에 맞춰서 아버님의 뇌 속에 생각하시는 게 맞춰질 겁니다."

차근차근 진행되는 어마어마한 기계들과 조용한 가운데 근엄한 기세로 돌아가는 소리들 때문에, 남자는 점차 조마조마하고 떨리는 생각 대신에 안심을 얻고 있었다. 남자는 양식이 시키는대로 자리에 앉았고, 자신의 뇌 신경 연결을 읽는 전선이 달린 모자를 썼다.

남자는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고, 양식은 그대로 기계를 맞춰 나가기 시작했다. 남자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는 기억에 남는 사건이나, 버릇, 취미 등등에 대해 계속해서 이어졌고, 그런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많이 진행되는 동안, 배양기 속의 뇌는 일정한 방향으로 신경 연결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7.
아버지에 대해 굳이 좋은 기억이라기 보다는... 유난히 며칠전부터 계속 생각나는 일이 있습니다. 원래 저희 아버지께서는 딱히 무뚝뚝한 분도 아니셨고, 반대로 그렇게 자상한 편도 아니셨습니다. 대체로 친절하신 분이셨고, 집밖에서 화를 내는 모습은 거의 보실 수 없는 분이셨습니다만, 저하고 친한 편은 아니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보면, 아마 어머니와 너무 많이 다투시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중국에서 태어나셔서 고등학교 졸업 하시고 한국으로 이민 오셨고, 그리고 나서 구청에서 운영하는 어린이집에서 일하셨습니다. 저도 거기에서 낮동안 어머니랑 같이 있었기 때문에 자연히 아버지보다는 어머니와 친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인도에서 이민오신 분이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이민 오신 뒤에 서울에서 태어 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저에게 종종 아버지께서 믿으시는 종교나 할아버지, 할머니때의 예절, 풍습 같은 것들을 알려 주실 때가 있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것을 굉장히 싫어 하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한국에서 살려면 그런 모습을 보이면 안된다고 하셨던 겁니다.

어머니께서도 아버지와 결혼하실 때 같은 종교를 믿으시게 되긴 했지만, 그래도 일상생활에서는 그 풍습은 최대한 지키지 않으시려고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래도 상관없는 사소한 습관 같은 것에 뭘 그렇게 정색을 하냐고 주로 따지셨지만, 어머니께서는 어린이집에 찾아오는 다른 부모들이 하는 이야기를 보면 그런 것 하나하나가 아이에게 보통 중요한 것이 아니라며 반박하셨습니다. 가끔씩은 두 분이 정말 심각하게 다투실 때도 있었지만, 결국 아버지께서 물러 나시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저도 점점 아버지와는 어색해졌고, 초등학교 2,3학년 때부터 아버지와 단둘이 어딜 가게 되면 할 말 몇마디도 없이 그저 "학교는 재밌어?" "누가 제일 친한 친구야" 같은 말이나 드문드문 하게 되었습니다. 언제 한 번 어머니와 아버지가 크게 싸우고 나서, 아버지께서 도망치듯이 바깥으로 나와서 장을 보러 가신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같이 가게 되었는데, 그때 아버지께서 한참 말이 없으시다가, "그래도 너는 얼굴 생김이나 살갗이나 이런 건 엄마를 닮아서 다행이다." 하고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 납니다.

초등학교 2학년 때인가, 3학년 때인가 잘 모르겠는데, 여름 방학 때였습니다. 저는 밀린 방학 숙제가 고민 거리였는데, 무슨 채집이나 관찰 일기 같은 걸 써오는 게 있었습니다. 저는 그보다 한 해 전에 했던 것처럼 곤충채집을 해 가려고 했었는데, 이틀을 꼬박 동네를 돌아 다녀 봐도 잡을 곤충이 없었습니다. 기껏해야 개미 종류 뿐이었습니다. 마침 몇 십년만에 가장 특이한 신종 뇌염이 발견 되었다던 해여서, 여름철에 특수 방역, 소독을 해버려서 왠만한 곤충이란 곤충은 다 같이 죽어 버렸던 것입니다. 나는 큰일 났다고 생각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그러길래 왜 방학숙제를 미리미리 안 해 두냐고 하셨고, 다른 거 할 거 찾아 보자고 했지만, 이미 다른 걸 채집하기에는 남은 방학이 너무 부족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다음날이 되면 그래도 뭐라도 샅샅히 찾아보고, 강가에도 나가 보자고 하셨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고민하고 있는 것을 보시더니 아버지께서는 정 할 게 없으면 돌을 채집해 보라고 하셨습니다. "암석 관찰"이라고 표지를 만들고 이곳저곳에 있는 돌을 보고 사진을 찍고 설명을 써 보라는 것이었습니다. 돌이 매끄러운지 울퉁불퉁한지 뾰족한지, 색깔은 어떤지, 잘 부서질 것 같은 지 딱딱한 지, 왜 그런 모양이 되었을 것 같은 지, 어디에서 본 돌인지, 돌에 박혀 있는 알갱이나 무늬 중에 신기한 것이 있는지, 보기보다 무거운지 가벼운지, 그런 것들을 써 보면 나름대로 그럴듯한 내용이 될 것이라고 하신 것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처음에는 돌멩이 주워다가 숙제라고 내면 학교 선생님들이 성의 없다고 하실 것 같다고 하셨습니다. 하지만, 그나마 지금으로는 최선인 듯 해서 어머니께서도 동의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날 저는 아침 일찍 아버지와 함께 돌을 주으러 나갔습니다. 아직 이른 아침이라서 다니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고, 저는 그 시각에 깨어나 본 적이 좀체 없어서 시간부터가 신기했습니다. 우리는 작은 자갈 같은 돌도 보았고, 맨들맨들한 돌멩이나, 하얀 구슬 같이 생긴 조약돌을 보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돌을 들어서 햇빛에 비춰보면 반짝거리는 석영 알갱이가 눈에 뜨이는 것을 알려 주시기도 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디에선가 읽은 것이나 들은 것이 있으신지, 가로로 줄무늬가 나 있는 돌을 보고, 이것은 수백만년 전에 아래 위로 눌려서 이런 모양이 생긴 것인 것 같다고 이야기를 해 주시기도 했습니다. 우리는 돌멩이를 모으고, 돌멩이에 번호를 붙이고, 어떤 표에 돌의 특징에 대해 써넣을 지 의논해서 정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얼마 후 출근할 시간이 되어 직장으로 가셨습니다. 저는 그날 한 나절 내내 계속 돌을 모으고 다녔습니다. 한참 하고 있을 때에는 뭔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대단히 심각한 연구를 하는 남자가 된 기분도 들었습니다. 그래서 재밌기도 했습니다. 저는 그날 저녁에 한 자루나 되는 돌멩이들을 주워 들고 가서 아버지께 보여 드렸습니다.

다음날 저는 혼자 돌을 모으러 나섰습니다. 동네 주변에는 왠만큼 구역별로 여러 가지 돌들을 모아 보았기 때문에, 저는 좀 더 멀리 가 보려고 했습니다. 저는 학교 쪽으로 가면서 돌을 더 모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저는 제 친한 친구들을 만났습니다. 친구들은 학교에 놀러 왔는데, 학교에서 방학동안 공사를 한다고 운동장에도 아이들을 못들어 오게 해서 불만인 상태였습니다. 더군다나 몇 번 몰래 공사장에 자재 쌓아 놓은 곳에 들어가서 기어 오르고 타넘고 놀다가 일하는 사람들에게 단단히 혼이 나서 억울하다는 생각마저 품고 있었습니다. 친구들은 "우리 기지"를 되찾아야 된다고 했고, 저는 친구들과 함께 학교 울타리 옆쪽으로 숨어 공사장 쪽을 보았습니다.

그런데 거기에 건설회사에서 나온 직원 두 사람과 함께 아버지가 계셨습니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건설회사 직원들이 공사를 해야 하는데, 아버지께서 안전 규정에 어긋나기 때문에 허가를 안 해주시는 상황이었던 것 같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지반이 약한 곳일 수 있다고 하셨고, 건설회사 직원들은 "상식적으로 그게 말이 되냐"는 말을 여러번 하면서 따졌습니다. 아버지께서 끝까지 안된다고 하자, 건설회사 직원들은 미안하다고 하고는 물러 났습니다.

건설회사 직원들은 우리쪽으로 다가오는 방향으로 왔는데, 그 직원들은 오면서, "외국애들은 한국 정서를 모르니까 진짜 꼴통이 따로 없다" 라고 했고, 또 다른 직원은,

"요즘 평등지원법 때문에 공무원들 중에 쟤네들, 외국애들은 일정 비율로 그냥 뽑거든요. 그러니까 외국애들은 커트라인이 정말 낮아요. 그러니까 띨빵한 애들도 그냥 높은 공무원으로 다 들어오는거예요. 이러니까 공무원들 중에 꼴통이 더 많지."

라고도 했습니다.

건설회사 직원들이 멀어지자, 공사장에는 아버지만 남아 계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혼자서 다시 한 번 뭔가를 살펴 보려고 하시는 지, 자재 쌓아 놓은 곳과 철근을 박아 놓은 곳을 유심히 보셨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께서 마침 "우리 기지"쪽으로 오자, 내 친구들 중 하나가, "저 꼴통" 이라고 작게 말하더니, 제가 들고 있던 주머니를 보고 거기에서 돌멩이를 하나 꺼내서 아버지 방향으로 던졌습니다. 그 친구는 제가 주머니에 담아 놓은 돌멩이가 돌팔매지를 할 무기로 모아온 것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습니다. 그러니까 다른 친구들도 따라서 제 주머니에서 돌멩이를 꺼내서 아버지 쪽으로 던졌습니다. 맞은 것은 없는 것 같았지만, 아버지께서 이쪽을 보자, 친구들은 소리를 지르면서 정신 없이 도망쳤습니다. 저도 따라서 도망쳐야 했습니다. 한참 도망친 친구들은 한 구석에 모여서 "와아"하고 재미 있어 하며 웃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해야할 지 우물쭈물하고 있다가 그대로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집에 돌아 오니, 어머니께서 교대 근무를 마치고 와 계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내 주머니를 열어 보시고 오늘은 왜 이렇게 돌을 별로 못 주웠냐고 말씀 하셨습니다. 그러자 나는 울음이 터져서 엄마 앞에서, 엄마 앞의 아이처럼 울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왜 갑자기 우냐고 놀라시면서 저를 달래 주려고 하셨습니다. 저는 우느라 자세히 이야기는 못하고 그냥 아버지를 욕한 직원들이 있다는 말만 얼핏했습니다. 그러자, 어머니께서는 나를 달래 주시면서, 아버지께서 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높은 사람이라서, 그 사람들이 부러워서 그렇게 말하는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날 저녁에 나는 방에 들어가서 남은 돌들을 모았던 돌과 함께 모아서 정리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그러지 못하고, 그냥 지금껏 모았던 돌멩이들을 다 아파트 화단에다가 버렸습니다. 그날 저녁 아버지께서는 오시는 길에 그 돌들을 버린 것을 보셨는지, 다시 그 돌들을 얼마간 주워 가지고 오시면서, 내 방학 숙제 한 것을 누가 이렇게 버렸냐고 어머니께 말씀하셨습니다.

아버지께서는 어머니께서 돌 모으는 것은 점수를 받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고 그만두라고 하고 돌을 버렸다고 생각하셨는지, 왜 그런 식으로 하냐고 어머니께 화를 내셨습니다. 어머니께서는 어머니께서 돌을 버린 게 아니라고 하셨습니다만, 어머니와 아버지는 계속 다른 이야기로 옮아가며 그날 저녁도 크게 다투셨습니다.

그 이후로도 비슷비슷했습니다. 저는 아버지, 어머니와는 항상 별로 가까워지지 못했습니다. 고등학생 때 부모님이 믿고 계신 종교를 믿지 않겠다고 했을 때는 정말 그 관계가 심각해지기도 했습니다. 저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입학하기 전 겨울 중에 어느 하루에 집을 떠났습니다. 그날 무슨 생각으로 왜 갑자기 고향을 떠났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그리고 나서 부모님께 몇 번 찾아 간 적도 있었고, 전화 통화 같은 것은 했지만 그것도 가끔 뿐이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십몇년만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고, 장례식에는 다녀왔습니다. 그것도 벌써 십년 가까이 전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아직도 살아 계십니다. 얼마전에 집에 가 보니, 그 때 방학 숙제 하면서 돌멩이를 모으고 "푸른 색깔이다. 이상한 줄무늬가 있다. 매우 딱딱해서 사냥이나 전쟁에도 쓸만하다" 같은 식으로 내가 돌멩이마다 설명을 써 두었던 것이 지금도 남아 있었습니다. 오랫만에 다시 보니 참 재밌어 보이고 웃기기도 했습니다. 지금 저는 그런 돌멩이와는 상관없는 항공학 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그걸 다시 보니까 계속 더 기억에 남았습니다.

한번 그런 생각을 하기 시작하니까, 또 계속 그렇게 보고 싶었습니다. 그냥 걸어 가다가나, 엘레베이터 기다리다가 그럴 때 문득문득 생각이 나는 겁니다. 아버지 다시 봤으면 좋겠다. 한번 다시 아버지께 이야기도 하고, 하시는 말씀도 듣고 하고 싶다. 아버지 보고 싶다. 그런 생각이 나는 겁니다. 그렇게 생각이 나더니, 이제 세상 아무리 찾아 돌아 다녀봐도 아버지는 어디에도 없다는 생각이 났습니다. 햇빛이 눈부신 빈터에 잠시 있다가 사라지는 아지랑이처럼 꼭 아버지 모습이 있는 것도 같은데, 세상 어디에도 이제 아버지께서는 안계시다는 생각이 드는 겁니다.


8.
미영은 그 남자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미영은 여기에 찾아와서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것에 대해 어머니와도 이야기했느냐고 물었다. 미영의 목소리는 차분하고 자상하였다. 남자는 그렇다고 했다. 많이 생각하고 많은 준비를 해서 여기까지 온 것이라고 남자는 말했다.

"이거 큰일났네. 전기가 딸리네."

양식이 말했다. 미영이 어머니나 아버지, 시간, 가족, 추억 이런 것에 대해 뭐라고 막 말하려고 했는데, 양식의 말이 그것을 막았다.

"지금 이 몸은 어느 정도 나이가 들어야 되기 때문에 강제 노화가 이뤄지도록 하고 있는데, 이건 한 번도 안 써 본 것이라서 이렇게 될 줄 몰랐네요. 이거 전기 엄청 먹네요. 이러다가 전기 모자라서 꺼지면 다 날릴텐데."
"날리면 다시 하기 어려워요?"
"어렵죠. 뭐 어차피 재료 물질은 다 그대로 안에 남아 있는 거니까 불가능한 건 아닌데..."

양식은 고민 하더니 미영에게 건물 지하에 내려가서 두꺼비집을 좀 보고 오라고 시켰다. 미영은 양식과 다투었다. 살아나시는 분 본인에 대해서도 생각을 해서 기왕 몸을 드리는 거 아버지 다운 늙은 몸보다는 오히려 젊은 몸을 주는 게 맞지 않냐, 이건 남들 보기 좋으라고 본인의 행복은 강압하는 게 아니냐 하는 이야기로 싸우기도 했다.

하지만, 결국 일단 전기를 당장 더 끌어오지 않으면 기계가 불안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고, 미영은 그 말을 들을 수 밖에 없었다. 양식은 기계를 조정해야 하고, 남자는 계속 아버지에 대해 생각하는 일을 해야 했다. 지금 밖에 나가서 전기를 끌어오는 일을 할 사람은 미영 밖에 없었다.

양식은,

"그러게, 쓸데 없는데 돈 아끼지 말고 비상용으로 까마귀 로봇 한 대만 사자니까."

라고 투덜거리다가, 다시 한번 미영에게 저주의 말을 더 들어야 했다.

미영이 세 마리의 도마뱀과 두 마리의 들쥐와 칠백아흔아홉 마리의 모기떼에 시달리며, 아파트 지하실로 내려가 전력을 조절하는 일을 해나가자, 양식이 이제 다 되었다는 연락을 전해 왔다.

미영이 돌아와 보니, 일단 옷이 더러워지고 숲을 헤메느라 얼굴과 머리칼이 엉망이 된 미영을 놀려대는 양식이 있었다. 양식을 다시 한 번 꾸짖고난 미영은 눈을 중앙으로 돌렸다. 과연 배양기 안에는 한 사람의 몸이 누워 있었다. 남자가 말했던 것 보다 더 덩치가 작고 더 초라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나름대로 건강해 보이는 모습으로 거기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숨을 쉬고 피가 돌 순간을 기다리는 몸이 있었다.

"다 됐죠? 선생님, 이건 선생님께서 직접 하시죠."

미영은 양식을 손짓해서 마지막 실행 작업을 남자가 직접 하도록 안내 했다.

그렇지만 남자는 그 아버지의 모습을 보며 그냥 가만히 있기만 했다. 미영은 무슨 문제가 있나 싶어 표정을 바꿔가며 남자의 동태를 살폈다. 미영이 양식을 쳐다보니, 양식도 뭔지 잘 모르겠다는 듯 입을 한 번 삐죽 할 뿐이었다.

침묵이 어색한 시간을 지나고, 이제 이게 원래 이러고 있나 보다 싶어 어색하지도 않을 정도로 조용한 시간이 많이 지났다. 그리고 남자가 말했다.

"아닙니다. 이게 아니라는 걸 이제 알겠습니다."

미영은 그 말을 듣고 놀라서 할 말이 잠깐 없었다. 미영이 정리해서 이어간 말은 다음과 같았다.

"아니, 왜요? 아버지가 아니신 거 같으세요?"
"아니오. 정말 아버지 같은데요. 그래도 이건 그냥 빚어 놓은 인형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게 아니잖아요. 정말 아버지몸을 그대로 다시 그 재료로 또 만든 거라니까요. 생각도 정말 그때 생각하시던대로 최대한 비슷하게 한 거라고요."

미영은 양식을 한 번 흘겨 보고는 다시 남자를 보았다.

"충분히 이해하셨다면서요."
"예,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요? 그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실때 의식이 한 번 흩어지면서, 모든 게 다 끝나서 없어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그게 아니라니까요. 그때 그 상태 그대로 이어진 거에요. 잠자는 동안 의식이 잠깐 멈췄다가 다시 그대로 이어지는 거랑 별로 다른게 없다니까요."
"그것도 잘 이해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왜요. 한번 흩어졌다가 다시 갖춰진 게 문제라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렇지만 사람 몸에서는 항상 각질이나 머리칼 처럼 조그마한 부분들이 계속 떨어져 나오고 새걸로 바뀌고 있잖아요. 계속 재조립되는 게 사람아닌가요. 이건 정도가 너무 심해서 마음에 바로 와닿지 않아서 그러신 건가요?"
"아니오. 아니오. 그런 것이 아닙니다."

남자는 말을 멈추고 장기배양기 안을 바라 보았다. 나머지 두 사람도 남자의 다음 말을 기다리고만 있었다.

"아무리 그래도, 아무리 그래도, 진짜 그때 아버지는 아닌 것 같아서요."

미영은 남자에게 더 말을 하려고 했는데, 양식이 미영을 쳐다 보면서 고개를 한 번 저었다. 미영은 안타까운 표정을 지을 뿐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남자는 얼마 후 그곳을 떠났다. 남자는 진심으로 미영과 양식에게 미안하다고 몇 번 사과했다. 남자는 자기가 처음에 제안했던대로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비용은 모두 지불하겠다고 했다.

얼마 후, 미영과 양식은 어쩔 수 없이 아파트 아래에 무덤을 하나 더 만들어야 겠다. 말없이 쓸쓸한 표정으로 미영이 그 무덤을 보고 있으니, 양식은 뭔가 웃겨 봐야겠다고,

"이거 진짜 무덤 위에 세워진 아파트네. 옛날에 그런 거 많지 않았어요? 아파트가 무덤 위에 세워진 아파트라서 귀신이 나오는데, 그래서 엘레베이터 타고 가다가 '넌 내가 네 엄마로 보이니?' 뭐 이러고 그러는거."

하고  주절 거렸다. 미영은 진절머리가 나는 표정을 지었다.

"넌 내가 네 사장으로 보이기는 하니?"

양식은 고개를 과장해서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

"이게 사실 엄청 심오한 이야기라니까요. 원래 옛날에 지구에 미국에서 보면 서부개척시대 지난 뒤에 인디언 묘지에 무슨 건물이 들어 섰기 때문에 그 건물에 유령이 나온다 이런 전설 엄청 많았거든요. 그거랑 일치되는거죠. 아파트가 무덤 자리에 들어 섰기 때문에 귀신이 나온다... 이건 각박한 도시화된 산업 사회의 개발이 전통 문화을 몰아내고 개척한 상실감, 죄책감을 말하는 거 아닌가요."
"그러면 무덤자리에 학교가 들어 섰다... 이런 이야기는? 그런 이야기도 많은데."
"그거야 몰개성적인 현대사회의 단체 교육이 고전적인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는 데 대한 무의식적인 고통의 발로인거죠."
"발로, 뭐 이런 단어 써서 말하면 진짜 헛 잘난척만 하는 것 같고 진짜 하나도 안 와닿는거 알아요?"
"정발로 그렇게 들려요?"

다행히도 머지 않아 두 사람은 병원 우주선이 지나갈 때 장기배양기를 꽤 괜찮은 가격에 팔 수 있었다.


9.
미영과 양식은 아버지를 다시 만나려고 했던 남자를 그 후로 한 번 더 만나게 되었다. 이렇게 말하면 한 몇 달이나 몇 년 쯤 지난 뒤에 한 번 더 만나고 그 후로는 영영 다시 볼 수 없었다, 이렇게 되어야 마땅할 듯 하지만, 사실 미영과 양식은 헤어진지 짧은 시간이 흐른 후에 그 남자를 만났다. 정확히 말하자면, 그 남자는 미영과 양식에게 인사를 하고 건물을 떠나는 듯 하더니, 나간지 몇 분 지나지도 않은 듯 한 시간에 다시 돌아 왔다.

남자는 미영과 양식에게 이렇게 말했다.

"제가 돌아 가서 바로 모든 것을 다 깨닫고 잘 살았다면 얼마나 매끈한 이야기였겠습니까.

그렇지만 저는 그 후로도 오히려 더 아버지에 대해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습니다. 저는 누군지도 모를 대상에게 매일 아침 일어날 때 마다, 아침잠이 깨고 의식이 찾아올 경계에서 항상 간곡히 기도 했습니다. 그런때가 정말로 간절히 기도할 수 있는 순간이라고 생각 합니다. 다시 한 번 아버지를 만나게 해 달라고 저는 매일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그러던 어느날, 저는 아버지를 만났습니다. 아버지 뿐만이 아니었습니다. 저는 정말로 옛날 그 시간에 가 있었습니다. 저와 아버지는 서먹서먹했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싸우고 있었습니다. 행복하고 즐거운 시간은 아니었지만 정말로 바라던 그 시절 그대로였습니다. 저는 그 모든 것이 갑자기 사라질 것이 두려워서, 조심조심 그냥 정말 그때 그시절 저를 흉내내면서 살았습니다. 하지만, 아무도 없이 혼자 있을 때마다 저는 다시 이때로 돌아와 아버지를 또 보게 된 것이 얼마나 기쁜 지 가슴 벅차했습니다. 그냥 아무 말도 안하고 아무 것도 안해도 다시 돌아가신 아버지를 또 보게 되었다는 것만으로 눈물이 나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지내던 어느날, 저는 아버지의 얼굴을 가만히 보다가 갑자기 알아 버렸습니다.

제가 어떻게 거기에 다시 가게된 줄은 정확히 몰랐습니다. 아직도 모릅니다. 당신들과 같이 신기한 기계를 가진 자들이 저를 몰래 꾸고 싶은 꿈을 꾸는 기계 같은 것에 넣어서, 제가 보고 싶어하는 환상을 체험하게 하는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그게 아니라면, 그 시절의 제가 살던 도시, 살던 나라와 똑같이 온통 꾸며 놓고 그때 살던 사람들을 그대로 재현해 놓은 거대한 민속촌 같은 곳에 저를 누가 데려다 놓은 것일 수도 있었습니다. 아니면, 정말로 어떤 대단한 능력을 가진 자가 온 세상을, 이 모든 별들과 빛의 한 조각까지도 모두 그 때와 똑같은 모습으로 다 바꾸어 놓은 것일 지도 모릅니다. 아니, 정말 시간마저도 그때와 똑같이 다시 만들어 놓았을 수도 있었을 겁니다.

그렇지만, 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자의 힘으로 이 모든 것을 그때로 만들어 놓는다고 해도, 저는 이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나는 내 아버지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떠나고, 생명이 사라지는 것을 이미 보았습니다. 그 기억과 안타까움이 내 마음 속에 한 번 남아 있는 한은, 이제 다시 보는 그 모든 것들이 아무리 그대로 다시 돌아온다고 해도, 모조품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단 말입니다.

그래서 그렇게 생각한 그 날이 제가 집을 떠나서 대학교가 있는 도시로 갑자기 나섰던 날입니다. 그리고 저는 지금껏 살았고, 다시 여기로 온 것입니다."

남자가 다시 나타나 떠난 후에도 약 5분 정도 미영과 양식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두 사람은 거의 동시에 말을 시작했는데, 미영이 먼저 말을 꺼내긴 했다.

"저 손님이 다시 와서 이런 이야기를 우리 한테 해준 이유가 뭐죠?"
"뭐..."

양식은 잠깐 생각하더니 대답했다.

"죽은 사람 되살린다고 하는 게 좋은 생각은 아니라는 거 아니겠어요. 프랑켄슈타인도 그렇고, 이탈리아산 좀비 영화들도 그렇고."

그러자 미영은 한숨만 쉴 뿐이었다.

- 2012년, 등촌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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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No Profile
    쑤우 12.08.15 01:27 댓글 수정 삭제
    이제 '미영과 양식의 우주 여행기' 시리즈로 나오는 건가요? ㅎㅎ
    정철의 시조가 생각나는 작품이었어요.

    어버이 살아신제 섬길 일란 다하여라
    지나간 후이면 애닯다 어찌하랴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 No Profile
    곽재식 12.08.20 13:34 댓글 수정 삭제
    그렇습니다. 이 2편 포함해서 일단 한 6편 정도는 만들어 보려고 생각하고 진행하고 있습니다. 언제나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이번에도 응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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