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미로냥 뮌헨의 꿈

2004.09.24 21:1909.24

뮌헨의 꿈

 

 

 

 이런 꿈을 꾸었습니다.
 돌다리에 어리는 물그림자처럼 눈부신 빛이 가득히 쏟아지는 거리에 앉아 있는데 한 명의 소년이 다가와 쏟아지는 그 빛살보다도 밝게 웃어 주는 꿈이었습니다. 백금 색 달처럼 환한 얼굴에 편안한 옷차림을 한 그는 가슴을 비스듬히 질러 바게트 빵이 다섯 개는 들어간 것처럼 생긴 가방을 매었는데도 아무 것도 몸에 지니지 않은 것처럼 경쾌한 걸음을 걸었습니다. 볕이 타오르는 블록 위에서 더운 여름에 아스팔트 위를 가로지르는 자동차처럼 만물이 일그러져, 문을 열지 않은 상점도 육중한 시계탑도 금세 무너질 신기루처럼 시야를 흐렸습니다. 그런데도 광장 먼 곳에서 빛이 낳은 것처럼 천천히 가까워지는 그는 무엇보다도 선명해서, 나는 넋을 놓고 그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내게 다가와 반갑게 인사했습니다.

 

 "오랜만이야!"

 

 영원의 어제부터 영원의 오늘까지 쭉 함께 살아 온 것처럼 스스럼없는 태도에, 나는 감히 누구냐고 물을 수 없었습니다. 선한 눈매는 반달을 그리며 웃는데도 어쩐지 저녁노을을 향해 오래 서 있던 때처럼 쓸쓸해서, 나는 그를 기억해 내지 못한다는 것이 미안해 졌습니다. 그는 아무 것도 모르는 양 내 일행을 향해 일일이 인사를 하고 손을 잡아 주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손을 내어 내 손을 잡아 주는데, 굳은살이 박힌 그의 손을 잡는 일이 왜 그렇게 괴롭던 지요. 무릎이라도 꿇고 미안해요, 미안해요, 한없이 속삭이고 싶었습니다. 그리하여 무엇이든 용서 받을 수만 있었다면.


 희고 찬란한 광장이었습니다. 인간 같은 건 숨이 탁 막혀 그대로 죽어질 것처럼 햇살이 내리쬐고, 그 지독한 더위와 찬란 위로 비둘기들이 하늘을 덮습니다. 수십 마리의 비둘기가 날고 비어 버린 하늘을 수백 마리의 비둘기가 다시 가로 질러도 태양이 살해당하지 않는, 그 광장은 분명 마리엔 플라쯔(platz). 나는 그때 이미 이것이 꿈이라는 사실을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던 걸지도 모릅니다. 8월의 어느 아침에 야간 열차에서 내려 한산한 마리엔 광장 귀퉁이에 앉아 깨끗하지 않은 분수인지 연못인지 우물인지 또 무언지 모를 곳을 바라보고, 아무리 살을 부대껴도 친근해지지 않는 여행 동료들과 밤 기차의 덜컹댐에 관해 떠들고, 그리고는 잠이 덜 달아난 눈을 끔벅이면서 차갑게 식은 햄버거를 먹었으니까요. 하룻밤이나 지나 버린 햄버거는 옆 나라에서 구입해 온 것, 포장지에 쓰인 언어는 이미 뮌헨에서는 통용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나만이 이방인인 것은 아니라고 자조하며, 그러나 사실 자조할 필요가 없었는데도, 나만이 이 세계에서 쓸모없는 것은 아니라고, 반드시 설득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처럼 열렬하게 생각해 대면서 씹어 삼킨 햄버거는 피도 살도 되지 않겠다는 양 내 목구멍에서 완고하였습니다. 내게는 '이국적'이지만 이 곳 사람들에게는 '전통적'일 건물 시계가 몇 시인가에 소리 나는 인형들을 내보낸다는 이야기가 책에 쓰여 있었는데, 다들 졸음에 절어 그 때를 기다리지도 못하고 이내 자리를 뜨고 말았습니다. 그러니까 마리엔 광장이라는 건 그 낯선 이름뿐 내게 어떤 인상도 남기지 못한 곳일 뿐이었는데. 그저 예쁜 이름 붙은 평범한 광장일 따름이었는데. 문을 연 상점 하나 없는 이른 아침, 햇살만이 끊임없이 떨어져 내리던 그 곳에서 나는 다만 이방인이었는데.

 

 "나랑 잠깐만 같이 가 줘."

 

 어째서일까요, 꿈에 나는 소년의 손을 잡고 바로 그 광장을 달렸습니다. 광장에서는 살아 있는 사람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포로 로마노의 유적들을 본래대로 복원한다면 이런 햇볕이 내리쬐고 이런 바닥이 발에 닿는 걸까, 하고 생각했을 만큼 고아하고 오래 되고 내 것 같지 않고 부조화한 광경, 살아 있는 것의 내음은 나지 않았습니다. 그저 소년의 드러난 팔과 다리를 태워 놓을 것처럼 쏟아지는 여름 햇살 사이로 그의 가느다란 머리카락이 일렁였을 뿐. 꼭 새카만 공단 같은 그 머리카락은 금세 금색 깁처럼 변했다가 새하얀 수의 빛깔로 다시 변하더군요. 검은 빛을, 다시 황금색과 장미색으로 수십 번이나 변하며 표현 못할 그림자를 그 목덜미에, 드러난 팔뚝과 땀이 흐르는 이마에 드리우면서. 그가 다리를 뻗고, 다시 오금을 오므려 바닥을 차는 걸음마다 발아래 단단한 돌들이 희게 질려 있었습니다. 그리고는 속삭입니다. 결코 네 발 아래가 다시 무너지는 일은 없을 거라고.


 언젠가, 나는 이 아래로 처참하게 내려딛은 일이 있었던 걸까요. 온 몸을 안고 뒹굴며 울음을 터뜨리고 상처 입으면서 고통을 호소한 일이 있었던 걸까요. 두 다리 아래 디뎠던 땅도 공고하게 머리 위를 받친 하늘도 힘없이 부서져 심연 속으로 꺼져 버린 일이 언젠가의 내게는 있었던 걸까요. 기억하지 못하는 일이, 혹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이, 또 혹은 기억하지 않는 편이 나은 일이 누구에게나 있다고 쉽게들 말합니다. 그러나 과연 쉽게 잊어 모두가 행복해지는 기억이란 것이 있어도 괜찮을 걸까요. 펼치지 못했던 책장처럼 한 줌의 아쉬움으로 남았다가 오랜 세월이 흐르면 그런 일이 있었다는 것조차, 내가 그 책을 읽지 못했다는 사실조차 완벽하게 망각해 버리는 일이 벌어져도 그 누구도 상처 입지 않는다고. 그렇게 내게 말한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그렇게 내가 발화하게 등 떠민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아아라하게 먼 서산으로 다시 떠오르지 않을 것처럼 지는 태양이었던가요. 이대로 죽어 버려도 결코 슬퍼하지 말라고, 이것이 바로 죽음을 방비하는 법이라고 소리 내지 않아도 누구나 뼈를 뒤틀어 연골 사이에 새겨 넣는 그 태양이었던 것입니까.
 하염없이 달려가자 문득 심장이 떨려 옵니다. 기억나지 않는 꿈을 온 힘 기울여 더듬어 나가는데 문득 떠오는 잔상이 죄다 끔찍한 악몽일 때처럼 말입니다. 생각해 내서는 안 된다고, 내 몸이 말합니다. 결코 죽음에는 이르지 않으나 나을 수 없는 고통일 거라고, 내 마음이 말합니다. 나는 죽을 것처럼 엄살을 부립니다. 잊지 못한 사람보다 잊혀 버린 사람보다 잊어버린 사람이 가장 간악하며 가장 유약한 법입니다.


 그래서,

 

 "잠깐만!"

 

 나는 그의 손을 세차게 팽개치고 뒤로 물러섰습니다. 후들거리는 두 다리, 숨이 차올라 한 대 떠 맞은 것처럼 욱신욱신 당기는 배, 이대로 바닥에 주저앉아 버릴까 생각하는데 그는 뒤를 돌아보면서 웃어 보입니다. 고개를 갸웃 기울이면서 가만히 말합니다.

 

 "나를 기억할 수 없는 거지?"

 

 조용하고 단호한 눈으로 내 눈을 들여다봅니다. 세상의 모든 빛깔을 모아 햇볕 아래 내 놓은 것처럼 기묘한 흑색입니다. 무지개 색으로 번뜩이다 문득 흰 빛을 토해 놓기도 하고 검은 용처럼 꿈틀거리며 자색과 청색을 퉁겨 내기도 하는 검은 눈. 저런 빛깔을 가진 것은 어떤 사람도 만져서는 안 되는 것이겠지요. 손대는 순간 먹혀 버리거나 혹은 깨뜨려버리고 말 테지요.

 

 "억지로 기억해 내지 않아도 좋으니까 그냥 나를 따라와 줘, 아주 잠깐만. 나는 네게 꼭 해야만 하는 이야기를 가지고 있어."

 

 기억해 낼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당신을 잊었어요. 버린 거예요. 분명히 당신은 한 때의 나와 함께 했는데 나는 그 모든 것을, 조금의 머뭇거림도 없이 잊었습니다.
 나는 숨을 죽였습니다. 무릎을 꿇습니다. 그는 숨도 헐떡이지 않은 채 내게 다가와 다정한 온기를 가진 손가락을 뻗어 어깨를 잡아 줍니다.

 

 "괜찮아. 울지 마. 해 줄 말이 있어서 쭉 찾았던 것뿐이야."

 

 그리고 그는 말합니다.
 이 여행이 끝이 나도 결코 집으로 돌아가서는 안 된다고. 괴롭고 힘겨워도 지는 해 아래를 방황하면서 황야와 해변을 거닐어 달라고. 기록하고 기억해 달라고. 부디 집으로는 돌아가지 말아 달라고.

 

 "어째서요?"

 

 나는 묻습니다.
 그는 그것은 아직 말해 줄 수 없는 거라고 조심스레 입을 뗍니다. 다만 며칠만이라도 집으로 돌아가지 말아 달라고, 꼭 그렇게 해야 한다고 다시 당부할 뿐입니다. 나는 억지로 고개를 끄덕입니다.

 

 고마워.


 라고, 그는 입 모양으로만 이야기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소리를 다 써 버린 사람처럼 순식간에 쇠락해 부서져 가면서 말합니다. 고, 마, 워, 다시 입술이 움직였을 때 나는 주저앉고 싶어져 버립니다. 그의 미소를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그의 우아한 걸음과 수백 번 산과 들을 가로질러도 지치지 않는 심장을 알고 있었는데. 그런데 나는 기억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잊고 버리고 망가뜨리고는 내 두 다리가 디딘 땅이 불안하던 시절과 작별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이제 하늘이 무너질까봐 겁내지 않아요. 감기에 걸릴 적마다 태양이 나를 덮친다고 울부짖으며 말하지도 않아요. 달보다 거대한 돌덩이들에 짓눌리고 바다보다 깊은 어둠 속으로 떨어져 버둥거리지도 않습니다. 나는 이제 그 감각조차 다시 떠올릴 수 없어져 버렸으니까요. 나는 이제 빅밴을 가로지르는 당신의 초록 옷가지를 동경하며 막힌 창을 몰래 열어 놓지도 않습니다. 베개에 고개를 묻고 수백 명의 당신과 손을 잡았었는데. 하늘을 나는 붉은 용과 싸우는 당신, 죽음의 신이 입은 차가운 옷자락을 붙잡는 당신이 구해내는 것은 이미 내가 아닌걸요. 스무 개의 월귤나무 열매와 서른 개의 박달나무 가지와 마흔 마리 요정의 날개로 만든 당신의 검은 너무 나약해서 이제는 나를 구해줄 수 없답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앞에서 간신히 말했습니다.

 

 - 미안해요.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젓습니다. 휘황한 큰곰자리 갑옷도 구름으로 만든 망토와 날개가 달린 방패, 얼음으로 된 흰 말도 가지고 있지 않은 그가 웃습니다. 그의 검은 부러지고 녹이 슬어 앙상한 채로 사라졌고 붉은 머리 마녀도 녹색 피부의 마법사도 그를 떠났습니다.

 

 - 아니, 내가 죽인 거예요. 내가 모두를 죽게 했어요.

 

 그는 소리 내어 웃습니다. 내 눈가를 닦아주고 청량한 목소리로 주위를 밝힙니다. 본 적 없는 인형극을 내게 보여주고 들은 적 없는 노래를 들려줍니다. 그는 언제나 그랬습니다. 내가 그의 손을 놓지 않았을 적에 그는 '미이라'라는 말이 무서워 백과사전의 '미음' 편을 펴지 못하는 나를 안고 '요정'을, 먼 남쪽의 진청색 바다를, 보름달과 게 자리 성운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저 하늘에 아득한 별들이 그물처럼 쏟아져 나를 잡아 갈까봐 떨고 있는 내 귀에 어느 여왕의 빗과 거울, 어느 영웅의 몽둥이, 어느 마음 고운 전갈과 아름다운 공주님이 저기에 있는 거라고 속삭여 주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그는 무엇도 보지 않고 무엇도 믿지 않고 무엇도 두려워하지 않는 나에게 저녁 해를 보여 줍니다. 쇠락한, 서쪽 나라의 성루처럼 허물어져 가는 태양이 서녘 하늘 가득 노을 피를 흘립니다.

 

 "나는 승리할 거야. 쉽지는 않겠지. 마왕은 아주 강하니까. 하지만 나는 이길 거야. 싸우고 또 싸워서 내가 이기면 너도 다시……."

 

 ……너도 다시 되찾을 수 있을 거야.


 그는 내 머리 위에 방울새와 박새의 깃으로 만든 관을 씌워 줍니다. 박하 꽃과 물망초로 엮은 장신구를 선사합니다. 나는 고개를 젓습니다. 아니, 아니에요. 틀렸어요. 나는 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는 결코 이길 수 없다는 것을. 그는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는 것을. 소녀들의 어린 기사, 어린 영웅, 당신은 언제나 살해당해요. 흰 날개를 가진 당신을 상처 입히는 건 프시케의 등불처럼 기름을 떨구는, 당신의 소녀들인 걸요. 당신의 날개를 꺾고 북풍의 신과 남풍의 신을 살해하여 폭우를 부르고 상아 신전을 허뭅니다. 죽은 화산이 살아나 불을 토해내자 모든 것이 거짓이 되고 맙니다. 그건 나예요.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하던 오래된 친구. 나는 이제 작은 소녀가 아니고 당신을 내 세계로 초대하지도 않아요. 그리고 이제는 당신을 죽음으로 안내합니다.

 

 "……사랑하는 친구, 작별의 입맞춤을."

 

 미친 듯이 열정에 달떠 나는 그를 안습니다. 입 맞추고 입 맞추고 또 입 맞추며 그의 어깨를 쥐었습니다. 그는 불멸의 시를 웃습니다. 누구도 기억하지 않는 노래를 말합니다. 그의 언어마저 내게는 이방의 것이 되어 버리겠지요. 이제는 내 꿈에서조차 그의 말을 알지 못하게 되겠지요. 마왕의 품으로 검도 방패도 갑옷과 말도 없이 달려드는 당신은 살아 남지 못하겠지요.

 

 미안해요.


 나는 말합니다.
 당신이 떠나도 나는 남아 있어요. 살아가요. 그립고 사랑하고 또 아쉬워해도 돌이키지 못해요. 당신을 죽이는 것도 그리워하는 것도 나인 걸요.
 물레 바늘 아래에서 손을 거두어 그의 검 아래 놓습니다. 그의 검이 내 손에서 다시 피를 내는 날이 오면 그 피로 그를 기억하겠습니다. 공고한 땅 아래에 무엇이 있는지, 단단한 하늘 뒤에 무엇이 죽어 있는지 말하겠습니다. 그를 사랑한 것도, 아쉬워 입 맞추어 준 것도, 그리고 결국 죽게 버려 둔 것도 나였다고 울며 외치겠습니다.


 미안해요.


 나는 꿈에서 깨어납니다. 눈을 뜨면 낯선 침대 위, 당신은 없고 나는 결코 울지 않습니다. 미안해요.

 

 

(end)

mirror
댓글 0
분류 제목 날짜
배명훈 Bicentennial Chancellor - 본문 삭제 -34 2007.12.29
이로빈 붓꽃 우산6 2007.11.30
이로빈 고양이비2 2007.11.30
배명훈 머나먼 퇴근15 2007.11.30
赤魚 반격 - 본문 삭제 -5 2007.10.27
초청 단편 최고의 사냥꾼 2007.09.29
초청 단편 컴패니 2007.08.31
미로냥 유순만담(柔淳漫談) - 본문삭제 -4 2007.08.31
미로냥 지배만담(紙背漫談) - 본문삭제 - 2007.08.31
jxk160 인용2 2007.07.27
jxk160 동거 2007.07.27
jxk160 무덤 2007.07.27
미로냥 화선(花仙) -본문 삭제-2 2007.07.27
초청 단편 바람 부는 날 2007.06.30
배명훈 논문 공장7 2007.06.30
배명훈 매뉴얼 - 본문 삭제 -14 2007.06.30
정대영 도넛 (본문 삭제)3 2007.05.26
곽재식 달팽이와 다슬기6 2007.05.26
초청 단편 아들의 방3 2007.05.26
초청 단편 사막에서 우물을 찾는 방법. 2007.04.28
Prev 1 ... 35 36 37 38 39 40 41 42 43 44 ... 5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