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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로레스 클레이븐 오를레앙

2020.01.16 11:4401.16

오를레앙

돌로레스 클레이븐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이미 서슬 퍼런 칼날이 머리를 향해 날아들고 있었다. 오를레앙은 반사적으로 몸을 낮췄다. 그러자 칼날은 오를레앙의 머리가 있던 자리를 깔끔하게 가로 그으면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그 광경을 빤히 바라보던 오를레앙은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술기운에 휘청이고 있는 몸뚱이가 바닥에 굴러다니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는 냅다 소리부터 질렀다.

“뭐야! 임야?”

임마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른 저녁부터 마신 술 덕에 혀는 점점 꼬부라졌다.

“넌 뭐하는 자식이야? 이 새벽에 뭐하는 짓이야?”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대신 쇠붙이가 유기적으로 맞물리는 소리와 찰랑거리는 사슬 소리가 어둠 속을 비집고 다가오고 있었다. 낯익은 소리에 오를레앙은 어둠 속을 노려보면서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그러자 어둠 속에 숨은 암살자는 천천히 술집 정문 옆에 걸어둔 횃불 아래로 걸어 나왔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얼굴 전체를 가린 투구였다. 전체적으로 길쭉하게 생긴 데다 정수리 윗부분이 둥그스름하게 마감질 된 흔한 물건이었다. 특이한 점은 인중과 콧대, 그리고 살기 어린 두 검은 눈구멍 아래를 가로질러 세공된 십자가 정도였다.

그 투구 아래로 목을 감싼 비버(목 방어구)가 매끄럽게 흉갑으로 이어졌다.

날렵하면서도 육중한 흉갑은 놈의 허리를 따라 흘러내렸다. 배를 가린 플라카트가 옆으로 뒤틀리기 무섭게 놈은 횃불 아래로 걸어 나왔다. 그러자 아랫배를 가린 사슬갑옷이 철렁이면서 밤의 커튼을 헤치고 이글거리는 은빛 다리가 드러났다. 횃불로 달구고 새벽빛으로 벼려낸 쇳덩이는 그렇게 어둠 속을 해치고 나왔다.

놈은 제 실력을 과시하듯 오른손에 쥔 장검을 가볍게 휘둘렀다. 양어깨를 따라 여러 개의 쇳조각들을 이어붙인 스파우들러가 철렁거리자, 팔꿈치를 가린 거대한 카우터와 팔뚝을 감싼 맴브레스가 은색의 존재감을 과시했다. 검은 빙그르 돌아 사뿐하게 허공을 내리긋고 멈춰 섰다. 그러자 두 사람을 감아 지난 바람결에 횃불이 흔들렸다. 그 아른 거리는 불길을 따라 갑주는 한층 더 차갑게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지옥문을 지키는 종말의 기수들처럼.

“뭐야, 넌 누구냐?”

천천히 뒷걸음질 치던 오를레앙은 야밤에 자신을 습격한 비열한 개자식에게 쏘아붙였다.

“이런 면상 썩을 놈 같으니. 대결을 원하면 정정당당히 얼굴을 드러내라!”

이번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대답은 고사하고 놈은 한 손으로 쥐고 있던 장검을 들어올려 천천히 자세를 잡았다. 오른쪽 어깨위로 올라가는 칼자루를 따라 두 손목이 서로 교차했다. 곧게 뻗은 검이 불빛 사이로 걸어 나왔다. 동시에 칼자루에 수직으로 뻗어 나온 뾰족한 크로스가드가 하늘과 땅을 가리켰다.

횃불 아래 벼려진 장검은 마치 물소의 뿔처럼 곧고 날렵하게 오를레앙의 가슴을 향했다. 오를레앙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잽싸게 오른손을 뒷짐에 숨기면서 천천히 어둠 속으로 녹아들었다.

“이봐, 나한테 무슨 원한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우리 이럴 게 아니라 술집에 좀 들어가지? 저 집 주인이랑 내가 꽤나 친하거든? 그러니까…….”

오를레앙은 더 이상 말을 이어갈 수 없었다. 이미 암살자의 검이 오를레앙의 가슴을 향해 맹렬하게 달려들고 있었다. 피할 순간은 없었다. 그렇다고 막을 수도 없었다. 고작해야 린넨 셔츠만 걸친 그의 가슴은 포크에 찍힌 고기처럼 처참하게 꿰뚫릴 것이 뻔했다. 하지만 오를레앙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뒷짐에 숨기고 있던 단검을 꺼냈다. 그리곤 칼자루 위에 달린 크로스가드와 칼날로 가슴을 향해 달려드는 장검을 올려 쳤다. 맹렬히 달려들던 장검은 단검에 밀려 왼쪽 어깨 위쪽을 빠르게 가르고 지나갔다. 오를레앙은 곧장 이 부도덕한 암살자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는 재빨리 왼손을 뻗어 놈의 오른손을 잡아 올렸다. 검을 휘두를 때 힘을 주는 오른손을 잡아챈 이상 놈의 검은 이빨 빠진 호랑이에 불과했다. 이제 남은 건 오를레앙의 단검이 놈의 목구멍을 쑤시는 일 뿐이었다.

하지만 오를레앙의 단검이 암살자의 목구멍을 파고들 수 없었다.

칼자루를 잡고 있던 놈의 왼손이 오를레앙의 단검을 잡아챈 것이다. 두꺼운 건틀렛의 손바닥을 감싼 가죽 장갑이 오른손을 감아쥐자 오를레앙은 투구에 뚫린 검은 눈구멍을 노려보았다. 검은 눈구멍 아래 반짝이는 눈동자가 오를레앙의 시선 속을 스쳐갈 즈음.

놈은 무릎을 가슴언저리까지 들어 올려 오를레앙의 배를 밀어 찼다. 묵직한 한방에 오를레앙은 저항 한 번 못하고 뒤로 나동그라졌다. 심지어 뒤로 한 바퀴 구르면서 나가떨어진 터라 얼굴까지 화끈거렸다. 하지만 부끄러워 할 때가 아니었다. 살아남는다면. 살아남을 수만 있다면 그는 이보다도 더 추하게 살아남을 자신이 있었다. 과거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그럴 터였다.

그렇기에 오를레앙은 정신을 꼭 붙들었다. 그는 곧장 놈의 투구를 향해 단검을 던졌다. 단검이 투구를 때리고 사라지자 탁한 쇳소리가 들판을 가득 매웠다. 오를레앙은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그는 잽싸게 자리에서 일어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냅다 달리기 시작했다. 곧이어 쇳소리가 따라붙었지만 자비로운 밤의 여신은 횃불 너머의 모든 것을 가려주고 있었다.

 

이른 저녁 즈음. 주점 안의 작은 나무 바에서 오를레앙은 술잔을 기울였다.

큼지막한 나무잔에는 누런 벌꿀술이 출렁이고 있었다. 거품이 조금 일었고 그 안에는 죽은 파리가 둥둥 떠 있었다. 하지만 오를레앙은 개의치 않았다. 역병의 기수가 내린 가호아래 그는 파리를 건져 내고서 벌꿀술을 들이켰다. 알싸한 술기운이 입안을 마비시켰다.

“대장, 내 말 듣고 있는 거유?”

아담한 바 테이블 옆에 서있던 토렉스가 살찐 얼굴을 씰룩이면서 말했다.

“거 꿀술만 마시지 말고 안주도 좀 섞어가며 마셔. 그러다 속 버려.”

“버리긴 뭘.”

오를레앙은 투덜거리면서 벌꿀술을 꿀떡꿀떡 목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빨 사이로 게트림이 비집고 나오자 토렉스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정보원들 풀어서 돈 될 만한 곳을 알아봤어. 소식통에 따르면 영국 놈들이 곳곳에서 마을을 불태우고 다닌다나봐.”

“이런, 젠장. 경쟁업자가 하나 더 늘었구먼.”

오를레앙이 시시덕거리자 테이블 너머에 술잔을 따르고 있던 엠마는 한숨을 쉬었다. 그녀는 두툼하고 새하얀 팔뚝으로 나무통에 담긴 술을 하나 가득 퍼와 오를레앙의 잔에 그득히 따라 주면서 비아냥거렸다.

“하, 아주 좋으시겠어. 오를레앙. 약탈 업계가 날로 번창하니 말이야.”

“엠마. 이건 그냥 ‘돈 안주고 빌려오는 일’이에요. 요즘 뜨고 있는 사업이죠. 저희는 그냥 영국 놈들이 가져가서 배때기 채우기 전에 먼저 물건을 선점하는 투철한 애국자라고요.”

“하, 퍽이나. 근데 이번 술값으론 뭘 낼 거야? 돼지? 아님 닭?”

“갑옷이랑 비단. 그리고 무기들. 전부 한 50자루 정도. 대장장이에게 팔든 하세요.”

어련하시겠어? 엠마는 푸념하듯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토렉스가 입을 열었다.

“어쨌든 간에 대장. 아무래도 그 ‘돈 안주고 빌려오는 일’은 이젠 좀 하향세인거 같아. 그래서 말인데 이제부터 우리도 용병으로 뛰어보면 어떨까? 일단 머릿수도 되겠다. 그냥 서 있다가 뒤로 빠지고 돈만 받아먹는 거지.”

“그래. 계약직 조오치. 근데 그런 꼼수 부리면 목 달아나. 나 군대에 있을 때 여럿 봤어.”

오를레앙이 살짝 꼬부라진 혀를 굴리자 토렉스는 뻘줌하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어쨌든 뭐, 이제 슬슬 합법적인 일을 해야 할 때가 됐다 이정도로 들어줬으면 해. 아무래도 전쟁도 다 끝나가는 거 같으니까. 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이건 대장일인데.”

토렉스는 뚱뚱한 얼굴을 오를레앙에게 들이 밀고서 말했다.

“대장. 아무래도 누가 대장 뒤를 밟고 다니는 거 같아.”

“날?” 오를레앙은 또다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토렉스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주위를 살폈다. 다른 놈팡이들이 술 마시고 노래 부르는 데 정신 팔린걸 확인하기 무섭게 토렉스는 조용히 말했다.

“우리가 전에 투렌 근처 마을에서 묵은 적이 있잖아? 근데 우리가 떠난 지 사나흘 정도 있다가 한 사람이 찾아와서 대장을 찾더래. 혹시 몰라서 우리가 온 방향과 정 반대 방향을 가리키면서 거짓부렁을 흘렸는데. 어찌 알았는지 나중에 다시 와선 칼부터 겨누더라는 거야. 그래서 이번엔 하는 수 없이 주인 놈이 우리 동선을 알려줬대.”

“그 거지 같은 새끼는 누구야? 산골짜기 줄리앙이야? 아님 길거리 위고 놈이야?”

“위고. 어쨌거나 놈이 떠나기 전에 남긴 말이 있대. ‘발랑송이 널 쫒고 있다. 모가지 닦고 기다려라.’던데. 근데 발랑송이 뭐야? 난 처음 듣는 데.”

오를레앙은 잠시 동안 토렉스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마치 유령이라도 본 사람처럼 새파랗게 질린 그는 잠시 술잔을 들었다 내려놓았다. 그는 숨을 고르고서 중얼거렸다.

“바, 발랑송? 젠장. 발랑송이라고?”

취기가 오른 오를레앙은 손으로 얼굴을 뭉갰다. 그리곤 갈라진 목소리로 한껏 성을 냈다.

“거기에 내 누이가 살았는데……. 르네……. 영국놈들이……. 클로에, 장……. 젠장.”

인상을 찡그린 오를레앙은 얼굴을 쓸어내리곤 피곤에 절은 시뻘건 눈을 부라렸다.

“그 새끼 뭐하는 새끼야? 남자야, 여자야?”

“글쎄, 투구를 뒤집어 쓴데다 목소리가 아주 흉하게 갈라져선 남자인지 여자인지 모른다던데. 근데 말이야. 대장. 대장을 찾는 놈이 누구인지는 대장이 더 잘 알지 않겠어?”

오를레앙이 눈을 부릅뜨자 입만 산 지방덩어리 자식은 지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자자, 어서 가슴에 손을 올려봐. 혹시라도 우리 몰래 누굴 해치거나 뭐, 교회에 지탄받을 일 한적 있지? 불륜이나 사생아나. 아니면 남자친구라든가.”

오를레앙은 입꼬리를 늘어뜨리곤 개처럼 으르렁거렸다. 그러자 머리를 긁적이던 토렉스는 어깨를 으쓱거리면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정작 오를레앙의 귓가에 먼저 날아든 것은 토렉스의 목소리가 아닌 술에 취한 거렁뱅이들의 고함이었다.

오를레앙은 소리가 난 곳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부하라고 부르기도 민망한 두 거렁뱅이가 맨바닥에서 서로 뒤엉켜 싸우고 있었다. 악취가 코를 찌르는 두 놈을 중심으로 욕설과 그릇이 사방에 쏟아졌다. 그 광경에 놀란 벙어리 가브리엘은 사내놈들을 말리려고 애를 썼다. 하지만 술 취한 후레자식들은 벙어리의 몸짓 따윈 아랑곳하지 않았다. 노인이 바닥에 쓰러지자 기분이 상한 오를레앙은 언성을 높였다.

“죄다 아가리 닥치지 못해? 이 쌍놈들아?!”

오를레앙은 테이블을 주먹으로 내리치면서 소리쳤다. 그러자 술집 안은 고요해졌다. 그릇이 떨어지는 소리나 모닥불에서 튀어나온 불을 끄기 위해 발길질하는 소리를 제외하고 누구하나 기침소리 조차 내지 못했다. 오를레앙은 눈을 부라리면서 자리에서 일어섰다.

“썩을 놈의 자식들아. 잘 처먹었으면 적당히 놀아야지 이게 뭔 소란이야? 엉? 지금부터 사람소리 입 밖으로 내기만 해. 아주 그냥 대가리를 쪼개버릴 테니까.”

그의 물음에 숙연한 대답이 돌아왔다. 오를레앙은 수염을 쓸어내리면서 사기가 꺾인 부하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러다가 오밤중에 단검을 들고 오를레앙의 침실에 몰래 들어 올법한 눈초리들이었다. 예전 같았다면 오를레앙은 이 잡놈들의 눈알을 뽑아서라도 오를레앙은 누런 이빨을 드러내면서 소리쳤다.

“지금 당장. 다들 마을로 꺼져. 알겠냐? 마차 끌고 마을에 내려가서 뭘 처먹든 사창굴에 가서 면상에 낙인찍힌 애들이랑 구르든 마음대로 해!”

오를레앙의 고함이 잦아들기 무섭게 싸늘해졌던 분위기는 다시 후끈 달아올랐다. 감당 할 수 없이 너저분한 말들 속에서 다시 플루트 소리가 주점 안을 재잘거렸다. 서로 치고 박느라 코피까지 흘리고 있던 두 거렁뱅이들도 어깨동무를 하고서 주점을 빠져나갔다.

오를레앙은 조용히 바에 앉아 술잔을 기울였다. 그러자 토렉스는 헛기침을 했다.

“있지 대장. 음, 일단 내 용건도 끝났긴 한데 뭐, 더 듣고 싶은 거 없지? 그렇지?”

오를레앙은 문간 쪽으로 슬금슬금 움직이고 있는 토렉스를 바라보았다. 그는 한숨을 내쉬면서 고개를 저으면서 가보란 듯이 손짓했다. 그러자 토렉스는 뒤도 안돌아보고 문간을 박차고 뛰어나갔다. 이제 술집에 남은 것은 술집주인 내외와 오를레앙. 그리고 고요함뿐이었다. 오를레앙은 고요함과 건배를 나누면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병신들.”

 

그렇게 동틀 녘이 되자 오를레앙은 그 병신들이 그리워졌다.

만일 그 병신들이 있었다면 밖에 오줌 갈기러 나왔다가 도망을 치지 않아도 될 터였다. 일단 소리만 쳐도 애들이 우르르 몰려나와 갑옷 입은 놈을 패대기쳤을 테니까. 하지만 마을로 내려간 놈들이 돌아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아마 별다른 일이 없다면 평소처럼 동이 틀 무렵에나 그 꾀죄죄한 면상을 들이밀 게 뻔했다.

오를레앙은 이를 갈았다. 하지만 냉철한 시점에서 그는 전술적인 측면에선 암살자보단 압도적인 우위에 서있었다. 일단 놈은 혼자였다. 만일 다른 놈들이 있었다면 주점 정문에서 그는 화살세례에 벌집이 되었거나 곧바로 뒤를 잡혔을 터였다. 하지만 따라붙는 발소리도 부산히 움직이는 인기척도 없었다.

거기다 그는 이 주점 근처의 지리를 잘 알고 있었다. 주점의 언덕을 따라 한 조금 걷다보면 작은 강이 있었다. 거긴 돌과 진흙이 많았다. 여차하면 어둠에 몸을 숨기고 그곳까지 달려가서 진흙을 던지면서 농성을 벌일 수도 있으리라. 하지만 그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를레앙은 조심스럽게 귀를 쫑긋 세우곤 몸을 낮췄다. 쇳소리는 없었다. 풀을 밟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따돌린 건가? 그는 어둠 속을 잠시 응시하다 쥐새끼처럼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그는 주점 뒤편으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이봐, 가브리엘! 가브리엘!”

오를레앙이 조심스럽게 문을 두드리기 무섭게 나무문에 달린 조그만 눈구멍이 벌컥 열렸다. 그곳에는 노인의 흐릿한 푸른 눈이 오를레앙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브리엘. 문 좀 열어줘! 미친놈이 날 죽이려한다고.”

그러자 가브리엘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옆에 있던 엠마가 녹색 눈을 내비쳤다.

“오를레앙? 이게 대체 무슨 일이야?”

“나도 몰라요. 엠마. 그러니까 어서 문 열어요.”

“그럴 순 없어. 너도 알잖아. 우리 술집에선 칼질은 금지야.”

“뭐요? 그러니까 지금 단골손님더러 얼굴도 모르는 개자식 칼에 맞아 죽어라 이 소릴 하는 거예요? 세상에. 마을 인심 다 어디 갔어요?!”

오를레앙이 말하자 엠마는 말없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망할망할망할.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던 오를레앙은 문뜩 정문에 횃불을 떠올렸다. 한 번 들판에 불을 지르겠노라 협박이라도 해볼까 싶었다. 하지만 오랜 시간 알고 지낸 사람들에게 험한 모습을 보이는 것은 별로 현명한 선택이 아니었다. 자칫하다간 오를레앙 본인과 패거리들이 모든 마을의 공공의 적이 될 수도 있었다. 오를레앙은 숨을 가다듬었다.

“그래요. 알겠어요. 엠마. 그러면 내 방에서 검을 집어다 줄 수는 있죠? 그쵸?”

“그래. 그건 할 수 있지. 가브리엘. 가서 칼 좀……. 오를레앙!”

오를레앙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희미한 달빛 사이에서 반짝이는 장검이 오를레앙에게 달려들었다. 오를레앙은 반사적으로 땅바닥을 굴렀다. 그러자 검은 문간 언저리에 박혔다. 암살자는 나무 문짝에 박힌 자신의 장검을 뽑아들고 오를레앙에게 다가왔다. 놈은 손목 반동을 이용해 검을 빙그르 휘두르면서 오를레앙을 위협했다.

오를레앙은 천천히 뒤로 물러섰다. 그는 갑옷 속에 숨은 비겁한 놈의 눈구멍과 주점의 뒷문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아직도 주점 뒷문은 미동도 없이 우두커니 서있었다. 오를레앙은 슬쩍 옆으로 사뿐히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찰랑이는 소리와 함께 놈도 오를레앙의 앞을 막아섰다. 아무래도 문 쪽으로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인 듯 했다.

“아주 명예라곤 모르는 녀석이로군. 무고한 사람에게 칼을 겨누다니.”

오를레앙은 말없는 암살자에게 계속해서 말을 걸었다.

“네 놈이 벙어리가 아니란 건 잘 안다. 뛰면서 기억이 났거든. 네가 나 찾아다니던 놈이지? 너 뭐하는 새끼야? 왜 발랑송 얘기는 왜 꺼낸 거냐? 엉? 너 누구야?”

침묵으로 일관하던 암살자는 검을 휘둘렀다. 비스듬히 왼쪽으로 날아든 칼끝이 오를레앙의 코를 스쳐갔다. 오를레앙은 엉거주춤하게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놈이 한 번 더 검을 휘두르기 위해 오른쪽 손등을 내비치자 오를레앙은 곧장 놈에게 달려들었다. 그리곤 순간적으로 왼손을 뻗어 자신을 올려 베려고 벼르던 놈의 오른쪽 팔꿈치를 눌렀다. 놈의 검이 잠시 멈칫거리는 사이. 오를레앙은 곧장 놈의 품속으로 몸을 던졌다. 그리곤 플레이트 메일을 온몸으로 감싸 안았다.

오를레앙의 몸뚱이를 정면에서 받아낸 철갑은 멀쩡했다. 조금의 흠칫도 구부러지는 낌새도 찾아 볼 수 없었다. 하지만 제아무리 튼튼한 갑옷을 입었다고 해도 안에 든 것은 결국엔 사람이었다. 오를레앙의 무게를 이기지 못한 놈은 철갑과 함께 바닥을 굴렀다. 칼자루는 손을 떠나 바닥을 굴렀다. 뒤로 처진 고개가 천천히 얼굴을 쳐들었을 즈음. 자리에서 일어난 오를레앙은 달음박질했다.

그는 빼꼼 열린 문틈 사이로 장검이 튀어나와 땅바닥 위에 나뒹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곧이어 갑옷에서 흘러나온 쇳소리가 화살처럼 귓가에 날아들었다. 놈이 따라붙고 있었다. 오를레앙은 젖 먹던 힘을 다해 몸을 던졌다.

땅바닥을 구르는 바람에 이파리 몇 개가 머리카락에 들러붙어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겨를은 없었다. 그는 오른손에 거머쥔 검을 추켜올렸다. 그리곤 곧장 뒤를 돌아보면서 등 뒤에서 날아든 검격을 처냈다.

놈의 칼날이 어둠 속에 녹아들기 무섭게 오를레앙은 왼손으로 손잡이를 잡아챘다. 잠시 방향을 잃었던 검에 중심을 잡은 그는 곧장 칼날을 눕혀 놈의 투구를 겨눴다. 날카로운 칼끝이 금방이라도 투구의 눈구멍을 후벼 팔 듯 달빛 아래 번뜩거렸다.

천천히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오를레앙은 천천히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암살자도 오를레앙을 끼고 왼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 어둠 속에서 튀어나온 칼날이 곧장 오를레앙의 검을 옆으로 쳐냈다.

검이 왼쪽으로 튕겨나가자 오를레앙은 칼자루를 가슴 쪽으로 끌어당겼다. 이대로 놈에게 끌려갈 순 없었다. 그는 빠르게 몰아치는 암살자의 호흡에 맞춰 검을 휘둘렀다. 두 사람의 검은 정면에서 맞부딪혔다.

한 치의 양보도 없는 짧은 힘 싸움 끝에 오를레앙은 놈에 대해 몇 가지 사실을 알아차렸다. 우선, 놈은 팔 힘이 좋지 못했다. 거기다 갑옷에서 몰칵 풍기는 미묘한 지린내까지 풍기고 있었다. 아마도 오랜 기간 갑옷을 입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오를레앙은 자신의 승리를 직감했다. 시간은 그의 편이었다. 아무리 새벽이라고 하나, 체력도 약한 이가 다루기에 중무장한 갑옷은 무척이나 무겁고 거추장스런 물건이었다. 거기다 움직일수록 조여드는 숨소리에 시야가 흐려질 터였다. 그 틈을 노려야 했다.

하지만 놈이 지치도록 유도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우선 놈은 연속으로 사과 깎듯이 연속으로 배어내는 기술을 사용하고 있었다. 분명 섬놈들의 검술이었다. 중단으로 잡은 검이 순식간에 몸을 한 바퀴 돌아 머리 위를 가르고 사라졌다.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일격에 오를레앙은 일보 전진하고 일보 후퇴할 수밖에는 없었다.

오를레앙은 흔들리는 이빨을 꽉 물었다. 몸이 무거웠다. 걸음을 땔 때마다 노쇠한 몸이 묵직하게 그의 몸을 붙잡았다. 만일, 그의 몸이 한창 전성기 때처럼 날고 기었다면 아마도 싸움은 몇 분 내로 끝이 났을 터였다. 지금 당장만 해도 놈의 공격이 좌절될 때마다 오를레앙은 검을 비틀어 곧장 놈의 갑옷을 긁어대지 않았던가? 하지만 오를레앙의 일격은 고양이가 성벽을 할퀸 것 마냥 줄줄이 튕겨져 나왔다. 갑옷의 틈새를 노려야 했건만.

시간은 그에게 경험이란 선물을 남긴 대신 정확성이란 축복을 앗아가 버렸던 것이다.

제길. 오를레앙이 입술을 깨물던 그때. 호시탐탐 오를레앙을 노리던 암살자의 검이 달려들었다. 그는 급하게 아래로 쳐진 검을 들어올렸다. 허나, 놈이 더 빨랐다. 칼자루 윗부분에 자리한 크로스가드가 오를레앙의 팔뚝을 순간적으로 밀쳐낸 것이다. 팔이 베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한순간에 방어태세가 무너진 터라 오를레앙은 경악스런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거기다 팔뚝을 가로지른 칼날은 순식간에 까만 밤의 품으로 사라졌다.

오를레앙은 이미 칼날이 어디로 향할지 알고 있었다. 그의 오랜 경험이 뒷목에 흘러내리는 서늘한 한기를 앞세워 에둘러 강조하고 있었다. 허나, 문제는 시간이었다. 시간 안에 놈의 일격을 막을 수 있을까? 초조하게 입술이 타들어갔다. 팔뚝은 금방이라도 굳어버릴 듯이 경련을 일으켰다. 작아지는 동공 속에서 오를레앙은 흐름에 몸을 맡겼다.

그는 왼다리에 체중을 실었다. 그리고 몸을 오른쪽으로 돌리면서 동시에 왼팔에 힘을 뺐다. 왼손이 칼자루를 놓기 무섭게 칼자루를 쥔 오른손이 목덜미를 따라 뒤로 넘어갔다. 어깨에 걸려 비스듬히 돌고 있는 서늘한 크로스가드가 턱을 스쳐지나 목덜미를 눌렀다. 그러자 칼날이 뱀처럼 어깻죽지를 가로질러 왼쪽 옆구리를 향해 머리를 쳐들었다.

마침내 다음 순간이 오를레앙에게 달려들었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금방이라도 목덜미를 저미고 지나갈 기세로 흘러내렸다. 오를레앙은 머리털을 바싹 세웠다. 등을 찍어 내리는 가느다랗고 묵직한 감각이 쇳소리와 함께 목덜미를 떠난 순간. 오를레앙은 칼자루를 머리 위로 넘겨 놈을 겨

칼끝이 다시 자신을 향하자 암살자는 검을 목뒤로 넘겼다. 그리곤 머리 위로 검을 휘두르면서 다가왔다. 놈은 오를레앙의 오른편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놈의 검이 오른쪽 어깨를 향해 내리 꽂히자 오를레앙은 곧장 놈의 검을 받아쳤다. 거의 수평하게 맞부딪힌 두 자루의 검이 서로의 몸을 갉아댔다. 그러자 순간적으로 엉덩이를 뒤로 뺀 놈은 다리를 쳐들어 오를레앙의 배를 밀어 찼다.

그 바람에 오를레앙은 힘없이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예상 못한 수는 아니었지만 노쇠하여 힘이 빠진 다리가 버티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은 넘어져 있을 때가 아니었다. 이미 하늘 위로 치솟은 검이 땅바닥을 향해 내리꽂히고 있었다.

오를레앙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언덕배기 아래로 몸을 던졌다. 살짝 경사가 진 비탈길을 따라 구르기 시작한 오를레앙은 등허리를 살짝 웅크린 채 입술을 깨물었다. 낙법을 배웠지만 돌부리에 차인 몸뚱이가 비명을 질렀다. 돌멩이가 입가를 때리고 지나가는 바람에 오를레앙은 입안에 피까지 머금어야 했다. 입안에서 으깨진 벌레의 쓴맛이 스멀스멀 올라오자, 오를레앙은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랬듯 그에겐 어떤 선택지도 없었다.

 

오를레앙은 가끔 이 모든 게 다 꿈일 거라 생각하곤 했다.

어쩌면. 이 악몽에서 깨어나기만 한다면. 그는 솔레이유라는 어느 작은 마을의 촌장집 아들이 되어 있을 지도 몰랐다. 아침이면 아버지와 함께 마을 주변을 돌고 점심 즈음에는 사람들과 밭을 맸다. 저녁이 되어 햇살이 붉게 물들고 나면 그는 가족들과 저녁을 먹었다. 장과, 피에르, 그리고 클로에가 재잘거린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끓여주신 돼지 내장 스프를 둘러싸고 떠들썩하게 그릇을 비웠으리라.

이제 늦은 밤이 되면 돼지고기 남은 것을 안주삼아 아내와 함께 술잔을 기울이고서 잠을 청했을 것이다. 그의 아내인 르네가 갈색머리카락을 입에 물고 잠을 청하는 모습은 여전히 사랑스럽게 새근거렸다. 그리고 늦은 밤이 되면 두 사람 사이엔 7살 먹은 클로에가 뛰어 들어온다. 침대 밑 괴물을 무서워하던 아이는 나이에 맞지 않게 어리광을 부리다 잠이 든다. 그러다 밤이 깊어지고 어두운 밤마저 잠이 들 적에. 그 아이는 오를레앙을 닮은 금발머리를 배배 꼬면서 잠꼬대를 부린다. 가끔은 이빨도 갈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평화로운 나날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오를레앙은 그 날을 똑똑히 기억했다. 새벽잠에서 깨어나 창밖을 바라보던 오를레앙의 눈에 깃발 하나가 보였다. 하얀 백합문장이 그려진 깃발은 서서히 마을 어귀로 다가오고 있었다. 오를레앙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그냥 지나가는 프랑스군인가 싶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아침이 오기 전에 마을 안으로 들어와 촌장 집 대문을 두드려 댔다.

제일 처음 문을 연 사람은 오를레앙이었다. 문을 열자 도끼날과 갑옷의 물결이 문 앞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들은 곧장 오를레앙에게 촌장이 어디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낮선 목소리에 방에서 나온 아버지는 오를레앙 대신 자신이 촌장이라고 말했다.

오를레앙이 옆으로 비켜서기 무섭게 군인들은 아버지에게 군량미를 요구했다. 그들에겐 영주님의 칙령이 적힌 칙서가 있었다. 군인들은 방해하는 이를 나무에 매달아도 좋다는 칙령을 소리 내어 읽어 내려갔다. 그리곤 거절해봐야 좋을 것이 없노라 으르렁거렸다. 하는 수 없지. 그의 아버지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마을 곳간을 열었다. 그러자 놈들은 그 안에 든 모든 것들을 수레에 실었다. 다음해에 심을 낱알까지도 그들은 탐욕스럽게 주워 담았다.

백합문장은 늦은 점심 즈음에 마을을 빠져나갔다. 곳간은 텅 비었고 남은 것이라곤 사람밖엔 없었다. 마을 사람들은 망연자실하게 멀어져 가는 프랑스군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날 저녁이 닥치자 이번엔 커다란 활과 검들의 물결이 온 마을을 덮쳤다. 그들의 머리 위엔 사자의 붉은 깃발이 천천히 나부끼고 있었다. 영국에서 온 놈들이었다. 그들은 프랑스군처럼 군량미를 요구했다. 하지만 당장에 우리 입에 풀칠한 거리도 없었기에 오를레앙의 아버지는 섬에서 온 영주에게 무릎까지 꿇고 빌었다. 그러나 영주에겐 자비란 없었다.

오를레앙의 아버지는 그 자리에서 목이 떨어졌다. 곳곳에서 솟아오른 불화살이 불씨를 사방에 퍼뜨리고 다녔다. 그것은 학살이었다. 검과 화살이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사방에 피를 흩뿌렸고 밭은 불길에 휩싸였다.

오를레앙은 그 불길 속을 간신히 빠져나올 수 있었다. 어떻게 나왔는지는 몰랐다. 그냥 달렸고 달리다 보니 숲이었다. 그의 손엔 아내인 르네와 울고 있는 클로에, 장이 함께 있었다. 하지만 피에르는 없었다. 뒤에서 날아든 화살 하나가 클로에를 챙기던 피에르를 잡아채간 터라고 르네가 말했다. 하지만 누구도 그 지옥 속으로 걸어 들어갈 엄두를 내지 못했다. 울음을 터뜨릴 생각조차도 할 수 없었다. 이미 두 부부의 머릿속에는 남은 두 아이들만이라도 살려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다음 날이 밝기 무섭게 오를레앙은 곧장 발랑송으로 향했다. 루앙성 근처 작은 촌락인 그곳엔 그의 누이가 살고 있었다. 그는 누이에게 가족들을 맡기면서 말했다. 당장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으며 한동안 고모에게 신세지더라도 언젠가 다시 만날 거라고. 하지만 누구도 그 말을 믿지 않았다.

장은 오를레앙이 가족들을 버린다 여겨 아예 집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르네는 창백한 얼굴로 애써 웃었지만 그녀의 얼굴엔 이미 깊은 그늘이 져있었다. 오를레앙은 한숨을 쉬었다. 허나, 자기 자신도 자신의 말들을 믿지 않았기에 그는 누구도 원망하지 않았다.

오를레앙은 아직도 제 어미의 치마를 붙잡고 울던 딸아이의 얼굴을 선명히 그릴 수 있었다. 살짝 뭉뚝한 콧날 아래로 오똑하게 선 코는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래로 축 처진 입술을 따라 입가에 박힌 점이 입술 언저리에서 똑 떨어질 듯 일그러졌다. 오를레앙은 발랑송 어귀에서 딸아이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아이는 엄마 손에 이끌려 집안으로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이 가족들과 함께 한 마지막 순간이 되었다.

 

얼마나 굴렀을까? 바닥에 멈춰선 오를레앙은 고개를 쳐들었다. 귓가엔 강물 소리가 흘러들고 있었다. 뒤를 돌아보니 코앞에 돌다리 하나가 눈에 띠었다. 한순간에 여기까지 밀려나다니. 자리에서 일어난 오를레앙은 부러진 이빨과 쓴 맛이 나는 벌레를 뱉어냈다. 그리곤 만신창이가 된 얼굴을 손으로 뭉갰다. 뺨과 머리 부근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거기다 허리와 어깨는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를레앙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에게 있어 당장 팔뚝이 분질러지지 않은 것만도 천운이었다.

하지만 천운을 감사할 시간은 없었다. 쇳소리가 귓가를 채찍질하자 오를레앙은 뻐근한 고개를 쳐들 수밖엔 없었다. 그는 멀찍이 다가오는 암살자를 바라보며 천천히 바닥에 떨어진 검을 집어 들었다. 그리곤 사납게 달려든 암살자의 검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정말이지 불공평하군. 오를레앙은 씁쓸하게 갑옷을 입은 놈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정말 불공평해.

검이 정수리를 향해 떨어지자 오를레앙은 곧장 놈의 일격을 쳐냈다. 그리곤 오른편으로 폴짝 뛰면서 오른손을 쭉 뻗어 놈의 투구를 칼끝으로 찔렀다. 칼끝이 투구에 뚫린 눈구멍을 스치자 놈은 엉거주춤 뒤로 물러섰다. 당장 얼굴로 날아드는 일격을 무시하는 바보는 없지. 오를레앙은 생각했다. 조금이나마 시간을 번 그는 곧장 왼손을 뻗어 검의 중간부분을 손에 쥐었다.

딱히 어깨나 허리에 부담을 줄이는 자세는 아니었다. 하지만 갑옷 입은 놈이 자세를 무너뜨리기에는 좋은 자세였다. 여차하면 아예 검을 거꾸로 쥘 수도 있었다. 그리고 손잡이 끝에 달린 무게추로 놈의 머리를 후려칠 수도 있었다.

오를레앙이 자세를 가다듬기 무섭게 놈은 검을 날렸다. 오를레앙은 더 이상 놈과 검을 섞지 않았다. 적당한 거리에서 치명적인 일격만 막아낸 그는 곧장 칼자루를 쥔 오른손까지 칼날로 옮겨갔다. 그리곤 있는 힘껏 거꾸로 쥔 검을 휘둘렀다. 왼손에 파묻힌 칼날이 묵직하게 왼손을 잡아당겼다. 오른손은 칼날을 따라 흘러내렸고 칼자루가 유유히 밤하늘을 가르고 지나갔다. 방해는 없었다. 그저 칼자루 끝에 달린 큼지막한 무게추가 암살자의 투구를 때리고 지나갔을 뿐이었다.

맑은 소리와 함께 암살자는 자리에서 주춤거렸다. 투구 사이로 뜨거운 숨소리가 탄식처럼 터져 나왔다. 자세히 보니 눈두덩 쪽을 가린 투구가 살짝 안쪽으로 꺼져 있었다. 어때? 해골이 짓이기는 것 같지 않나? 오를레앙은 속으로 으스대면서 숨을 헐떡였다. 허나, 놈은 멈춰서진 않았다. 놈은 계속해서 오를레앙을 몰아쳤다. 왼쪽, 오른쪽 그 다음엔 다시 오른쪽으로 휘몰아치는 칼날은 오를레앙의 피를 갈구했다.

그럴 때마다 오를레앙은 검의 모든 부위를 동원해 놈의 일격을 막아냈다. 크로스가드와 칼자루를 세워 칼날을 쳐내 놈의 일격을 뿌리쳤다. 그러면서도 오를레앙은 틈이 날 때마다 끈질기게 공격을 이어갔다. 놈이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오른손으로 칼자루를 쥐고 날카로운 칼끝으로 투구를 찌르는 시늉을 하며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빈틈이 생기면 두 손으로 칼날을 잡아 위험해 보일 만큼 휘어진 검을 휘둘렀다.

수차례 이어진 공격 끝에 이제 놈의 투구는 더 이상 둥그스름하지 않았다. 정수리 부근에 움푹 파인 자국 두어 개가 달빛 속에서 그림자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거기다 놈도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머지않았군. 오를레앙은 생각했다.

하지만 오를레앙은 방심하지 않았다. 이미 그의 몸도 한계에 부딪히고 있었다. 그는 거칠게 몰아쉬는 숨의 고삐를 다시 잡았다. 거꾸로 쥔 검을 넓게 잡은 오를레앙은 곧장 놈과 검을 마주했다. 놈은 검으로 가볍게 오를레앙을 내려 그었다. 오를레앙이 놈의 공격을 칼자루로 처냈다. 그러자 놈은 손목 반동으로 가뿐하게 검을 한 바퀴 돌려 한 번 더 오를레앙을 내리쳤다. 오를레앙은 칼날로 놈의 검을 막아냈다. 어깨가 비명을 질렀고 두 손 사이에서 칼날이 위협적으로 비틀리고 있었다.

그는 곧장 암살자의 검을 쳐냈다. 그리곤 검을 바로 잡아 놈과 정면으로 맞부딪혔다. 서로를 물어뜯기 시작한 칼날이 서로의 몸을 갉아 댔고 오를레앙의 낡아빠진 어깨도 비명을 지르기 시작할 무렵.

오를레앙은 곧장 서로의 이빨을 물고 있는 두 칼날을 왼손으로 잡아챘다. 우악스럽게 휘어진 두 자루의 칼날을 쥔 오를레앙은 오른손에 거머쥔 칼자루를 놈의 칼자루를 향해 밀어붙였다. 그러자 오를레앙의 크로스가드가 놈의 크로스 가드 밑을 파고들었다. 쇳조각이 미끄러지는 소리와 함께 오를레앙은 칼자루를 위로 당겨 올렸다. 그러자 팽팽하게 휘어진 장검은 순식간에 암살자의 손을 떠났다.

두 자루의 검을 한꺼번에 거머쥔 오를레앙은 놈의 검을 멀찍이 던졌다. 돌로 만든 다리 끝에서 장검이 분통하게 울었다. 그러자 승리에 취한 오를레앙은 자신만만하게 언성을 높였다.

“어떠냐? 이래도 계속 할 거냐? 엉? 이래도 계속 할 거냐고!”

하지만 일은 끝날 때까지 끝난 것이 아니었다. 오를레앙이 자만하는 사이. 놈은 빠르게 오를레앙에게 달려들었다. 당황한 오를레앙은 다가오는 놈에게 검을 휘둘렀다. 허나, 암살자는 오를레앙의 검을 피하거나 제자리에 멈추지 않았다. 놈은 손을 감싼 건틀렛으로 검을 막은 뒤, 그대로 오른손을 뻗어 오를레앙의 손목을 잡아챘다. 아차 하는 순간. 오를레앙의 뱃가죽에는 놈의 주먹이 박혔다.

몸이 앞으로 쏠렸다. 순식간에 내장의 위치가 전부 뒤바뀌어버린 것만 같은 격통이 등줄기를 따라 뻗어갔다. 오를레앙이 자리에서 멈짓거리는 사이. 무릎 뒷부분과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찔러 넣은 놈은 오를레앙의 다리를 들어 올려 그를 다리 밑으로 밀어 던졌다. 오를레앙은 두 손을 버둥거렸다. 그러면서도 오른손에 들고 있던 검을 놓치지 않으려고 그는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차가운 강물이 뒤에서 와락 끌어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었다.

 

마을을 떠나기 무섭게 오를레앙은 큰 도시로 향했다. 기근의 기수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운 가문을 바로 세우려면 당장에 돈이 필요했다. 집과 밭이 필요 했다. 하지만 이미 전쟁으로 온 국토가 불타고 있었기에 시골뜨기인 오를레앙을 받아주는 곳이라곤 군대뿐이었다. 때문에 오를레앙은 하는 수 없이 검을 들었다. 몇 번인가 마을을 약탈하는 산적들을 때려잡은 적이 있던 그로서는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거기다 가슴 한편엔 돈 말고도 다른 목적이 하나 자리하고 있었다. 어쩌면 아버지를 베어죽인 사자 깃발의 영주를 만나 복수를 할 수 있을 지도 모른다는 주제넘은 희망이 바로 그것이었다.

허나, 전장은 생각보다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혼미한 정신은 땅을 뒤집어버릴 듯이 울리는 전장의 기수의 말발굽소리에 차였다. 들판을 뒤덮은 함성이 세상을 찢어버릴 기세로 솟구쳐 올랐다. 크고 작은 전투마다 장궁병의 불화살이 먹구름을 흘리며 쏟아져 내렸다. 그러고 나면 곳곳에선 매캐한 기름 냄새가 온몸에 배었다.

그러나 매번 진창 속에서 죽어나가는 쪽은 백합 문장의 군인들이었다. 특히 오를레앙처럼 시골뜨기들은 몸값이야기가 오가기도 전에 죽임을 당했다. 그래서 그는 기를 쓰고 싸웠다. 계속해서 죽였고 살기 위해 다른 이를 앞세우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전쟁터를 가득 매운 피웅덩이와 내장이 엉킨 저주받은 대지가 정신을 갉아댔다.

하지만 언제나 그랬듯 처음이 어려웠을 뿐이었다. 두 번은 좀 더 쉬웠고 세 번째가 되면 숨을 쉬는 것처럼 별다른 감흥도 없었다. 역한 냄새에 구역질을 하고도 그는 웃었다. 죽은 이들에 대한 농담도 서슴없이 할 정도였다. 그리고 어느 세인가 전쟁도 마찬가지였다.

아니, 오히려 전쟁이었기에 더 쉬웠는지도 몰랐다. 살아남으려면 적응을 해야 했고 오를레앙은 이미 먹고 살기 위해서 가족을 등진 이였다.

그렇게 5년여의 시간이 지났다. 북프랑스 대부분이 함락되던 날. 오를레앙은 백합문장을 버리고 돈과 무기를 챙겨서 몰래 군대를 빠져 나왔다. 어차피 국운은 다했고 지금 수중의 돈이라면 어느 시골에서 집을 하나 장만해 살 수 있으리라. 희망을 품은 그는 훔친 말을 타고 달렸다. 이제 가족들과 함께 할 시간이 머지않았다는 사실만이 그를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발랑송에 다다랐을 때 그를 맞이한 것은 가족들이 아니었다. 그는 부서진 채 진창에 처박힌 표지판을 집어 들었다. 발랑송으로 가는 표지판이었다. 불길함이 심장을 할퀴고 지나갔다. 그는 낯익은 오솔길을 따라 수풀을 해치고 내달렸다. 허나 그 길의 끝에서 그가 마주한 것은 잿더미가 된 마을의 흔적뿐이었다. 사방엔 타다 남은 나무와 사람 뼈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있었다. 나무에 매달린 해골들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고개를 가로 젓던 그는 곧장 마을 어귀에 있던 누이네 집으로 향했다. 하지만 그 곳은 이미 사람이 사는 곳이 아니었다. 오를레앙은 나무에 매달린 크고 작은 해골들을 바라보았다. 그가 집 앞에 무릎을 꿇자, 나무 위에서 노닐던 까마귀 떼는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다. 구름 낀 하늘 속에서 까마귀 떼는 흐릿해져 형체까지 일그러지고 있었다.

그날 부로 오를레앙은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다.

술은 그의 유일한 친구가 되었고 검은 그의 유일한 밥벌이가 되었다. 이제 그는 술을 마시기 위해 약탈도 서슴지 않았다. 돈벌이를 위해 거렁뱅이들까지 고용한 그는 마을을 불태웠고 수많은 목숨들을 돈과 바꿨다. 그리고 돈이 생길 때마다 술을 찾았다. 그리고 밤마다 눈물 속에 빠져 허우적댔다.

이제 그에게 남은 바람은 딱 하나 뿐이었다. 어서 빨리 수많은 기억들이 술독에 빠져 죽기를 그는 술에 취해 바라고 또 바랐다. 그러면서도 밧줄에 목 매달 용기조차 없는 자신을 저주했다.

 

오를레앙은 강둑을 벗어났다. 예기치 못한 일격에 오그라든 뱃가죽을 붙들고선 조약돌 사이를 엉거주춤하게 기어올랐다. 홀딱 젖은 몸은 추레하게 마른 몸뚱이에 철썩 붙어 있었다. 아직도 뱃가죽이 아렸지만 지친 몸뚱이는 공기를 허겁지겁 들이마셨다.

한손에 쥔 장검이 너무 무겁게만 느껴졌다. 그는 푸념 섞인 숨소리를 천천히 흘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강 건너편에선 불빛이 비치고 있었다. 아무래도 물살에 떠밀려 강둑을 따라 건너편까지 흘러내려온 모양이었다.

오를레앙이 다리를 찾기 위해 고개를 쳐들던 그때였다. 어디선가 규칙적인 소리가 귓가를 스치고 지나갔다. 오를레앙은 곧장 검부터 쳐들었다. 어디서 나는 소리지? 그는 경계를 늦추지 않았다. 그러자 어둑한 밤하늘아래. 가느다란 빛이 서서히 구름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하루를 밝히는 여명이었다. 수풀 위로 솟아 오른 여명은 이제 하늘을 가로 지르고 있었다. 때문에 아주 조금이었지만 어둠이 걷힌 들녘을 따라 나무와 풀들의 윤곽이 드러났다. 그리고 판금 갑옷이 빛을 머금었다.

깜짝 놀란 오를레앙이 검을 들어올리기 무섭게 암살자는 검을 휘둘렀다. 오를레앙은 허둥지둥 검을 받아넘기면서 뒷걸음질을 쳤다. 하지만 암살자에게는 자비란 없었다. 놈은 허리 근육이 뒤틀릴 만큼 세차게 검을 휘둘렀다. 오른쪽 아래로 내리 그은 검은 순식간에 오를레앙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오를레앙은 반사적으로 검을 추켜세웠다. 크로스가드가 두 뺨을 가렸다. 그러자 왼편에서 무언가가 반짝거렸다. 오를레앙은 곧장 검을 왼편으로 옮겼다.

그 순간, 크로스가드 윗부분 날이 단단히 울었다. 칼날이 목 언저리까지 밀고 들어 온 소리였다. 그럼에도 오를레앙은 눈 하나 깜빡이지도 않았다. 그는 능숙하게 검을 머리 위로 받아넘겼다. 서슬 퍼런 날이 검을 따라 흘러내려 오른 어깨 위를 가르고 지나갔다.

칼날이 떠나기 무섭게 그는 오른발에 힘을 실었다. 그리곤 검을 밀어낸 방향을 따라 곧장 몸을 틀었다. 근육 하나하나가 거칠게 뒤틀리는 바람에 언덕을 구른 허리가 비명을 질렀다. 거기다 턱밑까지 차오른 숨은 공기를 갈구했다. 그럼에도 그는 신중하게 들판 위를 가로지르는 왼발에 온 신경을 곤두 세웠다.

오를레앙은 다리를 반 쯤 굽혀 자세를 낮췄다. 그리곤 오른발에 몸을 의지한 채 왼발을 재게 움직였다. 왼편과 오른편을 살핀 그는 풀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몸을 돌렸다. 칼자루를 잡은 왼손을 가슴위에 바싹 당겨 붙인 그는 칼날을 오른팔 위에 얹었다. 그 순간, 어둑한 공간이 반짝거렸다. 오를레앙은 온 몸의 신경을 곤두세웠다. 그러자 암살자의 검이 오를레앙의 가슴을 향해 정면에서 파고들었다.

이는 오를레앙이 가장 바라던 바였다.

그는 비스듬히 눕혀 놓은 오른팔을 세웠다. 왼손에 쥔 칼자루가 하늘을 향해 솟아올랐고 칼날은 팔뚝을 넘어 스르르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가 몸을 서서히 곧추서자 거꾸로 선 검은 제 주인의 빈틈을 파고든 칼날을 막아냈다. 그러자 쇠붙이가 분질러지는 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암살자의 칼날이 오를레앙의 칼날을 조금씩 부러뜨리면서 빗나가고 있었다.

이빨을 지그시 깨문 그는 곧장 검을 비틀었다. 그리곤 손목을 따라 검을 빠르게 휘둘러 놈의 정수리를 향해 검을 내리 그었다. 모르긴 몰라도 너덜거리는 투구를 제대로 때리면 이번에야 말로 투구에 제대로 된 흠집 하나를 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하지만 놈은 곧장 오른팔을 들었다. 턱. 둔탁한 쇳소리와 함께 건틀렛 위를 빠르게 가로지른 칼날은 바닥을 향해 달음박질쳤다.

휘청거리는 칼날이 건틀렛을 따라 흘러내리자, 놈은 왼손에 쥔 검을 오를레앙의 머리 쪽으로 찔러 올렸다. 휘청 이면서 날아든 검은 예리하게 오를레앙의 왼쪽 뺨과 귓불을 찢어놓았다. 오를레앙은 비명을 지르면서 뒤로 물러났다. 뜨듯한 감각이 싸늘하게 아린 감각을 타고 밀려왔다. 하지만 얼굴을 살필 세는 없었다.

드디어 피를 보고야만 암살자는 검을 고쳐 잡고서 오를레앙을 조여 왔다.

놈은 곧장 아래로 내려잡은 검을 쳐올렸다. 그러자 검격이 순식간에 오를레앙의 턱밑을 스쳐지나갔다. 비틀비틀 뒤로 물러난 오를레앙은 정신을 바싹 차렸다. 그는 이번에도 아래에서 달려드는 검과 마주했다. 오를레앙은 이번 일격을 피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아래서 치고 올라오는 검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검과 검이 크로스가드와 날에 얽혀 막히자, 놈은 빠르게 검을 아래로 내렸다. 칼날이 어둠 속으로 사라지기 무섭게 오를레앙은 검을 눕힌 채로 칼자루를 머리 위로 추켜올렸다. 그러자 약속이나 한 듯 암살자의 검은 오를레앙의 정수리를 향해 날아들었다.

크로스가드와 칼날이 한 대 엉켜 서로의 이빨을 물어뜯기 시작하자, 오를레앙은 놈의 검을 쳐냈다. 스치듯이 날이 선 쇳소리가 빠르게 두 사람 사이를 갈라놓았다. 하지만 오를레앙도, 이름 모를 암살자도 누구하나 물러설 생각 따윈 하지 않았다.

오를레앙은 압살자의 갑옷이 비틀리는 모습을 노려보았다. 팔뚝이 후퇴하면서 다리가 전진하고 있었다. 그 기백은 살아 움직이는 성벽과도 뒤지지 않았다. 하지만 오를레앙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비겁하게 살아남은 인간으로서의 의무를 다했다.

칼자루를 감도는 진동이 사라지기도 전에 오를레앙은 암살자에게 정면으로 달려들었다. 정수리를 반듯하게 내리 긋는 깔끔한 일격이었다. 하지만 오를레앙도 가만히 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그는 달려드는 칼날을 정면에서 받아쳤다. 칼끝이 서로 빗겨 갔다. 검과 검이 서로의 몸을 빠르게 교차하자, 서슬 퍼런 날이 서로를 밟고 올라섰다. 그리고 마침내 칼자루 위에 단단히 박힌 두 크로스가드가 서로 얽혔다.

수많은 이빨 자국을 아로새긴 상처뿐인 몸을 고통스럽게 비틀면서. 마치 무쇠의 파도가 성을 내기라도 한 듯 두 검은 동시에 불똥을 토해냈다. 마침내 두 검은 두 사람의 눈앞에서 멈춰 섰다.

비틀어야 해. 오를레앙은 생각했다. 하지만 몸은 그의 생각을 따라주지 않았다. 벌써부터 왼손과 오른손이 차례로 떨리고 있었다. 어깨는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처럼 떨렸다. 그 바람에 오를레앙의 검은 서서히 오를레앙의 품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허나, 오를레앙은 힘 싸움 따윈 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곧장 정면으로 맞부딪힌 검을 거둬들였다. 그리곤 빠르게 검을 눕혔다. 장검의 칼날을 암살자가 휘두른 검 반대편으로 넘긴 오를레앙은 왼손으로 칼날을 잡았다. 칼날로 암살자의 검을 빠르게 처낸 오를레앙은 곧장 놈의 목을 향해 칼끝을 밀어 넣었다. 번뜩이는 날이 목을 향해 달려들자 암살자는 애써 떨어지는 검을 추켜세워 가슴 앞까지 바싹 당겼다. 회심의 일격은 순식간에 놈의 크로스가드와 칼날에 막혔다.

허나, 오를레앙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곧장 칼날을 거머쥔 왼손을 거둬들였다. 이제 다음은 없어. 숨이 턱까지 차오른 그는 이를 갈며 힘껏 오른손을 내질렀다. 그리고 칼자루와 손목을 놈의 목에 단단히 걸치고는 안짱다리를 걸어 놈을 땅바닥에 그대로 매다 꽂았다.

암살자는 매가리 없이 수많은 조약돌 위에 엎어졌다. 엎어지는 와중에 암살자가 놓친 검이 암살자의 등 위를 굴러 땅바닥에 나동그라졌다. 놈이 투구 째로 조약돌과 흙을 퍼먹고 있을 동안 오를레앙은 잽싸게 놈의 몸뚱이 위에 올라탔다.

암살자의 목덜미에 칼날을 가져대기 무섭게 그는 짐승처럼 포효했다.

승자로서. 오늘도 살아남았음을 기뻐하는 노쇠한 들개로서. 그는 술에 취한 사람처럼 웃어 젖혔다. 술기운은 이미 토악질과 함께 싹 달아 난지 오래였다. 하지만 머릿속은 알딸딸하게 붕 떠올랐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고양된 쾌감은 웬만한 독주보다도 나았다.

“어디, 그 잘난 면상 좀 보자. 이 개자식아.”

오를레앙은 조심스럽게 턱 밑으로 손을 넣었다. 살짝 해진 가죽 끈이 아직도 제 주인의 턱을 꼭 붙들고 있었다. 하지만 억센 손이 끈을 잡아당기기 무섭게 가죽 끈은 천천히 벗겨졌다. 투구가 땅바닥에 떨어진 순간. 오를레앙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 없었다.

황금처럼 빛나는 기다란 금발 머리가 그의 눈을 찌른 것이다. 맑게 포효하던 머릿속은 순식간에 혼란 속으로 빠져들었다. 오를레앙은 잠시 동안 기다란 머리카락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가느다란 목을 따라 흐르는 금발 머리카락은 들판에 널리고 널린 잡초 위로 흘러내렸다. 그는 천천히 쓰러진 이의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가느다란 이목구비와 고운 살결이 머리카락 아래 드러났다.

여자잖아? 오를레앙은 휘둥그렇게 뜬 눈으로 고운 살결을 바라보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머리를 손으로 받히고서 앞으로 고꾸라진 여인의 몸을 뒤집었다. 그러자 낯익은 얼굴이 오를레앙의 눈동자 속에 또렷이 박혔다. 지그시 감긴 두 눈과 살짝 뭉뚝한 콧날 아래로 오똑하게 선 코. 거기다 입술 옆에 박힌 점 두 개. 귓불이 작은 귀는 볼 것도 없었다.

그 오랜 세월의 끝에 선 오를레앙은 한눈에 그녀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클로에?”

오를레앙은 넋이 나간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러자 클로에는 희미하게 반짝이는 실눈을 떴다. 그녀는 오를레앙에게 차가운 시선을 던졌다. 아직 숨이 고르지 못한 탓인지 그녀는 갑옷 아래서 헐떡이고 있었다.

“클로에? 왜, 네가……. 아니, 어떻게…….”

새파랗게 질린 오를레앙은 그제야 무언가를 깨달은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대장. 아무래도 누가 대장 뒤를 밟고 다니는 거 같아.) 그리곤 감당할 수 없는 재앙을 목도한 어린 양처럼 천천히 뒷걸음질 쳤다. 젠장. 이런, 젠장할. (발랑송이거 알아?) 거긴 불탔어. 오를레앙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리곤 장검에 기대어 자리에서 비적비적 일어선 클로에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가득 서슬 퍼렇게 독기로 가득찬 얼굴은 창백했다. 유리구슬처럼 차가운 두 눈 속에서 썩을 대로 썩은 오래된 원망이 시선 속에서 배어나왔다. 오른쪽 뺨에는 낙인이 새겨져 있었다. 무슨 낙인인지는 알지 못했지만 짐작은 갔다. 사창굴에서 비슷한 낙인을 몇 번 본적이 있었으니까.

오를레앙은 황소처럼 숨을 몰아쉬는 클로에에게 말은 건넸다.

“클로에? 아니, 어떻게……. 크, 클로에. 나야. 네 아버지…….”

오를레앙이 한걸음 다가서자 검을 집어 든 클로에는 오를레앙의 목을 겨눴다. 오를레앙은 자리에서 우두커니 서선 클로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흉하게 일그러진 입술 사이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버, 엇지라, 라고. 다, 당신이?”

조소가 밴 기괴한 목소리였다. 어린 시절의 맑은 목소리는 어디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뻐, 뻔뻐언 하네. 아, 아가리가 삐뚜, 뚫어 져도, 마, 말은 바로, 해야지. 다, 당신. 우, 우릴 버어, 렸잖아.”

그녀는 손을 내저으면서 언성을 높였다. 그러자 오를레앙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난, 널 버린 적 없어. 돌아와 보니까 전부 불에 타고……. 죽은 줄 알고…….”

“그래, 다, 다, 주주죽, 었어.” 클로에는 희망 섞인 오를레앙의 목소리를 단칼에 잘라냈다.

“당신이, 우릴 맡기고, 떠, 떠난, 뒤이이, 에 후유웅, 흉년이 드니까, 고, 고모는, 노예상에게, 우리 모두를, 파, 팔아 치웠어. 고모부우는, 어, 엄마랑 내 목에, 칼을 들이댔지. 이, 이, 것도, 그으때, 생긴 거야.”

클로에는 오른쪽 윗입술부터 목까지 이어지는 흉터를 가리켰다. 상처는 오래돼 보였다. 하지만 상처를 제대로 치료하지 못한 탓인지 오른쪽 입술의 살점은 너덜거렸다. 클로에는 목을 가리면서 말했다.

“그것도 고작, 빵이랑, 말린, 고기 몇 개, 때무우, 에 이, 이딴 지이잇을 해앴어.”

타고 남은 제처럼 이글거리는 그녀의 푸른 눈에는 눈물이 고였다.

“엄마랑, 내가 몹쓸, 짓, 다다, 당할 동안, 당신은, 뭘 했지? 엉? 장이 전쟁터로, 떠날 동안, 당신은 뭐, 무어, 어얼, 했는데? 자, 장은, 전쟁터에 나가서, 돌아오지, 지, 지, 않았어. 들어보니까, 아, 아아쟁쿠르에서 유망한 영주들도 지이, 진흙 처먹고 뒤, 에, 뒈, 뒈졌다더군. 그으, 그런 곳에서 16살, 짜, 짜, 짜리가 어떻게 살아서 도, 도, 돌아, 오겠어? 엉?”

오를레앙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주체할 수 없었다.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아 그는 허리를 굽혔다. 한순간에 폭삭 늙어버리기라도 한 듯 오를레앙은 허리를 펴지 못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클로에는 주먹을 쥐었다 피면서 천천히 오를레앙에게 다가왔다.

“클로에……. 네, 네 엄마는……. 르네는…….”

클로에는 오를레앙 앞에 멈춰 섰다. 그러자 클로에의 왼손이 오를레앙의 멱살을 잡아 올렸다. 오를레앙이 신음하는 순간. 정면에서 날아든 건틀렛이 오를레앙의 얼굴에 내리 꽂혔다. 얼굴을 뚫고 지나갈 기세로 날아든 일격이었다. 왼쪽 눈은 뜰 수도 없을 만큼 부어올랐고 골이 흔들려서 서있을 생각조차 희미해졌다.

클로에는 그제야 입을 열었다.

“귀, 귓구멍 열고 자, 자알들어. 어, 엄마느, 으은, 섬에, 에서 온. 나, 남자들에게, 찢겨서, 주, 주, 죽었어. 네 노, 옴 때문에!”

클로에의 왼손이 목을 놓기 무섭게 오를레앙은 잔디밭 위에 쓰러졌다. 클로에는 천천히 그의 몸뚱이 위로 올라섰다. 그리곤 개미를 밟는 사람처럼 무표정한 얼굴로 오를레앙의 오른손을 지그시 밟아 뭉갰다. 격통이 팔뚝을 타고 올라왔다. 하지만 오를레앙은 비명을 지를 수 없었다.

“이, 이 갑옷. 당신, 당신을 주, 죽이려고, 일부러 사, 사, 산거야. 주, 죽은 사람 갑옷은, 부정, 타, 탄다고 싸게 파, 팔더라고. 거, 검은 치, 치, 침대에서 배워, 웠고. 우, 웃기지? 치, 침실에서, 구, 구, 군인들한테 몸을 내주, 주우우고 검술이나 배, 배, 배웠으니.”

이미 오를레앙은 더 이상 살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는 딸아이의 곧게 펴진 가슴을 따라 올라가는 검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어차피 개처럼 죽을 운명이었다. 그럴 줄 알고 있었기에 그는 딱히 아쉽지 않았다. 다만, 딸아이의 손이 피로 얼룩지는 모습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이 눈물이 다 무슨 의미지?

이미 모든 것을 망친 것은 오를레앙이었다. 발랑송을 떠나 가족들을 지켜주지 못한 게 오를레앙이었다. 그럼에도. 가족들을 운명에게 팔아치웠음에도 그는 어떤 것도 이루지 못했다. 돈도, 복수도, 화목한 가정도 무엇 하나 손에 남은 것은 없었다. 그 빽빽한 세월 속에서 오를레앙이 얻은 건 공포와 주정, 그리고 도둑으로서의 삶이었다.

오를레앙은 허공에 잠시 멈춰선 딸아이의 손을 바라보았다. 그리곤 조용히 눈을 감았다. 이젠 모든 걸 끝낼 때도 됐지. 그는 그렇게 말없이 죽음을 받아 들였다. 지옥의 불길이 눈 앞에 아른거리면서 목자들이 이야기 하는 죽음의 기수를 따라 수많은 악마들이 땅굴에서 기어 나왔다. 허나, 죽음의 기수는 끝까지 오를레앙을 지목하지 않았다.

어디선가 바람을 가르는 낯익은 소리가 귓가에 날아들었다. 그리고 뒤이어 따뜻한 액체가 오를레앙의 뺨을 적셨다. 놀란 그는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코앞에서 휘청거리던 검이 떨어졌다. 예리함을 잃은 검은 힘없이 땅에 박혔다. 두 눈을 휘둥그렇게 뜬 오를레앙은 자신의 오른팔을 밟고 선 딸을 올려다보았다.

그 순간. 새벽녘의 햇살과 함께 날아 오른 화살들이 클로에의 어깨에 박혔다. 클로에가 몸을 움찔거리자 뒤이어 열댓 발의 화살이 비 오듯 쏟아졌다. 어떤 화살은 그녀의 판금갑옷을 때리고 튕겼다. 어떤 화살은 그녀의 종아리 위에 박혔다. 마른땅 위를 몰아치던 화살비가 멈추자 클로에는 얼떨떨하게 뒷목을 붙들었다. 그리곤 뒷걸음질 치면서 허공을 붙잡으려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녀의 손을 잡아주는 이는 어디에도 없었다.

둔탁한 소리가 하늘로 날아오르자 오를레앙은 창백하게 질린 얼굴을 간신히 들어올렸다. 그는 덜덜 떨리는 손으로 땅바닥을 기어 바닥에 쓰러진 자신의 딸에게로 다가갔다.

“클로에? 클로에?”

그는 검은 색 갑옷 위에 검붉은 피를 쏟아내는 딸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차가운 시선뿐이었다. 혐오스런 시선은 이제 꺼져가는 생명과 함께 사그라들고 있었다. 오를레앙은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클로에를 바라보았다. 이미 초점을 잃은 클로에는 어딘가 먼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는 클로에의 가슴을 옥죄는 갑옷을 잡아당겼다. 전장에서 부상당한 병사를 치료할 때 갑옷을 벗기고 치료했던 기억이 떠오른 터였다. 하지만 그가 갑옷을 세게 잡아당길수록 클로에는 더 많은 피를 토해냈다. 새파랗게 질린 오를레앙은 이번엔 클로에의 뒷목에 박힌 화살을 바라보았다. 그는 화살을 쥐어도 보고 화살을 부러뜨려도 보았다. 하지만 피는 멈추지 않았다. 목에 깊숙이 박힌 화살은 이미 시뻘건 핏물 아래 깊은 곳에 잠겨 있었다.

오를레앙은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다. 그러자 딸아이의 몸뚱이는 힘없이 들판 위에 처박혔다. 그는 다시 손을 뻗어 딸아이를 가슴에 안아 들었다. 그녀의 밝은 금발은 핏물에 엉겨 있었다.

“대장! 거 모가지 붙어 있수?”

황금빛 들판을 가로지른 토렉스와 사수들이 손을 흔들면서 소리쳤다. 그러나 오를레앙은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는 다가오는 부하들을 향해 입을 있는 대로 벌렸다. 얼굴에서 턱이 떨어져 나와도 이상할 게 없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그의 입안에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명들이 말을 타고 입 밖으로 튀어나올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입은 그 많은 비명들을 토해내기엔 너무나도 좁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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