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정도경 플라스틱

2014.05.31 23:0305.31

플라스틱

 

시어머니가 전화했다.

와서 네 인형 데려가라.”

시어머니가 말했다.

데려가고, 앞으로 다시는 오지 마.”

그리고 시어머니는 전화를 끊었다.

인형을 찾았다는 소식은 반가웠다. 전 남편이 버린 줄만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다시오지 말라는 시어머니의 말은 마음에 걸렸다. 이혼한 뒤로 그 집에 다시 찾아간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어쨌든 인형은 나에게 중요한 물건이었다. 그래서 나는 인형을 찾으러 몇 년 만에 처음으로 그 집에 다시 갔다.

 

시어머니가 인형을 가져가라고 하지 않고 데려가라고 표현했다는 사실에도 신경을 썼어야 했다. 문을 열어 준 시어머니는 뭔가 몹시 두려워하는 표정이었다.

가지러 가서 보니 인형은 내 인형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내 인형이 맞긴 맞는데, 내가 알고 있던 그 인형이 아니었다.

몸의 왼쪽에 불에 탄 것처럼 갈색으로 눌어붙은 자국이 새겨진 플라스틱 남자가 아무 감정도 없는 눈으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전 남편은 집에 없었다. 가는 길에는 내내 그 집에서 마주칠까 불안했기 때문에, 전 남편이 안 보여서 나는 안심했다. 플라스틱 남자를 보기 전까지는.

전 남편이 집에 없었기 때문에 어찌된 상황인지 아무 것도 알 수 없었다.

시어머니는 내 질문에 대답하려 하지 않았다. 몹시 불안하고 불쾌해하는 표정으로 입을 꼭 다물고 나와 플라스틱 남자에게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떨어져서 지켜볼 뿐이었다. 빨리 데리고 나가서 사라져 버리기를 바라는 기색이 그 얼굴에 역력했다.

내가 다가서자 플라스틱 남자는 바닥에 앉아 있다가 스스로 일어섰다. 그 동작은 대단히 느렸으며 상당히 불편했다. 왼팔이 불에 타서 비틀려 있었기 때문에 바닥에 앉아 있다가 일어설 때 제대로 몸을 지탱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바지에 가려서 보이지 않았지만 왼쪽 다리도 불에 타서 손상된 게 아닐까 싶었다.

플라스틱 남자는 살짝 절룩거리며 나를 향해 걸어왔다. 시어머니는 플라스틱 남자가 움직이기 시작하자 질겁을 하며 뒤로 물러섰다.

그 모습을 보자 시어머니가 원하는 대로 플라스틱 남자를 데리고 얌전히 사라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혼할 때 시어머니가 나에게 했듯이 이것저것 캐물으며 괴롭혀 줄까 하는 생각도 잠시 떠올랐다. 그러나 플라스틱 남자가 한 걸음씩 움직일 때마다 불안에서 두려움에서 패닉으로 옮겨가는 시어머니의 표정을 보니 쌓였던 혐오감이 다시 치솟았다. 그곳에서 버텨봤자 얻을 것이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나는 일단 플라스틱 남자를 데리고 그 집을 나왔다. 등 뒤에서 문이 쾅, 하고 닫혔다.

 

시어머니는 을 믿는 사람이었다. 시어머니의 삶에서 기본적인 매일의 의식주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한 부분을 넘어서 모든 문화적이고 사회적인 행동이나 활동은 을 바라고 을 받는다는 단 한 가지 목적만을 향해 있었다.

어째서 그렇게까지 에 집착하는지, 내 입장에서 이해되지 않는 경우도 물론 많았다. 고등학교까지 나왔으니 시어머니 세대의 일반적인 기준으로 볼 때 교육을 못 받은 것도 아니었고, 멀쩡하게 남편이 살아 있어서 경제적으로 아주 쪼들린 것도 아니고 사회적으로 심하게 차별을 받은 것도 아니었으며, 자식도 딸과 아들 하나씩 잘 키워서 시집장가도 다 보냈다. 시부모가 그처럼 평범한 인생을 살아왔다는 것이, 그러니까 바꾸어 말하면 전 남편의 집안이 크게 결여된 부분 없이 평범하다는 것이 내가 전 남편과 결혼을 결심하게 된 계기이기도 했다.

시어머니는 결혼을 결정하고 진행하는 모든 과정에서 아주 세세한 사안까지 점술 혹은 그와 비슷한 기복신앙에 의지하여 결정하려 했다. 그 당시에 나는 시댁이란 원래 나와 100% 의견이 일치할 수 없으니 이 정도는 웃으며 넘겨야 한다고 나 자신을 위로했다. 무엇보다도, 시어머니는 점술을 빙자하여 자신의 생각을 강제하거나 의사결정 과정에서 우위를 점하려 고집을 부리는 것이 아니었다. 그보다 시어머니는 그 때도 지금처럼 뭔가 이유 없이 불안해하고 두려워하는 것처럼 보였다.

결국 내가 시어머니의 기복신앙 때문에 이혼한 것은 아니었다. 전 남편과 결혼생활을 하면서 시어머니의 사고방식이나 행동이 때로 좀 짜증나기도 하고 좀 웃기기도 했지만, 그런 미신은 나에게 별다른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세상에 사람의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많은 변수가 있으며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기 때문에 원론적으로 나는 시어머니의 미신적 사고방식을 반박할 수 없었다. 생각해 보면 인생에서 통제할 수 있는 일보다는 통제할 수 없는 일들이 훨씬 더 많으니까 말이다. 태어났다는 사실 자체를 포함해서.

 

플라스틱 남자는 말을 하지 않는다.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고 별달리 움직이지도 않는다. 그저 말없이 앞을 바라보고 앉아 있다가 내가 근처에 나타나면 쳐다볼 뿐이다. 플라스틱 남자의 얼굴에는 왼쪽 뺨에 커다란 갈색 자국이 있었다. 불에 타서 눌어붙은 흔적이다.

전자 렌지에 금속을 넣고 돌리면 폭발한다. 옆에 있던 종이타월에 불이 옮겨 붙어 급작스럽게 타오르던 장면은 기억하고 있다. 그 뒤로는 잘 모르겠다.

나는 플라스틱 남자에게 다가가서 그을어 눌어붙은 뺨을 만져본다. 내 손가락이 뺨에 닿아도 플라스틱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는다. 그저 커다란 눈동자가 살짝 움직여 시선이 나를 향할 뿐이다. 나를 쳐다보면서 플라스틱 남자는 눈도 깜빡이지 않는다.

불에 그을어 얼굴과 왼팔이 뒤틀어진 인형은 내 어린 시절의 단 하나 남은 기념물이었다. 전 남편이 그 인형을 버렸기 때문에 나는 그와 이혼했다.

 

시어머니의 친구의 아는 사람 중에 (아는 사람의 친구였는지도 모른다) 아들이 마흔이 다 되도록 장가를 안 가는 집이 있다. 시어머니가 중매를 서 주려다가 들은 사연은 다음과 같다. 그 아들이 대학교 때 만나서 사귀게 된 아가씨가 있었는데, 결혼 이야기가 나와서 궁합을 보러 갔더니 점쟁이가 둘이 상성이 아주 안 좋으니 헤어지지 않으면 한쪽이 죽을 거라고 했단다. 두 남녀는 한창 열애중인 청춘이라 점술의 경고 따위는 진지하게 듣지 않고 약혼을 강행했는데, 결혼 전에 둘이 같이 여행을 갔다가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나서 여자가 죽어 버렸다. 그런데 사고 당시에 남자가 운전을 했기 때문에 남자는 자신이 약혼녀를 죽였다는 깊은 죄책감에 빠졌으며, 이후로 점술과 운명을 확고히 믿게 되었다. 그래서 시어머니가 중신을 서 주려 했을 때 남자가 상대 여자를 만나보기 전에 생년월일과 태어난 시간부터 먼저 물어보더니, 궁합을 봤는데 결과가 안 좋다며 아예 만나지도 않겠다고 했다는 것이다.

시어머니는 자신의 미신적 사고에 대한 이러한 경험적 증거들을 여럿 가지고 있어서 기회가 될 때마다 나에게 제시하였다. 내 입장에서는 흥미로운 이야기들이었으므로 재미있게 한 귀로 들은 뒤에 다른 귀로 흘려버렸다.

시어머니가 이야기해준 남자가 약혼녀와 일찌감치 헤어졌다면 여자는 살 수 있었을까? 하지만 살 수 있었다면, 두 사람은 과연 헤어져서 각자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억지로 헤어져서 각자 자기 갈 길을 갔다가 십 년, 이십 년 뒤에라도 다시 만났다면 어떻게 됐을까?

물론 이런 가정에 대한 답은 없다. 선택의 순간에 우리가 각자 경험할 수 있는 현실은 유일무이하게 단 한 가지이며 바꿀 수도 없고 다른 현실로 대체할 수도 없지만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 삶의 가능성은 무궁무진하다. 우리의 삶은 그러한 무한한 가능성의 무한한 여러 조합 중에서 우연히 맞아 떨어진 버전 중 하나인 것이다.

시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나는 전 남편과 궁합이 아주 좋아서, 둘이 결혼하면 싸우지도 않고 아들딸 많이 낳고 늙어서도 오래 오래 풍족하게 잘 살 거라 했다. 여자 쪽의 가정에 문제가 있을 경우 보통은 결혼에 있어 결격 사유가 된다고 하는데, 의외로 시어머니가 별달리 반대하지 않았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희망적인 예측과는 달리 고작 낡은 인형 따위로 이혼에 이르게 되었으니 점술은 믿을 게 못 된다고 나는 말하고 싶었다. 남편은 고작 낡은 인형 따위로 쓸데없는 고집을 부리지만 않았어도 어머니가 말한 대로 아무 일 없이 잘 살 수 있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만 참았으면 모두가 평온했을 텐데 하찮은 일에 발악하며 굴러들어온 복을 일부러 차 버리는 건 내 쪽이라는 남편의 주장을 별다른 감정 없이 하나의 가능성으로, 바람직하지는 않더라도 개연성은 있는 가설로 받아들일 수 있게 된 것은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뒤의 일이었다.

시어머니로 말하자면 세상의 나쁜 일을 대비할 수는 있어도 좋은 일에 대한 보장은 없다는 자신의 인생 철학을 더욱 확신하게 되었을 뿐이었다. 그러므로 에 대한 시어머니의 절박한 염원은 더욱 깊어졌다. 내가 나간 뒤에 시어머니는 남은 내 물건과 내가 자주 썼던 집안의 물건을 모두 가져다 태워버리고 집안을 정화하는 일종의 의식을 행했다고 시누이가 알려주었다. 시누이는 내가 자신의 가족에게 얼마나 큰 물질적, 정신적 피해를 입혔는지 알려주려는 의도에서 한 말이었지만, 나는 그 말을 듣고 이런 집안에서 벗어난 것이 어쩌면 다행일지도 모른다고 언뜻 생각했다.

 

나는 플라스틱 남자의 그을린 뺨을 손가락으로 쓰다듬는다. 플라스틱 남자가 눈을 들어 나를 쳐다본다.

그 모습을 보며 나는 플라스틱 남자의 뺨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별 의미 없는 행동이었으나 플라스틱 남자는 고분고분 고개를 돌려 보기 흉하게 갈색으로 눌어붙은 왼뺨을 내 쪽으로 향했다.

그 양순한 (사실은 무감정한) 태도와 자신의 결함을 숨김없이 완전하게 드러내는 몸짓에는 어딘가 보호 본능을 자극하는 면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손바닥으로 플라스틱 남자의 거칠거칠하게 눌어붙은 뺨을 살짝 쓰다듬었다.

플라스틱 남자는 눈을 감았다. 인형이 기분을 느낄 리 없지만 어쩐지 기분 좋아하는 것 같아서 나는 조금 더 그렇게 플라스틱 남자의 눌어붙은 플라스틱 뺨을 쓰다듬어 주었다.

 

세상에는 여러 가지 종류의 비밀이 존재한다. 타인에게 노출되면 나에게 피해나 불이익이 오기 때문에 숨기는 비밀도 있고, 반대로 아주 귀하고 좋은 것이기 때문에 타인이 알게 되면 탐내거나 뺏어갈 가능성이 있어서 숨기는 비밀도 있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다른 사람과도 아무런 관계가 없는 나만의 것이기 때문에 나만의 것으로 간직하다 보니 비밀이 되어버리는 일도 존재한다.

남편이 인형을 보고 싫어할까 봐 숨긴 것은 아니었다. 애초에 인형은 남편과 아무런 관계가 없었다. 그러므로 남편이 인형을 싫어할지 좋아할지 생각해본 적도 없었다. 인형은 내 것이었고 나만의 것이었으며 당연한 나의 일부였다. 남편은 나에게 팔이 두 개이고 코가 하나라는 사실을 싫어하거나 좋아할 권리가 없듯이 인형을 싫어하거나 좋아할 자격 자체가 없었다. 하물며 그것이 재수없어 보인다는 따위의 이유로 내다버릴 자격은 더더욱 없었다.

내가 그렇게 설명했을 때 남편은 코웃음을 쳤다.

얘가 완전히 정신이 나갔구나.”

그 말투와 어휘 선택, 심지어 목소리까지 시어머니와 똑같았다. 남편에게 느꼈던 모든 감정적, 정신적 유대감은 그 순간 완전히 끊어졌다.

 

자기 집이 불타는 광경을 지켜보는 여섯 살짜리가 손에 든 인형을 꼭 움켜쥘 때만큼 강렬한 감정은 찾기 힘들다. 그 순간의 반쯤 눌어붙은 플라스틱 인형만큼 순수하고 완벽하게 사랑 받는 존재는 이 세상에 두 번 다시 없다.

집이 불타는 광경을 지켜보며 여섯 살짜리가 기뻐하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 존재는 세상에서 꼬마 자신과 손에 든 인형 단 둘뿐이었다.

그런 경험은 본능 속에 각인된다. 그러한 경험을 공유했을 때 생기는 유대감과 결속은 시간이 지난다 해서 엷어지거나 사라지는 종류가 아니다.

 

플라스틱 남자가 나의 집으로 옮겨왔다 해서 생활에 무슨 변화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다. 나의 일상은 이전과 마찬가지로 평온하게 이어졌다.

플라스틱 남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았다. 처음에 데려왔을 때 앉혀놓은 모서리에서 움직이지도 않았다. 의자도 아니고 바닥에 앉아서 벽에 등을 기댄 채 시선으로만 나를 좇을 뿐이었다. 식사나 하다못해 물이라도 주어 보려 했지만, 입가에 컵을 가져다 대도 플라스틱 남자는 꼼짝도 하지 않고 전혀 입을 벌리지도 않고 무의미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래서 나는 플라스틱 남자를 구석에 앉혀둔 채로 밥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출근을 했다. 퇴근해서 돌아오면 어두운 집안에 플라스틱 남자가 그 자리에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불을 켜지 그랬어, 라든가 오늘 하루 뭐 했어? 라는 말에 플라스틱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플라스틱 남자를 그대로 내버려둔 채 저녁을 먹고 빨래를 하고 설거지를 했다. 밤에 자러 들어가기 전에 나는 집안의 불을 모두 끄고 그 자리에 그대로 잠시 서 있었다. 베란다 밖에서 비쳐 들어오는 희미한 거리의 불빛에 비친 플라스틱 남자의 얼굴은 희고 무감각했다. 플라스틱 남자는 눈을 뜬 채 그대로 정면을 응시하며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말없이 방으로 가서 잤다. 다음날 아침에 거실 겸 부엌으로 나왔을 때 플라스틱 남자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움직이지 않고 앉아 있었다. 잘 잤어? 하고 내가 인사했을 때 플라스틱 남자가 고개를 살짝 들어 나를 본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보았을 때 플라스틱 남자는 무감각한 얼굴을 정면으로 향하고 어딘지 모를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젯밤에 그러했듯이, 그 전날 밤에 그러했듯이, 그리고 그가 만들어져 세상에 나온 이후로 언제나 그러했듯이.

그래서 나는 안도했다. 다가가서 머리를 살짝 쓰다듬었다. 머리카락은 사람의 머리털이라기에는 지나치게 거칠고 뻣뻣했다. 거칠고 뻣뻣하고, 인공적이었다.

플라스틱 남자가 고개를 움직였다. 얼굴을 돌려 머리를 쓰다듬는 나를 올려다 보았다.

나는 손을 떼었다. 플라스틱 남자는 여전히 고개를 들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이유는 잘 알 수 없으나 나는 몸을 숙여 플라스틱 남자에게 키스했다. 입술은 딱딱했고 왼쪽 뺨과 이어지는 부분이 그을어서 거칠고 울퉁불퉁했다. 입술이 닿자 플라스틱 남자가 반사적으로 입을 약간 벌렸다. 그러나 입술에 닿은 부분의 거친 느낌이 불쾌했기 때문에 그 안에 무엇이 있을지 탐험해보고 싶지는 않았다.

인간 남자와 같을 리 없다. 나는 몸을 일으키고 거친 플라스틱에 비볐던 입술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플라스틱 남자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나는 돌아서서 플라스틱 남자와 아무 관계 없는 하루를 시작하러 갔다.

 

전 남편하고는 어땠던가.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대체로 나는 지난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

확실하게 기억하는 장면이 하나 있다. 나는 베란다에 널어놓은 빨래를 걷어서 가지고 들어오는 중이었다. 남편은 거실에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나는 거실을 가로질러 안방으로 가려다가 남편의 다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순간 화가 나서 나는 남편의 다리를 가볍게 찼다. 차고 나서 후회했다. 남편이 나를 때릴 것이라고 생각했다. 욕을 하는 건 상관 없지만 물건을 던지면 어떻게 피해야 할지 생각했다.

이 모든 생각은 1초가 안 되는 사이에 내 머릿속에서 명멸했다. 그것은 훈련된 생각들이었고 경험으로 인한 반응이었다. 물리적으로 위협을 느낄 때면 하나의 순간이 몇 배로 길어지고 그 안에 느낄 수 있는 지각과 감각 또한 그만큼 늘어난다.

그러나 물론 남편은 오빠가 아니었다. 남편은 전혀 다른 환경에서 성장한, 전혀 다른 사람이었다.

아야.”

남편이 말했다. 다리를 움츠리며 나를 보고 조금 쑥스러운 듯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 다시 아무 일도 없었던 듯 텔레비전을 보기 시작했다.

나는 그 자리에 그 자세 그대로 멈추어 서서 공격의 순간을 기다렸다.

영겁의 시간이 흐른 것 같았다.

남편이 일어섰다. 나는 굳어졌다.

알았어.”

남편이 말했다.

도와주면 되잖아.”

그리고 남편은 긴장하여 얼어붙은 채 서 있는 내 팔에서 빨래 바구니를 빼내어 거실 바닥에 내려놓았다. 걷어온 빨랫감을 하나씩 꺼내어 귀찮다는 듯이 대충 개기 시작했다.

나는 그 광경을 한참이나 지켜보았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해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남편이 나를 때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믿기까지 시간이 조금 더 걸렸다. 그 모든 것을 믿을 수 있게 된 뒤에도 나는 그대로 남편이 투덜거리며 빨랫감을 엉터리로 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것이 길지 않았던 내 결혼생활 중 최초이자 최고로 찬란한 순간이었다. 그 때 나는 행복했다.

 

사람의 기억은 어디로 가는가.

이혼한 뒤, 지금 살고 있는 임대 아파트로 이사 와서 처음으로 빨래를 한 날, 베란다가 없어서 거실 구석에 세워둔 빨래 건조대에서 나는 다 마른 빨래를 걷었다. 텅 빈 집안에서 혼자 바닥에 앉아서 빨래를 개었다. 가구가 다 들어오지 않았고, 사실 가구 살 돈이 없었기 때문에 거실은 오랫동안 소파도 탁자도 아무 것도 없이 비어 있었다.

남편이 빨래를 개어주던 순간에 대해서 나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다. 플라스틱 남자가 집에 들어와 거실 구석에 앉아 있게 되기 전까지, 나는 그 기억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기억하지 않았으므로 나는 행복하지도 불행하지도 않았다. 텅 빈 집안에 그저 있을 뿐이었다.

 

플라스틱 남자는 보통의 성인 남성만한 몸집이다. 그런 크기의 남자가 거실 겸 부엌이며 침실로 가는 복도 역할까지 하는 공간에 앉아 있을 때 지나다니기란 쉽지 않다. 아침에 침실을 나와 화장실로 가다가 나는 플라스틱 남자의 다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나는 플라스틱 남자의 허벅지를 발꿈치로 내리 찍었다.

순간적으로 화가 치밀었다는 말은 이럴 때 변명이 되지 않는다. 모든 고의적인 공격에는 언제나 계산이 앞선다. 지하철역이나 대형 마트 등 사람이 많은 공공장소에서 자기보다 몸집이 작은 여자만 골라 세게 치며 지나가는 중년 남자는 앞에 가는 여자를 본 순간 성별과 연령과 완력과 공격성향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하여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치고 지나가도 뒤탈이 없겠다는 계산을 했기 때문에 그런 행동을 하는 것이다. 여자가 아니라 덩치 크고 사나워 보이는 젊은 남자가 앞을 막고 있다면 상기한 중년 남자는 공간이 아무리 좁고 갈 길이 아무리 급해도 그런 행동을 하지 않을 것이다.

내가 플라스틱 남자를 공격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플라스틱 남자가 나를 반격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으며, 동시에 내가 발가락 부분으로 플라스틱 남자의 플라스틱 다리를 차면 나만 다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다.

계산에 넣지 못한 것은 플라스틱 남자의 플라스틱 허벅지가 상상 외로 단단하다는 사실이었다. 발꿈치로 내리찍었는데도 발이 아팠다. 나는 아팠기 때문에 우선 화가 났고, 계산이 어긋났기 때문에 더 화가 났다.

플라스틱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나를 보며 미안한 듯 어색한 웃음을 짓지도 않았고 다리를 움츠리지도 않았다. 초점 없는 시선을 정면의 어딘지 모를 곳에 고정한 채 팔다리를 널부러뜨리고 그대로 퍼져 앉아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더 화가 치밀어 올랐다. 그러나 발이 아팠고, 예상 외로 단단한 그 감촉과 닿을 때의 충격이 아직도 발에 남아 있었기 때문에 나는 참았다. 고의적인 공격에는 계산이 앞서게 마련이며, 반대로 일부러 공격을 하지 않을 때도 계산이 앞서는 법이다.

나는 플라스틱 남자의 다리를 넘어 화장실로 들어갔다.

내가 아침을 먹고 출근 준비를 마치고 집을 나올 때까지, 플라스틱 남자는 거실 구석에 그 자세 그대로 앉아 있었다.

 

퇴근하고 집에 와 보니 플라스틱 남자는 거실 구석에 서 있었다.

벽에 등을 기대고 널부러져 앉아 있을 때도 기괴해 보였는데, 서 있는 모습은 더욱 기괴했다. 거실 구석에 허수아비가 서 있는 것 같았다. 여전히 벽에 등을 대고 바짝 붙어 서서 양 팔은 힘없이 늘어뜨리고 고개는 약간 숙이고 있었다.

나는 플라스틱 남자의 앞으로 다가갔다. 플라스틱 남자는 나보다 키가 컸다. 고개 숙인 플라스틱 남자의 코에 내 이마가 닿을 것 같았다.

나는 약간 물러섰다. 왼손으로 플라스틱 남자의 불타지 않은 플라스틱 오른손을 잡았다.

플라스틱 손은 딱딱했다. 차갑지는 않았지만 그다지 따뜻하지도 않았다. 햇볕에 오래 내놓은 플라스틱 조각이 미적지근해지는 정도의 온기였다.

그것은 여섯 살 꼬마가 꽉 움켜쥐고 놓지 않았던 그 손이 아니었다.

애초에 꼬마의 손을 잡아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는 오른손으로 플라스틱 남자의 불탄 플라스틱 얼굴을 잡고 일그러진 왼뺨을 나를 향해 돌렸다.

넌 도대체 뭐냐?”

내가 속삭였다.

대체 넌 무슨 쓸모가 있는 거야?”

플라스틱 남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와 눈이 마주치자 얼른 시선을 돌려 내 머리 위의 허공을 바라보았다.

그가 눈을 피하는 것이 기분 나빠서 나는 플라스틱 남자의 갈색으로 일그러진 왼뺨을 때렸다. 아침에 발로 찼다가 아팠던 일을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힘을 주지 않고 가볍게 손을 휘둘렀다. 딱딱한 플라스틱 뺨에 손이 닿자 아프지는 않았지만 역시 충격이 있었다.

때린 뒤에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플라스틱 남자를 관찰했다. 플라스틱 남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고개를 살짝 돌려 불에 타서 일그러진 왼뺨을 나에게 향한 채 그 자세 그대로 서 있을 뿐이었다.

나는 방으로 들어왔다.

 

전 남편에게 전화하기 전에 나는 몇 번이고 망설였다.

전 남편이 무섭기 때문에 망설인 것은 아니었다. 혹은 잠시나마 한 집에서 같이 살았던 한때의 배우자에게 어떤 감정이 남아 있어서 망설인 것도 아니었다.

사실은 그 반대였다. 생전 본 적도 없는 낯선 타인에게 느닷없이 전화해서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려운 일에 대해 설명해야만 하는 상황에 처했을 때 사람이 어쩔 줄 몰라 망설이듯이, 나는 그렇게 오랫동안 망설였다.

막상 전화했을 때 전 남편의 반응은 나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 ?”

전 남편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그래서 나는 말문이 막혔다.

, 저기, ….”

내가 당황해서 의미 없는 어절들을 늘어놓으며 본론을 꺼내지 못하자 전 남편이 다시 물었다.

, 바빠? 주말에 못 만날 것 같애?”

나는 정말로 뭐라고 해야 할 지 모르게 되어 버렸다. 주말에 만나기는커녕 나는 지난 몇 년간 전 남편과 전화통화도, 메일 한 통, 문자 한 번도, 그 어떤 형태의 연락도 해본 적이 없다.

아니, 저기….”

그럼 뭔데?”

전 남편이 조금 초조해진 목소리로 말을 막았다.

주말에 못 볼 거 아니면 만나서 얘기하자. 그래도 돼? 급한 일이야?”

, 아니….”

내가 점점 더 당황하는 사이에 전 남편은 한 마디로 통화를 정리해 버렸다.

그럼 토요일에 거기서 만나. 내가 금요일쯤 다시 전화할게.”

그리고 전화는 끊어졌다.

나는 한참이나 휴대전화의 화면을 들여다보면서 멍한 채로 앉아 있었다.

 

자려고 누웠지만 잠이 오지 않았다. 앞으로 다시는오지 말라고 했던 시어머니의 말이 뒤늦게 떠올랐다.

전 남편은 대체 누구를 만나고 있는 것인가. 시어머니가 본 사람은 누구인가.

삐걱, 하는 소리가 들렸다. 방문이 조금 열렸다.

나는 소리 없이 몸을 일으켰다. 불을 켜지 않고 침대 밖으로 살며시 나왔다.

그 순간 방문이 조금 더 열렸다.

나는 문 바로 밖의 어둠 속에 서 있는 희끄무레한 형체와 정면으로 마주보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얼른 팔을 뻗어 방의 불을 켰다.

플라스틱 남자는 거실에 있었을 때와 마찬가지로 고개를 약간 숙인 채로 문 앞에 서 있었다. 내가 방의 불을 켜자 플라스틱 남자는 한 순간 시선을 들어 나를 보았다가 다시 눈을 내리깔았다. 시선이 움직이는 동안 몸의 다른 부분은 전혀 미동도 하지 않았다.

, 무슨 일이야?”

내가 물었다.

플라스틱 남자는 망가지지 않은 오른팔을 들어 오른손을 등 뒤로 돌렸다. 셔츠를 끌어당겨 한 번에 벗었다. 어딘지 삐걱거리는 듯한 부자연스러운 움직임과 불에 타서 굳어버린 왼팔을 생각하면 놀랄 정도로 빠르고 유연한 동작이었다. 플라스틱 남자는 이어서 한 손으로 바지의 허리띠를 풀었다. 바지를 내리고, 안에 입었던 속옷도 내렸다. 플라스틱 남자가 바지 안에 속옷을 입고 있다는 지엽적인 사실에 나는 공연히 조금 놀랐다.

나는 플라스틱 남자의 나체를 관찰했다. 플라스틱 몸은 보통 남자의 몸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나는 실험적으로 손을 뻗어 플라스틱 남자의 성기를 살짝 쥐었다. 플라스틱 남자는 그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플라스틱 남자의 플라스틱 성기는 딱딱했다. 인간 남자의 발기한 성기처럼 단단한 것이 아니라 플라스틱이기 때문에 딱딱했다. 플라스틱 남자의 손을 만졌을 때와 마찬가지로 남자의 성기도 햇볕에 오래 내놓은 플라스틱 조각이 미지근하게 데워지듯 그렇게 미지근할 뿐 차갑지도 따뜻하지도 않았다. 부드러워야 할 부분까지 딱딱해서 나는 잠시 소름이 끼쳤다.

플라스틱 남자와 관계를 가질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 나는 남자를 거실 구석으로 돌려보내고 방문을 닫으려 했다. 그 때 플라스틱 남자가 몸을 앞으로 숙여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댔다.

그것은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다. 한 순간 이마에 닿은 플라스틱 남자의 플라스틱 이마는 약간 차갑게 느껴졌으며 역시 딱딱했다.

그러나 그 몸짓은 더없이 다정했다. 전 남편도, 이전에 알았던 어떤 남자도, 어떤 사람도, 플라스틱 남자의 그 미세한 움직임에서 내가 느낀 것과 같은 애정과 간절함을 표현해준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한 걸음 물러섰다. 플라스틱 남자가 침실로 들어와 침대에 누웠다. 내가 플라스틱 남자의 플라스틱 몸 위에 앉았다.

 

그것은 기묘한 경험이었다.

플라스틱 남자는 인간 남자보다 조금 차가웠고 부자연스럽게 딱딱했다. 내가 몸 위에 앉자 플라스틱 남자는 오른팔을 머리 위로 올렸다. 불에 타서 굳어진 왼팔은 움직이지 않았다.

플라스틱 남자의 몸 위에 앉아서 나는 상체를 숙이고 남자의 플라스틱 가슴에 손을 대었다. 왼손에 닿은 가슴은 부자연스럽게 매끄럽고 딱딱했지만, 내 오른손에 닿은 남자의 왼쪽 가슴은 불에 탄 흔적이 이어져 갈색으로 거칠거칠하게 뭉치고 일그러졌으며 울퉁불퉁했다. 오른손에 그 불탄 플라스틱의 감촉이 닿는 순간 나는 의욕을 잃었다.

그래서 나는 플라스틱 남자의 플라스틱 몸에서 내려와 그의 옆, 침대 위에 앉았다. 플라스틱 남자는 잠시 그대로 누워 있다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내가 뭐라고 말하기 전에 플라스틱 남자는 상체를 천천히 내 쪽으로 숙였다. 불에 탄 왼팔이 어깨 부근에서 듣기 거북한 소리를 냈다. 플라스틱 남자는 불타서 일그러진 왼팔을 억지로 움직였다. 갈색으로 울퉁불퉁해진 플라스틱 팔이 내 쪽으로 조금 움직였다. 갈색 비늘이 일어난 것처럼 거칠고 울퉁불퉁한 그 플라스틱 표면을 본 순간 나는 어째서인지 아주 오래 전에 집이 불타던 냄새를 다시 맡았다.

그래서 나는 누웠다. 플라스틱 남자가 부자연스럽지만 느리고 조심스러운 동작으로 내 위로 올라왔다. 오른손을 내 얼굴 옆에 대고 불에 탄 상체를 받치면서 플라스틱 남자는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나를 주시하면서 플라스틱 남자는 천천히 어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 것도 느끼지 못했다. 그 부자연스러운 행위에는 고통도 쾌감도 없었다. 내 몸까지 플라스틱이 되어 버린 듯한 무감각이 있을 뿐이었다.

플라스틱 남자의 움직임은 일정했다. 플라스틱 남자는 내 표정을 살피며 조금 더 빠르게 움직여 보기도 하고 느리고 조심스럽게 움직여 보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남자의 플라스틱 얼굴에는 아무런 감각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다지 유쾌하지 않지만 또 그렇다고 딱히 불쾌하지도 않은 행위를 실험적으로 참아보다가 나는 팔을 들어 남자의 플라스틱 등을 만졌다. 플라스틱 남자의 오른손이 내 왼쪽 어깨 바로 위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비교적 자유로운 오른손을 들어 플라스틱 남자의 불탄 왼쪽 어깨를 더듬고 갈색으로 뒤틀린 플라스틱 왼팔을 만졌다.

플라스틱 남자가 움직임을 멈추었다. 나는 플라스틱 남자의 왼팔을 더듬어 내려가서 불탄 플라스틱 손목을 잡았다.

플라스틱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아까처럼 다시 내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었다.

불에 타서 뒤틀린 손목을 나에게 잡힌 채로 플라스틱 남자는 오랫동안 그렇게 내 이마에 자신의 딱딱한 플라스틱 이마를 대고 있었다. 남자의 플라스틱 입술이 약간 벌어졌으나 그 입에서는 아무런 소리도 새어 나오지 않았다.

 

내 몸에서 내려왔을 때 플라스틱 남자는 한숨조차 내쉬지 않았다. 플라스틱 남자가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다는 것은 명백했다. 행위는 플라스틱 남자의 쾌락이 아니라 나의 쾌락을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나도 마찬가지로 아무 것도 느끼지 못한 것을 보고 플라스틱 남자는 어린 아이가 엄마에게 매달리는 것과 비슷한 동작으로 오른손으로 내 어깨를 잡고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플라스틱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거칠고 뻣뻣한 인공적인 머리카락이 손에 불쾌하게 느껴졌지만, 그래도 나는 조심스럽게 플라스틱 남자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자가 찾아온 것은 다음날 저녁이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플라스틱 남자는 다시 거실 구석에 서 있었다. 옷도 이전처럼 제대로 입었고, 벽에 바짝 붙어 선 자세나 고개를 약간 숙인 각도까지 이전과 달라진 점은 아무 것도 없었다. 내가 앞에 가서 서자 플라스틱 남자는 잠시 눈을 들어 나를 보았으나 곧 시선을 떨어뜨렸다.

플라스틱 남자에게 뭐라고 말해야 할지 알지 못했기 때문에, 사실 나 자신도 이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알 수 없었기 때문에, 나는 일단 출근했다.

저녁에 집에 돌아왔을 때, 여자는 마치 자기 집인 것처럼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여자가 자기 집이라 해도 이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여자는 나와 똑같이 생겼다.

내가 들어서자 여자는 일어섰다. 여자의 얼굴을 보고 나는 말문이 막혀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놀라지 말아요.”

여자가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와 말투조차 내 것이었다.

저 애를 데려가려고 왔어요.”

여자는 턱짓으로 플라스틱 남자를 가리켰다.

저건 애초에 생겨날 수도 없는 거였고, 이쪽으로 와서는 더더욱 안 되는 물건이니까.”

그리고 내가 놀라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사이에 여자는 소파에서 일어나 성큼성큼 플라스틱 남자에게 다가가서 남자의 플라스틱 오른팔을 잡았다.

시댁이나 남편하고는 이제 연락할 일 없을 거예요. 처음부터 인연도 없는 집이었고, 있었다 해도 이걸로 완전히 정리가 됐으니까, 그렇게 알고 계세요.”

여자는 플라스틱 남자를 끌고 나가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자와 플라스틱 남자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놀란 와중에도 나는 플라스틱 남자가 여자에게 끌려가지 않으려 하는 것을 눈치 채었다. 플라스틱 남자는 여자에게 붙잡힌 오른팔을 이상한 각도로 비틀어 한껏 뒤로 빼고 등을 벽에 댄 채 버티고 있었다. 플라스틱 얼굴이 나를 향했다. 플라스틱 남자의 눈은 이제까지 한 번도 나타난 적이 없는 감정을 담아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여자가 플라스틱 남자의 팔을 잠깐 놓았다. 어깨에 걸쳐 메고 있던 핸드백에서 뭔가를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받았다.

당신 거였으니까, 돌려줄게요.”

여자가 말했다. 그리고 뭐라고 대답할 사이도 없이 이번에는 플라스틱 남자에게 다가가서 난폭하게 확 돌려 세우더니 목덜미를 붙잡았다. 형사가 범죄자를 검거해서 끌고 가는 것과 마네킹을 운반하는 것의 중간 정도 되는 동작으로 여자는 왼손으로 뒤에서 플라스틱 남자의 목덜미를 잡고 오른손으로는 남자의 망가지지 않은 플라스틱 팔을 잡은 채 질질 끌고 가기 시작했다. 플라스틱 남자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못하고, 목덜미를 잡혔기 때문에 돌아보지도 못한 채 그대로 끌려 나갔다.

나와 똑같이 생긴 여자가 플라스틱 남자를 데리고 사라진 뒤에 나는 여자가 내게 건네준 물건을 내려다보았다. 조그만 플라스틱 인형이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과는 달리 인형은 왼쪽이 불에 타지 않은 채 멀쩡했다.

인형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차츰 내가 어디에도 속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내가 속할 가족도, 돌아갈 가정도 없을 뿐 아니라 보잘 것 없더라도 유일하고 고유한 나의 현실, 아무도 대체할 수 없는 나의 삶이라고 생각했던 것조차 발 밑에서 흔들리며 조각조각 부서지고 있었다. 저들이 아무 것도 이해하지 못하며 그러므로 저들이 가짜라고 생각했지만 사실 가짜는 나였다.

나는 조그만 플라스틱 인형을 들어 이마에 대 보았다. 그저 딱딱한 감촉 외에는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생애 단 두 번의 행복한 기억만으로 남은 삶을 지탱할 수 있을까. 플라스틱 아파트의 공허 속에서, 무심한 햇빛을 받아 반짝이는 조그만 플라스틱 인형을 들여보며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과거조차 불확실해진 순간에, 나에게 미래를 보장해줄 수 있는 건 세상에 아무 것도 없었다.

mirror
댓글 0
Prev 1 ...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 5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