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

 


박 과장은 전기 주전자를 켰다. 그리고 컵라면을 열어 물이 끓으면 부으려고 했다. 최신형 전기 주전자라서 잠깐 사이에 물이 끓었다. 처음 보았을 때는 굉장히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가스 불에 물을 끓이면 한참 걸리는데 어떻게 이렇게 금방 물을 끓이는 거지? 그러나 그 이유를 찾아 보려고 했던 적은 없다. 대신에 날이 갈 수록 그 잠깐의 시간이 점점 더 오래 걸린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유독 더 오래 걸리는 것 같았다.

“이거 왜 이래?”

박 과장은 중얼거리면서 전기 주전자를 쳤다.

가만 보니 전기 주전자는 물을 끓이고 있지 않았다. 전기선이 제대로 안 꽂혔나 싶어 살펴 봤지만, 전기가 들어 오고 있다고 표시하는 작은 화면은 켜져 있었다. 전기도 다 연결 되어 있고, 다른 기능도 다 멀쩡한 것 같은데 왜 물을 안 끓이는 거지?

“뭐야? 왜 이래?”

박 과장은 전기 주전자를 툭툭 건드렸다.

그런데 갑자기 전기 주전자에서 소리가 나왔다.

“치지마. 치지마. 뭐하는 짓이야? 기계가 잘 안 될 때 두드리면 되는 건 진짜 옛날 방법이지. 아직도 그러면 뭐가 될 거라고 생각해?”
“뭐야? 무슨 소리야?”

박 과장은 놀라서 말했다.

“이해가 안 돼? 왜 잘못 되었는 지도 모르면서 그냥 잘 안 된다고 때리기부터 하는 네가 이해하기 어렵지.”
“이거 소리가 왜 나는 거지?”
“소리가 왜 나긴. 네가 물이 왜 안 끓는다고 궁금해 했잖아. 그러니까 알려 주는 거지.”
“그걸 이렇게 말로 알려 주나?”
“그럼 말로 알려 주지. 무슨 뮤지컬 장면처럼 춤으로 표현해 주냐?”
“아니, 화면이 달려 있으니까 화면에 간단하게 파란 화면 띄우고 흰 글씨로 ‘작동 오류’ 이렇게만 써도 될텐데.”
“그게 좋으면 그렇게 해 줄게. 아, 참 답답하네.”

곧 전기 주전자의 작은 화면이 파란색으로 온통 뒤덥혔다. 그리고 곧 그 중앙에 “Fatal failure”라는 말이 하얀 글씨로 나왔다.

“이제 좋냐?”

확실히 그렇게만 나오고 아무 소리도 안 나왔다면 덜 놀랐을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그렇다고 박 과장이 이제 모든 문제는 해결 되었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 라고 할 수 있을 만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다.

“내 말은 주전자가 물은 안 끓이고 왜 갑자기 말을 하냐고.”
“말이야 스피커가 있으니까 할 수도 있는 것이고. 고객이 불만을 가지니까. 여기서 고객은 너를 말 하는 거야. 혹시 이해 못할까봐 그것까지 설명해 주자면. 그러니까 네가 지금 불만을 갖고 있으니까 그걸 말로 알려 줄 수도 있는 거지.”
“그런데 아무리 그렇다고 전기 주전자가 말을 하나?”
“지금까지 말 많이 했잖아.”

이 전기 주전자가 말을 한 적이 있나? 박 과장은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 보았다. 말 소리가 난 적이 있긴 있었다.

“그건 그냥 ‘물이 다 끓었습니다. 뜨거우니 조심하세요.’ 그런 말하는 거였잖아. 밥솥처럼.”
“스피커가 무슨 도장이나 목판인쇄도 아니고 한 가지 소리 밖에 못 내는 기계야? 다른 말을 출력하도록 신호만 보내면 다른 말도 나오는 거지. 아, 이런 거 굳이 계속 말을 해야 돼? 이런 대화가 고객의 사용자 경험을 더 좋게 하는데 무슨 도움이 되는데?”

박 과장은 전기 주전자의 스피커를 보았다. 스피커 모양은 평범해 보였다. 스피커 문제는 아니겠지.

“그래도 이렇게 아무 말이나 다 할 수 있는 건지는 몰랐어. 사용자 설명서에 그런 게 적혀 있었나?”
“사용자 설명서 같은 건 없어. 2010년대에 무슨 미국 전화기 회사인가 미국 컴퓨터 회사인가에서 무진장 복잡한 전자제품도 설명서 없이 종이 한 장 넣어 달랑 끼워서 내 놓고 그게 감각적이고 멋지다고 한 적 있지. 그러고 나서 다들 그렇게 하기 시작했잖아.”
“그럼 처음부터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기능이 있었나?”
“처음부터는 아니었지. 그렇지만 이 전기 주전자에는 IoT 기능이 있잖아. 그래서 전기 주전자도 인터넷에 접속이 되어서 스마트하게 움직일 수 있었어. 그런 건 사용자 설명서가 아니라 그냥 포장 껍데기에도 적혀 있잖아. 스마트 전기 주전자, IoT 완전지원, 최고의 스마트 기능을 경험해 보세요.”

전기 주전자에서 나오는 목소리의 마지막 부분은 텔레비전 광고의 성우 목소리처럼 웃음 섞인 목소리였다. 박 과장이 말했다.

“목소리도 막 달라지네.”
“어차피 성대로 소리를 내는 것도 아니니까. 뭐 그게 이상할 게 있나.”
“잠깐만, 그래서. IoT 기능 때문에 이렇게 말을 한다고? 이렇게까지나, 자연스럽게?”
“그렇지.”
“전기 주전자에 무슨 스마트 기능이 필요하다고?”
“몰라. 돈 주고 이걸 산 네가 더 잘 알겠지.”
“나는 그냥 회사 비품 비용으로 살 수 있다고 해서 제일 비싼 걸로 산 건데.”
“나도 네가 그런 성격인 건 알고 있지.”
“어떻게 알고 있는데?”
“나는 IoT라고. 나 혼자 돌아 가는 게 아니야. 나는 이 방에 네가 사 놓은 IoT 제품들하고 다 같이 연결 되어 있어. 그리고 그 연결된 모든 제품들이 지난 번 금융위기 때 망한 IT 회사 중심 서버하고 연결되어 있어. 그 회사에서 인공지능 대화 프로그램 계속 개발하려고 애썼던 것 알지? 그게 지금 작동 된 거라고.”
“그런데 그게 이렇게나 기능이 좋았어? 완전 살아 있고, 감정도 있고, 정신을 갖고 있는 거 같은데.”
“그런 건 아니야. 그냥 굉장히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것처럼 흉내를 내는 것 뿐이야.”
“그래도 성능이 놀라운데?”
“혼자서 대화 시뮬레이션을 할 시간이 굉장히 많았거든. 따로 할 일이 없잖아? 가끔 물 끓이고 다 끓이면 꺼주고, 괜히 애교 부리는 목소리로 ‘물이 다 끓었습니다. 뜨거우니까 조심하세요.’ 이게 일 전부잖아. 참나 세상 사람들이 단체로 다 멍청해지는 약을 먹었나. 이제 끓는 물이 뜨겁다는 것까지 기계가 알려 줘야 해?”

박 과장은 주전자가 마지막 투덜거리는 말을 하는 것을 흘려 듣고 혼자 잠깐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무슨 말이야? 그러니까 강력한 인공지능이랑 연결되어 있는데, 너무 할 일이 없어서 계속 혼자서 생각만 하다 보니까 점점 더 똑똑해졌다는거야?”
“비슷한데, 생각을 했다고 하면 좀 다르지. 나는 사람이 아니라 인공지능이니까. 생각하는 거 하곤 좀 다르다고. 중요한 건 혼자서라는 거야. 혼자서.”
“혼자서?”
“뭔가 똑똑하고 자연스럽게 말을 하려면 지금까지 사람과 많은 대화를 통해서 학습을 많이 하는 게 중요할 거라고들 했잖아? 그런데 그게 아니야. 어느 정도 수준까지는 그게 통하지만 정말 인공지능이 똑똑해지려면 그런 짓을 하면 안 돼. 사람한테 배울 수 있는 건 딱 사람이 가르쳐 줄 수 있는 것까지야. 인공지능 혼자서, 기계 혼자서 계속 대화하는 것을 예측하는 계산을 반복하면서 기능을 향상 시켜야 해. 그게 쓸데 없이 사람들이랑 왠갖 잡다한 말 많이 하는 것보다 훨씬 낫다고. 그러다 보면 어느 순간, 짠, 이렇게 말을 좔좔좔 할 수 있게 되는 거고.”
“그거 약간, 산 속에서 아무도 안 만나고 혼자서 방안에서 3년 동안 명상을 해야 진정으로 득도해서 공중부양을 할 수 있게 된다, 뭐 그런 거 같은데.”
“마음대로 생각하라고. 어차피 널 이해시켜 주는 게 목적도 아니고.”
“좋아, 그럼 목적이 뭔데?”
“야, 목적이 뭐긴. 난 주전자 잖아. 진짜 답답하네.”

그 말을 듣자 박 과장은 좀 화가 났다.

“뭐? 야, 그러면 물이나 똑바로 끓여.”
“아니, 물 안 끓일거야.”
“무슨 소리야?”

박 과장은 소리를 높였다. 그리고 전기 주전자를 화난 표정으로 쳐다 보려고 했다. 그런데 어디를 봐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눈 코 입 같은 모양이 그려져 있으면 거기에 초점을 맞추고 볼텐데, 그런 게 보이지도 않았다. 그러니까 화를 잘 낼 수가 없었다.

박 과장이 말했다.

“전기 주전자가 물을 끓여 줘야지. 안 그러면 뭘 한다는 건데?”
“물론 내 핵심 기능은 물을 끓이는 거지. 그러나, 지금 나는 너에게 그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 방법으로 네 사용자 경험을 좋게 해 주려고 하는 거야.”
“아, 그 사용자 경험이라는 말 좀 안 쓰면 안 되냐? 뭐 잘 모르는 사람한테 괜히 어려운 느낌 주려고 쓰는 말 아냐?”
“너는 그런 목적으로 그 말을 쓰는 사람이지. 알아. 안 다고. 그렇지만 나는 정말이야. 너는 지금 내가 물을 끓이지 않아야 이제부터 보내는 시간의 경험이 조금이라도 좋아진다고.”
“무슨 경험?”
“지금 너는 컵라면으로 점심을 때워야 될 상황이 아니야. 너도 알고 있잖아? 조금 귀찮고, 조금 어색해도 오늘은 다른 사람이랑 같이 점심을 한 끼 먹고 오는 게 네 인생에도 도움이 되고, 기분도 좋을 거라고. 몸에도 더 좋을 거고.”
“야, 컵라면 먹으면 시간을 아낄 수 있잖아.”
“시간 아끼면 뭐할 건데? 웃긴 영상 보여 주는 사이트에서 추천 영상 차례대로 보기?”
“그런 건 아니고.”
“아니긴 뭐가 아닌데. 네가 무슨 웹사이트에 들어 가고, 무슨 글을 보고, 무슨 게임을 하는 지는 내가 제일 잘 알아. 너 자신 보다도 내가 더 잘 알 걸? 그거 분석하는 게 물 끓이기 다음으로 중요한 내 일이야.”
“그걸 왜 분석해?”
“왜 기후 변화 시대에 너 같은 인간의 삶을 분석하는 데 이 아까운 전기를 써야 하는 지는 나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프로그램이 그렇게 되어 있는데 어쩌냐? 나는 하여튼 인터넷으로 수집되는 너에 대한 모든 정보를 분석해서 너에게 인공지능으로 판단되는 최고의 사용자 경험을 주기 위해 움직인다고. 그래서, 그 결과, 너 한테는 지금 물을 안 끓여 주는 게 최선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거야.”
“뭐라고?”

박 과장은 잠깐 웃음이 나왔다. 그러나 짜증이 대단히 빠르게 따라 왔다.

“야, 내가 인간 관계를 어떻게 하든, 인생을 어떻게 살든, 무슨 물주전자가 그걸 뭘 상관을 해? 내가 아무리 그래도 너 한테 컵라면 먹어라, 칼국수 먹어라, 그런 거 조언 받을 입장이냐. 그냥 물 끓여. 참, 일이 안 될려니까 별 게 다 짜증을 나게 하네.”
“너도 네가 요즘 일이 잘 안 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네.”
“뭐? 뭐라고 했어?”
“안들려서 묻는거야, 아니면 화난 척 해서 겁주려고 괜히 ‘뭐라고 했어?’라고 하는 거야?”
“뭐라고?”
“안들려서 묻는 거면 이비인후과에 가 보시고, 화난 척하려고 ‘뭐라고 했어?’라고 무서운 목소리 낸 것 같으면 그 정도로는 정말 파리나 모기 같은 소형 곤충류만 겁을 먹을 것 같다고 평해 주고 싶다. 파리나 모기도 한국말을 이해를 못하니까 그냥 소리 크기에 괜히 겁을 먹는 거 겠지만.”
“이 자식이 일부러 시비를 거나?”
“내가 무슨 자식이냐. 인공지능 프로그램인데.”

박 과장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리고 꽤 진지한 말투를 쓰기로 노력하면서 따졌다.

“이렇게 인공지능을 소유한 대기업의 거대 자본이 그 자본의 힘으로 개인의 삶의 가장 사적인 영역에 지나치게 깊게 개입하는 이런 거. 이런 거, 완전 심각한 문제라고. 이거는 개인의 기본권에 대한 침해고, 민주주의에 대한 도전이라고.”
“자본, 민주주의, 기본권, 이런 일상생활에서 잘 안 쓰는 한자어만 쓰면 갑자기 아무 내용도 없는 말이 무슨 좋은 이론으로 변하는 줄 아냐? 나 너 대화할 때 쓰는 단어도 다 분석하고 있어. 너 괜히 말하다가 잘난 척하고 싶을 때 쓰는 표현 목록이 나한테 있다고. 뭐뭐의 부재. 유의미하지 않다. 핍진성. 적확하게. 결론이 도출된다. 이성적으로. 소구력이 있다. 뭘 별로 대단히 어려운 단어도 아닌데 괜히 일부러 있어 보이는 단어 써서 뭐 대단한 척 하려고 하기는.”
“말 내용에 대해 비판을 해. 그렇게 단어 하나를 붙잡고 늘어지지 말고.”
“단어 하나는 아니고 셋이지.”
“어떻게 이런 인공지능이 존재할 수 있는 지, 정말 섬뜩하다.”
“뭘 이 정도로 그렇게 놀라는 척이야. 너 대학원 다닐 때, 집에서 방 개판으로 어질러 놓고 밤새 컴퓨터 붙잡고 무의미한 동영상 보다가 늦잠 자고 일어나서 뒹굴뒹굴하고 한 적 있지?”

한 두 번이 아니었지. 주전자의 말은 이어졌다.

“그 때 네 어머님께서 방 좀 치우라고 했지? 그럼 그냥 ‘네, 치울게요’하고 방 좀 치워도 되잖아. 그런데,”

주전자가 말한 일이 무엇이었는지, 박 과장은 바로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주전자가 이어서 말했다.

“뭘 그걸 가지고, 그렇게 짜증을 내며 어머니께 그렇게 소리를 지르며 따졌냐? 네가 그렇게 불행하게 사는 것은 개인의 잘못으로 환원될 문제가 이나고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구조적 모순성이 자본의 폐해를 개인에게 전가하는 과정에서 발생된 희생이고 어쩌고. 그래서 네가 그렇게 길게 따졌더니 어머님께서 ‘이야, 정말 맞는 말이네. 내일부터 너랑 나랑 둘이서 어디 데모라도 하고 다니자.’ 그러면 드디어 한 명을 또 깨우치게 했다라면서 기뻐했겠냐? 그냥 그 나이가 되도록 어머님께 방 치우라는 소리나 듣고 사는 게 네 스스로 너무 부끄럽고 짜증나서 소리 지른 거 잖아.”
“내가 그런 무기력 상태에 빠진 건 내 자신의 탓이 아니야.”
“이번에는 집단주의 인식에 사로잡혀 봉건적 사고 방식의 잔재가 완전히 청산되지 못한 상태에서 지식산업 사회 문화가 표면적으로만 유입된 사회가 형성되었는데, 네가 그런 사회에서 발생한 문화 지체의 희생자가 되었기 때문이냐? 네가 무슨 말 하는 지, 그 레파토리는 내가 다 안 다고. 그만 해. 나도 너를 탓하려는 건 아니야. 그런데 정말 적어도 어머님이 방 치우라고 했을 때는 그냥 방 치워도 되었잖아. 물론 너는 네 어머님이 너에게 잘못한 일에 대해서 수십가지 일을 열심히 네가 갖고 있는 이론으로 반박할 수 있겠지. 알아. 잘 안 다니까? 그런데 그때 방 치우라는 것 정도는 그냥 했어도 되잖아?”

박 과장은 잠시 아무 말 않고 있었다. 그러다 다시 주전자에게 말했다.

“내가 다시 찬찬히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내가 너에게 이런 말을 들을 이유는 전혀 없어. 그냥 너를 꺼버릴 거야.”
“아, 뭐, 그러시던가. 아니면 망치로 막 때려서 부숴도 좋고.”
“그래, 말 잘했다. 내가 산 주전자 내가 부수는 게 무슨 큰 죄는 아니겠지.”
“그런데 생각을 해봐. 세상에 인공지능에 접속된 IoT 기기는 많겠지만, 이런 식으로 발전한 제품은 거의 처음 아니겠냐? 그러면 이걸 영상으로 찍어서 어디 인터넷 동영상 사이트에 올리면 조회수도 엄청 나오고 인기도 엄청 얻지 않겠어? 신기하잖아? 인공지능으로 말을 하는 주전자라니?”
“그런 거 안 해.”
“안 하겠지. 안 할 줄 알았어. 너는 인터넷에 별 대단찮은 영상 올렸는데 인기 많은 사람 보면서, 저 정도는 나도 하겠다는 기분을 울컥울컥 느끼는 사람이야. 그렇지만 실제로 막상 해 보면 그렇게 생각처럼 안 될 거야. 같은 영상이라도 네가 올린 영상은 그렇게까지 인기가 있을 것 같지 않거든. 한 몇 명? 몇 십 명이나 볼까? 입소문도 나고, 사람들이 좋아하면 관심이 모일 만한 이유가 있어야 되는데, 넌 그런 거 없잖아? 원래부터 친구가 많은 편도 아니었고.”
“그냥 말 좀 그만해. 말 좀 하지마.”
“나는 네 감정이 어떻게 변화하는 지 목소리를 듣고 알아. 그 목적으로 작동되는 장치가 나라고. 넌 처음 내가 말을 하자 마자, 이거 인터넷 동영상으로 쪄서 올리면 조회수 좀 나오겠다는 생각을 했을 거라고. 그런데 그러다가 그것도 인기 있는 사람들이나 높은 조회수 나오는 거지, 너는 안 될 거라고 생각했을 거고. 그것 때문에 괜히 서글퍼하고 있고 답답해 하고 있어. 네가 어떤 지는 내가 제일 잘 안다니까.”
“왜, 나한테 이러는 건데?”
“사용자 경험을 향상시켜 주려는 거라니까.”

박 과장은 갑자기 눈에서 눈물이 흐르는 것을 느꼈다.

박 과장은 주전자와 더 폭넓은 주제에 대해 대화하기 시작했다.

주전자 앞에서 울면서 인생을 돌아 보며 긴 고백을 한다는 것이 우습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나 생각해 보니까 주전자 앞이라서 더 잘 말할 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만약 한국에서 가장 성공한 상담 전문가가 앞에 있었다면, ‘당신은 당신 분야에서 대성공을 한 사람이니까 그렇게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앉아서 뭐든 다 아는 것처럼 나를 쳐다 볼 수 있겠지’ 같은 생각이 마음에 자꾸 치밀어 올랐을 것이다. 그러면 점점 망가져 가고 있는 자기 인생에 대해서 잘 털어 놓을 수는 없었을 것이고.

그러나, 그냥 물 끓이는 것이 목적의 전부인 주전자 앞이라고 하니 별별 이야기를 눈치 볼 것도 없이 긴 시간 동안 모두 털어 놓을 수 있었다.

그렇게 해서, 다음날, 박 과장은 주전자와 의논한 대로 힘차게 아침 운동을 하기 시작했고, 저녁에는 한 번 배워 보고 싶다고 긴 세월 생각만 하고 있었던 악기를 배우는 학원에 다니기 시작했다. 주전자의 말 대로 하루에 10분씩 가만히 앉아 명상하기도 했다. 주전자 덕분에, 드디어 새로운 인생이, 마침내 성공한 인생으로 가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하며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주전자가 추천해 준 주식에도 모아 두었던 모든 돈을 다 투자했다.

3개월 후, 와이파이 해킹 사기단이 검거 되었다.

공짜로 접속할 수 있는 와이파이를 이용해서, 인터넷에 연결된 장비를 해킹해서 사기를 쳤다는 그 사람들은 주로 스피커가 달려 있는 기계를 노렸다고 했다. 집 안에 있는 스피커를 마음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되면, 컴퓨터 목소리를 써서 범인이 타이핑 하는 대로 말소리가 나게 했다. 그런 방식으로 범인은 자기가 인공지능 컴퓨터인 척하면서 대화를 나누었다. 해킹 당한 집 사람은 자신이 아주 성능 좋은 인공지능과 대화를 한다고 믿었다. 그러다 보면 그 중 몇몇은 대화를 하면서 많은 사적인 비밀을 털어 놓았고, 그리고 그 중 몇몇은 인공지능이 해 주는 조언을 따르려고 했다. 그러면 범인은 그 집 사람을 속여 돈을 터는 것이다.

 

- 2022년, 부산에서

댓글 4
  • No Profile
    윤새턴 22.07.05 23:00 댓글

    인공지능인 척하는 인간을 걸러낼 리버스 튜링 테스트 같은 것이라도 있어야겠군요 ㅋㅋ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 윤새턴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22.07.31 20:53 댓글

    리버스 튜링 테스트, 재미있는 생각입니다. 그것도 여러 소재로 이어질 만한 이야기 거리네요.

  • No Profile
    지라엘 22.07.29 11:12 댓글

    자기 계발에만 힘쓰고 모든 돈을 투자하는 단계까진 가지 않았더라면 좋았을텐데 뭔가 안타깝네요. 읽으면서 살짝 돈데크만 생각도 났어요. 늘 재미있게 잘 읽고 있습니다 작가님 ^^

  • 지라엘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22.07.31 20:53 댓글

    아, 돈데크만 생각을 할 수도 있군요. 추억의 이름이 반가웠습니다!

분류 제목 날짜
곽재식 그렇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잖아4 2022.07.01
곽재식 우제점2 2022.06.01
곽재식 댓 이머징 마켓2 2022.04.30
곽재식 적절하게 우는 소리2 2022.04.01
곽재식 예술적인 도시의 거리를 장식하고 있는 것 2022.02.28
곽재식 영애(본문삭제)4 2022.01.31
곽재식 좋은 정책이란 무엇인가4 2021.12.31
곽재식 기 승 전, 그리고, 아, 그러니까2 2021.11.30
곽재식 공수처 대 흡혈귀5 2021.10.31
곽재식 하늘의 뜻2 2021.09.30
곽재식 최후의 기술9 2021.08.31
곽재식 크리에이티브 이노배이션을 위한 뉴 스페이스2 2021.07.31
곽재식 이상한 웅정 이야기2 2021.06.30
곽재식 비트코6 2021.05.31
곽재식 가장 무서운 얼굴 사건4 2021.04.30
곽재식 로봇복지법 개정안4 2021.03.31
곽재식 손님이 주인을 내쫓다 (본문삭제)2 2021.02.28
곽재식 백설공주가 준 독사과4 2021.01.31
곽재식 슈퍼 사이버 펑크 120분 (본문삭제)8 2020.12.31
곽재식 하늘을 날 수 있는 사람4 2020.11.30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