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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재식 지상 최대의 내기

2018.05.31 23:5905.31

지상 최대의 내기

곽재식

나를 친구라고 소개한 사람들 중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을 꼽으라면 당연히 한승희다. 내가 친구라고 소개한 사람들 중에서 꼽는 것 보다는 나를 친구로 소개한 사람들 중에서 꼽는 것이 더 공정할 것이다. 내가 친구라고 소개할 수 있는 사람들 중에 꼽아 본다고 해도 사실 한승희 보다 더 부유한 사람은 없다.

나는 한승희를 대학 입학과 함께 만났다. 나와 한승희는 같은 학교 생물학과의 신입생이었다. 그 외의 공통점은 많지 않았다. 내가 시험을 치르기 위해 지루한 고등학교를 부지런히 다니고, 알찬 시험 점수를 받고, 그 시험 점수를 빡빡한 배치표에 맞추어 본 결과로 이 대학의 생물학과에 오게 된 것과 달리 한승희는 그 곳에 온 이유부터가 흔한 것이 아니었다. 다름이 아니라 한승희는 아주 어릴 때부터 생물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고 싶었다는 것이다.

한승희는 다섯 살때 다른 많은 다섯 살 짜리 어린이들과 마찬가지로 공룡이 매우 멋진 동물이라고 생각했고, 공룡에 대해서 새로운 것을 알아 가면서 인생을 살면 무척 재미있겠다고 결심했다. 많은 어린이들이 학교에 가고 사춘기를 겪고 성장하면서 많은 지저분한 일을 통과하는 동안 그 결심을 버리게 된다. 그러나 한승희는 거의 아무런 지저분한 일을 겪지 않고 고등학생이 되는 위업을 달성했다. 한승희는 참사랑을 받고 자라나고 있는 알파 산업 창업주의 증손녀였으며, 이러한 배경이 한승희의 어린 시절을 돕는 방향으로 작용한 까닭이었다. 그 때문에 한승희는 입시와 진로를 고민하는 나이가 다가 와서도 공룡을 연구하는 학자가 되고 싶다는 꿈을 거의 그대로 보존하고 있는 상태였다.

그러나 한승희는 열렬한 압박과 권태에 묶인 무기력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입시 위주의 교육 체계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 나는 그렇지 않았다. 시험 범위에 맞춰 밤새 문제집을 풀고 그 다음 날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째깍거리는 시계를 보며 시험지를 재빠르게 풀어 내느라 조마조마하게 사는 것이 나는 삶에서 굉장히 중요하다고 생각에 빠져 있었다. 한승희는 그런 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아도 되는 삶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한승희는 여전히 성실하고 선량한 학생이었다.

삶, 학교, 시험지를 대하는 태도는 나와 전혀 달랐지만, 남을 조롱하거나 세상을 우습게 여기는 태도를 갖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교사들에게 친절한 표정을 짓고 학교에 머물러야 하는 시각까지 꼬박꼬박 끈질기게 앉아 있는 것에는 오히려 나보다도 더 능숙했다. 대학시절 몇몇 학우들은 그런 한승희의 성격을 두고 그녀는 워낙 곱게 자라서 세상 험한 것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지금 나는 오히려 한승희가 아닌 다른 모든 사람들의 삶을 그녀가 측은히 여길 줄 알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의심하고 있다.

나는 한승희의 그러한 성격이 그 부모에게서 물려 받은 것이라고 보고 있다. 알파 산업의 회장은 한승희의 어머니였는데, 회장님, 그러니까 한승희의 어머니께서는 옛날 환락과 정열의 20대를 뻐근하게 보낸 결과, 결혼할 남자에 대해서는 단 두 가지 특징만 따지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되셨다고 한다.

그 두 가지 중 첫번째는 선량한 마음이었고, 두번째는 뒤에서 보았을 때 어깨 근육의 아름다움이었다고 한다. 어머님께서는 알파 산업을 여든 배로 성장시킨 수완가 답게 그 둘을 완벽하게 갖고 있는 남자를 찾아 내고 자신의 배필로 삼는데 성공했다. 그러니까, 한승희의 선량함은 그 아버지의 선량함을 물려 받은 것이고, 한 편으로는 그런 선량한 사람을 찾아 다닌 어머니의 마음을 같이 물려 받은 더 새로운 선량함이었다. 게다가 한승희가 완벽한 어깨선을 갖고 있는
것 역시, 부모에게 물려 받은 유전자의 간접 영향은 아니었을까 나는 짐작한다.

따라서 한승희는 뇌물이나 서류 조작 등의 방법을 거치지 않고 자신이 진학하고 싶은 학과에 갈 방법을 찾고자 했다. 그녀에게는 그 증조부가 갖고 있던 기발한 발상을 떠올리는 재능도 충분히 있었던 것 같다. 한승희는 어머니께 말씀 드려, 몽골, 카자흐스탄, 미국에서 공룡 화석을 발굴하는 연구팀 여덟 곳에 자금을 지원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여덟 곳의 뛰어난 연구팀 중 한 곳이 티라노사우루스 렉스의 깃털 화석이 발견 될 기미를 찾았을 때, 연구원들은 매 시간 꼬박꼬박 진행 사항을 한승희에게 보고하도록 했다. 그리고, 그 포악한 육식 공룡의 깃털 화석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내기 직전에 한승희는 비행기를 타고 사막으로 날아가 직접 흙을 털고 화석을 꺼내는 일을 거들었다.

그 정도면 우리 학교 생물학과 입학 원서에 써 넣기에는 충분히 그럴 듯한 경험이었다. 다양한 경험을 해 본 창의적인 자질이 있는 학생을 뽑아야 한다는 구호에 어울리지 않음이 없었다. 실제로 우리 학교 교수들 중에는 지질학과 교수들까지 포함해도 티라노 사우루스 렉스의 화석을 실제로 발굴해 본 사람이 아무도 없었고, 깃털 화석은 심지어 실제로 본 사람조차도 아무도 없었다. 그 정도면 학문적으로도 고등학생에게 기대하기에는 출중한 성과였다.

그렇게 해서 한승희는 창의성 특별 전형이라는 방법을 통해 나와 같은 과목을 듣고 같은 과제를 하게 된 것이다.

나는 한승희를 처음 본 날과 그 시각을 지금껏 잘 기억하고 있고, 처음 나누었던 대화가 무엇이었는지도 기억하고 있다. “여기 자리 있나요?” “아, 앉으세요.” 그보다 조금 더 중요한 기억을 돌아 본다면, 생화학 강의 시간의 몇 초 간이다.

생화학 강의를 맡았던 교수는 지독하게도 지루하게 이야기를 늘어 놓는 편이었고, 때문에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무도 그 교수의 말을 듣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그 교수는 가끔 천 마디에 한번 꼴 정도로 아주 괴상하게 웃긴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주절거리고 넘어 가는 때가 있었다. 너무나 지루함에 깊게 파묻혀 있는 강의였고, 지루함 자체가 공기 속에 유독 가스처럼 퍼져서 강의실 전체를 메우고 있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그 웃긴 말이 실제 웃음으로 피어 오르지는 못했다. 실제로 아무도 소리 내어 웃는 사람도 없었고, 심지어 그 말을 한 교수 스스로도 아무런 웃음기 없이 그냥 별다를 것 없는 말을 했다는 것처럼 다음 이야기로 넘어 갔다.

그런데 나는 반쯤 졸면서 그 이야기를 듣다가 그 이야기가 굉장히 우습고 해괴한 말이라는 것을 갑자기 깨달았다. “으하하” 소리 내서 웃으려는데, 아무도 웃고 있지 않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강의실 안의 축 처진 분위기는 웃음이라는 것을 생각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에 가까웠다. 나는 급하게 웃음을 멈추고 참았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 보니, 대부분의 학생들은 몇 초 전의 나처럼 졸고 있었고, 몇몇 의욕적인 학생들은 또한 웃음과 관계 없이 생화학에 대한 학문적 열정에 불타는 눈동자를 보여 주고 있을 뿐이었다.

어떻게 그 말을 듣고 아무도 안 웃을 수가 있지? 나는 아주 이상한 말이 지나갔는데도 아무렇지도 않은 양 조용한, 적막 속의 강의실이 환상 속의 한 장면 같다는 기분까지 들었다.

그런데 그러다가 마찬가지로 주위를 둘러 보는 한승희의 눈과 마주쳤다. 한승희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바로 알 수 있었다. 그녀도 나와 똑같은 느낌을 느끼고 있었다. 그녀의 기울어진 눈썹은 “이게 도대체 뭐야?”라고 말하고 있는 것 같았고, 미소로 들어간 보조개가 더 큰 웃음을 숨기고 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나는 그녀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며 잠깐 눈짓을 하며 나도 같은 심정이라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렇게 2초 정도, 우리는 표정을 주고 받았다.

삶을 살다 보면 그런 몇 초의 시간이 일평생을 바꿀 때가 있다. 장난스러운 표정을 잠깐 주고 받는 그런 2초간, 3초 간이 그 학기 중에 몇 번 더 찾아 왔다. 한번은 도저히 웃음을 참지 못해 무슨 급한 일이 있는 것처럼 갑자기 강의실 밖으로 뛰쳐 나와서, 복도 끝 자동판매기 앞에서 둘이 같이 참다 참다 못 참은 웃음을 후련하게 터뜨리기도 했다. 지금 돌아 보면 그 정도로 웃긴 이야기도 아니었는데, 웃음을 참아야 한다는 것이 더 사람을 웃기게 만들어서 그랬는지, 왜 그랬는지 모를 일이다.

한승희와 내가 그렇게 많이 친했던 것은 아니다. 모든 때마다 항상 잘 어울렸던 것도 아니다. 이른 아침 강의 시간 전에 잠이 덜깬 눈으로 구내 식당에서 아침을 먹고 있을 때, 우연히 만나 정말 졸려서 죽겠다는 한탄을 같이 하면서 농담 따먹기를 할 때는 죽이 잘 맞았지만, 한편 초저녁에 나초 과자 봉지를 들고 학교 연못가에서 맥주캔을 따고 있는 내가 한 잔 하는 게 어떠냐고 하면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거절했다. 그러면서도 그녀가 거절하는 태도는 대단히 우아했다. 중간고사는 끝났는데 딱히 할 일은 없지, 겨우 네 개 묶음에 얼마라는 싸구려 맥주를 들이 밀며 “안 딴 캔 있는데 너도 마실래?”라고 내가 말했는데, 그것을 거절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불가침 조약을 거절하는 영국 여왕의 연설 같았다.

그 무렵의 하루하루란 언제나 피곤하고 언제나 잠이 부족한 시간이었다. 한 사흘만 그냥 마음껏 푹 잠 자 보면 좋겠다. 한번 푹 자고 싶은 만큼 잘 수 있는 날이 언제나 올까, 하는 상상을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른다. 그러나 매일이 알 수 없는 신비로 펼쳐지던 날이기도 했다. 전화기가 울리고 새로운 이야기 몇 마디만 전해져 오면, 뭐라고 대답할까, 혹시 나는,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걸까 밤이 깊도록 상상에 빠질 수도 있던 날이었다.

초여름 쯤이 되었을 때, 어느 새벽에 그녀는 나에게 메시지 하나를 보냈다. 금요일 저녁에 한 다섯 시간은 자리에 버티고 있어야 하는 좀 지루한 행사가 하나 있는데, 혹시 같이 가 줄 수 있겠냐는 것이었다. 원래 그 행사에 가기로 한 친구가 두 명이 있었는데 급한 일이 있어서 못 가게 되었다는 이야기였다. 일본에 가 있는 그녀의 동생을 급히 불러서 한 명은 채웠는데, 나머지 한 명이 마땅치 않다는 것이었다. 좀 힘들고 급한 부탁이라도 할만한 친구가 그녀에게 나 말고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그 친구들의 약속을 그녀가 이 약속 때문에 거절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시 부탁하기는 민망하다고 했다.

새벽 두 시 반에 온 연락이었고, 한참 잠을 자다 말고 메시지를 본 것이었지만, 그 말을 보는 순간 나는 잠이 싹 깼다. 가야지. 가야지. 당연히 가야지. 다섯 시간이 아니라 오십시간을 버티고 잇어야 하는 행사라도 가야지. 아니, 오히려 오십시간이나 오 일을 버티고 있는 행사라면 더욱 더 가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일단 답을 하지 않기로 했다. 새벽 두 시 반에 연락을 했는데 바로 대답을 하면 너무 할 일 없고 한가한 사람으로 보일 것 같았다. 나는 괜히 답을 안 하고 잠깐 버티기로 했다. 그러면 언제 대답을 하지? 보통 아르바이트하러 나가려면 다섯 시 반에 일어나니까, 그때 대답을 할까? 그것도 너무 이른 시각 아닌가? 사람이 눈 뜨자 마자 바로 메시지를 읽고 아침에 일어나서 제일 먼저 생각하고 하는 일이 그 문자 메시지에 답하는 거라면 그것도 너무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거기에만 몰두하고 있었던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그러면 한 두 시간 쯤 지나서? 일곱 시 몇 분 정도? 뭐라고 대답할까? 그냥 무조건 “좋지. 갈게.”라고 대답하면 그것도 너무 내가 세상 다른 일 신경 쓰는 것 없고, 하자는 대로 다 하는 사람 같게만 보이잖아. 뭔가 조건을 걸 거나 나도 고민 끝에 대답했다는 느낌을 줄 수 없을까?

나는 놀라운 의지력으로 대답을 하지 않고 다음날 아침 일곱 시까지 기다렸다. 정확하게 7시 00분에 대답을 보내면 일부러 7시까지 기다린 티가 날까봐 1분 정도를 더 기다린 뒤에 7시 1분 00초에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밥은 주냐?”

잠시 후 그녀는 밥은 준다고 답을 주었고, 나는 그렇다면 그 행사에 가겠다고 했다.

그 행사란 것은 어느 투자가의 자식이란 사람이 딱히 할 일이 없어서 자기 이름을 대표로 걸어 놓은 자선 단체의 후원 행사였다. 그런데 그것이 몇 년을 지나는 사이에 그것이 비슷한 수준의 갑부 자식들의 친목 모임으로 발전했고, 그것이 어쩌다 보니 꽤 중요한 연례 행사가 된 것이었다. 저녁 동안 요리사들이 음식 경연 대회를 하고 이런저런 여흥거리를 즐기면서 자선 후원금을 모으는 것이 행사의 중심이었다. 다만 행사에 참석하는 사람들이 그 보다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동안 그곳에 모이는 사람들끼리 서로 얼굴을 익히고 성격과 버릇을 탐지하고 친해지거나 누군가의 험담을 하거나, 혹은 험담을 하며 또다른 사람과 친해질 기회를 찾는 것이었다. 알고 보니, 갑자기 참석하지 못하겠다고 한 그녀의 친구 둘은 정권이 바뀐 뒤에 부모가 탈세혐의로 구속되는 바람에 몸을 피하고 있는 것이었다.

금요일 오전에 학교에서 한승희를 만나자 한승희는 드레스코드를 알려 주며 마땅한 옷이 있는 지 나에게 물어 보았다. 나는 한 사흘만 더 있다면 그럭저럭 비슷하게 맞출 수 있을 것 같기는 한데, 지금은 세탁소에 정장은 맡겨 놓은 상태이기 때문에 곤란하다고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자기가 갑자기 부탁했으니 옷은 어떻게든 마련해 보겠다고 했다. 그녀는 옷과 머리 모양을 골라 주는 일을 하는 예술가에게 전화를 걸었고, 전화 저 쪽에서는 너무 급하게 연락을 해서 시간을 낼 수가 없겠다고 했다. 그녀가 난처한 목소리를 들려 주자, 이윽고 그 예술가는 그러면 잠깐 기다리라고 하더니 무엇인가 대안을 찾아 주었다.

우리는 그날 점심 때 그 대안을 만났다. 요즘에는 조금 인기가 시들해져서 웃긴 역할로 주로 먹고 살고 있는 중견 배우 한 사람이 한승희와 나를 찾아 왔던 것이다. 한승희는 이미 그 배우와 알고 지내는 사이인 것 같았다. 배우는 이렇게 말하며, 자기 차에 우리를 태웠다.

“하여간 그 사람도 좀 너무 해. 아니 배우가 자기 아는 사람한테 스타일리스트를 보내는 경우는 있어도, 스타일리스트가 자기 바쁘다고 배우를 보내는 경우가 어딨어?”
“어지간한 스타일리스트보다 워낙 감이 좋으시고 잘 아시니까 그러시는 거죠.”

배우는 나와 한승희를 데리고 옷 가게 몇 군데, 구두 가게 몇 군데, 미용실 몇 군데를 돌며 나를 단장시켰다. 배우는 내가 새 옷을 입거나 머리 모양을 바꿀 때 마다, 거기에 어울리는 표정을 거울 앞에서 지어 보라고 강조했다. “사람이 표정이랑 목소리랑 옷이 어울리는 게 참 중요해.” 그렇게 말하면서 자기가 출연했던 무슨 영화에 어떤 장면에 나오는 누구 표정처럼 해 보라라든가, 자기가 출연했던 무슨 연속극의 누구 같은 얼굴을 지어 보라고 했는데,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자기가 나왔던 영화의 추억에 잠깐씩 도취되는 듯 보였다.

배우가 골라준 옷을 챙겨서 나와 보니, 오후 햇살이 한적한 거리를 채우고 있었다. 초여름 햇빛은 너무 강해서 검은 아스팔트가 어쩐지 희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배우는 우리 둘이 같이 나란히 서 보라고 했다. 그리고 고개를 강하게 끄덕였다.

“좋네! 그러면 저녁에 잘 하시고. 다음에 내 영화 나오면 꼭 극장에서 보고.”

배우가 떠나가자 우리는 그 길을 같이 잠깐 걸었다.

워낙 시끄럽고 급하고 소란스럽게 이 옷의 느낌이 어쩌니, 이 구두의 기분이 어쩌니 하는 이야기만 한참 떠들고 난 이후다 보니, 괜히 우리는 아무 말 없이 멍한 느낌이 되었다. 같이 걷는 중에 잠깐 어두워졌다가 다시 잠깐 밝아졌는데 나는 흰 뭉게구름이 태양을 지나친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를 하지도 않았다.

헤어지면서 그녀는 저녁이 되면 자기가 나를 데리러 올 거라고 했다. 나는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곳을 알려 주었고, 그녀는 아는 길이라고 했다. “그래 그러면 있다가 저녁에 보자. 정말 고마워.” 그녀는 웃으며 한 손을 들어 보였다.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옷을 갈아 입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나는 혹시나 옷 갈아 입는데 시간이 오래 걸리면 늦을 수도 있겠지 싶어 시간을 약간 넉넉히 잡아 놓고 움직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골목길 앞에 나와서 그녀가 오는 것을 기다렸다. 해가 긴 날이었기 때문에 제법 늦은 저녁이었는데도 아직 햇살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왜 이렇게 차려 입었어? 어디 면접 보러 가?” 얼굴을 알고 있는 그 동네 상인 몇몇이 그렇게 말을 걸고 지나갔다. 뭐라고 짧게 대답하면 좋을 지 궁리하는 동안 그냥 웃고 있기만 했다.

8분 정도 기다렸을 때, 그녀의 차가 나타났다. 그녀는 항상 그렇듯이 직접 운전대를 잡고 있었다.

“어? 일찍 끝났어? 그러면 연락하지. 나는 일부러 시간 딱 맞춰 온 다고 요 앞에서 차 세워 놓고 기다리다가 왔는데. 자리가 앞으로 당겨져 있어서 다리 불편하겠다. 잠깐만 뒤로 움직여 줄게.”

나는 고개를 숙여 운전석의 그녀를 쳐다 보았다. 그때 문이 열리고 저녁 햇빛이 갑자기 차 안으로 들어 왔다. 그래서 그녀가 잠깐 눈이 부셔 눈을 찡그렸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 빛 때문에 그녀가 입고 있던 흰 옷은 오렌지색으로 보였다. 그녀는 데이지 꽃 모양이 가운데에 있는 목걸이를 하고 있었는데, 그 꽃 모양의 색깔이 그녀의 얼굴 색과 똑같아 보였다.

“아, 나는 또 빨리 끝났다고 말하면 네가 너무 급하게 오려고 할 까봐. 안전운전 해야지.”
“그렇지. 안전운전.”

평소에는 별 재미 없는 잡담도 그냥 길게 했는데, 그날 저녁에는 한 동안 말을 별로 하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하면 재밌을까?” “아무 관심을 안 가질 화제 아닐까?” “되게 재미 없는 말만 한다고 생각하면 어쩌지?” 그런 생각만 몇 차례나 했다.

“저녁 행사라고 하는데 너무 날씨가 좋고 밝아서 저녁 느낌이 거의 안 난다, 그치? 거기 음식이... 경연 대회라고는 하는데 꼭 다 맛 있는 건 아냐. 정말 진짜 맛 없는 것도 있어. 그런데 거기 무슨 버섯 샐러드라고 하면서 매년 출품하는 요리사가 한 명 있는데 그건 정말 맛있어. 꼭 먹어야 돼. 어떨 때는 사람들이 막 줄 서서 먹어.”

평소에 내가 말을 조금 더 많이 하는 편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날 저녁에는 그녀가 더 말을 많이 해주었다.

우리가 탄 차는 곧 도심에 솟아난 작은 산기슭의 도로로 접어 들었다. 나무들이 이상할 정도로 가득 우거져 있었고, 그 나뭇잎 사이로 멀리 산 언덕을 감싸고 있는 도시 건물들의 불빛이 깜빡이며 지나가는 것이 보였다. 미처 모르는 사이에 주변은 한결 조용하고 어두워져 있었다. 이곳은 다닥다닥 끝없이 붙어 있는 집들의 바다 가운데에 고요히 솟아 있는 섬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숲 길을 지나 다시 트인 곳으로 들어 서자 그곳에는 호텔 건물이 있었다. 치장이 없는 반듯한 네모 모양의 건물이었지만 서울 땅값을 두려워하지 않은 널찍한 부지를 보면 고풍스러운 느낌도 있었다. 그녀는 호텔 입구로 차를 대었다. 직원이 차 문을 열어 주니, 건물 안 백열등의 황색 빛이 유리마다 반사되고 있는 것이 선명히 보였다.

“저 쪽이야.”

그녀는 우리가 가야 할 방향을 안내했다. 행사를 위해서 야외와 연결 되어 있는 뷔페 식당과 호텔 뒷 마당을 통째로 빌린 것 같았다. 호텔 바깥의 조용한 숲 공기와 다르게 그곳에는 오가는 사람이 제법 있었다. 나는 나와 그녀의 구두가 바닥을 딛는 소리가 울려 퍼져 그 사람들의 소음에 뒤섞이는 것을 들었다. 듣기 좋은 소리라고 생각했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들과 그 옆에서 더블베이스와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다. 무슨 노래인지 알 수 없는 피아노 소리는 공간 속에 울렸고, 알 수 없게 흘러다느닌 그 많은 사람들의 말소리에 섞여서 화음을 이루는 듯이 들렸다.

내가 무거운 유리문을 열고 그녀가 문 앞에 서 있던 직원에게 “안녕하세요. 잘 지내셨어요?”하고 인사하는 것을 마지막 절차로, 우리는 행사장에 도착했다.

“같이 온 친구 분은 한 분이신가 봐요?”
“예.”

그것 말고 달리 이름을 확인하거나 초대장을 보여 주어야 하는 것은 없었다. “잠깐만요.”라고 하더니 우리 둘의 사진을 한 장 찍을 뿐이었다.

“잘 나온 사진이면 연감에 실려요.”

다양한 옷차림의 요리사들과 하얀 식탁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안 쪽에는 갖가지 모양의 옷차림으로 단장한 온갖 참석자들이 흩어져 있었는데 그런데도 그들은 모두 조립해 완성한 레고 블럭처럼 잘 어울려 보였다. 내가 내 옷차림을 내려다 보니, 나도 거기에 어울리는 모습이 되어 있었다.

“어떤 쪽으로 앉을까? 저녁이라서 좀 시원해진 것 같으니까 건물 바깥에 앉으면 어때?”
“모기 있으면 어떡해?”
“네가 그때그때 재빨리 잡아야지.”

그녀는 나를 돌아 보고 웃었다. 나는 뭐라고 재밌는 말로 대답할 생각이었는데 말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앞서 걷던 그녀와 나 사이를 껄껄거리며 큰 소리를 내는 중년의 정장 차림 남자들이 지나 가면서 가렸다. 나는 빠른 걸음으로 다시 그녀의 뒤를 따라 잡았다.

자리에 앉아서 나는 그녀를 보았다. 그녀는 누군가를 찾는 지 사람들 사이를 보고 있었다. 나는 누구를 봐야 하는 지도 모르고 그녀가 보는 방향을 같이 보았다. 여러 가지 소리가 들렸다. 들뜬 목소리로 유난히 크게 웃는 목소리가 들리는가 하면, 작지만 빠르게 이어지는 목소리도 있었다.

“안녕하세요?”
“어, 승희! 올 해는 처음 보네.”
“잘 지내시죠.”

그녀는 누군가를 만날 때 마다 반갑게 인사했다. 가끔 내 쪽을 가리키며, “제 친구에요”라고 소개해 줄 때도 있었다. 나는 그녀가 최대한 자연스럽게 보일 수 있도록 나름대로 그곳에서 가장 어색하지 않은 사람 흉내를 내려고 애썼다. 얼마나 내가 그 흉내를 잘 냈는지는 모르겠다. 나를 보는 그녀의 눈은 평소와 같아 보여서, 예를 들면, 어제 아침 망한 과제 점수에 대해 나와 떠들 때와 다를 바 없어 보였다.

“어, 승희랑 같은 학교요? 그럼 전공이 뭐에요?”
“같은 생물과입니다.”
“그래요. 관심 있는 분야나 좋아하는 것 있어요? 요즘에는 유전자 가위 기술 같은 거 많이 이야기하던데.”
“아직 그냥 학생이라서 잘 모르죠 뭐. 저는 신경 인지 감각, 감성 공학, 그런 쪽이 재밌어 보이더라고요.”
“이름은 재밌게 들리네요. 요즘에 그쪽으로 사업 시작한 데가 있나? 아, 그럼 졸업하고 나서는 그 쪽으로?”

승희가 소개해 준 한 젊고 잘 생긴 남자는 나에게 그렇게 물었다. 내가 말한 생물학 분야의 기술을 이용해서 어떤 기업의 새로 시작하는 사업을 이끌거나, 내가 그런 기술을 이용하는 “스타트업”을 차릴 것인지 묻고 있었다. 나는 정직하게 대답했다.

“대학원 가려고요.”

대화가 끊어지면 나는 주위를 구경했다. 식탁마다 올려 놓은 꽃도 참 아름다운 것들이었다. 아무도 식탁 위의 꽃을 쳐다 보는 사람은 없는 것 같았지만 누군가 정성을 들여서 고르고 행사 전에 싱싱한 것을 골라 와서 꽂아 둔 것이었다. 실내의 깊은 곳에는 일부러 좀 어둡게 해 두어 아늑한 석유 램프를 켜놓은 것처럼 해 둔 곳이 있었고, 한편으로는 샹들리에 아래에서 반짝거리고 있는 아이스크림 진열장도 있었다. 다시 뜰 쪽으로 나오면 수영장이 보였다. 아직 사용할 날씨는 아니었지만 맑은 물이 가득 채워져 있었다. 주위의 빛을 반사하도록 해 둔 모습이어서, 여름 저녁, 시원한 바람이 불 때마다 수면이 흔들리면 거기에 비친 흐릿한 사람들의 모습도 지워졌다 나타났다하며 움직였다.

그녀가 말했던 대로 정말 행사는 길게 이어졌다. 가끔씩 연설 같은 것을 하는 사람이 중간에 있었고, 그러면 사람들은 박수를 치기도 하고 유리잔을 들고 술을 마시며 같이 웃기도 했다. 웃긴 재담을 하는 사람, 간간히 무슨 퀴즈나 게임을 진행하는 사람도 행사장 중앙에 올라 왔다 내려 갔다.

그 사이사이에 우리는 계속 이 음식 저 음식을 구경하며 다녔다.

“이 샐러드에 양상추 잎 모양은 뭘 나타낸 것 같애?”
“식물로 변한 쥐포... 같은 거?”
“쥐포가 왜 식물로 변하는데?”
“그런데 정말 그런 모양으로 만들었잖아. 쥐포가 식물로 변했다는 게 뭘 상징하는 거라든가 그럴 수도 있지 않겠어?”
“아. 현대사회의 각박한 현실 속에서 바다를 마음껏 헤엄치던 물고기조차도 그 동물성을 모두 다 잃고 식물의 형태로 박제되는 운명을 나타낸 것이다.”

그리고 그녀는 일부러 소리를 내어 웃었다. 나도 같이 웃었다.

밤이 깊어 가면서 그녀와 나는 점점 더 많이 웃게 되었다. 음악 소리는 좀 더 커졌다. 실제로 얼마나 따분해 하는 지는 모르겠지만 얼굴에 지루함을 드러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들 한결 행복해 하고, 또 한결 멍청해지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싱글거리며 술에 취해 벌건 얼굴로 누구에게나 멋지다고 반갑다고 하는 사람, 갑자기 들뜬 큰 목소리가 되어 먼 곳에서도 고개를 돌려 쳐다 보게 만드는 사람이 나타나기도 했다. 그녀의 초등학교 선배라는 사람이 우리에게 이런저런 재미난 이야기를 건네더니, 문득 춤을 가르쳐 주겠다고 하고는 그녀와 나에게 이리저리 돌고 발을 굴러 보라고 하기도 했다.

시간이 너무 지났다는 생각이 들었을 무렵, 다시 중앙에 나타난 사회자가 외쳤다.

“그러면, 지금부터 보물 찾기를 시작하겠습니다. 오늘은 기부액수가 많아서 상금도 무척 많습니다.”

사람들은 아이스크림 진열장 옆에 있는 긴 탁자를 향해 저마다 걸어 갔다. 거기에는 가지런히 접힌 카드가 꽂혀 있었다.

“뭘 찾는 보물찾기야?”
“저 카드에 적힌 것. 그게 보물이야. 카드마다 뭘 찾아야 하는 지 적혀 있고 점수가 있는데, 그 카드에 적혀 있는 걸 먼저 빨리 가져 오면 그 점수를 따는 거야. 이기면 상금도 받고.”
“상금이 얼만데?”
“제법 되지. 점수별로 뭐 주는 것도 있고. 올해에 모인 기부금은 자기 이름으로 내게 되기도 하고.”

보물 찾기 카드에 적혀 있는 것은 짖궂은 장난 같은 것들이 많았다. 예를 들면 “2층 쓰레기통 맨 밑바닥에 있는 것”이나, “호텔 입구에서 두 번째 나무 꼭대기의 나뭇잎” 같은 것이었다. 잘 차려 입은 남녀들이 바쁘게 뛰어 가서 먼저 쓰레기통을 뒤지려고 다투거나, 턱시도를 입은 은행가가 나무를 타는 모습을 보여 주기를 원하는 것이었다.

한편 구하기 어려운 것들은 그만큼 점수가 높았다. 예를 들어, “만화 주인공이 그려진 속옷” 같이 누군가 재빨리 시내로 내려가 사 오기만 하면 되는 것은 점수가 낮았고, “황금 1kg”이라든가, “살 1파운드” 같은 것은 제법 점수가 높았다.

“뭐 있는지 보자.”
“나는 진짜 매년 1점짜리도 따 본 적이 없어. 쉬운 거라도 해 보려고 하면 항상 먼저 하는 사람이 나타나더라고.”

나는 그녀와 함게 문제가 적혀 있는 카드들을 둘러 보았다. 이것저것 살펴 보며 궁리하고 있는데, 샹들리에 바로 아래쪽에서 상기된 표정으로 전화를 붙잡고 소리 지르는 사람이 보였다.

“어, 형. 난데. 지금 올 수 있어? 시간 되지?”

나는 그를 쳐다 보았다. 그는 전화기를 붙들고 계속 떠들고 있었다. 그의 눈이 커졌고, 계속 더 커졌다. 그녀가 나에게 말했다.

“쟤는 이거 이기려고 매년 아주 목숨을 걸어요. 재미로 하는 거 아니야? 뭘 저렇게 까지 열을 내고 이기려고 해?”
“저 사람이 이긴 적도 있어?”
“몇 번 있지. 쟤는 진짜 이기려고 별 짓을 다 한다니까.”

얼마 후 전화기에 소리를 지르던 남자는 호텔 바깥으로 뛰어 나가더니, 무서운 속도로 시내를 질주해서 돌아온 자신의 자동차를 맞이하는 것 같았다. 그 남자는 그 자동차에서 내린 사람의 손을 붙들고, 행사장 안으로 끌고 들어 왔다. 그 남자와 함께 나타난 사람은 5년 전 쯤부터 인기가 확 없어진 어느 나이 든 코미디언이었다.

남자는 사회자에게 자기가 들고 있던 카드를 내밀었다. 사회자가 말했다.

“보물은, ‘참석자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 입니다.”

사회자의 말을 들은 사람들 중 몇몇 사람들이 행사장 바깥 쪽에 있는 흰 옷을 입은 노인을 돌아 보았다. 그 노인은 오랫동안 이 모임에 참가해 온 사람으로 긴 시간 이곳 참석자들의 절반쯤과는 알고 지내는 사람이라고 했다. 그녀도 그 노인과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보니, 이 노인은 마침 금년에 은퇴를 한다고 했다. 내 짐작에는 아마 카드에 “참석자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보물이 있는 것은, 아마도 그 노인을 가리키는 것이지 싶었다. 그러니까 주최 측에서 노인의 은퇴를 기념하기 위해 모두들 앞에 설 자리를 잠깐 마련해 주기 위해 일부러 준비한 듯했다.

그러나 전화에 큰 목소리로 말하던 남자는 자신이 데려온 코미디언을 사회자 앞에 세웠다.

“이 분 모르시는 분 없으시죠. 형, 그거 한 번 해줘요. 유행어 있잖아요.”

남자가 코미디언에게 말했다. 인기를 잃은 이후 그 코미디언은 닥치는 대로 온갖 싸구려 방송이라는 방송에는 다 출연하고 있었다. 그 방송들을 재미 있게 보는 사람도 없었지만 그를 모르는 사람은 정말로 아무도 없었다. 그러니까, 그 남자는 자신이 데려온 코미디언이야말로 참석자들 모두가 알고 있으니, 절대적으로 “참석자들이 가장 많이 알고 있는 사람”이라는 주장이었다.

코미디언은 6년 전에 유행했지만 어제 방송에서도 자신이 또 써먹었던 유행어를 선보였다. 사람들은 웃었고, 박수를 쳐 주었다. 흰 옷을 입은 노인도 웃으며 박수를 치고 있었다. 사회자는 당황한 기색 없이 남자를 칭찬하고 보물을 찾았다면서 점수를 기록했다.

다만 그녀의 표정은 심통이 난 기색이었다. 그녀 어머니의 회사와 그 남자 가족의 회사 사이에 긴 경쟁 관계가 있고 그것 때문에 이런저런 다툼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지만, 그날 밤 그녀의 그 얼굴이 그것과 관계 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는 묻지 않았다. 그냥 그녀를 즐겁게 하기 위해 더 신기하고 재밌는 일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처럼, 일부러 더 밝은 목소리로 카드에 적힌 다른 보물들을 더 찾아 읽었다.

“이건 몇 점이야?”

나는 카드 하나를 집어 들었다. 카드에는 “다이빙 대회 메달리스트”라고 적혀 있었다.

“뒷면에 점수 적혀 있잖아.”
“그러면, 이 점수면, 아까 걔를 이길 수 있어?”
“그렇지. 더 점수가 높으니까.”
“그러면 오늘 우승할 수도 있겠다.”

내가 말하자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얼굴색을 바꾸고 나를 똑바로 쳐다 보았다.

“이거 찾아 보려고?”
“어.”
“너 다이빙 선수 알아? 고등학교 때 친구 중에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그럼 네가 다이빙 선수야? 메달 딴 적 있어?”

나는 잠깐 아무 말 하지 않고 있었다. 그리고 다시 대답했다.

“앞으로 최대한 빨리 따보는 쪽으로 해 보면?”

그녀는 벌써 웃고 있었지만 무슨 엉뚱한 소리를 하냐고 표정은 찌푸리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데이지 꽃 모양 목걸이를 가리켰다.

“이거 쓰면 될 것 같잖아?”

내 말을 듣더니 그녀는 똑딱하고 혀 굴리는 소리를 한 번 냈다. 웃는 얼굴에 보조개는 더 깊게 패였다.

“야, 꼭 그렇게까지 해서 보물을 찾아야 돼?”
“우승하고 싶잖아.”

그때 쓰레기통 바닥을 뒤진 부동산 재벌과 나무 꼭대기에 기어 올라갔다 내려온 항공사의 중역이 자기들도 보물을 찾았다며 그 점수를 인정해 달라는 소리가 크게 들렸다. 그녀가 뭐라고 말을 했는데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나는 카드 뒤편에 글을 썼다. 그리고 사회자에게 가서 그 카드 뒤편에 있는 이야기를 읽어 달라고 부탁했다. 사회자는 그것을 읽었다. 사람들이 모두 사회자와 내 쪽을 보았다.

사회자가 읽은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지금부터 자선 행사 공식 다이빙 대회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참가하실 선수께서는 손을 드시고, 다이빙을 시작하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나를 쳐다 보았다. 나는 손을 높이 들고 있었다. 나를 보는 그녀의 얼굴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가 조금 멀게 보였다. 나는 멋지게 웃어 보이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돌려 검은 밤하늘을 보고 그 방향으로 뛰었다. 별 하나 보이지 않아 그저 검기만 한 색이었다. 뛰어 가는 동안 주위로 등불과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과 건물을 치장한 조명의 모든 빛이 빠르게 지나가는 것을 보았다. 나는 파랗게 빛이 나는 수영장 물 위로 높이 뛰어 올랐다. 그대로 높이 몸이 솟아 오른 후, 숲 바깥 산 아래 수백만 사람들의 집과 길 사이까지 떨어질 것 같았다.

물 튀는 소리가 크게 났고, 내 주위를 물이 감싸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모두 막았다.

나는 아무도 사용하지 않아 맑기만 했던 그 차가운 물 속에 처음 뛰어든 사람이 되었다. 사람들이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웃는 소리도 많이 들렸다. 우리에게 춤을 가르쳐 준 사람과 그 흰 옷을 입은 노인은 더 크게 웃고 있었다. 나는 다시 수영장 밖으로 걸어 나왔다.

물에 젖은 옷의 무게가 무겁게 느껴졌다. 젖은 구두로 카펫 위에 깊은 발자국을 내며 나는 다시 행사장 쪽으로 걸어 갔다. 나는 그녀를 향해 걸어 갔다. 그녀의 표정은 장난꾸러기 유치원생을 달래는 선생님 같았지만, 그녀의 눈은 내가 본 중에 가장 환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그런 얼굴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잖아”라는 뜻인지, “오늘은 이러고 웃는 날이니까 이러고 넘어가지만 다시는 이러지마”라는 뜻인지, 아니면 그냥 우습다는 뜻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는 수영장 가까이까지 걸어 나왔다. 내가 다시 그녀의 눈을 쳐다 보자, 그녀는 눈을 돌려 내 목을 보았다. 그리고 그녀의 데이지 꽃 목걸이를 풀어, 내 목에 걸어 주었다.

“그러면, 여기에 제1회 자선 행사 공식 다이빙 대회 메달리스트가 오셨으니까, 다이빙 대회 메달리스트가 오신 것으로 인정을 하겠습니다.”

나는 수영장 곁에 걸터 앉았다. 우리가 보물을 찾았다는 것에 박수를 쳐 주는 사람도 있었다. 나는 아직 물결이 출렁이고 있는 텅빈 물 위를 보았다. 겉옷이라도 벗어서 좀 물을 짜고 가야 하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때 코미디언을 데리고 온 남자가 그 큰 목소리로 말했다.

“잠깐만요. 그런데, 대회라는 것은 경쟁이 있고, 복수의 참가자가 있어야죠. 혼자 참가하고 혼자 우승한 게 대회고, 그 대회에 참가했다고 메달리스트라고 하는 것은 좀 이상하지 않습니까?”

웃음도 덧붙였고, 농담을 하고 장난을 치는 거라는 말투도 곁들이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는 동시에 우승을 양보하는 것이 어떻냐는 뜻도 암시하고 있었다. 오늘 밤, 우리는 그저 애처로울 정도로 엉뚱한 짓을 해서 눈에 뜨이려고 난리를 부린 것일 뿐이고, 정말 재치 있고 제대로 노력을 기울인 것은 자신이라는 주장이었다.

나는 그녀가 있는 쪽을 보았다. 미안하다고 말해야 하나 생각했다. 그런데, 그녀도 나를 보고 있었다. 그리고 세상에서 가장 지루하던 생화학 강의를 들을 때 나에게 지어주던 그 눈짓을 다시 해 보였다. 나는 일단 일어 섰다. 뭔가를 하려고 했는데, 그러기 전에 먼저 그녀가 하늘 높이 자신의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녀도 수영장을 향해 달려 와 물 속으로 뛰어 들었다.

물에 젖은 그녀는 긴 머리카락을 헤쳐 다시 앞을 보는데만도 한참 걸렸다. 호텔 직원 세 사람이 수영장 안으로 들어 와 그녀가 나오도록 도와주려고 하기도 했다. 그녀는 혼자서 걸어 나왔다. 수영장 가에 와서 내 손을 잡고 그녀는 다시 올라 왔다.

그녀는 속삭이는 것처럼 나에게 말했다.

“1번 선수께 묻습니다. 2번 선수와 1번 선수를 비교해 보면 누가 더 잘했나요?”

그새 체온이 내려가 그녀의 입술이 보라빛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대답했다.

“2번 선수.”
“그러면, 메달은 2번 선수에게 수여해야겠지요?”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내 목걸이를 끌러 다시 그녀에게 걸어 주려고 했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우리를 입구에서 맞이해 주었던 호텔 직원과 그 동료들이 수건을 잔뜩 들고 와서 그녀를 감쌌다.

그리고 나서도 행사는 두 시간은 더 이어졌던 것 같다. 우리가 1등이기는 했지만, 다른 웃을 일도 많고 놀랄 일도 많은 보물을 찾아 온 사람들도 여럿 더 나왔다고 한다.

그렇지만 그 뒤의 일은 잘 모른다. 나는 호텔의 어느 빈 객실로 안내 되어 따뜻한 물에 몸을 씻고, 누군가가 마련해 준 운동복으로 갈아 입었다. 좀 쉬고 있으라는 말을 듣고, 내 방도 아닌 객실에서 혼자 누워 있다가, 뜻도 없이 50년 전 노래를 부르는 가수들이 나오는 심야 텔레비전 쇼를 좀 보다가 할 뿐이었다.

한참 그러고 있다가 깜빡 잠이 드나 싶을 때, 누군가 옷은 호텔에서 세탁해서 배달해 주겠다는 이야기를 전해 왔고, 얼마 후 그녀가 돌아 가는 길에는 혼자 먼저 돌아가라고 했다는 소식도 전해져 왔다.

그날 밤은 그렇게 끝이 났다. 호텔 바깥으로 나설 때 안 쪽에서 들려 오는 음악 소리가 미세하게 새어 나오는 것이 들렸다. 멀어질 수록 그 소리는 작아졌다. 그렇지만 아주 멀리 떠나 와서도 귓가에 조그맣게 그 소리가 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뒤, 얼마 지나지 않나 나는 학교에서 다시 그녀를 만났다. 여러 번 만났다. 졸업할 때까지 우리는 자주 마주쳤고, 같이 식사를 하거나, 과제 이야기를 하거나, 재미 있는 영화 이야기를 하거나, 재미 없는 영화 이야기를 한 적도 많았다. 그녀가 졸업하던 날에도 우리는 같이 사진도 찍었다. 그녀의 어머니를 본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다.

나는 예정대로 대학원에 갔고, 그녀는 어느 회사에 취직을 했다고 들었다. 학교를 떠나고 나서 우리가 만날 기회는 없었다. 나는 1년에 한 번 정도, 몇 시간 동안 생각을 하다가 가끔 안부 메시지를 하나 정도 보내기는 했는데, 그녀는 반갑게 보통 대답을 해 주었고, 어떤 때에는 한참 늦게 답이 늦어 미안하다고 하는 정도였다.

그러는 동안 나는 신경 감각 분야의 연구실에 들어가 일을 했는데, 다른 비슷한 학생들 처럼 몇 년 동안 몇 번 씩 이게 뭐하는 짓인지 때려 치울 생각도 하고, 울분에 가득 차서 세상이 얼마나 잘못 되어 있는 지 긴 목록을 마음 속으로 작성하기도 하고, 졸업을 제 때 못하면 어떡하나 고민도 끝도 없이 했다.

나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처럼 신경 신호 전달의 사이버네틱 1차적 발현과 사이버네틱 2차적 발현의 차이에 대해서 밤새 따지면서 인간 정신이 바짝바짝 바르도록 고민하고 있었지만, 그걸 잘 한다고 해서 그 잘 하는 만큼 무슨 결과가 보장되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고생고생 해서 좋은 연구 결과를 발표하고 칭찬을 들으면서 학위를 받는다고 해서 그 뒤에 좋은 미래가 펼쳐져 있는 지 없는 지 아는 사람은 없었다. 좋은 논문을 썼고 그 뒤에 멋진 직장을 얻어 행복하게 살고 있다는 사람을 찾아 보기란 어려웠고, 졸업 후에도 학교 주변을 떠돌며 9개월 마다 새 일거리를 찾아야 하는 계약직 연구원으로 떠도는 피곤하고 신경질적이고 지쳐 있는 사람들은 너무 많이 보였다. 더군다나 좋은 연구 결과라는 것부터가 힘든 것이었고, 칭찬을 들으면서 학위를 받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목표였다.

그래도 그럭저럭 사이버네틱 2차 발현 분야에 대해서는 이 나라 학생 중에는 제법 잘 아는 편 아닌가 싶게 결과를 정리하고 졸업하기는 했다. 하지만, 마침 그 분야의 인기가 시들해진 상황이었다. 내가 학교에서 밤낮 연구했던 것은 정원 다듬는 일이나 중국 음식 만드는 일처럼, 전국 어디에서나 어느 정도는 필요한 곳이 있는 일이 아니었다.

세상 사람들의 거의 대부분은 사이버네틱 2차 발현이란 것에 대해 그 말조차 알지 못하고, 사이버네틱 2차 발현을 잘 아는 사람이 필요한 한국 회사를 찾아 본다고 해도 한 두 군데 정도였다. 그런 회사들이 어느날 갑자기 그쪽으로는 이제 사업을 접기로 결정을 내리면 일자리란 영영 사라지는 것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그런 것 말고, 3차원 프린터니 인공지능 번역이니 하는 더 유행을 타는 쪽으로 투자하겠다고 연구비까지 끊어 버리면 그냥 그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 나는 아무도 알고 싶어하지도 않는 사이버네틱 2차 발현에 대해 혼자서만 몇 년간 별 짓을 다해 쌓아 올린 경력을 갖고 있으며, 그것 말고는 아무것도 해 놓은 것도 아는 것도 없어서 아무도 회사에서도 좋아하지 않을 법한 인재가 되어 있었다.

불경기 때 신세한탄 하는 젊은이들이야 가을 바람 불 때 낙엽처럼 흔하다고들 하지만, 내가 그렇게 되니 억울하다는 생각만 더 많이 들었다. 열심히 살았고 그럭저럭 잘한다는 평을 들으며 한 고비 한 고비 넘어 왔는데, 왜 이렇게 된 거지. 분명히 뭔가가 잘못 됐다고 생각했지만, 제대로 답을 찾을 수도 없었다. 망한 구렁텅이에 빠진 느낌이었다.

겨우 취직을 하고 더 급하게 풀어야 하는 일을 많이 겪으면서 나는 그 구렁텅이에서 벗어 나왔다. 구렁텅이에서 실제로 벗어난 것이 아니라, 그냥 구렁텅이에 빠져 있다는 느낌만 잊게 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신경 인지 감각에 대해 연구를 했으나 감성 분석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안다고 떠들어서 그럭저럭 부실하지 않은 소프트웨어 회사에 취직을 한 것이다.

사람 사진을 찍으면 웃긴 모양으로 바꿔 주는 소프트웨어를 누가 더 재밌게 만드냐로 전자업계는 다투고 있었다. 우리 회사 신제품이 이렇게 뛰어나고 신기하다고 자랑 하기 위해서 핵심으로 내세우는 것이 사람 얼굴을 닭이나 개와 비슷한 모양으로 합성해 준다는 소프트웨어였다. 경쟁사보다 조금 더 웃긴 개 콧구멍 모양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선전하는데 회사는 수십억원, 수백억원을 쓰는 판이었다. 그러다 보니, 그 돈 중에는 어찌저찌해서, 감정과 신경에 대해 연구한 경력을 몇 줄 갖고 있는 나도 신입사원으로 뽑아 갈만한 예산이 있었다.

차석연구원으로 승진을 했다고 맥주 한 잔 사고 돌아온 저녁에 나는 몇 년 만에 한승희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실제로 직접 한승희에 대한 소식을 들은 것은 아니었다. 텔레비전 뉴스에 한승희의 어머니가 구속 되었다는 소식이 나온 것이다.

공문서 조작 혐의를 받았다고 했는데, 어떤 사람들은 뒤로 회사돈을 빼돌린 사기꾼이라고 욕을 했고, 어떤 사람들은 검찰 조직이 개편되면서 경쟁사 쪽과 친한 검사들이 고위직으로 올라 가는 바람에 괜히 힘을 주어 수사하는 거라고 하기도 했다. 이 정도면 굳이 구속 수사할 필요는 없는데 이렇게 몰아 붙이는 것은 괜히 알파 산업을 괴롭히려는 것 아니냐는 기자의 질문에 대답하는 사람은 절대 그런 뜻은 없다고 대답했다. 하기야, 무의미한 질문이었다. 정말 그렇다고 해도, “예, 그렇습니다. 우리는 더러운 놈들이라서 일부러 죄가 있는 지 없는 지도 모르지만 왠지 우리가 싫다는 느낌 때문에 그냥 빨리 철창에 가두고 보는 겁니다”라고 대답할 리가 없지 않은가.

나는 전화기에 들어 가는 잡다한 재미로 쓰는 기능을 만드는 연구에 참여 하며 지내면서, 한편으로는 그 소식을 계속 따라갔다. 회장이 감옥에 간 틈을 타서, 알파 산업에서 회장을 몰아 내려는 계획이 시작 되었다는 이야기도 나왔고, 알파 산업 회장의 재산을 이곳저곳에서 빼 내어 간다는 이야기도 들렸다. 몇 번 재판이 열렸다는 이야기, 대통령이 사면을 해 줄 거라는 이야기나, 사면을 해 주지 않을 거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그러나 몇 주가 흐르자 그보다 더 웃긴 소식이 훨씬 더 많이 나와서 사람들은 더 이상 그에 대한 소식을 이야기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는 사이에 봄이 지나갔고, 다시 여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한승희로부터 연락이 왔다.

“오랜만이지? 잘 지내?”

퇴근길 버스에서 막 내린 참이었다. 1년 중에 해가 가장 길던 무렵이었지만 퇴근이 약간 늦어져서 해가 진 직후였다. 붉은 저녁 빛이 낮게 들어와 전화기 화면을 가려서 잘 보이지 않았다.

나는 혹시 갑자기 또 무슨 싱거운 연락이라도 한 줄 올까 싶어 어디를 가든 항상 전화를 멀리 두고 다니지 않는다. 두 시간 정도라도 전화 화면을 안 보고 있으면 그 사이에 혹시 무슨 메시지가 갑자기 와 있을까 싶어 기대하며 화면을 다시 켜기도 한다. 물론 항상 아무 메시지도 와 있지 않거나, 신용카드 결제일 안내 메시지 따위만 나와 있어서 매번 실망하기만 했다. 하루에 세 번쯤은 그랬고, 족히 5년은 그런 버릇이 있었으니까, 5천 번은 더 넘게 그런 기분으로 전화 화면을 보았다. 그런데 그날 저녁, 버스에서 내려 전화 화면이 잘 안 보여서 한쪽으로 기울여 보았을 때, 그 때에는 정말 그녀의 말이 화면에 나와 있었다.

나는 당장 전화를 걸고 싶었지만 일단 참기로 했다. 대신 집으로 걸어 가는 동안 뭐라고 대답하면 좋을 지 고민했다. “나야 잘 지내지” 너무 건방진 것 같았다. “야, 이게 누구야?” 이런 것 내가 쓰는 말투가 아니다. “반갑다.” 그 뒤에 무슨 말을 이어도 자연스럽지 않은 것 같았다. 좋은 대답을 찾아 궁리하다 보니 집까지 가는 제법 먼 길을 그냥 어쩌다 보니 지나친 것처럼 금새 집에 와버렸다.

“정말 오랜만이다. 소식 궁금했는데. 너는 잘 지내?”

라고 썼다가, 나는 “소식 궁금했는데.” 부분은 지우기로 했다.

“정말 오랜만이다. 너는 잘 지내?”
“잘 지내긴. 우리 엄마 구속된 거 알아? 엄마 구속되고 나서 아주 개판이야.”

그녀의 답이 왔다.

“어쩌냐. 그래도 너네 어머니면 잘 헤쳐 나오실거야.”
“엄마야 헤쳐 나오시겠지. 그런데 내가 문제야.”
“골치 아픈 일 많나 보네?”
“큰일이야. 너 금요일 저녁에 시간 돼?”
“시간이야 있는데. 왜?”
“보물 찾기 하러 가자고.”

사연을 들어 보니, 그녀의 어머니가 구속된 후, 그녀의 사정도 무척 나빠졌다고 한다. 사정이 점점 나빠지다 못해 이제 결국 당장 며칠을 버텨낼 생활비 마저 급해진 상황이 되어서, 그녀는 어떻게 급한 돈을 마련할 지 이런저런 궁리를 했다고 한다.

그러다가 그녀는 매년 돌아 오는 그 자선 행사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알아 차렸고, 거기에 가서 보물 찾기 행사에서 1등을 하면 제법 많은 상금을 딸 수 있다는 생각을 해낸 것이다. 그러면서 그녀는 만약 1등을 하면 상금은 반씩 갖자고 했다.

“너하고 같이 가야 이길 확률이 좀 높지 않겠니”

그래도 알파 산업 회장의 자식이면 그 정도 액수면 어디 다른 곳에서라도 훨씬 쉽게 구할 수 있지 않을까. 하다 못해 적당한 은행에 가서 그럭저럭 적당한 신용 대출 서류만 잘 꾸며도 대출이라고 받을 수 있을 것 같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게 아니라도, 이번 일에 휘말리지 않은 친구나 부모의 친구, 친척을 찾아가면 그 상금 정도되는 액수는 구할 수 있지 않을까? 아니, 구치소에 있는 그녀의 어머니를 찾아가 어쩌면 좋겠냐고 하면 당장 전당포에 맡길 수 있는 패물 몇 개 쯤이 있는 장소를 알려 줄 수 있지 않을까?

그녀가 행사장에 나타났다는 소식이 퍼진 후에 생긴 소문 중에는 그녀가 보물찾기를 하러 나타난 것이 너무 세상 사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녀는 알파 산업 회장의 자식으로 살면서, 비참한 실패를 헤쳐 나오거나 험한 다툼을 하는 세상과는 그때까지 전혀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으며 살아 왔다. 그러니, 은행 대출이나 친하지 않은 친척에게 불쌍한 얼굴로 돈을 빌리는 것은 도무지 떠올리기 힘들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겨우 생각해낼 수 있는 것이, 엉뚱한 사교 행사의 상금 내기 정도였다는 설명이었다.

나는 그 이야기는 사실이 아닐 거라고 생각한다. 한승희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그 모든 방법으로 돈을 구하는 것에 다 실패하고, 혹은 그 모든 방법으로 구한 돈까지 다 써버리고 마지막 궁지에 몰린 상태에서 보물 찾기를 하러 가자는 생각을 떠올렸을 가능성이 차라리 더 높다. 어머니의 숨겨둔 재산을 찾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그녀가 어머니를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도와 주워야 할 상황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쪽도 정말 가능성이 높은 것은 아니다. 다시 만난 그녀는 전혀 궁지에 몰린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니, 그녀가 그날 나에게 연락해 보물 찾기를 하러 가자고 한 이유는 나도 완벽하게는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정직하다.

우리는 호텔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 나는 버스를 타고 한참 산기슭을 걸어서 호텔로 갔다. 그때는 몰랐는데, 언덕길이 제법 길었고, 우거진 숲, 나무에서는 생각보다 짙게 나무 냄새가 났다. 몇 군데 장식을 조금 바꾸었을 뿐, 호텔 모습은 그대로였다. 도착하니 걷느라 땀이 조금 났다.

나는 약속한 시각보다 5분쯤 먼저 도착했다. 나는 건물 안으로 다른 사람들이 들어 서는 것이 보았다. 옷차림과 여유 있는 모습의 사람이 차에서 내리는 것을 보았을 때는, 나와 같은 행사에 가려는 사람들이 아닌가 짐작하기도 했다. 기다리는 시간은 금방 지나갔고, 약속한 시각에서 3분 정도가 지났을 때 그녀의 모습이 보였다. 나는 그녀 쪽으로 걸어 갔다.

그녀도 나를 보고 뭐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거리가 너무 멀어서 제대로 들리게 말하려면 너무 크게 소리를 질러야 했다. 그래서 그녀는 첫마디를 말하려다가 멈추었다. 그리고 내 쪽으로 빠르게 걸어 왔다. 그리고 내 눈 앞에 와서는 하려던 말을 했다.

“버스 타고 오려니까 시간이 가늠이 안 돼서. 조금 늦었지?”
“몇 년이나 지난거야? 그러니까, 졸업하고 나서. 우리 졸업하고 나서 처음 얼굴 보는 거 아니야?”

내가 대답했다. 대답하면서 보니 급하게 걸어 가느라 너무 서로 가까이 선 모양이 되었다. 나와 그녀는 조금 물러섰다.

그녀를 보고 처음 든 생각은 어른스러워 보였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대학교 1학년 때 처음 봤을 때부터 어른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지금 보니, 그보다도 더 어른스러워 보였다. 키가 좀 더 커졌나, 하는 생각까지 했다.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할 때 마다, 내가 그녀의 목소리, 그녀의 말투가 새삼 다시 생각났다. 그 동안 잘 기억하고 있었다고 생각하고 있었지만, 이런 느낌인지는 모르고 있었구나. 맞지. 이런 목소리였지. 이런 말투였지. 하고 생각했다.

행사장 입구에 서 있는 직원에게 말을 하고, 기념 사진을 찍고, 우리는 다시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 갔다. 그 몇 걸음을 걸어 오는 사이에 해가 져버리고 밤이 찾아온 것 같았다.

안쪽으로 갈 수록 음악 소리와 사람들의 말소리가 짙게 퍼져 있는 느낌이었다. 같은 모양은 하나도 없지만 옛날 보았던 것과 이상하게 비슷한 느낌의 요리들이 이곳저곳에 쌓여 있는 것이 보였고, 전등과 조명 장식도 보였다. 식탁마다 올려 두었던 꽃은 LED 장식품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수영장 모습은 하나도 바뀌지 않아 보였다.

아는 사람을 만나 인사하고, 그녀가 가벼운 농담을 주고 받는 것도 옛날 기억과 같았다. 그렇지만, 그녀를 유난히 쳐다 보는 사람들이 몇 명 있었다는 것은 나도 알아 볼 수 있었다. 몇몇은 먼 발치에서 그녀를 알아 보고 수군거리기도 하는 것 같았다. 만난 사람 중에서는 그때 그 코미디언을 데리고 왔던 남자도 있었다. 남자는 나를 기억해 냈기 때문인지, 혹은 불행할 것으로 짐작된 그녀의 사정에 호기심이 있었기 때문인지, 평균보다 더 길게 근황에 대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는 새로 선 보이는 음식들을 먹었고, 사회자가 드문드문 진행하는 새로운 농담이나, 새로운 놀이를 따라 하기도 했다. 올해는 더위가 빨리 찾아온 날씨였기 때문에, 밤이 깊자 수영장에 수영복을 입고 들어 가서 노는 사람들도 몇 나타났다.

“너는 요즘 뭐하고 지내고 있어?”
“너 한테 그때 초대장 보냈잖아?”
“무슨 초대장? 못 받았는데.”
“또 스팸메일로 갔나보네. 내 이메일 주소 ‘스팸이 아님’으로 해 놓으라니까. 스팸으로 지정한 거 아니야?”
“절대 절대 아니야. 내가 네 이메일을 왜 스팸으로 지정해.”
“그런데 초대장을 왜 못 받았지? 관심 없어서 보고도 그냥 넘겼나? 내 이름이 아니라 회사 공식 계정으로 보낸 초대장인데.”
“무슨 초대장인데.”
“공룡체험관 초대장인데, 정말 못 봤어? 내가 관장이거든. 좀 있으면 개장하는 건데 정말정말 바빴어. 체험관 허가랑 지원신청하기가 왜 이렇게 어렵냐. 1월달에는 공룡 화석을 수입해 오는데, 그걸 누가 동물시체로 신고해서 올리는 바람에 무슨 환경부 폐기물 단속반에 다 끌려 다니고, 진짜 엄청 고생했어.”
“야, 그래도 엄청 재밌겠다.”
“아니야. 그나마도 요즘에는 돈이 똑 떨어져서 문 열기도 전에 다 엎어질 판이고.”

나는 그녀와 여러 가지 이야기를 했다. 듣고 싶은 이야기는 많았고, 물어 보고 싶고 궁금한 것은 끝도 없었다.

그러다가도 다른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에 그녀는 또 그 사람들과 이야기했다. 우리에게 춤을 춰 보라고 했던 그 선배를 만났을 때는 대화가 좀 길어졌다. 그 선배라는 사람은 나에게도 반갑게 인사하고는 뭐라고 말을 건넸다. 그렇지만 그 선배는 그녀와 좀 심각한 이야기도 하고 싶어 했다. 그녀의 어머니가 얼마나 심각한 상황에 처해 있는지, 날린 재산을 어떻게 되찾을 가망이 있는 지에 대해 걱정하고 있었다.

나는 자리를 피하는 것이 맞겠다고 생각하고, 잠깐 바깥 쪽으로 걸어 나왔다.

나와 보니, 긴 탁자가 놓여 있고 보물찾기 카드들이 나란히 올려져 있었다. “보물 찾기를 시작합니다”라는 팻말이 있었지만, 보물 찾기를 시작한다고 알려야 하는 사회자는 자리에 없었다. 누군가 “시작한 거야 만 거야”하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이 들렸다.

그때 옛날 코미디언을 데리고 왔던 남자가 나타났다. 자세히 얼굴을 보니 그는 예전에 보았을 때 보다 한층 더 나이든 모습이었다. 그가 직원들이 있는 쪽을 보고 큰 목소리로 말했다.

“보물 찾기 시작 한 거예요?”

나는 대답하는 소리를 못 들었다. 그러나 그는 곧 카드를 집어 하나 둘 살펴 보기 시작했다. 그러자 다른 사람들도 카드를 집어 보물의 내용과 점수를 확인했다. 나도 그 사이에 끼어 들었다.

잠시 후 다시 그녀가 있던 곳으로 돌아 오니, 그녀는 수영장 쪽을 보면서 앉아 있었다. 그녀에게 말을 걸고 있는 사람은 없었다. 여름 바람이 그녀가 있는 쪽에서 내 쪽까지 불어 왔다. 아무도 그녀를 보고 있는 사람이 없고, 누구 앞에 앉아 있는 것도 아닌데도 그녀는 아주 약간 웃는 얼굴이었다. 그것이 한승희의 원래 보통 표정이라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었지만, 꼭 처음 보는 모습 같았다.

나는 그녀의 앞으로 갔다. 그녀의 얼굴은 더 크게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

나는 그녀에게 말했다. 그녀의 이름을 불렀고, 그녀는 내 목소리가 떨리는 것을 이미 알아차린 것 같았다.

“나 너 좋아해. 옛날부터 좋아했어. 그 동안 볼 기회도 없고 해서 이야기를 못해서 그렇지… 그냥 문자 메시지로 ‘좋아해’이럴 수는 없잖아. 그래서 말을 못 했는데 정말 정말 너 생각 많이 하고 너 보고 싶어 하고 그랬어.”

그녀는 바로 대답을 하지 않고 턱을 괴었다. 그러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보았다. 나는 그녀의 대답이 무엇일지 기다렸다. 세상이 너무너무 넓은데 거기에 아무것도 없이 우리 둘로만 가득 차 있고, 시간은 이상하게 느리게 흐르는 기분이었다.

“아니야, 아니야.”

그녀는 혼잣말처럼 그렇게 말했다.

“나도 학교 다닐 때 너 좋게는 생각했는데. 그런데 그리고 인범이 만나고 나서부터는 또 그런 건 아니니까.”

내 얼굴이 따끈해졌다. 그녀는 웃으면서 뭐라고 더 말을 했고, 나는 또 거기에 맞춰서 그녀와 같은 표정으로 웃으려고 했지만 결코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사회자가 보물찾기를 시작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카드가 놓여 있는 곳으로 가자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뒤를 따라 나섰다.

탁자 앞으로 다시 가 보니, 이미 카드를 펼쳐 본 그 남자는 벌써 한참 큰 목소리로 통화를 하는 중이었다.

그 남자가 찾고 있는 보물은 “백마 탄 왕자”였다. 남자는 자기 친구 중 한 명에게 연락이 통해 있는 중동 어느 나라의 왕족 한 사람에게 전화를 걸고 있었다. 어제 서울에 왔는데 지금은 이태원 어디인가에서 놀고 있다는 것이다. 그 왕족의 작위를 영문으로는 공식적으로 “Prince”라고 표기하기 때문에, 번역하면 왕자가 맞았다. 그리고, 남자는 과천의 경마공원에 연락해서 자신이 갖고 있는 경주마 한 마리를 빨리 배달해 달라고 했다. 그 말이 흰색이라고 했다. 말은 금새 준비가 되었는데, 밤이 늦은 시각이라 말을 태우고 이곳까지 올 트럭 기사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그래도 왕자는 이미 근처에 와 있다는 것 같았고, 남자는 바쁘게 건물 안팎을 드나들며 말이 도착하고 있는지 어떤지 알아 보고 있었다. 이제 막 사회자가 보물 찾기가 시작되었다고 했지만, 사실 남자는 이미 보물을 찾아 내기 직전이었다. 지금 바로 움직여야 우리가 우승할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옷 안주머니에서 내가 아까 미리 집어 왔던 카드를 꺼냈다. 그리고 사회자 앞에 나갔다. 사회자가 카드를 읽었다.

“보물은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입니다.”

사회자가 그 보물이 어디 있냐고 말했고, 나는 그 보물이 바로 나라고 말했다.

나는 이를 드러내고 눈꼬리를 처지게 한 표정을 짓고 웃음을 지어 보였다. 그런 표정을 일부러 만드는 것이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주저 앉아서 엉엉 소리를 내서 울어 보라고 해도 당장 할 수 있었겠지만, 일단 다른 표정을 짓고 있는 다음에야 그 정도 얼굴을 일부러 만들어 내는 것도 해보니 할 수는 있었다.

사회자에게 나는 말을 전해서, 사람들에게 내 모습을 전화기 카메라로 찍어서 감정 분석 소프트웨어로 분석해 보라고 했다. 기술인증 1등급을 통과한 진짜 과학적인 감정 분석 기능이 제대로 돌아 가는 소프트웨어를 써 보라고 설명했다. 그렇게 해서 내 얼굴을 분석해 보면, 정말로 내 감정은 행복감 100%로 나올 거라고 설명했다.

사람들이 내 모습을 한참 촬영하려고 하는데, 그 남자가 말고삐를 잡고 행사장 안으로 들어 왔다. 그가 끌고 온 말 위에는 멋진 선글라스를 쓰고 있는 왕자가 타고 있었다. 사람들이 모두 말과 왕자와 남자를 쳐다 보았다. “어머나”하고는 벌써 크게 웃는 사람도 있었다.

남자가 사회자를 멈추게 하고 말했다.

“감정 분석 프로그램으로 측정해봤더니 행복감 100%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라는 말이 재미있기는 한데요. 제가 알기로, 지금 저 참가자께서는 그런 소프트웨어를 만드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연구원이거든요. 그래서 아마 인위적으로 컴퓨터가 100% 행복감으로 인식할 수 있는 표정을 일부러 지을 수 있는 방법 같은 것을 아시고 있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실제로는 하나도 안 행복한데 컴퓨터 소프트웨어에서 행복감 100%로 나오는 그런 표정을 가짜로 짓는 것일지도 모른다는 거에요. 그런 거라면 그건 일종의 해킹이고, 그걸 두고 정말로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을 찾았다고 할 수 있을까요?”

남자의 말이 끝나자, 주변은 대단히 재미 없는 분위기가 되었다. 다행히 남자가 미소를 지어 “저도 이거 다 장난인거 알기는 하는데요”하는 신호를 보냈고, 휑한 조용함 속에서 남자가 끌고 온 말이 싱겁게 말소리를 몇 번 내서, 몇몇 사람들이 픽픽 새는 웃음을 웃기는 했다.

그녀는 나를 불쌍하게 여기는 것 같은 얼굴로 보고 있었다. 나는 사회자와 잠깐 말을 나눈 뒤에, 사람들 사이에 서 있는 그녀를 바라 보았다. 그리고 나는 옛날 그녀가 내게 보내던 것 같은 눈짓을 해 보였다.

사회자가 말했다.

“그러시면, 여기 참가자께서 보물이 무엇인지 발표되기 전에 찍힌 최근 사진을 보여드리고, 그 사진을 가지고 분석을 해 보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면 보물이 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찍힌 얼굴 모습일테니까, 일부러 컴퓨터를 속일 수 있는 표정을 지을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사람들은 사회자의 말에 박수를 보냈다.

사람들은 다들 그러자고 했다. 어차피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이 보물에 포함되어 있었던 것은 그것을 핑계로 해서, 최근에 기분 좋은 일이 생긴 사람을 사람들 앞으로 불러 내어 축하해 주려는 계획이었던 것일 게 뻔했다. “저는 이번에 회갑을 맞았는데 자식들과 손주들까지 모여서 축하를 해 주니 저만큼 행복한 사람이 없을 겁니다” “이번에 드디어 저희 회사가 법정관리를 벗어 났는데 이만큼 행복할 수가 없습니다” “지난 달에 드디어 저희 딸이 태어났는데, 정말 행복합니다” 이런 말을 사람들 앞에서 하고, 박수를 한 번 받으라는 계획 아니었겠나. 그런 보물을 두고 길게 다투는 것은 다들 지루해 할 짓이다. 말고삐를 쥐고 있는 남자도 그건 알고 있었다. 그도 사회자의 말에 찬성했다.

안쪽 어두운 곳에는 취한 사람들이 느릿느릿 무슨 노래에 맞춰 추는 지도 모르는 춤을 추고 있었다. 그곳이 화면이 되었다. 사회자는 그곳으로 그녀와 내가 저녁에 이곳으로 들어 오면서 입구에서 찍었던 사진을 보여 주었다.

그녀와 내가 나란히 서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그제서야 내가 그녀의 동행이라는 것을 알아 보고 옆 사람과 속삭이는 소리가 들렸다.

“그럼 이 사진에 찍힌 모습으로 한번 측정을 해 보겠습니다.”

사회자는 자신의 전화기로 사진 속 내 모습을 찍었다. 다른 전화기를 든 조금 다른 소프트웨어를 사용하는 다른 사람들 사진을 찍어 보는 사람이 몇몇 있었다. 말고삐를 쥔 남자도 내 모습의 사진을 자신의 전화기로 비춰 보았다.

내 얼굴은 긴장한 모습이었지만, 그럭저럭 밝은 얼굴이기는 했다.

“아, 이 사진을 보면... 이 사진을 봐도, 행복감 100%네요!”

사회자가 웃었고, 자기 전화기에 나오는 것을 보던 사람들 중에도 웃는 사람이 있었다. “이야, 나 행복감 100%는 처음 봐” 어떤 사람은 이제 좀 재밌는 이야기로 넘어 가자고 빨리 박수를 치기도 했다. 말고삐를 쥔 남자도 내가 보물을 찾았다는 것에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그녀와 나는 잠시 호텔 바깥으로 나왔다.

바깥은 조용했다. 수영장 쪽에서는 들리던 풀벌레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대신 늦은 밤, 막차 인 듯 싶은 버스가 산을 넘어 가는 소리가 멀리서 들려 왔다.

그녀가 어떻게 한 거냐고 내게 물었다. 내가 대답했다.

“나도 사실은 몰랐어. 나도 이제 알았어. 나는 너랑 같이 다니면서 뭐 같이 하고 그런 게, 나는 정말 제일 재밌고 좋아. 뭘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그냥 그렇게 너하고 같이 하는 게 제일 재밌고, 또 좋고.”

나는 그 말을 어떻게 끝내야 했는지, 지금까지도 고민할 때가 있다. 요즘도 가끔 그날 밤, 무슨 말을 더 했어야 했다고 후회할 때가 있다. 그런저런 생각이 많은 여름날 밤, 혼자 있다가 창 밖을 보게 되면, 지금도 어느 먼 곳 숲 속에 가면 그녀가 서 있을 거라는 상상을 하기도 한다.

얼마 후, 한승희의 어머니는 무죄로 구치소에서 나왔고 자신이 잃었던 모든 것을 다시 되찾았다. 그리고 한승희의 공룡체험관도 제 날짜에 문을 열었다.

— 2018년, 삼성동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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