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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밖은 위험해
김이환, 아작, 2021년 1월

김이환의 소설집 『이불 밖은 위험해』는 어느 한 문장으로 정의하기 어려울 정도로 다채로운 세계관을 선보이는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이 책은 작가가 10년 동안 써온 단편들을 모아서 낸 첫 단편집이고, 그만큼 작품의 스펙트럼도 넓고 유연하다.

​표제작 「이불 밖은 위험해」는 어느 날 갑자기 주인공에게 온갖 사물이 말을 걸어오는 상황을 가정한 초단편이다. 주인공은 혼자 정신과를 찾아가 진료를 받고 짧은 입원 끝에 집에 돌아오지만 상황은 달라지지 않고 이야기는 그대로 끝난다. 충분히 놀랄 만한 사건임에도 무덤덤하게 일상으로 복귀하는 주인공을 보면서 독자는, 그보다 훨씬 이상한 일도 아무렇지 않게 벌어지는 현실을 새삼 떠올리게 된다.

​「시리와 함께한 화요일」은 애플의 인공지능 '시리'의 이야기이면서 미치 앨봄Mitch Albom의 『모리와 함께한 화요일Tuesdays with Morrie』(1997)에 대한 오마주이기도 하다. 음성 기반의 소프트웨어였던 시리는 이 작품 속에서 인간의 외형을 갖춘 로봇 비서로 업그레이드된다. 하준은 넉 달 전 출시된 로봇 시리의 베타 서비스 사용자로 선정되었다. 하준의 집에 찾아온 시리는 사용자의 정보 일체에 관한 접근 권한을 넘겨받은 뒤 그에 맞추어 일상적인 대화를 이어나간다. 여기까지는 유튜브나 페이스북의 알고리즘이 하고 있는 일(사용자가 데이터를 열람하고 반응하는 패턴을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여 그가 선호하는 콘텐츠를 제공하는 것)과 비슷하다. 그러다 중간에 하준의 친구 도윤이 찾아오고, 둘은 시리 앞에서 의도적으로 소모적인 대화를 연출한다. 대화의 시나리오는 하준과 도윤이 범죄에 연루된 정황을 암시하도록 작성되었고, 둘은 이 대화에 시리가 반응하는 방식을 통해 애플이 사용자의 개인정보에 얼마나 접근할 수 있는지를 테스트하려는 것이다. 데이터를 기반으로 사용자의 성향을 체크하도록 설계된 알고리즘이, 역으로 사용자에게 자신의 성향을 의도치 않게 노출하는 이야기인 셈이다. 하지만 이미 고도로 정보화된 세계에서 이런 아날로그적인 전략이 어디까지 성공을 거둘 수 있을까.

​「바나나 껍질」「스파게티 소설」은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작품이다. 주인공이 '잭 인 더 박스'라는 카페의 바리스타 '잭'을 만난 뒤 벌어지는 사건을 담고 있다. 잭이 마법사라는 설정에서 구병모의 장편 『위저드 베이커리』(2014)가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이 소설들은, 김이환의 장편 『디저트 월드』(2014), 『행운을 빕니다』(2020) 등과 같은 세계관을 공유하는 뼈 굵은 작품들이기도 하다. 소설은 이야기 소품으로써의 마법보다는, 표현과 내러티브에서 더욱 인상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바나나 껍질」에서 주인공 민서가 어두운 귀갓길에 정체불명의 남자로부터 쫓기는 장면은 두 번 읽고 싶지 않을 정도로 공포스럽고, 「스파게티 소설」은 화자인 '소설가'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지 못하면 죽게 되는 설정을 통해 작가들이 겪는 딜레마를 인상 깊게 연출해낸다. 오늘도 이야기와 죽음의 양자택일 갈림길에서 분연히 앉아 글자를 새기는 모든 작가들에게 심심한 위로와 응원을 보낸다.

​「#초인은지금」은 서울 시민을 구하는 슈퍼맨 이야기다. 웬일인지 서울 행정구역을 칼같이 지키며 그 안에서만 활동하는 그에게, 서울 시민들은 DC코믹스의 히어로 대신 '초인'이라는 한국적인 호칭을 붙여주었다. 모종의 초현실적 현상이 관할 행정구역이라는 임의의 경계선에 기반하여 작동한다는 터무니없는 설정은 되려 터무니없기 때문에 이야기의 색깔을 한껏 빛내준다. 심너울의 단편 「정적」(2018)에도 비슷한 설정이 등장한 바 있는데 마찬가지로 흥미롭게 읽었던 기억이 난다.

​김이환 작가는 타당한 근거 없이 금기시되는 주제에 대해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데, 그의 이런 태도는 「섹스 없는 포르노」「너의 변신」 두 작품에서 유감없이 드러난다. 「섹스 없는 포르노」는 무성애와 사도마조히즘을, 「너의 변신」은 동성애를 소재로 다루고 있고 형식적으로도 뛰어난 성취를 보여준다. 특히 「너의 변신」은 베르나르 베르베르Bernard Werber의 단편 「완전한 은둔자L'ermite absolu」(2002)에서 적나라하게 묘사된 바 있는 육체성의 소멸과 삶의 연속적인 관계에 대해 깊숙이 조명함으로써 2011년 제2회 젊은작가상 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우리의 육체를 배제한 상태로 자유롭게 존재할 수 있는 세계가 있다면, 그 세계의 우리와 지금의 우리는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을까.

​「천국에도 초콜릿이 있을까」는 「너의 변신」에서 언급한 육체성에 관한 논의를 한 단계 더 발전시켜 이어가는 작품이다. 영원히 살기 위해 뇌의 정보만 컴퓨터에 전송하고 육체를 버리는 길을 택한 사람들과, 천국에 가기 위해 육체 안에 남기를 택한 사람들의 사연이 등장한다. 뇌 속의 데이터로만 살아있는 사람들은 지금 어디에 있고 무슨 생각을 할까. 살아있다는 건 무슨 의미일까. 6년 전 밤하늘의 별들이 일제히 빛나던 날, 이들이 어딘가로 떠난 것은 아닐까. 요한은 진실을 알기 위해 앞서 간 이들을 따라 떠나고, 베드로는 그런 친구를 배웅하고 돌아온다.

​「모든 것의 이론」에서는 우주 탄생의 순간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극적인 시뮬레이션을 경험할 수 있다. 이야기는 우주의 종말 37분 전에 시작된다. 그다음은 36분, 35분, 34분. 멀쩡히 앞으로 흐르는 시간도 거꾸로 가는 것처럼 느껴지게 만들면서, 이야기는 종말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간다. 카운트 다운이 끝나는 순간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까.

이상 소개한 9편의 작품을 포함하여 책에는 총 12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이 글에 길게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복권 당첨을 둘러싼 재미있는 에피소드도 있고 첨단 의료기술이 드래곤과 중세 판타지로 구현되는 병실도 있다. 심지어 말하는 투명 고양이까지, 책에는 각양각색의 매력 넘치는 이야기가 즐비하다. 당연히 겨울철 이불속 SF로 즐기기에도 더없이 제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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