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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버릇과 태도의 우아함

 

1.
미영과 양식이 대화를 하다가 '이건 우리가 사업을 시작한 목적이랑 전혀 안맞는다'는 말을 하면서 다투기 시작하는 것이 몇 분만일 지를 두고, 비서와 경리 부장은 내기를 걸었다. 내기를 걸고 얼마 후에,


"이건 우리가 사업을 시작한 목적이랑 전혀 안맞잖아요?"


라고 양식이 말하는 소리가 들렸고, 이긴 사람은 비서였다.


두 사람이 내기에 건 돈을 주고 받는 동안, 경마장을 도는 말 신세가 되어 있다는 것을 전혀 모르는 미영과 양식은 자신들의 이어지는 토론만 지루하게 계속할 뿐이었다.


"아무리 일거리가 없어도 그렇지, 애들 과외 해주고 돈 버는 건 진짜 우리 사업은 아니잖아요. 차라리 그냥 개인적으로 하시는 부업이시면 모를까."
"그냥 애들 과외해 주는 거면 나도 부업으로하지. 이건 그런게 아니라니까요."
"아니기는 뭐가 아니에요. 애들 사교육해주는 거잖아요."
"그런데 이건 애들 붙잡고 뭘 가르쳐 주는 게 아니라, 교육용 시스템을 구해 오는 거라니까."
"그냥 뭐 사오는 거면 택배회사나 특송회사에 시키겠죠. 왜 우리한테 일을 맡기겠어요. 뭘 구해와서 우리가 팔라고 하는 거 아니예요?"
"그런거 진짜 아니거든요. 우리가 하는 일은 해바라기 은하계까지 가서 이걸 다른 행성에도 설치하려면 어디까지 뭘 사와야 하는 지 알아내서 옮겨 오고 설치 도와주는 것까지가 우리 일이라고요."
"그건 무슨 학습지 떼와서 돌아다니면서 동네 애들한테 가입하라고 하고 그런거랑 비슷한거 아녜요. 왜 그런 사람들 있잖아요. 애들 모아다 앉혀 놓고 무슨 약장수처럼, 이 학습지 가입하면 무슨 게임기 준다, 장난감 준다 그런 소리 장황하게 떠들어서 애들이 집에가서 부모한테 조르게 하려고 꼬드기는 사람 있잖아요."
"아니래도 그러네. 만약에 그런거면 내가 애들 모아 놓고 춤을 추든 노래를 부르든 그건 내가 다할테니까, 김 이사는 우주선만 조종해요."


이어지는 긴 논쟁 끝에 두 사람이 이 일을 맡기로 결심할 무렵, 경리부장과 비서는 두 사람을 두고 또다른 내기를 걸어 보려고 협의 중이었다. 이번 일을 맡게 된다 안맡게 된다를 두고 내기를 걸어 보는데 대해 이야기를 했지만, 결국 일을 맡게 된다는데 두 사람이 모두 생각이 같아서 내기를 할 수가 없었다.

 

2.
미영과 양식이 사무실이 있는 은하수의 G581E 행성에서 출발해서 해바라기 은하계까지 3천7백만 광년을 가는 동안, 송진혁이라는 한 회사원은 지구에서 자신의 집과 직장 사무실 간을 주기적으로 반복하여 출퇴근 하는 삶의 고요함을 느끼고 있었다.


따분한 생활이었고, 오후 세 시쯤이 되어 조용한 사무실 방에 앉아 있으면 저절로 졸음이 솔솔 쏟아지는 조용한 나날이었다. 그렇지만 송진혁은 엷은 졸음 속에서 그래도 정말로 요즘 같기만하면 더없이 행복한 것이라는 생각을 문득문득할 때가 있었다.


송진혁이 맡은 일이란, 회사 구석구석의 돌아가는 사정을 컴퓨터로 살펴 본 뒤에, 회사에서 새롭게 할 수 있는 일, 개선할 수 있는 일을 찾아서 아이디어를 쓴 뒤에 보고하는 일이었다. 이것저것 흥미가 닿는 대로 거대한 회사의 면면을 찔러 볼 수 있어서 재미가 있기도 했고, 마음껏 떠오르는 생각을 그저 재미나게 써대기만 하면 일이 끝났기 때문에 신경 쓸 일도 적었다. 아이디어를 어떤 숫자만큼 내는 것만이 업무였기 때문에 나쁜 아이디어를 냈다고 닥달하는 사람도 없었고, 보고서를 엄격히 검토하며 따지는 누군가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비슷한 명칭의 업무를 부여 받은 같은 도시의 다른 수천명의 사람들과는 달리, 글자체를 굴림체 9포인트로 할 지, 맑은고딕 10포인트로 할 지를 두고 고민을 하면서 어떻게해야 이 문서를 읽을 사람의 비위를 조금이라도 더 잘 맞춰 줄 수 있을까, 마음 졸여가며 결과를 가다듬을 일도 없었다.


아쉽게도 같은 직급의 다른 직원들에 비해 월급은 조금 적었다. 그렇지만 그조차도 그저 조금 적을 뿐이어서 큰 불만은 없었다. 거기다가 같은 전공의 학위를 가진 사람이 정부 고위직으로 올라가면서 엮어 만든 특이한 법령 덕택에 송진혁과 같은 전공을 가진 사람은 함부로 해고를 할 수가 없게 되어 있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대우도 꽤나 극진히 해 주게 되어 있어서, 송진혁은 전망이 좋은 방을 하나 혼자 쓰도록 배정 받았고, 금희라는 이름의 전속 비서도 딸려 있었다.


송진혁이 고민거리를 찾는다면 그나마 비서인 금희가 걱정이기는 했다. 금희와 송진혁은 지나치게 가까웠다. 송진혁의 결혼 생활을 위협할 치명적인 선을 넘은 것은 결코 아니었다. 두 사람은 취향과 성격을 잘 헤아리는 비서와 그 비서의 모습과 일에 극히 만족하는 사무실 주인의 관계에 머물러 있었다. 애처롭게도, 두 사람 사이의 친목이 쌓이다가 어느 무게를 넘은 것이 한 원인이었는지, 금희는 어느 날 야근을 앞두고 같이 저녁을 먹던 때 이후로 안타까운 표정으로 송진혁을 보는 일이 많아졌다. 금희는 송진혁의 아내를 부러워하고, 송진혁의 아내와 자신을 비교하면서 과연 송진혁의 아내는 송진혁에게 훨씬 더 훌륭한 반려자라는 사실을 느끼면서 혼자서 자신은 부끄럽고 못났다는 생각을 하느라, 하루 종일 가슴이 답답하기만 하기도 하였다.


송진혁 역시 이런 분위기를 알고 있었다. 사실 송진혁이 보기에, 금희는 항상 마음이 잘 맞는 업무의 짝이었고, 다른 모든 면에서도 매력이 부족한 사람이 아니었다. 매사가 신기할 정도로 마음이 딱딱 맞아 드는 것은, 이제는 지긋지긋할 정도로 부부싸움을 해 왔던 아내와는 전혀 다른 관계의 배경이 되어 주었다. 송진혁과 동갑으로 차분하면서도 늘씬한 모습의 아내와 다르게, 금희는 스물여섯살, 어린 나이에 송진혁 보다는 20 센티 쯤은 작아 보이면서 항상 경쾌한 목소리를 사용하고 있었다. 이것이 아내와 무척 다르다는 생각이 괜히 들 때가 있었다. 그러니까 송진혁도 가끔 아내와 금희를 비교할 때가 있었다는 것만은 사실이었다. 게다가, 직장에서 항상 같이 지내다보니 송진혁이 금희와 함께 있는 시간이 아내와 함께 있는 시간보다 훨씬 더 길기도 했다.


그렇지만, 송진혁의 이러한 고민은 결코 송진혁의 아내가 주는 도덕적인 안식과 가정의 평화를 넘어 서고 있지 않았다. 집에 돌아와서 아내를 다시 보게 되면, 송진혁은 자신의 아내가 얼마나 현명하고 친절하며 또한 아름다운 여자인지 날마다 다시 깨닫게 되었다. 침대에 같이 누울 때마다, 송진혁은 바로 아내와 같은 이런 모습의 여자가 사춘기 때부터 자신이 동경해왔던 바로 그 환상에 가장 가까운 여자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거기에 두 자식을 같이 기르며 오랫동안 세상을 헤쳐온 동지로서의 감상이 더해진다면, 금희의 눈동자에 있는 안타까움이 아무리 간절해진다고 해도 결코 송진혁을 흔들 수는 없었다.


그러므로 송진혁의 고민이란 사실, 금희를 불쌍하게 여기는 마음과 미안한 마음이 든다는 것과 매일 저녁이면 사라지는 역설적으로 위선적인 죄책감이 전부였다.


아마 미영과 양식이 이러한 진혁의 모습을 보았다면, 미영은,


"이런 식으로 처신하는 놈이 제일 미운 놈이야."


라면서, 계속 금희와 같이 일을 하고 있는 송진혁에게 얼큰한 욕설을 선사해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금희는 내내 울적한 표정을 짓고 있다가도 어쩌다 송진혁과 같이 이야기를 하며 일을 하다가 유쾌한 순간이 잠깐이 있을 때, 저도 모르게 행복하게 웃었다. 세상 다른 곳에서는 결코 그만큼 기뻐하지 못할 만큼 행복하게 웃었다. 웃는 시간이 지나가고 나면 그만큼 더 허망하고 쓸쓸해져서 더 갑갑해 했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우는 것도 또 금희였다.


송진혁과 같은 상황의 다른 사람을 두고 나중에 미영은 다음과 같이 해설한 적이 있었다.


"저 자식은 저게 고민이라고 골치아파하지만, 그런식으로 감정에 자극이 생기는 게 사실은 저 놈한테 더 행복한거라고. 일단 생활이 지루하지 않고 사건이 자꾸 생기니까 재밌지, 거기다가 점점 나이가 들어가지만 아직 인기가 있다는 자신감도 채워주지, 그러면서도 그보다는 자기 처가 조금 더 낫긴 나으니까 자연스럽게 '나는 선을 넘지 않아'라면서 무슨 대단한 선행이라도 하는 것처럼 혼자 도덕에 기준이 높은 사람인 척도 할 수 있단 말이지."


아닌게 아니라, 송진혁 스스로도 행복하고 편안하기만한 자기 삶 속에서 이 작은 고민이, 진짜 고민이 아니라 지루함을 없애주는 보너스 행복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그 때가 바로, 날 좋은 봄, 오후에 사무실에서 금희와 함께 서류를 같이 보다가, 또 그렇게 금희가 즐겁게 웃다가 돌아서면서 허탈해 하며 슬퍼한 순간이었다.


이때, 송진혁은 "고민이 고민인가"라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들고 있는 서류를 다시 보았는데, 서류에 인쇄된 글씨가 춤을 추듯이 변해서 엉뚱한 말로 보이는 것 같았다. 꼭 이렇게 보였다.


"안드로메다 은하계의 한강주의자 조직을 구출하라."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인가 싶어 다시 찬찬히 읽어 보려고하자, 서류의 내용은 원래대로 돌아 갔다.

 

3.
미영과 양식이 도착한 해바라기 은하계의 자율학습 행성은 행성의 별명 그대로 거대한 대안학교가 있는 곳이었다. 주로 다른 은하계 곳곳에서 살던 부유한 주민들 중에 자기 자식들을 새로운 방법으로 교육하고자 모여든 사람들이 개발한 행성이었다.


미영과 양식은 주문 받은 대로 가장 좋은 교육 장비를 구해 와야 했고, 그러기 위해서 두 사람도 직접 교육 장비들을 사용해 보기로 했다. 간단한 설명을 들은 두 사람은 미영과 양식은 교육 장비 안에 들어가서 장치를 사용해 보았다.


두 사람이 사용해 보니, 그 장치란 것은 행성의 교육위원회가 종합 관리하는 훌륭한 가상현실 장치였다. 보고 듣는 것이 실제와 거의 똑같이 느껴질 뿐만 아니라, 실제로 몸에 일정한 중력을 걸어서 움직이면 운동을 할 수 있는 장치였다.


"이런 게 왜 필요한거죠? 등하교길이 멀어서 귀찮으니까 만든건가?"
"그게 아니라 체험학습이나 야외학습 같은 거 잘하려고 그런거겠지. 삼국시대 역사 배울 때는 진짜 삼국시대 같이 생긴 가상현실 거리로 다같이 들어가서 겪으면서 배우고, 그러라고 그런거 아녜요?"


두 사람이 장비를 소개하던 교사에게 말했다. 그러자 교사는,


"그런 것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따로 있습니다."


라고 하더니, 갑자기 대뜸 들고 있던 나무 막대로 양식의 머리를 휘갈기려고 했다.


양식은 피하지도 못하고 나무 막대로 강하게 두들겨 맞았다. 양식은 무슨 짓이냐고 따지려고 했지만, 그 보다 더 놀라운 일이 있다는 것을 곧 알아차렸다.


"어? 분명히 맞았는데. 안 아프네요."


교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교사는 가상현실 기계를 교육용으로 사용하는 가장 큰 이유는 이 기계를 사용하면 학교 폭력을 예방할 수 있다는 점이라고 설명했다.


처음 자율학습 행성에 부유한 개척자들이 왔을 때는, 훌륭한 지식과 교육 수단이 입력된 로봇들을 데려다가 가장 안전한 곳에 자녀들을 두고 가르치는 것이 대안교육이었다. 그렇지만, 그렇게 혼자 지내면서 로봇에게만 지식을 배우자니, 다른 사람들과 같이 지내면서 배우게 되는 경험들을 교육하기가 어려웠다. 여기에 대해서 급진파 개척민들은 "그런식의 경험이 요즘 시대에 실제로 소용이 있는 곳은 전혀 없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실제로 뭔가 정말 유용한 것을 배우는 것이 있건 없건, 아직 이 우주에 있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 성공을 하려면 적어도 다른 사람들에게 "우리 자식들도 인간들 사이에서 부딪기며 배웠다"고 선전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해서 사용하게 된 것이 여러 학생들이 온라인으로 접속하는 가상현실이었다. 가상현실 속에서 아이들끼리 서로 같이 지내면서 같이 배우는 모든 것이 보통의 지구 학교와 매우 비슷하다. 보고 듣고 느끼는 것도 진짜 갖고 성능은 나날이 좋아져서 운동을 하면 근육에 자극을 걸어서 실제로 신체를 발달 시키게 하는 기능도 완벽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한가지 차이점이 있으니, 그 누구도 다른 사람을 때릴 수가 없었다. 서로 손을 잡거나 경기를 하면서 몸이 닿는 감촉은 가상현실 장치가 전달하지만, 그 충격이 설정해 놓은 것 이상으로 강해지면 더 이상 그 감촉을 전달하지는 않는 것이다. 그래서 아이들 간에 싸움이 붙어서 누가 면상에 주먹을 날린다고 해도 그냥 얼굴에 주먹을 살짝 갖다 댄 느낌 밖에 들지 않는다.


자율학습 행성은 바로 이 가상현실이 어느 정도 정교해지면서 본격적으로 인기를 끌기 시작했다. 학교폭력과 체벌의 원천적인 차단이 이루어지지만, 서로 협동하고 갈등하고 본받고 질투하기도 하는 교육 공동체였다. 교사의 수업을 방해하는 학생은 벌을 주거나 내 쫓는 것이 아니라, 그 말과 행동이 더 이상 보이고 들리지 않게 되도록 차단시킬 수 있었다. 초기에는 아이들끼리 싸우다가 "가상현실 기계 밖으로 나와서 진짜 집에 찾아가서 패주겠다."고 협박하는 아이들도 있었지만, 그런 일을 실제로 하기는 쉽지 않았다. 게다가 모든 학교 생활을 가상현실 속에서 하는 문화로 다들 젖어들게 되자, 가상현실 밖에서 누군가를 때리고 싶다는 생각 자체를 모두들 잘 하지 않게 되기 시작했다.


대신에 생겨난 것이, 아이들이 서로 다툼이 일어 났을 때 말로 서로를 공격하려고 하는 일이었다. 따라서 한동안 자율학습 행성에서 애들 싸움이란 것은 서로 살벌한 욕설을 퍼붓는 일이었다. 공격의 수단이 그것밖에 없게 되자 아이들은 더 심한 욕, 더 강한 욕들을 다양하게 창작해서 사용하게 되었다. 나중에는 기가 막힐 정도로 잔인하고 더러운 욕으로, 몇 마디 서로 퍼붓는 사이에 평생에 마음에 못이 박힐만한 잔인한 감정을 주고 받는 경우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자, 행성 교육위원회는 가상현실 장치를 대대적으로 개량했다. 가상현실 장치는 주고 받는 모든 말들을 해석해서, 욕설로 사용되는 단어들은 자동으로 들리지 않게 차단하는 프로그램을 집어 넣었다.


"정말요? 이 속에서는 욕을 하면 안들린다는 거에요?"


미영은 그 사실을 알자마자 양식을 향해서 욕을 해 보았다. 양식은 아무 말도 안들린다는 표정이었다.


"진짜 신기하네."


양식도 재밌어하면서, 두 사람은 서로 욕을 한참 동안 떠들어대면서 상대방의 말이 안들린다는 사실에 재밌어 했다.


그러자 아이들은 말 없이 종이에 글자로 욕을 써서 서로에게 보이기도 하였고, 욕설 단어의 한 음절만 발음했다가 프로그램이 인식하지 못할 정도의 시간을 거친 후에 다음 음절을 발음하는 식으로 욕설을 하는 방법을 쓰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방법은 그저 우스꽝스러울 뿐, 정말로 상대방에게 공격을 하는 효과가 적었다. 결국 아이들은 다른 방법을 찾게 되었다.


아이들이 생각해낸 다른 방법이란, 욕설 단어를 전혀 쓰지 않으면서도 상대방을 괴롭히고 충격을 주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그런 방법을 위해서 아이들은 상대방이 얼마나 고통스럽게 죽기를 바라는지, 상대방의 어머니나 아버지에 대해서 자신이 얼마나 혐오감을 갖고 있는지를 긴 문장으로 설명하는 방식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연쇄살인마의 범행을 설명하는 신문기사와 같은 어투로 말했지만, 그런만큼 더 생생하고 더 극적으로 상대방이 죽게 만들겠다고 저주하며 싸우기 시작했다. 어떤 아이들은 정말로 살벌한 공포 소설의 한 문장처럼 기가막히게 살떨리는 말을 상대에게 던져서, 단번에 며칠간 잊혀지지 않는 감정을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자, 몇몇 강도가 세고 자극적인 표현들이 관용적인 수법으로 여러 아이들 사이에 널리 유행하기 시작하였다. 아이들은 이런 표현들을 서로 배워서 여기저기에서 떠들며 싸웠다. 이런 말들은 더 길고, 더 서술적이지만 일종의 욕설 단어의 기능을 하는 셈이었다. 그렇지만 행성 교육 위원회가 강화시킨 가상현실 장치의 인공지능이 가진 성능은 더욱더 대단하게 발전해서, 이런 식으로 반복적으로 욕설의 기능을 하는 표현을 찾아내면 그런 긴 설명 조차도 인식하고 포착해서 전달되지 못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니 아이들은 싸우면서 상대방을 공격하려면, 인공지능이 포착할 수 없는 새로운 자기만의 표현으로 상대방을 저주하고 괴롭혀야 했다. 힘이 세거나 키가 큰 아이가 싸움에 유리한 것이 아니라, 보다 유려한 수사학적 재능을 가진 아이가 싸움에 이기는 세상이 된 것이다. 이러니 아이들이 싸울 때 쓰는 말은 갈수록 복잡해지고, 갈수록 정교해졌다. 놀라운 비유법들과 참신한 심상 표현으로 상대방을 자극하려는 시도들이 끊임 없이 이루어졌다. 이 행성의 아이들이 가상현실에서 싸우는 것은 마치 두 사람의 시인들이 서로 싯귀를 주고 받으며 같이 한 편의 시를 만들어 나가는 모습과 비슷해질 지경이었다.


어떤 아이들은 다른 방법을 찾기도 했다. 상대방에게 욕을하는 대신에, 상대방이 매우 비참하게 살해 당한 모습이나, 상대방의 가족이 처참한 꼴을 당한 모습을 사실적이고 충격적인 그림으로 정교하게 그려서 상대의 눈 앞에 들이대는 방법으로 서로 괴롭히는 아이들이 생겨 났다. 잔인하고 추잡한 영상을 선별해 내는 기능을 가상현실 장치의 인공지능이 갖추게 되기 시작하자, 아이들은 인공지능이 인식하기 어려운 상징적인 도안과 추상적인 선과 면으로 상대방에게 혐오감을 표현하며 다투기도 하였다. 마침내, 행성 교육 위원회에서는 이 정도로 기교적인 방법들로 아이들이 다툰다면, 큰 부작용 없이 오히려 다툼이 갖고 있는 교육적인 가치를 줄 수 있다고 보고, 이러한 수위의 싸움은 허용하도록 장치를 조정해 두었다.


자율학습 행성을 비판하는 사람들 중에는 사람이 정말로 두들겨 맞을 수 있다는 육체적 위협이 있는 상태에서, 겁을 내거나 용기를 내면서 경험하고 배우는 것은 전혀 다른 경지의 경험이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이 있기는 했다. 아이들끼리 서로 만나고 어울리는 것이 가상현실 속에서 이루어지기는 하지만, 거기에 아주 작게 나마 정말로 피와 뼈가 부딛힐 가능성이 있지 않다면, 어떤 선에서 그러한 경험은 가짜일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성장하는 사람의 감정과 심성은 실제로 수틀리면 발길질하고 머리끄댕이 잡을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나며 배우는 마음보다 어떤 면에서 분명히 더 연약할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렇지만, 자율학습 행성에 모인 사람들은 그런 이야기야말로 오히려 근거 없이 낭만적이기만한 주장이라고 했다. 자율학습 행성에서 자라난 아이들은 이 행성 바깥으로 나가서도 다른 어떤 행성 출신의 아이들 못지 않은 성공적인 사회 생활을 해내고 있다는 통계조사가 있었다. 그러면서도 이 아이들은 훨씬 더 안전하고 효율적인 시간을 사용하며 자라난다는 것이었다. 더군다나, 자율학습 행성에서는 교육 과정을 마친 후에도 생활을 가상현실 속에서 계속 해 나가는 사람들이 점차 늘어나고 있었다. 3차 산업, 4차 산업에서 11차 산업까지가 발달해 있는 해바라기 은하계에서는 가상현실 속 인간관계만으로도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 직업들이 충분히 많았다. 자율학습 행성에서 사는 가수가 가상현실 속 세계에서 산을 오르고, 바다를 여행하면서 느낀 감상을 작곡한 곡은 안드로메다 은하계에서도 무척 인기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행성 교육 위원회의 교육이란 것이, 그저 무작정 아이들을 보호하기만 해서, 매양 꽃 뿌리며 노래하기만 하라고 하는 것도 아니었다. 행성 교육 위원회의 교육이란, 칼부림을 하는 학생이 생기거나 주먹질을 하며 돈을 뺏는 아이들이 없지만, 험한 세상을 견디는 일과 바깥 세상의 살벌함에 적응하는 방법을 언제나 가르치고 익히게 하려고 노력한다.


"온실 속의 화초로 아이들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비바람을 더욱더 잘 견딜 수 있도록 실험실 속에서 특수 처리를 한 나무로 아이들을 가르치는 거죠."


교사는 말을 마치고, 어제 심하게 싸워서 훈계했던 아이들에 대해 미영과 양식에게 소개했다. 두 아이들이 듣도 보도 못한 기막힌 표현으로 서로의 마음을 아프게 하기 위해 사설을 들어 놓았는데, 듣자하니 감탄스러울 정도로 놀라운 솜씨였다. 교사는 아이들 싸움에서 나오는 이런 기막힌 표현과 발상을 가져 가기 위해, 다른 은하계에서도 많은 예술가들이 와서 이들이 싸울 때 쓰는 말과 그림을 배워 가고 있다고 했다.


"완벽해 보이네요. 뭐 위험한 건 정말 아무것도 없나요?"


양식이 묻자 교사가 대답했다.


"유일하게 저희들이 고민하는 게, 바로 해킹입니다. 가상 현실 장치를 누가 해킹해서 아이들끼리 정말 치고 받고 싸우는 느낌이 전달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을 조작해버리면 한순간에 정말 위험해 질 수 있거든요. 그런 쪽으로 일이 벌어지면 어떻게 말려야 될 지 저희 교사들도 이제는 정말 경험이 없어서요. 그렇지만, 저희들이 워낙 신경을 쓰는 분야니까, 또 애들이 반항심으로 어떻게든 해킹을 해서 미운 녀석 아가리를 내 손으로 날리고야 말겠다는 애들이 항상 달라 붙거든요."


교사는 그래서, 이곳 가상현실 장치의 보안 설계야 말로, 다른 어떤 곳의 보안 프로그램 보다 철저하도록 잘 정비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4.
다시 이야기는 회사에 출퇴근을 반복하기만 하는 가운데, 언제나 속편하게 지내고 있는 송진혁에 대한 내용으로 돌아 간다.


처음 "안드로메다 은하계의 한강주의자 조직을 구출하라"는 글자가 서류에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을 본 후에, 송진혁은 종종 그와 비슷한 이상한 것을 자꾸 보게 되었다. 아내가 전화로 보낸 문자메시지의 내용에 안드로메다 은하계에 관한 내용이 있는 것 같았다가 자세히 보니까 저녁에 외식하자는 내용으로 변한 일도 있었고, 금희가 재밌는게 있다면서 보여준 TV 광고 영상의 첫부분에 한강주의자들의 활동에 대한 구호가 언뜻 보인 일도 있었다.


송진혁은 눈에 이상이 있나 싶어 안과에 찾아 갔다.


"황당하기는 한데, 안드로메다 은하계나 무슨 한강주의자... 이런 게 자꾸 눈에 보여요. 굉장히 비참하고 가난하게 사는 절망적인 사람들 모습, 이런 느낌이요. 정확하지는 않은데, 하여간 그런 느낌을 주는 것들 같은게 자꾸 보이거든요."


안과 의사는 눈을 검진하면서 이것저것을 살펴 보더니, 눈에는 이상이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조심스럽게 신경정신과 문제는 아니겠냐고 물어 보았다.


송진혁은 병원에서 나서면서 눈을 깜빡거려 보았다. 의사가 안약을 넣어서 눈에 보이는 것이 좀 더 이상하게 보였다. 눈물에 반사된 밝은 빛 속에서 송진혁은 한 여자의 모습을 잠깐 보았다. 송진혁은 내일은 정말로 상담을 받아 봐야 겠다고 생각햇다.


그런데 송진혁은 집에 가는 길에, 길가에 붙어 있는 표지판이나 건물 간판의 글자들이 자꾸 이상하게 변하는 것처럼 보였다. "일단 정지"라는 글자는 "깨어 나라"로 바뀌어 보였고, 맥주집이나 피자가게의 간판과 광고 문구들이 "안드로메다 은하계의 한강주의자 운동이 끝나려고 한다" 같은 말들로 바뀌어 보였다. 송진혁은 "정말 내가 미쳐가나" 싶어서 갑자기 겁이 더럭 나면서, 글자들을 안보려고 바닥만 보고 걸어 갔다.


이튿날 송진혁은 정신과에 예약을 하려고 했다. 안타깝게도 모두가 미쳐가고 있는지 정신과에는 예약할 수 있는 시간이 없었다. 송진혁은 시에서 운영하는 시립 심리상담소에 대신 찾아가 보기로 했다.


송진혁이 심리상담소에서 처음 본 것은 정말 안드로메다 은하계까지 다 뒤져봐도 더 이상은 없을 것과 같이 무관심한 표정을 하고 있는 접수원과, 그 접수원이 던져준 "심리검사 문항표"라는 종이 한 장이었다. 거기에는 벌써 수십년 전 부터 아무 생각 없이 똑같은 내용을 쓰던 것과 같은 문항들이 씌여 있었다. "가끔 나는 귀에 이상한 말소리가 들릴 때가 있다." "나는 작은 동물들을 죽이는 것을 어릴 때부터 좋아했다" "나는 여러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어도 갑자기 외로워질 때가 있다." 그런 말들 사이에 내가 해당하는 것이 있는지 표시하라는 것이었다.


이윽고 송진혁의 차례가 되어 상담사를 만나자, 상담사라는 그 노인은 이리저리 컴퓨터 화면을 앞뒤로 계속 살펴가며 송진혁에게 말을 걸어 왔다.


송진혁이 보기에는 심리와도 상담과도 전혀 상관이 없어 보이는 표정과 말투를 가진 사람이었다. 이 심리상담사는, 노인들에게 일자리를 주어야 한다는 시책을 실천하느라, 정부에서 "노인이라면 경험이 많고 경험이 많다면 상담이지"라는 원숭이 엉덩이가 빨갛고 빨간 것은 사과이며 사과는 달고 단 것은 바나나라는 발상에 따라서, 그저 이 학교에 몇 시간 앉혀 두고 저 학원에 몇 시간 앉혀 둔 후에 시립 기관에 취직시킨 사람이겠지. 그렇다고 송진혁은 생각했다.


"심리요법에는 처치가 있고, 또 치료라는게 있습니다. 서로 개념이 달라요. 여기서는요, 그냥 다 털어 놓으시면 돼요. 일단 털어 놓으시는거부터가 처치고 치료거든요."


상담사는 개념이라는 단어를 스스로 사용했다는 사실에 매우 뿌듯해 하는 것처럼 말했다. 하지만 송진혁은 그 말의 주장 자체에는 찬성하여 자기가 겪고 있는 일들을 말했다.


"이게 어떤 거 같냐면요. 도대체 무슨 상관인지는 모르겠는데, 안드로메다 은하계가 굉장히 산업이 발전해 있고 사람들이 정말 부유하고 잘사는 곳이거든요. 그러데 거기에 어떤 굉장히 일부, 소수 사람들은 훨씬 못살고 가난하고 비참하고 괴롭게 못배우고 살아요. 다들 힘들고 병들어 있고 교육 수준도 낮고 그래요. 그게 무슨 원인이 있고, 해결할 방법이 있는데.... 이걸 제가 정확하게 모르겠는데, 하여간 저도 꼭 그 사람들 중에 한 명인 거 같거든요."


상담사는 이미 송진혁의 말을 더 이상 듣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송진혁은 처치와 치료를 하기 위해 말을 계속했다.


"그런데, 거기에 한강주의자라는 사람들이 있어요. 이 사람들은 그 가난한 사람들을 잘 살게 할 수 있는 무슨 그런 정치활동이나, 비밀결사 활동 같은 걸 하는 사람 같은데요. 하여간 이 사람들도 되게 힘들고 비참하게 살아요. 맨날 경찰이나 다른 잘 사는 안드로메다 은하계의 여러 행성 사람들한테 쫓겨다니고요."


상담사는 송진혁을 말을 듣는 척 하면서, 그렇지만 전혀 안듣고 있는 것이 뻔히 관찰되었다는 점에서 성공적으로 듣는 척 하지는 못하면서, 송진혁이 작성한 생활환경에 대한 내용들을 보고 있었다.


"어휴, 잘 사시네. 아무 걱정 없으시겠네요."


상담사는 송진혁에게 송진혁이 이런 환상에 시달리는 것은 지금 너무 행복하고 즐겁기 때문에, 그 행복이 깨어질까봐 불안한 마음이 "잠재 의식" 속에 있기 때문일 수 있다는 설명을 해 주었다. 너무 행복하니까 그게 없어질까봐 겁이 나서, 자신이 힘들고 비참하고 가난하고 불행하게 사는 모습을 마음 속으로 자꾸 생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때까지 완전히 상담사를 무시하고 있던 송진혁은 그 말을 듣자 상당히 놀랐다. 그리고 갑자기 상담사에 대해 자신이 지나치게 오만하게 생각했다는 후회를 할 정도였다.


그러나 집에 돌아온 후에도 송진혁은 자꾸 눈에 헛것이 보이는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뿐만 아니라 이제는 귀까지 이상해졌는지, 침대에서 아내가 "안드로메다로" "나와"라고 소리치는 것처럼 들리기까지 했다.


다음날 출근한 송진혁은 인터넷에서 안드로메다 은하계나 한강주의에 대해 검색해 보기도 했다. 그렇지만 얼마지나지 않아 금희는 정신 없이 고민해야할 새로운 일거리를 가져왔고, 송진혁은 오후가 늦어질 때까지 다른 일들을 잊고 그저 일에만 즐겁게 몰두 했다.


오후 네 시가 되었을 때, 금희와 다시 정말 재밌는 농담을 나누고, 잠깐 쉬면서 빌딩 창밖 풍경을 돌아 보려고 송진혁은 일어 섰다.


그런데 그 때 금희가 울면서 송진혁에게 안겨 왔다. 송진혁의 모든 생각이 일제히 멈추었다. 송진혁은 무슨 할 말을 찾지 못해서 한참 가만히 있었는데, 금희는 이럴 때는 뭐라도 당신이 먼저 말해야 하는 거니까 기다리고 있겠다는 것처럼 계속 말도 없이 우는 소리만 냈다.


송진혁은 정신이 없는 가운데 창 바깥을 쳐다 보았다. 그런데 그러자, 창 바깥 멀리로 내다보이던 먼산 너머로 갑자기 아주 거대한 것이 불쑥 솟아 나오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산 보다 몇 십배는 거대한 크기인 여자의 모습이었다. 여자는 대양에서부터 모습을 드러낸 것인지 상반신을 채 다 드러내지 않았는데도 이미 하늘의 절반을 차지할만큼 거 보였다. 여자는 매우 아름다웠고, 아내와 같이 보이기도 했고, 금희와 같이 보이기도 했다. 파란 하늘 저편에거 갑자기 나타난 그 거대한 여자의 얼굴은 우주가 처음 생겨나던 것에서 멀지 않은 때와 같은 느낌이 들기까지 했다.


송진혁이 저게 다른 사람에게도 보이는 것일리도 없다고 생각했을 무렵에, 여자의 모습은 송진혁에게 말했다.


"정신 차리십시오. 여기는 가상현실 기계 속입니다. 이렇게 행복하고 즐거운 삶이 정말로 있겠습니까."


송진혁은 멍해져서 대답했다.


"이 꼴을 보세요. 그렇게 정말 아무 걱정 없이 행복하기만 하고 그런거는 전혀 아닌데요."


여자의 모습은 계속해서 송진혁에게 말했다.


"당신은 안드로메다 은하계의 한강주의자 입니다. 당신은 아주 비참하고 괴롭게 살고 있지만, 드디어 이 비참함을 벗어나고 한강주의자들의 목표를 실현할 기가막힌 방법을 찾아 냈습니다. 당신은 그 방법이 뭔지 알고 있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그 방법을 우리에게 전해주기만하면, 우리 한강주의자들은 이길 수 있습니다."
"한강주의자라는게 뭔데요? 갑자기 안드로메다 은하계가 왜 나오는데요?"


송진혁이 묻는 말에 바로 대답은 없었다.


"당신은 적들에게 붙잡혔습니다. 적들은 당신에게 처벌을 받든지 배신을 하든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하라고 했습니다. 당신은 배신을 할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처벌을 받겠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적들은 당신을 감금하고 노역에 시달리게 했습니다. 수난을 겪던 당신은 잠깐 쉬기 위해 적들이 제공하는 오락을 잠시 휴식시간에 즐기려고 했습니다. 그 오락은 행복한 휴식을 체험하게 해주는 가상현실 기계 입니다. 그렇지만 그 기계는 적들의 함정이었습니다. 적들은 가상현실 속 인생에 당신이 완전히 빠져서, 당신이 원래 뭘 하는 사람이었는지를 잊게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적들은 당신의 머릿속 어느 한 구석에 있는 우리 한강주의자들이 이길 수 있는 결정적인 비밀을 알아내려고 당신을 이 나른한 지구의 한 풍경 속에서 지내게 하면서 당신의 모든 말과 행동을 모두 기록하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결코 적들에게 그 비밀을 알려 주시면 안됩니다. 당신은 깨어나서 이 가상현실 기계 밖으로 나오셔야 합니다."
"내가 정말 미치려고 이러는건가. 가상현실 밖으로 나간다고 결심하는 순간 세상이 세상으로 안 보이게, 아주 확 미쳐버리는 거 아닌가."


송진혁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그렇지만 목소리는 끊임 없이 들려 왔다.


"정말로 무서운 일이 있는데, 겁이 나니까 거짓말로 숨고 있는 겁니다. 그저 좀 지나면 괜찮아 지겠지, 잘 되겠지, 하고 피하고 있는 것 입니다. 정말로 조금만 생각해 보시면 아실 겁니다. 얼마나 우리가 슬프고 힘들게 지내고 있는지 기억해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힘들고 답답한 것이 원래 당신의 삶이라면 너무 무섭고 싫으니까, 그러니까 지금 이 편안하고 좋은 삶이 진짜고, 두려운 세상은 환상이라고 자꾸 생각하고 싶으신 것 아닙니까?"


송진혁은 그 말을 듣자 흠칫했다. 송진혁은 잠시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들고 갑자기 떠들어 대기 시작했다.


"정말로 이게 다 가상현실인지 아닌지 저는 확인을 하고 나서 마음을 정할 겁니다.


저는 제가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는 현대 과학의 가장 정교하고 극단적인 이론에 대해 탐구하기 위한 실험을 하는 곳을 찾아 갈 겁니다. 그리고 거기에 가서 그 실험결과를 지켜 볼 것입니다. 만약 제가 있는 이 곳이 제가 있는 곳과 같은 수준의 지식을 가진 사람들이 만들어낸 가상현실이라면, 그런 근본적인 수준의 실험결과를 정확하게 알려 줄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런 알수 없는 이론에 대해 실험 결과를 정확히 가상현실에서 보여주려면, 이미 그 이론과 결과에 대해 통달한 수준의 한 단계 더 나아간 과학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그런 점을 다 표현할 수 있도록 가상현실 프로그램을 만들어야만 가짜로 그 현상을 꾸며 내서 현실처럼 나에게 보여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여기가 나와 같은 수준의 사람들이 운영하고 있는 가상현실일 뿐이라면, 그 사람들이 갑자기 내가 보려고하는 실험에 대한 이론을 모두 밝혀서 해답을 만들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므로, 분명히 실험 결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반대로 만약 실험결과가 제대로 보인다면, 이것은 누군가 꾸며낸 가상현실이 아니라 아직 누구도 밝혀내지 못한 자연현상을 보는 그 자체일 것입니다.


혹시 내가 상상하지 못할 정도의 새로운 단계의 지식을 이미 가진 사람들이 운영하고 있다면 또 다른 문제일 수는 있을 겁니다. 내가 보기에는 아무도 알지못할 최신 과학 이론 실험처럼 보이지만, 가상현실 바깥에서는 다들 알고 있는 지식으로 꾸민 가상현실일 뿐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만약에 정말로 그 정도로 뛰어난 자들이 운영하고 있는 가상현실이라면, 저는 그 사람들의 뜻에 복종하고 그냥 이곳을 내가 살아야하는 창조된 세상이라고 믿고 살도록 하겠습니다. 그 정도로 뛰어난 자들이라면, 저는 그 자들이 내 세상을 만들고 다스릴만한 수준에 있는 초월한 세상의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송진혁의 말은 무엇 때문인지 외운것을 말하듯이 무척 빨랐다. 송진혁의 말이 끝나자 여자의 모습의 목소리는 다급해졌다.


"저희는 당신의 한강주의자 동료들입니다. 저희들은 겨우 적들의 전산망을 해킹해서 당신이 붙잡혀 있는 가상현실 장치에 몰래 접속했습니다. 저희들은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 당신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은 고작 텍스트 메시지 몇 줄을 흘려 보내는 것 뿐이었습니다.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귀중한 정보가 적들에게 넘어가면 안되기에, 저희들은 어떻게든 당신을 깨우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글자들로만 당신에게 뜻을 전하려고 한 것 입니다. 이제 조금 더 접속방법을 개선해서, 이렇게 영상과 음성도 당신에게 보내고 있지만, 이미 우리의 적들은 보안을 강화하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곧 당신에게 이야기할 수 있는 방법은 끊어지게 됩니다. 제발 깨어나십시오. 안드로메다 은하계의 한강주의자들을 구해 주십시오."


그때 송진혁은 갑자기 깨닫는 것처럼, 안겨 있던 금희를 생각했다.


"이렇게 실수하면 안돼죠."


송진혁의 목소리는 가장 부드러웠다. 송진혁은 어린애를 달래는 것처럼 금희를 일으켜 세우고 그 얼굴을 보면서 눈물을 닦아 주었다.

 

5.
미영과 양식은 해바라기 은하계의 자율학습 행성에서 구해 온 최신형 가상현실 기계를 안드로메다 은하계로 왔다. 그리고 미영에게 가장 좋은 기계를 구해 오라던 의뢰인에게 찾아 갔다.


기계를 싣고 미영과 양식이 의뢰인을 따라가면서, 두 사람은 기계 설치 방법과 설정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쉽게 설명하기가 어려웠고, 결국 미영이 직접 설치를 도와 주어야 했다. 두 사람은 의뢰인에게 안내되어, 어느 긴 강철 통로를 따라 이동해서 수백킬로미터의 강철과 전선 속 인공 도시 깊숙한 곳에 있는 한 하얀 방으로 가게 되었다.


그 방에는 한 남자가 가상현실 장치에 연결되어 있었다. 기계에 오류가 있는지, 몇몇 사람들이 기계를 고치려고 애쓰고 있었다.


"여기가 요즘 상태가 좀 이상해서, 최신형으로 교체하려고 합니다. 이쪽으로 설치하는데 좀 도와 주시죠."


의뢰인이 미영에게 말했다.


양식은 기계에 연결되어 있던 남자가 누구인지 어떻게 이곳에서 가상현실 장치에 연결되어 있는 지 알아 보려고 했다. 남자의 얼굴 표정은 고민스러운 기색이 있었지만, 변함이 없을 것처럼 평화롭고 행복해 보였다.


누구인지는 보고 있어도 도통 알 수가 없었다.


- 2012년, 여의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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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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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쑤우 13.03.30 14:05 댓글

    오래간만에 보는 미영과 양식 씨 무척이나 반갑네요~ 비서와 경리 부장님두요~!

    두 이야기가 이렇게 이어지는 군요! @_@


    어렸을 적에 놀이터 한 구석에 아이들을 모아 놓고 학습지 신청하면

    연예인 전화번호가 담긴 수첩과 멀리서 나는 소리를 도청할 수 있는 장치를 준다고 약을 팔았던 무리들이 떠오르네요.

    (그 두개 아니면 5천원 상당의 다른 물품이었는데 아무리 그래도 도청장치가 5천원 밖에 안 할리가)

    생각해보니 도청 장치는 그냥 카세트 테이프에 아무 소리나 녹음해서 적절한 모션과 함께 

    마치 '이것이 도청!'인 양 들려주는 거였던거 같아요.


    '한번 들어가면 절대 나올 수 없지만 그대신 원하는 환상을 모두 제공해주는 가상현실 기계'에 대한 이야기는 

    중학교 윤리 시간에 들었는데 무척 매력적인 소재인 거 같아요. 저라면 당연히 거기 들어가서 안 나올 듯.


    영화 '아바론'에서도 바람직한 가상현실과 비참한 현실 세계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도 생각나고 그러네요.

    O.S.T 수록곡인 'Log Off'는 웅장한 느낌이 베르디의 '레퀘엠'이나

    올림픽 공식 주제가(?) 칼 오르프의 '오 포르투나'와 비슷해서 좋아하는 노래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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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3.04.01 19:09 댓글

    이번에도 반가운 덧글 언제나처럼 감사합니다.


    가상현실 보호하는 대목 중에서 욕설 필터링 부분이 저는 기억에 남는 부분입니다. 이 이야기 썼을 때는 그냥 순수히 상상만으로 썼는데 얼마전에 메신저 같은 데서 욕설 메시지는 자동 필터링 차단하는 기능 추가된다는 것 보고, 재밌게 겹치는구나하는 생각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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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blue1234 13.04.19 13:05 댓글

    그런데 사업을 시작한 목적은 언제쯤 나오나요

    신경 쓰여서 못 견디겠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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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곽재식 13.04.20 20:10 댓글

    작은 맥거핀으로 하나 끼워 넣어 두신 것이었는데 말씀해주시니 괜히 대단히 반갑습니다. 앞으로도 이 시리즈를 조금 더 만들것이라서 잠시 더 숨겨둘텐데, 그래도 오래 숨긴 소재니만큼 약간은 그럴싸한 장면으로 드러나게 하고 싶어서 고민거리이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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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바람 13.05.06 16:45 댓글

    저는 다음 소설 '종합적 신경성 증상'을 먼저 읽었어요. 

    이 SF에도 동명의 인물들과 G581E 행성이 등장하네요.

    그럼, 둘이 한 장편의 각 장들일수 있겠어요.

    쑤우님 댓글에서 다른 장도 이미 올려놓으신것 같은 느낌이 오고... 

    그것부터 찾고싶기도하지만, 작가님 작품은 다 재미있어보이므로 그냥 시간의 역순으로 쭈욱 잘 읽어볼게요. @e_acac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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