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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xk160 밤 너머에 2/2

2004.08.28 01:0208.28

  머리도 깨끗하게 감고 면도도 마친 셴이 회의장에 나오자 위원들이 반겨주었다. 셴은 정신이 들고나자 마흔 살의 몸 여기저기가 삐걱거리는 걸 느꼈다. 허리가 아픈 걸 참고 자리에 앉자마자 위원장이 회의를 시작했다.
  얼마 있지 않아 샤뮌에 대한 건도 나왔다. 시빌르가 둔기에 의한 상처가 뇌출혈의 원인이 되었음을 증명하는 자료를 보내오면서 사건을 의뢰한 것이다. 셴이 입을 열어 파시파르의 이름을 언급했다. 파시파르의 뺨 근육이 희미하게 떨렸다.
  “무슨 근거로?”
  “자네가 샤뮌과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알고있네.”
  “그건 사고였어.”
  위원들이 고개를 들어 바라보았다. 파시파르는 지금 불리한 말을 했다.
  “사고긴 했지만 실제로 있었던 일이란 말이지? 그래, 정황을 들려주게. 사고인지 아닌지 판단하는 건 위원들이네.”
  “나도 위원이야.”
  “폭행범은 더 이상 위원이 아니야.”
  “사고였다고 하지 않나.”
  “갑자기 몸이 풀려서 자네 손이 망치를 집어들더니 그의 머리를 내리쳤나? 그 정도면 거의 몽유병이군.”
  “그런 걸 집어든 적 없네.”
  “꼭 망치일 건 없겠지. 샤뮌의 머리에 둔기로 맞은 상처가 있었네. 이 상처가 그의 죽음의 원인이네. 그리고 나는 그가 죽기 사흘 전에 샤뮌과 자네가 대화하는 걸 들었지. 내 눈앞에서 그 친구가 무릎을 꿇고 쓰러지는 것도 봤어. 자네가 그 친구를...”
  “사고였단 말이야. 자네 말대로 몽유병에 가까워. 내가 한 짓이 잘 기억나지도 않네!”
  “자네가 한 짓에 대해서는 공판장에서 말하게. 어떤 짓을 하긴 했다는 걸 말해줘서 고맙네.” 셴이 말을 끊고 의자 등받이에 깊게 기대어 앉았다.
  물리적인 폭행은 아세빈에서 가장 금기시되는 것 중 하나다. 수상의 허락 없이 외부와 소통하는 것, 물리적인 폭행, 사치, 종교의 신봉, 이 넷 중에서 실질적으로 꺼림칙하게 여겨지는 것이 물리적인 폭행인데, 신체 중에서도 머리를 상하는 것은 두말할 것도 없고, 죽음에 이르도록 건드렸다 하면 어떤 벌을 받아야 할지 난감할 지경이다. 십오 년 이상의 금고형이 폭행을 당한 피해자가 고소하기만 하면 선고된다.
  파시파르는 당일까지 치안대의 감시 하에 자기 집에 구금되었다. 공판은 일주일 후에 열린다. 치안대는 파시파르의 진술을 받아냈다. 공판 당일, 파시파르의 사건 전에 가벼운 사건 하나가 진행되고 있었다. 셴은 숨이 멈추는 것 같았다. 나쿠드 사당을 짓게 해 달라는 건의 때문에 언쟁을 했던 게 옛날 일 같다.
  머리가 벗겨져가는 거주민 하나가 악을 쓰고 있었다- 물론 공판장에서 악을 쓰는 건 금지되어 있다.
  “우리 머릿속을 지배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나쿠드 사당을 세워달란 건 기각되었어도 나쿠드를 믿는 건 내 자윱니다!”
  “그런 식으로 시작하면 끝이 없습니다. 머릿속을 지배할 수는 없겠지만 행동을 기준에 맞게 조율해달라고 강제할 권리는 아세빈에 있습니다. 그 기준은 당신이 태어나면서부터 동의한 기준입니다. 싫다면 추방형을 받아야겠지요.”
  “나쿠드를 믿는 건 내 일이지, 당신들의 일이 아닙니다.”
  “실제로 당신의 머릿속이나 가슴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면 그럴 겁니다. 그러나 당신이 여기 온 이유는 티무르아 야사신이 당신을 절도 혐의로 고소했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그의 소유물을...”
  “파괴했습니다. 그러나 그의 소유물이기 때문에 파괴한 것은 아닙니다.”
  “압니다. 당신은 그게 카잔키키르의 두상이기 때문이 파괴했습니다. 그게 당신의 머릿속 일입니까? 그건 그의 소유물이고, 티무르아는 학문적인 의도로 그것을 수집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티무르아 역시 종교적인 뜻에서 그 두상을 집에 두고 있었다고 해도 당신에게는 권리가 없습니다.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려 든다면, 바로 그 정당화의 가능성 때문에 아세빈이 종교를 받아들이지 않는 겁니다. 그건 티무르아의 소유물이고, 티무르아 자신이 그걸 무슨 의도로 간직하고 있건, 당신의 눈이 그걸 무슨 의미로 바라보아야 하건, 당신은 그것에 대해 권리가 없습니다.”
  “나는 그것을 특정한 의미로 받아들여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최악의 신도로군, 하고 셴은 생각했다.
  “법정의 의무나 소유자의 권리와 마찬가지로 내게 의무가 지워져있다는 생각은 하실 수 없습니까? 이 아세빈이 그 의무를 받아들일 수 있을 정도로 관용적이지 못할 뿐입니다.”
  “맞습니다. 그게 우리의 한계입니다. 무한한 자유를 원하십니까?”
  추방형을 원하느냐는 뜻이다. 그는 입을 다물었다. 원로가 말을 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나쿠드의 의무 속에 당신이 무한한 자유를 누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 두상은 티무르아의 소유물인 것에서 나쿠드의 적으로 옮겨간 것 뿐 아닙니까. 당신은 나쿠드의 세계로 가야 할 것입니다. 여전히 누군가의 세계로 가야 할 것입니다. 그곳이 다만 아세빈이 아닐 뿐입니다. 아세빈의 윤리와 나쿠드의 명령 사이에서 고심하고 계십니까? 어떤 것이 더 높다고 생각하십니까? 우리는 어느 쪽이 더 고상하건 간에 둘이 본질적으로는 같다고 판단합니다. 한계라는 점에서 말입니다. 사람을 어떤 자로 만들고 그같은 자를 요구하는 점에서 말입니다. 추방형을 기쁘게 내려줄 수 있다면 우리로서도 망설일 것 없습니다. 선택하십시오.”
  “추방형을 선택합니다.” 그가 중얼거렸다. “기쁘게 내려주십시오. 나도 기쁘게 떠나겠습니다.”
  “그러하십시다.” 원로장이 웃어 보였다. 조금 슬퍼 보이기도 했다. “추방형을 선포합니다. 사흘 안으로 치안대의 안내에 따라 떠나주십시오. 자택에서 기다리고 계시면 지시가 내려갈 겁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내 형제였던 자여.”
  원로장이 나무판을 울려 종결을 표했다. 셴은 원로들이 장난스럽게 흔히 쓰는 단어들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순간엔 마음이 찌릿했다. 선고받은 자도 낯색이 붉어져서 감사를 표하고 물러갔다.
  파시파르의 폭행 건에 대한 공판이 이어졌다. 치안대는 파시파르의 진술을 받아두고 있었다. 파시파르는 깨끗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잠을 잘 자지 못했는지 눈은 붉었다. 원로가 서류를 한번 더 간단히 훑어보고 입을 열었다.
  “치안대가 당신의 집을 뒤졌군요. 그들은 금지된 약물을 찾아냈다고 되어 있습니다.”
  “맞습니다.” 파시파르가 투덜거리듯이 말했다.
  “약물 복용 상태에서 당신은 충동적으로 램프를 집어들고 남의 머리를 때렸습니다. 샤뮌 페라틴은 그 상처가 원인이 되어 뇌출혈로 사망했군요.”
  “그러나 그가 사망한 건 상처를 입은 지 약 보름 후의 일입니다.”
  “뇌졸중은 처음엔 드러나지 않다가 가벼운 두통으로 시작되기도 합니다. 몇 번의 통증 끝에 통증이 점점 더 심해지다가 결국엔 정신을 잃고 사망할 수 있습니다. 페라틴도 이러한 경우였습니다. 시빌르 비렌발트가 자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만, 문제는...”
  원로장이 다른 원로에게서 철이 된 문서를 넘겨받았다. “세젠 병원, 쥘 병원의 의료 기록입니다만, 샤뮌은 병원에 한번도 들른 적이 없다는 겁니다. 통증은 최소한 한번 이상 지속되었을 텐데도 말입니다. 본인의 책임도 약간은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파시파르의 경우,” 하고 원로가 손만 약간 들어서 그를 가리켰다.
  “저 약물의 효능은 아주 뛰어납니다. 아편 따위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뛰어납니다. 남쪽에서 밀수해 온 것으로 추측되는데, 아마 파시파르는 위원들 중 어떤 사람들과 특히 친분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건에 대해서는 추후에 따로 조사가 필요하겠지요.” 하고 원로가 셴 쪽을 돌아본 듯한 기분도 들었기 때문에, 셴은 극히 불쾌해졌다. “하여간 파시파르는 몇 달 째 복용해 온 것으로 보이고, 이는 혈액 검사나 주사 자국 검사에서 드러난 사실입니다. 세젠 병원 의사들이 자료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약물의 효과로는 환각 상태와 신체적 상실 상태가 두드러집니다. 이런 상태에서 범행을 저지른 것이 과연 의도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실제로 파시파르는 이 일에 대해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진술하고 있습니다.”
  “거짓말이야.” 셴이 중얼거렸다. “벌을 받지 않으려고, 얄팍한 거짓말이지.”
  시빌르가 바로 옆에 앉아 있다가 미묘한 표정으로 맞장구를 쳤다. 그러나 의사들은 그런 기억 상실도 당연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당시 파시파르는 그 자신이 아니었고, 지금의 파시파르를 벌한다고 해서 그 때의 파시파르를 벌하는 게 될 수는 없으며, 나쁜 것은 약물이고 파시파르는 약물을 끊으려 노력해야 할 것이나 살인에는 책임이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굳어져갔다. 셴은 부글부글 끓는 속을 억눌렀다.
  원로들이 십분 간의 휴정을 선포하고 물러갔다. 셴은 숨을 간간이 몰아쉬며 공판장을 둘러보았다. 많은 사람들이 이 건에 관심이 있었고, 아세빈 거주민들 중 반은 몰려와서 앉아있는 것 같았다. 기본적으로 거주민 모두가 들어앉을 수 있는 좌석이 있어야 했지만 사실 지금은 입석도 남은 게 없다. 개중에 셴은 게덴의 얼굴을 알아보았다.
  자신이 화가 나 있어서 그런지, 게덴의 얼굴은 차가워 보였다. 지나치게 차가워 보여서 그게 더 셴의 화를 돋우었다. 게덴은 램지와 아뉴르와 함께 앉아있었고, 램지는 바퀴 의자를 끌고 왔고, 거기에는 베일을 쓴 사람이 앉아있었다.
  우스우리 만치 챙이 넓은 모자 - 아세빈에는 모자 자체도 흔치 않은데 - 아래에 검은 베일을 늘어뜨린 어둠침침한 사람은, 전에도 몇 번 저 셋과 산책을 하다가 눈에 띈 적이 있고, 램지들은 즐겁게 서로 뭐라 지껄이면서 웃어대고 있었다. 그 풍경만 보면 실수로 다리라도 부러뜨린 친구의 바퀴 의자를 밀어주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할 말이 없었다. 그러나 그 친구의 얼굴에 쓴 베일은 아무래도 이해해주기가 힘들었다. 램지가 엄숙한 얼굴로 이 사람은 얼굴에도 흉이 졌기 때문에 보여주기 싫은 거라고 말했지만 아세빈이 언제부터 외모를 따졌단 말인가?
  위원들은 램지와 게덴이 시신을 소유하고 싶다면서 건의를 냈던 걸 물론 아직도 기억하고 있었고, 아뉴르도 그들에게 물들었다고 해도 이상할 건 없어 보였으므로, 저들이 가지고 다니는 게 시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퍼졌다. 하기사 그 베일을 쓴 사람은 잘 보면 몸을 전혀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아뉴르가 깔깔대고, 게덴이 몸을 숙여 웃고, 램지가 억센 얼굴에 험한 빛을 떠올리며 투덜거려도 그 사람은 고개만 간혹 기울일 뿐 말도 없고 동작도 없었다. 사람들 사이에 비슷한 의심이 퍼지지 않은 건 다행스런 일이다. 위원들은 건의안에 대해서는 함구하도록 되어 있고, 다른 평범한 거주민들은 그런 의심을 하기에는 지극히 제정신이었다.
  셴은 턱에 주먹을 갖다 댄 채 잠시 같은 의심에 빠졌다. 시신을 공판장에까지 데려와서 뭔가를 보여주려고 하는 거라면 저 셋은 물론 잘못 짚었다. 하지만 셴도 진지하게 의심하고 있는 건 아니었고, 다만 공상해보고 있는 것뿐이었다. 화를 식히려면 엉뚱한 공상도 필요하다.
  원로들이 돌아왔다. 나무판이 경쾌하게, 주파수가 높은 듯한 울림을 울렸고, 공판이 재개되었다. 원로들은 샤뮌이 하필 그럴 때 파시파르를 찾아갔다는 사실에 대해 의구심을 표명했고, 의외로 파시파르가 선선히 대답했다. 파시파르는 알다시피 위원직을 유지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시달리고 있었고 우연히 다른 친구의 집에 들렀다가 약물의 원액을 발견했다. 파시파르는 주사 식으로 만들어서 사용했다. 샤뮌이 우연한 계기로 그걸 알아채고 파시파르를 치료해주려 했다고 한다. 그러나 샤뮌은 또한 약을 압수하려 했고, 아마 그것 때문에 화가 나서 자신이 샤뮌과 물리적인 다툼을 벌였던 것 같다, 하고 파시파르가 진술하면서 이마를 찡그렸다. 원로들은 그 진술을 받아들였다. 치안대의 조사 결과와도 일치했다. 치안대는 파시파르의 집에서는 주사식 마약을, 샤뮌의 집에서는 여러 가지 실험의 내용이 기록된 서류와 마약의 중독 증상을 해소하는 데에 큰 효과를 발휘하는 처방전을 발견했다.
  다시 십오분의 휴정 뒤에 원로들이 들어왔다. 위원들은, 법안을 가결하는 일에 있어서는 최종 결정을 원로들에게 넘겨야 하고, 자신들은 의견만 피력할 수 있다. 재판의 판정에 있어서는 조사 과정까지만 위원들의 몫이다. 판정은 그저 기다릴 수밖에 없다. 원로들이 파시파르에게 폭행 혐의로 삼 년의 금고형, 그러나 그 전에 약물 일년간 치료 시설에 입원할 것을 명했다. 셴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원로가 앉으라는 신호를 보냈다.
  “금고형이란 말입니까...”
  “앉아 주십시오, 셴 베헬렘.”
  “자기 후계자의 뺨을 때린 사람도 육 년의 금고형을 받았습니다. 친구에게 주먹질해서 흉터를 남긴 사람은 추방형을 받았습니다. 사람을 때려 죽였는데 삼 년의 금고형이란 말입니까...”
  “뇌출혈은 세게 얻어맞은 탓도 있지만 운도 있습니다. 무엇보다 파시파르는 약에 취해 있었습니다. 그 자신이 아니었던 겁니다. 알고 계시다시피 저지른 일에 대해 벌을 내리려면 당시 일을 저지른 장본인이 신체 상실 상태가 아니었어야 하고, 이 후에도 기억이 남아있을 정도는 되어야 합니다.”
  “저 사람입니다.” 셴이 파시파르를 손가락질했다. “저 팔로, 저 손으로 때린 것이 확실합니다. 바로 저 사람의 팔입니다. 그런데 어째서...”
  “앉아 주십시오, 셴.” 원로가 달래듯이 말했다. 그 목소리에 섞여있는 충분한 공감 때문에 셴은 눈물이 날 것 같았고, 실제로 울었다. 시빌르가 머뭇거리다가 어깨를 꽉 잡고 달래주었다. 얼굴을 들어보자, 흐릿한 시야 너머로 사람들이 공판장 밖으로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사람들은 두런거리고 있었고 샤뮌의 죽음을 안타까운 사고로 덮어두는 데에 별로 동의하지 않는 듯 했다. 램지와 아뉴르와 게덴도 예의 그 베일을 쓴 사람과 함께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베일을 쓴 사람의 목덜미가, 아주 잠깐 드러나 보였는데, 희고 창백하고 연약한 목이었다. 그 순간 눈물이 떨구어지면서 시야가 맑아졌다.
  “괜찮나?” 시빌르가 말을 걸었다. 셴은 끄덕거리면서 볼을 닦아냈다.
  “항소할 거네.”
  “물론이야.”
  “세 번까지는 가능하지. 꼭 다시 돌아올 거야. 추방형으로 만들 거야.”
  “나도 돕겠네.” 시빌르가 낮은 소리로 동조했다.
  공판장에서 나오자마자 셴은 위원들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거주민들을 설득하는 데에도 힘을 많이 썼다. 사실 그렇게까지 힘을 쓸 것은 없었다. 거주민들은 거의 다 샤뮌의 이름을 알고 있었고, 그를 존경했으며, 폭행죄에 분노하는 선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었다. 위원들 전체가 결국 서명을 냈고 거주민들의 반수도 서면으로 원로원에 항의의 뜻을 내비쳤다.
  시빌르도 의사들을 설득한 것 같았다. 의사들은 시빌르가 당시 기억이 희미할 정도로 신체 상실 상태에 처해 있었다는 점을 번복했다. 애초에 가능성만을 표명했던 것이지, 꼭 그랬으리라는 법은 없다는 것이다. 첫 번째 항소는 이런 상황에서 이어졌다. 원로원은 아세빈의 법 역시 어디까지나 아세빈 거주민들의 뜻에 의해 존재한다는 점을 내키지 않은 듯이 공언한 후, 파시파르에게 십 년의 금고형을 선고했다.
  이쯤 해서 이 사건은 유행에 가깝게 되어 있었다. 이 두 번째 공판에는 공판장 바깥에서 기다리는 사람이 있을 지경이었고, 공판장의 분위기는 숨이 막혔다. 곧 윤리학자들과 심리학자들이 나서서 기억의 여부와 하나의 주체로서의 동질성 사이에는 크게 관련이 없음을 주창했다. 그 동안의 논문들을 원로원이 살피지 않은 모양이다, 원로들은 최근의 지식에 크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 모양이라고 점잖게 언급하는 사람도 있었다. 두 번째 항소 때 공판장 한 구석에는 수상마저 와 있었고, 위원들 전체가 원로원의 반대편에 앉아서 원로들에 비하면 아직 젊은 눈들을 부릅뜨고 있었으며, 원로원은 여전히 늙고 인자한 얼굴에 파랗게 맑은 눈으로 피고를 굽어보고 있었으나 그 자비로움은 전처럼 아름다운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세 시간동안의 공판과 마지막 삼십분간의 휴정이 이어졌다. 파시파르가 지긋지긋한지 휴정 직전에 <추방시켜요, 추방시켜 달라구> 하고 빌었다. 파시파르도 슬슬 자기 죄의식에 홀려 넘어간 듯 보였다. 법정 진술 때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던 것이다.
  “그 친구를 다시 살릴 수만 있다면,” 그는 엄숙하게 말했다. “내가 죽어도 좋겠습니다... 미안합니다.”
  파시파르는 진심으로 고통스러운 - 고통스러워서 성자가 되어 가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것이야말로 이제 사람들이 기대하던 죄인의 얼굴이었다. 사람들의 눈도 조금쯤 예전의 원로들의 눈처럼 변해서, 죄인에게 연민을 허락할까 하던 순간, 원로들이 돌아와서 추방형을 선포했다.
  “파시파르 데랄에게 추방형을 선포합니다. 단 일년의 약물 치료 기간을 거친 후 형이 집행될 것입니다. 이후에 치안대에게 내려가는 지시에 따라서...”
  원로장이 끝까지 말을 잇는 동안 사람들은 침묵하고 있었지만, 말없는 환호가 뒤따랐다.
  셴은 두 손을 모아 쥐었다. 요즘 제대로 잠을 자지 못했다. 시빌르가 이 친구의 휘청거리는 몸을 받쳐들었다.
  열에 들뜬 몸으로 돌아오면서 셴이 중얼거렸다. “일년 후라고... 틈을 주는 거 아닐까, 사람들이 좀 식으면, 다시 한번 공판을 열어보려고...”
  “그렇지는 않을 거야. 자넨 이긴 거야. 그 친구도 이긴 거고.”
  “그래, 샤뮌이 이겼어. 이제 된 거지...”
  셴이 흐느낌을 참아냈다. 흐린 눈꼬리로 검은 그림자가 지나갔다. 셴은 퍼뜩 눈을 들어 베일을 쓴 사람의 뒷모습을 보았다. 바퀴 의자를 몰고 있는 손과, 손 옆에 붙어있는 게덴의 뒷모습도. 셴은 그게 환각인지 아닌지 분간할 새도 없이 정신을 놓아버렸다.
  셴은 한동안 쉬어야 했다. 또 그 지겨운 침대로 돌아와서 누워있었다. 게덴이 돌보아주었다. 게덴도 많이 힘들어 보였고, 손목은 엉망으로 말라 비틀어져 있었기 때문에 셴은 가슴이 아팠다. 빨리 나아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몸이 쉽게 일으켜지지 않았다. 시빌르도 자주 찾아와주었고 회복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잠은 꿈 없이 푹 잤고, 일어난 후 잠깐동안은 몸도 개운했다. 게덴이 물에 개어 준 약을 먹고 잠든 날 밤, 셴은 오랜만에 꿈을 꾸었다.
  카잔키키르와 나쿠드가 공판장 양쪽에 서 있었다. 평소의 셴이라면 지긋지긋하다고 여겼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느낄 수 없었다. 그 둘은 정말로 신이었다. 그런 친근하면서도 압도적인 모습, 아름다움과 무엇보다 강대함은 세상에 있을 수 없는 종류의 것이었다. 나쿠드는 특히 순결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나단인의 신 나쿠드. 나쿠드는 유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순결하고 고통스럽지만 슬프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는 창백한 눈을 뜨고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게덴과 동족인, 머리 검고 눈 푸른 나단인들의 신 나쿠드, 그런데도 나쿠드는 밝은 머리칼에 흰 피부를 하고 있다. 첸족 지배의 영향이리라. 나쿠드는 곧 그 입술이 아닌 숨결로 무어라 말하더니 산산이 부서져 사라졌다. 마음이 금즉했다. 어디선가 무시무시한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셴은 곧 그것이 자신의 비명소리임을 깨달았다.
  카잔키키르는 판화에 새겨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새의 볏이 매달려 있었지만 얼굴은 사람 얼굴이었고, 푸른 번개를 액체로 만들고, 다시 그 액체에 천년을 담근 것 같은 새파란 깃털이 등줄기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다. 발은 표범의 발, 발바닥이 두텁고, 강건하게 버티고 선 다리는 돌로 된 힘줄이 불룩거렸다. 바다 건너 대륙의 강력한 붉은 민족이 믿는 신. 비명을 질렀던 목소리가 잦아들고 셴은 부르짖었다. “당신이 나쿠드를 죽였어!”
  “아니에요.” 하고 카잔키키르가 등뒤로 망치를 감추었다.
  “우스운 짓 하지 마. 거기 망치가 있잖아.”
  “에이, 하지만 그건 사고였다구요.”
  카잔키키르의 음성은 거대하고도 드높았기 때문에, 셴은 차마 그 말투를 우스꽝스럽게 느낄 수가 없었다. 셴은 부르짖었다.
  “나쿠드, 우리 셰일 강가의 신, 물을 주시고, 풍요로운 범람을 주시고, 낮은 자에게 자애를 주시고, 높은 자에게 권세를 주시고, 곡식 낟알을 주시고, 햇볕을 주시며, 대속해주시는 신을, 당신도 분명 신이기는 하다만, 무슨 신이더라? 몰라. 우리 나단인들은 관심이 없거든. 아무튼 당신이 우리 나쿠드를 죽여버렸어.”
  “사고였다니까요.”
  “사고라니! 신이 사고를 낼 리가 없잖아! 신의 일은 모두 계획적이지.” 나단인, 구릿빛 피부의 셴이 툴툴거렸다.
  “어쩔 거야? 당신이 나쿠드를 죽여서 우리 세계는 파탄 났어.”
  “그거 참 큰일이네요. 하지만 나는 카잔키키르고...”
  “모른다니까. 우리 나단인들은 당신이 무슨 신이건 관심 없어. 게다가 어째서 나 같은 힘없는 인간이 신의 입장까지 따져줘야 하는 거야? 신은 그런 게 아니잖아.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곤 경배하는 것 뿐이야. 그런데 우린 땅은 우리 신께 제를 드리는 데도 벅차다구.”
  “하기사 아편을 재배하기 쉬운 땅이 있고 히사시를 재배하기 쉬운 땅이 있지요.”
  “뭐라고 하는 거람? 아무튼 보자. 이 파탄난 세계를 어떻게 해야 하나? 오, 나쿠드여,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도와주소서, 빌어먹을... 그래, 난 말이야, 경당을 더 짓겠어. 나쿠드의 집도 크게 짓겠어. 전보다 더 크게. 아니, 전에 우리가 사당을 지었던가? 성벽도 흰색으로 둘러치겠어. 이름은 사루 데 바루흐라고 해야지. 신성을 지키는 요새라는 뜻이야. 성전에는 보리수를 하나 심겠어. 나쿠드의 조각상 - 아니 아니, 우린 조각은 만들면 안 되니까... 상징하는 걸로, 삼각형을 조합한 별은 어떨까? 그 모양대로 아예 도시를 구획하는 거야. 북쪽에는 가을마다 낟알로 의식을 지내는 신전, 봄의 제단은 저기, 폐허가 된 신전은 저기. 여기는 그의 고통을 상징하는 나뭇가지. 좋아, 사루 데 바루흐에 둘러싸인 발레인 성지. 이제 당신이 필요해. 도시 남쪽의 축대 위에 서 줘.”
  “네?”
  “거기서 멋지게 사형당해 주겠어? 나쿠드를 죽인 자로서 말이야, 거기가 상징적인 위치거든. 그러면 비로소 도시가 완성되는 거야.”
  “도시가 완성되면 어떻게 되는데요?”
  “나쿠드의 부활이지.”
  “하지만 이미 도시는 완성되었잖아요?”
  “응?”
  “이미 세계는 완공되었잖아요. 나쿠드가 필요해요?”
  셴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문제는 넘겨둬...”
  그리고 뭐라고 더 말했다. 카잔키키르도 뭐라고 더 투덜거리고, 둘은 거의 다투다시피 했다. 마침내 셴이 처절하게 절규했다. 카잔키키르는 조롱하는 듯 했지만 결국 겅중겅중 축대 위로 올라갔다. 그는 거기서 날개를, 푸른빛의 날개를 번개처럼 펼쳤고, 셴은 정말로 천둥소리를 들은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우뢰 같은 소리, 검은 하늘, 계란 만한 우박이 천지를 울리며 떨어져내렸다. 카잔키키르의 피가 축대를 적시자 하늘은 검게 닫혔다. 셴은 축대 아래로 다가가 보았다. 카잔키키르의 옷은 사라지고 사내는 맨몸으로 죽어있었다. 그는 물론 파시파르 데랄이였다. 셴으로서는 그 점이 조금도 이상하게 여겨지지 않았지만, 어딘지 씁쓸하기는 했다.
  그 시점에서 셴은 잠에서 깨어났다. 셴은 카잔키키르의 모습을 기억했다. 그건 그림에서 그대로 빠져나온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첼만 국에서 들여온 책, 양장본 제4 판형, 스물 두 살 때 풀밭에 앉아서 누군가에게 일부를 읽어주었던 것. 머리 한쪽이 쿡쿡 쑤셨다. 셴은 자리에서 일어나서 약을 찾았다. 시빌르가 놓아두고 간 것이 그대로 있었다.
  “약첩이라.” 셴이 중얼거렸다.
  셴은 문득 자기 방구석으로 걸어가서 서랍을 열었다. 누군가가 마지막으로 셴의 간을 걱정해주고 갔겠다. 병이 낫고 나면 이 약도 먹기 시작해야겠다. 셴은 한달 분쯤은 족히 들어있을 법한 약첩을 꺼내놓았다. 꺼내놓고 나니 또 누군가의 얼굴이 그려졌다. 가슴이 뜨끔했지만, 이제는 추억을 행복한 것으로만 받아들여도 좋으리라. 셴은 희미한 미소를 떠올렸다.
  샤뮌은 병원에 들렀다.
  셴의 머릿속에 불현듯 생각이 스쳤다. 샤뮌은 병원에 갔고, 위원들의 정기 검진 결과가 나온 것을 확인했으며, 셴을 위해서 약을 받아다 주었다 - 검진 결과표는 사적인 것이라 샤뮌이 받아다 줄 수 없었지만 - 그러나 결과표도 그로부터 얼마 안 되어 우편으로 각 위원들에게 배달되었다. 샤뮌은 분명 병원에 다녀왔다.
  이로서 샤뮌 자신의 불찰은 없었다는 점이 드러났다. 그러나 그렇다면 뭔가 이상하다. 그때 게덴이 거실에서 소리쳐서 전신이 왔다고 전했다.
  “누구한테서 온 거니?”
  “원로원 같아요.”
  읽어보고 셴의 표정이 묘해졌다.
  “뭐래요?”
  “공판이 다시 열린다는 구나. 도대체...”
  “무슨 공판이요?”
  “파시파르 건으로...”
  셴이 중얼거렸다. “사진이...”
  “게덴, 약첩들 좀 가져다주겠니.” 셴이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애매하게 말했는데도 게덴이 얼른 눈치를 채고 가져다주었다. 시빌르가 이번에 주고 간, 해열제가 든 약 첩과 전에 샤뮌이 주고 간 약첩 겉면에는 똑같은 인장이 남아있었다.
  “둘 다 시빌르가 처방전을 써 준거야.”
  셴이 혼자 끄덕거렸다. “샤뮌은 병원에 갔어. 세젠 병원에 가서 시빌르를 만났던 거야. 그때 수술했더라면 멀쩡히 살 수 있었는데 시빌르가 진단을 잘못 내렸던 거야. 별 거 아니라고 했겠지. 샤뮌은 그 말을 믿었겠지. 시빌르는 샤뮌이 죽고 나자 자기 착오를 숨기기 위해서 샤뮌이 다녀간 기록을 삭제했어.”
  게덴이 가만히 고개를 떨구었다. 셴이 이어 말했다. “시빌르가 제출한 자료는 거의 다 조작된 거라는 구나. 뇌 사진도 말이다.”
  “사진이요?”
  “사진 원본을 찾아냈다고 하는구나. 파시파르가 입힌 상처 때문에 출혈이 일어난 게 아니야. 단순 과로였어.”
  셴의 입 밖으로 말이 그저 흘러나왔다.
  “기록을 삭제한 동기는 이해가 가. 허나 왜 이런 식으로 일을 꾸몄을까...”
  “파시파르가 싫었나보죠.” 게덴이 대꾸했다.



  “그때 자네가 내 연구를 훔쳤어!” 시빌르가 소리쳤다.
  “그 덕에 자넨 위원이 된 거야! 생물학 협회 상을 받아서...”
  “난 그 망할 것 말고도 경력이 충분히 있었어, 이 사람아.” 파시파르가 지긋지긋하다는 듯 머리를 흔들었다.
  “이십 오년전 일이야. 그렇게 욕해놓고도 모자랐나?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을 꾸며?”
  “논문 표절이 어떤 의미인 줄 알면서 간단하게 말하는 군.”
  “오호라, 살인죄를 뒤집어씌우는 건 간단한 일이란 말이군. 그리고 이 사람아, 지금껏 골백번은 말했다시피 또 한번 말하는데, 자네 연구를 훔친 게 아니야! 우연히 주제가 같았던 것뿐이라고.”
  “그렇게 토씨까지 똑같을 수는 없어.”
  “같을 수도 있지! 하루 이틀 차이로 권리자가 달라지는 게 아세빈 아냐?”
  “도로 들여보내. 잡일꾼들한테 미안하군.” 보다못해 위원들 중 하나가 치안대원에게 부탁했다. 오늘 첫 재판이라 미리 대기석에 앉아있었는데, 잡일꾼들이 청소를 하다가 흘깃흘깃 쳐다보았다.
  원로들이 들어오고 공청석에 사람들이 들어찼다. 공판이 시작되고, 시빌르는 이미 셴이 짐작하고 있었던 것과 같은 내용의 진술을 반복했다. 시빌르는 당당하게, 자신은 의료 기록을 삭제한 것에 대해서는 얼마든지 죄를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고, 다만 사진 조작에 대해서는 정상을 참작해 달라고 하더니, 그 말을 일단 입 밖에 꺼내놓고 나니 자기도 우스꽝스러웠던지 얼굴이 새파래져서 입을 다물었다. 오래 담고 있었던 일인만큼 꺼내놓고 나면 별 거 아닌 법이다. 파시파르는 <아이고, 머리야> 하는 표정으로 자기 관자놀이만 쾅쾅 때려댔다.
  표절 의혹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아세빈은 특히 학위 논문을 쓰는 동안에는 연구 과정을 상세히 기록하여 달마다 대학에 제출하기를 권유한다. 발표 후로도 일년간은 대학이 그 전체 서류를 보관하여 표절 시비가 있을 때 자료로 활용한다. 시빌르는 그 권유대로 행하지 않았던가, 아니면 파시파르가 당시에도 평판이 훨씬 더 좋았기 때문에 자기가 소요를 일으켜봤자 별 소용없으리라고 판단했으리라. 셴은 샤뮌과 자신이 전공이 전혀 달랐던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원로원은 시빌르가 이 일을 꾸미기 위해 샤뮌을 방치한 건 아니리라는 점에는 동의했다. 다만 어차피 샤뮌이 죽고 나자 이 기회를 이용하고 싶어졌으리라. 시빌르는 십삼 년의 금고형을 선고받았다. 시빌르가 뭐라 항의하려다가 셴과 눈이 마주치자 말할 수 없는 표정을 했다. 셴도 그 표정엔 좀 놀랐다. 시빌르는 순순히 치안대가 안내하는 대로 따라나갔다. 파시파르는 일년간의 치료와 금고 삼년 형을 받았다. 어차피 그 형기는 살인죄가 아니라 폭행죄에 적용된 것이었다.
  셴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눈이 아팠다. 별 못 볼 꼴을 다 봐서 그런가보다. 공청석을 올려다보았다가 셴은 베일을 쓴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셴은 자신이 눈을 찌푸리고 있다는 걸 알았다. 그 베일이 시선을 잡고 놓아주질 않았다. 천천히 바퀴 의자를 쥐고 있는 손, 램지의 금발머리, 게덴과 아뉴르가 눈에 들어왔다. 램지가 바퀴 의자를 밀자 베일이 어스름이 출렁거렸다. 그 넷은 복도를 따라 사라졌다.
  셴은 얼른 달려서 따라갔다. 재판장에서부터는 바깥으로 바로 통하는 뒷길이 있다. 그러나 나가보니 사람들만 바글바글하고 그 조그만 머리들은 보이지가 않았다. 뒤에서 누가 툭 쳤다.
  “예?”
  “중요한 문제가 남았지 않습니까.” 위원장이었다.
  “일은 다 끝나지 않았습니까.”
  “파시파르가 어떻게 마약을 훔칠 수 있었을까 하는 문제입니다. 파시파르 본인은 입을 열지 않고 있다고 해요.”
  “입을 열 리가 없지요. 허나 지금 임무를 받은 위원들을, 물론 저를 포함해서 말씀드리는 겁니다만, 하나하나 집을 뒤져보거나 대질을 시켜보면...”
  “꼭 지금 임무를 받은 위원일 필요는 없지요. 이전에 임무를 받았을 때 대규모로 밀수해 왔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그 마약 - 텐스턴 - 은 부피도 작고 효용도 높아요. 그 사람들은 이제는 현직 위원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그런 가능성을 알고 있다는 사람에게서 밀고가 들어왔습니다. 누군가 진술을 받아와야 해요.”
  하고 위원장이 셴을 바라보았다. 셴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러나 위원장이 나즉이 말했다. “끝까지 이 건을 맡고 싶지 않으십니까?”
  “더 이상 이 자리에는 그 친구가... 없습니다.” 그렇다. 파시파르와 시빌르가 서로 추한 꼴을 보였을 뿐이다.
  “사실상 이 자리에는 처음부터 그 친구가 없었습니다. 당신이 끼워 넣었지요.”
  셴은 입을 다물었다. 시빌르의 자료를 믿은 게 실수였다면 실수지만, 이런 이야기를 들을 이유는 없다.
  “그런 걸로 책망하려는 게 아닙니다. 그 자료에는 다들 속았습니다. 당신의 심정도 십분 이해가 가고요. 저도 서명을 하지 않았습니까. 그러나 당신이 주도해서 일을 크게 벌이셨고, 그랬던 덕분에 시빌르의 조작도 밝혀진 것이니, 당신이 이 건을 끝까지 책임지고 싶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허나 이건 제 생각일 뿐이니 제가 만일 잘못 짚었다면 죄송할 따름입니다. 뜻대로 하십...”
  “누구에게서 진술을 받아오면 됩니까?” 셴이 말끝을 잡아챘다.




3

  셴은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 문제는 접어둬... 어쨌거나 당신의 죽음은 필요해. 도시는 완공되어야 하거든.”
  “흐응.” 하고 카잔키키르가 소리를 냈다.
  “저기 말이야, 그런데 날 어떻게 사형시킬 건데요?”
  “무슨 소리야? 신을 어떻게 죽인단 말인가? 나 같은 한낱 인간이. 당신을 사형시키는 건 나 같은 게 아니라 도시야.”
  “도시는 당신이 만들었잖아요.”
  “무슨 소리야?”
  “네?”
  “이건 나쿠드의 도시야. 그의 성스러운 모습을 나는 그대로 따라한 것 뿐이야. 그의 것이고, 그의 계시고, 그의 예언이며, 그의 형상이야. 내가 관여한 것은 기술적인 부분뿐이지. 예컨대 남이 온갖 일을 다 하고 다니는 걸 나는 내 머리로 기억을 했을 뿐인 거야. 이제 어서 축대 위에 올라가.”
  “더 이상 신의 존재를 필요로 하지 않기 위해 당신은 도시를 지었군요.”
  “신을 계속 존재하게 하기 위해 지은 거라니까, 지금까지 뭘 들었어? 빨리 축대위로 올라가.”
  “신은 원래 있지도 않았을지도 모르지요.” 카잔키키르가 말했다.
  “당신의 도시가 신이 존재하고 또 존재했다는 사실을 완벽하게 증명해버리는 이상 신은 스스로 존재할 수조차 없으니까. 신은 도시에 자신의 모든 존재와 역사를 빼앗겼어요. 당신은 도시를 짓기 위해 그를 철저하게 이용했고, 사실 당신이 필요로 했던 것은 도시 뿐인 거예요. 그렇다면 이 시점에서 당신은 말해야 해요. 당당한 목소리로,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그러나 신들은 존재해!” 셴이 부르짖었다. “그렇지 않다면 내가 신에게서 빼앗을 수도 없었을 거야.”
  “신들은 존재한다고?” 카잔키키르가 혀를 삐죽 내밀었다. “물론이죠. 신들은 존재하구 말구요. 내 말은 당신은 그런 식으로는 결코 진정한 신들을 모실 수 없을 거란 말이에요. 이 곳에는 당신뿐이에요, 한낱 인간. 영원한 무기물인 영원한 당신의 도시뿐이라구요.”
  지금이다. 셴은 생각했다. 이제 카잔키키르는 축대 위에 올라갈 것이다. 샛푸른 깃털이 떨어지고, 축대는 피로 젖을 것이다. 그러나 파시파르는 새 옷을 벗어버렸다. 그러나 새 옷이 벗겨지고 나자 그 속에는 파시파르조차 없었다.
  그리고 아무도 없었다. 셴은 몸을 떨었다. 그러나 떨고있는 몸조차 사라져가는 기분이었다. “신이시여,” 셴이 불렀다. “신이시여, 어디에 계십니까. 나를 살리지 않으십니까. 나를 구하지 않으십니까.”




  불그스름한 오솔길을 올라, 돌로 쌓고 나무로 서까래를 받친 집에 다다랐다. 현관은 활짝 열려 있었고 정원 근처에는 길게 누운 나무 의자가 있었고 나무 의자 위에는 형형한 늙은 육신이 얹혀 있었다. 셴이 탄식했다.
  “셰일 교수님.”
  “이런, 셴 벨헬렘.” 해 가리개 그늘 속에서 나오면서 셰일이 미소지었다.
  그는 칠십이 다 되어 가는 남자였다. 머리는 벗겨졌지만 눈빛이 생생했고, 코끝이 날카롭게 굽어 있었다. 셴은 그 사람을 알고 있었다. 셴도 학생 적에 그 사람에게서 심리학을 배운 적이 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위원이 된 건 알고 있었지만, 가슴의 별을 보니 감회가 새롭군.”
  셴이 쑥스럽게 웃었다. 셰일이 낄낄거렸다. “아직 그렇게 웃을 수 있으면 됐네. 자네가 진술을 받으러 왔는가?”
  “네. 셰일 교수님 - 아니, 셰일이 의뢰하신 겁니까?”
  “그래. 그런데 자네는 아니길 바랬는데.” 하다가 셰일이 고쳐 말했다. “아니, 잘 된 건지도 모르지. 앉게.”
  셰일은 셴을 집 안에까지 들이지는 않았고, 정원의 납작한 바위로 안내했다. 마주보고 앉자마자 셴이 물었다.
  “마약을 입수했을 만한 사람을 알고 계신다구요?”
  “음, 가능성이 있을 뿐이야.”
  셰일이 까끌까끌한 턱을 매만졌다.
  “일단 파시파르 데랄 그 사람과 가까운 사람일 거 아닌가. 파시파르가 어쨌거나 집을 허락 받았으니 그 집에 들러서 훔쳐낼 수 있었겠지, 산책을 하다가 갑자기 광기가 들어서 어느 집에 들어가서 찬장을 뒤져보니 우연히 마약이 있었겠나? 그리고 역시 오랫동안 자리를 지켜온 위원들이 가능성이 제일 높겠지, 오래 함께 한 위원들끼리는 어느 정도 친하다는 점도 있지만, 임무를 맡은 위원들만이 바깥과의 교역에 관여할 수 있기 때문이지. 다행히도 텐스턴은 아세빈의 토양에서는 잘 자리지 않으니 말이야.” 셰일이 말을 끊었다.
  “여기까지가 자넬 설득하기 위한 말이고, 지금부터는 내 확신일세. 난 이전에 텐스턴을 접해 본 사람을 알고 있네.”
  “어떤 경로로 말입니까?”
  “그 때 그 사람은 아직 위원이 아니었지만... 그 때는 내가 위원이었지.”
  셴이 눈을 크게 떴다. “셰일?”
  “그렇게 보지 말게. 나도 임무를 맡았고, 그 약물의 효능을 보았네. 나는 뇌의학자이기도 했고, 이게 잘만 사용하면 진정제로 쓰일 수 있거나 고통을 없애는 데에 써먹을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했어. 안락사에는 특히 별로 손을 볼 것도 없이 좋아 보이더군. 수상과 원로원에 직접 허락을 얻고 소량만 들여왔지. 허나 다른 용도로는 모두 실패했고 안락사 용도로만 써먹기에는 위험성이 너무 높았어. 내가 실패를 보고한 후 텐스턴은 물론 정식으로는 절대 들여올 수 없는 물건이 되긴 했지만 말이야.”
  “허가를 받으셨다면 그건 문제가 되지 않아요. 실험 중에 조수가 훔쳐가기라도 한 겁니까?”
  “맞네, 그 실험을 도와준 사람이 있었어. 내 가장 유망한 제자였지. 그 사람이 그걸 조금씩 훔쳐가서 쓰고 있었어. 내가 눈치채고 중간에 막긴 했지만 이미 약한 중독 증세를 보이고 있었네. 그 때는 다행히 끊었어.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위원이 되어서 임무를 맡았다면 유혹을 받지 않았으리라고 장담할 수 있겠나? 그런데 그 사람은 위원이기는 했단 말이지. 임무를 맡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제가 알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샤뮌 페라틴. 내 유망한 학생, 가엾은 아이.”
  셰일이 중얼거렸다.
  “그 애는 머리가 좋지. 지나칠 만큼 좋았지. 밀수하는 것 따위 그 애에겐 일도 아니었을 거야.”
  “그 친구는 임무를 맡고 있긴 했습니다. 또한 방금 말씀하신 것이 일부 사실일지도 모르지요.” 셴이 정색하며 말했다.
  “그러나 그 친구는 약을 할 사람이 아닙니다. 파시파르 자신도 증언하기를...”
  “나도 그 공판장에 갔었어. 샤뮌이 처방전을 주려 했다? 내가 아까도 말했지만, 샤뮌은 머리가 좋아. 처방전을 만드는 것도 일도 아니었을 거야. 치안대가 찾아낸 것 말인데, 그 서류에 날짜가 쓰여 있던가? 아주 한참 전부터 샤뮌은 이미 처방전을 갖고 있었을 거야. 그만둘 기약도 없이 약을 다시 시작할 애가 아니지. 처방전을 발견한 다음에야 다시 복용하기 시작했을 거야.”
  “팔에 주사 자국도 없었어요. 혈액도 멀쩡했고요. 시신을 조사하지 않은 게 아닙니다.”
  “누가 주사했댔어? 복용했댔지. 코로 들이마시는 식으로 바꿨을 수도 있지. 그게 제일 흔적이 안 남거든. 그 정도도 그 샤뮌 페라틴이 못 했을 거 같나?”
  “파시파르가 다르게 증언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나도 파시파르가 샤뮌을 숨겨주려 했다고는 생각지 않아. 공범이니까 그럴 수도 있었겠지. 파시파르가 정말로 약을 훔친 걸까? 남의 집에 들어가서, 이 아세빈에서? 정말로 샤뮌이 좋은 의도로 약을 압수하려 들었기 때문에 다툼이 일어났던 걸까? 샤뮌은 머리가 좋지만 바깥에서 거래할 금액을 무한정 만들어낼 수는 없어. 파시파르도 임무를 맡고 있지 않았나? 그를 꾀어내려 한 거 아닐까?”
  “파시파르는 임무를 맡고 있지 않고, 샤뮌도 더 이상 임무를 맡고있지 않습니다. 샤뮌이 약을 들여왔다 해도 오래 전에 들여왔겠지요.”
  “그런가? 그럼 이 가정은 포기하지.”
  “다른 가정도 그저 가정일 뿐입니다.”
  “몇 가지는 사실이야. 내가 텐스턴 실험을 했을 당시의 일은 그저 사실이라구.”
  “그 때도 당신이 그 친구를 오해했을 수 있습니다. 셰일, 제가 그 친구는 가장 잘 압니다. 내가 이십 삼 년 간 친구였어요. 셰일도 그를 잘 알지 않습니까. 그 친구가 약을 할 이유가 뭐가 있었겠습니까?”
  “물론 나도 그 애를 잘 아네. 이년동안 내 학생이었고, 칠 년 동안 내 환자였어.”
  “환자였다고요?”
  “자해 습관이 있었으니까. 열 세살 때 그 애의 담당 선생이 알아차리고 내게 넘겨주었네. 열일 곱살 때 심한 폭행을 당했지. 말하기는 뭐하지만... 그만두지. 하여간 눈이 가려진 채였기 때문에 신고를 못 했던 것 같네. 왜 한 보름쯤 학교를 빠졌을 때가 있었지? 우습게도 그 애는 그 후로는 자해를 하지 않게 되었어. 내게 말하더군, <교수님, 자해라는 건 자기애가 가장 강한 인간이나 할 수 있는 겁니다. 자기 몸이 상하는 게 무슨 대단한 일이나 되는 줄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걸로 다른 괴로움을 상충시킬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지요. 일은 하지 않고요. 자기에 대한 집착이고, 게으름이지요...> 그러고 나서는 자기애인지 뭔지를 버리려고 노력한 거 같은데, 힘들었는지 텐스턴에 손을 댄 거야. 그런 불안정한 애를 실험에 참여시킨 내 문제도 있네만, 나는 일을 주고 내 옆에 두는 게 더 나을 거라고 생각했었네.”
  “그건 그렇다고 칩시다. 그렇다고 치잔 말입니다.” 셴이 중얼거렸다.
  “그러나 강한 친구였어요. 누구보다 강한 친구였습니다. 그런 것쯤은 곧 극복했을 겁니다. 혹여 어쩌다 약을 접하게 되었더라도 곧 극복했겠지요. 제가 계속 옆에서 보아왔는데, 얼굴도 멀쩡했는걸요.”
  “글쎄, 나도 꼭 그렇다고 말하는 건 아니네. 가능성이 있지 않느냐는 거야. 허나 마약 유입 건은 중요한 얘기고, 지금으로서는 주목할 수밖에 없는 가능성이지. 나도 그 친구에 대한 나쁜 이야기를 하고 싶진 않지만 은폐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네. 그 친구, 얼굴이 푸릇푸릇하게 창백하다거나, 체온이 좀 높다거나, 손톱이 이상하게 희다거나, 자주 미간을 찌푸리지 않던가? 왜 그, 신경증을 참듯이...”
  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쾅 소리가 나면서 모든 기억을 지워버렸다.
  셰일은 셴이 정신을 가다듬을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셴이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말문을 텄다.
  “방금 말씀은 못 들은 걸로 하겠습니다.”
  “어느 부분을 말인가?”
  “전부 다요. 다른 누구에게도 입을 열지 말아주십시오.”
  “이보게, 셴. 말했다시피 나는 이게 은폐해서는 안 될 이야기라고 생각하네.”
  “알려지게 되면 죽어버릴 겁니다.”
  셰일이 셴의 얼굴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셴은 자기 손목께에 시선을 두고 말하고 있었다. “두려울 것도 없어요.”
  셴은 집으로 돌아왔다. 게덴이 기다리고 있었다. 셴은 게덴에게 웃어주려다가 얼굴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게덴이 붙잡았다. 진지하게 할 말이 있다는 것이다. 둘은 거실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았다.
  “셴, 저 이제 열 살이 다 되어가죠?”
  “그래.”
  “열 살이 되면 혼자 살아도 된다고 허가가 나잖아요?”
  “그럼, 그렇지.”
  “그럼 나가서 살아도 될까요?”
  셴은 한숨을 쉬었다.
  “왜?”
  “그냥요, 한번 혼자 살아보고 싶기도 하고...”
  “하나만 묻자.” 셴이 턱을 괴었다.
  “베일 쓴 사람은 누구니?”
  “그 사람, 얼굴 못 알아보겠어요?”
  “베일밖에 안 보이는데 어떻게 알겠니.”
  “그럼 이름도 몰라도 되잖아요.”
  “그게 대체 무슨 논리야?”
  “아무튼, 나가서 살아도 되어요?”
  셴이 한숨을 푹 쉬었다. “생각해 보자꾸나.”
  “급한데...”
  “게덴, 내가 내 머리를 날려버리기 전에 방에 들어가 있어라.”
  게덴이 말끄러미 셴을 올려다보았다. 셴은 그 눈길을 어떻게 느껴야 할 것인가 결정할 수 없었다. 소음들이 머리 뒤에서 떠돌았다. 아, 또 그 상태로 돌아갈까봐 셴은 희미하게 겁이 났다. 달력의 숫자를 읽을 수 없어지는 상태. 그러나 그 무서움조차 곧 흩어져서 바닥에 쌓인 먼지처럼 되어갔다. 생이 회색 빛으로 변하고 있었다.
  게덴이 가볍게 샤뮌의 팔을 건드리려다가 물러섰다. 그 애는 꾸벅 절을 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셴은 탁자에 잠시 엎드려 있다가 천천히 일어났다. 한 걸음씩 걸을 때마다 걸음이라는 행위 자체가 멀어져가는 것 같았다. 어디에도 떠 있지 않을 즈음해서 침대에 도착했다. 셴은 눈을 감았다.



  게덴은 끈질긴 시선을 느꼈다.
  지긋지긋해질 무렵 셴이 눈길을 돌렸다. 게덴이 좀 씁쓸하게 말했다.
  “나갔다 올 게요.”
  “그러렴.”
  셴이 미소지었다. 게덴은 신발 끈을 고쳐 매고 밖으로 나섰다.
  문을 두드리자 아뉴르가 열어주면서 투덜거렸다. “늦었어!” “미안.” 게덴이 문 안쪽으로 쏙 들어갔다.
  셴은 달력을 보고 오늘이 위원회의 날인 걸 알았다. 늦었다! 아무리 애써도 십분 쯤은 늦겠다. 셴은 달리려다가 땀이 날 것 같아서 그만두었다. 이런 계절에는 빨래도 잘 마르지 않는다. 그럭저럭 빠른 걸음걸이로 갔더니만 위원들이 다 앉아서 아니꼬운 눈초리로 탁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나 셴이 들어섰더니 반겨 맞아주었다.
  “어서 오십시오.”
  “이런 죄송해서...”
  “괜찮아요, 앉으십시오.”
  옆에 있던 위원은 의자까지 당겨다 줄 기세였지만, 실제로 그런 과도한 친절을 베푸는 우를 범하지는 않았다. 셴은 위원석 의자에 몸을 기대고 이미 자리에 놓여있는 사본을 집어들었다.
  “응?”
  “그래, 또 그 애들이야.”
  여전히 램지 비렌발트와 게덴 벨헬렘, 그리고 몇몇의 다른 사람들의 서명이 찍혀있는 사본을 셴은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이 애들의 집착에는 무슨 이유가 있는 걸까?
  회의가 끝나자 위원장이 셴을 따로 불렀다. 위원장, 이름은 무드퍼드, 턱 아래에 작은 사마귀, 윗입술을 덮기 직전의 콧수염, 나단인의 피와 공국의 피가 조금씩 섞인 검붉은 피부, 인상도 좋고 나이도 적당하다. 사람들에게 높은 신망을 얻고 있고 투표로 위원장이 되었다. 그런 만큼 모두에게 다정하게 군다. 위원장이 셴의 어깨에 손을 올려놓았다. 이 정도 친분이 있었던가 생각했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괜찮으십니까?” 하고 위원장이 걱정스레 말했다.
  “괜찮습니다만...” 셴이 난처하게 웃어 보였다.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무 일도 없습니다.”
  “샤뮌 일 이후로 안 좋아 보이십니다.”
  “괜찮습니다, 꽤 시일이 지난 일 아닙니까.”
  “상담을 한번 받아보세요.”
  “무드퍼드, 난 밥도 잘 먹고 있고, 식사 량도 변한 게 없고 멀쩡히 활동하고 있습니다. 체력도 아직 좋습니다.”
  위원들은 당신 정신 건강에 문제가 있어 보인다는 말을 듣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무드퍼드가 묵묵히 있다가 말했다. “아까부터 계속 미소짓고 계십니다.”
  “그거야, 뭐...” 셴이 너털웃음을 지었다.
  “삼 사초 이상 지속되는 표정은 가식입니다. 전에는 그러지 않으셨습니다.”
  무드퍼드는 묘한 표정을 했다. “제가 아는 심리 상담사가 있습니다. 약속을 잡아놓겠습니다.”
  “그러실 필요가...”
  “샤뮌은 큰 사람이었습니다. 당신과 샤뮌은 아주 가까운 사이였지요. 이 아세빈에서는 드물 만큼 말입니다.” 무드퍼드가 끄덕거렸다. “상담을 받아 보세요. 가끔은 그런 게 모르고 있던 걸 알게 해 줍니다.”
  셴은 무드퍼드가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어쨌거나 끄덕거렸다. “알겠습니다.”
  집에 오니 게덴이 기다리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오후 다섯시였다. 게덴은 딱히 병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늦으셨네요.”
  “병원에 들렀다 왔어.” 셴이 나무 의자에 걸터앉았다. “내 간은 여전히 좋지 않다는 구나.”
  “약 꾸준히 드셔야 해요.”
  “네가 영양제를 많이 받아갔다는 얘기를 들었어.”
  “특별히 배급받은 건 아니구요, 아는 의사한테 좀 나눠달라고 했어요. 남는 거 같던데요?”
  별로 해명을 듣고 싶어서 말을 올린 게 아니었기 때문에 셴은 가만히 있었다. 게덴이 밥을 열심히 퍼먹더니 그릇을 내려놓고 말했다. “저기요, 셴.”
  “응?”
  “모레가 제가 열 살이 되는 날인데요.”
  “알고 있어.” 실은 잊고 있었다.
  “열 살이 되면 나가서 살기로 했는데요.”
  셴은 고개를 기울였다. “짐은 싸 두었니?” “네.” “그래.”
  게덴이 또 나가보겠다는 듯이 가방을 챙겼다. 셴이 바라보고 있다가 게덴의 목덜미에서 보랏빛 얼룩을 보았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다가 게덴이 다친 거란 걸 깨달았다. “왜 그렇게 됐니?”
  “뭐가요? 참, 저 또 월반했어요.”
  “그래.”
  그럼 이제 칠 학년일 것이다. 동기들보다 세 살이 더 적겠다. 셴은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있었다. “그래서 맞았구나.”
  “맞은 건 아니구요, 위에서 뭘 던지더라구요.”
  “머리에 맞으면 큰일나.”
  “그렇네요.”
  셴이 얼음주머니를 꺼내다 주었다. “그 정도는 아닌데요.” “샤뮌도 이랬겠구나.” “네?” “네가 대고 있어라.”
  셴은 다시 자리에 앉았다. 게덴이 셴의 뺨에 입맞추고 쪼르르 달려나갔다. 셴은 그 뒷모습을 잠시 바라보았다. 게덴이 돌아보았다. “왜요?”
  “아냐.” 게덴이 그 시선을 느낀 게 신기했지만 셴은 다시 묻지 않았다. 게덴은 그대로 셴을 쳐다보고 있었다. 게덴은 곧잘 셴이 쳐다보면 그대로 빤히 돌아보아 주곤 한다.
  그러면 셴은 기다린다. 자기 감정을 지우고, 생각을 비우고, 자신의 시선에 담긴 열망까지도 지우려고 노력하면서. 그저 눈을 열고 기다린다. 그것이 자신이 살아있다는 것을 주장해주기를 기다린다. 어떤 생각도 하지 않으려 애쓰며, 자신의 존재가 반사되지 않도록 애쓰며 그 얼굴이 그저 얼굴만으로 의미를 띄고 있길 빌었다. 그는 계시를 기다렸다. 그러나 응답 받지 못했다.
  다행히 여러 번의 좌절은 열망을 지워주었다. 셴은 곧 눈길을 돌렸다. 익숙한 안정감이 다시 찾아오는 것이다. 게덴은 집 밖으로 나갔다.
  셴은, 간혹 옥죄는 듯한 고통이 찾아오지 않는다면, 이 무감각한 상태가 싫지 않다.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다. 어린애들은 물건처럼 보이지만 분간할 수 없을 정도는 아니고, 위원들의 얼굴은 미세한 특징을 기억해두면 알아볼 수 있다.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무감각하지 않지만, 일을 하고 싶을 정도로 무언가가 가치 있지는 않다. 어중간하게 무너진 채로 평생이 지나갈 것이다. 그러나 애초에 평생은 의미가 없는 것이고, 의미 없는 것은 의미 없게 흘러가는 것이 옳다.
  나쁜 것은 의미를 두려 하는 것이다. 의미를 두려 했기 때문에 모든 것은 무너진다. 셴은 간혹 꿈을 꾼다. 무엇도 무너지지 않을 수 있었을 꿈. 그것은 과거에 대한 소망이다. 무의미가 폐허에서 배어 나오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텅 빈 땅에서 축복처럼 솟아오르는 꿈. 자신이 샤뮌보다 높았을 경우에 대한 꿈. 꿈속에서 샤뮌은 늘 어리석고, 유치하고 미숙하고, 늘 셴을 짜증스럽게 만들었다. 샤뮌을 대하려면 늘 무언가를 참고 희생해야 했고 희생하는 만큼 셴은 늘 위에 있었다. 그러나 셴은 실제로는 샤뮌이 이런 입장 이였으리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꿈속에서 셴은 샤뮌에게 최대한 상냥하고 나긋나긋하게 굴었다. 마침내 샤뮌이 죽었을 때 셴은 벌레가 죽은 것 이상의 감흥을 느낄 수 없었다. 그리고 그대로 돌아섰다.
  그랬더라면 그 때도 지금과 같았으리라. 삶은 나의 것뿐이고, 나의 지금 여기에 있는 몸뚱이뿐이고, 나머지는 스쳐 가는 자극에 불과하다. 자극을 하나로 묶어주는 영원불멸한 근거를 믿어서는 안 된다. 예컨대 빨간 것과 둥그런 것은 내 감각에 있는 것이지, 그게 사과이며, 빨갛고 둥그런 것은 그 사과 자신의 존재론적 책임이라고 우길 필요는 없다.
  바깥에서, 주술사들은 아주 오래 전에 세계를 제어하는 일을 포기해버렸다. 그리고 어딘가에 자신과 같은 자가 있을 거라고 믿는 쪽을 택했다. 세계에는 신이 있어서, 무한히 주며, 어떤 계획을 갖고 일을 행하는 것이다. 그런 신들은 신화가 완성되면 더 이상 요구되지 않는다. 그리고 신화가 부정될 때 신들은 사멸한다. 나쿠드를 생각해보라. 성전이 파괴되었을 때 사람들이 쌓아올려야 했을 이야기의 바벨탑을. 그 모순된 불경.
  셴은 양피지로 된, 아주 오래된 책의 필사본을 만들다가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탁자 위에 물이 듣고 있었다. 게덴이 얼음주머니를 놓고 갔다. 그렇게 심한 상처는 아니었나보다.
  게덴이 샤뮌을 닮았다고 생각한 적이 있다. 둘은 잘 어울려 지내기도 했다. 셴은 그 둘의 관계를 질투했다. 그것은 셴이 샤뮌과 맺을 수 없는 관계였고, 게덴과 맺을 수 없는 관계였다.
  기억은 아득하다. 셴은 이제 어떻게 자신이 질투를 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내가 아닌 자에 나를 이입시키고 어떤 비교를 시도할 수 있었는지 이해할 수 없다. 그는 푸르다. 그는 아름답다. 그는 높다. 내가 그렇게 느낀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내게 주어진 것이지 그의 책임이 아니다. 세계를 질투하는 자는 없다. 신을 질투하는 자만이 있다. 사람들은 질투하기 위해 신을 만들었다. 그것은 일종의 정복욕이다.
  그러므로 미움. 셴이 간혹 새하얀 소년, 아마빛 머리칼이 헝클어진 소년의 목을 조르는 꿈을 꾸는 것처럼. 소년의 옷을 벗기고 머리를 밟는 학생들 사이에 섞여서 그는 소년의 목덜미에 손가락들을 대고 누른다. 그러나 미움은 얼마나 지독한 자기애인가. 누군가의 목을 조르는 것보다는 자해가 더 도움이 된다는 것을 사람들은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다.
  질투 받는 신들은 사멸한다, 신화가 무너질 때.
  질투 받는 타인은 사멸한다, 더 이상 그 사람을 알 수 없을 때.
  <샤뮌> 셴은 어둠 속에서 그 이름을 되뇌었다. <나의 샤뮌> 그 이름이 여전히 뚜렷한 추억을 불러올 수 있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상담사를 만났을 때, 셴은 샤뮌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그 이야기를 하면 상담사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그런 모욕적인 얘기를 들었다면 충격이 컸겠어요. 그러나 당신은 계속 그를 지키려고 노력했어야 하지 않나요? 당신 안의 그를 믿었어야지요.” 그런 말에 내포된 철저한 고독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과 말을 섞는 게 두려웠다. 그래서 셴은 거의 모든 이야기를 입 밖으로 내놓지 않았다. 상담사는 셴이 너무 말이 적다고 했다. 훨씬 더 정신 나간 사람들도 상대하는 사람이니까, 셴은 자신이 말이 적은 것 정도는 상담사에게 상관없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딱히 말을 더 하려는 노력을 하지는 않았다.
  면담은 재미없게 진행되었다. 상담사는 끝날 때 즈음에야 셴의 기억에 남을 만한 몇 마디를 물었다.
  “후계자가 있나요?”
  “네.”
  “그 애가 우는 걸 본 적이 있나요?”
  “아니오.” 셴은 어떤 기억 때문에 다소 불쾌하게 대답했다.
  “다른 가까운 사람이 우는 걸 본 적이 있나요?”
  “네.”
  “어떤 상황이었지요?”
  “그 사람이 위원직 시험에 붙은 날이었고, 그는 무능력할 때까지 필연적으로 승진하게 된다는 얘기를 하고 있었고, 그 다음에는 진정으로 올라가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러면서 울더군요.”
  “그래서 당신은 어떻게 했습니까?”
  “가서 세수하라고 했습니다.”
  “달래주지는 않고요?”
  “네.”
  “왜요?”
  “그 자신이 울고 있다는 걸 깨닫지 못하고 있었으니까요.”
  “왜 알려주지 않았습니까?”
  “지금이라면 내 것이 아니니까 가만히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때는 무서웠습니다.”
  “왜 무서웠습니까?”
  셴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 “그 때는 이렇게 느꼈던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은 자신이 강하다는 것을 앎으로 인해 고통받고 있다고요.”
  “그게 무서웠습니까?”
  “네.”
  “그게 지금은 무섭지 않나요?”
  셴은 침묵을 지켰다.
  집으로 돌아오자 호출이 와 있었다. 셴은 의사당 쪽으로 나갔다. 위원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아아, 셴.”
  “학생들에게서 이상한 얘기를 들었습니다. 램지 비렌발트와 친한 애들인 것 같은데... 램지가 아뉴르랑 한 집에 산다는 겁니다.”
  “두 명까지는 불법이 아닌데요.”
  “게덴도 자주 들락거리는데, 곧 이사올 계획이 있는 것 같다는군요. 세 명은 불법이지요. 하여간 계속 들어보십시오. 학생들이 이런 대화를 들었다고 합니다. 학교 복도 한 구석에서 애들 셋이 도란도란 얘길 나누고 있더랍니다. 목소리로 봐서 램지는 확실하고 다른 둘 중에 하나는 게덴인 것 같았다더군요. 그 애는 유명하니까 목소리를 알아들었다고 해서 이상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오해일 수도 있겠지만요. 게덴 같은 목소리가 먼저 말했답니다. <셋이서는 무리가 있다>고. 그러자 램지가 <시험도 곧 다가온다>고 투덜거렸고, 누군가 훌쩍거리면서 <셴이 도와주면 좋겠는데>라고 했다는군요.”
  셴의 머릿속에서 흐릿한 윤곽이 잡혀갔다. 위원장이 말을 이었다. “그러자 게덴 같은 목소리가 다시 <셴은 그럴 사람이 아니고, 당장에 신고할 거다>라고 말했다는군요. <시빌르한테 사실 기대했었는데> 하자 램지가 화난 목소리로 <시빌르 얘긴 꺼내지 말랬잖아!>. 여기서부터가 설득력이 있습니다. 보통 애들이 이런 내용을 상상으로 꾸며낼 수는 없을 테니 말입니다. 애들 말에 따르면 게덴이 이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시빌르가 도와주긴 했다, 그 사람이 내게 모르핀 주사를 맡겨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앰플 내용을 바꿔치기 할 수 없었을 테니까>... 그리고 램지가, <내가 잡일꾼인 척 하고 시신을 훔쳐올 수도 없었을 거다> 또 다른 애가 <시신이라고 부르지 말랬잖아!>하고 화를 냈고, 애들은 슬슬 기분이 이상해져서 램지들이 눈치채기 전에 얼른 다른 곳으로 나왔다고 합니다.”
  “정식으로 고발된 이야기는 아닌가보군요.”
  “얘기를 들었다는 애들 중 하나가 위원들 중 한 명의 친구의 후계자입니다. 그 친구가 듣고 이상했던지 위원에게 알려주었고, 우리들은 램지의 건의안에 대해 알고 있으니까요.”
  “일단 치안대를 아뉴르의 집에 보내서 조사해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위원장이 웃어버렸다. “셴, 정말 변하셨다니까요.”
  하고 어깨를 두드렸다. “먼저 게덴과 이야기 해 보십시오. 그 애는 아무 상관도 없을 수도 있지만요. 당신은 아뉴르나 램지와도 어느 정도 친분이 있지 않습니까?”
  게덴은 병원의 의사들과 친하다. 시빌르와의 친분은 말할 것도 없으니, 이미 죽은 몸에 모르핀 주사를 놓는 것 정도는 맡겨 주었을 수도 있다. 램지는 키도 크고 억세보여서 잡일꾼으로 변장할 수도 있다. 그런 정도야 맞춰볼 필요도 없이 셴의 머릿속에 떠올랐다.
  그러나 이상한 것은, 시신이라는 말을 들은 순간 훨씬 강한 고통이 셴의 가슴을 옥죄었다는 것이다. 새카맣게 떠오른 이미지가 일련의 추측들을 의식의 가장자리로 내몰았다. 그것은 어둠이었다.
  위원장이 고개를 갸웃하며 셴의 팔 언저리를 다시 건드렸을 때, 셴은 비로소 고개를 들었다. "게덴과 이야기해 보세요, 아시겠지요?"
  위원장의 얼굴 위에서 어둠이 안타깝게 팔락거렸다.
  "알겠습니다."
  대답하고 물러 나왔다. 어둠이 내내 셴의 감각을 지배하고 있었다. 생소한 것은 아니다. 태양을 지워버린, 해바라기를 몰수했던, 그 어둠이다. 그것은 늘 거기에 있고, 늘 볼 수 없도록 눈부시고 겪을 수 없게 어둡다. 셴은 자연스럽게 죽음을 떠올렸다. 삶이 결코 끌어안을 수 없는 것. 그러나 그 내밀한 무의미의 밤이 지금 생애를 위협하고 있다. 아뉴르네 집 문을 두드릴 때까지, 셴은 자신이 보게 된다면 무엇을 보게 될 것인지 짐작하고 있었지만 실제로는 전혀 알 수 없었다. 서너번쯤 두드렸으나 문을 열어주는 사람은 없었다. 셴은 망설이다가 창틀을 조금 밀어보았다. 커튼이 쳐 져 있었지만, 창틀 자체는 쉽게 움직였다.  셴은 발돋움을 해서 창틀에 올라앉았다.
  창은 거실로 통해 있었다. 셴은 조금 부끄러움을 느끼며 바닥에 발을 댔다. 방들은 문이 열려 있었고, 비어 있었다. 셴이 들어오느라 커튼이 젖혀진 틈으로 오후의 빛이 들어와 네모낳게 거실의 마루바닥을 그렸다.  팔꿈치 안쪽에 영양제 주사를 꽂고 그가 거기 앉아있었다.
  그는 이제 베일을 쓰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베일을 쓰고 있지 않더라도 그 얼굴은 더 이상 얼굴이 아니었다. 세젠 병원 열 명의 의사들이 공언했듯이 그는 언어 능력이 없고 감정을 표현할 수 없다. 계산 능력을 상실했고 지능은 두 살배기 수준이다. 기억 대부분이 사라졌다. 사지 제어 능력의 구할 이상과 괄약근의 조절 능력을 잃었다.
   그는 아무것도 하지 못하며 힘도 없다. 그는 더 이상 알아볼 수 있는 표정을 떠올리지 못하며 떠올린다 해도 의미가 없다. 그는 누군가가 될 수 없으며 어떤 자도 아니다. 셴은 낯설음만으로 점철된 얼굴을 보았다. 얼굴을 빼앗긴 얼굴.
  그는 기다리고 있었다.
  셴은 응답했다.
  증언이 이루어졌다.
  램지들이 돌아왔을 때까지도 셴은 무릎을 꿇은 채였다. 바퀴 의자에 기댄 자가 그 앞에 앉아, 나쿠드가 속죄시킬 때 그러하였다듯이, 셴의 머리께에 닿을 듯 말듯 손을 늘어뜨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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