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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싱 핑거와 점핑 걸의 대모험  


정세랑


손가락이 사라지는 남자애를 좋아해본 적 있니? 
그 아인 하필이면 사라지는 부분이 오른손 검지였어. 오른손잡이니까 찾으러 갈 수밖에 없었지. 손가락은 언제나 조금 곤란한 시간대로 사라졌어. 시간 여행이 늘 그렇듯 미래로 향하지는 않고 과거로 과거로. 
“감각은 남아 있니?” 
“저린 느낌만. 저려서 자다가도 깨.” 
궁금해서 물어본 건데 어쩐지 의기소침해하며 대답했어. 사실 그즈음에 더 의기소침해야 할 사람은 나였는데. 막 메달을 박탈당한 다음이었거든. 높이뛰기라 하면 모두 장대높이뛰기를 생각하지만 나는 그냥 높이뛰기 선수였어. 아무 장치의 도움도 없이 2. 25m를 넘었어. 그건 정말 좋은 기록이야. 이제는 지워졌지만. 경기 때마다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스트레스에 좋다는 차를 어렵게 어렵게 구해 먹었어. 뜨겁게는 마실 시간이 없어서 찬물에 냉침시켜 마셨지. 물처럼 마셨는데 그 차의 성분에 문제가 있어서 도핑 테스트에 걸렸어. 왜 그랬을까. 왜 확인하지 않았을까. 확인하려면 확인할 수도 있었는데. 사실은 그만두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어. 가장 비겁한 방식으로 그만두고 말았지만. 
“손가락을 찾으러 갈 때 나도 데려가줄래? 그래도 되니?”
“되긴 하지만 예방주사를 맞아야 해.” 
“어떤 걸?”
“리스트를 줄게.” 
지금은 미약해졌지만 과거엔 여전히 무시무시할 질병들의 이름을 외며 병원에 다녀왔어. 간격을 두고 맞아야 하는 주사들이 있어서 생각보다 길게 기다려야 했어.
“아직도 나랑 함께 가고 싶어?”
“응.”
“과거는 생각보다 재미없어. 더럽고 위험해.” 
“그래도.” 
언제나 시무룩한 미싱 핑거가 손을 내밀었어. 나는 그 아이의 손가락이 하나 없는 손을 잡았지. 단면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그 단면이 우리를 양말처럼 뒤집으며 포털이 되었어. 양말처럼 뒤집어졌기 때문에 약간 토했어. 낯선 공기에. 낯선 땅에. 
항상 린넨을 입었어. 어느 시대 어느 지역에 가도 가장 눈에 덜 띄는 옷이었어. 미색의 린넨. 그보다는 조금 진한 색의 하의. 밑창까지 가죽으로 된 신. 그래도 우리는 눈에 띄었어. 
손가락은 언제나 가장 곤란한 곳에 있었지. 독재자가 즐겨 쓰는 모자 벨트에 끼어 있었고, 길고 긴 사막 길을 가는 상인의 수통 속에 들어 있기도 했고, 과학자의 완두콩 밭에 묻혀 있었고, 범접할 수 없는 귀부인의 속옷 겹겹 사이에, 첨탑의 종 속에, 기와의 이끼 안에, 보석상의 펠트를 댄 서랍에, 절인 올리브 창고에, 호수 한가운데의 정자 댓돌에, 증기로 가득한 기관실 구석에, 비단이 가득한 선반에, 포환 상자의 지푸라기 틈에, 레이스와 가발 속에, 양피지 두루마리에, 원자로에, 통발에, 오래 쓰지 않은 무쇠 솥에, 구슬주렴 저쪽에, 궁전의 새집에, 박물관의 커다란 소라 껍데기에, 붓 통에, 산장의 양철 캔에, 등나무 바구니 안에, 분장실 분첩에, 성벽의 헐거운 돌 뒤에, 멸균 실험실에, 축음기에, 미로 정원에, 어항에, 테트라포드 아래, 꿀통에, 지뢰 밭에, 가면에 달린 수염 사이에, 시계추의 공동에, 닻의 사슬에, 필름 통에, 리본 심지에, 안대 안쪽에.   
돈 대신 곡류나 과일류를 들고 갔는데 그렇게 구한 현지 돈이 모자라면 종종 배면뛰기를 했어. 배면뛰기가 나오기 전 시대 사람들은 신기한 재주라 생각하며 동전을 던졌어. 옷깃에 방울을 달고 뛸 때도 있었지. 처음 몇 번은 도착한 곳의 나무를 베어 가로대를 만들었는데 번거로워서 결국 대나무 무늬 플라스틱 가로대를 들고 가게 되었어. 배면뛰기를 훔친 거나 다름없어서 마음에 걸렸지만……. 어차피 운동선수로서 나는 불명예의 가장 밑바닥에 이른 게 아닐까, 아득해할 때에도 일단은 뛰고 있었어. 시장 바닥에서, 갑판 위에서, 광장에서, 살롱에서 나는 넘고 넘고 또 넘었어. 
“내가 이상한 걸 발견했어.” 
어느 날 미싱 핑거가 말했어. 
“뭔데?”
“내 손가락이 다른 부위보다 빨리 늙고 있어.”
정말이었어. 손은 원래 빨리 늙는 부위잖아. 주름이 많이 생기니까. 그걸 감안해도 애써 찾아 돌아온 손가락은 미묘하게 조금 더 늙어 있었어. 손의 다른 부위보다 다섯 살은 많아 보였달까. 우리가 찾으러 가는 게 언제나 늦어서 그런 걸까 싶었어. 그 손에 미싱 핑거가 얼굴을 묻었어. 
“힘들어? 속상해?”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보았지. 조심스럽게 대해야 하는 남자애를 좋아했으니까. 
“지겨워.” 
사실 나는 하나도 지겹지 않았는데. 지겹다고 말하는 미싱 핑거의 말에 공격당한 듯한 기분이었어. 
“21세기가 좋아. 22세기면 더 좋을 것 같아.” 
그렇게 말하며 한 손가락만 늙은 손으로 내 얼굴을 쓰다듬어주었으므로 마음이 조금 풀렸지. 
사라지는 손가락을 제자리에 묶어두기 위해 우리가 찾아갔던 의사들, 주술사들, 재봉사들……. 하지만 언제나 해결책은 미래에 있잖아. 어느 날 연고가 발명되었어. 연고라기보다는 용기도 바르는 방식도 투명 매니큐어랑 비슷했지만. 사라지는 신체 부위에 코팅하듯 발라두면 그 이상한 실종 현상이 멈추었지. 전 세계의 비자발적 시간여행자들이 드디어 발 붙이고 살아갈 수 있게 되었어. 
이제는 손가락이 사라지지 않게 된 남자애. 여전히 좋아하지. 
그렇지만 가끔 연고를 매니큐어로 바꿔치기 해둘 때가 있어. 아주 자주는 아니지만. 내가 비겁하게 이곳을 떠나고 싶어질 때에.  

댓글 10
  • No Profile
    정도경 16.02.01 20:20 댓글

    우왕 재미있게 읽었습니다!!

    근데 손가락을 찾다가 지쳐서 그냥 없는 채로 살면 어떻게 되나요?

  • 정도경님께
    No Profile
    정세랑 16.02.03 14:17 댓글

    아프겠지요..! 손가락이가 곤란한 곳에서 뜨거워지거나 다치거나 하여간 아프겠지요..!

  • No Profile
    나무열쇠 16.02.02 00:44 댓글

    훈훈하군요! 읽을 땐 짧은 분량이라고 생각했는데 곱씹으려니 길고 장대한 모험이었어요

  • 나무열쇠님께
    No Profile
    정세랑 16.02.03 14:18 댓글

    압축된 부분을 알아주셔서 기뻐요 +ㅁ+

  • No Profile
    미로냥 16.02.02 03:32 댓글

    정말, 장대한 모험이네요. 감동했어요ㅜㅜ

  • 미로냥님께
    No Profile
    정세랑 16.02.03 14:18 댓글

    히히 >---< 다정하셔요..!!

  • No Profile
    민경일 16.02.02 10:04 댓글

    분량은 짧지만 내용은 전혀 그렇지 않네요 ㅎㅎ 재밌었어요..

  • 민경일님께
    No Profile
    정세랑 16.02.03 14:18 댓글

    감사합니다!!! 언젠가 더 길게 쓰고 싶어요!!

  • No Profile
    pena 16.02.02 21:51 댓글

    이것도 장편이 될 수 있는 씨앗처럼 보여요. 지금 짧고 담담하게 압축해놓았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강인한 느낌도 좋지만요.

  • pena님께
    No Profile
    정세랑 16.02.03 14:18 댓글

    사실... 학습만화 캐릭터로 좋을 듯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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