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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가지 소원을 이루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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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난생 처음 온 스타벅스는 기대만큼 대단한 곳은 아니었다.
테이블도 그렇지만 특히 별다른 장식도 채색도 없는 목재의자의 투박함에 머리보다 엉덩이가 먼저 실망감을 표현하고 있었다. 한 마디로 별 거 아니네, 라는 것이 솔직한 감상.
그나마 창가 쪽에 있는 푹신한 소파는 이미 커플로 보이는 남녀가 점령하고 있었다. 들키지 않으려 애쓰며 주위를 슬쩍 둘러보니 커플 외에도 신문을 읽는 남성, 잡담을 나누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여성 셋, 창가에 앉아 노트북을 들여다보고 있는 여성, 커피는 테이블에 장식처럼 놔두고 빵을 열심히 먹고 있는 남성이 보였다.
그제야 나는 갖고 온 노트북을 꺼냈다. 오래된 모델이라 덩치만 크고 성능은 낮지만 큰 화면이 마음에 들어 애용하고 있는데 굳이 약속 장소를 스타벅스로 정한 이유는 공짜 와이파이 때문이다. 노트북을 열고 부팅이 끝나자마자 메신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는 친구를 불렀다. 오랫동안 인터넷에서만 만난 정체불명의 친구로, 이름도 모르지만 그간의 대화로 상당히 신뢰할 만하다고 생각하고 있다. 솔직히 내가 오늘 이 자리에 있을 수 있는 것도 다 이 친구 덕분이니까. 그의 접속을 확인하고 바로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지금 스타벅스에 왔습니다.」
「2시 약속인가 보죠?」
「넵. 지금 1시 53분이네요.」
「제가 보내드린 프로그램 작동해주세요. 화면이 보이시나요?」
「예. 근데 각도를 바꿔야 할 것 같네요.」
「카메라를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살짝 들어주세요, 지금은 테이블밖에 안 보이네요.」
지금 내 노트북에는 스티커가 잔뜩 붙어 있다. 이 친구가 택배로 보내주었는데, 목적은 지금부터 펼쳐질 거래 장면을 실시간으로 보고 싶다는 이유로 함께 보내준 소형 카메라를 숨기기 위한 위장이다. 다. 노트북에 장착되는 웹캠은 화면을 보는 내 모습밖에 안 나오니 반대편에 있는 상대방을 보기 위해 카메라를 몰래 설치한 것이다.
약간은 산업 스파이가 된 듯한 가벼운 흥분을 느끼며 그의 지시에 따라 카메라의 각도를 조금씩 조절했다. 최적의 위치를 찾느라 조금 시간이 걸린 후 마침내 감독님의 OK사인이 떨어졌다.
「잘 보여요. 아주 좋네요. 그대로 노트북의 위치를 고정시켜주세요.」
이제 무대는 준비가 되었다. 그리고 화면 하단에 표시된 시계가 58분을 가리키자 문이 열리고 그가 들어왔다. he도 she도 아닌, 성별이 없는 상대를 가리키는 대명사 ‘그’. 그를 눈앞에서 보면서도 나는 그가 남자인지 여자인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그는 시대착오적인 중절모를 눌러쓴 상태로 가게에 들어오더니 실내에서도 벗을 생각을 안 하고 있어서 눈썹과 눈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날렵한 콧날과 작은 입, 립스틱을 칠한 듯한 짙은 보라색 입술을 보면 여자 같지만 단정할 수는 없었다. 어림잡아서 190센티미터는 될 듯한 큰 키와 넓은 포복으로 성큼성큼 걷는 모양을 보면 남자 같지만 마른 체구와 가느다란 허리를 보면 여자 같기도 하다. 키높이 구두를 신고 있는지는 미처 확인하지 못했다. 정장 차림이라 어깨를 보고 성별을 짐작할 수는 없고, 결정적인 단서인 ‘아담의 사과’, 즉 후두는 바짝 조인 넥타이와 셔츠 깃으로 목이 가려져 확인할 수 없었다. 더구나 결벽증인지 깔끔을 떠는 건지 춥지도 않은데 손에는 골프 칠 때 낄 법한 얇은 장갑을 끼고 있다.
검은색이라기에 약간 모자란 짙은 잿빛의 중절모와 양복, 새카만 구두, 가죽 가방, 하얀 얼굴. 현대판 저승사자라고 불리기에 모자람이 없는 풍모였다. 사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정말 저승사자를 만나고 있다. 다만 그는 서양에서 온 표현을 더 좋아하는 것 같지만. 바로 ‘악마’라는 이름 말이다.


2

간단한 인사를 나눈 후 그가 건네준 명함은 주인처럼 지극히 양면적인 모습이었다. 앞면은 평범하고 단순한 명함 자체였다. 3ishes(스리 위시즈) 유한회사 남애모 대리.
하지만 뒷면을 보면 얼핏 타로 카드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강렬한 도안이 새겨져 있다. 타로 15번, 악마. 염소의 머리와 다리에 박쥐의 날개, 두 개의 뿔 사이에는 뒤집힌 모양의 오망성이 빛을 발하고 있었다.
“바포멧이라고 합니다. 우리 회사 마스코트죠.”
명함 뒷면을 주의 깊게 들여다보고 있자 그가 말했다. 나는 별 관심이 없는 척 고개를 슬쩍 끄덕이고는 명함을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쑤셔 넣고는 자리에 앉았다.
이만하면 충분했다. 눈앞에 있는 단정한 인상의 청년은 지옥이라는 이름의 인재파견회사에서 찾아온 악마라는 이름의 영업사원이라는 것, 이 정도만 알면 된다. 그리고 그가 스타벅스에서 나와 마주하고 앉아 있는 이유도 간단명료했다.
“뭐라도 좀 드시죠? 제가 주문할게요.”
내가 엉거주춤 일어나는 척하면서 묻자 그는 황급히 답했다.
“아, 저는 블랙만 마시는데…… 직접 가서 주문을 해야 하나요?”
그는 점원이 와서 뭘 드실 거냐고 묻지 않아 당황한 듯 보였다. 지옥에는 프랜차이즈 카페가 아직 들어오지 않은 걸까. 오늘 처음 와본 촌뜨기라는 점에선 나도 다를 바가 없지만 덕분에 상대에 대한 친근함이 느껴져 긴장이 조금 풀렸다.
내가 아메리카노를 가져오는 사이에 사이에 악마는 들고 온 서류가방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안에서 서류철을 꺼내어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자리에 앉자 서류철에서 뽑은 서류 몇 장을 내 앞에 놓았다.
“일단 여기 약관 읽어보시고요, 읽어보실 시간 충분히 드리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서명하시면 됩니다.”
여기까지만 보면 보험회사 직원과 똑같다. 하지만 그와 내가 하려는 계약은 일반적인 보험이나 대출 같은 것이 아니다. 꿈과 희망, 영혼을 내건 일생일대의 도박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나는 지금 악마와 영혼을 걸고 계약을 하려는 것이다.

약 관
이 약관은 「세 가지 소원」 이벤트 당첨자를 대상으로 소원을 들어주는 악마(이하 “갑”)와 소원을 말하는 이(이하 “을”) 사이의 계약에 대한 주의사항 및 갑과 을의 권리 및 의무, 소원 성취의 조건 및 금지사항, 기타 필요한 사항 등을 규정함을 목적으로 합니다.

……그리하여 갑이 어쩌고 을이 어쩌고 하는 장황한 글이 쭉 이어진다. 보통의 사람이라면 이 길고 복잡한 내용을 읽기도 전에 질려서 대충 넘어가기 십상. 그러나 그게 바로 상대방이 원하는 노림수임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긴 문장과 복잡한 표현, 꼬아놓고 비벼놓은 문장의 틈새에 ‘을’에게 불리하거나 주의를 요구하는 부분이 감추어져 있는 법이다. 서명을 하고 나서 뒤늦게 그 사실을 발견하거나 지적을 당하여 결국 피해를 입는다고 해도 그때는 늦은 일이다. 법적으로도 절차에 하자가 없고 갑의 잘못이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약관 확인을 게을리 한 을의 책임으로 돌아가고 마니까 말이다. 약간의 금전적 손해나 불편함이라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지금 이 약관은 그렇게 가벼이 여길 수가 없다. 이 네 장짜리 A4지의 무게는 천근만근으로도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다. 저 지각 아래 맨틀 아래 있을지 모를 펄펄 끓는 지옥의 가마솥 밑바닥에까지 이어진 거대하고 무거운 추가 달려 있다고나 할까.
그런 비유가 과장되었다고 말할 수가 없는 것이 이쪽은 내 모든 인생, 아니 사후의 영혼에 이르기까지 한 마디로 내 전부가 걸려있단 말씀이지. 그래서 나는 글자 하나라도 허투루 넘길 수가 없다는 절박함과 긴장감으로 땀이 솟아나는 젖은 손으로 서류를 붙잡고 천천히 읽어보았다. 다 읽고 처음부터 또 읽었다. 세 번째는 중요한 사항만 골라가며 훑었다. 악마의 표정이 점점 굳어짐을 느낄 수 있었다. 처음 보였던 영업용 미소가 점차 옅어지며 만만치 않은 상대를 만났구나 하는 각오가 떠오르는 듯했다. 애초에 악마에게서 실수를 기대할 수는 없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적도 임전태세에 들어가고 있는 것 같았다.
장황한 약관의 내용과 아울러 내가 여기서 악마와 일대일로 ─사실은 몰래 지켜보는 친구가 있긴 하지만─ 대면하게 된 경위를 간추려보면 이렇다. 인터넷 한 구석에는 인생이 비참하고 괴로워서 죽지 못해 사는 사람이 신세한탄을 늘어놓는, 〈3ishes(스리 위시즈)〉라는 익명 게시판이 있다. 알고 보니 그 게시판은 악마들이 운영하고 있고, 그들의 기준에 ─정확히 어떤 기준인지는 약관에도 명시되어 있지 않아 알 길이 없지만─ 부합하는 사람을 뽑아 악마를 파견시킨다. 악마는 그에게 소원 세 가지를 들어주고 대신 그의 사후 영혼을 악마에게 양도한다는 계약을 맺는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아는 옛날이야기와 별 차이가 없다.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악마가 인터넷을 통해 먹잇감을 고른다는 정도 외에는.
그런데 약관은 아마도 그동안 축적된 경험 때문인지 여러 제약을 두고 있었다. 우선 계약서에 갑과 을이 자신의 피로 이름을 쓴 순간 계약이 맺어지고, 을은 그때부터 10분 내에 세 가지 소원을 모두 말해야만 한다. 각 소원은 하나의 문장으로 된 것이며 평서문 혹은 명령문의 형식을 가진다. 10분 안에 을은 의문문 형식의 질문을 할 권리가 있고, 갑은 사실만을 대답해야 한다. 당연하지만 을이 한번 입 밖으로 낸 소원은 취소하거나 내용을 바꿀 수 없다.
제한 시간 10분이 지난 상태에서 소원을 세 가지 다 말하지 못해도 갑의 의무는 끝난 것이 되어 남은 소원을 들어줄 의무는 없어진다. 다만 소원을 이루기 위해 10분 이상의 시간이 걸려도 갑은 끝까지 소원의 성취를 위한 활동을 해야 한다. 약관에 위배된 소원을 말할 경우 갑은 그 소원을 들어줄 의무가 없고, 해당 소원에 대한 효력과 권리는 소멸된다. 단 약관에 위배되지 않는 소원을 말했는데도 갑이 소원을 들어주지 못하거나 포기 선언을 하면 계약은 파기되고 을은 의무를 이행하지 않아도 된다.
여기서 약관에 위배되지 않는다는 부분이 중요하다. 약관에 의해 금지된 내용의 소원을 말하면 쉽게 말해서 소원 하나를 날리는 셈이 된다. 악마가 가장 원하는 것이 이 조항이며 어리숙한 혹은 다급한 마음에, 아니면 약관을 잘 안 읽어서 등의 이유로 잘못된 소원을 빌어 손해를 입을 가능성이 가장 많은 부분이기도 하다. 그런데 제약이 너무 많아서 문제였다. 우선 무한, 영원, 끝없이, 막대한과 같은 표현이 금지된다. 영원한 생명, 무한한 재산과 같은 간편한 요구가 안 먹힌다는 소리. 더구나 행복, 불행, 희망, 절망, 완벽, 최고, 최선과 같이 사람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일 수 있는 ─객관적 기준이 없거나 측정할 수 없는─ 추상적 표현도 불가. 많이, 적게, 길게, 짧게 등의 상대적 표현은 갑이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판단하여 부여한다고 적혀 있는데 갑에게 유리하도록 판단할 것임이 분명하다. 나를 여기까지 오도록 도와준, 저 카메라 너머에서 지켜보고 있는 친구의 충고를 절대로 잊어선 안 된다. 그때의 대화를 떠올렸다. 악마가 보낸 당첨 메일을 받고 기뻐하는 나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단 축하를 드리지만 조심하시라는, 그리고 각오를 단단히 하시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왠지 불안해지는데요.」
「절대 방심하시면 안 됩니다. 명심하세요. 상대방은 악마입니다.」
「그건 그렇죠. 천사는 아니잖아요. 근데 당연한 걸 굳이 강조하실 것까지야…….」
「아뇨. 많은 사람들이 의외로 간과하는 부분이에요. 저의 충고를 잊지 마세요. 상대방은 악마라고요. 놈들은 절대로 당신을 위해, 당신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려고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란 말이죠. 당신을 파멸시키고, 고통으로 영혼을 어둠에 물들이고, 그 영혼을 날름 집어삼키기 위해서 소원이라는 미끼를 내밀고 있어요. 그러니까 님은 세계 최고의 사기꾼과 거래를 한다는 마음가짐으로 계약을 하러 가셔야 합니다. 작은 실수 하나가 당신의 인생과 사후마저 망쳐놓을 수 있음을 명심하셔야 해요.」
과연 심장에 털이 있다면 곤두설 만한 섬뜩한 말이었지만, 덕분에 지금 이렇게 침착하게 지옥에서 날아온 약관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이다. 자살할 용기를 못내고 망설이던 심약한 내가 자살 사이트로 잘못 알고 글을 쓴 게시판에서 이런 동료를 만났으니 천우신조였다. 그리고 그의 도움과 조력을 얻고 악마와의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되었으니…….
그럼 약관을 더 살펴보자. 금지하고 있는 소원의 항목으로 악마 및 그에 준하는 존재에 관련된 소원이 해당된다고 적혀 있다. 또한 소원에 대한 소원도 금지라고 한다. 이 두 가지는 옛날이야기에 나오는 꾀 많은 친구들이 떠올릴 법한, 악마를 괴롭히는 함정 소원을 미연에 차단하기 위한 방책이라고 보면 된다.
구체적으로 악마에 관련해서는 악마를 지배하거나 악마가 되게 해달라거나 하는 소원이 안 된다는 세부 설명까지 첨부되어 있어 이런 생각에 확신을 심어주었다. 악마만이 아니라 천사나 신이 되게 해달라든지 하는 소원도 마찬가지로 금지되어, 현실에 존재하지 않거나 악마의 능력으로 통제가 안 되는 존재를 부리거나 그런 존재가 되게끔 하는 소원을 차단해 놓았다. 아마 옛날에는 이런 소원이 제법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도 어릴 적에 소원을 이루어준다는 내용의 동화를 보고 차라리 내가 소원을 이루어주는 신이 되면 더 좋겠다는 식의 상상을 했지 않았나. 악마가 괜히 자기들의 라이벌을 늘려서 좋을 일은 없다. 요즘 표현으로는 영업방해라고 할까, 아니면 골목상권 침해? 확실히 간교한 악마들이 용납할 리가 없겠지.
또한 소원에 대한 소원, 즉 소원을 100개로 늘려달라든지 매일 소원 하나씩 들어달라든지 하는 식으로 소원 자체를 어떻게 해달라는 소원도 금지시켰는데, 이 역시 전래동화에서는 나올 법한 꼼수로 이를 원천봉쇄하겠다는 심산이다. 과연 악마다운 철저함이 돋보이는 부분이었다. 아울러 약관은 소원을 되돌리거나 취소하는 것도 금지하고 있다. 러시아 민담에 신이 세 가지 소원을 말하라고 했는데 부부가 싸우다가 소원을 잘못 말하는 바람에 재앙을 입고 이를 복구하느라 남은 소원을 다 써버린 이야기가 있다. 소원의 취소가 된다면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겠지만 유감스럽게도 그때나 지금이나 한번 말한 소원을 물릴 수 없는 모양이다. 이런 식으로 약관은 길고 상세하게 이어졌고, 당연히 나는 어느 하나라도 소홀히 놓쳐서는 안 된다는 절박한 심정으로 읽고 또 읽으며 뇌주름 사이사이에 단단하게 새겨나갔다.


3

약관을 다섯 번째로 검토하고 나서 서류에 붙박였던 시선을 살짝 들어 골동품 감정하듯 조심스레 나를 살피던 악마를 쳐다보았다. 눈이 마주치자 그는 살짝 당황한 듯 했으나 이내 영업용 미소를 안면에 띠웠다. 어색한 침묵도 깰 겸 질문을 던졌다.
“뭐 좀 물어봐도 될까요?”
“얼마든지요. 다만 약관에 명시되었듯 모든 질문에 답변할 의무는 없습니다. 계약이 체결된 후에는 10분 동안 진실만을 말할 의무가 있죠. 지금은 아직 계약을 맺진 않았지만…… 저희도 굳이 고객을 속일 생각은 없음을 알아주시기 바랍니다.”
믿을 수 있을까? 물론 악마를 믿을 정도로 나는 어리석지도 순진하지도 않다. 그렇다고 무조건 거짓이라고 생각하는 것도 바보 같고, 적당히 의심하는 신중한 회의주의적 태도가 적합하리라.
“영원한 수명이나 무한한 재산 같은 표현이 금지된다고 했는데요, 그러면 어느 정도의 수명이나 재산을 줄 수 있는 거죠?”
“아, 그건 약관에 명시되어 있어요. 수명이나 재산의 경우는 고객님의 인생에서 원래 얻어질 수 있는 양에 따라서 결정됩니다. 가령 수명의 경우는 고객님이 평균 이상의 수명을 가진 운명일 경우는 세 배, 이하일 경우는 다섯 배까지 보장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본인 스스로의 관리와 운에 의해 더 길어질 수도 있지요.”
그 말은 더 짧아질 수도 있다는 얘기. 악마의 설명은 이어졌다.
“재산의 경우도 약관에 명시된 대로, 자신이 평범하게 살 경우 얻을 수 있는 재산의 양에 비례하여 산출됩니다. 지금 고객님의 경우는 대한민국에 살고, 부모 직업도 변변찮고 본인도 현재 무직에다가 특별한 능력도 없고 하니…… 대충 대한민국에서 서열 10위 정도의 기업 총수에 버금가는 재산을 얻게 되실 겁니다.”
10위라. 세 가지 소원이 주는 임팩트를 생각하면 조금 실망스러운데? 디즈니 만화의 스크루지 맥덕 영감처럼 금화로 가득 찬 건물 하나 달라는 소원은 입 밖에 내지도 못하겠어.
그 외에 약관에 의하면 죽은 자를 살리는 일은 금지사항은 아니지만 소원으로 제시하지 않을 것을 권장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그에 따른 부작용을 책임지지 않는다나. 첨부 설명에 따르면 사망 후 얼마나 경과되었느냐에 따라 다른데 육체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았을 경우 사망시 육체 그대로 부활한다(우웩! 좀비가 되겠군!). 시신을 화장했거나 매장한 지 오래되어 유골 이하 단계로 부식된 경우, 과거의 위인 등 시신 확보가 불가능한 경우는 갓난아이 하나를 희생시켜 사망 직전 육체로 복구시키고 영혼을 주입하여 부활시킨다. 즉 완벽한 부활이 아니고 일종의 복제인간을 만드는 셈인데……. 악마라고 해도 죽은 사람을 살리기는 꽤 힘든 모양이다. 하나의 소원으로 한 명밖에 살릴 수가 없다는 부분을 보면 만화 『드래곤볼』의 신룡보다 못한 것도 같고. 신룡은 한 가지 소원만 들어주지만 죽은 자 전부를 한꺼번에 살려주기도 했지 않았나? 죽은 사람 되살리기는 여러모로 제약이 많은 소원이다.
이쯤 되면 세 가지 소원 말하기가 엄청난 두뇌회전을 요구하는, 일종의 악마와의 싸움임을 이해하리라 믿는다. 실수로 약관에 위배되는 소원을 말하면 하나를 날리는 셈이고 취소는 불가능하다. 약관을 대충 혹은 아예 안 읽은 멍청한 인간이라면 “영원한 수명, 무한한 재산, 완벽한 배우자를 줘!”라고 외쳤다가 소원을 홀랑 날려버리고 말겠지. 영원, 무한, 완벽 모두 약관 위반으로 무효 처리되는 표현이니까. 전 재산을 건 도박에서 꽝이 나온 셈이 아닌가.
악마의 간교함을 떠올린다면 추상적 표현도 피해야 한다. ‘돈을 많이 줘’라고 했더니 악마 녀석이 10원짜리 1000개를 주면서 ‘아이고, 참 많네요’라고 말해도 약관에 위배되지 않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모든 소원은 실현 가능하고, 자신이 피해를 입을 가능성을 모두 배제하며, 악마가 이룰 수 있는 범위 ─약관에 명시되어 있는 한도─ 안에서 지정해야만 한다. 이왕이면 구체적인 수치나 계량 가능한 규모로 제시하는 것이 좋다. 특히 재산에 관련해서는 더더욱.
내가 일부러 시간을 오래 끌고 있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악마는 약간 초조한 듯 양손가락을 꼼지락거리고 있다가 내가 서류를 내려놓고 고개를 들자 안심이 된 듯 손을 테이블에 내려놓고 유혹하듯 말했다.
“가장 무난하고 적절하게 고르시는 게 어떨까요? 어차피 세 가지 소원을 선택하는 고객의 80퍼센트 정도는 넷 중에서 고르기 마련이거든요.”
“넷요?”
그가 오른손을 들어 펴 보이더니 손가락을 하나씩 접으며 열거했다.
“수명, 재산, 사랑, 복수. 누구나 원하고 누구나 만족할 사항들이죠. 수명과 재산은 약관에 명시된 대로 제 능력 한도에서 최대한으로 보장해드리고요, 사랑의 경우는 실제 있는 인물과의 연애 및 결혼 가능하고, 원하는 배우자상을 제시하실 경우 가장 근접한 인물을 찾아서 모자란 부분은 제가 보충도 해서 맞춰드립니다. 그리고 정말 미운 사람, 죽이고 싶은 사람에게 벌을 주거나 죽이는 것도 가능합니다. 확실하게 처리해드리죠.”
이젠 무슨 결혼정보회사 직원처럼 느껴진다. 원하는 배우자상을 찾아준다니. 생리적인 거부감과 악마 녀석의 속물적인 태도에 역겨움이 느껴지긴 했으나 내 바람이 저 네 가지에서 크게 벗어나지는 않는 것도 사실이다. 장수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바라는 일이고,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이나 집 같은 재산은 많으면 좋을 테고, 내가 열렬히 좋아하는 영화배우 A와 결혼할 수만 있다면 정말 좋을 것이고, 내게는 옛날부터 원수처럼 여기며 죽이고 싶을 정도로 증오하는 B라는 자가 있다.
그렇다면 나는 이들 넷 중에서 적당히 세 가지를 골라 잘 먹고 잘 살다가 악마에게 영혼을 넘겨야 할까? 유감스럽지만 그렇게는 못하겠다. 내 목적은 최대한의 소원을 이루고 내 영혼을 지켜내는 것, 즉 악마를 퇴치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세 번째 소원을 희생할 필요가 있다. 많은 어리석은 이들이 어떻게든 최대한 소원을 많이 이루려고 세 가지를 다 말하겠지만, 세 번째 만큼은 악마를 공격하기 위해 쓸 필요가 있다. 따라서 내 욕망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소원 두 개로 최대한 많은 걸 얻어내야만 한다.
“자, 그럼…… 마음을 정하셨으면…… 계약서에 서명을……”
재촉하듯 서명을 종용하는 꼴을 보니 악마가 꽤 초조한가보다. 괜히 바쁜 척 시계를 슬쩍 쳐다보기도 한다. 그러고 보니 벌써 한 시간 정도 지나 있었다. 그러나 계약서에 서명을 하게 되면 그 순간부터 내게는 시간이 10분밖에 없다. 야비한 악마들이 소원을 말하는 시간 제한을 만들어둔 탓이다.
그렇다. 혹시나 여러분이 악마와 조우하게 될 때 잊어서는 안 되는 사항. 악마를 대할 때 명심해야 할 그 문장을 다시 떠올려보자. ‘상대는 악마다.’ 악마는 사악하다. 악마는 교활하고 간교하다. 『원숭이 손』이라는 소설을 읽어본 적이 있는가. 소원의 성취가 주는 부작용과 고통에 대해 그보다 끔찍하고 냉정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절실하게 일깨워주는 작품은 없다. 악마가 들어주는 세 가지 소원은 바로 그 원숭이 손의 능력과 같다. 그들은 당신의 소원을 최대한 자기들 입맛에 맞게 해석해서 당신에게 불리한 조건으로 들어주고 당신의 영혼을 홀라당 집어삼키려 할 것이다. 이를 잊어선 안 된다.
이 모든 걸 알면서도 각오가 되었다면 계약서에 사인을 해도 좋다. 이 세상엔 다리 위나 건물 옥상을 어슬렁거리면서 죽을까 말까 망설이는 불쌍한 영혼들이 많다. 그들은 악마한테 혼을 팔아서라도 인생의 역전을 원한다. 악마가 계약서를 내밀면 약관은 읽는 시늉도 안 하고 덥석 사인부터 하고 말리라. 나도 사실은 그꼴이 나고 말 운명이었을 텐데 운이 좋게도 믿음직한 조력자를 만나서 지금에 이른 것이다. 그런 나에게 약관은 선전포고문이며, 결투에 임할 때의 주의사항이나 작전 안내서와도 같다. 여기에 서명을 한다는 것은 시합의 시작을 알리는 공을 울리는 일과 마찬가지이다.
서명은 피로 이루어진다. 계약서 가장 마지막 페이지에는 악마와 나의 서명란이 있다. 여기에 악마가 가져온 검은색 만년필 뒷뚜껑을 열고 피를 ─보통은 엄지손가락을 따서 피를 얻는다─ 살짝 흘려 넣는다. 그리고 서명란에 그 만년필로 이름을 쓴다. 그후에 악마가 역시 자신의 피를 넣은 만년필로 자기 이름을 씀으로서 형식상 절차는 끝나게 된다.
마침내 계약이 이루어지자 악마는 서류가방에서 전자 탁상시계를 꺼내어 탁자 위에 올려놓았다. 내 얼굴에 떠오른 의문을 알아차렸는지 악마는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우리도 시대의 흐름에 따라가고 있어서요. 옛날에는 모래시계를 이용했는데, 어쩌면 그쪽이 더 어울릴지도 모르겠네요. 분위기라고 할까요? 원하시면 바꿀 수 있는데.”
“아니, 그냥 하던 대로 하세요.”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악마라고 컴퓨터와 휴대전화, 전자시계를 쓰지 말란 법은 없다. 애초에 놈들이 먹잇감을 뽑아온 곳이 인터넷 게시판이 아닌가. 무엇보다 복잡하고 상세한 약관을 보니 악마가 현대문명에서 부대끼고 적응하며 축적한 경험의 결과가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 약관이야말로 자기들에게 유리한 요소를 넣고 불리한 요소를 빼면서 오늘에 이른, 악마 문명의 결실이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 이미 악마는 시계의 스위치를 눌렀고 흑백 LCD 화면의 숫자들이 숨가쁘게 바뀌기 시작했다. 00:10:00:00에서 시작한 숫자는 시시각각 줄어들며 0을 향해 가고 있었다. 이제 나는 00:00:00:00이 되기 전에 세 가지 소원을 말해야만 한다. 게임은 이제 시작되었다.


4

악마에게 전혀 미안하지 않지만, 나는 사실 예전부터 친구와 어떤 소원을 이루는 것이 좋을까에 대한 논의를 쭉 해왔다. 놈들이 갑작스레 만나자며 촉박한 일정을 강요하는 것도 다 이유가 있다. 악마는 우리가 깊이 그리고 오래 생각할 여유를 주지 않은 바람에 실수를 하거나 하찮은 소원을 말해서 손해를 보고 결국 빨리 죽도록 만든 다음 그 영혼을 접수할 요량이었던 모양인데, 그 작전이 이번에는 통하지 않은 셈이다.
솔직히 바로 나 자신도 그런 어수룩한 먹잇감에 지나지 않을 운명이었다. 그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면 잘못된 소원으로 파멸을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미리 말하지만 10분 동안 펼쳐지는 악마와의 두뇌 싸움을 기대한 사람에겐 미안하게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친구의 조언으로 나는 이미 세 개의 소원을 머릿속에 정해놓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여기서 잠깐 과거로 돌아가 그 친구와 있었던 이야기를 돌아보아도 이해해주기를.
그 친구는 게시판을 훑어보며 악마가 고름직한 사람에게 댓글로 슬쩍 접근해서 메신저로 연락을 취하곤 했다. 그런 그를 의심스럽거나 기분 나쁘게 생각하여 대화를 거절한 사람도 제법 되지만, 그는 늘 자신이 말을 거는 이유는 호기심밖에 없다고 말했다. 덧붙여 가능하다면 자신이 직접 악마와 만나 소원을 말하고 싶지만, 아마도 악마가 진짜라면 삶에 대한 큰 불만이나 욕망이 없는 자신을 선택할 리가 없음을 스스로도 알고 있기에 이른바 자신의 대리인을 찾고 있단다.
그는 나와 접촉했을 당시 이미 상당한 지식을 갖고 있었다. 악마가 교묘하고 복잡한 약관을 제시하고 있으며, ‘을’이 불리한 소원을 말하도록 유도하는 것이 그들의 목적이라는 것까지 말이다. 그래서 내가 멋모르고 이렇게 말했을 때 그는 따끔하게 조언을 해주었다.
「전 큰 거 안 바라고요, 그냥 재산 한 밑천이랑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랑 결혼하고 싶고…… 얄미운 놈 죽이고 싶고……. 정말 그 사기꾼 자식 때문에 우리집 재산 날아가고 부모님 몸져눕고 장난 아니었거든요.」
「저런, 님은 안 되겠군요.」
「진짜 저 죽고 싶어서 술 먹고 다리 위를 어슬렁거린 적 많았죠.」
「아니, 그런 의미가 아니라 님은 지금 악마랑 거래하면 안 되겠어요. 소원은 날리고 영혼만 빼앗길 거예요.」
「진짜요? 어째서?」
「일단 말이죠, 재산과 배우자 둘 중의 하나는 일단 포기하세요. 많은 재산을 바탕으로 나중에 직접 좋은 배우자를 찾든, 재산이 많은 배우자를 얻든 하나만 골라야 해요. 그리고 사람 죽이는 일은 자신이 불리해지지 않도록 방법을 세세하게 지시할 필요가 있습니다.」
「뭔가 어렵게 들리네요. 소원을 말하면 들어주는 것 아니었나요?」
「그들에겐 약관이란 게 있어요. 거기에 위반되면 들어주지 않지요. 그리고 한번 말한 소원은 물릴 수가 없어서 님만 손해예요. 마지막으로, 님은 죽고 나서 영혼을 악마에게 넘길 생각인가요?」
「글쎄요, 뭐 죽고 나면 끝이니까 상관없지 않을까요?」
「저도 정확한 정보는 없지만, 악마가 그렇게 허투루 영혼을 담보로 거래할 리가 없지요. 아마도 불지옥과 같은 고통을 겪거나 노예 이상의 가혹하고 비참한 경험을 해야 할 거예요. 그것도 영원히.」
「그치만 죽으면 고통을 못 느낄 가능성도 있고, 사후세계 같은 건 없을 수도 있잖아요.」
「악마가 멀쩡히 존재한다는데 그런 것이 없다고 보장할 수 있을까요. 최악의 경우를 상정하고 그에 맞게 대비해야만 합니다. 일단 님의 경우 수명과 건강을 바라지는 않나요?」
「물론 있으면 좋지만 소원이 세 개밖에 없잖아요. 오래 살면서 재산을 많이 달라는 식으로 한 번에 여러가지를 요구할 수는 없다던데요.」
「그말 대로예요. 제가 예전에 게시판에서 만난 분은 수명에 대한 집착이 강했어요. 결국 악마를 만나서 이렇게 말했다고 하죠. 악마 네가 나에게 줄 수 있는 최대한의 수명을 달라.」
「대단하군요. 확실히 100년이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보다 낫네요.」
「악마는 그대로 들어줬어요. 다만 그분은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 교통사고를 당해 즉사하고 말았죠. 약관에 의하면 문제는 없는 모양이에요. 악마가 준 것은 기본 수명이고 병이나 사고에 대한 보증은 전혀 없는 상태라나 봐요.」
「헉! 과연 악마다운 술책이네요.」
「따라서 안전하게 장수하려면 수명·건강·안전을 모두 말해야 하는데, 이것만으로도 소원 세 개를 다 써야만 하는 판국이에요. 하지만 님이 원하신다면 저는 이걸 하나의 소원으로 만들 수 있어요.」
「세상에, 그런 게 가능해요?」
그렇다, 가능하다. 단 하나로 세 가지를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마법과도 같은 해결책. 일단 떠올린 것은 ‘오랫동안 육체가 행복한 상태’. 하지만 ‘오래’는 추상적이라 써서는 안 되는 표현이고 ‘행복’도 금지된 낱말이다. 그렇다면 사고나 질병 없이 건강한 몸의 상태를 뭐라고 표현해야 좋을까. 무사함? 태평함? 안락함? 즐거움?
여기서 조력자가 힘을 발휘할 때다. 이미 외웠지만 악마에겐 보이지 않는, 노트북에 띄워놓은 글을 다시 읽고 확인했다. 친구가 내게 준 희망의 메시지였다.
8분 정도 남았을 때 나는 고개를 들고 당당하게 악마를 마주보며 첫 번째 소원을 말했다.
“첫 번째로…… 내 육체에 어떤 물리적·병리적 이상도 생기지 않기를 바랍니다!”
몸의 이상. 그것이 사고로 인한 물리적인 것이든 병원균에 의한 것이든 방지해 달라는 소원. 더구나 해석하기에 따라 이 소원은 노화도 죽음도 막아낼 수 있다. 악마는 겉으로 보았을 땐 눈썹 하나의 미동도 없이 굳은 표정 그대로였으나 꼼지락거리던 손가락의 움직임이 뚝 그친 것으로 봐서 제법 충격을 받았음을 알 수 있었다.
“어떤가요? 들어줄 수 있겠죠?”
나는 시험하듯 약간 깔보는 말투로 물었다.
“흠……. 그런 수를 쓰셨군요.”
악마는 내 속셈을 파악했다는 듯 어깨를 으쓱했다.
“육체에 물리적이거나 병리적 이상이 생기지 않는다는 말은 사고나 질병을 겪지 않는다는 뜻. 거기에 노화와 사망마저 피하겠다는 의미까지. 훌륭하십니다. 하나의 소원으로 수명과 안전과 건강을 얻어낸 사람은 종종 있지만 수명과 안전, 건강에 노화방지까지 다 얻어낸 사람은 처음입니다. 일단 칭찬의 말씀을 드리죠.”
칭찬의 말씀을 드리든 말든 별로 기쁘진 않다. 상대가 악마인 이상 더더욱. 이제 소원 대로 이루어주기나 하시지. 과연 이 볼살이 탱탱한 애송이 녀석이 소원을 들어줄 능력이나 있을까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녀석은 아무런 동작도 주문도 없이 너무나 간단히 말했다.
“소원은 이루어졌습니다. 그럼 다음 소원을 말씀하시죠.”
정말로 이루어진 것인지,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녀석이 정말 악마라면 지금 이 모든 일들이 다 거짓이요 사기일 가능성도 물론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 나는 증명할 능력이 없다. 왠지 어제까지 아팠던 내향성 발톱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느낌이 들긴 했으나 늘 아픈 것도 아니니 당장 확인할 길이 없고, 내 몸에 이상이 없어졌는지 판단할 수도 없었다. 일단은 믿어볼 수밖에. 악마란 믿을 만한 존재가 못되지만.


5

재산에 대해서 친구는 처음부터 회의적이었다. 소원을 말하는 사람들이 가장 선호하는 것이 돈과 관련된 소원임을 알면서도. 그래서 더욱 악마들의 술책과 함정이 견고하게 짜여 있는 항목임을 눈치 채고 단단히 대비해야 한다고 일러주었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순간적인 탐욕에 눈이 멀어 섣부른 소원을 말해 파멸에 이르곤 했다고 그는 말했다.
「제가 아는 분들만 해도, 한 사람은 지금 은행 강도로 체포되어 수감되어 있고요, 사업을 벌이다 금방 파산해서 소원을 빌기 전이나 다름없이 가난해진 사람도 있어요. 오히려 전 재산을 잃어서 더 가난해지고 집도 없이 노숙하는 분도 계시죠.」
「어째서 그렇게 될까요? 역시 악마니까 위조지폐를 주는가 봐요.」
「아니오, 그렇진 않을 거라고 봅니다. 악마들도 바보는 아니고, 불필요하게 사회에 혼란을 줘서 자신들의 존재가 경찰에 노출되도록 놔둘 리가 없죠. 그리고 녀석들도 일단 약관에 위배되지만 않으면 소원은 정확하게 들어줍니다. 악마라 해도 가짜 돈을 주거나 하지는 않을 거란 얘기죠.」
「그래도 결국은 파산을 하도록 만든다는 얘기겠죠?」
「네. 예를 들어 돈더미에 둘러싸이고 싶다고 말하면 은행 금고 안으로 이동시켜 버리는 식이에요. 그래서 강도로 오인받고 체포된 경우가 실제로 있으니까. 표현 하나, 낱말 하나에도 주의를 기울여야 하죠. 또 돈은 진짜지만 그 출처는 보장할 수가 없어요. 제가 노숙자가 된 분에게서 직접 얻은 정보가 있어요. 악마에게 돈을 달라고 하고 어디서 구해온 돈이냐고 물었대요. 약관에 의하면 소원을 말하는 시간 동안 악마는 거짓말을 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요?」
「모든 현금이나 재산은 자신에게 주어진 만큼 누군가, 어딘가에서는 잃게 된답니다. 악마가 지폐를 만들어낼 수는 없으니까 일견 타당한 조건이긴 하지만, 즉 악마가 다른 곳에서 훔쳐다가 준다는 뜻이 되잖아요. 더구나 한국은행에서 가져온 돈이라면? 일련번호도 있으니 도난당한 화폐임을 경찰이 알게 될 것이고, 따라서 이걸 유통시켰다간 추적당해서 체포되고 말겠지요. 물론 그게 악마가 원하는 바이기도 하고. 건물 같은 부동산도 마찬가지로, 없는 집을 지어달라고 하면 자재를 훔쳐다가 악마가 지어주고, 이미 있는 건물을 달라고 하면 소유주 변경을 몰래 해버리는 식이죠.」
「다음날 집주인이나 구청 직원이 발견하면 난리 나겠군요.」
「세상 어느 소유주도 하루아침에 집을 빼앗기고 가만히 있지 않겠죠? 당장 소송하고 난리가 날 걸요. 그러니 실제 있는 부동산을 달라고 하는 소원은 절대 말해선 안 됩니다.」
「등가교환이라는 거로군요.」
「악마 주제에 현대 경제의 원칙인 제로섬 게임을 착실하게 준수하고 있는 셈이죠. 기껏 긴 수명을 얻어놓고 그 세월을 감옥에서 보내야 하는 일이 벌어질지도 모르니, 제가 재산에 대한 소원은 말하지 말라고 충고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입니다.」
「확실히 끔찍한 일이네요.」
「주식 같은 건 현금보다 훨씬 위험하죠. 악마가 그 기업이 망하도록 수를 쓸지도 모르고. 외국 화폐를 달라고 하면 환율이 급변할지도 모르고요.」
「그렇다면 믿을만한 건 역시 현물 아닐까요? 금이라든지 석유…….」
「어차피 그것도 어디서 훔쳐오겠죠. 먼 외국이라면 덜미가 잡힐 가능성도 줄어들긴 하겠지만. 가령 남아프리카 광산에서 다이아몬드 원석을 갖다 달라고 하면, 어디에 팔지가 문제죠. 금은방에 다이아 원석이나 가공되지 않은 금덩어리 같은 걸 들고 나타나면 당장 의심받아 밀수라고 신고 당하겠죠. 결국 가공된 금괴가 그나마 안전하긴 한데, 역시 밀수로 의심받지 않도록 조심해야겠죠.」
「참 힘들군요. 그럼 복권에 당첨시켜 달라고 비는 건 어떨까요?」
「복권이라면 일단 로또는 절대 안 됩니다.」
「아니 왜요? 가장 상금이 큰데.」
「악마라면 1등 당첨자를 만 명 이상 만들어버릴지도 모르니까요. 2003년에 로또 당첨자수가 23명이나 나온 적이 있었어요. 총액을 23으로 나누다보니 1인당 7억 9천만 정도. 세금을 떼니 6억 2천여만 원으로 명색이 로또 당첨금인데 10억도 안 되었죠. 그러니까 악마의 능력으로 당첨자를 확 늘려버리면 일확천금이 아니라 그냥 뭉칫돈 정도 수준으로 전락하는 거예요. 없는 것보다야 낫겠지만 이래서야 어디 영혼을 팔고 받는 돈이라 할 수 있나요.」
「어디 안전하게 돈을 얻는 방법이 없을까요…….」
「편법을 이용한 방법을 찾아야겠죠. 실제 은행 직원의 실수로 어느 외환 딜러의 통장에 천만 달러가 입금된 일이 있었어요.」
「정말요?」
「은행이라고 해도 고객 계좌의 비밀번호를 멋대로 알아낼 수는 없으니 그 돈을 인출하지 못하고 결국 통장 주인에게 부탁을 하여 되찾게 되었죠.」
「거기서 만약 그 사람이 돈 못 주겠다고 버티면 어떻게 되죠?」
「일단 은행에서 인출을 못하도록 통장을 묶어놓을 순 있어요. 그리고 소송을 걸겠죠. 결국 직원의 실수를 유도한다고 해도 그 돈이 고스란히 자기 것이 되는 건 아니에요. 은행 측의 승리 확률이 높으니, 변호사비만 날리지 않을까요.」
「그럼 결국……」
「악마에게 돈 달라는 소원은 빌지 말 것. 아시겠죠? 예전에 제가 드린 말씀을 기억하세요. 돈이 많은 배우자를 만나면 되는 거예요. 이혼하게 되더라도 원만히 합의하면 재산을 나눌 수 있으니까요.」
「악마가 맺어준 사람은 믿을 수 없다는 뜻인가요?」
「그런 의미는 아니에요. 어디까지나 만약을 대비하자는 거죠.」
이상이 내가 재산에 관련된 소원을 포기하기까지 10초도 걸리지 않은 까닭이다.


6

복수. 그렇다. 이번엔 복수에 대한 이야기를 해보자. 악마가 나에게 제안을 했을 때 대다수 사람들이 원하는 소원으로 수명, 재산, 사랑과 함께 복수를 거론했다. 앞의 세 가지는 누구나 동의하겠지만 얼핏 마지막 것은 예상 외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항목은 단순히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에게 앙갚음을 하겠다는 작은 의미 말고도 누군가에게 해를 끼치고 싶다는 범죄욕구 전반을 가리키는 말로 해석하는 쪽이 타당하다.
가령 세계 평화를 가로막는 존재를 제거해달라는 원대한 포부일 수도 있고, 작게는 자신이 증오하는 인물이나 악의 세력을 일망타진하고 싶다든가 하는 영웅심리일 수도 있다. 그도 아니면 죄 없는 선량한 이들을 괴롭히거나 죽이고 싶지만 경찰에 잡히고 싶지 않을 때 악마의 손을 빌릴 수도 있다. 악마에게 있어서는 가장 적성에 맞는 일이라고나 할까.
좀 전에 우리 가족을 고통의 구렁텅이로 밀어 넣은 B라는 사기꾼을 벌하고 싶다고 말한 적이 있다. 같이 사업을 하자는 그놈의 유혹에 넘어간 부모님은 전 재산은 물론 대출, 사채 등 온갖 경로를 통해 막대한 돈을 끌어 모아 갖다 바쳤으나 결국 사업은 사기로 판명, 그자는 외국으로 도피했고 빚은 부모님에게 고스란히 남고 말았다. 어머니는 충격에 몸져누우셨다 그대로 돌아가셨고, 아버지는 폐인이 되어 술에 절어서 살고 있다. 나는 부모님을 돕겠다는 생각에 다니던 회사도 그만두고 사업에 함께 뛰어들었다가 졸지에 무직 상태, 희망도 의욕도 잃고 방황하다가 자살 사이트를 찾아다니는 한심한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한 마디로 그자는 철천지원수라고 할 수 있는 인물로, 할 수만 있다면 나는 그를 감옥에 가두든지 죽여버리든지 어떻게든 복수를 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러니 소원을 통해 안전하게 복수할 수 있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지만 침착하자. 그만 흥분해서 밑도 끝도 없이 ‘B를 죽여줘!’ 같은 소리를 했다가는 악마의 간계에 말려들게 된다. 그점은 친구도 지적한 적이 있다.
「죽여 달라는 소원이요? 아마 악마라면 기쁘게 받아들이겠지만, 전 말리고 싶은 심정이군요. 순수하게 윤리적인 이유에서 말이죠.」
「악마니까 다른 건 몰라도 그 소원만은 잘 들어줄 것 같은 생각이 드는데요. 이왕이면 잔인하게 죽여 달라고 부탁하고 싶은 걸요.」
「그렇지만 소원을 말할 때는 조심해야 합니다. 그냥 죽이라고 해선 안 되죠. 어디까지나 B라는 사람의 죽음에 님 자신이 연관되는 일은 없어야만 합니다.」
「어째서요? 악마를 시켜서 악마가 죽이는 건데요. 저는 그 시각에 사람 많은 곳에서 알리바이를 만들어두면 되잖아요.」
「B의 사후 경찰이 수사를 하면서 B의 인간관계가 드러나겠죠. 님과 님의 아버지가 B에게 강한 원한을 품고 있음을 알게 되면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할 거예요. 물론 소원을 말할 때 범행시각을 지정하고 알리바이를 만드는 것은 좋은 생각이지만 완전하진 않아요.」
「그걸로도 부족할까요? 아버지를 목욕탕에 보내서 사소한 일로 사람들과 말다툼을 벌이게 꾸민다든가, 하는 정도로는 안 될까요?」
「무엇보다 상대는 악마니까요. 그냥 죽이라고 하면 악마는 님의 집에 있는 칼이나 망치를 가져다가 B를 죽일지도 모르죠. 현장에 남은 흉기에는 님이나 님 아버지의 지문이 잔뜩 묻어 있을 테고, 악마에게 지문이란 게 있을지 모르겠네요. 있더라도 악마의 능력이라면 없애고 님들 것만 남기겠죠. 또는 님들 머리카락을 몰래 가져다가 현장에 뿌릴지도 모르고.」
「그렇게까지 한다는 건 일부러 나를 범인으로 만들겠다는 뜻인데……. 그런 건 계약 위반이 아닐까요?」
「그렇게 하지 말라는 얘기는 없으니까요. 혹은 악마가 님의 모습으로 변장해서 B를 어설프게 공격해서 경찰서에 연락하거나 다잉 메시지를 남기도록 여유를 주고 난 후 죽일지도 모르고, B의 집이나 주변에 설치된 CCTV에 일부러 찍히도록 지나간다든지, 일부러 소리를 내서 이웃 사람을 불러 목격하도록 만드는 식으로 함정을 팔 수도 있어요.」
「이런!」
「따라서 님 가족과의 연관 없이 깔끔하게 해치우려면 심장마비 같이 병으로 인한 급사를 유도하거나 자살하도록 만들어야 해요. 자살이라면 유서를 길게 쓰도록 여유를 줘서도 안 돼요. 악마가 당신의 이름을 쓰도록 부추길지도 모르니까.」
「하지만 전 저의 복수임을 그놈에게 알리고 싶은데……」
「안타깝지만 그 생각은 포기해야만 해요. B는 목욕하다가 욕조에 빠져서 죽는다든지 하는 어이없는 급사로 처리해야만 해요. 몸을 물에 담근 상태이니 유서나 유언도 남길 수 없을 테고 집에서 목욕하다 죽으면 가족들이 발견할 테니 님 쪽이 연루될 가능성은 없는 거죠.」
그때의 대화를 떠올리고 다시금 약관을 읽어보니 타인의 영혼과 행동을 조종하는 것에 대한 제약 사항이 상당히 많아서 만화에 나오는 데스노트처럼 쉽지가 않았다. 영혼과 행동을 동시에 조종할 수가 없기 때문에 자살을 명령하면 몸은 움직여도 마음이 거부하게 된다. 그러면 무의식적으로 막으려 하고 결국 자살은 실패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반대로 마음을 우울하게 만들어도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면 그만이다.
결국 생각을 정리하기까지 제법 많은 시간을 허비했지만 결단을 내리기로 마음을 먹은 후에는 망설이지 않았다. 앞에서 말했듯 나는 두 개의 소원만 욕망을 이루기 위해 쓰기로 결심했고 재산을 포기한 만큼 배우자를 선택하기 위해 복수를 포기해야만 했다.
비록 지금은 물러났지만 포기했다는 의미는 아니다. 내게 충분한 재산이 주어진다면 B를 파멸시키기 위한 함정을 만들 기회는 생기리라 믿는다. 그때를 위해 복수를 일단 미루기로 했다. 몸의 이상을 방지한다고 해도 살인죄로 잡혀서 사형을 당하는 것까지 막아주지는 못할 테니까 말이다.


7

내 입으로 말하기는 쑥스럽지만, 내 방 벽에는 배우 A의 사진과 포스터가 가득 붙어 있을 정도로 나는 A를 좋아한다. 따라서 A를 내 연인으로 만들어달라거나 A와 결혼하게 해달라는 소원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걸 겨우 참아야 할 정도로 간절하게 A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럴 때일수록 머리를 차갑게 식히고 뇌세포를 침착하게 굴려가며 잘 판단해야 한다. 덮어놓고 결혼을 요구했다간 악마의 술수에 말려들게 된다. A는 내 존재 조차도 모른다. 그런 사람과 졸지에 결혼을 하게 된다면? 분명 깜짝 놀라고 당혹스러워 하겠지. 결혼 다음날 곧바로 이혼 당할지도 모른다.
결국 A와의 사랑을 이루고 싶다면 A의 마음을 내게로 돌리도록, A가 나를 사랑하도록 만드는 소원을 빌어야만 한다. 이런 경우 많은 이들이 흔히 생각하는 소원이 ‘A가 나를 영원히 사랑하게 해줘’겠지만 역시 이 소원엔 큰 함정이 도사리고 있다. 일단 ‘영원히’는 금지되었으니 A가 살아 있는 동안 나를 사랑하게 만들라고 하면 좋을 것 같지만, 문제는 여전히 남아 있다. 친구의 조언은 내가 생각지도 못했던 점을 정확하게 지적했다.
「일단 나쁘지 않군요. 그 사람은 유명 배우라 출연료도 비싸고, 광고도 많이 찍은 걸로 알고 있고…… 재산 문제는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고요. 알려진 바로는 성격도 나쁘지 않다고 하니까.」
「단순히 제가 팬이라는 점을 제외하고 보더라도 최고의 배우자감 아닌가요?」
「그건 맞지만, 지금 현재의 상황일 뿐이죠. 지금 님은 A를 좋아한다, 소원의 힘으로 A도 나를 좋아하게 된다. 하지만 평생 그럴 거란 확신이 있나요?」
「그거야 평생 나만 사랑하도록 소원을 빌면 되잖아요. 이혼 요구도 없을 테고, 바람도 안 피울 것이고.」
「그건 A 이야기죠. 제가 묻는 건 님이에요. 님은 A만을 평생 사랑할 자신이 있나요? 만나서 사귀어본 적도 없잖아요. 겉으로 보이는 모습과 이미지만으로 사랑에 빠진 사람이 그 감정을 평생 지속할 거라고 믿을 만큼 저는 순수하질 않아서요.」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부끄럽고 창피하지만 그의 말이 틀리지 않았음을 깨달았으니까. 처음엔 A에 빠져 있는 나에게 그런 말이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기 때문에 약간 기분이 상했던 것도 사실이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그의 지적은 옳다. 생각해보면 분명 지금의 나는 A를 좋아하고 A를 원한다. 그러나 평생 그럴 수 있을까? 살다보면 더 마음에 드는 상대를 만날 수도 있고, 상대가 싫어져 헤어지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런데도 상대는 악마의 술책으로 나만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상태다. 이혼하자고 말하면 완강히 거절하거나 싫다고 매달려 애원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관계는 고통의 굴레가 되고 만다.
또 하나 나는 A에 대해, 즉 A라는 인간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한다. 또한 A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도 모른다. 이는 좋은 배우자를 골라준다는, 악마가 스스로 추천한 무난한 소원 쪽도 마찬가지다. 지금은 A가 겉과 속이 다 멀쩡하고 훌륭한 사람일지 몰라도 세월이 흐르며 성격이 이상해지거나 외모가 추해질 수가 있다. 도박에 빠져 재산을 탕진할 수도 있고, 범죄를 저질러 내 속을 썩일 수도 있고, 중병에 걸려 나를 괴롭게 만들 수도 있는 것이다. 물론 그런 사람이라도 미워하거나 버리지 않고 감싸 안는 것이 진정한 사랑이겠지만, 아직 나는 A를 그 정도로 사랑하고 있지는 않으며 앞으로 그리 될지 확신할 수 없는 상태가 아닌가.
이런 제반사항을 다 감안한다면 A와 나의 사랑이 지속되도록 소원을 빌면 안 된다는 결론에 이른다. 그렇지만 내가 A를 사랑하는데 A가 나를 싫어하거나 바람을 피우거나 해서도 안 된다. 이걸 어떻게 하나의 문장으로 정리할 수 있단 말인가. 고민을 하다하다 질린 나는 친구에게 넋두리 늘어놓듯 의견을 내놓았다.
「결국 소원이 길어지겠네요. A는 기본적으로 나를 사랑하되 내가 A를 사랑하지 않게 되면 A도 나를 사랑하지 않게 해줘, 이런 내용이면 어떨까요?」
「너무 복잡하네요. 요는 서로 사랑한다면 애초에 문제가 되지 않겠지만, 님이 A를 사랑하지 않게 되거나 헤어지고 싶어질 때 A가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어야만 한다는 얘기죠? 이걸 간단하게 표현하자면 이렇게 돼요.」
정답은 나왔다. 나는 악마를 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두 번째 소원은 내가 A에 대해 가진 감정과 똑같이 A가 나를 생각하도록 해줘요!”
즉 해답은 이렇다. 내가 A를 사랑하고 원하면 A도 나를 사랑하고 원한다. 그러나 내가 A를 싫어하게 되면 A도 나를 싫어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이혼하는 것쯤은 일도 아니게 된다. 이 얼마나 명확하면서 간편한 관계인가. 지금은 A를 사랑하지만 살다보면 정말 내 이상형이다 싶은 사람을 만날 수도 있다. 그래서 A에 대한 내 애정이 식으면 A도 동시에 나에 대한 애정이 식으면 된다. 단순히 사랑하도록 만들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두 사람이 서로를 생각하는 감정을 똑같이 만들어달라는 것. 이것이 결혼 생활에서 올 수 있는 문제점을 해소할 수 있는 탈출구이다.
내 소원을 들은 악마의 얼굴에 감탄의 빛이 떠오른다.
“자신의 애정과 상대방의 애정을 동등한 정도로 해 달라 이런 말씀이시죠? 치밀하시군요. 고객님은 약간 바람둥이 기질이 있을지 모르지만, 주도면밀하다는 점은 인정해드리겠습니다.”
악마 따위에게 내 기질이 어쩌니 하는 평가질은 듣고 싶지 않다. 소원이나 제대로 이루어주시지.


8

이제 남은 시간은 약 4분. 생각보다 두 가지 소원을 성취하는 데에 시간이 오래 걸렸다. 그래도 이제 분위기는 완전히 역전되었는지 난 느긋한 반면 악마 녀석은 무언가에 쫓기는 듯 초조해하고 있다.
거듭 강조했듯 나는 마지막 소원에 승부를 걸 생각이다. 악마가 도저히 이루어줄 수 없거나, 악마 스스로가 약관을 위반하도록 만들거나, 어쨌든 계약을 지킬 수 없도록 만드는 소원을 빌려고 한다. 약관에 따르면 갑의 잘못으로 계약이 파기될 경우 이전까지 들어준 소원의 효력은 유효하면서도 을의 의무는 사라진다. 즉 내 영혼을 양도할 책임은 벗어나면서도 앞서 말한 소원을 얻어낼 수 있다는 뜻이다.
당연히 그런 소원이 존재하도록 악마가 놔둘 리 없을 테고, 약관은 깨알 같은 요구 조건과 제약과 위반 사항과 주의점으로 가득한 복잡한 기술문서처럼 되고 말았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된다는 식으로 문제의 소지가 있는 부분을 막고 보자는 불공정한 계약이었다. 그래서 그만큼 나와 친구도 머리를 굴리고 궁리를 하며 답을 찾아온 것이다.
우선 내가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자연 법칙을 조종하는 등의 압도적인 능력을 요구하는 소원이었다. 가령 여름에 눈이 오도록 만든다든지 에베레스트 산을 깎아서 평지로 만들어달라든지……. 하지만 악마를 너무 얕봐선 안 된다. 정말로 이루어줄지도 모를 일이다. 더구나 약관에 의하면 천재지변이나 그에 준하는 큰 변화를 요구할 경우 그로 인해 생기는 피해와 부작용에 대해서는 책임을 지지 않는다고 했다. 악마라면 분명히 소원을 들어주되 나에게 피해가 미치게끔 꾸밀 것임에 틀림없다. 에베레스트의 눈과 바위를 내 머리 위에 떨어뜨린다든지 하는 식으로.
이런 게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악마를 당혹스럽게 만들, 꼼짝 못하게 만들, 곤란해 하다가 고민하다가 괴로워하다가 죽어버리게 만들 그런 소원이다. 한 마디로 상대를 쓰러뜨릴 촌철살인, 아니 촌철살악마 같은 그런 소원 말이다. 그렇지만 그런 멋진 해결책이 쉽게 나올까? 더구나 그 친구도 나도 약관을 다 파악하고 여기에 온 것은 아니다. 그가 여러 명의 소원 성취자와 접촉하여 정보를 입수했다곤 하지만 내가 오늘 직접 약관을 읽고 알게 된 새로운 사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결과 내가 미리 생각했던 비책들이 모두 무용지물이 되어버렸음을 깨닫고 말았으니, 지금껏 태연함을 가장하고 있었으나 진짜 위기는 이제 막 시작되고 있었다.
사실 내가 친구와 상담한 결과 만들어놓은 소원 후보는 세 개였으나 전부 부적합함이 드러났다. 그 첫 번째는 ‘내 소원을 들어주지 마라’라는 소원. 크레타인의 에피소드를 연상시키는 소원으로 악마는 내 소원을 들어줘야 하기 때문에 소원을 들어줘선 안 된다는 모순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시간내로 소원을 안 들어주면 악마는 약관을 위반하게 된다. 따라서 악마는 소원을 들어줘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를 두뇌에 과부화가 걸릴 때까지 끝없이 고민하다가 제한 시간을 넘기고, 나는 두 가지 소원을 챙기고 안전하게 내 영혼을 지켜내게 될 거라는 계산이었다.
그렇지만 소원에 대한 소원을 금지한다는 조항이 모든 계산을 무너뜨렸다. 이는 두 번째로 생각한 ‘내 소원은 없다’라는 소원도 마찬가지. 호시 신이치의 단편소설에서 힌트를 얻은 이 소원은 원작에서도 악마를 쫓아낸 명언이지만, 이때의 실패가 악마에게 전달되었는지 소원에 관련된 모든 소원을 차단해놓음으로써 간단하게 해결한 것이다.
어쩔 수 없다. 이제 마지막으로 궁리한 소원을 내놓을 차례인가보다. 그것은 바로 ‘내가 마음속으로 생각하고 있는 소원을 들어다오’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이를 위해서는 먼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악마 씨, 물어볼 것이 있는데요.”
상대방은 대답 대신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당신은 내 마음속을 들여다볼 수 있나요? 내가 생각하는 내용을 알아낼 수 있는지요?”
“악마라고 불리지만 기본적으로 저도 인간의 육체를 입고 있습니다. 인간의 능력을 초월하는 일은 하지 못하죠.”
“그럼 소원은 당신이 직접 들어주는 것이 아닌가요?”
“이렇게 생각해보시죠. 인터넷에 비교해볼까요? 저를 컴퓨터 단말기라고 본다면, 소원을 이루고 사자(死者)의 영혼을 접수하는 거대한 존재는 데이터를 전송하는 서버로 여기면 이해가 되겠죠. 고객님이 저에게 소원을 입력하면 이루어진 소원이 저를 통해 출력되지만 직접 그 일을 하는 것은 보이지 않는 곳에 있는 거대한 서버인 셈입니다.”
역시 네놈은 별 볼일 없는 영업사원이라 이 말이지. 뭔가를 결정하고 조절하고 변경할 권한도 능력도 없는 말단. 진짜 악마의 발톱 사이에 낀 때 같은 존재였구나.
“그래서 질문에 대한 답을 다시 드리자면 저는 인간 이상의 능력이 없지만, 저를 지원하는 제 뒤의 존재라면 할 수 있을 겁니다.”
그가 미소를 지었다. 심장에 차가운 칼날이 스친 듯한 기분이었다. 그렇다면 내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도 가능하다는 얘기일까?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어느새 7분을 지나고 있었다. 돌연 시간의 흐름이 빨라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악마가 시계에 교묘한 조작을 해놓아서 실제 10분보다 더 빨리 흐르는 것 아닐까? 하지만 혹시나 싶어 내 노트북 화면의 시계를 확인하니 별 차이가 나지 않았다.
머리가 하얘지며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애초에 악마를 지혜로 이긴다는 생각이 무모한 자만 아니었을까? 민담과 동화 속의 악마는 멍청하지만 지금 악마는 컴퓨터를 이용하고 약관을 작성할 정도로 영리해졌다. 아마도 긴 세월 동안 겪었던 실수와 실패를 거울 삼아서 데이터를 축적했겠지.
나는 탁상에 팔꿈치를 괴고 양손으로 머리를 감싸며 정신을 집중하려 애썼다. 주위의 수런거림, 창밖에서 들리는 자동차의 엔진 소리와 경적 같은 소음이 자꾸만 정신을 흐트려놓는다. 조용히 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다들 조용히 좀 해! 난 지금 영혼을 건 게임을 하고 있다고!
역시 남은 것은 하나뿐인가. 나는 약관을 다시 집어들고 떨리는 손가락으로 금지 항목을 짚어나갔다. 영원히 살거나 죽지 않도록 만들 수는 없다고 적혀 있다. 하지만 영혼을 빼앗기지 않으려면 죽는 즉시 되살려 달라고 비는 수밖에 없다. 슬며시 문서 너머로 시선을 보내며 약간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부, 부활에 대해서는 나 자신도 똑같이 적용되는 거겠죠?”
“물론이죠. 시신이 있다면 그대로 되살아나고, 화장이나 부식으로 시신이 없어졌다면 육체를 새로 만들되 사망 직전의 연령과 상태를 최대한 재현합니다. 약관에 적혀 있는 그대로입니다. 심장이나 머리 등의 손상이 심해서 살려도 살 수 없을 정도로 시신의 훼손도가 심할 경우에도 새 육체를 준비하지요.”
“그렇다면 죽는 즉시 부활도 가능하겠네요? 시간 제한은 적혀 있지 않은데.”
“당연합니다. 옛날에 죽은 사람도 되살릴 수 있으니까요. 다만 역사책에 적혀 있다고 해도 사실은 실존 인물이 아닌 경우는 불가능하고, 자기 자신의 경우라면 죽은 후 언제 되살아날지까지 직접 정하실 수 있어요. 그러나 되살아난 당신에게…… 생전에 이뤘던 소원의 효력은 남지 않다는 점을 명심하세요.”
즉 죽자마자 곧바로 살아나는 것은 가능하다는 얘기. 그런데 소원의 효력이 남지 않는다니, 그게 무슨 소리지? 그 말은 얻었던 재산이나 배우자 등은 죽었다가 살아나면 모두 잃는다고?
“말도 안 돼! 그건 약관 위반 아닌가요?”
악마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상황은 역전된 듯했다. 나는 겁먹고 초조한 먹잇감이고, 녀석은 여유로운 맹수요 사냥꾼이었다. 어느새 얼굴을 가득 적신 땀방울이 흘러 눈꺼풀 위를 무겁게 눌렀다.
“아니죠. 소원의 효력은 당신이 살아 있는 동안에 유효하다고 약관에 분명히 적혀 있습니다. 한 번 죽은 이상 다시 살아난다고 해도 이전의 당신은 아니지요.”
안 돼, 마지막 희망이……! 악마의 미소는 끔찍했다. 내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는 듯한 저 여유로운 미소! 방금 그런 능력은 없다고 한 주제에!
“영혼을 팔기 싫어서 죽자마자 다시 살아나게 해달라는 사람이 종종 있었어요. 하지만 그런 사람은 오래 살지 못하죠. 우리 악마가 빼앗긴 걸 되찾는 데 주저함이 있을 것 같나요? 사흘도 넘기지 못할 걸요.”
짐짓 웃는 시늉까지 하며 손을 내젓는 모습이 가증스러웠다. 악마의 말대로라면 육체의 안전을 소원으로 빌어놓았다고 해도 죽었다가 되살아난 이상 소원의 효력은 사라지고 악마의 술책을 막을 방어막은 사라지고 만다. 그렇다면 몇 번을 부활해도 허사다. 악마들이 그 즉시 온갖 사고를 동원하여 나를 죽이고 영혼을 빼앗으려 할 테니까. 마지막 희망을 건 막판의 비책도 녀석들에게는 수차례 겪었던 하찮은 꼼수요 반항에 불과했던 모양이다.
8분을 지나고 있었다. 남은 시간은 약 1분 40초. 이제 내 마음은 악마가 원하는, 어둠과 절망과 자포자기라는 색으로 짙게 물들고 있었다. 이왕 이렇게 되었으니 욕심과 쾌락을 위해 남은 하나를 써버리자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미 나는 안전하게 장수하는 소원을 빌었고, 최고의 배우자가 많은 재산과 함께 나를 맞아주리라. 최소한 죽기 직전까지는 행복으로 가득한 인생을 즐길 수 있을 터. 그러나 언젠가 내 영혼은 악마에게 팔려가고 그 끝에 남은 것이 고통인지 공포인지 모르겠으나 끝없는 불안이 남아 있는 한 나는 무엇을 보아도 보이지 않을 테고 무엇을 먹어도 그 맛을 느끼지 못하게 되리라. 그런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9

전자시계의 숫자가 00:00:59:00를 지났다. 드디어 앞의 세 단위를 모두 0으로 장식했고 시간은 1분도 채 남지 않았다.
「보고 계세요?」
갑자기 메신저 창에 글이 뜨기 시작했다. 그 친구다. 화면을 너무 깊이 보고 있으면 악마에게 들킬지 모르니 나는 조심스레 바라보았다. 제삼자가 있다는 사실이 발각되면 계약 파기니까. 모니터에는 계속 그의 글이 떠올랐다.
「보기만 하세요. 고개를 이쪽으로 돌리지 말고 슬쩍 보세요.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시고.」
「세 번째 비책을 쓰세요. 마음속에 떠올린 소원을 맞추라는 소원이요.」
「분명히 저 녀석은 다른 수단을 써서 님의 마음을 읽을 거예요. 그때 님은 계속 이렇게 생각하고 계세요.」
친구의 글은 계속 이어졌다. 어차피 포기한 상태, 더 망설일 것도 없었다. 아직 왜 그래야 하는지 이해하진 못했으나 그에 대한 신뢰만은 굳건했기에 그대로 따랐다. 즉시 입을 열고 남은 생명을 건 도박판에 마지막 베팅을 했다.
“마지막 소원은…… 내가 지금 생각하고 있는 소원을 들어주세요!”
“네? 뭐라고요?”
악마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내 목소리가 생각보다 꽤 컸기 때문에 듣지 못했을 리는 없고, 믿을 수가 없다는 듯 되물으며 악마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내 속셈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걸까? 그러거나 말거나 나는 이제부터 마음속으로 강렬하게 소원을 빈다. 그리고 악마가 파악하고 알아내어 소원을 들어주기를 바랐다. 악마가 만약 내 속마음을 읽어내지 못한다면 그대로 녀석의 패배로 게임 끝. 악마가 마음을 읽는 재주가 있다고 해도…… 내겐 아직 기회가 있다.
악마는 내 속셈을 어느 정도 파악했는지, 고개를 숙이다가 확 쳐들어 천장을 보더니 손가락을 격렬하게 꼼지락거리고 주위를 두리번거리다가 돌연 뭔가 결심했는지 벌떡 일어나 두 주먹을 꽉 쥐었다.
“이렇게까지 하게 만드시는군요. 보통은 악마라고 해도 쓰지 않는 술수지만, 어쩔 수 없죠. 상당한 대가를 지불해야 해서 저도 꺼리고 있지만……. 좀 전에 저는 단말기에 불과하다고 말씀을 드렸죠? 하지만 제가 악마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길!”
악마는 돌연 두 손을 치켜들고 알아듣지 못할 말을 빠르게 외쳤다. 마법주문인지 욕인지 분간도 할 수 없었다. 이어서 서류가방에 손을 집어넣고 휘젓더니 조그만 카메라를 하나 꺼냈다. 먼지 묻고 낡은 구식 필름 카메라처럼 보였다.
“이게 뭐냐면 말씀이죠, 고객님의 생각을 읽도록 도와주는 마법 도구란 말씀입니다. 모습이야 시대에 따라 달라지기 마련이라서, 중세시대엔 수정 구슬이었는데 최신 유행에 따라 카메라가 되었을 뿐입니다. 우리 악마들이 시대에 좀 뒤떨어져서 그런지 낡은 필름 카메라긴 하지만…… 조만간 캠코더 같은 모습이 될지도 모르죠. 모습이야 어떻든 성능은 예로부터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이제 당신의 속마음을 훤히 알 수 있습니다. 사진으로 찍듯이 분명하게 말이죠!”
장황한 설명을 마친 악마는 사진을 찍듯 카메라를 들고 내 가슴팍 부근을 쳐다보았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간절하게 소원을 빌었다. 혹시라도 다른 잡생각을 떠올려 정신이 흩어지거나 악마에게 꼬투리를 잡히지 않도록 하나의 문장만을 되풀이하여 되뇌였다. 내 목숨을 살릴 주문이라도 되는 양 외고 또 외웠다. 마침내 악마의 카메라에 그 문장이 떠올랐다.
‘내 영혼을 팔지 않겠다! 내 영혼을 가져가지 마라!’
악마는 당황한 표정으로 카메라에서 눈을 떼며 중얼거렸다.
“아, 안 돼……. 이건 약관에 어긋나는……”
그때 나는 눈을 뜨며 친구가 귀뜸해준 말을 재빨리 했다.
“하지만 약관은 내가 소원을 말할 경우에만 적용되죠. 내 소원은 분명히 생각하는 내용을 이뤄달라고 했잖아요? 생각을 하는 것에 대해서는 약관 어디에도 언급되지 않았어요.”
악마의 표정이 점점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영업용 미소는 사라진지 오래고, 매서운 눈빛을 뿜어내던 여유로운 얼굴이 이제는 분노와 초조함으로 물들어갔다.
“이런 제길……. 상부에 건의해야 겠어. 약관에 추가할 부분이 생겠군.”
“약관에 의하면 계약을 맺은 후에 계약 조건을 바꾸는 일은 금지되어 있죠. 당연히 약관의 수정도 포함해서. 설마 계약을 위반할 생각인가요?”
나는 이제 여유롭게 웃음을 흘리며 응수했다. 과연 그 친구는 천재다. 내 목숨을 구해준 구세주, 수호신, 천사, 하느님, 부처님, 조상님이 아닐 수 없다! 모든 일이 그의 생각 대로 돌아가고 있다. 상황은 다시 나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흘러왔다. 악마는 자신이 만든 약관 때문에 곤란에 처한 것이다.
분명 계약 후 조건을 바꿀 수 없다는 조항은 악마 쪽에 더 유리하도록 만들어진 방책이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제 상황은 역전되었다. 더구나 이미 맺은 계약은 취소할 수도 없다. 그저 한쪽이 계약을 진행할 수 없을 경우에는 파기될 뿐.
쿵! 요란한 소리와 함께 악마의 머리가 그대로 테이블에 수직낙하했다. 무척 아플 것 같았지만 잠시 꼼짝도 하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너무 움직임이 없어 순간 기절했나 싶었지만 악마는 서서히 얼굴을 들었다. 그것도 이마에 분홍색 멍이 든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 반은 얼이 빠진 멍한 표정. 기운이 빠졌는지 삶의 의욕을 잃었는지 자포자기의 심정이 가득 담긴 헛웃음을 토해내었다.
“훗, 푸훗, 이런 일이 있나……. 제가 졌군요. 갑은 을의 세 번째 소원을 들어드릴 수가 없습니다. 계약은 파기되었고, 지금까지 들어드린 소원은 유효하면서 더이상 계약을 이행할 필요는 없어졌습니다. 고객님의 영혼은 자유로워졌고, 저는 악마들의 규율에 의해 처벌을 받게 되겠죠……. 이 사건은 상부에서도 중요하게 취급할 겁니다. 곧 약관의 수정이 이루어지겠죠.”
난 말없이 승자의 미소로 화답했다. 어차피 한 인간에게 찾아오는 악마는 평생 한 번뿐. 소원 두 개를 뒤탈 없이 이룬 것만으로도 내게는 충분한 축복이며 행복이 아닌가.
악마는 말없이 서류며 전자시계며 카메라를 서류가방에 쓸어 담고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실로 묶인 마리오네트처럼 힘없이 휘적이는 모습이 언제 넘어질지 몰라 위태로워 보였다. 나는 어쩔까 잠깐 망설이다가 마중을 나가듯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없이 스타벅스의 출입구를 향해 걸어가던 악마가 살짝 얼굴을 돌렸고, 죽은 고등어 같은 그의 눈동자가 행복과 승리감이 가득 담긴 생기 넘치는 나의 눈동자를 직시했다.
“악마와의 내기에서 이긴 사람…… 그에게 앞으로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을지…… 궁금하지 않습니까?”
뭐지, 이건? 이젠 심리전인가? 나를 불안하게 만들려는? 허나 그런 풋내기 같은 술수에는 안 넘어간다. 민담과 동화에서 악마를 지혜로 물리친 사람에게는 ‘그후로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결말만 남을 뿐이다. 내게는 흠 없는 두 가지 소원으로 완벽하게 보호를 받는 즐거운 미래가 보장되어 있다. 세상 어떤 보험도 비교할 수 없는 든든한 악마의 보살핌이라고나 할까.
악마는 뭔가 기대를 담은 표정으로, 그러나 여전히 생기 없는 눈동자로 나를 슬쩍 보더니 그런 수수께끼 같은 말만 남기고 스타벅스를 나갔다. 그는 대학가의 인파 사이를 스치며 지나갔고, 강물처럼 흐르는 자동차의 행렬에 쓸려가듯이 자취를 감췄다. 지금쯤은 아무리 뒤를 쫓아가려고 해도 찾지 못할 것이다. 어쩌면 그라는 존재 자체가 이미 이 세상 어디에도 남지 않은 후가 아닐까.
나는 자리로 돌아와 손도 대지 않은 채 차갑게 식은 악마의 커피잔과 반쯤 마시고 남은 내 커피잔을 바라보았다. 이를 제외하면 여기 어디에도 악마가 왔다 갔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외국 동화에서 언급하던 코를 찌르는 유황 냄새는 애초에 나지도 않았고 날카로운 손톱으로 긁어놓은 흔적 같은 것도 없었다.
그저 단 하나, 테이블 위에 검붉은 점 하나가 보였다. 아마 만년필에 피를 담다가 흘린 피 한 방울이겠지. 저건 나의 피일까, 아니면……? 문득 꺼림칙한 느낌이 들어서 고개를 돌려 노트북의 화면을 바라보았다.
「갔나요, 악마는?」
친구의 질문이 덩그러니 떠 있었다. 나는 굳어버린 듯 뻣뻣해진 손가락을 들어 천천히 자판을 두드렸다.
「갔어요. 완전히 저의 승리입니다.」
그런데 왜 이렇게 기분이 착 가라앉아 있는 걸까, 나는.
「축하드립니다. 당신은 제가 처음 만난 승리자예요. 악마와 대결해서 원하는 소원을 얻어내고, 자신의 영혼은 지켜냈다. 민담이나 전설이 되어 남을 만한 일이에요. 얼마든지 스스로를 자랑스러워 하셔도 돼요.」
「이건 다 님 덕분이에요. 님이 아니었다면 전 그냥 막무가내로 소원을 말했다가 파멸당하고 말았겠죠.」
여기까지 쓰고 나자 지금껏 잊었던 새삼스런 의문을 떠올렸다. 왜 그는 이렇게 친절하게 나를 도와준 것일까. 대가를 바란다면 진작 말했어야 했다. 악마를 이긴 지금까지도 그런 이야기를 한 마디도 비추지 않고 있는 것은 어째서일까. 다른 사람의 소원 성취를 통해 얻는 것은 무엇일까? 처음엔 호기심 때문이라고 말했는데 고작 그것만으로 충분할까? 그렇지만 용기가 없어서인지 본인이 원치 않는데 무리하게 캐묻고 싶지 않다는 생각에서였는지 내 손은 마음과 달리 에둘러서 말을 하고 있었다.
「저기, 님에게 뭔가 보답을 하고 싶어요. 한 번 만나 뵙고 싶은데 가능할까요?」
「그럴 필요는 없어요. 전 보답을 받으려고, 뭔가를 얻어내려고 당신을 도와준 게 아니니까요.」
「그럼 무엇 때문인가요?」
「글쎄요. 실은 저도 명확히 설명은 못하겠지만, 이런 대답은 어떨까요? 악마와의 내기에서 이겨서 행복해진 사람의 모습을 보고 싶은 이가 있다면? 악마가 져서 꼴사납게 도망가는 모습을 보고 싶은 존재가 있다면? 이 세상에 악마란 것이 정말 존재한다면, 그에 맞서는 쪽도 역시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그들은 너무 착하고 소심한데다가 물러 터져서 악마처럼 대놓고 사람들과 접촉하며 이 세상에 직접 개입하지는 못하지요. 그래서 고작 한다는 짓이 한 발 물러서서 적들이 망하기를 바라고만 있는 거예요. 그 꼴을 보다 못한 누군가는 그나마 한 발자국 더 나서서 참견이라도 하고 싶어지는 거죠. 자신을 대신하여 악마와 싸워줄 누군가를 위해 훈수 정도는 두고 싶은 마음도 들지 않겠어요?」
나는 멍하니 화면만 보고 있었다. 정말로 악마가 있다면 우리는 얼마나 불안하고 두려워하며 살아야만 할까. 하지만 이 세상이 이렇게 무사히 돌아가고 있다는 얘기는 악마만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할지 모른다. 악마와 반대되는, 악마를 물리치려는 선한 존재 역시 우리 주위에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종교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싶진 않지만 달리 부를 명칭이 없으니 그들을 천사라고 부르자.
이제 나는 악마의 존재를 믿는 만큼 천사도 믿을 수밖에 없다는 심정이었다. 증거는 얼마든지 있다. 바로 여기, 나라는 인간이 그 증거가 아니고 무엇일까.
「그럼 앞으로 행복하게 사시길 빌어요. 참, 님은 A의 연락처를 모르죠? 상대도 마찬가지일 거예요. 며칠 후에 A가 출연한 영화의 공개 시사회가 있다니까 꼭 참석하세요. 눈이 마주치는 순간 두 사람의 감정은 똑같아질 테니까 이후로는 일사천리겠죠?」
「잠깐만요. 님을 꼭 만나고 싶어요. 직접 뵙고 감사인사를 드리고 싶고요, 작게나마 사례도 하고 싶습니다.」
「말씀드렸듯 제가 바라는 건 인사치레 같은 게 아니에요. 굳이 당신이 저를 위해 뭔가 하고 싶다면 세상 사람들에게 말씀하세요. 천사니 악마니 하는 존재는 이 세상에 없다고. 소원을 이뤄주는 게시판은 가짜이니 믿지도 글을 쓰지도 말라고 말해주세요. 그러면 악마들은 영혼의 공급이 끊겨 파산할 테고, 제가 나설 일도 없어지겠죠. 자, 그럼 이만. 앞으로는 대화할 일도 없을 거예요. 안녕히 계세요.」
내가 더 뭐라고 하기도 전에 이미 그는 메신저를 나갔고 메시지를 보내도 회답은 없었다. 망연자실 화면만 바라보고 있을 때, 누군가 테이블 옆을 스치고 지나갔다. 창가에 앉아서 줄곧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여성이었다. 하지만 뒷머리가 길어서 여자라고 생각했을 뿐, 지나가는 옆모습을 보니 그 옷차림과 얼굴은 무척이나 중성적이었다. 하지만 깨끗한 피부와 또렷한 눈동자가 긴 머리카락과 어우러져 첫인상은 아름다운 여성이라는 느낌이었다.
그 신비한 외모와 갑자기 내 앞에 나타난 시기를 생각하니 결코 우연 같지 않았다. 나는 너무 놀라서 말을 걸고 붙잡으려고 황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하지만 막상 해야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아 “저……”하고 입만 여는 사이에 그는 어느새 스타벅스를 나가고 있었다. 잠시 보이지 않는 줄에 묶인 듯 꼼짝도 못하고 있다가 유리벽 너머로 그 모습이 사라진 후에야 주문에서 풀려난 듯 서둘러 쫓아나갔지만, 이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악마가 그랬듯 천사 역시 이 도시와 인파 속으로 녹아들듯 사라졌던 것이다. 세상 누구도 그들을 다른 평범한 사람과 구별해낼 수 없겠지.
허탈한 마음에 자리로 되돌아와 노트북의 전원을 끄고 가방에 넣었다. 그 순간 무심코 눈이 간 테이블 위에는 방금 있었던 핏자국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처음부터 그런 건 존재하지도 않았다는 듯이. 내 마음 속에는 소원이며 약관이며 악마와 천사 등 모든 것이 저 핏자국처럼 흔적도 없이 사라진 듯 후련한 기분만이 남아 있었다.
앞으로 나는 그 소원을 이루어주는 게시판의 존재를 한물 간 도시전설 취급하며 코웃음으로 넘기며 살겠지. 그렇지만 이 강렬한 체험을 결코 잊을 수도 부정할 수도 없음은 분명하다. 아마도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 이 모든 일이 흐릿한 추억이 되었을 무렵 나는 이곳으로 다시 오리라. 다행히도 이곳이 여전히 커피를 파는 곳으로 남아 있다면, 나는 악마처럼 검지만 천사처럼 순수한 커피를 마시며 마주앉은 내 반려자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리라. 믿어지니? 인터넷 어딘가에 소원을 이뤄준다는 게시판이 있었는데…….

 

(2007 /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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