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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말시티 별 헤는 밤의 기억

2019.12.01 00:0012.01

별 헤는 밤의 기억

노말시티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 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이 시를 끝까지 다 외운 적이 있어요. 특별히 시를 좋아하는 학생은 아니었습니다. 시가 무언지도 잘 몰랐어요. 이 시를 외운 이유는 아마도, 길었기 때문입니다. 시는 모르지만, 기억력은 좋았거든요.

 

이 시를 외워오라는 국어 선생님의 숙제는 농담이었을 겁니다. 아무도 안 외웠거든요. 끝내 반 애들을 일으켜 시를 외워 보라고 시킨 것도 짓궂은 장난이었을 거에요. 누구도 외우지 않았고, 선생님도 그저 피식 웃을 뿐 혼내지 않았거든요. 한 명, 한 명 내 앞의 아이들이 머리를 긁다가 자리에 앉았고, 제 차례가 되었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선생님은 아마 따로 준비한 무언가가 있었을지도 모르겠어요. 한 줄의 아이들이 전부 그 시를 외우지 못하면, 아마도 당연히 그랬겠지요? 그러면 선생님은 그걸 나무라든, 격려하든 한 다음에 수업을 진행하려 했을 거에요.

 

그래요. 한 반에 네 분단, 여덟 줄이 있는데 선생님이 지목한 줄이 제가 앉은 줄이었어요. 높은 확률이라고 할 순 없겠죠? 아, 좀 성급한 결론이네요. 저 말고 저 시를 다 외웠던 사람이 또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제가 이렇습니다. 자기 중심적이죠. 그런데, 그 날은 정말 그랬어요. 선생님의 눈길이 한 칸 한 칸 제 자리로 다가올 때, 제 머릿속은 하얘지고 반 전체가 바깥쪽 부터 지워져 나갔어요. 결국엔 저만 남았죠. 선생님하고요.

 

결국 제 차례가 되어 의자에서 엉덩이를 떼고 서서히 일어나면서 수많은 생각을 했어요. 아직 허리가 구십도에 가까왔을 때는 저도 그냥 머리를 긁고 앉으려고 했어요. 다들 그러리라 여겼었고, 왜 그런 분위기 있잖아요. 아, 이렇게 행동하면 아무 문제가 안 생기겠다, 그런 분위기. 당연하다는 눈빛, 당연하다는 몸짓, 내가 미처 그 행동을 하기도 전에 모두가 당연하게 내 행동을 예상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갈 준비를 시작하는, 그런 분위기.

 

아, 전 문제아는 아니었어요. 공부를 그다지 못하는 학생도 아니었고. 국어 선생님은 가끔 절 아껴 주시기도 했어요. 저만 그렇게 느꼈던 걸까요? 모르겠네요. 일어나 몸을 펴고, 선생님은 장난기 어린 눈빛으로 날 바라보고, 거기에 어떤 기대감이 있었을까요? 당시에 전 그렇게 믿었는지도요. 솔직히 아무런 기억이 안 나요. 어쨌든 첫 단어가 제 입에서 나왔습니다.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오오오오. 아이들이 환성을 질렀어요. 제가 외우고 있어서는 아니에요. 솔직히 거기까지는 다 알잖아요. 아이들이 그런 반응을 보인 건, 어차피 다 외우지도 못하면서, 마치 외우고 있는 것 처럼 제가 장난을 친다고 생각해서였을 거에요. 다시 말하지만, 전 문제아나 장난 꾸러기는 아니었어요. 쑥맥에 가까왔죠. 그런 제가 장난을 시도한다고 생각했으니, 조금 놀라기도 했을 거에요. 이제 생각해보니 그 오오오오에 놀라움도 좀 있었겠군요. 이유는 달랐겠지만.

 

가슴 속에 하나 둘 새겨지는 별을. 제일 먼저 바뀐 건 선생님의 표정이었어요. 눈이 조금 커졌거든요. 이제보니 기억이 나는 것도 있군요. 사진같은 장면들일 뿐이지만요. 갑자기 걱정이 되었어요. 내가 다 외우고 있는 게 맞나? 확신할 수 없었어요. 바로 다음 구절만 생각났거든요.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그 다음 구절이 생각났어요. 쉬이 아침이 오는 까닭이요. 그렇게 하나 하나 입에서 쏟아졌어요.

 

신이 들린다고 하나요. 전 미신을 믿지 않지만 그게 어떤 기분, 아니 몸의 상태인지는 알 것 같아요. 저는 제가 아니었어요. 오히려 저는 공중에 붕 떠 올라 별 헤는 밤을 끝까지 외우는 한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어요. 반 아이들과 똑같이 신기해하면서요. 정말 신기하게 입에서 술술 싯구가 흘러나오고 있었어요. 아직 나의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이 시의 중간에 이 부분을 넣은 게 제가 시를 외울 때의 극적인 효과를 위해서는 아니었을 거에요. 당연하잖아요?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별 하나에. 별 하나에.

 

제가 사랑과, 쓸쓸함과, 동경과, 시를 말할 때, 반에는 더 이상 오오오오를 외치는 아이들이 없었어요. 아, 저희 학교는 남녀공학이었답니다. 남학교였다면 혹시 이 부분에서 분위기를 깨 버리는 짓궃은 아이가 있었을까요? 그건 저의 행운이겠네요. 어쨌든, 그 때 교실 안은 정말 조용했어요. 제가 별 하나를 외칠 때마다 한 칸씩 정적이 쌓여가는 듯 했어요. 그리고 어머니.

 

시의 중간에 산문이 들어가는 경우는 별로 없죠? 요즘에야 노래의 중간에 리듬을 탄 랩이 들어가는 게 흔합니다만. 제가 과문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시 중간에 산문이 들어가는 경우는 거의 못 본 것 같아요. 별 헤는 밤을 빼고는요.

 

저는 한 호흡에 산문 부분을 읆어 내려갔어요. 숨이 막혔죠. 제가 패, 경, 옥 이라는 이국 소녀들의 이름을 말할 때 누군가의 탄식 소리를 들은 것도 같습니다. 착각일까요?

 

이네들은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그 뒤 부터는 정말 잘 기억이 나지 않아요. 라이너 마리아 릴케의 이름을 말할 때 쯤에 이미 제 머릿속의 산소는 바닥이 나 버렸거든요. 아마 목소리도 떨렸던 것 같아요. 그래도 아이들은 비웃지 않았어요. 비웃다니요. 아이들은 혹시라도 내가 주저 앉지 않을까, 싯구 하나를 빼 먹지 않을까, 틀린 단어를 읆지 않을까 긴장하며 절 지켜 보고 있었어요. 착각은 아닐 거에요. 그렇잖아요. 줄넘기 하나를 해도 기록에 가까이 가면 긴장이 돼요. 설령 얄미운 친구라도 적어도 그 순간 만큼은 백이면 백, 이백이면 이백, 딱 떨어지는 숫자를 채우기를 기도하게 된다니까요.

 

내 이름자 묻힌 언덕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거외다.

 

후. 저는 일순 제 자신으로 돌아오며 등골이 싸늘해졌습니다. 손과 턱이 덜덜덜 떨렸어요. 아이들이 시끄럽게 환호성을 내지르지 않았다면 제 모습이 정말 바보같아 보였을 겁니다. 어. 뭐 그 뒤에 대단한 일이 있진 않았어요. 사실 그렇잖아요. 별 헤는 밤 하나를 끝까지 외우는 게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니고. 청산별곡도 다 외웠는데요 뭐. 그러고 보니 정말 이상하네요. 그때 그 교실에서는 왜 제가 싯구를 내뱉을 때, 마치 양궁선수가 10점을 쏘아 나가는 것 같은 긴장감이 가득 찼었을까요.

 

제가 다시 자리에 앉고 나서 분위기는 금방 원래대로 돌아갔습니다. 선생님이 무언가 칭찬을 하고, 다른 아이들을 가볍게 꾸짖은 후, 수업이 시작되었어요. 평소와 똑같은 수업이요. 국어 시간이 끝난 후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어요. 저를 빼고는요.

 

시를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그냥 기억력이 조금 좋았을 뿐인, 그리고 선생님이 장난스럽게 내 준 숙제를 정말로 해 갈 정도로 고지식하고, 어찌 보면 괴팍했던 저는 그렇게 별 헤는 밤을 끝까지 외우는 문학 소년이 되어 버렸습니다. 아니, 애들이 그렇게 인정해줬다는 게 아니고요. 저 스스로가요.

 

저는 이과였어요. 공대에 진학했고요. 하지만 문학은 그렇게 희미하게 제 곁을 맴돌았습니다.

 

별 헤는 밤을 끝까지 외우는 기억력이 있었듯, 지금의 저도 이런 저런 말을 붙여 나갈 손재주는 있는 모양입니다. 꾸역꾸역 글자를 채워 소설 비슷한 걸 만들어 내고, 또 그걸 몇 명이나마 읽어 주기도 하니까요.

 

하지만 글이라는 건, 여전히 너무나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스라이 멀듯이요.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렇게 자정이 지난 시간에 무언가를 끄적이고는, 부끄럽게도 어딘가에 던져 놓으려 합니다.

 

생각해 봅니다. 그 날 제가 별 헤는 밤을 끝까지 외워가지 않았다면, 선생님이 하필이면 절 지목해 외워보라고 시키지 않았다면, 저도 모르게 첫 구절이 흘러나오고, 그 구절이 다음 구절을 끌어당기지 않았다면, 제가 지금 여기서 문학 소년의 흉내를 내면서 이런 졸문을 누군가에게 보여줄 용기를 낼 수 있었을 지.

 

저는 시를 잘 모릅니다. 좋아한다고 할 수도 없어요. 하지만 어떤 시는 그렇게 신비한 방법으로 한 사람을 바꾸기도 하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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