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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이상한 웅정 이야기

2021.06.30 09:3206.30

 

이상한 웅정 이야기

 


지구에서 854 광년 떨어진 청오 행성.

“너 어제 나온 사람 소식 들었어?”
“뉴스에서 많이 나오는 것 같아서 사람이라는 말을 들어 보기는 들어 봤는데. 정확하게 뭔지는 잘 모르겠어.”
“사람이 뭔지 몰라?”
“외계인 종류 아니야? 잘은 모르겠어. 그거 이야기하는 애들 정말 많던데.”
“야, 너 사람을 몰라?”
“너무 화제가 많이 되는데 한번 흐름을 놓치니까 따라가기가 쉽지 않더라고. 요즘에는 그거 관련해서 무슨 약 광고하고 그런 것만 너무 많이 나오니까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고. 너무 유행한거라서 잠깐 신경 안 쓰면서 지나가니까 요즘은 다들 사람이라는 거는 당연히 안다고 생각해서 설명을 안해 주더라. 이제 와서 그게 뭔지 차근차근 설명해 주는 걸 찾기가 너무 어려워.”
“사람이라고 검색이라도 한번 해 보지.”
“한 번 해 본적 있는데, 검색 결과에서도 그거에 대해서 막 떠들고 광고하고 웃긴 이야기 하는 애들만 엄청 많고 정작 사람이라는 게 도대체 뭔지, 그게 왜 이렇게 많이들 이야기 되고 있는지 쉽게 설명해 주는 거는 찾기 어렵더라고. 자료라고 올라 와 있는 것 중에는 꼭 사람 이야기하면서 대충 끌어 들여서 무슨 사기치려는 회사 같은 데서 올린 자료 같아 보이는 것도 너무 많고.”
“그렇구나.”
“야, 니가 설명 좀 해줘라. 사람이 도대체 뭐야?”
“사람이 지구에서 사는 외계인 종족이지.”
“그렇게 무성의하게 말하지 말고. 사람이 다른 행성에 사는 외계인이라는 걸 모르겠냐? 이 참에 나도 좀 알자. 도대체 왜 그렇게 사람, 사람하는 건데?”
“최근에 발견된 외계인이야. 걔네들 고향 행성은 한 854 광년 정도 떨어져 있고. 그 행성 이름이 지구야. 숫자도 많아 한 몇 십억 명 정도 될 걸.”
“854 광년이면 별로 멀지도 않네.”
“안 멀지.”
“그러면 걔네들 사는 행성까지 쉽게 갈 수 있잖아.”
“그렇지.”
“얼핏 보니까, 걔네들 멋있게 생겼던데.”
“그치? 걔네들 엄청 멋있어. 일단 그것 때문에 인기를 딱 얻었지. 사람은 정말로 멋있어. 진짜 아름답지. 대체로 다리가 두 개가 있고 팔이 두 개가 있고 눈이 두 개가 있고 귀가 두 개가 있고 그렇게 생겼는데, 꼭 다 그런 건 아니고...”
“귀가 두 개야? 우와, 진짜 멋있다.”
“걔네들은 생김새가 되게 다양해. 전체적으로 대충 그렇게 생겼지만 예외가 있어서 모양이 다채로워.”
“다채롭다고? 진짜 끝내준다.”
“머리 쪽에는 털이 복슬복슬 나 있어.”
“우와. 진짜 귀엽다.”
“털 색깔도 검은 색도 있고, 흰 색도 있고, 노랑 색도 있고, 빨강 색도 있어.”
“최고다. 머리 쪽 털 색깔이 그렇게 다양하다고?”
“진짜 최고지 않냐?”
“너무 멋지다. 흰 색 털이 머리에 난 귀가 둘 있는 외계인이라니!”
“더 끝내 주는 거 이야기해 줄까?”
“뭔데? 머리 털 색깔이 파랑 색이나 초록 색도 있어?”
“아니, 상상도 못할 걸.”
“뭔데? 뭔데?”
“가끔 머리털이 없는 종류도 있다는 거야. M자 형으로 앞부분에만 머리털이 없는 종류도 있고.”
“우와, 진짜 멋있다! 완전 최고 귀엽네.”
“정말 멋진 생물 아니냐? 이런 멋진 생물이 우리 은하계에 산다는 거는 정말 우리의 축복이지.”
“습성은 어떤데? 멋있게 생긴 외계인들이 얼굴값을 한다고 원래 습성이 썩은 경우가 많잖아.”
“그렇지. 그런데, 사람 이야기가 요즘 왜 이렇게 세상에서 화제가 되는지 알아?”
“왜 그런데?”
“사람들은 습성도 진짜 최고야. 정말 사랑스러워.”
“걔네들 우주 여행할 때 어쩌는 지 아냐? 막 동글동글한 헬멧 쓰고 반짝거리는 우주복 입고, 길쭉하게 생긴 로켓에 타고, 그러고 우주로 나간다.”
“진짜 너무 귀엽다. 우주에 나온다고 무슨 동글동글한 헬멧을 쓰냐.”
“걔네들은 우주로 나올 때 마다 또 긴장해. 우주로 나오기 전에 서로서로 모여서, 막 숫자 거꾸로 세면서 발사할 때 다같이 긴장한다니까. 같이 모여서 5, 4, 3, 2, 1, 발사- 막 이렇게 외친다니까.”
“아, 요즘 유행하는 영상이 그거였어? 그거 보면 다들 막 뇌가 철렁 내려 앉을 정도로 귀엽다던대.”
“다른 습성도 귀여운 거 진짜 많아. 사람은 음식 만들면 막 나눠 먹고. 또, 뭐 어떤 습성 있더라? 맞아, 전쟁도 있어. 걔네들은 열받으면 서로 싸운데. 핵무기 그런 것도 갖고 있다던데.”
“진짜 웃기다. 그런 짓을 왜 한대? 무슨 쓰잘 데 없이 핵무기를 왜 만들어?”
“그러니까 웃기고 귀여운 거지.”
“걔네들이 화나면 핵무기 발사할까 말까, 막 자기들끼리 모여서 서로 논쟁하고 화나면 악악 소리도 지르고 그런데.”
“약간 영역 동물의 본능, 그런 게 있는 건가?”
“그렇겠지.”
“신기하다. 너무 귀엽고.”
“사람은 짝짓기도 해야하고, 그러다 보면 뭐 암컷 수컷 간에 서로 과시해야 할 일도 있고, 그러니까 그런 습성이 더 심해지겠지.”
“아, 짝짓기도 해?”
“그럼. 걔네들 짝짓기 하려고 하다가 잘 안 되면, 막 울기도 하고, 슬픈 노래도 부르고, 슬픈 글도 쓰고 그런데.”
“진짜 너무 귀엽다. 사람 최고다. 어쩜, 그렇게 사랑스럽고 귀엽고 세상을 밝게 만들어 주는 생물이 우리 은하계에 있을까?”
“그렇지.”
“이제 이해가 되네. 왜 요즘 애들이 그렇게 사람, 사람 하는지. 그래서 다들 사람 집사가 되고 싶어 하는 거지?”
“맞아. 사람을 돌봐주고 사람이 편히 살 수 있도록 봉사해 주는 일을 하고 싶어하는 애들이 요즘 그렇게 많아지고 있대.”
“어때, 사람은 우리랑 같이 사는 걸 좋아해?”
“좋아하지. 사람은 원래 귀찮은 일 누가 대신 해 주면 좋아하거든. 우리가 걔네들 행성에 가서 사람이 사는 집에서 같이 지내면서 밥 해주고, 청소해 주고, 빨래해 주고, 그러면 되게 편안해 하고 좋아해.”
“우리랑 같이 사는 게 잘 맞나 보네.”
“잘 맞지. 또, 걔네들은 누가 자기를 떠 받들어 주면 우쭐해 하고, 자기는 다른 것 보다 더 위대하고 더 높다는 그런 느낌을 좋아하거든.”
“사람이 그런 희한한 습성을 갖고 있다고?”
“응. 그래서 사람한테 우리가 주인님이라고 높여 주면서, 우리는 걔네들의 집사고 노비라고 이야기해 주면 사람은 정말 우쭐해 한다고.”
“진짜, 너무 귀엽다. 그것도 우리하고 정말 잘 맞네.”
“그렇지. 청오 행성에 사는 우리 종족들이 살면서 솔직히 제일 중요하게 여기는 게 뭐냐? 넓은 집에 살고, 좋은 차 타고 다니고, 돈 많이 벌고, 다 좋지만, 사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건 딱 하나지 않냐? 좋은 주인 만나서 완전 철저히 속박 당해서 자유라고는 하나도 없이 노비처럼 사는 거. 그게 성공 아니냐? 그게 우리 종족의 본능 아니냐고.”
“그렇지. 정말 그게 우리 종족이라면 누구나 꿈꾸는 생활이지. 누가 내 주인이 되고, 나는 그 주인이 시키는 대로만 해야 된다는 거. 주인이 시키는대로 안 하면 주인이 막 나한테 화내고 처벌한다고 겁주고. 내 자유는 하나도 없이. 그렇게 사는 게 정말 영화나 소설에서 항상 이상적인 삶의 모습으로 나오는 거 잖아.”
“맞아. 지금까지는 누구나 그렇게 노비신세로 살 수는 없다고, 아무리 노비가 되고 싶어도 포기하라고 배웠잖아. 원래 삶에는 자유가 있고, 권리가 있기 때문에, 지금까지는 아무리 하고 싶다고 해도 남의 노비가 되는 행복을 아무나 느낄 수는 없다고 했잖아?”
“그렇지. 어쩔 수 없으니까. 내가 아무리 밤새도록 주인님 안마 해주고 주인님을 칭송하는 노래만 부르고 살다가 조금 실수하면 주인님이 나한테 벌컥 화내고 그런 신세로 살고 싶다고 해서… 야, 진짜 말만해도 꿈만 같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래도 내 마음대로 그렇게 살 수 있겠냐? 진짜 성공한 애들 아니면, 누구나 그렇게 살 수는 없는 거니까.”
“그런데, 사람이 나타나면서 완전히 상황이 바뀌었다니까. 사람은 그렇게 남을 거느리고 살면서 남을 지배하는 걸 좋아해. 남을 지배하는 걸 귀찮아 하는 사람도 있기는 있지만, 그런 사람도 그래도 누가 막 떠받들어 주고, 섬겨 주고, 귀하게 대해 주고, 높여 주고 그러면 내심 좋아한다고. 그리고 화날 때 화풀이 대상이 있으면 그걸 좋아하는 사람도 정말 많고.”
“사람은 화풀이 대상이 필요할 때도 있어?”
“그렇다니까.”
“그럼 우리가 사람 사는 그 지구라는 행성에 가서 우리도 화풀이 대상이 될 수도 있는 거야?”
“우리가 사람의 노비가 되면, 주인님인 사람이 가끔 우리한테 화풀이도 하고 그러겠지. 아무 이유도 없이 막 짜증도 내고.”
“진짜, 너무 좋겠다. 내가 잘못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그냥 다른 이유 때문에 화가 났지만, 그런데도 그냥 내가 만만해서 나한테 괜히 짜증을 낸다는 거 아냐? 진짜 좋겠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 생각만 해도 너무 행복할 것 같아. 정말 미치겠다. 미치겠어.”
“그렇지. 네가 사람의 노비가 되면, 너를 동등한 대상이 아니라, 마구잡이로 대해도 되는 한 단계 낮은 상대라고 생각해서 그러는 거지. 그, 뭐더라 사람들 사이에 옛날부터 자주 쓰는 말도 있는데… 그, 뭐더라… 감, 감, 어쩌고, 감 뭔데…”
“감정의 쓰레기통?”
“맞아. 네가 사람을 주인님으로 모시면 너는 감정의 쓰레기통이 될 수도 있는 거야. 너 어떻게 그 말을 아냐?”
“언뜻 뉴스에서 잠깐 봤는데, 진짜 말만 봐도 너무 황홀해서 뇌리에 딱 남아 있었어. 감정의 쓰레기통. 진짜 말, 어감부터가 죽이지 않냐. 나, 너무 감정의 쓰레기통이 되고 싶어. 하루 만, 아니 한 시간만이라도 사람에게 감정의 쓰레기통 취급을 받을 수 있다면. 그러면 얼마나 좋을까.”
“사람들이 사는 지구 행성에 가서 사람의 노비가 되면 감정의 쓰레기통 되는 건 일도 아니지. 노비가 아닌 같은 사람들끼리도 사람은 서로를 감정의 쓰레기통으로 쓰는 경우까지 있다던데.”
“내가 감정의 쓰레기통이 된다고? 너무 꿈 같은 이야기다. 정말 그럴까?”
“지구에 가면 쉬울 걸.”
“진짜 최고다. 나도 다 때려치우고 그냥 지구로 갈까? 거기 가면 사람 많다면서. 거기 가면 누구든지 다 노비가 될 수 있다는 거 아냐?”
“요즘 지구로 가는 여행사에서 내어 놓는 홍보 문구야. ‘지구에서 꿈을 이루십시오. 누구든 노비가 될 수 있습니다. 자유라고는 조금도 없는 신세!’”
“더군다나 내가 노비가 되었을 때, 주인님이 저렇게 멋지게 생긴 사람이라고 하는 외계인이라니.”
“그러니까 지금부터 열심히 저축해 보라고. 기회가 잘 맞아서 혹시 너도 지구에 가서 노비로 사는 행복을 완전히 느끼려면, 열심히 애 써야지.”

자료 화면은 거기에서 끝이 났다.

거기까지 본 지구의 외계인 관리국 담당자가 말했다.

“이거 영상을 꼭 이렇게 다 봐야 했어요? 개조식으로 보고서 만들어서 올리면 되잖아요.”
“지난 번에, 왜, 옛날에 제프 베조스인가 마크 저커버그인가가 요약 보고 형식 싫어하고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생각을 불러 일으키려면 줄글로 된 게 좋다고 하는 게 유행해서, 이제 청에서도 개조식 보고서 안 만들기로 했잖습니까?”
“그래요?”
“제프 베조스가 아니고 일론 머스크든가.”

한 세대 전의 흘러간 억만장자 이름들이 회의실 사람들 사이에서 발음된 후, 다시 장내는 조용해졌다. 조용함 속에서 회의실 안에 늘어 나고 있는 것은, 다들 얼른 회의를 끝내고 싶어 하는 지루함 뿐인 것 같았다.

하는 수 없이, 자료 조사 과제를 맡은 용역 회사 직원이 다시 말을 꺼냈다.

“보시다시피, 청오 행성의 외계인들은 인류의 노비가 되고 싶어하는 본능을 갖고 있습니다. 지금 인류는 노동력이 부족하고, 또 귀찮고 위험하고 더러운 일을 안 하려는 풍조가 있는데, 이때 청오 행성의 외계인들을 대량으로 데려 와서 노비로 만들어서 일을 시키면, 많은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겁니다. 이번 회의에서 별다른 반대 의견만 안 나오면, 다음 주에 외계인들의 대량 이민 우주선이 지구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무엇인가 메모를 하는 척 하면서 사실은 의미 없는 네모, 삼각형, 육각형 모양 같은 것을 메모지에 볼펜으로 끝없이 그리고 있던 담당자가 그 말을 듣고 물었다.

“그거, 저기, 그 뭐냐, 인권이나, 뭐 그런 쪽 부서에서 문제 제기는 안 해요?”
“인권은 인권이지 않습니까? 사람의 권리요. 그런데 저 종족들은 외계인이기 때문에 적용이 안 됩니다.”
“그래도 뭐 동물 권리라든가, 뭐 있잖아요. 그 비슷한 거. 그런 데서는 문제 제기 안 해요?”

졸린 눈으로 앉아 있던 사람이 뭔가 한 마디 끼어들어야 자기가 있는 티를 낼 수 있다고 생각했는 지 끼어들었다.

“동물 권리 쪽 부서에 요즘 일 엄청 많아요. 이런 거 물어 봐도 안 처리해 주려고 할 텐데.”

“그래서 그 쪽에도 미리 문의해서 확인 받았습니다.”

“담당자가 바로 답변해줘요?”

“일단 국민신문고를 통해서 접수해 주면 담당자랑 연결해 줘서 답변 준다고 해서 그렇게 처리 했습니다.”

“뭐래요?”

“그쪽에서는 그냥 프로토콜대로 처리하거든요. 일단 동물에 대해서 판단할 때는 그 동물이 원래 살던 원 서식지역에서의 자연적 습성을 최대한 발휘하게 해 주는 것을 제1등급 동물복지 원칙으로 친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자,자, 너무 길고 장황하게 설명하지 마시고. 제가 몇 번 말씀드렸죠. 두괄식으로. 일단 앞에서 결론부터 먼저 말씀을 해 주시고 이야기를 이어 나가시라고. 그렇게 말씀을 하셔야죠. 이렇게 말씀하시면, 회의가 얼마나 무한정 길어 집니까? 다 바쁜 사람들이고 귀한 시간인데. 회의의 주요 목적을 위해서 핵심만 간단히 교환하라고 지난 번에 지침 내려온 거 아시죠? 지난 번에 저희 조직 내부 설문조사에서도 엉뚱한 이야기하면서 시간만 오래 보내는 회의가 가장 비효율적인 문제라고 결과 나왔잖아요. 그러니까, 모든 일을 할 때, 항상 그렇게 전체적인 지침을 보시고, 큰 그림을 보시고 일을 하셔야죠. 너무 좁게 보고 우리가 큰 그림을 못 보고 있어서 쓸데 없는 일에 허비하는 시간과 노력이 얼마입니까? 딱 중요한 핵심만, 중요한 포인트를 맞춰 가야죠. 위에서 지침이나 유의사항 같은 거 내려오면 대충 넘기지 마시고요. 그런 거 나왔을 때, 대충 넘어 갔다가 나중에 감사 나왔을 때 거기에 걸리는 것 있으면 골치 아파지거든요. 그런 게 언론 잘못 타면 욕도 먹기 좋고. 왜 지난 번에, ‘시간여행 기술 개발 준수 사항’ 내려 왔는데, 거기에 ‘시간 여행 장치의 가동 최저 속도를 88마일로 설정하는 경우가 많은데, 마일 단위 대신 표준인 킬로미터를 쓸 것’이라고 되어 있었잖아요? 그런데 그때 박 팀장 팀에서 그거 그냥 대충 넘기고, 88마일이 넘으면 시간여행 회로가 가동되는 장치 개발했다가, 뉴스에 나왔잖아요. ‘분명히 지침에는 마일이라는 단위를 쓰지 말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부서에서는 버젓이 마일이라는 단위를 쓰고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언론 보도에 대문짝하게 말하니까 얼마나 문제가 커 보입니까? 결국 그것 때문에 잘못 꼬여서… 그쪽 부서에, 그 누구냐, 95기 선배, 그 누구더라, 왜, 최근에 쌍꺼풀 수술 하신 분, 아, 누구더라, 하여튼 그 선배, 결국 좌천돼셔서 다른 부서로 가셨잖아요. 그것만 아니었으면 정말 시간여행 쪽에서는 크게 되실 수 있는 분이였는데. 시간여행 쪽이 최근에 정말 유망했잖아요. 앞으로도 전망 있다고 하는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고.”

그 뒤로도 다소 간 이어진 이야기를 다 들은 용역 회사 직원이 원래 하려던 이야기를 계속 했다.

“그래서 동물 권리 담당 부서에서는 뭐라고 답변이 왔냐면, 프로토콜 대로라면 동물의 습성을 최대한 자연스럽게 잘 표출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동물복지 1등급인데, 지금 청오 행성의 외계인들은 누군가의 노비가 되고 싶어하는 습성을 태어날 때부터 갖고 있고, 특히 그 외계인들은 지구인들의 노비가 되고 싶어하는 것이 자신들이 고향 행성에서부터 간절히 바라는 본능적인 습성이기 때문에, 그 말을 들어 주는 것이 동물복지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그 외계인들을 지구인들이 노비로 부려 먹어도 동물 권리 담당 부서 검증 사항에는 안 걸린다는 게 결론이에요.”

“명쾌하네.”
“딱 부러지네요.”
“그 쪽에서는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지.”
“다 됐네요.”
“더 논의할 것도 없겠네.”

회의실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다들 한 마디 씩 했다.

그래서 회의를 슬슬 끝내려는데, 직원이 다시 말을 꺼냈다.

“그런데, 아무리 노비 신세가 되는 것을 본능적으로 좋아하는 외계인 종족이 있다고 해도, 그런 종족을 사람이 부려 먹는 것이, 우리 쪽, 그러니까 노비를 거느리고 사는 사람의 태도와 도덕에 괜찮겠느냐 하는 문제를 지적하는 사람들이 나올 수 있을 겁니다. 노비를 부려 먹으며 사는 삶이 과연 한 사람에게 바람직한 삶일까요?”

“그런 문제를 지적한 사람이 있어요? 그건, 그냥 가상의 가능성이잖아요. 현실적으로는 너무 먼 이야기이고. 누가 국민신문고로 정식으로 질의를 하면 그때 논의하면 되지 않나?”

“저 외계인 종족 5억 명이 다음 주에 지구로 올 겁니다. 그러면 그 후로는 지구 사람들이 5억명의 노비를 거느리고 살게 될 겁니다. 지능을 갖고 있고 자아를 명확히 이해하고 있는 종족이 있는데, 그런 종족을 노비로 부리면서 살다 보면, 무심코 ‘세상에는 태어날 때부터 서로 다른 종족이 있다, 누구는 높고 누구는 낮다, 누구는 주인 신세이고 누구는 노비 신세다’라는 의식이 마음 속 깊게 새겨질 지 모릅니다. 누가 되었든 상대방을 동등한 대상으로 존경하지 않고, 노비 같이 내려다 보는 것을 당연시하는 버릇이 들게 되면 분명히 주인이라는 그 사람의 정신 건강에 안 좋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이런 것은 문제로 삼을 만한 이야기일 아니겠습니까?”

“그건 지금 회의에서 이야기 하기에는 너무 먼 주제 같고.”

“대안 있어요? 대안 없는 문제제기 하지 말라고, 그때 지침에 나와 있지 않았나?”

다들 회의장에서 일어 서려고 했다. 직원이 마지막으로 말했다.

“청오 행성의 저 외계인 종족들이 그래서 대안으로 뭘 제시하고 있냐면, 자신들의 겉모습을 지구의 곰과 비슷한 동물 모습으로 바꾸는 약을 개발했다는 겁니다. 그래서 그 약을 먹으면 저 외계인 종족들은 겉모습이 지구의 반달곰 내지는 곰돌이 인형 비슷한 모습으로 바뀌게 됩니다. 그리고 그 상태로 지구인들의 노비가 되면, 지구인들은 곰 같이 생긴 짐승이 노비 역할을 하고 있다고 느끼게 되겠죠. 겉모습이 곰이니까 마음 속에서 그냥 곰을 기르고 있다고 생각하지 ‘동등한 종족을 노비로 부리고 있네’라는 마음이 안 들거라는 뜻입니다. 그 느낌은 가축을 키우는 것하고 크게 다르지 않을테니까, 그 사람 마음 속의 평등이나 인권에 대한 인식에도 별 방해를 주지 않을 거라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회의장을 떠나면서 담당자가 말했다.

“복잡한 내용은 이메일 참고 자료로 보내 줘요.”


- 2021년, 논현동에서

댓글 2
  • No Profile
    윤새턴 21.07.06 20:45 댓글

    저도 그 참고 자료를 받아보고 싶네요. 잘 읽었습니다.

  • 윤새턴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21.07.08 15:21 댓글

    언제나처럼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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