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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의 마을

  ‘아홉개의 붓’ 외전

 - 본편에서는 ‘푸른 불의 얼음’ 과 ‘소리의 그림’ 사이의 일화입니다. 



 

 

 낮이면 뜨거운 햇빛으로 숨이 턱턱 막히고 눈앞이 아득해질 정도로 햇빛이 쏟아지는 여름이었다. 한여름은 지난 시절이건만 날씨만으로는 오뉴월 햇살에 뒤지지 않는다. 얼마 전에 떠나온 얼음골이 그리워지는 날씨였다. 석빙고가 있는 얼음골이라면 한낮에 발을 드리우고 서늘한 그늘에서 얼음 동동 띄운 오미자차를 들이킬 수도 있으련만 일행의 여행길은 아직 멀기만 했다. 

 

 더운 날씨에 체력이 떨어지기 쉬운 것은 아이일수록 심한 법이지만 아리는 생각보다도 잘 버텨주고 있었다. 일행은 한낮에는 걸음을 멈추고 해지기 전까지의 긴 저녁나절에 그만큼을 더 걸었다. 바닷가의 마을을 향하는 걸음이었다. 아직 찾지 못한 나머지 천인의 붓을 찾을 수 있으면 다행이고, 그렇지 않더라도 바닷바람을 쐴 수 있으면 분지보다는 견디기 쉽지 않을까 여긴 때문이었다. 

 

 천인(天人)은 바람의 감과 물의 감이 만든 사람들로, 물이 없는 곳에는 결코 깃들이지 않았다. 천인들 대부분이 상인들을 떠나 만든 ‘빛의 계곡’ 역시 깊은 산 속, 세상 어디보다도 맑은 물이 흐른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다. ‘빛의 계곡’에 함께 가지 않았거나 계곡을 떠난 천인들은 오래 전 천인들이 그랬던 것처럼 상인들 사이에 섞여 살았다. 그들이 먼저 천인임을 드러내지 않는 경우도 많아서 천인을 가려내는 것은 쉽지 않았으나. 

 

 “삼일이면 간다더니 꼬박 나흘이 걸렸네.”

 “탈 것도 없이 한낮이면 쉬면서 왔으니 나흘도 감사하죠.” 

 

 시겸의 말에 갈이 말을 받았다. 더위에 고생한 것이 모두 씻길 정도로 아늑해 보이는 바닷가 마을이 눈앞에 펼쳐져 있었다. 나지막한 둥근 지붕을 짚으로 엮어 올렸는데, 바닷바람에 날려가지 않도록 짚으로 엮은 끈으로 다시 지붕을 격자로 눌렀다. 바람 많은 지역의 특색이었다. 일행은 반갑게 마을로 걸음을 옮겼다. 지친 걸음도 어느새 빨라졌다. 

 

 “아이구, 이 더위에 어쩐 일로 외지분들이 오셨대?”

 

 물동이를 들고 집으로 향하던 아낙이 일행을 보고는 반가운 얼굴로 물동이를 내려놓았다. 

 

 “이웃 마을이라고 해도 사나흘은 걸릴 텐데, 고생이 많았겠네. 땡볕에 서 있지 말고 우리 집에서라도 좀 쉬어요.”

 

 아낙은 조그만 집을 가리키며 웃었다. 아낙의 말을 듣고는 집 안에서 덩치 좋은 남자가 나와서는 일행을 보았다. 

 

 “정말로 외지분들이 오셨구만? 거기 서 계시지만 말고 오시오. 날 덥소.” 

 “그럼 실례하겠습니다!”

 

 제일 먼저 뛰어나간 것은 시겸이었다. 갈은 웃으며 그 뒤를 걸었다. 아리와 재찬도 그 뒤를 따라왔다. 

 

 일행은 마루에 앉아서 마을의 풍경을 내려다보았다. 모두 합해 10여 채나 될까 싶은 작은 마을이었다. 고기잡이를 주로 하는 듯 집마다 그물이 널려 있고, 바닷가 쪽에는 작은 배들이 매여 있는 것이 보였다. 작은 텃밭들이 집집마다 딸려 있기는 했지만 외지에 내다 팔 정도로는 보이지 않았고, 동물들은 집 앞의 닭이나 개 정도밖에 없는 흔한 바닷마을이었다. 

 

 “오늘은 비구름이 심상치 않아서 배를 안 냈더니, 외지분들이 다 오시네. 한바탕 큰 비가 올지도 모르니까 맘 편하게 쉬시오. …그나저나 참 특이한 일행이시오?”

 

 아낙이 부엌으로 들어가고 사내가 일행에게 물었다. 

 

 “저는 그림을 그리고 여기 재찬은 약초를 다룹니다. 아리는 피리를 불지요.”

 “그리고 저는 나무를 깎고요.”

 

 갈의 말을 시겸이 냉큼 이었다. 갈이 시겸을 쳐다보았다. 함께 다닌 시간이 가장 짧은 탓에 갈은 항상 시겸을 소개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런 맘을 들킨 것 같아 갈은 어쩐지 미안해졌지만, 시겸은 자신에 대해서 직접 이야기한 것이 오히려 기쁜 것 같았다. 

 

 “나무를 깎는다면, 그릇이나 잔 같은 걸 깎는 건가?”

 

 “지팡이 같은 것도 만들고, 활도 만들죠. 아, 손에 안 편한 손잡이도 매끈하게 만들어 드릴 수 있고요. 주걱이나 뒤집개 같은 건 금방 만들고요.”

 

 “그거 잘 됐네요. 마침 쓰던 뒤집개가 부러져서 새로 구하려던 참인데. 옆 마을에서 마음에 드는 걸 구해 와서 잘 쓰고 있었는데 부러졌지 뭐예요. 이 마을에서 쉬시는 동안에 괜찮으시면 하나 만들어 주세요.”  

 

 물그릇과 과일이 놓인 작은 소반을 일행 앞에 내려놓으면서 아낙이 말했다. 시겸은 반갑게 고개를 끄덕였다. 

 

 조그마한 마을에 외지인이 들어왔다는 건 마을 사람들에게 금방 소문이 퍼졌다. 몇몇 사람들은 일행이 묵은 곳에 일부러 찾아와 얼굴을 보고 가기도 했다. 사내가 말한 비구름이 잠깐 소나기를 뿌리긴 했지만 이내 날씨가 개어, 내일 배를 띄우는 데는 별 무리가 없다고 했다. 비구름 때문에 생긴 하루간의 휴식이었다. 시겸은 집집마다 필요한 물건들을 만들어 주느라 주문을 받아야 할 지경이었다. 낫이나 호미의 손잡이를 손보는 것 같은 일, 뒤집개나 국자 주걱을 만드는 것 같은 일로 그다지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일행은 덕분에 편안하게 작은 마을에서 쉴 수 있었다. 

 

 비인이 산 적이 없는 것 같은 마을이었다. 머리에 두건을 두른 이도 없고, 사람들 사이에서 천하게 여겨지거나 하는 이도 없어 보였다. 마을이 생긴 것이 그리 오래 되지 않은 데다가, 농사짓고 배를 띄우지 않으면 입에 풀칠하기 쉽지 않은 고장이었다. 비인은 상인과 달라서 땅을 갈거나 씨를 뿌리기보다 나무에 자라는 열매를 먹고 자연히 자라는 것을 거두는 이들이라, 상인들이 마을을 만드는 곳과는 달랐던 것이다. 

 

 아리의 장군도 모처럼 몸 밖으로 나오지 않고, 갈은 시겸이 나무를 깎는 사이에 뜨개질을 했다. 나루가 건넨 뜨개바늘이었다. 아리도 함께 하고 싶어했지만 상인의 붓인 뜨개바늘을 쥘 수 있는 건 갈과 시겸 뿐이었다. 아리는 대신 동네 아이들과 피리를 불며 놀았다. 겉으로 비슷한 또래로 보이더라도 실제로는 나이차이가 상당했지만, 아리는 모처럼 아이들과 함께 놀 수 있는 시간이 즐거운 모양이었다. 한적한 일상이었다. 

 

 일행이 마을에 들어온 날 저녁, 갈은 뜨개질을 하면서 막 방으로 들어서는 재찬을 보며 말을 건넸다. 

 

 “아무 일도 없는 고장이라는 게 신기하네요. 이렇게 평화로운 마을이 있을 줄은 몰랐어요. 서아사의 난과도 멀고, 아홉 붓이 모두 모여서 만들어지는 세상이라는 건, 이런 곳일지도 모르겠어요.”

 

 “…그렇습니까…?”

 

 재찬은 그리 밝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 거라도 있어요?”

 “아닙니다, 단지…, 이 고장은 삼인이 조화롭게 사는 곳이라고는 할 수 없을 것 같아서.”

 “아…….”

 

 갈이 그제야 뜨개질하던 손을 멈추었다. 

 

 “시겸 도령이나 아리 아가씨께서는 즐거워 보이시니 그건 다행입니다만…, 찾아온 외지인이 상인이 아닐 수도 있다는 의심은 아예 하지 않는 것 같아서요. 상인들만 사는 세상은 이렇겠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갈은 재찬이 약초를 정리하는 걸 물끄러미 보다가 뜨개질 바늘을 내려놓았다. 반비반상으로 태어났다고는 해도 갈은 기류원에게 거두어진 이래로 거의 상인과 같은 삶을 살았다. 한골은 원래 비인이 없는 고장이었다. 비인인 갈의 아버지가 비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죽어야 했을 정도로. 기류원이 갈을 자신의 딸을 대하듯 했고 갈은 상인인 기류원과 상당히 나이차이가 있어 보였으므로 한골에서 갈은 윗손의 딸로 자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저택 밖으로 한 걸음도 나갈 수 없다는 점만 빼면. 

 

 “재찬은…, 날 만나기 전에 많은 곳을 봤겠죠. 상인들만이 사는 고장도 처음이 아닐 거고요. 그런 곳에 비인이나 천인이 들어오면 어떻게 되나요?”

 

 “그렇게 많은 곳을 본 것은 아닙니다만…, 아사나 한골을 포함해서 동북쪽은 보통 비인이 적더군요. 상인들이 뿌리를 내린 곳이라. 물론 숲그리매 같은 곳도 있긴 합니다만 동북쪽에서 그런 지역은 적지요. 상인들이 많이 사는 곳일수록 비인에 대한 흉흉한 소문이 많습니다. 남쪽에 이렇게 비인이 적은 곳은 드문 일인데…. 어떨까요. 이 고장에 비인이 나타나면 사람들이 어떻게 대할지는 사실 상상도 되지 않는군요.”

 

 “천인이라면요?” 

 

 갈이 물었다. 재찬은 엷게 웃었다. 

 

 “글쎄요. 천인이라면…, 들키지 않고 들렀다 가거나 아니면 꽤나 시끄러워지거나…. 정착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특별히 문제는 없을 것 같긴 하지만요.”

 

 날개를 숨길 수 있는 천인들이었다. 일부러 날개를 드러내지 않는다면 상인들과 차이를 느끼기는 어려웠다. 정착한다면 상인들보다 나이를 느리게 먹는 몸 때문에 구설수에 오르게 되겠지만. 

 

 “지나친 걱정일지도 모르겠습니다. 그저 평화로운 마을에서 조금 쉬었다 가는 것도 좋겠지요.”

 

 그리고 그날 밤, 일행은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나무를 열심히 깎은 시겸이 지쳐서 먼저 잠들었고, 아리도 실컷 놀다 온 모양인지 깊이 잠들었다. 그렇게 달이 중천에 떠올랐을 때, 갈은 누군가가 흔들어 깨우는 통에 잠에서 깼다. 재찬과 굳은 얼굴의 아리가 갈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쉿, 큰소리 낼 것 없으니 그대로 조심히 일어나거라.”

 

 아리의 몸에서 나오는 목소리는 소리를 죽이고 있긴 했지만 굵고 낮은 노장군의 음성이었다. 

 

 “장군님…?”

 “바깥에 수상한 기척이 있다. 짐을 챙기거라.”

 

 그리고 재찬이 시겸을 일으켰다. 깊이 잠든 시겸은 좀처럼 깨지 못했다. 갈은 조심스럽게 방문을 조금 열어보았다. 방 밖에 사람들의 인기척이 느껴졌다. 한두 명이 아닌 것 같았다. 갈은 다른 쪽의 창을 조금 열어 밖을 내다봤다. 창 쪽에는 사람들이 없는 것 같았지만 방문에서 창까지는 금방 돌아올 수 있는 거리였다. 창을 통해 밖으로 나가기에는 창이 너무 작아 재찬과 시겸은 나갈 수 없어 보였다. 

 

 “이게 다 무슨……?”

 

 그 때 부스스 잠을 깬 시겸이 영문을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마을 사람들이 금방 들이닥칠 게야. 무슨 꿍꿍이인지, 잠들면 이 아이를 데려가겠다고 수군거리는 걸 들었다.” 

 “…아리를…?”

 “뭐든 무기가 될 만한 게 없느냐?”

 “…무기라는 게…….”

 

 시겸이 말했다. 그들이 붓을 모으기는 했지만 붓 중에 무기로 쓸 수 있는 것은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일단 무슨 일인지 알아보죠. 도망칠 곳도 없어 보이고요.” 

 

 갈이 자신의 바랑을 등에 매면서 말했다. 시겸은 자신의 조각칼을 물끄러미 보다가 조금 한숨을 내쉬고 짐 안에 칼을 집어넣었다. 함께 여행을 떠난 이후로 자신은 나름대로 일행 안에서 도움이 되려고 하고 있었지만, 자신의 ‘붓’이 어떤 식으로 일행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지는 아직도 확신이 없었다. 특히 이런 순간에, 다른 사람들로부터 일행을 지킬 수 있는, 적어도 자신의 몸 하나를 지킬 수 있는 정도의 물건일 수는 없을까 아쉽기도 한 것이다. 이 칼 외에 다른 것이 자신의 붓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었다. 이 ‘붓’을 자신이 제대로 쓰고 있는 게 맞을까 고민하는 것이었다. 

 

 시겸이 방에 불을 켰다. 밖에서 나던 인기척이 일순 멎었다. 갈은 시겸을 한 번 보고는 입술을 조금 깨물고 방문을 활짝 열고, 밖으로 나왔다. 세 사람이 그 뒤를 따랐다. 마당에는 십여명의 남자들의 그림자가 보였다. 주인 남자가 가장 앞에 서 있다가 들고 있던 나무에 불을 붙였다. 주변이 환해지면서 당황한, 굳은 얼굴의 마을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일행은 마당으로 내려서며 주인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무슨 일이시죠? 이렇게 한밤중에.”

 “…….”

 “이야기 할 게 있으시면 낮에 하시지 그러십니까.”

 

 대답 없는 사내에게 재찬이 되물었다. 집주인인 남자가 할 수 없다는 듯이 다른 이들을 뒤로 물리고, 입을 열었다. 

 

 “기왕 이렇게 됐으니 그냥 말하겠소. …그 아이, 우리에게 넘기시오.”

 “……저희가 그러겠다고 할 것 같으신가요?”

 

 아리를 데려가겠다고 한 이들은 처음이 아니었다. ‘나그네’의 존재를 처음 알았던 마을, 단풍나무가 유난히 붉었던 산속 마을 사람들,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사라진 채로 과거의 환상 속에서 헤매던 고장의 사람들도, 아리를 놓고 가라 말했다. 못말에선 이름난 넋업사니가 자신의 뒤를 잇지 않겠느냐고 아리를 설득하기도 했다. 아이를 잃은 사람들, 뒤를 이을 자식이 없는 이들이 떠돌이 무리에 어린 아이 혼자서 있는 걸 보고 안쓰러워 말을 걸곤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이들은 그런 것 같지 않았다. 이 고장에 아이가 없는 것도 아니고 아리가 넋업사니인 것을 이들에게 밝힌 것도 아니었으므로. 

 

 “어른 하나에 소년 둘, 어린아이 하나, 작은 마을이라곤 해도 이 마을 사람들 모두를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도대체 왜 아리를 데려가려는 건데?”

 

 시겸이 짜증을 섞어 말했다. 이럴 때에, 저들을 제압할 무기 하나 없다는 것에 화가 치밀었다. 

 

 “배를 못 낸지 달포가 다 됐어. 맑은 날씨가 배만 띄우면 파도로 뒤집혀서, 벌써 배를 몇 척이나 손봤는지 몰라. 이러다간 다들 굶어 죽을지도 모른단 말이지.” 

 

 “…내일은 배가 나갈 거라 한 말은 거짓말이었군요.”

 

 “아니, 날이 밝으면 배가 나갈 거야. 바다를 달랠 제물을 싣고 말이지.” 

 

 사내가 말했다. 갈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오랫동안 잊고 있었던 것이 다시 기억에 떠올라, 가슴이 지끈 아파왔다. 제물 중에 으뜸은 사람 제물이라 했다. 단풍나무가 붉던 그 마을에서도, 사람들은 기우제 제물로 과부의 어린 자식을 제물로 바쳤더랬다. 이곳도 같은 일을 하려는 거였다. 변덕스럽게 파도가 일어 배를 못 띄우는 바다를, 사람 제물을 바쳐서 달래려는 거였다. 

 

 “이것도 다 감님의 뜻이야. 외지인이라고는 들어오지 않던 곳에 이렇게 제물이 되려고 와 주었으니. 좋게 아이만 넘겨주면 다른 사람들은 무사히 나갈 수 있도록 해 줄테니까.” 

 

 “멋대로 말하지마! 누가 아리를 넘겨준대!”

 

 시겸이 버럭 소리쳤다. 주인 남자 뒤의 청년이 TM게 웃으며 말했다. 

 

 “넘기지 않으면? 이 마을 사람들 전체와 싸워서 이기겠다고?”

 

 “…듣자듣자 하니 이것들이 못하는 소리가 없군.”

 

 우렁차고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마을 사람들은 놀라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주변에서 들릴 리가 없는 목소리였다. 갈이 아리를 돌아보았다. 아리가, 장군의 넋을 업은 채로 일행 앞에 나왔다. 

 

 “어리석은 것들 같으니라고! 바다에 이 몸을 바치겠다고? 할 수 있으면 해 보아라! 넋업사니를 바다에 넣고 그 업을 니놈들이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이게 무슨….”

 

 당황한 사람들에게 재찬이 말했다. 

 

 “부담스러우실까봐 이야기 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넋업사니가 왔다고 호들갑떠는 걸 싫어하셔서 말이지요.”

 

 “…허튼 소리 마라, 저런 어린애가 넋업사니라니…!” 

 “기다리게. 정말 넋업사니라면…….”

 

 주인 뒤에 서 있던 청년이 일행들에게 다가오려 하자 주인 남자가 팔을 들어 제지했다. 

 

 “…믿지 못한다 말이냐? 어디 이 몸에 손끝 하나라도 대 보거라!”

 

 아리가 조금 더 사람들에게 다가갔다. 재찬은 긴장하면서 갈과 재찬의 눈치를 살폈다. 자신이 데리고 도망칠 수 있는 사람은 한 명, 남은 두 사람이 자신이 돌아올 때까지 마을 사람들 사이에서 버틸 수 있을지 알 수가 없었다. 누구부터 먼저 피하게 할지 정할 수도 없다. 처음 ‘새벽돋이’ 에서 시겸을 처음 만났을 때, 곱게 자란 것 같은 소년이 일행 안에 들어오겠다는 것이 재찬은 영 마뜩찮았다. 하지만 그가 붓의 주인이었기 때문에, 그 붓을 일행에게 넘길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갈의 의견에 따라서 시겸과 동행하기로 한 것이었다. 시겸이 이런 소년이 아니었다면, 최소한 성년은 지난 상인이었다면 조금은 든든해졌을 지도 모른다. 지금 같은 상황에서 시겸을 믿고 갈이나 아리를 먼저 데리고 이 곳을 뜰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시겸은 재찬이 챙겨야 할 또 하나의 소년일 뿐이었다. 

 

 “장군님께서 더 진노하시기 전에 길을 터 주세요.”

 

 갈이 말했다. 재찬은 갈이 움켜쥔 주먹 끝이 파리하게 떨리는 것을 보고 있었다. 이 사람들과 부딪혀서 싸우고 싶지 않을 것이다. 어떻게든 원만하게 이곳을 뜨고 싶을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아리가 넋업사니라는 것만으로 상황이 달라질 수 있을까. 

 

 “정말로…, 넋업사니시란 말씀이에요?”

 

 조금 높은 목소리가 섞여들었다. 주인 남자가 놀라 목소리가 난 쪽을 돌아보았다. 횃불을 들고 한 여자가 일행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일행은 본 적 없는 여자, 이제 갓 스물을 넘겼을까 싶은 까무잡잡한 여자가, 무릎을 조금 넘길 폭 넓은 바지 차림으로 일행들 바로 앞에 섰다. 

 

 “…저희가 알아서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아가씨.”

 “됐어요. 너무 늦어서 와 봤더니, 이야기가 다르잖아요. 뜨내기 외지인 중에 제물로 좋은 계집아이가 있다고 하더니, 넋업사니시라면.”

 

 매몰차가 젊은 여자가 주인 남자에게 쏘아붙이고는, 일행을 보았다. 

 

 “정말로 넋업사니시라면, 어째서 달포가 다 되어가도록 바다가 저렇게 변덕을 부리는지 알아내시겠죠. 바다가 저러는 게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에요. 제물을 써도 두 달만 지나면 또 같은 상황이죠. 다른 바다를 찾아가고 싶어도 예삿일이 아니고, 뱃일밖에 안 한 사람들이 뭍으로 깊이 들어가는 것도 쉽지 않아요.”

 

 “…처음부터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좋았을 걸요.”

 

 갈이 말했다. 

 

 “네가 이 고장 배들의 주인이구나. 좋다, 내 이 아이에게 바다를 보게 할 테니, 당장 이것들을 물려라. 넋업음은 가장 편한 상태에서 해야 하는 법이니라. 또다시 허튼 짓으로 방해하지 말고. 네 등에 붙은 넋들도 해결되겠지.”

 

 아리가, 장군이 말했다. 여자가 움찔하면서 얼굴을 찌푸렸다. 

 

 “다들 물러나, 말하는 대로 해 드리세요.”

 “아가씨…!”

 “넋업사니를 잘못 건드렸다가, 배가 다 못 쓰게 되면 어쩔 거예요? 제 말대로 하세요!” 

 

 아가씨가 홱 하고 돌아섰다. 남자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하나씩 슬금슬금 흩어졌다. 마당에 남은 것은 집주인 남자 한 명 뿐이었다. 

 

 “…그럼 쉬시오. 내가 지키고 있을 테니 몰래 도망갈 생각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요.”

 

 사내가 협박하듯 말했지만 그렇게 힘이 실리진 않았다. 갈은 아리, 장군을 돌아보았다. 장군은 입 끝을 조금 올리며 쓰게 웃고는 돌아섰다. 

 

 “잠을 설쳤으니 들어가자. 이 아이가 조금이라도 쉬어야 하니.” 

 

 

 

 

 장군은 방 안으로 들어오자마자 아리의 몸 밖으로 빠져나갔다. 그와 동시에 아리는 쓰러지듯 잠들었다. 갈은 여자의 등 뒤에 붙은 넋이 뭔지 물어보고 싶었지만 아리는 깨어나지 않았다. 갈이나 시겸, 재찬 모두 잠을 이룰 수 없었다. 그나마 아리가 잠을 자고 있는 것이 다행이었다. 새벽, 동녘이 밝아지기 시작하고 나서도 아리는 깨지 않았다. 완전히 주변이 밝아지고 나서야 부스스,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아리가 일어났다. 

 

 “…아리…?”

 

 조심스럽게 갈이 물었다. 아리는 조금 웃음 지었다. 지난밤의 일을 모두 기억하는 듯, 약간 머쓱한 표정이었다. 

 

 “…바닷쪽으로 가보지 않아서 몰랐어요.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긴 했는데…, 죄송해요. 제가 좀 더 알아봤으면 좋았을 걸.”

 

 “우리도 모두 너무 쉽게 맘을 놓아버렸는걸. 환대해 주는 사람들을 보니 기뻐서. …장군님 말씀으로는 배 주인이라는 아가씨에게 넋이 붙어 있다고 하던데…….”

 

 “응, 맞아요. 봤어요. 아이들…, 아주 어린 아이들이 몇 명이나 붙어 있어요.”

 

 “그게 바다를 달래는 제물…….”

 

 “…아닐 것 같아요. 그 아이들은 바다 이야기는 하지 않았어요. 엄마, 오빠, 언니…. 그런 이야기만 했어요.”

 

 아리는 바랑에서 피리를 챙기고는 옷매무새를 다듬었다. 아직 어린 아이의 모습을 하고 있어도 넋업사니로서 말할 때 아리는 다른 사람처럼 의젓해지곤 했다. 

 

 “준비는 다 됐소?”

 

 방문 밖에서 주인남자가 물었다. 갈이 아리를 보자, 아리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다 되셨답니다. 곧 나갈게요.” 

 

 

 

 

 아리와 시겸이 일행의 가장 앞에 섰다. 겉으로 보기에 갈보다는 시겸이 좀 더 든든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일행의 가장 뒤는 항상 그렇듯 재찬이 맡았다. 아리는 마을 사람들의 안내도 없이 바다로 향했다. 오히려 마을 사람들이 아리가 향하는 곳을 따라가며 수군거리고들 있었다. 배가 묶인 바닷가나 나루터 자리는 일행이 묵은 집에서도 보였지만, 아리가 향하는 곳은 나루터가 아니라 묶인 배 가운데 한 척이었다. 아리는 정확하게 한 배 앞에 서더니, 재찬을 돌아보았다. 

 

 “이 배에 오르시겠습니까?”

 

 아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재찬은 아리를 번쩍 들어올려, 뱃머리에 태웠다. 

 

 “정말 넋업사니가 맞나보이… 어떻게 저 배들 중에 제물 바친 배를 정확하게 찾아?”

 “…우연일 수도 있잖나. 아직은 몰라.” 

 

 사람들이 웅성거리는데, 마을 사람들 가운데 있던 배 주인이라던 여자가 성큼 배 앞으로 다가와, 배 위로 올라탔다. 

 

 “거기와 거기, 두 사람, 노를 젓게.” 

 아리가 모여든 마을 사람들 중에 두 사람을 가리켰다. 그 둘과 함께 일행도 배 위에 탔고, 닻을 올리고 남자들이 노를 젓기 시작했다. 곧 배는 바다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배가 조금 마을에서 멀어졌을 무렵, 돌연 배가 더 나아가지 못하고 멈췄다. 파도의 모양이 이상했다. 흔들흔들 그 자리에서 무언가를 탐색하는 것처럼 배를 둘러싸고 일렁이고 있었다. 

 

 “또 시작이야…. 여기서 더 나가려고 하면 파도가 배를 삼킬 것처럼 높아진다고.”

 

 배주인 여자가 긴장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여기구나.”

 

 아리가 바다를 내려다보고는, 여자를 돌아보았다. 

 

 “…셋, 넷…, 아니, 다섯이야. 다섯 명의 목숨이 여기 먹혔어.”

 “다섯이라고? 아니야! 우리가 제물로 바친 건 넷이야. 바다가 이상해 진 게 작년부터고, 제물은 네 명이었어!”

 “아니, 너희가 죽인 건 다섯이야.”

 

 아리가 말을 자르듯이 말하고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재찬은 아리의 몸속에 희뿌연 것, 젊은 청년의 넋이 스미는 것을 보았다. 그 바로 옆에서 장군이 불편한 표정으로 아리를 보고 있었다.  

 

 “…다들 잊어버렸소…? 아가씨, 내가 여기서 죽었소. 자네들이 그리 했잖나. 아가씨를 넘보는 건 용서할 수 없다고, 자네들이 날 여기서 밀었잖나.”

 

 젊은 청년의 목소리가 떨리며 아리의 입에서 새어나왔다. 순간 노를 젓던 청년들이 놀라며 아리를 보았다. 

 

 “수창…이?”

 

 아가씨의 목소리도 떨렸다. 

 

 “줄낚시를 하다가 큰 물고기를 못 이겨서 바다에 빠졌다고…, 그렇게….”

 “계속 기다렸소, 계속…, 바다에서 허우적대면서, 구해주러 사람들이 올 거라고 필사적으로 헤엄쳤지. 하지만 파도가 너무 높아서, 내 힘이 너무 모자라서….”

 

 아가씨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남자들을 돌아보았다. 

 

 “이게 다 무슨 이야기야! 같은 마을 사람들을 죽이다니! 그러고도 나한테 뻔뻔하게 거짓말을 했다는 거야?”

 “아가씨 그게…….” 

 “내 동생들, 어머니도 여의고 나 하나 믿고 살던 애들…, 그 애들은 어찌 됐소? 아가씨를 언니라고, 누나라고 따랐던 아이들이잖소. 그 애들은?”

 

 “그 애들은…….”

 

 사내들은 대답하지 못했다. 재찬은 여자의 등 뒤에 붙은 어린 넋들의 정체를 그제야 깨달았다. 청년이 아리의 입을 빌어 이야기하기 시작할 때부터, 여자의 등 뒤의 넋들은 아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신이 넋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아이들의 목소리를 전해줄 수 있겠지만, 재찬은 그런 힘은 갖지 못했다. 

 

 “…그 아이들을 거두러 갔을 땐 벌써 집이 비어 있었어. 얼마나 찾았는지 몰라. 하지만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어. 그래서…….” 

 

 “아저씨들이 설마 그 애들도 죽인거야?” 

 

 시겸이 물었다. 사내들은 얼굴이 굳은 채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무슨 짓을……, 그 죄 없는 어린 것들에게 무슨 짓을 한 거야!”

 “……그러고는 바다를 달랜다고 외지인들을 제물로 썼단 말이군요. 당신들은.” 

 

 갈의 말에, 여자가 털썩 주저앉았다. 

 

 “수창…, 나는 몰랐어…. 맙소사, 나는……. 마을 사람들을 풀어서 아이들을 찾으라고 시켰는데 찾을 수가 없어서……. 바다가 갑자기 물길을 막은 게 당신 탓이라곤 생각도 못해서……. 아아, 세상에 이런 일을…….” 

 

 아리가 다시 몸을 떨었다. 청년이 아리의 몸에서 빠져나가고, 장군이 아리의 몸으로 들어갔다. 

 

 “…원혼이 물길을 막았는데, 원혼만을 계속 더하다니, 이 어리석은 것들.” 

 

 싸늘하게 장군이 말했다. 

 

 “미안해 수창……, 미안해……. 난 정말로……. 물길을 터야 한다는 생각 밖에 없었어……. 아니면 이 마을 전체가 어딘가로 옮겨가는 것 밖에 방법이 없어서……. 아버지께 물려받은 자리, 내 대에서 엉망으로 할 수는 없어서……. 수창…, 미안해……. 미안해…….”

 

 여자가 흐느끼기 시작했다. 

 

 “어떻게 하면 이 죄를 갚을 수 있나요? 어떻게 해야…… 수창에게, 그 애들에게, 잘못을 빌 수 있어요?”

 “……아이들의 시체가 있는 곳을 저 자들이 알게다. 제대로 수습해서 새로 장사를 지내 주어라. 억울하게 바다에 빠진 수창, 그리고 너희들이 제물로 바친 억울한 나그네들의 무덤도 만들고, 알겠느냐?”

 

 장군의 목소리가 무거웠다. 

 

 “그리고 저들은…, 질투로 귀한 목숨을 빼앗은 저들은, 응당 댓가를 치러야 할 것이나…, 목숨을 목숨으로 갚는다는 생각은 하지 말거라. 평생 죄책감을 가슴에 안고 사는 것이 더 큰 벌이 될 게야.”

 

 “…그러겠습니다. 그러고 말고요.”

 

 아가씨가 머리를 조아렸다. 

 

 “종을…….”

 

 장군의 말에, 재찬이 기다렸다는 듯 품에서 종을 꺼냈다. 장군이 아리의 몸에서 빠져나가고, 아리는 목에 걸린 피리를 입에 물었다. 물을 부르는 아리의 피리를 배 위에서 불었다간 배 안으로 물이 들이차는 게 아닐까 갈은 순간 걱정했지만, 아리의 얼굴은 평온해 보였다. 아리의 피리에서 낮고 고즈넉한 피리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재찬의 손에서 작은 종이 함께 울렸다. 일행과 이 마을 사람들의 눈에, 배 위에 올라서 있는 청년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여자의 등에 매달린 어린아이들의 모습도. 

 

 여자는 아무 말도 못하고 피리소리와 종소리가 울려 퍼지는 배 위에서 무릎을 꿇은 채로 앉아 있었다. 여자의 눈앞에서 파도가 서서히 높아져서 배를 삼킬 듯 높아졌지만, 파도는 배를 덮치는 대신에 배 밑으로 파고들며 배를 밀어올리기 시작했다. 어린 아이들의, 수창의 넋이 천천히 하늘 위로 떠오르더니 천천히 구름에 섞였다. 들어 올려진 배 옆에 네 개의 흰 연기 같은 것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바다에서 일렁이며 솟아올라, 수창의 넋과 마찬가지로 구름으로 옅어졌다. 피리소리가 조금씩 느려졌다. 재찬의 종소리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배가 다시 낮아지면서 파도가 배를 내려놓았다. 벽을 만든 듯이 배를 둘러쌌던 파도는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잔잔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피리 소리가, 종소리가 멎었다. 

 

 아리의 몸이 푹 앞으로 거꾸러졌다. 기다린 듯이 부축한 건 시겸이었다. 시겸은 땀이 송글송글 맺힌 아리의 이마를 닦아주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맑소릿골’에서 내림굿을 받은 이래로 아리가 넋업음을 오래 한 뒤로는 항상 정신을 잃는 것을 보아온 시겸이었다. 

 

 “…이제 괜찮을 거예요. 마을로 돌아가죠.”

 

 갈의 말에, 사내 둘이 급히 노를 잡았다. 

 

 

 

 

 배가 마을로 돌아가자 바닷가에서 초조하게 기다리던 사람들은 걱정스럽게 여자의 안위부터 살폈다. 마을에서는 바다위에서 일어난 일은 보이지 않았지만 창백한 여자의 얼굴이나 남자들의 처음과 다른 모습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여자는 마을 사람들에게 일행이 한 일을 알렸고, 두 사내의 이야기도 빠짐없이 이야기했다. 성난 마을 사람들이 두 남자를 공격하려는 것을 여자는 겨우 말렸다. 바닷길을 다시 터준 넋업사니께서 이르신 대로 해야 한다는 말에, 마을 사람들은 더이상 입을 대지 못했다. 

 

 뒷수습은 여자와 마을 사람들에게 맡기고, 일행은 쓰러진 아리를 업은 채로 마을을 떠났다. 여자가 몇 번이나 사과하며 고개를 숙였지만 일행은 여자에게 바랄 것이 없었다. 단지 억울한 죽음을 제대로 수습해 줄 것을 거듭 부탁할 뿐이었다. 

 

 “…상인들만의 마을도…, 저런 억울한 죽음이 생기네요.”

 

 마을에서 한참 떨어졌을 때, 갈이 말했다. 

 

 “비인들보고 뭐라고 할 게 하나도 없다니까, 갈 형. 자기들끼리도 저렇게 의심하고 싸우고 하는 걸. 상인들은.”

 “이럴 땐 꼭, 상인이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는군요. 시겸 도령은.” 

 “상인이라고 상인에 대해서 좋은 것만 말할 순 없잖아. 사실이 그런걸. 재찬 형도…….”

 

 뭔가 말하려던 시겸은 말을 삼켰다. 

 

 “제가 뭘 말입니까?”

 “아무 것도 아냐. 그러니까 그냥, 내가 하려던 말은, 서로 못 믿고 의심하는 게 제일 무서운 것 같다고. 상인끼리든, 상인과 비인이든, 상인과 천인이든…. 그러니까 싸움이 생기고, 억울한 일이 생기고, 원한이 생기고 그런 것 같다고.”

 

 시겸이 아리를 업은 팔을 조금 추켜올렸다. 

 

 “힘드시면 제가 업을까요?”

 “하나도 안 힘들어!” 

 

 시겸이 어깨를 으쓱 하고는 씩씩하게 걸음을 재촉했다. 갈은 앞서가는 시겸을 따라 걸으면서 시겸의 말을 곱씹었다. 시겸이 그런 의도가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서로를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것이란 마치 얼마 전의 재찬과 자신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갑자기 일행 앞에 나타난 이부명이라는 자의 말 한마디에 휩쓸려버린 자신이 어리석게 느껴졌다. 낯선 이의 말보다는 오래 함께 걸어온 일행의 행동이 훨씬 더 믿을 수 있는 게 분명한데도. 

 

 마을에서 한참 벗어나 일행은 다시 서쪽으로 향했다. 아리가 맘 편히 있을 수 있는 산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가는 길에 ‘나그네’의 정체를 알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터였다. 그러다보면 언젠가는 아직 손에 들어오지 않은 천인들의 붓의 실마리도 찾을 수 있을 거라고, 갈은 스스로 그렇게 달래며 힘차게 걸어가는 시겸의 뒤를 따랐다. 여름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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