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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 이사의 조촐한 16번째 결혼식

by amrita

“이번엔 누구래?”
“조리팀 주방장, 왜 이번에 새로 장 받은…….”
“걔는, 그건 아니지, 겨우 스물둘 아냐?”
“나이는 문제가 아니었나보지.”
“하기야 상대가 미 이산데 나이 차가 열 살이든 서른 살이든 대수겠어?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렇게 새파랗게 어린애를…….”
“원래 우리 미 이사야 오는 상대 안 막고 가는 상대 안 잡잖아?”
“가는 상대야 안 잡지만 오는 상대는 많이 막지 않아? 자기 맘에 안 들면 쳐다도 안 보잖아?”
“그거야 잘못 쳐다만 봐도 저 혼자 머릿속에서 결혼식까지 진행해 버리는 놈들이 어디 한둘이야?”
“하긴.”
김과 이 팀장은 동시에 말을 멈추고 맞추기라도 한 듯 각자의 칵테일을 쭈욱 들이마셨다. 박 실장이 이번에 새로 직접, 본인이 직접, 친히, 현장에서 곧바로 픽업했다는 신입인 송사슴의 단발머리가 시야에 들어왔기 때문이었다. 
둘은 사슴 신입이 서빙봇 트레이에서 샴페인을 두 잔 조심스레 집어들어 에덴 장미가 만발한 [축복의 향연] 정원 쪽으로 멀어지고 나서야 속닥거림을 재개했다. 
“사슴이는 비결이 뭘까?”
“어떻게 신입사원 오리엔테이션도 수료하기 전에 덥석 박 실장 눈에 든 거지?”
“그때 이무기 사건 때….”
“뭔 활약이나 했어? 별 일 없었잖아?”
“안 죽었잖아.”
“그거야- 그건 뭐- 흠 그래, 그렇네.”
두 팀장은 지금껏 박 실장이 맡아 해결해왔던 일들과 아직도 진행 중인 여러 사건 사고들을 떠올리는 시간을 가졌다. 광화문 이무기 시위 진압, 용산의 눈알괴물 아지트 박멸, 태백산맥 용호간의 영역다툼 화해, 금천구 동남풍 유치 작전, 수산시장 용궁 왕자 실종사건, 오대산 이승저승냥냥사자 파업 협상, 계룡산 구미호 이사 딜…….
“인원 충원할 필요 없다고 없다고 할 땐 언제고 쏙 골라간 걸 보면 어지간히 맘에 들었나봐.”
“뭐 숨겨둔 비장의 재주 같은 거라도 있나? 생긴건 순해빠져갖고 벌레 한마리 못잡을 거 같던데.”
답은 귀여움이었다. 신입사원 송사슴이 눈을 땡그랗게 뜨고서 박 실장한테 하이힐 그만 좀 신어라, 출근 좀 늦게 해라, 칼은 항상 검집에 넣어 둬라, 머리 그렇게 미친 것처럼 땋을 거면 차라리 날 불러라, 담배 피려면 나가서 펴라, 셀프 당직 좀 그만해라, 정시 퇴근 좀 해라, 미래봉황백학스 에어라인에서 ‘전에 추락하던 비행기 무사히 건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고 다이아몬드 스파 전신관리 평생무료이용권 같은 걸 주면 버리지 말고 차라리 날 주든지? 같은 잔소리를 주구장창 하면서도 멀쩡히 목숨을 부지하고서 회사에 다닐 수 있는 비결은, 쨍한 귀여움이었다. 적어도 박 실장에게는 그랬다. 귀여우면 된 거였다. 물론 그걸 김과 이 팀장이 알 리는 없었으므로, 그들에게 이 미스터리는 현재진행형이었다. 
김 팀장은 이 팀장의 옆구리를 약간 눌렀다. 
“온다, 와.”
“뭐 뭐가?”
“신랑 팀, 저기 저기.”
“아아.”
이 팀장은 보기도 전에 알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과연 턱시도를 빼 입은 일군의 사내들이 줄지어 장미 정원의 입구로 줄줄이 들어섰다. 다들 하나같이 빼어난 미남들이었고, 다들 하나같이 가슴팍에 [#번째 님프: 아무개] 명함을 달았으며, 다들 하나같이 어딘지 우울한 기색이었다. 
“전에 결혼했던 게 언제지? 세 달은 지났어?”
“그 정도.”
“저런 걸 보면 참 결혼은 전쟁이나 다름없어.”
“별 수 있어? 이사가 그리 좋다잖아. 솔직히 나라도 미 이사랑 결혼할 수 있다면 십육번이 뭐야, 삼백번째 님프 자리라도 좋겠는데.”
“자기는 헤테로잖아.”
“그러게. 아니 나도 알아! 나도라고! 그런데도 그런 심정이 된다니까? 알지?”
김 팀장은 알겠다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친정보살 앤 컴퍼니에 입사한 후 미 이사를 한 번이라도 친견해본 사람이라면 동의하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었다. 
“미 이사는 왜 굳이 회사는 다니는 거야? 그 미모로 모델이나 가수나….”
“그건 뭐 쉽나. 그냥 조카 회사에서 이사 달고 맘 편히 사는 게 낫지.”
“그것도 그럴 수 있지만.”
다중결혼이 합법화된 지 벌써 반백년이었다. 사람이라면 성별 무관히 누구나 몇 번씩 마음에 드는 사람과 결혼할 수 있다. 이 사람과 결혼한 상태에서 다른 사람과 (모두의 동의 아래) 또 결혼할 수도 있다. 신랑을 여럿 두거나 신부를 여럿 둘 수도 있다. 
다자결혼의 합법화가 논의되던 과거에는, 이걸 합법화 시키면 사람들이 미친듯이 마구 결혼해버릴 수 있지 않은가! 하는 말도 나왔던 모양이지만, 막상 합법화가 되고 나니 별 일은 없었다. 
일단 사람들은 미친듯이 거미줄 뻗듯 결혼할 정도로 결혼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단일결혼조차 귀찮아서 안 하는 경우가 많은데 다중결혼이야 더 말할 것도 없다. 다자결혼 합법화가 불러온 것은 미친듯한 결혼 광풍이 아니라 공동경제체제와 그에 따른 법 개정과 위장결혼/이혼 방지 알고리듬의 입체화와 다세대 주택의 재도약과 과세 체계, 양육권 배정과 회계 방식의 진화였다. 
“크레딧 계정에 딸려오는 배우자의 숫자가 다섯 이상이면 다혼 디스카운트 계정으로 인정된대. 나도 알아봤는데 근데 요새는 네트워크도 좋아져서 굳이 할인 혜택이나 의보 때문에 결혼까지는 좀….별로 크게 차이가 나는 것도 아니고.”
“열여섯 명이면 어떻게 된대?”
“축구팀을 꾸리는 게 낫지 않을까.”
“뮤지컬 프로덕션은?”
“미 이사 남편들만으로도 지금 당장 회사 하나는 굴릴 수 있을 걸.”
김 팀장은 숨을 훅 들이마셨다.
“혹시 그래서 아냐? 선별한 인재들과 결혼해버려서 스무스하게 아무도 모르는 새 독립해 나가서 자기 회사를 차리려는… 그런 큰 그림?”
“에이, 미 이사는 그런 귀찮은 일 안 해.”
“미 이사는 안 하지. 가만 있으면 동풍과 남풍과 서풍과 북풍과 계절들이 알아서 요리해다 갖다 바칠 뿐이지, 나도 그 중 하나고.”
이 팀장은 김의 옆구리를 꾹 찌른 후 팔꿈치를 잡아 허둥지둥 끌고 가서 자리에 앉았다. 둘은 수다에 정신이 팔려서 식이 곧 시작됨을 알리는 음악이 나오는 것도 몰랐던 것이다. 다행히도 그 둘보다 늦게 자리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적잖았다. 
자리에 앉자마자 또 입을 여는 이 팀장의 옆구리를 이번에는 김 팀장이 꾹 찔렀다. 이는 김의 뜻을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대놓고 수다를 떨기에는 이쪽 저쪽으로 듣는 귀가 너무 많은 위치였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는지, 다들 약속이라도 한 듯 하나같이 별다른 내용 없는 얘기나 주고받을 뿐이었다.
김과 이 팀장은 신랑 하객석의 최전선에 빼곡이 놓인 열여섯 개의 의자로 시선을 돌렸다. 하객 의자는 모두 흰색인데, 미 이사의 남편 지정석에는 등받이에 파란 리본을 달아놓아 차별성을 두었다. 김과 이 팀장의 눈길을 끈 것은 푸른 리본이 아니라 (한두 번 보는 광경도 아니고) 푸른 리본석에 앉아 저들끼리 소곤소곤 심각하게 얘기하는 열다섯 명의 남편들이었다. 그냥 척 보기에도 칙칙한 분위기라 누가 봐도 약간 걱정이 될 만한 그림이었다. 이 팀장은 김 팀장의 귓가에 속삭였다. 
설마 다들 작당해서 이번에 들어올 신랑을 치워버리려는 건…?
아냐, 우리 요새 궁중모략 서바이벌 드라마들만 너무 많이 본 거 같애.
[식이 시작될 예정이오니 모두 자리에 앉아 주시기 바랍니다.]
사회도 없어? 회장님 너무하는 거 아냐? 아무리 열여섯번째 결혼이래도? 사람들은 수군거렸다.
그렇다. 아무리 열여섯번째 결혼이라도 그렇지, 너무나도 효율성만을 따진 예식이었다. 하객들이 얼추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텅 빈 주례석 양쪽의 스피커폰에서 띡 하고 웨딩 마치가 울려퍼지더니, 장미 정원 저쪽에서 열여섯번째 새신랑이 방긋 방긋 웃으며 버진 로드를 걸어오더니, 하객 쪽으로 손을 나풀나풀 흔들어 보이고는 열여섯번째 남편 지정석에 풀썩 앉았다. 이번에는 주례도 없을 모양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신부하고 맞절이라든지, 뭐 아무 것도 안 하는 거야? 그 순간 모든 하객들이 공통적으로 떠올린 의문점이었다. 무슨 소풍 왔나? 손수건 돌리기도 아니고 그냥 와서 앉으면 땡이야?
김 팀장은 눈빛으로 이 팀장에게 말했다. 이대로라면 열일곱번째 결혼식은 회사 공문으로 떼우겠는데. 이 팀장 역시 눈빛으로 답했다.
앞으로 몇십 번이나 더 해야 할 지 알고? 아무래도 매번 처음처럼 회장님 주례에 꽃등에 나룻배에 물길에 불꽃놀이까지 하기는 무리겠지. 
그것도 그렇긴 해. 아 저기…….
김과 이 팀장의 텔레파시는 훅 하고 끊겨 날아갔다. 웅성대던 하객들의 소리 역시 썰물처럼 쓸려나갔다. 뒷자리에서 쟁반과 글래스를 정리하던 로봇들마저 동작을 멈추었다. 침묵 속에서 유일하게 작동하는 것은 주례석 양쪽의 스피커폰 뿐이었다. 
[신부 입장.]
입장이라는 말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기왕이면 강림이라고 하는 편이 더욱 정확했을 것이다.
사방으로 바람이 둥글게 춤추듯 여러 개의 원을 이루며 요요히 가라앉았다. 그와 함께 형용할 수 없는 향기가 번져 나갔다. 
사람들은 하늘에서부터 쏟아져 내려오는 섬려한 광채에 숨쉬는 일도 잊었다. 구름과 바람의 둥근 진세를 흐트러뜨리며 하늘 저 멀리에서부터 등장한 것은 찬란한 금빛 난새였다. 
가장 광폭한 고요와 망망한 경이가 장미 정원을 통째로 뒤덮어 갔다. 곧 생사를 넘나드는 아름다움 그 자체의 강림이었고, 그러한 은총의 세례는 난새의 등에 기대어 앉은 이번 예식의 (열여섯번째 결혼식의) 주인공에게서 근원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하나같이 그대로 아무 이유도 없이 왈칵 죽어버릴 것만 같은 심정이 되었고, 하늘 위의 찬란함을 올려다 보는 일조차 힘겨워서 간신히 버티거나 눈을 감거나 고개를 숙이거나, 눈물을 손등으로 훔쳤다.
다자결혼의 장단점이며 남편을 열여섯이나 두는 일의 찬반논란, 처음과는 심히 대조되는 대강 건성 예식, 참석조차 않은 회장이며 사장이며 기타 이사진, 기존의 (열다섯명의) 남편들의 어두운 표정과 그러한 암울한 분위기로 미루어 짐작해서 입방아 찧던 사람들, 샴페인 맛이 전과 다르다는 불평이라든지 대체 아무리 다중결혼이 합법적이라 해도 그렇지, 결혼을 몇 번이나 해야 성미에 차겠냐며 미 이사의 뒷담을 까던 극소수의 무리마저 하던 생각과 참던 말들을 고스란히 잊었다. 
물론 예전에 열다섯 번 일어난 일이었다. 모두가 익히 아는 바였다. (신입들 빼고.) 미 이사의 아름다움은 그 자체로 경천동지의 절대 권력임을, 아무리 말이 많든 일단 미 이사가 등장하는 순간 평정되지 않을 논란이란 없음을, 바로 지금 일어나는 일처럼, 미 이사가 설령 난새의 등에서 살며시 몸을 밀어 허공에 몸을 던지더라도 바람이 스스로 불어와 그의 흰 팔꿈치와 손과 발등과 금빛 드레스 자락을 고스란히 받아 안아 살살, 너무나도 살살, 마치 다이아몬드를 풀어 감은 솜사탕 한 움큼을 하늘에서 땅으로 받아 내리듯이, 장미 정원 한가운데로 내려다 줄 것임을, 그러고도 모자라서 장미 향기의 바다가 우르르 일어나서 정원을 다 채우고도 넘쳐 흘러서, 근방의 영문 모르는 사람들마저 속절없이 넋을 잃고 가던 길을 멈추어 서거나 하던 생각을 잊게 되리라는 것을. 
미 이사는 바람이 치맛자락을 정돈해 주기를 기다렸다가 한 손을 부드럽게 위로 들어 올렸다. 또다른 바람 줄기가 공중에서 길 잃은 레이스 숄을 잡아다가 그의 옥 같은 손에 찬찬히 떨구어 주었다. 사람들은 숨쉬는 것조차 잊고서 그를 그저 바라보거나, 차마 바라보지도 못했다. 시공간이 통째로 삭제되어 버리는 아름다움이란 그 자체로 신성한 진리였다. 빛이 담긴 눈동자나 광채가 서린 피부, 온화한 입술선이나 잔잔히 흩날리는 흑단같은 머리채는 그러한 진리가 물질계에 현현할 때 발생하는 부차적인 결과였다. 휘황한 황금빛 영원을 끌어올려 부수어 내리는, 폭발하는 화산 같은 힘이 미 이사의 몸을 감싼 채 더할나위 없이 부드럽게 움직였으며, 절대의 아름다움은 절대적 잔혹이나 참담함, 극심한 통한이나 환희, 혹은 순수한 비탄과 다르지 않은 힘이었고, 이 허름한 세상에는 감히 그의 존재를 담을 자격조차 없었으며, 그런 연유로 그를 둘러싼 시공간의 흐름은 한없이 스스로를 무참히 지워 나갔다.
미 이사는 장미 정원을 한 번 크게 둘러 보았다. 저 멀리 하늘에서 난새는 원을 그리며 유영했다.
영원이나 다름없는 순간 속으로 웨딩 마치가 울려 퍼졌다. 예식의 하이라이트여야 하는 음악은, 그러나, 그 누구의 귀에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하늘이나 바람, 장미나 꽃향기, 세상이나 정원이나 난새나 의자나 리본이나 하객과도 마찬가지로, 미 이사에게서 쏟아져 나오는 창백한 빛물결에 의하여 속절없이 밀려나가고 물러나가 아득히 희미해졌을 따름이었다.
음악은 그 누구의 귀에도 제대로 입력되지 못한 채 무기력하게 희미해지다 끝났다.
미 이사는 숄을 어깨에 두른 후 다시 손을 들어올렸고, 이번에는 먼 곳에서부터 희고 얇은 무언가가 팔락거리며 날아 내려와 그의 손바닥에 조심스레 안착했다. 그제서야 내려올 것이 다 내려왔다는 듯, 미 이사는 몸을 돌려 버진 로드를 따라 주례석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로봇마저 넋을 놓았는지 웨딩 마치를 다시 재생하기를 잊어서 아무 음악도 나오지 않았지만, 어차피 필요도 없었다. 
바람마저 숨죽인 가운데 미 이사의 걸음 걸음마다 드레스 자락만이 나지막이 사락였고, 영롱한 아름다움이 쟁쟁이며 식장의 여기저기로 낙하했으며, 여기에 설령 그 어떤 음악을 억지로 더한들 소음으로 전락했을 것이었다. 미 이사의 걸음 걸음마다 하객들의 심장이 박자를 맞추어 쿵 쿵 떨어져 바닥을 굴렀고, 열여섯 명의 남편은 신부에게서 일 초간의 미소를 선사받은 후 각자 의자에서 떨어질 뻔했으며, 곧이어 미 이사는 주례석으로 올라가 모두를 마주하고 섰다. 
“자 그럼.”
미 이사는 조금 전 바람이 가져다 주었던 편지를 잘 펴 들었다. 그리고 천천히, 또박 또박 읽어 나갔다. 
“오늘 이 축복받은 자리에, 초대하지도 않았지만 스스로를 초대한 당신께 드리고픈 말이 있습니다.”
김과 이 팀장은 눈부시게 빛나는 미 이사를 멍하니 바라보면서도 이상하다, 이상하다, 어디선가 뭔가 또각 거리는 소리가 나는데? 라는 생각을 동시에 하고 있었다. 정작 결혼식이 어째서 서신 낭독회가 되었는지는 관심 밖이었지만, 그야 미 이사가 하는 일이니 당연히 옳은 일일 것이었다.
“저는 오래 전에 이미 당신의 마음을 거절한 바가 있지요. 하지만 당신은 나의 의사를 존중하지 않았어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둥, 사나이의 미덕은 끈질김에 있다는 둥 하면서 구애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신이야 구애겠지만, 저에게는 너무나도 싫은 스토킹에 불과했지만, 아무리 이런 얘기를 해도 당신은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지요. 하긴 그런 말을 들을 수 있는 존재였다면 애당초 그런 스토킹 자체를 하지 않았겠지만요. 저는 당신의 위치나, 우리 사이에 엮인 여러 관계들을 생각해서 최대한 조용히 참아내려 했습니다. 당신이 아무리 나를 좋아한다 생각한들, 당신을 움직이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자의식이니까요. 당신의 세계에는 사랑이란 게 애당초 없어요. 사랑이라고 포장하고픈 자의식, 감정이라고 착각하고픈 자의식, 고통이라고 믿고픈 자의식 뿐입니다. 하다못해 당신이 자신이라 믿는 자의식 자체조차 진리와는 아무 관련도 없는 조작된 표면 의식에 불과합니다. 그것이 필멸생의 요점이자 한계지요. 그리고 나는 어리석지 않아요. 당신의 자의식 충족 연극에 나의 고귀한 사랑을 낭비하고픈 마음은 털끝만큼도 없습니다. 
그럼 당신은 이렇게 묻겠지요, 자신의 마음이 단지 에고 놀음인지 진짜 사랑인지 제가 어떻게 장담할 수 있느냐고. 바로 오늘이 그 증거입니다.”
미 이사는 편지를 내려놓고 버진 로드 한가운데 놓인 어항을 가만히 응시했다. 하객들은 난데없이 출현한 커다란 어항과 그 어항을 소리 없이 옮겨 온 호버 카트, 그리고 카트 뒤에 담배를 꼬나물고 선 박 실장의 모습에 눈만 깜박였다. 
김과 이 팀장은 박 실장의 킬힐을 보았고, 서로 마주 보았다. 설마 아까부터 또각대던 소리가 저…?
어항에는 랍스터 두 마리가 어색하게 담겨 있었다. 사실 어항이라기보다는 수조라고 하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랍스터가 수조에 어떻게 담겨 봐야 어디가 굳이 어색하거나 자연스러울 거리가 있겠는가마는, 둘은 누가 보더라도 많이 어색해 보였다. 
박 실장은 수조의 벽을 잠깐 쳐다보다가, 담배를 입에서 빼냈다. 그리고 그 담배를 어항, 아니 수조 속으로 던지는 시늉을 해 보였다. 김 에코 팀장은 박 실장의 입 모양을 재빨리 읽어냈다. 얼른 안, 튀어 나와? 담배탕 끓여주리? 곧바로 펑 하는 소리와 함께 흰 연기가 자욱히 일어났고, 부지런히 불어온 바람에 의해 척척 걷히어 갔으며, 곧 만인 앞에 드러난 것은 랍스터 집게발이 달린 두 로봇 서빙봇의 모습이었다. 사람들이 미처 경악하기도 전에 박 실장의 짜증섞인 고함이 쩌렁 쩌렁 울려퍼졌다. 
“인간형으로 나오라고! 인간형으로!”
다시 연기가 바쁘게 일어나고 걷힌 자리에는 정장을 멀끔하게 차려입은 랍스터 집게발의 두 청년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미 이사는 꽃잎 묻어나는 봄바람과도 같은 미소를 지어 보였으며, 인간형의 두 랍스터는 괴로워하며 제자리에서 두어 번 빙빙 돌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털썩 무릎을 꿇었다. 
“저희가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죽여 주십시오!”
“죽여 주십시오! 아무리 명령이었다 해도 이사님께 해를 끼치려 했으니 죽어 마땅합니다!”
두 인간형 랍스터가 버진 로드에 이마를 쿵 쿵 찧으며 속죄하는 동안 미 이사는 하객 여러분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해 나갔다. 
“여러분, 답례품으로 캐비어를 준비해 두었었어요. 하지만 이 두 분이 그 캐비어에 독을 심었으니 실수로라도 가져 가시면 안 된답니다. 저희가 전량 회수를 하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해서 알려드립니다. 이와 같은 부득이한 사정으로 인하여 답례품은 후일 개별적으로 보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왜 오늘 이런 슬픈 일이 있었는가 하면….”
멀리서 천둥 소리가 번뜩 내리꽂혔다. 미 이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곧 아시게 될 거예요.”
삽시간에 먹구름이 모여들더니 바람의 기세가 미쳐 돌아가기 시작했다. 하객들은 뭔가 사태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그제야 감지하긴 했는데, 많은 일들이 너무 빠르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꺄아아아아아악!”
하늘 저 멀리서 유영하고만 있던 난새가 갑자기 급하강하는 바람에 하객 몇몇이 쓸려 날아갈 뻔했다. 
“요 요 용오름이다! 도망쳐! 엘리- 엘리베이터! 빨리!”
과연 그러했다. 집채만한 용오름 현상이 일어나면서 빌딩에 지나치게 가깝게 접근해 오고 있었다. 난새는 미 이사를 보호하듯 둘러싸고 앉았다. 
“아 아무거나 붙잡아요! 빨리!”
“이거 오즈의 마법사 아냐?”
“입 닫아 캐비어 캔 날아다니는 거 안 보여?”
“엄마아아아아아아악!”
“사람 살려!”
빗방울이 우르르 와장창 쏟아졌다. 미쳐 날뛰는 바람 때문에 의자와 장미 꽃잎, 가디건이며 샴페인 글라스, 쟁반과 핸드백과 냅킨과 캐비어 캔이 어지럽게 사방으로 흩어졌다. 장미 정원은 삽시간에 난장판이 되었다. 조명이 하뜩대다 퍽 나갔고, 어느새 공중을 꽉 메운 거대한 먹구름 덕분에 사방이 심각히 어두웠다.
하객들은 어떻게든 안전을 도모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나 비상구, 장미의 벽이나 박 실장 곁으로 몰렸고, 의자를 끌어안고 제자리에서 빙글빙글 돌거나 테이블 아래로 기어 들어가 비명을 질러댔으며, 미 이사와 열여섯 남편들은 집채만한 금난새 날개 아래서 더할나위없이 평온히 사태를 인내할 뿐이었다. 
난리통 속에서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서 버티는 이들이라면 박 실장과 방금 전 미 이사에게 죽여달라 읍소하던 두 인간형 랍스터 뿐이었는데, 박 실장은 보살이고 랍스터는 원래 껍질이 두꺼우니까 괜찮은 건지도 몰랐다. 인간으로 둔갑한 상태긴 하지만. 그때였다.
[동청이 네 이놈!]
벼락이 와그닥 떨어지더니 하늘에서 벽력보다 더 폭랄한 호통 소리가 터져 나왔다. 
[당장 멈추지 못할까!]
장미 정원 위로 성벽처럼 쌓여있던 먹구름이 칼에 잘린 듯 반으로 갈려 나갔다. 그와 함께 거짓말처럼 용오름이 훅 사라졌다. 언제 날뛰었냐는 듯 잔잔해진 바람과 그친 빗발에, 하객들은 약간 어정쩡하게 서로와 주변을 둘러 보았다. 박 실장의 킬힐을 필사적으로 붙잡고 늘어지던 김과 이 팀장은 은근슬쩍 손을 놓고서 일어나 앉아 헝클어진 머리칼을 정돈했다. 그러다 이 팀장은 김의 어깨를 톡톡 쳤다. 
“아 왜 또… 어? 노량진… 수산… 테마파크화 위원회… 회장?”
그러했다. 먹구름이 갈린 하늘 한가운데에는 에어바이크 한 대가 둥둥 떠 있었고, 그 바이크에는 [노량진 수산시장 테마파크화 위원회 회장] 이라는 글귀가 적힌 백색 머리띠를 이마에 두른 중년의 여인이 위엄 넘치는 모습으로 앉아 있었다. 짙은 남색 가죽 자켓과 미청색 새틴 점프수트의 윤곽을 따라 비치는 후광의 기세가 딱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보였다. 
모두의 의문어린 시선을 받으며 노량진 수산시장 테마파크화 위원회 회장은 에어바이크를 몰아 천천히 장미 정원으로 미끄러져 내려와 착지했고, 바이크에서 내리고 나서 일단 박 실장에게 손을 한 번 들어보인 후 미 이사 쪽을 향해 말했다.
“결례가 많았습니다, 그간.”
“아니에요. 동해 용왕님이야말로 그동안 스트레스를 많이 받으셨을 거예요.”
별빛이 미 이사의 목소리를 타고 치렁 치렁 쏟아져 내리는 것만 같았고, 바람도 다 가라앉았는데 어디선가 아찔한 장미 향기가 피어올라서, 사람들은 제각기 한숨을 쉬거나 눈을 감거나 일어나다 말고 자리에 도로 앉거나 했다. 이윽고 저 하늘 멀리서 먹구름을 딱 뚫으며 무언가 날아왔다. 
정확히는, 노량진 수산시장 테마파크화 의원회 회장이 하늘이 마치 무슨 터치 패드인 양 검지손가락으로 꾹 누르는 시늉을 하더니, 그대로 쭈우우욱 가로선을 밖에서부터 안에서 긋다가 탁 놓았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마치 미끼를 제대로 문 붕어마냥 그의 손가락 끝 움직임대로 훌쩍 딸려와 장미 정원 한가운데 와장창 떨어진 것은, 새파랗게 염색한 마린 컷 헤어스타일만 빼면 의외로 얌전하게 생긴 턱시도 차림의 청년이었다. 그는,
“엄마 정말 이러기야? 어? 나도 다 생각이란 게 있는데?”
바닥에서 굴러다니다가 대뜸 소리치며 펄떡 일어나 앉았고, 두 랍스터맨이 다급히 달려들어 그의 팔을 받쳐 들었다.
“왕자님!”
“왕자님 괜찮으십니까?”
“이거 놔! 에이!”
“생각? 네놈의 얼어죽을 생각이란 게 기껏 남의 혼사에 깽판이나 놓는 거냐? 이 척척 다져 국거리로 쓰기에도 모자란 새끼야!”
노량진 수산시장 테마파크화 위원회 회장 겸 동해 용왕이 분노해서 고함을 지르자 하늘에 다시 쏜살같이 먹구름이 모여들더니 번개가 쩡 하고 번득였다. 바람이 재차 출렁였다.
“엄마가 뭘 알아! 내 순정은, 내 순정은!”
동해 용왕의 아들로 추정되는(왕자라니까) 청년은 눈물을 줄줄 흘리며 땅바닥을 주먹으로 쿵쿵 쳤고, 그의 수하로 추정되는 두 명의 랍스터맨들은 옆에서 쩔쩔대며 어쩔 줄 몰라할 뿐이었다. 
“동청씨, 이제 그만하세요.”
미 이사의 청아한 목소리에 동청이라 불린 동해 용궁의 왕자는 급속냉동기에 쓸려들어간 생태처럼 몸이 굳었다. 그는 잠시 그렇게 있다가,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고개를 돌려 미 이사를 바라보았다. 먹구름과 하늘과 흩날리는 장미와 울렁이는 바람 너머로, 금빛 난새의 날개 아래에 기대어 앉은 한 조각의 아득한 영원함을, 꿈에서라도 잊지 못할, 그 어떤 꿈이라도 눈짓 한 번에 무너뜨릴, 가슴 시린 아름다움 그 자체인 그의 첫 사랑을. 
동청은 고개를 파득 파득 저었다. 
“왜 나는 아닙니까? 왜 아니라는 겁니까? 저런 인간 나부랭이 떨거지들과는 열 번이고 몇 번이고 결혼하면서, 왜, 나는 아니라는 겁니까?”
바람이 파도처럼 출렁대다가, 짜증 어린 동해 용왕의 손짓 한 번에 도로 싹 가라앉았다.
“내가 아직 승천도 못 한 새끼용이라서요? 앞으로 몇 년만 기다리면 할 수 있다고요! 당신은 저런 먼지같은 인간들한테 시간 낭비를 할 필요가 없단 말입니다! 내가 그렇게 부탁했건만, 왜, 대체 내 어디가 부족하다는 겁니까? 아무리 보화와 마음을 갖다바쳐도 싫다는데 내가 더 뭘 어째야 하냐구요! 게다가 하다못해 또 인간 놈하고 결혼을 한다니, 아으아아아아아아아아!”
“싫다면 좀 알아들어 먹으라고!”
“말했잖아요, 동청씨. 당신은 사랑을 하는 게 아니에요.”
미 이사는 한숨을 폭 쉬었다. 
“사랑은 오래 참지 않아요. 타협하지도, 온유하지도 않아요. 그럴 필요가 없어요. 곧바로 절대적이며 완전한 것이에요. 당신은 날 사랑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날 사랑하는 당신 자신을 사랑하는 것뿐이면서, 무슨 절절하고 대단한 사랑을 하는 양 사기치지 말란 말이에요. 그런 거짓을 제 세계로 받아들이는 일은 없어요.” 
“목숨을 건대도 사랑이 아니라는 말입니까? 그래서 그때 제가-!”
“자살 쇼 말씀인가요? 그런 걸 하게 만드는 게 진짜 사랑인가요? 어떻게든 사랑을 이겨 보겠다는 독기 어린 무리수에 불과하죠. 솔직히.”
미 이사는 백옥 같은 손을 뻗었고, 그의 남편 중 하나가 장미꽃을 하나 꺾어 주는 걸 비단결처럼 받아 들었다.
“장미를 피우는 게 사랑이고, 월홍을 띄우는 게 사랑이고, 당신의 선물과 협박과 집착은 사랑이 아니라 정복욕일 뿐이에요. 당신은 내게 구애하는 게 아니라 전쟁을 거는 거잖아요. 구애와 전쟁은 당신에겐 같은 것이니까요. 구애로 날 당신 아래의 존재로 격하시키겠다는 마음을 먹어 놓고, 왜 내 탓을 하지요? 세상의 모든 것을 이겨 보겠다는 어리석은 오기에, 왜 내가 사랑으로 답해줘야 하나요?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는 말도 있잖아요. 당신이 여의주를 실컷 모아둔 것도 그래서지요, 모든 걸 이기기 위해서. 다섯 개나 되지 않아요? 그런데 왜 아직도 승천하지 않아요?”
“그, 그걸 어떻게-.”
“승천을 안 하는게 아니라 못 하는 건가요?”
“그건 그게, 그런 게 아니라….”
“천상이 당신의 속셈을 모르리라 생각하나요? 내게 그랬듯이, 승천의 규칙을 이겨내려는 마음, 하늘을 보기좋게 깔아뭉개고 기어이 승천해내서 자기보다 못한 모든 것들을 비웃어 주겠다는 마음을? 그런 마음으로 서천화원에 발끝이나 들이밀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세요?”
미 이사의 눈동자로 지금까지와는 다른 종류의 광채가 차올랐다. 
“하늘 입구에 이르면 제일 먼저 누굴 만나야 하는지 아시나요?”
“그, 아직 그건 제가 승천은 못 해봐서….”
“동청씨 자신을 만나게 된답니다. 자기 자신이지만 모든 전부인 자신을요. 그 자신이 자신의 마음 속에서 모든 것을 안팎으로 훤히 들여다 봐요. 아무것도 숨길 수 없고, 뒤틀 수 없고, 잊을 수도, 변명할 수도 없어요.”
미 이사는 장미 꽃잎을 뜯어내어 핏방울처럼 점점이 떨구었다.
“승천하고 싶나요? 아주 오랫동안 바래오지 않았어요?”
동해 용궁의 왕자는 많이 멍해진 얼굴로 느릿느릿 답했다.
“그야… 그렇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아둔 여의주 다섯 개를 전부 버리면 승천할 수 있을지도 몰라요. 그래도 장담할 순 없지만.”
“전부- 다요?”
“두 번 다시 찾으러 갈 수도 없는 곳에 영영 버린다면요.”
“영영……?”
“그래요. 돌아보지도 않고.”
동청의 얼굴로 푸른 구름 그림자와 붉은 꽃잎 몇 점, 흐린 햇살이 참참히 흘러 지났다. 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한동안 그대로 앉은 채 미 이사만 바라보았다. 하객과 열여섯 명의 미남 남편과 두 랍스터맨과 박 실장과 송사슴 사원, 동해 용왕은 말없이 동청의 정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럼, 그러면- 제 것이 되어주실 겁니까?”
“어휴.”
동해 용왕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사람들은 제각기 아이고 저런, 아이 그럼 안되는데, 눈치도 이해력도 없는 놈 같으니 같은 말을 중얼댔고, 동청은 애매한 얼굴로 사방을 둘러보았다.
“뭐, 뭐가 왜? 내가 뭘 어쨌다고? 다들 왜 이래?”
결론은 미 이사에게서 날아왔다.
“자, 그럼 저는 신혼여행을 떠나야 해서 그만 일어나 보겠어요.”
[결혼을 축하드립니다. 차량이 대기 중이오니 열여섯 님프들은 로비로 행차해 주시기 바랍니다. 하객 여러분들께 알립니다. 식권은 식당 입구에서 받아가시고…….]
“뭐? 잠깐, 잠깐… 저기….”
미 이사는 사뿐히 난새의 등에 올랐고, 그의 열여섯 님프 남편들은 줄지어 엘리베이터 쪽으로 행진해 갔다. 서빙봇들은 트레이를 내려놓고 정원 여기저기에 널린 캐비어 캔을 바삐 주웠다. 사람들은 소지품을 챙겨 들거나 없어진 물건을 찾아 식장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거나 했다. 동청은 떨떠굴하니 주변을 둘러 보았다. 뭐야 이 인간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그의 머릿속은 아직 아련히 흐렸다.
김과 이 팀장은 엘리베이터 옆에서 대기하고 있다가 열여섯번째 님프에게 재빨리 말을 걸었다.
“사보팀에서 나왔습니다, 안녕하세요? 지금 기분이 어떠신가요?”
“미 이사님의 열여섯번째 남편이 된 기분이 어떻습니까? 믿겨지십니까?”
미 이사는 난새가 하늘로 날아오르기 전에 박 실장에게서 담배를 한 입 받아 피웠다. 박 실장은 미 이사가 되돌려주는 담배를 두어 번 흔들어 장미 향을 떨구어 냈다. 그런다고 지워질 향기도 아니라는 걸 알기야 했지만.
“가망이 없어. 얘는 뼛속까지 장미 물이 들어버렸어.”
“넌 언제 봐도 발랄해서 좋아.”
“이번에는 어디로 가는데?”
“아, 바다가 예쁜 곳에도 가고, 여기 저기.”
박 실장은 피식 웃고는 담배를 입에 물었다. 그리고 바로 뗐다. 이게 장미맛 사탕이지 담밴가? 어째 향이 전보다 더 진해진 것 같다. 웨딩 효과인가?
“왜 웃니 웃긴? 이뻐가지고.”
“이런 일을 겪고도 아직도 바다 타령이라니 말이 돼? 이번엔 어디 용궁을 초토화시키려고.”
미 이사는 진주알이 옥 쟁반으로 쏟아지듯 맑게 소리내어 웃었다. 
“너도 참! 얜 정말 항상 상큼하게 웃긴다니까.”
“신혼 여행 잘 다녀와. 올 때 선물?”
“그래, 우리 이쁜이. 이리 와봐요.”
미 이사는 박 실장의 흰 뺨에 반짝 입맞춤을 남겼고, 한 번 취한 꿈결처럼 끌어안고 놓았다. 박 실장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서서 손을 흔들었다. 난새는 큰 날갯짓 한 번에 너끈히 공중으로 날아오르더니 금세 시야에서 멀어져 갔다. 얼마 후에는 빛무리도 오색 채운도 다 흩어져서 흔적조차 찾을 길 없었다. 부서져 산산이 흩어지는 먹구름의 균열 새새로 물빛 어린 햇살이 줄줄이 뻗어 내렸다. 
사람들은 계단이나 엘리베이터로 식당 층으로 무리지어 내려갔고, 로봇들은 쓰레기 봉투에 캐비어 캔을 주워 담느라 바빴다. 박 실장은 손짓으로 송사슴에게 먼저 내려가라고 알렸다.
“안돼! 내 말 아직 다 안 끝났다고!”
뒤늦게 정신이 퍼뜩 돌아온 동청은 난새가 사라진 방향 쪽으로 버럭 소리쳤고, 동해 용왕에게 등짝을 시원하게 얻어맞고는 바닥에 엎드러져 꿈틀거렸다. 
“엄마 아 좀! 진짜 왜 이래?” 
얻어맞은 등이 얼얼했지만 동청은 성질 부리기를 멈추지 않았다.
“쪽팔려서 뒤질 거 같아서 그런다! 어? 아들이랍시고 야! 여자가 아니라면 아닌 거야! 니가 뭔데 강짜를 부려? 자살 쇼는 또 뭐야? 아쉬워도 니가 백 번은 아쉽지, 미 이사가 왜 너깐 모자란 놈한테 승천 입문까지 가르쳐야 하냐고? 내가 누누이 말했지? 또 가출하거나 사고치면 유배형이라고?”
“유배 보내! 보내라고! 누가 무섭대?”
“니가 여의주 꿍쳐놓은 거 믿고 그러는 거 모를 줄 아냐?”
“뭐- 그게 뭐- 무슨-!”
동청은 말문이 턱 막혔다. 어떻게 알았지? 
동해 용왕은 주머니에서 웬 약병을 하나 꺼냈다. 흰색 플라스틱 약병에는 [청정남해 스피루리나-딜럭스200] 이라고 적혀 있었다. 그것을 본 동청의 얼굴에서 핏기가 싹 가셨고, 동해 용왕의 입가에는 찬 미소가 서렸다. 
“이만큼이나 모아놨으니 유배형을 받은들 어거지로 덮어씌우기하고 승천할 수 있을 줄 알았지? 싹수부터 노란 놈아. 청정남해는 또 뭐야? 나름의 페이크 시도냐? 하늘법이 무슨 인간법 같은 줄 알어? 뇌물 먹고 봐주게?”
“아, 아, 아냐! 그거 내 거야! 내 여의주 내놔!”
“니 거야아? 아구 그래애애애?”
“그래! 아니, 아니 저기 그렇습니다 어머니! 제 거라고요! 어마마마! 모왕!”
동해 용왕의 눈짓에 두 랍스터맨이 달려들어 버둥대는 동청의 양팔을 붙잡아 결박했다. 
“그럼 불러. 불러 보라고.”
“네, 네네?”
“이게 정말 니 여의주라면 약병 속이 아니라 지옥 빙판 천리 길 아래서라도 주인의 부름에 답해서 곧장 날아와야 한다고? 그러니까 불러 봐. 네가 불러서 정말로 이 약병이,” 동해 용왕은 스피룰리나 약병을 허공에 둥실 띄웠다, “네게 날아간다면 아무 말 않고 넘겨 주마.”
“그야 당연히! 좋습니다 그러죠!”
동청은 내심 기뻤다. 그야 당연히 그가 오랜 세월을 기울여 빚어낸 여의주니까, 당연히 부름에 응답할 것이 아닌가? 실제로 전에 몰래 실험해봤을 때에도 한강을 건너 날아와 그의 손으로 찰떡같이 붙기도 했었다. 그는 최대한 멋있게 목소리를 낮게 깔았다.
“여의주, 이리 오너라!”
박 실장은 멀찍이서 동청을 구경하며 장미 담배를 입에 물었다가 바로 뗐다. 역시 너무 달다. 약병은 같은 자리에 둥실 둥실 떠 있을 뿐이었다. 
이게 왜 이러지? 못 들었나? 동청은 다시 불렀다. 
“여의주, 오라고!”
변함없이 둥실댈 뿐, 후딱 날아오기는커녕 이쪽으로 한 치도 기울지 않는다. 동청은 슬그머니 불안해졌다.
“여의주! 야! 내 말이 안 들리냐? 어? 이거 뭐야 그, 맞어, 이거 그냥 빈 병이지! 엄마!”
동해 용왕이 약병 뚜껑을 돌려 열자, 안에서 푸르게 빛나는 구슬 다섯 개가 하나씩 날아 나왔다. 동청은 이제서야 슬슬 혼란스러웠다.
“아닌데, 저거 맞는데… 어?”
동청의 여의주 다섯 개는 매끄럽게 날아가서 동해 용왕의 손바닥에 착지했다. 
“어어?”
동해 용왕은 여의주 다섯 알을 한 입에 홀랑 털어 넣었다. 동청의 입이 쩍 떨어졌다.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자 그럼.”
동해 용왕은 에어바이크에 올라 탔다. 
“동청에게 삼백 년의 유배 형을 내린다. 죄목이야 하도 많으니 열거는 생략하고, 삼백 년간 생사를 거쳐 송사리로 살아 보도록 해라. 년수를 다 채우든지, 그 전이라도 여의주가 왜 불러도 오지 않았는지, 왜 여의주를 죽어라 모았어도 승천이 안 된건지, 왜 여의주가 느닷없이 나를 새 주인으로 선택한 건지 이유를 알아낸다면 풀어주겠다. 이의 있는 자? 하나 둘 셋? 당연히 없지? 이에 형을 선고한다.”
동청은 여전히 얼이 나간 채 용왕을 멀거니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동해 용왕은 빈 스피룰리나 병을 들어올렸고, 동청의 몸이 푸른 연기로 화하여 약병으로 쓸려들어간 후 뚜껑을 꽉 닫아서 자켓 주머니에 넣었고, 손짓 한 번으로 두 랍스터맨을 본래 모습으로 되돌려 어항에 날려 넣었다. 그런 후 그는 무엇이 막 기억났다는 얼굴로, 자켓 다른 주머니에서 작은 백금 상자를 꺼냈다.
멀리서 일이 마무리되기를 기다리던 박 실장은 이제 천천히 동해 용왕에게 다가갔다. 
“신부는요? 아.”
“아까 갔지요. 이건 전달해 드릴까요?”
동해 용왕은 박 실장에게 백금 상자를 열어 보였다. 엄지 손톱만한 순백색 진주 귀걸이가 저녁 노을에 명명히 반짝였다. 한 점의 흠도 없이 완전히 둥그런 데다, 빛을 받는 각도에 따라 섬섬히 광채가 달라지는 최상급 진주였다. 어떻게 보면 빛을 반사하는 것만이 아니라, 스스로 은은히 빛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는 상자를 닫고 박 실장의 손에 가만히 놓았다.
“내가 정말 회장님이나 박 실장을 볼 면목이 없어요. 미 이사한테 끼친 무례야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 왕자랍시고 무슨 사고로 실종된 줄 알고 천하대지를 이잡듯 뒤져내어 이제야 겨우 꼬리를 잡았나 했더니 이런 소란이나 부리고 있을 줄이야. 아무튼. 이것 잘 전해 주세요. 결혼 선물이라고… 자식 교육을 제대로 못 시켜 미안합니다.”
“무슨 말씀을요. 용왕님의 청청결백한 성정이야 하늘이 알고 땅이 알지 않습니까?”
“그런가요? 아무튼 정말 면목이 없습니다.” 
동해 용왕은 힘겹게 웃어 보였다. 박 실장은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오며 가며 또 뵙지요.”
“그래요. 의뢰비 나머지는 잘 챙겨서 정식으로 보내지요. 그럼 항상 무탈하세요.”
작별 인사 이후에 에어바이크는 소리 없이 떠올라 노량진 시장 쪽으로 날아갔으며, 박 실장은 동해 용왕의 모습이 완전히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돌아서서 엘리베이터로 또각 또각 향했다. 
“실장님!”
“실장님!”
김과 이 팀장은 엘리베이터 곁에 쪼그려 앉아 있다가 박 실장을 보고서 반색하며 일어나 섰다.
“아니. 안돼. 가서 밥이나 먹어.”
“아유 실장님, 그런 게 어딨어요.”
박 실장은 고개를 저었다. 
“미 이사가 입 댔던 담배를 화분에 심으면 장미 덩굴이 솟아오른다잖아요?”
“정말입니까?”
“무슨 그런 말이 돈단 말야? 어지간하네.”
“저희가 이번 기회에 실험을! 그래서 사실이면 좋고 아니면 유언비어를 혁파하는 셈이 아니겠습니까?”
“됐어.”
박 실장은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안으로 훌쩍 들어갔다.
“정말 어떻게 안될까요?”
“아까 버렸어.”
“네에에에에에에?”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틈새로 경악한 김 팀장의 소리가 크게 솟았다. 이 팀장은 손바닥으로 자신의 이마를 딱 쳤다.
“그럼 소문이 사실인 걸까요? 장미 정원의 장미들이 미 이사와 박 실장의 합작이라는? 그런?”
“그건 또 뭔 소리야?”
“모르셨어요? 한참은 지난 얘깁니다!”
“으.”
“사업의 괴로움! 친정 대행 서비스의 고통 어린 나날들! 옥상에서 고뇌에 차서 담배를 피우는 박 실장과 그런 그에게 담배를 얻어 피우는 미 이사! 미 이사가 툭 던져 버리는 담배 꽁초!”
“숭구리 당당 숭당당! 자라나라 장미 장미!”
“사실은 박 실장님께 미 이사가 담배를 가르쳤다더라! 그래서 박 실장님은 담배가 원래 단맛인 줄 알았다더라!”
박 실장은 식당층인 10층을 꾹 눌렀다. 기나긴 하루였다. 어서 식당에 가서 묽어터진 갈비탕이라도 먹고 싶었다. 
“사보팀 누구 아이디어였지? 해체해도 좋을 거 같은데. 아니 대체 요새 누가 사보를 읽기라도 해?”
“회장님이요!”
김과 이 팀장은 방긋 웃으며 동시에 합창하듯 대답했고, 박 실장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겠지. 그래야겠지. 많은 것이 설명되지 않는가?
사보팀 공동팀장의 질문 세례는 아직 끝난 게 아니었다. 
“어쩌다 송사슴을 직속으로 고르신 건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어떤 장점이 가장 튀었나요?”
“학력? 순발력? 유머 감각?”
“눈치? 사교력? 리서치를 잘 합니까?”
“저희가 우리 친정보살 앤 컴퍼티의 이상적인 인재상에 관한 특집을 준비하고 있거든요, 한 말씀만 해 주시죠!”
박 실장은 묵묵히 층수가 내려가는 화면만 바라보았다. 어쩌면 오늘은 사슴이의 충고를 받아들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그 잘난 정시 퇴근이라는 것을 한 번 해 볼까? 그리고 바다나 보러 가서. 벨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는 바람에, 박 실장의 퇴근 상상은 뚝 끊겼다. 김과 이 팀장이 여전히 뒤에서 뭐라고 떠들어댔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박 실장은 식당 입구의 사슴이가 건네주는 식권을 받아 들었다. 
“아직 밥 안 먹었어?”
“네, 별로 배도 안 고프구요. 갈비탕은 그냥 별로 안 좋아해서요.”
“나도 별로야. 게다가 묽거든.”
“묽어요? 진짜요? 아유!”
박 실장은 사슴이가 진작에 뽑아둔 식권 덕분에 줄 서서 기다릴 필요 없이 바로 식판을 받을 수 있었다. 겸사 겸사 김과 이 팀장과 거리를 멀리 하는 효과까지 낼 수 있으니 금상첨화라 할 만했다. 
박 실장과 송사슴은 창가 빈 테이블에 식판을 놓고 앉았다. 그런 후 김이 모락 모락 피어오르는 갈비탕 그릇을, 둘은 잠시 말없이 내려다 보았다. 송은 탕 속의 갈비를 찾기 위해 내려다 보았고, 박은 탕국의 표면에서 연하일휘 일지홍 진달래꽃 피어난 절벽과 높이 치달아 오르는 파도, 방파재와 바닷바람과 해상경비 드론, 갈매기 몇 마리를 보았다. 
그는 젓가락을 집어 들며 무심히 말했다. 
“우리도 바다나 보러 갈까?”
“네?”
“아냐.”
송사슴 사원은 숟가락으로 탕을 휘휘 저었다. 암만 해도 갈비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뭐가 있나 싶으면 죄다 무였다.
“외근이에요? 아님 출장? 그것도 좋죠, 퇴근보단 덜 해도.”
“그래?”
“그럼요.”
“그래 그럼.”
박 실장은 그릇의 밑바닥에 고인 면발을 한가득 집어 올렸다. 송사슴은 안 그래도 땡그란 눈을 더 땡그랗게 떴다. 
“무슨 면이 그렇게 많아요? 전 면이고 뭐고 없어요! 세숫대야를 잘못 받아온 거 같아요!”
“그럼 바꿀래?”
“네? 정말요?”
“아니.”
“아우.”
송사슴은 고기고 면이고 포기하고 그냥 밥이나 말았다. 좀 더 일찍 입사했어야 했는데. 그래서 미 이사님의 처음 결혼식 때 그렇게나 호화찬란했다는 산해진미 정식 코스를 맛보았어야 했어. 왜 난 항상 느려터진 걸까? 앞으로는 좀 더 빠릿빠릿하게 살 거야. 맛난 거 많이 먹고, 응. 그래야지. 그가 그런 생각을 하며 밥 한 입 두 입, 깍두기 한 개 두 개 먹는 동안 박 실장은 면만 딱 골라 먹고 젓가락을 놓았다.
“강릉이다.”
“네?”
“강릉으로 가는 거야. 어차피 그쪽에 볼 일도 있고. 먹고 나와.”
“네? 아니 저기 실장님! 실장님! 출장을 뭐 이렇게 가요! 잠깐만요!”
그가 부르든 말든 박 실장은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정작 답해야 하는 사람은 홀랑 나가버리는데, 엉뚱한 두 얼굴이 불쑥 송의 눈앞을 가로막았다. 
“출장이라고요?”
“무슨 일인데요? 이렇게 갑자기?”
송은 밥을 크게 한 숟갈 퍼서 입에 쑤셔 넣었다. 그런 후 입을 손가락으로 가리켜서 자기는 지금 입 안의 음식 때문에 말을 못하니 양해 바란다는 뜻을 대강 표현하고서, 허둥지둥 가방을 집어들고 식당 밖으로 냅다 도망쳤다. 김과 이 팀장은 아쉽다는 표정으로 송과 박이 앉았던 자리에 슬슬 앉았다. 서빙봇이 다가와서 식판과 물컵을 치웠고, 식탁을 닦았다.
로봇이 다른 테이블로 옮겨간 후 둘은 옆에 뒀던 식판을 앞으로 끌어왔다. 그리고 심각한 표정으로 각자의 갈비탕을 들여다 보았다. 
“뭐 보여?”
“아니. 그냥 국물하고, 뭐.”
“어! 갈비다!”
“우와! 웬일이야?”
“그러게. 사보에 싣자!”
“갈비탕에서 정말로 갈비를 찾아낸 일에 대하여, 뭐 그런 타이틀을 거는 거야?”
“그래야 다음에는 좀 뭐라도 메뉴가 나아지지 않을까?”
“차라리 미 이사가 결혼하길 멈추길 바라지.”
“그것도 그래.”
사보팀의 공동 팀장은 동시에 젓가락을 들었다. 그때 이 팀장의 블라우스 소맷단에 숨어 있던 장미 꽃잎 한 장이 살랑 떨어져 내렸다. 꽃잎은 김 팀장이 빠르게 내민 숟가락 세이브마저 간발의 차이로 절묘하게 피해서, 이 팀장의 갈비탕 속 갈비에 착 앉고야 말았다.
침묵이 흘렀다. 몇 초 후, 김 팀장은 젓가락 끝으로 장미 꽃잎을 가리켰다.
“아.”
“어….”
“아아.”
“어어.”
이 팀장은 젓가락 한 짝 끝으로 국물만 약간 찍어 맛을 보았고, 고개를 도리도리 거칠게 저었다. 그는 식판을 옆으로 쭈욱 밀어냈다.
“장미탕이야.”
“아하?”
김 팀장은 자신의 식판을 이 팀장 쪽으로 조금 밀었다. 
“일단 나눠 먹자고. 콩 한 쪽도 나눠 먹는다잖아?”
그렇게 훈훈하게 식사를 하는 것인가 싶었으나, 이번에는 김 팀장의 소맷단 속에서 장미 꽃잎 한 점이 화륵 흘러내려 무 위에 사뿐히 앉았다.
두 팀장은 서로를 마주 보았다. 이번에는 아주 긴 침묵이 시작될 예정이었다. 그것이 미 이사의 뜻일 수도 있을 것이며, 그냥 우연일 수도 있겠으며, 바람이 전에 너무 심하게 분 탓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유든지간에, 혹은 여러 가지 종합적인 이유로 인한 것이든지, 미 이사의 열여섯번째 결혼식의 마무리로는 더할나위없이 적절한 결말이라 할 만했다. 고래로부터 에코는 여신의 일에 함부로 왈가왈부해서는 안된다는 교훈이 괜히 전해져 내려오는게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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