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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빈 개천절 블루스

2019.08.01 00:0008.01

개천절 블루스

amrita

“왜 예전에, 으아, 명절 증후군이라던가, 허, 그런 게 있었다는 거, 알아요? 헉.”

“아, 네. 들어는 봤네요. 전에 뉴스? 무슨 프로그램에서 봤는데.”

“이건, 뭐라고, 허억, 해야 하죠 그럼?”

“뭘요?”

명 대리는 턱끝까지 차오른 숨을 고르느라 한참을 아무 말도 못 했다. 난간을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쥐고서 주저앉아 오 분은 쉬고서야 말을 이을 수 있었다.

“난 아무래도, 으아아, 개천절이 제일 무서워요. 그럼 개천절 증후군? 포비아? 후우.”

“네? 왜요?”

명 대리는 세상 해맑게 왜냐고 묻는 심 대리를 감탄과 분노가 반반씩 섞인 눈으로 보았다. 무슨 로봇이 아닐까? 무슨 체력이 이렇게 좋아? 땀도 안나!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심 대리는 머리를 높이 질끈 올려 묶었는데, 이마에 땀 한 방울 맺히지 않았다.

“심 대리는 등산을 평소에도 좋아하나봐요?”

“딱히 특별히 좋아하는 건 아니에요. 그냥, 공기도 좋고, 나무도 좋고.”

“평소에 취미가 뭐예요?”

“아, 영화 보고, 집에서 뒹굴고 그래요.”

“운동 같은 건 안 해요?”

“아뇨 딱히….”

심 대리는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말했다.

“그냥 회사까지 걸어요. 그 정도고 딱히 다른 건.”

“집이 어딘데요? 아침마다 한 삼십분이라도 걸으면 그래도 운동 될텐데.”

“온양이요.”

“네?”

“온양. 그 온천으로 유명한 데 있잖아요.”

명 대리는 눈을 깜박였다. 온양? 온양 온천 할 때 그 온양? 충청남도의 그? 몇 초의 침묵 후 그는 약간 웃었다.

“에이, 농담도. 괜히 집 물어봐서 그래요? 알려주기 싫으면 그냥 대략적으로 어디 동이라고 해주면 되죠, 거리가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암튼 방금 만난 사람한테 개인 정보를 물어본 나도 잘못이네요.”

“아니에요 진짠데…….”

심 대리는 고개를 살살 저었다. 반곱슬 단발머리가 차락 차락 양옆으로 흔들렸다.

“축지법으로 한 삼십 분 걸려요. 아침을 든든하니 잘 먹으면 십오 분.”

“아니, 괜찮다니까요. 안 알려줘도 돼요.”

“진짠데…….”

심 대리는 목에 걸고 있던 사원증 목걸이를 벗어 명 대리에게 건네 주었다. 사원증 앞면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친정보살 앤 컴퍼니
보 살 증
심 풍

그리고 뒤집어서 뒷면을 보자 사원증에서 명 대리의 생체 정보를 읽어 같은 회사 직원임을 확인 후 상세 사항을 띄워 주었다.

행동실 / 대리
담당 업무: 축지법 외 기밀사항

그리고 맨 밑에는 손글씨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이 사원증을 습득하신 분은 가까운 우체봇에게 맡겨주십시오. 사례하겠습니다.
1, 2, 3, 7.

“어, 아아. 그렇네요 정말.”

명 대리는 뭐라 할 지 잘 모르겠어서 일단 물을 꺼내 한 모금 마셨다.

“그런데 이 숫자는 뭐예요? 무슨 의미가 있는 거예요?”

“아, 그동안 쯩을 잃어버린 숫자예요. 제가 좀 건망증이 있어서.”

“아….”

트랙킹 기능이 있는 사원증을 일곱 번이나 잃어버린 것도 놀랍지만 (대체 어떻게?) 일곱 번 다 되찾은 것도 놀랍다.

명 대리는 물을 심 대리에게 내밀었지만, 심 대리는 고개를 살랑 살랑 저었다. 그래서 명 대리는 사원증만 그에게 돌려 주었고, 물도 가방에 넣었다. 마음 같아선 다 마시고 싶지만 그랬다간 나중에 마실 물이 없어서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는 자신을 잘 알았다. 산을 올라갈 때에는 올라가니까 힘들고, 내려갈 때에는 다리에 힘이 풀려서 힘들다. 이래저래 힘들다. 등산이란 그런 것이다. 세상은 계속해서 미래로 나아가는데, 왜 굳이 힘들게 울퉁불퉁 불규칙하고 불편한 길을 따라서 산을 올라야 하는가? 그냥 날아가면 안 되나? 그런 건 등산이 아니라고 하겠지. 게다가 이 계단은.

명 대리는 계단의 난간을 따라 줄줄이 흘러가고 오는 홍보용 문구를 지친 눈으로 따라가 보았다.

마니산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즐거운 산행 되세요! 참성단까지는 이제 금방이에요! 계단 오르시면서 기 받으세요! 아자 아자?! 마니산의 마스코트 웅웅이가 응원합니다! 단군 할아버지께서 지켜보고 계세요? 힘 내라 힘! [광고] 관절과 간, 숙취와 생리통과 안구는 물론이요 기분 전환에도 두루 좋은 영약을 아십니까? 장안의 화제! 최첨단 영양제! 그것은 바로!

인간들은 명소의 계단을 자동계단으로 업그레이드 시키는게 아니라 난간에 광고판을 다는구나. 그래, 뭐, 돈이 되나보지…. 명 대리는 한숨을 푹 쉬고는 천천히 일어서다가 다시 주저앉았다. 아이고, 팔 다리 어깨 무릎 허리 발목 발가락까지 다 아프네. 하다못해 귓볼까지 아리다. 이놈의 개천절.

“괜찮아요? 계속 갈 수 있겠어요?”

명 대리는 심 대리의 걱정스런 눈길에 울컥 해서 하마터면 눈물을 다 보일 뻔했다. 이놈의 회사에서 자신을 걱정해 주는 사람이라고는 오늘 처음 만난, 눈빛이 맑은, 낯선 회사 동료뿐이네. 아무튼, 고마웠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가방에서 막대 초콜렛을 꺼내 들었다. 이거라도 나눠 먹을까.

“괜찮…아요. 작년에도 올라갔는데요 뭐. 초코 좋아해요?”

“아뇨, 전 단 거 잘 안 먹어요. 잘 갖고 있다가 나중에 명 대리 혼자 다 먹어요. 지금도 많이 초췌한데.”

명 대리는 그래도 강권했고, 심 대리는 마지못해 아주 조금만, 새끼손톱만큼 떼어 갔다. 명 대리는 나머지 초콜렛을 힘들게 한 입, 한 입 베어 먹었다. 이것 역시 다는 안 먹고, 반만 먹었다.

매해 개천절마다 친정보살 앤 컴퍼니의 직원들은 마니산에 오른다. 전직원이 다 산을 오르는 것은 아니고, 실적이 뛰어난 자들만, 거진 탑 3프로만이 등산 초대증을 받는다. 그러니 올해 누구누구가 등산 간다고 하면 모두들 일단 부러워하고 봤다. 등산 간다=승진 혹은 특별 보너스, 혹은 둘다 따논 당상이라는 말이므로. 잘하면 임원을 만날 수 있는 것도 큰 플러스 요소다.

평소에도 등산을 좋아한다든지, 체력이 뒷받침되는 직원이라면 해발 462 미터의 마니산 정도야 큰일은 아니겠지만, 명 대리는 워낙이 원체 운동을 싫어했고 어디 조용한 데 콕 박혀서 꼬물 꼬물 일하는 것만 좋아했다. 올해 등산에 초대받은 것도 어찌보면 그래서였다.

명 대리는 퇴마 팀 소속이었는데, 더러운 하급 잡귀 요괴와 씨름하는 것도 하루 이틀이고 녹초가 다 되어 퇴근하는 것도 어느 정도여야지, 이대로는 도저히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생각한 끝에, 자동지능 기반의 사신 호출 프로그램, 일명 [오 랏 줄]을 짜서 담당 구역의 공공보안 카메라 시스템에 녹여 넣었다. 그렇게 하니 카메라 시스템에서 잡귀를 발견한 뒤 친정보살 앤 컴퍼니의 지원팀에 알람을 보내 저승사자 파견 요청까지 넣는 모든 일이 자동으로 진행되었고, (요괴의 경우에는 지옥팀으로 연락이 가고, 이래저래 처치곤란인 최고 난이도 일은 박이나 흑 실장의 개인 메시지함으로 전달된다) 나중에는 카메라 시스템뿐만 아니라 전기 시스템에까지 섞어 놓으니 더욱 치밀한 스크리닝이 가능해졌다.

이런 시스템을 구축하고 나니 명 대리는 전처럼 번거롭게 밖을 헤매고 다니며 귀신과 요괴의 출몰 패턴과 난이도를 일일이 파악할 필요가 없었다. 일은 전보다 훨씬 줄어들었으며, 지원팀은 심하게 바빠져서 인원을 많이 확충해달라며 매일같이 울어댔다. 맨날 탕비실에서 놀다가 쫓겨나던 게 일과던 지원팀이 갑자기 인원이 모자란다니까 처음에는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일거리가 잔뜩 쌓인 로그가 있는데 안 믿을 수도 없었을 것이다. 아마 그래서 전에 신입을 얼마 더 뽑는다고 했던 거 같다. 어떻게 됐는지는 모르지만.

아무튼 그래서 명 대리는 살 맛이 났다. 이제 더는 후줄근한 여벌 옷을 작업복으로 쓴답시고 아껴 놓지 않아도 되었고, 찌는 날씨 추운 날씨 가리지 않고 외근에, 귀신들린 아저씨가 팬티 바람으로 옥상에서 춤추는 꼴 같은 건 굿바이였으며, 가끔은 운동화 대신 단화나 구두 같은 것도 신을 수 있었다. 외근은 전보다 훨씬 덜 나가는 것 같은데 실적은 나날이 향상 가도를 그리자, 상사는 뭔진 잘 모르겠지만 이제 드디어 일이 익숙해졌나 보다? 앞으로도 잘해? 하고 칭찬도 해주고 갔으며, 명 대리는 가끔 가다가 프로그램의 데이터 입체구축 구조라든지 자가 진화 매커니즘을 조금씩 손보기만 하면 되었다. 바야흐로 좋은 세상이 온 것이다.

등산은 가야 하지만.

“근데 작년 등산에도 왔었어요? 완전 능력자네, 능력자.”

“아, 아녜요. 그냥. 로봇이 놀고 있길래 써보려고 했던 건데….”

작년에는 장미 정원 자가관리 프로그램을 짰었다. 그때 명 대리는 정작 본 업무인 퇴마 쪽에서는 하위권 평가를 받았지만, 장미 정원이 매우 좋아 보인다고 회장님께서 흡족해 하셨다는 소문이었다. 명 대리는 그저 창고에서 놀고 있던 정원사 로봇이 아까워서 주말에 심심풀이로 짰던 건데 그게 그렇게까지 좋은 평가를 받을 줄은 몰랐다. 반짝반짝 금박의 등산 초대증을 받고서 들었던 생각은 ‘뭐야, 이 회사… 뭐하는 회사야? 공로의 포인트가 완전 엉뚱해?’ 였다. 아무튼 좋은 일인 것 같긴 했다.

등산은 가야 했지만.

‘끔찍했어….’

그때는 정말 멋모르고 산에 와서 죽는 줄 알았다. 어떻게 하산했는지 기억도 안 난다. 그는 그래서 이번에는 물에 초콜렛 등 여러가지 간식 거리를 준비해 가지고 왔다. 좋은 등산화에 허리 보조대, 등산용 무릎 도우미 (당신의 관절을 아껴드립니다, 짜자잔?) 까지 찼고, 덤으로 입술 건조 방지를 위해 립밤도 발랐다. 그래서 작년보다는 형편이 조금 낫긴 했다. 적어도 계단 중간에서 쉬면서 모르는 사람과 한담까지 나눌 수 있지 않은가? 작년에는 옆에 누가 지나가는지, 뭔 말을 하는지, 마른 하늘에 천둥 번개가 치는지, 용이 날든지 말든지…. 물론 특별 보너스 받는 건 좋았지만.

“그런데 심 대리는 어쩌다 여기에 온 거예요?”

“아, 전 그냥 덤으로 온 거죠. 초대증 받고 온 건 아녜요. 어차피 와야 하긴 하거든요, 이게 업무의 일부라서.”

“그런 일도 있나요? 무슨 업무길래… 아, 기밀사항이랬죠.”

뭐 본인이 그렇다니까 그런 거겠지. 이름도 매우 애매하고 일반적이라 뭔 일을 하는 건지 짐작하기도 힘든 행동실 소속이라잖아. 명 대리는 반 남은 초콜렛을 가방의 냉방 주머니에 넣었다. 그런데 우리 회사에 그런 데도 있었나? 행동실이라니… 왠지 익숙하긴 한데. 아무튼 모든 게 뒤죽박죽이야, 이놈의 회사는? 부당한 일 투성이라고.

“그럼 황금같은 공휴일에 일하러 여기까지 온 거라고요? 불합리해요.”

“아녜요 그런 건, 원래 이런 일이라는 걸 알았던 거니까.”

심 대리는 방긋 웃으며 손사래를 쳤다. “그리고 어차피 힘든 일도 아니고, 저한테 잘 맞는 일 같아요. 출퇴근보다 쉬운데요.”

“그럼, 뭐….”

명 대리로서는 심 대리 본인이 괜찮다니 자신이 더 뭐라 할 일은 아닌 것 같긴 했다. 하긴 서울에서 마니산이면, 그래도 서울에서 온양보다는 나은가? 온양이 어디쯤이지? 잘 모르겠어. 강화도가 서울 곁이니까 온양보다는 가깝지 않을까?

아무튼 명 대리는 심 대리의 보조를 받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이대로 주구장창 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데 이런 체력으로 퇴마팀에 배정된 거예요? 뭔가 이상한데?”

“그러게요….”

명 대리는 천천히 한 칸, 두 칸, 계단을 올랐다.

“사실 제가 지원했던, 곳이긴 한데요.”

“아아.”

“왜냐면, 청소가 잘 되면, 기분이 좋잖아요.”

“음?”

“박자가, 척척 맞고, 모든 게 딱, 맞아떨어지면, 그럼요.”

“어 음. 네, 그럴 수도 있겠네요.”

명 대리는 모든 게 조화롭게 잘 돌아가는 모양새를 좋아했다. 세상을 합당함으로 채워가는 것이 사람으로서 마땅히 할 일이며, 그런 사람들 덕분에 세상은 전보다 나아지는 것이라고 믿었다. 잡귀나 요괴 같은 것이 부당한 것이 세상에 어슬렁 거리는 것은 그에게 있어 참기 힘든, 불합리한 일이었고, 쓰레기는 쓰레기통에, 꽃은 꽃밭에, 귀신은 저승에, 악한 요물은 지옥에 보내는 일에 이바지하고 싶었다. 그래서 희망 부서를 퇴마 분야로 골랐다. 어차피 오래 생각할 여유도 없었고, 그때는.

그런데! 막상! 들어와 보니 퇴마 팀의 신참은 허구헌날 필드에 나가 살면서 경험을 쌓는 일부터 시작하는 것이었다. 의미는 납득이 가는데, 그런데, 그 방식이…….

“부당하다구요, 헉, 아이고.”

“목적은 합치하는데 방식에서 완전히 어긋난 경우군요.”

“아니, 와 보니 무슨 7세기 전도 아니고 일하는 방식이 완전 쓰레- 음, 그보담요, 저랑 안, 맞아요. 으흠흠. 전, 집순이니까요. 그치만, 회사 일은, 좀 더 포괄적, 다른 개성들도 폭넓게 어울려 적용될 수 있어야, 해요. 그래야, 각종 인재들을, 최대한 모조리 다양히, 뼛골까지 우려- 등용할 수, 있잖아요.”

심 대리는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 곁으로 몇 사람이 훅훅 거리며 멧돼지처럼 두두두두 계단을 뛰듯이 올라 지나갔다. 명 대리는 잠깐 부러운 얼굴로 그들을 보았다. 니네들은 좋겠다….

“일테면, 호율의 문제예요. 그게 요즘 제, 고민 거리거든요.”

“그렇군요.”

그리고 어떻게 [오 랏 줄]의 존재를 눈치챈 건지, 그것도 알 수 없는 일이긴 하다. 그렇지만 회사에서 업무를 모니터링 하다가 발견한 것일 수도 있고, 개발자가 자기 혼자인 것도 아닐 테니 명 대리는 그 부분에 대해서는 깊이 생각하지 않았다. (사실 회사에서 [오 랏 줄]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오히려 실망했을지도 모른다. 이놈의 회사! 직원이 뭘 하는지도 모르고! 라면서.)

어떤 방법으로 알아냈든, 친정보살 앤 컴퍼니에서는 어느 날 갑자기 명 대리에게 [오 랏 줄]을 개발한 공로를 높이 산다며 올해의 모범 직원 리스트에 이름을 올려주더니만 금박이 빛나는 등산 초대증까지 내 주었고, 그래서…….

“등산의 효율이란, 대체, 뭔지!”

얼어죽을 등산을 온 것이다. 개천절에, 마니산으로.

옆에서 심 대리는 여전히 땀 한 방울 나지 않은 말끔한 모습으로 계단을 오르면서, 숨소리 한 번을 놓치지 않으면서, 지극히 평안한 말투로 대꾸해왔다.

“글쎄요, 공기도 좋고 뭐 하늘도 맑고 바람도 잘 불고. 운동도 할 겸 애사심도 다질 겸 그런 거 아니겠어요?”

“애사시임?”

명 대리는 당장 머릿속에서 심 대리의 천하태평 스타일 대답에 대한 반론으로 서론 본론 결론, 각각 2, 5, 1 페이지씩 작성해서 보고서 스타일로 뽑아낼 수 있었지만, 참았다. 그런 걸로 지금 두뇌를 돌리는 것은 에너지를 낭비하는 일이다. 반강제적으로 등산에 직원을 동원하는 일의 효율과 의미와 결과란 무엇인가? 이것이 진정으로 애사심을 장려하는 일인가? 아니면 그 반대인가? 과연? 뿐인가, 10분 안에 나레이션 스타일로 뽑아서 영상 보고서로도, 5초까지 광고로도, 한줄뉴스 용으로도 가상현실용 입체 프레젠테이션으로도 다듬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그래서 뭘 하는가? 지금 자신은 허덕대며 어떻게든 산을 오르고 있지 않은가? 웬수같은 계단 같으니라고. 더러운 세상. 비합리적이야. 말도 안돼. 이럴 수는 없어. 왜 이런 회사에는 지원해 가지고. 왜. 왜지? 그러고 보니? 명 대리는 과거에 취업 준비할 때를 떠올렸다.

‘그러고 보면 그때에도….’

자동 스크리닝 프로세스를 짜서 탑 200개의 회사를 넣었더니 1위로 나온 것이 친정보살 앤 컴퍼니였다. 공교롭게도 취업의 난이도 랭킹에서도 1위를 찍어서, 자신을 잔뜩 긴장시켰던 회사였다. 왜 입사하기가 가장 어렵다는 건지 상세히 뜯어 보니, 불규칙성과 예측불가능성 때문에 2위보다 자그마치 30km나 격차가 났다.

취준생 시절, 명 대리는 뛰어난 성적은 기본에 이미 입체 데이터 프로그래밍을 통달한, 준비된 인재였다. 그런 그의 머리에서 나온 데이터 맵핑 체계는 평지와 산, 골짜기와 사막과 호수, 바다가 존재하는 독자적인 하나의 세계였으며, 가상 현실에서는 아무리 먼 거리라도 생각 한 번에 이동이 가능했으므로 스케일이 아무리 크든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마음대로 먼 거리의 데이터를 이쪽으로 끌어올 수도 있었고, 가까운 곳에 구축된 정보를 한없이 멀리까지 밀어낼 수도 있었다. 그런 식으로 해서 데이터의 이동을 따라 달라지는 현실값을 예측하거나, 목표한 결과를 얻으려면 무슨 조건을 어떻게 움직여야 하는지 계산해볼 수도 있었다. 그때 만들어 둔 데이터 프로그램의 공공 사용료가 아직도 쏠쏠한 부가 수입이 되어 주었다.

동력을 파악할 수 있다면 거리적인 시작점과 끝점은 자동으로 알 수 있다. 동력의 연료를 알아낼 수 있다면 시간적인 맵핑을 할 수 있다.

문제는 불규칙성과 예측불가능성이었다. 친정보살 앤 컴퍼니의 구인 패턴에는 무슨 원칙이나 규칙 같은 게 없었다. 깨날라리 니나노 제멋대로라던 어떤 익명 취준생의 한탄 타령 메들리처럼, 도대체 하나도 말이 되는 게 없어가지고, 모든 것이 질서정연한 그의 가상세계 한가운데서 지 혼자 물음표 모양으로 둥둥 떴을 뿐이었다.

명 취준생은 그게 너무 너무 거슬렸다. 저 거슬리는 것을 풀어내서 적당한 위치에 가져다 둘 수 있다면, 이 데이터 맵은 깔끔 완전해질 텐데. 으으으. 거슬려. 으으으으. 그러던 차에 실시간으로 친정보살 앤 컴퍼니의 게릴라 신입사원 모집 공고가 떴고, 그는 곧바로 입사 지원서를 작성해서 보냈다. 첨부하라는 말도 없었던 온갖 서류까지 죄다 보냈다. (그는 준비된 취준생이었으므로.) 그리고 십 분 후에 면접 초대증을 받았다. 내일 오전 열한 시라고 했다. 무슨 회사가 이리 빠르지? 싶었지만, 어차피 좋은 게 좋은 거, 그는 다음 날 면접을 보았고 면접 중간에 곧장 취직까지 해버려서, 정신을 차리고 보니 퇴마 팀이었다.

‘난이도 1위라며… 데이터? 데이터 맵 씨?’

그런 일이었다. 그리고 일을 정말 자기가 생각해도 지지리 못 했는데, 장미 정원 로봇 프로그램 잘했다고 대리 승진에 특별 보너스까지 받았다. 정말. 이 회사…….

“그런데요, 궁금한 게 있는데요.”

“네? 물어보세요, 헉.”

“명 대리는 작년에 임원분 중 한 명도 못 만났었어요?”

“글쎄요, 기억에 없어서, 잘은 몰라요.”

“아, 힘들었댔지. 그럼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러면요.”

“네에.”

“개발을 잘 하시는 것 같아서 아까부터 궁금했는데요, 음.”

“네, 말씀 해보세요, 으어.”

심 대리는 몇 분을 우물거리다가 드디어 말했다.

“분실물이 자동으로 주인한테 돌아가게 해주는, 그런 것도 그 프로그램 뭐시기로 가능해요?”

“아아.”

명 대리는 생각하는 얼굴로 계단을 세 칸 정도 올랐고, 대답했다. “잘하면요.”

“으하핫!”

심 대리는 한 번 펄쩍 뛰었다.

“그럼 저기 나, 그런 거 맹글어 주면 안 돼요? 사례는 제대로 할게요. 자꾸 쯩을 잃어먹어서, 너 계속 이러면 정말 징계먹인다고 어찌나 구박을 하는지, 어휴. 눈치 보여서 밥도 잘 안 넘어가요. 물론 잃어버리면 안 되긴 하는데, 제가 하는 일 특성상 그게 좀 어렵기도 하고, 아 지금 대답 안하셔도 되고 생각해보신 뒤 알려주세요. 우리 네트워크 연결해놓자구요. 그래도 되죠?”

심 대리는 명 대리가 고개 끄덕이는 것을 확인한 후, 자신의 사원증을 명 대리 사원증에 3초간 댔다 뗐다.

‘그런 건 사원증을 목에 걸고 다닐 게 아니라, 팔목 같은 데 묶어두면 되는 거 아닌가. 가방이나.’

명 대리는 일단 말을 아끼기로 했다. 참성대까지 가서 다시 얘기해도 되겠지, 지금은 모든 게 힘들다.

그러나 명과 심 대리가 참성대에 이르렀을 때, 분실물 자동 복귀 프로그램에 대해 자세한 얘기 같은 걸 나누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우 실장님?”

“그래, 어서 와야.”

동그란 얼굴에 붓가락 같은 눈, 쪽진 머리에 비단결이 자르르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분이 인자한 미소와 함께 그 둘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명 대리는 죽을 것 같이 괴로운 와중에도 심 대리를 따라서 꾸벅 인사했다. 우 실장? 우 실장이면 그, 친정보살 앤 컴퍼니의 최정예 트리오 실장 중 하나라는…?

“이리 올라 와. 기다리고 계시니까.”

“벌써요? 아이 참.”

심 대리는 우 실장과 초면이 아닌 듯했다. 반갑게 다가가서 뭐라 뭐라 얘기하는 폼이, 많이 친해 보이기까지 했다. 명 대리는 급히 수건을 올려 땀을 닦았다. 손도 닦고 손등도, 목도.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던 계단이 마침내 끝났는데, 이제 참성대까지 왔는데, 다짜고짜 우 실장이라니. 긴장감에 안 그래도 지친 뇌가 이제는 그냥 녹아내릴 것 같았다. 이런 건 뭐라 해야 하지? 압박 등산? 극기 훈련? 그런 와중에도 참성대 곁에 붙은 [올라가지 마시오]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명 대리는 참성대 위로 훌쩍 점프해서 올라가는 심 대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저래도 되나…? 올라가지 말래잖아. 그나저나 몸에 날개를 달았나, 가볍게도 뛰네. 이름값을 하는구나, 심 풍 대리는.

“뭐 해요? 아, 내 정신 좀 봐. 도와줄게요.”

심 대리는 아래로 훌쩍 뛰내리더니, 명 대리에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올라가면, 안 된다는데요, 저 간판에.”

“괜찮아요.”

“아니, 우리가 괜찮다고, 될 일이 아니라요.”

심 대리는 씨익 웃었다. “정말 괜찮아요.”

“아니, 그래도아아아악!”

명 대리는 몸이 가볍게 부웅 날아오르는 느낌에 기겁해서 비명을 질렀다. 발바닥이 다 따가울 정도로 놀라 버렸다. 눈앞이 새하얘지더니, 자신의 몸이 무슨 깃털 자루라도 된다는 양 가뿐히 안아든 심 대리의 천하태평한 턱선이 아련하게 잠깐 보이더니, 중력이 사방에서 땡볕 더위 속으로 흩뿌려지는 얼음 조각처럼 녹아내리며 사라지는 것 같더니, 누군가의 머리카락이 살랑 살랑 춤추는가 싶더니 그마저도 어지러움에 못이겨 천천히 지워져 갔다.

심 대리는 파라솔 그늘 드리운 돗자리에 명 대리를 살살 눕혔다.

“왜 그리 급허게. 사람들이 다 심 대리 같은 줄 알으야? 체력이 안 좋은 사람은 더욱 살살 챙겨야 한다고 몇 번을 말했쨌냐?”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도 많이 참았다고요. 오분도 안 걸릴 등산에 한나절을 다 쓰고 나니 힘들었나봐요.”

“아무튼, 급해서.”

우 실장은 혀를 끌끌 차며 다가와 명 대리의 손목을 살짝 쥐었다. 그러자 명 대리는 잠깐 끙끙대더니 곧 눈을 반짝 떴다.

“정신이 들어야?”

“여, 여기는….”

“저승이여.”

“그, 아. 결국 등산하다가 죽은 건가요… 이럴 줄 알았어.”

“아녜요! 아무 말이나 곧이곧대로 믿지 말아요!”

“심 대리…? 심 대리는 왜 여기 있어요? 건강했던 사람이.”

“맛이 갔네, 갔어.”

“회장님.” 우 실장은 뭐라 더 말을 하려다 그치고 옆으로 물러나 섰다.

저승에도 회장님이 있나? 명 대리는 심 대리의 손을 잡고 느리게 일어나 앉았다. 아무튼 여기가 저승이라면 저승 회장님께 잘 보이는 게 좋겠다는 생각에, 그는 일어서서 인사하려 했지만 몸이 도저히 말을 듣지 않아서 일단 급한대로 꾸벅 목이라도 숙였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처음 뵙습니다. 전 명 심이라고 합니다. 아무쪼록 잘 부탁드립니다.”

“그래, 기다리고 있었네. 체력은 작년보다 한 톨도 나아지지 않았구먼?”

“죄송합니다, 제 불찰입니다.”

친정보살 앤 컴퍼니의 회장은 화려한 컬이 돋보이는 단발 파마머리에 무지개색 줄무늬 등산복 차림이었다. 양 어깨에는 한 글자씩 단 군 이라고 수놓여 있었다. 바람에 머리칼이 날릴 때마다 다이아몬드 귀걸이가 햇빛을 받아 희게 반짝였다. 단아한 코와 얌전한 입매, 잔잔한 검은 눈동자는 사뭇 편안하고 자상한 분위기를 자아냈지만, 명 대리는 아예 땅만 보았으므로 이 모든 디테일을 잘 볼 수가 없었다.

우 실장은 명 대리에게 둥그런 크리스탈 사발을 건넨 뒤, 막걸리를 가득 따라 주었다.

“쭉 들이키우. 기운이 날게니.”

“네에. 감사합니다.”

명 대리는 정말로 막걸리 한 사발을 쭉 들이켰다. (그는 체력은 별로여도 술은 또 그럭저럭 했다.) 어차피 아무러면 어떤가, 저승인데. 그런데 마시고 나니 정말로 기운이 났다. 한결 몸이 가뿐해지는 느낌이라, 명 대리는 눈을 크게 떴다. 눈이 절로 뜨였다는 편이 맞겠지만.

이 술은 뭐지? 보약인가?

“우리 우 실장이 직접 담근 곡주일세. 우루다 열 통 먹느니 이거 한 사발 마시는게 낫지. 맛도 일품이고.”

“네에….”

친정보살 앤 컴퍼니의 회장, 단군은 명 대리에게 육포를 한 줄기 내밀었다.

“이것도 좀 뜯게.”

“감사합니다.”

명 대리는 육포를 냉큼 받아 들었다. 옆으로 돌아앉아 한 입 뜯는데, 적절히 짜고 달고 매콤한 맛이 진하게 혀를 물들여서, 왠지 모를 감동마저 심장을 울리며 퍼져나갔다.

“진짜 맛있어요!”

“그렇지? 그렇다니까.”

“어쩜 이렇게 맛있을까요! 참, 죽기를 잘했네요.”

단군 회장님은 핫핫하 하고 시원하게 웃어 제꼈다.

“죽긴 누가 죽어? 우 실장이 농담한 거야. 죽었으면 패 전무를 만났겠지. 아직 자네 명이 한참은 남았으니 그건 나중에 걱정하세.”

심 대리는 슬그머니 명 대리 곁에 앉았고, 우 실장은 단군 옆자리에 앉았다. 아직 멍해 보이는 명 대리에게 심은 나즈막히 속닥거렸다.

“우리 회장님이세요. 명 대리에게 맡길 일이 있다고 하셨어요.”

“네, 네? 저 죽은 거 아니에요?”

“잠깐 기절했었긴 했어요.”

“아. 전 또, 저승 사람들이 농담하는 줄 알고….”

“사람이 너무 천재여도 인생 피곤해.”

단군은 그러면서 명 대리의 크리스탈 사발에 곡주를 다시 채워 주었다.

“자, 그럼 본론으로 들어가지.”

“네, 아 네. 감사합니다.”

“일단 먼저 마시고. 나도 한 잔.”

단군은 자기 사발에도 주전자를 기울여 곡주를 가득 채웠다. 그러자 그의 손에 들린 크리스탈 사발에서 은은한 광채가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금색, 무지개색, 백색으로. 저, 저것은 혹시 신통력인가? 말로만 듣던 그? 그런 명 대리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우 실장이 옆에서 설명해 주었다.

“광원 처리된 막걸리 사발이여. 내달 출시될 물건이거든.”

“아, 그렇군요.”

“술상에 바다가 일렁이고 달이 뜨고 꽃이 피는 세튼데, 회장님이 전부터 그런 거 만들라 만들라 노래를 부르셔서 이번에 런칭하게 됐으야.”

“아 지금 시대가 어느 땐데 여직꺼정 이런 거 하나 제대로 만드는 곳이 없어!”

“알겠으니까 회장님은 곡주나 마저 넘기시요.”

“흠, 흠.”

단군은 얌전히 우 실장의 말대로 사발을 쭈욱 들이켰다. 그 틈을 타서 명 대리도 옆으로 돌아앉아 사발을 비웠다. 그는 아직도 자기가 이런 자리에 와 앉았다는 사실을 믿을 수가 없었는데, 방금 전 기절까지 했다가 죽었다 깨어나 (진짜 죽었던 것은 아니지만) 막걸리까지 마셔서 그런가 적당히 비현실적이고 몽롱한 기분인 것이, 회장님 앞에서도 그다지 긴장이 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될 대로 되라 싶기도 했다.

단군은 육포 한 줄기를 재차 명 대리에게 내주며 말했다.

“자 그럼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지. 자네한테 맡겨야 할 일이 있으니까.”

“아, 네. 말씀만 하십시오.”

“자네도 알다시피 옛날에는 프로그래밍 언어의 춘추전국시대였잖은가? 그래서 인간이 기계를 다루는 일의 진입 허들이 꽤 높았지. 그러다 인공 지능이니 뭐니 하다가 상위 프로그래밍 언어가 나왔고, 그게 여러 시도를 거쳐 오늘날의 자동지능 매커니즘으로 이어졌잖아? 이거야 자네 전문 분야니까 잘 알겠지만.”

“네, 말씀하신 바가 맞습니다.”

“그래서 좋은 세상이 왔단 말이야, 굳이 번거롭게 사람들이 따로 코딩할 없이 일상적인 언어로 말해도 기계가 다 알아 들으니까. 안 그런가? 물론 복잡한 경지로 들어가자면 뇌과학이니 뭐니 한도끝도 없지만.”

“네, 맞습니다.”

“자네의 장미 정원 로봇 프로그램도 그렇고, [오 랏 줄]도 그렇고 말이야, 보다 보니 흥미로운 점이 많았어. 자동 진화 패턴도 패턴이지만, 어쩌다 이매망량 스크리닝 프로세스를 공공보안 시스템에 섞어넣을 생각을 했나? 정부에 어필해서 협력정책 주도사업이란 명목으로 합법적으로 굴리게 하느라고 애들이 시공간을 거슬러가서 고생 좀 했네.”

“아, 그건, 제가 우선시하는 것은 효율성이라서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효율?”

“네, 그래야 합리성이 도출될 수 있으니까요.”

단군은 명 대리에게 막걸리를 한 사발 더 따라주며 상큼히 미소 지었다.

“정말 재밌어, 전과 하나도 달라진 게 없잖아? 사람 안 변한다더니 자네 경우를 두고 그런 거 같구먼?”

“네, 아, 네? 전이라면….”

내가 전에 회장님을 만난 적이 있었나? 명 대리는 기억을 촤르륵 훑었지만 도무지 그런 적은 없었다.

“왜 전에 배꽃 패밀리가 나라를 운영할 적에, 그때에도 일을 합리적으로 말이 되게 제대로 해야 한다며 허구헌날 신하들 굴리던 거 기억 안 나나? 하긴 전생이니까.”

“아, 제가요? 그랬단 말입니까? 전….”

전 뭐? 전생? 배꽃 패밀리는 또 뭐야. 설마 조선?

“그래도 좀 그러네. 그때도 나하고 꿈에서 술 마셔놓고.”

“네…?”

생사람 잡지 마십쇼, 제가 언제요? 라고 되물으면 안 되겠지, 회장님한테. 명 대리는 막걸리를 일단 반 사발 정도 마셨다. 그나저나 이거 정말 맛이 너무 좋다.

“왜 그때에도 내가 그랬잖아, 일을 제대로 하고 싶으면 인재를 모아야 한다고. 그러니까 사막에서 벼 키우는 소리 하지 말라며? 그래서 내가 온 백성의 효율성을 원하거든 먼저 뭐 부터 하라고 했나, 자네한테?”

“그….” 이 시점에서 명 대리는 대한민국 유구한 전통의 청문회 단골 멘트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기억이… 안 납니다.”

“호환부터 시키랬잖아. 그래서 자네가 한글을 만든 거잖아? 말이 되는 말을 만들어서 온 백성을 언어 호환 시킨다고.”

“죄송합니다, 전생이라 기억이 도무지… 안 납니다.”

“그래 뭐 전생이니까 기억을 못할 수도 있겠지. 그건 이해하네. 그래도 이번 생에는 퇴마 팀에 넣어주면 좀 돌아다니면서 체력도 기르고 할 줄 알았건만 이게 뭔가? 무슨 히말라야도 아니고 마니산 정도 오르면서 기절까지 하고? 세종이 건강이 좋았으면 배꽃 패밀리의 운명이 크게 달라졌을 텐데, 그 참. 답답하네 또 생각하니.”

명 대리는 왜 죄송한지도 모르고 (아니, 알기는 했지만) 그저 죄송하다는 말만 반복했다. 세종대왕이었다고? 내가? 전생에? 그게 뭐야? 꿈을 꾸는 건가? 사실은 아까 죽어서 지금 임사체험 중인 게 아닐까?

“아무튼 이번 생에도 이렇게 다시 만났으니 임무를 주겠네. 본격 현실 절대호환 프로그래밍 언어를 개발해 보도록 하게.”

“네… 네?”

“자네가 그런 걸 만들면 회사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많아. 그 언어로 잡귀 소멸, 차원 이동, 괴물 해체, 회복에 천도에… 그럼 우리 실장 트리오가 만년 과중 업무에 시달릴 일도 없을 테고.”

“그, 네, 그렇군요….”

“자네는 항상 효율성을 중시하지 않는가? 효율성은 호환성에서 나온다고. 논이 있어야 벼를 심을 게 아닌가?”

“네….” 그런데 그런 언어를 어떻게 만들죠? 저더러 어쩌라고.

“지금도 그럭저럭 굴리는 언어가 있긴 한데 임원들 개인 권한에 한정된 면이 많아서 많이 불편하거든. 아무튼 잘 만들어 보게나.”

“네…….”

다 때려치고 퇴사하겠다고 하면 안될 것 같은 분위기다. 명 대리는 그냥 앵무새처럼 얌전히 대답만 했다. 모르겠다, 어떻게든 되겠지. 일단 이 자리는 모면하고 보자.

그런 그의 생각이 들고 나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기라도 한 듯 단군 회장에게서 또다시 질문이 날아왔다.

“대답은 잘만 하는데 어떻게 개발할지 무슨 아이디어라도 있나?”

이에 명 대리는 빠르게 포기하고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뇨, 하나도 모르겠습니다.”

“의지를 현실화 시키는 언어를 만들라는 말이야. 우리 회사 사원이면 누구나 쓸 수 있는. 일 더하기 일은 뭔가?”

“이 입니다….”

“그럼 일 더하기 조약돌, 호랑나비 그림자, 송사리 꼬리, 애들 웃고 떠드는 소리, 포도알 몇 개 더하기 장미 꽃잎 한 장이면 뭔가?”

“그… 아……. 모르겠습…. 네?”

“때늦은 가을 태풍이라네.”

명 대리는 입을 뻐끔거리다가, 육포를 한 입 뜯었다.

“자네는 꽃이 뭔지 아나?”

“꽃이, 꽃이죠.” 으아아아.

“장미 정원을 피운 본인의 공이 얼마나 큰 건지 짐작은 하는 건가?”

“글쎄요, 관상적으로도 좋고, 그런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꽃의 마지노선이라는 게 있다네.”

단군은 빈 사발을 밥상에 내려 놓았다.

“꽃들이 그 선보다 적게 피면 세상이 망하거든. 그냥 멸망해. 그런 일을 알겠나? 땅에서든 바다에서든 다들 할당량을 채우겠다고, 세상을 지키겠다고 애쓰는 속사정을.”

“네….”

명 대리는 왠지 약간은 알 것 같았다. 세상 만물은 제각기 열심히 일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따지고 보면 다들 저마다의 언어를 사용하는 것이고, 그 언어들의 상위 언어가 또 있는 것이고, 친정보살 앤 컴퍼니의 직원들은 보살으로서 또, 그런 어떠한… 자신만의 언어로 세상의 언어를 지우거나 더하거나 덮어씌우거나 고치면서 일하는 게 아닐까. 그런 게 가능하려면 보살과 세상의 언어는 적절하게 호환되어야 한다.

그런 호환성을 쉽고 간단한 형식으로 패턴화 할 수 있다면…. 누구나 금방 배워서 써먹을 수 있도록….

“그런데 회장님, 호환성이라는 것이요….”

“그래.”

“꽃을 피우려 할 때, 무작정 꽃아 피어라 이러는 건 호환성이 아닌 것 같습니다. 그건 좀 강제적이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러면, 제가 그려내야 하는 것은, 호환성 그 자체가 아니라 호환성의 유도체 입니까? 그것을 패턴, 언어화 해야 한다는 뜻이신가요?”

“그렇지.”

“그렇군요….”

단군은 자신과 명 대리의 사발에 다시 곡주를 부었다.

“이게 마지막 잔이구먼. 암튼 이제 좀 이해한 것 같으니 됐네. 속이 시원하구만?”

“저, 그런데 회장님.”

“그래, 왜?”

“단군 신화에서 곰과 호랑이 얘기 있지 않습니까? 동굴에서 쑥과 마늘을 백일간 먹어야 사람이 된댔는데 호랑이는 도망가고 곰만 버텨서 사람 된 얘기요.”

“그랬지.”

“그게 정말 있었던 일인가요? 전부터 궁금하던 점이라서 꼭 알고 싶었거든요.”

“있었지. 얼마 전에도 있었잖아?”

“얼마 전이요?”

“그래, 남한과 북한으로 나뉘어 있었잖아? 그게 그 얘기나 똑같은 거지.”

“아…. 그럼 마늘하고 쑥 얘기는….”

“사람이 사람같이 살려면 먹는 것도 가릴 줄을 알아야지. 고기 맛을 포기하고서라도.”

“아…. 그런 뜻이군요. 심오한 의미가 있었군요.”

단군은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스승으로 모시게 해달라며 귀찮게 따라다니길래 떨궈내려고 그럼 풀만 백일간 먹고 살아보라고 했던 건데, 정말 버티는 인간들이 나올 줄은 몰랐다고 이제와서 말하기에는 좀 그랬다.

‘그래서 맨날 지들끼리 치고박고 싸우는 이런 인간들하고 엮인 거 아닌가? 벌써 몇 번의 천년이야. 초상화랍시고 웬 수염만장 아저씨를 그려놓지를 않나.’

“어쨌건 자세한 건 심 대리가 알려줄 테니 그리 알고, 앞으로는 개발에나 힘쓰게.”

“네, 알겠습니다. 잘 해보겠습니다, 회장님.”

“그래.”

이제 몸이 한결 가벼워진 명 대리는 일어서서 단군에게 꾸벅 허리 굽혀 인사를 했고, 크리스탈 사발도 가져가라며 우 실장이 씻어서 상자에 담아주는 것도 정중하게 받아 들어 가방에 넣었다.

심 대리는 올라왔을 때처럼 명 대리를 공주님처럼 안아서 훌쩍 참성대 아래로 뛰어내렸다. 바람이 둥글게 모여들었다가, 사방으로 퍼져나가며 두 사람을 가뿐히 내려 주었다. 일순 오렌지 같기도 하고 유자 같기도 한 향기가 뭉클 솟았다.

명 대리는 왠지 어색하고 부끄러운 기분에, 심 대리를 바라볼 수가 없었다. 내가 이 나이에, 이런 체력인 게 죄지. 평소에 좀 운동을 할 걸 그랬어.

“솔직하게 말해 봐요.”

“네, 네?”

“여기서 다시 한 걸음 두 걸음 하산할래요, 아니면 그냥 내가 주차장까지 안아다가 줄까요?”

“아….”

명 대리의 이성은 어서 이 당황스런 제안을 사양하라고, 스스로 걸어서 내려가겠다고 말하라고 그를 종용했지만, 그의 입에서는 정반대의 말이 나갔다.

“그, 그래 주실 수 있어요? 힘드실 텐데.”

“괜찮아요. 전 풍사니까요.”

“풍, 풍사요?”

“네, 그래서 이름도 풍이에요.”

“그럼 행동실이라는 거가….”

“원래는 비서실이었는데 좀 예전에 이름을 바꿨어요. 회장님께서 바꾸라셔서.”

“아…그아아아아아악!”

갑자기 심 대리가 훌쩍 날아오르는 바람에 명 대리는 기겁을 하고 그의 목을 팔로 감았다. 그는 눈을 꼭 감았다. 무게감이 사라진 몸은 당장이라도 천팔백가지 깃털로 흩어져 부서져 나갈 것만 같았고, 귓가로는 바람 스치는 소리만 간혹 가까워졌다 멀어졌다.

“근데, 그거 알아요?”

“뭐, 무뭐뭐뭐뭐뭘요!”

“세종대왕의 비 말예요. 소헌왕후.”

“네, 그렇죠.”

“소헌왕후가 심온의 딸이었잖아요.”

“그래요. 그게 근데 왜요. 아아아 갑자기 고도를 팍 높이고 그러지 마요!”

“나두 심 씬데. 재밌는 우연이죠?”

“그그그 그래요, 그런 것 같네요!”

심 대리는 씨익 웃었지만, 명 대리는 눈을 감았기 때문에 볼 수 없었다.

“다음주부터 제가 집 앞에서 기다릴게요. 우리 출퇴근 같이 하는 거예요, 이제부터. 명 대리 직위도 사무실도 다 달라질 거니까 기대하세요?”

“네, 뭐든 할테니 목숨만은 살려주세요!”

“그렇게까지 열혈 예스는 안 해도 되는데.”

심 대리는 명 대리를 안고도 하산하는데 십 분도 걸리지 않았다. 아니, 십 분도 많고, 오 분에 가까웠을 것이다. 명 대리는 주차장 벤치에 앉아서 한동안 숨을 골랐다. 정말, 안 죽은 게 신기하다, 아휴.

“그리고 시간 날 때 아까 부탁한 거 만들어 줘요? 난 다시 가 봐야 해서 그럼 이만!”

“아, 저기요! 심 대리! 심 대리님! 아…!”

심 대리는 이미 다시 훨훨 날아갔고, 명 대리의 안타까운 손끝이 가리키는 저 멀리로 사원증 목걸이 한 줄기 팔랑 팔랑 날아갔다.

청명한 하늘과 산세와 바람과 구름이 한데 어우러진 허공의 어딘가로 녹아내리듯 사라지는 심 대리의 사원증을 명 대리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바라보았고, 어디선가 날아온 멧비둘기 한 쌍이 구구 거리며 회사 버스 앞에서 모래를 쪼았다.

“아까 그냥 말해줄 걸, 팔에 묶든지 하라고….”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이미 일어난 일 아닌가. 다음 주에 다시 만나면 쯩 찾았냐고 물어봐야지. 그거 없이 회사에는 어떻게 들어가는가? 자주 있는 일이라 괜찮은가? 그런데 회장님 비서라면서 왜 대리지? 다른 직위여야 되는 거 아닌가? 옛날 얘기에서도 풍사 우사 운사는 단군 (회장님)의 직속이잖아.

‘모르겠다. 담에 물어보자.’

뭐가 어찌 됐든, 명 대리는 궁금한 것은 못 참는 성미였다. 한 번 집중한 일은 꼭 끝을 보는 것도 그랬다. 전생에서도 그랬으며 현생에서도 그랬다. 물론 그에게 전생의 기억은 없었지만, 전생에서 준치면 현생에서도 준치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그러므로 그런 일이었다. 어쩌면 명 대리라면 정말로 단군 회장이 맡긴 임무를 성공적으로 완수해낼 지도 모른다.

댓글 2
  • No Profile
    갈원경 19.08.30 07:48 댓글

    웃다가 숨 넘어가는 줄 알았어요 멋져요!

  • No Profile
    글쓴이 amrita 19.10.12 01:29 댓글

    감사합니다! 저도 쓰면서 재밌었어요 전에 마니산 갔던 기억도 나고... 계단... 끝나지않는 계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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