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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단군굴

2018.06.15 00:0006.15

단군굴 (壇君窟)

곽재식

* 거울 15주년 특집호를 발간을 맞아 필진이신 곽재식 작가에게 '거울'을 소재로 한 단편 원고를 청탁했다. SF를 중심으로 판타지와 미스터리에 이르기까지 작품 세계를 확장해온 그는 경이로운 창작열을 가진 작가이다. 매달 빠짐없이 거울에 발표되어 온 단편들은 그가 전폭적인 독자들의 지지 속에 뚜벅뚜벅 걸어가는 성실함으로 남긴 열정의 흔적이다. 거울의 간판 작가라 해도 손색이 없을 그의 단편을 특집호에도 실을 수 있어서 영광이며, 감사하다. 앞으로도 거울이 그와 오래 함께 할 수 있기를 빌어본다.(편집자)


경원(京媛)은 고조선(古朝鮮) 말 혈구(穴口) 사람이다. 이 무렵 세상에는 산신(山神)이 되는 방법을 알아내려고 하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았다. 그러므로 조금이라도 보고 들은 것이 있고 학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저마다 세상이 생겨난 까닭을 깨우치는 것에 대한 이야기나, 늙지도 병들지도 않고 영영 살 수 있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를 많이 듣고자 하였다. 세 집에 한 집은 저녁 밥을 먹다 사람이 세상을 사는 까닭에 대해 이야기하며 밤을 지 새는 곳이 있었고, 사흘에 한 번은 늙지 않는 방법을 찾아낸 사람에 대한 소문을 서로 물었다. 그러니, 물지게를 지고 다니면서 먹고 사는 사람도 물동이를 내려 놓고 쉴 때가 되면 산 속에 들어 가 기도를 하여 신령으로 변하는 방법을 공부하였고, 밭을 가는 사람도 밭을 가는 도중에 해와 별과 같이 오래 사는 사람에 대한 꿈을 생각하곤 하였다.

경원은 총명하였으므로 그러한 산신의 술법에 대해 여러 사람들이 하는 이야기를 많이 듣고 외울 수 있었다. 그 중에 몇몇은 깊이 알아 듣기도 하고, 몇몇은 의심을 갖기도 하였다. 그렇게 해서 몇 년이 흘러 경원이 배우고 익히는 것이 깊어지자, 주변에서 그 학문을 따라갈 자가 없게 되었다.

이에 경원에게 처음 별이 뜨는 것과 계절이 바뀌는 것을 가르쳐 주었던 스승이 말했다.

“아사달(阿斯達)에 가면 스스로 산신이 되는 방법을 정말로 알아내었다는 사람들이 여럿 있다고 하니, 이제 너는 그들을 찾아가 한번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어 보면 어떠하겠는가?”

경원은 그 말을 듣고 그곳을 한번 구경해 봄직하다고 생각하고 아사달로 갔다.

아사달에는 한 산봉우리를 둘러 싸고 온갖 학자들이 모여 들어 저마다 크고 작은 집을 짓고 사람을 모으고 산신에 대한 이야기를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한 무리들이 만든 집들은 어떤 것은 커다란 궁전과 같고 어떤 것은 허물어진 움막과 같기도 했다. 산 굽이 굽이, 숲 구석 구석마다 그런 사람들이 들어 차 있어서, 얼마나 많은 자들이 모여 들어 있는 지 헤아리기도 어려웠다.

특히, 옛날 단군(壇君) 왕검(王倹)이 아사달에서 산신이 되었다는 이야기를 굳게 믿는 사람들이 그 중에 대단히 많았다. 그러므로 그 사람들이 단군 왕검을 비롯한 갖가지 산신의 모습을 흙으로 빚거나 나무나 돌을 깎아 만들어 둔 것이 많아 곳곳에 널려 있었다. 어떤 것은 커다란 돌로 만들어 마치 거인과 같이 큰 것도 있었고, 어떤 것은 흙을 곱게 빚어 꼭 진짜 사람처럼 정교한 모양으로 작게 만들어 놓은 것도 있었다. 그 중에 오래된 것은 반쯤 부서진 것도 있었고, 나무로 만든 것은 썩어 가는 것도 있었으며, 한편으로는 어제 오늘 사이에 만들어 깨끗하고 번듯한 것도 있었다.

“이것은 옛날 산신이 되기 직전의 단군 왕검의 모습을 손가락 마디 길이와 발가락 마디 길이까지 꼭 같도록 흉내내어 만들어 놓은 것이니, 이것을 보고 있다면 사람이 산신으로 변하는 모습을 지금 두 눈으로 보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니, 이것을 보면서 참된 마음으로 깊이 마음을 다해 빌고 우러러 보면, 반드시 저절로 마음 속에서 산신으로 변할 수 있는 깨우침이 떠오를 것이다. 무릇 모든 사람들은 마음 속에 누구나 산신으로 변할 수 있는 참된 마음이 있다. 그래서 누구든 그 마음을 다시 내어 보일 수만 있으면 저절로 산신이 되는 깨우침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다만, 다른 일에 마음을 쓰고 몸을 바삐 움직이느라 그 마음을 모를 뿐이다.”

어느 긴 수염을 허옇게 기르고 빛나는 흰 옷을 입고 또한 호랑이 가죽을 두른 한 사람이 어떤 아름다운 돌 조각 앞에서 그와 같이 말하니, 많은 사람들이 그 말을 듣고 그 앞에서 절을 하고 또 정성스레 기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를 보고 경원이 따져서 말하는 것이 다음과 같았다.

“사람은 저마다 다 기질이 다르고 가진 것이 다르다. 한 손으로 싸리나무를 뽑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도 드물어, 그런 힘을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런 힘을 갖고 있는 사람을 부러워 한다. 또한 좋은 눈을 갖고 있는 사람이 드물기 때문에, 건너편 산 봉우리의 새가 날아 올랐는지 아닌지 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드문 것이다. 하물며, 산신으로 변한다는 것은 싸리나무를 뽑는 것이나 산 봉우리의 새가 나는 것을 보는 것보다 훨씬 귀한 재주인데, 어떻게 해서 그러한 재주가 누구에게나 있다고 함부로 말할 수 있는가? 누구나 갖고 있는 재주인데 다만 깨우치지 못해서 산신이 되지 못한다고 하면 그만큼 안타깝고 진기한 이야기로 들리므로 사람이 관심을 갖고 재미있게 여기게 되므로 마음을 끌기 위해 그저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또한 누구든지 갖고 있는 재주라고 하면 누구든지 그 말을 듣고 모여 들게 할 수 있으므로 그만큼 사람을 끌어 들이기 쉽기 때문에 그렇게 말하는 것 아니겠는가? 만약 키가 아주 작은 사람만 산신이 될 수 있다거나, 발가락이 열 둘인 사람만 산신이 될 수 있다고 한다면, 그러한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믿어 보려고 하는 사람은 적을 것이므로 사람을 많이 끌어들 일 수 없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을 솔깃하게 하여 끌어 모을 수 있는 이야기가 없다면 어찌 그 앞에 서서 스승이다, 곧 산신이 될 사람이다 하면서 거들먹거릴 수 있겠는가?”

그렇게 말을 하며, 여러 일을 따져 묻자, 마침내 호랑이 가죽을 두르고 긴 수염을 기른 사람이 말했다.

“그대는 어찌하여 우리가 기도하는 것을 이와 같이 괴롭히는가? 그대가 이 돌 조각을 싫어하는 것 같으면 그대는 이 돌 조각에게 절을 하지 않으면 되는 것 아닌가?”

그리고 경원을 그 자리에서 떠나도록 하니, 경원은 한번 웃어 보이고 그 자리를 떠났다.

이후로 경원은 아사달 근처에서 산신이 되는 방법을 알아 낸다고 하는 사람들을 계속해서 만났다. 그리고 그런 사람을 볼 때마다, 그 사람이 하는 말이 잘못된 점을 찾아 말하고, 그렇게 해서는 산신이 될 수 없다고 꾸짖는 말을 했다.

목소리가 매우 고운 어느 스승이라고 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춥고 더운 것을 견디며 높은 산 바위 위에 앉아 음식을 먹지 않고 굶으며 그저 혼자 고요히 생각하고 또 생각하면, 어느날 갑자기 마음 속에서 산신이 될 수 있는 방법의 깨우침이 떠오르게 된다.”

라고 하면, 경원은 따지기를,

“땅 속에 돌을 묻어 두고, 다른 사람을 불러 다가 그 위에서 땅 아래에 있는 돌이 무슨 색인지 맞혀 보라고 하면, 땅을 파 보기 전에는 십년, 백년을 그 위에서 생각해도 알아낼 수가 없는 법이다. 하물며, 산신이 되는 방법은 돌 색깔을 알아 내는 것 보다 훨씬 더 찾기 어려운 답인데, 어찌 그것이 그저 밥을 굶고 있으면 홀로 생각하는 가운데 저절로 나타날 것이라고 말하는가? 힘써 일하고, 애써 배우기 싫은 자들에게 그저 이상하고 놀라운 방법으로 대단한 것을 알 수 있다고 현혹하는 것 뿐이 아니겠는가? 그렇게 알아낸 것이 씨를 뿌리고 과일 나무를 가꾸는 법을 배우는 것보다 훨씬 더 값어치 있다고 속여 당장 힘든 궁리를 떠나도록 속이는 것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또 사람들이 바친 장신구를 많이 갖고 있는 어떤 스승이라고 하는 사람이 말하기를,

“내가 알려 준 방법대로 10년만 힘을 써 단련하면 마침내 세상이 왜 생겨 났으며 사람이 왜 삶을 사는 지 확연히 깨닫게 되니, 이는 세상의 가장 중요한 것을 깨우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세상에 모르는 것이 없게 되어 하늘을 날고 구름을 움직일 수 있게 되며, 늙지 않고 언제까지나 살 수 있게 된다.”

라고 하였다. 그러자, 경원은 그 앞에 나아가 말하기로,

“10년간 그와 같이 애를 써서 세상이 생긴 이유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도 믿을 수 없거니와, 설령 그러한 이치를 깨닫게 된다고 해도, 왜 그런 깨달음을 얻게 된다고 해서, 왜 저절로 하늘을 날 수 있게 되고 영영 죽지 않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러한 이치에 대해서는 설명해 주지 않고 그저 신기하고 이상한 것 한 가지를 말 해 주었으니 저절로 다른 신기하고 이상한 것도 될 것이라고 얼버무리고 마는 것이지 않은가? 알기 어려운 것 대단한 것 한 가지를 알게 되었다고 해서 이루기 어려운 것이라면 모두 저절로 이룰 수 있다는 법은 없지 않은가? 활을 쏘고 창칼을 잘 휘두르는 영웅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그 영웅이 학식도 풍부하며 노래와 춤도 잘 춘다고 믿는 것은 잘못이지 않은가?”

라고 하였다.

이리하여 얼마간 시간이 지나자, 아사달의 여러 스승이며 산신으로 변하기 위해 애를 쓴다고 하는 사람들은 경원을 매우 싫어하게 되었다.

이에 어떤 스승들은 몰래 사람을 보내어 경원에게 금과 은을 뇌물로 주면서 제발 아사달을 떠나 달라고 하기도 했고, 어떤 스승들은 칼잡이 들을 보내 경원을 해치려고 하기도 하였다.

어떤 스승들은 경원에게 간곡히 빌기를,

“지금 산신이 되어 하늘 위로 올라 가는 방법을 깨우치고, 천년 장수 하는 방법을 깨우치기 위해서, 수많은 재물을 모두 다 써버리고 오직 넝마 같은 옷 한 벌만 남긴 채 아사달에 와서 그저 기도만 하는 사람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비왕(裨王)의 자식이라고 하는 높고 귀한 사람들이 귀한 옷과 많은 재물을 정성을 바친다 하며 불 살라서 잿더미로 만들어 모두 없애고 팔다리에 피가 나는 것도 모르고 그저 스승의 말만 믿고 그 앞에 매일 엎드려 깨우침을 달라고 울부짖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대가 그와 같은 이야기를 하고 다니면서 그 많은 사람들을 욕 보이는 것은 너무나 참혹한 일 아닙니까?”

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래도 경원이 아사달에 머물며 계속 스승이라 하는 사람들을 따지는 이야기를 하고 다니게 되자, 마침내 스승이라 하는 사람들은 같이 모여서 다같이 힘을 모아 경원을 쫓아낼 방법을 찾아내고자 하였다. 그 사람들은 각자 재물을 꺼내어 철과 구리 덩어리를 가득 내어 놓고, 또한 가장 훌륭한 노비 열 사람을 내어 놓으며, 만약 경원을 물리칠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에게 그 모든 것을 다 주겠다고 하였다.

그리고 며칠이 지나자, 곰 가죽으로 지은 아름다운 옷을 입은 사람이 나타났다. 곰 가죽 옷을 입은 사람이 스승이라고 하는 사람들 앞에서 말했다.

“제가 경원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재물과 노비는 하나도 주시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그리고 그 곰 가죽 옷을 입은 사람은 어느 깊은 밤 경원을 찾아갔다.

곰 가죽 옷을 입은 사람이 경원에게 물었다.

“이곳에서 산신이 되는 방법을 알려 준다고 하는 사람들은 대체로 그저 속임수에만 밝아 깨우침을 준다고 하고는 재물을 받아 챙기는 거짓말쟁이들일 뿐입니다. 그대는 왜 참으로 산신이 되는 방법을 깨우치고 있는 사람들을 찾아가 보지 않으십니까?”

경원이 되물었다.

“그런 사람들이 어디에 있습니까?”

곰 가죽 옷을 입은 사람이 대답했다.

“산 속 깊은 곳에 들어 가면, 굴 속에 들어 가 홀로 지내며 깨우침을 얻기 위해 궁리하고 또 궁리하며 다른 하는 일은 없이 하루 종일 마음 속 깊이 생각하는 일만 오래토록 계속 하는 자들이 있지 않습니까?”

경원은 그 말을 듣고 웃었다.

“이곳 산 속에 옛날 단군이 어떤 동굴 속에 들어 가서 고민하다가 산신이 되는 방법을 깨우쳐서 마침내 그곳에서 산신이 되는 데에 이르렀다고 하는 곳이 있다는 이야기를 저도 들어 보았습니다. 그런 곳을 ‘단군굴’이라고 하는데, 이른 바 단군굴이라고 하는 크고 작은 굴이 이 산에 수십 군데가 넘습니다. 그런 굴에 가 보면, 대체로 바위와 흙 사이에 깊게 굴을 파 놓고 기어 들어가서 그 안에서 살면서 옷이 넝마가 되고 얼굴이 검게 더럽혀져 흰 두 눈만 반짝반짝하게 머물고 있는 얼빠진 자들이 굴을 색색깔의 천과 온갖 무늬의 장식으로 꾸며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어리숙한 사람들이 대단한 곳인가 보다 하고  그 앞에 찾아 오면 곡식과 과일을 바치라고 하는 곳입니다. 산신이 된 단군이 수십명이 아니고서야, 이런 것들은 다들 속임수일 뿐이지 않겠습니까?”

그 말을 듣고 곰 가죽옷을 입은 사람도 같이 따라 웃었다. 그러다 한참 웃고 떠드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문득 얼굴 빛이 바뀌더니 목소리가 싸늘해져서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지금 제가 알려드리는 굴은 정말로 기이한 것이 있는 곳이라 하는 굴입니다. 그곳에 들어간 사람들이 나올 때에는 반드시 깨우침을 얻어 세상과 사람이 생겨난 이치를 알고 영영 죽지 않는 방법을 알게 된 것을 본 사람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또한 그 굴은 만들어진 지가 아주 오래되어 그 자체로 이미 선대의 옛 터입니다. 그렇다면 비록 그곳이 실제로 어떤 사람이 산신으로 변한 곳이 아니라 할 지라도 오랜 옛 것을 구경하고 살펴 보는 것만으로 또한 뜻 깊은 일 아니겠습니까?”

경원은 그 말을 하는 곰 가죽옷 입은 사람의 목소리가 무섭게 느껴진다고 여겼으나, 짐짓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고, 그렇다면 한번 그곳의 입구에는 찾아 가 보겠다고 하였다.


다음날 경원이 곰 가죽옷 입은 사람이 알려준 곳을 찾아 산을 올라가면서, 길을 물어 보았다. 깨우침을 얻어 세상 온갖 것을 저절로 얻을 수 있다고 하면서 금은으로 장식한 옷을 입고 대부와 장군처럼 꾸미고 있는 사람에게도 묻고, 다 찢어진 옷을 입고 진흙이 묻은 풀어헤친 머리카락을 하고는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으므로 세상 아무것도 더 바라는 것이 없다고 하는 사람에게도 물어 보았는데, 이들은 하나 같이 말 하기로,

“그 굴에는 대단히 무서운 것이 있다고 하니, 절대 들어가면 안 됩니다.”

라고 하였다.

경원은 더욱 이상하게 여기어 궁금함이 커졌으므로, 그 굴 앞으로 더 빨리 가 보려 하였다. 이에 벼랑을 기어 오르고, 나무 덤불을 헤치고 나아가기를 한 나절을 한 끝에 마침내 어느 굴 앞에 이르렀다.

그 굴의 입구와 그곳에 새겨진 무늬들을 보고 경원이 가만히 홀로 감탄하였다.

“과연 그 곰가죽 옷 입은 자의 말이 틀리지 않구나. 이 굴이 만들어진 것은 대단히 오래된 옛날이니 이 모든 솜씨가 옛 사람들이 남긴 오래된 것이다.”

그리고 다시 또 중얼거리기로,

“그렇다면 이곳에 뱀이나 호랑이가 산다고 해도 이미 다 나이가 들어 죽었을 것인데 왜 이곳에 무서운 것이 있어 들어가면 안 된다고 하는 것인가?”

라고 하였다.

경원이 굴 안으로 들어가 어두운 곳을 헤치고 한참을 기어 가니, 그 가운데에 돌로 된 함이 하나 있었다. 함을 열어 보니 안에는 천을 둘둘 말아 놓은 것이 있었는데 그 두께가 두터웠다. 경원이 그 말아 놓은 것을 조금 풀어 보았는데, 거기에는 글자가 써 있었다. 몇 자 살펴 본 즉 오묘하고 깊은 깨우침에 대해 이야기 해 놓은 것 같았다.

“이 굴에 있는 사람이 산신으로 변하는 술법을 써 놓은 것인가?”

경원은 그렇게 말하고 그 내용을 읽어 보려 하였다.

이 시절에는 글을 아는 사람이 무척 적었으며, 글을 쓰는 것에 대한 일도 그 정묘함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또한 글을 익혀 쓰는 것이 지금과는 많이 달랐으므로, 한 글자 한 글자를 읽고 그 뜻을 익히는 것이 오래 걸리는 일이었으며, 또한 한 구절 한 구절의 글이 담고 있는 이야기 또한 그 양이 무척 많았다.

그러므로 경원은 그 글을 읽는데 여러 날이 걸렸다. 오랜 세월 삭아지고 상한 천을 조심스럽게 천천히 풀어 가면서 전체를 보려 했으므로, 천을 조금씩 풀어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고, 한 글자 한 글자를 읽을 때 마다 그 깊은 뜻을 새기는데에도 오랜 시간이 걸렸다. 경원은 이틀 밤을 지새며 그 글을 읽었는데, 그러느라 수염이 덥수룩해지고 배를 곯아 몸이 휘청거리고 머리가 어질어질 해 졌다. 힘이 없어 경원이 굴 벽에 기대어서 글을 읽다가 문득 새로 뜨는 아침 해와 차가운 이슬이 더러워진 옷에 닿는 것을 알았을 때, 글의 뜻에 대해 한 가지 알게 되는 것이 있었다.

“이 글에는 실제로 산신이 되는 방법이나 세상을 사는 이유에 대해서 씌여 있는 것은 한 마디도 없다. 다만 여러가지 치장하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무슨 표정을 짓고, 무슨 옷을 입으며, 어떤 말투로 말하고, 무슨 목소리를 내라는 이야기만 가득하다. 다만 그 치장하는 방법에 분명히 예스러운 데가 있으며, 또한 고아하고 아름답기는 하다. 이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경원은 그 글을 지니고 다니면 다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것이라 생각하고, 다시 천 뭉치를 돌 함 속에 숨겨 두고, 굴에서 나와 산 아래로 내려 갔다.


이후 경원은 몇 차례 다시 그 굴을 몰래 들락거리며, 계속해서 그 글을 읽어 나갔다. 경원은 먹을 것과 불을 밝힐 것을 싸와서 며칠 동안 굴 바깥으로 나가지 않고 그 글의 내용에 몰두할 때도 있었다. 경원은 글을 차분히 살피며 여러 차례 뜻을 알기 위해 애쓰며 읽다가 자연히 그 글에 나와 있는데로 말투와 목소리를 따라하거나 눈짓과 표정을 흉내내 보기도 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표정을 가다듬는 이야기가 다 끝나고 나면, 그 뒤에는 혹시 그렇게 잘 가다듬은 행색을 고결하게 갖춘 뒤에는 어떻게 하면 산신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가 짧게라도 나와 있을 지도 모른다. 그 끝 대목까지 읽어야 하지 않겠는가?”

경원이 열심히 뒤의 내용까지 읽어 가는 동안 몇 십 일의 세월이 지났다. 그러는 사이에 경원은 그 글의 뜻을 완전히 알기 위해 거기에 나와 있는 이야기를 익히려 하였고, 말투, 목소리, 표정에 대한 것들을 완전히 그 글에 나와 있는대로 온전히 따라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경원이 그 글의 끝을 읽게 되었는데, 끝까지 읽어 보아도 산신이 되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었다. 다만 맨 끝에 몇 글자에 해당하는 내용에 천이 붙어 있어 가려져 있었다. 그러므로 글의 마지막 몇 글자는 읽을 수가 없었다.

다만 그 앞에 설명이 씌여 있었으니,

“삶을 다하여 세상을 뜨기 직전까지는 결코 맨 마지막 가려진 부분은 뜯어 보지 말아라.”

라고 되어 있었다.

경원은 괴이한 곳에 들어 와 오래된 옛 글을 오랫 동안 익혔는데도 오히려 깨달음을 얻는 방법에 대한 이야기는 한 마디도 없는 것을 보고 낙심하였다.

“차라리 커다란 집을 화려하게 치장하고 ‘나는 온 세상의 이치를 다 안다’고 하는 거짓말쟁이 늙은이가 하는 말 중에 한 두 마디라도 들을 이야기가 있는 것 아닌가? 목소리나 말투를 고결하게 꾸미는 방법 따위만 있는 이 글이 무슨 소용인가?”

그리고 경원은 굴 밖으로 나와 다시 밥과 고기와 술을 파는 곳들이 있는 산 아래로 내려 갔다.

그런데, 그때 그저 밥을 먹고 있는데, 밥을 내어 오던 사람이 말하기로,

“그대는 참으로 깨우침을 얻은 사람이 아닙니까? 부디 저를 이끌어 주시어 죽음을 피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외치더니, 그의 발 앞에 엎드려 그 신발에 얼굴을 비비며 간청하는 것이었다. 경원이 놀라 엎드린 사람을 일으키려 하니, 그가 뒤이어 말했다.

“제가 이곳에 머물면서, 산신이 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을 수십 명, 수 백명을 보았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그 눈만 보아도, 그 자가 얼뜨기인지 거짓말쟁이인지 알아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대는 눈빛에 사특함이 조금도 없으며, 얼굴은 한 없이 어질고, 말 한 마디 한 마디를 할 때마다 수백년, 수천년을 배우고 궁리한 듯한 깊이가 있는 듯 합니다. 어찌, 그대야 말로 산신이 된 사람 아니겠습니까?”

경원은 이상하게 여겼는데, 그 후에도 자신을 마주치는 사람들 중에 갑자기 자신에게 감탄하며 칭송하거나, 또는 울면서 깨달음을 나누어 달라고 하거나, 그저 무엇이든 하라는대로 할 터이니 뒤따라 다니게만 해 달라고 애걸하는 이들이 여럿 있었다.

경원은 잠시 수풀 너머로 몸을 피했으나, 그래도 멀리서 경원을 스승으로 모시는 제자 여럿이 둘러싸고 우러러 보며, 기도를 읊조리는 것이 들렸다.

그때 경원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 글에 나와 있던 것은, 정말로 산신이 되는 방법이 적혀 있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볼 때에 산신처럼 보일 수 있는 방법이 적혀 있었던 것이구나. 그 글에 나와 있던 것은 세상이 왜 생겨 난 것인지에 대한 답이 씌여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답을 알고 있는 사람인 듯이 흉내내어 다른 사람이 저 사람은 답을 알고 있을 거라고 굳게 믿게 만드는 방법이 적혀 있었던 것이로구나.”

그리고 나서, 경원이 자신의 제자라고 따라다니는 자들을 보니, 자신의 표정과 말투와 목소리가 극히 절묘하여 사람의 정신을 흐리게 하고 혼을 홀리게 할 정도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하여, 경원의 제자들은 경원이 무슨 뜻의 말을 하는지, 경원이 하는 이야기가 무엇인지는 알지도 못하면서, 다만 그 겉모습과 말의 느낌만을 가지고, 저마다 경원이 한없이 심오하고, 끝없이 신비하다고 감탄하고 있었다.

또한 제자들이 그렇게 감탄하며 얼마간을 지내게 되자, 그 사이에 이치에 맞게 헤아리고 따질 수 있는 마음이 상해 버려서, 똑바로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되었으며, 그저 경원의 묘한 목소리를 듣고 있으면 경원이야 말로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깨우친 사람이라고 더 굳게 믿게 될 뿐이었다. 그리하여, 오직 경원의 말을 따르면 깨우침을 얻을 수 있고 그것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여겼으므로, 재물을 쓰고 몸이 쇠하는 것을 잊고 경원을 따르고자 여기기만 하였다.

경원은 제자들을 보고 이렇게 외쳤다.

“아사달에서 깨달음을 얻었다면서 그럴듯한 말로 속이는 자들을 놀리는 것으로 내가 이름을 떨쳤는데, 이제 내가 가장 들을 말도 없는 속임수를 쓰는 자가 되었으니, 이는 남들을 너무 심하게 놀리고 다닌 죄를 받게 되는 것인가?”

그리고 며칠을 고민하며 지냈는데, 그러다 문득 혼자서 말하기로,

“지금 그 글이 씌어진 천을 갖고 와서, 내가 그 천에 나와 있는 말대로 따라하고 있을 뿐이라고 다른 모든 사람들에게 낱낱이 말하면 어떻겠는가? 내가 익힌 것은 실제로 깊은 깨달음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저 남이 보기에 그럴 듯하게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흉내 내는 재주가 극히 높은 경지에 이른 것 뿐임을 알려 준다면 되지 않겠는가? 이는 또한 마침내 내가 다시 한 번 크게 이기는 것 아니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리고, 경원은 깊은 밤, 몰래 제자들 사이를 빠져 나와, 다시 굴로 돌아 갔다.

경원은 굴 속에 횃불을 켜놓고 함을 열어 글을 읽다가 문득 맨 마지막에 가려져 있는 부분을 보았다. 경원은 어차피 이러한 글이 있다는 것을 널리 까발릴 것이라면, 마지막에 가려진 부분까지 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경원은 그 가려진 부분을 조심스럽게 뜯어 보았다.

그리고 그곳을 열어 보니 거기에는,

“돌 함 아래를 파 보아라.”

라고 적혀 있었다.

경원은 이상하게 여겨, 돌함 아래의 흙을 파 보았다.

그곳에는 두 손바닥을 합친 것 만한 둥글고 판판한 구리 덩어리가 있었다. 그 구리 덩어리에는 빗살로 금을 그어 놓은 잔무늬가 아름답게 돌아가며 새겨져 있었다.

경원은 그것이 무엇인지 이상하게 여기고 있다가, 그것을 뒤집어 보았다. 그리고 경원은 뒤집힌 모습을 보고 말했다.

“이것은 거울이 아닌가?”

그리고 경원이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니, 그 얼굴과 눈짓과 입술의 움직임이 참으로 온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을 깨우친 사람 같아 보였다. 거울 속의 모습은 너무나 믿음직스럽고도 고귀해 보였으니, 아는 것이 너무나 깊어져 세상에 중요한 일들은 모두 알게 되었으며 하물며 남들이 모르던 것들을 모두 알게 되어 이제는 하늘을 날고 짐승의 말을 알아 듣고 날씨를 바꾸고 산을 무너뜨리고 바다를 마르게 하고 달을 부수고 해를 쥐어 짜면서 영영 죽지 않을 수 있는 그 모든 방법까지도 다 알게 된 사람의 모습으로 보였다.

그리하여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를 다시 들으니, “이것이 거울이 아닌가?”라는 말이 모든 할 수 있는 말 중에서 가장 깊은 깨달음을 담고 있으며, 삶의 시작과 끝에 걸쳐져 있는 커다란 문제에 답이 숨겨져 있는 말처럼 들렸다. 그러므로, 경원은 거울 속의 자신을 보고 그 자신이 깨달음을 얻은 것이 분명하다고 믿게 되었다.

경원은 너무나 기뻐서 다른 모든 것을 잊고 팔 다리를 움직여 계속 춤을 추었는데, 그 춤추는 것을 멈출 줄을 몰랐다. 다리에 힘이 빠져 넘어지기도 하고, 힘 빠진 팔을 잘못 움직여 뼈가 상하는 중에도 그저 기뻐서 춤을 계속 추기만 했다. 그러는 사이에 횃불의 불이 번져 굴 속이 모두 타게 되었다.

뒤늦게 경원을 따라 온 제자들과 깨달음을 얻으려고 근방에 모인 온갖 스승이며 학자들이 가득 그 앞에 모였다. 모여 있는 사람들은 모두 불 속에서 춤을 추는 경원의 얼굴을 보았다. 다들 불길 속에서 그 모습이 더 이상 보이지 않을 때까지 경원의 춤추는 얼굴을 보면서 감탄하고 또 감탄하기만 하였다. 그리하여 다들 저러한 얼굴은 정말로 깨달음을 얻은 얼굴이 분명하다고 믿지 않음이 없었으니, 모인 사람들 중에 콩 두 주먹을 받으면 산신이 좋은 운을 내려 줄거라고 말해 주는 속임수꾼조차도 경원은 정말로 깨달음을 얻고 산신이 된 것이라고 굳게 믿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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