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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uewind 인형을 만드는 남자

2004.05.28 22:4305.28

  어스름이 내리고 사물의 색깔이 모두 짙은 푸른 색 속에 침잠(沈潛)되기 시작하면 나는 일을 나간다. 그렇다. 일이다.
  내가 하는 일이란 인형을 만들어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배달해 주는 일이다. 내 인형 제작은 재료를 찾는 일부터 시작한다. 재료는 길거리에 여기저기 널려 있다. 암시야를 제공하는 검은 안경 안에 멍한 빛의 내 눈을 감추고 거리를, 재료를 찾아 훑는다.
  오늘도 하나……. 멍하게 움직이는 내 손은 텅 비어 버린 마음과 달리 솜씨 하나만은 좋다고 인정받고 있다. 머리를 쓸 필요는 없다. 손만 잘 움직이면. 이런 일들은 이제 일상을 넘어서 내게는 하나의 습관이고 타성이다. 아침이면 잠들고, 해가 질 무렵이면 일어나서 인형을 만드는 일을 반복한다. 그리고 살아간다.
  살아가는 것에 얼마나 고상한 의미가 부여되는지 나는 모른다. 나는 단지, 먹고 싸기 위해 존재하고 그 존재를 이어가기 위해 칼과 바늘과 실, 가위 따위를 휘두르는 것이다. 그 외에 다른 것이 있었는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다 잊어버렸다. 그렇다. 기억 속에 묻혀 버렸다.
  내가 어릴 적의 그 인형들처럼 말이다.

  내가 어릴 적에 우리 막내 이모-어머니의 사 남매 중에서 막내였던 그녀는 인형 공장에 다녔었다고 한다. 그녀는 해마다 내 생일이면 인형을 한아름 보내오고는 했었다. 그래서 한번도 인형을 산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조그만 집은 그 인형들로 가득했다.
  그들이 전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었는지 지금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건드리면 바스락  거리는 소리로 울던 푸른 폴리염화비닐, 혹은 그 비슷한 종류로 만들어진 강아지가 있었고, 말랑말랑한 등껍질을 가지고 다리도 머리도 숨기지 못하는 바보같은 거북이도 있었다. 잠자리에서 눈을 뜨면 내 옆을 지키고 앉아 항상 나를 놀라게 만들던 극히 사실적인 셰퍼드 종(種)의 커다란 개도 있었고, 방구석에서 귀신과 도깨비들이 울부짖는 밤이면 나를 지켜줄 거라고 믿으며 이불 속으로 꼭 끌어안고 들어가던 붉은 용도 있었다.

  “이 인형들은 아마 가족인가 봐.”

  방바닥에 어지럽혀진 인형 더미들 속에서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팬더 인형을 하나 집어 들었다. 까맣고 하얀 털을 가진 그 인형은 아직 어렸던 우리들의 팔로 안으면 가슴에 한가득 안겨오는, 그런 크기의 인형이었다. 그리고 그것과 똑같이 생긴 인형이 두 개 더, 다른 점이 있다면 먼저의 인형보다 작은 크기였다.

  “형제? 아니면 부자?”

  “아마도 부자.”

  “그런걸 어떻게 아는 거야?”

  내가 물어보기라도 할 지라면, 그녀는 웃으면서 대답한다. “이야기를 듣는 거야.”
  그랬다. 내가 바라보면 입을 다물고 꿈쩍도 하지 않는 그 인형들은, 웬일인지 그녀에게만은 마음을 여는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수 없어도 좋았다. 그녀가 내게 인형을 대신 해서 들려주었으니까.

  “인형들은 머나먼 나라에서 이리로 여행을 온데. 사람들, 자신들의 주인이고 친구인 그들과 만나기 위해서 말이지. 언제 떠나는지는 몰라. 사람들에게서 잊혀지면. 응. 자신에게 관심을 가져 주지 않으면 사라지는 거야. 자신이 주인에게, 친구에게 더 이상 의미가 될 수 없으면. 처음에는 잘 느끼지 못하겠지. 하지만 왠지 인형을 보는 날이 적어지고, 인형과 노는 날이 적어지고, 그러다 보면 며칠씩 인형이 있다는 사실도 잊어버리고 자기 일에 몰두하는 거야. 그러다가 가끔 알 수 없는 불안감에 휩싸여서 인형을 찾아보지. 그건 인형들이 외치는 거야. ‘나를 봐줘, 나를 봐줘. 돌아 가버리기 전에, 사라지기 전에 나를 봐줘’라고 말이야. 하지만 점점 그런 소리도 잘 안 들리는 날이 올거야. 어느 날인가, 너는 인형들에 대해서는 완전히 잊어버리고, 그러면 그들은 자신의 나라로 돌아가는 거야. 아니면 다른 주인을 찾으러 가던지. 누구에게도 의미가 되지 않으면…
  그러고 나면 없어. 네가 가끔, 아주 우연으로 옛날에 네가 가지고 있던 인형을 찾아보려고 해도 이미 어디론가 온데 간데 없이 사라지는 거지. 그리고…”

  “나도 네게 있어서 잊혀진 하나의 의미가 되고 말겠지.”

  그 말을 할 때쯤 그녀는 전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좀 더 돈이 잘 벌리는 머나먼 도시로 간다고 했다. 어느 도시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먼, 아주 먼, 인형들의 나라만큼 머나먼 도시였던 것 같다.

  “잊지 않아.”

  “잊어버릴 거야.”

  “그렇다면, 네게 하나 선물을 할게. 무엇이든, 내가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하나 가져가. 그럼 나는 그것의 빈자리를 볼 때마다 너를 기억할 테니까.”

  “그렇다면…”

  그녀는 언젠가, 부자父子-라고 말했던 세 개의 팬더 인형 중에 하나를 집어 들었다. 아이와 아버지. 이미 다 자란 아버지는 자신의 어버이의 품을 떠나서, 이제는 자기 자신의 분신이자 자신의 아버지의 분신이기도 한 아이를 품속에 곱게 껴안고 있다.

  “내가 보고 싶으면, 가끔 그 인형보고 안부나 전해 줘. 그러면 그 할아버지 팬더 인형은 자신의 아이들에게 네 이야기를 전해 줄 테고, 나는 그들을 통해서 네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지. 그리고 가끔은, 내 소식이 궁금하면 인형들이 하는 말을 귀 기울여서 들어봐.”

  “꼭 그럴게.”

  “자, 그럼 이제 안녕.”

  그녀는 그 인형을 품에 안고 떠났다. 그렇게 친하던 내 인형들과, 그리고 내게 작별을 하고.

  시간은 흐른다. 내가 눈을 감고 잠들어 있는 사이에도 내 심장은 1분에 칠십 번, 하루에 십만 팔백 몇 번, 하면서 흘러간 시간을 새고 있다. 눈만 깜빡여도 시간은 흘러가고 거울 속에 내 모습은 하루가 다르게 늙어간다. 나는 어느새 자라서 어른이 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변했다.
  나와 그녀와 인형들의 보금자리였던 우리 집은 10년도 더 전에 재개발 구역으로 책정되어 모두 부서져 버렸다. 더 이상 인형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람이 없었기에 나는 인형들도 우리 집에 대해서도 빠르게 잊어버렸다. 그렇게 내 인형들은 다른 주인을 찾아갔다. 아니면 자신들의 나라로 돌아갔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어제의 일이다.

  어스름이 내리고 사물의 색깔이 모두 짙은 푸른 색 속에 침잠되기 시작하면 나는 사냥을 나간다. 그렇다. 사냥이다. 내가 하는 일은 인형을 만들어 배달하는 일이다. 술에 취해서 밤  거리를 흐느적거리며 돌아다니는 사람들로부터 장기와 의체(義體)의 부품을 빼앗아서 인형을 만드는 일이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손에 든 칼을 휘둘러서 정확하고 빠르게,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일이다. 시체, 영혼이 없는 인형, 이제는 아무런 의미도 지니지 않는 그 사체에서 장기를 빼앗아 모으는 일이다. 인형을 원주인으로부터 죽여서 훔치고 다른 주인에게 맡겨 버리는 일이다.

  그 날도 그렇게 재료를 찾으러 나간 길이었다. 시내의 메디컬 센터로 황급히 달려가는 사람을 붙잡았다. 왜 그랬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나는 그를 인형으로 만들었다. 흥건한 피와 함께 그의 품안에 꼭 안겨 있던 짐들이 굴러 떨어진다. 그 속에서 나는 오래 전에 나를 떠났다가, 이렇게 다시 돌아온 인형을 본다. 까맣고 하얀 털을 가진, 이제 다 자란 내 품에는 너무 작아진 팬더 인형이다. 그의 품안에는 아직도 자라지 않은 작은 아기 팬더가 안겨 있다. 그리고 그는 나를 만난 이후 처음으로 내게 말을 걸었다.

  ‘자, 그럼 이제 안녕.’

  그리고 내 마지막 인형은 나를 떠난다. ‘아무런 의미가 없던 것이 의미를 가지면서 태어나고, 의미를 잃어버리면 죽어버린다.’ 그녀는 그렇게 말했었다. 인형의 생일은 태어난 날이 아니라 그가 자신의 주인의 손에 들어와서 이름을 부여받는 날이다.

  오늘 아침에 찾아간 병원, 어느 병실에서 나는 아주 낯익고 익숙한 이름을 보았다. 아주 익숙한 얼굴을 보았다. 기억의 구석에서 먼지를 털고 일어난 조각들이 맞추어졌다.
  나는 왜 살아가는지 잊어버렸다. 살아가는 이유란 하나쯤 있어도 좋은 것이다. 나도 누군가에게 의미가 되고 싶다. 내가 만드는 인형들에게는 그 존재의의라는 것이 하나쯤은 있는 것이다. 아무 생각도 없이 살아가는 인간보다, 누군가에게 하나의 의미라도 되는 인형이 되고 싶다.
  이제 조금 있으면 나는 마지막으로 인형을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살아가는 의미를 하나쯤 받는 것이다. 그녀의 심장이 뛰는 소리가 되고, 그녀의 눈으로 세상을 보여주고… 어릴 적에 그녀는 내게 항상 인형들이 하는 이야기를 대신 들려주었었다. 그러니 이제 내가 그녀에게 세상이 돌아가는 모습을 보여주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구석에서 조용히, 시간이 흘러가는 소리를 세고 있어도 좋을 것이다. 그리고 언젠가는, 그녀와 함께, 그녀가 말했던 영원의 시간이 있는 인형의 나라로 돌아가도 좋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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