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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어리랜드 - 쿨한 환상세계 모험담
캐서린 M. 밸런트, 공보경·김승욱 옮김, 작가정신, 2015년 7월~2018년 1월


판타지 소설은 여러 기준에 따라 다양하게 분류할 수 있다. 본작을 『반지의 제왕』 계열이냐 『디스크 월드』 계열이냐 라는 기준에 따르자면 단연 후자에 속한다고 할 수 있겠다. 이 둘의 차이는 같은 환상소설 카테고리 안에서도 핍진성과 개연성을 추구하느냐, 아니면 이를 신경쓰지 않고 막 나가는 내용이냐에 따라 나눌 수 있다.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엄밀하게 내적 개연성을 지키고 나름의 과학이나 마법의 법칙에 따라 2차 세계를 구현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따른 구분인데, 전자가 주로 진지한 하이 판타지 장르이고 후자는 유머나 패러디 작풍 혹은 알레고리나 주제의식을 중시하는 매직 리얼리즘 계열의 장르에서 주로 나타난다.

본작의 경우는 후자에 속하지만 주요 얼개가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즈의 마법사』와 같은 〈소녀의 환상세계 모험담〉이라는 전통적 형식을 답습하면서도 새로운 요소가 제법 두드러진다. 동물이나 환상종들이 사람처럼 행동하는 이세계 페어리랜드의 면모는 얼핏 코믹하게 보이지만, 아동·청소년용 소설임에도 코믹하다기보다 시니컬하고 그로테스크하다고 표현할 수밖에 없는 부분이 꽤 많다. 포스트 모더니즘의 영향인지 ‘쿨함’을 추구하는 최신 유행을 반영한 결과인지는 모르겠다.

특히 본작의 가장 큰 특징은 주인공이 현실과 환상세계인 페어리랜드를 오고 가는 이야기임에도 작품 속의 현실세계가 우리가 사는 완전한 현실이 아닌 듯한 묘사나 복선이 들어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심지어 이야기가 이어지다보면 현실과 페어리랜드가 완전히 분리된 개념도 아님을 알게 된다(2권에 나오는 ‘그림자’가 증거).

이를 뒷받침하는 요인은 화자의 존재다. 믿을 수 없는 화자(Unreliable narrator) 분류에 넣어도 좋을 정도로, 화자는 작가 자신도 아니고 소설 내용에 개입도 하지 않지만 능청스러운 어조로 가끔 엉뚱한 말을 한다.

이런 면면을 볼 때 테리 프래챗의 『디스크월드』 시리즈가 연상되지만, 이런 시니컬한 블랙 유머가 우리나라에서 인기를 얻은 경우가 많지 않아서 아쉽다. 『디스크월드』도 영국 베스트셀러라지만 우리나라엔 겨우 2권까지 번역되었다가 낮은 인기로 오래지 않아 절판된 바 있다. 하긴 외국의 인기 장르소설이 반드시 우리나라에서 인기라는 법은 없으니. 『반지의 제왕』, 〈해리 포터 시리즈〉 같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라면 모를까, 일본에서 100권 이상 지속되고 있는 인기작(작가가 사망한 후에도 다른 작가가 이어서 연재하고 있다) 『구인 사가』도 우리나라에 야심차게 소개되었다가 6권으로 출간이 끊긴 굴욕(?)을 당하기도 했다. 그나마 본작은 비교적 길지 않게 5권으로 끝났고 전권 번역 출간되어 다행이다.


그러면 각 권의 내용을 간단하게 소개하기에 앞서 언급할 부분이 있다. 번역본의 부제는 원문을 직역하지 않고 번역자 혹은 편집자가 새로 지어서 붙인 경우도 있기에 여기서는 원문 번역한 부제를 ‘원제’라는 표제를 붙여 병기했다(한편 표지와 일러스트는 원작의 것을 그대로 사용했다). 다른 점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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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권 - 셉템버와 마녀의 스푼 / 원제 : 직접 만든 배를 타고 페어리랜드를 항해한 소녀
번역판의 부제는 해리 포터 시리즈를 의식한 티가 역력하다. ‘○○와 ○○(주인공과 작중 중요한 아이템)’식 작명은 이전에도 있었으나 해리 포터로 인해 유행하게 되었음은 분명하니까.
1권은 이야기의 시작인 만큼 주인공 소녀가 이세계(페어리랜드)로 갔다가 모험을 펼치고 돌아온다는 점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오즈의 마법사』,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등 수많은 레퍼런스의 영향이 느껴진다. 진짜 이름에 얽힌 내용을 보면 『어스시의 마법사』도 연상된다.
그러면서도 전술했듯 다르고 새로운 점이 엿보이는데, 바로 주인공 셉템버가 모험을 떠나는 계기가 ‘그저 심심하기 때문’이라는 부분이다. 이런 ‘쿨함’은 2000년대의 상상력이라 불러도 좋을 듯하다. 본작의 라이벌이자 최종보스에 해당하는 인물인 후작도 셉템버처럼 현실에서 페어리랜드로 왔음이 밝혀지는데, 가난하고 불운한 현실에 절망하여 이세계로 도피했다는 점에서 이쪽이 더 고전적인 이세계물 주인공 같다. 이렇듯 셉템버와 후작은 거울에 비친 모습처럼 서로 닮았으면서도 대조적인 면모가 보이고, 후작에 맞서는 셉템버의 선택이 1권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 된다.
또한 본작의 차별적인 설정으로 모험을 하면서 종래의 모험담처럼 동료나 아이템을 얻기도 하지만 그만큼 잃는 것도 많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셉템버는 출발할 때 신발 한 짝을 잃어버리고, 모험을 하면서 그림자, 머리카락, 목소리 등 자신의 일부를 계속 잃는다. 이는 후속 시리즈의 복선으로 작용하기도 하여 처음부터 시리즈를 염두에 두고 썼음을 짐작케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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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 그림자들의 흥청망청 파티 / 원제 : 지하세계 아래로 내려가 흥청망청 파티를 주도한 소녀
이번에는 원제와 번역판의 부제가 거의 같다. 셉템버는 현실로 돌아온 1년 뒤에 자력으로 페어리랜드로 돌아가는데, 1권에서 분리되었던 그림자가 지하세계의 왕이 되어 있었다. 사실 읽고 나면 그림자가 주인공 같은 느낌이 든다. 원제를 봐도 그렇고.
자신과 그림자의 대립이라는 설정은 『어스시의 마법사』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보이지만, 그렇다고 마지막에 그림자와 합체하느냐 하면…… 스포일러를 막기 위해 결말을 언급하진 않겠다. 다만 반전과 속편 예고를 남긴 결말이었음은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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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 달을 두 조각 낸 소녀 / 원제 : 페어리랜드 위로 날아올라 달을 두 조각 낸 소녀
3권도 원제와 번역판 부제가 거의 같다. 셉템버는 두 번의 모험을 거쳤으나 페어리랜드를 계속 그리워하다 드디어 다시 가게 된다. 그러나 환영받지 못하고 우여곡절 끝에 달로 가게 된다. 달에서 비로소 옛 친구를 만나는 등 새로운 무대에서 새로운 모험을 펼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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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권 - 트롤 소년과 마법의 그림 숲 / 원제 : 페어리랜드에서 길을 잃은 소년
번역판 부제는 또 해리 포터식으로 돌아갔다. 4권은 특이하게 주인공이 완전히 바뀌어 트롤 소년 호손의 이야기를 그린다. 이번에는 주인공이 페어리랜드에서 현실 세계로 가는데, 시작부터 납치되어 소포로 발송되는 희한한 급전개를 거쳐 인간 아이 토머스와 바꿔치기되어 자란다. 요정이 아이를 바뀌친다는 유럽의 체인질링 민담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더 재미있게 읽을 수 있는데, 같은 소재를 쓴 로저 젤라즈니의 『체인질링』도 있으니 참고 바란다.
한편 호손은 학교에서 자신과 같은 처지의 소녀를 만나 함께 페어리랜드로 떠나 모험을 펼치고 자신과 바꿔치기된 진짜 토머스와 만난다. 마지막에는 어느 인물에 대한 반전이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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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권 - 셉템버와 심장을 향한 경주 / 원제 : 페어리랜드를 경주하여 집으로 돌아간 소녀
마지막편에서는 셉템버가 페어리랜드의 여왕이 되었으나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상태였기에, 이 갈등을 풀기 위해 왕위를 건 경주 시합이 열린다. 단순히 목적지로 빨리 가기만 하면 되는 게 아니라 어딘가에 숨겨진 〈페어리랜드의 심장〉을 찾아야 우승할 수 있기 때문에 달리기보다는 보물찾기에 가깝다.
5권이자 시리즈의 결말은 역시 스포일러 방지를 위해 밝히지 않겠지만 다 읽고 나서 1권의 앞부분을 다시 읽으면 더 감동적으로 느껴진다. 일종의 순환이자 승계를 상징하는 결말로, 작가는 이 긴 이야기의 시작이 그저 우연이 아니었다고 역설하는 듯하다. 필자도 소설을 쓰는 입장인지라 이런 결말을 보면 미리 처음부터 구상해놓았는지 아니면 그냥 쓰다가 막판에 떠올라서 끼워 맞췄는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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