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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백 번째 통신

2011.09.30 22:3909.30






 1.


 화면에 나오는 북유럽의 금발 미녀 세 사람은 우리가 있는 방향을 향해 화면 바깥의 세상이 얼마나 따분한 곳인지 알려 주려는 양 웃음을 지었다. 그 웃음의 리듬에 맞추어 세 사람이 입고 있는 스키복 바지의 뒷모습이 꼭 알루미늄 재질인 것처럼 반짝 거리는 듯하였다. 핀란드 관광청에서 만든 광고였다. 재작년에 내어 놓은 휴대용 동영상 방송 기술이 아직까지 통신 혁신 연구소의 가장 큰 홍보 수단으로 재탕, 삼탕 되고 있어서 또 나오는 것이었다. 연구소 이곳저곳에 있는 화면 마다 투자 유치를 위해서 보여 주면 좋겠다고 휴대용 동영상 방송 기술을 적용한 방송을 모두 틀어 놓게 했고, 지금 나오는 것도 그 방송 중의 광고였다. 내년도 연구 계획을 세우는 요즘도 저러고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내년도 핵심 홍보 자료 역시 또 저 휴대용 동영상 방송 기술이 될 것이다. 재탕, 삼탕을 지나 사탕째에 들어가겠지.


 시험적으로 실시되는 방송이라 광고 유치가 잘 안 되는 편인지, 광고는 몇 가지 되지 않았다. 그 덕분에 연구소 곳곳의 화면에서 여러 나라의 관광청 광고들이 계속 반복 되어 나왔다. 이름도 성도 알 수 없는 사람들이 화면을 스쳐가고 왜 웃는 지 까닭은 더욱더 알 수 없는 모양으로 사람들이 웃고 있는 모습들, 광고가 시작되고 끝나는 음악, 마지막 화면에 새겨지는 “수오미” 어쩌고 하는 말과 함께 새겨지는 “핀란드“라는 글자체, 이제는 모든 광고 내용을 직원들의 반수는 외울 법도 할 것 같았다. 아쉽게도 그랬지만, 눈 덮힌 풍경에 달리는 썰매들과 산타클로스가 손 흔드는 모습을 보고 있으면 크리스마스가 또 얼마 남았나, 하는 생각이 잠깐 들 뿐, 딱히 가보고 싶은 곳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처음 봤을 때는 어쩌면 꽤 호기심 생기고 한 번 가 봐도 재밌겠다 하는 생각이 잠깐 들었던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처음 볼 때에 감상이 어땠는지는 지금 도무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이런 점은 딱히 이 광고의 문제라기보다는 모든 광고들이란 다 그런 것이겠거니 생각 한다. 시험삼아, 아무 광고나 한 번 잠깐 생각해 보자. 무척 기억에 잘 남는 광고라고 해도 그 광고를 처음 본 때가 언제인지 정확히 생각나는 것이 몇이나 될까?


 유리벽으로 되어 있는 회의실 바깥을 내다 보고 아무 재미도 없는 광고를 이렇게 멍하니 보고 있으니, 귀로 들리는 클러스터장의 목소리는 늦은 하교길 아득하게 들려오는 학교 운동부의 연습 구령 소리처럼 들려 왔다. 무슨 뜻으로 하는 말인 지 잘 알아 들을 수 없는 부분도 있었지만, 굳이 찾아 가서 물어 보고 싶지는 않다. 별 새로운 것도 없는 말이지만, 머리 한 쪽에는 오래 남아 울려 퍼진다.


 “박사님.”


 클러스터장은 다음 구절을 이야기하려다가, 나를 부르며 내 쪽을 본다. 나는 앉은 자세를 잠시 고쳐 앉았다.


 “박사님도, 저, 이런 이야기 하기는 좀 뭐하지만… 아시잖아요. 조직이라는 게 개인 뜻대로, 아이디얼하게 움직일 수만은 없는 때가 있는 거잖아요. 더군다나, 또 이제 선거철이잖아요. 선거철만 되면 맨날 이야기하는 게 청년 실업 대책 이야기니까, 위에서는 계속 그걸로 애그리개이션이 내려온다고요. 나이 많은 사람들 일 자리 하나를 줄여서 신입 자리 두 개를 만들라는 거거든요.”


 클러스터장은 나를 보고 이야기 하면서, 마흔 다섯살 이상은 다들 위험하다고 겁을 주고 있었다. 역시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재탕, 삼탕 듣던 이야기였다. 호랑이가 아직 금연에 성공해지 못했던 시절, (김광욱 박사가 종종 재밌게 여겨서 쓰던 말이다.) “클러스터장”이라는 직함이 “팀장”이던 때에도 저런 소리는 있었다. 팀 제도 보다는 더 유연하고 효율적이라면서 그룹 제도로 조직을 개편한 뒤에, 그 두령을 “그룹장”이라고 불렀는데, 그 때에도 역시 비슷한 이야기는 있었다. 그룹 제도 보다도 더 유연하고 더더욱 효율적이라면서 클러스터 제도로 조직을 또 개편한 뒤에 그 두령의 이름은 “클러스터장”이 되었다. 그게 요즘인데, 역시 같은 이야기는 격년에 한 번 꼴로 계속 나온다. 나이가 든 사람이 나가야 된다는 이야기가 상부에서 내려온다, 마흔 다섯살 이상은 다들 위험하다, 어쩔 수 없다.


 “그런데, 왜 위에서 어떻게 하려고 압력 넣고 닦달하는 말 내려오는 걸, ‘애그리개이션’이라고 하지? 그거 우리 연구소 말고 딴 데서도 쓰는 말인가?”


 나는 그렇게 말하고 한 번 허허 웃어 보았다. 말을 돌리는 게 아니라, ――― 잠깐 동안 말이 돌려 지기도 하지만 ――― 사실 정말 궁금했다. “애그리개이션이 내려온다”니. 말을 들을 때마다 정말 궁금한 것이었다. 이 연구소에서는 위에서 달갑잖은 지시가 내려오는 걸 “애그리개이션”이라고 한다. 도대체 무슨 뜻으로 그런 말을 하는 지 한 번도 설명을 들어 본 적은 없다. 그런데도 다들 몇 번 듣다보면 그 말을 하나 둘 따라 하곤 한다. 무슨 대단한 용어인 것처럼 아주 멋진 영단어로 “애그리개이션”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왜 그게 그런 뜻이 되었는 지 아는 사람은 내가 지금껏 아는 중에서는 적어도 아무도 없었다.
 
 이런 단어가 쓰일 때일 수록 살벌하게 누군가의 죄를 따지는 때이기 마련이어서 단어의 뜻을 물어 볼 기회는 더욱더 없었다. 상상해 보자. 지금 자네를 해고 하는 데, 내가 니가 싫어서 해고하는 것이 아니라, 위에서 “애그리개이션”이 내려와서 너를 해고한다고 둘러대고 있는데, 그 말을 훌쩍거리며 듣고 있던 만 24세 여자 신입 연구원이 울음을 참으며,
 
 “그런데 도대체 옛날부터 궁금했던 건데, 도대체 애그리개이션이라는 말을 왜 이런 때에 쓰는 거예요?”
 
 라고 하는 일은 안 생기기 마련이었다. 이 단어는 들리기에 “압력”이라는 말과 묘하게 어감이 닮게 들리는 데가 있다. 그것 때문에 다들 말이 마음에 들어서 “위에서 애그리개이션이 내려 온다”고 하는 건 지 뭔지?
 
 웃기다면 웃긴 것일 수도 있고, 정말 회의 자리에서 여러 사람 모여 있는데 언젠가 한 번 여러 사람에게 물어 볼만큼 궁금한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날 회의에서 나를 따라 웃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잠깐 동안 침울하게 조용하기만 했다. 심심하게 한 번 픽 웃는 사람이 있기는 했는데, 워낙 아무도 대꾸하지 않아서 그 웃음은 오히려 더 안 웃기다는 뜻처럼 들렸다.
 
 그렇게 해서 어영부영 다들 연구비 안 따오면 잘릴 수도 있다는 각오로 겁 좀 먹으라는 내용으로 클러스터장의 이야기는 끝이 났다. 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주섬주섬 일어나서 나갔다. 나는 빨리 이곳을 빠져 나가지 않으면 어디엔가에 빨려 들어가 버리기라도 하는 듯이, 유난히 빨리 탁자에서 일어서 움직였다.
 
 그런데 막 회의실 문을 나서려는데, 클러스터장이 나를 불러 세웠다.
 
 “저, 잠깐만 이야기 좀 하고 가시죠.”
 
 나는 빨려드는 기분이 되었다. 혹시 이러면 어떡하나, 혹시 이러면 어떡하나 하고 가끔 답답하게 여기던 바로 그것이, 드디어 눈앞에 캄캄하게 뒤집어 씌워지는 바로 그 기분이었다.
 
 클러스터장이 “잠깐”한다던 이야기는 45분 동안 이어졌다. 이게 잠깐인가. 하기야 20년 가까이 연구소를 다녀온 시간에 비하면 별로 긴 시간은 아니다. 말이 기어서 그렇지, 나눈 이야기도 짧게 요약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정말 위험하다는 이야기였다. 나이가 많고 연봉 수준도 낮지 않은 나 같은 사람이 가장 위험하다고. 위에서 정말 강하게 “애그리개이션”이 들어오고 있다고.
 
 “청년 실업에 대해 말을 많이 해야 표를 많이 얻으니까, 이 정치인 놈들이… 나이든 사람 잘리면 그 사람 표 한 표만 잃지만, 젊은 사람 취직 잘 되게 한다고 하면, 그 젊은 사람이랑 그 부모까지 표를 얻을 수 있으니까. 남는 장사거든. 사실 박사님 정도면, 우리 클러스터에서도 나름대로 경력도 있고 또 경험도 있으셔서 사실 저도 어지간하면 버티고 싶은데요. 연구비 규모가 확보 안 되면 정말 어쩔 수 없습니다.


 연구비 만들 수 있는 연구사업을 따와야 되는 게, 박사님 같은 경우에는 연봉 100%에 패딩 마진 20% 거든요. 사실 애그리개이션 들어온 거는 연봉 백에 패딩 마진을 또 오십 더 해오라는데… 그건 진짜 너무 한 거고. 제가 어떻게 해 볼 수 있는 한계선이 연봉 120% 입니다. 갑자기 무슨 도깨비 방망이 두드린다고 돈 주면서 연구하라는 사람이 나타나는 것도 아닌데, 이 겨울에 대뜸 백이십프로치 연구비 챙길 수 있는 사업 들고 오라고 이렇게 말하는 게, 참 저도 그렇습니다만…”
 
 클러스터장은 내 힘으로 내가 내 월급의 120%에 해당하는 연구 사업을 받아 오지 못하면 해고 당한다는 말을 하면서, 이게 다 선거 때 표만 노리는 정치인들 때문이라는 이야기를 했다. 클러스터장은 그러면서 정치인들 욕하는 이야기에 흥이 났는지, 좀 더 열성적으로 이놈저놈 정치인 이름을 반말로 부르면서 길게 말을 늘어놓았다. 클러스터장의 정치 판도에 대한 통찰은 45분이 지나서, 짧게 한다는 회의가 이어진 이 이야기가 점심시간이 다가올 때 즈음해서야 끝이 났다.
 
 클러스터장은 이렇게 말을 맺었다.
 
 “우리 연구소가 국제 협력 프로젝트가 비슷한 급 연구소에 비해서 좀 떨어지는 편이거든요. 그래서 그런 쪽도 괜찮을 것 같기는 해요. 국제 협력 프로젝트로 어떻게 연구 사업 하나 따오시면, 따로 패딩 마진 없어도, 그냥 연봉 백프로만 딱 해오셔도 막아 볼 수 있을 거 같은데… 혹시 박사님, 외국에 어디 좀 이렇게 아시는 분 없으세요? 뭐 대단히 높은 이런 분 아니라도, 그 나라 언어 좀 하고 대충 업계 사정 알아서 다리만 좀 놓아줄 수 있는 사람이라도요.


 일본이나 중국 말고. 그런 쪽은 너무 흔하고… 위에다 대고 말하기에는 유럽이나 미국 쪽이 좋은데.”
 
 나는 정말 나가라고 하면 어떡하지, 그러면 당장 뭐부터 해야 할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다시 유리벽 밖을 보고 있었다. 또 한 번 재생되는 관광 홍보 광고가 보였다. 나는 입을 열고 대답하기 시작 한다. 광고를 보고 있던 내 눈과 클러스터 장에게 말하는 내 입은 나의 뇌를 통해 함께 연결되지도 않은 듯이 움직였다.
 
 “핀란드요.”


 클러스터장의 얼굴에 놀라면서도 기뻐하는 기색이 돌았다.
 
 “핀란드에 아시는 분이 계세요? 예전에 기초 통신 연구소 시절 때 선배? 후배? 아니면 형제나 친척 분 중에 핀란드 쪽에 계신 분이 계신가?”
 
 나는 다시 정신을 차린다. 나는 아까와 같은 웃음을 만들어 보인다.
 
 “제 딸아이요.”


 
 2.
 
 토요일 오후, 인천 공항으로 갈 때 김광욱 박사가 따라 왔다. 급하게 자료를 고치고 새 아이디어를 넣다 보니 발표 자료에 대해서 같이 의논할 시간이 부족했기에, 가는 동안에도 자료를 보면서 같이 의논해야 했다.
 
 “이제 벌써 한참 왔네. 이거 시간 안에 다 한 번 볼 수 있을까요?”
 
 김광욱 박사는 시연 장비를 한참 설명하다 말고, 대뜸 물었다.
 
 “박사님, 그러니까 그냥 박사님 개인카드로 비행기표 먼저 결제하시고 나중에 연구소에서 받으셨으면, 이렇게 밤에 힘든 일정으로 급하게 안 가도 되잖아요.”
 
 “그게 뭐, 그래도 되는데, 그래도 한두푼도 아닌데 괜히 먼저 내고 나중에 또 받고 뭐 이렇게 하다보면 번거롭고 안 좋더라고.”
 
 “하여간, 이놈의 연구소, 진짜 이상해. 왜 출장 가는 비행기표 사는 여행사가 정해져 있는 거예요? 이거 뭐 연구소장 아들이나 친척이 또 여행사 사장이고 뭐 이런 거 아냐?”
 
 “그렇기야 하겠냐. 중소기업 육성사업이라는 게 있는데, 국공립 기관들은 8대 역점 분야라는 게 또 있거든. 그래서 8대 역점 분야에 대해서 꼭 중소기업을 정해 놓고 거래한 다음에 감사 때 내역 제출해야 하는 게 있다고. 아마 그거 내역 제출하기 편하게 한다고 여행사 하나만 고정해 놓고 쓰는 걸 거야.”
 
 “그런지 어떤지 어떻게 알아요. 토요일 오후에 이렇게 가는 표 밖에 못 구하는 이런 여행사랑 왜 거래를 하는 건지. 좀 괜찮은 여행사는 없나? 이거 값 보면, 별로 싸지도 않아요. 그냥 박사님 자비로 먼저 비행기표 사고 나중에 정산하는 게, 차라리 돈도 더 싸게 먹히겠구만…”
 
 “지금 벌써 이렇게 가고 있는데 그런 이야기 해 봐야 뭐하냐.”
 
 나는 김광욱 박사가 하던 말을 멈추게 하고 전리층 공명 장파 통신 시연 장비에 대한 이야기를 물었다.
 
 “여기 요, 반 알렌 벨트 공명 부분만 한 번 더 설명해 봐.”
 
 이미 대충 아는 분야여서 꼭 설명을 듣지는 않아도 되었다. 하지만, 비행기표 결제 하는 이야기를 계속 하고 싶지는 않아서 그것부터 물었다. 내가 내 돈으로 비행기표를 먼저 살 수 없었던 것은 이번 달도 신용카드를 한도액까지 다 써버려서 쓸 돈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만한 일에 어디서 정식으로 돈을 빌리기도 그랬고, 따로 돈 구할 친척이나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고 더 젊은 직원들만 있는 연구소에게 정산하면 갚아 줄 테니 돈 좀 꿔달라고 하는 것도 좋은 생각은 아닐 테니까.
 
 항공사와 여행사에 몇 번 전화를 걸어서 할부로 결제하는 방법이나, 새 신용카드를 만들어서 결제하는 방법을 두어 가지 궁리해 보다가, 결국 포기하고 그냥 연구소에서 선불로 돈을 내주는 지정 여행사의 비행기표를 쓰기로 했던 것이다.
 
 “아시겠죠? 이 부분은 옛날이랑 사실 별 바뀐 게 없어요.”
 
 “지난번에 잘 안 되던 게, 고주파 장파에 디지털을 보내고 저주파 장파에 아날로그를 보내는 걸로 분해해서 보내고, 나중에 받을 때 다시 합쳐서 손실 신호를 보상하자는 거였잖아. 내가 이번에는 고주파랑 저주파랑 디지털, 아날로그를 왔다갔다하면서 써보려고 하거든. 그것도 되는 거지?”
 
 “그게 어제 새로 집어넣은 건데, 실험실에서는 몇 번 시험해보기는 했거든요.”
 
 “돼?”
 
 “예, 되긴 돼요.”
 
 광욱 박사는 우리가 새로 고친 장파 통신 장치가 어느 정도 선까지는 움직인다고 말했다. 그리고 광욱 박사는 방금 전까지 실험실에서 맡아서 고민하던 부분에 대해서 계속 설명을 해줬다.
 
 “이게 어쩔 수 없는 문제가 있어요. 전리 반사 장파 통신이라는 게, 항상 그렇지만, 이렇게 해도 역시 될 때는 잘 되다가 또 안 될 때는 또 막 계속 안 되거든요. 이번에도 그걸 잘 못잡겠어요. 그나마 세부 설정을 잘 잡아주면, 확률은 좀 높일 수 있기는 할 텐데.”
 
 나는 광욱 박사가 설명하던 것을 듣다가 잠시 물어 본다.
 
 “광욱 박사가 나하고 여기 몇 년 같이 일한 건지?”
 
 “예? 10년 하고… 11년… 올해가 12년째죠.”
 
 나는 전철 창 바깥으로 보이는 서해 풍경을 보았다. 나는 갯벌 위를 덮고 있는 불긋불긋한 것을 보고 그게 무엇일지 잠깐 생각해 본다. 세상이 핵전쟁으로 멸망한 뒤에 조용히 삭아 없어져 가는 세상을 가득 뒤덮는 곰팡이가 평원과 바다에 퍼지면 저런 모양이 아닐까 싶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되어 연구소에서 쫓겨나면 어쩌나 상상 하는 것과 상관이 있지는 않나 싶자, 나는 다시 곧 딴 생각을 하려고 한다.
 
 나는 다시 광욱 박사가 온갖 설명을 써준 발표 자료로 시선을 옮긴다.
 
 “광욱 박사도 학위 따고 처음 연구소 왔을 때부터 이거 했는데, 그지?”
 
 “말도 마십쇼. 이제 지긋지긋합니다. 2, 3년 내에 실용화 된다 어쩐다 했는데, 아직까지도 혁신 기술 연구니, 도전 과업이니 어쩌니 하면서 맨날 연구비 따내는 데 울궈 먹고 있잖습니까? 야, 진짜 저는요. 졸업할 때만 해도 저는 이거 장파 통신 해가지고 제가 빌 게이츠처럼 될 줄 알았습니다. 세상에 전화기나 텔레비전마다 전부다 제가 만든 게 다 들어가고, 막 벤처 기업 차리고요.”
 
 “야, 그건 좀 심하다. 빌 게이츠는 무슨 전산학과 학위 하고 돈 벌었냐? 돈은 많이 안됐어도, 그래도 이거 붙잡고 조금씩 조금씩 하나하나 연구 주제 잡아 가면서 이렇게 살짝 저렇게 살짝 새로 연구해 가면서 연구비도 많이 따왔고, 그 동안 논문이라도 꽤 썼으니까, 아주 껀수를 잘못 잡은 건 아니라고.”
 
 “박사님도 학교 다닐 때부터 장파 통신 하셨다 그러셨죠?”
 
 “학교 다닐 때는 뭐 이것만 한거는 아니고… 반 알렌 벨트 공명도 하고, EMP 쪽도 좀 해보고 그랬지.”
 
 박사 학위 공부 시작할 때 즈음해서 지도 교수님께서는 이걸 하면 곧 있어 굉장한 거물 학자가 되고, 잘 하면 노벨상도 받을 수 있을 것처럼 말씀 하신 적도 있었다. 하기야 이곳저곳 연구비 지원해 주는 곳을 바꾸어 한 해, 한 해 살림 때울 때 마다 조금씩 연구 방향을 고쳐서 그 동안 장파 통신이라는 주제로 따냈던 연구비를 다 모아 보면 족히 노벨상 상금 정도는 되기는 할 것이다.
 
 멍하게 있는데, 광욱 박사가 다시 발표 자료 화면을 툭툭 쳤다.
 
 “어이쿠. 벌써 공항 다 와갑니다. 이거 진짜 시간 없네. 이제 발표 자료 네 페이지 더 남았는데, 마지막 두 장은 박사님께서 만드셨던 거고, 두 장이 딱 제가 이번에 새로 고친 거니까, 공항 도착하기 전에 이것만 빨리 다 설명하겠습니다.”
 
 “어, 그래. 그래. 너무 걱정 하지마, 공항 가서도 아직 시간 좀 있으니까.”
 
 나도 다시 발표 자료를 보았다. 이렇게 해서, 전리층 공명 장파 통신이 실용화 되면, 별도의 기지국이나 회선망을 세우지 않고도 세계 전역에서 누구나 통화를 할 수 있게 된다는 꿈같은 결론이 자료 마지막 페이지에 실려 있었다. 20년째 보고 있던 이야기였다. 20년 전에, 처음으로 발표자료 마지막 페이지에 나오는 지구 이곳저곳에 있는 사람들이 전화를 들고 있는 그림을 만들던 때가 생각이 났다. 연구 사업 마다 초점을 맞추는 부분이 조금씩 다르고, 우리가 그 동안 새로 찾아낸 것들이 많이 있어서 내용은 달라졌다. 그렇지만, 이 마지막 페이지만은 수십 번, 수백 번 똑같이 사용되고 있었다. 회선망 사업자가 없어도, 수백 개씩 기지국과 전선을 깔아 놓지 않아도 누구나 세계 누구와 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고 있는 통신 혁신 기술.
 
 “은정이한테 안부 전해 주세요. 야, 전에 정말 요만할 때, 정말 어릴 때 한 번 봤었는데.”
 
 공항에서 마지막으로 광욱 박사는 딸아이에게 안부를 전해 달라고 했다. 나는 그러겠다고 했다. 그리고 비행기를 타러 들어가는 데, 내 뒷모습을 보던 광욱 박사의 표정은 다시 돌아오지 못할 전장으로 최후의 용사를 보내는 망해가는 나라의 대신처럼 보였다.


 
 3.
 
 비행기 안에서는 아주 느리지만 무료로 인터넷을 쓸 수 있었다. 자꾸 끊겼다 연결되었다 했는데, 연결 될 때 마다, 핀란드 관광 홍보 광고를 한 번씩 봐야 했다. 기본 내용은 핀란드 관광청에서 만든 익히 보던 광고와 같았다. 거기에 항공사에서 바꾸어 꾸민 것이 조금 섞여 있는 것이었다. 원래 크리스마스 캐롤 같았던 배경 음악이 빠르고 춤추기 좋은 전자 음악으로 바뀌어 있었고, 광고가 끝날 때,
 
 “6시간 만에 만나는 유럽-”
 
 이라는 말이 나온다. “6시간 만에 만나는 유럽”이라는 말이 나오는 부분에서는, 핀란드 헬싱키행 항공편은 북극 항로로 가로 질러 가기 때문에 의외로 아주 가깝다는 이야기와, 면세점에서 향수와 가방을 많이 사라는 이야기, 두 가지 내용을 0.6초 단 한 장면으로 보여주려고 애를 쓰고 있었다.
 
 비행기 안에서 인터넷을 쓰는 것은 느리고 답답하고, 유럽을 6시간 만에 만난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되새김 당하는 것이었다. 그렇게 인터넷을 쓰자니, “6시간 만에 만나는 유럽”이라는 그 광고를 여섯 시간 내내 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그래도 나는 계속 그걸 붙들고 있었다. 애엄마가 소식을 남기는 곳들, e메일 사이트들을 한 바퀴 돌았다. 돌고 나면, 그렇게 한 바퀴 도는 데 지나간 시간 사이에 혹시 한 두 마디라도 더 소식이 들어오는 지 싶어 나는 다시 또 인터넷 사이트들을 처음부터 돌았다. 그러다 한 번씩은 며칠 전, 몇 주 전의 이야기를 읽어 보면서 시간을 또 보내기도 했다.
 
 처음에는 그러다보니 곧 졸려서 잠을 잘 수 있을 듯 했다. 하지만, 막상 화면을 끄고 눈을 감으면 점차 졸리운 느낌은 사라졌다. 평소에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가서 불을 모두 끄고 누워 있으면 잠이 잘 오지 않았다. 허옇게 아무것도 없는 천장이 밤에 자리에 누워서 보면 검게 보이는 데, 그러면 사방 조용하기만 한 것이, 멀리서 어디서 누가 어디로 가는 지도 모르는 차 소리만 들렸다. 오래도록 누워 있어도 잠이 들 수 없었다. 나는 그게 집에 너무 아무도 없어서 잠이 안 오는 것이라고 생각 했다. 그러니 비행기 안 자리에 앉아, 여섯 시간 만에 유럽을 만나러 가는 사람들과 앞뒤 빽빽이 줄지어 앉아 동시에 잠에 빠져들고 있으면, 썩 잠이 잘 올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아마, 거기까지는 맞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처음에 졸렸던 이유는 바로 앞뒤에서 자고 있는 사람들이 가득했기 때문이라는 것이 맞았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은정이 덕택에 지금 핀란드로 가는 길이었다. 은정이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핀란드어로 나오는 통신 연구 과제 공고라든가, 핀란드 통신 기기 회사 연구 사업에 참여해 본 경험이 많은 대학 교수가 누구인지 알아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따져보자면야, 은정이가 핀란드어 번역을 몇 번 해줬다는 게 고마운 것이 아니라, 오랜만에 내가 연락하는 것을 듣고 도와 줬다는 것부터가 생각해 볼만한 일이었다.
 
 “여기 몇 년 있었다고, 공짜로 이것저것 번역해 달라고 온갖 거 들이 미는 사람들 정말 너무해. 그런 거 하라고 번역하는 사람도 있고, 회사도 있는 거 아닌가? 한국어, 핀란드어 둘 다 할 줄 안다고 그저 일이 거저인 줄 알고 막 부탁하는 사람들 정말 많은 거 알아? 처음에나 좀 고마워하지, 그러다가 보면 나중에는 고마운 지 어떤지도 몰라.”
 
 은정이 친구가 은정이랑 그렇게 통화 하는 것을 한 번 들은 기억이 났다. 원래 은정이와 내가 별로 친근한 부녀 관계인 편도 아니었지만, 애엄마가 베트남으로 가고부터는 별 말도 하지 않고 지내게 되었다. 그 무렵 내 얼굴 표정에는 항상 어쩔 줄 모르는 사람의 겁먹은 기색이 있었던 것 같다. 생활비와 애엄마에게 보낼 돈과 집 사느라 업은 대출금 갚을 돈을 합해보면 잔고에서 조금 모자랄 때가 있었는데, 그런 때는 갈수록 점점 잦게 찾아 왔다.
 
 그렇다고 중학생이던 은정이와 무슨 다른 좋은 기억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애엄마가 다른 직업을 가지지 않고 집에서 살림을 했는데, 그게 이유라고 나는 은정이와 지내는 것도 “원래는” 애엄마의 생활이라고 생각하고 살았다. 애엄마가 베트남에 가기로 한 이후에, 애들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그걸 두고 이야기하고 이리저리 말 둘러 대다가 욕도 들어 먹고 따지기도 하고 그랬는데, 내가 괜히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어떤지, 은정이는 그때부터 나를 점점 멀리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나는 집을 팔고 다른 곳에 있는 더 좁은 집으로 이사를 가야겠다고 말을 했다. 주택 대출금을 없애고 복잡하게 막아 넣어야 하는 청구서들을 깔끔하게 떨어지게 하기 위해서는 그 방법 밖에 없다고 생각 했다. 은정이와 같이 살 이사할 집을 찾아 매번 퇴근 후에 전철을 타고 다니며 여기저기 집을 보다가 그나마 적당한 곳을 찾았을 무렵에, 은정이는 핀란드로 떠나는 유학 프로그램에 지원했다고 말했다.


 나는 몇 번 마음을 잡고 은정이에게 무슨 생각으로 왜 핀란드로 유학을 가려고 하는 지 차분하게 물어 보려고 했지만, 은정이는 별 뾰족한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은정이는 그 학기가 끝나자마자 핀란드로 갔고, 나는 더 좁고 더 먼 집으로 이사갈 수 있었다. 그 후로는 대출금도 정리 되고, 돈도 아주 급하게 되는 일은 없어 졌다. 은행에 다니는 제수의 말로는 엉망이 된 내 신용 기록도 아주 조금씩은 나아지는 것 같다고 했다. 은정이는 오픈 소스 교육 재단에서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가 돈을 보내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은정이는 처음 말을 꺼낼 때부터, 떠나기 전까지 몇 번이나 그 말을 했다. 나는 은정이가 가기 사흘 전에 필요할 때는 아무 때나 쓰라고 내 신용카드 하나를 주었는데, 은정이는 지금껏 한 번도 그 카드를 쓰지 않고 있었다.
 
 은정이 생각을 하면, 애엄마 생각이 났고, 애엄마 생각이 나면, 또 어머니, 아버지 생각도 났다. 그러다 보면, 또 애엄마가 무슨 소식을 남기지 않았나 싶어 인터넷 화면을 보고 싶었다. 무슨 뾰족한 대단한 수가 날 희소식이 올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나는 화면을 살펴보았다. 그러다 다시 시간을 보내느라, 은정이와 애엄마와 같이 살 던 때 찍은 사진들이나, 그 때 썼던 일기들을 몇 번씩 다시 확인하기도 했고, 또 그러는 사이에 새 소식은 없나 싶어 다시 또 인터넷 사이트 이곳저곳을 돌았다.
 
 애엄마가 남긴 소식은 며칠 전에 보낸 e메일 내용대로, 장모님이랑 병원에 갔다는 이야기가 마지막이었다. 2주일에 한 번씩 꾸준히 반복되는 것이었다. 장모님께서는 베트남에서 이민 오신 분이셨지만, 애엄마와 내가 결혼하기 전에 벌써 베트남으로 다시 돌아가신 상태였다. 결혼식 할 때 한번 한국에 다시 오시고 그 후로는 두번 다시 한국에 다시 오신 적은 없었다. 그러다 장모님께서 몸이 불편해 지시게 되자, 어쩔 수 없이 애엄마는 베트남에 돌아가서 장모님을 보살펴야겠다고 했다. 애엄마의 형제자매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다들 사정이 있었다. 우리는 그 사정이란 것들과 우리의 사정도 만만하지는 않다는 점에 대해서 이야기를 많이 하기는 했지만, 결국 다른 수를 찾기 어려운 일이었다.
 
 여섯 시간은 지났고, 나는 유럽을 만나게 되었다. 비행기가 내리기 얼마 남지 않을 때가 되어서야 나는 발표 자료를 다시 한 번 돌아본다고 부산을 떨었다. 나는 발표할 내용을 모두 외워 두고 있었는데, 출발하기 전에 녹음해 둔 것을 다시 반복해서 들으면서 몇몇 부분들을 반복해소 조용히 중얼 거려 보았다. 식사를 나눠 준다고 좀 시끌시끌한 때였지만, 옆 자리에 앉은 사람이 그 말을 들리는 지, 나를 힐끗 보았다. 나는 말을 멈추고 그 사람에게 말했다.
 
 “어휴, 죄송합니다. 연습하는 게 있어서요. 이제 그만 하죠.”
 
 그 사람은 웃으며 좌우로 손을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계속 하세요. 그렇게 자기가 말한 거 녹음해서 들어 보면서 연습하는 게 참 좋은 방법이죠. 저는 옛날에 연기 수업에 나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연습 할 때, 거울을 보면서 연습하고 손동작이나 표정 연습해 보고 그랬는데, 그렇지만, 목소리는 자기가 자기 목소리 들으면 좀 다르게 들리잖아요. 그래서 정작 말하는 내용이 이상하게 들리는 걸 모르고 연습을 한 거더라고요. 그래서 녹음을 해서 진짜 자기 목소리를 들어 보고 들어 보기에 어떻게 들리는 지 아는 게 정말 중요하더라고요.”
 
 핀란드 헬싱키에 도착하니, 꼭 폭풍이라도 몰려와서 먹구름이 깜깜한 것처럼 사방이 어둑어둑했다. 그렇지만 비행기가 시간을 끌며 늦는 일도 없었고, 하늘에 정말로 구름이 낀 것도 아니었다. 이제 정오가 지난 지 그렇게 많이 되지도 않은 오후였는데, 해가 벌써 한참 기울었기 때문에 어두워진 것이었다. 나는 몇 번씩 시계를 다시 들여다봤다. 위도가 너무 높은 곳이라서 낮이 짧고 밤이 아주 길기 때문에 벌써 밤이 오려고 그러는 것이었다. 창 바깥은 해가 지는 어두운 기색이 계속 퍼져 오고 있었고, 공항 안은 전등 빛으로 더 환해지고 있었다. 분명히 환한 낮이어야 할 시각이었는데, 나는 밤 시간을 다니고 있었다. 그러니까, 괜히 꼭 원래 흐르던 시간을 벗어나서 어디 세상 몰래 어긋나 있던 이상한 세계에 잠깐 잘못 흘러들어 온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은정아, 야, 정말 반갑다.”
 
 “은정아, 잘 지냈어?”
 
 나는 그렇게 말을 녹음 했다가 다시 들어 보았다. 일부러 천천히 걸어서 비행기에서 나오는 사람들의 무리가 흘러 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주위에 사람이 없을 때 여러 가지로 몇 번씩 녹음해서 다시 들어 보았다. 경험이 많고 안정감이 있고 신사다운 어른의 굵직한 목소리라든가, 뭐든 도와 줄 수 있고 아무것도 거슬릴 것은 없는 자상하고 친근한 목소리를 내어 보려고 했다. 내 목소리가 그렇지는 않다는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런 방향으로 흉내라도 내 보려고 했다. 그렇지만, 녹음 되어서 들리는 것은 얼뜨기 같고 별 믿음 가지 않는 목소리에 호흡도 불안한 목소리였다.
 
 나는 잠깐 목소리를 녹음하는 것을 추스리고 조용히 다시 들어 보느라 멈춰 섰다. 그러다가 나는 면세점에서 산타를 태운 썰매를 끄는 순록 인형을 하나 샀다. 은정이한테 혹시 한국에서 뭐 사갖고 가서 전해 주면 좋을 것 없냐고 e메일을 보냈는데, 은정이는 아무 답장이 없었다. 뭘 선물답게 사가면 좋을 지, 혼자 백화점을 기웃거려 보기도 하고, 연구소의 젊은 직원들에게 물어 보기도 했지만 적당한 것은 없었다. 쓸데없이 비싼 것을 사면 지금 자기 처지를 놀리는 것이냐고 은정이가 버럭 화를 내면서 엉엉 울어 버릴 것 같기도 했고, 그렇다고 해서 별 물건 보는 눈도 없는 내가 잡다한 뭘 골라 간다고 하면 그대로 비웃음거리가 되고 곧 쓰레기통에 버려질 것 같았다.
 
 순록 인형을 보니까, 은정이가 루돌프 사슴 코가 어떻다는 노래를 유난히 어릴 적에 좋아 했다는 생각이 났다. 헬싱키 공항은 입국하는 방향으로도 면세점에 들를 수 있었는데, 헬싱키 공항 면세점에서 그 때 팔던 인형은 어디에 두어도 적어도 못나 보이지는 않아 보였다. 크리스마스가 올 때 즈음이 되면, 저녁 먹을 시간 즈음을 전후해서 10분이나 15분 정도 이런 노래를 집안에 한동안 틀어 둘 때가 있었는데, 은정이는 흥얼흥얼 그걸 곧잘 따라했다.
 
 “루돌프가 멋있는 거 하게 됐다고 다들 부러워하는데, 왜 그를 모두 사랑했네, 야?”
 
 은정이가 한 말은, 루돌프가 실직자일 때는 코 부분의 피부 트러블을 놀리던 주위의 다른 순록들이, 루돌프가 좋은 직장을 얻자 모두 “사랑”을 한다고 떠든다는 줄거리에 대해 비판을 가한 것이었다고 생각 한다. 은정이는 노래를 부르다가 몇 번씩 마음에 안 든다고 투덜거렸지만, 그래도 그 노래를 제일 좋아하는 듯이 가장 많이 불렀다.
 
 “그러면 썰매 못 끌게 되면 또 놀리는 건가?”
 
 그러다 또 흥얼흥얼.
 
 통관 신고 구역을 통과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광고 전광판에 보이는 것은 핀란드 관광 홍보 광고였다. 뒷모습이 반짝이는 스키복을 입고 있는 여자 두 사람이 남자 한 사람 양 옆에 서서 웃고 있는 모습은 끝까지 나왔다. 자동문 바깥으로 나가 보니, 나를 마중 나와 있는 사람은 무척이나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할머니 두 분이셨다. 공교롭게도 두 분의 옷도 뒤에서 보면 몹시 반짝 거렸다. 통신 기기 회사에서 사람 안내하려고 보낸 분들이었는데, 정말 고마울 만큼 밝게 웃으며 나를 환영해 주셨다. 그렇지만, 두 분이 내 곁에 서서 팔 근육을 자랑하려 하시는 듯이 내 짐 옮기는 것을 도와주실 때에, 나는 좀 겁을 먹은 기분이 들었다. 하기야, 정말 광고에서 보던 그 두 사람이 옆에서 이렇게 붙어 있었어도 방향은 달랐으되, 비슷한 정도로 위축되기는 했을 것이다.
 
 두 할머니들은 헬싱키 관광청에서 일하는 노인 고용부의 대원이라고 하시고는, 통신 기기 회사가 관광청에 부탁을 했기 때문에 나를 마중 나온 것이라고 하셨다.
 
 “여기서 버스를 타고 헬싱키 시내에 있는 기차역 까지 가시면, 랩랜드 연구소까지 가실 수 있으실 거예요. 저희들이 기차표 사는 거랑, 기차 탈 때까지 안내해 드릴 거고, 기차가 도착하고 나면, 그쪽 연구소에서 저희들처럼 안내해 주실 분이 나올 거예요.”
 
 “아뇨. 감사합니다만, 괜찮습니다. 헬싱키 기차역까지만 가면, 거기서 아는 사람이랑 만나기로 했거든요. 여기 버스 타는 데까지만 데려다 주시면 됩니다.”
 
 “아, 헬싱키에 친구가 있나 보죠? 친척이 여기 사시나요?”
 
 “예.”
 
 두 할머니는 영어가 무척 유창하셔서 나보다 훨씬 나았다. 노인 대학 영어 강좌 학생들 중에 가장 실력이 뛰어난 학생 같은 묘한 느낌이 있기는 했지만, 헬싱키 노인 대학 연합회 최고의 솜씨라고 해도 믿을 만큼 말씀을 잘 하셨다.
 
 “친척 누구요? 형제분이나 자매분이 헬싱키에서 직장을 얻은 거예요?”
 
 “제 딸이 핀란드에서 대학교를 다니고 있거든요. 랩랜드에서요.”
 
 “랩랜드면 어디라도 헬싱키에서는 꽤 거리가 될 텐데…”
 
 “장학금 받는 게 있는 데, 다음 학기 장학금을 받으려면 헬싱키에 있는 장학재단에서 면접을 한 번씩 보면서 상담을 하고 그런 게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거랑 시간이 맞아 떨어져서, 딸아이가 면접 보고 돌아 가는 걸 하루 늦추고 저랑 같이 가기로 했죠.”
 
 “아, 그렇지. 거기가 핀란드 중북부 지역인데, 통신기기 회사들이 세운 연구소가 몇 군데 있어서 대학이 모여 있지.”
 
 공항에서 시내로 들어가는 버스를 탔을 때는 벌써 사방이 깊은 밤처럼 깜깜해져 있었다. 다시 또 시계를 봤지만 아직 저녁시간도 채 되지 않은 때였다. 그래서 그래 보였는지, 버스는 마치 심야버스처럼 정류장에 오래 서서 온갖 나라에서 온 손님들이 가득 찰 때까지 한참 가만히 있었다. 그러는 동안, 두 할머니들은 나에게 끊임없이 갖가지 이야기들을 내가 곤란할만한 그 선 바로 앞에 몰릴 때까지 계속 물어 보았다. 또 그러다 한참 동안 둘이서 핀란드 말로 즐겁게 웃으며 내가 도무지 알 수 없는 이야기들을 떠들기도 했다.
 
 “오랜만에 따님 만난다니 기분 좋으시겠어요. 따님이 뭐 선물 같은 거 사오라고, 계속 전화하고 기다리고 그러지 않아요?”
 
 “예……”
 
 나는 그리고 조금 더 말을 하려고 머뭇거렸다.
 
 “이제 가나 보네요.”
 
 다른 할머니께서 말씀하셨다. 버스가 출발한다는 것이었다.
 
 헬싱키 시내로 들어서자, 시내 길마다 전구를 엮어 드리워 놓은 장식들이 노란 빛을 뿜고 있었다. 공터에는 얼려 놓은 빙판이 있는 곳이 몇 군데 있었는데, 환하게 빛을 밝혀 두고 아이들이 스케이트를 타고 놀거나 아이스하키를 하고 있거나 했다.
 
 버스를 타고 잠깐 지나는 동안이었지만, 깜깜한 바깥 풍경 중에 하얀 빙판이 있어서 빛을 받고 있으니, 꼭 그 빛나는 것이 어디 붕 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모습을 신기하게 보는 것은 나 뿐이 아닌지, 프랑스 즈음에서 온 학생들이 한 무리 버스 안에 있어서 창 바깥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서로 떠들어 대고 있었다. 나는 그 학생들의 모습을 유심히 보면서, 은정이가 저 비슷한 차림이면 어떤 모습일까 계속 생각해 보았다. 머리카락은 좀 더 길게 길렀겠지, 저렇게 무릎 정도까지 오는 외투를 입었겠지. 쉽게 알아 볼 수 있을까.


 너무 자세히 나에 대해 캐묻는 것에 대해, 한 할머니가 다른 할머니에게 주의를 줄 무렵, 나는 은정이가 보낸 문자 메시지를 봤다.
 
 “오래 걸리나 보네. 역 앞 광장 가운데 쪽에서 기다리고 있을게요.”
 
 나는 문자 메시지가 온 시각을 보고, 다시 한 번 내용을 읽었다. 전화기를 닫았다가 열어서 내용을 다시 한 번 더 읽었다.
 
 버스가 기차역 근처에 도착했을 때, 버스는 기차역 근처의 호텔들을 돌며 사람들을 내려 주느라 역앞에 서기 전에 근처의 골목들을 뱅그르 돌았다. 나는 내가 앉은 쪽 창문과 반대쪽 창문을 번갈아 보면서 역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고, 역 앞의 광장이라는 게 무엇을 말하는 것인지 보려고 애썼다. 버스가 골목을 돌아 나갈 때 마다, 나는 언뜻언뜻 보이는 광장 중앙의 사람이 혹시 은정이는 아닌가 싶어 얼굴을 보려고 기웃거리기도 했다.
 
 할머니들은 다시 한번 크게 웃어 주는 인사를 보내 주었다. 나는 내리자마자 흩어져 바삐 역이나 호텔 쪽으로 걸어가는 많은 버스 승객들과 함께 기차역 앞에서 내렸다. 곧 다시 버스도 돌아 나가고, 나는 혼자 서서 역 앞의 광장을 두리번거렸다.
 
 광장 한 가운데에는 스케이트장이 있었다. 스케이트장 위에 쌓인 눈을 치워둔 것이 스케이트장 둘레에 둔덕이 되어 쌓여 있었다. 그렇게 해 놓으니 눈 쌓인 깊은 산속 한 구석을 잠깐 덜어 내어서 도시 한 가운데에 잠깐 올려 둔 것 같았다. 사방에서 차들이 지나가는 소리가 들리고, 벌써 전등을 가득 밝힌 건물들에 오가는 사람들이 어디에나 많은 데, 그 가운데 스케이트장에서 이리저리 움직이는 아이들은 꼭 소리도 없이 빙글빙글 움직이는 것만 같았다. 광장 가운데에는 따로 등이 없어서, 스케이트장의 빙판은 더 밝아 보였고, 그 빛을 받아 아이들이 입고 있는 붉고 푸른 옷들은 더 뚜렷하게 색색깔로 어울어지며 움직였다.
 
 나는 그 움직이는 아이들 중에 은정이를 찾아보려고 했다. 은정이 정도 되어 보이는 체구의 닮은 여자 아이가 금방 눈에 뜨이기는 했는데, 지금 은정이 나이는 아니었다. 어떤 아이는 모자를 깊게 쓰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언뜻 언뜻 보이는 모습이 은정이 같아 보이기도 했다. 어떤 아이는 소리를 내어 웃고 있었고, 어떤 아이는 막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는 듯한 표정이기도 했다. 나는 그렇게 먼 곳에 눈을 두고 걷다가 두어번 자빠질 뻔도 했다. 광장에는 눈이 덜 치워진 곳이 있었다. 주춤했지만, 나는 좀 더 가까이서 찾아 봐야겠다고 생각 하고, 너 빨리 중앙으로 걸어가려고 했다.
 
 그때 누군가 내 앞을 막아섰다. 어떤 여자였다. 다시 눈에 미끄러져 부딪힐 것 같아 나는 멈칫 했다. 미안하다고 말하려고 보니, 동양인이었다. 머리카락이 까맣고 그래서 얼굴은 더 희어 보였다. 그 여자는 말은 하지 않고 그냥 나를 보기만 했다. 나는 누가 왜 내 앞에 서서 나를 이렇게 보고 있는가 싶었다. 두 발을 가지런히 모으고, 두 손은 주머니에 넣은 채, 똑바로 서서 내 앞에 가만히 있었다.
 
 “오래 걸렸네. 공항에서 여기까지 별로 안 먼데.”
 
 그 여자가 말했다. 나는 다시 그 얼굴을 찬찬히 보았다. 그제야 나는 옛날 얼굴과 닮은 표정들을 찾아 볼 수 있었다. 바로 은정이였다.
 


 4.
 
 은정이와 기차를 타고 랩랜드의 통신 기기 회사 연구소가 있는 지역까지 가는 길은 그날 오후, 저녁 내내 이어졌다. 지금 돌이켜 보는 이야기지만, 은정이를 그렇게 만난 뒤에 무슨 말을 어떻게 제일 먼저 했는지 생각도 나지 않는다. “정말 반갑다”, “잘지냈어?” 이런 말을 맨 먼저 한 것 같지도 않다. 은정이가 뭐라고 묻는 말에, “그래, 그래, 응, 응” 하고 말했던 것이 처음 말했던 것이었는지, 아니면 늦게 온 건 지, 사람을 잘 못 찾은 건 지 하는 말에, “어, 그래, 미안하다” 하고 말했던 것이 처음 말했던 것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많이 기다렸어?”
 
 “아니. 같이 오늘 면접 본 애들도 아는 애들 있거든. 개들이랑 나도 같이 놀다가 뭐…”
 
 그런 말을 했던 것이 본격적으로 처음 나눈 말이었던 것 같기는 하다. 그렇지만 무슨 말을 먼저 꺼냈고 어떻게 기차역에 들어섰는지, 세세한 내용들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핀란드어로 말하면서 표를 사는 은정이를 보고, 말없이 가만히 서서 기차를 기다리고, 거기서 시끄러운 소리들을 멍멍하니 듣고, 잠깐 눈발이 날리는 것을 보고 “눈 온다”라고 한 마디를 하고, 다시 또 조용히 있다가 드디어 한참 만에 기차를 타던 것, 그런 기억들이 날 뿐으로, 말 내용이 정확히 생각나는 것은 없다.


 기차에 타자, 은정이는 짐을 싣는 곳에 들고 온 것들과 가방을 두라고 했다. 그리고는 자기가 챙겨온 자물쇠로 가방을 그대로 열차 선반에 묶고 잠가 버렸다. 그리고 다시 한참 떨어진 열차 앉는 자리로 옮겨 와 앉았다. 나는 그제껏 은정이에게 언제 순록 인형을 주어야 하나 싶었는데, 그렇게 짐꾸러미를 다 묶어 놓으니, 나는 더 미뤄두게 되었다.


 “학교는 다닐 만해? 너무 힘든 건 없고?”
 
 “뭐, 그렇지 뭐… 무슨 학교 다니는 게 그렇게 힘들고 뭐 그럴 거야 있겠어.”
 
 그 정도 말을 몇 마디 더 나누었을 뿐, 열차가 도착할 때 까지 우리는 별 이야기를 더 하지 않았다. 멀리까지 와서 머물면서 면접시험도 보고 했던 것이 피곤했는지, 은정이는 곧 열차 자리에서 자기 시작 했다. 나도 잘까 싶어서 잠깐 눈을 감고 있기도 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인터넷 화면만 누르면서 비행기를 타고 온 탓인지, 머리가 약간 아픈 듯한 것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나는 잠을 자는 것을 포기하고, 다시 전리층 공명 장파 통신 연구 사업에 대한 발표 자료를 꺼냈다. 간단하게 내용을 설명하고, 한쪽에서 신호를 보내고 멀리 떨어진 다른 곳에서 신호를 받아서 보여주는 시연을 한다. 보내는 쪽과 받는 쪽의 가운데에는 중간감지소를 두어서, 신호가 잘 전달되고 있는지, 어떤 식으로 신호가 중간에 망가지는 것을 막아내는 지 확인해서 그 원리도 보여 준다. 한 페이지, 한 페이지 넘길 때마다 나는 은정이의 자는 얼굴을 보았다. 별 표정은 없었다. 오른쪽 눈 아래에 있는 작은 점이 예전에도 있었던 것인 지 생각을 해 본다. 아직도 어릴 때 그 얼굴이 남아 있다는 생각을 한다. 갓난아기였던 은정이를 본 후에, 언제쯤부터 이 아이의 표정에 내가 은정이 얼굴이라고 생각하는 그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는지도 생각해 보았다.
 
 진작에 밤이야 찾아 왔지만, 열차는 정말 밤이 깊어서야 도착했다. 은정이는 깨어나서 눈을 비비다가 내가 펼쳐 놓고 보고 있는 걸 보았다.
 
 “중파 통신, 이거 옛날에, 옛날에도 하던 거 아닌가? 나 어릴 때도 본 거 같은데.”
 
 “응? 어?”
 
 나는 맞다고 대답해 줬다. 그러고 나서, 그동안 계속 고치고 더 좋게 만들어서 이제 상용화 쪽으로 알아보고 있는 거거든, 하고 더 설명을 하려는데, 은정이는 벌써 짐을 묶어 둔 곳으로 가고 있었다. 나는 늘어놓은 자료를 챙겨서 은정이를 뒤따라갔다.
 
 열차가 도착한 곳은 랩랜드, 숲 속 한 가운데를 밀고 만들어 낸 마을이었다. 오기 전에 내가 상상한 모습은 검은 윤곽을 높다랗게 벌여두는 키가 큰 침엽수 숲이 빽빽이 가득하고, 그 사이에 눈 덮인 통나무집들이 옹기종기 자리 잡고 있는 모습이었다. 흰 눈이 쌓이고 나무 그늘이 덮인 가운데에 있는 집 창문에서는 아늑하게 밝혀둔 불빛이 눈 위로 새어 나오고, 굴뚝으로는 벽난로를 지핀 연기가 밤새도록 별들 사이로 올라가는 그런 곳을 나름대로 상상해 보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정작 눈에 보이는 이곳 마을의 풍경은 거대한 난방장치 같았다. 그래도 침엽수림에 눈이 덮여 있는 것은 생각한 것과 닮은 데가 있었다. 풍경이 그래서 그랬는지, 찬기운이 바람도 없는데 휑하니 몰려 온 듯했다. 열차를 타고 온 시간이 그렇게 길지도 않았는데, 훨씬 더 추워진 느낌이 들었다.
 
 “옷 있나? 없지?”
 
 은정이는 방한 자켓을 꺼내어 입으며 나에게 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아니, 여기까지 데려다 줬으니까 괜찮아. 나는 이제 여기서 택시나 뭐나 타고 호텔 가면 되니까. 너 있는 집은 어느 쪽으로 가야돼? 추운데 일단 택시를 불러서 거기 먼저 들렀다가 가면 되지.”
 
 “택시 안 불러도 돼. 내가 차 빌려 놨어.”
 
 은정이는 역사 뒤쪽으로 걸어 나갔다. 주차장이 있는 쪽이었다.
 
 “그러면 너 피곤할 텐데 좀 쉬어. 내가 운전할게. 여기도 오른쪽 차선으로 달리고 왼쪽에 운전석 있는 거 맞지? 내비게이션만 있으면 뭐 찾아가는 거야 어렵겠어?”


 은정이는 대답을 하지 않고 그저 눈 쌓인 주차장을 걸어 지나가기만 했다. 따라 가던 나는 은정이가 눈 위를 요령 있게 잘 걷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주차장이 어둡기도 해서 몇 번 또 넘어질 뻔 했다.
 
 주차장에 세워져 있는 것은 스노모빌이었다. 일반 도로 주행을 위한 타이어와 설상차로 움직이는 썰매 부분이 같이 달려 있는 것이었다. 스노모빌을 보고, 나는 아무 말 않고 그저 은정이가 운전하는 뒷자리에 탔다.
 
 “확인해 보세요. 이 조그마한 동네에 거기 그 회사 연구발표회인가 한다고, 여기저기서 사람들 많이 왔거든. 미리 예약 안하고 왔으면 방 없을 거 같은데.”
 
 은정이가 한 말대로였다. 호텔이나 가까운 숙소에서는 이미 방을 구할 수 없었다. 이럴 거였다면, 차라리 헬싱키에서 자고 내일 새벽 일찍 여기로 오는 게 차라리 나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2층 쓰는데, 2층에는 방하고 거실하고 있으니까. 하루 이틀 정도는 있을만 할거야.”
 
 은정이가 그렇게 말을 하자, 나는 미안하다느니 하고 대답하려는 데, 은정이가 일단 스노모빌에 타라고 손짓 했다.
 
 “옷 더 두꺼운 거 없어?”
 
 은정이는 그렇게 말하고 바로 출발했다.
 
 달리면서 바람이 불기 시작하자 바로 확 추워지기 시작했다. 내 나름대로는 꽤 두텁게 입었다고 생각했는데도, 잠옷 바람인 나를 어떤 거인이 집어 들고 얼음판 위에 지우개질 하듯이 문지르는 모양으로 아주 아주 추웠다. 애초에 기차에서 내리면서, 나는 차에 탈 때 짐을 다시 싣다가 자연스럽게 순록 인형을 은정이에게 주어야겠다고 생각 했다. 그런데, 스노모빌의 짐 싣는 것이 쉽지 않았다. 나는 순록 인형을 엉성하게 한 손에 든 채로, 스노모빌 뒷자리에 앉아 있었다. 바람이 불자 나는 순록 인형을 놓치고 날려 버릴 것 같아서 힘을 주어 꼭 붙들었다.
 
 은정이가 사는 곳은 방이 좀 많은 꽤 큰 집 몇 채가 모여 있는 곳이었다. 은정이는 그 집중에 알 수 없는 노란색 깃발 같은 것이 높게 세워져 있는 한 집 앞에 섰다.
 
 “주인아저씨, 아주머니 아마 주무시고 계실 거거든. 2층으로.”
 
 나는 추워서 그저 곧장 가라는 데로 집 안으로 들어갔다.
 
 은정이가 방을 빌려서 사는 곳이지 싶었다. 하숙이라고 해야 할 지, 자취라고 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거실 소파 있는 곳에 자리를 잡고,
 
 “여기서 자면 되겠다.”
 
 하고 먼저 말했다. 은정이는 부엌으로 들어가 짐 중에 부엌에 둘 것을 풀어 놓고 있었다.
 
 둘러보니, 텔레비전 옆이나 책꽂이 위 같은 곳에 인형이 놓여 있는 것들이 보였다. 옳다거니 싶었다. 순록 인형을 줘도 아주 이상하지는 않겠지. 인형을 주면서, “너 루돌프 노래 좋아하지 않았냐?” 하고 말하면 어울릴 것 같았다. 거기에 이어지는 다른 이야기로 이런저런 말들을 좀 더 풀어 볼 수도 있을 것도 같았다.
 
 나는 짐을 끌러서 다시 순록 인형을 꺼내어 들었다. 나는 일어서서 순록 인형을 들고 은정이가 오기를 기다렸다.
 
 은정이가 말하는 소리가 곧 들려 왔다.
 
 “순록 고기, 이런 거 먹어요? 여기 핀란드에서 순록 먹을 때 스테이크가 피 맛이 좀 많이 나게 요리하기는 하는 데, 남아 있는 게 있네. 이거 데우면 먹을만은 할 텐데. 배 고프죠?”


 
 5.
 
 다음날 아침, 나는 어제 “요즘 잠을 잘 못자서…” 어쩌고 하면서 불쌍한 척 하는 말을 바깥으로 하지 않은 것을 진심으로 다행스럽게 여겼다. 막상 잠이 들자, 나는 그동안 못잔 잠을 보충이라도 하듯이 모두 몰아서 자버리는 것처럼 세상 모르고 잤던 것이다. 게다가 낮이 짧은 겨울철인 탓에 점심 때가 다가오도록 해가 뜨지 않아서 나는 10시, 11시가 되도록 퍼질러져 자고 있었다. 퍼질러져 잔다는 말이 어울릴 만도 한 것이, 나는 소파에서 자다가 내려와 남의 집 거실 바닥에 어디서 난 것인 줄도 모르는 이불을 덮고 있었다. 누가 봤으면, 술 마시다가 길바닥에서 엎어져 자는 알코올 중독자 늙은이와 아무 다를 바 없는 꼴이려니 싶었다.
 
 아닌게 아니라, 누가 보기는 했다. 내 옆을 왔다갔다하면서 부스럭거리는 어떤 사람의 기척을 느끼고 나는 일어났다. 눈에 보인 사람은 머리가 하얗고 조그마한 동양인 노인이었다. 그 사람은 은정이가 사는 곳의 집주인이었다. 노인은 느릿느릿 말하지만 알아듣기 좋은 영어로 말했다.
 
 “은정은 아침에 일어나서 학교로 갔고. 나보고 좀 들여다 봐 주라고 하던데? 은정의 친척이요?”
 
 나는 그렇다고 말했다. 노인은 1층으로 내려오라고 하더니, 핀란드말로 뭐라고 말했다. 그러자 노인의 부인이 트럭에서 내려와 나를 보고 인사를 했다. 부인은 노인 보다 두 배는 더 커 보이는 서양인 할머니였다.
 
 “아침하고 점심을 합쳐서 먹어야겠네. 청어 절임 드슈?”
 
 부부 두 사람은 냄새가 강한 생선요리와 두텁게 썬 빵을 꺼내서 식탁 위에 늘어놓았다. 나는 굳이 이렇게 안 챙겨 주셔도 된다고 웃으면서 말했다. 내가 잠깐 햇빛이라도 쏘이려고 문을 열려고 하자, 할머니는,
 
 “그렇게 입고 있으면서 문 열면 큰일나.”
 
 하고 나를 말렸다.
 
 아침을 먹으면서 나는 두 사람에게, 은정이는 언제부터 이 집에서 살았는지, 학교에서 얼마나 있고 집에는 얼마나 있는지 하는 것들을 물어 보았다. 할머니는 은정이가 친구들과 전화로 떠들며 이야기하는 것을 너무 좋아한다고 했다. 나는 어제, 오늘 본 모습과는 잘 안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어서 몇 번 다시 물었다. 할머니는 그래도 밤늦게 시끄럽게 해서 남에게 폐 끼치는 때는 전혀 없다면서, 불평하는 게 아니라고 했다. 나는 그것 때문에 물어 본 것이 아니라고 했는데, 다시 말하려고 보니, 그러면 뭣 때문에 물어 본 것인지 말할 거리가 없었다.
 
 그 외에도 나는 발표회장이 있는 통신 기기 회사의 연구소 까지는 얼마나 먼지, 거기까지 가려면 어떻게 가야하는 지, 신세 지는 게 죄송스러운 데 다른 머물 숙소는 없는지, 내가 하룻밤 더 여기서 머물러도 되는 지 그런 이야기들도 물어 보았다. 할아버지는 점심 때 지나서 짐승 잡으려고 덫 놓아 둔 곳을 보러 나갈 때, 나도 같이 가서 발표회장은 어디 즈음이고, 어떻게 가는지 알려 주겠다고 했다. 나는 그렇게까지 해주시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러자, 할머니는 너스레를 떨면서, 자기네들에게는 은정이가 고객인데, 고객의 마음에 들기 위해서는 고객의 친척도 잘 대해 줘야 하지 않겠냐고 했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냥 웃었다.
 
 “저게 무슨 깃발인지 알겠소?”
 
 함께 출발할 때, 집에 지붕 높이 걸려 있던 노란 깃발을 가리키며 할아버지가 말했다. 내가 모르겠다고 하자, 할아버지는,
 
 “저게 바로 지금은 없어진 나라인 남베트남의 깃발이오.”
 
 라고 말했다.
 
 이미 지겹게 들었던 이야기인지 할머니는 고개를 흔들었다. 할아버지는 자기가 어릴 때 남베트남이 멸망해서 부모와 함께 탈출했다고 했고, 세계 이곳저곳을 흘러다니며 살다가 당시로서는 중립국 역할을 하던 핀란드에 와서 살게 된 것이라고 이야기해 주었다. 할아버지는 자뭇 기운이 차서 나라가 망할 때의 이야기라든가, 전쟁 때 본 것들 같은 이야기를 했는데, 할머니는 아무래도 못마땅한 지 한숨을 쉬며 이죽 거렸다.
 
 “아니, 그래도 이 동네에 지금 베트남에서 와서 사는 사람들이 몇 명인데, 꼭 저 깃발까지 저렇게 걸어 놓으면 누가 좋아할 거라고.”
 
 할아버지는 가면서도 내내 어떻게 해서 남베트남에서 탈출해서, 어릴 때 여러 나라들을 왔다 갔다 하면서 보고 겪은 일이 무엇인지 끝없이 이야기 했다. 할아버지는 그러다가 마침내 핀란드에 정착했는데, 러시아 경제 위기 때 러시아인 불법 이주민들이 핀란드 국경으로 몰려오면서 온갖 새로운 산업이 일어나던 때에 기회를 잡아서 차츰차츰 먹고 살 터를 닦을 수 있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보니까 여기 핀란드 사람들은 랩랜드 북쪽으로 갈수록 사냥을 많이 하더라고. 그래서 총을 많이 갖고 있는데, 내가 어릴 때부터 총소리라고는 진짜 지겹게 겪었거든. 그러니까, 한 마디로 나는 총이 뭔지, 총알이 뭔지, 아주 어릴 때부터 알았으니까.”
 
 라고 말하면서, 자기가 총포 유통업에 뛰어 들어서 대충 성공할 수 있었다고 이야기 했다.
 
 전쟁 중에 기관총 소리를 많이 들은 것이 사냥에 쓰는 엽총의 성능을 따지는 데 무슨 도움이 되냐 싶었다. 하지만, 스노모빌을 얻어 타고 가고 있는 터라 굳이 따지지 않기로 했다. 할아버지는 할머니를 만나고 아들, 딸이 어디서 뭘 하고 살고 있는 지에 대한 이야기로 곧 넘어 갔다. 계속 듣다보니 정말 맞장구를 치게 되고 재밌다 싶은 이야기도 있었다. 그러자니 끊임없이 긴 이야기를 하는 이 작은 체구의 할아버지는, 이렇게 이야기를 듣게 하는 것으로 스노모빌을 태우고 다니는 값을 물리고 있다고 스스로 생각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할아버지는 한 언덕에서 숲 이곳저곳을 돌아보고 다녔다. 나도 따라다니면서 할아버지가 동물 잡는 덫을 놓아둔 풀섶이나 나무 둥치 뒤를 같이 찾아보기도 했다.
 
 “그 연구소 건물까지 가는 중간 즈음이 바로 여기 언덕배기라고.”
 
 할아버지는 덫을 둔 곳들만 한 바퀴 다 돌아보고 바로 연구소까지 가자고 했다.
 
 “아, 그럼 천천히 일 보십시오. 저도 그럼 여기서 이걸 좀 세워 둬야겠네요.”
 
 나는 여기에 중간감지소 장비를 세워 두기로 했다. 여기가 연구소와 집의 중간 정도라면, 오가는 신호가 어떤 모습인지 상태를 중간에서 살펴볼 장비를 벌여 두기에 마땅할 듯싶었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제가 통신 실험을 내일 사람들 앞에서 해 보일 것이고, 연구소에서 통신 신호를 보내고, 집에서 신호가 잘 오는 지 받아 볼 것인데, 여기에서 중간 상황을 측정해 볼 장비를 둘 것이라고 설명 했다.
 
 할아버지는 그냥 전화 거는 것과 다른 점이 무엇인지 잘 이해하시지는 못하셨지만,
 
 “여기 가끔 사냥하는 사람들이 지나다니거든. 그러니까 곰이나 짐승으로 보여서 총 맞지 않게, 사람 소리를 내라고.”
 
 하고 혼자 있을 때 주의해야 할 점을 알려 주셨다.
 
 “사람 소리요?”
 
 “크게 말하는 소리를 내든가, 아니면 노래 같은 걸 부르든가 하라고.”
 
 할아버지가 덫을 보려고 가시고 나자, 눈이 하얀 것만 보이는 숲은 곧 극히 조용해 졌다. 멀리서 울려 퍼지는 이상한 새 울음소리가 한 번 들렸을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실어온 짐에서 중간감지소 장비와 안테나를 세우면서, 하늘을 보았다. 아무것도 없는 파란 하늘이 훤하게 펼쳐져 있었다. 곧 나는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가사가 처음부터 가지가지로 꾸며진 “아련한 너의 추억” 어쩌고 하는 노래를 두어 마디 부르다가 어정쩡하게 멈추었다. 나는 다른 노래로 바꾸었다. 남진이 불렀던 “님과 함께”를 불렀다. 가사만 크게 부르다가 나중에는 혼자서 반주로 흘러나오는 기타와 관악기 소리까지 흥얼거리면서 상체를 휘저어 박자를 맞추며 우렁차게 소리쳤다. 세상 멀리까지 그 소리가 퍼져 나가는 것 같은 데, 정말 아무도 없는 것처럼 다른 소리 없이 그 노래 소리만 들렸다.
 
 “멋쟁이 높은 빌딩 으시대지만 유행따라 사는 것도 제멋이지만” 이 가사 부터가 참 제대로 신난다, 라고 감상을 되새길 무렵, 나는 중간감지소의 전원을 연결할 곳이 마땅찮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주위에 인가가 있으면 양해를 구하고 사례비를 준 뒤에 전기를 연결하도록 몇 십 미터 쯤 전선을 가져오기도 했는데, 쓸 곳이 없었다. 이런 곳에서는 아무리 멀리 가서 어디 전기 플러그를 꽂아 본다고 해도 나오는 것은 나무 수액 밖에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노래 부르는 것을 멈추고 시간을 확인 한 뒤에 한국에 전화를 걸어 물어 보기로 했다. 벌써 날이 어두워 가고 있어서 시각은 계속 헷갈렸다.
 
 “광욱 박사, 퇴근 시간 지났을 텐데 미안해. 그런데 이게, 여기 전원 연결할 때가 없는데 이거 배터리로도 잘 움직여?”
 
 “배터리로도 문제는 없는데, 그래도 전원 따로 연결해 두는 게 좋을 텐데요. 이게 연구비 따려고 시연하는 거니까, 중간감지소에서 신호가 어떤 식으로 퍼져 나가는지 하는 게 실제로 통신이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거든요. 어디 무슨 가게나 공중전화라도 없어요?”
 
 나는 김광욱 박사에게 그런 것은 눈 씻고 찾아 봐도 없다는 설명을 하려고 했다. 그런데, 그 때 갑자기 멀리서 총소리가 들렸다. 나는 깜짝 놀라서, “여기, 여기 사람이에요-! 맨-! 퍼슨-! 휴먼 비잉-!” 하고 소리를 지르고, 허둥지둥하다가 다시 큰 소리로 고래고래 “저 푸른 초원 위에” 하고 노래를 불렀다.
 
 “왜 그러세요? 괜찮으세요?”
 
 전화 저 쪽에서는 김광욱 박사가 다시 묻는 소리가 들렸다. 다시 몇 차례 들린 총소리 때문에 김광욱 박사와 말을 하는 것은 이후에도 몇 번 멈추었다.
 
 김광욱 박사는 어쩔 수 없다면 배터리를 써도 문제는 없을 거라고 말했다.
 
 “원래 통신이 연결 될 때까지 무제한으로 반복 탐색을 계속할 수 있는데, 배터리를 쓰면 그렇게 하는 건 못하니까, 백 번만 시도할 수 있게 설정 해 놓죠, 뭐.”
 
 “백번이면 뭐 넉넉하지. 이번 기종에서는 날씨만 좋으면 열 번이나 스무 번이면 충분히 연결 되잖아.”


 “그렇죠. 아니, 뭐 날씨가 비가 오거나 구름이 좀 껴도, 크게 번개가 치거나 전기가 강한 구름이 많거나 하지만 않으면 괜찮을 거예요. 번개 같은 것만 안 치면 뭐, 백번 보다 훨씬 전에 연결 되겠죠. 뭐 날씨 나쁘단 이야기는 없는 것 같던데. 날씨 괜찮죠?”
 
 “일부러 날씨 좋은 날로 골라서 잡는다고 급하게 날짜 잡았잖아. 눈 때문에 아주 눈이 부시게 날씨는 좋으니까, 날씨 걱정은 덜었다고 보면 될 거야.”
 
 김광욱 박사는 그래도 보조 배터리가 하나 있으니까, 만약에 혹시 통신에 실패한다고 해도 보조 배터리로 교체만 하면 또 백번 더 반복해서 탐색을 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래, 고마워.”
 
 총소리도 멎은 지 한참 지났고, 중간감지소도 설치가 다 끝난 것 같았다. 나는 전화를 끊으려고 하는 데, 김광욱 박사가 멈추게 하며 말했다.
 
 “이거, 시연 잘 되겠죠? 왜, 몇 번씩 계속 연습해보고, 실험실에서 수백 번씩 시험해 보고 그럴 때 잘 되다가도, 꼭 많은 사람들 보는 앞에서 시연하려고 하면 그 때 꼭 무슨 문제 생기고 그러잖아요.”
 
 김광욱 박사는 내가 아까부터 계속 고민해서 걱정하고 있던 말을 묻고 있었다. 사실 내가 김광욱 박사에게 한 번 물어 보고, “에이, 걱정 마세요. 잘 될 거예요.” 하는 말을 김광욱 박사로 부터 듣고 싶었다. 그런데 일부러 내 입으로 잘 안될 것 같다느니 어쩐다느니 하는 말을 하기가 싫어서 먼저 묻는 것을 참았던 것이다.
 
 “에이, 걱정마. 잘 될 거야.”
 
 내가 김광욱 박사에게 말했다.
 
 “그렇죠? 잘 되겠죠?”
 
 “실험실에서 잘 봤잖아. 이번에 장비 출력하고. 위상차가 향상 된 게 네 배잖아. 그런데, 이게 사실 공명을 이용하기 때문에 네 배가 되었다는 게, 실제로 성능으로 나타나는 것은 4승배로 나타날 거라고. 저번 장비보다 훨씬 더 강한거야. 날씨를 봐서 갑자기 번개 칠 일도 없고.”
 
 “그래도, 그래도, 만약에, 만약에, 번개 치면?”
 
 “그러면 그냥 번개 그칠 때 까지 기다렸다가 하면 돼. 이게 통신 연결이 잘 안되어서 시간 오래 끌지도 몰라서 저녁 뱅큇하고 순서를 같이 이어 놓았거든. 그러니까, 일단 시험 시작하고, 결과 안 나오면 결과 나올 때 까지 사람들하고 느긋하게 저녁 먹으면서 한 두어 시간 기다리면 되는 거야. 저녁 식사 도중에 시연 결과를 보여 줘도 되도록 순서를 짜 놨거든. 그러니까 뭐 오십 번이고 육십 번이고 재시도 해서 번개 다 그쳤을 대 연결 되겠지.”
 
 “그렇죠. 그렇죠. 괜찮겠죠?”


 “너무 그렇게 겁먹고 그럴 필요 없어. 막말로 이거 시연 잘 안된다고 갑자기 줄 사업을 안 주고, 안 줄 사업을 주겠냐. 지금 이야기 된 걸로 봐서는 일단 여기 통신 기기 회사에서 벌써 사업 줄 계획은 세운 거니까, 설령 시연에서 아무것도 안되고, 우리 장비가 아예 켜지지도 않는다고 해도, 뭐 다 파장 나고 그런 일을 없을 거야.”
 
 “그래도 잘 되는 게 좋잖아요. 이번 거 한다고 고생도 많이 하셨는데.”
 
 “나야 맨날 하던 거고, 급하게 새 사업에 제안한다고 광욱 박사가 고생 많이 했지.”
 
 김광욱 박사는 마지막으로 발표 내용과 장비 사용하는 법을 다시 같이 챙겨 보자고 했다. 우리는 처음부터 찬찬히 한번 더 따져 보았다.
 
 처음 완전히 새로운 무선 통신 기술이 있다고 해서, 전리층 공명 장파 통신 논문을 봤던 때가 생각이 났다. 그때는 조교 수당을 두 배로 받을 수 있다고 조교장이 된 학생을 부러워하면서 한 며칠 보냈던 것이 기억났다. 적어도 그때보다는 지금 우리 장비가 비교할 수 없이 많이 개량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해가 지려고 하는 하늘은 분명히 똑똑하게도 맑았다. 다시 돌아온 할아버지와 함께 연구소로 출발하면서, 나는 계속 “걱정할 것 없다” “걱정할 것 없다” 하고 마음속으로 중얼 거렸다.
 
 연구소에 도착한 후 나는 통신 기기 회사쪽 직원들에게 인사를 했다. 내일 일정을 확인하고, 내가 준비한 장비들을 둘 곳과 발표 자료가 잘 보이는 지 확인해 보았다. 별도의 안내 직원이나 장비 담당이 없고, 친절한 대학원생 몇 명이 그 역할을 하고 있었다. 학생들이 신기해하면서 장비를 쳐다보고, 불필요한 정도로 무슨 대단히 높은 사람 모시듯이 나를 친절하게 대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그럴 필요 없이 내가 직접 하겠다고 말했다. 학생들에게 어느 학교를 다니느냐고 물었다. 은정이와 같은 학교의 대학원 학생들이었다.
 
 나를 기다려 주던 할아버지와 함께 돌아가려는 데,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시험해 보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일 시연 전에, 같은 장소에서 같은 장비 설정으로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잘되는지 보는 거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먼저 가시라고 말했다. 나는 재주껏 다른 사람에게 얻어 타고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나는 속으로 길은 알고 있고, 거리가 아주 멀지는 않으니까 정 안되면 걸어가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할아버지는 내심 불안한 지 머뭇머뭇 하다가,
 
 “아까 덫 놓아둔 것 봤던 거기서, 부르던 노래가 참 듣기 좋던데, 무슨 내용이오?”


 하고 묻는 말 몇 마디를 더 하다가는 혼자 돌아갔다.
 
 나는 연구소에 통신 장비를 가동 시키고, 일반 출력으로 신호를 보내도록 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서, 보낸 신호가 잘 잡히는지 보면 될 터였다. 중간감지소에서 관찰되는 신호를 받아 보면, 생각했던 대로 모든 것이 잘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도 나는 혹시 몰라서 중간감지소까지 가서 한 번 직접 거기서는 어떻게 나타나는 지 한 번 측정을 해 볼 필요도 있겠다고 생각 했다. 중간감지소는 배터리로 움직이고 있어서 다 쓰고 나면 꺼야 했는데, 원격으로 끄고 켜는 것도 잘 되는 지 다시 확인하고 싶기도 했다.
 
 나는 걸어서 중간감지소가 있던 곳까지 갔다. 한 30분쯤 가면 될 줄 알았는데, 밤길에 눈이 깊게 쌓인 곳에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 생각 보다 어려웠다. 나는 두 시간 가까이 걸어야 했다. 눈에 발이 빠지고 다리가 빠지고 바지가 빠졌다. 바람이 많이 부는 편은 아니었다. 그래서 추운 날씨이기는 했지만 얼굴이나 몸이 춥다는 생각은 크게 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에 빠져 젖은 발은 미치도록 시려웠다. 무슨 동상에 걸려 어떻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싶어 무서울 만큼 발이 추웠다. 그렇지만, 맑디 맑은 하늘에 가득한 별은 아주 보기 좋았다. 또 이렇게 맑은 하늘에 많은 별을 본 것이 몇 년 전, 언제 즈음인지 한 번 돌이켜 보면서 나는 한동안 밤하늘을 쳐다보기도 했다. 생각대로 중간 감지소도 잘 움직이고 있었고, 마지막 시험도 잘 이루어졌다.


 집에 돌아오니, 은정이가 벌서 와 있었다.


 “함부러 그렇게 걸어오면 안 되는데.”
 
 은정이는 내 꼴을 보더니 그렇게 한 마디를 했다. 나는 제대로 대답을 못했다. 나는 오늘 다른 사람들을 대하던 것과 비슷하게 농담 섞어 웃으면서, 은정이에게 “야, 너는 아빠한테 인사를 정답게 못하고 대뜸 하는 말이 그게 뭐냐” 하고 말을 꺼낸 뒤에, 그 웃는 웃음에 달아서 말을 길게 붙여 보면 어떤가 하는 생각도 했다. 그렇지만, 나는 은정이에게 무슨 속임수를 쓰는 것 같아서 그러지는 않기로 했다. 그러다가 잠깐 돌아 서면 어떻게 하는 것이 더 맞는 것인 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은정이와 나는 거실에 같이 앉아 있었다. 은정이는 텔레비전을 켜 놓았다. 은정이는 텔레비전을 이리저리 돌리더니 핀란드어 방송이 나오는 채널 몇을 보다가 이내 영어 방송이 나오는 채널로 맞추어 두었다. 영국에서 보내는 위성 방송 뉴스였다. 나는 눈치 채지 않을 정도로 살짝 은정이가 어떤 표정으로 얼마나 관심 있게 뉴스를 보는 지 살펴 보면서, 계속 그 방송을 보았다. 무슨 사고가 어디서 생겼고, 요즘 우주 개발 계획은 어떻게 진행 되고 있고, 가전 로봇 시장에서 전자 업체들은 어떻게 겨루고 있는지 하는 이야기를 텔레비전 뉴스는 계속해서 늘어놓았다. 나는 아주 가끔씩, 뉴스를 보다가,
 
 “저런.”
 
 혹은,
 
 “야, 참. 저건 너무 심하다.”
 
 하는 말을 잠깐씩 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은정이는 아무 말도 없었다. 했던 뉴스가 두 번 쯤 반복해서 지나가고, 내가 광고에 대해서도,
 
 “영국 방송 보면 이런 광고가 많더라.”
 
 하고 별 통찰력도 없으면서 넘겨짚는 말을 하는 것도 할 만큼 하자, 은정이는 도저히 답답했는지, 갑자기 나를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그래서, 내일 하시는 거 그건, 뭐 잘 될 거 같아요?”
 
 “어.”
 
 다시 말이 없어지자, 은정이는,
 
 “그게, 그게, 뭐예요?”


 하고 물었다.
 
 “전리층 공명 중파 통신이라고… 이게 상용화가 되면 기지국이나 별도 망이 없어도 누구나 휴대용 전화로 무선으로 누구한테나 연결할 수 있게 되는 거거든. 그러면 큰 회사나 나라에서 갖고 있는 통신망을 이용 안하고도 누구든지 통신을 할 수 있게 되는 그런 거야.


 이중 시장이라고 해서, 통신 기기 만드는 회사들은 소비자들한테 전화나 컴퓨터 같은 통신 기기를 팔기는 팔지만, 또 동시에 그 기계가 이용해야 되는 통신망을 갖고 있는 통신 회사가 자기 물건을 채택 하는 것도 중요하거든. 그러니까 통신 기기 회사들은 소비자가 고객이면서, 또 통신 회사도 고객이라고. 통신 기기 회사는 계속해서 통신망 회사 눈치를 봐야 된다고. 이게 이렇게 섞여 있으니까 고민할 것도 많고, 경쟁구도도 좀 이상해지고 되게 귀찮아 지는 게 많은데, 그런데, 만약에 이게 상용화 되면, 통신 기기 회사는 통신망 회사에서 자유로워지는 거지. 통신망 없이도 아무하고나 전화를 할 수 있게 되니까. 통신 기기 회사는 바로 소비자한테만 신경 쓰면 된다고.”
 
 나는 신이 나서 떠들었다. 그러나 은정이는 점점 더 재미없어 하는 것 같았다. 나는 어떻게 흥미를 끌어 보겠다고, 통신 시장의 규모나, 하루에 팔리는 휴대 전화기의 대수, 특허료가 얼마나 비싼지 하는 소리를 떠들기도 했는데, 쓸데없이 그런 말을 하다 보니 이야기는 더 장황해 져서 더욱더 재미없게 들렸다.


 조금 더 텔레비전 앞에 있다가 은정이는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잘 자라고 말했는데, 너무 작게 말해서 잘 안 들렸는지, 은정이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나는 자려다가 다시 한 번, 컴퓨터를 켜고 내일 발표 자료의 내용을 살펴봤다. 전리층 공명의 기본 원리에 대해서 설명 하는 부분, 우리가 교묘하게 이용해서 신호를 크게 만들고 흩어지는 신호를 붙잡는 데 쓰이는 관계식, 통신 장비의 구조. 몇몇 오류 상황을 피해 넘어 갈 아이디어들. 아직까지 해결 되지 않은 통신 신호 산란과 재시도를 지나치게 많이 해야 된다는 문제들. 언제나처럼 몇 년 안에 상용화 단계로 길을 찾아 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예상. 무슨 말을 어떻게 하고, 어느 부분에서는 어떻게 농담을 하고 넘어 가야 하는 지, 다시 한 번 할 말을 주욱 외어 보았다.
 
 만약에, 만약에, 혹시 매몰차게 이 통신 기기 회사에서 연구비 지원을 하지 않겠다고 해 버리면 어떻게 될까. 혼자 밤에 있게 되니 그런 생각이 났다. 추울 것도 없고, 총 쏘는 것 걱정하며 장비 만질 일도 없이, 따뜻한 곳에 앉아 있으니, 연구소를 그만 두게 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다시 또 들었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살 게 될까, 뭘 먹고 살까.
 
 당장 어떻게 되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학교를 졸업 하고 난 바로 다음부터 연구소에 자리를 얻었으니까, 그때부터 다니며 모아 놓은 연금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많은 돈은 아니겠지만 살 집은 있고, 혼자 지내면서 조금 아끼며 지내면 버티는 것이 그렇게 힘든 액수도 아니지 않겠나 싶었다. 애엄마에게 보낼 돈은 좀 힘들 수도 있겠지만, 그거야 아낀 돈으로 어떻게 막아 볼 수도 있지 않을까. 아니면 아예 연구소를 그만 뒀으니, 서울 집은 다른 사람에게 세를 주고 나는 훨씬 더 집세 싼 곳에서 살면 수입이 더 늘어나지 않을까.
 
 언젠가, 어머니께서 혼자 사는 나를 만나러 오셔서는 한참 맛있는 음식이나, 재미난 여행지에 대한 말씀을 하시다가,
 
 “어차피 혼자 이렇게 살 거면, 이제 딴 고민도 없겠다 돈도 아끼고 다시 우리랑 같이 살면 어떠냐. 너희 아버지 이제 많이 늙으셨잖아. 어머니, 아버지 집에 들어 와서 같이 살면… 그냥 효자 흉내라도 내는 것처럼 하면서…”
 
 하는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었다. 어머니께서는 그 때에도 나를 두고 “밖에서 일하는 아들 기를 꺾으면 안 되지” 하는 생각으로 한 마디 한 마디 말하는 것마다 조심하시는 기색이 역력 했는데, 나는 그런 눈치가 보일 때 마다 자꾸 자리를 피하고 싶었다.


 나는 연금에 살던 집에 세를 놓으면, 어느 정도가 수입이 되는 지 계산해 보았다. 나는 은퇴한 사람들의 평균 월수입을 찾아 보고, 내가 계산한 액수가 조금 높다는 것을 확인 했다. 그걸 보고 안도라면 안도 해 보려고 했지만, 정말 안심이 되지는 않았다.
 
 그러고 보면, 연구소를 그만 두고 나서 당장 월급이 없어지는 것도 걱정이지만 그렇게 되고 나면 “이제 정말 다 끝났다”라는 그 느낌이야 말로 정말 두려운 것이었다. 공부도 하고, 연구도 하고, 새로운 것도 만들겠다며, 많은 날, 많은 밤을 지냈는데. 이제 내가 뭔가를 해 나가던 시간은 다 끝나게 된다. 그날까지 한 것이 그게, 내가 산 날들의 결과로 모양 없는 덩어리로 남고 이제 끝난다. 그렇게 되는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한 번 더, 발표 자료와 장비를 살펴보니 시간은 훌쩍 지났다. 나는 이러다가 내가 발표하다 졸면 안 되겠다 싶었다. 나는 자리에 눕자마자 잠이 들어서 그 다음날 아침까지 푹 잘 잤다.
 
 다음날 아침에는 내가 일찍 일어났기에 은정이를 볼 수 있었다.
 
 “저녁에 발표 끝나고 일곱시 되면 바로 기차 타고 헬싱키로 가서 돌아갈 거죠?”
 
 은정이는 아침에 자기가 연구소 회의장까지 데려다 주고, 끝나고 나면 기차역까지도 시간 맞춰 데려다 주겠다고 했다.
 
 “바쁘지 않겠어? 오늘은 강의 없어?”
 
 은정이는 그냥,
 
 “딱히 다른 방법도 없잖아.”


 라고 했다.
 
 그리고 은정이는 어제처럼 틀어 놓은 텔레비전 뉴스로 눈을 돌렸다.
 
 은정이는 곧이어,
 
 “어제 말한 거 있잖아. 중파 통신. 그렇게 되면, 저기 저런 독재하는 나라나 저런데서, 사람들이 남들 감시 없이 서로 이야기할 수 있게 되는 거 아냐? 뭐 나쁜 짓 한 거, 이런 거 나라에서 검열하지 못하게, 다른 통신망 안거치고 바로 직접 사람들끼리 서로 연락할 수 있잖아. 맞지?”
 
 라고 말했다. 나는 그럴 수도 있겠다고 대답했다.
 
 참 모를 일이다. 전리층 공명 통신 기술을 두고, 나는 통신 기기 회사가 주가를 어디까지나 올릴 수 있을 지를 상상하고 있었는데, 은정이는 혁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를 은정이에게 어떻게 말해 줄 지 잠깐 생각 했다. 그런데 그러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애엄마 전화였다.
 
 우리는 항상 하던 이야기를 몇 마디 나누었다. 곧 애엄마는 은정이를 바꿔 달라고 했다. 나는 은정이에게 엄마 전화라면서 전화를 건네주었다. 은정이는 계단 아래로 내려가 바깥으로 나가서 전화를 받았다.



 6.
 
 회의장에서, 오후 늦은 시간 내 차례까지 기다리는 동안 긴장 되는 것이 조금 있기는 했지만, 나는 성공적으로 발표를 시작할 수 있었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다른 발표자들의 발표와 회의장에 온 젊은 학생들과 늙은 학자들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심심하지는 않았다. 이번에는 주로 나이든 사람들을 유심히 보았다. 저 사람들은 각자 어떻게 해서 저 나이까지 있을 직장을 저마다 차지 했는지 상상하다 보면, 가끔 아는 얼굴을 만나기도 했다. 요즘 어떻게 지내냐고, 나는 그럭저럭 잘 지낸다고 하면서 한 번 통쾌하게 웃으면 10분, 20분 시간은 지나갔다.
 
 내 차례가 되어 발표를 시작하고 시연을 위해 통신 장비를 실행시킬 때에도 날씨는 무척 맑고 좋았다. 나는 농담 몇 마디를 섞어서 발표를 시작했고, 언제나 하던 이야기이지만 수 천 곳의 기지국과 수만 킬로미터의 통신 회선 없이, 그저 단말기계 한 대만 있으면 누구와도 통신을 할 수 있는 기술이 우리의 꿈이라는 이야기를 꺼냈다.
 
 특히 이번 발표에서는, 요즘 동향을 한 번 소개하면서 출발한 것이 잘 먹혀들었다. 전리층 공명 중파 통신은 한 십 몇 년 전쯤에 한 번 크게 유행했다가 얼마 전부터는 관심 갖는 사람들이 별로 없는 영역이라는 생각이 있다는 것을 대놓고 나는 소개 했다. 그렇지만, 최근 들어서 다시 새로운 정보 압축 기술을 적용하면서 주로 미국의 학계를 중심으로 다시 연구하는 사람들, 관심 갖고 자료를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고 이야기 했다. 그렇게 말하고 나니, 튼튼한 학문의 뿌리가 있는 연구이면서도 또 시류에 걸맞는 요즘 흐름을 따라가는 기술인 것처럼 보였다. 통신 속도를 일정하게 유지하기가 어렵고, 접속에 재시도가 지나치게 많이 필요하다는 문제점이 있지만, 몇 년 동안만 더 연구하면 이런 문제를 해결해서 상용화 할 수 있을 거라는 결론까지, 매끄럽게 이어졌다. 어려워 보여서 대단해 보이면서도 듣는 사람이 자신의 이해력에 우쭐할 만큼 알아듣기 좋은 부분도 잘 섞여 배치되어 있었다.
 
 한 가지 아쉬운 것은 발표의 마지막 말이 끝날 때 까지도 시연하고 있는 통신 장비의 접속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래도 큰 걱정은 아니었다. 재시도 횟수는 겨우 10회 정도였으니까, 아직 좀 더 기다려 보면 얼마 안 있어 접속이 이루어질 것처럼 보였다. 예정해 두었던 대로, 이제는 회의장에서 진행되는 저녁 식사를 하면서 언젠가 접속이 이루어졌다는 소식을 기다리면 될 터였다. 그러면 마지막 시연까지 멋지게 보여 줄 수 있었다. 우리는 세상에서 누구도 갖지 못했던 장비를 갖고 있었고, 그 장비가 어제 마지막 순간까지 잘 움직이는 지 확인을 했고, 오늘 밤하늘은 번개도 구름도 없이 맑았다. 걱정할 것은 없었다.
 
 그래도 한 번, 두 번, 재시도 횟수가 늘어날 때 마다 계속 마음은 조마조마 했다. 그 동안 도대체 얼마나 많이 이 재시도 화면을 봤는지 헤아리기도 어렵다. 그렇지만 매번 재시도를 할 때마다 나는 속으로 “제발 이번에는 돼라. 이번에는 돼라.” 하고 빌었다. 내가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학생일 때, 결혼을 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은정이가 태어난 무렵에, 언제나 항상 바로 이 재시도 순간이 되면 나는 이번에는 접속이 잘 되라고 빌고 있었다.
 
 막연히 그런 상상을 할 때가 있었다. 갑자기 허공에서 흰 불꽃이 탁 터지듯이, 어느 날 갑자기 마술처럼 접속이 잘 되게 되어 버리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걸 보고 드디어 되었다면서 주변 사람들과 함께 한참 화면을 지켜보면서 기뻐한다.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시험 결과를 보내는 곳들 마다 모두 고맙다고 답장을 해 주면서, 서로 학술회지에 크게 실어 주려고 우리에게 연락을 해온다. 사람들을 만나면 이제 드디어 이건 한 고비 넘었다고, 편안한 말로 지난 무용담처럼 이야기해 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제는 그렇게 시험 결과가 잘 나온다고 해서, 그것만으로 지금 내 고민거리들이 모두 다 풀리지는 않는다는 것을 똑똑히 알고 있었다. 이제는 시험 결과가 잘 나온 다는 것만으로 바로 출세를 하고 돈을 버는 것조차도 아니었다. 통신이 잘 되는 길을 찾게 되어 성공한다고 해서, 걱정할 일들이 싹 없어 지고, 갑자기 나에게 대단한 행복이 찾아오고, 지금껏 살아오며 계속 꾹꾹 차올라 마지막까지 쌓여 온 모든 어두운 것들이 갑자기 다시 처음으로 거슬러 올라가서 모두 환해지게 되는 것도 아닐 것이다. 오늘 나는 특히 그것을 잘 알게 된 것 같았다. 그런데, 제발, 그러니까 제발, 그러니만큼. 적어도 시험 결과는. 다른 대단한 행복은 그냥 아니라고 치고, 그냥 시험 결과는 좀 잘 나와 주면 안 될까.
 
 처음에는 느긋하게 기다렸는데, 도무지 끈질기게 접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이상하게 재시도 횟수가 반복되는 간격이 점점 더 짧아 졌다. 이상했다. 뭔가가 잘못 되어 생각 보다 훨씬 더 접속이 안 되고 있었다. 재시도 횟수는 곧 60을 넘어 갔다. 회의장에서 저녁 식사를 하며 한 두 잔 맥주를 마시고 유쾌하게 웃는 여러 사람들의 웃음이 울려 퍼지는 것이 들렸다. 그렇지만 나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이, 그냥 장비 화면만 들여다 볼 수밖에 없었다. 이대로 가면, 금세 100회째 재시도 횟수를 채울 것처럼 보였다. 그렇게 되면 중간감지소의 배터리도 곧 소모 된다.
 
 스노모빌로 빨리 가면 10분이면 중간감지소를 장치해 둔 곳까지 갈 수 있었다. 금세 가서 상황을 좀 자세히 보고 일단 배터리라도 보조 배터리로 교체를 한 뒤에 다시 보자고 마음먹었다. 어차피 여기까지 와서 하는 것, 되는 데 까지 할 수 있는 데 까지는 다 해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체 무슨 까닭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달려가서 한 번 보고 끝까지 매달려 보겠다고 생각 했다.
 
 나는 회의장 바깥으로 나갔다. 건물 로비 쪽에는 벌써 은정이가 와 있었다.


 “다 끝났어? 빨리 끝났네.”
 
 은정이가 말했다. 나는 은정이에게 아직 다 끝난 것은 아니고 좀 확인할 게 있어서 급히 가 봐야 되는데 운전을 좀 해 줄 수 있겠냐고 물었다.
 
 “밤에 운전하는 거 힘들 텐데 미안하다. 그 집에 할아버지가 짐승 잡는 덫 두러 가는 언덕 쪽 거기 알지. 거기 거든.”
 
 은정이는 따로 대답을 하지 않고, 스노모빌을 타고 시동부터 걸었다.


 나는 목에 두른 목도리와 모자를 단단히 하면서 스노모빌 쪽으로 갔다. 그런데, 어째 주차장에 가로등이 이상하게 밝다는 생각을 했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에는 천둥번개도 전기를 띈 구름도 없었다. 그러나 대신에 뿌옇게 빛나는 오로라가 가득 퍼져 있었다. 파도가 부서지며 흰 물방울을 튀기듯이 오로라는 그 전기 띈 플라즈마가 온통 바람 속에서 부서지면서 기이한 초록색 빛을 내뿜고 있었다.



 7.


 중간감지소에 도착한 나는 오로라의 전자파 때문에 신호가 엉망으로 어그러지는 모양을 똑똑히 확인할 수 있었다. 당장 어떻게 해결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몇 번 다시 중간감지소의 장비를 껐다 켰다 하면서 신호가 가는 모양을 봤다.
 
 회의장에서 보낸 신호가 중간감지소 근처까지 오기는 하는 것 같았다. 그렇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그대로 흩어져 버렸다. 하늘 방향으로 신호는 간섭을 받아 웨이블릿 형태를 잃어버리는 것들이 많아 보였다. 동시에 전리층 반사 공명을 몇 번 반복하면서 이상한 피드백 효과가 나타나는 것이 아주 심했다. 평소 같았으면 작은 잡음 정도로 보일 내용이었지만, 갈수록 점점 커 보였다. 역시 오로라 때문인 것 같아 보였다.
 
 배터리가 다해 가고 있었다. 재시도 횟수가 80회, 90회를 넘어 갔다. 이제 몇 분이 지나지 않아 중간감지소는 꺼질 것처럼 보였다. 200회나 300회 재시도 할 때에 통신이 이루어질 가능성은 얼마든 지 있었다. 하지만 중간감지소가 꺼진 후라면 소용이 없었다. 중간감지소에서 잡아낸 전달 파형을 잡아서 보여주지 못하면, 원리와 성능을 보여주는 연구과제 발표회의 의미는 크게 줄어들 수밖에 없을 것이다. 나는 보조배터리를 꺼내서 병렬로 연결하기 위해 전선 피복을 벗기고 접점의 나사를 풀기 시작했다.
 
 은정이는 멀찍이 떨어져서 내 쪽을 보고 있었다. 마냥 기다리는 동안 지루해 하고 있겠지. 은정이는 추운지 팔짱 낀 것을 조금 더 움직였다. 나는 좀 더 초조해 졌다. 은정이의 얼굴은 표정도 바뀌지 않고 있었고, 말도 하지 않고 있었다.


 신호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 모양은 그대로였다. 나는 조바심이 나서, 기계가 망가지건 말건 급하게 중간감지소를 급하게 껐다가 다시 켰다. 어차피 이번에 제대로 써먹지 못하면, 이 중간감지소 장비를 써먹을 일도 없을 터였다. 나는 계속해서 신호가 부질없이 흩어지기만 하는 것을 본다. 나는 점차 장치의 출력을 높여 보았다. 소용없었다. 대신에 하늘의 오로라 빛은 점점 더 강해지는 것 같았다. 내 눈으로도 빤히 보일 정도였다.
 
 나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로라 빛이 이제 저 혼자 깨끗하게 흩어지게 되는 수는 없을까. 김이 낀 유리창을 닦듯이 없어져 버리면 안 되나. 하늘에 구름처럼 퍼져서 빛나고 있는 저 이상한 빛 덩어리만 지금 잠깐만, 한 20분만 사라져 주면 안 될까. 그러면 될 텐데. 그러면 시연도 성공하고, 사업비도 따내고, 연구소도 계속 다닐 수 있을 텐데. 하필이면 저 빛 덩어리가 내 머리 위를 가로 막고 있어서,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20년 동안 한 발자국씩 한 발자국씩 더 다듬어 온 전리층 공명 장파 통신 장비들 중에서, 이번 시연에 쓰는 장비가 가장 좋은 것이었다. 그 어느 때 보다 훌륭한 결과가 나와야 마땅했다. 그런데 하필이면, 오늘 하늘에서 녹아내리는 플라스마 덩어리가 번지는 저 초록색 빛이 있어서 아무것도 움직이지 않는다니. 답답해져서 이것저것 살펴보다가, 나는 막막한 마음에 손을 놓고 하늘을 멍하니 보았다.
 
 “잘 안 돼?”
 
 은정이가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다시 은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은정이는 내가 고개를 돌리자 다른 방향을 쳐다보았다. 은정이는 몇 발자국 더 걸어 나갔다.
 
 “어, 좀… 이게…”
 
 나는 더듬거리면서 말하면서 다시 장비 출력을 좀 더 높여 보았다. 작은 소음과 함께 둥근 원모양 안테나에서 전기 불꽃이 튀는 것이 보였다. 전압이 높아지자, 어디인가 떨리는 부품이 있는지 작은 웅웅거리는 소리가 들려오기도 했다.
 
 “공명 계수는 정말 진짜 말도 못하게 높게 나오는 데… 신호 보존이 안 되네.”
 
 나는 혼잣말로 중얼 거렸다. 통신 신호는 발신 장비에서 나와서 수신 장비로 들어가는 대신에, 하늘 오로라 빛 속으로 모두 빨려 들고 있었다. 수신 장비에서 나오는 응답 대신에 오로라 빛이 내뿜는 전자기파 속으로 잡혀 들어갔다. 그 속도와 양은 엄청나게 거셌다. 하지만, 모두 부질없는 것이었다. 절벽에 한쪽 끝에 선 사람이 다른 사람을 애타게 부르는 데, 다른 쪽 끝에 선 사람이 그 소리를 듣기 전에, 하늘에서 폭설이 마구 쏟아져 내리며 그 소리를 휩쓸어 계곡 아래로 퍼부어 쓸어 간다는 따위의 모양이 떠올랐다. 어떻게 그 휩쓰는 것을 이겨 보겠다고, 장비 출력은 최고로 설정 되어 계속해서 움직이고 있었다. 안테나에서는 오로라 빛과 같은 초록색 빛이 감돌아 피어오르는 것 같았다.
 
 나는 이건 너무 심하다 싶어서 안테나를 좌우로 흔들면서 다시 똑똑히 살펴보았다. 푸르스름한 빛이 안테나 주변에서 머물다가, 연기가 퍼져 나가듯이 하늘로 올라가는 모양이 보였다. 한 번도 본적이 없었던 모습이었다. 신호 보존율은 더욱 떨어져만 갔다. 오작동이 심해져서 어느 때 보다 엉망으로 신호는 흔들렸다. 단 한 톨의 신호도 전달되지 못하고 모두 오로라로만 흘러갔다가 되돌아오고 있었다. 제대로 틀려먹고 있는데, 그 정도가 너무나 심해서 한 번 상상도 해보지 못한 정도였다. 통신 장비와 오로라 빛이 엉켜서 제멋대로 뒤틀려 가는 것 같았다. 통신 장비의 안테나 주위로는 계속해서 오로라 같은 빛깔이 흘러 나왔다. 곧 뭔가가 확 터져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이상한 빛이 감돌았다.
 
 나는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하늘 이곳저곳에 퍼져 있는 뿌연 초록색 빛깔 가장 자리에 조금씩 이지러지는 모양이 보였다. 나는 눈을 하늘 가장 자리로 돌려 보았다. 지평선 한쪽 끝, 멀리 보이는 뾰족한 나무 그림자 뒤편으로 언뜻 붉은 빛이 다시 비치는 듯 했다.
 
 바로 그 순간, 초록색으로 뿌옇게 빛나던 오로라 빛 가운데로 갑자기 밝은 붉은 빛이 물이 쏟아지듯이 홱 쏟아 졌다. 잠깐 눈이 부실 정도였다. 붉은 빛은 원래의 초록색 빛과 이리저리 섞이더니, 하늘에서는 다시 파란 빛이 펄럭이는 천과 같은 모양이 되어 천천히 쓸어 담듯이 쏟아 졌다. 이내 우리가 서 있는 중간 감지소가 있는 곳을 중심으로 하여, 사방에서 오렌지 빛 덩어리가 어지럽게 휘몰아쳐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을 감싸고, 여러 색깔의 빛들이 수백가닥, 수천가닥씩 엉켜 움직이며 하늘에 커다란 곡선을 계속해서 그려 나갔다. 아주 가는 무지개가 밤하늘에 빛을 뿜으며 그려지는 것 같은 모양이 계속 뻗어 나왔다.
 
 나는 내가 보고 있는 것이 도대체 하늘에서 볼 수 있는 일인가 싶어, 고개를 젖힌 채 계속 올려다보고만 있었다. 몇 분 째였는데 목이 아픈 줄도 모르고 있었다. 통신 신호의 전달은 잘 안되다 못 해 이제 완전히 차단되어서, 코딩 모듈이 다시 초기화되려는 지경이었다. 대신에 하늘이 혼자서 장난이라도 치면서 춤을 추는 것처럼 오로라가 빛나고 있었다. 나는 이런 비슷한 것을 볼 수 있을 거라고는 한 번 상상도 해 본 적이 없었다.
 
 오로라 빛은 점점 더 또렷해지면서 차지하고 있는 자리는 줄어들었다. 그러자, 오로라 빛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별빛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흰 눈을 같이 반사시킬 만큼 별들은 수천 개, 수만 개는 될 것처럼 아주 많고, 또 아주 밝아 보였다. 그렇게 보이는 별빛은 더 강하고 더 선명해 보였다. 대조가 되어서 유난히 더 그렇게 보이는 것인지, 아니면 이것도 지금 보이는 새로운 현상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휘몰아치는 오로라는 우주 저편에서 새어드는 별빛을 번져 나오게 녹여 휘감으면서 움직였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저마다 모두 유성이 되어 떨어져 내리는 것 같이 보였다.
 
 이윽고 오로라 빛은 점차 테 모양으로 둥글게 뭉치기 시작했다. 뭉치면서 그 빛은 한 방향으로 돌았다. 그 빛이 움직여 돌아가는 속도는 전리층 공명 장파 통신기가 발진을 재시도 하는 주기와 맞아 떨어졌다. 신호가 조금도 전달되지 않고 모조리 하늘에 잡아먹히고 있다는 증거 였다. 오로라 빛은 점차 소용돌이 모양이 되어 갔다. 오로라 빛이 이루는 소용돌이는 하늘에서 커다란 원을 그리며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와 은정이가 서 있는 우리 위의, 이곳 밤하늘에 거대한 구멍이 나서 땅위의 모든 것을 빨아들이기라도 할 것 같은 모습이었다. 소용돌이 바깥으로는 흐르는 별빛이 계속 가득했지만, 소용돌이 가운데의 검은 구멍 부분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그저 까맣기만 했다. 그 구멍 저 편으로 언뜻 다른 세상의 무엇인가가 보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2분이 채 더 지나지 않아서, 중간감지소의 배터리는 모두 방전 되었고, 중간감지소는 꺼졌다. 연결 되어 있던 통신 장비 프로그램도 같이 종료 되었다. 하늘의 오로라 빛은 다시 점차 흩어졌다. 중간감지소를 써서 못 보여주는 마당에 통신 프로그램만 다시 돌려 보는 것은 의미가 없었다. 나는 이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하늘을 무슨 다 끝난 TV 연속극의 올라가는 자막이라도 되는 것처럼 계속 보고 있었다.


 나는 은정이를 보았다. 은정이는 내 앞에서 같이 하늘을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뒷모습 밖에 볼 수 없어서, 은정이가 하늘을 올려다보는 동안 무슨 표정을 지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은정이는 돌아 서서 나를 보았다. 지금 얼굴은 엊그제 다시 만나고 처음 보았을 때처럼, 조금 화난 것처럼 보이는 아무 표정 없는 얼굴이었다.
 
 “된 거 아냐?”
 
 나는 이번에도 똑똑히 대답하지 못하고, “어…” “저…”하고 머뭇거리는 말만 한다.
 
 결국 연구사업은 신청한 연구비의 70%만을 인정받아 시작되었다. 나는 2년 후 연구소에서 퇴직하게 되었다. 다시 2년이 지난 후, 김광욱 박사는 콜럼비아 대학교 연구팀이 전리층 공명 장파 통신은 상용화하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증명했다는 소식을 전해 왔다.
 




―――――― 2011년, 서울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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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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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쑤우 11.10.01 02:14 댓글 수정 삭제
    루돌프 사슴코의 스토리 텔링에 대해서 저렇게 생각해본적은 없었는데 그렇군요.
    학교 다닐때 핀란드 학생들이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자기네 나라에 대해 아냐고 물어보길래 '노키아'를 말해주니 좋아하더라구요.
    죽기전에 오로라를 보는게 꿈인데 누군가에게는 재앙이 될 수도 있겠네요.
    그래도 눈앞에 펼쳐진 듯한 오로라 묘사는 무척 좋았습니다~!

    * 혹시 베트남에 얽힌 사연이나 이야기가 있으신가요?
    달팽이와 다슬기도 그렇고 격투의원 곽반웅에도 베트남계 영국인도 살짝 언급되는거봐서 베트남과 어떤 인연이 있으신지 궁금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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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1.10.01 10:28 댓글 수정 삭제
    이번에는 좀 가라앉은 분위기로 묘사, 감상 중심으로 가보려고 했는데, 너무 지루하지는 않았는지 걱정입니다. 좋게 봐주신 부분있다니 감사합니다,

    베트남과는 별인연은 없고 핀란드에 이방인으로 자리잡은 사람들을 찾다가 '보트피플' 이야기를 보고 넣어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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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샤유 11.10.01 12:15 댓글 수정 삭제
    잘 읽었습니다. 무언가를 발표하기 전에 긴장감은 진짜 굉장하죠. 오로라를 보는 장면이 매우 인상적이네요. 만약 돈이 많고 저런 기계가 있다면 매일같이 켜놨을지도 모르겠네요. 마지막에 다시 딸과의 관계나 그런 게 어떻게 됐는지 좀 궁금하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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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1.10.02 21:08 댓글 수정 삭제
    오로라와 저 정도로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는 장치를 만들었고, 기계 성능 자체도 굉장히 훌륭한 수준이니, 아마 주인공이 통신기술혁신에는 실패했을지라도 꽤 의미 있는 실험결과를 남긴 것으로 인정 받기는 했을 겁니다. 오히려 이럴 줄 알았다면 진작에 장치의 다른 응용분야를 찾아 보는 것이 나았을 겁니다.

    딸과의 관계에 대해서는 마지막 부분에서 두 가지로 표현해 보려고 했습니다. 우선 은정이 실험 내용을 완전히 오해하고 있다는 점과 주인공이 거기에 제대로 대답해 주지 못하고 있다는 점은 여전히 은정과 공감도 이루지 못하고 있고 두 사람 사이에 뚜렷한 이해도 여전히 없다는 겁니다.

    그러면서도 은정이 실험을 유심히 지켜 보았고 실험의 성패에 관심을 가지기는 했다는 것은 앞으로 아버지를 용서하고 관계를 좋게할 가능성이 있기는 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와닿게 이런 느낌이 드러났는지 조심스럽습니다만, 지금 돌아보면 인물들의 행동을 조금 더 능동적으로 보여주는 사건들로 더 꾸미는 것도 좋겠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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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laret 11.10.05 18:52 댓글 수정 삭제
    오로라를 보고 싶어서 언젠가 북반구에 가보고 싶었는데, 글의 묘사가 정말 인상적입니다. 오로라에 대한 묘사만큼이나, 현실의 묘사도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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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1.10.05 19:28 댓글 수정 삭제
    위 글 속의 오로라는 가상의 전리층 공명 장치를 가정해서 오로라를 일으키는 고에너지 입자가 실제보다 훨씬 더 요란하게 움직인다고 보고 꾸며서 쓴 것이니, 실제는 훨씬 더 조용하고 단아한 모양일 겁니다.

    이번 이야기에서는 겨울 저녁 어스름할 무렵에 꿈꾸는 것처럼 환상적인 풍경을 묘사하려고 노력해 봤습니다. 그래서 초반 1/4 정도 쓰고 어느 정도 이야기의 세부를 이렇게 짜겠다고 생각난 후에, 먼저 오로라 묘사 장면부터 써놓고 나머지 부분을 또 써 나갔습니다. 그렇게 써 나가면서 생각날 때마다 오로라 묘사도 고치고 덧붙이고 그런식으로 만들어 나갔습니다.

    다 만들어 놓고 보니, 그러니 만큼 사건이나 인물에 대해서는 약간 심심하게 처진다 싶은 느낌도 많이 듭니다. "설국" 같은 소설 처럼 사실적이면서도 강렬한 심상으로 밀고 나가는 글까지는 못미치니 만큼, 이렇게 정경을 꾸며 놓으면서도 인물을 조금 더 또렷하게 살리고 사건도 약간 더 긴장감 있게 가져 갔다면 더 좋았을 것으로 생각 합니다. 부녀 관계에 대해서도 세부를 조금 더 보충해서 생동감을 느끼게 했다면, 은퇴 직전 여러모로 복합적인 감정을 느끼는 주인공의 감상도 더 살았을 거라고 생각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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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슴컹크 11.10.05 21:29 댓글 수정 삭제
    날씨가 추운 날이긴 했지만 '백 번째 통신'을 읽으면서 정말로 핀란드의 청량한 눈밭 속에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어요. 주인공은 나중에 은퇴하고 나서라도 똑부러지는 똑똑한 딸아이 덕을 많이 볼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따뜻하고 돈독한 부녀간의 정을 그렸다기 보다는 서늘하고 쿨한 부녀간을 그린 것도 새롭고 특이하게 다가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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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1.10.06 08:31 댓글 수정 삭제
    부녀관계는 파탄난 관계가 아주 조금 수습되는 정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으로 목표를 잡아 봤습니다. 이 역시 조용하고 보기 좋은 풍경을 그리는데 방해가 되지 않도록 하려고 어느 선 이상까지는 나가지 못했다고 생각 합니다. 더 아슬아슬할만큼 좀 더 망가진 가족 관계를 드러내면 더 극적으로 꾸미기 좋았을 것으로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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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아 11.10.06 17:30 댓글 수정 삭제
    와우 재미있네요. 어쩌면 언어나 개념이 망사업자군(국가나, 출판사나, 평론가나 또는 기러기나 귀뚜라미나[밝혀지는 않은 비밀은 많으니깐])을 거치지 않고 이용자에게 전달되는 환타지적인 상상도 해봤어요. 잠옷만 입은 사람을 거대한 거인이 빙판에 지우개처럼 문대는 느낌이라니 생각만 해도 춥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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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1.10.07 06:03 댓글 수정 삭제
    아마 주인공이 통신기술을 성공시켰다고 해도 산업변화에는 또 난관이 있을겁니다. 반정부분자나 범죄자의 사용이 염려된다는 이유로 암호화 기술의 공개도 제한하는 요즘 상황을 보면 아마 같은 이유로 이야기 속의 통신기술 역시 잘 된다고 해도 제도적으로 제한을 받을지도 모를 겁니다. 당연히 이익을 지키려는 통신망 회사들 역시 한편으로 제한제도를 지지할테니 말입니다. 통신회사들이, (심지어 일부에서는 요즘도) 데이터통신을 무슨 요금 후려가는 함정, 속임수처럼 생가했던 사례를 생각하면 과연 그렇지 싶습니다. 어제 뉴스보고나니 아이폰이 무슨 디자인, 창의력 이런 것도 중요했지만 전화기에 와이파이를 탑재했던 용기도 무척 크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만 덧글 중에, '귀뚜라미, 기러기' 부분은 무슨 뜻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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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코아 11.10.07 11:19 댓글 수정 삭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 읽었던 기억이 나는데 궁극의 답은 사십 몇이었던 걸로 기억나요. 귀뚜라미는 4 기러기는 3 순서대로 43이라면 어떨까요? ^^ 한국의 경우 요즘 게임 심의제 사건을 통해 보여지는 사감의 헤게모니를 쥘려는 여성부가 가정과 대화의 중요주체로 자신들을 스스로 자리매김하고, 그 범위를 개별통신까지 확장해 제한제도의 주요 의사결정기관으로 등장하지 않을까란 생각이 문득 들어서 살짝 골치도 아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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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1.10.09 21:38 댓글 수정 삭제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에서는 42였지요. 거기서도 정말 뜻모를 말로 나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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