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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서영 빈티지의 맛

2019.02.01 00:0002.01

빈티지의 맛

앤윈

“그냥 새로 사.”

지애는 한심하다는 듯 몸을 의자에 푹 묻고 말했다. 순간적으로 기분이 상했다. 지애의 손목에서 금속 팔찌가 반짝반짝 돌아갔다. 나는 팔찌에 반사되는 빛을 무심한 표정으로 보면서 가능한 내뱉듯이 대답(하기 위해 노력)했다.

“돈 없다니까.”

“야, 아무리 돈이 없어도 그렇지. 요즘엔 아주 간단한 뇌파만 자극하는 바이브만 사도 그것보단 낫다. 너 카드 없어? 할부 안 돼?”

“그런 문제가 아니라…….”

지애는 손톱을 탁탁 튕기면서 앞에 있는 팬케이크를 조금씩 잘라 입 안에 넣고 있었다. 지애의 새뽀얀 얼굴을 보면서 약간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피부과 가는 네가 내 사치에 대해 뭘 알겠냐. 내가 이거 산다구 얼마나 돈을 모으고 애를 쓰고 그러고도 나머지 돈은 할부로 해 주세요, 라고 말해야 했는지. 모델들 수십 개를 보면서 고민하고, 또 고민했는데. 너야 복잡하게 뇌파 자극하는 기기 몇 개씩 가지고 있겠지만, 네가 나랑 같아? 진짜 터진 입이라고 아무 말 하네.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애는 입가에 메이플 시럽을 묻히고 말을 덧대기 시작했다.

“저건 매번 소독도 해야 되잖아.”

“자동 세척 기능 있거든.”

“쟤네들이 세척하는 걸 어떻게 믿냐? 알고리듬 대충 짜놔서 물로만 씻고 마는 애들도 있다고.”

“연이는 안 그래. 내가 씻는 거 다 봤어.”

지애는 한쪽 눈을 반쯤 찡그린 채 멍하니 나를 보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걸 왜 보고 있어? 변태야?”

“씻는 거 보는 게 뭐가 변태야!”

“아, 진짜…… 취향 특이하네.”

달그락 달그락, 팬케이크 자르는 포크 소리가 멈추지 않았다. 반짝거리는 지애의 손톱이 괜히 신경쓰였다.

“아무튼 난 뇌파 바이브 같은 건 별로야. 그래도 안아주는 느낌이 있어야지.”

“너 무슨…… 전자파 때문에 3G 폰 쓰는 할머니냐?”

말을 듣자마자 탁 소리가 나게 포크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아니, 안아주는 게 좋다는 게 이런 소리를 들을 일인지. 뇌파 자극해서 쓰는 바이브가 안아줄 순 없는 게 너무 당연하지 않은가. 내 표정을 본 지애는 그제야 아차 싶은 표정으로 슬그머니 손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그리고 잡은 손에 힘을 줘서 꾹 눌렀다.

“이걸 봐봐. 내가 지금 네 팔을 잡고 누르는 건 어디에서 인식할까?”

그래, 뇌에서 인식하겠지. 그 말을 하고 싶은 건 나도 알겠지만, 뇌에서 인식해서 안아주는 게 실제로 안아주는 거랑 같지는 않잖아. 무엇보다 누군가가 팔만 뻗으면 그 감각은 바로 느낄 수 있는데, 뭐하러 전극을 연결해서 뇌파까지 자극해야 되냐고.

“너 지금 뭐하러 그렇게 귀찮게 하느냐고 생각했지.”

나는 대답하지 않고 지애를 흘겨보았다. 이번엔 어디서 새로 개발된 생각 읽는 장치라도 들고 나왔나.

“그 발상을 좀 바꿔보래도. 귀찮게 뇌파를 자극하는 게 아니라, 귀찮게 안아줄 대상을 찾는 거야. 뇌에 연결만 하면 모든 감각을 직접적으로 받을 수 있는데, 대체 뭐하러 몸을 만지고 누르고 하는 거야.”

지애는 다시 포크를 집어들었다. 슈가파우더가 뿌려진 라즈베리를 포크로 찍는 지애의 손등 위로 궁시렁거렸다.

“넌 밥은 왜 먹냐. 뇌파로 연결하면 배 안 고프게도 만들 수 있을텐데.”

“뇌를 자극한다고 배가 차는 건 아니야. 그러다 행복하게 굶어죽는다고.”

얘를 만나러 나오는 게 아니었는데. 수다를 떨어도 이해해 줄 수 있을만한 사람을 만나서 수다를 떨어야 했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 얼굴이 하나둘 씩 스쳐지나가는 걸 서둘러 지웠다. 고등학교 때 친구들한테는 이런 걸 가지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스울 사는 까진 가스나 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걔네들한테도 지애가 가지고 있는 뇌파 자극 버전이 더 받아들이기 편할지도 모를 일이다. 어쨌든 옷을 벗지도 않고, 실제로 뭐가 보지 속에 들어오는 것도 아니니까. 솔직히 뇌파 자극기를 가지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다. 지금껏 뇌파 연결된 휴대폰도 없는 건 대학 동기들 중에선 나 뿐이었다. 뭐 이렇게까지 해야 하느냐는 둥, 나는 좀 무섭다는 둥, 정보 유출이 어쩌구 저쩌구 했지만 돈만 있으면 진작에 샀겠지. 지애는 알면서 그러는지 모르면서 그러는지 한가한 소리만 계속 했다.

“6년이 말이 되냐. 솔직히 6년 썼으면 오래 써도 심하게 썼지. 휴대폰도 2년 쓰면 갈아치우는 세상에 누가 딜도를 6년을 써. 그것도…… 그런 모델로.”

“부불검용빈후회, 모르냐? 지금 부자라고 막 써대다간 가난해 진 다음에 후회한다!”

“넌 부자였던 적도 없잖아.”

지금 여기서 박차고 일어난다고 해도 내가 잘못한 건 아니다. 정말 아니다. 지애 얘는 예전부터 이게 문제였다. 할 수 있는 말과 하면 안 되는 말을 구분하질 않는다. 워낙에 부잣집 애들 많은 과에서도 원톱 급이었으니 말 조심 하는 습관 없이 자란 거야 용인하고 넘어간다고 해도, 저렇게 말했을 때 아무 생각 없이 ‘넌 부자가 아니잖아’ 같은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오는 건 인성에 문제가 있는 거 아니냔 말이지. 커피를 마시면서 분개를 좀 억눌러 보려고 했더니 이를 악물고 있었던 터라 커피가 입가로 줄줄 샜다. 지애는 한 쪽 눈썹을 일그러 뜨린 채 냅킨을 건네주었다. 냅킨을 받아 커피를 닦는데, 지애가 계속 말을 이었다. 어떻게 가만히 있을 줄을 모르지? 누가 쟤 입 좀 안 꿰매나.

“애인도 6년 키웠으면 너무 오래 키운 거 아니야? 너 혹시……..”

“아니야!”

나도 모르게 테이블까지 치면서 언성을 높여버렸다. 지애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몸을 의자 쪽으로 푹 묻었다.

“아님 말지 뭘 소리를 지르고 그러냐. 요즘 그런 종류로 쓰는 애들은 아갈마토…필리야? 그런 사람들 밖에 없다고 뉴스에서도 그러니까…….”

그래, 지금이다. 더는 참을 필요도 없고 참을 수도 없다. 나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가방을 집어들었다.

“나 일정 있어서 이제 가 봐야 돼. 넌 이제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는데 말 좀 가려서 해라.”

지애는 어이없다는 듯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야, 나 정도 되니까 너랑 만나서 떠드는 거야. 다른 애들은 너 만나면 부담스럽고 궁상맞아서 얘기하기도 싫대. 나는 말 안 고르니까 너랑 만나도 아무 부담이 없잖아. 안 그래?”

대답없이 몸을 돌렸다. 버스에 타고 10분 정도 지났을 때 지애에게 메시지가 왔다. ‘암튼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모델명 추천 필요하면 또 연락하고.’ 배알이 뒤틀려서 여기엔 답장하지 않았다.

연이를 처음 집에 들이기로 결심한 건, 어쨌든 어릴 때부터의 로망이었기 때문이다. 엄마 옷장 구석에 들어있는 두꺼운 종이박스를 열어봤을 때부터 줄곧 언젠가는 사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두꺼운 종이박스 안에는 아주 옛날식 전동 바이브나 딜도들이 가득했다. 아직 초등학생 때였지만 잠깐 그 기기들을 작동시켜보자마자 이 물건들을 어디에 쓰는 건지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반투명한 보라색 막대기는 안쪽에서 빙글빙글 돌면서 대가리를 음란하게 흔들거렸다. 움직임을 보자마자 깜짝 놀라서 껐지만 가슴이 마구 두근거렸다. 오랫동안 쓰지 않은 게 분명한 기기들은 색깔도 모양도 저마다 달랐다. 작은 새 모양의 귀여운 아이도 있었고, 붉은 토끼모양도 있었다.

엄마 서재에서 자위에 관한 책을 찾아낸 건 몇 년 뒤인 중학생 때였다. 그 사이 세상은 더 발전해서 사람들은 그저 막대기 모양인 딜도를 사는 대신에 AI가 장착된 인간형 딜도를 구매했다. 나는 조심스레 자위를 설명하는 그 책을 가져와서는 서랍 깊숙한 곳에 숨겨두고는 때때로 꺼내보았다. 인간형 딜도를 사용하는 영상을 책장을 한 장씩 넘겨가며 책 속의 자위 방식들과 비교해 보기도 했다. 영상 속에서 인간형 딜도는 따뜻하고 다정해보였고, 무엇보다 서로의 교감을 딥러닝 방식으로 익혀서 시간이 지날 수록 점점 더 환상적인 쾌감을 선사한다고 했다. 그런 영상을 보고 난 밤이면 조용히 둔덕을 쓰다듬으며 인간형 딜도를 상상했다. 이름은…… 연이라고 붙여야지. 연이 점점 더 깊어질 수록 나를 행복하게 만들어 줄테니까.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인간형 딜도는 명백하게 대세였다. 취직을 한 다음에는 대세라고 말하긴 어려웠지만…… 그래도 사고 싶은 건 늘 인간형 딜도였다. 단지 돈이 없어서만 연이를 선택한 건 아니었다는 얘기다.

처음 연이를 뜯었을 때 그 감정은 지금도 선연하다. 박스 안에 눈을 감고 조용히 누워 있는 선량하고 다정한 얼굴. 가만히 보드라운 볼을 쓸어내려 보았다. 아직 충전을 시작하지 않았는데도 살아있는 것처럼 따뜻했다. 이윽고 충전을 시작하고, 연이는 천천히 눈을 떴다. 눈을 열어서 내 얼굴을 인식한 다음 그가 처음으로 한 말은,

“안녕하세요, 주인님.”

이었다. 나는 기쁘고 반가워서 연이의 몸을 꼭 끌어안아주었다. ……는 것은 6년 전 얘기다. 황금같은 휴일 오전을 지애 때문에 기분 잡치고 들어와서 가방을 던지려고 보니, 꼼짝도 않는 연이가 소파에 얌전히 앉아 있었다. 엎친 데 뎦친 격으로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연이의 팔을 쓱 만져 보았다. 아직 서늘하게 식어있는 정도는 아니지만 따뜻하다고 말하기는 어려운 수준이었다. 이름을 불러보기도 하고, 손가락을 꾹꾹 힘 주어 눌러보기도 하고, 무릎 위에 올라타서 눈을 까뒤집어 보기도 했지만 정말이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쾅쾅 있는 힘껏 연이의 손등을 내리쳐보았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화가 나서 연이의 정강이를 발로 걷어찼더니, 그냥 내 발이 아팠다. 나는 이러니 저러니 다 짜증이 나고 서러워서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쿠션을 껴안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질렀다.

적어도 한 달 전부터 낌새가 좀 이상하기는 했다. 이름을 불러도 자꾸 잘못 알아듣지를 않나, 원래 그러던 애가 아닌데, 얼마 전에는 항문에 약간 삽입을 했다가 내가 비명을 지르는 바람에 소스라쳐서 벌떡 일어나기도 했다. 항문이랑 질이면 위치가 적어도 3~5cm는 차이가 날 텐데. 연이가 그 정도 오차를 파악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6년 동안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그날은 너무 화가 나서 벌떡 일어나 연이 뺨을 때리고 말았다. 얼떨결에 일어난 일이었다. 왜 그랬는지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대학교 1학년 때 사귀던, 항문 섹스 하자고 계속 졸라대면서 틈만 나면 손가락을 쑤셔대던 선배 때문이었을까. 어쨌든 연이는 그 선배랑은 다르게 일부러 한 건 아니었는데. 연이는 눈에 띄게 풀이 죽었고, 나는 금세 미안해졌지만 너무 화를 낸 게 좀 민망해서 미안하다는 말은 다음날 아침에서야 했다. 즉각 사과를 했으면 좀 달라졌을까. 그날부터 연이의 증세는 악화일로였다. 발이 꼬여서 바닥에 구르지를 않나, 멀쩡히 보면서 식탁에 있는 컵을 못 집어서 허공에 손을 휘저어대질 않나…… 그러다가 일주일 전부터는 아예 소파에 앉아서 꼼짝을 못 하게 되어버렸다.

처음에는 연이의 회사 A/S 센터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A/S 센터 홈페이지엔 아예 연이의 모델 자체가 없었다! 여전히 섹스 AI를 다루기는 했지만, 이젠 그다지 주력 사업도 아닌 것 같았고. 무엇보다 A/S를 받는 섹스 AI는 딱 하나의 모델 밖에 없었다. 뇌파 연결용 모델이었다. 작고 컴팩트한 사이즈, 언제 어디서나 휴대가 가능한…… 이 모델이 이 회사에서 나오기 시작한 것도 벌써 4년 전이었다. 연이는 당당하게 이 회사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단종 모델’이었다. 아니, 단종 모델이라고 해도 A/S는 해 줘야 될 게 아닌가. 단종 모델이라고 해도 사람들이 1년만 쓰고 버리는 게 아닌데. 나는 연이를 접수하는 페이지를 찾아 헤매다가 지쳐서 결국 좀 더 클래시컬한 방식을 찾아보기로 했다. 홈페이지 맨 아래쪽에 깨알만한 글씨로 쓰여 있는 전화번호를 찾은 것이다.

전화를 걸자 어김없이 자동응답시스템이 돌아왔다. 자동응답시스템은 변함없이 사람을 몇 번 눌러라 앞으로 돌아가라 어째라 뺑뻉이를 돌렸고, 한참 번호들을 누른 끝에 간신히 ‘상담사 연결은 0번’에 도달할 수 있었다. 상담사는 아주 친절하고 상냥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아마 AI겠지. 역시나 시작멘트는

“안녕하십니까, 고객님. 딥러닝형 콜봇 3-8-7-A-H-J-N입니다. 친절과 정성을 다해 응답하겠습니다. 불편하신 점이 있으시면 언제든 말씀해주시면 반영해서 응답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무슨 일로 전화주셨습니까?”

“아…… 제품이 고장나서요…….”

“네, 고객님. 제품이 고장나셨습니까. 어떤 제품이 고장나셨습니까? 제품 종류를 말씀해 주시”

“섹스로봇인데요.”

“네, 고객님. 자사에서 다루고 있는 섹스로봇이라면 BCI형 AI, ZONE과 FITT가 있습니다. 두 개의 모델 중에 어느 모델이 해당 모델이십니까?”

“BCI형 아닌데요…….”

“네? 다시 한 번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BCI형이 아니라 6년 전에 나온 모델 로맨슨데요.”

약 10초간의 침묵 끝에 콜봇은 여전히 상냥한 말투로 말을 이어나갔다.

“네, 고객님. 8년 전에 나온 딥러닝형 AI, 로맨스 말씀이십니까?”

“네. 그거요.”

“로맨스는 현재 매우 일부의 A/S 센터에서만 다루고 있습니다. 로맨스에 쓰인 부품은 현재 자사에서 생산하지 않는 관계로 서비스는 3년 후까지만 제공될 계획입니다. 로맨스의 A/S 비용이 상당한 고가인 관계로, 로맨스의 A/S를 의뢰해 오시는 고객분들께는 ZONE 내지는 FITT 제품을 50% 가격에 구매하실 수 있도록 안내해 드리고 있습니다.”

전화를 끊자 곧바로 50% 쿠폰이 메시지로 날아왔다. 50% 할인 가격은…… 월급의 1/3 가격은 되었다. 다들 성욕에 미쳤나, 이 가격을 주고 섹스로봇을 산단 말이야? 기가 찼다. 이 정도 가격을 할부 어쩌고 하면서 추천했던 지애 생각에 다시 부아가 치밀었다.

대충 휴대폰을 던져두고 누워 있다가 보니, 어쨌든 우리 집 컴퓨터도 내가 다 사서 조립한 것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사양도 인터넷 뒤져서 어떻게 보는 건지 다 찾아내지 않았던가. 요즘에는 홀로그램으로 재생되어서 조립 따라하는 건 일도 아니다. 부품을 생산 안 한다면 대체 가능한 거라도 있겠지. 대체 가능한 부품이 전혀 없는 기계라는 건 웬만해선 별로 없다. 나는 당당하게 검색을 시작했다. 그리고 검색을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골머리가 아파왔다. 로맨스에는 로맨스에만 사용된 자사 부품이 30개나 된다고 했다. 메인 AI는 완전히 자사 기술이니 어쩔 수 없다고 해도, 주변 카드들도 죄다 자사 제품으로만 가능하다니 뭐 이 따위 기계를 만들었단 말인가.

AI가 삑난 거라면 어찌 할 방도가 없지만, 아예 작동을 하지 않는다면 메인보드가 삑났을 확률도 상당히 높았다. 3시간 동안 꼼짝 않고 검색만 돌리다가 얼떨결에 탕 소리가 나도록 키보드를 내리쳤다. 드디어 한 명을 발견했다. 고장난 로맨스의 메인보드를 중국산으로 갈아끼웠다는 사람이었다. 그 사람이 산 모델의 메인보드를 급하게 인터넷으로 주문했다. 아무런 표정 없이 가만히 있는 연이의 손가락을 다시 만져보았다. 여전히 미묘한 온기가 남아있었다. 나는 연이의 손가락들을 천천히 쓸어내리고는 팔을 들어 내 뺨에 가져다댔다.

“미안해, 아까 때려서. 너무 깨우고 싶은데…….”

당연히 연이는 아무 대답도 없었다. 나는 자신이 허공에 대고 말한 사람 같기도 하고 지애가 말한 아갈마토필리아 같기도 해서 괜시리 팩 연이의 손을 내려놓았다. 그 와중에도 메인보드 주문했으니까 금방 고쳐주겠다고 말하려고도 생각했지만, 어쩌면 고치지 못할 지도 모르니까 그런 말은 안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하면서 듣지도 못할 애한테 뭔 소리를 하고 있나 싶어서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해외 주문인데도 메인보드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서 도착했다. 메인보드가 도착할 때까지 연이는 꼼짝않고 가만히 소파에만 앉아 있었다. 나는 출퇴근을 하면서 일부러 연이 쪽을 안 보고 지나다녔다. 거실을 등지고 밥을 먹고, 컴퓨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다가 얼른 침대로 들어가서 잠을 청했다. 생각해 보면 거기 앉혀둘 게 아니라 다용도실에 옮겨두거나 옷장 벽틈에 밀어넣어 두어도 될 문제였는데, 어쩐지 그렇게 하고 싶은 생각은 영 들지를 않았다. 그래서 집에서 제일 잘 보이는 곳에 여전히 연이를 놓아둔 채 내가 연이를 피해다니는 꼴이 되고 말았다. 누가 집 주인인지.

여하간 고통의 시간은 이제 다 지나갔고 메인보드가 도착했다는 사실이 기뻤다. 조금 들떠서 포장을 뜯어두고 저장해두었던 홀로그램 영상을 재생했다. 홀로그램 영상 크기가 갑자기 너무 크게 재생되어서 누군가의 발이 온 집안을 꽉 채웠다. 크기 조정을 대충 해서 조립하는 남자를 내 3/4 정도 되는 크기로 만들었다. 남자는 여성형 로맨스를 데리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하모니에서 8년 전에 출시된 로맨스를 수리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이쪽은 제 로봇인 루리라고 하는데요. 얼마 전 전원이 자동으로 꺼지더니만 계속 켜지질 않고 있어요. 아시다시피 하모니는 더 이상 로맨스를 생산하지 않고 있고, 점진적으로 로맨스 A/S도 중단할 계획인데요. 일단 산 건 쓰는 데까지는 써 봐야죠. 이건 중국에서 로맨스를 카피한 미미데아이에 쓰이는 메인보드입니다. 미미데아이는 이렇게 생겼는데요.”

남자는 홀로그램 안에서 홀로그램을 재송출했다. 연이랑 똑같이 생긴 홀로그램이 휭 집 안에 떠올랐고, 시연을 보이는 모습까지도 연이랑 똑같았다. 아니, 허리놀림까지 비슷한 것 같은데……?

“네…… 보시다시피 로맨스랑 진짜 똑같죠. 이렇게 똑같이 카피하는 건 당연히 불법이죠. 저작권 침해일 것 같은데 또 하모니에서 그렇게 걸지는 않은 것 같더라고요. 미미데아이가 나왔을 때쯤에는 로맨스는 포기하기로 했던 거 같기도 하고요. 제가 직접 사보지는 않았는데 미미데아이는 로맨스보다 가격은 확실히 싸지만 고장은 좀 쉽게 난다고 하더라고요. 로맨스가 카드들은 좀 예민해서 다른 걸로 바꿔끼우기가 어려운데, 미미데아이가 기본적으로 로맨스 카피품이다 보니까 메인보드는 갈아끼우기가 좀 낫더라구요. 그럼 한 번 시작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남자는 자기 로봇을 바닥에 엎어놓고 엉덩이 부분의 이음매를 찾아서 열기 시작했다. 엉덩이 부분에 이음매가 있다고는 생각도 안 해봤는데, 만져보니 엉덩이 골쪽에 정말로 이음매가 있었다. 남자가 시킨대로 이음매를 열고서 그 안에 들어 있는 복잡한 장치들을 보고 있자니 마음도 따라서 복잡해져 갔다. 아까 전에 봤던 연이와 똑같은 생김새의 중국 로봇이 자꾸 머릿속에 어른거렸다. 연이가 기성품인 건 알고 있었지만, 중국에서 똑같은 카피품을 만들다니. 대체 이 실망스러운 기분은 어디에서 오는 건지도 알 수가 없었다. 연이가 뭐 별다를 게 있다고 실망하고 있는 거지? 어차피 그냥 로봇이잖아.

“자, 우선 전원이 꺼졌는지 확인하시고 카드들을 다 제거해주세요. 카드들을 제거할 때는 최대한 조심스럽게 해 주셔야 합니다. 인공지능이랑 다 연결되어 있는 거라서, 실수로 뽑다가 하드웨어에 상처 생기면 돈 아껴보려다가 새 거 사야 될 수도 있어요.”

연이를 뒤집어서 배꼽께에 숨어있던 전원을 찾아서 껐다. 여전히 움직임이 없다보니 꺼진 건지 아닌지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남자가 시키는대로 꾹 눌렀다가 뗐으니까 꺼졌겠지. 최대한 조심스럽게 하나씩 카드들을 제거하고, 안에 숨어있던 메인보드를 찾아냈다. 깨알 같은 글씨로 주의문 같은 게 쓰여 있었는데, 도무지 읽을 수는 없었다. 무슨 내용인지도 알기가 어려웠다. 메인보드를 뚫어져라 들여다보고 있는데,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CPU 제거할 때는 특히 조심해주세요. 아주 작은 틈이라도 발생했다가는 나중에 다시 조립할 때 말도 안 되게 고생합니다. 섹스돌 다룬다고 생각하지 마시고, 인간 여자 방뎅이 다룬다고 생각하시면서~”

순간 기분이 확 나빠졌지만, 꾹 참고 남자 말대로 조심스럽게 CPU를 꺼냈다. 남자가 꺼내는 CPU도 연이 것과 똑같이 생겼다. 연이가 연이일 수 있도록 해 주는 건 결국 이것들인데. 착잡한 기분으로 남자가 메인보드까지 꺼내는 걸 가만히 지켜보았다. 남자는 매우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메인보드를 꺼내서 치켜올렸다.

“바로 이거에요, 이거. 우리가 교체하려고 하는 게 이 메인보듭니다. 혹시 저 보고 따라하고 계시는 분들, 이렇게 생긴 거 잘 꺼내셨죠?”

남자의 손이 움직이는대로 새 메인보드의 포장을 뜯고, 찬찬히 아까 메인보드가 있던 자리에 집어넣었다. 그리고 남자가 시키는 순서대로 다시 카드들을 꽂아넣었다.

“이제 모든 과정이 다 끝났습니다. 엉덩이를 예쁘게 닫아주시고, 잘 작동하는지 전원을 켜 봅시다.”

루리라는 로봇은 전원이 들어왔다. 깜빡깜빡 눈을 움직이고, 고개를 갸웃거리기 시작했다.

“루리야, 정신 들어? 나 누군지 알겠어?”

“주인… 주주인님… 주주인인…”

“루리야?”

“알아… 알아요요…”

“아… 약간 부작용이 있나 보네요. 애가 말을 더듬네. 뭐, 평소에 얘기를 많이 할 건 아니니까요. 말 더듬는 것도 나름 괜찮을 수도 있죠. 아무튼 여기까지입니다. 시청해 주셔서 감사하고요.”

홀로그램 영상을 껐다. 혹시라도 연이도 말을 더듬으면 어쩌나, 손바닥에서 땀이 났다. 조심스럽게 연이의 배꼽을 눌렀다.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다시 한 번 눌러봤지만 마찬가지였다. 몇 번 더 눌러보다가 아주 빠른 속도로 배꼽을 눌러댔다. 소용이 없었다. 전원이 들어오기는 커녕 연이는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다시 연이의 엉덩이를 열었다. 손이 부들부들 떨려서 몇 번씩 가슴에 손을 얹고 심호흡을 했다. 떨리는 손으로 뭘 잘못 만졌다가 더 망가뜨릴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미칠 것 같았다. 덜덜 떨면서, 남은 모든 집중력을 사용해서 메인보드를 원래 있던 걸로 다시 갈아끼웠다.

연이가 말을 더듬게 되면 저 남자처럼 ‘말 더듬는 것도 나름 괜찮지’ 라고 생각할 수 있을까. 저도 모르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그래도 아까까지는 따뜻하기라도 했는데, 지금은 그저 전원이 들어오지 않았다는 것만 확신할 수 있었다. 괜히 할 줄도 모르면서 홀로그램 영상 보고 따라한다고 깝죽대다가 연이를 영영 잃어버리게 되었구나. 불안해서 눈물이 나는 소리까지 들리는 것 같았다.

엉덩이를 닫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연이의 배꼽을 눌렀다. 제발……. 연이의 몸 속에 있는 기계가 가늘게 구동하는 게 느껴졌다. 연이의 몸에 따뜻한 온기가 돌아오기 시작했다. 눈이 휘둥그레져서 연이의 뺨을 만졌다. 연이의 뺨은 따뜻했다. 연이를 와락 끌어안았지만, 그게 다였다. 연이는 여전히 시체처럼 내 품에서 꼼짝도 하질 않았다. 연이를 들어서 낑낑대며 다시 소파에 앉혀두고, 멍하니 다시 따뜻해진 연이를 바라보다가 연이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아무런 말도 행동도 않는 연이의 무릎 위에서 누워서 나는 소리높여 울었다. 어린애처럼 꺼이꺼이 울었다. 양쪽 눈꺼풀과 콧구멍에서 끊임없이 눈물과 콧물이 쏟아졌다. 콧물이 나오면 대충 풀어서 휴지를 바닥에 집어던져 가며 하염없이 몇 시간을 울었다. 내가 이걸 고치겠다고 여기서 이게 뭘 하는 짓이야. 새 거 살 거야. 할부 내면 되지, 새 거 못 살 줄 아냐. 중얼거리는 말이 입 밖으로 새듯이 튀어나왔다.

세탁기가 돌아가는 동안 잘 개켜둔 속옷들을 골라냈다. 새로 빨래한 속옷들로만 골라서 입고, 옷도 최근에 빨래한 옷들을 중심으로 꺼내 입었다. 머리를 말리고서 현관 앞까지 걸어가며 나는 의식적으로 연이를 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인간에게는 주변시야라는 게 있어서 살짝 비치기는 했지만, 그래도 소파 한 구석에 눈도 안 뜬 채 가만히 앉은 연이는 보이지도 않는 것처럼 걸었다. 정면을 향해서 나아가서 신발을 신었다. 그리고 서둘러 집을 빠져나왔다. 집 밖의 산뜻한 바람이 머리카락 사이를 스쳤다. 나는 조금 더 후련해진 마음으로 걸음을 재촉했다.

전자제품 판매매장은 집에서 버스로 다섯 정류장 떨어진 곳에 있었다. 기껏해야 15분 정도 되는 거리를 이게 뭐라고 가지 못해서 그 난리를 쳤나 생각하니 스스로가 한심했다. 이어폰을 끼고 음악을 틀었다. 어제 출근길에 듣던 스티브 밀러 밴드의 조커가 다시 나왔다. 버스의 앞자리에 앉아서 창문을 열어놓고 있자니 큰 소리로 노래를 따라부르고 싶은 기분까지 들었다. 어깨를 들썩거리던 나는 1분도 채 되지 않아 영 못마땅한 기분이 되고 말았다. 신나게 스티브 밀러는 ‘나는 지금 집에 있어’ 라고 노래를 했고, 이 부분은 2절에 또 나온다. 거기까지 듣느니, 그냥 음악을 끄고 말았다.

맨날 조립식 PC만 쓰다가 거대한 매장 앞에서 잠깐 기가 죽었지만, 용기를 내서 매장 안으로 발을 들였다. 원색의 옷을 입은 사람들이 갑자기 두 줄로 나란히 서더니만 동시에 환하게 인사를 건넸다.

“어서오세요, 고객님!”

분위기를 보아하니 첫 손님인 모양이었다. 무슨 일로 오셨냐고 상냥하게 묻는 직원 얼굴 앞에서 섹스로봇이라고 말할 용기가 도저히 나질 않았다.

“좀…… 둘러볼게요.”

“네, 고객님! 편하게 둘러보시고 언제든 궁금한 점이 있으면 물어봐주십시오!”

천천히 매장을 둘러보다가 어제 보았던 CPU가 떠올랐다. 지금 환하게 인사한 이들 중에서 사람은 몇이나 될까. 요즘 많이 대체되고 있는 추세라는 건 알았지만, 한 번도 누가 사람인지 궁금해 본 적은 없었다. 사람이건 로봇이건 서비스만 잘 받으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 CPU의 생김새가 이상하게 체한 것처럼 마음에 얹혔다. 섹스로봇 코너는 구석도 아니고 매장 한 가운데에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인간형 섹스로봇은 역시나 하나도 없었다. 모두 BCI형이었다. BCI형 기기 하나를 들여다보고 있자니 옆으로 누군가 다가왔다. 아주 향긋한 냄새가 코끝을 스쳐서 깜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앞머리를 자연스럽게 위로 넘겨 올린 남자는 사과라도 깨문 거 같은 미소를 만면에 지으면서 날 바라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섹스 관련 BCI 제품이 궁금하신가요?”

“아, 네, 안녕하세요!”

“이쪽에 있는 BCI 제품은 뇌파를 통해 성기를 자극하는 감각을 그대로 전달하는 제품입니다. 다양한 방식의 니즈를 그대로 재현하기 때문에 별다른 모드도 필요없지요. 한 번 사용해보시겠어요?”

“이걸, 사라구요?”

“아뇨아뇨.”

남자는 아까보다 더 짙은 사과향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무슨 향수를 뿌린 거지, 어안이 벙벙해질 지경이었다.

“써 보지도 않으시고 어떻게 사시겠어요. 테스트가 가능하시니까 저쪽에서 제품들을 다양하게 테스트 해 보시라는 말씀을 드린 거예요.”

쫄래쫄래 남자를 따라가고는 있었지만 머릿속은 복잡했다. 대체 여기서 어떻게 테스트를 해 보란 말인가. 이게 무슨 탈의실도 아니고, 낯 뜨겁게 여기에서 무슨 테스트를 할 수가 있다고……. 남자가 데려간 곳에는 정말로 탈의실처럼 두꺼운 커튼이 쳐진 방이 있었다. 남자는 손에 든 무전기 같은 걸 보면서 뭔가를 체크하더니 좀 더 안쪽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남자가 커튼을 젖히자 한 가운데 의자를 빙 둘러싸고 디스플레이 된 BCI 제품 세 개가 모습을 드러냈다.

“설명서는 위쪽에 있으니 편안하게 체험해 보시고 결정하세요. 기기당 15분씩 작동하고, 중단하고 싶으시면 기기 옆의 버튼을 누르시면 바로 중단됩니다.”

남자는 여전히 산뜻하게 웃으면서 묵직한 커튼을 닫았지만, 산뜻한 웃음은 이쯤 되자 어쩔 수 없이 의미심장한 미소로 보였다. 한참 멍하니 앉아 있다가 어쨌든 여기까지 온 목적을 다시금 상기했다. 새로운 기기를 살 것이다. 얼마나 대단한지, 나한테 변태라고 비웃던 지애가 써 보는 그거, 나도 한 번 써 보겠다. 일단 제일 왼쪽에 있는 기기에 손을 뻗었다. 역시나 BCI 기기답게 눈을 가리는 헬멧처럼 생겼다. 설명서를 보니, 왼쪽 버튼을 누르면 작동이 되고, 오른쪽 버튼을 누르면 중단이 된다. 왼쪽 버튼을 한 번 더 누르면 숨겨진 모드가 작동. 뇌파를 읽어서 어떤 모드가 가장 적절한지 파악해서 그 모드를 적용해 준다. 무슨 모든지는 모르지만 내가 자위기구의 모드조차 정할 수 없다니, 어릴 적에 우리 엄마가 쓰던 바이브레이터도 일곱 가지 모드를 고를 수 있었는데. 자유도가 겁나게 떨어지는 게임을 하는 기분이었다.

칼을 뽑았으면 두부건 무건 베기는 해야지. 용기를 내서 헬멧을 머리에 썼다. 버튼을 누르려고 하니 저도 모르게 입술에 힘이 들어갔다. 왼쪽 버튼을 누르자, 눈 앞에 환한 빛이 떨어지면서 뭔지 모를 포근하고 나른한 기분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나는 얼떨결에 손을 허벅지 근처로 가져가다 멈췄다. 내가 손을 가져가기도 전에 무언가가 아주 느긋하고 천천한 손길로 그곳을 어루만지기 시작했다. 아니, 정확히는 아무도 어루만지지 않았다. 내 몸 속에서 자극을 만들어내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만질 필요조차 없다는 건 아주 잘 알겠지만 가만히 누워만 있는 게 어색했다. 손을 꼼지락거려보고 싶기는 한데, 너무도 나른하고 느긋한 느낌 때문에 꼼짝도 하기 싫기도 했다. 뭐가 지나갔는지 모르게 오르가즘이 지나갔고, 15분은 커녕 5분도 걸리지 않은 것 같았다. 어색하게 몸을 일으켜서 헬멧을 벗었다.

뭐가 좋은지는 분명 알겠는데…… 나는 잠깐 그냥 나갈까 고민했지만, 소파에 누워 있는 연이를 떠올리니 갑자기 또 분개가 치밀었다. 여기에서 포기할 순 없었다. 나는 다시 헬멧을 뒤집어썼다. 왼쪽 버튼을 두 번 누르면 뇌파를 인지한 새로운 모드가 작동한다고 했다. 빠르게 두 번을 누르자, 이번에는 눈앞에 아까 봤던 그 남자를 미묘하게 닮은 남자가 등장했다. 남자는 미끈한 정장을 입고 치약 선전처럼 웃으면서 옷을 천천히 벗어내렸다. 스트립쇼라도 하는 거 같은 남자의 손놀림에 머릿속에 물음표가 다섯 번째 뜰 때, 남자는 내 몸을 끌어당겨 나를 번쩍 들어올리고는 천천히 자기 뒤쪽에 있던 침대를 향해 걸어갔다. 포르 우나 카베사 같은 음악이 깔리기 적절한 상황이라고 생각하자마자 포르 우나 카베사가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생각을 멈추려고 하니까 더욱 생각이 강렬해졌다. 내 뇌는 내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조직이 아닌데. 침대에 남자가 날 내려놓고 천천히 입을 맞췄다. 남자의 입술은 부드러웠지만, 이 포르 우나 카베사는 누가 어떻게 좀 해 줬으면. 그 순간 피아노의 주제 부분으로 곡이 접어들며 남자는 강하게, 하지만 아프진 않게 내 가슴을 움켜쥐었다. 순간 놀라서 비명을 지르며 오른쪽 버튼을 눌러서 기기를 꺼버렸다. 너무 세게 눌러서 거의 스스로 뺨을 때리는 수준이었다. 내 뇌파가 이런 걸 원한다니 도대체 믿을 수가 없었다. 아까 나른하고 편안한 모드는 어색하긴 해도 이것보다는 좀 괜찮았던 거 같은데 대체 이 모드는 뭐란 말인가. 헬멧을 벗어서 내려놓는 사이 헬멧 위쪽에 쓰여 있던 글씨가 천천히 없어졌다. ‘ROMANCE’라고 쓰여 있었다.

기가 질려서 기기를 내려놓았다. 어쨌든 시험해 볼 기기가 앞으로 두 개는 더 남아있었다.

다음 기계는 판타지 모드가 있다고 했다. 이번엔 설명서를 좀 자세히 읽어야지. 몇 번씩 넘겨가며 확인한 설명서에는 역시나 자세한 내용은 없고, ‘내가 가장 꿈꾸는 판타지를 실현시켜 준다’고만 되어 있었다. 나머지는 그 문장을 수식하는 꾸밈말들이었다. 뇌파를 파악해서 내가 가장 꿈꾸는 모습 그대로의 섹스…… 아까 경험했던 로맨스 모드와 뭐가 다른 건지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속는 셈 치고 기계를 뒤집어 썼다. 이번에도 엉망진창이면 그 이상한 로맨스 모드는 안 쓰는 걸로 하고 아까 그 기계를 살까 싶었다. 아, 아직 하나 더 남았었지. 그거까지 다 해 보고 나서.

모드를 실행시키자, 아까와는 완전히 다른 감각이 몸을 감쌌다. 아까는 낯설고 어색한 느낌이 확실했다면, 이번엔 익숙하고 편안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처럼 나른하지도 않았고, 몸이 축 늘어지지도 않았다. 어딘지 어색한 부분이 있어서 머리카락을 가볍게 쓸어내리자, 단발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내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오는데. 모습이 변한 걸까? 몸을 내려다보자 흘린 커피가 지워지질 않아서 3년 전에 버린 블라우스를 입고 있었다. 이 옷을 내가 좋아하기는 했지…… 블라우스는 마치 어제 산 것처럼 깨끗했다. 커피를 흘렸던 가슴께를 만지작거리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우리 집이었다. 엄마가 줬던 군자란이 아직 살아있었다. 저거 죽었을 때 엄마한테 미안했었는데. 익숙한 목소리가 귓전에 들렸다.

“주인님.”

고개를 돌리자 그곳에는 멀쩡하게 움직이는 연이가 있었다. 너무 놀라서 연이의 몸을 붙잡았다.

“너 괜찮아? 이제 움직일 수 있어?”

“무슨 말씀이세요.”

연이가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웃었다. 연이의 몸을 가리고 있는 건 제일 처음 봤을 때 입고 있던 실험복 비슷한 하얀 천쪼가리였고, 나는 연이의 몸을 더듬거리며 그 하얀 천쪼가리가 연결되어 있는 어깨부근의 끈을 풀었다. 몇 개의 끈을 더 풀자, 연이의 단단하고 부드러운 나신이 환하게 드러났다. 처음 봤을 때와 전혀 다를 바 없이 하얗고 예쁜 몸이었다. 그리고 내가 연이의 몸을 만지작거리자 언제나 그렇듯 단단하게 연이의 그곳이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너무 반가워서 울컥 눈물이 날 뻔 했다.

“너 정말…….”

나는 연이를 꼭 끌어안고 한참을 흐느꼈다. 연이는 어쩔 줄을 모르는 듯 가만히 서 있다가 조용히 내 어깨를 함께 감싸안았다.

“주인님, 슬픈 일이 있으셨어요?”

“그래, 나는 네가…….”

까지 말하자마자 무슨 상황인지 깨달았다. 이건 연이가 아니다. 연이가 아니라 내 뇌를 자극해서 연이를 되살려 낸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건 너무나 연인데. 눈 앞에 있는 연이를 몇 번씩 다시 만져보았다. 분명 연이였고, 짓는 표정과 움직임 모두가 완벽하게 내가 아는 연이었다. 연이의 손을 잡고 천천히 안방으로 걸어들어갔다. 안방도 내가 생각해 왔던 안방 그대로였다. 내가 침대에 눕자, 연이도 함께 침대에 누웠다. 연이가 천천히 나를 쓰다듬는 걸 느낄 수 있었다. 하지만 연이의 손길을 온전히 느끼기엔 머릿속이 너무도 복잡했다.

나는 연이를 더 이상 고치지 않아도 된다. 그 점만은 확실했다. 연이를 고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영원히 연이를 만날 수 있다. 어떤 상황에서건 언제라도, 연이가 6년 전에는 멀쩡히 있던 블라우스를 벗겨냈다. 블라우스의 단추가 풀리는 걸 보면서 깨달았다. 이 상황의 배경은 6년 전, 연이를 처음 만난 그 순간이었다. 연이가 하나도 낡지 않았던 시절. 6년 전의 내 몸은 좀 더 말랐고 팽팽해 보였다. 나는 연이를 만지는 대신 자신의 허리를 쓰다듬었다. 오늘 아침에 본 것보다 6년 더 젊은 피부. 내가 70살이 되더라도 이 기기와 함께라면 나는 6년 전의 연이를 계속 만날 수 있다. 처음 연이와 함께 했던 섹스는 정말…… 황홀했지. 연이의 탄탄한 가슴팍을 쓰다듬으며, 연이의 낡은 CPU, 연이의 엉덩이 골이 뜯겨지던 순간, 연이의 몸이 멈춰버리던 시간들을 생각했다. 팬티 위로 연이의 손가락이 닿았을 때 나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잠깐, 연이야.”

“네?”

“잠깐만 멈춰 봐.”

나는 연이의 뺨을 천천히 쓰다듬으며 올록볼록한 연이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기계를 중단시켰다.

다음 기계는 아예 작동시킬 생각도 하지 않았다. 나는 헬멧을 벗어서 내려놓자마자 곧바로 커튼을 젖히고 밖으로 걸어나갔다. 기다리고 있었던 것처럼 잘생긴 남자가 이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남자를 붙잡고 물었다.

“A/S 신청서는 어디서 써야 하죠?”

“아, 새 제품 사시려던 거 아니셨어요?”

“궁금해서 들어가 봤어요. 사실은 집에 구형 모델인 로맨스가 있거든요. A/S 되는 센터가 정해져 있다고 하던데요.”

“로맨스는 지방으로 보내야 수리가 가능할 거예요.”

“네, 신청서 작성할게요.”

남자는 적이 난감한 표정으로 수리 신청서를 들고 왔다. 자리에 앉아서 수리 신청서를 작성하는 걸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보고 있더니, 우물쭈물하면서 남자가 말을 덧댔다.

“고객님, 로맨스를 왜 굳이 고쳐 쓰시려고 하시는 건가요? 돈도 상당히 많이 들텐데요. 그 가격이면 새 BCI를 하나 사는 게 나으실텐데…….”

아무런 대답이 없자 불안한 듯 남자는 점점 말이 많아졌다.

“혹시 딥러닝 기능 때문에 그러시는 건가요? BCI를 쓰시는 고객님들 중에도 딥러닝 기능을 그리워하시는 분들이 꽤 있으시거든요. 딥러닝이 있으면 로봇과 나 사이에 구체적 관계가 생기는 거니까요. 저희 회사도 그런 문제를 많이 고민해서 제품을 개발하고 있습니다. 아까 보셨던 제품 중에 마지막 제품은 딥러닝이 가능합니다. BCI 기술과 딥러닝 기술이 결합하면 어떤 제품이 나올지 기대되지 않으세요? 고객님의 뇌파가 어떻게 작동했는지를 기억하고, 고객님과 함께 구체적인 추억을 쌓아갈 수 있는 제품입니다. 고객님만의, 고객님만 이해할 수 있는 BCI가 가능하다는 얘기죠.”

나는 남자의 말을 한쪽 귀로 흘리면서 계속 수리 신청서를 작성해 나갔다. 로맨스 수리가 가능한 곳은 전라북도 순창군의 풍산면까지 가야만 있다고 쓰여 있었다. 연이가 거기까지 가는 건 버틸 수 있을까. 하지만 거기에서만 수리가 가능하다면 어쩔 수 없겠지. 나는 주소 옆에 동그라미를 그려넣었다. 남자는 점점 더 초조해 보였다.

“고객님, 혹시 인간형 모델을 선호하시는 건가요? BCI를 인간형 모델에 적용시킨 경우도 있는데요. 예를 들자면 바로…….”

갑자기 남자의 손이 정수리에 닿았다. 나는 화들짝 놀라서 남자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뭐하시는 거예요?”

“아니, 전…… 혹시 인간형 모델을 좋아하시는 걸까봐…….”

나는 어이 없이 남자를 바라보다가 다 완성한 수리 신청서를 남자에게 건넸다. 남자의 명찰을 보았다. 박병훈이라는 이름을 확인하고, 다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이름 기억했으니 제대로 접수해달라는 의미였고, 손을 얹었다가 한 소리 들은 남자는 약간 주눅이 들긴 했지만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인간형 모델을 고치겠다고 하니 손을 얹었다. 남자는 로봇인 걸까. 연이의 수리비는 남자 말대로 웬만한 BCI 한 대 값보다 조금 싸게 나왔다. 속이 쓰렸지만, 카드를 내밀었다. 카드를 긋기 전에 다급하게 12개월 할부를 외치긴 했지만, 어쨌든 세상에는 할부라는 훌륭한 제도가 있었다. 연이를 데려가는 서비스 기사들이 도착한 건 바로 다음날이었다. 일요일에도 서비스 센터의 AI들은 성실하게 일했고, 몇 겹씩 완충재를 넣어서 꽁꽁 연이를 싸맨 뒤 상자 안에 넣었다.

“잘 부탁드립니다.”

“네네, 그럼요.”

포장운송을 맡은 로봇은 별달리 사람처럼 생길 이유도 없었는지 은색 몸체와 골격을 훤히 드러낸 채였다. 엉덩이께를 바라보며 저 로봇 안에는 무엇이 들어있을지 생각했다. 아무래도 인체형 로봇만 보면 엉덩이를 한 번씩 유심히 보는 못된 버릇이 생긴 것 같았다. 은색의 단단한 철제 팔이 상자 안에 들어간 연이를 안아들었다. 인간 표정이랑은 영 차이가 지는 얼굴로 로봇이 웃어보였다. 나도 어색하게 함께 웃어보였다.

나는 연이가 떠나고 난 방 안에 혼자 앉아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고전 영화를 한 편 보기 시작했다. 로렌스 올리비에가 주연을 맡은 1939년 작 폭풍의 언덕이었다. 그와 함께 일생을 같이 한다면 내 급이 떨어질 거라는 캐시의 말을 반만 듣고 분노한 히스클리프가 그 자리를 떠났을 때, 정지버튼을 눌렀다. 캐시의 말은 틀린 게 없었다. 히스클리프와 일생을 함께 한다면 명백하게 캐시에게는 급 떨어지는 일이었다. 캐시에게는 히스클리프보다는 좀 더 교양있고 고고한 짝이 필요했다. 하지만 그 결과 저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지? 연이가 떠나 버린 소파 구석에는 연이 대신 휴대폰이 놓여 있었다. 번호를 누른지 얼마 되지 않아 엄마는 바로 전화를 받았다.

“어, 왜. 무슨 일이야?”

“그냥, 엄마는 요즘 잘 지내나 해서.”

“못 지낼 건 뭐가 있니.”

“몸은 건강하지?”

“진짜 너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지? 생전 안 하던 전화를 하고 건강을 묻고 말이야.”

“엄마, 나 어릴 때…….”

“응?”

옷장 구석에 있던 종이 박스가 머릿속을 가볍게 스쳐 지나갔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상자를 발견했을 무렵의 엄마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엄마는 한참 젊었고, 자주 푸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항상 아침 일찍 일어나서 저녁 늦게 들어왔다. 엄마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날도 많았다. 나는 엄마가 없는 곳에서 밥을 먹고 놀고 엄마의 옷장 속을 뒤지며 거침없이 쑥쑥 자라났다. 내게는 빛나는 것들이 많이 필요했고, 엄마의 옷장 속은 은밀하게 빛났다. 엄마의 밤을 나는 알지 못한다. 엄마가 몇 시쯤 잠들었는지, 때로 휴가를 내고 혼자 침대 위에서 깊게 잠들었는지, 그 수많은 기구들과 얼마나 친하게 지냈는지, 혹은 단지 잠들기 위해서만 그것들이 필요했을지. 그걸 굳이 우리가 서로 알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었다. 나는 목소리 톤을 조금 높였다.

“엄마는 요즘 뭐 하고 지내?”

전화기 너머 엄마 목소리도 가볍게 밝아졌다. 청소하는 AI들끼리 연결되어 있다보니, 연결망 때문에 친하게 지내게 된 사람들 이야기를 신나게 했다. 그 중에 엄마처럼 수간호사로 오래 일했던 사람이 있다고 했다. 다른 동아리 사람들한테 비밀로 하고 둘이서 같이 다음달에 여행을 가기로 했다며 유쾌하게 웃었다. 모아놓은 연금은 좀 있으신가 보지, 나도 같이 웃었다.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퇴근하고 돌아온 집 문 앞에 사람 크기만한 상자가 놓여있었다. 나는 가만히 상자 위에 손을 얹었다. 운송장에 쓰여진 발송 주소는 전라북도 순창군이었다. 문을 열고, 상자를 힘껏 떠밀어서 집 안으로 넣었다.

커터칼을 아주 조금만 밀어서 포장된 상자를 뜯었다. 빽빽하게 들어있는 완충재를 하나하나 걷어내자, 돌아갔을 때 그 모습 그대로 연이가 눈을 감고 누워 있었다. 처음 왔을 때와 똑같이 환자복 같은 하얀 옷. 충전량은 15% 정도 남아 있었다. 15% 정도면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데. 나는 심술이 나서 연이의 뺨을 찰싹 때렸다.

“자는 척 하지 마.”

“아.”

연이가 번쩍 눈을 떴다. 안 웃으려고 했는데, 연이가 눈을 뜨자마자 입가에 환하게 웃음이 번지기 시작했다. 밀려 올라가는 볼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아주 욕이라도 신나게 해 주고 싶은데, 싱글싱글 웃고 있었다.

“오랜만이다.”

“뭐가 오랜만이에요. 나흘 만이지.”

“너한테는 하루 만이겠지만, 나한테는 아니거든. 내가 너 때문에…….”

전해져 내려오는 고사 같은 것들이 떠올랐다. 꿈을 꾸듯 홀려가서 천상의 달콤한 과일을 먹고 사흘간을 지냈더니 지상에 돌아와보자 지상에서는 30년이 훌쩍 가 버렸다더라 같은. 연이의 시간과 나의 시간은 분명히 다르게 흐른다. 연이의 죽음은 나의 잠과는 다르다. 명백한 의식의 종결. 연이는 그 모든 순간들에 살아있지 않았다. 연이는 싱긋 웃으며 팔을 벌려 나를 끌어안았다.

“주인님, 제 엉덩이 뜯으셨잖아요.”

숨이 턱 멎었다. 나는 의식적으로 숨을 크게 들이쉰 후 천천히 내뱉고는 몸을 뒤틀어 연이의 품 안에서 빠져나왔다.

“너…… 깨어 있었어?”

“주인님이 CPU 뽑았을 때 잠깐 빼고요.”

연이의 눈빛은 다정하고도 뜨거웠다. 저 눈빛은 연이에게만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몰랐다. 연이는 조금도 유일한 존재가 아니다. 연이같은 건 아주 흔해 빠졌다. 더욱이 한 번 더 고장나면 수리를 받는 것도 거의 불가능할 것이다. 나는 그 다정한 눈을 깊이 바라보며 대답했다.

“너 다시 안 설까봐 무섭더라고.”

“고마워요.”

“뭐가.”

“고마워요.”

“그만해.”

연이는 처음 왔을 때와 달리 자기 손으로 슥슥 포장재를 떨쳐내고 옷을 벗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 조금도 변하지 않은 새하얗고 눈부신 나신이 내 눈앞에 펼쳐졌다. 적당한 근육의 모양새는 단단하게 자리잡은 빙산 위에 곱게 쌓인 흰 눈 같았다. 나도 모르게 손을 뻗어서 연이의 가슴팍을 쓰다듬었다. 연이는 내 허리를 붙잡은 채 가만히 내 손길을 느끼고 있었다. 문득 매장에서 경험한 온갖 종류의 BCI 기계들이 같이 떠올랐다. 그러고보면 연이의 모델명조차 로맨스가 아니었던가.

“너는 무슨 다른 모드같은 거 없어?”

“갑자기 무슨 말씀이세요?”

“아니야.”

그냥 연이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려고 했는데, 연이가 내 몸을 일으켜세웠다.

“다른 기계 써 보셨죠.”

“아, 그…….”

“좋으셨어요?”

“아니, 내가 꼭 그게 좋았다기보다는…….”

“사실 저도 5년 전쯤에 업데이트 된 모드가 하나 있긴 한데요. 주인님이 안 좋아하실 거 같아서 전환을 안 했거든요. 한 번 써 보실래요?”

대답도 하기 전에 벌써 약간 신이 난 표정으로 연이는 특수 모드를 구동해버렸다. 연이의 표정이 약간 서늘한 느낌으로 변하더니만, 평소보다 센 힘으로 내 턱을 치켜올리고는 밀어붙이듯이 입술을 부딪혀왔다. 혀가 빨려들어가듯이 뒤얽혔고, 아무런 애무도 없이 연이는 한 손으로는 내 허리를 감싸고 다른 손으로는 둔덕을 꽉 움켜쥐었다. 당황해서 연이의 어깨를 찍어눌렀다.

“야, 그만! 그만!”

커다란 눈동자를 굴리더니만 연이의 몸에서 힘이 빠졌다.

“별로예요?”

“원래가 더 좋아.”

나는 연이의 손을 꼭 잡고 침대방 문을 열었다. 연이는 보드라운 솜이불처럼 내게 안겨들어왔고, 우리는 아주 오랜만에 섹스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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