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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종합적 신경성 증상

2013.05.01 00:0005.01

 
종합적 신경성 증상

 

 

 

1.
경리부장이 회사 자금 사정이 정말로 어렵다고 말한 것이 불씨였다.


“이제 한 명씩 해고 당할지도 모르지.”
“잘린다고요? 누구부터 잘린다는 거죠?”
“그런 것까지는 아직 모르지만. 에이, 아녜요. 내가 쓸데 없는 소릴 했네.”


경리부장은 캐묻는 말을 피하려고 했다. 그렇지만 비서는 계속해서 말을 캤다.


“우리 회사에 사장님이랑 사장님 동업자 이사님 빼면, 부장님하고 저밖에 없잖아요.”


5분전만해도 토머스 에디슨이 막 개발해낸 백열전구처럼 밝기만 했던 비서의 얼굴은 콘래드의 소설과 같은 암흑이 되어 있었다. 비서는 누군가가 해고된다면 그나마 역할이 있는 부장이라는 사람보다는 자기가 해고될 거라는 심연에 빠져 들고 있었다.


“어휴... 그럼 어떡해.”


비서는 오후 내내 한 숨을 쉬는 어두운 표정으로 잘릴 걱정을 했다. 이제 겨우 회사 사무실이 있는 G581E 행성에도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또 어디에 취직해서 어떻게 살아야 한단 말일까. 실업자와 구직자로서 갖가지 이어지는 미래의 우울한 자기 모습을 상상하던 비서는 마침내 한 가지 결론에 이르렀다. 회사가 당분간 유지될만한 일거리가 생기는 것만이 해고를 피하고 필요한 만큼의 안식을 더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것이다.


비서는 퇴근 후 온갖 잡다한 분야의 프리랜서들이 모이는 길거리에 갔다. G581E 행성 전체에 걸친 지옥과도 같은 부동산 시장 붕괴 이후, 빈 아파트와 빌딩들이 서서히 말라 비틀어져 가던 넓디 넓은 숲 외곽에 생긴 곳이었다. 그런 곳에 어울리는 은하계의 온갖 실업자들이 모여든 골목이 몇 있었는데, 그곳에 단정하게 옷을 차려 입은 비서는 겁을 먹은 눈으로 나타났다. 그러니, 거리의 사람들은 그녀가 말은 하지 않고 있어도 그 모양만으로도 꼭 나래이터 모델이 마이크에다 대고 귀가 아픈 큰소리이로 - 동시에 물렁물렁 중얼중얼 대는 것 같기도 한 끊임 없는 말소리로 -  “저는 멋모르고 온 사람입니다” “저는 멋모르고 온 사람입니다” 하고 소리치는 양 보였을 것이다.


그날 저녁 비서 주변에 몰려든 얼간이들은 42명이 있었다. 운 좋게도 비서는 그 중에 한 사람으로부터 스스로 쓸만하다는 생각이 드는 회사의 일거리를 얻어 왔다.


“여기 은하수 외곽에 있는 우주 정거장에 경매창고에 보면 붙박이식으로 설치 되어 있는 저장용 드라이브가 있는데요. 그걸 그대로 들어내서 전원이 끊어지지 않은 상태로 분리하고요. 목성까지 가져가면 끝입니다.”


비서는 다음날 회사에서 “내가 일거리 따왔어요”라면서 다시 밝아진 얼굴로 말했다. 그러나 이미 어두워져 있던 사장과 이사는 덤덤하니 그대로 칙칙한 얼굴이었다. 그러다가 사장은 잠깐 놀랐다는 표정도 지었다.


“나도 거기서 저장용 드라이브 옮기는 일 따왔는데. 그런데, 나는 토성으로 가져 오라고 하던데.”


회사 사람들은 어떤 일이 제대로 된 일인지를 두고 논쟁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논쟁이 얼마 진행되지 않아 이사인 양식이 자리를 털고 일어 섰다.


“어차피 뭘 하든 우리가 사업 시작한 목적 하고는 아무 상관도 없는데, 무슨 소용이에요. 그냥 돈 많이 준다는 쪽 대로 하죠, 뭐.”


얼마 후 이 의견에 다른 사람들도 모두 동의했다.


미영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지만, 이 전날 저녁에 미영 역시 비서처럼 길거리의 얼간이들 사이에서 일거리를 찾아 다녔다. 차이점이 있다면 그나마 비서가 “저는 멋모르는 사람이요”하고 소리치는 나래이터 모델 같았다면, 미영은 바람이 부는 대로 펄럭펄럭 움직이며 춤추는 모양을 하는 주황색 비닐 인형 같아 보인다는 느낌이었다는 정도였다.


나중에야 모두가 알게 되는 일이기는 하지만, 비서가 가져온 일과 미영이 가져온 일 중 어떤 일을 결국 하게 되는지에 대한 결론이 맺어지는 데는 좀 더 많은 이야기가 필요하다.


그 이야기는 김형로라는 사람이 결국 마무리를 짓게 되는데, 김형로는 당시까지는 매우 다행스럽게도, 지금 비서나 미영이 있는 곳으로부터 무척 멀리 떨어진 곳에서 이들의 회사에 대해서는 조금도 알지 못하는 상태였다.


그렇기는 하지만 김형로는 전혀 다른 문제로 세상의 어느 누구 못지 않은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2.
김형로는 정신을 차렸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이지가 않았다. 그저 깜깜하기만 했다. 그것도 밤이라서 어두운 것과는 달라 보였다. 새어 드는 별빛에 보이는 희미한 형체도 보이지 않았고 실내에서 흐릿한 윤곽을 나타낼 반사광도 보이지 않았다. 잠깐 혹시 무엇인가 안대 같은 것으로 눈을 가렸나 싶기도 했다. 그런데 그런 것도 아닌듯 싶었다. 눈앞을 감싼 것이 보이지도 않았고 눈앞을 무엇이 가로 막고 있다는 감촉이 느껴지지도 않았다.


김형로는 이게 왜 이런가 싶어 어리둥절해서 고민했다. 그러다가 갑자기 왈칵 겁을 먹었다. 눈을 다친 것이다. 앞이 안 보이게 된 것이다. 무슨 사고가 나서 눈을 다쳤나보다. 시력을 잃었나 보다. 김형로는 놀라서 허둥거렸다. 그리고 그런 그를 붙잡고 누군가 설명을 해 주기를 바랬다.


‘김형로씨? 깨어나셨나 보네요. 괜찮습니다. 눈은 잠깐 부상을 당해서 안보이는 거니까요, 치료 받으시고 수정체만 인공제품으로 바꿔서 끼우시면 잘 보일 겁니다.’


같은 목소리가 들리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런 소리도,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김형로는 가만히 귀를 기울여 보았다. 그런데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만약 김형로가 있는 곳이 병원이라면 병원 속 사람들의 말소리나 지나가는 발소리라도 들려야 할텐데 그런 것도 없었다. 김형로가 만약 어떤 깊은 지하실 같은 곳에 있는 것이라면, 보일러나 수도관에서 들리는 소리라든가 멀리서 들리는 문틈 사이에 새는 바람 소리 같은 것이라도 들려야 할 법 했는데 아무 소리도, 어떤 작은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김형로는 설마 눈도 멀고 귀도 같이 먹었나 싶었다. 이미 겁을 먹어서 아무 것도 제대로 못할만큼 허둥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도대체 얼마나 몸을 다친 것이가 싶어 더욱더 허둥대게 되었다. 김형로는 귀를 손으로 후벼 보려고 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아무것도 못할만큼 허둥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더 허둥대는 일만은 할 수 있구나”하는 묘한 생각을 이상하게도 길게 해 보기도 했다.


그런데 김형로는 곧 귀를 후빌 수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손이 귀에 닿지가 않았다. 처음에는 손이 어디에 묶여 있어서 못 움직이거나, 몸을 눕힌 자세가 이상해서 손이 귀가 아닌 다른 쪽으로 뻗는 것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손이 무엇인가에 묶인 느낌도 없었다. 심지어 자세히 정신을 모아 봐도 손을 휘두르는 느낌도 나지 않았다. 그리고 김형로는 그 순간 숨을 들이 쉬고 숨을 내 쉬는 동작을 하는 것조차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김형로는 아찔하여 갑자기 머릿속이 흔들리는 맥주캔 속처럼 변하여 온갖 두려움으로 부글부글 차오르는 것 같았다.


김형로는 정신이 뒤죽박죽 음식물 쓰레기처럼 변해 가는 혼란을 겪었다. 우는 소리를 크게 내면서 발작하고 있는 상태와 비슷한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김형로는 눈물을 흘릴 눈물샘도 없었고 소리를 지를 성대도 없었다. 때문에 울고 있는 것인지  어떤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아무것도 보이지도 않고 들리지도 않고 있었으므로, 김형로는 그런 뇌가 떡이 된 상태로 얼마나 오래 있었는지도 잘 알 수가 없었다. 10초 20초 동안 날뛰는 것일 수도 있었고, 3,4일 동안 울면서 데굴데굴 뒹굴고 있는 것에 가까운 일일 수도 있었다.


그러던 끝에 김형로는 겨우 진정을 하고 약간 생각을 가다듬는 순간을 가질 수 있었다. 한번 그 시간을 갖게 되자, 흔들린 탄산음료 캔을 뜯었을 때처럼 김형로는 생각이 한 줄기로 치솟는 것을 알 수가 있었다. 김형로는 자신이 당한 사고를 기억해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김형로가 일하던 회사는 “휴머시닉서스”라는 곳이었다. 영어 단어 두 개를 합쳐서 벤처 기업 이름을 지어 놓으면 멋있다고 투자할 사람이 많아진다고 믿던 사람들이 많을 때에 설립된 회사였다. ‘human’이라는 단어와 ‘machine’이라는 단어를 합친 것이 회사 이름이었는데, 회사 이름에 x가 들어 가면 더 멋있다는 생각 따위의 몇 차례 유행에 더 휘말려서 결국 이름이 휴머시닉서스로 바뀐 곳이었다.


휴머시닉서스는 사람 몸의 일부를 기계로 대체해 주는 일에 대해서 부품 구성과 수술을 설계해 주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장사로 뭘 하건 핵심은 “우리도 벤처 기업으로 무일푼에서 억만장자가 된 누구처럼 될 수 있는 날이 올 때까지 몸이 가루가 되도록 열심히 일해보자”고 대학생들이나 졸업생들을 꼬드겨서 그 몸과 정신을 고운 가루로 빻아 대면서 두어푼 월급을 쥐어주는 것이  중심이었다. 김형로 역시 인생의 젊은 10년 정도를 그 가루로 빻아다가 투자의 물결과 정부 육성 정책이라는 덧없는  바람에 날려 보낸 직원 중 한 사람이었다. 다만 김형로의 경우에는 그 결과로 이 은하계 안에서는 무척 뛰어난 기술을 갖게 되기는 했다. 김형로 만큼 정교하게 부품과 수술을 조합할 수 있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한동안 휴머시닉서스는 건실하게 지원금과 투자금을 받아 모으는 것에는 일이 잘 풀렸다. 그러므로 휴머시닉서스의 사장은 “신기술 개발”에 투자를 한다는 명목으로 비슷한 분야의 이런저런 기술 회사들에게 다시 투자금을 뿌리면서 무엇 하나 “잘 걸려 들기를” 바라고 있었다.


휴머시닉서스가 그렇게 발을 들여 놓은 회사 중에 어느 외곽지역 우주정거장에 있는 사무실에 자리 잡은 “주식회사 염라대왕”이라는 곳이 있었다. 주식회사 염라대왕은 사람이 늙어서 죽게 되면 그 뇌를 시체에서 빼내서 기능이 완전히 정지하기 전에 보존처리를 해 주는 회사였다. 그렇게 해서 사람의 뇌만 활동을 계속해서 살아 있게 한 상태로 뇌를 가상현실 기계에 집어 넣고, 육신을 갖고 살아 있는 것처럼 가상현실 속에서의 삶을 살게 해 준다는 곳이었다. 주식회사 염라대왕은 나름대로 노인양로원 비슷한 느낌으로 가상현실 속 세상을 안락하고 깨끗하게 꾸며 두고 그 세상을 “천당”이나 “극락”이라고 불렀고, 그러면 뇌만 보존 되어 있는 사람들은 그 가상현실을 영원히 즐기면서 지낸다는 것이었다.


휴머시닉서스의 사장은 주식회사 염라대왕에 투자한 후에, 주식회사 염라대왕을 나날이 빠르게 성장해 나가는 회사로 선전하고 싶어 했다. 그렇게 되면 많은 사람들이 주식회사 염라대왕의 전망을 밝게 보고 투자를 할 것이었다. 그래서 휴머시닉서스 사장은 주식회사 염라대왕의 가입자를 늘리기 위해 애를 쓰고 있었다.


휴머시닉서스 사장은 김형로에게 이런 이야기를 해 준 적도 있었다.


“옛날에는 사람 죽으면 저승에서 좋은 데 가라고 오귀굿이라고 굿을 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장사 지내면서 독경꾼들을 불러다가 무슨 경전 같은 걸 읽히는 사람들도 있었단 말이지. 그런데 이제 앞으로는 굿하고 경읽는 대신에 사람들이 주식회사 염라대왕 특약에 가입하게 될 거라고.


그런데 말이지, 사람들이 왜 사람 죽었을 때 굿을 하고, 경전을 읽고  했냔 말이지. 그게 말이지 따지고 보면 ‘남들이 그렇게 하니까’ 그것 때문에 그냥 그렇게 하는 거거든. 그래서 이런 비즈니스에서 제일 중요한 게, 남들도 요즘에는 다 그렇게 하는 것처럼 보여야 되는 거라고. 그렇게 하려면 일단 주식회사 염라대왕도 가입자수를 확 늘려 놔야 된단 말이야. 그래서 사람들이 ‘요즘에는 다들 주식회사 염라대왕 특약에 가입하던데.’하게 만들어야 된단 말이지. 그렇게만 되면 그게 대박이야.”


그렇게해서, 휴머시닉서스의 사장은 전 직원들에게,


“올해에는 임금 인상은 없는 대신에 직원 여러분 전체에게 사내복지를 확대하기로 했습니다.”


라고 말을 하고는, 모든 휴머시닉서스 직원들이 주식회사 염라대왕에 가입을 하게 만들었다.


그런 식으로 주식회사 염라대왕의 투자자들이 투자한 다른 회사의 직원들을 줄줄이 주식회사 염라대왕에 가입시키는 방법으로 그 가입자수를 급격히 불려 나갔고, 그렇게 몸집을 불린 것이 그럴싸한 모습이 되어 주식회사 염라대왕은 꽤 큰 투자건을 따낼 수도 있게 되었다.


그렇지만 휴머시닉서스의 사장이란 양반이 이곳저곳 돈 놓고 돈 먹고 다닌 것이 결국 오래 가지는 못했다. 우주 초장거리 이동에서 가장 중요한 사회 간접 자본인 시공장성이 테러를 당하고 그것 때문에 주식시장이 주춤한 것이 충격을 견딜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인간이 알고 있는 우주에서 가장 거대한 토목건축물인 시공장성이 위험해졌다는 이야기는 많은 경제 지표를 흔들었고, 그 지표 하나하나는 성단에 딸려 있는 별과 같이 많은 투자자들을 도산하게 했다.


이것저것 투자랍시고 어지럽게 돈을 빌리고 돌려 막아 놓았던 휴머시닉서스도 그때 망했다. 다니고 있던 회사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공교롭게도 김형로는 바로 그 시공장성에 있는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마지막 날의 기억은 김형로에게 아주 또렷하게 남아 있었다. 자기가 다니고 있는 회사가 망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의 사무실 풍경은 거의 예술에 가까울 정도로 오묘한 모습이었다.


여기저기서 술렁거리는 소리와 함께, “망한거야” “법정관리” “부도” “파산” 같은 말들이 들려 오고, 직원들은 저마다 일하다 말고 자리에 일어나서 우두커니 서 있게 된다. 서로 옆에 있는 사람들을 선 채로 쳐다보며 뭐라고 한 마디씩 묻고 답하는데, 저마다 자기들의 눈 속에 서려 있는 갖가지 감정들이 먼저 눈에 들어 온다. 그러다가 하던 일은 마저 다 해야 하나 싶어서 일하던 책상을 본다. 그러면 이제는 망한 회사가 된 회사의 업무에 대한 자료와 서류에 적힌 글씨들이 영원한 무의미와 같은 느낌으로 멀리멀리 멀어져가는 듯이 눈에 흐릿하게만 잡히는 것이다.


김형로는 그 회사의 마지막 모습이 왜 그렇게 똑똑히 기억 나는지 곰곰히 고민해 보았다. 그리고 이제 김형로는 알 수가 있었다. 휴머시닉서스가 망한 것은 그날 주식시장이 다시 한 번 요동쳤기 때문이고, 그렇게 요동친 이유는 시공장성에 다시 폭탄 테러가 일어 났기 때문이었다.


또한 가장 중요한 것으로, 그 테러리스트의 연이어진 공격 때문에, 그 순간에 퇴직금을 받을 수 있는지 없는지 조회하고 있던 김형로의 사무실까지 날아 갔다는 이유가 있었다.

 

3.
김형로는 그렇게 해서 폭발로 몸이 반쯤 증발했고 반쯤은 조각나 버렸다. 그런데 지금 김형로가 고민하고 있다는 점을 보면, 김형로의 뇌는 거기에 속하지 않고 있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김형로는 주식회사 염라대왕에 가입한 적이 있었기 때문에, 주식회사 염라대왕과 계약한 구급구조 회사에서 김형로의 뇌를 가져와서 반영구식 보존 장치에 넣어서는 주식회사 염라대왕 본사로 갖고 간 것이다. 그렇게 해서 김형로는 눈도 귀도 코도 손도 발도 없이 깜깜한 허공 속에서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는 채 똘망똘망한 머릿속 궁리만 남은 뇌 한 덩어리 상태로 배달 되었다.


주식회사 염라대왕에서는 특약에 가입할 때, 이렇게 해서 죽고 나서 뇌만 남으면 그 뇌를 가상현실에 연결해서 천당이나 극락이라고 하는 노인 양로원에서 살게해 준다고 했다. 지금 김형로를 가장 크게 괴롭히는 것이 바로 그 희망이다. 이제 조금만 기다리면 이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안들리는 지금 상태에서 벗어나 밝은 빛과 편안한 정원과 재미난 놀거리가 가득한 실버 타운 같은 곳으로 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자꾸 들었던 것이다. 그렇게 되면 외부 세계와 연결도 해 볼 수 있을테니까 자식들과 아내의 소식도 물어 볼 수 있게 되겠지. 한동안 김형로는 그 때를 기다리면서 아무것도 할 일이 없는 그 상태를 견디며 시간을 참아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김형로는 일이 그렇게 되지는 않을 것을 사실 알고 있었다. 휴머시닉서스가 망할 때 주식회사 염라대왕도 같이 망했다는 소식을 들었던 것이다. 이미 요양원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이야 법정관리를 하면서 채권단에서 어떻게든 계속 요양원 생활을 하도록 유지시켜 주겠지만, 망하는 순간에 새로 들어온 김형로까지 영원히 돈을 써가면서 가상현실 기계에 연결시켜 줄 가능성은 없었다.


그래도 혹시 주식회사 염라대왕을 인수해서 경영 정상화를 해 보겠다는 곳이 나타나지는 않을까? 아니면 내가 이렇게 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이 처박혀서 끝없이 갇혀 있다는 사실이 어딘가에 보도 되어 이 감옥 같은 인권의 박탈이 알려지면 내가 구출 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렇지만 김형로는 거기에 대한 답도 알고 있었다.


먼 하늘의 구름 같은 희망일 뿐이었다. 주식회사 염라대왕은 시간여행이니 어쩌니 하는 데까지 투자하는 가망이 없는 회사였으므로 아무도 인수할 사람은 나타나지 않을 것이 뻔했다. 또 김형로가 어딘가에 처박혀 있다는 사실이 알려져 구출하게 되는 일이었다면 벌써 누군가 구출해 주는 게 맞았다. 지금까지 아무도 나타나지 않고 있는 것을 보면 이미 아무도 쳐다보지 않는 곳에 묻혀 버린 것이다.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릴 바에야, 김형로는 차라리 애초에 폭탄테러가 벌어 졌을 때 구급구조 회사에서 김형로의 뇌를 구조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싶었다. 물론 그렇게 되면 김형로는 영영 이 세상을 떠났겠지만, 지금 이 모양으로 답답하게 있기만 하는 것이 별로 이 세상을 안 떠난 느낌도 아니지 않는가 말이다. 그렇지만, 구급구조 회사로서는 살아 있는 뇌를 보고 구출 하는 것까지가 자기네들 계약이라는 점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그런 만큼 계약에 있는 구출할 수 있는 아직 살아 있는 뇌를 보고, 거들떠 보지도 않고 그냥 우주 공간 속에서 얼어 붙어 죽도록 방치하는 것은 구급구조 회사로서는 살인을 저지르는 것과 비슷한 부담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계약기간이 남아 있는 한은 구급구조 회사는 김형로의 뇌를 주식회사 염라대왕으로 배달해 주어야만 했다.


아마 주식회사 염라대왕의 택배, 우편물 받는 탁자에 김형로의 뇌는 몇 시간 올려져 있다가 이 회사의 집기를 집어 가려는 빚쟁이들이 몰려 들었을 때 아마 무심하게 쓰레기통에 버려진 것은 아니겠나.


한참 동안 신세 한탄과 어쩔 도리도 없이 영영 이러고 있어야 한다는 두려움을 교대로 겪으면서 김형로는 헤메야 했다. 김형로는 옛날 지구에서 방영했던 심야 영화 방송에서 본 “죽지 않는 뇌”라는 영화를 생각했다. 한 이,삼만원 들여 찍은 것 같은 매우 못만들고 조잡한 옛 흑백 영화였는데, 그 영화에서도 몸은 날린 뒤에 머리만 남아 있는 사람이 나왔다.


김형로는 그 영화 속의 사람이 부러웠다. 이 사람은 그래도 바깥을 볼 수도 있었고, 이야기를 들을 수도 있었으며, 남들에게 말도 할 수 있었다. 김형로는 잠깐만 내가 어디 있는지 알 수 있으면 얼마나 시원할까 생각했다. 다른 사람과 글자로 문자메시지 보내듯이라도 이야기할 수 있다면 얼마나 속이 후련할까. 한번만 눈을 뜨고 볼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해서 본 광경이 설령 안드로메다 행성의 어느 괴팍한 수집가가 지하실에 갖춰 놓은 진열장에 김형로의 뇌가 올려져 있는 것이라서, 마를린 몬로와 똑같이 생겼다던 1958년산 식빵이 썩은 잔해와 나란히 보관되고 있는 것임을 알게 되더라도 얼마나 덜 답답하겠느냐 하고 꿈꾸어 보았던 것이다.


그렇지만 김형로에게 그런 일은 없었다. 너무나 간절히 그 처지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나머지 김형로는 정신을 잘 집중하면 초능력이 생겨서 텔레파시로 바깥의 누군가와 이야기를 할 수 있게 된다거나, 바깥에 있는 어떤 물체를 움직인다거나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상상까지 해 보기도 했다. 김형로는 지금 정신을 어지럽히는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이 없고, 속이 불편하다거나 허리가 아프거나 할 일도 없으니 더 확실히 더 오랫동안 방해 없이 누구 못지 않게 강하게 정신을 집중할 수 있기는 했다. 정신을 미친듯이 집중하면 정말로 초능력을 터득할 수도 있지 않겠나 하고 또 무의미한 희망을 품어 본 것이다.


그렇지만 결론은 역시 헛짓이라는 것이었다. 김형로는 바깥 세상에는 아무것도 영향을 미칠 수 없었다. 정신을 미친듯이 집중해 봐야, 그냥 미칠 뿐이었다.


이제부터 김형로의 모든 삶이란, 어떻게 생겼는지도 모를 저장 장비 속에 있는 대뇌 덩어리 속에서 이 생각 저 생각 하는 대로 신경세포 간에 미약한 전류가 오락가락하는 것만 영원히 계속되는 일이고, 그게 전부였다.


괴롭다고 징징거리는 긴긴 시간들이 지나고 나자, 김형로에게 다음으로 몰아 닥친 것은 어마어마한 지루함이었다. 어떻게 해도 이 상황을 벗어 날 수도 없고, 손쓸 방법도 달리 없다는 것을 완전히 깨닫고 나니, 더 이상 생각할 것도, 할 일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김형로는 시간이 얼마나 지나는지, 얼마나 흐르는지 알 수도 없었다.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고 날짜를 셀 생각은 애초부터 안하고 있었지만, 먹고 자는 것도 없으니 엄청나게 지루하긴 한데 한 시간이 지난 건지 이틀이 지난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김형로는 잠깐 꾀를 써서 하나 둘 셋 넷 하고 마음속으로 일초 씩 시간이 지나가는 것을 세면서, 60초가 지났으니 1분, 1분이 60번 지났으니 한 시간 하는 식으로 시간을 쟤 볼 생각도 했다. 그런데 그러고 나니 결국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숫자만 세는 게 되어 지루함이 뻥뻥 터지듯이 커져 나가는 느낌이었다. 결국 김형로는 5일 18시간 33분 8초 동안 숫자 세는 것을 계속하다가 그만 두었다.


김형로는 지루함을 달래기 위해 여러 가지 궁리를 해 보았다. 궁리해 볼 시간은 많았다. 처음에는 할 일 없는 일이었지만 끝말잇기를 하며 시간을 보냈다. 수천, 수만번 혼자서 끝말잇기를 한 끝에 김형로는 “나트륨”처럼 다음 말을 대기 어려운 말들이 한국어에 무엇이 있는지 체계적으로 조사하기 시작했고, 여러가지 단어로 시작할 때마다 그런 단어에 연결시켜서 끝말잇기를 승리하는 족보들을 만들기도 했다. 몇몇 단어들을 사용하지 않는 경우를 한정해서 새로운 끝말잇기 이기는 방법을 연구해 보기도 했고, 반대로 없는 단어를 나름대로 이것저것 만들어 내서 집어 넣는 규칙을 만들어서 끝말잇기를 하는 방법을 찾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나중에는 끝말잇기가 단어를 빨리 떠올리는 놀이가 아니라, 어떤 집합 간의 공통 원소를 찾아내는 최적 알고리즘에 대한 연구처럼 변해간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끝말잇기가 지루해지면 김형로는 마음 속으로 노래를 불러 보기도 했다. 김형로는 좋아하는 노래들을 이것저것 돌이켜서 불러 보았고, 가사가 잘 생각 안 나는 경우에는 나름대로 이런저런 가사를 새로 붙여서 가장 잘 어울리는 것이 뭔지 떠올리면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다가 재미를 붙여서 김형로는 아예 완전히 새로운 가사를 붙인 노래를 꾸며 본다든가 직접 노래를 만들어 본다든가 하면서 계속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그런 식으로 김형로는 갖가지 시간 보낼 일들을 궁리하며 시간을 보냈고, 그렇게 하다가 적당히 재미난 것이 떠오르면 거기에 매달려서 시간을 보냈다. 김형로가 초반에 자주 매달린 생각할 거리들은 이런 것들이었다. 만약에 세상에서 아직 돌아다닐 수 있다면 어떻게 하면 쉽게 세상에서 성공할 수 있겠는가. 지금 당장 우리 은하계에서 가장 시급한 문제가 뭔가. 지금 은하 연합에서 가장 사악한 정치인은 누구인가. 이런 주제들을 골라서 이리저리 구불구불 이어지는 상상을 계속하다 보면 한참씩은 생각할 거리가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 김형로는 가장 하기 편하고 가장 오랜 시간 동안 생각해 볼 수 있는 문제를 떠올릴 수 있게 되었다. 김형로는 세상이 도대체 왜 생겼고, 왜 이렇게 생긴 것이며, 사람은 왜 태어 났고, 과연 인생의 궁극적인 의미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명상을 하며 고민한다는 데 빠졌던 것이다. 마음을 가라앉혀 가면서 오랫동안 가장 긴 시간 동안 고민해 볼 수 있는 주제가 바로 그것이었다. 김형로는 처음 이 주제를 떠올렸을 때 이게 얼마나 지루함을 달래는 지 좋은 지 깨닫고 매우 기뻐했다. 이 고민을 하면서 김형로는 지루함이라는 자체가 나쁜 기분이 아니라 무엇인가 즐거운 감정으로 변하는 듯한 괴상한 생각마저 품게 될 지경이었다.


김형로는 잠깐 동안이었지만, 드디어 할 일을 찾았다는 생각에 기뻐하기까지 했다. 이렇게 아무것도 느낄 것도 할 일도 없이, 오직 생각만 할 수 있는 운명에 처한 것이, 바로 우주가 탄생한 이유와 삶의 진정한 의미를 다른 누구도 아닌 김형로가 깨우치게 하기 위한 하늘의 뜻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위대하고 숭고한 뜻이 이루어지기 위해, 김형로의 운명이 협잡을 부리는 벤처기업 투자꾼들과 무심한 법정관리 담당 공무원들의 행동에 따라 조정되었다고 생각하면, 그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김형로는 이 매력이 넘치는 주제에 깊이 빠져들 수 밖에 없었다. 김형로는 누구보다도 긴긴 시간 동안 누구도 하지 못한 최고의 집중력으로 이 문제에 대해 고민할 것이고 그러다 보면 정말로 어느 순간 그 모든 것에 대한 명쾌하고 훌륭한 해답을 확 하고 얻어 낼 수 있을 것 같다는 상상도 해보았다. 그렇게 진정한 깨달음을 얻는 순간, 김형로는 옛 전설에 나오는 것처럼 드디어 득도하게 되어 신통력을 얻고, 이 답답한 곳을 벗어나 마음껏 다시 바깥 세상을 날아다니게 되고 우주의 무엇이든 마음대로 할 수 있게 되는 것 아닌가 하는 꿀처럼 달디단 생각을 해보기도 했다.


반대로 비관적인 생각도 해 보았다. 우주의 의미와 인생의 목적에 대해 고민하는 것이 이렇게 시간을 잘 가게 해 준다면, 이것은 그 동안 불안하고 괴로웠던 김형로의 마음속을 점점 무뎌지게 하는 방법이라는 뜻 아닐까. 김형로는 점차 편안하게 마음을 가라앉힌 채 평온히 깊디 깊은 진리를 탐구하고 있다고 좋아하고 있다. 그렇지만, 사실은 그게 그냥 뇌의 예민한 부분들이 점점 닳아 빠지고 죽어가고 있는 것이라는 뜻 아닐까. 그러다가 뇌가 완전히 맛이 가는 순간에 그냥 괜히 걱정이 없어지니까 만사 아무것도 모르면서도, 드디어 모든 것을 깨달았다는 기분만 아주 정신이 확 돌아버린 정신병으로 착각에 빠지게 되는 것 아닐까.


어느 쪽인지 김형로는 알 수 없었다. 그렇지만 김형로는 계속해서 이 문제를 고민해 보게 되었다. 그 어떤 중요한 이유보다도, 달리 아무리 궁리해도 더 이상 할 일이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이리하여 김형로는 긴긴 시간 동안 삶의 의미에 대한 명상에 들어갔다. 김형로는 명상까지 지겨워 지는 순간이 잠깐씩 찾아 오면, 뭔가 즐겁고 평화로운 것을 상상해 보려고 애를 썼다. 김형로는 초록색 곡식이 풍성하게 자라나면서 들바람에 파도처럼 흔들리는 넓디 넓은 평야를 생각했고, 그 곳에 서서 지평선 끝의 하늘 쪽을 보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했다.


놀랍게도 한 번 그 모습을 상상해 보기 시작하니 마치 지루한 순간에 잠깐 잠이 들어 꿈을 꾸는 것처럼, 그 모습이 진짜처럼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졌다. 김형로는 평소에 마음 속으로 무엇인가를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더 진짜 같고 감정이 정확한 것 같았다. 김형로는 조금 더 생각을 집중해서 좀 더 마음에 드는 풍경, 좀 더 세밀하게 보고 싶은 부분을 떠올려 보았다. 그 상상은 거기에 맞춰서 더욱더 구체적이고 선명하게 변했다. 어차피 지금 이 마당에 더 이상 생생하게 느껴볼 방법도 없으니, 이렇게 머릿속으로 그냥 상상한 것이 가장 생생한 것처럼 느껴지는 것 아닌가 싶기도 했다.


김형로는 하늘을 마음 껏 날아다니는 상상을 해 보기도 했고, 물살을 시원하게 가르며 바다 한 복판까지 뛰어 가 보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사막 한 가운데에서 하늘 높이 솟구쳐 올라 별들이 빛나는 저 높은 곳까지 단숨에 올라가서 대지의 모든 풍경을 한 눈에 보기도 했다. 그 모든 것들이 실제로 그렇게 겪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실 이미 김형로는 무엇을 “실제로 그렇게 겪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잊어 가고 있었기 때문에 확실히 그렇다고 하기는 어렵겠지만, 적어도 김형로는 신나고 즐거울 만큼 그런 것 같았다.


나중에 김형로가 한 생각이지만, 참 이래서 사람이 무섭다. 김형로는 이렇게 해서, 이 마당에도 나름대로 적응해서 그럭저럭 지내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었다. 김형로는 우주가 왜 생겨났나 따위에 대해서 고민하다가 지루해 지면 상상 속에 떠올린 기막힌 풍경 속을 이리저리 돌아 다녔다. 그러다가 지치면 다시 인생의 근원에 대한 고민을 시작한다. 이런 일을 번갈아 가면서 하다 보니 김형로는 이 짓도 하고 살만하다는 생각도 들었고, 나중에는 이렇게 살아 보는 사람이 세상에 또 몇이나 되겠냐, 이것도 좋은 라이프 스타일이다, 그런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렇게 되고 나니, 김형로는 다시 겁을 먹게 되는 때가 찾아 왔다. 이게 갑자기 끝이 나면 어떡하나? 김형로의 뇌가 들어 있는 이 상자를 누가 확 깨 버리면 안될 텐데.

 

4.
차라리 구조 되지 않고 우주 먼지로 사라졌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했던 것도 그렇게 오래되지도 않았는데 - 사실 몇 년 전인지도 모르겠지만 – 이제 김형로는 누가 갑자기 자기가 이렇게 있는 것을 중단 시키는 것을 걱정하게 되었다.


뇌가 필요한 산소와 영양분을 차단하기 위해서는 아마 스위치 하나만 톡 건드리면 될 것이다. 그러면 김형로는 잠깐 사이에 잠들듯이 뇌를 쓸 수 없게 될 것이다. 그런 일은 언제나, 어느 때나 일어날 수 있다. 걱정 하는 지금 이 와중에도 갑자기 무심히 아지랑이가 한 번 이글거리듯이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걸 미리 알 수도 없고, 그걸 대비하며 버틸 수도 없고, 그걸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일도 없다.


그렇게 생각을 해보니, 김형로는 또다시 무서워졌다. 화가 치민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이꼴이 되어서도 더 이상 이꼴로 있지 못한다는 걸 무서워하다니. 그렇지만 무서운 걸 안 무섭다고 한다고 해봐야 지금 나 용기 있다고 자랑할 누가 어디 있는 것도 아니었다. 김형로는 그 무서운 생각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진지하게 삶의 참뜻을 생각하고, 아무리 멋진 낙원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고 해도 그 자체가 다 사라진다는 두려움을 잊기는 어려웠다.


김형로는 무서움을 잊게 할 만큼 완전히 새로운 것을 떠올려야겠다고 생각했다. 김형로는 오랫동안 이 일을 궁리했다. 김형로는 뇌가 여기에 갇힌 이후로, - 그 즈음 김형로는 뇌가 갇혔다는 말 보다는, 뇌가 몸 밖으로 나왔다는 말이 더 좋다고 생각 하고 있었다. - 지금까지 느꼈던 감정과 시간을 보냈던 상상들을 다 돌이켜 보았다. 마침내 김형로는 지금 이 신세에서 무서움을 잊게 할 만큼 강한 주제는 외로움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해냈다.


한 동안 누구와도 대화를 할 수 없고, 어떤 동물이나 식물이라도 보고 만질 수 없이 영영 버텨야 한다는 것이 얼마나 크게 느껴졌는지 기억해낸 것이다.


김형로는 외로움을 없애는 수법으로 두려움을 잊어 보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누군가 대화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다. 김형로는 그 방법까지 곧 찾아 냈다. 김형로의 머릿속 어딘가에 있는 갖가지 “기상천외한 방법”들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다가, 20세기말 추리 영화에서 의외의 범인을 만드는 수법이랍시고 지겹게 남용되던 방법이 떠올랐던 것이다. 바로 다중인격이었다.


김형로도 세 편 쯤은 보았던 그 답답한 결말의 영화들은 이런 내용이었다. 주인공은 주인공 주변 사람을 무참하게 살해하는 무시무시한 연쇄살인마를 찾아 내려고 한다. 그런데 그 연쇄살인마 같아 보이던 의심스러운 사람들은 모두 범인이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데 마지막 순간, 알고 보니 범인이 다름 아닌 주인공 자신이었던 것이다. 주인공은 다중인격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주인공은 갑자기 홱 돌아 버리면서  성격, 취향, 기억, 이름이 전혀 다른 사람으로 종종 변하곤 한다는 것이다. 왜 가끔 신들린 사람이라면서, 귀신이 붙었는지 자기가 자기가 아니라 200년 전에 억울하게 죽은 귀신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사람들이 바로 다중인격을 가져서 정신 한쪽이 다른 사람처럼 되어서 움직이는 거다, 어쩐다 하는 이야기도 있지 않은가.


이리하여 김형로는 스스로 다중인격자가 되기로 했다. 김형로가 아닌 다른 사람 한 명을 머릿속에서 또 떠올리고 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김형로와 그렇게 새로 떠올린 사람이 동시에 나타나게 해서 서로 대화도 하고 서로 다투기도 하면서 지낸다면 외로움을 덜어버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었다.


김형로는 일단 좋은 방법이라는 느낌이 들자 바로 다중인격자가 되기 위해 여러 가지로 머릿속을 단련하기 시작했다. 이미 김형로는 머릿속에서 갖가지 이상한 생각을 해내고 거기에 맞춰서 정신을 이리저리 뒤틀어 놓는 데에 더할 수 없이 능숙해진 상태였다. 왼손잡이는 왼손이 발달하듯이, 몸의 나머지 부분이 없는 김형로는 뇌를 이용해서 괴상한 정신상태를 만드는 쪽으로 발달해 있었다.


김형로는 잠깐씩 다른 사람으로 자신이 변해간다는 생각만 느끼다가, 얼마 안 되어 그 다른 사람으로 있는 시간을 잠깐 겪다가 다시 김형로로 돌아 오게 되기도 했다. 그러다가 결국 김형로는 자신의 생각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마음 속 한 켠에서 다른 사람도 있어서 그 사람을 지켜보고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는 경지까지 나아 갔다.


김형로의 계획은 그대로 들어 맞았다. 새롭게 만들어낸 정신과 같이 잡담도 하고 논쟁도 하다 보니, 훨씬 더 시간이 잘 가기 시작했다. 다른 걱정할 것도 확 줄어 드는 느낌이었다. 김형로는 머릿속으로 떠올린 낙원의 풍경 속으로 새롭게 떠올린 또 다른 사람과 같이 가 보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둘이서 노는 것은 훨씬 더 재미있었다. 김형로는 그냥 좋은 풍경을 보면서 산책을 하는 정도가 아니라, 술래잡기를 한다거나, 달리기 경주를 한다거나 했다. 점점 더 그런 상상들은 두터워져서 김형로는 거인들이 돌아 다니는 고원에서 결투를 하며 논다거나, 하늘을 날아다니는 용을 사냥한다거나 하는 일도 즐겨 보게 되었다.


김형로는 떠올린 세상 속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그래 봐야 그 모든 것이 김형로가 마음 속에서 떠올린 상상을 무척 세세하게 느껴 보는 것일 뿐이었으므로, 김형로는 한 순간에 커다란 산을 만들어 본다거나, 태양을 마음대로 움직인다거나 하는 일도 내키는대로 해 볼 수 있었다.


그러던 김형로는 어느날 갖가지 맛있는 음식을 먹는 것을 겪어 보고 있는 중에, 또다른 사람이 “한 명 더 만들어 내 보는 것은 어떠냐”고 제안하는 것을 들었다. 김형로는 재밌겠다는 생각을 했고, 다시 이리저리 마음을 가다듬어서 지금 김형로의 머릿속에서 떠 올린 사람 말고 다른 한 사람을 더 나타나게 해 보려고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런 식으로 김형로는 머릿속에 열 두 사람의 정신을 나타나게 해 버렸다.


그리고 열 세 사람 째의 정신이 나타나는 것을 생각했을 때, 김형로는 그 열 세 사람 중에 누가 처음부터 있었던 김형로인지 잘 알 수 없게 되었다. 상상 속에서 마음대로 세상의 모습을 바꿀 수 있고, 그 세상의 모든 일들을 다 속속들이 돌아 보려면, 이게 김형로의 상상일 뿐이라는 김형로 자신의 생각이 뚜렷해야 했는데, 바로 그 생각이 희미해졌다. 그리고 마침내 김형로는 자신을 잊게 되었다.


그러면서 김형로의 머릿속에서는 자꾸만 더 많은 사람들이 생겨났다. 열 세 사람은 곧 스무사람으로 늘어 갔고, 김형로라는 이름이 그 속에서 완전히 사라지기도 전에 그 숫자는 사백 스물 여섯명까지 늘어 났다.

 

5.
사백 스물 여섯명으로 불어난 정신들이 살고 있는 세상은 그대로 복잡하게 계속 굴러가기 시작했다. 그 세상의 사람들은 마을을 만들었고, 성벽을 쌓았다. 새로운 음식을 만드는 방법과 하늘의 별들을 정리하는 기술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은 서로 편을 나누어 싸우기도 했고, 그러면서 새로운 제도와 법들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 세상은 그런 식으로 점점 더 넓어지고 점점 더 자세해져 갔다. 처음에는 네모난 땅 덩어리 하나만 있던 세상이 곧 거대한 대륙으로 커졌고 얼마 후 둥근 하나의 행성처럼 커졌다. 사람들이 산과 강에만 관심을 갖던 시절에는 그것들 밖에 없었지만, 누군가 어느 하나가 작은 벌레들의 내장을 보려고 하고 세균의 미세한 모습을 보려고 하자 그런 것들도 생겨 났다. 마침내 이 세상에는 거대한 행성과 이웃 행성들도 생겨 났고, 나중에 미세한 원자들과 전자의 움직임에 대해서 궁금해 하는 사람들이 생겨나자, 그에 대한 정교한 모습들도 상상 속에서 떠올라 갖춰지기 시작했다.


세상을 다스리는 지배자들과 부유한 사람들이 왔다가 떠났고, 그 보다 훨씬 많은 비참한 사람들의 이야기와 가난한 사람들이 같이 지나갔다. 이곳저곳에서 일하며 작은 꿈을 꾸는 사람들이 있었고, 커다란 소동 속에 휘말려서 하루아침에 운명이 바뀌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 모든 것들이 잠깐 동안의 딴 생각이었는지, 수천년간의 역사였는지 모르는 시간 동안 끊임 없이 계속 되었다.


그러던 가운데 사람의 몸을 기계와 연결해 주는 기술도 생겨 났고, 사고로 팔다리를 잃은 사람들에게 기계로 만든 팔과 다리를 달게 해 주는 회사들이 생겨 났다. 비슈누라는 지역에도 그런 회사가 하나 생겼다. 그리고 그 회사의 직원 중에 김형로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도 나타났다.


얼마 지나지 않아, 김형로는 단순히 기계 몸을 달아 주는 회사 직원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김형로는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을 해내는 신비한 사람이라는 이야기가 퍼져 나갔다. 김형로는 절대로 고칠 수 없는 병을 고쳐 주기도 하고, 마음대로 물건을 만들어내기도 하며, 다른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단번에 한 행성을 없애버릴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생겨 났다. 그런 김형로를 자신의 모든 문제를 해결 해 줄 사람으로 모시면서 따르는 사람들도 생겨 났다. 그 사람들이 퍼뜨리고 다니는 생각 중에는, 김형로는 온 우주를 마음대로 한 순간에 바꿀 수 있는 자와 동일한 사람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다.


김형로를 따르는 사람이 많아지자 사회 각계 각층에서는 김형로가 위험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김형로가 자신을 따르는 사람들을 모두 거느리고 반란이라도 일으킨다면 막을 사람이 없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곧 누명을 씌워서 김형로를 감옥에 가두거나 사형시켜야 한다는 계획을 꾸미는 사람들이 나타났다.


하지만 정작 김형로는 그런 일은 신경쓰지 않고 자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하고 있었다. 시공장성에서 폭탄터레가 일어났을 때, 김형로는 테러로 다친 사람들을 살리는 일에 정신이 없었다. 김형로는 팔을 잃은 사람에게 기계 팔을 달아 주었고, 심장을 다친 사람에게 기계 심장을 달아 주었다. 김형로는 뇌와 척추를 다친 사람을 도와 주기도 했다. 소뇌를 다친 사람에게 몸의 신경을 조절하며 소뇌 기능을 대신하는 컴퓨터를 대신 달아 주기도 했고, 대뇌에서 소리를 듣는 부분을 담당하는 부분을 다친 사람에게 대뇌의 소리를 처리하는 기능을 하는 컴퓨터를 달아 주기도 했다. 김형로는 회사에서 주문을 주는 대로, 사고로 다친 수없이 많은 사람들을 살려 냈다.


김형로는 그 중에 가장 심하게 다친 남자 아이 한 명을 만난다. 남자 아이는 14세였고, 어느 부유한 집안의 아들이었다. 회사의 지시대로 김형로는 그 아이의 다친 뇌와 다른 몸 부분을 기계로 대체해서 살려 낸다. 너무 많은 몸을 기계로 바꾼 탓에 다치기 전과는 행동거지가 꽤 달라지기는 했지만, 그래도 다치기 전과 겉보기 모습은 똑같고, 목소리도 거의 다를 바 없는 훌륭한 모습으로 그 아이는 다시 건강하게 뛰어 다닌다.


김형로는 문득 그 아이가 이 세상에 있는 것과 다른, 세상 밖의 어떤 신비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는다. 김형로는 아이에게 찾아가 도대체 누구인지 물어 보려고 한다. 그런데 아이에게 달려가는 김형로를 군인들이 막아 선다.


군인들은 김형로를 체포하려고 왔다고 한다. 군인들은 김형로가 세상에 나쁜 생각을 퍼뜨리고 있으며, 김형로 자신이 매우 위대하고 대단한 힘을 갖고 있다고 속임수를 쓰는 사기꾼이므로 조사를 해야 한다고 한다. 김형로는 군인들의 말을 듣지 않고, 아이를 찾아 가려고 한다. 군인들은 김형로를 막아 선다. 조사에 협조하지 않으면 김형로에게 총을 쏠 수도 있다고 말한다.


김형로는 갑자기 두 사람의 목소리를 듣는다. 맑은 여자 목소리였고, 하늘 저편에서 들리는 것 같은 목소리였다. 김형로는 두 여자가 하늘에서 내려온 사람들이라고 생각한다. 한 여자는 지금 당장 아이를 찾아 가서 아이에게 말을 해 보라고 말한다. 다른 여자는 죽을 수도 있으니 일단 멈추라고 말한다. 김형로는 누구의 말을 들을지 고민한다. 두 여자는 집요하게 김형로를 돕기도 하고, 김형로를 말리기도 한다.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 없다. 결국 김형로는 아이에게 뛰어 간다. 아이는 김형로를 쳐다 본다.


김형로는 아이를 붙잡고 아이에게 수술로 연결해 놓은 기계 장치들을 살펴 본다. 김형로는 아이의 머리에 연결되어 있는 컴퓨터를 살피고 그 기계의 상태를 읽어 본다. 김형로를 쫓아 오던 군인들은 김형로를 끌어 내려고 한다. 김형로는 끝까지 아이의 뇌와 컴퓨터를 살펴 보려고 한다. 마침내 군인들은 김형로에게 총을 쏜다. 김형로는 총을 맞고 정신을 잃는다.


김형로는 자신이 죽어 가고 있다고 생각 했다. 정신을 차렸을 때 김형로는 어떤 형구에 묶여 있는 지, 온몸을 움직일 수도 없었고 아무것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는 상태였다. 김형로는 아무것도 알 수 없이 다만 또렷한 정신만이 남아 있었다. 김형로는 다시 모든 것을 곰곰히 생각하기 시작한다.


아이가 다쳤을 때, 아이의 뇌는 무척 많이 손상된 상태였다. 그래서 뇌의 매우 많은 부분을 컴퓨터로 바꾸어야 했다. 그렇지만 뇌의 한 부분만은 살려서 다시 기계를 연결해서 움직이게 하는 데 성공했다. 아이의 어머니는 죽다가 살아난 아이가 겨우겨우 큰 수술 끝에 살아 났다고 안도한다. 아이의 어머니는 이제 더는 아이가 위험에 처하지 않게 하기 위해 온 마음을 다하여 아이를 보살피고 보호한다. 아이도 거기에 맞게 착하게 자라난다. 아이는 다치기 전의 아이와는 좀 달라진 것 같기는 하지만, 뇌의 상당한 부분을 기계로 바꾸었기 때문에 그 정도는 어쩔 수 없는 거라고 어머니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이의 누나는 아이가 달라진 정도가 너무 심하다고 생각한다. 아이의 누나는 아이의 뇌 중에 어떤 부분은 다쳐서 버려지고 컴퓨터로 바뀐 부분이고, 어느 부분이 그대로 남아 있는 부분인지 알고 싶어 한다.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담고 있는 부분은 다쳤지만 친구들에 대한 기억을 담은 부분은 그대로 남아서 이어진 것인지, 그림을 그리던 재능에 대한 부분은 다쳐서 없어졌지만 음식 맛을 미묘하게 느끼던 부분은 그대로 남은 것인지 알고 싶어 한다.


아이의 누나는 다친 아이의 몸을 기계에 연결한 김형로를 찾아서 아이의 수술에 대한 기록을 알아내려고 한다. 아이의 어머니는 그런 짓은 쓸데 없는 짓이라면서 말리려고 한다. 두 사람의 목소리가 김형로에게 들린다.


김형로는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모를 그 생각이 점점 깊어질 수록, 그럴 수록 잠이 들고 꿈을 꾸는 것처럼 의식이 서서히 사라지는 것을 느낀다. 김형로는 말했다. 점점 잠에 빠져 드는 졸리는 목소리였다.


“아이의 뇌는 다 녹아 없어졌습니다. 남아 있는 부분은 아주 작은 기억이 남아 있는 한 덩어리 뿐입니다. 거기에 남아 있는 것이라고는 오직 구구단에 대한 기억 뿐입니다. 저 아이는 인간의 뇌에 부족한 기능을 컴퓨터로 보완하고 있는 것이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그냥 다 컴퓨터일 뿐입니다. 모든 것은 인공지능 컴퓨터가 아이의 살아 있는 밝은 모습을 흉내내고 있는 것입니다. 아이의 남아 있는 뇌는 그냥 장식처럼 붙어 있어서, 고작 사백바이트 정도를 기록할 수 있는 작디작은 단순 메모리의 기능 밖에 하고 있지 않습니다.”


마지막으로 김형로는 눈부신 빛이 쏟아지는 것을 안다.

 

6.
김형로가 눈을 뜨자, 김형로는 두 명의 천사가 자기 옆에 서 있다고 생각했다.


“다시 정리하면, 그러니까, 뇌가 남아 있는 부분이라고는 4백 바이트 짜리 단순 저장 기능 밖에 없는 아주 조금 뿐이라고요?”


두 천사 사이에 한 남자가 나타났다. 양식이었다. 그제서야 김형로는 천사라고 생각했던 둘도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한 사람은 비서였고 한 사람은 미영이었다.


김형로의 눈에는 울고 있는 중년 여자와 그 여자와 같이 울고 있는 젊은 여자도 보였다. 누가, 왜 울고 있는지 하는 의문 보다, 김형로는 보인다는 느낌 자체가 이상해서 우선 눈에 손을 뻗었다. 눈이 있고 만질 수 있는 손이 있었다. 김형로도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뇌 보존 상태가 좋아서 저희 쪽 장비로 만든 재생 신체에 잘 옮겨졌는데, 이상하게 잘 깨어나지를 못하시더라고요. 혼자서 계속 잠을 자면서 꿈이라도 꾸고 계신건지. 깨어날듯 말듯할 때 저희가 계속 말시키고, 뭐 여쭤 보고 했는데 계속 의식이 왔다갔다 하는 것 같으셨어요.”


김형로에게 양식이 설명했다.


“저기 계신 아이 누나가 저희에게 부탁했고요, 그래서 저희가 선생님을 찾아서 다시 새 몸을 마련하고 뇌를 넣어서 깨어 나게 해드린겁니다.”
“저도 저 목소리를 들었어요.”


김형로가 말했다.


김형로가 정신을 차릴 때 쯤 되자, 비서는 김형로에게 왜 아이 누나가 김형로를 깨우려고 했는지 알려 주었다.


아이 누나는 아이의 어머니가 테러에 휘말려서 죽다 살아난 아들을 아끼고 걱정하는 것이 정도가 심하다고 생각했다. 특히 온통 기계로 되어 있는 아이의 몸과 컴퓨터를 유지하기 위해 막대한 돈을 낭비하는 것은 전자제품 회사들에 속아 돈을 날리는 것이나 다름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아이가 다시 살아 왔다는 생각에, 그 많은 돈을 조금도 아까워하지 않고 써 없애고 있었다.


아이의 누나는 아이를 수술하는 일을 지휘한 김형로를 찾아내서 아이의 상태에 대해서 정확한 사실을 알고 싶어 했다. 그렇지만 애꿎게도 김형로도 두번째 폭탄테러로 희생 당한 형편이었고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는 것인지 찾아내기가 어려웠다. 아이의 누나는 여러 전문업자들을 통해 알아 본 끝에, 김형로의 뇌가 보존된 상태로 망한 회사들의 재산을 관리하는 경매창고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미영과 양식의 회사에 부탁해서 그 뇌를 가져 와서 다시 몸에 넣어 깨어 나게 해서 아이에 대해 물어보려고 했던 것이다.


한편 아이의 어머니는, 혹시 아이가 진짜 자기 아이라고 할 수 없는 그냥 기계와 컴퓨터 조각이라는 것을 알게 될까봐 무서워 했다. 그래서 이 계획을 몰래 방해하려고 했다. 어머니는 먼저 김형로의 뇌를 담아 놓은 저장 드라이브를 빼돌려서 다른 행성의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에 넣어 두려고 했다. 그리고 그 일이 비서에게 갔다. 결국 미영과 양식의 회사는 둘로 쪼개져서, 아이 누나의 부탁을 받고 김형로를 다시 깨우려는 쪽과, 아이 어머니의 부탁을 받고 김형로를 영영 그대로 두는 쪽으로 나뉘어 다투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이 모든 사실을 아이가 알지 못하도록 아이의 컴퓨터 뇌 부분을 꺼 놓고 있었다. 아이의 누나가 “도대체 언제까지 이러고 살건데” 라며 큰소리를 지르고 두 모녀가 서로 울어 대는 한바탕 비참한 싸움이 끝나고 나서야, 어머니는 아이의 컴퓨터를 다시 켰다.


그 뒤의 일에 대해서 미영과 양식이 알게 된 것은 열흘 쯤 뒤의 일이었다. 김형로가 미영과 양식에게 다시 찾아 왔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왕 이렇게 된 마당에, 다시 몸 있는 채로 세상을 돌아다니게 해 줘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러 왔다고 했다. 김형로는 그리고 말하기로, 어머니는 아직도 그대로 아이를 보살피고 있고, 어쨌거나 아이의 뇌가 남아서 움직이고 있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어머니는 아이를 그대로 살아 있는 자기 아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제 이 모든 것을 알게된 상황에서 아이가 구구단을 꼽으며 곱셈을 할 때 마다 그렇게 애틋하게 보면서 매번 울게 된다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김영로는 떠나면서, 자기가 겪은 이 모든 일의 결과, 자기는 어머니가 옳다고 생각한다고 덧붙여 말했다.


- 2013년, 영등포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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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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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쑤우 13.05.01 01:09 댓글

    이야기 속의 이야기가 또 다른 이야기와 겹쳐지는 순간이 흥미롭네요~

    주식회사 염라대왕 서비스가 상용화되면 천국 특약에 가입한 사람은 좋겠지만

    누군가 나쁜 마음을 먹고 지옥 특약을 주문한다면 그야말로 지옥이겠네요.

    (전생에 착하게 산 사람은 천국에, 악하게 산 사람은 지옥에, 이도 저도 아닌 사람은 중국에서 환생한다는 유머도 생각나구요~ ㅎㅎ)

    매달 잊지 않고 꾸준히 찾아와주는 곽재식 님의 이야기들 매번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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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3.05.01 09:04 댓글

    감사합니다. 두 이야기가 흥미롭다고 말씀해 주셨는데, 사실 두 가지 이야기 거리 이어다 붙이는 게 쓰면서 고민거리였습니다. 지금은 접작체로 떡칠을 해서 강제로 붙인 듯한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두 추적자들이 서로 겨루고 방해하는 이야기가 구체적으로 묘사되고, 복선도 많이 넣어서 더 깔끔하고 부드럽게 이어 붙였어야 했다는 생각 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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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바람 13.05.05 19:59 댓글

    '주식회사 염라대왕'이 넘 재밌어요. 사람이 영원히 존재할 수 있는 아이디어~~~. 사람이 죽으면, 뇌만 빼내어 그 활동을 유지해준다.

    작가님, 이 아이디어 특허로 출원하세요.

    이 아이디어 하나면 소설을 천편이라도 쓰실 수 있고, 염라대왕 시리즈 같은 드라마도 구상하실수 있을거 같구요. @e_acac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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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3.05.06 19:13 댓글

    재밌게 봐 주셔서 감사합니다. 사실 두 편 째 써먹은 것이기는 합니다.


    뇌만 옮겨서 살려 놓는다는 것은 고전SF소설 "도노반의 뇌"가 대표적이고, 사후 세계를 상업화 한다는 것은 "불사판매주식회사" 같은 고전 SF 소설에서 잘 보여줬던 것인데, 이렇게 저렇게 버무려 보았습니다. 벤처기업들이 막 공격적으로 사업하다가 갑자기 몰락해가면서 하루아침에 서비스 중단으로 낭패 보는 사람도 생기고 하는 이야기를 여기에 엮어서 내용 꾸며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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