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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원근법 기교

2013.03.01 00:5403.01


원근법 기교


이야기가 시작되자 유진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상준은 하루 종일 유진과 같이 있었지만, 그 이야기를 할 때가 되어서야 유진이 진짜 관심을 갖는 것처럼 보였다. 가게 안에는 음악이 나오고 있었는데, 유진의 웃음소리는 음악 소리에 화음으로 섞여 들렸다.

"그런 건 너무 특이한 거 아녜요?"
"말해 보라고해서 말해 본건데요."

따지는 대답이었지만, 상준의 목소리는 기쁘게 들렸다.

"아무 이유 없는데 이상하게 괜히 계속 머릿속에서 거슬리게 생각나는 걸 말해 보라면서요."

말하면서 상준이 보니, 유진은 더 재미난 표정이 되었다. 그렇지만 고개를 숙여 눈은 탁자 위를 보았다. 탁자 위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냥 '청소기 색깔은 빨간색이 아니라면 정말 이상해 보인다.'던가하는 정도라거나. 뭐 그런 거 생각했는데."
"청소기 색깔이 빨간색이 아니면 이상해요?"
"이상하잖아요. 빨간색 아니면 그나마 노랑색 정도. 안그러면 이상하죠. 파랑색깔 플라스틱으로 된 청소기, 생각만해도 토할 것 같아."
"그러고보니까, 청소기가 파랑색깔이면 왠지 안어울리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네요. 그런데, 그런거 말해 보라는 거였어요?"

상준은 유진을 보고 따라 웃었다.

"나는 이상한 생각 말한다는 게, 그런게 아니고 진짜 진짜 말도 안되게 황당한 생각을 뭘 갖고 있는지 말하는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예를 들면, 뭐, 먼 나라에 어느 빈 땅에 가서 작은 나라를 만들어서 왕이 되고 싶다든가. 뭐 그런 생각."
"왕이 되고 싶은 생각이 있어요?"
"정말 제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요. 예를 든거죠. 그 정도로, 누구한테 이야기해 주면 그건 좀 이상하다- 싶은 그런 생각 말해보자는 건 줄 알았죠."
"다른 사람한테도 이런 이야기 해 본 적 있어요?"
"무슨 이야기요?"
"방금 한 이야기."

유진은 잠시 말을 멈추고 탁자 위에 있는 아이스크림을 한 숟갈 떠 먹었다. 유진은 "맛있네"하고 잠깐 말했다. 그렇지만 그렇게 말하는 것이 아이스크림의 맛을 평가하거나, 그 맛에 대한 정보를 상대방에게 전달하고자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숨을 쉬는 특이하고 즐거운 방법의 하나인 것처럼 짧게만 말했다. 아이스크림을 삼킨 유진은 상준의 이어지는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이스크림 먹는 것을 지켜 보던 상준은 곧 그 눈치를 알아 보고 말했다.

"내가 다른 사람이 지은 이야기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이고 세상 일이 전부 다 누가 지어낸 이야기 속의 일인 것 같다는 그 생각?"

상준의 말에 유진은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유진이 다시 "다른 사람한테 그런 이야기 해요?"하고 다시 물었다. 상준은 지금껏 아무에게도 그 이야기는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상준은 유진에게 그렇게 말하지는 않았다.

"예. 그냥 이 이야기 저 이야기 하다 보면 그런 이야기할 때도 있으니까."

상준은 자신이 유진에게 어떤 특별 대우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숨겨야 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이 유진에게 들키기 시작하면, 상준은 어딘가 불리한 지형으로 빠져들게 될 것 같았다. 도대체 어떤 것이 유리한 지형이고 불리한 지형인지도 몰랐고, 심지어 뭘 하기에 유리한 것인지 불리한 것인지도 잘 몰랐지만 그렇게 생각했다. 상준이 계속해서 말했다.

"원래 그런 이야기 많이 하잖아요. 세상이라는 무대 위에, 내가 주인공이다. 그런 이야기. 책이나 공익 광고 같은데도 많이 나오고요."
"그런데, 그건 그냥 세상이 한바탕 무대 같다는 거지. 진짜 무슨 가상현실이라는 이야기는 아니 잖아요. 그런데, 지금 이 대리님 하시는 말씀은, 이 세상이 전부다 어떤 글 속에 씌여 있는 이야기 같은 건데, 세상 사람들은 전부다 다 그 이야기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이라는 거 잖아요."
"크게 다르지도 않죠. 뭘."

유진은 잠시 "음..."하는 소리를 냈다. 마침 가게의 음악도 멈춰서 아무 소리도 나지 않고 조용했다. 상준은 약간 불안해졌다. 유진이 상준이 한 말을 두고 어떻게든 상대방에게 독특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겨 보려고 억지로 애쓰는 지겨운 수작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준은 말을 잠깐 멈추고 다문 유진의 입술을 보면서, 유진에게 지금껏 얼마나 많은 남자들이 그렇게 특별한 인상을 주려고 했을까. 숫자를 짐작해 보려고 했다. 그것은 상준이 결코 단시간에 완료할 수 없는 추산이기도 하였으되, 그 계산은 유진이 곧이어 말하는 것에 끊겼다.

"그러면, 세상 모든 사람들, 50억명 사람들이 다 어떻게 사는 지가 전부 다 시시콜콜 그 어떤, 누가 쓴 이야기에 다 적혀 있다는 거에요?"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몇몇 등장인물들하고 그 사람들이 보고 듣는 것만 이야기로 만들어져 있는 거죠. 나는 그 등장인물이고요."
"나는?"
"최대리님도 등장인물이겠죠."
"그러면 내가 지금 갑자기 확 날아서 그리스나 터키나 그런 나라로 가면, 아무것도 없겠네요. 텅 비어 있겠네. 백지처럼. 그 사람들은 등장인물로 안 나와 있는 거니까."
"아니죠. 만약에 최대리님이 지금 그리스로 날아가면, 그거는 이야기가 최대리님이 갑자기 긍리스로 날아가는 내용으로 진행되니까 그런 걸 거고, 그러면 이야기 내용에 최대리님이 그리스로 가면서 거기서 만나는 사람들 이야기가 세세히 나와 있는 거겠죠. 그리스 사람 등장인물들이 계속 등장하는 거고."
"에이. 그래도 너무 황당하다. 나도 등장인물이면, 내 눈에 이렇게 세상이 컬러로 다 생생하게 보이는데. 이런게 어떻게 다 이야기에 표현되어 있을 수가 있어요? 이야기니까 글로 씌여 있을 거 잖아요. 이렇게 지금 딱 보이고 있는 느낌, 이 색채, 이 빛, 이 소리, 이 냄새 이런게 정확하게 글로 된 이야기로 표현되어 있을 수는 없지."
"이야기에 그렇게 '생생하게 이 색채, 이 소리, 이 냄새 이런게 있다'고 글로 씌여 있는 거겠죠. 지금 우리가 눈으로 볼때 무슨 빛이 어떻게 들어와서 뭐가 반사되고 망막이 어떻게 되고 시신경에 뭐가 들어 오고 이런거 하나하나 구체적으로 느껴지는 거는 아니잖아요. 그냥 딱 이렇게 보이는거지."

상준은 딱 유진의 눈을 보았다. 유진은 말하던 내용 때문에 평소보다 더 눈을 크게 뜨고 있었다.

"그러니까 딱 그렇게 글로 이야기가 씌여 있으면, 그런 것도 표현되는 거죠."

상준의 설명을 듣고 유진은 다시 한 번 소리를 내서 웃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상준을 보지 않고 일부러 고개를 돌려 상준의 어깨 너머 뒤 쪽을 보고 있었다. 유진은 그러더니 고개를 아주 조금 가볍게 돌려 다시 상준의 눈을 쳐다 보았다.

유진이 말했다.

"이 대리님, 여자 친구 없으시죠?"
"예?"

상준은 놀랐다. 그리고 상준은 자신이 낸 그 1음절의 감탄사 발음의 소리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아주 우스꽝스럽게 들렸다고 생각했다. 유진이 뒤이어 말하는 목소리에는 그 우스꽝스러움을 굳이 지목하지는 않겠다는 관대함이 깃들어 있었다.

"너무, 그렇게 만사 극적이고, 꼭 무슨 사연이 이야기가 되고, 이런 식으로만 자꾸 생각하는 거 아녜요? 그래서 여자 친구도 안생기고. 세상이 꼭 극적인 거만 재미는 아니잖아요. 그냥 비슷비슷한 사람들끼리 만나고 싶어서 여기저기 소개시켜 달라고 하다 보면 잘 맞아서 만나고, 그렇게 해서 사귀고 그러잖아요. 꼭 무슨 지어낸 이야기처럼 그런 사연이 되게 멋있어야 된다고만 마음에 두고 지내는 것도 좀 그렇지."

유진이 하는 말은 갈 수록 말하는 투가 혼잣말하는 것처럼 변해 갔다. 유진은 시계를 보았다. 상준은 시계를 보는 유진을 쳐다 보았다. 시간이 다 되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 같았다. 오후 다섯시. 바로 집에 들어가도 될만한 시각이었다.

"여기서, 한 시간도 넘게 때웠네. 다섯시면 지금 들어간다고 말하고 바로 집으로 퇴근하면 되겠죠?"

유진이 말했다. 상준은 그렇겠다고 대답했다. 깜빡 잊고 있었다. 상준은 유진이 말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왜 이 가게에 들어 오게 된 것인지 돌아 보게 되었다.

두 사람은 박람회장을 조사하러 나온 시장조사팀과 기획팀 직원들이었다. 조사하는 일은 오후 네 시가 채 못 되어 끝이 났다. 그리고나서 바로 집으로 들어가자니, 너무 빨리 퇴근하는 것 같아 눈치가 보였다.

그렇다고 다시 사무실에 들어 갔다가 퇴근하는 것도 너무 피곤할 것 같았다. 예전 같았다면 이렇게 외근 나왔다가 일찍 끝이 나면 운 좋은 날인셈 치고 일찍 퇴근하는 게 당연했다. 그렇지만 작년에 이쪽 계열사로 회사가 합병 된 후에는 그게 당연하지가 않게 되었다. 직업마다 관습이 다르고, 직장 마다 문화가 다르겠지만, 하필이면 합병한 회사에서는 일찍 퇴근하는 것에 눈치를 보는 것이, 직원 전부가 공유하고 있는 전통이었다.

세시 몇 십분 어정쩡한 시각이었다. 다시 머나먼 사무실까지 갔다가 몇 십분 일을 더 하고 다시 집으로 퇴근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라는 데 두 사람은 의견의 합의에 이르렀다. 그래서 두 사람은 "의견 교환"을 좀 더 하면서, 근처 아무 가게에나 들어가 머물면서 놀며 시간을 보낸 후에, 적당한 시각이 되면 사무실로 돌아가지 말고 바로 퇴근하자고 뜻을 모았다.

어제까지만해도, 두 사람은 열몇명씩이 들어가는 회의에 몇 번 같이 들어가서 서로 얼굴을 알고 인사를 하는 사이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조직 문화의 주요한 특질이었던 퇴근 시간에 대하여 눈치를 보아야 한다는 관념은 트여 있는 같은 건물에 들어찬 공기와 같이 두 사람이 일하는 직장을 꿰뚫고 퍼져 있었던 것이다.

유진이 먼저,

"어디가서 커피나 한 잔 마시면서 버티죠."

하고 말을 꺼내자, 상준은 잠시 생각하더니 오후 일찍 문을 연 맥주집에 들어 가자고 했다.

하필이면 대낮부터 맥주집에 가자고 선택한 것은 다름이 아니라, 상준이 유진에게 독특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남겨 보려고 억지로 애쓰는 수작을 건 것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지만 먼저 들어가서 자리잡고 보니, 손님 없이 텅빈 가게이면서도 시간 보내기에는 조금도 어색할 것이 없는 묘한 모습의 가게였다. 그때문에, 유진은 겉으로도 속으로도 상준을 비웃는 것을 멈추고 가게 안으로 들어 갔던 것이다.

그리고 십 분 쯤 시간이 지나서, 이제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재미없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을 때, 유진은 "혼자만 갖고 있는 신경쓰이는 생각 있느냐?"고 물었던 것이다. 그리고 상준이 "나는 내가 다른 사람이 쓰고 있는 이야기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에 불과한 것 같다"고 대답했다. 그 이야기를 꺼낸 것이 경계가 되었다. 그 후에는 시간이 얼마 남았다거나, 어색 하다거나, 유진은 나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할까, 하는 생각보다 주고 받는 말만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 섰다. 다섯시. 상준도 같이 자리에서 일어 섰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지나갔나. 유진이 웃으면서 하는 말을 듣고 대답하다 보니, 유진과 이야기를 하기 전에 했던 일들은 그제서야 세상에 생겨난 일인가 싶었다. 어떻게 해서 이 가게에 들어 왔는지, 두 사람이 어떤 사이인지 하는 일들을 돌이켜 생각하는 것들. 그런 것들이 모두 꿈에서 깨어나라고 들려 주는 자명종 소리 같았다.

"그래도 떠들고 다니지만 않으면 이상하고 그렇지는 않네요. 술 먹고 나서 술만 취하면 '이 세상은 다 누군가가 쓰고 있는 이야기이고 우리는 거기에 조종 당하고 있는거야' 그렇게 사람 붙잡고 오래 길게 이야기하고 그런 건 아니죠? 그렇지만 않으면, 뭐."

유진이 말했다. 상준은 유진을 따라 가게를 나가면서 유진의 뒷모습을 보았다. 가게 바깥으로 나가자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그렇지만 햇살은 강했고, 유진은 눈이 부셔서 잠깐 얼굴을 찡그렸다. 그렇지만 유진은 다시 웃었다.

"그 이 대리님이 등장인물로 나오고 있다는 이야기에 저도 등장인물이에요? 누구누구가 나오는 이야기인거에요?"

상준은 "지금까지는 최유진 대리랑, 나 둘밖에 없죠."하고 말하려다가, 너무 앞서 나가는 말이다 싶어서 말을 멈췄다. 그러고보니 유진과 별달리 할 이야기가 없어서 계속 이 이야기만 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상준은 그 말에 이어서 대답하는 대신 다른 이야기로 말을 돌리고 싶었다.

"집에 갈 때 지하철 타고 가세요?"
"예."

상준은 "저는 버스타고 가는데. 그러면, 이쪽으로 가셔야 겠네요." 하고 말을 꺼냈다.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서로 헤어지자는 뜻을 담고 있는 주문을 읊는 것이라고 할 수 있었다. 사실 상준도 지하철을 타고 가는 편이 더 편했지만, 오늘은 일단 버스로 도망치기로 했다.

"예, 그러면 잘 들어가세요."

유진이 인사를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말을 하고 걸음을 돌릴 때에 갑자기 웃던 표정이 없어지던 옆얼굴과, 거기에 비하여 볼 때 훨씬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날렸다가 제자리를 잡는 머릿결이 보였다.

그 머리카락과 그날 퇴근길의 교통 체증 때문에, 상준은 할일 없이 유진과 영화나 TV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상상해 보기 시작했고, 그런 상상을 한 시간쯤 하고 나서는 유진과 흰눈 덮인 경치가 보기 좋은 산장에 놀러 가는 일도 생각해 보았다. 올림픽 대로의 교통 상황이 오늘은 정말 좋지 않다는 라디오 목소리는 기운이 빠졌지만, 그러나 그렇게 긴 시간을 자동차 전조등 불빛만 보면서 차 안에 있었기 때문에 상준은 마침내 유진과 함께 두 아이를 기르는 꿈을 꾸기도 했던 것이다.

그리고 상준은 그날 저녁 집에 와서는 물론이고, 다음날 아침 출근길에서도 그날 있었던 일을 계속 돌이켜 보았다. 멍청하지 않게 이야기하자면야, 유진과 같이 박람회에 갔다가 잡담을 하며 두 시간 정도 몰래 시간을 없애 버리고 다시 헤어진 일. 그게 전부였다. 그 정도로 이걸 무슨 특별히 기억할만한 일이 될 자격이 있는 사건으로 생각해야 하나. 이런 일이 유진에게나 상준 자신에게나 정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만한 일인지, 상준은 고민했다.

상준은 혼자 고민하다 못해 사무실로 올라가는 엘레베이터 안에서는,

"어제 잘 들어 갔어요?"

라든가,

"좋은 아침입니다. 조금 춥긴 하네요."

따위의 간단한 문자 메시지로 유진에게 한 번 연락해 볼까 하는 생각도 했다. 그리고 거기에 대한 대답이 얼마나 빨리 오는지, 어떤 문체를 사용한 대답이 오는지에 따라, 유진을 대할 적절한 앞으로의 태도를 결정할 수 있을 거라고 나름의 전략까지 세웠다. 

상준은 엘레베이터 안에서 전화기를 열었다. 그리고 자음과 모음을 번갈아가며 찾아 누르고 있는데, 마침 눈에 엘레베이터에 있는 조그마한 화면이 보였다.

그 화면에는 "오늘의 명화"라는 제목 아래에 옛날 화가의 그림이 나오고 있었다. 상준은 그 그림의 중앙에 선 늙은 현인이 자신에게 말을 건다고 생각 했다. 그림에 있는 사람들은 전화기의 문자판을 누르는 상준을 쳐다 보며 말한다. '그건 아닌데.'

엘레베이터 화면에 나오고 있는 그림은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었다. 고대 서양의 철학자들이 높게 솟은 대리석 벽의 건물 복도 앞을 같이 거닐며 이야기하는 모습이었다. 누가 무슨 생각으로 아침 출근길 엘레베이터 화면에서 이 그림을 보여 주겠다고 생각한 것인 줄은 알 수 없었다. 이 건물의 수많은 사무실 방으로 걸어 들어가는 2200명의 사람들은 그냥 한 번씩 눈길을 주고 다시 엘레비이터의 층수를 표시하는 곳으로 눈을 옮길 뿐이었다. 상준은 왜 자기가 이 그림을 평균보다 몇 초 더 오래 지켜 보게 되었는 지 잠깐 따져 보았다.

원근법 구도. 중학교 때 미술책에 나와 있어서 몇 차례 강조했던 것이 기억 났다. 그렇지, 학자들 뒤에 있는 건물의 복도 모습이 모서리 선이 점차 멀리 갈 수록 가까워져서 한 점에서 만나게 되는 원근법 구도라고 "시험에 나온다"고 강조했던 젊은 미술 교사의 모습이 생각 났다. 사실적인 세상의 모습을 종이 위에 옮기는 방법. 기차 다니는 철로를 멀리 보면 철로의 두 궤도가 멀어질 수록 점점 가까워져서 한 점에서 만나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과 같이 표현한 방법이라고 그때 예를 들어 보여 주었던 것도 생각이 났다.

그러는 동안 상준은 유진에게 괜히 아침에 문자메시지로 헛말을 건네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중학교 무렵 쯤에, "자연스럽게 친해지겠다"면서 좋아하던 여학생 근처에서 서성이던 수작들이 얼마나 한심한 것들인지 같이 생각 났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껏 같이 출장 다녀온 사람에게 그 다음날 안부 묻는 문자메시지를 보낸 적이 없었다는 점도 기억 났다. 상준 스스로도 받아 본 적도 없다. 평범하지 않은 행동이고, 어색한 행동이었다. 쓸데 없이 유진에게 말 한 번 더 걸어보고, 괜히 친해지려고 꾀를 쓰는 일의 일종으로 보일 것이 분명했다.

상준은 엘레베이터에서 걸어 나가면서, 유진에게 중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그런 꾀로 다가 오는 남자들이 얼마나 많았겠나 하는 생각도 했다. 그럴까. 갑갑했다. 아무리 고민해도 남의 머릿속에 들어가서 내가 남처럼 느껴 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저 그림 속의 풍경을 보고 그 곳의 온도나 바람을 짐작하듯이, 남의 생각이란 어찌 되었건 그냥 짐작하고 상상하는 것일 뿐이라는 생각을 했다. 상준은 정말로 자기가 이야기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이고, 이야기를 짓는 사람은 이야기에 나오는 모든 사람의 생각과 행동을 써 내는 것이라면, 그 이야기를 조종하는 자의 손에 다른 등장인물의 생각도 달려 있지 않겠냐는 공상도 해 보았다. 어떻게 그 자를 통해서 다른 사람의 생각을 알 수는 없을까. (그렇게는 안되겠지.)

그런 생각을 하는 중에 엘레베이터에 회사 합병으로 새로 부임한 부사장이 탔다. 상준과 9명의 다른 직원들은 급히 허리를 굽혀 인사를 했다. 엘레베이터에서 고개를 숙이는 많은 직원들을 향해, 부사장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부사장의 말 없이 다문 입은 무슨 은은한 초음파 신호라도 보내는 것 같았다.

상준은 36층에서 내렸고, 그 후에도 1080명의 사람들이 이 엘레베이터를 타고 건물의 각 층과 여러 다른 사무실로 모세혈관을 타고 흐르는 핏방울처럼 움직여 들어 갔다. 그리고 그 1080명 중에 13명의 사람들이 그날 아침 엘레베이터 화면의 그림을 보고 옛날 교과서에서 보았던 원근법 구도에 대해 떠올렸다.

아침 시간 동안 사무실은 무척 조용했다. 걸려 오는 전화도 적었다. 가끔씩 딸깍거리는 마우스 버튼 누르는 소리, 키보드 누르는 소리만 들렸다. 그런 소음이 크게 들리는 덕분에 말소리가 없고 조용하다는 것이 더 짙어지는 느낌이었다. 상준은 그런 소리가 귀에 한번씩 들릴 때 마다, 유진에 대해 생각하는 것이 한 글자, 두 글자씩 다시 펼쳐지는 것 같았다. 유진이 어제 일을 지금껏 생각하고 있을까, 혹시 유진은 나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그런 생각이 그렇게 점점 차올라가다보니, 오전 11시쯤 해서는 한심해 보이건 말건 상준은 유진에게 뭐라고 한 마디라도 이야기를 해야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 말이나 한 마디만 유진에게 던져 볼 이유를 뭐든 하나 찾아 내려고 궁리했다. 그러다 머릿속이 엉키게 되자, 상준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고개를 돌려 창바깥을 보았다.

하늘이 보였고 구름이 있었다. 아무 소리 없이 보이는 하늘이었지만, 지금까지 이 사무실에 들어와서 바깥을 보는 그 수백번, 수천 번의 순간 동안 단 한 번도 정확히 똑같은 구름인적은 없었겠다는 생각을 했다.

차근차근 하나씩 펼쳐서 쉬운 것부터 생각해서 쌓아 나가보자. 일단 유진과 관계가 있는 것은 어제 그 박람회에 같이 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뭐가 되었든 그 박람회와 연결되는 이야기가 나와야지 부드럽게 이야기가 이어진다. 그럼, 박람회에 대해서 이야기를 하자. 유진이 대답을 하게 하려면, 뭔가 묻거나 요청하듯이 말을 하는 게 좋다.

정 부장 책상 뒤로 보이는 창틀에서 다음 창틀까지 뭉게 구름 덩어리가 지나가는 동안, 상준은 계획을 마쳤다. "보고서 써야 되니 혹시 어제 박람회에서 본 것 메모한 자료 있으면 하나 보내 달라, 내가 메모한 것은 먼저 보내 주겠다"는 내용으로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이다. 상준은 전화기를 열고 몇 번 썼다 지웠다하면서, 말투를 고치고 여러차례 퇴고를 거쳤다. 사무상의 내용을 요청하는 것이지만 그 속에서 친근감과 호감을 갖출 수 있도록. 그리고 만약에 유진이 혹시라도 상준에게 약간의 호감을 갖고 있다면 그 호감을 되돌려 표현해 주기에 자연스러워지도록, 그렇게 잘 꾸민 한 마디를 보내려고 했다.

상준은 가능한 최선의 문자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지만 2분 정도가 지나자, 말을 고쳐서 보내는 게 나았겠다고 후회 했다. "'주실래요'라고 쓰는 게 아니라 '주세요'라고 쓰는 게 더 좋았을텐데." 상준은 어떻게 지금 유진의 전화기로 가고 있을 메시지를 취소해서 다시 붙잡아 와서 고쳐서 새로 보낼 방법이 없을까 안타까워 하기도 했다. 상준의 생각 속에서 전화기의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것은, 전파의 덩어리로 이루어진 보이지 않는 비둘기 같은 것이 이쪽 전화기에서 날아 올라서 상대편 전화가 있는 쪽으로 하늘을 비행하여 다시 저쪽 전화기로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그 날아가고 있는 전파 비둘기를 붙잡아다가, 지금 다시 돌아오라고, 고쳐 줄테니 다시 다른 소식을 들고 날아가라고 하고 싶었다. 그렇지만 상준이 실제로 할 수 있는 일은 그냥 유진에게서 돌아올 답을 기다리는 것 뿐이었다.

유진이 문자 메시지를 보자 마자 답을 보낸다면 2분, 3분 후면 답이 올 것이라고 처음에는 생각 했다. 3분 후에 다시 한 번 전화를 살펴 보았지만 대답이 없었다. 상준은 사무실 일을 계속 하면서도, 5분, 10분 마다 다시 전화를 보았다. 대답은 계속 없었다.

유진이 잠깐 다른 일이 바빠서 전화를 빨리 확인하지 못해서 답을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었다. 회의 중이거나 보고 중이어서 문자 메시지를 보내기 힘들어서 답이 없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상준은 초조하게 답을 기다리느라 자신이 전화를 계속 확인하는 것이 조금 한심하게 느껴졌다. 상준은 이제 뭐라고 답이 올 지 애타게 기다리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일은 그냥 업무상의 요청을 한 번 해 본 것이었으나, 업무상의 답변을 기다리는 태도로 기다리겠다고 결심 했다. 상준은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전화를 주머니 속에 넣었다. 나중에 틈 날 때 자연히 확인할거라고 생각 했다.

1시간 쯤 지나고 나서 상준은 "이번에는 시간을 확인하려고 보는 거다"라고 머릿속에서 스스로에게 말하고는 전화를 다시 보았다. 세 통의 문자 메시지가 와 있었다. 상준은 전화기의 반응 속도가 느리다는 생각을 새삼하면서 세 건을 모두 확인했다. 그 중 한 건은 정 부장이 보낸 문자 메시지로, 그야 말로 순수한 업무상의 요청만이 담긴 내용이었다. 나머지 두 건은 이길 확률이 높은 도박을 해 보라는 광고와 오를 확률이 높은 땅을 사 보라는 광고였다. 두 광고는 본문 앞뒤로 흰색과 검은색의 별모양 특수문자 여덟개 덕지덕지 달려 있었다.

상준은 왜 이렇게 유진의 대답이 늦어지는지 짐작하려고 해 보았다. 오류가 생겨서 문자 메시지가 제대로 전달되지 않은 건가 싶었다. 전파 비둘기가 찬바람 속에서 길을 잃었나. 그것이 아니면, 혹시 말투가 너무 이상하다고 느낀 것은 아닌가 싶기도 했다. 정 부장에게 받은 글귀와 자신이 보낸 내용을 비교해 보면, 현격한 감상의 차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유진이 상준에게 "더 이상은 나를 귀찮게 하지 말없이 꺼져 주시죠"라는 대답을 우아하게, 그렇지만 분명하게 전해줄 방법을 찾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싶었다.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모를 일이고 혹시나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유진도 상준과 같은 생각을 갖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유진도 상준이 그랬던 것처럼, 부담 없이 호감을 드러내고, 유감 없이 대답을 이끌어 내는 교묘한 문장을 만들어 내느라 고민하는 것은 아닐까. 그러느라 이렇게 답을 보내는 게 오래 걸리는 것은 아닌가하는 생각도 잠깐 해 보았다. 상준은 거기까지 상상 하자, 그런 생각을 한 것을 빨리 취소라도 해야 한다는 생각으로 얼굴이 따끈따끈해 졌다. 상준은 급히 전화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고, 다시 부질 없는 문자들만 가득 씌여 있는 컴퓨터 화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멍하니 "고객"이니 "혁신"이니하는 단어가 잔뜩 사용된 컴퓨터 화면의 문구들을 보면서, 잠깐 상준은 내가 등장인물로 나오는 이야기가 누군가가 뜻대로 써내려가고 있는 것이라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이런 갈등으로 보냈는 지 어떤 결말을 맺으려고 하는 것인지, 그리고 지금 이 이야기의 다른 등장인물인 유진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제발 좀 알려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 했다. 그렇게치면, 아마 지금 내가 이렇게 푸념하고 있다는 것도 누군가 정해 놓고 지금 쓰고 있는 이야기이겠지. 그러고 나니, 정말 유진의 말처럼 요즘에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고 궁리하는 게 너무 많은 건가 싶기도 했다.

마침 그때 조 차장이 상준을 불러서, "차나 한 잔 마시자"고 했다. 어차피 이 사무실에서 누군가 "차를 마시자"고 제안하면 "저는 카페인을 이미 다른 방법으로 섭취했습니다"라고 말하면서 거부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 곳 반경 5킬로미터에 입주해 있는 업체들에서는 다음과 같은 뜻의 관용구로 쓰이고 있었다. "내가 불만 있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그래도 너는 욕 먹는다는 태도로 임하면 안되는 대화를 하자"

조 차장은 상준에게,

"우리 회사가 벌써 합병된 지도 1년이 다 되어 가잖아. 그런데, 아직도 이쪽 회사 분위기에 옛날 직원들이 잘 적응을 못하는 것 같아. 이쪽 조직문화라는 게 있고, 또 조직생활이라는 게 문화적인 단결이라는 게 중요한 거니까, 더 신경 쓰자고. 오늘 오후에 하는 '인식 재고 강연'에서도 앞에서 말하는 사람한테 호응도 좀 많이 해주고. 이쪽 사람들은 무슨 교육, 강연 그런 거 할때 열심히 하는 걸 굉장히 크게 보더라고."

라는 이야기를 했다.

싫은 소리를 잘 못하는 조 차장이었기에 천천히 에둘러 말했지만, 그동안 비슷한 눈치를 많이 본 덕에 상준은 담고 있는 뜻은 금새 알 수 있었다. 별로 납득 안되더라도 회사에서 만든 프로그램을 좋아하는 양하라는 말이었다. 그리고 그 내용을 신입사원들에게도 퍼뜨려서 알려 주라는 것이었다. "차나 한 잔 하자"고 하면서.

상준은 조차장을 뒤따라 다시 자리로 돌아 오면서, 사무실 전체의 풍경을 보았다. 널찍한 사무실 건물과 긴 복도를 두고 플라스틱 칸막이. 서로서로 시선을 막아둔 벌집 같은 모양이 가득차 있었다. 복도를 따라 걸어가면서, 상준은 그 장면을 보고 복도의 바닥과 벽이 만나는 선이 멀리까지 이어지면서 대각선을 이루어 원근법 구도가 된다는 생각을 했다. "아테네 학당" 같은 그림처럼.

그리고 상준이 자리에 와서 앉으며 그 생각을 멈추었을 때, 바로 같은 시각에 그 보다 7층 위에서는 유진이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자리로 돌아 오면서 7층의 사무실 풍경을 보고 있었다. 유진도 그 모습이 "아테네 학당" 그림에 나온 원근법 구도라는 생각을 마침 떠올리고 있었다.

결국 상준이 유진이 답한 문자 메시지를 받은 것은 조차장이 이야기했던 "인식 재고 강연"을 할 때가 되어서 였다. 36층에서부터 45층까지에서 일하는 직원들 모두가 강당에 모였다. 문이 좁은 탓에 길게 줄을 서서 강당으로 들어 가다가 "도대체 줄 서서 허비하는 시간이 몇 분이나 되나" 싶어 시계를 보러 전화를 열었다. 그런데, 마침 유진이 보낸 말이 와 있었던 것이다.

"지금 강연 와 있는데, 이 대리님도 강연 와 계세요? 사무실 돌아가는대로 자료 보내드리겠습니다. 이 강연 재밌을 것 같아요?"

상준은 두 번 그 말을 확인했다. 그리고 다시 세 번째 확인할 때, 유진이 말끝에 "이 강연 재밌을 것 같아요?"라고 한 마디 더 묻는 말을 덧붙인 것을 보았다. 그 의문문은 크고 무겁고 대단하고 굉장해 보였다. 아무런 생각과 감정이 없었다면 이런 말을 왜 붙였겠는가? 서로 의견을 주고 받으며 대화를 나눠 보자는 뜻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적어도 최소한 친하게 지내자는 뜻은 들어 있지 않겠는가. 특히 저 즐거운 말끝의 물음표를 보자. 저것은 적어도 약간의 호감, 좀 더 넉넉히 생각해도 최소한의 친근감이 있음을 나타내는 것 아니겠는가?

상준은 대답할 말을 돌려 주려고 다시 고민하기 시작했다. 강연의 주제는 "긍정적인 생각의 힘"이라는 것이었다. 내용은 긍정적인 태도를 갖고 있으면 행복해지고 성공하게 된다는 내용이었는데, 유난히 설명하는 방법은 90년대말에 이미 다들 세 번, 네 번 이상 들어본 것들 뿐이었다. 특히 케케묵은 알려진 금언들을 마치 처음 듣고 감탄하여 놀라워해야 마땅한 이야기처럼 의욕적인 말투로 말할 때는 서글프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적어도 그런 낡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전혀 부끄러운 줄 모르는 강연자가, 긍정적인 생각을 확실히 하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렇지만 상준은 정성을 기울여 강연을 관찰하고 있었다. 지금 이 강연장에 와 있는 유진도 같은 내용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 강연을 보다가 적절한 순간에 재치있게 어울리는 말 한 마디를 떠올려서 유진에게 문자 메시지로 보내 줄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 조 차장은 열심히 웃고 박수치며 호응해 주고 있었지만, 누가 봐도 지루한 강연이었다. 이 와중에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한마디 재치 있는 말을 상준이 유진에게 보내면 어떻겠는가. 그래서 이 많은 청중 중에 멀리 떨어져 앉은 두 사람만 같은 내용으로 웃고 있게 된다면, 그렇다면 그 가까워지는 마음이 좋지 않겠나.

강연의 절정은, "먼저 나서서 웃으면 행복해진다"고 주장하면서, 청중들 모두를 다함께 강제로 박장대소 하게 만드는 시간을 가져 보자는 것이었다. 다들 시키는대로 억지로 소리 내어 웃기 시작했고, 그렇게 이유 없이 웃는 것을 서로 지켜 보다 보니, 참 웃기게 보여서 하나 둘 정말로 웃는 사람들도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 이 강연의 술수였다. 그렇지만 그날 강당 안에 울려퍼지는 그 큰 웃음소리들은, 그저 속임수 같기만했다. 직업과 금전을 조종해 오던 그 누군가가 이제 한 인간은 자기 얼굴 찌푸릴 권리 정도는 갖고 있다는 것조차 꼴보기 싫어서 고안해낸 속박술처럼 보였다. "긍정적으로 살면 성공한다"는 유혹으로 한 사람 한 사람의 얼굴 표정과 감정 표현까지 보기 좋은 화초 흉내만 내도록 조종하려는 욕심이 어딘가에 숨겨져 있는 것 같았다.

두 귀로 가득한 웃음소리들을 들으면서, 상준은 정신병자가 되어 의사에게 상담을 받는 모습을 상상했다. 상준은 크게 웃으면서 의사에게 고백한다.

"저는 자꾸 실제 사람이 아니라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인 것만 같습니다. 세상 모든 일과 제 행동과 생각도 다 누군가 지어내는 이야기에 나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냥 모든 것이 누가 지어낸 이야기이기만 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의사와 힘을 합해 상준은 잘못 머릿속에 박혀 버린 강박증을 없애려고 갖가지로 노력한다. 의사는 계속 웃음소리를 낸다. 쉽지는 않다. 여러 의사들을 만나고 나서도, 상준의 머릿속은 고치기 쉽지 않다. 아테네 학당의 많은 학자들이 모두 상준의 상태를 살펴보며 정상이 아니니 걱정된다는 말을하면서 다같이 껄껄 웃는다. 모두들 긍정적인 생각을 잃지 않고 있다.

"망상증이 있으시고, 현실 감각 상실을 겪고 계십니다. 처방해드리는 약을 드시면 정상으로 돌아오실 수 있으실 겁니다."

의사의 얼굴은 유진을 닮았다. 밝게 웃고 있었다. 상준은 약을 먹는다.

"저도 빨리 제정신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제가 이야기 속 등장인물이라니 그런 미친 소리가 어디있겠어요. 그런데 왜 자꾸 그 생각을 버릴 수가 없는 지, 진짜 모르겠어요."

약을 먹고, 또 약을 먹는다.

마침내 상준도 기뻐한다. 상준도 같이 소리를 내어 웃기 시작했다. 이제야 다 알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설령 내가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이라고 해도, 지금 내가 행동하는 것과 생각하는 것은 이야기에 나와 있는 그 자체로 지금 내 모습 그대로이다. 그리고 말이 되는 이야기라면 지금 내가 한 행동과 내 생각의 인과에 따라 다음 이야기가 이어질 수 밖에 없다. 앞뒤의 말은 맞아야 해고, 복선은 연결되고 주제는 남아야 한다. 그렇다면, 지금 내가 애써 마음쓰고 있는 일 하나하나가, 결국 이야기의 결말을 이끌어 준다. 내가 남이 지어낸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이건 아니건, 나는 여기에 내 뜻을 갖고 있어서, 의미심장하게 웃고 있을 수 있는 것이다.

강연이 끝나자, 상준은 유진을 찾아 달려 갔다. 상준은 바로 전화를 걸어 유진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물었다.

"어디 계세요? 제가 할 말 있는데요."

상준은 유진을 찾아가며 유진에게 뭐라고 말할 지 생각했다. 말을 멋있게 꾸며서 잘 할 필요가 없다. 하고 싶은 말을 그냥 그대로 하기만하면 된다. 그렇게 결심했다. 벌써 해가 어두워지고 저녁시간이 되었으니, 일단 오늘 저녁부터 같이 먹으면서 이야기해보자고 말할 참이었다.

상준은 조금이라도 빨리 유진을 만날 생각에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직까지는 멍청한 상상 속의 장면이기만 했지만, 혹시나 일이 잘 풀리면 앞으로 유진과 같이 하는 시간이 얼마나 즐거울 지 생각했다. 그래서 만약 내가 이렇게 좋아하는 사람이, 그녀가 나를 좋아해 준다면 얼마나 기쁠 지, 그때 같이 손을 잡고 걸으면서 추운 바람에 언 얼굴을 마주 보면서 웃으면 얼마나 기분이 더 좋을 지 상상했다. 그리하여 비록 아무도 모르던 일이었지만, 상준이 그때 뛰어가면서 느꼈던 기대와 희망의 느낌은 이후에도 깨어지지 않을 그의 일평생에 최고의 강도에 도달한 시기로 기록을 남기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가련하게도 그날 저녁 상준이 유진을 발견했을 때, 유진은 환경팀의 과장과 정겹게 손을 잡고 퇴근하고 있었다.

더러운 것은 그때 두 사람이 같이 있던 모습이, 상준이 그때껏 상상했던 그 어떤 모습보다도 그럴싸하고 아름다워 보였다는 것이다. 상준은 그때까지 생각하고 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말을 황급히 떠올려야 했다. 방금 전까지만해도 감격에차서 뛰어 가고 있던 상준이, 황급히 왜 유진을 갑자기 만나자고 했는지에 대한 사무적인 이유를 급히 떠올려 둘러대는 꼴은, 누구나 소리 내어 웃을 수 있을 만했다.

"예, 그러면 잘 들어 가시고요."

유진이 인사를 끝으로 다시 자신의 연인에게 고개를 돌리자, 상준은 혼자 길 위에 남았다. 그 동안 전기 신호를 반짝이며 머릿속에서 깜빡거리던 뇌세포들이 몽땅 터져 버린 전구가 되어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되었다.

상준은 그냥 한 숨을 쉬었고, 할 수 있는 말은 이 한 마디 뿐이었다. 이제 다 끝난 이야기라고.

- 2013년, 가양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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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2
  • No Profile
    쑤우 13.03.01 01:35 댓글

    아... 마지막 한줄을 위해

    "앞뒤의 말은 맞아야 하고, 복선은 연결되고 주제는 남았"던 것이군요! @_@

    좋아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길을 걸으면 마치 온 세상을 손에 쥔 것처럼 두근거리고 기쁘죠.


    그리고 왠지 알 것 같아요. 그 더러움.

    내 이야기는 제 머리속 상상일 뿐이고 그들에겐 그들만의 이야기가 따로 있었던 기억이 새삼 떠오르네요.

    작품 외적인 이야기지만 팍팍한 제 삶에 항상 따스한 위로와 살며시 미소 짓게 만드는 이야기를 선물해 주셔서 매번 감사한 마음입니다.

  • No Profile
    곽재식 13.03.01 10:16 댓글

    아... 또 그런 기억이 하필 떠오르시게 되다니... 이것 참....


    원래 이번 이야기에서 처음 아이디어는 "외눈박이 세상에서 괴물 취급을 받는 눈 둘인 사람" 이야기처럼, 이야기 속의 등장인물이 "나는 사실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아닐까"라는 망상에 너무 심하게 시달려서 정신병에 걸린 거라고 의심하고, "세상이 소설일 리는 없다"고 허망하게 여기고 있는 주변 사람들이 그런 주인공을 비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출발해서, 주인공이 "나는 소설 속의 등장인물 뿐인 것은 아니다"라고 믿으려고 애쓰는 내용이 펼쳐지는 소설을 써 보려고 했습니다.


    중간 부분에서 예전에 제 블로그에 올렸던 글처럼, 주인공이 정말로 자기가 "내가 소설 속 등장인물이다"를 깨닫는 것으로 간다든지, 그게 아니라 평생 "인생이 누군가 지어낸 이야기를 그대로 따라가는 것만은 아닐거다"라고 계속 되뇌이면서 살다가 죽기직전에 후회하면서 그 의심을 떨치지 못했음을 깨닫는다든지 뭐 그렇게 해보려고도 했습니다. 결국에는 그러다가 어차피 소설도 나름대로 인과관계와 앞뒤가 이어지는 논리가 있는 이야기이니만큼, 소설 속 등장인물일 뿐이라도 매순간의 생애에 성실히 보람을 갖고 살 수 있다는 결론을 내리는 이야기로 어떻게 꾸며볼까 하는 생각도 해 봤습니다.


    그랬습니다만, 또 이야기를 막상 쓰다보니, 맨날 쓰기 좋아하는 내용들, 웃고 지나가보자는 이야기들에 치우치고 싶은 마음 막 따라가다보니까 결국 결과로 나온 것이 위 이야기 입니다. 이번달도 즐겁게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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