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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razyjam 사랑스런 아내여

2004.08.28 01:2008.28

  두려움을 모르는 기사 랜돌프 경은 다시금 랜스를 고쳐 쥐었다. 그는 드래곤의 눈을 노려보았다. 뜨거운 숨을 몰아 쉬며 그의 시선에 맞서고 있는 붉은 드래곤의 노란 홍채에는 피로가 가득했다.
  랜돌프 경은 첫 공격으로 드래곤의 날개를 노렸다. 그로 인해 조그만 인간의 랜스가 닿지 않는 머리 위에서 공격할 수도, 귀찮은 싸움을 피해 날아 달아나 버릴 수도 없게 된 드래곤은 무거운 몸을 질질 끌며 싸운 탓으로 금방 지쳐버렸다. 이전에도 드래곤과 싸워본 경험이 있는 랜돌프 경은 혈기만 가득한 젊은 얼간이들과 달리, 한 두 번의 공격으로 드래곤을 쓰러뜨릴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랜돌프 경은 랜스 끝을 흉갑의 고리에 끼워 돌격 태세를 갖추고 자신만만하게 외쳤다.

   "마지막이다, 사악한 드래곤아!"

   "...자, 잠깐!"

  랜돌프 경이 말 옆구리를 차려는 찰나, 드래곤이 비명 같은 소리를 쥐어짰다. 싸울 의사가 없는 상대를 공격하는 것은 기사의 도리가 아니다. 상대가 인간이 아니라 사악한 생물일지라도.
  기사는 경계를 늦추지 않은 채, 투구의 면갑을 들어올려 얼굴을 드러냈다.

   "무슨 일인가, 드래곤이여?"

   "항복하겠네, 인간. 나는 늙었고, 더 이상은 싸울 마음도, 싸울 기력도 없다네."

  붉은 비늘의 드래곤은 사람들이 귀찮은 일을 거절할 때 하는 몸짓처럼 두 앞발을 들어 내저었다. 포기에서 배어나오는 느긋함이 풍기는 드래곤의 태도에 비해, 승자인 기사는 너무나 어이없는 상황에 빳빳이 굳어있었다. 세상에, 이제껏 살아오면서 싸움을 포기하고 항복을 하는 드래곤이 있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어!
  랜돌프 경은 잘 다듬어진 갈색 콧수염 아래로 입을 쩍 벌린, 그다지 품위 없는 표정을 유지한 채로 생각에 잠겼다. 어찌 되었건 그는 이긴 것이다. 그래, 사악한 드래곤과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랜돌프 경은 건틀릿으로 감싼 묵직한 주먹을 입가에 대고 헛기침을 했다.

   "그 항복을 받아들이겠네. 그러면 이제 그대가 납치해간 나의 아내를 돌려주지 않겠나?"

   "빨간 머리 여자? 그건 어제 먹어버렸는데."

   "내 아내는 금발이다! 황비 전하께서 햇빛 같은 금발이라 칭찬하셨던 바로 그 금발이란 말이다!"

  시뻘개진 얼굴의 기사를 보며, 드래곤은 끽끽대는 쇳소리로 웃어댔다. 랜돌프 경이 자신을 죽이지 않으리라는 확신이 들자 여유가 생긴 모양이었다. 드래곤은 장난스레 랜돌프 경을 향해 커다란 눈을 끔뻑여 보였다.

   "농담일세, 인간. 인간의 암컷은 다들 달착지근하면서도 독한 냄새를 풍겨서 먹질 못한다네."

  잠시 그 말을 생각하던 랜돌프 경은 겨우 머리를 끄덕여 드래곤의 의견에 동조했다. 향수를 과하게 뿌려대는 아내의 버릇 때문에, 그 역시 가끔은 키스하기조차 망설여질 때가 있지 않던가. 랜돌프 경은 랜스를 받침고리에서 뽑아내어 드래곤을 가리켰다.

   "이제 더 이상 허튼 수작을 부릴 생각은 마라. 빨리 내 아내를 돌려줘!"

  드래곤은 턱을 긁던 발톱을 세워 따라오라는 손짓을 하고는 날개를 폈다. 기사의 랜스에 의해 상처 입은 날개는 축 늘어진 재 들리지 않았다. 드래곤은 고개를 내젓고는 앞장서서 걸음을 옮겼다.
  친구를 만나고 돌아오던 랜돌프 경의 아내 캐롤라인이 납치된 것은 열흘 전의 일이었다. 호위하던 종자들은 거대한 붉은 드래곤이 나타나 그녀가 탄 마차를 낚아채어 날아가버렸다고 보고하며 연신 고개를 조아렸다. 드래곤을 두 마리나 죽여 황제로부터 '두려움을 모르는 기사' 라는 호칭을 얻은 랜돌프 경에게는 치욕적인 일이었다.
  랜돌프 경은 신속하게 대응했다. 요 몇 년 동안 붉은 색의 드래곤을 보았다는 보고가 들어온 곳은 단 한군데 뿐이었다. 발라리온 산맥. 랜돌프 경은 끈기 있게 드래곤의 자취를 쫓았다. 그리고 오늘 드디어 아내를 납치해 간 붉은 드래곤과 대결을 하고 그에게서 항복을 받아낸 것이다.
  붉은 드래곤은 커다란 동굴 안으로 그를 안내했다. 문득 의심이 피어났다. 미간을 찌푸리는 랜돌프 경을 돌아보며 드래곤이 히죽이 웃는 표정을 만들어보였다.

   "겁이 나나, 인간? 이쪽은 심하게 부상을 당하고 항복까지 한 드래곤 인데?"

   "천만에."

  호기 있게 대답한 랜돌프 경은 랜스를 쥔 손에 슬그머니 힘을 주었다. 한참을 앞장 서 걸어 들어간 드래곤은 슬그머니 몸을 옆으로 비켰다.

   "저 안에 있는 게 자네가 찾는 암컷일세."

   "...뭐...?"

  붉은 드래곤이 비켜선 뒤로 보이는 것은 아직 비늘의 색이 채 다 붉어지지 않은 젊은 드래곤이었다. 랜돌프 경은 움찔하여 랜스를 치켜세웠다. 역시 속였구나 라는 생각이 스쳐갈 때 젊은 드래곤이 그들을 돌아보았다. 젊은 드래곤은 놀랍다는 듯이 눈을 커다랗게 뜨더니 입을 열었다.

   "랜돌프! 벌써 여기까지 온 건가요?"

  젊은 드래곤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랜돌프 경의 사랑스러운 아내 캐롤라인의 목소리였다!
  랜돌프 경은 무의식적으로 말의 고삐를 당겨 두어 발짝 물러났다.

   "황제 폐하의 부름에는 그렇게나 열심이면서 내가 찾을 때는 번번히 이런저런 핑계로 도망치는 사람이 당신 아니던가요? 웬일로 이번에는 이렇게나 급하게 달려오셨죠? 황제폐하께서 나를 구해 오라 하시던가요?"

  빈정거리는 태도로 고개를 치켜드는 그 태도 역시 캐롤라인의 동작 그대로였다. 랜돌프 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대로 굳어있을 수 밖에 없었다. 젊은 드래곤- 캐롤라인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그래도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했어요. 지금 가뜩이나 우리 집안의 재정이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어요?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만 당신은 내 말이라고는 모두 무시했었죠. 그래서 나는 생각한 거예요. 드래곤에게 나를 납치해 달라고 한 후에 비싼 몸값을 요구하면 당신은 가진 돈 한 푼 없으니 황제폐하께서 대신 대금을 지불해 주시겠죠. 당신을 그렇게나 아끼는 분이시니까."

   "그런 불충한!"

   "아무래도 상관 없잖아요? 그래도 이제는 그 방법은 쓰지 않기로 했으니 괜찮겠죠? 저 드래곤의 아내는 나를 드래곤의 모습으로 바꿔주었어요. 이제 나는 한 달 동안 드래곤의 모습으로 살게 되는 거예요. 그 동안에 마음껏 사람들을 습격해서 돈을 뜯어낼 거야. 벌어들인 돈과 보석의 절반을 지불하고 나면 나머지는 우리들의 것이 되어요. 사람이 드래곤으로 변해서 한 짓이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않을 테니 내가 의심 받지도 않을 거고요."

  젊은 드래곤은 이전이라면 하얗고 섬세한 손이었을 두 붉은 앞발을 자랑스럽게 펼쳐보였다. 랜돌프 경은 도저히 그 손을 잡고 다독거리며 아내를 달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랜돌프 경은 어지러운 머리를 흔들며 동굴 밖으로 말머리를 돌렸다.

   "잠깐, 어딜 가는 거에요? 언제까지 당신은 그렇게 고고한 척하며 살아갈 거죠? 이봐요, 랜돌프!"

  동굴을 빠져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것은 화가 난 그녀가 발을 구르는 모습이었다. 캐롤라인은 그 조그만 발을 구르며 화를 내는 버릇이 있었다. 이제는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발이 한 번 굴러질 때마다 쿵쿵 울리는 동굴 벽은 그녀가 무척 화가 나 있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겨우 동굴 밖으로 빠져 나온 랜돌프 경은 투구를 벗고 머리를 싸 쥐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괜찮나, 인간?"

  옆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랜돌프 경은 랜스를 들어 붉은 드래곤을 똑바로 겨냥했다.

   "이 사악한 드래곤아! 나의 아내에게 무슨 짓을 한 것이냐!"

   "내가 한 것이 아닐세. 내 마누라가 한 짓이야."

  드래곤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자네도 알겠지만, 나는 이미 늙었다네. 그런데도 마누라는 늘 나에게 보석과 황금을 요구하지. 나는 이제 인간들의 성을 습격할 정도의 기력은 남아있지도 않아. 그래서 마누라는 내가 자고 있는 틈에 자네의 암컷과 함께 저런 짓을 꾸민 걸세. 어쩌겠나, 나도 마누라는 당해낼 수가 없는걸."

  랜돌프 경은 천천히 랜스를 든 팔을 늘어뜨렸다. 마주보고 있는 붉은 드래곤의 눈에서 자신의 표정에 드러나 있을 감정과 똑같은 것을 본 탓이었다. 랜돌프 경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래, 드래곤이여. 그대와 나는 똑같은 처지로군. ...내 아내가 말한 만큼 우리 집안의 재정은 위태롭지 않다네. 그러나 아내는 늘 더 좋은 옷, 더 비싼 보석을 요구하고 있지. 내가 성에 붙어 앉아 있기를 그녀가 바라는 단 한가지 이유는, 나에게 돈을 졸라댈 시간을 더 많이 얻기 위함일 뿐이라네."

  드래곤과 기사 사이에는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두 중년의 사이에 어느새 묘한 유대감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윽고 침묵을 깨뜨린 것은 드래곤 쪽이었다.

   "그래서 자네는 어떻게 할 생각인가, 인간?"

   "솔직히...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네."

   "한 가지만 묻도록 하지. 자네는 자네의 암컷을... 인간들은 그것을 무어라고 표현하더라... 아, 그래. 사랑. 자네의 암컷을 사랑하나?"

  드래곤의 노란 눈에 잠시 스쳐간 것은 교활함에 가까운 감정이었다. 잠시 굳어있던 랜돌프 경은 변해버린 캐롤라인을 떠올리고는 가볍게 몸을 떨었다. 기사는 드래곤을 향해 씨익 웃었다.

   "예전에는 그녀를 사랑했었다네. 결혼하고 2년이 지나기 전까지는."

   "그렇다면 답은 나온 것 아닌가, 인간? 지금 그녀는 드래곤의 모습이라네. 자네는 어쨌든 자네의 아내를 빼앗아 간 드래곤을 물리쳐야 하는 것 아닌가?"

  목소리를 낮추어 말하는 드래곤의 말에 랜돌프 경은 벗어 던진 투구를 집어 다시 썼다. 랜돌프 경은 투구의 목 끈을 단단히 조인 후, 드래곤을 올려다보았다.

   "그래, 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가 있겠지, 드래곤이여?"

   "그렇네. 계약이지."

  드래곤은 눈을 가늘게 뜨며 히죽이 웃었다.

   "자네의 암컷을 잡는 일을 도와주겠네. 대신, 그 일이 끝나면 나를 도와주게. 나 역시 이제는 내 마누라를 사랑하지 않는다네."

  드래곤은 어떠냐는 듯이 커다란 앞발 하나를 내밀었다. 랜돌프 경은 내밀어진 앞발의 발톱 끝을 잡고 맹세의 악수를 했다.
  문득 랜돌프 경의 머리 속에, 얼마 전에 병으로 남편을 잃은 아름다운 미망인 레이디 마들렌이 떠올랐다. 만일 이 일이 생각한 대로 잘 되어준다면 그는 드래곤에 의해 부인을 잃고 슬픔에 젖은 용맹한 기사 역을 연기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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