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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피에타

2019.04.01 02:0904.01

피에타

 

김두흠(아이)

 

 


1

 

요즘은 컨트리 음악만 듣는다. 
내가 이런 말을 다 하게 될 줄이야.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음악은 좋아하지 않았다. 그때까지만 해도 음악은 무서운 힘을 갖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피했다. 

히야, 정말 굉장한데. 소리에다가 무슨 초능력이라도 걸어둔 건가. 음악 듣기 전에는 내 기분이 상당히 좋았어. 귀에서 새의 지저귐이 들릴 것만 같았으니까. 기분이 좋아서 음악을 틀었는데, 듣고 있자니 우울해져. 공기가 막 나를 짓눌러서 질식할 것만 같고. 그러면 이게 타살이냐 자살이냐. 한마디로 죽음에 대한 공포가 막 꿈틀대더라고. 그래서 음악을 꺼버렸어. 음악이 이게, 듣는 사람의 기분을 완전히 장악해 버리는구나. 멜로디가 경쾌하면 듣는 사람도 흥겨워지고, 멜로디가 축축 가라앉으면 듣는 사람도 땅 속으로 푹 꺼지고 싶어지고. 음악을 듣기 전의 감정이 어땠는지, 그런 건 상관이 없어. 기뻤든 슬펐든 상관이 없어. 이제부터 들을 음악이 어떤지가 중요하니까. 그 음악에 의해서 감정이 좌우돼.

음악은 이런 힘이 있는 것 같아서 피했다. 좋아하는 가수도 없었고, 그러므로 CD를 산 적도 없었다. 사람들이 누구 누구 콘서트에 간다고 하면, 그 위험한 데를 왜 갈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갔다가 괜히 목숨이라도 끊으면 참 안타까운 일인데. 부모님이 슬퍼하실 거야. 그런 생각을 했다. 음악은 그런 힘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전에 사귀던 여자 친구가 당시에 좋아하는 가수의 콘서트를 보러 가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나보고 같이 가자고 하기에 겁이 나서 싫었지만, 그런 얘기를 또 곧이곧대로 하면 남자 체면이 말이 아니라서 잠시 우물쭈물했다. 그 틈을 노려 여자 친구가 강제로 내 표도 예매를 하려는데, 컴퓨터 모니터를 통해 본 콘서트 티켓 값이 8만 원이었다. 지금 시세로 따져도 비싸지만, 당시로서는 그 티켓 값의 체감 금액은 거의 8억 원에 육박했다. 8억 원. 아마 전부 10원짜리로 바꾸면 0.1초 만에 깔려죽을 수도 있는 금액이었다. 

이래저래 음악은 나를 죽인다. 그래서 피했다. 그러던 내가 요즘은 컨트리 음악을 즐겨 듣는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이번 달부터 컨트리 음악만 듣고 있다. 오늘이 7일이니까, 딱 일주일 된 셈이다. 컨트리 음악만 듣게 된 게. 
좋아하는 가수, 좋아하는 노래, 그런 건 아직 없다.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한 지 이제 일주일밖에 안 됐으니까. 나는 좋아하는 소설가도 이십대 후반이 되어서야 찾았다. 온갖 소설들을 천칠백 권 넘게 읽다가 비로소 찾았다. 그런데 이 소설가는 요즘 통 소설을 안 쓴다. 아주 가끔 짤막한 에세이가 신문에 실릴 뿐이다. 주로 여행담이나 음식에 관해서. 그래서 나는 그 소설가가 소개한 여행지나 음식은 전부 스크랩을 해뒀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여행지는 안 갈 것이며, 그 음식은 공짜로라도 안 먹을 것이다. 

물론 커피집에서도 컨트리 음악을 틀어놓고 있다. 그러면 손님들이 음악에 크게 관심을 갖지 않는다. 처음에는 재즈를 틀었다. 왠지 커피집과 어울리는 음악은 재즈가 아닐까 하는 생각 때문이었다. 작은 커피집에서 울려퍼지는 재즈 선율. 이 한 문장이 머릿속에서 입간판 조명처럼 반짝거리기도 했고. 그래서 재즈 들려주는 웹사이트를 검색해 찾아냈다. 24시간 무료로 재즈를 들려주는 곳이었다. 뭐 이런 아름다운 웹사이트가 다 있는지 원. 

사람들은 재즈를 좋아했다. 백이면 백 재즈 들려주는 웹사이트 주소를 알려달라고 했다. 그러면서 다른 이야기들도 몇 마디 오고갔다. 그게 귀찮았다. 재즈 때문에 손님들과 대화 나누는 일이 잦아진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귀찮아서 인상을 찡그린 적도 몇 번 있었고. 그래서 음악을 아예 틀지 말까 고민도 했다. 커피집이라고 해서 반드시 음악을 틀어야 할 필요는 없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의 유명한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런 비슷한 말을 하지 않았던가.
음악을 틀지 않아서 그곳이 좋다.

어떤 음악은 소음일 수 있다. 음악에 대해 잘 모르면 그냥 안 트는 게 낫다. 뭐 이런 의미였겠지. 딱 나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무라카미 하루키의 말에 힘입어 과감히 음악을 꺼버렸다. 음악 없는 커피집 이틀 째 되던 날, 한 여자 손님이 들어오면서 이렇게 중얼거렸다.

“숨 막혀.”

아주 작게 중얼거렸는데도 그 말소리가 들렸다. 그만큼 커피집은 숨 막힐 정도로 조용했다. 쥐죽은 듯 고요했다. 손님도 없고 음악도 없는 커피집은 숨 막히는 곳이었다.
그때 알았다. 음악은 소음의 역할도 한다는 것을. 그리고 그 소음도 필요하다는 것을. 
그래서 다시 음악을 틀었다. 음악에 대해 잘 모르기 때문에 그냥 재즈를 틀었다. 그리고 문득문득 생각이 날 때마다 음악을 무료로 틀어주는 웹사이트를 검색했다. 그렇게 웹사이트 몇 곳을 알아냈고, 그러다 보니 재즈 말고 다른 장르의 음악도 틀게 되었다. 

요즘은 커피집에서 컨트리 음악만 튼다. 재즈를 틀었을 때와는 다르게 손님이 이 노래 제목이 뭔지, 누가 부르는 건지, 웹사이트 주소가 뭔지 묻지 않는다. 그래서 컨트리 음악이 좋다.
그 아주머니를 알게 된 것도 다 재즈 때문이다. 
실은 관심도 없으면서. 관심이 있는 척 노래가 좋다고 얘기하면 지적인 이미지라도 풍기는 줄 안다. 재즈는 그런 힘이 있다. 허영을 부추기는 힘. 괜히 아는 척, 관심이 있는 척, 좋아하는 척한다. 
그 아주머니도 그랬다. 자신도 재즈를 좋아한다고 말했다. 품에 안은 아기 고양이를 쓰다듬으면서. 
아주머니가 쓰다듬어주자 아기 고양이는 눈을 가늘게 뜨면서 가르릉 가르릉 소리를 냈다. 

“노래가 참 좋네요. 이건 사장님이 따로 컴퓨터에 저장해 놓은 음악들인가 봐요?”

“아닙니다. 이렇게 재즈만 24시간 틀어주는 웹사이트가 있더라고요. 그것도 무료로요.”

“호, 그런 아름다운 곳이 있어요! 재즈 좋아하는데도 그런 건 모르고 있었네요.”

“네, 그게 다들 모르시더라고요. 하긴 뭐, 저도 안 지는 얼마 안 됐습니다. 인터넷 포털사이트 검색창에 ‘재즈 들을 수 있는 곳’이라고 쳐서 검색을 해봤거든요. 별로 큰 기대는 안 하고 검색을 했던 건데요, 의외로 모니터에 몇 군데가 뜨더라고요.”

“그중에서 무료로 들을 수 있는 곳을 선택하신 거군요?”

“그렇죠. 무료로 듣는 곳이 있는데, 굳이 회원가입까지 해가면서 제 돈 주고 들을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아, 그냥 장난으로 물어보셨을 텐데, 제가 너무 딱딱하게 말씀을 드렸네요. 죄송합니다.”

“아니에요. 오히려 장난스러운 질문에 그렇게 진지한 반응을 보이니까 순수해 보이시는데요, 후후후.”

‘순수해 보이시는데요.’ 이 말은 분명 의도적으로 한 게 틀림없다. 왜냐하면 나는 이 말을 듣는 순간 아주머니에 대한 경계심을 풀었으니까. 
게다가 아주머니는 후후후 웃으면서 또다시 품에 안고 있던 아기 고양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런데 마침 아주머니의 등 뒤로 햇빛이 비춰서일까, 웃음 가득한 얼굴로 고양이를 쓰다듬는 모습이 신성해 보이기까지 했다. 굳이 비유를 들자면 성모 마리아 같달까. 음, 성모 마리아인가. 피에타 조각상이 먼저 떠올랐던 것 같기도 하고. 

“요즘은 재즈 틀어주는 커피집이 별로 없어요. 대부분이 인기가요 위주로 틀더라고요. 그런 노래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이 들어오니까 어쩔 수 없겠죠. 괜히 커피집에서 재즈 같은 거 틀면 나 같은 노땅들이나 가끔 들어오지.”

그런 건 잘 모르겠지만, 재즈를 틀어놓으면 가끔 몸에 닭살이 돋기는 한다. 나는 전혀 낭만적인 인간이 아닌데, 커피집 안에서 재즈가 울려퍼지고 있는 것만으로 사람들이 나를 낭만적인 인간으로 착각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몸에 닭살이 돋는다. 
낭만적인 인간, 생각만 해도 닭살이다. 

아침에 일어나서 침대에 걸터앉아 커피를 마신다. 잠이 좀 깼다. 발코니로 나가 의자에 앉아서 잠시 책을 읽는다. 10분 혹은 20분. 비록 짧은 시간이지만, 집중은 가장 잘 된다. 책을 덮고 잠시 눈을 감는다. 오늘 하루 일과를 머릿속으로 정리한다. 오늘 하루가 반드시 계획대로 되지는 않겠지만, 이렇게 머릿속으로 한번 정리를 하면 한결 여유가 생긴다. 집안으로 들어와 시리얼을 우유에 부어 먹은 뒤 샤워를 한다. 이때 중요한 건 시리얼을 우유에 붓는 거다. 우유를 시리얼에 붓는 게 아니다. 그런 뒤 고양이 사료를 보충해 주고 물도 새로 떠주고 나서 옷을 입고 지하주차장으로 간다. 오늘은 월요일이니까 차는 렉서스 인스피레이션을 탄다. 스포츠카라 경쾌하면서도, 그 경쾌함을 억누르고 있는 차분함이 돋보이는 외관이다. 월요일이라는 설정과 잘 어울린다. 주말에 푹 쉰 덕분에 몸은 가볍지만, 한 주를 또 시작해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은 무겁다. 회사까지 가는 동안 차 안에서 재즈를 듣는다. 오전 업무를 끝내고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동료 세 명과 함께 파스타 요리 잘 하는 집으로 간다. 45분 뒤 레스토랑을 나와서 근처 ‘커피5’에 가 커피를 산다. 물론 커피값은 각자 낸다. 그리고 커피를 든 채 길 건너 고궁에 간다. 점심시간에는 주변 직장인들이 와서 산책할 수 있도록 무료로 개방한다. 고궁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동료들과 가벼운 농담을 주고받는다. 동료의 농담에 하하하 웃기도 한다. 웃으면서 고궁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이 참 파래.” 내 말에 동료들도 일제히 고궁의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러게. 참 파래. 좋다.” 사무실에 들어가 업무를 보다 내년 초부터 개최할 멸종동물 보호 콘서트 관련 2차 리허설 점검 때문에 회사를 나선다. 1차 리허설 때도 문제 삼았던 부분들을 콘서트 기획사에 다시 한번 강력히 전달한다. 다음 주 3차 리허설 때도 똑같은 문제가 발생한다면, 이번 콘서트 개최 여부를 보류하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감정이 격해질 것 같아 잠시 건물 밖으로 나온다. 주머니를 뒤지지만 담배가 없다. 아차, 금연 이 주째지. 그때 본부장한테서 전화가 온다. 나는 일단 이번 콘서트를 준비하는 기획사의 안일한 프로그램 구성에 대해 간략히 보고한다. “어, 알았어. 내가 한번 그쪽 임원진이랑 통화를 해볼게. 거기가 가끔 그렇게 엉성한 시나리오대로 진행하려고 할 때가 있어. 좀 골치 아픈 데야.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아 참, 그리고 오늘 늦었으니까 회사 들어오지 말고 거기서 바로 퇴근해. 내일 보자고.” 나는 집으로 가려다 도중에 방향을 돌려 대형 서점으로 간다. 사람들은 대부분 종이책은 인터넷 서점에서 산다. 나 역시 마찬가지다. 시간도 절약되고, 책값도 싸고, 구입 방법도 간편하다. 무겁게 들고 올 필요도 없다. 그럼에도 가끔 대형 서점에 간다. 새로 나온 요리책을 살피러. 요즘은 디저트류에 관심이 많다. 일본의 천재 파티시에라고 불리는 사람이 만든 케이크는 맛과 모양이 환상적이다. 비슷하게라는 말조차 무리라는 걸 안다. 그냥 그가 만든 걸 나도 대충 흉내내 보고 싶다. 서점을 나와서 근처 레스토랑에 들어간다. 혼자서도 조용히 샤부샤부를 먹을 수 있는 곳이다. 고기가 먹고 싶을 때는 가끔 이렇게 샤부샤부를 먹는다. 삼겹살이나 갈비는 아무래도 식당에 혼자 들어가서 먹기가 좀 불편하다. 그렇다고 집에서 삼겹살이나 갈비를 먹었다가는 일주일 이상 창문을 열어놔야 할 것 같고. 게다가 이곳에는 근처에 영화관도 있다. 볼 만한 영화를 며칠 전에 하나 골라놓기는 했는데, 예매도 안 한 상태라 바로 티켓을 구할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겠다. 만일 티켓을 구하지 못하면 위층으로 올라가, 커피5에서 한두 시간 책을 읽다 집에 가도 된다. 아참, 커피5에 가면 테이블에 이런 설명이 붙어 있다.

커피5는 커피 업계의 유니콘 기업 신화를 이끌고 있는 브랜드입니다. 커피5는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소를 비롯해서 라떼 종류도 블렌딩 원두가 아닌 예가체프로 만드는 파격을 시도하고 있습니다. 신맛 나는 카페라떼를 내세워 커피 업계의 악동으로 입소문이 자자합니다. 대신 예가체프 생두를 볶을 때 미디엄이나 하이 로스팅이 아니라 풀시티 로스팅으로 볶습니다. 창업자 케일의 말을 빌리자면, 본인이 가장 즐겨 마시는 커피가 예가체프라고 하네요. 망할 신맛 때문에 마셔도 마셔도 질리지가 않는다고. 좋아할 수가 없으니 질리지도 않는다고. 커피5의 로고는 이렇습니다.

커피5로고.jpg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커피를 뜻합니다. 

음, 이런 인간을 낭만적이라고 하는 건가. 그렇다고 한다면 나와는 사는 세계가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나는 이런 자가 좋다. 

살아가는 게 힘들 때, 가끔 한 번씩 화장실로 가, 커터칼로 자기 손목을 살짝살짝 긋는, 그런 자가 좋다. 

“아직 젊으신데요. 노땅이라는 표현은 좀 지나치십니다. 열 살 먹은 아이가 ‘인생 살아보니 참!’ 뭐 이런 거랑 같은 맥락인 것 같습니다. 외국에는 재즈 페스티벌 같은 게 많은 것 같더라고요. 아무래도 재즈는 현장에서 라이브로 듣는 게 제맛인데요, 그런 기회가 많지 않아서 좀 아쉽습니다. 그런 기회가 많다면, 음악을 좋아하는 취향도 다양해질 수 있을 텐데 말입니다.”  

“음, 그렇겠네요. 어떤 건 접할 기회가 많지 않으니까, 상대적으로 쉽게 접할 수 있는 음악 장르를 좋아할 수밖에 없겠어요. 선택의 폭이 좁아지겠죠. 하지만 또 쉽게 접하는 것들은 그만큼 쉽게 싫증을 내더라고요. 그러니까 또 변하는 속도가 빠르고. 빨리 빨리 바뀌어야 그 사람들의 관심을 계속 끌 수 있으니까요. 그러다 보니 인기가요 같은 노래들은 점점 더 저와는 멀어져요. 뭐 좀 관심을 가져보려고 하면 사라지잖아요. 그러고는 다른 노래가 유행이 되고. 이런 건 노래뿐만이 아니죠. 뭐든 쉽게 얻으면 쉽게 버려요. 고양이도 마찬가지죠. 까다로운 임보자한테서 힘들게 입양한 고양이는 어떻게든 키워보려고 해요. 고양이가 아무리 집안에서 말썽을 부려도 말이에요. 하지만 그렇지 않은 고양이는 사정이 달라요. 길에서 주운 고양이라든가, 요즘은 인터넷 카페 같은 곳에서도 고양이를 공짜 혹은 아주 쉽게 분양을 해주더라고요. 그러니까 그런 곳을 통해서 얻은 고양이. 그런 애들은 키우다가 병들면 바로 버려요. 조금만 귀찮아도 버리고요. 그나마 어떻게든 다른 주인 찾아주려고 애쓰면 양반이죠. 그런 노력조차 안 해요. 그냥 자기들 집하고 좀 떨어진 데로 데려가서 버리고 와요. 산 채로 껍질을 벗겨서 죽여야 돼요, 그런 인간들은. 새끼일 때는 실컷 가지고 놀다가, 이제 다 커버리니까 버리잖아요. 싫증난 장난감 버리듯이 하잖아요. ‘아빠, 어디 가세요? 저 두고 어디 가세요?’, ‘엄마, 어디 가세요? 저 두고 어디 가세요?’ 고양이도 다 알아요. 자기가 지금 버림받는 거 알아요. 그래서 눈 동그랗게 뜨고 주인 얼굴 쳐다보면서 묻거든요. 자기 두고 어디 가냐고요. 장난감은 그러지 않죠. 버려도 주인을 쳐다보지 않아요.”

“재즈 얘기 하다가 고양이로 넘어갔습니다. 그리고 갑자기 감정이 격해지셨고요. 손님은 고양이를 많이 좋아하시나 봅니다.”

“네. 좋아하죠. 혹시 고양이 키워본 적 있으세요?”

“아니요. 없습니다.”

“그럼 강아지는요?”

“강아지도 안 키워봤습니다. 동물은 키워본 적이 없습니다. 어머니하고 누나가 동물을 싫어해서요.”

“그것 참 드문 경우네요. 보통은 고양이든 강아지든 한번씩 다 키워보셨던데. 혹시 지금 혼자 산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네. 혼자 삽니다.”

“잘 됐네요. 제가 어미 잃은 고양이나 주인한테 버림 받은 고양이들 임시로 보호하는 봉사를 하고 있거든요. 지금 안고 있는 얘도 어미를 잃었어요. 그렇다고 어미가 죽은 건 아닐 거예요. 어딘가 어미가 살아 있기는 할 텐데요, 어미 역시 길고양이라 찾기는 불가능하죠. 어제 저녁에 산책하러 저 위 석촌호수에 갔었어요. 석촌호수 주변을 걷고 있는데, 어디서 아기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리더라고요. 그래서 소리 나는 쪽으로 가봤더니 글쎄, 초등학교 저학년 정도 돼 보이는 남자 애들 셋이 얘를 데리고 막 장난을 치더라고요. 얘 이제 태어난 지 두 달 정도 됐어요. 이런 애를 글쎄 남자 애들 셋이 공중에 휙휙 던지면서 가지고 놀더라고요. 공 주고받는 놀이 하듯이 말이에요. 그러니 얘가 얼마나 무서웠겠어요. 막 자지러지게 울죠. 그래도 누구 하나 나무라는 사람들이 없어요. 다들 나 몰라라 하죠. 석촌호수에 가끔 그런 애들이 와서 놀아요. 길에서 새끼 고양이 주어다가 가지고 노는 애들. 그러고는 싫증나면 호수에 휙 던져버려요. 아니면 길 옆 숲에 내버리던가. 호수에 빠진 애들은 바로 죽어요. 며칠 있다가 석촌호수 관리하는 분이 건져내죠. 그리고 숲에 버려진 애들은 졸지에 어미를 잃게 되는 거고요. 날이라도 따뜻하면 다행이죠. 춥기라도 해봐요. 그런 애들은 새벽에 추워서 벌벌 떨다가 죽어요. 죽어야 할 것들은 그 애들인데 말이에요. 얘도 그렇게 됐을 거예요. 싫증나면 석촌호수나 길 옆 숲에 휙. 그래서 일단 얘부터 애들한테서 빼앗았어요. 빼앗고 나니까 살인 충동이 조금 약해지더라고요. 그래서 참을 수 있었어요. 안 그랬으면 죽였을지도 몰라요. 세 명 다 산 채로 껍질을 벗겨서 죽였을지도 몰라요. 그런 애들은 커봐야 제대로 된 인간이 될 리 없죠. 어떤 범죄를 저지르게 될지 알 수 없는 일이고요. 하지만 분명한 건, 그건 정말 끔찍하게 잔인한 범죄일 거라는 거예요. 그러니 어쩌면 미리 그 애들을 죽이는 게 인류에 도움이 될 수도 있겠죠. 하지만 어쨌든 살인 충동은 약해졌어요. 그리고 품에 안긴 새끼 고양이는 배가 고파서 작게 울고 있었고요. 그래서 그냥 집에 왔어요. 일단 얘한테 뭘 좀 먹여야 했거든요. 목욕도 시켜야 했고요. 오늘은 병원에도 다녀왔어요. 길에서 지내던 애들은 일단 기생충 검사를 해봐야 해요. 질병에 그대로 노출이 된 채 지냈으니까요. 다행이 아픈 데는 없더라고요. 이런 애들이 아프기까지 하면 정말 불행한 거죠. 제가 데리고 있을 때 아프면 괜찮아요. 치료받으면 되니까요. 하지만 다른 주인을 만나 그 집에서 잘 지내다가도, 몸이 조금만 아프면 버림을 당해요. 아니면 저한테 돌려보내거나. 그렇게 해서 저한테 되돌아온 고양이도 많아요. 아마 버림받은 고양이는 그보다 더 많을 거고요. 그런 생각 하면 길고양이 임시 보호하는 봉사 활동 그만 하고 싶어지죠. 모르면 슬프지도 않을 테니까요. 물론 고양이가 버림받는 건 제 잘못도 있을 거예요. 제가 너무 쉽게 고양이를 새 주인한테 주니까요. 조건을 좀 까다롭게 해서 줘야 하는데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서 분양비를 받는다든가, 아니면 고양이를 키우겠다는 사람의 집에 가본다든가 하는 거요. 그런데 저는 그렇게 못 하겠더라고요. 제가 까다롭게 굴면 고양이 키우겠다고 나서는 사람이 없을 것 같아서요. 그래서 그냥 누가 고양이 키우겠다고 하면 무작정 줘요. 그러네요. 제 잘못이 가장 큰 거 같아요. 열 마리 다 구하려고 하지 말고, 그중 한 마리라도 제대로 구할 생각을 해야 하는데 말이에요.”

그러면서 아주머니는 또 품에 안은 고양이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고양이는 기분이 좋은지 눈을 가늘게 뜬 채 가르릉 가르릉 소리를 냈다.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면서.
처음에는 그 모습이 경계심 때문인 줄 알았다. 나를 힐끔힐끔 쳐다보는 건 낯선 사람을 경계하느라 그러는 줄 알았다. 

“가끔 보면 고양이는 정말 묘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기 운명을 아는 것 같거든요. 혼자 산다고 하셨죠? 잘 됐네요. 고양이 한번 키워보세요.”

 

이름은 몽요. 태어난 지 약 3개월 됐다. 나와 함께 산 지는 1개월 정도 됐고. 
믿을 수가 없었다. 겨우 1개월밖에 안 됐다니. 분명 1년은 넘었을 거라 생각했다. 그만큼 하루하루가 끔찍했으니까. 하지만 몽요의 몸무게는 아직 1키로 미만이었다. 400그램인가 500그램인가 그렇다. 한 살 먹은 고양이의 몸무게라고 할 수는 없다. 나와 함께 산 지 1개월이 맞다. 

그 1개월 사이에 가장 크게 변한 건 역시 집이다. 몽요와 내가 함께 살고 있는 집. 
나는 이 집에서 혼자 5년 가까이 살았다. 사는 동안 도배를 새로 한 적도 없었고, 장판을 새로 깐 적도 없었다. 그만큼 집을 더럽힐 일이 없었다. 집은 그냥 잠만 자는 장소였으니까. 하지만 몽요와 생활한 지 이제 1개월. 나는 요즘 도배를 새로 할까 말까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물론 도배를 새로 하게 된다면, 장판까지 하는 걸로 해서 패키지 할인을 노려볼 생각이다. 

지구상에서 고양이가 멸종하지 않는 한, 도배와 장판 관련 직종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미래에도 일자리가 사라질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고양이 눈에 벽지는 벽지가 아닌 걸로 보이나 보다. 아니면 벽지가 고양이한테 말이라도 거나. 자기 좀 긁어달라고 고양이한테 애원이라도 하나. 단 1개월 만에 벽지가 작살이 났다. 큰 방, 작은 방, 거실 마찬가지였다. 죄다 작살이 났다. 저녁에 퇴근해서 집에 들어가면 고양이 발톱에 무참히 난자당한 벽지가 바닥에 수북이 쌓여 있었다. 갈기갈기 찢긴 채 쌓여 있었다.

장판도 처지는 비슷했다. 고양이 앞에서는 속수무책이었다. 이빨에 뜯기고 발톱에 뜯기고. 그야말로 만신창이가 돼버렸다. 
의자는 또 어떤가. 3년 넘게 사용하는 동안 나는 저 의자의 안락함에 매번 감탄했다. 휴일이면 컴퓨터로 영화를 다운로드 받아 보는데, 이럴 때는 앉은 자세가 매우 중요하다. 두 시간 가까이 앉아 있어야 하기 때문에 의자가 좋지 않으면 아무리 영화가 재미있어도 오래 앉아 있을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저 의자는 영화의 재미를 완벽하게 느낄 수 있도록 해줬다. 내가 아무리 몸을 상하좌우 마구 비틀어도, 현실과 비현실의 경계를 마구 넘나들어도, 의자가 삐걱대는 일은 없었다. 엉덩이를 마구 들썩거려도 의자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비틀거나 들썩거려도 늘 내 몸을 한결같이 안락하게 감싸줬다. 하지만 그런 의자도 몽요가 이 집에 온 뒤 흉물로 변해버렸다. 몽요의 이빨과 발톱 공격에 가죽이 다 찢기고 뜯어졌다. 그 모습은 흡사 맹수의 공격을 받은 직후의 얼룩말 같았다. 겨우 목숨은 건졌지만, 몸뚱이는 한마디로 너덜너덜해졌다. 비록 겉으로 보기에 평소처럼 풀을 뜯고 물을 마시고 초원을 달리겠지만, 맹수의 공격을 받았던 트라우마는 평생을 따라다니겠지. 혹시라도 풀을 뜯고 물을 마시고 초원을 달리다 또 한번 맹수가 공격해 온다면, 그때는 얼룩말 스스로 제 몸을 갈기갈기 찢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의자는 상상 속에서 제 몸을 수도 없이 찢었겠지. 몽요가 걸핏하면 의자 위에 올라가 있었으니까. 몽요가 와서 앉을 때마다 의자는 몸을 움찔거리면서 그렇게 제 몸을 찢었겠지. 

도배도 새로 하고, 장판도 새로 깔고, 얼룩말 의자를 포함해서 살림살이 몇 가지는 내다버려야 한다. 
이처럼 고양이 한 마리 키우는 데는 꽤 많은 돈이 들어간다. 그렇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돈은 고양이가 알아서 갖고 온다. 

퇴근하고 집에 들어갔더니 상황은 어제와 똑같았다. 벽에서 뜯겨진 벽지가 거실 바닥과 방바닥에 마구 흩뿌려져 있었다. 흡사 만추의 어느 숲속 오솔길 같았다. 
바닥에 나뒹구는 뜯겨진 벽지를 낙엽이라 생각하면서, 거실을 지나 큰 방으로 갔다.  

아, 정말이지, 무의식적으로 욕이 튀어나올 뻔했다. 어쩌면 이미 튀어나왔는지도 모르겠다. 낙엽이 많아도, 아니, 뜯겨진 벽지가 바닥에 많아도 너무 많았다. 물론 쌓인 것 자체는 크게 문제될 게 없다. 치우면 그만이다. 하지만 치워도 치워도 끝이 없다는 게 문제다. 오늘 치웠으니 이제 다음 주에 치우면 된다거나, 오늘 치웠으니 이제 한 달 뒤에 치우면 된다거나, 오늘 치웠으니 이제 내년 가을에 치우면 된다거나 하는 차원이 아니다. 매일같이 치워야 한다. 1년 365일 하루도 거르지 않고 치워야 한다. 벽에 벽지가 붙어 있는 한 끊임없이 치워야 한다. 몽요가 죽거나, 아니면 내가 죽거나. 그날까지 계속 치워야 한다. 아, 이런 젠장. 

매일이 이렇다. 집에 들어가면 항상 무의식적으로 욕이 튀어나온다. 그러다 마침내 한계에 다다른다.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이제는 도배를 해야 할 때다. 
돈 들어갈 생각에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래서 괜히 “야, 몽요!” 하고 큰소리로 불렀다. 볼이라도 한번 꼬집어줘야 직성이 풀릴 것 같아서였다. 

몽요는 내 목소리만 들어도 쉽게 감정을 읽는다. 기분이 좋은지 나쁜지 안다. 나쁘면 얼마나 나쁜지, 또 좋으면 얼마나 좋은지도 안다. 나도 모르는 내 디테일한 감정의 차이를 몽요는 내 목소리만으로 파악한다. 그래서 내가 부르면, 나한테 오는 시간이 제각각이다. 어떨 때는 그야말로 부르기도 전에 온다. “야, 몽” 이러면 벌써 내 앞에 와 있다. ‘요’를 발음하기도 전에 와버렸다. ‘헐, 대단하다!’ 하고 저절로 감탄하게 된다. 

내 기분이 최고조에 달해 있을 땐, 그렇게 귀신같이 알고 쏜살같이 달려온다. 심지어 달려올 때는 달그닥 달그닥 하고 말달리는 소리까지 날 정도다. 말이 바람을 가르며 달려오는 소리. 몽요는 아마 전생에 말이었을 수도 있다. 그런 생각에 한번은 당근을 줘봤지만, 먹기는커녕 오히려 당근을 건넨 내 손을 할퀸 적이 있다. 당근에 신물이 난 말이었을지도 모른다. 
내 기분이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을 때는 몽요 역시 중립을 지킨다. 부르는 즉시 달려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불러도 못 들은 척 하지 않는다. 한 번 부르면 오기는 온다. 다만 좀 느리게 온다. 어슬렁 어슬렁. 태어난 지 3개월째인 녀석이 어슬렁 어슬렁이라니. 저런 건방진 녀석 같으니, 하고 혀를 찰지 모르겠다. 하지만 몽요는 다르다. 3개월째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만큼 어슬렁 어슬렁 걷는 게 잘 어울린다. 얼핏 보면 무슨 호랑이나 사자가 목적 없이 터덜 터덜 걷는 것 같기도 하다. 걸을 때마다 엉덩이를 좌우로 살랑살랑 흔드는 건 완벽하게 호랑이나 사자다. 

물론 내 기분이 안 좋다고 판단했을 때 몽요는 불러도 안 온다. 작은 방에 있는 의자 위로 올라가 납작 엎드려 있을 뿐이다. 

“야, 몽요!”

또 한 번 불러보지만 여전히 감감무소식이라야 맞는 거다. 원래는 몇 번을 불러도 아무 반응이 없어야 맞는 거다. 그런데 이번에는 몽요의 반응이 이상했다. 마치 ‘알았어! 잠깐만 기다려!’ 하고 말하듯이 ‘야옹! 야옹!’ 크게 소리를 냈다. 
저게 이제는 막 짜증을 내네. 게다가 반말까지.

오늘은 어떤 손님이 가게에서 커피 한 잔 시켜놓고 무려 다섯 시간을 앉아 있었다. 리필을 네 번 해줬다. 짜증도 짜증도 이런 짜증이 없다. 게다가 장사도 잘 안 된 탓에 하루 종일 기분이 풀리지 않았다. 짜증, 짜증, 짜증 하는 말을 입에 달고 다닌 하루였다. 그런 상태에서 집에 왔더니 또 짜증. 홧김에 도배를 새로 하기로 마음먹었다. 2년 가까이 장사하면서 제대로 쉰 적이 없다. 이참에 도배 핑계로 쉬면 된다. 

물론 그렇게 정하기는 했어도 마음이 아주 홀가분하지만은 않다. 장사하는 사람이 가게 문을 안 열면 당연히 돈을 못 번다. 게다가 도배하려면 돈도 꽤 든다. 짜증, 짜증, 짜증. 홧김에 도배를 하기로 마음을 먹기는 했지만, 짜증이라는 말이 입에서 떨어지지는 않았다. 그래서 겸사겸사 몽요의 볼이라도 꼬집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저 녀석도 짜증을 낸다. 이거야 원. 

몽요는 어슬렁어슬렁 모습을 드러냈다. 내 기분이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을 때 보이는 몽요의 반응이었다. 
몽요 쟤가 지금 착각하는 건가. 
아무래도 이번에는 몽요가 내 감정을 제대로 못 읽은 모양이었다. 
나는 지금 기분이 안 좋다. 평소라면 이럴 때 몽요는 내가 불러도 무시한다. 그런데 오늘은 반말로 대답까지 하고 어슬렁어슬렁 모습도 드러냈다. 나이도 어린 게 정신머리 하고는.
그렇게 어슬렁어슬렁. 

내 감정 상태를 착각한 몽요가 귀엽기도 해서 기분이 약간 풀렸다. 매번 정확하면 인간미가 떨어지지 않나. 그런데 어째 몽요의 모습이 좀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어슬렁어슬렁 걷는 게 호랑이나 사자 같기는 한데, 오늘은 이상하게 몽요한테서 육지가 아닌 바다의 지배자 분위기도 풍긴다. 상어. 머리가 저렇게 가로로 길쭉한 상어를 뭐라고 하더라. 귀상어였던가. 

오늘은 몽요한테서 귀상어의 모습도 보인다.
물론 몽요의 머리가 정말로 가로로 길쭉해진 건 아니다. 입에 직사각형 모양의 뭘 물고 있다. 뭘 물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제 몸에 비해 좀 큰 걸 물고 있다. 그래서 마치 귀상어 같다. 
몽요가 비록 체구는 작더라도 어쨌든 지금의 모습은 귀상어다. 성격 사나운 바다의 포식자. 물론 체구가 작아서 나를 잡아먹지는 못하겠지만, 귀상어 같다고 생각한 순간 내 다리는 알아서 뒷걸음질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넌 도대체 뭘 물고 있는 거냐.

도배를 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가장 컸다. 그래서 기분이 썩 좋지는 않았다. 몽요를 부른 건 볼이라도 한번 꼬집어주기 위해서였다. 물론 기분이 별로 좋지는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몽요를 불러도 안 올 가능성이 컸다. 음, 불러도 안 올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일단 부르고 봤다. 오면 볼을 한번 꼬집어주는 거고, 안 오면 마는 거고.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몽요가 어슬렁어슬렁 모습을 드러냈다. 그게 신기했다. 원래대로라면 내가 불러도 무시해야 했는데 모습을 드러내기에, 나이도 어린 게 벌써부터 판단력이 흐리멍덩해졌다고 핀잔을 줬다. 입에 뭘 물고 있는 것 같기는 한데, 뭘 물고 있는지 크게 궁금하지는 않았다. 그냥 종이 뭉치겠거니 생각했다. 몽요는 종이라면 아주 사족을 못 쓴다. 놀다 지칠 때까지 가지고 놀게 놔둬야 한다. 그래도 아주 무관심한 모습을 보일 수는 없어서 일단 건성으로 물어보기는 했다.

“몽요야, 너 도대체 뭘 물고 있는 거냐?”

그때까지도 몰랐다. 
몽요가 물고 있던 건 그냥 종이 뭉치일 거라고 이미 확신해 버렸기 때문에 전혀 궁금하지도 않았다. 어디서 그렇게 직사각형의 네모반듯한 종이를 찾아냈을까, 이런 궁금증조차 없었다. 몽요가 그 네모반듯한 걸 내 앞에 툭 떨어뜨릴 때조차, 그게 뭔지 몰랐다. 

뭐냐, 지금 놀아달라는 거냐? 내가 지금 너하고 놀 기분이냐? 
그러면서 그 네모반듯한 걸 집어들었다. 그제야 그게 뭔지 알 수 있었다. 이건 내가 둔해서 그런 게 아니다. 이런 뭉치를 실제로 본 적도 없고 만져본 적도 없어서 그렇다. 텔레비전이나 영화에서만 봤을 뿐이다. 
고양이를 키우게 되면 소소하게 돈이 들어간다. 물론 도배 같은 큰일을 치러야 할 때도 있지만, 이런 건 목돈이 드는 거라 확실히 돈 들어가는 티가 난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닌 경우, 예를 들어 장난감 같은 걸 사주다 보면, 이런 게 은근히 지출이 많다. 

좀 이상한 게 있는데, 고양이를 키우다 보면 장난감이나 기타 미용용품, 생활용품, 위생용품 등을 자주 사게 된다. 식료품을 사러 대형 마트에 가더라도 애완동물 용품 파는 곳에 들러서 뭘 하나 산다. 인터넷 쇼핑을 할 때도 항상 마지막에는 고양이 용품 쇼핑몰에 들어가서 뭐라도 하나 사야만 한다. 그렇다고 해서 그렇게 사들인 걸 고양이가 좋아하느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한 번은 애완동물용 자체발열 보온매트를 산 적이 있다. 일반 방석보다 조금 큰데, 가격은 웬만한 전기장판 값이었다. 애완동물용 보온매트는 자체발열이라 전기장판이 아닌데도 말이다. 크기도 한참 작고 전기장판도 아닌데 값은 전기장판이랑 비슷하다니,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샀다. 뭘 사고는 싶었지만 딱히 뭘 사야 좋을지 몰라서 그냥 샀다. 그런 뒤 쫙 펴서 몽요 집 옆에 놔뒀건만, 몽요는 보온매트 위에서 매트를 발로 한두 번 꾹꾹 밟아보더니 이내 내려왔다. 그걸로 자체발열 보온매트에 대한 관심은 끝이었다. 두 번 다시 올라가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내 마음이 상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충분히 예상한 결과였기 때문이다. 장난감들을 사줘도 마찬가지였고, 미용용품을 사도 사정은 비슷했다. 장난감은 한두 번 가지고 놀면 끝이었고, 미용용품도 한두 번 사용하는 게 고작이었다. 

뭘 사든 그랬다. 굳이 살 필요가 없었는데 샀다는 느낌이 강했다. 그런데 왜 계속 살까. 
몽요는 가끔 자신의 혀가 까칠하다는 걸 까먹을 때가 있다. 그래서 내가 자고 있을 때 다가와서 혀로 볼을 핥을 때가 있다. 그럼 나는 볼이 따끔거려서 몽요를 밀친다. 몽요의 이빨은 날카롭다. 작지만 뾰족해서 살짝 깨물어도 아프다. 몽요는 내 품에 안길 때마다 내 손과 발을 깨문다. 그럼 나는 몽요를 품에서 내려놓는다. 내가 퇴근하고 집에 오면 몽요는 반갑다며 다리에 매달린다. 그러면서 몽요는 내 발을 깨문다. 그때마다 나는 발로 몽요를 슬쩍 민다. 물론 처음에는 나도 퇴근하고 집에 와서 혹은 아침에 눈을 떠서 몽요를 안아주었다. 안고 몽요의 볼에 내 볼을 비볐다. 처음 두세 번은 그랬다. 네 번째인가, 몽요의 볼에 내 볼을 비비는데, 몽요가 평소보다 기분이 조금 더 좋았는지, 발톱으로 내 볼을 할퀴면서 동시에 이빨로 깨물었다. 볼이 조금 따끔 했다. 그래서 그 뒤로는 몽요를 끌어안지 않는다. 

몽요와는 스킨십이 별로 없다. 귀엽고 사랑스럽지만, 몽요가 고양이라 어쩔 수 없다. 그래서 몽요한테 장난감이나 생활용품들을 자주 사주는 것이겠지. 안아주는 대신 다른 걸로 애정을 표한다. 그러다 보니 은근히 지출이 많다. 게다가 이번에는 도배.

그때 몽요가 물고 있던 걸 내 앞에 툭 던지듯 떨어뜨렸고, 나는 그걸 집어들었다. 
5만 원짜리 한 다발. 
그러고 나서 몽요는 아주 새침하게 몸을 돌려 다시 작은 방으로 어슬렁어슬렁 걸어갔다. 엉덩이를 좌우로 흔들면서 어슬렁어슬렁.

고양이 한 마리 키우는 데 꽤 많은 돈이 들어가지만, 그렇다고 해서 걱정할 필요는 없다. 
돈은 고양이가 알아서 갖고 온다. 

 


2

 

요즘은 재즈 대신 컨트리 음악을 트는데도, 오십대로 보이는 그 아주머니는 가끔 커피를 마시러 온다. 일주일에 한 번 혹은 이 주일에 한 번. 여전히 자기 딸과 같이 온다. 딸은 올해 네 살이다.

오늘은 아주머니가 기분이 좋아 보였다. 딸을 무릎에 앉히는 거야 매번 있는 일이지만, 좀처럼 머리를 쓰다듬지는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머리를 다 쓰다듬고 있다. 물론 머리를 쓰다듬는 건 괜찮지만, 그렇다고 볼까지 쓰다듬으면 아이가 자칫 장난을 칠 수도 있다. 그래도 일단 여기까지라면 괜찮다. 아이가 장난을 좀 친다고 해서 아주머니가 바로 반응을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니까 아이가 혼자 장난을 치는 것까지는 괜찮다. 아주머니는 아이의 볼을 쓰다듬고, 아이는 아주머니한테 장난을 치고. 이런 모습은 언제 봐도 평화롭다. 하지만 아이는 겁이 많다. 장난을 치면서도 아이는 가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주머니를 쳐다본다. 표정을 살피는 것이겠지. 그렇게 한두 번 표정을 살피고 말면 좋은데, 아이는 수시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아주머니의 표정을 살핀다. 아주머니는 아이더러 그만 쳐다보라며 볼을 좀 세게 꼬집는다. 그럼 또 아이는 신이 나서 아주머니의 손을 깨문다. 아주머니가 아이의 볼을 꼬집었으니, 아이가 아주머니의 손을 깨무는 건 어쩌면 당연하다. 아이의 입장에서 볼 땐 당연하다. 아주머니가 아이의 볼을 꼬집을 때, 아이는 아파하지 않는다. 아파하기는커녕 오히려 좋아한다. 짜증이 나거나 아픈 게 아니고 좋아한다. 자기를 예뻐해 주는 것 같아 오히려 좋아한다. 그래서 아이도 아주머니 손을 깨문다. 그러면 아주머니가 좋아할 것 같아서 깨문다. 짜증을 내거나 아파할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한 번 깨물고 두 번 깨물고 세 번 깨문다. 물론 아주머니도 짜증을 내지 않는다. 짜증을 내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해서 기분이 좋은 건 아니다. 아이가 그만 깨물었으면 하는 생각을 갖는다. 그래서 아주머니는 이번에는 아이의 엉덩이를 좀 세게 때린다. 좀 세게 때린다고 해서 감정이 실린 건 아니다. 볼을 꼬집을 때와 같다고 보면 된다. 얼굴을 쓰다듬다 보면 볼을 꼬집게 되고, 볼을 꼬집다 보면 엉덩이를 때리게 된다. 저절로 그렇게 된다. 그래서 애초에 머리를 쓰다듬지 말아야 한다. 엉덩이를 좀 세게 맞은 아이는 얼른 아주머니의 눈치를 살핀다. 아주머니는 화가 안 났다. 그래서 아이도 조금 더 세게 아주머니의 손을 깨문다. 

“악!”

결국은 이렇게 되겠지.
아주머니가 지금 아이의 볼을 쓰다듬고 있다. 애초에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지 말아야 했는데 말이다. 머리를 쓰다듬다가, 볼을 쓰다듬다가, 볼을 꼬집다가, 엉덩이를 찰싹찰싹 때려주다가, 또 볼을 쓰다듬어 주다가. 
그럴 때마다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아주머니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런데 이게 거짓말이 아니고 진짜다. 정말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으이그, 귀여운 녀석. 귀여워, 귀여워, 귀여워. 내 새끼 귀여워 죽겠어, 그냥.”

그러면서 아주머니는 아까보다는 조금 세게 아이의 엉덩이를 철썩철썩 때렸다. 
엉덩이에 전해지는 강도가 갑자기 세지는 바람에 아이는 순간적으로 몸을 움츠렸다. 몸을 움츠리면서 머리를 아주머니의 겨드랑이 사이로 들이밀었다. 아이가 겁을 먹을 때 하는 행동이었다. 겁을 먹으면 아이는 일단 머리부터 숨기고 본다. 머리를 숨겼다가 얼른 눈을 진짜 동그랗게 뜨고 다시 아주머니의 표정을 살핀다. 그랬다가 다시 머리를 숨긴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아주머니는 조금 더 세게 아이의 엉덩이를 때리고, 아이는 강도가 세진 만큼 조금 더 깊이 머리를 숨긴다. 머리를 숨겼다가 얼른 아주머니의 표정을 살피고, 그리고 다시 머리를 숨긴다. 

그런 아이의 모습은 귀엽다. 아주머니 말대로 정말 귀엽다. 
그러고 보면 이 말은 매우 잘 지었다. 누가 지었는지 대단하다.

‘깨물어주고 싶을 만큼 귀엽다.’

진짜로 깨물지는 않겠지만, 그만큼 과격해질 수는 있다. 예를 들어, 볼을 꼬집어도 조금 더 세게 꼬집게 된다. 엉덩이를 때려도 조금 더 세게 때리게 된다. 머리통을 때려도 조금 더 세게 때리게 된다. 뺨을 때려도 조금 더 세게 때리게 된다. 
귀엽다, 귀엽다 하고 장난을 치게 되면, 그 장난은 조금씩 과격해진다. 혹은 잔인해진다. 깨물어주고 싶어지니까 말이다.
혹시 테이블에 머리가 짓눌리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본 적 있는지 모르겠다. 

가게에 다른 손님들은 없었다. 

나는 아이가 아주머니의 겨드랑이 사이로 머리를 들이미는 걸 보면서 가게를 나갔다. 화장실에 다녀왔다. 그리고 다시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다가, 테이블에 머리가 짓눌리고 있는 아이의 얼굴을 보았다.

아이는 울지도 않고, 몸부림치지도 않고, 잘못했다고 빌지도 않았다. 빠져나올 생각이 없기 때문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냥, 그대로, 짓눌려진 상태로, 가만히 있었다. 
익숙해졌기에, 아이는 가만히 있었다. 

 

아이의 머리를 짓누르고 있는 아주머니의 모습은 성모 마리아 같달까. 음, 성모 마리아인가. 피에타 조각상이 먼저 떠올랐던 것 같기도 하고.

아이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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