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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곰과 대통령과 나

2020.06.30 11:5006.30

 

곰과 대통령과 나

 


나는 어지간하면 이 이야기는 안 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하며 지냈다. 그런데 이제는 제법 어지간한 때가 온 것 같아서 처음으로 이 이야기를 꺼내 보려고 한다. 나는 최대한 내가 기억하고 있는 것을 최대한 내가 생각하는 정확한 묘사로 가감 없이 기록할 것이다.

내가 사는 중소도시에는 공원이 하나 있었다. 이 도시에서는 언제인가부터 곰을 상징으로 삼아서 무엇인가를 홍보해 보려는 시장의 야심이 펼쳐지고 있었는데, 그에 따라 그 공원 이름도 곰돌이 공원이었던가 곰곰히 공원이었던가 뭐 그런 이름이었다. 잡다한 언어유희를 너무나도 사랑해 마지 않는 한국 공공기관의 취향에 따라 한 때에는 약간 미래지향적인 느낌을 준답시고 공식적인 공원이름이 곰돌e 공원이 되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여전히 “다eat는 먹자골목”이라든가, “愛들 노는 야시장” 같은 제목을 붙여 놓고 이 얼마나 발칙 하고 통통 튀며 상큼발랄한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작명인지 감탄하고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약간은 서글픈 기분이 된다. 하지만 그때의 곰돌이 공원이라는 공간 자체는 그럭저럭 괜찮은 편이었다. 걷기 편한 산책로가 있었고 너른 들판이 마음을 트이게 해 주는 느낌도 있었고, 그러면서도 근처의 숲과 언덕은 자연스러운 모습이 잘 살아 있었다. 적당한 중소도시의 적당한 공원 역할을 하기에는 그만큼 적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가 얼마 후 그 공원 안에 정말로 곰을 키우는 곳이 생겨났다. 시에서 이런 것을 운영할 만한 돈이 있는가 싶기는 했다. 하지만 어쨌거나 정말로 곰이 뛰어다니는 곳이 생기니 공원은 더 인기 있는 곳이 되었다. 곧 이웃 도시에까지 곰돌이 공원에는 진짜 곰이 있다는 소식이 퍼져 나갔고 6시내고향인가 생생정보인가 하는 TV프로그램에서 사람들이 와서 촬영해 가기도 했다. 여러 연령대의 어린이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아져서, 그러면 안 된다고 했지만, 아이들은 장난을 친다고 곰에게 쑥이나 마늘을 자꾸 먹이기도 했다.

나 또한 그 공원을 갈 때면 꼭 곰 키우는 곳에 가서 곰 구경을 한 번 씩 하고 오곤 했다. 호기심이 있다라는 것은 사람의 천성인지라, 곰을 눈 앞에서 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데 안 들르고 지나가게 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하루는 어떤 행사 때문에 대통령이 내가 사는 도시에 찾아 왔다. 아마 이 도시와 근처 다른 행정구역 사이에 위치한 무슨 장소를 새로 야심차게 개발하는 사업과 관련되어 있었던가, 아니면 그 개발을 중단하는 조치와 관련되어 있었던가, 뭐 그런 문제 때문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당시의 신문 보도를 찾아 보면 정확하게 무슨 이유 때문에 대통령이 왔었는지 알아 낼 수 있겠지만, 나는 그때의 언론 기사를 찾아 보는 것이 오히려 나의 순수한 기억을 더 바꿀 수도 있다고 판단해서 아무 자료도 찾아 보지 않고 그저 내 기억으로만 모든 이야기를 돌이켜 보려고 한다.

주요 일정이 끝나자, 다른 도시에서 오는 수많은 다른 사람들처럼 대통령도 곰돌이 공원을 한 번 구경하고 가기로 했다. 시장이 비교적 유망한 정치인이 되어 있는 상황과 상관이 있는 지도 모른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침 그때 나도 공원에 있었다는 사실이다. 나는 공원을 지나가는 사람들이 “대통령” “장관” 어쩌고 하는 말을 들었다. 언뜻 들으니 대통령이 와 있다는 이야기 같았다. 마침 나는 공원을 산책하는 것을 거의 마칠 때 즈음이 되어 마지막으로 곰을 구경하러 갈 참이었다. 그러고 보니 곰이 있는 우리 근처에 유독 사람이 많고 웅성거리는 분위기가 있었다. 그곳에 대통령이 있는 것 같았다.

나는 곰이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대통령을 멀리서라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사람이 많아 대통령을 보기는 어려웠다. 나는 곰을 구경하고 있는 대통령을 구경하고 있는 사람들을 구경할 수 있을 뿐이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우리 속의 곰들을 보았다.

그 날은 곰 세 마리가 눈에 보였다. 세 곰 모두 털이 약간 떡져 있는 모양으로 좀 지저분해 보였다. 세 곰 중 두 마리는 장난을 치는 것인지 싸우는 것인지 서로 주먹을 휘두르다가 붙잡고 뒹굴다가 하는 행동을 끊어질 듯 말 듯 계속 이어서 했다. 장난을 친다고 보기에는 좀 격해 보였고 싸운다고 보기에는 좀 나른해 보였다. 나머지 곰 한 마리는 뭔 생각인지 무거운 돌 하나를 미는 지 굴리는 지 하고 있었다.

나는 그날 따라 잠깐 그러고 있는 곰들이 유독 불쌍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곰돌이 공원의 곰들은 시장의 자랑거리였던지라 우리 내부는 널찍하고 깨끗해 보이기는 했다. 적어도 곰 세 마리가 살고 있는 면적을 나눠 놓으면 내가 살고 있는 집 보다는 훨씬 더 드넓은 크기였다. 대통령은 곰을 보고 웃고 있었던 것 같다. 아마 시장이나 시장 보좌관이나 섭외된 지나가는 시민이 실없이 웃기려는 소리를 한 마디 했고, 거기에 맞춰 웃어 준 것 아닌가 싶다.

그런데 그 즈음 갑자기 돌을 굴리고 있던 곰이 그 돌을 던지는 것처럼 강하게 움직였다. 정확한 순간을 목격하지는 못했기 때문에 곰이 돌을 집어 던진 것인지 아니면 발로 차듯이 한 것인지는 모르겠다. 그 충격이 제법 강했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은 소리를 치기도 했다. “어머” “뭐야”하는 소리도 들렸다. 움찔하면서 우리에서 멀어지려고 하는 사람도 봤다.

그리고 잠시 후, 그 곰이 우리 밖으로 뛰어 나왔다.

곰이 어떻게 해서 울타리를 넘어 섰는지 나는 보지 못했다. 그런 것을 보고 “아, 이런저런 수법으로 곰이 울타리를 통과했군. 참 기막힌 상황인데. 앞으로는 울타리에 저런 점은 보강해야겠어”라는 논리적인 판단을 내리기 전에, 당장 도망치지 않으면 죽을 지도 모르겠다는 공포감이 온몸에 콱 치밀었다.

질주하는 커다란 곰의 검은 모습이 멀리서 얼핏 보였다. 다리가 저절로 움직였다. 나는 전력을 다해 도망치기 시작했다. 이쪽으로 오는 곰의 몸집을 보자, 먼 옛날, 야생의 대지에서 수렵과 채집으로 살아가던 그 원시 인류의 본능이 깨어 나서 그저 온몸을 정신 없이 움직이게 만들었다. “우어워러러어어어”하는 이상한 비명 소리도 입에서 튀어 나왔다. 아마도 몇 만 년 전 비슷한 곳에서 비슷한 곰을 만나 비슷한 상황을 겪었을 나의 먼 조상이 내질렀던 소리와 매우 비슷했을 것이다.

나는 원래 달리기를 잘 하지 못한다. 어릴 때 운동회에서 달리기를 하면 항상 꼴지만 했고, 어쩌다가 꼴지를 면하면 그것만으로 하루 종일 기뻐하곤 했다. 나이가 들어서는 살도 찌고 체력도 약해져서 더욱 더 달리기를 못하게 되었다. 애초에 달릴 일도 별로 없으니 달리기 솜씨는 더욱 감퇴했다. 아침에 버스를 놓칠 것 같을 때 정도가 내가 뛰는 거의 유일한 계기인데 그나마 그럴 때에도 실제로 달리는 거리는 20미터 정도 밖에 안 된다. 그런 정도의 경험은 맹렬하게 달려 오는 곰을 피하는 상황에서는 당연히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그래도 아드레날린인지 아니면 무슨 다른 지옥에서 뽑아 올린 호르몬인지가 온몸이 쩔도록 뿜어 나오는지라, 나는 힘들다는 것도 숨차다는 것도 느끼지 못하면서 그냥 막 달렸다. 그러다가 나는 마구잡이로 흩어지는 사람들 사이에서 도망치고 있는 대통령을 발견했다. 나는 대통령 곁으로 가면 조금이라도 안전할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을 했다기 보다는 그런 기분이 들었다고 말하는 게 맞겠다.

그래서 나는 대통령이 있는 방향으로 뛰었다. 그런데 재수 없게도 곰 역시 자꾸 내 쪽으로 오는 것 같았다. 대통령은 노인이지만 그래도 빡빡한 일정을 매번 소화하는 체력이 있는 사람이라서인지 제법 잘 달리는 것 같았다. 아니면 곰이 그쪽으로 오고 있다는 것 때문에 더욱 더 힘을 내고 있기 때문에 그렇게 잘 뛰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여튼, 나는 대통령을 따라 달리고 있지만 대통령에 비해서는 약간 뒤쳐지는 모양이 되었다. 그리고 내 바로 뒤에는 거대한 몸집의 무서운 야수가 달려 왔다.

그 상태로 실제로는 아마 1분 아니면 2분 정도를 뛰었을 것이다. 당시의 기분 상으로는 2시간 반 정도 이어지며 온갖 고난과 역경을 보여 주는 긴긴 인간승리 드라마 영화 한 편을 본 것 같은 시간이 흘렀다. 뛰다 보니 우리는 공원 한 켠에 마련 되어 있는 작은 정자 비슷한 집 가까이에 오게 되었다. 비를 많이 맞아 금속으로 된 부분은 낡은 부분이 있었지만 그래도 보기에는 나쁘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나 보기에 좋은지 나쁜지 하는 것이 당시의 문제는 아니었다. 그때의 문제는 그곳이 막다른 길목이라는 점이었다.

곰 한 마리가 있었고, 사람 네 명이 그 곰에게 몰려 있는 상황이었다. 나와 대통령이 있었고, 얼떨결에 비슷한 방향으로 휩쓸려 온 한 장관과 지방법원장이 있었다. 네 사람이 힘을 합치면 곰을 물리칠 수 있을까? 나는 사람 네 명이니, 4명, 죽을 사, 이런 아무짝에도 쓸모 없는 생각만 자꾸 해내고 있었다. 장관과 법원장이 좀 더 안 쪽에 가 있고 나와 대통령이 곰에게 좀 더 가까운 쪽에 있었다.

어떻게 해야 하나 싶어 두리번거리니, 맨 안 쪽에 몸을 바짝 숨긴 장관과 법원장이 나에게 뭔가 눈치를 주는 것 같았다. 네가 제일 젊으니까 좀 나서서 어떻게 해 보라는 듯한 눈빛 같았다.

나는 그 눈빛들 때문에 나도 모르게 몸을 돌려 곰 앞에 섰다. 그러니까 곰의 눈빛이 보였다. 아무리 젊어도 맞설 수 있는 상대가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저 거대한 앞발을 휘두르면 정말로 온 몸의 뼈가 실제로 저리겠지. 옆에는 대통령이 서 있었다. 정치판이 무서운 곳이라고 하더니, 그 정치판에서 최후의 승자 자리를 차지한 인물 답게 대통령은 곰 앞에서도 무서워하는 정도가 나보다는 훨씬 약한 것 같았다. 그러나 곧 대통령 또한 점점 심한 공포를 느끼고 있다는 것을 나도 같이 인류 공통의 공감대를 통해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어디에선가 곰은 코가 약점이라는 이야기가 생각났다. 온 힘을 다해 주먹으로 코를 때려 볼까? 그런데 어디에서 읽은 거더라. 과학책에서 읽은 건가? 소설책에서 본 건가? 소설 작가가 대충 그냥 지어낸 이야기를 내가 믿고 따라 하다가 잠시 후 나의 신분이 곰의 애피타이저로 변하게 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어떻게 할 줄을 몰랐는데 내 다리만은 어떻게 하는 지 안 다는 듯이 저절로 후들후들거리며 떨렸다. 곰은 곧 달려 들 것 같았다. 이빨이 먼저 날아 올까, 발톱이 먼저 날아 올까 싶었다. 힘이 풀린 다리 때문인지 절망감 때문인지 나는 자리에 주저 앉아버렸다.

그런데 너무나 이상하게도 그 다음 순간. 곰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저기요. 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

뭐라고? 라고 소리 지르고 싶었지만 너무 무섭고 너무 이상해서 그런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곰이 정말로 말을 하고 있었다. 뒤에 “좀 부탁드리고 싶은 게 있는데요”는 정확한 발음으로 들리지는 않았지만, “저기요”는 정말 똑똑한 발음으로 들렸다. 목소리나 말투도 내가 언제인가 곰이 말하면 이렇게 말할 것 같다고 상상하던 바로 그 느낌 그대로인 목소리였다. 어릴 때 아버지께서 일요일 날 늦잠 자고 계실 때 같이 놀자고 하면 투덜거리시면서 뭐라고 잠 덜깬 목소리로 웅얼웅얼하시던 그 목소리에 조금 더 청정 자연의 느낌을 가미한 듯한 바로 그런 목소리였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지? 그런데 곰은 계속해서 말을 이어 나갔다. 그리고 대통령은 그 말을 관심 있게 듣는 모습을 보였다. 진심으로 곰이 말하는 것을 귀 기울여 듣는 것인지, 아니면 노련한 정치인 다운 연기인지는 모르겠으나, 지금 이 상황에서 살아 남는데 꼭 필요한 태도라는 생각은 들었다. 나는 “뭐?” “이럴수가”하는 말이 입에 튀어 나오려다가 자꾸 멈칫거렸다.

결국 당장은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것이 상책인 것 같았다. “곰은 지능도 낮고 혀와 성대의 구조도 사람과 다를텐데 어떻게 사람과 같이 말을 한다는 것이 가능할 수 있는지요?”라고 따져 묻는 것이 필요했겠지만, 상대방이 앞발을 한 번 힘껏 휘두르는 것 만으로 모든 의문에 대한 대답을 대신할 수 있는 인물인 경우에는 아무 질문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일 때가 있는 법이다. 뒤를 돌아 보니, 장관과 법원장은 그저 몸을 웅크리고 떨고 있을 뿐이었다. 곰의 목소리가 낮은 편이어서 두 사람에게는 전혀 들리지 않는 것 처럼 보였다.

곰의 표정은 진지했고, 약간 쑥스러워하면서도 공손히 부탁하는 것 같았다. 물론 사람과는 얼굴을 움직이는 방식이 완전히 다른 동물인지라 내가 그렇게 곰의 표정을 읽은 것이 맞다는 보장은 없다. 하기야 나는 사랑하는 사람의 표정도 잘 못 읽을 때가 있는데.

대통령과 곰의 대화는 제법 길게 이어졌다. “환경이 그렇게 열악합니까?” “네, 조치할 것은 조치하고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겠습니다.” “연어나 생선을 좀 더 자주 먹고 싶다는 그런 말씀입니까?” 아무래도 대통령은 사람이라서, 나는 곰이 하는 말 보다는 대통령이 하는 말을 훨씬 더 잘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얼마 후, 경호팀이 도착하자 곰은 바로 도망쳤다. 놀란 경호원 한 명이 곰을 사살하려고 했는데, 대통령은 손짓으로 말렸다. 곧 곰은 생포 되었고, 원래 있던 우리로 돌아갔다. 대통령은 헬리콥터를 타고 청와대로 돌아 갔고, 나를 비롯한 몇몇 사람들은 병원으로 실려 가 서 간단한 검진을 받았다. 나는 너무 오래간만에 뛰어 내일은 분명히 다리에 알이 배일거라는 진단을 받은 것 이외에 별 탈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날 일은 그렇게 끝이 났다.

그 일은 한 동안 화제거리가 되었다. 야당 정치인들은 대통령 경호 체제가 너무 부실하다면서 정부를 공격했고, 반대로 대통령 지지자들은 우리 대통령은 위기의 순간에서도 항상 침착했다면서 대통령을 응원했다. 텔레비전 인터뷰에서 장관은 곰이 닥쳐 왔는데도 대통령은 그 거대한 괴물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무엇인가 소통하려고 하는 듯 했다면서 칭송했고 자신에게 대통령은 영원한 생명의 은인이니 앞으로 모든 것을 바쳐 언제까지나 충성을 다하겠다고 이야기했다. 곰 앞에서도 강아지를 다루듯 소통할 수 있는 대통령이라니. 비록 얼마 후 공천을 못 받자 장관은 대통령을 배신하기는 했지만, 그때 당시에는 정치인들 사이에 아직 “소통”이라는 단어가 지겨워지기 전이었던 까닭에 대통령 인기를 높이는데 상당히 도움이 되기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전국의 동물원과 곰 사육시설에 대해 대대적인 시설 점검과 환경 개선 조치가 시행되었다. 대통령 앞에서 곰이 탈출한 사건에 비해서 이 소식은 별로 화제가 되지 못했다. 두 사건을 연관지어 보는 사람도 아무도 없었다.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온 세상에 나 뿐인 것 같았다.

이상한 것은 또 있다. 나를 취재하려고 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다 보니 나는 내가 보고 들은 일을 주위에 그대로 말하지 않았다. “그때 나도 대통령하고 같이 도망쳤다”는 정도 이외에 남에게 자세한 설명을 했던 적은 없었다. 하기야, 그때 곰이 대통령에게 처우를 개선해 달라고 하소연하는 말을 했다고 주변에 떠들고 다녀 봐야, 정신나간 사람이라는 소리만 들었을 것이다. 그게 정말 진짜라고 끝끝내 강하게 주장했다면, 나를 안타깝게 여기는 내 주위 사람들에 의해서 나는 지금 쯤 어디인가에 갇혀 치료를 받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러다 보니, 나는 한 가지 현실성 있는 추측을 하게 되었다. 나는 그때 너무 극심한 긴장과 호르몬의 충격 때문에 모든 문제가 해결된 시점에서 뇌에 큰 충격을 받았고 그 때문에 기억이 손상을 입은 것이다. 그래서 망상 속에 떠오른 곰이 말하는 장면을 실제라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혹은 갑자기 너무 빠른 속도로 심한 운동을 하다 보니, 곰을 마주한 최고 공포의 순간에는 몸과 마음이 버티지 못해 나는 실신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실신 상태에서 꾼 꿈을 진실이라고 기억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은 꿈이었고 사실 나는 실신해서 누워 있다가 의료진과 구조대원이 다가 올 때 즈음해서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그러니까 그 모든 황당한 기억은 사실 그 무렵 내가 겪었던 온갖 일에 대한 스트레스와 불안감, 외로움, 심적인 괴로움, 신체적인 괴로움이 순간적으로 폭발한 최악의 절망감과 뒤섞여 덥쳐 온 그야말로 황당한 꿈에 지나지 않는다는 결론이었다. 뭐 그런 정도로 내 자신을 위한 당시 상황에 대한 설명을 개발해 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쯤이 지났다. 나는 아침마다 건강을 위해 달리기를 연습하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그해 여름에 나는 서울에 무슨 과제 보고회가 있어서 왔다가 시간이 남아서 서울에서만 먹을 수 있는 음식을 먹어 보고 가자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종로 어디인가 삼계탕이 맛 있는 집이 있다고 해서 그곳을 찾아 가 보았다. 마침 한참 더위로 달아 오른 여름철이고 해서, 삼계탕은 제법 괜찮은 선택이었다.

다 먹고 일어 설 때 쯤 해서, 또 무엇인가 왁자하고 웅성웅성해지더니 한 무더기의 수행원들과 기자들이 몰려 왔다. 대통령이 삼계탕을 먹으러 왔다는 것이다.

기자들이 하는 말을 보니, 지역 경제 활성화를 위해서 청와대 근처에 있는 식당에서 대통령이 밥을 먹는 모습을 보여 준다는 뭐 그런 행사 비슷한 식사인 모양이었다. 이번에도 온통 기자들에게 둘러 쌓여 있어서 대통령의 모습을 잘 볼 수는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떠나기 전에 대통령이 직접 내 곁으로 다가 왔다. 잠깐 대통령 비서 한 사람이 기자들에게 무슨 중요한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기자들은 모두 그 쪽으로 몰려 있었다. 때문에 기자들의 시선을 피해 대통령과 내가 몇 초 정도 대화할 시간이 생겼다.

대통령은 나를 보면서 몇 년 몇 월 며칠 생 누구 맞냐고 먼저 확인했다.

“어떻게 그걸 아십니까?”
“국가정보원에서 알려 주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대통령은 나에게 낡은 책 한 권을 내밀었다.

“SF를 좋아하신다고 해서 한 권 선물로 드립니다. 이런 것은 돈 주고도 못 구한다고 하던데요.”

그 책은 듀나 작가의 첫번째 단편집 “나비전쟁” 초판이었는데, 놀랍게도 그 작가의 친필 서명이 들어 있었다. 나는 한 마디도 답을 못하고 그냥 놀라서 대통령을 쳐다 보기만 했다.

곧 대통령은 싱긋이 웃으면서 이렇게 말하고 떠났다.

“그 날 일은 앞으로도 어지간하면 말 안 하는 걸로 합시다.”


- 2020년, 강남에서

 

댓글 8
  • 이경희 20.06.30 23:43 댓글

    아니 작가님, 결말이 이게 대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이경희님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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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곽재식 20.07.01 09:15 댓글

    뭔가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겠고 왜 이렇게 시작되어 이렇게 끝나는 지도 모르겠는 느낌 아닙니까? 아주 구체적인 사연이 있는데 그런 느낌이 서려 있는 것도 가끔씩은 재미 있겠다 싶어서 그냥 이렇게 놔 두어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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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새턴 20.07.01 00:44 댓글

    이 이야기를 공개하기에 어지간한 때가 왔다고 생각하신 것은 정권이 교체되었기 때문이고, 그 때 일어났던 모든 일들은 다 신적인 능력에 의지한 큰 뜻이 있었기에 그러하였다고 상상해보니 역시 잘 모르겠습니다.

    조공 요청을 에두르시는 것인지요? ㅋㅋㅋㅋㅋ

  • 윤새턴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20.07.01 09:15 댓글

    하하 그런 것은 아닙니다.

  • No Profile
    나무늘보 20.07.09 16:10 댓글

    작가님 글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제가 보기엔  여우처럼 노련한 정치적 술수로 인기를 유지하는 대통령의 마지막 선물은 어딘지 귀엽습니다. ㅋㅋ 

  • 나무늘보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20.07.10 12:47 댓글

    힘이 되는 응원의 말씀 너무나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종종 들러 주십시오.

  • No Profile
    사피엔스 20.07.09 21:51 댓글

    안녕하세요. 가입하고 처음 읽는 글이네요. 계속 웃으면서 봤습니다. 개인적으로 정치에는 관심이 없어서 그런 제가 파악하지 못 한 의미가 있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이 조금 있습니다만 무척 재밌게 읽었습니다.

  • 사피엔스님께
    No Profile
    글쓴이 곽재식 20.07.10 12:47 댓글

    정치적인 풍자는 별로 없는 글입니다. 그냥 좀 괴상한 느낌으로 뭔가 후련하게 답답한 것을 날려 보는 느낌의 글을 한번 써 보면 어떤가 싶어서 이렇게 써 보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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