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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쓰다 그만두는 이야기

 

두 사람은 만나게 되었다. 계기는 우연이었다. 비슷한 예를 들어 보자면, 건물 엘리베이터 앞에서 다른 사람들이 점심으로 먹을 샌드위치를 잔뜩 사서 들고 가고 있는데 너무 양이 많아서 도저히 혼자서는 들지 못할 상황이 왔다고 하자. 엘리베이터에서 자주 마주치던 다른 한 사람은 샌드위치를 들고 가는 것을 도와준다. 둘은 샌드위치와 왜 이렇게 점심을 많이 사 가는지에 대해 짧은 대화를 나눈다. 고맙다고 이야기하고, 이튿날 엘리베이터에서 만났을 때 감사의 뜻으로 커피라도 한 잔 사겠다고 한다. 커피를 같이 마시고, 사흘이 지나서는 다시 상대편에게 점심 식사나 같이하면 어떻겠냐고 한다. 그런 정도의 우연이다.

그렇지만 두 사람은 그 만남이 철저하게 아무 의미가 없었던 우연이었기 때문에 매우 놀랍고 신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두 사람은 그렇게 두 사람이 만난 우연이야말로 오직 두 사람이 만난다는 일, 한 가지 의미밖에 없는 일이라고 느끼게 된다.

두 사람은 친해지고, 두 사람은 가까워진다. 두 사람은 같이 더 긴 시간을 보내고 싶어 하고, 더 긴 시간을 보낸다. 한 사람은 다른 사람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다른 사람은 그 말을 듣고 웃으며 진즉에 알고 있었다고 말한다. 상대방은 머쓱해 하다가 다시 말한다. “내가 먼저 말하기는 했지만, 사실 나도 네가 나 사랑하는 거 벌써 알고 있었거든. 맞잖아? 나도 이미 짐작하고 있었어.” 그 말을 듣고 쿡쿡거리며 웃다가 “추리력이 상당히 뛰어나네. 잘 맞췄어”라고 대답한다. 둘은 행복해한다.

같이 보내는 시간 동안 둘은 서로에게 공통점이 얼마나 많으며 또한 서로 다른 점이 얼마나 많은지 알아 간다. 같은 풍경을 좋아하고, 같은 곳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면서 둘은 서로 반가워하고, 한편으로 서로 위로한다. 또 둘은 서로 생각하지도 못한 것에서 다른 생각을 갖고 있고 내가 모르고 있는 것을 너는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 때문에 새로운 일에 궁금해하며, 다른 사람의 다른 생각에 신기해한다. 같이 길을 걷는 동안, 음식이 나오기를 기다리는 동안, 시내 건물의 에스컬레이터를 오르는 동안, 횡단보도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아무것도 안 하고 같이 앉아 있는 동안, 두 사람은 같이 이야기하고, 같이 웃는다. 오후에 만나 잠깐 반가워하다 보면 어떻게 벌써 저녁노을이 보일 정도로 시간이 빨리 흐르는지 이상하다고 몇 번씩이나 같이 느낀다.

둘은 남들이 하지 않는 새롭고, 별것 아니고, 두 사람만 아는 일들을 같이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한편으로는 누가 봐도 사랑하는 두 사람의 표본이 될 법한 일을 같이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같이 휴가 여행을 떠나기 위해 햇빛이 가득한 고속도로를 달리던 평일 오후의 한적한 기분. 금요일 밤늦게까지 같이 시간을 보내고 조금 지쳐서 심야의 택시를 타고 시내를 빠져나와 한강 다리 위를 지날 때 불빛들을 보며 하던 생각. 차가운 비가 갑자기 쏟아지던 날에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동네의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가게에 들어가 차를 마시며 비를 피할 때 갑자기 따뜻했던 것.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다시 몇 가지 우연이 같이 찾아오자, 두 사람은 아주 조금씩 차츰차츰 멀어지게 된다. 멀어지다가 다시 가까워지는 것 같기도 하고, 그러다가 다시 조금 낯설어하기도 하고, 어느 날 감동했다가 다음 날 불편해하기도 하면서, 시간은 더 흐른다. 그러는 사이에 두 사람은 분명히 서로 멀어지고 있음을 알게 된다. 다시 예전처럼 돌아가는 것이 좋겠다고 간절히 느낄 때가 생기기도 하고, 정말로 잠깐 오히려 더 친밀한 사이가 될 뻔한 기회가 오는 것 같을 때도 있었다. 그러나 한 사람은 너무 비겁했고, 다른 한 사람은 얼마나 사랑하고 있는지 숨기려고 든다.

결국 두 사람은 헤어지게 된다.

여기까지는 자주 있을 수 있는 일이다.

문제는 그다음부터 생기게 된다. 두 사람의 직업은 모두 작가였다.

한 사람은 자신이 겪은 일을 변형해 소설로 쓰기로 결심한다. 지금 자신의 처지와 자신의 느낌을 소설로 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마나 재미있는 만남이었고, 얼마나 즐거운 시간이었고, 얼마나 감동적인 추억이었는지,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이 다 지나가 버렸다는 사실은 얼마나 허무한지를 글로 남기기로 한다. 같이 만나서 겪었던 시간은 누가 보아도 보기 좋은 일이었고, 그것을 옮길 수 있는 내 감정은 아직도 절절하다. 게다가 두 사람이 같이 지낸 시간 동안, 나는 내가 무엇이 부족했으며 어떤 것을 더 배워야 하는지 더 잘 알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예전보다 더 좋은 글을 써 나갈 수 있게 된다.

그와 거의 동시에 상대방도 마침 자신이 겪은 일을 변형해 소설로 쓰기 시작한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생각을 갖고 서로 다른 공간에서 출발해서 서로를 만났기 때문에, 두 이야기는 서로 다른 이야기가 된다. 같은 일을 다루면서 같은 사연을 겪어 나가지만, 중심에 선 인물이 다르고 인물과 배경을 변형한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보는 방향이 달라진다. 그러나 두 글 속에서 똑같이 둘의 모습은 멋지고, 둘이 겪는 일들을 지켜보고 있으면 똑같이 웃음이 난다. 정말로 사랑하는 두 사람이 서로를 생각하면서 같이 겪은 일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소설은 각자가 서로 그런 소설을 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른 채 공개되기 시작한다.

둘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많아지고 두 소설은 인기도 얻게 된다. 그 이야기를 읽으면서 사람들은 살면서 흐뭇한 순간이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고, 사랑하는 사람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왜 소중한 것인지 다시 알게 된다. 소설은 점점 더 널리 알려지고, 그 때문에 더 많은 사람이 그에 대해 알게 된다. 소중한 사랑 이야기라면 뭐든지 빨리 팔고 싶어 하는 사람들도 소설에 잽싸게 모여든다. TV, 케이블, 웹드라마, OTT, 영화, 모바일 전용 스트리밍 서비스, 그 외에 자기 회사가 하는 일을 설명할 때 무슨 무슨 플랫폼이라는 말만 붙이면 저절로 멋진 장사가 되는 줄 아는 다양한 얼간이들까지, 소설을 사려고 경쟁하게 된다.

두 소설의 연재가 거의 끝이 나게 되고, 두 소설의 텔레비전 시리즈 작업이 막 시작될 무렵. 두 소설이 얼핏 전혀 달라 보이지만 핵심은 같다는 점을 지적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생겨나게 된다. 이 이야기는 사람들 사이의 논쟁으로 번진다. 한 소설을 보고 다른 소설을 베꼈다고 말한다. 아니다, 다른 소설을 쓴 작가가 상대편 소설을 표절한 것이다. 두 소설이 모두 참조한 공통의 자료가 있다더라. 억측도 나오고 추리도 등장한다. 한쪽의 소설이 어떤 이유로 더 원본에 가까운 이야기인지 증명하려는 사람이 나타나는가 하면, 다른 쪽의 소설은 무슨 이유 때문에 더 독창적인지 주장하는 사람도 나타난다.

두 이야기에 대한 이야기에 대한 관심이 아주 높아졌을 때, 누군가 두 사람이 사실은 원래 사랑하는 사이였으며 두 사람이 같이 경험한 일을 소설로 옮긴 것이라는 사실을 밝힌다. 배배꼬인 것을 좋아하는 평론가들은 두 사람의 마음이 두 개의 소설에서 어떻게 드러나며 어디에서 서로 만나고 있는지 동시에 찾아가며 즐기는 것이 진정한 묘미라고 말한다. 사람들은 더 관심을 갖게 되고, 두 이야기 중 어떤 것이 더 좋으냐에 대한 논쟁은 더 치열해져 간다. 텔레비전 시리즈를 만들던 사람들은 서로 두 패로 나뉘어 논쟁에 가세한다. 한 텔레비전 시리즈에서 두 사람을 연기하고 있는 배우들은 한쪽 편을 들고, 다른 텔레비전 시리즈에서 두 사람을 연기하고 있는 다른 배우들은 그 반대편을 들며 논쟁한다. 다툼은 격해지고 싸움은 깊어진다. 두 편은 서로 소송을 걸고 법정에서 다툴 것이라고 발표한다.

두 사람의 사랑하던 이야기에 대한 권리가 누구에게 있느냐를 두고 변호사들이 결정을 볼 시기가 다가온다. 내가 몇 시간이라도 먼저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했으니까 권리는 내 쪽에 있다는 점을 한쪽은 주장한다. 반대쪽에서는 연재되는 이야기의 전체 내용을 보면 오히려 이쪽에서 먼저 발표한 회차가 더 많다는 점을 지적한다. 또한, 애초에 내가 직접 경험한 일을 상상의 세계에서 다시 재구성해서 풀어 놓는 소설인데 그 내용의 참신함에 대해 내가 권리를 갖는 것은 당연하다는 주장도 이어진다.

다툼의 액수는 커진다. 두 사람은 작가로서 처음 맞는 큰 기회와 막대한 돈을 벌 미래를 놓고 다투게 된다. 변호사와 제작사 사람들이 찾아와 요청한다. 당신이 쓴 소설이 왜 더 훌륭하고 더 우월한지 당신이 밝히고 증명하는 글을 써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글을 쓴다. 내가 너를 사랑한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그것이 얼마나 진심이었는지, 세상에 지금 이 순간에도 어디선가 수천번씩 울려 퍼지고 있는 사랑한다는 말을 한 번 더 하는 것뿐이었는데 내가 왜 그렇게 긴장했고 용기를 냈어야 했는지. 그 말을 듣고 그럴 줄 알았다고 말하던 너의 웃는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았는지, 그래서 아직까지도 이렇게 있는 그대로 그때 그 시간을 글로 옮길 수 있다고. 네가 얼마나 예쁜 지 이야기하고 싶고, 내가 너를 아직도 이렇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다고. 나는 그 모든 것을 밝혀서 이 바보 같은 싸움을 내가 끝내야겠다고 또 이야기한다.

다음날, 법정에는 소송의 진행을 바라지 않는다는 두 사람의 청이 담긴 문서가 동시에 도착한다. 법원과 변호사들이 풀 수 없는 문제는 더 복잡해진 것 같지만, 두 사람은 이제 남은 문제는 없다고 생각한다.

 

- 2020년, 강남역에서

* 2020년 7월 17일자 한겨레 신문에 실린 이야기를 고쳐서 싣습니다.

댓글 3
  • No Profile
    윤새턴 22.09.02 16:24 댓글

    냉정과 열정 사이, 라는 소설이 떠오르네요. 그것도 하나의 연애를 다른 두 남녀작가가 서로 다른 시점에서 쓴 소설이었는데, 그 후일담이라고 생각하니 재밌군요. 2년전의 신문을 읽는 건 처음 해보는 일이었는데, 시간여행 다녀온 기분 참 좋네요. 그런데 막상 어떤 기사가 모티프였는지는 도통 모르겠군요.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윤새턴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22.09.30 00:01 댓글

    하하 착각하셨습니다. 한겨레신문에 실린 기사를 모티프로 썼다는게 아니라 제가 과거에 한겨레신문에 실은 소설을 가져온 것입니다. 이번에도 감사합니다.

  • 곽재식님께
    No Profile
    윤새턴 22.10.09 13:07 댓글

    흔히 쓰는 말인데 왜 못 알아들었을지 멋쩍네요. 평생의 의문으로 남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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