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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간단 오븐마법 레시피: #103

amrita

오랜 고민 끝에 컵케잌을 만들기로 했다.

재료는 밀가루, 베이킹 소다와 베이킹 파우더, 버터, 설탕, 소금 한꼬집, 레이디 그레이 티백 두 개, 우유와 라임즙이다. 아이싱도 만들까 하다가 생략하고 크림치즈와 수제 딸기잼을 얹기로 했다.

날은 맑고 바람은 시원하고 동네는 너무나 조용하다. 항상 이 시간이면 지나가는 야채 트럭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좀 아쉽긴 했다, 오늘은 싱싱한 딸기를 사먹고 싶었는데.

딸기처럼 붉고 상쾌하고 귀여운 게 없다. 그냥 보면 붉은 것만 같지만, 사실 딸기의 색깔은 붉은색과 흰색의 아슬아슬한 밀당이 결정한다. 거기에 아주 작은 딸기 씨앗들이 보조개의 향연을 펼치며 콕콕 숨어준 보람이 있어 깜찍한 분위기를 제대로 조성해 주는 것이다.

좋은 시절이 없지는 않았다. 일단은 말랑한 실온 버터를 핸드 믹서로 풀어 준다. 이 버터만 해도, 영원히 딱딱히 굳은 채 냉장고 구석에 처박혀 있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살랑살랑 녹는다는 건 얼마나 좋은 일일까. 달고 시고 부드러운 맛들과 온몸으로 뒤섞여서 뜨겁게 케이크로 피어오른다는 건 버터가 꿈꿀 수 있는 가장 행복한 운명일지도 모른다. 버터가 얼추 풀어지면, 설탕을 더해서 다시 섞어 준다. 버터와 설탕이 섞이며 하늘하늘하니 레몬빛 허니 크림처럼 부드러워진다. 레이디 그레이 티백을 잘라서 여기에 뿌리고, 잘 섞어 준다. 금세 상큼한 향기가 피어올라 기분까지 청량해진다. 그리고 계란을 하나씩 깨서 크림을 구름처럼 올려 준다.

계란은 언제 봐도 신기한 재료다. 모든 걸 부드럽게 해주고 폭신하게 해주고 물과 기름처럼 서로 겉도는 재료들을 왈칵 끌어안아 한몸으로 만들어 준다.

레이디 그레이 홍차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배신한 적이 없지. 레몬 필, 오렌지 필, 그리고 푸른 수레국화의 정연한 조화는 언제 봐도 마음을 기쁘게 한다. 노랗고 더 노랗고 깜짝스레 파란 꽃잎, 어둔 홍차 속에서 시야를 한듯한듯 밝혀주는 반가운 색깔들.

볼 때마다, 아니, 생각만 해도 심장이 녹아내리던 얼굴이 내게도 한때는 있었는데. 그때는 세상도 따뜻했고 사람들도 산뜻했어. 사랑이었으니까, 아니, 사랑이라기보다는, 사랑이고 싶은 착각에 푹 빠져 있었으니까.

우유는 계량컵에 따라 놓고, 라임 즙을 섞어서 몽글몽글하게 일어나도록 가만히 둔다. 그래야 나중에 베이킹 소다와 만나서 케이크를 한층 더 부풀릴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무래도 좋았다. 사랑인 줄 알았던 내 무지도, 아픔도 눈물도 이제는 지난 일. 그리고 이미 한 달이 갔는데, 이 정도면 충분히 기다려 준 거라 생각해. 오년을 만났지만 띠동갑 스물둘 어린 여자가 좋다던 사람한테는 넘치도록 과분한 관대함이잖아.

이제 밀가루와 소금 한꼬집, 베이킹 소다와 베이킹 파우더를 잘 섞어서 체쳐 주고, 삼분의 일만 레이디 그레이 버터 크림에 살살 섞는다. 그런 후에 준비해둔 라임 우유의 절반을 부어서 다시 잘 섞고, 다시 밀가루 삼분의 일, 다시 우유, 마지막으로 나머지 밀가루와 핏방울 약간을 다 흘려넣으면 얼추 끝.

끝이라는 건. 그런 건 뭘까? 양다리의 끝? 권태와 싸움과 손찌검과 차가운 눈빛의 끝? 거짓말과 기만도.

(반죽은 가루와 액체와 번갈아 몸을 섞으며 침침해졌다가, 해이해졌다가, 마지막에는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고 대뜸 숙연해진다. 그러면 손을 떼야 한다. 거기서 욕심을 부려서 더 뒤적거리면 케이크가 질겨지므로.)

내게는 힘이 있으며, 더는 망설이지도 않을 거야. 무가치한 그런 놈 따위에게 더는 나의 삶을 조각 조각 갈라내어 먹이지는 않아.

컵케잌 팬에 반죽을 고르게 담아 오븐에 집어 넣는다. 나머지는 불 기운에 맡길 뿐이다.

불은 또 어떤 것인가. 타오르는 것이고, 빛나는 것이며, 뜨거운 것이고, 무거운 것을 태워서 아주 가볍게 만들어 날려 보내는 힘이다. 불 앞에서 어물쩡하거나 망설일 수는 없다. 일단 타들어가면 타들어가는 것이므로. 재미있는 것은, 불에 몸을 던지면 몸은 끝장 나지만 또 연기는 새로 피어오른다는 점이다. 물이 곱게 씻어주는 힘이라면, 불은 죽음으로써 씻겨주는 힘일까? 아니, 물도 홍수가 나면 다 죽이는 건 마찬가지지. 어쩌면 본질은 같은 것일까?

눈을 감는다. 양손을 얼굴에 덮는다. 불과 정오의 태양과 피와 눈물과 여기저기 헛된 꿈 꾸며 돌아다녔던 데이트 장소들과 선물과 문자, 손편지, 같이 찍은 사진들을 떠올린다. 툭하면 삐져서 어르고 달래줄 때까지 말도 한 마디 하지 않던 습관과, 손을 잡으려 하면 귀찮아 하며 먼저 빠르게 걸어가던 뒷모습, 넌 뭐가 그리 진지하냐며 손에서 폰을 떼지 않고 건성으로 대답하던 옆 얼굴, 싸우다 말이 막히자 목을 눌러놓고 그냥 장난이었다며 으쓱이던 어깨, 헤어지자는 말에 피식 비웃던 기름진 눈빛까지.

그리고 불을 생각한다. 붉고 노랗고 푸르고 흰 불꽃이 검은 세상의 한가운데에서 아찔하게 폭발하는 모습을, 그 심중을, 관자놀이가 쩡 하니 울리도록 아프게, 칼을 끝까지 찔러 꿰내듯이 들여다 본다.

보고 싶지 않았던 수많은 것들. 그저 바라보는 일만큼 무서운 것이 없었다. 세상 천지에 들여다보는 순간 사라지는 것들 뿐이었고 헤어지느니 조금 아픈 게 낫다고 생각해왔다. 나만 눈을 감으면 된다고, 안 보면 된다고, 그러면 행복해질 수 있을 거라고.

하나씩 둘씩, 불길 속으로 던진다. 목에 핏대 세우며 욕하던 그의 벌건 눈도, 치켜 올리던 의기양양한 큰 손도, 무슨 이런 비싼 옷을 샀냐며 가위로 치마를 잘라내며 웃던 입가도, 사랑한다던 말도, 너밖에 없다고 영원히. 나는 더는 삶을 스스로 질기게 비벼 망치지 않을 것이다. 불의 입김에 닿자마자 비명지를 새도 없이 창백하게 타올라 부스러져 날아가는 재를 본다. 망설임도 자책감도 함께 던진다. 불길의 뜨거움에 목이 건조하게 말라붙어도, 멈추지 않으며 멈추지 않고 멈추지 않는다. 이것은 이제와 구태여 원망에 눈이 멀어 하는 일도 아니며 복수도 아니고 저주도 아니고 오로지 완전한 정리를 위한 일이니 이제라도 저의 시간이, 그의 시간이, 세상의 시간이 올바로 흐르도록 하소서.

오븐 속에서 쩡 하는 소리가 울려 답한다.

타인의 잔혹함은 타인에게로, 욕심은 욕심 부린 곳으로, 어리석음은 어리석음을 낸 곳으로, 현상은 근원으로 분노와 폭력은 벽을 후려치던 그 손아귀로 결국 돌아갈 것이며 이렇듯 마땅히 모든 것이 적처로이 이루어지리니 불길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순명한 진실만이 남아서 향그러우리이다.


다 식은 컵케잌 위에 크림치즈와 딸기잼을 얹는데 폰이 진동한다.

‘갑자기, 네가 생각나서. 지금 뭐 해? 바쁘니? 오늘 날이 참 좋다, 그지?’

그러거나 말거나 아랑곳않고 블러드 레이디 그레이 컵케잌을 한 입 베어 문다.

그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것은 그로부터 한 달 후였다. 웃기다면 웃기게도, 하필이면 모텔 앞에서 사고가 났는데 엉망으로 주차된 차들 때문에 앰뷸런스가 제때 도착할 수 없었다고 한다.

댓글 2
  • 너울 19.02.28 19:00 댓글

    산문시 같은 느낌이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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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amrita 19.02.28 23:39 댓글

    글쿤요 베이킹의 리듬을 타고 싶었읍니다 아마 그래서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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