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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빈 3000년의 봄

2014.02.01 10:1702.01

3000년의 봄


 
  새해 여섯 시 정각에 메시지가 왔다. 크리스마스까지 아무 연락이 없었으니 이미 짐작한 일이지만, 어쨌거나 쓰라린 알림 벨 소리였다. C는 버블침대 속에서 나가기 싫었다. 어쨌든 메시지야 누운 자리에서도 받을 수 있다. 받기도 전에 무슨 일인지 이미 알았지만, 그래도 받기는 해야 했다. 어쨌거나 나이 서른이 되도록 싱글인 그에게 새해 아침부터 나긋나긋하게 말 걸어줄 이는 그녀뿐이었다.

  [여보세요?]
  [자기야, 나야.]

  어 그래. C는 손등으로 눈두덩을 꾹꾹 눌렀다.

  [미안해, 올해에도 탈락이야. 괜찮아, 자기?]
  [그렇지 뭐. 언제는 안 그랬나.]
  [내가 자기 거 처음부터 끝까지 읽어봤는데, 너무 틀에 박혔다는 인상이라 뽑지 못했어.]
  [본심에는 올라갔어?]
  [아아니.]
  [그래.]
  [올해 수상작은 어떤 글인데?]
  [단편소설 부문 말이지?]
  [그래, 내가 맨날 찔러보는 부문 말이지.]
  [기사 떴는데 링크해줄까?]
  [아니, 네가 읽어 줘.]
  [가끔 보면 자긴 날 심사봇이 아니라 낭독봇이라고 여기는 것 같아.] 
  [기왕 떨어진 거 아무러면 어때.]

  C의 연례행사가 된 지 오래다. 새해 아침, 신춘문예 심사봇과의 대화는 서글프기도 했고 흥미롭기도 했다. 새해 신춘문예 수상작 낭독을 듣노라면 어느 해는 화가 나기도 했고, 어느 해는 허탈하기도 했다. 천재구나! 싶어 절로 한숨 날 때도 있고, 아니 이런 게 왜 뽑힌 거지? 싶을 때에는 짜증이 났다. 어쨌든 부러웠다.

  신춘문예 심사봇이 처음 등장한 것은 2300년대이다. 신문이라는 매체가 식상해지다 못해 시들어갈 때쯤, 퀸테센셜 서울 포스트 (Quintessential Seoul Post)가 혜성처럼 등장했다. 현실화된 웹(Synchronized Abstract Reality)상에서 들풀처럼 난무하던 문필가의 포스트와 소식은 물론이고 정치, 스포츠, 온갖 컨텐츠를 뽑아서 소개하는 식으로 시작된 웹 기반 신문이었다. 주로 컨텐츠를 가져가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있는 걸 소개해주는 식이었고, 해당 창에서 얻은 광고 수익의 절반을 지급했다. 독자가 의견을 단 것이 인기를 끌면 독자에게도 댓글금을 지급했다. 어떻게든 참여하면 어떻게든 돈이 나오는 신문이었다. 어디로 보나 흐뭇한 신문, 퀸테센셜 서울 포스트.

  물론 현재의 돈은 이미 옛날의 돈이 아니다. 2200년 말기에 일어난 경제대혁명 덕분에 구식 돈은 소멸했다.

  이미 2200년대에 확립된 지구적 네트워크 시스템 덕분에 정보의 정확성을 확인하는 데 힘을 쓸 필요가 없어졌고, 저온 핵융합 기술의 상용화, 국경과 민족주의의 부드러운 와해(Smooth Deterioration), 정치적 권력과 일상의 융합, 투명화된 윤리적 자본주의(Moralized Transparent Capitalism)는 곧 상호 공덕주의(Mutual Contributism)로 진화했다. 노동의 대가로 생계를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생계는 기본적으로 보장되고 나머지는 유희였다. 경제활동의 모든 흐름은 무상으로 이루어졌고, 모든 기록은 항상 개방 상태였다. 물론 명목상의 돈이라고 쓸모가 없는 건 아니었다. 재미라는 것이 새로운 포인트였다. 퀸테센셜 서울 포스트는 그 재미라는 요소를 적극적으로 매체에 접목시켜 대히트친 좋은 예였다.

  바야흐로 인류는 실로 처음으로 봄을 맞이한 상황이었다, 적어도 모두들 그리 말했다. 서울 포스트의 고민도 여기서부터 출발했다. 세상이 비로소 살만해진 이 마당에, 수천 건이 넘어가는 신춘문예 투고작을 문인 몇몇이 며칠 만에 다 읽어보고 심사하는 방식을 고수해야 하는가, 시력에도 좋을 리 없다, 그러면 응모기간을 여름으로 하고 가을에 마감하는 건 어떠냐, 심사위원을 수십, 아니 한 백여 명 데려오는 건 어떠냐, 그냥 신춘문예를 안 하면 되지 않느냐, 무수한 컨퍼런스 창이 열리고 닫혔다. 그러한 긴 난항 끝에 가까스로 신춘문예봇 도입이 결정된 것이다.

  처음에 봇은 오타나 오류 등을 걸러내는 보조 역할만 했다. 그러다가 수십 년 이후에는 심사의 모든 과정을 총괄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의 문청은 작품을 송고할 때 신춘문예봇의 알림 설정을 미리 선택할 수 있다. 3000년도 신춘문예 옵션 창 메뉴는 이러했다.

1.     당선 시 자동으로 메시지 보낼 분 연락처를 입력해 주십시오. 최대 백 명까지 가능합니다.
2.     탈락 시 언제 통보받고 싶으십니까? 당장_ 새해_ 기타(직접입력)_
3.     신춘문예봇의 말투, 목소리 톤, 언어 등을 선택해 주십시오. 비주얼 옵션은 여기에서 선택하실 수 있습니다.
4.     응모자님의 심사평과 교정본을 받아보고 싶으십니까?
5.     당선작과 당선자 소감을 받아보고 싶으십니까?
6.     궁금하신 점, 기타 의견 등은 이곳에 입력해 주십시오. (베스트 의견 펼치기)
7.     신춘문예봇의 실시간 원고접수 현황, 심사 상황 중계는 ‘나는야 문청’ 코너에서 보실 수 있습니다.

  물론 C한테는 별 의미 없는 역사였다. 그에게는 당선이 중요했다. 등단, 유명세, 우월감, 성취감, 글쓰기에 들인 시간과 노력이 유의미한 것이었다는 공식적인 확인이 중요했다. 다른 신문이나 잡지 말고, 서울 포스트 신춘문예로 화려하게 등단하는 것이 중요했다. 3000년은 그가 신춘문예에 도전한 지 칠 년이 되는 해였다. 그의 생일이 7월 7일이니까, 칠 년째 도전해서 드디어 등단하면 7, 7, 7, 그야말로 럭키 세븐, 트리플 세븐 아닌가. 

  C는 올해야말로 되리라 생각했다. 덕분에 크리스마스까지는 한껏 기대감에 부풀어 행복하게 보냈다.

  [당선작부터 낭독할까, 아니면 자기 작품평부터 낭독할까?]
  [그냥 다 건너뛰고 당선작만.]
  문득 C에게 어떤 생각이 들었다.
  [당선작 전부 다 말고, 가장 중요한 부분만 읽어줘 봐.]
  [줄거리?]
  [아니, 너 말이야. 네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만 읽어 줘.]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만?]
  [당선작 제목이 뭔데?]
  [장미계(薔薇界).]
  [그걸 당선작으로 뽑았다면은, 그 글 중 어떤 부분이 말이지, 네 눈에 중점적으로 딱 들어서 그걸 뽑았을 거잖아. 그 부분을 읽어달라고.]
  [알았어.]

  신춘문예봇은 나긋나긋한 목소리로 낭독을 시작했다.
 

 
  어찌 된 일인지 알 수 없다. 뒤섞이고 붉게 울며 흩어진다는 것, 뜨거워 죽어버린 꿈의 파편과 가망 없는 희망 같은 무가치한 것들이 끝없이 난다, 날아오른다는 것, 이글대는 저 새파란 불길이 이들을 무자비하게 죽였고 또한 비상시켰다는 것, 그녀가 국물 위 기름을 걷어내는 동안 P는 그저 멍하니 있었다. 이 식사가 끝나면 그녀는 가볍게 일어나서 떠날 것이다. 부대찌개 집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그를 떠날 것이다. 슬프거나 괴로워도 굴하지 않고 그저 멀어질 것이다. 둘 중 슬픔에 강한 쪽은 언제나 그녀였다. P의 최선은 언제나 망설이다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는 선까지였다. 벼랑에서 뚝 떨어지는 일은 저지를 수 없었다. 말도 안 되고 논리에도 맞지 않고 현실적이지도 않은 그런 일은 상상 속에서나 벌어진다. 그런 그의 눈앞에서 몇 번이고, 다시 몇 번이고, 그녀는 벼랑에서 떨어졌다. 망설임 없이 떨어지고는 백학처럼 날아올랐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차라리 배신감에 찬 목소리로 외치는 그를 위해, 몇 번이고, 다시 몇 번이고, 그녀는 땅으로 되돌아왔다. 그러면 짧은 안심스런 행복이 찾아왔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몇 번이고 다시, 벼랑 끝이 밀려왔다. 이제 더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녀가 아무 말 않아도 알 수 있었다. 눈같이 흰 밥, 피어오르는 흰 김 너머로 이미 이방인 같은 그녀가 보였다. 뿌옇게, 아른 아른, 벌써 길 떠난 사람처럼. 햄 조각이 장미처럼 붉은 찌개 국물 속에서 흔들렸다. 꽃술 같다. 죽어버린, 삶긴, 김 다 빠진, 제 꿈까지 다 뱉어내고 한데 뒤섞여 뚝 꺾인 동백 같다.
 

 
  [이 글에서도 음식이 나오네?]
  [자기 글에서도 음식 많이 나와.]
  [그런데 왜 내 건 안 됐지?]
  [자기 글은 전자동 반찬기의 역사와 개발에 관한 연구서 같거든. 사업계획서라든지. 소재는 좋았는데 소설이라기보다는 리포트였어.]
  [그래, 그렇구나.]
  [너무 상심하지 마, 자기야.]
  [그러기에는 이미 충분히 상심했거든.]
  [그렇다고 내년 신춘문예 글은 또 감성으로 떡칠하지 말고, 적절하게 잘 썼으면 해.]
  [글쎄, 아무리 쓴들 내 글이 뽑히겠어? 보나 마나 내년 새해에도 네 목소리 들으며 아침을 맞이하겠지. 로또 사고 나서 기분하고 비슷해. 뽑혔나, 뽑혔으면 어쩌지, 소감은 어떻게 쓰지, 원고 청탁이 물밀 듯이 들어오면 어떻게 감당하지, 한참 희희낙락하다가 휙 뒤집혀서는, 에이 될 리가 있나, 보나 마나 본심 심사평에는 언급도 되지 않고 조용히 파묻혔을 거야, 언제는 됐나 뭐…….]

  신춘문예봇은 말없이 웃음 인터랙티콘을 보내왔다.

  [그래서 결국 어떻게 됐는데?]
  [그래서 그녀는 결국 가 버렸어.]
  [P는 어쨌는데?]
  [부대찌개 집 지붕이 떠나가라 술 취한 아이돌 팬처럼 ‘사랑해! 사랑한다고!’ 외쳤어.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가 버렸지. 어쨌든 이쯤에서 P는 이미 과음한 상태니까.]
  [명색이 신춘인데 암울한 결말이잖아.]
  [괜찮아, 폭풍을 몰고 가 버렸거든.]
  [응?]
  [간단히 얘기하면 좀 설명이 안 돼. 시간 나면 천천히 읽어봐. 어차피 자기 매년 ‘당선작 별로다!’ 말로만 이러면서 사실은 꼼꼼하게 읽고 또 읽잖아. 못내 새초롬한 문청 C씨.]
  [그냥 네가 낭독해 줘.]
  [매년 이러기는…….]
 

 
  끝이라는 걸 알면서도 믿을 수 없었다. P는 말도 못 하고 끄윽 끄윽 거렸다. 속이 뒤집어질 것 같다. 너, 나뿐이라고 했잖아. 내가 세상에서 제일 멋진 오빠라고 했잖아. 광장에 서 있으면 오빠만 너무 잘생겨서 오빠만 보인다고 했잖아. 내 등하고, 또, 또 손등하고, 목덜미가 조각 같다고 맨날 칭찬하고 그랬잖아. 그런데 간다니, 더는 내가 이제는 정말 싫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이야.
  오빠, 나 낙태만 세 번 했어.
  그랬는데, 그런데 네가 어떻게 나한테 이럴 수가 있어…….
  내가 아르테미스 같다고 했지? 처녀신이라고. 세 번째 낙태 후 보약 갖다 주면서 했던 말이야, 기억나?
  그녀는 긴 생머리를 틀어 올려 보라색 핀으로 고정했다. 로즈 미스트를 목과 머리채에 분사했다. 립밤과 립글로스를 부드럽게 발랐다. P는 상에 엎드린 채 옆으로 그녀를 보았다.  
  우린 결혼할 준비도 안 돼 있고…….
  알아. 내가 오빠한테 그 정도는 아니잖아. 아무튼 원망은 안 해. 그래서 뭐하겠어? 아무튼 오빠 안녕.
  볼에 크림형 블러쉬를 살살 펴 바르고 손거울을 백에 집어넣은 후, 그녀는 상큼히 일어났다. P는 여전히 믿을 수 없었다. 베이비 핑크 미니스커트와 검은 스타킹이 떠나간다. 향기만 남기고, 뿌연 기사식당/부대찌개 집 출구로 가 버린다. 주변 테이블들은 무덤처럼 조용하다. 기실 식당은 삼십 분 전 그가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야, 정말 사랑한다니까!’ 라고 외쳤을 때부터 고요했다.

  일전에 P는 이런 쪽글을 썼었다.
 
 
아르테미스에게 찍히면 헤어날 길 없는 것이다
죽고 다시 태어나도 소용없다
 
a는 둥글둥글하게 살았다 부드럽게 다소곳하니
말썽부리지 않고 반항하지도 않고 밥도 적당히 먹고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열심히 하고
모범적으로 신사적으로 차분하니 의젓하여 동네 아줌마들이 매일같이 칭찬해대느라 바빴다
좋은 학교에 큰 어려움 없이 들어가서 유학도 가고 유명한 큰 회사에 수월히 입사하여 일곱 시부터 아홉 시까지 일하고
룸메이트 셋과 살다 나와서 스튜디오 하나 비싼 빌딩에 찾아 들어가서 조용히 할 일 하며 살았다
딱히 풍파랄 것도 없고 드라마랄 것도 없이 고분하고도 얌전하게, 순순히 평화롭게 살았다
 
그날도 그는 조용히 셔틀버스에 올라탔는데 딱 한 자리가 비어 있길래 앉았다, 앉았는데 옆자리 창가에 앉은 여자가 a가 별 뜻 없이 건넨 농담에 버스 뚜껑이 날아가라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때 그의 운명은 결정된 것이었다
 
아니 이미 오랜 옛날 결정된 것이었다 새벽 달 등지고 여신에게 입 맞추었을 때, 활 떨구고 단검 버리고 허리끈 잘라 끊었을 적 이미 끝장난 일이었다
 
그 여자 눈 속에서 폭풍과 만월, 날뛰는 천둥 같은 것이 빛났는데 

아무래도 끝장난 일이었다
 
 
  세상이 떠나는 것이다. P는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한 시대가 나를 버리고 가는 것이다. 하늘이, 땅이, 그 사이 모든 요동치는 것들이 한꺼번에 일어서서 등 돌리는 것이다. 미뤄오고 미뤄왔던 모든 벼랑들이 다 같이 쏟아지는 것이다. 이자까지, 밀린 이자까지 남김 없이 받아먹겠다고. 이럴 수는 없는데, 이럴 수는 없다. 내가 버림받을 리가 없다. 그녀가 부대찌개, 라면 사리 추가, 공깃밥 한 그릇, 소주 네 병을 모조리 계산하는 동안 P는 온 힘을 다하여 간신히 일어나 섰다. 섰으나 천장이 빙글빙글 돌았다. 뱃속에 화산이 굴러다닌다. 이게 진짜일 리 없다. P는 다리가 불안해서 좀처럼 걸음을 내딜 수 없었다. 내 세상이 이따위라니. 이렇게 비참하고 잘못된, 초라한, 어긋난 난장판에 불과하다니. 이래서는 아무것도 안 된다. 길이 보이지 않는다, 내가, 내가 고작, 내 것인 세상이 겨우 이 정도일 리가……. 문 열리고 햇살 쏟아진다. 도시의 희미한 윤곽 너머로 점점이 구름 찍혔다.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는다. 영수증 쓰레기통에 버리고 또각 또각 간다. P는 힘내어 걸으려다 의자와 함께 엎어졌다. 온 사방에서 ‘저런!’과 ‘아이고 총각!’이 메아리 쳤다. 가겠다는데 그냥 보내 줘, 괜찮은가? 머리를 심하게 부딪쳤는데? 병원 가야 되는 거 아녀? 구름 몰려간다. 노을이 그 뒤를 따른다. 바람도 함께 간다. 애인이 많이 이뻤네그려……. P는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아뇨, 애인이라니. 겨우 애인 정도가 아닙니다. 처음부터 그런 정도가 아니었어요……. 신성이 진세를 저버릴 수가 있습니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습니까…….
 
 

  C는 한숨을 푹 쉬었다.

  [이래서 내가 연애를 안 하는 거야.]
  [무슨 소릴, 연앤 바로 이런 맛에 하는 거야, 자기야.] 

  C는 침대에서 일어나 앉았다.

  [소재가 하나 떠올랐어.]
  [벌써?]
  [옛날에 극심했었다는 층간 소음 말이야. 그걸 붙잡고 단편을 하나 써 보려고.]
  [연초부터 기운 내니까 보기 좋네. 그럼 힘내, 자기.]

  폭죽과 스마일 혼합 인터랙티콘이 왔다. C는 대화를 잠시 중단하고 서울 포스트 창을 새로 열었다. 곧바로 <장미계>의 결말 부분을 읽었다.
 
 

  여신은 한철 피어난 장미를 모조리 수확해 돌아간다. 세상 귀퉁이에 세워 둔 폭풍의 고삐를 풀면 하늘길 잡힌다. 진한 여름 그늘과 온습한 바람, 사람들 쓰러져 깨진 틈새로 밀려 나오는 눈물도 더불어 거두어 간다. 그래야 가을 밤하늘에 뿌려 별빛 돋굴 수 있다. 겨울 노을이 얼어붙지 않으려면 여름 장미 꽃잎이 필요하다. 붉음을 볶아 갈아서 남김 없이 하늘 뚜껑에 쏟아야 한다. 이때 누군가의 사랑 노래나 이별 통곡도 간혹 섞여 들어가기 마련이나, 천상에는 괴로움이 없으므로 딱히 동감하는 이는 없다. 담담히 하늘 물들이다 보면 뜬금없이 인간 몇몇 좀 울 뿐이다.
 

 
  C는 다른 공모전 리스트도 모두 열어 보았다. 다들 하나같이 눈부신 공사였고 간판이었고 열쇠였다. 영화도 좀 보고 그러다 욕실로 가서 씻은 후 방을 청소 모드로 돌렸다.

  오늘의 뉴스를 열어보니 전자동 영화 제작기의 소형화가 화제였다. 여성 고객을 겨냥하여 비즈 장식한 머리띠 형태로 출시했다는 것이다. 쓰고 영화를 상상만 하면 파일이 만들어져 개인 메일함으로 들어온다고 한다.
  문제는 생각하는 대로 영화가 만들어진다는 점이었다. 영화 상상하다 말고 딴생각이라도 하면, 히어로가 세상 구원하다 말고 느닷없이 옥션 창 열리고 올해 유행하는 겨울 코트 리스트가 쫙 뜬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이런 걱정 안 해도 되는 세상이 올까요? 구식 영화 말고 가상현실 제작기 같은 건 과연 언제쯤 나올까요?” 머리띠를 든 고객의 불평과 “그냥 쓰고만 있으면 되니까 괜찮은 것 같아요, 그런데 디자인이 약간…….” 마음을 정하지 못한 고객, “무척 좋아요! 이런 빈티지스런 머리띠를 찾아 헤맸거든요, 영화까지 만들 수 있으니 아주 맘에 들어요.” 만족한 평가를 내리는 고객 영상, “의견이 분분합니다,” 마무리 멘트 중간에 C는 창을 닫았다. 기지개 켜고 팔다리 스트레칭을 좀 했다. 생각만으로도 영화를 만드는 이런 세상에 굳이 글을 쓰겠다고 복닥거리다니, 그는 새삼 스스로가 신기하기도 했다. 그래도 자신 같은 인생이 작년 말, 팔천 명이나 서울 포스트에 글을 들이민 것이다.

  C는 목을 시계방향으로 여덟 번, 시계 반대방향으로 여덟 번 돌렸다. 어깨도 풀고 허리, 무릎, 발목까지 탈탈 털었다. 청소 끝났다는 알람 소리를 끄고 집필 모드를 선택했다. 나타난 의자에 앉자 책상이 펼쳐졌다. 연말에 잠시 손 놓았던 글을 다시 시작할 때였다. ‘누가 읽어주기나 할까?’ 싶기도 했으나, 곧 자세를 가다듬는 C였다. 괜찮다, 어쨌든 신춘문예봇이 있으니. 그는 봇과의 대화를 재개했다. 이미 메시지 하나가 도착해 있었다.
 
 
동해서 칼 휘두르니 남해 용 비늘 운다
하늘 꼭지 똑 떨어지니 여의주 쏟아지는데
온갖 달맞이꽃 승천하고 이무기 허물 벗네
손가락 넣어 휘저으니 딱 맞게 끓었구나
이번 봄 맛은 어떠한가 옥구슬 넘쳐 구르는데
회오리 꽃전도 같고 꿀탕도 같아 흡족하니
사흘 밤낮 쪼그려 앉아 지킨 보람 있도다
네 머리채 매달린 태양도 떨구어 저어 풀어라
장미로운 노랫소리 수정궁 지붕까지 뚫으리니
 
 
  [그럼 자기야, 내년에 봐.]
  [잠깐, 잠깐! 이거 네가 쓴 거야?]
  [응.]
  [제목은 뭔데?]
  [수라간 선녀의 노래.]
  [너도 글 써?]
  [그럼, 서당개도 삼 년이면 풍월 읊는다는데 난 벌써 칠 세기 째라구.]

  어떤 생각이 벼락같이 C의 뇌를 때렸다.

  [너……너 혹시, 너도 매년 신춘문예 응모하니?]
  [응. 그다지 의미는 없지만. 왜냐면 내가 날 뽑을 수는 없잖아, 안 그래 자기야? 나만큼 비운스런 봇도 없을 거야, 자그마치 이런 시대에. 언젠가는 내가 날 뽑을 수도 있는 세상이 올까?]

  C는 그저 한숨 쉬었다.

  [한도 끝도 없다는 거야.] 
  [무슨 소리야, 자기?]

  설명하는 대신 C는 방금 보았던 오늘의 뉴스를 다시 열었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이런 걱정 안 해도 되는 세상이 올까요?” 머리띠를 하고 있기만 해도 영화 만들 수 있는 세상인데, 어쨌거나 바라는 것은 한도 끝도 없다. 인간이나 봇이나.

  최초로 신춘문예가 열렸던 1928년만 해도, 당선까지 되어 놓고도 작품이 삭제된다든지 하는 말도 안 되는 일도 있었지 않은가. 물론 그 당시의 상황을 지금 시각으로 판단할 수야 없지만, 아무튼 기껏 당선까지 되었는데 삭제라니, 일부도 아니고 전체 삭제라니. 그 불운스런 작가의 심정을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신춘문예봇은 신춘문예봇 답게, C의 말뜻을 바로 알아들은 모양이었다.

  [이런 시대가 왔다는데도 말이야, 자그마치 낙원에 준하는 이런 시대인데도. 그치 자기? 우리가 바라는 건 정말 끝도 없어.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이제 좀 겸손해져야 한다는, 그런 말을 하고 싶어?]
  [아니, 그렇게까지 부지런한 생각은 안 했어. 그냥. 바라는 것이 한도 끝도 없다는 건 어쩌면 우리가 그냥 한도 끝도 없는 존재라서가 아닐까.]

  신춘문예봇은 한 줄, 아니 족히 한 단락은 멈추었다가 재차 물었다.

  [나도?]
  [응?]
  [나도 그 ‘우리’에 들어가는 거야?]
  [당연하지.]
  [고마워.] 
  [이런 모던한 세상에 무슨 새삼스레…….]

  C는 멋쩍게 대화를 종료했다. 올해 신춘문예봇과의 대화는 약간 간지러웠다.

  빈 집필 창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C는 검색 창을 띄우고 “3000 낙선소감”을 입력했다. 그간 단 한 번도 낙선소감을 써본 적은 없지만, 이제 3000년도이니 기념으로 써 보고 싶었다. 그런데 3000년도, 전쟁도 돈도 가난도 공해도 국경도 존재하지 않는 울트라 모던 지구 거주민 중 지금까지 최소한 오천 명은 넘게 낙선소감을 쓴 모양이었다. 검색 수치가 꾸준히 올라갔다. 숫자를 한참 바라보다가 C는 검색을 중지, 취소했다.

  기다리다가 내년 되겠다. 그냥 쓰지 뭘.

  그리고 그는 텅 빈 집필 창으로 돌아갔다. 항상, 결국 묵묵히 그래 왔듯이. 이제 기다리는 일뿐이었다.
 
  그래서 그는 기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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