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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 진화하는 장난감

2004.01.30 21:3101.30

   1.
   공중 화장실. 다소 어둡다. 전체는 흰색 타일로 덮여 있고 오른쪽에 네 개의 소변기, 왼쪽에 세 개의 좌변기가 있는 문이 있다. 문 앞쪽에 거울과 세면대가 있다. 모두 다섯 사람이 화장실 안에서 배설의 고통을 참고 있다. 한 사람은 쪼그려 앉아 있고, 한 사람은 벽에 기대어 있고, 두 사람은 자신의 사타구니를 움켜쥔 채 소변기를 바라보고 있다. 나머지 한 사람은 세면대에서 머리를 감고 있다. 그러면서 외친다.
   “나는 이곳과 어울리지 않는 인물이야!”

   꿈에서 깨어난 지금, 나는 낯선 곳에 와 있다. 구토 증세를 느끼고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 갑자기 거친 금속음이 들린다. 하늘색 제복을 입은 사내가 음식을 가지고 들어온다. 사내의 뒤로 쇠창살문이 보이고 여섯 평 정도 되는 방에 내가 갇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곳이 어딥니까? 왜 제가 여기에 있는 거죠?”  
   사내는 내 앞에 음식을 갖다놓고 돌아선다.
   “자네는 얼굴빛이 빨간색이군. 내가 좋아하는 색이지. 실컷 먹으라구.”
   나는 배가 고프지 않았다. 얼굴빛이 빨간색이라니. 그러고 보니 나는 몸에 옷도 걸치지 않은 알몸 상태다.
   구석에 조그마한 의자가 있다. 그것을 끌어다가 앉는다. 주위가 어두워지고, 어디선가 바이올린 소리가 빠르고 낮게 들려온다. ‘자살을 하면 어떨까.’ 귀를 양손으로 막고 나니 기분이 가라앉았다. 사내가 문 앞에 나타난다.
   “이곳에는 반드시 한 사람이 있어야 하네. 얼마 전에 한 사람이 있었고, 그리고 얼마 전에, 그리고 또 얼마 전에 한 사람이 있었지. 알겠나. 이곳에는 반드시 한 사람이 있어야 돼. 왜냐하면 여기에는 내가 존재하기 때문이야. 나는 단 한 사람을 지키기 위해 여기에 있는 거야.”
   나는 아직 귀에서 손을 떼지 않았다.
   밖에서 남자의 말소리가 들린다.
   “왜 나를 저 방에 들여보내지 않는 거야!”
   “저 방에는 이미 사람이 있어.”
   “왜 저 자는 저렇게 오랫동안 머물고 있는 거지.”
   사내는 대꾸를 하지 않는다.
   온몸이 나른해지고 속이 쓰리다. 의자에 앉아 있던 나는 맥없이 시멘트 바닥으로 고꾸라진다. 사내가 들어와 찬물에 적신 수건을 이마에 얹어준다. 얼음주머니 두 개를 양쪽 겨드랑이에 끼워놓는다. 그리고 하룻동안 나를 지켜보며 약을 먹인다. 또다시 구토 증세를 느낀다. 구석으로 가 오물을 토해낸다. 오른쪽 배에 가스가 차오른다. 나는 신경질적으로 오른쪽 배를 때려본다. 하지만 답답함은 사라지지 않는다. 오른쪽 배가 딱딱하게 굳어져가는 느낌이다. 살을 꼬집어도 감각을 느끼지 못한다.
   나이 든 남자와 젊은 여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저 자를 만나게 해주시오. 우리는 저 자에게 사과를 해야 됩니다.”
   “저 사람의 잘못이 아니에요.”
  사내는 꿈쩍도 하지 않는다. 무심코 나는 손으로 얼굴을 더듬는다. 허기가 느껴진다. 어느새 사내가 음식을 갖고 들어온다. ‘나는 가장 아름답고, 매혹적인 존재다.’ 광대가 문 앞에 등장한다. 자신의 이름도 역시 광대라는 것이다. 사내와 나는 광대의 즉흥 연기를 지켜본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내 행동들이었음을 알아챈다. 광대는 내 과거를 흉내내고 있다. 어쩌면 그저 추측일 뿐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분노한다. 나는 사내에게 저 광대를 내쫓으라고 윽박지른다. 그러자 사내가 나를 매질하기 시작한다. 광대는 곧 사라진다.
   불안에 떨고 있는지 아니면 무언가에 흥분해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내 감정 상태를 짐작할 수 없다. 배가 격하게 출렁일 만큼 거칠게 호흡을 했다. 배에서는 끊임없이 물소리가 들렸다. 머리카락이 곤두섰다. 불안, 흥분, 아니면 공포. 이 세 감정 중 한 가지일 텐데 도무지 알 수가 없다. 잠시 사랑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사랑일 리는 없다. 나는 그런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기 때문이고, 그 단어조차 지금 처음으로 생각한 것에 불과했다. 허기를 느끼고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끊임없이 숨이 가쁘다. 나는 전혀 움직이지 않는다. 호흡을 멈춰보았다. 관자놀이가 간지럽고, 머리 뒤쪽이 오싹해졌다. 손가락 끝과 발가락 끝이 파르르 떨렸다.
   깡마른 몸집의 사내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 하반신이 마비된 듯한 느낌이 들었다. 실제 한동안 하반신을 움직이지 못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하반신이 서서히 뜨거워지더니 저린 듯 따끔거렸다.
   머릿속에서 심하게 격투가 벌어지고 있다. 눈조차 뜰 수 없을 만큼 고통이 심했다. 뇌가 짓밟히고 두개골이 조각나는 환상에 시달리고 있다. 격투사들은 좁은 공간에서 더욱 치열하게 자신들의 영역을 사수하려고 한다. 뇌가 수많은 성으로 서로 대립하고 있다. 비좁은 뇌는 지리멸렬하다. 아직 저녁 일곱시. 지금이 열세 번째 대변이다. 내가 잠을 깬 시간은 오후 한시가 조금 넘어서였다. 대략 여섯시간 동안 나는 열세 번째 대변을 보았다. 그리고 앞으로 한 열다섯시간 정도 나는 깨어있을 것이다. 대장 역시 너무나 비좁다. 하지만 이것은 탈출구가 있어 비좁은 공간일지라도 그나마 불쾌한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대변을 보는 중에도 두려움 때문에 속이 울렁거리고 현기증을 느꼈다. 혀를 움직여서 속으로 말을 하려고 해도 도무지 혀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둔감해진 혀 때문에 말의 속도가 느려지고 있다. 입 안에서는 은단 맛이 느껴졌다. 목 안쪽에서 은단의 독특한 단 맛이 느껴졌다. 그것 때문인지 입 안에 계속 침이 고이고, 목이 뻣뻣하다.
   생각을 이어서 해본 적이 없다. 언제나 몇 개의 생각들이 토막으로 떠오른다. 한 가지 기억에 대해 생각하다보면 불쑥 다른 기억이 머리를 지배하고, 또 다른 기억이 머릿속을 지배한다. 다듬어지지 않은 이러한 기억들의 나열 때문에 나는 내 정신을 의심해보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의식을 회복하고 있다. 이곳에 대해서 생각하게 되었다.

   사내가 들어와 내 머리카락을 모두 잘라버린다. 나는 그에게 저항할 기운이 없다. 삭발 당한 머리를 쓰다듬어본다. 바닥에는 머리카락이 보기 흉하게 흩어져 있다. 사내는 머리카락을 치우지 않고 방을 나간다. 머리카락을 쥐어뜯어야만 고민할 수 있고 또한 그 고민을 풀 수 있는 나로서는 이제 고민이라는 것 자체를 상실해버린다. 사내가 눈치채지 못하도록 머리카락을 다시 길러야 한다. 한동안은 절대 고민의 흔적을 보여서는 안 된다. 머리카락이 자랄 때까지 허무에 빠진 듯 자신을 비난하며 사내의 눈을 속여야 한다.
   둔탁한 소리에 잠을 깬다. 이른 아침부터 사내는 짧은 몽둥이로 쇠창살을 난폭하게 두들겨댄다. 내가 잠을 깨자 사내는 자물쇠를 풀고 직사각형의 커다란 물건을 들고 들어온다. 거울을 한 쪽 벽에 세워놓고 사내는 방을 나간다. 그때부터 내 행동에 변화가 생긴다. 내 행동이 어색해진다. 반복해서 거울 앞으로 다가가 자신을 비춰본다. 다시 의자로 돌아와 쪼그려 앉았다가도 이내 의자를 거울 앞으로 끌고 와서 의자에 앉은 모습을 거울에 비춰본다. 잠에서 아직 완전히 깨어나지 않았기 때문에 바닥에 누웠다가도 다시 일어나 거울에 내 얼굴이 보이도록 눕는다. 거울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거울 때문에 공간이 더욱 비좁아진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저 거울을 깰 용기가 나질 않는다.
   사내가 창살 근처를 서성이며 계속해서 낮은 음성으로 무언가를 중얼거린다. 의자에 앉아 멍하니 거울만 들여다보려고 하지만 그 소리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의자에서 일어나 창살 쪽으로 간다. 사내에게 제발 그 소리 좀 멈출 수 없냐고 말해보지만 사내는 나를 쳐다보지도 않는다. 다만 소리가 더욱 작아질 뿐이다. 의자로 돌아와 귀를 틀어막고 쪼그려 앉는다. 소리는 사라지지 않는다. 관자놀이가 간지러울 만큼 미세하게 울리는 소리, 코끝이 찡하고 뇌가 따끔거린다. 얼굴을 찡그리며 눈을 감는다. 사내의 중얼거리는 소리를 멈추게 할 수 없다. 사내는 내 마음을 읽고 있는 것이다.
   사흘 째 같은 꿈을 꾸었다. 바닥에 누워서 자는 동안 검은 물체의 사내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하지만 사내의 얼굴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단지 어둠뿐이었다. 전혀 그 사내가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다만 깡마른 몸집의 사내는 아닐 것이라고 추측해보는 것 정도였다. 사내를 밀어내지 않으면 그가 나를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죽음을 생각하는 순간 손톱 끝에 통증을 느꼈다. 거울 앞으로 다가가 어둠 속에서 나를 비춰보았다. 사내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것은 직감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의자에 앉아서 날이 밝기를 기다렸다. 사내는 나타나지 않았다.
   ‘고통이 사라져가다니. 그럼 나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어야 하나. 이제는 고통 이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다. 불안하다. 정신은 끊임없이 온몸을 훑어댄다. 어느 한 곳을 찾아내야 한다. 고통이 다시 나를 지배해야 한다.’ 나는 계속 거짓말만 지껄이고 있는 것이다. 명치에 숨이 고였다. 한동안 들이쉰 숨이 명치에 고여 그 부위만 볼록했다. 입을 벌려 더욱 많은 공기를 들이마셔 명치를 부풀렸다. 나는 산소가 부족하다. 몸 곳곳으로 산소가 퍼지지 못한다. 곧 숨이 끊어질듯이 헉헉대기 시작하면 드디어 명치가 뚫리고, 고였던 공기가 하복부로 내려간다. 변기의 물 내리는 소리만큼이나 시원하고 크게 공기가 내려가며 소리를 낸다. 방금 명치가 뚫렸다. 그리고 다시 숨이 고이기 시작했다. 다시 고통이 사라지기를 원했다. 뇌는 답답할 정도로 둔해져 있다. 한 가지 생각에 집착하며 고립되기 시작했다.
   사내가 창살 앞에 서서 나를 물끄러미 쳐다본다. 나는 사내의 모습조차 바라볼 여유가 없다.
   “그렇게 괴로운가?”
   나는 대답하지 않는다. 헉헉거리며 공기를 끌어모으느라 사내의 물음에 대답할 겨를이 없다. 사내가 조그마한 녹음기를 꺼내든다. 시선이 녹음기 쪽을 향한다. 사내가 녹음기를 작동시키고 곧이어 녹음기에서 변기의 물 내려가는 소리가 반복해서 들려온다. 그리고 나는 편안해진다. 마치 그 소리가 내 뱃속에서 들려오는 것처럼 명치가 뚫려 공기와 음식물이 아래로 내려가는 것 같은 쾌감을 느낀다. 공기가 명치에 고이지 않고 허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그리고 사내는 녹음기를 들고 가버린다.
   나는 살아남고 싶다. 비록 이 폐쇄된 공간에서일지라도 언제까지나 살아서 움직이고 싶다. 저 사내가 지켜보는 곳에서 만큼은 절대 죽음을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무언가를 이루고 싶은 욕망 따위가 없더라도 그저 이렇게 움직이고 싶다. 이곳보다 더 처참한 곳에서라도 나는 살아남고 싶다. 오직 저 사내 외에는 거들떠보지 않는 추악한 인간이 될지라도 나는 끝까지 살고 싶을 뿐이다. 거울 앞에 앉아 내 모습을 지켜보았다. 변한 것은 없었다. 소외된 자의 무표정한 모습. 바깥에서 지낼 때와 별로 달라진 것은 없다. ‘이제 그만 끝내고 싶다’고 생각해야 한다. 머리가 참을 수 없을 만큼 아프고, 그것 때문인지 일어설 기운마저 없었다. 거울 옆에 수북이 쌓인 알약들,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이 안쓰러웠다. 알약들을 혀로 녹여 거울에 내 이름을 썼다. 이름이 희미해지면서 의식을 잃었다.

   “너는 왜 나를 지키고 있지. 너도 나처럼 세상을 보지 못하고 있어. 너는 문지기에 지나지 않아.”
   “나를 비웃지 마라.”
   “이곳을 벗어날 사람은 내가 아니고 바로 너야.”
   세상은 모두 저런 자들로만 득시글대고 있을 것이다. 오히려 나는 그들 틈에서 벗어나 고귀하게 자신의 유아성을 지켜나가고 있는 것임에 틀림없다. 이곳은 사람들이 발견하려고 하는 유토피아일지도 모른다.
   나는 사내에게 옷을 요구한다. 씻을 물과 세면도구를 갖다달라고 한다. 몸을 씻고 거울 앞에 다가가 치장을 한다. 전혀 어색해 보이지 않는다. 이제 창살 앞으로 다가가 사내를 부른다.
   “이봐, 직원! 문을 열라구. 이제 그만 나가야겠어!”
   잠시 후 내 앞에 나타난 사내는 지금까지 나를 지키고 있던 직원이 아니다. 옷차림은 여전히 녹색의 제복이지만 분명 낯선 사내다.
   “자네는 여기 가만있으면 돼. 바깥 구경은 우리가 하면 되니까. 자네는 그저 의자에 앉아서 거울이나 보라구. 자네는 얼굴색이 파란색이군. 내가 좋아하는 색이지.”
   바이올린 소리가 느리고 높게 들려온다.
   “옷은 내가 가져가지.”
   흥분을 주체할 수 없다. 들이쉬는 공기에 모르핀이 함유되어 있는 것 같다. 숨을 쉴 때마다 현기증이 나고 졸음이 왔다. 몸속 전체가 간지러웠다. 간지러움 때문에 코끝이 찡하고, 콧물이 흘렀다. 나는 이곳을 사랑한다. 이곳을 벗어나고 싶지 않다. 한동안 나는 흥분에 사로잡힌 채 의자에서 환상적인 삶을 보냈다.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바깥 세상에 대한 상상을 시도했다. 도서관에 들어가 책을 꺼내서 의자에 앉아 읽어보려고 했다. 하지만 첫 장을 펴는 순간 더 이상 상상은 이어지지 못했다. 속이 부글거리기 시작했고 몹시 허기를 느꼈다. 뒤이어 손과 머리에 경련이 일어났다. 신경이 온통 육체적인 변화에 함몰되어버렸다. 그저 방 안의 거울만 쳐다보는 수밖에 없다. 고개를 숙여 무릎 사이로 밀어 넣은 채, 눈을 치켜 떠 거울만을 바라보는 수밖에 없다. 나만 바라보고 있으면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았다. 그것 외에는 달리 버텨나갈 방법이 없다. 새로 온 사내 역시 내가 그에게 무관심해야 나에게 관심을 가질 것이다.
   드디어 사내가 내 앞에 나타난다. 나는 사내에게 미소를 지어보인다. 사내는 잠시 나를 차갑게 쳐다보더니 왼손을 들어 누군가에게 손짓을 한다. 그리고 뒤이어 옛 직원이 나체의 여인을 들고 온다. 우윳빛 살결에 해맑은 웃음을 짓고 있는 여인, 마네킹에 불과하지만 여인은 아름답다. 어느새 사내는 사라진다. 나는 이제 여인을 바라본다. 여인은 그렇게 창살 너머에 세워져 있을 뿐이다. 날이 어두워지고 사내는 마네킹을 들고 가버린다. 나는 그녀를 생각한다. 날이 밝아오자 여인은 다시 내 앞에 나타난다. 이제는 거울 대신 여인을 바라본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고, 사내는 다시 마네킹을 들고 가버린다. 나는 날이 밝아오기를 기다린다. 그녀가 보고 싶어진다. 드디어 날이 밝아오고, 여인이 다시 내 앞에 나타난다. 나는 더 이상 거울을 보지 않는다. 의자에 앉아 여인의 얼굴만을 쳐다본다. 여인은 웃음을 지어보일 뿐 내 시선을 피하려하지 않는다. 여인과 나는 움직이지 않고 그저 서로를 주시하기만 한다. 여인은 아직 눈조차 깜박인 적이 없는데 어느새 날이 어두워지고, 다시 내 앞에서 사라진다. 나는 의자에서 일어나 거울 쪽으로 걸어간다. 그 옆에 수북이 쌓아둔 알약 몇 알을 집어 입에 넣고 삼킨다. 정신이 몽롱해지고 이내 잠이 든다. 다시 날이 밝아오고, 나는 그녀를 기다린다. 아직 그녀는 나타나지 않는다. 사내의 모습마저 찾을 수가 없다. 날이 어두워지고, 나는 거울 쪽으로 걸어가 어제보다 더 많은 양의 알약을 삼킨다. 잠이 들고, 잠시 후 깨어나 창살 너머를 쳐다보지만 여전히 그녀는 나타나지 않는다. 나는 창살 쪽으로 걸어가 사내를 부른다. 손으로 창살을 흔들고, 발로 걷어차고, 몸으로 창살에게 대들며 점차 광분한 목소리로 사내를 부른다. 사내가 내 앞에 나타난다.
   “이봐, 왜 그녀가 나타나지 않는 거지.”
   사내는 손을 창살 안으로 뻗어 내 얼굴을 쓰다듬는다. 나는 사내의 손을 움켜쥐고 그에게 애원한다. 사내는 내 손을 뿌리치고 나서 나를 날카롭게 쳐다본다.
   “이제 너는 마네킹을 영원히 보지 못해. 그래서 마네킹을 너에게 보여준 거야.”
   사내는 사라진다. 나는 손을 뻗어 사내를 붙잡으려고 양팔을 휘젓는다.
   “이봐, 돌아와. 제발 돌아와!”
  나는 다시 알약을 먹고, 아침이 되자 눈을 떠 창살 쪽을 바라본다. 그리고 날이 어두워지면 다시 거울을 바라본다. 의자에 앉아 이를 악물고, 꼭 쥔 손에 힘을 주고, 거칠게 심호흡을 한다.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가죽이 벗겨질 만큼 머리카락을 쥔 손에 온 힘을 싣는다. 참을 수 없을 만큼 그녀가 보고 싶다. 육체적인 통증이 사라지고 그 자리에 온통 그녀가 들어와 고통을 대신한다. 고통이 진화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사내가 창살문을 열고 들어온다. 나를 매섭게 노려본다. 나는 그저 의자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그를 조심스럽게 올려다본다. 사내는 다시 방을 빠져나가고 이내 문 밖에서 시계들을 방 안으로 밀어 넣을 것이다. 벽시계와 탁상시계가 수북이 쌓여 있다. 사내는 삼 면 벽에다 수십 개의 시계를 걸어놓을 것이다. 바닥 여기저기에 탁상시계를 놓아둘 것이다. 그리고 방을 나간다. 나는 벽과 바닥을 훑어본다. 저마다 시간이 다른 시계들, 일초의 간격도 두지 않고 초침 소리가 들려온다. 어떻게든 하루를 보내야 한다. 수많은 시계 때문에 나는 시간의 흐름을 인식하지 못한다. 일분 전에 내가 무엇을 했는지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혼란에 사로잡힌다. 생각하는 것 자체가 고문이다.
   사내와 잠자리를 같이 해야 한다. 그의 아내가 되어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


   2.
   결국 이 모든 것은 한낱 수작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독방에 갇힐 수 없었다. 아무리 독방에 갇혀 있다고 자위해도 변신을 꿈꾸는 정신은 독방 안에만 머물지 않았다. 독방에 갇혀있으면 정신 또한 게을러질 것이라고 믿었다. 이제는 독방에 대한 욕망마저 사라져간다. 독방을 지탱할 기력마저 잃고 있다. 독방을 무너뜨려서는 안 된다. 다시 그 안에 갇혀야 한다. 더 음산하고 더 매혹적인 독방을 지어야 한다. 더 잔인하게 사내의 이성을 말살시켜야 한다. 독방의 절대적인 폐쇄성과 나이 든 사내의 유치한 음모들을 구상하고, 그 안에 재수감 되어야 한다.
   나는 다시 도서관으로 향한다. 책을 끄집어내 책상 위에 놓는다. 의자에 앉아 심 호흡을 한 후 책장을 넘긴다. 그리고 뒤이어 배의 일부분이 일직선으로 통증을 일으킨다. ‘햇빛도 없고 물도……’ 더 이상 눈이 오른쪽으로 이동하지 않고 목도 움직이지 않는다. 갈비뼈가 내장을 조이기 시작한다. 그저 쓴웃음을 짓고는 생각에서 벗어난다.
   생각보다 쉽게 새로운 독방이 완성됐다. 거대한 독방. 전체는 시멘트 바닥일 뿐, 이제는 벽도 없고 창살문도 없다. 천장도 없고 오직 끝이 보이지 않는 어둠뿐이다. 책이 바닥에 끝없이 널려있고 거대한 거울이 시멘트 바닥 여기저기에 박혀 있다. 사내는 없고 거울이 사내 역할을 대신 전담하기로 했다. 알약도 거울 옆에 놓여 있다. 이제 나는 다시 독방에 갇히게 됐다.
   바닥에 배를 붙이고 애벌레처럼 기어간다. 책을 짓뭉개고 머리로 책을 들이밀고 손으로 힘 있게 책을 뿌리친다. 왼쪽 볼을 바닥에 대고, 볼이 쓰릴 만큼 바닥을 문지른다. 바닥에 입을 대기도 하고 몸을 돌려 바닥에 붙인 채 움직이지 않는다. 거울 있는 곳까지 기어가 머리로 거울을 밀어본다. 손과 발로 바닥을 휘저으며 머리에 힘을 준다. 거울을 움직여보려고 안간힘을 쓴다. 이런 행동을 이해할 수 없다. 그러면서도 멈추지를 못한다. 움직이지 않으면 불안해진다.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으로 머리를 둔하게 만들어야 한다. 가만히 있으면 생각들이 나를 아름다운 존재로 몰아간다. 하지만 이것들로부터 도망가고 싶지 않다. 나는 매료되었다.
   바닥에 앉은 채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있다. 눈을 감지도 못한다. 끊임없이 독방 전체가 회전을 하고 있다. 눈을 감으면 그 소용돌이 속으로 끌려들어갈 것만 같았다. 가까스로 움직여 자리를 옮아앉았다. 그리고 옮아앉은 자리에서 조금 전까지 앉아 있던 곳을 바라보았다. 어지럼증은 여전했지만 무언가 분리된 듯한 기분을 느꼈다. 가까스로 움직여 자리를 옮아 앉아보았다. 그럴 때마다 처음의 자리에 내 육신의 일부가 한 조각씩 존재함을 느꼈다. 결국 이 거대한 독방도 언젠가는 나의 부산물로 꽉 차게 될 것이다.

   ‘왜 너는 나와 분리되어 있지. 이제는 고통마저 없어졌어. 나를 속였어. 내가 병들어 있는 줄 알았어. 나를 속인 거야. 교묘해. 아주 교활해. 결국 네가 이길 수밖에 없는 싸움을 벌였어. 나는 거기에 말려들었고, 패배했어. 나를 죽이려 하고 있어.’
   ‘내가 네 안에 남아 있다면 너는 자살하고 말 거야. 이건 모두 너를 위한 거야. 그리고 내가 분리되기를 바란 것은 너였어. 왜 이제 와서 나를 찾는 거지.’
   새벽 두 시 이십 분. 머리가 어지럽다. 지금 읽는 책은 도움이 될 것 같지 않다.
   ‘아무것도 기억이 나질 않아. 왜 그런 거지. 왜 이 방만 벗어나면 모든 걸 망각하지. 왜 육체적인 고통을 줬지. 호흡이 가쁘고 복부가 찢어질 것 같았어.’
   잠시 중단. 구토 증세를 느낀다. 어지럽고 감정이 격해져온다. 흥분, 마약과 같다. 환각 상태에서 식은땀을 흘린다. 갑자기 책을 읽는 행위. 드라마를 포기하고 싶은 듯 모든 행위를 중단.
   ‘너는 내게서 분리되어야만 해. 그래야만 너의 꿈을 이룰 수 있어.’
   또다시 전율. 눈을 감고 미간을 찌푸린다. 알몸. 손톱으로 자신의 살을 학대.
   ‘나는 고통을 겪어야 해. 그렇지 않으면 죽고 말 거야. 너를 학대하지 않겠어.’
   주먹으로 복부를 여러 차례 때림. 숨을 일시적으로 멈춤.
   ‘결국 너는 내가 완전히 분리되기를 바라고 있지. 완벽한 광기를 원하지. 그래야 꿈을 단기간에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지. 너야말로 야비한 인간이야.’
  의자에서 일어나 무대를 맴돈다. 왼쪽 어깨를 벽에 기댄 채 몸을 떤다. 심호흡을 하고 자신의 배를 바라본다. 주머니에 손을 넣고, 고개를 숙이고, 천천히 의자 주위를 맴돈다. 어깨가 심하게 들썩인다. 양손으로 명치를 세게 누르며 과장되게 비명을 지른다. 바닥에 놓인 책을 집어 의자에 앉아 소리나게 읽는다. 얼굴 표정은 가식적인 웃음기를 띠고 있다. 정상적인 인간으로 보인다.
   ‘잠들 수 없어. 머리가 조여오고 몸이 감전된 것 같아. 사람들의 말소리가 들리고 암흑이 나를 짓눌러. 네가 조종하고 있는 거니.’
   이 순간을 느끼고 싶어서 무대에 선 것입니다. 발작이 진행되다가 어느 순간 감정이 고조되지요. 심장이 뛰는 것을 느끼고 이마 한가운데가 뜨거워집니다. 몸이 감전된 듯하고 머리카락이 치솟는 것 같아요. 피가 하복부로 일시에 내려갈 때에는 마치 공포를 경험한 뒤의 서늘함과 유사하지요. 이것은 더 이상 공포가 아닙니다. 신음소리. 추운 듯 몸을 움츠린 채 가늘게 뜬 눈으로 천장을 주시. 무대에서 벗어나 관람석으로 간다. 빈 의자에 앉아 무대를 바라본다. 무대에는 흰색 가면을 쓴 보조 자아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미치지 않았어요!”
   또다시 무대는 사라진다. 천장을 주시하는 행위에서 벗어난다. 잠을 자고 나면 다시 괜찮아질 것이다. 벌써 몇 번째 이런 심리극에 시달리고 있다. 예리한 칼로 마취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머리를 가르는 것 같다.

   나는 갑자기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머리 쪽에 옅은 막의 촉감이 느껴졌다. 내가 일어설 수 있을 만큼의 높이에 쳐진 투명한 막. 이것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무릎으로 기어가 거울을 바라보았다. 얼굴빛이 노랗다. ‘내가 좋아하는 색이군.’ 바이올린 소리가 여전히 느리고 낮게 들려왔다.
   이 독방은 거대하다. 출구가 없다. 나는 여기에서 영원히 고립되어 존재할 것이다. 내가 움직이면 독방 또한 움직인다. 거리는 절대 좁혀지지 않는다. 나는 이곳과 유리될 수 없다. 책을 읽고 글을 쓸 수만 있다면 그 이외의 일은 나에게 소모적인 것에 지나지 않는다.
   또다시 서랍에 넣어 둔 수면제에 손을 댔다. 두 알을 꺼내 삼켰다. 다시 독방에 갇히기 위한 방법이었다. 아직 졸음은 오지 않았다. 곧 졸음이 올 것이고, 잠을 깬 뒤에는 여전히 독방에 갇혀 있게 될 것이다. 광대뼈 주위에 심하게 경련이 일어났다. 몸이 화끈거리고 식은땀이 났다. 손가락 하나 움직이기가 힘들었다. 어깨와 목이 아래로 쳐지고 있었다. 눈까풀이 조금씩 따끔거렸다. 하지만 졸음은 오지 않았다.
   오늘이 고비인 것 같다. 마약에 취한 것처럼 몸이 흐느적거렸다. 무언가가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데 그것을 뿌리칠 수 없다. 어둠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하지만 어둠까지는 끝내 갈 수 없었다. 어둠은 똑같이 먼 거리에 남아 있었다. 공간은 변하지 않았다. 갑자기 그곳에 우두커니 서서 자위행위를 벌였다. 느리게 성기를 매만졌다. 독방은 사라지고 공간은 어느새 내 방이 되어버렸다. 아무리 노력해도 독방에 갇힐 수 없었다. 오후 여덟시 십오분, 정신의 흥분을 못 이기고 또다시 수면제에 손을 댔다. 차라리 졸음기를 느끼는 것이 현명하다고 판단해서였다. 그리고 공간에서 내가 사라졌다. 거울과 책들뿐이고 어느 곳에도 나는 존재하지 않았다. 며칠 동안이었을까. 아무튼 그 며칠 동안은 내가 태어나기 전의 세상이었다. 그리고 무슨 이유로 나는 지금 또다시 태어났을까.
   이 안에는 타인이 없다. 내가 결정하고 행위를 벌인다. 오늘부터는 독방 안에 수면제 대신 달콤한 약을 거울 옆에 놓아둘 것이다. 물론 조제는 내가 한 것이다. 나를 옭아매두기 위해서다. 봉지 안에는 녹색 가루약 한 스푼, 빨간색 알약 한 알 반, 파란색 알약 세 알, 조금 작은 노란색 알약 한 알, 그리고 노란색의 타원형 알약 한 알, 보라색 알약 한 알이 들어 있다. 나는 이 약을 수시로 먹을 것이며, 이로써 내 정신은 추함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어제는 하루 종일 약을 먹지 않았다. 똑같은 고통만을 겪었다. 목을 자르고 싶은 충동뿐이었다. 바닥에 앉아 몸만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을 보냈고, 새벽에 결국 약을 먹었다. 잠들기 위해서 책 위에 몸을 뉘었지만 영원히 눈을 뜨지 못할 것만 같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 어쩌면 이 모든 것이 죽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서 약을 먹었고, 다행히 오늘 눈을 뜰 수가 있었다. 일어나면서부터 머리가 아팠다. 얼굴은 겁에 질려 더욱 누렇게 변했고, 안구는 절반 이상이 눈까풀에 가려진 채 위로 향해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약을 먹었다. 두개골이 점점 작아지고 있는 느낌이었다. 그것이 뇌를 조여왔다. 다시 졸음이 쏟아졌다. 거울에 등을 기대고 앉은 나, 도대체 내가 이곳에서 무엇을 바라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한 인간으로서 파멸하게 된다면 그것은 고통 때문이 아니라 고통의 소멸 때문이다. 성급하게 이 말을 내뱉는 이유는 지금 내게서 조금씩 고통이 사라지고 있음을 느끼기 때문이다. 정신은 나를 괴롭히고 싶어한다. 단지 하룻동안 약을 먹지 않으면 그만이다. 고통은 다시 찾아올 것이다. 그렇다고 계속 약을 먹지 않는 행위는 하지 않을 것이다. 그것 또한 고통을 느끼지 않는 상태를 의미한다. 고통은 일종의 환각이다. 나는 그것을 느껴야 한다. 거울에 등을 기대고 책을 읽는다. 이 책을 다 읽었을 때 나는 이미 변신해 있을지도 모른다.
   무언가 내게 새로운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떠서도 나는 의식을 놓치지 않았다. 어제의 예감과 우려가 들어맞지는 않았다. 머릿속에서는 계속 ‘의식을 놓치면 어떻게 하나’하고 되뇌고 있다. 생각을 멈출 수가 없다. ‘걱정 말아요. 내가 감금되지 않도록 해줄 테니까.’
   아침에 일어나 보니 거울 앞에 의자가 한 개씩 놓여 있었다. 꼭 누군가가 와서 앉을 것만 같았다. 얼른 거울 앞으로 달려가 의자를 계속해서 어둠 속으로 집어던졌다. 누가 의자를 갖다놓았을까. 의자가 거울 앞에 놓여 있다. 나는 알고 있다. 저것을 치울 수는 없다. 치우려고 생각하는 이상 의자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단념한다. 내가 먼저 저곳에 앉으면 그만이다.
   다음에 갇혀 있게 될 또 다른 공간을 구상했다. 초원 한가운데에 굳게 닫힌 거대한 철문이 있고, 철문 틈으로 하얀색 건물이 보인다. 입김이 새어나오는 추위 속에서 나는 계속 거대한 철문을 흔들어댄다. 그리고 마침내 한 사내가 나타나고, 나는 그를 따라 하얀색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건물 안은 모두 똑같은 하나의 방들뿐이다. 벽과 가구, 바닥 등이 모두 흰색으로 되어 있다. 가구라고는 스프링 침대 하나뿐이다. 공간은 매우 협소하다. 나는 그곳에서 오로지 책만 읽고 글을 쓰게 된다. 하지만 자신은 이러한 행동을 의식하지 못한다. 백치 상태에 빠져 있다. 직원에게 끊임없이 책을 요구하고 연필과 종이를 요구한다. 그리고 글이 채워질 때마다 그 종이를 벽에 붙인다. 종이에는 글자가 쓰여 있지 않다. 녹색 옷을 입은 그는 아니, 직원은 나에게 연필을 주지 않았고, 나는 직원에게 연필을 받았다. 벽에 붙인 종이에 글자가 보이는 한 나는 그곳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지금처럼 나라는 존재는 이 방에 없는 것이다.
   종이에 글자를 적어 거울에 붙였다. 우리는 아직 종이에 적혀 있는 글자를 읽어낼 수 있다. 바닥에 앉아 몇 개의 거울을 바라보았다. 거울에는 마찬가지로 군데군데 글자가 적힌 종이가 붙어 있다. 내 질병을 끊임없이 생각하고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두렵다. 우리가 갇혀 있게 될까봐 두렵다. 이곳을 벗어나면 안 된다.  
   나는 마네킹을 다시 만들어내지 못했다.
   약이 다 떨어졌다. 아무리 약을 만들어내려고 해도 약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이 안에는 지금 약이 없다. 초조하다. 내가 어떤 증상, 발작을 일으키게 될지 두렵다. 약을 만들어야 하는데 의식이 그것을 방해한다. 내가 더 아름다워지기를 원하는 것인가. 약을 구해오기 위해서 이곳을 나갈 수는 없다. 너는 지금 내 왼쪽 팔을 송곳으로 찌르고 있어. 뼈까지 닿은 것 같아. 조금 더 송곳에 힘을 줘. 팔 전체가 마비될 때까지 송곳을 비틀란 말이야.

   일주일 후에 돌아온 아버지는 잠자리에서 내게 귓속말을 했다.
   “아빠가 어디를 갔다 왔는지 아니. 그곳은 초원이었지. 굉장히 추웠단다. 입김이 났으니까. 아빠는 초원을 걸었단다. 한참을 걷다보니 저 앞쪽에 거대한 철문이 보이는 거야. 아빠는 그곳으로 들어가고 싶었단다. 그래서 막 달렸지. 그런데 거대한 철문은 자물쇠로 굳게 닫혀 있더구나. 너무 높아서 감히 올라갈 생각도 하지 못하고 그저 철문 틈으로 보이는 하얀색 건물만 바라보았단다. 소리도 지르지 않고 철문만 마구 흔들어댔지. 아빠는 그 집에서 누군가가 나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단다. 그 집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볼 참이었지. 그러다가 깨달았단다. 어쩌면 이 철문을 열 수 있는 열쇠가 내게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이야. 그래서 주머니를 뒤져보았단다. 정말 있더구나. 커다란 열쇠 하나가 주머니에 들어 있었어. 그래서 아빠는 그 열쇠로 철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단다. 그리고 하얀색 건물 앞에서도 똑같은 열쇠로 현관문을 열 수 있었단다. 아빠는 마치 그 집의 직원처럼 열쇠 하나로 모든 문을 열 수 있었지. 그리고 아빠는 그 집에서 집수리를 하며 며칠을 보냈단다. 언젠가 아빠는 다시 그곳으로 돌아가야 한단다.”

   이제는 거울도 사라졌다. 그 자리에는 직원의 환영이 앉아 있다. 그것들이 나에게 이야기를 하려고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것들을 이길 수 있다. 나는 그들과의 대화를 참아내고 있다. 그들이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없다.


   3.
   오랜만에 친구가 찾아왔다. 그는 독방 안으로 들어왔고, 우리는 같이 대화를 나누었다. 나는 그에게 지금 내가 독방에 갇혀있다고 말해주었다. 끝이 없는 암흑과 그 속에 앉아 있는 환영들이 내게 이야기한다고 말해주었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저들의 말을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기 때문에 나는 아무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바닥에 널려 있는 수많은 책들 중에서 한 권을 집어 친구에게 보여주었다. 나는 요즘 하루종일 책을 읽으며 지내고 있다고 말해주었다. 손가락을 약 있는 곳으로 뻗으며 말했다.
   “며칠 전에 새로 지은 약인데 효과가 아주 좋아. 나는 전혀 지루하지 않단다. 매일 흥분하고 매일 좌절하지. 저 약을 먹으면 나는 매일 변신한단다.”
   친구는 흥분한 채 떠들어대고 있는 내게 말했다.
   “네 방은 고작 여섯 평 정도밖에 안 돼. 이 비좁은 곳에서 도대체 하루종일 무엇을 하고 지내는 거지. 가끔 내게 오라구. 외출을 해봐!”
   “너는 저 끝없는 어둠이 안 보이니. 저 환영들이 네 눈에는 안 보인단 말이냐. 나는 이곳에서 할 일이 많단 말이야. 저 수많은 책들을 봐. 나는 저것들을 다 읽어야 해. 저 오른쪽에 있는 환영이 또 뭐라고 중얼거리는구나. 너도 들어봐. 도대체 저 자가 무슨 소리를 하고 있는 거니?”
   눈을 부릅뜬 상태로 친구는 일어섰다.
   “미친 놈. 제발 정신 좀 차려!”
   “나가는 길은 알고 있니. 저 어둠 끝에 나가는 문이 있을지도 몰라. 나는 아직 찾지 못했지만, 아마 너는 찾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친구는 어느새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어제는 악몽을 꾸었다. 환영이 나를 붙들고 놓지를 않았다. 나는 내 몸에 붙어있는 환영을 뿌리치려고 몸부림쳤고, 환영이 떨어져나간 후에 나는 그것에게 불쑥 손으로 십자가를 만들어 들이밀었다. 현실인 줄 착각했다. 지금 생각해보니 나는 환영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몸부림치는 행동의 방향을 그가 모두 알고 있었다. 내 힘의 방향을 읽고 그도 똑같이 움직였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나는 환영에게서 빠져 나올 수 없었다. 그리고 습관처럼 어느 순간 눈을 떴고, 그때에 환영도 내게서 떨어져나갔다. 나는 그제야 환영에게 십자가를 들이민 것이었다. 내가 저 환영들을 칼로 찌른다면 어떻게 될까. 저들이 피를 흘린다면 그 고통이 나에게도 전이될까. 저들의 목을 조른다면. 나는 일어섰다. 환영 앞으로 다가가 그것의 목을 조르려했다. 하지만 내 손은 그의 목 근처에서 멈춰버렸다. 그의 가는 목을 움켜쥐려고 해도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리고 내 목에 차가운 감촉이 전해졌다. 환영이 내 목을 조르고 있었다. 환영의 얼굴이 벌게지고 눈동자에 핏발이 섰다. 어둠 속의 환영들이 일제히 신음 소리를 내고 있었다. 괴로운 것은 나 자신이다. 다시 자리로 돌아가 살인의 계획을 짜야 한다. 한 번에 저 수많은 환영들을 죽일 수 있다. 하지만 나는 살아남아야 한다.
   새벽, 악몽에서 벗어나기 위해 안간힘을 써야 했고, 그럼에도 악몽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역시 습관처럼 눈을 떴다. 하지만 공포는 잠을 깬 지금부터 시작되었다. 꿈에서의 공간은 무시무시했다. 수많은 사람들이 수용소와 같은 비좁고 삭막한 공간에 득시글거렸고, 모두 등 뒤에 형체가 불분명한 인간이 자신을 붙들고 있었다. 몸부림치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었다. 나는 등에 매달려 있는 그를 너무나 두려워하고 있다.


   사람들은 고조의 손에 들려진 책을 뺏은 후, 그에게 삿대질을 하며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는 여전히 멋을 부리고 있어.”
   고조는 오직 사람들이 빼앗은 책만 돌려받고 싶을 뿐이다. 바이올린 소리가 빠르고 높게 들려온다. 책에는 온통 혼란스러운 보라색뿐이다. 고조가 책을 읽는 이유는 그저 추위를 잊기 위해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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