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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은닉] 리뷰

2012.07.27 23:4207.27


은닉

배명훈, 북하우스, 2012년 6월



날개 (http://blog.aladdin.co.kr/twinpix revinchu@empal.com)



 소설 『은닉』은 ‘거짓’의 백과사전이다. 거짓의 온갖 양상이 망라된다. 대표적으로 ‘위장’, 또‘허풍’. 그 밖에 등재된 항목들 없는 주제에, 있는 것처럼 꾸며 상대를 현혹시키기. 엄연히 있으면서 없는 척하기. 있는지 없는지 확신하지 못하게 함으로써 불안하게 만드는 요령. 시늉, 연막, 연극, 성동격서, 은폐, 은신 및 변신, 미끼로 유인, 가면, 배신해놓고 시침 떼기, 이중스파이, 함정, 꼭두각시, 매복, 위증, 칼을 숨긴 주머니, 음성변조, 억지웃음, 은근히 떠보기, 거울, 가상현실, 흥정, 환각, 조각난 진실의 몇 가지 파편들, 소문, 꿈. 그리고 어쩌면 사랑. ――― 영화감독 박찬욱


 문학평론가 신형철이 은희경의 소설집 [아름다움이 나를 멸시한다](창비, 2007년 4월) 해설에서 "'은희경'은 하나의 장르다."라고 정의내렸다. 은희경만의 문법이 있다는 수사랄까. 나는 신형철의 말을 빌려서 "'배명훈'은 하나의 장르다."라고 정의내리고 싶다. 그는 문단 소설의 관습에도 장르 소설의 관습에도 구애받지 않으며 그 경계에서 자유롭게 외줄타기를 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 줄타기가 배명훈만의 문법을 보여주고 독특한 감성과 재미를 만들어낸다.
 배명훈의 전작들 역시 특이하고 새로운 감각의 소설들이었다. [타워](오멜라스, 2009년 6월), [안녕, 인공존재!](북하우스, 2010년 6월), [끼익끼익의 아주 중대한 임무](이병량 그림, 킨더랜드, 2011년 4월), [신의 궤도](문학동네, 2011년 8월)까지 보여지는 작품의 흐름은 유사한 작가를 찾아내기도 힘들뿐더러, 비슷한 느낌의 작품들을 꼽기도 힘들었다. 작가만의 색채가 새롭고 강렬한 것이다. 아주 새로운 이야기나, 새로운 문장들은 아닐지라도, 새로운 감각이라는 점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공감을 하는 작가라고 할 수 있다. 계간 문학동네에 발표한 첫 번째 단편 {안녕, 인공존재!}가 곧바로 제1회 '문학동네 젊은작가상'을 수상하며 받은 심사평에서 그러한 평가를 찾을 수 있다. 소설가 신경숙은 "다른 별에서 써가지고 온 것 같은 서사의 신선함"을, 윤대녕은 "독창적이고 참신하다. 전혀 새로운 감각의 작가"라고 말했다. 이제 그가 두 번째로 펴낸 [은닉](북하우스, 2012년 6월)을 살펴보자. 여전히 그의 작품은 기존 작품군에 포함시키기 힘든 독특함을 가지고 있다. 비슷한 작가를 찾아보기 힘든 배명훈만의 문법과 색채로 무장하고 있다. [은닉]을 읽으면서 받은 첫 번째 느낌은 바로 이것이다. 배명훈은 하나의 장르라는 것.

 [은닉]은 어떤 작품인가?

 배명훈의 장편 소설 [은닉]은 한 마디로 정의하기 어려운 소설이다. 이런 소설을 쓰는 작가들이야말로 그 이름이 장르로 불리기에 적합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장르 관습에 구애받지 않고 새로운 장르를 만들어낸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작가만의 문법이 또다른 형태의 장르로 보이기도 하는 작가라면, 많은 작품을 쏟아내며 그 작품에서 독특한 개성이 묻어나야 할 것이다. [은닉]은 기존의 배명훈의 작품들에서 보였던 여러 특성들이 집합되어 있고, 배명훈의 문법으로 쓰인 장편소설이다. 그러면서도 바로 전작인 첫 번째 장편소설 [신의 궤도]의 전혀 성향이 다른 작품이다. 작품의 배경이며 주인공의 성별 그리고 주제 의식, 다루는 소재까지 전부 다르다. 작가의 양면을 보는 기분이다. 그런데 그 양면이 다채로우며 서로 상호보완하면서도 변별점을 지니고 있어서 경이롭기까지 하다.

 연방은 종종 죽음을 대량생산한다. 그건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다만 가끔, 아주 소량의 죽음을 주문생산해야 할 때가 있는데, 세상 모든 정부가 그 주문을 다 받아주는 것은 아니다. 또한 분업 없이 수작업으로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일을 해낼 재래식 기술자를 어느 나라나 다 보유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연방에는 그런 사람들이 있다. 나 또한 그들 중 하나다. 분업으로 은폐되지 않은 생생한 죽음을 날것 그대로 다루어야 하는 직업.(15~16쪽)


 [은닉]의 이야기는 이렇다. 주인공은 조직에 속한 킬러다. 바로 첩보물이 연상될 것이다. 그런데 이야기는 그렇게 단순하게 흘러가지 않는다. 은경이라는 여자가 나오고, 연방이 나오고, 전략무기가 나오고 마음과 마음이 얽힌다.
 주인공은 11년차 킬러로 11년차 킬러에게는 1년의 휴가가 주어진다. 이 안식년은 단순히 편하게 노는 게 아니라 앞으로 킬러로 계속 살아갈지, 아니면 은퇴를 할지 고민하게 되는 시기이다. 이 중요한 시기에 특별한 임무가 주어진다. 추리극 [랑케의 결백]을 보고 감상만 말하면 된다는 것. 그러나 이 단순해 보이는 지령은 휴가 기간에 주어졌다는 점만으로도 불길한 사건을 암시한다.

 내 눈에 비친 은경이. 그건 사랑이 아니라 경이로움이었다. 세상에 태어나 그 나이가 될 때까지 내 눈에 비친 것들 중 가장 경이로운 존재. 그 전까지 봐오던 세상이 완전히 다른 세상으로 바뀌는 경계. 그 경계에 서 있는 이정표 같은 사람. 처음부터 아예 몰랐으면 모를까, 그런 게 있다는 걸 알게 된 이상 도저히 그쪽으로 가지 않을 수 없는 삶의 새로운 단계.
 그러니까 그 마음은 사랑이든 뭐든 다른 이름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그걸 원래 의미 그대로 표현할 수 있는 말은 세상에 오직 하나밖에 없었다. 은경이. 은경이라는 이름 그 자체. 그뿐이었다.(31쪽)


 주인공이 [랑케의 결백]에서 보는 것은 숙청된 권력자의 딸 은경이다. 배명훈의 독자라면 배명훈이라는 장르에서 매번 주인공을 맞는 ‘은경’이라는 캐릭터가 반가울 것이다. 작가는 매번 ‘은경’의 이름을 등장시킴으로써 ‘은경’이라는 이름이 배명훈 장르에서 상징을 가지도록 했다. 이 소설에서 ‘은경’은 많은 등장을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은경’의 비중이 무겁게 느껴지는 것은 필시 배명훈의 소설을 다 따라서 읽은 독자가 누리는 특별한 경험일 것이다.(이것은 마치 이기호 작가의 소설에서 매번 ‘시봉’이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이 주인공을 하는 것과도 비슷하다. 이 역시 ‘시봉’이라는 이름에 다양한 의미가 쌓이게 된다.)
 여기서 ‘은경’이 하는 역할은 단순하다. 바로 추리극 안에서 시체 연기를 하는 것이다. 상황 역시 ‘은경’은 죽은 듯이 시체처럼 지내야 하는 것과 맞아떨어진다. 소설인 이렇듯 하나의 현상을 한 가지가 아닌 두 가지 의미를 내포하게 겹치는 상황을 많이 만든다. 그것이 이 소설이 빠른 전개 중에서도 다양한 층위로 소설을 읽을 수 있게 만드는 힘이다. 작가의 구성이 여러 겹으로 소설을 구성했음을 알 수 있게 만들고, 독자는 여러 사실을 유추해냄으로써 이 소설에 흥미를 느낀다. 은경이라는 캐릭터는 이 소설에서 많이 등장하지 않으면서도 주인공의 동기이자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이다. 모든 사건의 시발점이자 인물들을 움직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작가는 많이 등장시키지 않음으로써 신비를 덧씌우고 캐릭터성을 드러낸다. 여기에 물론 독자로써 인물에 감정이입이나 해석을 하기 힘들다는 점 때문에 아쉬움이 들기도 한다. 한편으로는 계속 설명하는 방식의 문장으로도 이 소설의 독특한 반복하며 리듬감을 주는 문체의 힘으로 독자를 납득시키고 어느 정도 설득하면서 은경의 존재를 주입시킨다. 이 점이 개인적으로는 꽤 놀라운 점이었다.
 죽음을 배달하는 휴가를 맞은 주인공 킬러는 은경을 보는 순간, 이 지령이 역시 특별한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은경이 죽음의 위기에 놓여 있고, 자신의 판단이 그것을 결정할 것을 깨달은 것이다. 주인공은 은경을 살리기로 결심하고 거짓된 판단을 내놓으며 부지런히 움직인다. 그리고 연방에 의해 죽었다고 알려진 천재 정보분석가 조은수를 소환한다. 그것은 진짜 조은수일까 죽은 조은수일까. 천재는 죽고 그가 만든 인공 정보 분석 기계의 음성인 것일까. 아니면 악마의 속삭임일까. 소설은 여기서부터 끓기 시작한다. 이제 이야기는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흐름 속으로 빠져든다. 주인공의 휴가는 끝났다. 이제 다시 살인의 무대에 입장한다. 은경의 시체 연기는 현실로 이루어질 것인가. 주인공은 이제 어디로 갈 수 있는가. 조은수는 어떻게 주인공과 은경을 도울 것인가. 그의 목적은 무엇인가. 또, 그들을 둘러싼 조직들의 목적은 무엇인가. 진짜와 가짜가 섞인다. 이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다. 수많은 가짜 속에 은닉된 진짜를 찾는 것. 동시에 서로에게 감춘, 은닉한 마음이 드러난다. 현실의 사건과 내면의 마음은 모두 은닉되어 있고,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반전에 반전을 거듭하며 몇 겹의 거짓이 찢겨나간다.
 [은닉]은 결국 배명훈이 들여다본 마음의 공식, 감추려고 하나 영원히 감출 수 없으며 드러나는 진실들에 초점을 맞춘다. 이것을 단순히 첩보물이 아니라 여러 독특한 과학적인 장치와 정보전을 통해 내밀한 마음 속과 복잡한 현실을 드러내는 기이한 소설로 그려낸다. 읽고 나서 드는 생각은 도대체 누가 이런 스타일의 작품을 또 쓸 수 있겠는가. 이런 발상, 이런 문체, 이런 속도감, 이런 이야기, 이런 인물, 이런 대사, 이런 문장은 모조리 배명훈만의 독특한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기 때문에 이 참신한 감각, 처음 맞보는 발상과 스토리텔링에 감동하고 순수하게 즐거움을 느꼈다.

※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주의해 주세요.

 놀라운 흡인력의 비결, 빠른 속도감과 독특한 문체

 [은닉]이라는 작품을 읽으면 공통적으로 나오는 감상은 속도감이 빠르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물의 묘사에 집중해서 배경과 인물을 천천히 그려나가는 작품이 있고, 추리나 스릴러 같은 장르 소설에서는 주위 배경보다 사건 전개에 초점을 맞춰서 빠른 전개를 이어나가는 작품이 있다. [은닉]은 킬러나, 스파이, 전략 무기 등을 소재로한 작품으로 첩보나 스릴러 장르의 소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전개에 집중해서 속도감이 느껴지는 것은 당연할 것이나, 일반적인 스릴러 소설의 전개 속도를 생각해봐도 이 소설이 두 세배는 더 빠른 느낌이다. 이는 일부 독자에게는 내용 파악이 힘들어 단점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다른 독자들에게는 빠른 속도감에서 느껴지는 쾌감 때문에 이 작품을 더 좋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다른 소설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이 속도감이 즐거운 쪽이었다. 물론 빠른 전개가 연속이다보니 사건이 지나치게 가볍고, 전체적으로 붕뜬 느낌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작가는 담담하면서도 리듬감 있는 문체를 구현하여 소설 전체를 하나로 묶는다. 읊조리는 듯한 소설 전체가 하나의 독백인 듯한 느낌인데, 그 느낌이 소설 한 권을 지배하고 있다. 독특한 문체의 힘으로 소설을 긴밀하게 묶어놨고 독자가 혼란을 느끼거나, 지루함을 느끼거나, 너무 가볍게 느낄 여지를 없앴다. 빠른 속도감과 리듬감 있는 문체로 소설 한 권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힘이 좋았고, 그 힘에 이끌려서 정신없이 소설을 읽을 수 있었다. 마치 멈출 수 없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기분이었다. 롤러코스터를 타면 신나면서도 한편으로는 지나치게 빨리 끝난다는 느낌을 받기 쉬운 것처럼, 이 소설 역시 마구 페이지를 넘기다보면 어느새 끝나 있다.
 이 소설의 방식은 일단 정보를 먼저 주지 않는다. 주인공은 이미 알고 있는 사실들을 중간중간 툭툭 던져서 독자를 안내한다. 따라서 독자는 대사에서 정보를 조합해 사건을 그려야 한다. 연방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은경은 어떤 여자인지, 조은수는 어떤 인물인지 상황과 대사로 유추해내야 한다. 이것이 또다른 재미를 주면서 또한 설명 없이 빠르게 전개해나가기 때문에 이 소설의 그 독특한 속도감을 형성한다. 너무 간결하게 생략하고 넘어가는 부분들, 지나치게 묘사와 설명 없이 오직 전개만으로 밀어붙이기 때문에 숨쉬기 힘든 부분도 분명 있고, 아쉬운 부분도 있다. 인물들에게 깊이 몰입할 여지도 공감할 구석도 적은 편이다. 이는 개인적으로 [은닉]에서 아쉬운 부분이기는 하나, 그 대신 이 소설만의 호흡, 리듬, 속도감을 즐길 수 있었다. 계속 주인공은 고뇌하고 질문을 던진다. 자기 자신에게, 남들에게 묻고 또 묻는다. 그렇게 끊임없이 질문과 답변이 반복된다. 이런 빠른 전개와 계속 의문을 제시하고 해결하는 식으로 이야기를 끌고 가기 때문에 이전에 못 보았던 독특한 형태의 소설이 완성되었다. 이 독특성을 즐기는 것도 이 소설의 재미이다. 오로지 진실만을, 사건의 모든 진상을 파악하려고 삶과 죽음 사이에서 끝없이 달려 나가는 이 소설의 속도는 흥미롭다. 그것이 어쩌면 우리 내면의 속도일 것이다.

 
 또다른 배명훈 월드

 바로 전에 발표한 장편 [신의 궤도]는 기존에 배명훈이 발표한 여러 단편들의 집합처럼 느껴진 면이 있었다. 즉, 여러 단편들을 포함한 배명훈 세계가 존재한다는 느낌이 있고, [신의 궤도]라는 장편은 그 세계를 가장 큰 스케일로 보여준 작품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신의 궤도]를 읽고 약간 우려를 한 것도 사실이다. 이 작품에서 그 동안 조금씩 단편으로 보여주었던 배명훈 세계의 모든 모습이 한 번에 드러난 것은 아닐까. 배명훈 작가의 궤도가 [신의 궤도]로 정점을 찍었다면, 그 위로 올라가거나 다른 방향으로 궤도를 트는 일은 없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은닉]은 이러한 우려를 단번에 씻기는 작품이다. 작가는 얼마든지 더 높이 상승하거나, 혹은 다른 궤도로 비행할 수 있다는 것을 이 작품으로 증명하고 있다. [신의 궤도]는 배명훈 세계의 모든 모습을 보여준 것이 아니었다. [은닉]을 읽고 나서야 그 동안 배명훈이 발표한 몇 십편의 단편을 [신의 궤도]가 다 포함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배명훈 세계는 아직도 넓고 미개척지도 얼마든지 더 있으리라. 그 때문에 그 다양한 가능성의 실체를 읽는 듯해서 즐거웠다.
 [은닉]에서 느껴지는 배명훈의 단편들은 다음과 같다. {마탄강 유역}, {인섹트 플라이트}, {초록연필}, {얼굴이 커졌어요}, {스마트D} 등등. [은닉]에서 '악마'의 존재가 언급될 때는 자연스레 {마탄강 유역}이 떠올랐다. 판타지 단편인 {마탄강 유역}에서는 '악마'의 존재는 물론 창병이 '창'으로 직선을 그리는 것에 대한 묘사가 나오는데 이점 역시 [은닉]에서도 보다 자세하고 중요한 상징으로 사용된다. 초소형 비행물체가 등장하는 부분에서는 역시 같은 소재를 다룬 단편 {인섹트 플라이트}가 떠오른다. 주인공이 킬러라는 설정은 단편 {얼굴이 커졌어요}를 떠올리게 하고, 모든 전자 정보를 감시하고 영향을 끼치는 설정 등에서 {스마트D}의 향기를 느낀다. {스마트D}나 {변신합체 리바이어던} 등에서 보이는 배명훈의 문법, 무한대로 펼쳐지는 것들과 한 점으로 수렴되는 것. 아직 펼쳐지지 않은 배명훈 세계는 이토록 넓었고 편린처럼 흩어져 있던 단편들이 합쳐져 장편을 이루는 순간, 광활하고도 복잡한 새로운 서사가 구축되는 모습은 근사했다. 배명훈의 단편들을 따라 읽었던 독자라면 [신의 궤도]나 [은닉]을 읽는 순간, 그 단편들이 합쳐지면서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하는 과정에서 감탄하고 매료될 것이다.

 매력적인 설정, 디코이, 정보전

 전작 [신의 궤도]에서 '냉동', '복제인간', '세대우주선', '인공지능' 등 SF 클리셰가 다양하게 사용되었다면, 이번 [은닉]에서는 '정보전', 초소형 비행물체, 디코이, 시신경과 무의식이 대화하는 장치2) 등 전작과 궤를 달리하는 소재들이 사용되었다. 킬러와 조직과의 대결이라는 점에서 기존 첩보물을 중심으로 하여, 현대적인 장치들을 변주하여 사용하여 참신함을 얹은 작품이다. 이런 장치들은 신선하고 재미있는 요소이다. 조은수로 대변되는 천재의 몇 수를 먼저 읽는 능력, 수많은 정보를 동시에 처리하는 능력 등은 마치 인간을 뛰어넘은 존재로 보이게 하고, 소설의 신비감을 주면서 한편으로는 최근에 출간된 다카노 가즈아키의 [제노사이드](다카노 가즈아키, 황금가지, 2012년 6월)를 연상시키는 면이 있다. [제노사이드]에서 초월종이 벌이는 정보전이 [은닉]에서는 조은수나 악마를 통해 이루어지는 느낌이다. 일본 소설에서 [제노사이드]에 정보전이 묘사되었다면, 한국 소설에서는 배명훈의 [은닉]에서 정보전이 묘사되었다고 할까. 일본 소설에 나온 정보전의 한국의 대답인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 재미있었다.

 “너는 네 취향이 네 것 같지? 세상이 네 머릿속에 그런 착각을 집어넣은 줄도 모르고. 아무튼 말이야, 투입되는 데이터만 충분하면, 음악 취향이나 옷 고르는 패턴 같은 건 물론이고, 어떤 현장요원이 누구를 죽일 때 어떤 칼을 어느 각도로 집어넣는 걸 선호하는지까지 알아낼 수 있어. 너도 예외는 아니야. 무슨 말인지 알겠냐? 행동만 예측하는 게 아니라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고. 네 내면에 대한 심오한 분석 따위는 아예 시도해볼 필요조차 없이 말이야.”(61쪽)


 또한, 이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소재는 정보전을 이루는 주축인 '디코이'(Decoy)다. 디코이란 "사냥에서 들새나 들짐승을 사정거리 안으로 유인하기 위하여 만든 모형새"를 말한다. 한마디로 미끼새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체스의 전술 중 하나이기도 하며, 적 어뢰 요격 및 적 교란용 무기의 명칭으로 쓰이기도 하는 단어다. 이 작품에서는 '디코이'란 현대 사회에서 한 인간의 모든 것을 추적하고 파악할 수 있는 상황에서 추적에 혼란을 주기 위한 미끼 정보를 말한다. 지금도 우리는 신용카드를 사용하면, 자신의 아이디로 접속해 모든 사용 내역을 일일이 확인할 수 있다. 그걸 통해서 무엇을 알아낼 수 있을까. 이 소설에서는 "문제는 취향이야. 그건 절대 숨길 수 없거든."이라는 말을 통해 수많은 취향을 통해 그 사람을 규정하고 파악할 수 있다고 말한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사고, 무엇을 먹는지, 누구를 만나는지, 무슨 책을 읽는지, 어떤 사이트에 접속하는지, 어떤 사진을 보는지, 어떤 영상을 보는지 파악된다면 그 사람이 무슨 행동을 하고 어떤 사고를 하는지까지 취향을 통해 그 사람을 다시 재구성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이것을 피하기 위해 정보를 완전히 숨기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수많은 가짜 미끼를 정보망에 뿌려서 거짓된 구성을 만들도록 하는 것을 '디코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숨길 수 없다면 역으로 수많은 디코이를 뿌려서 자신을 숨긴다. 이 디코이란 설정이 소설의 매력을 부여한다. 눈에 보이지 않은 정보망 속에서 자신의 분신이 돌아다니는 광경은 환상적이기까지 하다.

 그리고 악마

 단편 {마탄강 유역}이나 {초록 연필}을 보듯이 배명훈 작가의 작품에서는 '악마'라는 키워드가 중요하게 작용한다. 이 소설에서 '악마'라는 단어를 본 순간, 역시 배명훈 세계의 작품이라는 느낌과 앞에서도 말했듯 [신의 궤도]에서 나오지 않은 키워드가 많았구나, 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여기서 나오는 악마는 초자연적인 악마 그 본연의 모습은 아니다. 그렇다고 해서 단순히 기계적인 정체성을 가진 인공지능을 가리키는 말도 아니다. 인간 유전자 근원에 각인된 악마를 현대 신경망 기술로 소환하여 막강한 정보전의 전략 무기로 화한 것을 말한다. 이는 배명훈 작품의 특징이기도 하다. 작품의 주요 소재를 환상이나 신비로만 남기는 게 아니라 과학이 뒷받침된 환영으로 만든다. 이는 다시 앞서 말한 줄타기를 떠올리게 한다. 소설은 인간 내면의 악마를 형상화한 상징이나 은유를 그리는 한편, 과학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물리적인 실체를 지니고 있다. 경계에 서서 양쪽의 해석이 모두 가능한 것이다. 이는 이미 이전의 단편인 {안녕, 인공존재!}에서 '인공존재'의 폭발이 주류소설과 SF의 독서 프로토콜 간의 차이가 있는 것처럼,1) '악마' 역시 독서 프로토콜에 따라, 다양한 해석을 만들어내는 것이 이 소설의 매력이라고 할 수 있다. 사람 사이의 마음 그 속에 자리잡은 악마. 또 다른 인격이라는 주제는 오래되었으나, 유전자 속에 내재된 악마를 소환해내는 방식이 흥미롭다. 시신경에 장착한 물건이 인간의 무의식과 소통을 한다는 것. 그 인간이 인지하지 못하는 대화 속에서 창출되는 정보집합체의 존재. 이런 발상을 떠올리고 그 내면을 파고드는 작가의 시선을 통해 은유이자 실체인 [은닉]이 탄생한 것이다. 물리적인 실체를 가지면서도 은유로써 작용하는 악마는 이 소설의 가장 결정적일 때 등장하여 등장인물을 혼란으로 빠트린다. 그러면서 등장인물의 내적 갈등은 곧 세계의 갈등으로 발전한다. 내면의 세계가 곧 현실 세계와 겹치는데, 이런 점 역시 이 소설의 매력으로 꼽을 수 있다.
 이 소설은 전체가 디코이로 이루어진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수많은 디코이들이 난무하고, 반전에 반전을 거듭한다. 그러면서 각종 장치들이나 상황들이 별다른 설명없이 제시되는데 이점 역시 배명훈 작가의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조직들의 상황이나 여러 과학적인 장치들을 제대로 설명하려면 몇 권에 달하는 지루한 내용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수많은 논문들을 바탕으로 한 장치라고 할지라도 [타워]처럼 과학적 설명을 늘어놓는 대신 능청스럽게 상황과 배경만을 제시한다. 많은 독자들이 이야기에 집중하고 인물들의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는 장치인 것이다.
 은닉은 마음에 관한 소설이다. 광활한 우주나 몇 백 만년의 세월을 관통하는 작품은 아니다. 그런데 마음에 관한 소설이라고 반드시 스케일이 작을까. 지구를 배경으로 한다고 해서 그 작품의 스케일이 정해지는 것일까. [은닉]은 그렇지 않다고 증명한다. 추상적이고 모호한 사람의 내면은 어찌보면 우주와 동일한 크기를 지녔다. 그 내면의 소우주와 현실의 우주를 겹치는데 성공한 소설이 바로 [은닉]이다. 내면의 우주가 기울여지자, 세상이 기울여지는 소설이다. 내면이 검은색으로 물들면 바로 세상이 검은색으로 물든다. 이 내면과 세상을 일치시키는 방식이 이 소설의 뼈대를 이루고 있다.
 [신의 궤도]는 독자가 감당하기 힘들 정도로 오랜 시간이 지나, 지구가 아닌 다른 휴양 행성을 배경으로 한 소설이다. 수많은 인류는 소멸하거나 진화하여 존재들은 유기체에 머물지 않고 행성 그 자체가 된 세상이다. 그 세상의 스케일과 지성을 머리로 가볍게 파악하는 것과 실체를 느끼는 것은 차이가 있다. [신의 궤도]는 면밀히 따져보면 그 복잡하고 다층적인 세계관을 단번에 받아들이기에는 버거운 작품이다. 반대로 [은닉]은 지구에서 먼 미래가 아닌 근미래에 벌어지는 작품이기 때문에 소화가 어렵지 않다.(그러나 물론 [은닉] 역시 내면을 깊이 파고들어가면 무의식과 내면의 소우주가 더 넓고 받아들이기 벅찰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 [인셉션](Inception, 2010), 애니메이션 [파프리카](Paprika, 2006)나 로저 젤라즈니의 {형성하는 자}([드림 마스터], 행복한책읽기, 2010년 1월)에서 기계를 매개체로 하여 꿈과 무의식의 세계로 침전한다면, 이 소설에서는 무의식과 그 속의 악마를 이 현실 세계에 덧씌운다. 무의식의 차원을 현실의 차원으로 투영하면서 더욱 많은 것을 드러낸다. 빙산 속을 파고드는 게 아니라 빙산의 조각과 배를 부딪쳐 배를 산산조각 내는 것이다. 이렇게 어떤 지역을 보여주는 게 아니라 현상을 통해서 그것을 형상화하는 과정이 탁월한 소설이었다. 그로 인해 우리는 이 소설이 끊임없이 마음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한 사람의 마음의 파장이 세계의 파장으로 겹쳐지는 것을 보면서, 그 충격을 함께 겪는 것이다. 이 소설이 끝까지 독백 형식으로 목숨이 위태로운 사건들을 보여주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이다. 주인공의 개성을 획득하면서 구성과 문체의 힘으로 인물 간의 관계와 의식의 이끌림을 보여준다.
 소설을 다 읽고 나서 한 동안 여운에 정신이 혼미한 소설이었다. 그것이 결코 빠른 속도감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소설을 읽으면서 차츰 모습을 드러낸 그 악마가 마침내 내게 말을 걸어오기 때문이다. 우리는 다섯 개의 이름을 가진 악마를 만나기 위해 오늘도 소설을 읽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떤 악마는 스스로 악마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 채 평생을 살아간다. 그래서 어떤 천사는 혹시 자신이 바로 그 악마가 아닐까 평생을 고뇌한다.”




1) 자, 그러면 이런 질문은 어떨까? 주류소설(Mainstream Fiction: MF)과 SF(Science Fiction)는 과연 무엇이 다른가? 다름 아닌 ‘독서 프로토콜(protocol)’의 차이다. 작품의 내용이 아니라 작품을 읽고 쓰는 방식이 다르다는 말이다. 어떤 소설가가 “그녀의 세계가 폭발했다”는 문장을 썼다고 치자. 주류소설의 독자들은 ‘그녀는 격렬한 감정의 폭발을 경험했다’고 읽을 것이다. 그러나 SF 독자들은 ‘그녀가 살고 있는 행성이나 거주지(우주선 등)가 폭발했다’고 읽을 것이다(SF 평론가 김상훈이, 작가이자 평론가인 새뮤얼 R. 딜레이니가 제시한 예를 들어 설명한 것이다). 그러니까 배명훈의 소설은 SF와 주류소설이 거느린, 아니 그것들을 이루게 하는 독서 프로토콜이 합류하는 지점에 놓인다고 할 수 있다. 예컨대, 그의 소설이 ‘그녀의 세계가 폭발했다.’고 이야기할 때, 우리는 주인공이 겪는 사랑의 심리적 내면 폭발과 더불어 우주선이나 행성의 물리적 외적 폭발을 함께 상상해 볼 수 있다. 주류소설에 익숙해진 독자라면 이 점을 염두에 두도록 하자. 배명훈 소설을 더 즐겁게 읽을 수 있을 것이다. ――― 노대원, “배명훈 소설집, 『안녕, 인공존재!』”, 2010년 8월 16일, 창비문학블로그, http://blog.changbi.com/lit/?p=1226
2) 시신경에 관한 부분에서 피터 와츠의 [블라인드 사이트]의 대사가 떠오르기도 했다. 큰 연관은 없지만.
 "시각이란 건 거의 대부분 거짓이야." 커닝햄이 말을 이었다. "실제로 볼 수 있는 건 눈이 초점을 맞춘 부분의 고해상도 영상 몇 조각이지. 그걸 뺀 나머지는 그냥 뿌연 배경일 뿐이야. 빛과 움직임 정도지. 움직임이 생기면 초점이 옮겨 가. 그리고…… 눈이 항상 가늘게 떨린다는 거 알아? 그걸 단속운동이라고 불러. 대상의 움직임이 너무 빠르면 뇌가 그걸 하나로 통합하지 못하고 그 결과 눈이 잠깐씩 작동을 멈추는 거야. 그럼 영상이 흐려지지. 그럴 경우 눈은 별개로 나뉜 정지 영상만을 보내는 거야. 뇌가 공백을 메우고 이어 붙여서…… 머릿속에다가 연속된 환각을 만들지."
 커닝햄이 몸을 돌려서 나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정말로 놀라운 건 뭔지 알아? 그 틈새를 타서 뭔가가 움직인다면 뇌가 그걸…… 무시한다는 사실이야. 못 보는 거지." (피터 와츠, [블라인드 사이트],  이지북, 384~3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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