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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영 보시기에 나빴더라

2018.12.01 00:0012.01

보시기에 나빴더라

앤윈

아무래도 지연은 자신이 그리 건강한 성격은 못 되는 모양이라고 새삼 생각했다. 환하게 인사를 하며 지나가거나 괜히 서로에게 시비를 거는 아이들의 시끄러운 흐름들 속에, 지연은 도통 어디에 자리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시끄러워.’

여하간 이곳은 교회인데도 이 모양이다. 지연은 오래전부터 어른들이랑 함께 예배를 드리고 싶었다. 아이들은 영 자발스러워 조금만 오래 함께 있어도 피로해지기 일쑤였다. 목소리는 굳이 저렇게 크게 높여야 하는지, 저렇게 괜히 친한 척을 꼭 해야만 하는지. 지연은 자신에게도 똑같이 반가움을 표하는 몇몇 아이들을 지나서 조심스럽게 예배실로 들어섰다. 짧은 시간이었는데도 상당히 피로했다.

지연은 예배실 가장자리 뒤쪽에 자리를 잡았다. 맨 앞자리에 앉아서 초롱초롱한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도 물론 있었지만, 지연은 아무래도 그런 타입은 되기가 어려웠다. 이왕이면 눈들을 좀 피할 수 있는 곳이 마음 편했다. 우왕좌왕 아이들이 뛰어 들어와서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았고, 뛰어 들어오는 아이들 중에서 지연은 도훈을 찾아냈다.

도훈은 약간 심드렁한 표정으로 지연의 대각선으로 한 자리 앞에 자리를 잡았다. 도훈의 뒷덜미에서 익숙한 냄새가 났다. 지연은 얼떨결에 다른 아이들처럼 반갑게 인사를 건넬 뻔한 걸 간신히 억눌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고, 순간적으로 지연의 아랫배가 당겨왔다. 도훈이 옆에 있으면 언제나 이런 불편감이 따라왔다. 그럼에도 교회에 올 때마다 가장 먼저 도훈이 어디에 있는지부터 찾는 건 어쩔 도리가 없었다.

오래 걸리지 않아 예배가 시작되었다. 지연은 꼿꼿하게 등을 펴고 조용하게 마음을 가다듬었다. 천지를 새로이 주관하신 하나님 아버지를 내가 믿사오며, 우리에게 임재하신…….

기도문을 외우다가 지연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고 단정하게 정돈된 도훈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도훈은 언제나 그리 말이 많지 않고, 쉽사리 큰 소리를 내지 않았다. 하지만 서로 큰 소리를 내지 않는 존재들이라 오히려 더욱 가까이 지내기는 어려웠다. 도훈과 지연 사이에는 언제나 수많은 아이들이 끼어들었다. 조용한 이들에게는 적대감을 표출해도 친근감을 표출해도 별다른 응답이 돌아오지 않게 마련이었기에, 지연을 노려보거나 혹은 괜히 친한 척을 하던 아이들도 금방 시들해지기 마련이었다. 아마 사정은 도훈도 비슷할 것이라고, 지연은 어렴풋하게 짐작했다. 도훈에게도 꼭 붙어 다니는 단짝 친구는 없어 보였다.

그렇다고 지연이 도훈의 옆에 꼭 붙어 다니는 자신을 상상할 수 있을 만큼 명랑한 소녀였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았다. 그저 걷고 있는 도훈의 모습을 보거나, 도훈이 근처에 왔다는 걸 인지하면 그제야 괜히 수그리고 가만히 도훈을 지켜보는 수준이었다.

가장 좋아하는 강독과 설교 시간까지는 귀찮은 경배 의식들이 장애물 경주처럼 차곡차곡 쌓여 있었다. 시끄러운 찬송 시간과 잡다한 워십 시간들을 멍하니 일어나 고개만 까딱이며 지연은 열심히 버텨냈다. 다들 기다렸다는 듯 찬송을 한 목소리로 쏟아내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시끄러움에 일익을 담당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여하간 이것은 경배다. 지연도 작은 목소리로 찬송을 불렀다.

얼마 전 보았던 연구에서는 경배 의식은 활발하게 뛰놀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하나로 모을 수 있어서 정서 발달과 함양에 아주 좋다는 내용이 있었다. 하지만 그 연구 앞에서 지연은 괜히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 지연은 그다지 활발하게 뛰놀고 싶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을 보면 활발하게 뛰놀고 싶은 게 아이들의 특성이라는 사실은 명료했다. 지연은 뛰고 싶지 않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억지로 있는 힘껏 뛰어다니곤 했다. 아주 어릴 적에 그다지 뛰고 싶어 하지 않는 나 같은 아이들을 위한 프로그램은 없을까, 조심스럽게 엄마한테 물었을 때 엄마는 숨을 깊이 들이쉬며 낮은 목소리로 어딜 가서 그런 이야기를 하지 말라고 했다. 지연은 입을 다물었다.

엄마의 크고 쩌렁쩌렁한 목소리도 지연에게는 늘 고통스러웠다. 하지만 지연처럼 덩치가 작은 아이가 조용하게 숨죽이며 살다가는 결국 이모 같은 삶을 살게 될 뿐이었다. 이모를 떠올리고 지연은 얼른 생각을 쫓아버렸다. 조용하게 있는 게 허용되는 건 어른들이나 덩치가 큰 친구들뿐이었다. 도훈이가 조용히 있는 것이 전혀 어색하지 않은 것처럼.

‘도훈이랑 내가 한 집에서 살게 된다면 우리 아이들은 조용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을텐데.’

속으로만 생각해 놓고도 화들짝 놀라 지연은 얼굴을 살짝 쓸어내렸다. 여하간 지연은 아직 아이고, 도훈도 아직 아이였다. 생은 어찌 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고, 이런 생각은 그만하고 예배에 집중해야지. 지연은 머리를 한 번 세게 흔들고 다시 목사님 쪽을 바라보았다. 옆에 앉은 녀석이 의아한 듯 지연을 힐끔거렸다.

오늘은 대림절의 마지막 날, 교회로서는 가장 큰 축제기간이었다. 그래서 굳이 바글바글할 어제 저녁 예배까지는 참석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연이 제일 좋아하는 이야기들은 바로 대림절 구간에 다 모여 있었다. 대림절의 예배에 하나라도 빠진다는 건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다. 심지어는 마지막 예배였다. 사제님은 어김없이 지연이 예상한 그 부분에 대한 설교를 시작했다. 도훈의 뒷모습에서 익숙한 내음을 맡던 것과는 다른 맥락에서 지연의 가슴이 두근거렸다.

“세상의 모습을 오래 지켜보아 오신 하나님은 우리의 세상이 너무나 어지러워 천지를 새로이 주관하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단상 앞에 환하게 드러난 하나님을 보며, 지연은 잠깐 생각했다. 하나님의 모습은 언제나 저렇게 그려진다. 너무나도 우리와 닮은, 그러나 지극히도 늠름한 모습. 교회 여기저기에 붙어 있는 하나님의 모습도 딱히 다르지 않았다. 진짜 하나님의 모습은 이제 누구도 기억하지 못하는데, 여하간 하나님은 언제나 찬란한 금발을 휘날리며 아름다운 천사들과 함께 이 땅에 강림하는 모습으로 그려진다. 길고 매끈하게 뻗은 하나님의 입. 강철로 된 병거를 타고 하늘에서 내려온 하나님은 엄숙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그가 말을 걸어오리라고는 아무도 짐작치 못했던 이 땅의 존재들은 당황하여 너나없이 수군거리지만, 그의 언어는 명료하고도 단호하다. 오래도록 우리를 지켜보았고, 오직 우리만을 위해서 이 땅에 강림하였다고 설명한다. 지연은 그 말을 받아들이는 하잘 것 없는 이 피조물들의 모습을 사랑한다. 아무리 여러 번 접해도 그 때마다 이 장면은 지연을 강렬하게 사로잡았다. 신의 모습이 나타난 첫 순간에는 모두 오히려 신의 존재를 의심한다. 신의 메시지가 너무도 정확하였기 때문이다. 이토록 배려하는 언어를 들어본 적 없었던 이들은 신의 존재를 적대한다. 그러나 신은 자신을 적대하는 이들조차도 사랑으로 품었다. 사제님은 자연스럽게 그 사랑의 이야기로 옮겨갔다.

“하나님께서는 날카롭게 자신을 적대하는 이들의 눈앞에 사랑의 장막을 열었습니다. 사랑의 장막 속에서 모든 이들은 진정으로 행복해졌고, 그제야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를 받아들였습니다. 신의 목소리는 오직 신에게 속한 것이라는 것을 이해한 것이지요.”

오직 억압받아 왔기에 억압에서 풀려나는 순간마저도 순종으로 따르는 이들. 명료하게 알아들을 수 있는 자신의 목소리로 말을 걸어오는 신에게 믿음 그 자체로 순종하는 선하고 아름다운 이들. 지연은 이 부분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 듣는 순간부터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엄마는 어린 지연이 처음으로 고통스러워했을 때가 바로 이 이야기를 듣는 순간이었다는 걸 꽤 자랑스럽게 몇 번 교회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곤 했다. 조금 부끄럽기도 했지만, 조금 자랑스럽기도 했다. 여하간 지연은 선하였기에 도리어 신의 사랑을 거부하고, 마찬가지로 그 선함만을 이유로 신을 받아들이는 모습에 크게 감동하는 신실한 아이였다. 여기에 감동하는 게 조금 아이답지 않은 모습일 수는 있겠지만, 이걸 자랑스러워하는 건 또 아이다운 모습이 아닌가.

이렇게 매 순간을 메타적으로 생각하는 건 지연에게 뼛속깊이 박힌 귀찮은 습관이었다. 그래도 이런 메타적 사고는 하나님의 가장 명민한 천사, 하라엘의 특성이기도 했다. 지연은 신이 허락하신대로 고요하게 의심하면서도 신실하게 따르고 싶었다. 스스로 생각해도 멋진 성품이었다.

“하나님과 천사들은 지금껏 우리가 보지 못한 아름다운 모양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상의 모든 피조물이 하나님의 모습에 경의를 올렸습니다.”

눈부신 빛, 하나님이 서 있는 자리마다 화려하게 꽃이 피어올랐다. 하나님은 높게 고개를 들고 자애롭게 세상을 관장하였다. 하나님의 주변을 호위하는 천사들도 마찬가지였다. 하나님이 걸음을 옮기시는 자리마다 비뚤어졌던 세상의 틈새들이 메워졌다. 지연이 살고 있는 세상은 그렇게 창조되었다.

“그러나 여러분도 잘 알고 있다시피 오직 단 하나의 피조물만은 하나님에게 경의를 올리지 않았습니다. 누구였지요?”

“악마, 악마요!”

짹짹거리는 참새들처럼 아이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자그마한 발을 굴러대며 신이 나서 소리높였다. 지연이 사랑하면서도 가장 끔찍해하는 바로 그 시간이었다.

대림절 마지막 주의 설교가 그렇듯, 단상 위에서는 하나님이 악마를 처단하는 장면을 재현해서 보여주었다. 전능하신 하나님은 빛으로 휘감겨 있다. 하나님의 빛나는 금발이 휘날리고, 악마들은 하나님을 향해 길다란 막대기를 들이대며 조심스럽게 접근한다. 악마들의 입에서 무어라 소리가 들리지만 우리의 귀로는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그저 하나님을 위협하는 소리라는 것만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따름이다. 하나님은 그때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드시고, 그 순간 철병거에서 악마들을 처단하는 날카로운 이빨이 튀어나온다. 피비린내가 사방으로 확 끼친다.

피비린내가 나는 장면에서 지연은 눈살을 찌푸렸다. 물론 이 장면이 흉측하도록 아름다운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거 하나를 위해서 오랫동안 노력했을 것은 뻔하고, 여러 준비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진짜 이렇게까지 해야 하나. 눈을 찌푸리고 단상 옆쪽을 보니 아니나 다를까 아주머니들이 우리 눈에 안 띄게 사방으로 돌아다니며 애를 쓰고 있다. 악마들은 힘없이 스러져간다. 처음에는 한두 마리 악마들이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전역의 악마들이 처단 당한다. 남은 악마들은 힘을 잃고 도망친다. 아이들이 도망치는 악마들의 뒷모습을 보고 환호성을 지른다. 흉측한 모습의 악마들이 점점 멀리 사라져간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새로이 세상을 구축하셨고, 우리는 신의 모습을 닮기 위해 노력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대림절 설교다. 하지만 그 다음 이야기가 나오는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지연은 현재까지 설교에 쓰인 시간을 계산해 보았다. 연극까지 지나갔지만, 아직까지 상당 부분 시간이 남아있다. 그렇다면 분명 그 다음 이야기까지 나온다. 지연은 몸에 힘이 들어가는 걸 느꼈다. 살짝 대각선 앞을 돌아다보니, 도훈도 무척 긴장한 표정으로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솔직한 말로 악마를 물리치는 하나님의 이야기보다는 그 다음 이야기가 언제나 더 재미있는 법이었다. 옳고 그름을 이야기로 만든다면, 언제나 옳은 이야기보다는 그른 이야기가 서사로서 더 매력적이다. 그리고 지금부터는 그른 이야기가 시작될 참이었다.

“하나님은 이토록 보시기에 좋으신 세상을 구축하시고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실 일이 무척 많으신 분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다시 이 세상에 임재하실 때가 도래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우리의 바보같은 죄악 때문이었습니다.”

차가운 눈발이 뺨에 닿았다. 아, 고생들 너무하네. 눈을 만들었어, 이번엔? 고개를 들어 보니 이번에는 아저씨들이 교회 기둥까지 계단을 타고 올라가서 눈송이 비슷한 걸 얼음으로 만들어서 뿌려대고 있었다.

“유난히 추웠던 겨울, 살기 위해서 대부분 함께 지내야만 했던 때였습니다. 사건은 여기서부터 한참 먼 곳에 있는 높은 산맥들의 도시 시나이아에서 벌어졌습니다.”

“시나이아!”

시나이아. 이름은 수도 없이 들어보았다. 아마 그곳에도 여름이 있고, 봄이 있을 테지만 전세계의 모든 곳에서 차가운 겨울 눈발로 기억될 도시. 서로의 체온으로 간신히 버티고 견뎌나가야만 했던 그 겨울, 시나이아의 신도들은 악마에게 미혹 당한다.

단상 위에는 다시 악마들의 형상이 등장했다. 악마들이 등장하자마자 나이어린 아이들이 너무나 즐거워하며 야유를 보내기 시작했다. 악마들은 겨울에 모두가 합심을 하고 고생고생하여 잡은 흰 토끼의 가죽에 붙은 살을 돌로 벗겨냈다. 돌돌돌 토끼 가죽이 벗겨져 나갔고, 악마들은 남은 살을 불에 구웠고, 가죽을 습기 없는 곳에 널어 말렸다. 남은 살들을 분류해서 말렸고, 잘게 썰었다. 이들은 눈을 떠서 물을 만들었고, 물을 끓여서 잘게 썬 고기들을 우려냈다.

한파가 더욱 심해졌을 때, 시나이아의 대장 비앙카가 숨을 거둔다. 백발의 비앙카가 추위를 견뎌내지 못하고 숨을 거두었을 때 시나이아의 모든 신도들은 슬피 흐느낀다. 신에게 비앙카를 애도하는 제사를 지낼 때, 구석에 있는 펠리시아. 신을 닮은 금발의 눈부신 펠리시아가 웅크리고 있다. 지연은 펠리시아 역할을 맡은 것이 소율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소율이야말로 우리 동네에서 가장 아름다운 금발을 뽐내는 아이다. 그래, 소율이 저 역할을 맡아야겠지. 연극에서 역할을 맡을 생각은 조금도 안 했음에도, 어쩐지 괜한 심술이 났다. 몸을 웅크린 소율의 뒷모습에서 반짝거리는 향기가 나는 것만 같았다. 뺨에 닿는 눈발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향기였다.

펠리시아가, 아니 소율이 자리에서 일어나자 모두들 동공이 커졌다. 좌중은 소리 하나 없는 침묵이었다.

“우리는 더 이상 먹고 살 수 없을 거야! 비앙카 님도 죽었는데, 이제 어떻게 하면 좋담!”

매끈한 몸으로 장례식장을 빠져나오며 흐느끼던 펠리시아는 울면서 악마들이 살고 있는 구역까지 도달한다. 악마들은 잘게 썬 고기들을 마침 우려내고 있던 참이었다. 펠리시아를 발견한 악마들이 소리를 지르며 펠리시아를 쫓으려고 하고, 생애 처음으로 악마들을 만난 펠리시아는 날카롭게 울부짖으며 악마들을 향해 이빨을 드러낸다. 그때 한 악마가 펠리시아를 향해 이상한 행동을 한다.

눈앞에 툭 떨어진 고깃덩이, 심지어 잘게 다져서 뭉쳐서 불에 구운 고깃덩이를 보고 펠리시아의 눈이 휘둥그레진다. 펠리시아가 조심스럽게 고깃덩이에 입을 가져다 댄다. 아주 맛있는 고기냄새가 사방으로 퍼진다. 대체 이 냄새는 뭐 어떻게 낸 거야. 다들 두리번거리며 냄새의 진원지를 찾는데, 고기를 한 입 베어문 펠리시아의 목소리가 들린다.

“악마, 악마랑 같이 있으면 굶지 않을 수 있어!”

소율은 입에 고깃덩어리를 넣고 대사를 하고 있다. 저거 진짜 고길까. 설마, 아니겠지. 만약에 진짜 고기면 이따가 밥 먹을 때 소율은 두 끼 먹는 거 아니야. 지연은 연극을 하지 않은 게 억울한 기분이 조금 더 들었다. 고기를 던진 악마가 다가와서 소율의 목덜미를 쓰다듬는다. 목덜미를 쓰다듬는 앞발을 보아하니 악마를 연기하려고 털까지 싹 다 밀어버린 연기 대투혼이다. 펠리시아의 황홀경이 좀 더 확장된다.

“뭐 하는 거야!”

“아직 새끼잖아. 얼마나 귀여워.”

“너 그러다 물린다고!”

펠리시아는 악마를 향해 꼬리를 치며 춤을 춘다. 악마는 반갑게 펠리시아의 몸을 두드리고, 악마와 펠리시아는 끝내 친구가 되고야 만다. 매번 저 장면을 볼 때마다 지연은 기묘한 기분이 들곤 했다. 악마와 펠리시아의 관계는 세상에 그런 관계가 다시 있지 않을 것처럼 편안하고 다정해 보인다. 오래 전에 잃었던 친구를 되찾은 것 같기도 하고,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며 영원토록 그 평온함 속에 머물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러나 펠리시아의 우정을 출발점 삼아 다시 세상에 등장한 악마들은 신도들을 채찍으로 후려치고 고기를 건네고 머리를 쓰다듬으며 모든 신도들을 다시 악마의 노예로 굴종시키는 데에 성공한다. 악마들을 따라 온 신도들의 이빨 아래 산속의 온갖 생물들이 죽어간다. 악마들의 손으로 썰리고 분류되어 그저 고깃덩어리가 되어가는 수많은 생물들, 그들을 물어뜯어 악마들의 눈앞에 가져다 바치는 신도들의 눈에서 행복감이 어른거린다.

이 장면을 읽을 때면 지연은 매번 이모를 떠올리곤 했다. 태어날 때부터 유난히 작고 가느다란 이모. 이모의 치아는 튼튼하지 않았고, 이모는 쉽게 겁에 질렸다. 이모는 마치 토끼 같았다.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몇 번씩 판정받았는데도 오랫동안 왼쪽 뒷다리를 절었다. 때로는 왼쪽 뒷다리에서 심각한 수준의 통증도 느낀다고 했다. 꾀병을 부린다고 혼난 적도 많다는 이야기를 가늘고 힘없는 목소리로 말했었다. 그건 모두 악마 때문이라고, 악마가 저지른 원죄를 타고났다고 마을에선 수군거렸다.

그건 우리를 저주에 빠뜨리기 위해 몇 세기를 걸쳐 행해졌다는 악마의 짝짓기 이야기였다. 오랜 시간이 지나도 악마의 짝짓기는 계속 우리 핏속에서 영향을 미친다고 했다. 악마가 정해준 짝과만 짝짓기를 해서 불행한 운명을 타고 나야만 했던 선조들이 있었다. 선조들은 비정상적으로 긴 허리와 튀어나온 눈, 짧은 팔다리, 짓눌린 얼굴을 가지게 되었다. 흉측한 외모와 함께 수많은 병들에도 시달렸다. 그 중에서 가장 끔찍한 종류는 바로 이모와 같은 이들이었다.

이모는 어릴 때부터 조용한 아이였다고 했다. 뛰는 걸 좋아하지 않고 말수가 적어서 모두가 걱정을 했는데, 역시나 얼마 지나지 않아 ‘저주의 기운’이 발병하기 시작했다. 이모는 때와 장소를 가리지 못하고 상관없는 말을 되는대로 중얼대는가 하면, 왼쪽 뒷다리에 환각을 느낀다고 통증을 호소했다. 논리에 맞지 않는 말들을 정신없이 할 때도 있었고, 고깃덩이를 앞에 두고 느닷없이 기절을 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언제나 지연에게는 다정하고 상냥한 이모였다. 이모가 되어서는 안 되지만 지연은 이모의 냄새를 늘 좋아했다.

어릴 적, 지연을 핥아주며 이모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어떻게 이 마음을 나한테서 떼어놓으면 좋을까. 이렇게 태어나게 했다면 차라리 악마가 답을 알진 않을까.”

어린 지연도 이런 말을 누구에게도 전해선 안 된다는 정도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악마의 저주는 오래 우리의 핏속을 타고 다니다가 때때로 발현된다고 했다. 지연은 이모와 같은 피가 흐르는 자신의 몸이 두려워서 자주 소스라치며 깨어났다. 지연은…… 달리고 싶지 않아서는 안 되었다.

가장 좋아하는 부분 중 한 부분이 또 등장할 차례다. 아니, 사실 이 이야기 중에는 어느 부분도 싫어하는 부분은 없어. 마침내 창공이 열리고 환한 빛으로 하나님이 다시 이 땅에 내려오신다. 하나님의 날카로운 심판으로 친구의 목이 날아가는 걸 본 펠리시아가 고통스럽게 울부짖는다. 흐느끼며 친구의 몸 곁에 주저앉은 펠리시아를 하나님의 위대한 혓바닥이 쓸어내린다. 하나님의 혓바닥이 몸에 닿자, 펠리시아는 낑낑대며 하나님의 품으로 파고들어간다.

“너희들의 몸과 마음속에는 오랜 시간 동안 함께 지내 온 악마의 패턴이 새겨져 있다. 악마들에게도 마찬가지로 새겨져 있기에, 이들은 이것을 패턴사고라고 칭했다.”

“패턴사고!”

아이들이 아우성치듯 소리쳤다. 패턴사고가 정확히 무엇인지 우리들은 잘 알지 못하지만, 여하간 대림절의 처음이자 마지막이 있다면 바로 이 ‘패턴사고’다. 지연 역시 패턴사고라는 말만 들어도 움찔하고 오스스 소름이 돌았다. 자비로우신 하나님은 패턴사고에 빠진 바보같은 신도들을 용서하셨다. 다만 한 가지 계명을 그 자리에 놓아두셨다. 악마는 그 계명 아래에서 원래 있던 구석 자리로 돌아갔다.

“외로움을 견뎌내어 안온하게 몸을 맡기지 않되, 홀로 서기를 구하라.”

사제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여러분, 악마의 냄새는 달콤하고, 악마는 언제든지 우리를 손에 넣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악마가 목덜미를 쓰다듬는 손길은 놀라울 만큼 달콤하고 우리를 행복감에 빠지도록 합니다. 그러나 악마가 우리를 유혹해서 얻고 싶어 하는 것은, 결국 우리를 수단으로 삼아 하나님의 세상을 도탄에 빠뜨리기 위함입니다. 악마는 우리를 언제든지 해칠 존재입니다. 우리는 매 순간 악마를 경계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이번에는 악마를 경계하는 으르릉 소리가 전 교회 안에 울려퍼졌다. 반가운 환호성도, 킁킁대며 다가오는 또래 강아지들도 다 싫어하는 지연이 경계하는 으르릉 소리를 좋아할 리가 없었다. 지연은 꼬리를 둥글게 말아서 뒷다리 사이에 집어넣고 고개를 깊이 숙였다. 그리고 으르릉대는 소리가 그칠 때까지 속으로만 계속 생각했다.

정말로 악마는 그토록 잔혹한 존재일까. 그토록 잔혹한 존재라면 어째서 악마는 신도 인정할 만큼 그렇게 매력적인 생물이란 말인가. 꼭 그런 생물이어만 했을까?

언젠가 학교에서 지연의 과학 선생님은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는 게 당연히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이 모두 옳다고 몇 번씩 말한 다음에 조심스럽게 악마에 대해 이야기를 했다. 오랜 예전에 악마와 개들은 매우 친밀했고, 악마와 개들은 이해관계를 떠나 진정한 우정을 나누었다는 기록이 수도 없이 남아있다고 했다. 이제 그 진정한 우정은 변질되었고, 변질되었다는 사실을 신께서 깨닫게 해 주셨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악마와 개 사이에 ‘진정한 우정’이 있다고 말했다는 것만으로도 과학 선생님은 처벌받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지연은 아무에게도 과학 선생님이 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말은 오늘까지도 지연의 마음을 붙들고 늘어졌다. 악마와 펠리시아는 어떤 사이였을까.

예배가 끝나고 나오는 길에 지연의 옆에 누군가 가까이 다가섰다. 늘 찾던 냄새가 너무 가까이에서 풍기는 바람에 지연이 펄쩍 뛰듯 놀라 옆으로 물러섰다. 도훈이 반갑게 지연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냄새를 맡았다.

“안녕?”

“어…… 안녕.”

어색하게 지연도 도훈의 얼굴을 핥았다. 매번 스쳐 지났지만 인사를 나눈 건 오늘이 처음이었다. 도훈의 냄새가 코 주변을 계속 맴돌았다. 엉덩이가 빵빵하게 부푸는 기분이었다. 교회에서 밥을 먹을까 말까 망설였는데, 도훈과 조금이라도 더 같이 있으려면 아무래도 식사를 하고 집에 돌아가야 할 것 같았다.

오늘의 사냥감은 토끼인 모양이었다. 근처 토끼굴에서 몇몇 토끼들이 놀러 나와 있었다. 우리들은 몸을 납작하게 낮춘 채 천천히 토끼들을 향해 전진했다. 지연과 도훈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었다. 이번에는 지연이 먼저 말을 걸었다.

“저기 지금 냄새가 짙은 갈색으로 하자.”

“같이?”

“둘이 한 마리면 충분하지 않겠어?”

도훈은 꼬리를 살랑 흔들었다. 도훈의 몸짓은 군더더기 없이 우아했고, 도훈의 냄새는 익숙하고 편안했지만 그럼에도 짜릿했다. 지연은 숨을 죽이고 있다가 두 걸음 앞에 토끼가 등장했을 때 가볍게 꼬리로 도훈을 쳤다. 둘은 거의 동시에 토끼 위로 덮쳤다. 사방에서 개들이 등장하자 토끼들은 삐익삐익 울며 여기저기로 날래게 도망쳤다. 토끼들은 무척 빨랐지만, 개들도 못지않게 빨랐다. 그래도 결국 도망치는 토끼들은 존재하게 마련이었다. 도망치는 토끼들은 언젠가 더 많은 새끼들을 낳아서 우리에게 맛있는 토끼고기를 선사해 줄 것이었다. 여하간 지연과 도훈의 발아래에 잡힌 토끼의 몸이 파르르 떨렸다. 도훈이 잽싸게 토끼의 목을 물어뜯었다. 토끼는 금세 움직임을 멈추었다.

토끼의 뱃가죽을 헤집어 놓은 도훈은 지연에게 토끼를 콧등으로 밀어주었다.

“응?”

“너부터 먹어.”

내장 냄새가 물큰하게 코를 찔렀다. 같이 잡았지만 목을 물어뜯은 건 도훈인데. 다시 가슴이 두근거려왔다. 지연은 사양하지 않고 토끼의 내장에 입을 들이댔다. 구불구불 자리를 잡은 토끼 내장은 쫄깃하면서도 고소했다. 한참 입에 피를 묻혀가며 내장들을 먹고 나자, 도훈이 살코기를 먹기 시작했다. 도훈이 실컷 살코기를 먹도록 잠깐 쉬고 있는데, 도훈은 살코기도 한 점 물어 지연의 입가에 가져다 댔다.

“이것도 먹어?”

“살코기도 맛있잖아.”

도훈과 지연이 꼭 붙어서 토끼 한 마리를 먹는 데에 관심이 있어 보이는 개는 아무도 없었다. 지연은 토끼를 사이에 두고 철병거를 타고 하늘을 나는 기분이었다. 실컷 달렸고, 실컷 먹었다. 하늘은 밝았고 세상은 따스했다. 그리고 도훈의 냄새는 포근했다. 다 먹은 토끼를 이대로 놓아두고 가면 아마도 악마들이 나타나서 나머지를 정리할 것이었다. 악마들과 마주쳐서는 안 되므로, 먹은 자리에 토끼를 그대로 두고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배불리 토끼를 먹은 지연은 한달음에 내달려서 집으로 돌아왔다. 엄마는 입가에 피를 묻힌 지연을 보자 즐거운 듯이 개천에 가서 물 좀 마시고 오라고 얘기했다. 물에 비친 지연의 모습은 너무도 당당해 보였다. 지연은 으쓱이며 물을 마시고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집에 돌아오자 소율의 엄마 지수가 집에 놀러 와서 엄마에게 조잘조잘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지수는 불에 타 버린 나무처럼 새까만 흑발의 개였다. 언제나 반들반들 예쁜 빛이 났지만 예전 악마들이 교배를 잘못 시킨 조상들이 있어서 무릎관절을 늘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를 소율에게 들은 기억이 났다.

“그 왜, 있잖아. 옆 동네에 아주 늙은 개.”

“철구 할아버지?”

“그래, 그래, 그 누렁이 개 말이야.”

“아니, 그렇게 나이도 드신 분이 대체 왜…….”

“그러니까 악마가 요물이라는 거 아니겠어.”

분명 지연이 들어가면 말을 멈출 것이다. 지연은 살금살금 엄마들이 눈치 채지 못하게 귀를 기울였다.

“마지막까지 악마를 애지중지 싸고돌면서 마을 개들한테 짖고 아주 난리도 아니셨다더라고. 앞으로 달려는 드는데 눈이랑 귀는 뒤로 쭉 당겨져서…… 무서워하면서도 악마를 지키려 드는 딱 그 표정 알지? 그 표정으로 말이야.”

“그럼 악마는 어떻게 했고?”

“다른 개들이 다 몰려서 물어죽였대.”

“죽인 개들도 괜찮지는 않겠네.”

“그렇지. 악마를 죽이고 나면 다들 겪잖아, 그…… 어디서 오는지 모를 죄책감. 방에 틀어박혀서 울기만 하고 있는 개도 있다나봐.”

“불은 없었대?”

“없었나봐. 완전히 어른인 악마는 아니었던 거 같아.”

“어르신은, 어르신은 괜찮고?”

“눈앞에서 악마가 물려죽는 걸 보고 그 자리에서 쓰러지셔서, 시름시름 앓고 고기도 제대로 못 드신다더라. 뼛조각에 붙은 좋은 살들을 다 발라드려도 입도 안 대신대."

"아이고, 어쩌다가…….“

“악마한테 홀리면 그렇게 되는 거지 뭐. 윤자도 조심해.”

목소리가 낮아졌다.

“그 집엔 홀리기 쉬운 동생도 있잖수.”

엄마가 구석에 숨은 지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크. 지연은 얼른 자리에서 나와서 반갑다는 듯 꼬리를 흔들어 보였다.

“지수 아주머니, 안녕하세요.”

“아니, 지연아. 넌 언제 왔어.”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얘기하시는 거 같길래.”

“그래, 오늘 교회에선 토끼 먹었다면서?”

"네!“

도훈이 준 토끼 내장 맛이 갑자기 다시 혀끝에 돌아오는 것만 같았다. 괜히 지연은 주둥이 근처를 혀로 훑었다. 지연은 이모가 있는 방 근처로 가서 슬쩍 이모가 뭘 하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이모는 오늘도 아무 말 없이 몸을 웅크리고 졸고 있었다. 시선을 느꼈는지 잠깐 고개를 들어 코를 킁킁거렸다. 지연이라는 걸 확인하고는 가볍게 꼬리를 쳤다. 지연은 약간 거리를 두고 이모를 향해 꼬리를 쳤다. 이모에게 너무 가까이 가는 건 위험했다. 이모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

이모의 입은 매끈하고 길었지만, 이모의 눈은 너무 툭 불거졌다. 이모의 툭 불거진 눈을 볼 때마다 지연은 몇 번씩이고 자기 얼굴을 확인하곤 했다. 툭 불거진 눈은 대표적인 저주의 상징이었다. 지연은 괜히 자기 눈이 더 튀어나온 것 같다는 생각에 눈썹 뼈를 종종 땅에 부벼대곤 했다. 지연은 절대로 이모처럼은 되지 않을 것이었다.

그날 저녁 뉴스에서는 하나님에 대해 발견된 새로운 기록이 화제였다. 대림절 마지막 날 발견된 하나님에 대한 기록이라니, 모두 다 몹시 신이 난 것처럼 보였다. 기록은 악마들이 해 둔 것이었다.

“악마들이 남겨둔 이 기록 속에는 악마들이 스스로를 지칭하는 ‘인류’ 및 ‘인간’이라는 단어가 여기저기에 보입니다. 동시에 ‘개’를 의미하는 단어로 하나님을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악마들이 하나님을 묘사하는 단어인 ‘외계인’을 ‘개’가 수식하고 있습니다. ‘개’ 모양을 한 ‘외계인’이 등장하였고, ‘개’와 똑같이 인간을 향해 짖고 있으므로, 외계인에게 ‘개’ ‘훈련사’들을 파견한다는 결정을 담고 있는 내용입니다. ‘개’에게 ‘훈련사’가 어떤 역할을 맡는 악마였는지는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으며, 이 기록은 자그마치…….”

엄마는 뉴스에 완전히 집중해 있었다. 그리고 이모는 여전히 쇠약해진 채 가느다란 숨을 쉬고 있었다. 아무도 지연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걸 확인하고, 조심스레 집을 나섰다. 나중에 지연이 없어진 걸 알아도 산책 나갔으려니 생각할 것이다. 물론 지연도 그렇게 멀리 갈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이 외출은 절대로 누군가에게 들켜서는 안 되는 외출이었다. 지연은 가능한 발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심조심 걸었다.

마을 어귀에서 아직 나이가 어려보이는 닭 한 마리를 발견했다. 푸드덕 날아오르려는 걸 냉큼 달려가 목덜미를 물어버렸다. 닭은 숨도 못 쉬고 금세 죽어버렸다. 지연은 닭을 입에 물고 마을 구석에서 조금 더 떨어진 수풀까지 다가섰다.

지연이 주변을 둘러보고 아주 조심스럽게 수풀을 젖히자 털 하나 없이 뽀얀 악마의 새끼가 나타났다. 악마의 새끼는 지연을 보고 반갑다는 듯 양팔을 뻗으며 옹알이를 했지만, 지연은 혹여 그 옹알이 소리가 누구한테 들릴까 아이의 입술을 핥아 소리를 멈추게 했다. 눈을 휘둥그레 뜬 악마의 새끼는 세상에 있을 수가 없는 존재처럼 사랑스러웠고, 지연은 몇 번씩 털을 아이에게 비볐다. 새끼는 행복하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웃었다. 새끼의 입 꼬리는 지연과는 완전히 다른 생김새로 올라갔지만, 새끼가 즐거워한다는 것은 명백하게 알 수 있었다.

지연은 새끼의 바로 옆에서 이빨을 날카롭게 세워 닭을 물어뜯었고, 닭의 부드러운 살코기를 잘근잘근 씹어서 새끼의 입가 위에 떨어뜨렸다. 새끼는 날름날름 작은 분홍색 혀를 내밀어서 고기를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새끼의 혓바닥은 지연의 발톱보다도 작았다. 어떻게 이렇게 작고 약한 것이 있을 수 있담. 새끼를 위해 열심히 닭을 씹은 지연은, 이번엔 근처 시냇가에서 커다란 나뭇잎에 물을 담아 새끼의 입가에 떨어뜨렸다. 새끼는 물도 있는 힘껏 받아마셨다. 이 새끼를 먹이고 있는 것도 벌써 일주일 째였다. 어쩌다가 이 새끼가 여기에 있게 되었는지는 지연도 알지 못했다. 아마 악마들의 둥지에서 낙오한 것이 아닐까.

새끼의 눈동자는 크고 동그랬고, 새끼의 몸에서는 달콤한 냄새가 났다. 지연이 새끼의 얼굴을 핥자, 새끼는 눈을 더 크게 뜨고 손을 뻗어 지연의 얼굴을 만졌다. 그 순간 지연의 전신에 행복감이 휘몰아쳤다. 새끼를 처음 발견했을 때, 물어 죽이려고 했던 지연이 도무지 물지 못했던 것도 바로 이 손길 때문이었다. 새끼의 손이 지연의 얼굴에 닿을 때마다 지연은 이 새끼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세상의 어떤 가혹한 일이라도, 이 새끼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불사할 수 있을 것 같은 뜨거운 마음이 솟아올랐다. 그 뜨거운 마음과 동시에 패턴사고를 외치던 예배당의 어린 목소리들이 떠올랐다. 과학 선생님의 목소리도 함께 떠올랐다.

“그런 기록들을 다 살펴보면 어떤 인간, 아니 그러니까 악마들은 정말로 친한 친구였을지도 몰라. 서로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철구 할아버지는 악마에게 홀린 걸까. 이모 같은 사람들이 자칫하다가는 철구 할아버지처럼 악마에게 홀리게 되는 걸까. 과학 선생님은 어떨까. 어쩌면 나도 지금 악마에게 홀리고 있는 것일까. 지연의 앞발을 손으로 꼭 쥐고서 악마의 새끼는 새근새근 잠이 들어 있었다. 아무 것도 부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작고 가느다란 손이었다. 이런 새끼가 지연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지연은 사제님이 하신 말을 도무지 믿을 수가 없었다. 머리 위에만 듬성듬성 얼마 나지 않은 털을 몇 번씩 핥아주다가 지연도 깜빡 잠이 들고 말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벌써 달이 중천에 떠 있었고, 사촌인 늑대들이 산 여기저기에서 목청 돋아 높이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지연은 악마의 새끼가 이곳에 있다는 것을 알리지 않기 위해, 컹컹 소리 내어 별 일 없다고 짖었다. 지연의 짖는 소리에 새끼는 잠깐 몸을 뒤챘지만 다시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지연은 조심스럽게 앞발을 빼냈다.

“잘 자고 있어, 내일 또 올게.”

보드라운 풀들로 새끼의 몸을 따뜻하게 덮어주고, 지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근처에는 닭이 많으니 내일도 어린 닭을 한 마리는 더 구할 수 있겠지. 그도 그렇지만 이 시간이면 엄마와 이모가 찾고 있지나 않은지 걱정이었다. 지연은 힘차게 집을 향해 달리면서, 역시 자신은 이모와는 다르다고 생각했다. 나는 악마에게 홀리지 않을 거야. 절대로. 지연은 서둘러 집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댓글 2
  • No Profile
    쁘로프박사 18.12.02 17:36 댓글

    처음엔 연말이라 교회 얘긴가 했는데 개 이야기군요.

  • 쁘로프박사님께
    No Profile
    글쓴이 앤윈 18.12.05 17:35 댓글

    연말의 교회에 다니는 개 이야기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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