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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님이 주인을 내쫓다


1.
1949년 늦겨울의 하루를 한 푼 어치도 되지 않는 일에 허비하고 사무실로 다시 돌아가는 길이었다. 멀리서 자동차 한 대가 시내 거리를 달려 오고 있었고, 두터운 옷이 없어서 덜덜 떨며 걷고 있는 사람 둘이 내 앞을 막고 있었다.

나는 자동차를 타고 있는 사람 쪽을 보았다. 말끔하게 옷을 차려 입은 깨끗한 사람 하나가 뒷자리에 앉아 가지런히 앞을 보고 있었다. 더러운 거리를 쳐다 보지 않기 위해 필사적인 얼굴이었다. 잠깐 잘못해서 고개를 돌리면 온갖 값싼 것들이 가득 차 있는 서울 거리가 그대로 눈에 보일 것이다. 그 사람은 머릿속에 그 지저분한 느낌이 스며드는 것이 싫어서 아무것도 보지 않으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리고 가게 유리창을 보니 내 모습이 비쳐 보였다. 아직 더러워 보이지는 않았지만 값어치가 있어 보이지는 않았다. 실제로 하루 종일 여기저기 불려 다녔지만 돈은 줄어들기만 한 날을 마치고 있는 참이었다. 

유리창 안에는 “영어를 배워서 미국인들과 유창하게 대화해 보시라”라는 말이 붙어 있는 유성기판이 돌아 가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늘은 무슨 요일인가요? 좋은 날입니다.” 교향곡이나 사랑 노래 대신에 누군가 영어로 실없는 이야기를 끝없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려 왔다. 그 위에는 작은 달력이 놓여 있었다. “하루에 몇 번 씩 이것을 들으며 연습했는지 달력에 표시해 보시라”

나는 그 달력을 보면서 도대체 올해 들어 와서 돈을 번 날이 며칠이나 있는지 찬찬히 헤아려 보았다. 오늘 날짜까지 헤아려 보니, 설마. 믿을 수 없는 숫자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다시 한 번 다시 셈해 보려고 했다. 그런데 멀리서 크게 술 취해서 웃는 소리가 들려 왔다. 세상에서 가장 비겁한 남자가 오직 취한 기운을 빌어서만 크게 낼 수 있는 그런 소리였다. 나는 길에서 다른 곳으로 피하고 싶었다.

갈 곳은 결국 사무실 밖에 없었다. 사무실에도 달력은 있으니까 후회하기 위한 장소로는 부족할 것이 없었다. 나는 음반 가게가 있는 건물의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계단을 올라 돌아갈 때 마다 컴컴한 건물 안으로 어떻게든 비집고 들어온 거리 불빛이 얼룩처럼 이곳저곳에 비쳐 있는 것이 보였다.

“여기에서 일 하세요?”

내 사무실 앞에 서 있는 사람이 말했다. 누가 서 있을 줄은 몰랐다. 나는 여기가 내 사무실은 맞지만 이 사무실에 내가 있는 것은 일이 없을 때 입니다, 하고 대답하려고 했다가 그만 두었다. 돈은 못 벌고 있었지만 그 정도 말을 재미있다고 주절거리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았다.

“제 사무실이 맞습니다. 어떻게 찾아 오셨습니까?”
“제가 약간 험한 곳에 가야 하는데요. 같이 가 주셨으면 해서요.”
“탐정사무소라고 해도 노동조합 파벌 싸움하는데 같이 가서 각목을 휘두르는 일은 하지 않습니다.”
“아니오. 그런 일은 아니고요.”

서 있던 사람은 나에게 자신의 명함을 내밀었다. 무슨 투자 회사의 주임이라는 직함을 갖고 있는 신씨라는 사람이었다. 얼굴이 새로 갈아 끼운 전구처럼 하얬다. 웃는 얼굴이 아니었다면 시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서류 처리가 애매한 건물이 있어서 그 건물 주인을 확실히 하려고 하는데, 혹시 싸움이 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저 혼자 가기는 조금 위험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데. 같이 가 주실 수 있나 해서요.”
“여러 사람을 데리고 가지는 못합니다. 지금 총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 정도까지 위험할 것 같지는 않고요. 이런 비슷한 일 많이 해 보셨다고 하던데요.”

말하는 것을 들어 보니 신 주임은 다른 탐정 사무소에 이미 한 번 들렀다 오는 것 같았다. 회사에서 경비로 쓸 수 있는 돈은 정해져 있었다. 탐정을 고용한다고는 해도 비용에 한계가 있었을 것이다. 몰래 준비한 무기들을 쌓아 놓고 있는 그런 탐정 사무소를 고용할 수는 없었겠지. 얼마나 돈을 쓸 수 있냐고 물어 봤을 때 예산을 이야기해 주면 그런 탐정들은 “그 값에는 코 푸는 소리 들려 주는 일도 할 수 없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면서 그런 돈으로 무슨 일이든 해 보려거든 저쪽 골목에 있는 나를 찾아 가 보라고 했겠지.

“이게 제가 계약금으로 준비한 돈인데요.”

신 주임은 나에게 봉투 하나를 내밀었다. 나는 봉투 속을 들여다 보았다.

“지금 당장 출발해야 하는 일입니까?”

내가 물어 보니, 신 주임은 다시 생글거리며 웃었다. 이어진 “네”하는 대답소리조차도 눈웃음에 묻혀 버리는 것 같았다.


2.
신 주임은 차분하고 깨끗하게 운전을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요즘 같은 시절에는 보기 드문 인물이라고 할 수도 있었다. 자동차가 시내의 복잡한 곳을 빠져 나오자 나는 어디로 가는 것인지 들을 수 있었다.

“’라우자’라는 집 들어 봤어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건물 이름입니까?”
“맞아요. 요기로 돌아가면 있는 산 중턱에 있는 큰 집인데. 한 몇 년 빈 집이었죠. 원래 처음 옛날 옛날에 집 처음 지을 때는 그, 갑오경장 때 쯤에 아주아주 부자인 아주머니랑 아저씨가 같이 살자고 번듯하게 지은 집이었다고 하거든요.”

자동차는 산 비탈의 험한 길을 오르고 있었다. 길도 좁아졌다. 운전은 점점 힘들어졌다.

“왜 이런 데 이렇게 큰 집을 지었을까요?”
“갑오경장이 된다더라, 신분제도도 없어지고, 과거제도도 없어지고, 새로운 세상이 온다더라, 분명히 엄청 살기 좋아질거야. 뭐 그런 생각으로 좋은 세월 좋게 보낼 좋은 집을 지으려고 했다던데. 그 집주인 아주머니랑 아저씨가 한참 둘이 세계여행을 다녔다고 하거든요. 이란에서는 좀 오래 머물면서 지냈다고도 하고. 그리고 나서 조선으로 돌아 와서 여기저기 다른 나라에서 구경 다니면서 본 것 생각하면서 멋지고 좋은 집을 지었다는 거에요. 그런데 서울 시내 가까운데에 이렇게 큰 집을 지을 터가 마땅치 않으니까 좀 산으로 높이 올라 가서 터를 잡았겠죠.”
“지금 거기로 가는 겁니까?”

신 주임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러면서도 손은 재빠르게 움직였다. 낡은 자동차의 삐걱거리는 변속기를 조절하면서도 조랑말을 타고 꽃동산을 달리는 리듬을 타고 있었다.

그러나 곧 신 주임은 차를 세웠다.

“여기에는 눈 때문에 길이 엉망이네요. 차는 더 못 들어가겠고.”

신 주임은 차에서 내려 섰다. 나도 따라 내렸다.

“조금만 가면 돼요.”

신 주임은 진창 옆에 서 있었다.

“여기가 옛날 사람들은 풍수지리가 그렇게 좋은 자리라고 해서 몰래 무덤을 많이 만들었대요. 그런데 그 집주인 부부가 그걸 다 싹 밀어 버리고 이 집을 세운거예요. 그래서 옛날에 사람들이 죄 받는다, 벌 받는다 그런 이야기를 엄청 많이 했대요. 치사하지 않아요? 몰래 무덤 만든 사람은 풍수가 좋아서 복 받고, 거기에 자기 돈 주고 땅 사서 집 지은 사람은 벌 받고.”

신 주임은 집이 있는 방향을 바라 보았다.

“어때요? 풍수지리가 좋아 보여요?”

나는 신 주임이 보는 방향을 같이 보았다. 그때 서 있는 자리에는 작은 빛도 들지 않아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의 캄캄한 구렁텅이만 있을 뿐이었다. 신 주임은 곧 진창에 빠지지 않도록 가장자리를 딛고 앞으로 걸어 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걸음은 빨랐다. 나도 그 뒤를 따라 갔다.

“그런데 라우자가 왜 빈집이 되었답니까?”
“거기에 무슨 사연이 있대요. 무덤 파 낸 것 때문에 벌 받는다고 하면서 그 무덤 후손인 무슨 집안의 아씨인가 마님인가가 찾아 왔대요. 그 마님이 그런 풍수지리, 귀신의 음덕 이런 거 엄청 많이 믿는 사람이었다고 하거든요. 그래서 아주 목숨 걸고 매달렸대요. 그런데 신식 문물 좋아하는 집주인 부인이랑 남편이 그런 걸 들으려고나 했겠어요. 대판 싸운 뒤에 그 마님이 험하게 쫓겨 났다고 그러거든요. 그러면서-”

신 주임은 나를 돌아 보았다. 어두워서 그 얼굴은 캄캄하게만 보였다.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너희들 그러면 몇날 며칠에 죽을 거다, 너는 며칠 날 죽고, 너는 며칠 날 죽고, 너는 며칠 날 죽을 거다. 어디 내 말이 맞나 틀리나 보자- 그랬대요.”

목소리는 떨리는 것 같기도 했고 희미하게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그 날짜에 정말로 사람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까?”
“이야기에서는 그렇죠. 그때 라우자에 있던 사람들이 다 그 마님이 말한 날짜에 다 정확하게 맞춰서 죽었다는 거에요. 마님이 정해 준 날짜에서는 먼저 무덤을 파헤쳤던 일꾼이 죽을 날이 제일 가까웠다고 하거든요. 그 일꾼은 폐병이 있었는데 점점 병이 심해지더니 급하게 세상을 떠났데요. 그런데 그 날이 하필 정말로 마님이 정해 준 그 날짜였대요. 집 공사를 하면서 집 도면을 그렸던 사람이 그 다음인데 그 사람은 공사를 끝내고도 계속 라우자에서 살았거든요. 그 사람은 어느날 길에서 놀란 말을 만났다가 말발굽에 밟혀 죽었다고 해요. 그런데 그 날짜가 바로 그 죽는다고 정해 주었던 날짜였대요. 세번째는 집사였는데 건강했고 항상 길조심도 각별히 하면서 지냈는데 종로 어딘가로 나갔다가 갑자기 무슨 폭동에 휘말려서 어디로 날아 가는 지도 모르는 화승총 총알에 맞아 죽었는데,그것도  역시 죽는다던 바로 그 날짜였다고 하고.”
“세 명이 줄줄이 죽었다는 이야기입니까?”
“잡다하게 뒤에 이야기가 더 있어요. 정원사가 그 다음에 죽었다는 이야기도 있어요. 정원사는 앞 서서 세 사람이 죽는다고 한 날짜에 정확하게 죽는 걸 보고 너무 겁이 났다고 해요. 그래서 죽는다고 한 날짜가 다가 오자 여기 저쪽으로 깊은 산 속에 들어 가서 숨어서 기도하면서 지냈다고 하거든요. 아무도 안 만나고, 아무 일도 안 생기도록. 그런데 그러다가 어느 날 새벽에 산에서 호랑이에게 물려 죽었다는 거에요. 정원사가 죽은 그 날짜는 죽는다고 했던 딱 그 날짜고.”
“믿을 만한 이야기입니까?”
“집 값 떨어뜨리려고 부동산 꾼들이 퍼뜨린 이야기겠죠. 구한말에 사기꾼들이 좀 많았어요? 잘 먹힌 이야기 같기는 해요. 이 아랫 동네 사람들도 이 집이 무섭다고 싫어하는 사람들 많거든요.”

몇 걸음을 더 내딛자 나뭇가지 너머로 커다란 건물이 보였다.

지붕은 삼각형으로 튀어 나온 부분이 둘 있어서 양쪽에 괴물의 뿔처럼 높이 솟아 있었다. 다른 부분은 네모 반듯한 모양인 듯 했지만 어두워서 자세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아마 2층 아니면 3층 건물인 것 같았는데 1층은 유독 높게 지어져 있었다. 촘촘히 벽돌을 쌓은 벽채는 두터워 보였고, 그에 비해 창문은 작아 보였다. 정말로 갑자기 정원사가 세상을 떠나고 아무도 돌보지 않은 것처럼 주변은 멋대로 자란 잡초 따위가 가득했다. 아무렇게나 자라난 산의 작달막한 나무들도 집을 할퀴려는 모양으로 이리저리 가지를 내뻗고 있었다.

다가 서서 보니 건물의 벽은 엷은 적색이었다. 원래부터 그런 색깔이었는지, 그 동안 색깔이 낡고 바래 그런 색으로 변해 버린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살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살고 있지 않을 것처럼 라우자라는 건물은 무겁고 어두워 보였다.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주변에서 들리는 무슨 소리든 빨아들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나 신 주임이 라우자의 문을 두드리니 그 소리는 똑똑히 울려 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낡은 문이 소리를 내며 열렸다. 나는 문틈으로 뭔가가 엉뚱한 것이 튀어 나온다면 곧 발로 차 버리겠다고 생각하며 기다렸다.

“주임님 오셨습니까?”

우리를 맞이해 준 사람은 검은 양복을 차려 입은 마른 남자였다. 족히 30년 동안 피곤해 보지 않은 순간은 한 번도 없었던 사람 같아 보였다. 목소리는 대단히 공손했고 희미하게 웃고 있기는 했지만 웃음은 그  얼굴에 어울려 보이지 않았다.

신 주임은 그가 김 주사라고 소개했다.

“지금 이 집 관리하고 계시는 분이예요. 민보단 소속이시고.”

나는 그가 민보단 사람이라는 이야기에는 조금 놀랐다. 민보단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들 몽둥이를 들고 몰려 다니면서 무슨 구호나 외치고 다니는 사람인 것은 아니겠지만, 이런 모습을 한 단원은 쉽게 어울릴 것 같지 않았다.

“민보단 사업으로 집집마다 전기 절약하라는 이야기하러 이 동네까지 왔다가 이 건물에 지금도 살고 계시는 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집 주인이신 분들은 아니시고 제대로 된 계약을 맺고 사시는 분들도 아니지요. 알아 보니 이 집은 제대로 된 주인이 없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민보단 쪽 윗분들을 움직여서 허가를 받고 돈을 좀 구하면 이 집을 정식으로 사들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저희 회사에서 돈을 대고, 이 분이 허가를 얻은 거고. 그래서 지금은 이 집 주인이 저희 회사랑 김 주사님이 될 수 있는 거지요.”

문 안은 집 바깥보다도 더욱 어두웠다. 그렇지만 넓은 방 건너 안쪽에서는 전등이 켜져 있었다. 그 빛 때문에 안쪽으로 걸어갈 수록 건물 안은 더 밝아 보였다.

빛이 있는 쪽에서 한 사람이 더 걸어 나왔다.

“안녕하세요? 오신다는 이야기를 듣고 제가 저녁을 좀 준비했죠. 괜히 옛날 생각도 나고 해서 옷도 좀 차려 입었고. 혹시 이 집에서 나가게 되면 언제 이런 옷을 또 입어 보겠나, 그런 생각도 나고.”

걸어 나온 사람은 마흔 전후로 보였다. 어깨가 드러나는 화려한 차림이었다. 어떤 일을 하기에도 편해 보이지 않는 옷이었다. 가만히 서 있거나 가만히 앉아 있는 것 조차도 불편할 것 같아 보였다.

“박 사장님이십니다.”

김 주사는 그 사람을 역시 공손한 말로 소개했다. 박 사장은 김 주사를 웃으며 바라 보았다. 웃고는 있지만 그 얼굴에 증오하는 기분이 담겨 있었다. 그것은 불빛이 아무리 희미하더라도 쉽게 알아 볼 수 있었다.

“사장은 무슨 사장이에요. 애들 아버지 친일파로 몰려서 반민특위에 잡혀 간 뒤에는 재산이고 회사고 남은 게 뭐가 있어요. 홀라당 다 날아가고 이름만 망한 회사 사장이지. 빚만 쌓여서 빚 이자만 자꾸 늘어나는 빚 공장 사장.”

박 사장은 웃으면서 말했지만 한 마디도 농담인 것 같지는 않았다. 박 사장은 우리를 집 안 쪽 식당으로 안내했다.

식당에는 환하게 전등이 밝혀져 있었다. 이 정도로 전기를 함부로 쓰는 가정집이라니 과연 민보단 사람이 차지하고 있는 집인가 싶었다. 우리가 들어 가니 자리에 앉아 있던 남자 한 사람이 일어나 우리쪽으로 돌아 섰다.

남자는 닳아빠진 군복을 입고 있었다. 그나마 새벽부터 온 종일 다림질을 해서 겨우 그 모양으로 만들어 놓은 모양이었다. 남자는 나이 보다 열 살은 더 늙어 보이는 얼굴이었고, 목소리는 그 얼굴보다도 더 늙게 들렸다.

“다시 또 못 볼 얼굴일지 모르겠지만 하여튼 반갑소. 어쨌든 서류는 잘 정리 되어야 이 집에 남든, 어디로 가든, 집을 떠나든 제대로 될테니.”
“최 중령이십니다.”

김 주사가 그 남자를 최 중령이라고 소개했다. 군복으로 봐서는 지금 대한민국 군대에서 계급을 갖고 있는 중령 같지는 않았다. 아마도 광복 전에 적당한 독립군 단체에서 장교 군복을 입고 다녔던 사람인 것 같았다. 몇 년 만에 고향으로 돌아 왔지만 전재산이라고는 깨끗하게 닦은 장교용 권총 한 자루 뿐이더라, 하는 부류로 보였다.

아마도 군대에서 적당히 일자리를 얻어 보려고 시도는 했겠지만 모두 실패했겠지. 그런 결론을 내리기까지는 별 추리력도 필요 없었다.

“군인으로 살면서 힘들고 가난해도 명예와 긍지만은 잊지 않고 살고자 했소. 빈 집에 들어 와 주소도 없이 살아 온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소. 이제라도 일을 깨끗하게 정리할 수 있으니 오히려 잘 된 일 아니겠소.”

우리가 식탁 앞 자리에 앉자 묻지도 않았는데 최 중령은 그렇게 이야기를 늘어 놓았다. 최 중령은 몇 가지 재미 없는 농담과 따지고 볼 수록 우스운 전투 무용담을 늘어 놓았다.

얼마 후 음식을 들고 한 젊은 남자가 나타났다. 남자는 두터운 스웨터를 입고 있었다. 그의 코 끝은 날카로웠고 눈매는 어리광부리는 것처럼 보였다. 영화 포스터에 나온다면 배우라고 생각해 볼만한 얼굴이었다.

“박 사장님께서 말씀하신대로 요리를 해 봤는데 잘 되었을 지는 모르겠습니다. 다같이 식사할 기회가 거의 없었는데, 마지막 날일지도 모르는 오늘 밤에라도 이렇게 같이 모일 기회가 있어서 다행이네요. 슬프기는 하지만 뭐 어쩔 수 없겠죠.”

그는 걱정하는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김 주사는 그를 서 기사라고 불렀다.

“기사라고 하셨는데 무슨 기사입니까?”
“운전기사입니다. 하시는 일은 자동차 경주 선수입니다. 전쟁 전에는 대회에서 우승도 여러 번 하신 분입니다.”

그 말은 제대로 된 경주가 열리지 않는 요즘은 일거리가 없어서 굶고 있는 사람이라는 이야기였다.

우리는 음식 맛을 보고, 모여야 할 사람이 다들 모였는지 확인했다. 조명은 밝았고 웃는 소리가 많이 들리는 자리였지만, 누구 하나 정말로 밝아 보이는 사람은 없었다. 박 사장이 자꾸 무엇인가 농담을 하려고는 했지만 최 중령은 어울리지 않는 대답으로 그 말을 받았다. 서 기사는 어떻게든 웃으며 넘어 가 보려고 했는데 그것도 잘 되지는 않았다.

다만 음식은 무척 맛이 있었다. 돈 한 푼 없는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저주 받았기로 소문난 집의 음식이라고는 아무도 상상할 수 없을 것 같은 맛이었다.

음식을 반쯤 먹었을 때, 발 소리가 들리더니 단정하게 차려 입은 사람이 한 명 더 걸어 들어 왔다.

“이 교수님이십니다.”
“김 주사님은 항상 저를 교수라고 불러주시지요. 벌써 학교에서 쫓겨난 지가 얼마나 되었는데.”

이 교수라고 한 사람은 소리 내어 웃었다. 이 교수는 그리고 나서 작게 중얼거리는 목소리로 “이제 집에서도 곧 쫓겨나겠지”하고 말했다. 내 옆에 앉으면서 말을 했는데, 나만 그 말을 들은 것인지, 아니면 다들 그 이야기를 들었는데 모른 척 하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늦으셨네?”
“마지막 날이잖아요. 서재에 있던 그 공책을 방으로 가져 가서 다시 한번 잘 읽어 봤어요. 이제 여기 나가면 어디서 그런 이야기를 또 보겠어요?”

박 사장은 이 교수의 대답을 듣더니 얼굴이 살짝 바뀌었다. 먹는 소리에 잡담하는 소리가 울려퍼지던 것이 문득 멈추는 듯했다. 잠깐 자리에 앉은 사람들을 돌아 보니 최 중령과 서 기사도 어딘가 멈칫하는 느낌이 있어 보였다.

김 주사의 숟가락이 그릇에 닿는 소리만 멈춤 없이 짤랑거리며 울려 퍼졌다.

잠시 후 김 주사가 나에게 말했다.

“선생님께서는 아마 친숙하지 못한 이야기일 것 같습니다. 저희들끼리만 아는 이야기를 한 것 같아 죄송합니다.”
“무슨 이야기인지요?”

다들 한 마디도 하지 않고 있었다. 서 기사는 고개를 숙이고 음식을 먹는데 몰두하는 척 했다. 넓은 집 복도를 도는 바람 소리가 이상하게 들려 왔다. 집이 내고 있는 소리였다.

김 주사가 이어서 말했다.

“이 집을 처음 지으신 분들의 이야기를 말하는 것입니다. 집을 짓기 전에 이 터에 무덤을 함부로 없앴다고 죄를 받았고 그래서 마님이라는 사람이 다들 죽을 거라고 했다지요. 그리고 그 마님이 말한 날짜에 집에서 살던 사람들이 하나씩 하나씩 죽었다는 겁니다. 옛날 옛날 조선시대 적의 전설입니다.”
“이야기가 거기서 끝나는 건 아니에요. 결국 죽는 날짜가 다가 올 때마다 벌벌 떨면서 죽는 걸 집에 있던 사람들이 너무 무서워하니까, 그 집의 집사가 다시 마님한테 대신 사죄를 하러 갔다고 해요. 그랬더니 마님이 죄를 빌고 싶으면 이 집 자체를 무덤으로 바꿔 달라고 했대요.”

이 교수가 말했다. 신 주임이 물었다.

“그게 무슨 말이예요? 집을 무덤으로 바꿔요?”
“기둥 밑에, 어디 바닥에, 계단 밑에, 그렇게 정해준 자리에 파내서 없앴던 뼈랑 무덤에서 파낸 걸 다시 묻으라는 거에요. 그리고 그거 말고도 무슨 이상한 짓을 시켰다고 하는데, 그건 공책에 정확하게 안 나와 있어서 아무도 모르지요. 그리고 제사도 시킨대로 지내주고.”
“그 놈의 제사. 뭘 죽은 양반들이 그렇게 밥을 챙겨 먹으려고 하는지. 죽어서 묻혀 있으면 위장도 소장도 다 썩어 없어졌을텐데 도대체 밥이 무슨 소용이라고.”

박 사장이 웃으면서 말했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는 사람 죽는 게 멈췄대요?”
“그랬다고는 하는데 어차피 그게 사람들이 다 죽고 난 후였다고 하오. 게다가 집주인 남편은 그 전에 먼저 죽었소. 결국 이 집에 마지막까지 남아 있던 사람은 집주인 중에 부인 뿐이었소.”

최 중령이 말했다. 내가 물었다.

“그 부인이라는 사람은 어떻게 되었다고 합니까? 그것도 공책에 나와 있습니까?”
“그건 제가 알아요.”

신 주임이 말했다.

“그 부인은 말년에 세상 뜰 무렵까지 혼자 이 집을 지키고 있었다고 하거든요. 그런데 전쟁 터지고 나서 일제 조선총독부에서 부인이 꾸준히 미국, 영국 등지의 인사들과 교류해 온 불온 인물이라고 지목 받은 거에요. 그래서 여기서 쫓겨 나서 어디로 추방당했다든가 하지요. 그리고 얼마 안 되어서 세상을 떴고요. 그 후로는 이 집도 조선총독부 관할 재산이 되었어요. 계속 빈집이었고. 광복 후로는 그나마 아무도 관리 안 하는 집이 됐고요.”

김 주사가 말했다.

“그리고 그 후에 갈 곳 없는 사람들이 하나 둘 이 집에 들어 와서 살게 된 겁니다. 사람 죽어 나가는 집이라고 다들 무서워하는 곳이었습니다만, 세상에는 죽는 것 보다 누추한 집에서 사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의 말투는 계속 공손했지만 말의 내용은 다른 네 사람을 비웃고 있는 것이었다. 말 없이 있던 서 기사가 말했다.

“저는 아니에요. 저는 애초에 사기꾼한테 속아서 여기에 왔다고요. 저는 방세를 꼬박꼬박 내고 사는 주인이 있는 집인 줄 알았어요. 여기 소개해 준 사기꾼한테 첫 달치 방세도 냈어요. 애초에 주인 없는 집인 줄도 모르고요.”
“다른 곳으로 가겠다는 생각은 못 했습니까?”
“생각은 항상 하고 있지요. 그런데 방 얻을 돈을 다 날렸는데 어디로 갑니까? 돈이 조금만 더 모이면 이 집에서 나가서 내려갈 생각이긴 한데요.”

박 사장은 서 기사를 보고 있었다. 추위에 떨고 있는 강아지를 보고 있는 듯한 눈빛이었다. 어떻게 보면 사랑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한편으로는 사람으로 여기고 있는 상대를 보는 것 같지는 않는 눈빛이었다.

이 교수가 말했다.

“김 주사님 말은 조금 틀렸어요. 누추한 집에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싫은 사람들이 여기에 있는 게 아니라, 누추한 집에 사는 것이 죽는다는 헛소문 보다 싫은 사람들이 여기에 있는 거죠. 이 집에 대한 이야기는 그냥 소문이고 누가 지어내서 퍼뜨린 이야기일 뿐일테니까요.”
“그래도 나는 이야기의 어느 정도까지는 사실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오.”

최 중령이 말했다.

“무덤이 있던 자리에 지었다거나 이 집에 예전에 살던 사람들이 불행한 일을 겪었다거 집에서 이 집을 무덤처럼 만들었다는 것 중에 실제로 일어난 일인 대목이 있을 거요. 내가 지내는 동안에도 밤에 이상한 반짝거리는 불빛을 보았던 적이 있소.”
“도깨비불이 있단 말입니까?”

서 기사가 물었다. 그러자 이 교수가 대신 대답했다.

“사람이나 동물 시체에서 인 성분이 나오면 그 중에는 저절로 불이 잘 붙는 게 있을 때가 있어요. 그런게 하늘에 날리면 도깨비 불빛처럼 보일 때가 있는 거죠.”
“맞는 말이오. 나도 큰 전투가 벌어졌던 전쟁터에서 그런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소. 그 비슷한 것이 집 안에서 보인다는 말이오.”
“그러면 도깨비가 불빛을 보여 주는 것까지는 아니라도 시체나 뼈를 집 곳곳에 묻어 놓은 것은 사실이라는 이야기잖아요?”

서 기사는 눈이 커졌다. 원래부터 크고 부리부리하던 눈이 더 커지자 얼굴의 대부분이 눈으로 변해 버린 모양이 되었다. 박 사장이 말했다.

“벽에 뼈 좀 있을 수도 있지. 뭘 그걸 갖고 그래. 서 기사, 자주 입고 다니는 그 멋쟁이 외투는 가죽으로 만든 거 아닌가? 돼지가죽으로 만든 외투는 죽은 돼지 껍질을 몸에 두르고 다니는 거잖아. 무슨 징그러운 짐승도 아니고 사람 뼈가 가까이 있다는 게 뭐 그렇게 놀랄 일인가?”

박 사장은 다시 웃음소리를 냈다. 이번에도 아무도 같이 웃는 사람은 없었다. 대신 이 교수가 뒤를 이어 말했다.

“그래서 그 마님이 시킨대로 이 집을 통째로 무덤으로 바꾼 뒤에는 더 이상 죽는 사람은 안 나왔다고 하는 게 공책에 적혀 있는 이야기예요. 그래서 혼자 남은 마님은 계속해서 오래 살았다는 거고요. 만약에 이 집을 고치거나 부수어서 다시 무덤이 훼손되면 또 여기 사는 사람들이 죽기 시작할 거라는 이야기지요.”

이 교수는 말을 마치고 김 주사를 쳐다 보았다. 김 주사는 먼저 미소로 대답했다.

“조선시대의 풍수지리 이야기입니다. 허황된 이야기지요.”

그는 자기 자리에 있던 잔을 들어 술을 한 모금 들이켰다.

“저는 민보단 일을 하기 전에 40년 동안 남의 집에 얹혀 살면서 그 집의 작은 일들을 돌봐 주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저를 고용해 주던 그 선생님이라는 사람이 어느날 갑자기 자기는 사회주의자라면서 몰래 북으로 가 버렸습니다. 저는 갈 곳도 없어졌고 공산주의자의 부하라는 이유로 이상한 기관에서 별별 이상한 조사를 다 당했습니다. 제가 민보단원이 된 것도 공산주의자 부하라고 끌려다니는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골치 아프고 고민스러운 문제는 세상에 얼마든지 많습니다. 무덤 자리 때문에 화를 입는다거나 죽을 날짜를 맞힌다거나 하는 이야기는 느긋한 어린애들의 동화일 뿐입니다. 세상이 그렇게 한가한 일에 신경을 쓰는 곳이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서 기사가 물었다.

“그래서 김 주사님은 정말로 우리를 내쫓고 이 집을 고칠 건가요?”
“집이 넓으니 고치는 동안 방을 좀 옮겨 다니시면 나가실 필요는 없을 겁니다. 대신에 방세는 제대로 내셔야 할 겁니다. 집이 다 고쳐지면 저는 이 집을 호텔이나 클럽으로 바꿀 겁니다. 아니면 집값을 제대로 치를 수 있는 어느 부유한 진짜 주인을 찾아 이 집을 팔 수도 있을 겁니다.”
“제대로 낼 방세가 지갑에 있으면 왜 이런 데서 살고 있겠어.”

박 사장이 말했다. 혼잣말이었지만 다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였다. 서 기사는 다시 김 주사에게 물었다.

“김 주사님은 정말 무덤으로 꾸며 놓은 이 집을 망가뜨린다는 게 하나도 안 꺼림칙하세요? 남의 무덤 망가뜨린다는 이야기 잖아요. 무덤에 손을 대면 여기 살던 우리는 다 죽는다는데.”
“이야기가 무서운 거라면 공책에는 조금 다른 이야기도 남아 있습니다.”
“집주인 남자가 의병이 되었다는 그 이야기 말이오?”

최 중령이 묻자 김 주사는 그렇다고 대답했다. 신 주임은 그러자 새로운 이야기는 무엇이냐고 다시 물었다. 신 주임은 여전히 밝은 얼굴이었다. 신 주임의 물음에는 이 교수가 대답했다.

“다른 이야기가 또 있어요?”
“집주인 중에 남편은 끝까지 그 마님에게 사죄를 안 했다는 이야기도 있기는 있어요.”
“그러면 어떻게 했는데요?”
“주인 남편은 자기가 죽을 날짜가 점점 다가 오니까 점점 무서워했대요. 그리고 그 부인은 더 무서워하고 걱정했다고 하고요. 남편은 그게 너무 싫은 거예요. 게다가 이제 개화 세상이 되어서 세상이 확 좋아지고 조선도 아주 좋은 나라가 될 거다, 하고 돌아 와서 지은 집이 여기 이 라우자였는데요. 아시잖아요. 전혀 안 그렇게 된 거. 그러는 중에 이것저것 다른 일도 다 꼬이고, 망하고, 그래서 아주 사람이 절망에 빠진 거예요. 그런데 얼마 안 있으면 무슨 풍수지리 때문에 죄 받아서 자기가 곧 죽는다는 말까지 나온 상황인거죠.”

누구인가 한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이 사람이 결심을 한 거에요. 자기가 마님을 한 번은 이겨야겠다. 마님은 그 집에 살던 사람들이 곧 죽을 거라면서 죽는 날짜를 다 정해줬잖아요. 그리고 그 날짜가 오면 아무리 도망치고 숨고 발버둥을 쳐도 꼭 사람이 죽는단 말이에요. 사람 운수가 딱 정해져 있는 것 처럼요.”
“그런 게 정말 될까?”

박 사장이 말했다. 이 교수는 대답했다.

“옛날에 조선 성종 때 사람들 사이에 떠돌던 이야기 중에 보면 그런 게 있어요. 서해의 바다 깊숙한 곳에 어디인가에 가면 무슨 책 한 권이 숨겨져 있대요. 그게 ‘조선인명총록’이라는 책인데요. 그 책을 열어 보면, 조선에 사는 사람들은 언제 태어나서 뭘 하다가 언제 죽는 지 전부 다 적혀있다는 거에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그 책에는 오늘 여기에 모여서 우리들이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라고 말하는 것까지 적혀 있는 지도 모르죠.”
“저는 그런 이야기는 믿지 않습니다. 만약 그런 책이 있다면 그 책에 나오는 내용을 보고 일부러 그 반대로 말할 겁니다.”
“그 책에는 ‘일부러 그 반대로 말 할 겁니다’하는 방금 그 말도 적혀 있겠죠. 하여튼 중요한 거는 정말로 그런 책이 있었다는 게 아니라 그런 걸 옛날 사람들은 잘 믿었다는 거죠.”

이 교수가 김 주사에게 말하는 것은 조금 싸우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고 보면, 그 식사 자리는 잠시 후 서류에 서명이 끝나고 나면 곧 지낼 곳 없이 쫓겨날 사람이 마지막으로 힘차게 말할 수 있는 기회였다.

“그래서 집주인 남편은 그런 식으로 자기에게 죽을 운수를 걸어 놓은 마님을 자기 목숨을 걸고라도 그런 게 한 번은 틀리게 만들겠다 생각한 거에요. 운수, 풍수지리, 그런 게 없고 세상에는 다른 실용적인 새로운 학문이 훨씬 중요하다는 게 집주인 부부의 생각이었잖아요. 라우자를 지은 것도 그런 생각에 미래를 낙관하고 지었던 거고. 그러니까 마님이라는 사람이 자기 죽을 날짜 정해 준 것, 그것만은 모든 걸 다 바쳐서라도 꼭 엎어 버리겠다, 집주인 중에 남편은 그렇게 생각한 거죠.”
“어떻게 한 건데요?”

이 교수는 대답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무슨 이야기가 이어지는 것인지는 다들 어느 정도 이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집에 사는 사람들에게는 이 역시 친숙한 이야기였던 듯 싶다.

“마님이 죽는다고 한 날짜가 오기 한 달도 넘게 전에 집주인 남편은 갑자기 집에서 나가서 무슨 의병인가 뭐에 들어갔대요. 그때 조선의 왕비가 죽었다고 여기저기서 일본군을 몰아 내야 된다고 총들고 싸우자는 사람들 있었거든요. 거기 들어 가서 총들고 제일 위험한 일을 하겠다고 나서서는 바로 세상을 떠난 거죠. 일부러 그런 거예요. 마님이 말했던 죽는다는 날짜를 틀리게 하려고요.”

이 교수의 설명 뒤에 김 주사가 말했다.

“저는 이 이야기가 차라리 마음에 듭니다. 그 남편이 결국 자기 목숨을 바쳐서 마님의 말을 틀리게 만든 것 아닙니까? 그리고 그 후로 부인은 늙을 때까지 잘 지냈다는 거니까, 결국 남편이 마님이 꾸며 놓은 사악한 것을 다 깨뜨린 겁니다.”

그리고 김 주사는 지금껏 한 번도 보이지 않았던 웃음을 보였다. 그리고 다시 말했다.

“다 깨지고 다 끝난 겁니다. 그래서 이 집은 무덤이 된 것도 아니고 이 집을 부수거나 고친다고 죄를 받아 죽을 사람도 아무도 없는 겁니다.”

그런데 그 말을 마칠 때 즈음 갑자기 전등이 꺼졌다.

집 안은 온통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되었다.


3.
잠시 후 전등이 켜졌다.

특별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조금씩 놀라고 조금 긴장한 얼굴빛도 보이기는 했지만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결국 다들 서울 시민이었다. 이북에서 전기를 제대로 보내 주지 않아 요즘 전력 사정이 엉망이라는 데는 익숙해져 있었다. 소리 지르는 사람도 허둥대는 사람도 없었다. 아마 조금만 더 캄캄한 시간이 길어졌다면, 누군가 자연스럽게 호롱불이나 촛불을 밝히기도 했을 것이다.

라우자 사람들은 그 후로 운명이나 죽음에 대한 시시한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면서 식사를 이어나갔다.

시간이 흐르자 그들은 다같이 모여 있으면 제법 잘 어울린다는 사실이 차차 드러났다. 이 교수에게는 새로운 화제가 많았고 박 사장은 거기에 맞장구치며 웃긴 이야기를 만드는데 재주가 좋았다. 최 중령은 모든 것이 너무 뻔해지지 않게 가끔 엉뚱한 소리를 던지는 사람이었는데 그러면서도 자기 고집을 심하게 부리지는 않았다. 그는 무슨 고집을 부리기에는 삶에 아무런 용기가 없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대화는 항상 부드럽게 흘러 갔다. 서 기사는 무슨 이야기이건 푹 빠져서 듣는 사람이어서, 어린 아이가 구구단을 외는 것을 듣고도 감동의 눈물을 흘릴 수 있을 성 싶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이 되자 김 주사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 섰다.

“제가 차를 내어 드리겠습니다. 서재에 가서 이제 이야기를 하면 어떠시겠습니까?”

우리는 어두운 복도와 방을 지났다. 서재는 건너편에 있었다. 어두운 곳을 조심스레 걷고 있으니 거리는 더 멀게 느껴졌고 집은 더 큰 것 같았다. 서재도 어두운 곳이었다. 하지만 전기는 들어오는 방인 듯 했다. 이 교수가 전등을 켜니 널찍한 방안이 환해졌다.

사방에 책장이 있었다. 튼튼하게 제본 된 돌덩어리 같아 보이는 책들이 가장 먼저 보였다. 누가 언제 들어 오든 읽을 것은 있다는 넉넉한 자신감을 보여 주는 모양이었다. 그 밖에 다른 책들도 많았다. 이런저런 잡지도 꽂혀 있었고 책이 아니라 무슨 자료 뭉치나 기록장 같은 서류를 철해 놓은 듯한 것도 보였다. 한 쪽에는 가로로 눕혀서 쌓아 놓는 옛날 필사본 책들도 적지 않았다. 신 주임은 천천히 걸음을 옮기며 대체 무슨 책이 이렇게 많이 꽂혀 있는지 이리저리 훑어 보았다.

한 켠에는 책상이 있고 중앙에는 편안히 앉을 수 있는 푹신한 의자들이 여럿 놓여 있었다. 이런 집에서 그런 의자에 몸을 기대고 앉아 술술 책장이 잘 넘어 가는 소설 책을 느긋하게 읽으면서 겨울밤이 다 가도록 쉬고 있으면 얼마나 아늑한 기분일까 나는 생각해 보았다. 내 상상력으로는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옆에 있는 누구에게 물어 보기에도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집이 사실 무덤 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나, 곧 이 집에서 쫓겨나서 길거리로 나서야 한다는 생각 없이, 그렇게 마음 편하게 책에 빠져 있을 수 있는 사람은 그때 곁에 없었다.

이 교수는 책상 앞에 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방 가운데의 푹신한 의자에 앉았다. 그 사람들은 말이 없었다. 표정은 저 마다 달랐지만 아주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나는 방문 앞에 서서 불꺼진 캄캄한 건너 편에서 김 주사가 걸어 오기를 기다렸다.

곧 어둠 속에서 김 주사의 희미하게 웃는 입이 가장 먼저 보였다. 그리고 전등불에 반짝 거리는 찻잔들이 보였다. 막상 불빛 속에 그의 모습이 다 드러나자 웃고 있는 얼굴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찻잔을 책상 한 켠에 올려 두었다. 다들 자리에서 일어나 찻잔을 들고 돌아 갔다. 나는 그대로 문 옆에 서 있기로 했다.

김 주사가 말했다.

“라우자에 풍수지리가 어떻다는 이야기나 죽는 운수가 미리 정해져 있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만, 그런 것들은 그냥 떠도는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확실한 것은 전쟁 때 집주인 부인이 영국, 미국과 친한 사람이라고 당국으로부터 쫓겨 나면서 빈집이 되어 일제 조선총독분 관할 부동산이 되었고, 광복 후에는 주인이 누구인지 애매해졌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여기에 들어 와 사실 수 있었던 겁니다. 이제 제가 정식으로 이 집의 주인이 될 수 있는 허가를 서울시에서 얻었고, 투자회사에서 거기에 필요한 돈을 낼 겁니다. 그렇게되면 이 집의 서류상 소유자는 제가 될 것입니다. 이 집에 살고 계시는 여러분께서 여기에 동의해 주신다는 서류에 오늘 저녁 서명을 해 주시면, 모든 절차는 평화롭게 끝이 납니다.”

서 기사가 물었다.

“한 번만 더 여쭤볼게요. 만약에 제가 서명을 안 하면 어떻게 되는데요?”
“그러면 제가 경찰에 신고를 할 것이고, 하루 이틀 더 있다가 경찰에 끌려 가게 되시게 될 겁니다. 아마 제 집에 무단으로 침입한 상태였다는 점 때문에 다른 처벌을 더 받게 될 겁니다. 이삿짐도 챙기시기 힘드실 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서명을 해 주시면 차근차근 준비해서 내일 나가시면 될 것이고 다른 아무 처벌도 받지 않을 겁니다.”

그 말을 듣고 박 사장이 이야기했다.

“짧게 말하면 그런 거지. 맞고 나갈래, 그냥 나갈래.”

김 주사가 다시 말했다.

“말씀드렸던대로, 집을 고치는 것이 끝나고 다시 세입자를 받게 되면 주변 시세보다 훨씬 싼 값에 여러분께는 들어 올 수 있는 권리를 드릴 예정입니다.”

김 주사는 신 주임에게 서류를 가져다 달라고 말했다. 신 주임이 서류를 꺼내 주자, 김 주사는 빠르게 서류를 읽어 보았다. 그리고 먼저 이 교수에게 서류를 넘겼다.

“제가 설명드린 내용과 서류에 적혀 있는 내용이 본질적으로 차이가 없음을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거기에 대해서는 투자회사의 신 주임께서도 증인이 되어 주실 겁니다.”
“예, 맞습니다. 김 주사님 설명이 틀린 것은 없어요.”

신 주임이 말했다. 맑고 밝은 목소리였다. 그러면서도 곧 집에서 쫓겨날 사람들에게 들려주는 목소리로 걸맞게 들리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이 교수가 먼저 서명을 하고, 서류를 최 중령에게 넘기자 최 중령 역시 서명을 마쳤다. 박 사장이 뒤이어 서명을 했고, 마지막으로 서 기사도 서명을 하게 되었다. 서명을 마치고 서 기사가 질문했다.

“정말로 집을 고치실 거예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대로라면 그랬다가 화를 입어서 여기에 살던 우리들도 다 죽고 김 주사님도 죽을 수도 있다는 거잖아요.”
“수리하고 구조를 조금 바꾸는 것이 훨씬 더 집 가치를 높일 수 있는 길입니다. 투자 회사가 돈을 벌려면 그런 식으로 하는 것이 맞을 겁니다.”

김 주사는 덧붙여 설명했다.

“최대한 빨리 모든 일을 막힘 없이 밀고 나가서 진행할 생각입니다. 지금 제가 이 집의 소유를 명확히 서류로 정리할 수 있는 허가를 받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제 성격에 맞지 않는 말과 행동을 하며 수 없이 많은 공무원들과 실력자들을 만나고 다니면서 이루어낸 일입니다. 그렇게 여러 고비를 넘긴 끝에 겨우겨우 줄을 대어 겨우 저는 이 집의 소유자가 되려고 하는 참입니다. 만약 제가 이 일을 지금 빨리 진행하지 않으면 제가 제 이름으로 겨우 얻어 놓은 모든 신고와 허가와 서류에 대한 인증은 무효가 될 것입니다. 나중에 누군가 다시 서류를 만들어 자기 것으로 사들일 수 있는 기회를 만드는 데는 또 한 세월이 필요할 겁니다.”

그런데 그때 그 대답을 하는 김 주사가 말 하는 것을 약간 힘겨워 한다는 기색이 있었다. 이상하게 땀을 흘리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것이 갑자기 남의 묘자리를 훼손한 벌을 두려워하게 된 것 같아 보이지는 않았다. 무슨 다른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서류는 김 주사 자신만 서명을 마치면 완성될 참이었다. 그런데 김 주사는 서 기사가 건내 주는 서류가 자기에게 오는 것을 서서 기다리지 못했다. 김 주사는 한쪽 팔로 책상을 짚고 섰다. 그런데 다리에 힘이 없는 지 몸이 휘청거렸다. 나는 그의 눈이 생명력을 잃는 순간을 보았다. 받은 서류를 한 손으로 받는가 싶더니 곧 서류를 놓치고 김 주사는 쓰러졌다.

바닥에 그는 처박히듯이 무너졌다. 머리를 바닥에 찧었다. 무생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빈 공간에울려 퍼졌다. 김 주사는 몸을 조금 더 움직일 것처럼 보이는가 싶더니 아무 움직임 없이 곧 힘이 빠져 늘어졌다.

“괜찮소?”

김 주사가 고꾸라지는 것을 보고 서재 안에 있던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적어도 놀라는 모습을 서로서로에게 보여주었다. 최 중령은 김 주사에게 다가가더니 그 맥박을 쟸다.

최 중령은 바로 확인한 것 같았다. 그렇지만 몇 번이고 다시 김 주사를 살폈다. 김 주사의 상태를 확인하는 작업은 다소 길게 이어졌다. 다들 조금은 지루해 하기 시작할 때 그가 말했다.

“맥박이 뛰지 않소. 이미 목숨이 끊어진 것 같소.”

몇 분 동안 라우자에 사는 사람들은 각자 자기 방식으로 놀람과 걱정과 공포를 표현했다. 그 표현 방식은 각양각색이었지만 또한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에 잘 어울렸다. 묵묵한 표정을 가능한한 지키고 있는 최 중령조차도 그런 감정을 나름대로 내비쳤다. 다만 그런 중에도 김 주사가 죽었다는 사실이 반갑다는 생각은 모두가 약간 씩은 보여 주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러나 신 주임은 다양한 감정이 짜증에 다 뒤섞여 엉킨 모습이었다.

“갑자기 여기서 쓰러졌으니 참 큰 일이네요. 서류 처리니 계약이니 뭐니 다 그냥 끝이네요. 오늘 내로 처리한다고 이 밤에 굳이 찾아 오라더니. 몇 날 며칠을 준비한 일이 이게 뭐야. 허무하게.”

나는 이 집에 전화가 있는 지 물어 보았다. 전화기는 예전부터 있었는데 전화국에 가입을 안 하고 있었다는데, 얼마 전에 김 주사가 들어 오면서 전화가 통하게 되었다고 했다.

“그러면 신 주임님은 경찰에 연락 해 주십시오. 사람이 갑자기 쓰러졌는데 아무래도 그냥 병으로 쓰러진 것 같지는 않다고 말씀하십시오.”

신 주임은 그러겠다고 대답을 하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서 기사가 그 큰 눈을 한 번 더 크게 떴다.

“그냥 병으로 쓰러진 게 아니면요? 김 주사님이 왜 돌아 가신 건데요?”
“보면 몰라요? 누가 뭘 먹인 거지.”
“누가요?”

서 기사가 말했다. 이 교수가 대답했다.

“아까 저녁 식사 중에 잠깐 전등이 꺼졌을 때가 있었잖아요? 그때 김 주사 음식에 누가 몰래 독약을 넣었다면 지금 쯤 김 주사가 쓰러질 수 있겠죠.”
“그러면 우리 중에 김 주사를 죽인 사람이 있어요? 누구요? 왜요?”

박 사장은 피식 웃었다. 나도 따라 웃을 뻔할 정도로 잘 만들어진 웃음이었다. 김 주사가 죽으면 무엇이 누구에게 득인지는 다들 잘 알고 있었다. 서 기사조차도 모르고 묻는 것 같지는 않았다. 서 기사가 말했다.

“물론 김 주사님이 돌아 가셔서 이 집이 안 넘어가면 우리들이 얼마간은 더 살 수도 있겠죠. 그리고 집을 안 고쳐도 되니까 무덤을 망가뜨려서 화를 입는 것도 피할 수는 있을 거고. 그런데, 그렇다고 정말 사람을 죽여요? 우리 중에 누가 그럴 수가 있어요?”

다시 이 교수가 대답했다.

“무덤을 망가뜨려서 사람들이 정해진 날짜에 운수에 살이 끼인 것처럼 꼬박꼬박 죽었다는 이야기를 정말 깊게 믿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요? 그런 사람이라면 김 주사를 지금 죽이는 것이 나중에 건물을 고치는 것 때문에 화를 입어서 죽는 것 보다는 낫겠다고 믿었을 거니까요. 겸사겸사 다른 좋은 점도 있다고 생각했을 지도 모르고.”
“그런데, 교수님. 그 무덤 건드린 것 때문에 죽는다는 주술은 주인 남편이 일부러 그 이야기를 틀리게 하려고 그것 보다 앞서서 죽으면서 깨진 것 아닌가요? 저는 그래서 이제는 그것은 끝난 이야기라고 생각했는데요.”
“그렇지만 주인 부인은 남편이 죽고 얼마 후에 결국 이 집의 벽에 뼈를 묻고 제사를 치렀다고 하오. 그 쪽 이야기를 따른다면 그 부인조차 주술이 그대로 남아 있다고 생각하고 두려워 했다는 뜻 아니겠소?”

최 중령이 말했다. 그러자 박 사장이 대신 대답했다.

“중령님은 그래서 그 주술이 아직 남아 있다고 생각하세요? 그걸 믿어요?”
“믿지 않소. 세상에 두려운 것은 총알이나 감옥 같은 것 아니겠소? 풍수지리나 죽을 날짜를 지목하는 주술 같은 것은 우스운 일일 뿐이라고 생각하오.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아닌지도 모르는 일인데 그런 일에 깊이 마음을 쏟지는 않소.”

최 중령은 거기까지 말을 한 뒤에 다른 세 사람을 한 번 둘러 보았다. 그리고 말을 덧붙였다.

“그렇지만, 이 집에서 살다 보면 그런 주술 이야기에 자칫 깊이 빠지게 될 것 같은 이상한 기운이 감도는 것 같을 때가 있기는 있다 느꼈소.”

박 사장이 다시 말했다.

“그래도 이상하잖아요. 주인 남편이 미리 짚어 준 날짜 보다 먼저 죽었으면 그것으로 죽는 날짜를 지정해 준다는 주술은 깨진거고, 땡이고, 끝인 거죠. 한 번 죽은 사람이 또 죽을 수는 없잖아요. 그걸로 주술은 틀린 게 되는 거죠. 그리고 나서도 주인 부인이 계속 그걸 믿었다는 게 이상한데. 목숨을 바친 남편을 생각한다면 그럴 리가 없을 것 같은데?”
“그렇지만 주인 부인은 주인 남편이 목숨을 바쳐서 죽을 날짜를 틀리게 한 후에도 주술을 계속 믿기는 믿었던 것 같아요.”

이 교수가 대답했다.

“공책에 적혀 있는 이야기들을 제가 자세히 살펴본 바로는 확실히 그래요.”
“지금 이 이야기들을 다들 그 공책을 읽어 보고 아시게 된 겁니까?”

내가 묻자, 그 들은 그렇다고 대답했다. 서 기사가 말했다.

“그 공책이 원래는 이 서재 책상 위에 놓여 있었거든요. 이 집에 들어 온 사람들은 한 두 번씩은 그걸 읽어 보게 돼요. 이 집에서 꼭 지켜야할 일이 그 공책에 적혀 있다는 식으로들 이야기했거든요.”

서 기사는 거기까지 말하고 박 사장을 흘깃 쳐다 보는 듯 싶었다. 아마 서 기사가 이 집에 처음 들어 왔을 때, 박 사장이 서 기사에게 그런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는 뜻인 것 같았다.

“지금 그 공책은 어디 있습니까?”
“제가 지내는 방에 있어요.”

이 교수는 그렇게 대답했다. 내가 그 공책을 실제로 보고 싶다고 하자, 그렇다면 다 같이 자기 방에 가서 보자고 했다.

계단을 걸어 이 교수의 방으로 가는 동안 박 사장이 중얼거렸다.

“다 같이 몰려 가는 게 맞겠지. 안 그러면 사람 죽인 그 인간이 ‘나는 잠깐 여기 앉아서 쉬고 있겠다’고 말해 놓고 사람들 없을 때 도망칠 거 아냐.”

어떻게 들으면 즐거워 하는 목소리 같기도 했고, 어떻게 들으면 두려워 하는 목소리 같기도 했다. 일부러 고개를 돌려 보지는 않았다. 때문에 어떤 모습으로 그런 말을 하는 지는 나는 보지 못했다.

이 교수의 방에는 가지런하게 정돈 되어 꽂힌 책이 벽마다 수북했다.

책상이나 의자 위에는 어질러져 있는 책이 이리저리 쌓여 있었다. 책 더미 중에 어떤 것은 위태로울 정도로 높다랗게 쌓인 것도 있었다. 평평한 곳에는 어디든지 책이나 종이 뭉치가 있었고, 책장 틈새나 가구 사이 같은 곳에도 책이 곳곳에 들어 가 있었다. 여러 나라의 말로된 책이 있어 보였는데, “장화홍련전 연구”나 “강도몽유록 연구” 같은 조선시대 소설을 연구한 자료는 금방 알아 볼 수 있었다.

책꽂이에 잘 꽂힌 책들은 높이 솟은 절벽 같았고 바닥에 흩어진 책들은 절벽 앞에 출렁거리는 파도 같아 보였다. 그런 혼란에 잘 어울리도록 옷 가지들이 이리저리 널브러져 있었다. 그것은 누가 바다에 뭔가를 내다 버린 것 같아 보였다.

“이게 그 공책입니다. 앞부분은 주인 남편이 정리한 내용이 많이 남아 있고, 뒷부분은 주인 부인이 정리한 내용들이 주요 내용으로 되어 있어요.”

이 교수는 책상 위에 쌓여 있는 것들 사이에서 공책 몇 권을 찾아 꺼냈다. 다른 사람들은 그 공책을 알아 보는 것 같았다.

“내용을 제가 다시 잘 따져 봤는데요. 지금까지 우리가 이야기했던 내용이 다 맞아요. 희망에 찬 부부가 집을 지었는데 집 지으면서 묘자리를 훼손했다는 말이 들려 와요. 그때 마님이란 사람이 나타나서 다 죽는다고 이야기하고, 마님이 죽을 거라고 미리 말해 준 날짜에 맞춰서 사람들이 줄줄이 죽어 나가지요. 주인 부부는 겁을 먹는데 주인 남편은 절대 지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죽을 거라는 날짜를 틀리게 하려고 자기가 죽는다던 날짜 한 두 달 전에 의병에 뛰어 들어요.”
“그리고 그렇게 했는데도 주인 부인은 주술을 계속 믿어서 집을 무덤으로 바꾸었고.”

이 교수는 이야기를 설명하면서 그 이야기를 확실히 밝힐 수 있는 대목들을 공책 이곳저곳에서 몇 군데씩 짚어 주었다. 이 교수의 설명은 상세했고 그날 밤 사람들 사이의 분위기에도 맞았다. 갑자기 아는 사람이 세상을 떠났는데 또한 진심으로 슬퍼할 만큼 친한 사람은 아니라는 그 분위기는 한창 무르익고 있었다.

“죽는 날짜가 틀리는 것을 분명히 봤는데, 어떻게 계속 주술이 이어지고 있다고 믿었던 거죠?”
“정말 두 번 죽은 건가?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 났다가 다시 죽은 건가?”
“죽었던 사람이 되살아나는 일은 불가능하오.”

최 중령이 말했다. 그러자 박 사장이 말했다.

“죽는 날짜를 미리 정해 주는 일은 가능한가?”
“그것은 완전히 불가능하지는 않소.”
“어떻게 가능한데요?”
“굳이 예를 들자면 그저 우연히 들어 맞을 수도 있는 거요.”
“한 명이라면 모르겠지만, 여러 사람이 죽는 날짜가 줄줄이 다 맞아 들 수가 있어요?”
“월과 일만 맞춘다면 1년에 365일이 있으니 한 사람이 죽는 날짜를 우연히 맞힐 수 있는 확률은 365분의 1이죠.”

이 교수가 설명하기 시작했다. 한 번 스스로 고민해 본 일이 있는 문제인 듯 보였다.

“두 사람이 죽는 날짜를 우연히 맞힐 수 있는 확률은 13만 분의 1 정도고. 세 명이면 4천9백만 분의 1. 네 명이면 177억분의 1 정도거든요. 177억분의 1 정도면, 온 세상 사람들이 계속 남의 죽는 날짜를 추측해서 말한다고 하면 몇 번 만에 그 중에 몇 사람은  맞춘다는다는 이야기니까.”
“그래도 177억분의1이잖아요.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다고 할 수 있어요?”
“더 이상한 것은 거기까지는 우연으로 설명한다고 해도 한번 틀린 날짜가 바뀔 수는 없다는 거예요. 분명히 남편이 날짜를 틀리게 만들었는데 왜 부인은 주술이 안 깨졌다고 계속 믿은 걸까요?”

이 교수가 말을 마치자 다시 박 사장이 말했다.

“시간여행? 죽기 전에 살아 있는 상태의 남편을 누가 미래로 데려 갔는데 원래 정해 준 날짜가 되자 다시 죽는다.”

박 사장은 장난을 치는 태도였다. 최 중령이 말했다.

“시간여행도 불가능하오.”
“대한의 광복이 불가능하다고 하던 사람도 많았는데.”
“나는 광복이 가능하다는 것을 의심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소. 광복이 어려워 보일 때가 있었을 뿐이지 언제였든 완전히 불가능한 목표였던 적은 결코 없었소. 그렇지만 시간여행은 그 자체로 모순이오.”

최 중령은 자뭇 비장하게 말했다. 그러나 초라해 빠진 제복과 가난해 빠진 늙은이의 그런 모습이 그 태도에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어 보였다. 최 중령 스스로도 곧 부끄러워하는 것 같았다.

서 기사가 말했다.

“그러면 남편이 주술을 틀리게 했지만 뭔가 더 무서운 것이 나타났다거나 한 것이 아닐까요? 아니면 너무 극심하게 부인이 겁을 먹어서 아예 정신도 못 차리게 되어서 남편이 주술을 깼다는 것을 받아들이지도 못할 지경이 되었다거나.”
“그건 말은 되네. 남편이 주술을 깼는데 깼는 줄도 모르고 계속 겁 먹고 있었던 거지. 그래서 해골을 집 벽에 파 묻는 공사를 하고, 제사를 하고, 굿을 하고. 죽을 운수에서 벗어 나 보겠다고 그런 거일 수도 있지 않아요? 거기다가 원래 남편이라는 사람들을 믿기가 쉽지는 않잖아.”

박 사장의 태도는 농담을 하는 것인지 진담을 하는 것인지 알기가 어려웠다. 이 교수는 웃지는 않았고 그 말에 찬성하지도 않았다. 이 교수는 공책의 내용 몇 군데를 더 짚어 가며 보여 주었다.

“공책에 적혀 있는 주인 부인이 남긴 쪽 내용을 보면 그렇게 상황을 아예 이해도 못했던 것 같지는 않아요. 주인 부인은 분명히 남편이 무슨 행동을 왜 했는지 알고 있었어요. 그리고 남편의 희생 덕분에 이제는 주술이 깨어졌다고 잠깐 생각했던 적도 있는 것 같고요. 그런데 그런데도 얼마 후에는 오히려 더 굳게 주술을 믿는 태도로 갑자기 바뀌거든요.”
“그렇게 태도가 바뀌었으면 왜 무엇 때문에 태도가 바뀐 건 지는 공책에 안 써 놓은 거죠?”
“혹시 진짜 그 묘자리가 파헤쳐졌다는 그 시체가 아예 직접 나타난 거 아닐까? 무덤에서 나온 시체가 남편이 애는 써서 한 번은 내가 정해 준 죽는 날짜를 벗어 났지만 이제부터 계속 피할 수는 없다, 그런 거지.”

박 사장이 말했다. 서 기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만약에 그렇게 무덤 속 시체가 말하는 걸 봤다면 정말로 겁을 먹고 모든 걸 다 믿게 되겠죠. 그리고 함부로 그런 내용을 주절주절 밝히면 부정탈까봐 공책에 세세한 내용은 안 적었을 수도 있을 거고. 공책에 그 이야기를 세세하게 쓰는 것 자체가 너무 무서웠을 수도 있고요.”
“무덤 속 시체가 나타나서 묘자리가 잘못 되었으니 너희들은 죽을 거라고 말 한다?”

박 사장의 말에 이 교수가 덧붙여 설명했다.

“조선시대 이야기 책 중에 ‘동패락송’이라는 책이 있는데 거기에 비슷한 전설이 있기는 있어요. 무덤이 망가진 곳의 시체가 나타나서 무덤을 좀 고쳐 달라고 하는 이야기인데요. 그 이야기 속에서는 어떤 모습으로 나타난 뭘 봤는지 묘사가 자세한 편이죠. 그런데 공책에 그런 내용은 없어요. 주인 부인의 이야기를 보면 뭔가가 나타난 것을 봤다거나 했던 것 같지 않아요. 뭔가가 더 나타나거나 새로운 이야기를 들었다는 느낌이 아니거든요. 그보다는 그냥 예전의 주술이 그대로 계속 남아 있다는 느낌이지요.”
“그러면 정말 말이 안 되는데. 남편은 죽는 날짜를 분명히 틀리게 하려고 했고 그래서 날짜가 틀려졌는데, 얼마 후에 부인은 그냥 그 주술이 그대로 잘 맞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상한데요.”
“그래서 서 기사 자네나 나나 이 이야기를 대충 알면서도 주술은 그냥 깨졌다고만 생각하지 않았나?”

최 중령은 답답해 했다. 

“나는 누가 되었든 그 주인 부인의 행동이 도대체 어떻게 된 영문인지 알아낸 사람이 우리 중에 한 사람은 있었을 거라고 생각하오. 그리고 그 사람은 주술이 아직 남아 있다고 믿고 집을 고치려는 김 주사를 막아야 할 거라고 느끼고 김 주사를 헤쳤다고 생각하오. 설령 주술을 아주 깊게 믿지 않았더라도 김 주사를 없애야 되겠다는 마음이 더욱 치밀기는 할 거요.”

최 중령이 김 주사 이야기를 하자 갑자기 모든 사람이 말이 없어졌다. 내가 말을 할만한 차례였다.

“집 안에 사람을 해칠 수 있는 독약 같은 것이 있습니까?”

그러자 사람들은 모두 최 중령 쪽을 보았다. 최 중령이 아무 말을 안 할 수 없었다.

“내가 가져다 놓은 극약이 있소. 부끄러운 일이지만 나는 양식을 마련할 방편이 마땅치 않아 겨울 동안 이 산에서 토끼나 꿩을 잡는 일을 했소. 그래서 그 짐승들이 먹이로 착각하고 먹을 극약을 구해다 놓았소.”
“최 중령님께 미안하기는 미안한 이야기이기는 한데. 최 중령님은 사람 죽이는 일을 전에도 많이 해 보신 분 아니에요?”

박 사장이 말하자, 최 중령의 얼굴에 조금 붉은 기색이 나타냈다.

“군인으로 광복을 위해 전투를 한 것을 어떻게 살인자와 비교하는 거요? 더군다나 내가 가져다 놓은 극약은 다락방에 갖다 놓았고 집안의 쥐를 잡을 거라면 누구든 써도 된다고 말한 적이 있지 않소? 누구든 그 다락방에 갈 수는 있었을 거요.”

이 교수는 최 중령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기는 있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우리는 그 다락방 쪽으로 갔다. 이 교수의 방에서는 조금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렇지만 최 중령의 방에서는 가까운 위치에 있었다.

최 중령은 자기가 언제 그 극약을 가져다 놓았는지, 극약이 어떻게 포장된 모양인지 보여 주었다. 극약의 포장은 뜯겨져 있었고 그의 말 대로 누구든 집어갈 수 있도록 다락방에 던져져 있었다. 도대체 어디서 구한 것인지 양이 무슨 곡식 자루처럼 대단히 많아 보였다. 그러니 누가 언제 몇 알을 썼는지 알아 보고 짐작하기란 어려워 보였다.

“이것은 짐승을 잡기 위한 극약이요. 이것을 얼마나 어떻게 써야 사람을 죽일 수 있는 지를 나는 알지도 못하오. 그런 일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이 극약으로 사람을 해칠 결심을 하고 행동을 하기가 쉽겠소? 사람을 죽이는 것과 짐승을 잡는 것은 다르다는 것은 전에도 여러분 모두에게 설명한 적이 있지 않소?”
“그러면 이런 극약에 대해 지식이 많은 사람이 저지른 일이 아닐까요? 그러니까 여러 많은 지식을 깊게 갖고 있는 사람이요.”

서 기사의 말에 이 교수가 대답했다.

“서 기사님, 저를 쳐다 보는 게 너무 웃기네요. 저는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지만, 제 전공은 독약이나 사람 몸의 생리학과는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극약에 대해서 뭘 알든 모르든 여러분하고 다를 바가 없을 것 같은데요.”

우리는 그러는 동안 최 중령의 방을 같이 둘러 봤다.

최 중령의 방은 휑해서 거의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총알은 한 발도 없는 권총 한 자루가 눈에 뜨일 뿐이었다. 그 밖에는 처음 부부가 라우자를 세웠을 때부터 있었을 낡은 가구들만 놓여 있었다.

몇 벌의 군복과 제복이 옷장에 걸려 있었는데, 그것을 보고 우리는 지금 최 중령이 입고 있는 못 봐줄 정도로 낡은 군복이 그나마 가장 좋은 옷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의 방에 걸려 있는 군복 중 한 벌은 족히 김춘추와 김유신이 삼국통일을 하던 때 어느 병사가 입던 것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것 같아 보였다.

방 안을 서성거리는 가운데 몇 마디 이야기가 더 오갔다. 대체로 김 주사를 죽인 것이 그 극약이라는 것까지는 다들 동의하는 것 같았다. 나도 거기까지는 맞는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다들 생각이 다른 것은 누가 그 극약을 썼느냐 였다.

“투자 회사에서 서류를 들고 찾아 와서 우리를 쫓아낼 거라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사흘 전이오. 그렇다면 누가 김 주사를 해칠 결심을 하고 극약을 준비했다면 그 사흘 사이일 거요. 혹시 지난 사흘 동안 누가 수상하게 이 다락방 앞을 드나든 것을 본 적은 없소?”
“최 중령님.”
“나는 당연히 사냥을 위해 매일 당당하게 극약을 집어 가고 있소. 나 말고 누가 있는 지가 궁금한거요. 나는 내가 김 주사를 해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소. 그러니 다른 사람들 중에 누군가 마음을 잘못 먹은 사람이 있지 않겠소?”

그 말을 듣고 서 기사가 말했다.

“그건 저도 마찬가지에요. 저도 제가 김 주사님을 해친 건 아니라는 걸 알아요. 그러니까 저 말고 누가 김 주사님을 해치고나서 안 한 척 숨기고 있는 거겠죠. 거짓말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거에요. 저는 제가 거짓말을 안 하고 있다는 걸 알지만.”

이 교수가 말했다.

“서 기사님 방은 다락방 아래쪽이니까 누가 다락방으로 올라 가면 소리 들리지 않아요? 밤에 몰래 걸어 다니면 소리 다 들릴 것 같은데요?”
“소리가 들리기는 하는데, 다락방으로 가는 소리인지 어떤지 구분은 안 돼요. 그래서 저는 누가 어디로 가는가 보다 그런 것은 아예 신경을 안 쓰고 지내요.”

그 말에 최 중령은 정말로 그런 지 다 같이 살펴 보자고 제안했다. 우리는 곧 서 기사의 방으로 가서, 실험해 보았다. 서 기사의 말대로 바깥에서 들리는 발 소리가 어느 방향으로 가는 것인지 알기란 쉽지 않았다.

서 기사의 방 안은 생기 있고 깔끔해 보였다. 다만 최 중령의 방과는 다르게 여러 옷가지들이 가지런히 정리되어 놓여 있었다. 책상 앞에는 무거워 보이는 장식품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자동차 경주 대회에서 3등, 2등을 했을 때 받은 트로피였다. 최 중령은 그것을 유심히 살펴 보았다.

“이것은 가짜 같은데? 돈이 없는 부대에서 대충 훈장을 만들어서 나눠 줄 때 쓰는 수법하고 비슷하게 만든 것 같소.”

그 말을 듣자 서 기사는 최 중령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최 중령은 트로피와 서 기사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서 기사에게 내 말이 틀린 것 같거든 트로피를 한 번 같이 보자고 하는 눈치였다. 그렇지만 서 기사는 최 중령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서 기사는 짧게 최 중령에게 이야기했다. 그런데 서 기사의 목소리는 지금까지 그의 말소리가 나오던 입이 아닌 다른 곳에서 나는 것 같았다.

“그것은 최 중령님이 상관할 바가 아니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모두 놀랐다. 박 사장은 털이 곤두서는 듯이 겁을 먹은 것처럼 보였다. 잠깐 동안 서 기사가 아니라 다른 이상한 것이 지금 이 집 속에 나타나 소리치는 것 같았다. 서 기사는 박 사장의 얼굴을 잠깐 바라 보고는 다시 눈길을 다른 곳으로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박 사장은 원래의 태도로 돌아 갔다.

박 사장이 말했다.

“최 중령님은 이 집의 주술이 아직 깨지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람이 아마 욱해서 독약을 탔을 거라고 했잖아요. 저게 가짜든 진짜든 그거하고 무슨 상관이 있나? 그렇게 치면, 최 중령님은 진짜 중령 맞아요?”
“박 사장님은 저녁에 포도주를 조금 과하게 마신 것 같소.”
“포도주는 진짜 포도주였나 보지.”

박 사장은 작은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 작은 웃음이 이 커다란 집을 가득 채우며 울렸다.

“이 집의 주술에 대해 뭔가 다른 생각을 갖고 있는 사람이 엉뚱한 짓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크다는 생각은 변함이 없소.”
“그러면 중령님이 도깨비불을 봤다는 곳에 가 보면 어떨까요?”

이 교수의 제안에 따라 우리는 마지막으로 중앙 계단으로 걸어 갔다. 그곳은 박 사장의 방 바로 옆이었다.

이 교수는 벽을 두드려 보자고 했다. 소리가 다른 곳은 벽 속에 다른 물체가 있거나 빈 공간이 있는 곳일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곳에 아마 시체라든가 주술을 걸 수 있는 물체가 묻혀 있을 거라고 말했다.

가장 먼저 이상한 곳을 찾아낸 사람은 서 기사였다. 서 기사가 소리가 이상하다고 한 곳 근처를 다른 사람들은 같이 두들겼다. 곧 우리는 어느 산 풍경을 그려 놓은 그림이 걸려 있는 벽 뒤편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과연 그림 뒤에는 붉은 글씨를 써 놓은 작은 종이 부적 같은 것도 하나 붙어 있었다.

“벽 반대 쪽에서도 한 번 두들겨 보면서 가늠해 보면 어떻겠소?”

최 중령의 제안에 따라 우리는 벽 반대편인 박 사장의 방 안으로 들어 갔다.

박 사장의 방은 이 집의 방이 원래 어떻게 장식 되어 있어야 하는 지 보여 주는 전시관 같아 보였다. 침대는 훌륭하게 치장되어 있었고 걸려 있는 모자와 옷도 이 집에 완전히 어울려 보였다. 침대 옆의 탁자에는 술 한 병과 술잔이 놓여 있었다. 그것도 둘 다 오래 동안 귀하게 보관해 온 것을 최근에 사용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여서 역시 이 커다란 집에 잘 어울리는 모습이었다.

유일하게 너저분해 보이는 곳은 책 상 위였다. 그런데 거기에는 잡다한 재산 기록과 법정 서류들이 있었다. 그 역시 이 집에 어울린다면 어울려 보였다.

“나 같은 처지에 이혼 준비하려면 해야 하는 일이 많아요.”

그것은 감옥에 갇혀 있는 남편과 지금 이혼을 하게 되면 어떻게 해야 자기 수중으로 최대한 재산을 가져 올 수 있을 지를 연구한 것이라고 박 사장은 설명 했다. 이 교수는 책상 위의 서류 뭉치 중에 가장 두텁고 낡아 보이는 것을 쳐다 보았다. 박 사장이 다시 말했다.

“남편 잡혀들어갈 때까지 집안 재산을 매년 정리해 놓은 서류거든. 이혼하면서 이것만 잘 써먹으면 이런 이상해 빠진 곳에서 더 안 살아도 될 만큼 재산을 빼낼 수 있을텐데. 거기 무슨 영조 때, 정조 때, 어디서 땅을 샀다는 이야기부터 작년까지 돈 모은 이야기가 다 있다니까.”

사람들은 곧 박 사장의 방 안에서 벽을 두드려 보았다. 그리고 그곳의 벽 속에 분명히 누가 시체나 사람의 뼈를 넣어 두었을 거라고 틀림 없다고 저마다 한 마디씩 말했다. 그 모든 것은 공책에 적힌 이야기의 후반부와 비슷해 보인다는 데에도 다들 생각은 비슷했다.

박 사장은 침대에 비스듬히 앉았다. 그리고 술이 든 잔을 한 손에 들었다. 박 사장은 그 술의 맛을 보았다.

“벽에 시체가 들어 있는 방에서 계속 지낼 수는 없잖아. 또 한 동안은 이 집에서 살게 될 텐데 방을 바꿔야 되나? 어제 저녁까지 잘 놀고 잘 자다가 이제 와서 무서워서 도망친다는 게 좀 부끄럽기는 하네.”

곧 술잔을 비운 박 사장은 그 방에서 나가고 싶어 했고, 우리는 방에서 나왔다.


4.
결국 우리는 다시 서재로 내려 왔다.

김 주사의 시체는 쓰러진 그 모습 그대로 바닥에 있었다. 모범적인 현장 보존이라고 경찰에서 표창이라도 줄 만큼 아무도 시체 가까이에 가지 않고 있었다. 거품을 뱉으며 쓰러진 시체를 사람들은 그저 더럽고 지저분하다고 여기는 것 같았다.

시시한 이야기를 몇 더 나누었고, 이승만 박사가 뭘 잘못하고 있다든가 요즘 미국의 경제 원조가 어떻다든가 하는 더 쓸모 없는 이야기를 더 주고 받기도 했다. 그러는 중에도 농담 한 두 가지 정도는 괴상할 정도로 웃긴 것이 있었다. 시체를 옆에 두고 서로를 살인자로 의심하고 있는 중에도 정말로 웃긴 이야기가 나오면 쿡쿡거리며 웃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은 오늘 밤 내가 새롭게 깨달은 사실이었다.

그러다가 도저히 더 이상 웃긴 이야기가 나올 가능성이 없을 정도가 되었을 때, 신 주임이 나에게 말했다.

“오늘 저녁 일은 아주 엉망이 됐는데, 탐정이 뭐 할 이야기 없어요?”
“사람이 한 명 죽었고 일을 저지른 사람은 누구인지는 모르지만 우리 사이에 아직 그대로 있습니다. 그런데 경찰이 올 때까지 아무도 그 이상은 다치지 않도록 탐정인 제가 잘 지켜 보고 있지 않았습니까? 저는 제가 올만한 곳에 와서 제 일을 잘 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신 주임은 재차 물었다.

“방금 그 말대로 조금 있으면 경찰이 올 거 잖아요. 뭐 해주고 싶은 이야기 없어요? 이렇게 될 거라든가. 어떻게 될 거 같다든가.”

나는 집 안과 라우자 사람들을 다시 바라 보았다. 밝은 전등 불빛에 밤이 깊어 갈 수록 피곤해 하는 그 모습은 더 또렷하게 보였다.

“그러면 조금 무례하게 들릴 지도 모르는 제 생각을 그대로 말해도 되겠습니까?”

나는 네 사람의 대답을 들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이 듣고 싶어할만 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저는 최 중령님이 준비한 극약으로 사람을 해칠 생각을 한 적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건 최 중령님은 극약에 가장 익숙한 사람이라는 것은 사실입니다. 짐승을 잡는 일과 사람을 해치는 일이 다르다고 설명하신 것도 그 차이를 알아 보실만큼 사람 해치는 일을 궁리해 보셨다는 뜻도 될 겁니다. 물론 그렇다고 정말로 최 중령님이 극약을 김 주사의 음식에 넣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최 중령은 아무 말이 없었다.

“그런데 최 중령님은 그 극약에 대한 이야기를 다른 사람들에게 전부터 들려 주었습니다. 저는 그 이야기가 누군가를 해치려는 사람에게는 ‘약은 여기에 준비되어 있으니 쓰고 싶을 때 잘 알아 보고 쓰라’는 말처럼 들렸을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서재 책상 위의 책들을 쳐다 보았다.

“결국 그 말을 듣고 누가 일을 저질렀는 지는 저도 모릅니다. 그렇지만 묘자리를 잘못 쓴 것 때문에 화를 당했다는 그 이야기를 깊게 믿게 된 사람이 독약을 넣었다는 것이 최 중령님과 이 교수님의 의견입니다.”

이 교수가 내 쪽을 쳐다 보았다. 나는 이어서 말했다.

“그런데 저는 그 이야기는 대체로 이 교수님이 지어낸 이야기일거라고 생각합니다. 라우자라는 크고 생소한 건물을 지을 때 이런저런 소문이 있기는 했을 겁니다. 산에 생긴 신식 벽돌 건물이 옛날 조상의 묘자리를 망가뜨렸다는 이야기는 아주 흔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시대를 낯설어 하는 사람들은 그따위 이야기를 유독 신기하고 중요하게 여기기도 합니다. 그렇지만, 사람이 죽는 날짜를 정해 준다든가, 그 날짜에 사람들이 차례차례 죽어 나가니까 누군가 독하게 마음 먹은 사람이 일부러 그 날짜를 틀리게 하기 위해 희생했다든가 하는 이야기는 조금 더 특색이 있습니다. 그런 내용 중에 이 교수님께서 일부러 더 신기하게 들리라고 이야기를 가다듬은 점이 있을 겁니다.”

이 교수는 나에게 뭐라고 대답을 할까, 더 이야기를 들을까 망설이는 듯이 보였다. 나는 그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이상한 이야기를 더 그럴듯하게 꾸며서 이 집에 더 찾아 올 사람이 없게 하려는 생각도 있었을 지 모르겠습니다. 아니면 김 주사가 그 이야기를 꺼림칙하게 여겨서 이 집을 더 건드리지 않게 하려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것도 아니면, 그냥 있는 이야기 재료에 이것저것 내용을 더 조사해서 살을 붙이다 보니 점점 이야기가 불어 났고, 그런 이야기를 듣고 누군가 무슨 일을 저지르기를 기대한 것일 수도 있을 겁니다.”

그때 박 사장은 또 웃는 소리를 냈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그런데 다들 아시다시피 이 이야기에는 제대로 이어지지 못하는 점이 한 군데 있었습니다. 주인 남편이 주술을 깨기 위해서 희생했다는 이야기와, 주술을 너무 믿어서 집을 무덤으로 고쳤다는 주인 부인의 이야기가 제대로 이어지지 않습니다. 이 이야기가 이어지려면 주인 남편이 이미 시간을 한번 틀리게 만들었는데, 주인 부인에게는 그 시간이 나중에 맞는 시간으로 변해야 합니다. 그런데 이런 일은 이상해 보입니다. 한번 지나간 과거의 시간을 누가 나중에 바꿀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그게 이 교수가 이야기를 완성 못한 부분인가요?”

신 주임이 물었다. 나는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대신 다른 이야기를 들려 주었다.

“그런데 시간은 바꿀 수 없지만, 날짜를 바꿀 수는 있습니다. 날짜라는 것이 팔자나 사주와 관련이 있는 하늘이 내려 준 운명과 직접 연결되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만, 사실 날짜라는 것은 사람들이 적당히 제도로 만들어서 정해 놓은 규칙에 불과합니다.”
“무슨 뜻이지요?”

이 교수가 나에게 물었다. 나는 대답했다.

“라우자는 갑오경장과 을미사변 즈음에 건설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죽는 날짜라면서 정해준 날짜도 다 그때 즈음일 겁니다. 저는 그렇다면 이야기가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이 한 가지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박 사장을 보면서 다음 부분을 말했다.

“묘자리를 건드렸기 때문에 화를 입어서 주인 남편이 죽는다고 정해준 날짜가 단기 4229년 1월 1일, 그러니까 서기 1896년 1월 1일이라면 이야기가 이상하게 돌아갈 가능성이 생기는 겁니다. 주인 남편은 1896년 1월 1일에 자신이 죽는다는 주술이 틀리게 하기 위해서 그보다 앞서 의병 전투에 참가했을 겁니다. 예를 들어서 한 달 넘게 앞서서 1895년 11월에 의병이 되었고, 1895년 11월 17일에 전사했다고 해 봅시다.”

내가 거기까지 이야기하자 이 교수는 이제 알겠다는 듯이 ‘아’ 하는 소리를 냈다.

“그런데 1895년에 고종은 어명을 내려 조선의 달력 체계를 음력에서 양력으로 바꾸어 버렸습니다. 그래서 1895년 11월 17일은 1896년 1월 1일이 됩니다. 주인 부인이 이 사실을 나중에 알았다면 정말 놀랐을 겁니다. 주술을 깨기 위해 11월에 앞서서 남편이 세상을 떠났는데 달력이 바뀌는 바람에 그 날짜가 1896년 1월 1일로 변해서 오히려 딱 맞아 버린 겁니다. 주인 부인은 주술이 기막히게 맞아든다고 믿게 되고 집을 무덤으로 바꾸게 된다, 그렇게 이야기는 완성 됩니다.”

이 교수도 박 사장을 바라 보았다. 나는 계속해서 말했다.

“저는 이런 식으로 이야기의 아귀가 맞아 든다는 사실을, 박 사장이 1890년대 후반의 재산 자료에서 날짜 기록을 보다가 날짜가 이상하게 바뀌는 대목을 보는 도중에 알게 되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서 기사는 “말도 안된다”고 중얼거렸다. 나는 서 기사에게 말했다.

“저는 서 기사님만은 이 일과 아무 상관이 없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는 서 기사님이 직업적인 사기꾼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합니다. 자동차 경주 선수로 화려한 과거를 갖고 있지만 지금은 몰락한 불쌍한 사람 흉내를 내면서 누군가를 속이려고 하는 사람인 것 같습니다. 서 기사님은 이 집에서 당장 나가게 되시더라도 어떻게든 머물 곳을 쉽게 찾아낼 분이시고, 괜히 엉뚱한 풍수지리 이야기를 믿고 위험한 큰 사건을 함부로 일으키실 분도 아닙니다. 애초에 이 집에 온 과정을 분명히 밝히고 계시다는 것도 특이한 점입니다. 이 집에 서 기사님이 오신 것은 그런저런 사연 속에서 자신이 화려한 과거가 있는 사람인 척 흉내내기 위해서 였든지, 아니면 이 집에 사는 부유한 누군가를 유혹하려는 정도의 목적이었을 겁니다.”
“사실은 이 집에는 빈털터리들만 살고 있었지만.”

박 사장의 말이었다. 박 사장은 자기가 살인범이라는 말을 듣고 태도가 바뀌어 있었다. 다만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오히려 더 졸려하는 듯한 모습이 되었다.

“서 기사가 자기는 사기꾼이라는 이야기는 사실 나한테 진작에 했어요. 그런데 자기는 정말로 나를 사랑한다고 하더라고.”

조금 더 이어지는 말을 들어 보니 박 사장은 완연히 술 취한 목소리였다.

서 기사는 나를 노려 보고 있었다. 노려 보는 얼굴은 더 반듯한 미남의 얼굴이었다.

“그래서 박 사장님이 달력이 바뀌면 주술이 맞는 이야기가 된다는 사실을 알아서 그 주술이 아직까지도 이어진다고 믿고 집을 고치려는 김 주사님을 해쳤다고요? 거기에는 아무 증거도 없잖아요?”
“맞는 말씀입니다. 박 사장님이 그 사실을 알아냈다고 해도 박 사장님이 독약을 탔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저희들이 도착하기 전에 박 사장님이 이미 다른 분들께 자신이 알아낸 것을 다 털어 놓았고 그 말을 듣고 실제로 일을 저지른 사람은 다른 사람일 수도 있을 겁니다.”

멀리서 희미하게 들려오는가 마는가 싶던 경찰의 사이렌 소리가 점점 더 분명하게 들려왔다.

“그런데 이제 경찰이 오면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쨌거나 여러분 네 사람 중에 한 사람이 일을 저지른 것은 사실입니다. 넷 중에 최소한 한 사람은 범인입니다. 대한민국 경찰은 뭔가 탓할 일이 필요하고 책임질 일이 필요하다면 어떻게든 한 명은 잡아 넣을 겁니다. 경찰이 무슨 생각으로 누구를 살인범이라고 할 지는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누구든 한 분은 범인이라고 할 것이고 그렇게 지목된 사람은 경찰을 한 번 겪고 나면 살인범으로 취급될 겁니다. 그게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이야기의 결론입니다.”

내 말을 듣더니 서 기사는 다시 박 사장을 바라 보았다.

“박 사장님, 경찰에는 제가 자수할게요. 어차피 저는 감옥살이해 본 경험도 있어요. 김 주사는 민보단 사람이잖아요. 요즘 민보단이 워낙 횡포를 부리니까 사람들이 다들 싫어하는 분위기인 거 아시죠? 김 주사가 민보단 위세를 등에 업고 거들먹거리며 상전인 척 하길래 다투다가 죽였다고 하면 큰 벌은 피할 수 있을 거에요. 저는 검사들이랑 판사들을 어떻게 다루는 지 잘 알거든요. 대충 이런 판결을 내리는 게 그럴듯하게 보이는 일이다 싶고, 자기들 멋있게 보일 수 있는 것처럼 누가 모양만 좀 맞춰 주면 딱 그대로 움직이는 사람들이에요. 독약을 쓴 것도 어차피 동물 잡는 독약이니까 애초에 죽일 생각은 없었고 그냥 배 아프게 골탕만 먹일 생각이었다고 둘러대도 되고요. 저는 별 대단한 형 안 받을 자신 있어요. 박 사장님은 한 3, 4년만 기다려 주시면 돼요.”

박 사장은 그 말에 바로 그러라든가 그러지 말라든가 하는 대답을 하지 않았다. 대신에 이 교수와 최 중령에게 뭔가를 물었고, 그 사람들은 다시 서 기사에게 뭐라고 대답했다.

그러다 보니 그 대화는 갑자기 다시 생기를 띄고 있어서 죽어서 누워 있는 김 주사도 잠깐 한 마디씩 끼어드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였다. 라우자 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경찰이 오기 직전까지 처량한 토론을 이어나갔다.

얼마가 지나자 다시 전기가 불안해져서 서재의 전등 불빛이 흔들렸다.

전등에서 오락가락하는 전류 때문에 웅웅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러자 누군가 “집이 우는 소리를 내는 것 같다”고 말했다. 내 귀에는 깜빡이는 불빛 사이에 시커멓게 눈 앞을 뒤덮는 어둠이 낄낄거리며 웃는 소리를 내는 것처럼 들렸다.

 

- 2018년 우면산에서

댓글 2
  • No Profile
    윤새턴 21.03.02 12:43 댓글

    독약이 범행 수단이면 여자를 의심한다는 클리셰가 기묘하게 맞아 떨어졌...나요? 眞해결편이 따로 있을 것 같은 느낌도 듭니다만, 시대를 생각하면 이 정도로 답답한 것이 적절할지도 모르겠군요. 저는 오리엔트 특급살인의 결말이지 않을까 생각했었습니다 ㅎㅎ 잘 읽었습니다.

  • 윤새턴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21.03.02 20:54 댓글

    감사합니다! 이런 이야기는 사실 오리엔트 특급살인 식 결말이 균형이 잘 맞아 떨어져서 어울릴만한데 그렇게 하면 그 소설 따라하기가 되어 버리니 그렇게 갈 수는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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