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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러디 발렌타인 크로니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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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이상해졌다. 통제력과 사회성을 상실한 자들이 늘어만 갔다. 하지만 세상에는 질병 때문에 이상해진 사람들만큼이나 원래부터 이상한 사람들도 많았기에 변화에 대한 자각은 너무나 늦고 말았다.

이상해진 사람들의 증가로 각지에서 이상한 소동이 일어났다. 이상해진 사람들은 모두 죽거나 실성하여 격리되었다. 질병은 특정 염색체에 반응하였다. 이후의 세계에서 거리는 조금 더 깨끗하고 조용해졌다.

죽은 사람들은 망령이 되어 돌아오고 살아남은 자들은 초콜릿을 끓인다. 이후의 세계는 그렇게 변했다. 이 이야기는 이후의 세계가 마주해야 했던 피로 얼룩진 발렌타인 데이에 대한 기록이다.


“옛다.”

“먹고 떨어져라.”

이수는 벽돌에 초콜릿을 묻힌 뒤 벽을 기어오르던 망자의 머리통을 향해 던졌다. 명성 고등학교 옥상 높이만큼의 위치 에너지가 고스란히 벽돌의 무게에 실려 망자의 두개골로 전달이 되었다.

망자는 그대로 추락하여 땅바닥에 부딪혔다. 머리는 이미 초콜릿으로 반쯤 녹아 있었다. 소동 이후의 세계에서 매년 발렌타인 데이마다 볼 수 있는 평화로운 풍경이다. 발렌타인 데이가 되면 망자들이 어딘지 모를 곳으로부터 돌아온다. 그리고 초콜릿에 이끌려 도시를 배회한다.

망자들은 칼로도 막을 수 있고 총으로도 막을 수 있다. 하지만 가장 안전하고 값싸게 그들을 막는 방법이 바로 이 초콜릿이었다. 망령이 된 자들은 초콜릿을 원하면서 또 초콜릿에 녹아버리기 때문이다.

“향기 좋다.”

이수는 기지개를 크게 하고는 옥상 곳곳에 놓인 솥에서 끓고 있는 초콜릿의 향을 들이마셨다. 다른 자봉단원들도 이수와 함께 동이 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들은 오늘 있을 장례식의 상주들이다. 기존에 상주를 맡던 자들이 다 죽거나 실성하는 식으로 추락한 덕이었다. 발렌타인 데이의 상주들은 이제 망령이 된 자들을 위해 초콜릿을 통한 진혼을 준비하고 있다.

죽어서도 정신을 못 차리고 산 자들에게 먹을 것을 구걸하는 일이 어디 자랑일까. 하지만 그럼에도 상주들은 관대하게 망령들을 위한 애도를 진행했다. 그리고 이 애도는 단순한 선의에서 비롯한 것이 아니다.

망령이 되어 돌아온 자들을 초콜릿으로 코팅한 무기들로 되죽이는 일은 누군가에게는 훌륭한 엔터테인먼트다. 이후의 세계에서 초혼은 축제나 다름없었다.

“시간 됐습니다. 3학년 반 정위치로 가주십시오.”

“달미 씨. 내려가요.”

“네, 이수 씨.”

달미는 올해 이수의 부사수를 맡은 신입이다. 둘 다 3학년 반 소속이지만 실제 고등학생은 아니다. 이는 1층에 위치한 3학년 교실에서 망령이 된 자들을 상대하도록 배정을 받았다는 뜻이다. 오늘 내내 초콜릿을 끓일 옥상 반 다음으로 고된 파트다.

그런 만큼 이수는 작년과 마찬가지로 운서처럼 숙련된 부사수를 원했지만 조직위는 이수처럼 숙련된 사수가 달미 같이 미숙한 부사수를 맡아주기를 원했다. 이수는 이 배치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말이 통하는 운서가 옥상 반에 들어간 것은 어찌 보면 이수에게는 더 행운이라고 할 수도 있으니까.


“아, 냄새.”

이수와 달미는 1층으로 내려가자 명성 고등학교의 교문 너머로부터 하나 둘 망자의 무리가 오고 있음을 시각만이 아닌 후각으로도 느낄 수 있었다. 3학년 반은 건물 입구를 둘러싸는 바리케이트 뒤에 이열로 서서 망자들과의 싸움을 준비했다.

지린 냄새가 코를 찌르자 3학년 반은 입으로만 숨을 쉬려 했다. 옥상 반과 3학년 반의 부사수들이 끓이고 있는 대량의 초콜릿으로도 지울 수 없는, 눈이 아파올 정도로 지독한 악취였다.

“세상에. 이런 구린내라니. 쟤들은 1년 동안 하수구에서 지냈나 봐요.”

“원래도 저런 냄새가 났는데 우리가 잊은 걸지도 모르죠.”

달미는 낄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화살촉에 중탕된 초콜릿을 발라 이수에게 건네었다. 이수는 차분하게 활시위를 당기며 망자의 머리를 겨누었다.

쉭.

화살이 악취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교정을 지나 망자의 이마를 꿰뚫었다. 화살은 그 자체로도 무기였지만 망자에게는 염산이나 다름없는 초콜릿이 발라져 있었다. 초콜릿은 그렇잖아도 손상된 망자들의 뇌를 확실하게 녹여버렸다.

달미는 이수의 깔끔하기 그지없는 사격에 그만 박수를 칠 뻔 했다. 망자는 좀비처럼 굼뜨게 움직이니 비교적 맞추기 쉬운 과녁일지는 몰라도 이수가 활을 쏘는 자세만으로도 남다른 품격을 느꼈기 때문이다.

“다음 화살 부탁해요.”

“네.”

이수는 달미에게 화살을 건네받는 족족 망자들의 뇌에 박아버렸다. 3학년 반의 다른 사수들도 이수의 뒤를 이어 화살을 쏘았다. 망자의 군세는 곧 망자의 융단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망자들은 그들의 동료가 땅바닥에 쓰러지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저 3학년 반이 대기하고 있는 건물 정문을 향해, 공기에 녹아드는 초콜릿 향기에 이끌려서 느릿느릿 진군할 뿐.

망자들은 지능이 없다. 그저 살아남은 자들에 대한 적의만이 그들의 행동을 증명한다. 이들은 약간의 소동이 있던 당시부터 이미 정상적인 사고기능을 잃어버린 상태였다. 뇌가 손상된 탓인지 움직임도 굼떴다.

그들은 분명 죽었음에도 발렌타인 데이가 되면 어딘지 모를 곳에서 나타나 살아남은 자들을 위협하고 초콜릿을 쫓는다. 시체를 땅에 묻고 불로 태우고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다음 해 발렌타인 데이면 다시 돌아와서 말이다.

사람들은 이 현상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는 시도를 포기했다. 그저 이상한 사람들이 너무 늘어났고 그들이 한꺼번에 죽은 나머지 지옥의 망자들이 가득 차 현세로 흘러나온 것이라는 정도로만 받아들였다.

[진행 상황 좋습니다. 15분 뒤 예정대로 3층으로 이동해주십시오.]

“15분 뒤 3층으로 이동하라고 톡이 왔어요.”

“알겠어요. 고마워요.”

달미가 부사수로서 맡은 임무는 초콜릿을 지속적으로 중탕하는 것과 화살의 보충 그리고 작전팀이 보내는 톡의 확인이다. 사수들은 전열에서 망자들을 활로 쏴 맞추면서 달미의 보고에 집중했다.

달미는 이 순간 기시감을 느꼈다. 공장에서 하던 아르바이트와 발렌타인 의식에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다. 기계적으로 또 조직적으로 행해지는 반복노동. 어떤 감정이 개입되기에는 너무나 단조로운 일이었다.

“달미 씨. 진행이 의외로 빠르네요. 5분 뒤에 3층으로 올라간다고 전해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한국에서 치러지는 발렌타인 의식의 자원봉사단은 대부분 활을 사용했다. 대단한 이유는 아니다. 총이나 대포에 비하면 경제적으로 저렴한 해결책이었기 때문이다. 망자들에게는 총알 값도 아까웠다.

뇌에 화살을 맞은 망자들은 땅바닥을 기다가 그 위에 새로운 망자가 쓰러져 이내 움직이지 못하게 된다. 그렇게 망자들로 이루어진 샌드위치의 높이가 건물 한 층의 절반 정도 높이가 되면 3학년 반은 3층으로 거점을 옮길 준비를 한다.

“부어달라고 해주세요.”

“네.”

이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미에게 작전 팀에게 연락을 넣으라 명령했다. 슬슬 올라갈 시간이 된 것이다.

“부어요-!”

“부어요-!”

“부어요-!”

옥상으로부터 경고의 외침이 세 번 반복되었다. 다음으로는 팔팔 끓는 초콜릿의 폭포가 바리케이트 앞에 쌓인 망자들의 둑 위로 쏟아졌다. 망자들은 뜨거운 초콜릿에 온몸이 녹아내리자 고통 속에 발버둥을 더 이상 꿈틀거리지도 못하게 되었다.

“이수 씨는 부먹 파, 찍먹 파 어느 쪽이에요?”

“찍먹이요.”

“역시.”

이수와 달미도 겨우 어깨를 펴고 긴장을 풀 수 있었다. 1차 작전이 끝나기도 했지만 시궁창 같던 망자들의 냄새가 초콜릿의 달콤한 향기로 중화된 덕분도 크다. 달미만이 아니라 3학년 반 전원이 안도의 한숨과 함께 서로를 격려했다.

이수는 손을 들어 3층으로 올라가라는 신호를 보냈다. 초콜릿으로 코팅이 된 망자들의 언덕은 그 자체로 망자들을 유인하고 또 녹이는 방어막이 될 것이다. 그 위로 두터운 망자의 언덕이 다시 쌓이기 전까지 3학년 반은 2층의 2학년 반과 교대해 쉬는 시간을 가지게 된다.


“이수 씨는 올해 발렌타인 데이가 다섯 번째 참석이라 하셨죠?”

“네.”

“그러면 첫 해 빼고는 전부 참가하셨네요.”

“벌써 그렇게 됐네요.”

“발렌타인 의식은 징병이 아닌 자원봉사잖아요. 매년 참석하시면 피곤하지 않으세요?”

달미는 냄비 안의 찌개가 끓는 동안 끊임없이 이수를 향해 말을 걸었다. 달미는 올해 발렌타인 데이 사냥에 처음으로 참가한 신참이니 궁금한 것이 많을 법 했다. 하지만 이수는 달미와의 스몰토크보다는 찌개 쪽에 더 관심이 갔다.

올해 발렌타인 데이 의식 준비위원회가 준비한 메뉴는 부대찌개였다. 3학년 반은 방금 식사를 마친 2학년 반과 교대를 하고는 학교 실험실에 들어가 식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화력이 약한 탓인지 찌개는 쉽사리 끓지 않았다. 결국 이수는 테이블에 같이 앉은 사람들과의 별 거 아닌 스몰토크에 참가해야만 했다.

“발렌타인 데이 의식의 참가자들은 대부분 세 가지 이유를 갖고 있죠. 가장 적은 부류는 의식이 마무리된 뒤 나눠주는 초콜릿 때문에 온 사람들. 하루치 간식으로는 나쁘지 않지만 이 고생값으로는 모자란 편인데도요.”

“저는 초콜릿 때문에 왔어요.”

“그 다음으로는 의식 참가자들에게 나오는 페이 때문에 온 사람들. 용돈벌이로는 나쁘지 않을만큼 일당이 나오니까요.”

“쏠쏠하더라고요.”

“의외로 가장 많은 것이 헌팅 자체의 재미 때문에 온 사람들. 취미가 맞는 사람에게는 이만한 레져도 없을 거예요.”

달미는 접시에 찌개를 덜어내며 침착히 활을 쏘며 망자들의 뇌를 부수던 이수의 모습을 떠올렸다. 과연. 사람들이 몰려들 만도 했다. 이수와 달미가 앉은 테이블에서 함께 식사를 하던 커플들도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화제는 이제 올해 제작된 초콜릿의 품질로 옮겨졌다. 발렌타인 데이 의식용 초콜릿은 식용보다는 살상용을 목표로 제작되는지라 먹을 만한 품질이었던 적이 없었다.

참가자들에게 주는 기념 초콜릿은 그날 끓인 망자 살상용이 아닌 후원기업에서 따로 제작한 선물용 초콜릿이었다. 그러니 딱히 살상용 초콜릿의 품질에 호불호를 가질 것도 없었으나 올해는 달랐다. 망자들의 썩은 냄새를 지우기 위해 보다 달콤한 향기가 나도록 제조된 특수 초콜릿이었던 것이다. 예년보다 자봉단의 복지를 신경 쓴 결정이었다.

이런 변화 때문에 내년에는 자봉단 경쟁률이 더 올라가는 것이 아니냐, 올해 초콜릿을 후원한 기업은 어디냐, 작년은 노이하우스였다 등 대화의 열기가 식탁 위의 부대찌개처럼 끓어올랐다. 하지만 이수는 식사에만 급급했다.

“이수 씨.”

“네.”

“아까 발렌타인 의식에 참가하는 사람은 대부분 세 가지 이유로 온다고 하셨잖아요.”

“네.”

“이수 씨가 참가한 이유는 그 세 가지 중에서 어떤 거예요?”

달미는 대화에 휴지기가 찾아온 사이를 놓치지 않고 자신의 사수에게 질문을 건넸다.

“그 세 가지 중에서는 없어요.”

“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세 가지 이유 중 하나를 갖고 있다고 했지 전부라고 하지는 않았잖아요. 그렇다고 제 이유가 별 대단한 것은 아니에요.”

이수는 달미와 다르게 길게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달미를 무안하게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떻게 하면 다른 주제로 대화를 돌릴 수 있을까 고민하던 찰나, 이수는 주머니 안에서 자그마한 진동을 느꼈다. 옥상 반의 운서였다.

[왔어. 갈 거지?]

[네.]

이수는 반사적으로 답을 보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지갑에서 명함 한 장을 꺼내 달미에게 건네었다. 달미는 무슨 영문인지 모른 채 명함을 받았다.

“달미 씨. 이건 제 가게 명함이에요. 나중에 가게에 놀러오시면 작게나마 대접할게요. 오늘 제가 급히 나가봐야 할 일이 있어서 죄송하지만 오늘 남은 일정은 달미 씨에게 부탁해야겠어요. 저는 아마 뒷정리를 시작할 때쯤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작전 팀에는 옥상 반의 운서 씨가 양해를 구할 테니 전달은 하지 않으셔도 되어요.”

“네?”

이수는 달미에게 제대로 된 설명도 하지 않고 교실 밖으로 나섰다. 어차피 자원봉사의 개념인만큼 자리를 비워도 큰 문제가 되진 않을 터이다.

달미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이수가 남긴 명함만을 바라보았다. 이거 공쳤나? 달미는 그제야 오늘 이수가 의식에 참가한 이유를 짐작했다. 그렇다면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 오래도록 간직했던 마음을 전하는 날이니까.


이수는 자동차의 시동을 걸었다. 거친 배기음이 망자들의 신음 소리를 찢었다. 망자들은 명성 고등학교의 정문 근처에만 몰려들었기에 일일주차장이 된 운동장은 한산했다. 이수는 안심하고 액셀을 강하게 밟았다.

텅, 텅텅.

망자들을 상대로 하는 인간볼링에서는 약간의 통쾌함마저 느껴졌다. 아니. 아니다. 이수는 죄책감을 느꼈다. 그리고는 다시 방금까지의 그 금욕적인 태도로 돌아가려 애썼다. 즐길 상대는 하나여야 했다.

‘옳지, 저기 보인다.’

운서가 말한대로였다. 이수가 찾던 망자는 아직 교문 근처에서 다른 망자들과 함께 뒤뚱거리고 있었다.

‘그러면 그렇지. 네가 학교가 아니고서야 어디서 초콜릿을 받을 수 있었겠니?’

이수는 심호흡을 한 뒤 다시 한 번 액셀이 으깨지지나 않을까 염려될 정도로 강하게 밟아 목표로 한 망자와 그 주변의 무리를 향해 돌진했다. 타이어가 대지에 갈리면서 찢어질 듯 한 파열음을 내고 유리창과 범퍼 역시 금이 가거나 일그러지는 소리가 났다.

주변의 망자들은 모두 차에 치여 관절들이 꺾이면 안 될 방향으로 꺾여버렸다. 이수는 안심하고 목표로 했던 망자를 향해 작살총을 쏘았다. 쇠사슬이 달린 작살이 망자의 가슴팍을 파고 었다. 이수는 작살총을 단단하게 고정한 뒤 다시 한 번 액셀을 밟아 그를 가로막는 망자들을 뭉개버렸다. 이제는 이 냄새 나는 학교를 떠날 차례였다.


“용문아. 오랜만이다.”

이수는 거실 소파에 앉아 눈앞의 남자에게 인사를 건넸다. 예정보다 준비하는 시간이 오래 걸렸기에 이수는 가급적 천천히 다음 단계로 진행할 생각이었다.

용문이라 불리운 망자는 이 집에 끌려왔을 때 그대로 가슴에 긴 작살이 박힌 채로 사지가 묶여 있었다. 그를 한마디로 설명하자면 튀어나온 뱃살로 벨트가 감춰지는 사람이었다. 그 외에는 다른 망자와 다를 바 없었다. 악취가 심했으며 입은 다물어지지 않았고 촛점이 어긋난 동공은 제 방향을 찾질 못했다.

이수는 쇠지렛대를 휘둘러 망자의 머리를 갈겼다.

“용문아. 집중해야지.”

낡은 집이었다. 사람이 사는 기색은 없었다. 바닥에는 먼지의 카페트가 두껍게 깔려 있었고 천장 곳곳에는 거미가 집을 지어놓았다. 이수는 몇 년만에 돌아온 고향집이었음에도 반가움은 느끼지 못했다.

거실에는 소파와 가스렌지 그리고 램프만이 놓여있었다. 이후의 세계에서 이수가 살던 이 교외지역 같은 곳은 안전상의 문제로 출입금지구역이 되었다. 수도와 가스 그리고 전기 모두 끊긴지 오래였다.

이수는 만약을 대비해서 초콜릿을 계속 중탕하고 있었다. 집의 묵은내와 망자의 쉰내 그리고 초콜릿의 단내가 뒤섞여 형언하기 싫은 냄새가 났다. 이수는 깊은 감정을 쇠지렛대에 담아 망자에게 분출했다. 망자는 경련했다.

“너도 알고 나도 알지만.”

쇠지렛대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를 냈다. 망자의 이빨 두어 개가 거실 바닥에 튕기며 경쾌한 소리를 냈다.

“이건 다 화풀이일 뿐이지.”

사람들이 발렌타인 데이 의식에 참가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세 가지다. 하나는 초콜릿. 또 하나는 돈. 마지막으로는 헌팅의 재미. 하지만 그 대부분에 속하지 않는 이유로 참가하는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이 있다. 그 사람들의 이유는 대부분 복수이다.

이수는 오래도록 용문을 찾았다. 그렇기에 매년 발렌타인 데이 의식에 참가했던 것이기도 하다.긴 시간이 지나면 이 감정이 잊혀지지 않을까 자문하고 우려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수의 분노는 오래 묵을수록 숙성되어만 갔다.

“네가 서현이한테 한 짓.”

또 다시 망자의 이빨이 입에서 튀어나와 바닥을 굴렀다.

“네가 질병으로 이상해진 것 때문인지 원래부터 이상했던 것 때문인지는 모르겠더라.”

다음으로는 안구였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관심 없기도 해.”

이번에는 머리 안에 담겨있어야 했던 무언가가 흘러나왔다.

“나는 네가 병에 걸린 환자이거나 사회의 희생양이거나 그런 이야기를 들어줄 정도로 한가한 사람이 아니니까.”

용문은 이전의 세계에서 서현에게 폭력을 저질렀다. 이수가 용문에게 폭력을 저지르는 지금 이 순간보다 더 잔인하고 부당한 이유에서였다. 그 결과 이수는 서현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용문은 명성 고등학교의 교사였다. 이수와 서현은 용문이 담임을 맡고 있는 반의 학생들이었다. 이후의 세계에서 망자들은 초콜릿을 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그리고 자신들이 초콜릿을 받을 수 있는 곳으로 모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이수는 하나의 가능성을 떠올렸다.

오늘은 발렌타인 데이면서 이수의 꿈이 이루어진 날이기도 하다. 이수는 용문에게 품어 왔던 자신의 진솔한 마음을 초콜릿이 코팅된 쇠지렛대에 담아 용문의 두개골에 전달하기 위해 오래도록 기다려 왔다. 애도의 시간이다.


이수는 달궈진 찻주전자에서 차를 따랐다. 램프에서 은은하게 비춰지는 주황빛과 유령도시가 된 거리의 야경을 즐겼다. 집안에서 캠핑을 하는 기분이 들었다. 곤죽이 된 용문의 몸뚱아리는 조각조각 해체해서 비닐봉지에 담았다.

어차피 망자들과 그들의 잔해는 발렌타인 데이가 지나면 어디론가 사라지니 이렇게까지 깨끗이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이수는 식사를 마치면 바로 설거지를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이수는 차를 마시기 전 이미 창을 열어 겨울의 차디찬 공기를 안에 들였다. 망자의 썩은내와 초콜릿의 향기가 뒤섞인 것이 마뜩찮았기 때문이다. 이제 집안에서는 방금 끓인 차향만이 흐릿하게 흘렀다.

‘끝났다.’

이수는 오열을 그친 사람처럼 차분해졌다. 망자가 된 용문의 몸뚱아리를 부수고 찢은 다음 분리수거까지 마치면서 많은 것이 정돈된 느낌이었다.

복수는 이기적인 일이다. 이수가 용문을 되살려 다시 죽인다고 서현이 기뻐하지는 않을 것이며 이수에게 돌아올 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으로 충분했다. 이수에게는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필요했다.

‘돌아갈까.’

소파에 기대 갓 끓인 차를 한 모금 마시자 피로가 녹아내렸다. 그리고는 옆에 든 초콜릿 상자에서 위에 알파벳 G가 새겨진 초콜릿을 하나 골라 입안에 넣었다. 이수는 브랜드의 로고따위가 새겨진 디자인이 질색이었기에 가급적 빨리 먹어치우고 싶었기 때문이다.

이수는 달콤한 향이 입안을 감돌자 다시 기운을 되찾았다. 차를 다섯 모금만 더 마시고 돌아가자. 이수는 그렇게 자신을 다독였다. 명성 고등학교에는 아직 수많은 망자들이 남아 있었다. 달미와 운서에게 떠넘긴 업무들도 과하게 많았고.

하지만 그 순간 집 안에서 낡은 화장실의 지린내가 났다. 이수는 순식간에 밀려오는 불쾌한 감각에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주변을 경계했다. 이 냄새는 망자의 것이었다.

“태령이니?”

이수는 어느새 부엌에서 나타나 어기적어기적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망자를 향해 질문을 던졌다. 상대는 망자답게 신음으로 대답했다.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하고 한 질문은 아니었다. 태령이 망자가 아니었을 때도 제대로 된 대답을 기대했던 적은 없었다.

“하긴. 너는 학교나 학원에서 초콜릿을 받는 인간이 아니었지.”

“엄마나 내가 주는 초콜릿 외에 뭘 받아봤겠어.”

“그러니 망자가 되어서도 집 말고는 갈 곳을 떠올리지 못 했을 테고.”

“안 그래?”

이수는 망자가 된 손위 형제를 향해 비아냥거렸다. 하지만 살아있을 때와는 달리 태령은 이수의 조롱에 반응하지 않고 그저 초콜릿을 쫓아 누이에게 다가갈 뿐이었다.

태령은 지척까지 접근했다. 이수는 용문의 토막이 난 몸뚱아리를 버리면서 쇠지렛대마저 치운 것을 후회했다. 이수는 급한 마음에 어떻게든 다가오는 태령을 물리치고자 티테이블 위에 놓여있던 초콜릿을 집어던졌다. 망자에게는 아까운 맛이었음에도.

하지만 태령은 이수가 던진 초콜릿을 얼굴에 맞고도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도 내심 기대했는데 말이야.”

망자들에게 대부분의 초콜릿은 독이나 다름없다. 하지만 모든 초콜릿이 그런 것은 아니다. 가족이 주는 초콜릿은 망자에게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

이수는 마음 한구석에서 태령과 자신이 피가 이어진 사이가 아닐 수 있을 가능성에 대한 희망을 품고 살았다. 하지만 애석하게도 이수의 초콜릿에 태령이 반응하지 않는 모습을 보아 둘 사이는 혈연관계가 맞았다.

“어쩔까. 비명이라도 지를까?”

“그때처럼?”

태령은 동생에게 다가가 그 손목을 강하게 비틀었다. 생전과 다를 바 없는 행동이었다. 이수는 소리쳤다. 비명은 아니었다. 지저분한 손으로 동의없이 자신을 붙잡은 것에 대한 분노의 고함이었다.

이수는 태령의 발을 걸어 넘어뜨린 뒤 그 위에 올라탔다. 쇠지렛대가 없었기에 급한대로 찻주전자를 양손에 쥔 채로 그 코에 찍어버렸다. 두 번, 세 번, 다섯 번이고 내리치자 제 아무리 망자인 태령이라고 해도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는 듯싶었다.

이수는 신음하는 태령으로부터 일어나 신발장 옆에 놓았던 쇠지렛대를 찾았다. 하지만 그 사이 태령은 그 두터운 살덩어리를 무기로 삼아 이수를 깔아뭉갰다.

“이 인간 진짜 죽어도 관리를 안 하네!”

이수는 태령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불에 그을린 듯한 피부에 듬성듬성 수염이 났으며 질질 침을 흘리느라 입은 다물 줄을 몰랐다. 내가 얘랑 진짜로 피가 이어졌다고? 이수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대부분의 경우 망자들은 초콜릿을 먹고 죽어버린다. 하지만 초콜릿이 없을 경우는? 먹을 수 있는 모든 것을 먹는다. 그리고 이 상황에서 태령이 먹을 수 있는 것으로는 이수가 있었다.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태령은 큼지막하게 입을 벌리고는 이수를 향해 누런 이를 드러냈다. 그리고 퍼석, 하는 소리와 함께 그 누런 이 사이로 거무튀튀한 무언가가 튀어나오고는 피가 뿜어져 나왔다.

“괜찮으세요?”

이수는 피범벅이 된 얼굴을 손으로 훔친 뒤에야 누구의 목소리인지 확인할 수 있었다. 바이커 용 자켓을 입고서는 초콜릿으로 코팅된 날카로운 나무말뚝-속칭 빼빼로-를 들고 있는 순찰대원이었다.

방금 들렸던 무언가가 깨지는 소리는 이 순찰대원이 이수를 구하기 위해 거실의 유리창을 깨고 들어오는 소리였다. 이수는 나무말뚝이 뒤통수부터 입까지 관통한 태령을 발로 걷어 차 치우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순찰대입니다. 출입금지구역에서 불빛이 보이기에 주시하고 있다가 큰 소리가 들려서 들어왔습니다. 다치신 데는 없고요?”

“감사...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네요.”

순찰대원은 쓰러진 이수를 붙잡고서는 일으켜주었다. 단단한 손이었다. 이수는 순찰대원을 훑어보았다. 명찰에는 화정이라 이름이 적혀 있었다. 이수는 발목이 시큰거리자 자연스레 소파에 기대었다. 화정은 놀란 얼굴로 다시 한 번 이수의 상태를 확인했다.

“괜찮으십니까?”

“네. 괜찮아요.”

“다행입니다.”

“하지만...발목이 아픈 게 운전은 무리일 것 같아요.”

“그렇군요. 괜찮으시다면 제가 댁까지 바래다드릴겠습니다.”

화정은 이수에게 다가가 그를 부축했다. 겨울이라고는 해도 두터운 바이커 용 자켓 때문인지 화정에게는 약간의 땀내와 가죽의 향기가 났다.

이수는 화정에게 기대고는 오늘 낮 달미에게 했던 이야기를 상기했다. 사람들이 발렌타인 데이 의식에 참가하는 대부분의 이유는 초콜릿이나 페이 그리고 의외로 가장 많은 경우가 바로 헌팅이라고.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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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쁘로프박사 19.02.01 12:35 댓글

    마지막이 참 재밌네요. 초콜릿, 페이, 헌팅이라는 부분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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