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곽재식 망했다

2014.03.01 15:4103.01



망했다


이게 다 안형일 때문이다. 나는 “최면치료소” 앞에 와 있었다. 낡은 주상복합 건물의 햇빛이 들지 않는 곰팡이 슨 복도 구석에 있는 “최면치료소” 사무실은 수상해 보이기만 했다. 들어서면, 치료해 준다면서 최면가스로 나를 기절 시키고, 이 건물 지하실에라면 족히 살고 있을 만한 고려시대 부터 몰래 숭배해 오던 지네 괴물에게 나를 먹이로 던져 줄만한 곳으로 보였다. 아무렴, 안형일이 아니었다면, 이런 최면치료소 앞에 내가 와 있을 이유는 결코 없다고 생각한다.


사실 안형일과는 고등학교 다니던 시간 대부분 중에는 별로 친하지도 않았다. 사실 친하다면 친한 편이기는 했다. 그렇지만, 특별히 재미난 일을 같이 했던 기억이나, 서로 진지한 이야기를 오래 나눴던 일도 전혀 없었다. 그냥저냥 친한 듯 하지만 많이 친하지는 않은 그 정도 친구였다.

그렇지만 대입 시험이 끝나고 학교 수업을 거의 안하면서 허구헌날 놀며 지내는 날이 오게 되자, 안형일과 나는 같이 돌아 다니는 일이 많아졌다. 안형일은 여름과 가을 동안, 피로한 수업이 겹겹히 쌓여 있고, 공부 해야 한다, 대학 가야 한다는 압력이 푹푹 쌓여 있을 때는 친해질 일이 없는 인간이었지만, 쓸데 없는 일 하며 헛시간 보내기에는 은은하게도 죽이 잘 맞았다. 안형일은 아름다운 옷차림의 젊은 여자들이 많이 다니는 시내 어느 길거리의 적당한 의자에 앉아서 "감상"을 하며 시간을 때우는 놀이 따위를 나에게 권했고, 나는 안형일에게 라면 끓여 먹을 때 해물탕면과 쇠고기면을 1.5:0.5로 섞어 먹으면 3배로 맛있다는 지식을 전수해 주는 등의 교류를 했던 것이다.

그러던 차에 나는 대학 입학 면접을 보기 위해 학교를 하루 거르고 멀리 다녀온 일이 있었다. "미래에 어떤 사람, 어떤 직업을 갖고 싶나?"라는 면접관의 질문에, "바로 교수님 같이 학계에서 학문을 연구하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그 전 주에 면접 특강 수업에서 세 시간 동안 배운 면접관에게 애걸하는 비굴한 표정을 얼굴에 띄웠다. 중요하게 들리는 일이기는 하나, 이것이 그날 일어난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사실 그 학교에는 합격했지만 가지도 않았거니와.

그날 일어난 중요한 일은, 저녁에 만난 안형일이 나에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준 것이었다. 안형일과 나와 비슷한 수준의 얼간이 같은 친구들 서넛이 모여서 재미도 없는 놀이로 시간을 한두시간 때우다가 순대를 먹으러 갔는데, 거기서 안형일이 이런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내가 면접을 보러 가서 생소한 지역의 지하철 표를 사면서, 왜 음료수 자동판매기는 돈 먼저 넣고 선택을 하는데, 지하철은 먼저 선택을 하고 돈넣을까라는 의문에 고민하고 있던 바로 그 시각, 학교에 남아 있던 학생들은 한 국회의원의 특강을 듣게 되었다고 한다. 학교 교사들은 국회의원에게 미리 설명해 주기를, 이 학생들은 갑작스럽게 주어진 기나긴 자유의 시간에 짓물러 터지도록 놀아서 지루함에 떡이 된 인간들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국회의원에게 좀 재밌고 학생들에게 와닿는 이야기를 해 달라고 간청했다고 했다.

사실 이 국회의원은 상당히 좋은 평판을 갖고 있던 정치인이었고, 실제로 해 온 일을 보면 약한 사람을 위해 가끔씩은 싸우기도 했고, 사회의 부조리한 일들을 없애려고 공헌도 그럭저럭 했던 사람이었다. 유능하고 똑똑하며 50 주변의 나이에도 멀쩡하니 잘생긴 얼굴이 뚜렷한 사람이었다. 국회의원은 교사들의 설명을 잘 알아 듣고, 진심을 담아 자신의 일평생 동안 깨달은 학생들에게 도움이 되는 충고를 해 주겠다고 결심했던 듯 하다.

그러나 어쩌나. 바다는 짭짤하다고 해도 국이 아니고, 구겨버린 비닐 과자 봉지가 알록달록하다고 해도 꽃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 국회의원은 대한민국 국회의원인 만큼 제정신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인간이었고, 결국 도대체 무슨 생각을 했는지, 술을 진탕 퍼마시며 놀고 자빠지다가 술이 제대로 깨지도 않은 상태에서 고등학교 학생들 앞에서 강연을 하겠다고 기어 올라왔던 것이다.

그리고 국회의원은 학생들 앞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
남학생 여러분! ... 여학생 여러분께는 제가 바로 팍 말씀을 잘 못드리겠는데, 적당히 상황을 바꿔서 잘 알아들으세요. ... 하여간, 남학생 여러분! 제가 간곡히, 지금껏 배우고, 익히고, 공부하고, 겪은 모든 지식과 대한민국 헌정사의 모든 정수를 다 모아서 말씀드리는데요. 제발, 제발, 진짜, 무슨 수를 써서든, 예쁜 마누라를 얻으세요."

교사들은 처음에는 국회의원이 웃기려는 줄 알았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렇지만 국회의원의 이야기는 진심일 뿐만 아니라, 진심 이상이었다. 국회의원은 말을 하면서 무슨 자기 한풀이를 하는 것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 뭔가를 짜내는 듯이 절절히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국회의원은 사랑하는 예쁜 아내를 얻는 것의 장점을 크게 두 가지로 설명했다.


첫번째는 일단 마음을 뒤흔든 미녀의 사랑을 얻게 된 후에는 세상을 대하는 시각이 바뀌며, 그 때의 시각은 한 단계 높은 구름 위에서 하계를 내려다 보는 것과 같다는 것이었다. , 세상의 많은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잘 보이려고" "여자들에게 관심을 끌려고" 농담, 운동, 돈벌기에서부터, 온갖 헛치장, 싸움, 질투에 빠져 별별 쓸데 없는 말과 행동과 감정에 허우적 거리기 등등을 하게 된다고 하는데, 이미 더 이상 좋은 사람을 찾을 수 없을 만큼 만족스러운 미녀를 얻은 후에는 이런 허황된 짓에서 한 걸음 물러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되면, 다른 사람을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사회와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까지 완전히 달라지는 것을 경험하게 된다고 했다.

국회의원이 말한 두번째 이유는 바로 그것이 행복의 완성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국회의원은 우리나라의 옛 신화와 전설에서부터, 중국 고전 속의 일화들과 아라비안 나이트, 할리우드 영화들과 성경에 이르기까지, 모든 행복한 남자의 전형 속에는 항상 미녀 부인이 나온다는 말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국회의원은 미녀 부인 없이 행복하다고 주장하는 남자는 거짓말을 하고 있거나, 미녀나 행복이 무슨 말인지 모르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 말을 할 때, 국회의원은 자신의 진심이 전달되는 기세가 부족함에 안타까워 거의 오열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그날 나에게 들려주던 안형일은 국회의원의 그 얼빠진 술취한 감정을 그대로, 나와 친구들과 양념을 묻히고 뒹굴고 있는 순대 앞에서 펼쳐 주었다. 안형일이 그날 어찌나 열렬히 그 이야기를 나에게 전해 주었는지, 안형일이 국회의원의 이야기를 말하는 음파가 내 주변에 울려퍼질 때, 백마고지 전투의 한 가운데에서 쏟아지는 포탄을 맞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같이 이야기를 듣던 친구들도 완전히 거기에 도취되어, "맞아, 그 국회의원이 그랬어" 라면서 맞장구 쳐 주었고, 안형일이 그 감격과 열정이 지나치게 가득한 이야기의 전달을 마치자, 우리는 순대집에서 술취한 국회의원의 개소리를 전해 들은 것 뿐이면서도, 처절한 전투를 같이 헤쳐 나온 전우와 같은 이상한 감상에 빠질 지경이었다.

그날 남 나는 상당히 설레는 기분으로 잠이 들었다. 나는 그간 학교에서 서로 사귀게 된 남녀를 몇 알고 있었다. 내 친한 친구 중에 거기에 끼는 사람은 아무도 없긴 했다. 하지만 그게 꽤 그럴듯해 보인다는 생각은 종종 하고 있었다. 그런데 안형일이 전해 준 이야기를 듣고 나니, 그게 굉장히 치명적으로 중요하다는 느낌이 들기 시작 했다. 나는 잠이 드는 듯 마는 듯 할 때까지 이야기의 요점과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 대해 곰곰이 생각했고, 그러다 보니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 나서도 그 생각이 이어지게 되었다.


그런데 다음날 학교에 가는 길에 나는 옆반의 김자경을 발견했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 길 반대편에서 횡단보도를 건너 온 김자경과 바로 마주친 것이다. 작년에는 김자경과 나는 한 반이었기 때문에, 나는 인사를 했고, 우연히 우리는 같이 잡담을 하며 학교에 가게 되었다.


같이 걷는 동안 김자경을 보았는데, 이 일을 어쩌면 좋겠는가. 김자경은 키는 작지만 얼굴이 뾰족하고 긴 모습이었다. 내가 고등학교 다니던 해에는 무슨 이치인지, 키가 작으면서 얼굴이 뾰족하고 긴 것이 굉장히 미인이라고 온통 텔레비전에서 떠들어 대던 시기였다. 그리고 김자경이야말로 바로 그런 아이였다. 주변에서, “자경이가 미인은 미인이지”하고 친구들이 잠깐씩 말했던 것도 그 순간 기억이 났다. 그 친구들 중에는 심지어 안형일도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고 보면, 볼 수록 예쁘게 생긴 아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들기 시작했다.


학교에 도착해서 서로 복도에서 갈라져 각자의 교실로 들어 갈 때, 나는 김자경이야말로 바로 그 “행복 그 자체”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나는 도대체 이게 무슨 마음인지, 내가 정말 김자경을 좋아하게 된 것인지를 생각하며 그날 하루를 보냈다.


그 얼얼한 표정을 안형일은 놓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 가는 길에 안형일은 뜬금 없이 여당과 야당의 극한대립에 대한 정치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이 정치 대립이 옛날 삼김 시절까지 올라간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리고, 그러다 말고, 갑자기 나에게 좋아하는 여자가 있냐고 물었다. 그 주제가 삼김은 커녕 삼김들 중에 한 김 하고라도 관련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시시껄렁한 소리를 한없이 주절거리며 가는 그 하교길에서는 그렇게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 또한 매끄럽기만 하였다.


우리 학교에서?”


나는 짐짓, 여자 연예인 중에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 것인지 물어 보는 것인지, 실제 주변의 여학생을 대상으로 말하는 것인 지, 더 정확하게 알아내기 위한 의미로 되물어 보려고 했다. 그런데, 안형일은 되묻는 내 더듬거리는 말투와, 괜히 되묻는다는 그 사실에서 한꺼번에 모든 것을 눈치 챈 것 같았다.


안형일은 대뜸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그러더니 뭔가 간곡한 어조가 되어 말했다.


,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우리처럼 학교 다닐 떄, 이럴 때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팍팍 바깥으로 표현을 해야 돼.”


안형일은 설명 하기를, 학교 다닐 때 만큼 여자에게 좋아한다고 말하기 좋은 때가 없다고 나에게 주장했다. 나는 도대체 지금 나에게 그 이야기를 왜 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안형일은 나의 그런 의문 따위는 가치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는 지, 자기 설명만을 늘어 놓았다.


안형일은 자신의 이론을 나에게 해설하기 시작했다. 안형일의 이론에 따르면, 나이가 들면 좋아하는 여자를 발견했다고 해서 좋아한다고 말하면 여자들이 미치광이나 스토커, 잘해야 수작 거는 바람둥이라고 생각하고 경계하는 상황에 빠질 비율이 자꾸 자꾸 높아지는 것이 인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 친해질 기회를 만들거나 소개를 시켜 달라고 해야 되는데, 그런 식으로 가까워지는 게 지금에 비하면 얼마나 수단이 부족해지는 일이냐고 설명했다.


그에 비해서 지금 이렇게 학교를 다니는 중에는 같은 반이었던 적만 있으면 “한 반 친구”인척 하면서 말 몇 마디 붙여 보는 게 어렵지 않고, 좋아한다고 말한다고 해도, 그냥 “좋아하는 남학생 생겼구나” 정도만으로 생각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만한 기회가 어디있냐고.


더 좋은 건 뭐냐면, 밑져야 본전이라는 거지.”


일생일대의 사랑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개미들의 주식투자에서 사용하는 어투가 되는 것을 들으면 신뢰가 떨어질 만도 했다. 그렇지만 말을 이어 나가는 안형일은 자신의 이론에 조금의 자신감도 잃지 않고 있었다.


만약에 일이 잘 안풀렸다고 해봐. 좀 낙심스럽겠지. 나나 친구들이 ‘너 차였다며’라고 좀 놀리겠지. 그치? 그런데 그걸로 그냥 끝이야. 그 이상은 더 없어. 그런데 봐라. 세상 사람들 다, 어른들도 다 따져보면 저마다 여자하고 잘 안돼서 고민하고 걱정한 기억은 다 있어. 그러니까, 나중에 지나고 나면 네가 무슨 특출 난 손해를 본 것 같은 흔적이 남는 게 전혀 아니거든. 다들 그렇게 되니까. 그렇게 될거니까. 세상에 이런 장사가 어딨어. 잘풀리면 봉되고 용되는 거고, 못풀려도 그냥 지나가는 사람1, 지나가는 사람2 랑 똑같이 아무 차이가 없는 거야.”


안형일이 그 말까지 했을 때, 나는 이제야말로 쓸 데 없는 이야기를 그만하라고 할까 하면서도, 한쪽으로는 계속 김자경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안형일은 계속해서 이야기했다.


네가 나중에 취직을 했다고 생각해봐, 아니 그게 아니라 무슨 장사를 하려고 뭘 차렸다고 해도 마찬가지지. 그렇게 해서 나중에 너보다 나중에 취직한 여자 직원이 좋아 보이는 거야. 잘 맞아, 괜찮은 분위기야. 그런데 그래도 좋아한다고 확 말할 수 있겠어? 못 그런다고. 그거 잘 하면 범죄자 되는 거야. 그 사람 입장에서는 혹시 일할 때 부당한 대접 받을까봐 거절하는 게 엄청 부담이란 말이야. 아예 널 좋아하는 마음이 조금 있다고 해도 마음이 좀 그렇다니까. ‘내가 저 사람에게 잘 보이려고 괜히 저 사람의 고백을 받아 주는 건 아닐까’ 이렇게 감정을 막 의심하게 된다고. 반대로 네 상사 중에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더 골치야. 너 여자 상사한테 좋아한다고 깝죽거리면 ‘얘가 날 우습게 보나’ 하면서 엄청 기분나빠할 걸. 그거 진짜 범죄자 되는 거야.”


그리하여 안형일의 과장되고 왜곡된 이론의 세계에서는, 학교를 졸업하기 전까지 남아 있는 시간 동안에는 모든 세상이 사랑으로 가득차고, 모든 아름다운 여인들이 나를 위하여 방긋 웃으며 가능성의 향기로 유혹하는 세계이며, 그 이후의 세상은 결혼 정보 회사에 다가 돈을 내고 나라는 인간의 평가 금액 만큼의 절차에 따라 주어지는 것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부도덕과 무례와 범죄로만 향하는 어둡고 추우며 메마른 구렁텅이라는 것이었다.


, 내 말 들어라. 어릴 때 좋아하는 여자한테 좋아한다고 말 속편하게 해야돼. 나이 들면 더 못해. 더 기회 없어. 더 어려워. 지금은 좋아한다고 해, 차여, 그럼 끝이야. 그런데 나이들어 봐라, 좋아한다고 했을 때 차이는 게 다가 아니야. 아무리 좋아해도 좋아한다는 말 자체를 하는 것 자체가 허용이 안되게 된다니까. 알겠냐?”


안형일은 자기는 나보다 한 십년 나이를 더 먹기라도 한 양 그렇게 말했기에, 나는 방송에서 내보낼 수 있는 수준으로 조율된 욕을 한 바탕 해주면서 헛소리 좀 그만하라고 했다.


그러나, 그 다음날부터 나는 김자경에게 좋아한다고 말 할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말할 수 없이 비참했다.


그 모든 비참함을 참고 말을 해 보자면, 벌어진 일은 이러하다.


나는 김자경에게 너를 좋아하고 있으니까 사귀자고 말을 했고, 김자경은 “아직은 누굴 사귈 생각”이 없다고, 그때까지 족히 2천명은 거절해 본 것 같은 솜씨로 나를 거절했다. 안형일의 예상대로 안형일과 친구들을 나를 놀려 댔고, 나는 어색하고 부끄러워서 김자경 주변 80미터 반경의 공간에 가까이 다가 가지도 못했다. 80미터라는 수치는 안형일이 나를 놀린다고 평균적인 거리를 측정한 결과다.


이 정도를 두고 비참함이 말할 수 없었다는 것은 아니다. 그 정도라면 말은 할만 하다. 그래서 긴 다른 말 없이 이 정도 이야기는 먼저 꺼낸 것 아니겠나. 그렇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우선 김자경은 “아직 사귈 생각”이 없다는 대답과는 달리, 나를 돌려 보내고 사흘 후에 다른 놈과 사귀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다른 놈”이야말로 내가 평소에 무척 싫어하던 녀석이었다. 도덕적으로 사악하고 생각하고 있었음은 물론이요, 여러 모로 놈이 나보다 못났고 무능하다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데, 그 놈이 김자경과 사귀게 되면서, 이 모든 것이 한순간에 역전된 느낌이었다. 그 놈은 공주와 함께 말을 달리는 백마탄 왕자였고, 나는 그 앞에서 말발굽에 차이는 눈에 뜨이지도 않는 돌멩이 하나일 뿐이었다.


그 놈이 나타날 때 마다, 그 놈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도 나를 비웃는 것 같았고, 나는 쏟아지는 빗방울을 맞듯이 패배감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싸늘하게 젖는 느낌을 느낄 수 있었다. 나는 보잘 것 없고, 매력이 없고, 가치 없는 인간이며, 나의 적이며 내가 세상에서 몰아내야 할 원소라고 생각하고 있는 저 놈이 볼 만하고 매력이 있고 가치 있는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그 놈은 물론이요, 그 놈과 적당히 친한 우리 반과 옆 반의 다른 친구들 40여명과도 서서히 멀어지고 친하게 지내기 어렵게 되었다.


게다가 나는 다른 여학생들과도 확확 멀어지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 반에는 꽤 친하고 말이 잘 통하는 여학생이 한 명 있었다. 가끔 시간은 남고 보고 싶은 영화가 사랑 이야기 하는 코미디다 싶으면, 같이 영화 한 편 보러 갈 수 있는 친구였다. 그 여학생과 그렇게 영화를 보러 가면, 안형일의 헛소리보다는 훨씬 더 가치 있는 담소를 나눌 수 있는 훌륭한 동지임을 알 수도 있었다.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애초부터 이 여학생을 좀 좋아하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거기다가 작은 키 뾰족 얼굴이라는 산들바람과 같은 이상한 유행이 지나간 지금 이 순간을 돌아 보면, 심지어 그 여학생이 김자경 보다 더 예쁘기 까지 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렇지만, 김자경에게 내가 난데 없이 사귀자고 했다가 쫓겨났다는 소문이 퍼지고 나니, 그 여학생은 나를 가까이 하는 걸 꺼려하는 기색이 확 강해진 것 같았다. 내가 그 여학생 가까이에 가기만 해도,


좋아하는 여자한테는 거절 당하고, 너는 그 B급 대용품으로 만만해서 찾아 왔어”


라고 말하는 것처럼 보이는가, 싶었다. 그 여학생도 자기 자신을 그런 별로 소중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대해도 그저 손아귀 놀리는 대로 놀리는 것 같이, 더 못하고 더 허름한 것처럼 보이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하여, 나는 스스로 타오르는 열등감과 주변에서 부채질해 주는 조롱을 받으며, 또한 지옥불을 끄는 데에 도움이 될 촉촉한 관심의 물길은 단 한 방울 조차도 모조리 차압 당한 채, 가히 파산과도 같은 고교 시절의 마지막과 졸업을 맞이하였다.


빚더미와 같던 겨울이 끝나고 대학에서 맞이하는 새 봄이 오자, 그래도 나는 그럭저럭 정신은 차릴 수 있었다. 아찔한 등록금 때문에 하루 하루의 강의는 꼭 심오한 의미가 있어야 할 것처럼 생각 되었고, 대학에서 새롭게 만난 사람들과 새로 사귄 친구들은 다시 신선한 영혼을 조금씩 채워 주는 것 같았다. 고등학교 동문들과 떨어져 학교를 다니면서 자연히 부끄러운 기억을 서서히 잊었다는 점도 큰 도움이 되었다. 물론, 얼토당토 않은 소리로 김자경에게 고백하던 순간이 문득 다시 기억이 나면 혼자서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도 부끄러워서 괜히 아무도 말하는 사람도 없는데 혼자 목소리로 “어이쿠”하고 소리 치는, 그런 서글픈 흉터가 아직 남아 있기는 했다.


그렇지만 두 가지 문제의 불씨가 있었다. 첫번째는 내가 다니는 학교에 안형일도 다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두번째 불씨는 그 해 봄에 내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자를 발견하고야 말았다는 점이었다.


그녀는 “기초 미적분학” 강의를 같이 듣는 학생이었는데, 강의실 문을 들어 서면서 잠깐 옆에 스쳐 지나갔으면서도 나는 “어 뭔가 중요한 것이 지나간 것 같다”고 바로 알 수 있을 지경이었다. 기억 속에서는 짧은 머리카락으로 기억이 되는데, 막상 실제로 쳐다 보면 결코 짧지 않아 보이는 신이한 머리모양을 하고 있었고, 가만히 눈을 내리 깔고 책을 보고 있을 때에는, 이깐 대학 강의 따위 조금도 필요하지 않아 보이는, 이미 사회의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그러면서도, 어쩌다가 웃을 때에는 유치원생이 다람쥐를 보고 웃을 때처럼 웃는 얼굴로 바뀌어, 마치 마술을 부리는 것과 같았다.


그녀는 “기초 미적분학” 과목을 올해 부터 들어야만 하게 되어 있는 경제학과인가, 경영학과인가의 학생이었는데, 나는 출석 부를 때 이름을 듣고 그녀의 이름을 알았고, 우연히 한 번 그녀의 뒷자리에 앉은 후에는 매번 그녀와 그렇게 앞뒤로 앉았다. 세번째 강의를 들을 때, 그녀가 내 앞에 와서 또 앉았을 때에는 그렇게 반가웠고, 네번째 강의에서 그녀가 다시 내 앞자리로 스스로 왔을 때에는 그녀가 약혼이라도 하자고 한 것 같았다.


한동안 나는 그녀에게 멋있게 보이기 위해서, 미적분학은 지루하다고 여기고 있지만 재미 있고 쾌활하고 영리한 학생인냥 가장하려고 했다. 나는 강의실 안은 답답한 데 내 마음 속에는 열정과 재치가 가득 차 있다는 표정을 지으면서 교수의 강의가 졸린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며 - 진짜 졸면 절대 안된다 - 그녀가 고개를 돌리면 보일 만한 곳에 앉아 있었다. “난 예술적인 영감으로 가득 차 있는 정말 멋있고 재미있는 젊은이야, 이런 나에게는 그래디언트, 다이버전스, , 다들 너무 따분하게 들리는 이름이지.” 이렇게 말을 하는 것 같은 표정을 지으려고 애를 썼다.


그러고 있는데, 그녀가,


, 죄송한데 아까 숙제가 뭐라고 한 거죠?”


라고 나를 돌아 보고 물었다. 그녀의 얼굴이 내 정면의 시야를 다 가리자, 나는 우주가 신비와 아름다움으로 가득하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깊게 느낄 수 있었다. 진짜 예뻤다. 내가 아까까지 짓고 있던 표정은 거품처럼 깨어져 사라지고, 착실하고 성실한 표정이 얼굴에 밀려 들었다. 누가 본다면 내 표정은 “제 특기는 벡터의 외적 계산인데요, 가끔 취미로 벡터의 내적 계산하는 걸 즐깁니다”라고 말하는 것 같았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다시 두어번 숙제는 뭐라고 했는지, 교수가 이야기한 말이 뭐였는지, 아까 그 문제를 풀 때 어떻게 하는 지 기억이 나는지, 그런 이야기를 그녀와 나누었고, 그러는 동안 가끔 볼펜 한 자루는 빌려 달라고 할 수 있는 사이가 되었다. 그리고 그러고 나서, 나는 그녀와 친해지게 되면, 그녀가 나를 사랑하게 되면, 정말 좋겠다. 세상에서 제일 좋겠다. 우주에 내가 좋아서 웃는 소리가 가득 차도록 좋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결국 나는 오늘, 그러니까 방금 세 시간 전, 강의가 끝나고 떠나려는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내가 말을 걸었을 때 그녀는 무슨 일인지 궁금해 하면서 나를 쳐다 보았다. 지금 하는 이야기이지만, 정말 아름다운 여자들의 공통점은 말을 걸었을 때, 무슨 말을 하려는 지 궁금해서 쳐다 보는 표정을 하면 확 몇 배 더 예뻐진다는 점이라고 생각 한다.


그러니까, 뭐냐면요. 혹시 토요일 저녁에 시간 되세요? 저녁이라는게 사실 길잖아요. 다섯시도 저녁이라면 저녁이고 밤 열한시도 저녁이면 저녁이고. 그 긴긴 저녁 시간 중에서 길면 길게 짧으면 짧게 아무 때나요. 시간 될 때만 조금 되실까요. 왜냐면, 그게 왜냐면. 벌써 아시겠죠? 그렇죠. 바로 생각하시는 그거죠, 그러니까, 사실, , 그렇죠. 그냥 딱 있는대로 말해서, 엄청 미인이시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러니까 진짜 영광일거거든요.


저녁에 같이 가서 뭐, 뭐 좋아하시죠? 고기나 좀 먹죠 뭐. 스테이크 같은 거. 가끔은 먹어야 되는데, 학기 시작되고는 한 번도 못 먹었거든요. 뭐 시간 없으시면, 그냥 케익이랑 차나 좀 먹어도 되고. 케익 잘하는 데는 알거든요. ‘42.6도’라고, 아시나요? 진짜, 그냥 아무 생각 없고, 부담 없이, 그렇게 밥만 같이 드시면 일단 되는 거거든요. 제가 뭘 기대하거나 이런 게 없어요. 정말 없어요. 한톨도 없어요. 그냥 거기까지만 해도 저는 진짜 70, 80 될 때도 그래, 내가 대학교 1학년 때 세계 최고의 미인이랑 같이 밥을 먹었지. 이렇게 기억이 남을 거 같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이상한 거 같으시면, 그냥 제가 남자가 아니라 음식점으로 가는 길잡이다, 그렇게만 생각하시고, 네비게이션인데 목소리만 나오는 게 아니라 몸체 까지 같이 있는 거다, 그냥 그렇게만 생각하시고 같이 가기만 하셔도 되는 거거든요.


그걸로 그냥 끝내도 진짜 괜찮아요. 제가 아니라고 하면 딱 그냥 끊거든요. 제가 어렸을 때 부터, 여러 번 차여 봤는데, 그렇다고 미련 갖는 다거나 귀찮게 한 다거나 이런 거 하나도 없었어요. 차면 아예 중앙선 넘어 저 멀리 까지 확 날아 가서 정말 편하게 날아 가거든요. 뭐 그렇다고 그렇게 많이 차여 봤다는 건 아니고요. 저도 뭐 잘된 적도 있는데, 하여튼 아니라고 하면 딱 그냥 거기서 멈출 건데요. 그냥 딱. 그렇다고 막 냉정하게 모른 척 하고, 영영 아는 척도 안하고 그런다는 건 또 아니고요. 그러니까 아주 공기처럼 안 보이게 있다가 갑자기 보고 싶을 때 있으면 그때 갑자기 확 불꽃처럼 다시 또 활활 타오르는 것처럼 있을 거라는 거죠.


그러니까, 사실 제가 딱 말 걸려고 불렀을 때부터 아셨죠? 그쵸. 그랬을 거 같은데. 뭐 그러자마자 벌써 답을 마음 속으로 이미 정하셨겠죠. 그래서 저도 정말 겁나는 데, 그냥, 제발. 제발요? ?”


그렇게 말을 하고 나서, 신의 처분을 기다리며, 눈을 질끈 감을까 하고 있을 때, 여신께서는 감동적이게도 나에게 하늘로 날아 올라 오라고 결정을 알려 주셨던 것이다.


그녀는 웃고 나서 나에게 연락할 전화번호를 알려 주었다. 그녀의 웃음은 나를 그 자리에서 다람쥐로 변하게 만들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녀는 정확히 언제 어디서 만날지는 있다가 오후에 전화 해서 다시 이야기 해 달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녀는 서서히 페이드 아웃 되어서 바람을 따라 환영이 없어지는 것처럼 부드럽게 강의실 밖으로 나갔다.


이 모든 것이 나는 방금 짧게 벌어진 꿈은 아닌가 싶었다. 주변의 모든 사람들과 모든 의자와 탁자와 칠판과 벽과 나무와 풀들과 대기의 입자들이 나를 축하하며 노래를 부르는 것 같았다. 벅차 오르는 감정이라는 말을 할 때, “벅”이 누구이길래 찬다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그야말로 벅차오르는 감동을 느끼며 나는 그녀의 전화번호를 저장하려고 했다.


그런데, 때마침 안형일의 전화가 왔다.


오래간만에 점심 때 라면 끓여 먹자. 쇠고기 라면이랑, 해물 라면이랑 섞어서.”


별 볼일 없는 소리였다. 그 쓸모 없는 말에 뭐라고 욕을 했는지, 수긍을 했는지, 기억도 나지 않는다.


그런데, 중대한 사고가 터져 버렸으니, 방금 들은 그녀의 전화번호도 역시 기억이 나지 않았다.


?”


나는 혼자 소리를 질렀다. 분명히 들었는데, 똑똑히 들었는데, 그리고 입력하려고 했는데. 안형일과 라면을 끓이느니 섞느니 하는 통화를 하는 사이에 그만 잊혀지고 만 것이다.


나는 이럴 리는 없다고 생각하고, 다시 가만히 앉아서 종이에 차분하게 기억나는 번호를 써 보았다. 자신감 있게 쓰는 첫 세 자리, 그나마 대충 기억이 나는 것 같은 다음 네 자리, 그리고 마지막 네 자리. 네 자리. 결코 생각이 나지 않았다.


, , !”


나는 생명의 불꽃이 꺼져 가는 것을 목격하는 동화 속의 사나이처럼 안타까운 소리를 내었다. 기억이 안났다. 아까 방금 말로 발음할 때 첫 글자는 높고 둘째 셋째 글자는 낮고 마지막 글자는 좀 높은 소리로 발음 했던 것 같다. 대충 비슷한 숫자를 발음해 봤는데, 하나를 발음하면 그게 맞는 것 같다 가도 다른 것을 발음 하면 또 아까 그 소리가 이 소리 같기도 했다. 알 수가 없었다. 계속 마지막 네 자리를 가지고 고민을 하다 보니, 오히려 점점 기억이 잊혀지면서 옅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마지막 네 자리. 0000번 부터, 9999번 까지. 만 가지 가능성이 있으니, 전화를 만 통 해보면서 아예 확 다 실험을 해 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까지 해 보았다. 그렇지만 너무 힘들기도 할 것 같았다. 게다가 전화번호가 틀린 것인지, 그녀가 잠깐 전화를 받지 않아서 모르고 넘어 가게 되는 것인지 확인할 길이 없다는 점도 문제였다. 그렇게 계속 고민을 하다보니, 그럭저럭 기억이 나는 것 같은 중간 네 자리 숫자도 정확한 것인지 아닌 것인지 문득 의심스럽기도 했다.


나는 뭔가 저주할 대상을 잡아서 욕을 한 바탕 하려다가, 갑자기 생각이 나서 강의실 바깥으로 뛰어 나갔다. 나는 남쪽으로 100미터, 북쪽으로 다시 200미터를 오락가락 달리며 그녀를 찾았다. 그렇지만 전화번호를 다시 물어 볼 그녀는 없었다. 라면 이야기를 하는 동안 학교 바깥으로 벗어 났을 것이고, 내가 전화번호 숫자의 발음을 기억해내며 중얼거리는 동안 버스나 지하철을 타고 이미 이 구를 벗어나 버렸을 것이다.


그냥 끝났다, 어쩔 수 없다, 다음에 다시 물어 보자, 인연이 아닌가 보다.


그런데 그럴 수는 없었다. 그럴 여자가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오늘 오후가 지나가도록 전화를 안하면, 내내 전화를 기다리던 그녀는 이렇게 약속을 어기는 것은 무슨 무례냐고 생각을 할 것이다. 그 새 내가 다른 여자와 어울리게 되었거나, 그녀에게 관심을 잃었다고 오해할 것이다. 그녀가 이미 비워두었을 토요일 저녁 시간은 그냥 버려지게 될지도 모른다. 그녀는 성의와 호의를 모독 당하게 될 것이다. 다음 주에 다시 만나서, “전화번호를 깜빡했다”고 말한다면, 얼마나 그녀를 하찮게 대했는지 조롱하는 말이라고 생각하거나, 그게 아니면 뭔가 켕기는 일을 거짓말로 둘러댄다고나 생각할 것이다.


그것은 아니었다. 그녀에게 차일지언정, 그녀가 차인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할 수는 없었다. 누구는 자기가 차면 차도 차이지는 않는다는 것이 원칙이라고도 하던데, 그런데 그때 내 기분을 한번 생각해 보자, 나는 정말 절박했다.


나는 생각 끝에 미적분학을 가르치는 교수을 찾아 갔다. “큐잉 이론”인지 뭔지, 알 수 없는 것을 전공으로 연구하는 교수였는데, 어지럽게 배치된 수학과 건물에서 교수의 방을 찾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교수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그녀의 전화번호나 연락처를 알려 달라고 하자, 교수는 지독하게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나를 보았다.


학생 연락처를 함부로 외부에 알려 줄 수는 없어요.”


그리고 교수는 마치 그녀의 아름다움은 나도 알고 있다는 눈빛으로 나를 쏘아 보았다. 내가 그 아름다움에 해를 끼치며 달려드는 해충이라는 것 같은 인상이었다. 나는 내가 그녀와 자리 앞뒤로 앉는 사이라고 말했는데, 그러자 교수는 자기는 지난 달 행사에서 노벨상 수상자 두 사람 가운데에 앉아 있었다고 대답했다. 그리고 교수가 더 이상 설명이 없길래.


그런데요?”


라고 물었는데, 그러자 교수는 나에게,


그렇지. 그런데요?”


라고 말했다.


나는 실망해서 교수의 방을 나갔다. 그러다 번득 생각나는 것이 있어 다시 교수의 방으로 되돌아 들어 갔다.


교수님, 그러면 이렇게 하시면 어떻겠습니까? 제가 전화번호를 까먹었으니까 다시 알려 달라는 말을 교수님께 전해드릴게요. 그러면 교수님께서 중간에서 그걸 그대로 걔한테 전달해 주시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저한테 연락처를 알리지 않고도 제가 뜻을 전할 수 있잖아요. 그러니까 교수님께서 중간전달자, 프록시 역할을 해주시는거죠. 그렇게 하면, 정말 제 말이 맞다면 걔가 저한테 연락을 할 거고, 걔가 저하고 그런 일 없다고 하면 교수님께서는 그 때 저를 경찰에 신고하셔도 되고, 강의 시간에 창피를 주셔도 되고, 뭐 여차하시면 뭐 거꾸로 매달아 놓고 때리셔도 됩니다. 하여간, 그렇게 좀 도와 주시면 안되겠습니까?”


교수는 이미 귀찮아졌다는 듯이 어차피 수강생들 연락처 정보는 조교가 다 들고 있으니까, 조교하고 이야기 해 보라고 하며 방을 나가 버렸다.


그러나, 조교를 만나 이야기해 보니, 조교는 무슨 일에선지 “내가 왜 대학원에 왔을까”하는 인생의 번민으로 거의 타다만 골판지 같은 정신력을 가진 상태였고, 내가 데이트 신청을 하는데 전화번호 좀 알게 해 달라는 이야기를 꺼내자, 갑자기 성질을 버럭 내면서,


, 내가 너한테도 시다바리냐!”


라고 하더니, 울어 버릴 것 같았다.


아직까지 그런 것을 본 적이 없던 대학교 1학년 신입생이었던 나는 겁을 먹고 그곳을 도망 나와야 했다.


그렇게 해서, 결국 나는 이 최면치료소라는 곳까지 오게 된 것이다. 나는 분명히 그녀의 전화번호를 듣기는 들었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선명하게 기억도 하고 있었다. 뇌의 한 곳에는 그 기억이 잠깐이지만 새겨졌다는 것이다. 나는 그 기억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서 어떤 신경정신의학적인 묘수를 쓴다는 상상을 해냈다. 아주 어린시절의 충격이나, 중요한 장면을 정확하게 떠올리기 위해서 잠깐이라도 뇌에 들어가 있던 것이 잠재의식 깊은 곳에 숨었던 것을 다시 꺼낸다는 그런 영화 장면들을 생각했던 것이다.


급하게 검색해서 찾아 온 최면치료소는 무슨 흉가 같은 곳에 입주해 있었고, 최면치료소 문 앞에서 저기에 들어 갔다가 잘못하면 죽을 것 같다는 겁도 났다. 그렇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그 안으로 들어 갈 수 밖에 없었다.


우선 이것부터 한 번 풀어 보시고요.”


최면치료소 소장은 나에게 “아주 그렇다 - 아주 아니다” 중에서 고르게 되어 있는 검사용 문제지를 내밀었다. 그녀의 전화번호를 다시 기억하는 일에는 아무 도움이 안될 것 같았지만, 소장은 꼭 해야 된다고 주장했다. 나는, “가끔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도 나는 혼자인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라거나, “나는 모든 일이 잘 되지 않을 것 같아 두려움을 느낀다” 같은 질문이 잔뜩 씌여 있는 벌써 몇 십년 째 재활용하는 것인지 알 수 없을 것 같은 문제들을 잔뜩 풀어야 했다.


나는 최면치료소 소장과 괴상하게 하는 잠자는 흉내를 내는 짓이나, 꿈 이야기를 몇 번 나누었는데, 최면치료소 소장은 그러다가, 그녀가 바로 어린시절 어머니의 모습을 상징한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건 아닌거 같은데요.”


내가 강하게 부정하고, 설령 그렇다고 해도 내가 전화번호를 기억해내는데 도움은 안된다고 항변도 하자, 최면치료소장은,


그러면 어머니가 아니라면, 아버지인거지. 그 여학생이 바로 네 아버지인거지.”


라고 말했다.


나는 실낱 같은 희망으로 최면치료소 소장이 늘어 놓는 말들을 끝까지 들어 보았다. 하지만, 실낱을 붙들고 있어 봐야, 당장 밧줄에 매달려 기어올라가야 하는 지금 상황에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도저히 다른 방법을 생각해 낼 수 없어서, 나는 결국 그냥 아무나 붙잡고 물어 보기로 했다. 그녀는 경제학과 아니면 경영학과 같았다. 나는 경제학과 건물 근처에 가서, 여기 저기 걸어다니며, 그냥 마주치는 사람이면 아무나 그녀를 아는 지 물어 보았다. 그렇지만, 그렇게 애타게 이름을 부르며 뛰어 다니면서 물어 보아도, 그녀를 안다고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하기야, 알고 있다고 해도 무슨 사채빚 받으려고 사람 추적하는 놈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아는 친구 연락처를 함부로 알려 주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녁이 되고, 모든 희망이 사라진 어둠 속에서 슬프게 곡을 해주는 것처럼 빛나는 별을 보고서야, 나는 절망하여 학교에서 나왔다.


다음날인 토요일 점심 때 나는 안형일에게 전화를 했다. 안형일이 말한대로 라면이나 끓여 먹자고 했던 것이다. 안형일은 반가워 하였다.


나는 혹시나 하여 안형일에게 물었다.


, 걔 알어? 여자애인데, 좀 키 크고 머리가 좀 짧아 보이는 데 너무 짧지는 않고, 약간 베이지색인지 흰색인지 그런 색 상의 자주 입고...”


내가 설명하자, 안형일은 놀랍게도 알고 있다고 했다. 심지어 연락처도 알고 있다고 했다.


, 네가 어떻게 알아?”


안형일은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하. 오늘 아침에 걔랑 사귀기로 했거든.”


- 2014, 서초동에서

mirror
댓글 4
  • No Profile
    쑤우 14.03.01 18:42 댓글

    안형일이 잘못했네요 ㅠ_ㅠ

    중간에 그녀에게 말 거는 대사가 정말 주옥같아요! ㅎㅎ

    저도 종류가 다른 두 라면을 섞어먹는 걸 좋아하는데 정말 라면스프의 시너지 작용인지 더 맛있어지는거 같더라구요; ㅎㅎ

    미세먼지가 자욱한 우중충한 봄날에, 한줄기 산들바람같이 청명한 연애이야기 감사합니다~!

  • No Profile
    곽재식 14.03.01 22:57 댓글

    청명한 분위기가 좀 있다가 결말은 죽이 됩니다만, 그런게 또 말씀하신 요즘 날씨에는 더 어울리기를 바랍니다. 잘 읽어주셨다니 감사합니다.

  • No Profile
    신나라 14.03.02 01:08 댓글

    아아, 곽 선생님이 잘못했네요. 곽 선생님이 나빴어요. 왜? 대체 왜!

  • 신나라님께
    No Profile
    곽재식 14.03.02 13:19 댓글

    마감 앞두고 후다닥 결말 빨리 짓는 방법 생각하다보니, 이런 구성이 손쉬워서 한번 써봤습니다. 다음 이야기도 기대 부탁드립니다.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