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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괴이한 거울

말할 수 없었던 이야기

해망재

얼마 전, 나는 SNS를 통해 은수의 연락을 받았다. 친구 추천 기능으로 어떻게 연결이 되었던 모양이었다.

“하여간 SNS가 기가 막혀요.”

나와 어릴 때 한 동네 살던 은수는, 어릴 때의 인상이 아직도 남아 있는 얼굴에 동그란 안경을 쓴 채, 옆구리에 큼직한 가방을 끼고 나타났다. 공부를 계속 한다더니, 책이나 노트북 컴퓨터 같은 게 들어있을 성 싶었다.

“어릴 때 한 동네 살던 친구들부터, 웬만하면 인생에서 지워버리고 싶은 구남친까지 다 보여준다니까.”

은수는 구남친이라는 말을 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아, 그렇겠구나. 예전에는 그렇게 셋이서 붙어 다녔는데, 이제는 서로에 대해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훨씬 더 많을 것이다. 나는 내가 모르는 그 애의 남자친구에 대한 이야기를 어색한 웃음으로 받으며 버블티를 빨대로 저었다. 진하게 끼얹은 흑당이 얼룩을 남기며 밀크티 속으로 섞여들어갔다.

“유리는 어떻게 지내? 유리 보고 싶은데 연락이 영 안 되더라.”

“모르겠어.”

“몰라?”

“응, 지방에 가 있다는 말만 들었어.”

“지방에?”

“그래. 아, 너 우리 살던 데가 어떻게 변했는 지 알아? 그렇지 않아도 얼마 전에 다녀왔는데...”

은수는 태블릿을 꺼냈다.

사진 속 풍경은 낯이 익으면서도 많이 달랐다. 우리가 살던 집들은 우리가 알던 것보다 훨씬 이질적인 모습이 되어 있었다. 전에는 대충 슬레이트를 얹어 놓기도 했던 지붕들에는 일본식 기와가 얹혀 있었다. 우리가 살던 때 보다도 훨씬 전의 모습을 일부러 복원한 것 같았다.

“이게 다 뭐야.”

“역사문화의 거리래. 개항장 시대의 모습을 복원한다나.”

“이게 무슨 일제시대 테마파크야. 사진찍긴 좋겠네.”

“응, 근데 누가 여기서 사진찍자고 인천까지 오냐.”

우리는 사진들을 들여다보며 낄낄거렸다.

많이 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변하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길이며 산이며,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각도들. 간만에 보는 그 풍경들 속에, 어렸을 때의 우리가 여전히 연보라색 속셈학원 가방을 메고 돌아다니는 것만 같았다.

“하인천역 앞에 흉물스러운 거 있잖아, 월미 은하레일이라고. 그거 마침내 써먹는다던데?”

“고철로?”

“고철은 아니고. 근데 그거 움직인다면서, 은하레일 지나가면서 잘 보이는 데다 사이다 병을 띄운다는 거야.”

“사이다? 인천 앞바다에 사이다가 떠도?”

“그래, 당신의 세금이 고뿌로 퍼지고 있습니다지, 뭐.”

시시하고 웃기는 이야기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생각해보니 이사를 하고, 한 번도 그 동네에 돌아가지 않았다. 가끔은 궁금해서, 그리워서, 인천에 볼 일 있어서 가는 김에 한 번쯤 들러 볼 법도 했는데도.

우리가 이사를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은수도 연수구 쪽으로 이사를 했다고 들었다. 그게 자였다. 유리는 이사를 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어느샌가 소식이 끊기고 말았다. 찾아가 보면, 혹은 예전 전화번호로 전화 한 번만 걸면 다시 이어졌을지도 모르는데, 어째서인지 연락하게 되질 않았다. 어린시절 친구라는 것, 딱 그만큼의 인연, 그렇게 생각하고 넘어가면 될 일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슴에 큼직한 가시가 걸려있는 것처럼, 신경이 쓰였다.

묵직하고 아릿하게.

“유리... 는 연락 안 되지?”

“응.”

“그렇구나.”

그 동네까지 가 본 은수가 그렇게 말할 것 같으면, 아마 유리네도 어디론가 이사를 간 모양이었다. 그런데 은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연락이 안 되는 게 아니라, 안 했어.”

“아.”

“너도 그렇지?”

“으응...”

우리는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나와 은수, 그리고 유리에게는 비밀이 있었다.

돌아가신 유리의 할머니와, 그리고 은수의 엄마가 알고 계신 비밀.

그때 은수가, 가방 속에서 구깃구깃한 흰 봉투를 끄집어냈다.

“그건...”

기억에 있는 봉투였다. 은수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것’을 발견한 다음에, 유리 할머니가 쓰셨던 거야.”

나는 차마 손을 뻗지 못한 채, 그 봉투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것’에 대해, 우리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그 순간, 20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선뜩한 무언가가 내 발목을 휘감는 것만 같았다.


우리는 그때 5학년이었다. TV에서는 매일 경제가 어렵다고, 불황이라고, 실업자 수가 늘어난다고 우울한 뉴스가 쏟아지고 있었다. 우리가 사는 동네 역시 그 불황에서 아주 벗어날 수는 없었는지, 어른들의 표정은 대체로 어둡기만 했다.

하지만 아이들까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방학때에도, 혹은 주말에도, 우리는 동인천에 가서 놀곤 했다. 산을 빙 돌아 신포시장을 지나서 큰 길을 따라 가도 되었지만, 그보다는 응봉산을 넘어가는 것이 더 재미있었다. 같은 골목에 살던 친구들은 응봉산 꼭대기에 자리잡은 자유공원까지 올라가며 꽃을 꺾거나, 아침부터 맥아더 동상이 밟고 선 커다란 받침대에다가 판박이를 문질러 붙이곤 했다. 좀 짓궂은 애들은 저녁 늦게까지 놀다가 돌아오는 길에 공원 구석구석에 숨어 있는 커플들을 놀래키기도 했다.

지금이야 낡고 쇠락한 곳이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동인천은 우리에겐 환상적인 곳이었다. 어린애들이었던 우리의 눈에만 그랬던 게 아니라 정말로, 그 무렵 동인천은 인천 번화가의 중심이었다. 주말이 되면 백화점으로, 지하상가로, 구제시장이며 배다리 헌책방으로, 학생들이며 주머니가 가벼운 20대들, 그리고 미림극장 쪽의 그릇가게들에는 혼수를 알뜰하게 준비해 보려는 예비부부들이며, 살림살이를 좀 싸게 장만해 보려던 아이 엄마들까지 정말 많은 이들이 이곳을 누비고 다녔다.

대한서림 뒤편으로는 상가들과 학교들이 모여 있었다. 인성여고, 인일여고, 인천여고, 제물포고 같은. 고등학교들은 10월 무렵, 중간고사가 끝나고 수능이 오기 전 길게는 3일, 짧게는 당일치기로라도 축제를 하곤 했다. 비슷비슷한 골목 안에 중고등학교가 여럿이었으니, 이 무렵에는 그 근처 학교들 뿐 아니라 인근 상가들까지 축제 분위기였다고 들었다. 여기서 들었다는 건, 나는 딱 축제 무렵의 동인천에 친구들과 함께 가 보진 못했다는 말이다.

“안 돼.”

물론 평소에는 풀방구리 쥐 드나들 듯 돌아다니는 동인천인데, 멀어서 못 가는 건 아니었다.

“가정통신문도 나왔잖니. 축제 기간에 동인천 함부로 돌아다니지 말라고.”

“어엄마아아아.”

“안 돼. 홍예문 너머로 아예 넘어가지 마.”

홍예문이란 자유공원 옆쪽으로 난 터널이었다. 예전에는 바다가 가까운 이쪽에 먼저 마을이 만들어졌는데, 인천역과 동인천역이 생기며 쉽게 넘어갈 수 있도록 아예 터널을 뚫은 흔적이라고 했다. 그러니까 엄밀히 말하면, 그 홍예문 너머가 우리들이 말하는 동인천인 셈이다.

“지난번에 거기서 중학생들에게 뜯기고도 놀러간다는 소리가 나와?”

“그건 4학년때고!”

“4학년이나 5학년이나지! 가서 숙제나 해!”

물론 자유공원이나 홍예문에서 동인천역으로 내려가는 길 중간중간에는 외진 골목길들이 많았다. 초등학생들이 신이 나서 몰려 다니다 보면, 어디선가 중고등학생 날라리들이 스르륵 나타나 건방지다고 한 소리 하거나, 삥을 뜯기도 했다.

간혹 고등학생 일진과 싸우고 왔다는 애들도 있었다. 그런 애들은 한동안 교실에서 영웅 취급을 받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고등학생이긴 해도 일진은 아니었을 것 같다. 아니면 일진 쫓아다니는, 한참 밑에 지질한 따까리였거나. 그러니까 한심하게도 초등학생이나 패고 다니지.

여튼 어른들 말씀으로는, 축제 기간이면 중고등학생들의 그런 일탈도 특히 심해지니, 아예 걔네들 축제라고 노는 동안에는 그쪽에 가서 얼씬거리지 말라는 말이었다. 그냥 우리 엄마만 하고 마는 잔소리면 모르겠는데, 학교에서는 또 주말이나 축제 때 그런 피해를 입지 않도록, 10월 내내 주의하라는 가정통신문까지 내려보냈다. 그걸 보시고 이 집 저 집에서 다들 한 말씀 하신 바람에, 평소에는 동인천을 그냥 우리 집 안마당처럼 생각하던 친구들도 요 기간에는 다들 발이 묶여 이 좁다란 동네에서만 모여 놀곤 했다.

“빨리 중학생 되고 싶다...”

“맞아. 우리 동네엔 중학교가 없으니, 가면 천상 그쪽으로 가는 거 아냐?”

“그치, 그러면 축제기간에 우리도 맨날 꼽사리껴서 놀고 좋은데.”

물론 중학생이 되면 수업시간도 늘고, 학교에 붙잡혀서 공부하는 시간이 더 길어지겠지만, 그때의 우리는 아직 거기까지는 생각이 미치지 않았다. 그저 교복을 입고 동인천을 활보하는 언니들이 부러웠을 뿐이었다. 우리는 투덜거리며 골목 안길에서 평소의 두세 배는 말썽을 부리고 다녔다. 축제에 못 간 스트레스를 그렇게라도 풀려는 듯이.

여긴 오래되고 허름한 마을이었다. 지어진 지 몇십 년은 된 듯한 낡은 집들이 쭉 뻗은 골목을 따라 서로서로 마주보며 이어져 있었다. 이곳의 집들은 저기 홍예문 너머의 동네들과는 좀 달랐는데, 아파트도 빌라도 아니었다. 단독주택이지만 2층집이 많았는데, 그게 TV나 책에서 보는 2층 양옥집 같은 것과는 좀 달랐다. 나무로 지어진 부분이 많았고, 2층은 1층보다 밖으로 튀어나와 있었다. 기와 지붕이었는데, 역시 학교에서 배우는 한옥과는 많이 달랐다.

고개를 들면 자유공원과, 그 아래 교육청 건물이 우리를 내려다보았고, 비탈 아래로는 항구가 있었다. 드넓은, 세계로 연결된 그런 바다가 아니라 내항이었지만 말이다. 그리고 우리와 내항 사이에, 구청이 있었다. 구청이 있다고 딱히 번화한 동네는 아니라는 게 중요했다. 우리 아빠는 구청에 다녔는데, 아빠와 손을 잡고 다니면 아는 척 하는 아저씨들이 많아서 짜증났다. 옆집의 은수네 아빠는 교육청에 다녔다. 은수네 엄마는 학교 선생님인데, 바로 저 너머 인천여고에서 역사를 가르친다고 했다. 은수네 엄마는 전에 이 동네를 두고 그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적산가옥이라고. 그건 이곳이, 예전에 해방이 되기 전 일본인들이 살던 마을이었다는 뜻이다. 이곳은 개항과 함께 바로 외국인들이 들어와 살기 시작한 곳이었다. 이쪽은 일본인들이, 또 패루 저 편으로는 중국인들이. 그리고 해방이 되면서 도망친 일본인들이 버리고 간 집들이 아직까지 남아 있는 거라고 들었다.

그리고 은수네 옆집, 유미네 집은 아주 오래 전부터 이 동네에서 살았다고 했다.

한 마디로, 먼지 냄새만 풀풀 풍기는 이 오래 된 마을에서는, 무엇하나 재미있게 놀 만한 게 없었다는 이야기다.

“우리, 학교 갈까?”

“학교?”

“그래, 답동에. 답동 가서 떡볶이 사 먹자.”

나와 은수, 그리고 유미는 소곤거리다가, 가위바위보를 했다. 내가 졌기 때문에, 나는 얼른 집에 숨어들어가 학원 가방을 탈탈 털어 비운 뒤 주방에 있던 과자들을 두어 봉지 챙겨왔다. 그리고 우리는 다 함께 시장 쪽으로 향했다.

답동은 우리가 놀기 좋은 곳이었다. 거기는 우리가 아장아장 걸어다닐 때부터 집 앞 골목길처럼 뛰어놀던 곳이었으니까. 우리 세 사람이 졸업한 박문유치원과, 지금 다니고 있는 신흥초등학교가 전부 답동성당을 끼고 그 주변에 있었다. 우리는 늘 학교 가던 길을 따라 가다가, 살짝 길을 벗어나 신포시장에 들렀다. 여긴 원래 후라이드 치킨이 유명했지만, 그런 건 엄마랑 왔을 때나 한참 졸라서 맛을 보는 거고. 대신 구석에서 우무를 한 접시씩 먹었다. 그리고 우리는 지하도로 길을 건너 성당 쪽으로 넘어갔다.

“괜찮을까?”

“괜찮을거야. 여기 언니들도 전부 인일여고 쪽 축제 준비하는 데 가 있는다고 그랬어.”

“좋겠다... 축제도 가고...”

성당 쪽에는 만화잡지 “내 친구들”이며, 여기 연재되다가 책으로 묶여 나온 만화책들도 있어서, 우리는 우선 성당에서 뒹굴거리며 수십 번은 읽었던 “일루미나”며 “거울나라의 수수께끼” 같은 만화들을 다시 읽었다. 그러다가 우리는 평소보다 조금 대담한 짓을 해 보기로 했다.

그건 주말이라 텅 빈 데다, 동아리 활동하는 언니들도 다른 고등학교 축제에 참가하느라 보이지 않던 인천여상에 숨어드는 것이었다.

학교 주변에는 나무가 울창했다. 우리는 축대 위에 적당히 철망을 친 다른 학교들과 달리, 매끄럽게 잘 다듬은 돌기둥으로 쌓아올린 이곳의 울타리를 조심스럽게 넘어들어갔다. 학교 안은 고요했다. 등나무 벤치 바닥도 돌로 깔려 있어서, 학교는 유난히 청결한 느낌이 들었다. 인천 시내가 다 내려다 보일 만큼 높고 경치 좋은 이 곳에서, 우리는 아까 집에서 훔쳐 온 과자 봉지를 뜯었다.

“근데 인천여상이 학교는 진짜 예쁘지 않냐? 나 나중에 여기 다닐까.”

“우리 엄마가 요즘은 여자도 대학 가야 한댔어. 우리 엄마는 나 인문계 못 가면 죽여버린대.”

“야, 근데 인천여상은 공부 잘 해야 하는 데 아냐?”

“실업계가 무슨 공부를 잘 해야 가.”

“아냐, 우리 엄마가 그러는데 인문계 갈 만큼 공부 잘 하면서 집이 가난해서 빨리 취업해야 하는 애들이 인천여상을 가는 거래. 그래서 여긴 입시반도 있다고 하잖아.”

“정말?”

“그렇다던데? 인천대 같은 데는 인천여상에서 따로 뽑는다는 말도 있었어. 내신성적이라는 게 있다잖아. 내신만 보면 인천여상 오는 게 훨씬 대학 가기 나을 수도 있다던데?”

“어려운 말 그만 하고 이거나 먹어. 안 먹으면 내가 다 먹을 거야.”

학교 건물 옆에는 잘 다듬어진 돌기둥 두 개가 있었고, 그 주변의 길도 다른 학교는 물론, 구청에서도 그렇게 하지 않겠다 싶게 잘 다듬은 돌계단이 놓여 있고, 그 안쪽의 산책로에도 돌바닥이 깔려 있었다. 돌바닥은 오래 된 듯, 사람의 발길에 닿아 매끈해진 느낌과 함께, 구석구석에 해묵은 이끼의 흔적들이 보였다.

“왜 이 학교는 이렇게 잘 해놓은 걸까? 공부 잘 하는 인문계도 아닌데.”

“동창회에서 돈을 많이 냈나...? 전에 아빠가 그러는데, 동창회에서 돈을 많이 내야 학교가 발전을 한다고 그랬어.”

“너희 아빠 어디 나왔는데?”

“제고.”

“야, 제고. 너네 아빠 공부 되게 잘 하셨나보다.”

우리는 시답잖은 이야기를 하다가, 빈 과자 봉지를 벤치 구석에 적당히 쑤셔넣고 일어났다. 그리고 모처럼 고등학생 언니들이 없는 이 곳이 마치 내 세상인 양 뛰어다녔다.

“야, 이거 봐.”

그리고 우리는, 그동안 못 봤던 것을 발견했다.

그건 나무 안쪽에 있는, 석등이었다.

“별 게 다 있네, 이 학교는.”

조심조심, 풀숲 안쪽으로 들어갔다. 마치 절에 있는 것 같은 석등을 보고 우리는 다들 들떠 있었다.

“이 밑에 보물이라도 묻어 놓은 게 아닐까?”

그런 농담을 하며, 굴러다니는 돌조각을 주워 땅을 파헤치는 시늉도 했다.

그런데 유미가 땅을 파헤치던 돌조각이 뭔가에 걸린 것 같았다.

“이건 뭐지?”

“야, 너무 파지 마. 여기 선생님한테 걸리면 혼나.”

“맞아. 뱀 나오면 어떡해.”

“인천에 뱀이 어딨어. 어, 이거 봐.”

유미는 갑자기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더 큰 돌조각을 찾아 석등 밑을 파헤치기 시작했다. 내버려 둘 수 없어서 우리도 도왔다. 그리고 잠시 후, 석등 바로 아래쪽에서 갈색에 가까운 붉은 색 천으로 둘둘 말아놓은 무언가가 나왔다. 유미가 천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갸웃거리는데, 은수가 그 뭉텅이를 받아 천을 벗겨냈다.

“이건 뭐지?”

벗겨낸 천 쪽에는 실로 묶어서 염색한 것 같은 무늬가 나 있었다.

한편으로 그 천 뭉치 안에는 나무 상자가 들어 있었다.

간단히 열릴 것 같은데, 아무리 해도 열리지 않는 나무 상자가.

“이건 뭐지?”

“보물 상자 아닐까?”

“보물은 아니고... 여기 석등 밑에서 나온 걸 보면 무슨 유물이 아닐까?”

“유물을 우리가 이렇게 멋대로 파도 돼? 이런 건 어디다 물어봐야 해?”

나는 곰곰 생각하다가 유미와 은수의 손을 이끌었다.

“파도 되는지, 우리 아빠한테 물어보면 되지 않을까?”

우리는 그 천에 둘둘 말린 상자를 가방에 넣고 의기양양하게 동네로 돌아왔다. 정말 보물이든, 혹은 유물이든, 무척 중요한 것을 발견해 낸 것 같았다.

“역시 TV에 나오지 않을까?”

유미는 신이 나서 떠들어댔다.

“왜, 최초 발견자라고 말야. 뉴스에도 나오고.”

“그러게. 초등학생이라고 하면 다들 놀라겠지?”

“맞아맞아.”

그런데 갑자기, 유미네 집 문이 벌컥 열렸다.

“너희들, 지금 뭘 하고 다니는 거냐!”

유미네 할머니였다.

유미의 할머니는 일본 분이라고 들었다.

늘 깔끔하고 조용조용한 분으로, 언제나 몸에 잘 맞는 차분한 톤의 옷들을 즐겨 입는 분이었다. 아침마다 화장도 하셨다. 그러다 보니 동네 할머니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으셨다. 저네는 해방이 된 게 언제인데 아직도 깔끔을 떨고 있다고. 동네 할머니들이 뒤에서 수군거리시는 것을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런 유미네 할머니가, 지금 화를 내고 계셨다.

평소 같으면, 그 목소리가 담을 넘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분인데.

“너희 셋 다 이리 들어오너라! 너희 집 대문에는 손도 대지 말고!”

우리는 기가 죽어서, 유미네 집으로 들어갔다. 유미네 집은 나나 은수네 집보다도 훨씬 더 옛날 모습을 간직한 것 같은 집이었다. 신발을 벗고 들어가자 좁은 복도가 이어졌다. 나무로 된 계단이 삐걱거렸다. 유미의 방은 우리들 집처럼 평범한 모노륨이 깔려 있었지만, 평소에는 기웃거릴 엄두도 내지 못했던 2층 할머니 방에는 화문석 자리 같은 것이 깔려 있었다.

“할머니...”

유미가 울상을 지었다. 할머니는 우리 셋 모두를 번갈아 바라보시며 눈을 부라리셨다.

“그것, 어디 있느냐.”

“어떻게 아신 거예요...”

나는 학원 가방을 벗어 내려놓고, 지퍼를 열었다. 그러자 할머니는 나를 밀쳐내시며 가방을 빼앗으셨다. 나는 깜짝 놀라 울음을 터뜨렸다. 할머니는 허겁지겁 지퍼를 열고, 그 천에 싸인 상자를 꺼내셨다.

“이건...”

할머니의 표정이 창백해졌다.

“우리가 찾은 거예요...”

은수가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오래된 유물을 찾은 것 같은데 우리가 발견했으니까, 우선 희연이 아빠한테 보여드리고, 괜찮다고 하시면 우리 엄마한테 물어보고... 박물관에 기증하려고요.”

“큰일 날 소리!”

할머니는 천을 다시 꽁꽁 묶어 놓으시다가, 그 뭉치를 다시 내 가방 안에 밀어넣으셨다.

“너희 셋, 여기 꼼짝도 말고 있거라!”

할머니는 내 가방 째 그 뭉치를 들고 나가셨다. 갑자기 소나기가 내리는 듯한 요란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일본 말이라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만, 호통을 치는 듯한 소리가 나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곧, 그 호통 소리조차 사라졌다.

우리는 불안했다. 방문은 닫혀 있었고, 유미네 집은 기묘할 정도로 고요했다. 나는 흐느끼다가 애써 울음을 삼켰다. 유미도 마찬가지였다. 유미는 고개를 저으며 중얼거렸다.

“할머니가 왜 그러시지...”

“무슨 일인 걸까, 대체.”

은수가 불안한 듯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리고 자리에서 일어나 문을 향해 다가갔다.

“근데 나 우리 할머니가 저러는 거 처음 봤어...”

“어, 이거 문 잠겼어.”

은수는 문을 흔들어 보았다. 문은 밖에서 꽉 잠겨 있었다.

“우리 못 나가는 거야?”

“할머니 방은 밖에서 잠글 수 있어...”

“갇힌 거냐고!”

“오시면 풀어 주실 거야. 밖에 나가지 말라고 했으니까 그냥 있자...”

“야, 전유미.”

“나도 무서워, 근데 그냥 나가면 혼 날 거야.”

“아, 진짜.”

은수는 방을 가로질러 반대편 벽으로 다가가려다 털썩 주저앉았다. 벽 쪽에는 큰 창문이 있었지만, 여긴 2층이었다. 창문을 열고 나갈 수는 없었다.

“못 나가는 거야? 밀실 살인처럼?”

은수가 고개를 저었다.

“...안 죽으면 밀실 살인이 아니지.”

은수가 수선을 부리는 것을 보고 조금 우스워져서, 나는 눈물을 슥슥 닦으며 말했다. 은수는 나를 향해 혀를 낼름 내밀었다.

“울다가 웃으면 어떻게 된다더라?”

“안 웃었거든.”

울다가 웃었든 말았든, 창문으로는 나갈 수 없다. 방문은 잠겨 있었다. 달리 할 수 있는 일도 없어, 우리 셋은 할머니 방 한 가운데에 모여앉았다. 가을이었고, 할머니의 방은 따뜻했지만,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우리는 손을 잡고 앉아, 얼마 전 나온 H.O.T의 새 앨범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다가 바닥에 드러누워 다섯 명 중 누가 제일 멋있는지에 대해 언쟁을 하거나, 신곡인 “I yah!”를 부르기도 했다. 한참 그런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 불안한 마음도 조금씩 가라앉았다.

그때였다. 밖에서 자물쇠를 흔드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할머니?”

유미가 얼른 일어났다. 하지만 자물쇠는 바로 열리지 않았다. 맞는 열쇠를 끼우지 않고 억지로 열려는 것처럼, 자물쇠를 흔드는 소리가 계속 들렸다.

마치, 누군가가 억지로 이 방에 들어오려고 하는 것 같았다.

“...할머니야?”

유미는 뒷걸음질을 치며 다시 한 번 물었다.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우리 셋은 찰싹 달라붙은 채, 슬금슬금 뒤로 물러나, 창문이 있는 벽까지 왔다. 유미가 용기를 내서 다시 한 번 물었다.

“...おばあちゃん?”

그리고 자물쇠를 흔들던 소리가 멈췄다.

달칵, 하고 자물쇠의 잠금장치가 풀어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리고 우리가 등을 기대고 있던 벽의 바로 옆, 창문의 틈새로 시커먼 그림자가 배어나왔다, 그리고 그 그림자에서 갑자기 수십 개의 손이 튀어나와 우리를 붙잡았다.

“으아아아아악!!!!!”

셋이 일제히 비명을 질렀다. 우리는 허둥지둥 문 쪽으로 달려갔다.

그때 잠겨 있던 문이 열렸다.

유미네 할머니였다.

“네 이놈들! 어딜 감히!”

할머니가 호통을 치셨다. 우리는 할머니의 치맛자락에 정신없이 매달렸다. 그리고 등 뒤를 돌아보았다.

그림자들은, 다시 빨려들어가듯 창문 밖으로 사라졌다.

창문은 여전히 꽉 닫혀 있었다.


“나는 오늘 너희 때문에 아주 몹쓸 짓을 저지르고 왔다.”

할머니는 엄숙한 목소리로 말씀하셨다.

“지옥에 떨어져도 할 말이 없을 죄를 짓고 왔다. 하지만 어쩌겠느냐. 가만히 내버려두면 너희 셋 모두가 잘못될 것을.”

“할머니...?”

우리는 긴장한 채, 할머니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었다. 할머니는 우리 셋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셨다.

솔직히 말하면 무척 궁금했다. 그 상자는 무엇인지, 어떻게 된 일인지. 할머니께서 말씀하시는 몹쓸 짓이란 것은 또 뭔지. 하지만 아마도, 할머니는 말씀해 주시지 않을 것 같았다. 우리는 고개를 숙이고, 바닥의 돗자리 무늬만 바라보았다. 그때 할머니가 한숨을 쉬며 말씀하셨다.

“나중에 내가 죽은 뒤에.”

“할머니, 왜 그런 말을 해요.”

“유미 너는 입 다물거라. 어디서 그런 흉한 것을 찾아내 놓고 할 말이 있어서.”

“...”

“은수 너, 너희 엄마가 학교 선생님이지. 역사 선생님.”

“예.”

“나중에 내가 죽은 뒤에, 너희 엄마에게 물어보거라. 너희가 그 상자를 어디서 찾았는지도.”

은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는,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전 까지는 어디서도 이 이야기를 하지 않겠다고 약속을 했다. 새끼손가락도 걸었다. 그리고 나서, 우리 세 사람은 유미네 집 좁은 욕실에서 목욕을 했다. ‘

씻고 나와 보니, 할머니는 속옷까지 새 옷을 가져다 놓으셨다.

“너희 입던 옷은 찾을 것 없다.”

집에 가서 뭐라고 말해야 하나, 난감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우리는 아침에 신었던 운동화 대신, 할머니가 사다 놓으신 삼선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왔다. 귀신에라도 홀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뭔가 굉장한 일이 벌어졌던 것 같지만, 그게 뭔지 알 수 없으니 어디 가서 무용담을 늘어놓을 수도 없었다. 다만 은수가 한숨을 쉬며, 유미네 집 2층을 올려다보았다.

“그 손들... 은 다 뭐였을까.”

“그러게. 잡히면 죽는 거였을까? 아, 내 가방!”

“포기해... 옷도 안 주셨는데 가방을 돌려 주시겠냐.”

“어떡해, 엄마한테 죽었어.”

“내가 빌려갔다가 잃어버렸다고 할게.”

“옷이랑 운동화는 어떡하지.”

“...그건 나도 걱정이야. 유미랑 말이라도 맞출걸.”

우리는 한숨을 쉬었다. 정말 세상이 멸망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일주일 뒤, 유미네 할머니는 저녁식사를 준비하시다 말고 갑자기 쓰러지셨다. 심장발작이었다. 유미네 부모님은 바로 119에 전화를 거셨지만, 구급차는 올 수 없었다.

동인천에 큰 불이 나서 전부 그쪽에 가 있다고 했다. 결국 은수네 아빠가 유미네 할머니를 차이 모시고, 우리 아빠가 뒷좌석에서 인공호흡을 하며 인하대 병원으로 향했다. 하지만 할머니를 구할 수는 없었다.

“운이 나빴어.”

밤 늦게 돌아오신 아빠는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대한서림 뒤쪽에, 불이 났잖아.”

“어떡해... 불이 크게 났대?”

“어. 지하에서 불이 나서 연기가 꽉 차는 바람에, 2층, 3층의 당구장이랑 호프집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나봐. 마침 학교 축제도 끝나고 해서, 고등학생 애들이 많았다는데.”

“어떡하니...”

“아까 은수네 엄마가 어딜 갔나 했더니, 그리 갔었나봐. 그 학교 학생 중에도 다친 애들이 있는 모양이지.”

“아무리 축제가 끝나도 그렇지, 애들이 그런 덴 왜 가...”

“그러게.”

“근데 죽진 말아야 할 텐데...”

엄마 아빠는 그렇게 말씀하셨지만, 다음 날 뉴스 들어보니 상황은 무척 심각했다.

그 화재 사건의 사상자 중 상당수가 축제를 마치고 나온 고등학생들이었다. 이 동네에도 그쪽으로 학교를 다니는 언니 오빠들이 있었는데, 그날 화재 사고로 죽은 사람도, 화상을 심하게 입은 사람도 있었다. 또 본인이 죽거나 다치진 않았어도 주변에 친구나 아는 사람들이 사고로 죽은 경우도 많았다 보니, 다들 얼굴이 어두웠다.

그해 연말이 지나도록, 모든 것이 조심스럽기만 했다. 그저 코미디 프로를 보며 웃는 것 조차도 죄스러울 만큼.

그리고 새해가 되었다.

“은수 너, 너희 엄마한테 여쭤봤어?”

유미네 집에서 모여서 귤을 까먹으며 뒹구는데, 문득 유미가 물었다. 은수는 뒹굴거리다가 움직임을 멈추고 천장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한참만에야 대답했다.

“...아니.”

“궁금하지 않았어?”

“궁금한데... 엄마한테 뭐라고 물어봐야 할지 모르겠어서.”

“나 말야.”

유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미는 자기 책상을 열고 뭘 한참 찾다가, 하얀 편지봉투를 끄집어냈다.

“...그날 밤에, 할머니가 이걸 주셨어.”

“그게 뭔데?”

“유언.”

“너희 엄마 아빠도 아셔?”

“아니... 이건 그냥 은수네 엄마한테 여쭤볼 때 보여드리랬어.”

유미는 마음이 복잡한 듯 했다.

“계속 신경이 쓰였어.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돌아가시자마자 여쭤볼 수도 없고. 그런데다 그 날, 화재 말이야.”

“동인천 화재?”

“응.”

나중에 알았지만, 그날 동인천에서 일어난 화재는 정부 수립 이래 세 번째로 큰 화재 사고라고 했다. 죽은 사람이 50명이 넘고, 부상자도 80명 가까이 되었으니까. 그런데다 어른들은, 애들이 왜 호프집에 가 있었냐며, 죽거나 다친 학생들을 날라리 취급하기까지 했다. 신문도 뉴스도 그런 식이었다.

“우리 할머니가 그랬잖아. 죄를 지었다고.”

유미가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할머니가 발작을 일으키신 바로 그 때에, 동인천에는 불이 났어.”

“...우연의 일치야.”

은수가 대답했다. 하지만 유미가 고개를 저었다.

“아냐, 우리 할머니는 우연한 일이라는 건 없다고 늘 그러셨어. 그런데다...”

그리고 유미는 목소리를 낮추어, 우리에게만 들리게 속삭였다.

“엄마 아빠가 말씀하시는 걸 들었어. 할머니 입관 전에 새 옷으로 입혀드리는데, 발목부터 무릎까지 손자국 같은 게 가득 나 있었대.”

손자국.

그 말에 나와 은수는 동시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날, 그 창문에서 새어나오던 그림자와, 그림자에서 튀어나오던 손들이 떠올랐다.

만약 붙잡혔다면, 우리는 그때 죽었을지도 모른다.

“뭔가가 있어. 그러니까 역시 너희 엄마한테 여쭤보자.”

유미가 말했다. 은수도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 엄마도 방학이라서 집에 있어. 셋이 같이 가서 여쭤보는 게 좋겠다.”


“여상에 가서 그런 상자를 파냈다고?”

은수네 엄마는 우리 말을 듣고는 바로 눈살을 찌푸리셨다.

“예... 근데 유미네 할머니가 화를 내시더니, 우리를 방에 가둬 두셨었어요.”

“그게 언제 일인데.”

“그... 할머니 돌아가시기 일 주일 전요.”

은수 엄마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유미가 내민 봉투의 모서리를 손끝으로 만지작거리셨다.

“인천여상이 있던 자리에, 옛날에는 신사가 있었어.”

“신사가 뭔데요?”

“왜, 일본 신을 모시는 절 같은 것 말이야. 일제시대 때 일본 놈들이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강제로 신사참배를 시켰다고들 그러잖아? 그 신사.”

“그럼 일제시대 때 있었던 거예요?”

“그래. 지금 여기도 예전에는 일본인들이 마을을 이뤘던 곳이고... 거기 언덕 아래에는 포로 수용소가 있었어. 연합군 포로 수용소가. 그리고 지금은 여상이 있는 그쪽을 미야마치라고 불렀지. 신사가 있는 곳에 붙이는 지명이었어. 너희들, 여상 안에 돌기둥 같은 것 봤니?”

“예.”

“하긴, 이걸 석등 아래에서 파냈으면 당연히 봤겠구나... 그 돌기둥이 있는 자리가, 원래는 신사의 출입구였다고 해. 거기 돌계단도 그때의 흔적이고.”

“저희는 그걸, 처음에는 희연이 아빠한테 물어보려고 했어요. 이거 파내도 되는지... 보물이라든가 그런 것인 줄 알고...”

“학교에서 파냈는데 그걸 왜 구청에 물어봐... 아니다. 그런데 그날 할머니께 혼났고. 그게 다였니?”

“아뇨.”

우리는 그날, 유미네 할머니가 우리들에게 대문에 손 대지 말라고 했던 것과, 할머니 방에 갇혀 있을 때 보았던 그림자와 손들에 대해 말했다. 할머니의 시신에 남아 있던 손자국에 대해서도. 은수 엄마는 심각한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셨다.

“돌아가신 뒤에, 은수네 엄마한테 여쭤보라고 하셨어요. 그래서...”

은수 엄마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 봉투를 조심스럽게 뜯어보셨다.

꼬깃하게 접힌 편지 속에는, 우리가 알아볼 수 없는 일본어가 가득했다. 은수 엄마는 한 줄 한 줄 손으로 따라 짚으며 편지를 읽어보셨다. 그리고 편지봉투를 닫아서 등 뒤에 두셨다.

“너희가 신경 쓸 만한 일은 아니야.”

“하지만...”

“이건, 만약에 할머니가 대응하신 것으로 끝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하나, 누구한테 연락해야 하나, 그런 것에 대한 이야기야.”

“대응?”

“그래. 이건 그냥 천재지변 같은 거니까, 사람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너희가 신경 쓸 일도, 죄책감을 가질 일도 아니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어. 그리고...”

은수 엄마는 한 순간 무서운 표정을 지으며 말씀하셨다.

“나라고 해도 은수에게 그런 일이 생긴다면 너희 할머니와 같은 일을 했을지 몰라. 그러니까 이 일은 그만 잊어버리도록 해.”


그러니까 이건, 그때 은수 엄마가 받으셨던 그 편지였다.

나는 편지 봉투를 만지작거리다가, 다시 은수의 앞으로 밀어놓았다.

“나, 일어 잘 못 해.”

“찍어서 번역기 돌려. 안 읽어 볼 거야?”

“...모르겠어.”

나는 힘겹게 대답했다.

“내가 알아야 하는 내용이 있는 거야?”

은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 애는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편지 봉투를 다시 가방 속으로 밀어넣었다.

툭, 하고 무언가 끊어지는 듯한 느낌이 났다.

“별 건 아니야.”

“그럼 왜...”

“난, 계속 여기 얽매였어.”

은수가 속삭였다.

“이걸 읽으려고 일본어도 배웠고, 여기 적힌 연락처에 연락해서 물어보고 싶어서 공부도 했지. 그러다가 결국 민속학까지 가긴 했지만 말야.”

은수가 쓰게 웃었다.

“나도 그냥, 그럴 걸 그랬어.”

순간 나는, 하마터면 다시 그 봉투를 보여 달라고 말할 뻔 했다.

하지만 은수가 고개를 저었다.

“여기 얽매일 필요 없어.”

“하지만...”

“묶일 필요 없어. 왜, 액년에 든 사람이 있으면 정월 대보름 전날에 제웅을 만들어서, 그 사람의 옷을 입히고 생년월일을 적어서, 돈을 함께 묶여서 길에 버린다잖아. 그걸 주워든 사람에게 액이 가서 붙는 거야. 봤어도 줍지 않으면, 보고 모르는 척 하고 그냥 갈 수 있으면, 그 재액은 네 것이 아니야.”

은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묘하게 찜찜하고 오싹한 기분이 들었다. 내가 줍지 않은 것, 내가 알려 하지 않은 것들이, 그대로 묵직하게 그 애의 가방 속으로 가라앉았다. 나는 문득 우리가 마신 음료수들을 내려다보았다.

은수가 한국에 남아 있는, 일본의 신사 터에 대해 연구하는 데 필요하다며 유학을 갔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은 그 해 겨울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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