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밀번호를 잊어버리셨나요?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해망재 권력의 기억

2019.03.01 04:3503.01

인년, 명나라 만력제 즉위 때의 일이었다. 
세상에는 유의(儒醫)로 알려져, 엄연히 사평을 지낸 문관임에도 내의원 의관이 아니냐는 오해를 받던 괴짜, 정작의 집 앞에 한 사내가 걸음하였다. 

“정 형, 계시오.”

문이 열리고, 사내는 안으로 걸어들어갔다. 나이는 이제 마흔 남짓, 소탈해 보이는 행차였다. 그러나 걸친 도포나 갓이며 갓끈은 하나같이 귀물이었다. 

“정 형.”

그가 짐짓 친근한 체 다시 부르자, 장지문이 열렸다.
문을 열고 나온 사람은, 그보다 열 살은 넘게 나이가 많아 보였다. 아니, 의원이라 몸에 좋은 것들을 철철이 달여 먹여 그리 보이는 것이지, 실상은 아버지와 아들 만큼 차이가 졌다. 

“부원군 대감께서 여긴 무슨 일이시오이까.”

둘째따님을 이 나라의 지존에게 여읜 뒤로, 하늘을 나는 새도 떨어뜨릴 만 하다는 말을 듣는 그였다. 그런데다 중전이 되신 그 따님께서, 혼인하자마자 바로 회임을 하신 뒤로는 세상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럴 만도 하였다. 주상께서는 자녀를 여럿 두셨으나, 모두 후궁 소생이었다. 지금은 이 세상 사람이 아닌 의인왕후는 삼십 년 동안 수도 없이 기도를 올리고 절을 세웠지만, 중궁전에서 입덧 비슷한 이야기도 나오는 일이 없었다. 그렇게 한 번 포태해보지도 못한 대군 아기씨를, 아니, 아직은 대군인지 공주인지 알 수 없는 귀한 아기씨를 어린 새 중전께서 대번에 품으셨으니, 그 부원군 김제남을 두려워하며 공경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하지만 이 집의 주인은, 옛날과 다름없는 오연한 태도로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정 형은 정말 변함이 없는 사람이시오.”

김제남은 웃으며 댓돌에 신발을 벗었다. 정작은 들어오라 마라 가타부타 말도 하지 않고, 장지문을 열고 들어가 자리를 잡고 앉았다. 

“무슨 일로 이 누추한 곳까지 거둥하셨소이까.”

아랫것들이 주안상을 내어 왔다. 정작은 김제남의 잔에 술을 치고, 제 잔에 술을 따라 단숨에 비웠다. 김제남은 천천히 마시며 그의 기색을 살폈다. 

“여긴 부원군 대감께서 몸소 찾아오실 만한 곳이 아닙니다만.”
“모시려 한들 오셔야 말이지요.”

정작은 나이가 들어도 여전히 꼬장꼬장했다. 벼슬은 고작 사평에 머물렀지만, 의술이 뛰어나 어의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어전에 들고, 저 양평군 허준이 매달리고 있는 의서의 편찬에도 한 몫을 거들었다. 

“권력에 가까이 가지 말라는 유지를 받들고 있어서 말이외다.”
“정북창 선생께서 그리 말씀하셨는지는 모릅니다만, 제가 어디 정 형 앞에서 권력을 뽐낼 사람으로 보이셨습니까.”
“…”
“권력이라고 한들, 복중 태아가 세상에 나와 보셔야 알 일을.”
“그래서, 전녀위남법(轉女爲男法)이라도 알아보려 오셨습니까.”
“잘은 모르지만 그런 수작을 부리기에는 이미 때가 늦지 않았겠습니까. 혈이 모이고 정이 엉기는 바로 그 시기에 손을 써도 될까 말까한 일이라 들었는데.”
“알고 오셨으니 다행입니다.”

정작은 여전히 술잔만 기울이며 중얼거렸다. 김제남은 술잔을 내려놓으며 낮게 속삭였다. 

“그보다 여쭙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
“선대인의 일입니다.”
“이보시오, 공언.”

정작은 단호하게, 밀어내듯 말하며 눈을 부릅떴다. 하지만 김제남은 조금도 기세가 꺾이지 않은 표정으로 정작의 잔에 술을 따랐다. 

“정 형께 있어, 돌아가신 우의정 대감의 일을 말하는 것이 역린을 건드리는 것이나 다름이 없는 줄은 잘 압니다.”
“알면서 묻는 것이 더 몹쓸 일이라고는 생각지 않습니까.”
“생각하지요. 게다가 여쭙고 싶은 것이, 갑이의 일이라고 하면 필시 화를 내실 것이고.”
“…다시는 내 집에 오지 마시오.”

정작은 조용히, 그러나 분노를 감추지 못한 채 입을 열었다. 

“선친께서 윤원형과 더불어 을사사화를 일으키신 것에 대해, 나와 내 형님들은 평생을 두고 몸을 낮추며 백만분의 일이라도 그 죄를 갚으려 하였소. 장형께서 벼슬을 그만두신 것도, 내가 유자의 몸으로 의원의 업을 익혀 백성들을 도우려 한 것도 그 때문이라.”
“압니다.”
“그 천첩의 일에 대해 소문이 돌았던 것은 알고 있으나, 그 이야기를 면전에서 들어야 할 만큼 덕이 없이 살지는 않았다고 생각했거늘…”

그가 지그시 어금니를 깨물었다. 
분노할 만한 일이다. 그만큼 무례한 일이기도 하였다. 반백 년 전 세상 떠난 우의정의 소실에 대해 이런저런 뒷소문이 있었다 하나, 다 지나간 일이다. 무엇보다도 그 우의정 정순붕은 김제남이 태어나기도 한참 전에 죽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김제남으로서는, 그 일을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람을 죽여도 죽지 않는 비방.”

그가 낮게 속삭였다.

“그것에 대해 알고 싶어서 왔습니다.”

정작은 낮게 신음했다. 그는 한참동안 장지문을 노려보았다. 김제남이 이 집의 대문을 열고 들어설 때만 해도 늦은 오후였는데, 밖은 이미 어둑어둑해져 있었다. 정작의 안에서 두 사람이 서로 밀고 당기며 기세를 겨루는 듯 하였다. 괴력난신을 믿지 아니하는 유자와, 자신이 보고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겨 그 의미에 끝까지 천착하고 궁구해 온 의원. 둘이나 하나인 그들은 한참동안 정작의 눈 안에서 흔들리며 드잡이를 하였다.

“그걸 무엇에 쓰시려는 거요.”

그리고 마침내, 정작은 눈을 감으며 중얼거렸다. 

“정 형께서는 세자 저하를 어찌 보십니까.”
“이 나라의 국본이자 장차 지존이 되실 분에 대해, 나와 같이 한미한 자리에 머무르는 자가 무슨 할 말이 있겠습니까. 먼 발치에서 보다가, 간혹 어명이 있을 때 맥을 한두 번 짚어 보았을 뿐이온대.”
“정 형.”
“과욕을 부려 될 일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세자 저하를 어떻게 하겠다는 게 아니지 않습니까.”
“아니면, 그 일을 왜 지금 꺼내겠다는 거요.”

정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세간에는 그 일이, 천첩이 감히 제 주인을 방자하였다는 이야기로 알려졌을 텐데.”
“말은 바로 하십시다. 감히 제 주인을 방자한 게 아니라…”
“충비(충성스러운 여종)갑이지묘. 그 묘비명을 꼭 내 앞에서 말해야만 하겠습니까.”
“필요하다면 해야지요.”
“그리 눈치없는 분이 어찌 그 자리까지 오르셨답니까.”
“권력이 생기면 남의 눈치를 볼 일이 줄어들더군요. 그래서, 알려주실 것입니까.”
“허어.”

김제남이 눈을 빛냈다. 정작은 한숨을 쉬었다. 

“결코 세자 저하를 해치려는 것이 아닙니다.”
“중전마마께서 혹여 대군 아기씨를 생산하시더라도, 세자 저하께 어떠한 위해도 끼치지 않을 것이라 장담하실 수 있습니까.”
“그리 약조한다면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정작은 이해할 수 없었다. 
사람을 죽여도 죽지 않는 것이, 당대의 권세가인 그에게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설마 영원한 삶이라도 꿈꾸고 있는 것인가. 
그런 것이 어떤 것인지, 어떤 형태가 되어버리는지 안다면, 감히 그런 생각은 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면 하나만 부탁하겠소이다.”
“뭐든 말씀하십시오.”
“당장은 내, 알려 줄 수 없소. 허나 내가 죽은 뒤, 내 병부를 부원군께 맡길 것이니 그것을 불태워 주시오.”
“그 말씀은…”
“그 병부 중에, 돌아가신 장형께서 남기신 것이 있소이다.”

스무 살이 넘게 넘게 차이가 났던 맏형, 북창 정렴.
그 역시, 정작과 마찬가지로 의술을 익힌 유의였다. 의술과 양생술에 조예가 깊었으나, 부친인 정순붕이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자, 벼슬을 그만두고 하늘을 부끄러워하며 술로 세월을 보냈다. 
그 정북창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버지를 버리지 못하였다.
정순붕의 간병을 하며 병부를 적은 것도, 그의 임종을 지킨 것도 정북창이었다. 부친에 대한 정이 남아 있었던 것인지, 장남으로서의 굴레였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가 죽으며 그의 병부도, 정순붕의 죽음에 대한 기록도 모두 막내인 정작에게 전해졌다. 

“필요하다면 그리 하시오.”
“고맙소이다, 정 형.”
“그리고 내 살아있는 동안에는, 다시는 찾아오지 마시오.”

정작은 쓸쓸한 표정으로 김제남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그것이 두 사람의 마지막 만남이었다. 
정작은 그 다음 해인 계묘년에 숨을 거두었다.
그의 분재기에 적힌 대로, 그는 자신의 병부들을 모두 부원군인 김제남에게 남겼는데, 사람들은 그 일을 기이하게 여겼다. 


***


산군이 쫓겨나고 진성대군이 추대되니, 그가 바로 조선의 열세 번째 국왕인 중종이었다. 대군 시절 맞이한 부부인 신씨가 즉위 후 이레만에 쫓겨나고, 새로 맞아들인 중전 윤씨는 적통의 원자를 낳고 엿새만에 산후병으로 숨을 거두니, 장경왕후라는 시호를 얻었다. 원자는 세자에 봉해졌으나, 그 다음으로 맞아들인 중전 윤씨가 다시 경원대군을 낳으며 그 자리가 위태로워졌다. 
같은 파평윤씨 집안이었다. 장경왕후는 중전 윤씨의 삼종고모가 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한 집안 일가붙이라 해도, 권력이라는 것은 애초에 그리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동궁에 불이 나는 등 죽을 고비를 넘겼어도 세자는 살아남았다. 중종이 승하하고 세자가 즉위하자, 장경왕후의 오라비인 윤임과 사림파가 잠시 권력을 쥐는 듯 했다. 하지만 세자는 즉위하고 여덟 달 만에 급사하였으니, 그가 바로 인종이다. 
인종이 죽고 경원대군이 즉위하며, 이제 대비가 된 중전 윤씨, 아니 문정왕후가 수렴청정을 하자, 정권은 즉시 문정왕후의 오라비인 윤원형과 훈구파의 손에 넘어가고 만다. 
정순붕은 이 윤원형에게 붙어, 윤임과 사림파들에게 경원대군의 즉위를 방해한 역적이라며 그 죄를 물었던 이들 중 하나였다. 
그리고 그렇게 역적의 몸이 되어 억울하게 목숨을 잃었던 이들 중에, 좌의정 유관이 있었다.

“왜 운단 말이오. 의리 같은 것은 갓 쓴 양반님네들이 지키는 것이지, 어디에 있으나 어린 계집종에 불과한 제게 그런 것이 어디에 있는지, 나는 참말로 모르겠소.”

역적으로 몰린 자는 사약을 받는다. 그 일가붙이는 남자는 귀양을 가거나 목숨을 잃었고, 여자는 관노가 된다. 재산이나 노비들은, 새로이 권력을 쥐고 스스로 공신의 자리를 손에 넣은 이들에게 나누어졌다. 

“어차피 계집종인 거, 역적의 집안보다는 공신의 집안에 가는 게 더 기쁜 일이 아니오. 의리를 지킨다고 면천이 되기를 하겠소, 어디서 쌀이나 돈이 나오길 하겠소.”

그렇게 정순붕이 손에 넣은 유관의 재산 중에, 갑이라는 어린 여종이 있었다. 
열네 살 밖에 안된 것이 얼마나 앙큼하고 말을 잘 하는지, 그야말로 신통방통할 정도였다. 

“돌아가신 대감마님을 생각하며 울어봤자 무엇하오? 어차피 죄 짓고 죽은 역적인데. 새 대감마님을 모시게 되었으니 모두 기뻐할 일이 아니오?”

말을 잘 하는데다 입안의 혀처럼 굴며, 따로 시키지 않아도 정순붕이 시키는 일들을 척척 해 내니, 정순붕은 그 어린 계집종을 퍽 신임하였다. 그런데다 어리고 얼굴도 어여쁘니, 그런 아이가 대감마님의 품에 안기는 것은 그야말로 시간 문제였다. 

“아무리 철모르는 어린아이라 하나, 그래도 옛 주인에 대한 정리라는 것이 있지 않느냐. 교언영색, 그 고운 얼굴과 달콤한 말로 아버님을 속이고 무언가를 꾸미는 게 아니냐.”
“그럴리가요. 천부당 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정북창은 그때, 현감 벼슬을 스스로 사직하고 돌아와 있었다. 
말하자면 시작은 파평 윤씨들 간의 권력다툼이었다. 저들간의 집안싸움이었다. 하지만 정순붕은 그 일을 키워 수많은 선비들을 죽게 하고 말았다. 북창은 그런 아비를 두고 벼슬자리에 연연하는 것은 하늘에 부끄러운 일이라 믿었다.
하지만 돌아와 보니 더욱 한심한 일이 벌어져 있었다. 
늘그막인 그의 부친 정순붕이, 어린 계집종을 잉첩 삼아 품고 있었던 것이다. 

“제가 대감마님을 속여 무엇하겠습니까. 대감마님께서 계시지 않으면 저는 그저 천한 계집종일 뿐이옵니다. 비단 옷도 쌀밥도 그림의 떡일 뿐일 것입니다. 저는 이대로가 좋사오니, 그저 내치지만 말아 주십시오.”

나이도 어린 것이 뱀처럼 영리하다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천문을 읽고 양생과 도학에 능통하던 그 정북창조차도, 아버지의 곁을 차지한 그 어린 여종이 그런 일을 꾸미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하였다. 

“으… 으어… 으어어어…”

을사사화가 나고 삼 년. 
권력의 절정에서 온갖 영화를 누리던 정순붕은, 갑자기 염병에 걸려 쓰러졌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차도를 보였을 때, 정순붕은 죽어도 죽지 않는 산송장이 되어 있었다. 

“의원을 불러야 하는 게 아닙니까.”
“그러다가 세간에 소문이 나면 어찌하려고!”
“하지만 아버님을 저대로 둘 수는 없는 일이 아닙니까.”

맥이 짚이지 않았다. 숨도 쉬지 않았다. 잠들었을 때는 누가 보아도 시체였다.
하지만 아침 동이 트면 홀연히 눈을 뜨고 앉았다. 그리고 사람을 물어뜯었다. 다행히도 하루에 한 명 정도밖에 물리지 않았고, 한 명을 물어 뜯고 나면 얌전해 졌지만, 물린 자들은 모두 죽었다. 그리고 죽었다가도 아침에 되면 홀연히 일어나 앉았다. 
그야말로 괴질이었다.
처음에는 대감에게 물려 산송장이 된 걸린 노비들을 따로 광에 가두었다. 어찌 하여도 방법이 없이, 동이 트면 그저 사람을 하나씩 물어 죽이려 들었다. 그리 못 하게 하자 저들끼리 몸을 물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노비들이야 그렇다고 치고, 문제는 저 우의정 대감이었다. 

“대체 어디서 저 흉한 병이 시작된 건지 모르겠습니다.”
“함부로 소문이 나면 안 될 일. 일가는 물론 아랫것들 모두의 입을 단속시켜야 할 것이다.”
“사람 입이 그렇게 단속이 되는 것이겠습니까요.”
“안 된다면, 죽일 수 밖에 없지 않느냐.”

아버지와는 뜻이 달랐다 하나, 북창은 이 집안의 장남이었다. 대를 이을 아들이었고, 정순붕이 쓰러진 지금은 집안의 가장이었다. 집안의 다른 어른들에게 휘돌릴 만큼 젊은 나이도 아니었다. 일찍부터 벼슬을 하였고, 현감의 인수를 걸어놓고 돌아설 때에는 이미 불혹을 넘긴 나이였다. 

“다행히도 나 역시 의원이니, 아버님의 일은 내가 직접 맡아 돌볼 것이다.”

집안에 염병이 돌아 바깥 출입을 할 수 없다 문을 걸어잠근 채, 그는 집안을 단속하고 정순붕이 쓰러지기 직전 접촉한 모든 이들을 확인하였다. 사람을 먹이로 댈 수도 없으니, 소를 잡아 며칠을 두고 뜯어먹게 했다. 산송장이 된 아비는 입에 맞지 않는 것 같았으나, 그래도 얼추 어린아이 한 명 무게 만큼을 물어뜯어 놓고 나면 또 잠잠해지곤 했다. 계속 이런 식으로 하여도 될 지는 모르겠으나, 시간을 벌기는 벌어야 했다.
심증은 있었지만, 물증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혹시라도 있는 물증을 스스로 바수어 버리는 일이 생길까 저어하여, 북창은 하인들에게 일러 갑이의 처소를 감시케 하였다. 정순붕의 다른 아들들 역시, 그 갑이라는 아이가 감히 제 주인을 저주하여 병들게 한 게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허나 고작 열 일곱밖에 되지 않은 이 어린 잉첩은, 기특할 정도로 ‘대감마님’을 섬기고 있었다. 그가 죽었다가 아침마다 깨어나 사람을 물어뜯기를 반복하는 지금까지도. 
그런 정성스러운 이를 의심해도 좋은 것일까. 정순붕의 아들들도 고민할 지음, 마침내 북창은 갑이의 처소를 강제로 열고 들어갔다. 

“어서 고하지 못할까.”

갑이의 처소에서 나온 것은, 약재들이었다. 
아주 희한하고 구하기 어려운 것들도 아니었다. 흔한 약재들이었다. 다만 그것들이, 어지간해서는 함께 사용되지 않는 것들이라는 게 문제였다. 
그런데다 밤이 되면 죽었다가 아침이면 살아나는 저 대감마님의 몸에, 치명상으로 보이는 칼에 찔린 상처들이 수도 없이 남아 있었다. 
하루에 한 번, 북창이 진맥을 하러 들어갔지만, 그 뿐이었다. 다들 그 괴질이 옮을까봐, 혹은 정순붕에게 물려 목숨을 잃을까봐, 어지간해선 가까이 가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말도 못하고 비명도 지르지 못하며, 기껏해야 짐승같은 울음소리를 내는 게 고작인 그 ‘대감마님’은 매일매일 해가 저물 때에는 갑이의 칼에 찔리며 죽었다가 다시 아침이 되면 살아나고 있었다. 
죽여도 온전히 죽지 못하는 몸이 된 채로, 끝도 없이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면서. 

“대체 어떻게 이런 짓을 저지른 것이냐.”
“어째서 이런 짓을 저질렀느냐 물으실 줄 알았는데, 나리께서는 과연 다른 분들과는 다르십니다.”

꽁꽁 묶인 채로, 갑이는 태연히 말했다. 
갑이를 붙잡아 둔 가노 두엇을 제외하면, 정순붕의 아들들만이 모인 자리였다. 

“세 해에 걸쳐, 대감마님께 약을 달여 드렸습니다. 마님께서는 아무도 믿지 않는 분이시지만, 제가 드리는 것은 잡수시더군요.”
“그 처방은 어찌 되느냐.”
“나리께서는 보시면 아시지 않습니까? 어차피 흔한 향약들일 뿐이온대.”

갑이는 웃었다. 그 웃음은 승리자의 여유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준비가 다 되었으니, 이제 복수를 할 차례였지요. 이 집안에, 돌아가신 좌상대감을 섬기던 이들이 어디 한둘이었습니까. 그들이 구해다 주었습니다. 염병에 걸려 죽은 시체의 뼛가루를요.”

정순붕의 막내아들이 정작은, 그 해 열 다섯 살이었다. 
이제 막 관례를 올렸을 뿐, 아직은 소년이나 다름없었던 정작은 제 형님들 뒤에서 그녀를 바라보며 덜덜 떨고 있었다.
자신보다 고작 두 살 많은 그 여자가, 3년동안 입안의 혀처럼 굴며 약을 먹이고, 그 약이 몸에 독처럼 쌓여 죽여도 죽지 않을 만큼 몸을 바꾸어 놓은 뒤에, 굳이 염병 걸린 이의 뼈를 구해 베개를 채워 넣었다. 
그저 복수하기 위해서. 

“삼 년동안 약을 달여 먹였으니, 삼 년동안은 목을 자르고 불에 태우지 않는 한 살아 계실 것입니다. 쇤네가 몇 번이나 가슴을 칼로 찌르고 피를 내고 발가락을 부러뜨려도요. 하지만 삼 년동안, 이대로 이 집안의 문을 닫고 사실 것이옵니까?”
“네 이…”
“그렇다고 삼 년 내내 소를 잡아 대실 것이옵니까, 노비들을 조반 대신 대령하여 죽이실 셈이시옵니까. 지금도 광에서 굶주림에 아귀가 된 자들이 밤에는 죽었다가 아침에는 일어나 슬피 울며 서로의 팔다리를 물어뜯는 지옥도가 벌어지고 있사온대. 삼 년이면 천 일입니다. 뭐, 효성스러운 나리님들은 어떻게든 해내실 수 있을 지도 모르지요. 까딱 잘못하면 조선 천지에 저 역병이 번져, 온 조선의 사람들이 산송장이 될 수도 있겠습니다만.”

갑이는 웃었다. 
그리고 북창은, 가노들에게 일러 그녀를 죽이라 명했다. 
그날 밤, 해가 지자 다시 송장이 된 정순붕은 마침내 오랜 와병을 끝내고 숨을 거두었다. 정순붕에게 물린 노비들도 마찬가지였다. 
북창은 그날 이후, 죽는 날까지 술을 마셨다. 상주답지 않은 처사라 비난하는 이들도 없지 않았지만, 형제들은 모두 그 일에 대해 입을 다물었다.
다음 해, 북창은 숨을 거두었다.
그는 죽기 전 자신의 동생들을 불러 모아, 신신당부하였다.

“결코 권력에 가까이 가지 말아라. 우리는 하늘 보기를 부끄러워하며 살아야 할 사람들이니.”


***


작이 세상을 떠난 그 해에, 중전은 정명공주를 생산하였다. 
그리고 네 해 뒤인 병오년, 중전께서는 영창대군을 생산하셨다. 그때 세자는 광해군으로, 이미 장성하여 슬하에 아들을 두었는데다, 전란 중에 공을 세운 이였다. 
허나 광해군은 그때까지 명나라 조정에 조선의 세자로서 인정받지 못하고 있었다. 그 위로 장남인 임해군이 있는데도 광해군을 세자로 세우는 것이 법도에 맞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여기에 왕실의 적자인 대군이 태어났으니, 광해군의 입지는 더욱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주상께서 “참언과 모함이 있어도 믿지 말고 대군을 어여삐 여기라”말한들, 어찌 그 말을 순순히 받들 수 있을까. 

“처음 간택을 받아 이 나라 중전이 되었을 때는 우리 가문의 광영이라 여겼는데, 이제 대군을 낳고 보니 그저 살얼음판을 걷는 것만 같습니다.”

중전은 한숨을 쉬었다. 아직 젊은 중전의 얼굴에는 피곤한 기색이 가득했다.

“쉬셔야 하지 않습니까.”

김제남은 걱정스레 말했다. 

“대군 아기씨와 공주 아기씨를 돌보시는 일은 봉보부인(유모)이 할 일입니다. 마마께서는 모쪼록 옥체를 보전하시는 것이 우선입니다.”
“그럴 수 없어요.”

중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내 눈이 닿지 않는 곳에 두었다가, 자칫 세자가 해코지라도 하면 어찌 하려고…”

김제남은 머리를 조아렸다. 
수년 전, 중전이 아직 정명공주를 수태하고 있을 때의 일이 떠올랐다. 

- 부원군 대감께서 이 병부를 어디다 쓸 것인지, 그 비방을 찾아 무엇을 할 것인지, 나는 알고 싶지도 않고 알아볼 생각도 없소이다. 

그때 정작은, 다시는 보지 말자며 냉랭하게 그를 내쳤다. 하지만 정작은 약속을 지켰다. 

- 설령 대감께서 내 집안의 치부에 대해 세상에 알리신다 한들, 내가 어찌 할 수 있겠소. 애초에 소문이 번질 것을 두려워하는 것도 아니외다. 갑이라는 충직한 여종이 제 주인에 대한 복수를 하기 위해 염병으로 죽은 자의 뼛가루를 갈아 선친의 베개에 넣어, 그 병으로 선친은 물론 가족과 노비들까지 죽게 만들었다는 이야기야 이미 널리 퍼져, 어우당(유몽인)도 그 이야기에 대해 알고 있습니다. 어우당의 귀에 들어갔으면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니. 

그가 숨을 거둔 뒤, 김제남은 그의 병부들을 물려받았다. 정작이 평생 쓴 병부는 물론, 그의 장형인 정북창의 병부까지도.

- 허나 약조대로 이 병부들을 전하는 것은, 그대와 나의 업보에 대해 그대에게 말하고 싶었기 때문이오.

몇 번이나 그 병부들을 다시 살폈다. 정북창이 기록한 그 부친의 일들을. 그리고 여종 갑이의 방에서 나온 약재들의 목록을. 그 일이 있고 정북창이 그 약재들의 비율을 시험하여 닭과 개에게 먹여 보았던 기록들을. 

- 나의 선친이 을사사화를 일으킨 주범이라면, 그대의 증조부께서는 기묘사화를 일으키셨으니.

정작이 그에게 기대했던 것이 무엇인지도, 짐작은 간다.
아비가 저지른 죄를 평생을 두고 제 뼈에 새기듯 살았던 이다. 그런 자가, 사람이 죽어도 죽지 않는 산송장으로 만드는 처방이 담긴 병부를 남기며 다시 한 번 말했다. 너도 같은 죄의 핏줄이라고. 공연히 헛짓거리를 하지 말고, 더는 피를 부르지 말라고. 아마도 그렇게 당부하고 싶었을 것이다. 

“중전 마마.”

하지만 사람의 일이라는 게, 어디 그렇게 올곧은 마음 하나로만 되는 것이었던가. 

“주상 전하께서 자꾸만 쇠약해지시는데다, 대군 아기씨께서 자꾸 잔병치레를 하시니, 마마의 마음이 더 약해지시는 것 같습니다.”
“아버님…?”
“대군 아기씨께 올리는 탕제야 모두 내의원에서 관장하는 것이 옳습니다만…”

흔한 약재였다. 김제남도 대충 어디다 쓰는 것인지 다 헤아려 볼 수 있을 만큼. 
어지간해선 함께 쓰지 않는 그것들을 뒤섞어, 술을 부어 곰삭힌 뒤 그때그때 필요한 만큼만 걸러내어 마시게 한다. 평소에 마시는 동안에는 아무 변화도 없으나, 일단 장복하던 중 병이나 사고로 숨이 끊어지면 그것을 꾸준히 마신 기간만큼 죽었다 살아나기를 반복한다. 마시다가도 그 마신 기간만큼을 약을 끊고 지내면, 그 약효도 사라지는 듯 하다고 했다.

“그래도 할애비가 어린 외손이 애틋하여 약재를 들이는 것까지도 막을 만큼 걍팍한 세상은 아니지 않습니까.”

김제남은 웃었다. 
아예 대군이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저 공주 하나 뿐이었다면 또 모를 일이다. 주상께서 승하하신 뒤에도 딸은 대비로서 대접받을 것이요, 그 역시도 부원군이라고, 나는 새도 떨어뜨릴 것 같던 권세는 한 풀 꺾일지언정 남은 여생 편안하게는 살아갈 수 있었으리라.
하지만 대군이 태어난 지금은 다르다. 

“건강하게, 오래 사셔야지요. 아기씨께서.”

설령 세자가 어린 대군을 해치려 들더라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군이 살아야만 자신도, 일가붙이도 모두가 살 수 있다. 설령 밤에는 송장이 되어 쓰러지고, 아침이 되면 사람 한 명, 혹은 어린아이 하나만큼의 고기를 물어뜯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극심한 허기를 느낀다 하더라도. 
적어도 그 자리에서 버티기라도 하여 주어야 모두가 산다. 김제남은 그런 마음을 차마 입 밖에는 내지 못한 채, 중전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그의 집 뒷마당에서는 이미, 벌써 네 해가 넘도록 곰삭고 있는 저 약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댓글 1
Prev 1 2 3 4 5 6 7 8 9 10 ... 42 Next

게시물의 무단 전재, 복사, 배포를 금합니다.

서버에 요청 중입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